소설리스트

3부-11장 (10/19)

11장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방에선 습기 찬 먼지 냄새가 났다. 네모반듯한 작은 창으로 햇빛이 들어왔지만, 토막 난 햇빛은 방의 일부도 밝히지 못했다.

모서리마다 거무스름한 자국이 남은 방 안은 누추했다. 이곳에 놓인 가구라고는 연식이 느껴지는 서랍장과 검은 물때가 남은 가습기, 그리고 낡은 철제 침대뿐이었다. 그나마 깨끗한 것은 개가 깔고 누운 시트와 이불밖에 없었다.

흰 시트에 파묻힌 개는 일견 시체처럼 보였다. 굳게 닫힌 눈꺼풀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천장을 향해 곧게 누운 몸은 미동이 없었다. 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가슴팍이 아니라면 돌팔이는 개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을 것이다.

“…….”

검은 와이셔츠 위에 긴 코트를 걸친 남자, 차현은 다리를 꼰 채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삐걱거리는 간이 의자에 앉은 차현은 병실과 유리되어 보였다. 고급스러운 파티장에 앉아 있어도 모자람이 없을 아름다운 남자가 너저분한 방 안에 있는 장면은 가히 비현실적이었다.

끼익, 끽.

검은 구두를 신은 발끝이 흔들릴 때마다 낡은 의자에서 쇳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로 잠든 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요란한 소리에도 개는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취제에 취한 것을 감안해도 너무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차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곳곳이 녹슬어 있는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잠든 개를 돌아보고는 병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개만 홀로 남은 방은 완전한 침묵에 매몰되었다.

“…….”

매몰될 줄 알았다. 파르르 떨리던 개의 눈꺼풀이 마침내 떠지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새까만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개는 누렇게 변색된 천장을 보며,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끝을 움찔 움직였다. 약을 맞은 건지 머리가 몽롱했다.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여긴 어디지. 개는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들어 올리는 순간, 어깨에 강렬한 통증이 쑤셔 박혔다.

“흣……!”

눈앞이 핑 돌 만큼의 통증이었다.

끼익. 철제 침대가 소리를 내질렀다. 숨이 순간 멎었다가 급하게 토해졌다.

개는 어깨를 움켜쥐었다. 딱딱한 천의 느낌이 손안에 가득 감겼다. 어깨에 감긴 것은 붕대였다.

‘형이, 형이 피가…… 흑, 너무 많이 나요.’

‘빨리 옮겨야 하네. 더 늦으면 이 애는 죽을 거야.’

그 순간 머릿속을 가리던 안개가 빠르게 걷혔다.

“주태성.”

개는 신음처럼 한 구절의 이름을 뱉어 냈다. 개는 까만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태성은 어떻게 된 거지? 혁명단의 인간들이 그 애를 살렸을까? 살렸다면 어디에 있는 거지?

본거지를 아직 옮기지 않았다면 그 애가 살아 있는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본 태성의 얼굴이 너무 창백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던 때, 태성이 너무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애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개는 망설임 없이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다급히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어깨에 난 상처가 욱신거리며 조여들었다.

개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고통에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져 뜀박질로 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총을 다리에 맞은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전처럼 발목이 꿰뚫렸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장소를 탈출하는 일에 장애가 생겼을 것이다. 개는 기척이 들려오는 곳을 피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계단을 두어 개쯤 내려왔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운 곳에 출구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개는 망설임 없이 몸을 틀었다. 문까지는 고작 서른 발자국 정도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던 그 순간, 누군가 개의 어깨를 붙잡았다.

강한 악력에 붕대 아래 있는 상처가 짓눌렸다. 통증에 순간 숨이 멈췄다.

쾅!

개는 순식간에 벽에 밀쳐졌다. 강한 충돌에 내장이 뒤흔들리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개는 눈살을 일그러트린 채 머리 위로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

“……!”

곰팡이 냄새가 곳곳에 슬어 있는 이 건물은 대체로 어두웠다. 창문은 작았고 조명은 흐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

눈앞에 선 공작은 무감정한 눈으로 개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 남자의 얼굴 위로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개의 멍한 눈동자가 남자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불현듯, 개의 어깨 위를 움켜쥔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처 위를 후비듯 짓누르는 손길이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격통이 전신을 내달렸다. 멍한 기색을 띠던 개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흐읏…….”

“벌써부터 뛰어다닐 힘이 있나 보군.”

공작은 벌벌 떨리기 시작한 개의 어깨를 무자비하게 후벼 팠다.

“하, 으.”

“그렇게 겪고도 배운 게 없나?”

개는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벽에 닿은 몸을 비트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짓눌리자 시야가 뒤틀렸다.

일그러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곧 정신을 잃을 것처럼 흐려졌다.

“흣…….”

“분명 얌전히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상처를 짓누르던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은 그때였다. 개는 고통에 멈췄던 숨을 헐떡거렸다. 개의 입에서 흘러나온 숨소리가 텅 빈 복도 안을 웅웅 울렸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태성이…….”

개는 억눌렸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말을 웅얼댔다. 그러나 채 말을 다 잇기도 전, 개의 머리 위로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총 거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목소리는 분명 공작의 것이었다.

공작은 태성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

“태성이는 혁명단에 있는 겁니까?”

언제 고통에 헐떡였냐는 듯, 개는 공작의 코트 자락을 움켜쥐고 물었다. 강한 악력에 코트 위로 구깃구깃한 주름이 새겨졌다.

“……일어나자마자 뛰어나온 게 그 시종 때문이란 말이지.”

공작은 코트 자락을 쥔 개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곧 절박한 빛을 띤 개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공작의 눈동자 위로 불똥이 튀듯 격렬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공작에게서 냉기가 느껴졌다. 그건 분노의 온도였다.

“다시 쏴서 눕혀 놓기 전에 얌전히 누워 있어.”

“……안 됩니다.”

이 대답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는 물러설 수 없었다.

“안 돼?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서 말하는 건가?”

“……화나신 겁니까?”

“진짜 쏴 버리기 전에 따라와.”

공작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위협적인 울림에 본능적으로 목덜미가 섬짓했다. 마른침이 목 아래로 넘어갔다.

공작은 더 이상 개의 변론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멱살을 움켜쥔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개는 강한 힘에 이끌려 두어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직 돌아갈 수 없었다. 개는 다급히 남자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화를 풀어 드리려면 뭘 해야 합니까.”

공작의 눈은 싸늘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제 손을 쥔 개의 흉측한 손을 보더니 비식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예쁘게 굴기를 해, 말을 잘 듣기를 해. 내가 그러라면 네 몸이라도 쓸 건가?”

“쓰겠습니다.”

개의 무덤덤한 대답에 공작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시체를 모으는 취미는 없어.”

공작은 개가 사람의 목을 따 올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건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과거였다면 개부터 ‘몸을 쓴다’는 말에 암살을 먼저 떠올렸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성기를 빨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너…….”

공작의 눈매가 조금 일그러졌다. 분노가 일렁이는 눈동자에 묘한 당황이 서렸다.

멱살을 쥔 공작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 순간, 개는 공작의 손을 떼어 냈다. 무릎을 꿇는 개의 머리 위로 공작의 시선이 닿았다.

달칵.

흉터가 가득한 손이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지퍼를 풀 때쯤이 되자 바지 안에 눌린 살덩이가 손끝에 닿았다.

개는 잠시 손을 멈칫했다.

핏줄이 흉흉하게 돋아난 공작의 성기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황제의 것보다 컸으니, 물면 입술이 찢어질지도 몰랐다.

“하…….”

“……?”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공작의 커다란 손이 개의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손은 곧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개는 순순히 시선을 올려 공작을 보았다. 사타구니 가까이에 얼굴을 둔 개가 그에게 말간 시선을 보냈다.

공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고 일어서.”

공작은 머리를 짚고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깟 시종이 뭐라고 지극정성이 따로 없군.”

개는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공작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개를 보더니 이내 손을 뻗었다. 개의 흰 뺨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이리 와.”

공작은 ‘이리 와’라고 이야기해 놓고 그 자신이 개에게 다가갔다. 개는 다가오는 공작에게 밀려 벽에 몸을 기댔다.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진 순간 입술이 닿았다.

“흣.”

공작은 개의 아랫입술을 씹었다. 날카로운 치아의 단면이 얇은 표피에 잇자국을 남기고 떠나갔다. 굳게 다물렸던 개의 입술이 그 순간 벌어졌다.

작게 벌어진 입술 새로 공작의 혀가 침범했다. 개는 순간 도망치려 했지만 공작은 물러서는 혀를 잡아 문질렀다. 신음이 샜다.

혀를 비비는 행위는 오래 지속되었다. 입 안이 질척하게 젖어 뭉그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장이 문질러질 때마다 간지러운 기분에 등골이 오싹했다. 개는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모자란 숨을 그러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우, 읏.”

그리고 그러모았던 숨마저 모두 떨어졌을 때, 공작은 입술을 뗐다. 개는 색색거리며 멍하니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네 시종이 혁명단에 있냐고 물어봤지.”

공작의 눈동자에 일렁이던 분노가 한풀 꺾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곧은 손가락으로 개의 입술을 따라 훑었다. 부드럽게 젖은 입술이 공작의 손끝에서 뭉개졌다.

“따라와.”

공작은 검푸른 눈동자로 개를 보았다.

“보여 줄 테니까.”

삐, 삐.

심장 박동을 알리는 기계 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햇빛이 가늘게 들어오는 병실은 어두웠다. 호흡기를 입에 붙인 말간 얼굴이 수면에 잠긴 듯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느리게 숨을 몰아쉬는 태성의 가슴팍이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

눈이 퉁퉁 부어오른 예성은 선잠에 빠져 있었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제 형의 손을 꽉 잡은 작은 손에서는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병실 안을 감도는 공기가 차가웠다. 개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개는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아니.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개의 인생은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인생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소생에는 관심이 없었고, 타인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살아 있는 겁니까?”

침대 위에 고요한 얼굴로 누워 있는 태성은 죽은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일정한 속도로 그래프를 그리는 기계는 태성이 살아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개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태성이 죽음 가까이에 있는지, 삶 가까이에 있는지 판단 내리기 힘들었다.

개는 시선을 올려 공작을 보았다. 공작은 죽은 듯 누워 있는 태성이 아닌, 울렁이는 개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편적인 감정만을 내비칠 줄 알던 개의 새까만 눈동자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표류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고 숨을 쉬고 있으니,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거겠지.”

태성의 상태를 읊는 공작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울렸다.

개는 시선을 돌려 침대 위를 보았다. 태성은 여전히 고요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뜰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깊게 내리감고 있었다.

개는 순간 태성의 얼굴을 만져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코 아래에 손을 대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눈꺼풀을 더듬어 그 아래 있을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눈을 뜬 태성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위협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살아 있다면.”

그러나 혀가 입 천장에 말라붙은 것처럼, 제대로 된 언어를 내뱉기 힘들었다.

개는 허벅지 옆에 늘어져 있던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짧게 깎인 손톱이 손바닥 안쪽을 파고들며 상처를 냈다.

“왜 눈을 뜨지 않습니까.”

“머리를 맞은 데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언제 눈을 뜰 수 있는 겁니까?”

“글쎄.”

명확하지 않은 답변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개는 고개를 들어 올려 공작을 보았다. 공작의 검푸른 눈동자가 태성에게로 옮겨 갔다.

“내일 당장 눈뜰 수도 있고, 일주일 뒤에 뜰 수도 있지. 어쩌면 영영 눈뜨지 못할 수도 있어. 말 한 번, 눈짓 한 번 못 한 채로 숨만 이어 갈 수도 있다는 말이야. 생체 활동이 멈출 때까지.”

무감정한 눈동자가 개를 향해 돌아섰다.

“무슨 대답을 바라지?”

개는 잠시 숨을 멈췄다.

남자의 물음을 듣는 순간, 강렬한 바람이 되어 치밀어 오르는 말이 있었다. 울컥 솟은 그 말이 개의 눈자위를 어지럽혔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눈을 떴으면 좋겠습니다. 숨만 쉬고 있는 건……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개는 ‘진짜’ 살아 있는 태성을 알았다.

그 애는 강함을 동경해 개의 시종이 될 것을 자진했고, 차갑게 내치는 말에도 넉살 좋게 대화를 걸었다. 또한 누구도 걱정하지 않은 개의 안위를 걱정했고, 겨울이 다가왔을 때는 겉옷을 건넸다.

개는 태성이 멋쩍게 웃는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이라 부르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 애는 개를 유일하게 ‘개’가 아닌 ‘형’이라 부르는 이였다.

“살아 있는 건…….”

목구멍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 병실 안이 너무 건조하기 때문일까.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부드러운 무게를 가진 무언가가 머리에 닿았다.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공작은 개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얇은 가닥의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되겠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 위에서 손을 뗐다.

개는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지 못한 채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지는 무게가 아쉽게 느껴졌다.

“그러니…….”

공작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낯선 소음이 병실 안에 끼쳐 들어왔다.

공작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늦었군.”

쯧, 혀를 찬 남자가 개에게 시선을 주었다.

“쉬어. 총상이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까.”

남자는 별다른 설명 없이 병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개는 멀어지는 남자의 기척을 느끼며 입을 달싹였다. 잠시지만 공작이 어디로 향하는 건지 궁금했다.

결국 묻지 못했지만.

닫힌 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개는 가라앉은 시선을 침대 위로 돌렸다. 삐, 삐. 기계가 일정한 소음을 내뱉으며 태성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개는 예성이 붙잡은 태성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낫지 않은 상처가 보기 흉하게 남아 있었다. 개는 충동적으로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거친 피부 위로 체온이 느껴졌다.

개는 일순 놀라 태성의 얼굴을 보았다. 체온이 느껴진 순간, 어째서인지 태성이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러나 고요한 얼굴에는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태성은 아주 깊은 수면 속에 잠겨 있는 사람 같았다. 그 얼굴은 아주 평화롭고 조용했다. 고통도, 슬픔도, 기쁨도 없는 세계에 빠진 사람처럼.

개는 태성의 손 위에 올렸던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상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왜 하필 태성이었을까.

그날, 태성은 혁명단원으로서 무언가 행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 그 애는 어두운 밤거리를 나선 동생을 걱정한 형에 불과했다. 고작 그뿐이었는데.

무슨 이유로.

어째서.

대체 왜.

“형, 가지…….”

“……!”

개는 화들짝 놀라 예성을 내려다보았다. 예성의 감긴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새어 나오더니, 관자놀이 부근으로 흘러내렸다. 태성을 잡은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러나 태성은 자신을 간절히 붙잡는 손길에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개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잠꼬대를 웅얼거리기 시작한 예성을 마주칠 용기가 없었다.

아이가 깨어나 원망을 토해 내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개는 공작을 떠올렸다. 그라면 어떤 방법이든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텐데.

그러나 개는 공작이 아니었다. 개는 그저 사람을 죽일 줄 아는 짐승에 불과했다.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오자 멎었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

개는 선명한 색을 띠는 까만 눈으로 병실 문을 돌아보았다. 미련이 남은 눈동자가 그곳에 붙박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 체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개는 힘이 빠진 어깨를 늘어트린 채 자신이 깨어났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개의 병실에 입을 만한 옷가지가 들어온 것은 저녁놀이 질 즘이었다.

“총상을 입은 이상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셔야 합니다.”

공작의 수하들은 들고 온 옷가지를 늘어놓으며 당부의 말을 내뱉었다. 개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쫓는 눈길이, 어째 그들은 개가 또 사고를 칠까 두려운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개는 의욕을 상실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공작의 말대로 얌전히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만이 들 뿐이었다.

개는 병실 바깥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수하들의 기척을 느끼며, 그들이 놓고 간 옷가지를 힐끗 보았다. 얇은 옷이 대부분이라 짐은 단출했다. 개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리려 했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검은 코트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

개는 검은색 코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옷이 어째서 이곳에 흘러들어 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일한 겉옷이니 수하들이 챙긴 것일지도 모르고, 혹은 공작이 발견해 이곳으로 오게 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손을 뻗어 코트를 손에 쥐었다. 부드러운 섬유가 손끝에 걸렸다.

개는 단숨에 겉옷을 잡아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코트 위에 놓여 있던 몇몇 옷들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

개는 코트의 소맷자락을 만졌다. 고작 몇 번 입었을 뿐인데 끝이 조금 닳아 있었다. 언제 닳은 거지. 개는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소매를 더듬던 손으로 목깃을 만졌다.

두꺼운 코트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자신을 불러 세워 코트를 주던 태성의 모습이 어렴풋 떠올랐다.

개는 멍하니 코트를 만지작거렸다. 더듬었던 곳을 또 더듬고, 만졌던 곳을 또 만졌다. 코트를 천천히 매만지던 개의 손이 주머니 위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바스락.

주머니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낯선 소리에 조금 당황한 개가 눈을 깜빡였다.

잠시 주머니를 내려다보던 개는 황급히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울퉁불퉁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아.”

뜻밖에도 그건 사탕이었다. 머지않은 과거에 예성이 손에 쥐여 주었던 알록달록한 사탕.

구겨진 포장지에 싸인 사탕은 너무 오래 이 상태로 머물렀던 탓인지, 어느새 녹아 끈적해져 있었다.

개는 손에 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버리지 못한 채 잊어버린 것들이, 개의 앞에 조금씩 닳은 채로 놓여 있었다.

검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봉지를 뜯은 것은 충동이었다.

녹아 달라붙은 사탕을 떼어 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개는 포장지에 붙은 사탕을 떼어 내다가 몇 개를 실수로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제 개의 손에 남은 건 빨간색 사탕 하나뿐이었다.

가만히 사탕을 내려다보던 개는 입을 벌렸다. 둥그런 사탕이 개의 입 안에 들어가 혀 위를 뒹굴었다. 달콤한 맛이 가득 번졌다. 쓰게 느껴질 정도로 다디단 맛이었다.

“…….”

개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더니 눈가가 뜨거워졌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당황한 개는 자신의 눈을 더듬었다.

툭 굴러 떨어진 눈물이 옷을 적셨다. 개는 투명하게 젖은 자신의 손끝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눈자위를 물들이는 눈물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개는 양손을 허공에 든 채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턱 끝에 고인 눈물이 코트 위로 끊임없이 떨어졌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개는 코트 위를 문질렀다. 그러나 눈물을 아무리 닦아 내도 번지기만 할 뿐이었다.

창문의 모양을 따라 네모나게 조각난 노을이 병실의 문을 비췄다. 개는 눈물이 어룽거리는 눈을 돌려 문을 보았다. 익숙한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눈자위에 무겁게 고인 눈물이 뺨 위로 굴러 떨어졌다. 흰 뺨에 긴 궤적을 그리며 내려온 눈물이 마침내 손등 위를 적셨다. 초점을 흐리던 눈물이 사라지자 시야가 맑아졌다.

문 앞에 선 것은 공작이었다. 긴 그림자를 몰고 온 남자는 당황한 듯 보였다. 개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다시 차오른 눈물에 눈앞이 흐려졌다.

“너…….”

차현은 낯선 얼굴을 한 개를 보았다. 노을이 지는 창을 등진 개는 얼굴이 흠뻑 젖었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로, 그러나 아주 서럽게.

“당분간은 여기에 계속 있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말…….”

“그만.”

그는 횡설수설하는 개의 말을 끊어 냈다. 개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눈물에 흠뻑 젖은 까만 눈에서 서러움이 흘러내렸다. 공작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너 지금, 네가 무슨 상태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양쪽 어깨에 총상을 입어 당분간은 움직임을 조심해야겠지만 거동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개는 붕대가 감긴 어깨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감하게 깜빡인 두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져 내렸다.

공작의 미간이 확 일그러진 것은 그때였다.

성큼 뻗어진 긴 다리가 순식간에 개의 앞에 다다랐다.

“지금 그딴 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개는 급히 눈을 들어 올렸다.

공작은 한 손으로 개의 양 뺨을 꽉 눌러 쥐었다. 눈물로 흐려진 검은 눈이 공작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네가 왜 울어.”

공작은 전에 본 적 없는 사나운 얼굴로 물었다.

왜 울고 있느냐고?

개는 생각을 더듬었으나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뱉은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비집고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셨다. 짧은 속눈썹이 눈물로 흠뻑 젖어 투명해 보였다. 공작은 그런 개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맴돌았다.

겨울의 짧은 해 위로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노을이 지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개는 그림자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보며 입을 달싹였다.

“……독이 있었던 걸까요.”

멍청한 질문이란 건 알았다. 예성이 준 사탕에 독이 들어 있었다면 그 누구보다 개 자신이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독에 의한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 안에는 그저 다디단 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눈물은 왜 새어 나온 걸까.

“독이라고?”

양 뺨을 붙잡은 공작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은 그때였다.

공작의 반응은 생각보다 격렬했다. 그는 개의 얼굴을 좌우로 돌려 살펴보더니 이내 눈을 가깝게 붙였다. 사나운 기색을 띠는 공작의 얼굴이 코앞에 닿아 있었다.

“입 벌려.”

“……?”

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공작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마주 보고 있는 공작의 눈빛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개는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벌렸다. 사탕을 먹어 단내가 나는 혀가 빠끔 드러났다.

“웃.”

그 순간, 남자의 손가락이 개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남자는 개의 혀를 더듬어 올리고 혀뿌리 아래를 샅샅이 뒤졌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손가락은 무자비했다.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입 안을 거칠게 더듬는 손가락을 피하기 위해 혀를 움직였다.

“우, 흐으…….”

그러나 좁은 입 안에서 남자의 손가락을 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개는 붉어져 투명한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입 안을 모두 더듬은 남자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쯧, 혀를 찼다.

“웃!”

공작의 곧은 손가락이 목구멍을 찌를 듯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아니. 공작의 손가락은 분명 개의 목구멍을 찌를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단번에 목 안쪽을 파고든 손가락 탓에 구역질이 올라올 뻔했다.

개는 그제야 공작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는 개가 독을 일부나마 뱉어 낼 수 있게 하려는 거였다. 그저 ‘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뿐인데.

개는 변명하기 위해 혀를 움직였다. 그러나 공작의 손가락에 혀를 눌렸기에, 흘러나오는 건 어눌한 신음 소리뿐이었다. 작게 버둥거리기 시작한 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삭!

얇은 비닐 포장지가 개의 손아귀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개의 입 안을 더듬던 남자의 손끝이 움찔 굳었다.

그는 눈을 굴려 개의 손아귀에 시선을 두었다.

“사탕?”

개의 손 밖으로 튀어나온 포장지에 ‘사탕’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보였다. 개는 뒤늦게나마 그것을 등 뒤로 숨기려 했지만,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는 게 먼저였다.

개의 뺨을 쥐었던 남자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젖은 손으로 개의 손가락을 억지로 펼쳐 냈다. 부스럭거리는 사탕 포장지가 개의 손에서 툭 떨어져 내렸다.

“누가 준 거지?”

잔뜩 구겨진 포장지가 남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개는 그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혀 위를 짓누르던 남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예전에, 태성이의 동생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애한테 받았다는 말이군.”

공작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사실을 정리했다. 개는 눈물로 젖어 든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개의 작은 머리통을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이건 내가 버리지.”

“……!”

개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작이 버린다는 것의 정체는 명백했다. 개의 손에서 빼앗아 간 사탕 포장지.

“안 됩니다.”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난 개가 공작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총구멍이 났던 팔로는 공작을 힘주어 잡는 것도 버거웠다. 고작 옷자락을 움켜쥔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공작은 힘없이 떨리는 개의 손에서 시선을 뗐다.

“이깟 포장지를 애지중지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개의 눈과 시선을 마주한 검푸른 눈동자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봐. 이건 빈 껍질이야. 한번 쓰고 나면 길바닥에 버려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

개는 작게 헛숨을 내뱉었다. 그의 말이 가리키는 게 사탕 포장지가 아니라 개의 입장인 것만 같았다. 투명하게 고였던 눈물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입을 달싹이던 개는 한참 만에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버리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돌려주십시오.”

“그 울음부터 그치고 말해.”

공작은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개를 다그쳤다. 개는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을 멈춰 보려 했지만, 개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은 자꾸만 새어 나왔다.

“닦아.”

개가 눈물을 그치지 못하자 공작은 다른 것을 명령했다. 개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러자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범람해,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가득 적셨다.

개는 몇 번이나 눈을 문지르고 닦길 반복했다. 그러나 손등이 온통 축축해져 더 이상 닦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군.”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개는 귓가를 간질이는 낮은 목소리에 놀라 눈을 들어 올렸다.

“읏……?”

공작의 입술이 눈꺼풀 위에 닿은 것은 순간이었다. 거슬한 감촉의 혀가 눈자위에 닿았다. 따끔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눈동자를 핥아 눈물을 닦아 낸 혀가 통증을 남기고 떨어져 나갔다. 공작의 붉은 혀가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개는 울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짓을…….”

혀가 닿았던 개의 눈이 붉었다. 눈물로 젖은 것과는 다른 붉은색.

차현은 흰 눈 위에 첫발을 찍은 것 같은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혼란이 일렁이는 흰 얼굴을 손아귀 안에 쥐었다. 눈물에 젖은 피부는 뜨겁고 습했다.

그는 이 곱상한 얼굴을 볼 때면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분노였다.

그날, 개가 혁명단에 들어가 저지른 일은 엄청난 사고였다. 그는 돌발적인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하도록 최대한 유동적으로 계획을 세워 두었지만, 모든 계획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에는 지켜야만 하는 순서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개가 저지른 것은 순서를 어그러트리는 사고였다.

‘익명의 후원자’와 혁명단이 만나는 것은 지금 이 시기에 이뤄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나 버렸지.

차현은 사납게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더한 짓을 할 건데 벌써 ‘무슨 짓’이냐고 물어보면 안 되지.”

이 들끓는 분노를 덮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정욕이었다.

차현은 투명한 눈물에 빠진 말간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아주 밝았던 날. 혁명단 여자에게 제압당한 개는 체념한 얼굴이었다.

“입 벌려.”

개는 자신이 차현에게 무슨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을까. 안다면 이렇게 태연자약한 얼굴로 울고 있을 수 없을 텐데.

차현은 개가 스스로 입을 벌리기도 전에 그의 볼을 짓눌렀다. 부드러운 피부가 짓눌리며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울음에 달아오른 붉은 입술 새로 작은 혀가 보였다. 차현은 그 위로 입술을 겹쳤다.

“읍.”

개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작의 말캉한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개는 훈련되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공작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공작의 혀가 입 안을 파헤치면, 발끝에서부터 힘이 빠진다는 건 익히 겪어 아는 일이었다.

“흐으…….”

치켜든 개의 얼굴을 꽉 붙잡은 공작은 난폭했다. 뒤섞이는 혀의 뿌리가 아렸다. 목구멍을 파고들 것처럼 깊은 곳을 핥아 올리는 탓에, 혀끝에 닿지 못한 신음이 울대에 걸려 울렁거렸다. 남자의 옷자락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더한 짓’을 하겠다고 말했다. 개는 혼곤하게 흐려지는 머리를 간신히 굴렸다.

공작은 분명 자신에게 전기 고문 같은 짓을 할 것이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뜨거워지고, 배 속이 저릿하게 달아올라 무력해지고 말 것이다.

도망친다면 입술이 떨어진 순간을 노려야 할 것이다.

“흐, 읏…….”

그러나 막상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을 때, 개는 남자를 밀쳐 내지 못했다. 그저 저릿한 혀를 입 안으로 감추는 게 다였다. 무겁게 흘러내리던 눈물은 눈자위에 고여 그 흔적만을 내비쳤다.

공작은 비틀거리는 개를 침대에 밀쳐 앉혔다. 눈높이가 한순간 달라졌다. 검은 눈동자가 공작의 움직임을 따라 굴러갔다.

개의 양 어깨를 움켜쥔 공작은 허리를 숙여 개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읏!”

부드럽게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흰 목덜미에 이를 세운 공작은 피가 배어 나온 상처 위를 지근 씹었다. 개는 어렵지 않게 고통을 참아 냈다.

이미 상처가 난 곳을 또다시 짓이기는 것은, 영구적인 상처를 입히려는 목적이 분명한 행위였다. 또한 일견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듯한 행위.

그러나 그 누구도 행위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았다. 아니. 읽어 내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아, 흣…….”

공작의 손이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얇은 옷가지를 걷고 들어온 흰 손이 흉터로 엉망인 개의 등허리를 쓸어 올렸다.

마른 뼈대를 더듬는 손길에 개의 몸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입을 맞추며 목덜미를 타고 쇄골 위까지 내려오던 공작이 잠시 멈칫했다.

“몸 웅크리지 마.”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눈물에 젖은 검은 눈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귀에 개미 수백 마리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귀를 문대 닦고 싶었다. 그러나 귀를 만질 시간조차 개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읏.”

개는 침대 위에 밀쳐졌다. 끼익, 낡은 침대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소음을 내뱉었다. 상처가 눌리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리 벌려.”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끼익!

공작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침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 따윈 별것도 아니라는 듯, 공작은 무섭도록 집중한 얼굴로 개의 발목을 잡아 벌렸다. 개는 가늘게 일그러진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흐읏…….”

공작은 개의 다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걸쳐 놓은 뒤, 개의 쇄골 쪽을 질근 씹었다. 붉은 순흔이 남은 피부는 잇자국과 흉터가 뒤섞여 엉망이었다. 젖은 개의 눈동자가 흐리게 녹아들었다.

순간 단단한 손이 바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병실에서 쓰는 품이 넉넉한 바지는 남자의 손길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속옷도 입지 않았던 탓에 남자의 움직임엔 더더욱 거침이 없었다.

“아……!”

개의 말랑한 성기를 움켜쥔 남자는 뿌리 부근을 주물거리더니, 이내 열기를 얻기 시작한 기둥을 쓸어 올렸다. 개는 사타구니가 뜨거워지는 감각에 몸을 뒤틀었다.

끽, 끼익!

낡은 침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개의 감각을 예민하게 깨웠다.

“으읏, 아. 흐으……. 싫 으, 싫어.”

개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남자의 팔을 밀어 내려 했다. 그러나 어깨가 꿰뚫린 손으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남자는 마치 깃털에 밀린 것처럼 미동 없이 개의 귀두를 문질렀다.

요도구가 문대지자 날카로운 쾌감이 배 속을 쑤셨다. 개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남자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골반 아래까지 내려간 바지춤 사이로 꼿꼿이 선 성기가 드러났다. 붉게 달아오른 기둥을 문지르는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우으, 읏……!”

몸 안에 있던 수분이 눈으로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몸이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양쪽으로 활짝 벌어진 개의 다리가 허공에 버둥거렸다.

끼익, 끼익! 흔들리는 침대가 비명을 질렀다.

“싫어, 싫……! 아……!”

사정의 순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허공을 차던 다리가 빳빳이 굳더니 발끝이 둥글게 옹송그려졌다. 검은 머리칼이 베개에 엉망으로 문질러졌다. 남자는 개의 흰 목, 툭 불거져 나온 목울대에 이를 세웠다.

“흐, 으읏…….”

개는 밭은 숨을 내뱉었다. 겨우 울음을 그쳤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눈물에 젖은 검은 눈동자가 주인을 찾듯 허공을 굴렀다.

“읏……?”

그러나 검은 동공에 담긴 것은 공작의 모습이 아니었다. 크게 확장된 눈이 허공을 담았다.

“좁아.”

차현은 사납게 미간을 구겼다.

그는 희뿌연 정액을 묻힌 손으로 입구를 문지르며 몇 번이나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짙은 분홍빛에 가까운 입구는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던 것처럼 꽉 다물려 있었다.

혀를 찼다. 누가 개의 구멍 아니랄까 봐 제 주인과 똑 닮았다. 겉보기에는 순종적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매번 골머리를 썩이는 것이 그랬다.

그는 사정해 풀 죽은 개의 성기를 눈에 담았다. 늘어진 성기 위에 손이 닿은 것은 순간이었다.

“흐으, 무슨, 싫……!”

개의 몸이 경련이라도 인 것처럼 파득 떨렸다. 그는 숨을 멈춘 채 허리를 들썩이는 개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요도구를 손끝으로 둥글게 문지르자, 막 사정한 성기가 부들부들 떨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꽉 다물려 있던 구멍이 빠끔거리며 틈새를 만들었다.

그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입구를 파고들어 구불구불한 내벽을 벌렸다. 그러나 요도구를 문지르는 손 때문인지 꽉 조여든 내벽이 손가락의 진입을 막았다.

그는 자신의 한 손에 가득 차게 선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아, 으읏…….”

성기를 놓아 주자 개는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붉어진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처연함이 어룽거리는 검은 눈이 오로지 자신을 향했다. 어쩐지 갈증이 일었다.

그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개의 눈 위를 핥았다.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개는 재빨리 눈꺼풀을 닫았다. 아쉽지만 혀는 눈물에 젖어 든 속눈썹만 핥고 떨어졌다. 긴장으로 굳어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쯧, 혀를 차고는 내벽을 파고든 검지로 배 안쪽을 강하게 찔러 올렸다. 그 순간 개의 내벽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전립선을 찔린 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공작의 혀가 다시 눈알 위를 핥아 왔다. 지독한 이물감이 스치고 지나간 눈이 쓰라렸다. 그러나 그 행위를 지적할 여력이 없었다.

“싫 힛, 이상한…… 우읏. 흐……!”

“쉬, 얌전히 있어.”

끼익, 끽! 침대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개의 얇은 상의를 가슴 위까지 끌어 올린 남자가 개의 명치를 가볍게 내리눌렀다. 힘을 주어 누르면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 급소를 누르는 그의 손길에 몸이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구멍을 파고든 손가락이 집요하게 내벽을 찔러 올릴 때마다 신경이 녹아들었다. 이젠 긴장이 우위에 있는 건지 쾌감이 우위에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개는 발끝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발간 구멍이 움찔거리며 남자의 흰 손가락을 빨아들였다가 뱉어 내길 반복하고 있었다.

“우으, 싫…….”

두 번째 손가락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개의 눈에 그득 고였던 눈물이 눈가를 적시고 떨어졌다. 좁은 내벽을 벌리는 이물감에 숨이 막혔다.

“……아!”

그러나 공작은 자신의 속도를 버거워하는 개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세 번째 손가락이 꽉 다물린 입구를 벌리며 들어왔다.

개는 자신의 명치 위에 놓인 남자의 팔을 간절히 움켜쥐었다. 벌어져서는 안 될 입구가 잔뜩 벌어진 탓인지 어딘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몸이 망가져 버리면 어떡하지?

개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간신히 내뱉었다.

“손가락…… 싫……!”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붉은 내벽을 벌리던 손가락이 일순 추삽질 하듯 안쪽을 찔러 올렸기 때문이다.

쾅, 부딪치는 충격과 함께 개의 허리가 들썩였다. 꼿꼿하게 서 있던 성기 끝이 손도 대지 않았는데 젖어 들었다.

공작은 파르르 떨리는 개의 몸을 쓸어내렸다. 미처 살이 차오르지 못해 깊게 파인 흉터와,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채 차올라 울룩불룩하게 솟은 흉터들. 그 사이에 자리한 분홍빛의 유두는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험하게 다룬 몸에 약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우습다가도, 그 위를 핥아 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유두의 표피가 붉게 벗겨질 때까지 핥고 깨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통이니 무감한 얼굴로 견딜까, 아니면 지금처럼 눈물로 흐려진 얼굴로 애원할까.

“네 구멍이 너무 좁아서, 좀 넓히려는 것뿐이야.”

그러나 그는 유두를 핥지 않았다. 그저 새빨갛게 달아오른 개의 귀 끝을 물었다가 놓으며 낮은 목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우읏, 으…….”

귀가 예민한 개는 금세 반응했다. 파르르 떨리는 몸이 자극적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세 개를 가득 문 구멍 안을 천천히 벌렸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내벽 안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쑤셔 댄 덕에 구멍이 느슨하게 벌어졌지만, 아직 그의 성기를 넣기엔 좁았다. 미간이 선을 그렸다.

“벌리는, 거 이상…….”

그 순간 개가 숨소리에 가까운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 목소리는 조금씩 타들어 가던 성욕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개의 구멍에 쑤셔 박았던 손가락을 단번에 빼냈다.

“흐, 읏…….”

갑작스럽게 빠져나간 손가락의 감촉이 아쉬운 듯, 벌어진 개의 구멍이 꽈악 조여들었다.

지익. 그 순간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핏줄이 선 두꺼운 성기가 다리 사이에서 퉁 튕겨져 나왔다.

“아……?”

입구에 뭉뚝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에 허공에 들린 개의 다리가 뻣뻣이 굳었다. 단단한 성기가 빠끔 벌어진 구멍을 파고든 건 그때였다.

“……!”

날카로운 통증이 입구에 쑤셔 박혔다.

아니. 입구뿐만이 아니었다. 두꺼운 성기에 밀려 내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홉떠진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벌어진 입술이 소리가 되지 못한 헛숨을 덜컥 내뱉었다.

“크흣…….”

고통스럽긴 차현도 마찬가지였다. 주름 하나 없이 벌어진 구멍이 검붉은 성기를 끊어 낼 것처럼 조였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반쯤 내리감긴 눈꺼풀이 떨렸다.

긴장으로 빳빳이 굳은 개의 내벽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팔뚝을 파고든 개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사타구니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구멍에 박힌 성기는 아직 반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한 손에 들어오는 개의 붉은 성기를 쥐었다. 배 위에 늘어진 성기는 고통 때문인지 힘이 빠져 말랑했다.

젖은 귀두를 손끝으로 강하게 문질렀다. 요도구가 쑤셔지듯 문질러지자 개의 몸이 뒤틀렸다.

“흐으, 읏…….”

긴장으로 바짝 굳었던 개의 몸이 다른 의미로 꼿꼿해졌다. 내벽이 일순 확 조여들었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차현은 구멍이 풀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끼익! 낡은 철제 침대가 무너질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반도 들어가지 않았던 성기가 벌어진 구멍 사이로 단숨에 사라졌다. 개의 마른 뱃가죽이 일순 불룩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읏…….”

차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개를 내려다보았다. 개의 가슴 위가 가파르게 들썩였다. 벌어진 입술 새로 가느다란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크게 확장된 검은 눈이 갑작스러운 충격에 초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개가 초점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마른 골반을 잡은 남자가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아……!”

퍽, 퍽, 박히는 성기가 내장 안쪽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몸이 위아래로 들썩일 때마다 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 격통과 함께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이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시, 싫……. 이거 흣, 안…….”

고통만 있었더라면 버틸 만했을 텐데. 남자의 두꺼운 성기가 자꾸 어딘가를 찌르고 스칠 때마다 눈앞이 희게 튀었다. 개는 겨우 토막 난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베개를 적셨다.

개가 이겨 낼 수 있는 역치를 넘어선 쾌감이었다. 두꺼운 성기가 어디를 찌르든 몸이 뒤틀렸다.

희뿌연 시야에 담긴 공작은 설핏 일그러진 검푸른 눈동자로 개를 보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뱉는 그는 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개는 숨을 헐떡였다. 남자의 열기가 몸에 옮겨붙는 것 같았다.

끽, 끼익!

몸이 크게 흔들릴 때마다 침대가 무너질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선뜩한 긴장감도 금세 쾌감으로 산화했다. 내벽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남자의 성기를 우물우물 씹어 댔다.

자신이 공작과 이런 관계를 맺어도 되는 걸까. 개의 머릿속에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이상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러다간…… 무너지겠군.”

공작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건 그때였다.

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던 허리 짓이 잠시 멈췄다. 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구 찔러 올려진 내장이 저릿했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살갗 너머, 배꼽 언저리에 남자의 성기가 놓여 있었다.

“흐, 읏……?”

남자가 개의 몸 아래에 팔을 집어넣은 것은 그때였다. 몸이 한순간 공중에 떠올랐다. 흰 엉덩이에 박힌 검붉은 좆이 창문 넘어 들어온 달빛을 받았다.

공작은 삽입한 채로 침대 위에서 일어섰다. 중력에 당겨진 몸이 공작의 성기를 꽉 조여 물기 시작했다. 두꺼운 귀두가 벌어지지 않았던 곳까지 파고들었다. 온몸에 있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 아……!”

공작은 개를 벽에 밀쳤다. 그러고 곧장 개의 흰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벌어진 흰 엉덩이 사이로 흉흉하게 선 성기를 삼킨 붉은 구멍이 드러났다.

“하……. 좋아.”

그는 자신을 빨아들이듯 조이는 구멍에 성기를 더 깊이 쑤셔 넣었다. 마찰에 의해 뜨겁게 부풀어 오른 내벽이 힘겹게 성기를 짓씹었다.

개의 안은 그의 생각보다 더 좋은 감도를 가지고 있었다. 갈증이 더욱 심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이를 세워 개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서 달큼한 살내가 났다.

다시 허리를 쳐 올리기 시작하자 개의 신음이 높아졌다.

“흐으, 응! 아! 이거 싫……! 으, 읏……!”

개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허공에 버둥거렸다. 깊이 박혀 뱃가죽 위로 불룩한 남자의 성기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개는 허리를 높이 들어 올린 채 쥐어짜듯 구멍을 조였다.

“큿…….”

공작의 낮은 신음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개의 어깨를 움칠 튀어 오르게 만들었다. 쾅, 쾅, 쑤셔 박히는 굵은 성기에 눈앞이 희게 점멸했다.

“히, 으……!”

남자의 몸 위로 개의 꼿꼿이 선 성기가 비벼졌다. 비질비질 흘러나오는 선액이 남자의 옷을 적셨다. 남자가 붙잡은 흰 엉덩이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개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꾹 눌러 감았다. 눈물이 정액과 함께 바닥에 투둑 쏟아져 내렸다.

“아, 흐으……! 아, 아……!”

그러나 남자는 파정하지 않았다. 공작은 사정으로 인해 부푼 전립선 위를 거칠게 짓이기며 개의 목덜미를 강하게 짓씹었다. 공작의 손아귀에 잡힌 몸이 파드득 떨렸다. 경련하듯 떨리는 붉은 내벽이 두꺼운 성기를 꽈악 짓씹었다.

“큿, 하아…….”

남자가 마침내 낮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개는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자극적인 목소리에 가물가물한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붉게 달아오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 읏…….”

개는 온몸에 힘이 빠져 공작의 품으로 늘어졌다. 아직 성기가 빠져나가지 않은 구멍에서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뭘 어떻게 해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머리칼을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공작은 자신에게 기댄 개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종이 잘못된 게 눈물을 흘릴 정도의 일인가?”

“…….”

개는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힘을 다하는 기분이었다.

“……잠들었나 보군.”

공작의 목소리가 작게 잦아들었다. 잠든 개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 개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침묵을 지켰다. 부드러운 손길에 간신히 차리고 있던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개는 가물가물하게 흐려지는 정신의 끈을 천천히 놓아 버렸다.

“운다 해서 죽어 가는 시종이 돌아오지는 않아. 네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면 생각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무엇부터 고쳐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리고 내 앞에서 다시는 그딴 멍청한 얼굴로 울지 마.”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개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다만 정신의 끈을 놓는 와중에도 그의 말은 선명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개의 몸이 축 늘어졌다.

“……듣지도 못할 텐데 괜한 말을.”

차현은 쯧, 혀를 찼다.

그는 달이 선명하게 떠오른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혁명단원들은 애가 타도록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약속했던 시간이 한참 전에 지났으니까.

“흣…….”

내벽 깊숙이 박혀 있던 성기를 슬슬 빼내자, 정신을 잃은 개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미간이 작게 찡그려졌다.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벌로 남겨 놓을까.”

차현은 벌어진 구멍 안쪽에 질척거리는 정액을 그대로 둔 채 개를 침대 위에 눕혔다. 개는 무언가 불편한 사람처럼 몸을 한참이나 뒤척거리더니, 곧 고르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 잠든 개를 돌아보았다.

개가 끼어든 이후로 계획은 조금씩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윤재경은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가 판단하기에 상황은 아직 정상 궤도 내에 있었다. 그러니 개를 계획 내에서 배제하는 일은 조금 더 뒤로 미뤄도 될 것이다.

이 계획에서 배제된다면 개는 즉시 죽게 될 테니까.

차현은 잠시 침대 위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탁.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 안이 고요에 잠겨 들었다.

여자는 초조한 얼굴로 원탁 앞에 앉아 있었다. 침묵에 휩싸인 방 안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여자가 다리를 떠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벽시계의 초침이 12시를 막 지났을 때, 침묵을 깨고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벌써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네만…….”

노인은 지루한 기다림에 지친 듯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약속을 잊었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

“그럴 수도 있죠.”

여자는 즉답했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긴 여자는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달이 아주 밝았던 날.

‘그 총 거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자신에게 총구를 내밀며 웃던 아름다운 남자.

“하지만 저희는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아시다시피.”

황제의 측근이자, 황제가 유일하게 믿는 인간이라 평가받는 ‘그’ 차현 공작이 ‘혁명단을 지원하는 익명의 후원자’였을 줄이야.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발한다면 아주 큰 포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이랴, 어쩌면 내부의 적을 잡았다며 황제의 신임을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딴 신임은 트럭째 가져다줘도 가질 생각이 없으므로 고발하지 않을 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가 아군이었다니, 그 사실은 역시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공작’이 ‘익명의 후원자’였다니.

공작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그자는 검찰청의 수뇌부다. 충분히 익명의 후원자의 존재를 알고 있을 만도 했다.

그러나 익명의 후원자를 알고 있다면 왜 그자를 체포하지 않은 거지?

의문은 꼬리를 물고 물어 원점으로 돌아왔다.

여자는 입술을 짓씹었다. 역시 오늘 그를 만나야만 했다. 그래서 공작이 ‘익명의 후원자’라는 명백한 증거를 받아 내야만 했다.

“하아…….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드르륵.

그때였다.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그림처럼 미소 짓는 공작, 그는 어딘지 모르게 느른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먹이를 양껏 먹고 늘어진 포식자 같았다.

가을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고, 비옥한 땅 위에서 생명체들이 생기를 띠고 움직였다.

누군가는 연인을 만나고, 누군가는 가족을 만나는 계절.

열다섯의 개는 황궁의 담벼락 위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높고 청량한 하늘 위로 새하얀 구름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불어온 바람이 지푸라기처럼 거친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갔다.

“…….”

황궁에 들어와 ‘개’라고 이름 붙여진 지 2년이 지났다.

모시는 황태자는 그의 이복형제와 황제 자리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서로의 치부를 들춰내고, 형제의 식탁에 독을 보내며, 잠자리에 암살자를 보내는 저열한 싸움.

개는 2년의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했다. 소문을 내는 자의 혀를 잘랐고, 음식에 뿌려진 독을 대신 먹었으며, 암살자의 목을 베었다.

그사이 개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와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흉터가 새겨졌다. 독을 먹고 크게 앓아누웠을 때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개의 새까만 눈동자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황궁의 후원에는 코스모스가 잔뜩 피어 있었다. 툭 건들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줄기 위에 피어난 꽃은 선명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개는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사이로 둥그렇고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벌레의 매끈하고 빨간 외피에는 검은 얼룩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이름을 모르는 생명체였다.

개는 벌레의 눈앞에 손가락을 올렸다. 발발 걸음을 옮기던 벌레가 일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개도 잠시 기척을 죽인 채 벌레를 바라보았다.

벌레가 다시 움직인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작은 벌레가 개의 검지를 타고 올라왔다. 개는 손을 움칠 떨었다. 벌레의 다리가 스쳐 지나가는 자리마다 간지러움이 피어올랐다.

벌레는 마치 제집을 드나들듯 개의 흉터 가득한 손을 기어 다녔다. 짧게 깎인 손톱 위를 지나기도 했고, 울룩불룩 살이 돋아난 흉터를 등산하듯 오르기도 했다.

개는 이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다.

“뭘 보고 있느냐.”

그 때문이었다. 황태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색 옷을 걸친 황태자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는 바닥에 머리가 닿을 만큼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가 신은 검은 신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서라.”

황태자는 한참 만에 기립을 허락했다. 개는 무릎을 펴 일어났다. 벌레는 아직도 유유히 개의 손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이걸 보고 있었습니다.”

“무당벌레?”

황당함과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개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빛을 등진 황태자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 더러운 것을 왜 손에 올리고 있느냐! 어서 치우지 못할까!”

황태자는 당장에 칼이라도 빼어 들 것처럼 사나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성년인 개와 성인인 황태자의 신장 차이는 컸다.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기세에 개는 황급히 손을 털어 냈다. 여유로이 개의 손을 기어 다니던 무당벌레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라 날개를 펼치고 멀어졌다.

“누가 이딴 것에 관심을 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개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엇을 잘못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태자의 말은 진리였다. 그가 죄를 지었다 하면 지은 것이고, 짓지 않았다 하면 짓지 않은 것이었다. 개는 자신에게 떨어질 체벌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날, 황태자는 개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왜 개가 밖에 나오게 두었느냐. 누가 감시를 소홀히 한 거야?”

황태자는 자신의 등 뒤에 선 내관을 보았다. 초록색 복식을 갖춰 입은 늙은 비서실장이 허리를 깊이 숙이더니, 곧 매서운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했다.

개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어린 시종이 죄인처럼 끌려와 황태자의 앞에 섰다.

“소, 송구합니다. 소인이…….”

시종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개는 어쩐지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냐?”

황태자는 성큼 시종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망설이지도 않고 대번에 손을 들어 시종의 얼굴을 내리쳤다. 강한 충돌에 작은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악!”

그는 저항 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몸을 흙발로 짓밟았다. 시종의 옷이 흙과 발자국으로 더러워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는 그 누구도 황태자를 말리지 않았다.

개는 힐끗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즐거운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약한 자는 강한 자를 이길 수 없다.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황궁에 갇힌 개는 꼬리를 쫓는 짐승처럼 평생 같은 것만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같았다.

“…….”

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드러났다. 익숙하지 않은 무늬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개는 혼몽한 정신을 다잡지 못한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누가 머릿속에 먹물을 끼얹은 것처럼 생각이 뒤죽박죽 흐트러졌다. 게다가 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미간을 찌푸린 개는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읏……?”

그 순간, 벌어진 내벽 안에서 무언가 주륵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눈이 커다래졌다. 까만 동공이 짧게 흔들렸다.

개는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확 걷어 내고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있어야 할 바지는 온데간데없고 맨다리가 침대 위에 뻗어 있었다. 말랑한 성기가 늘어진 사타구니는 얇은 상의로 간신히 가려져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목 뒤가 쭈뼛 서는 격통이 개의 몸에 내리쳤다.

“……아.”

그제야 기억났다.

어젯밤, 남자는 방망이 같은 성기로 좁은 구멍을 찢듯이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내벽을 마구 들쑤셨지. 파헤쳐진 내벽은 아직도 화끈하게 달아올라 조금만 움직여도 저릿저릿했다.

개는 후들거리는 팔을 움직여 자신의 구멍 위에 손을 댔다. 고작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저며진 상처 위에 소금물을 뿌린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개는 이를 악물었다. 고통을 참고, 벌어진 구멍에 손끝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덩어리진 액체가 투둑 떨어졌다.

“흐읏…….”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개는 몇 번 더 구멍을 쑤셨지만, 내벽 안에 달라붙은 정액은 단순히 구멍을 벌린다고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개는 뜨겁게 달아오른 내벽 안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잔뜩 벌어졌던 구멍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개는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움직이는 몸의 마디마디가 기름칠하지 않은 경첩처럼 뻑뻑했다.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무언가 다시 흘러나오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벽에 남은 이물감이 거스러미처럼 신경을 거슬렀다.

“……운다 해서 돌아오지 않아.”

그러나 개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옅은 신음이 아니었다. 낮게 가라앉아 쉰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와 떨어졌다.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면…….”

정신을 잃기 전, 공작은 개에게 말했다. 멍청히 울어 봤자 태성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면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무엇부터 고쳐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하라 했다.

“…….”

개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가득한 손. 누군가를 죽이고, 싸우고, 고문했던 손.

이 손으로 다른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없지 않다.

개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풀어 줄 이가 같은 공간 안에 존재했다.

그자도 아직 치료를 받고 있을 테니 분명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흐읏.”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벌어진 내벽 안에서 무언가 주륵 흘러내렸다.

개는 황급히 구멍을 조이며 뒤에 손을 댔다. 찌푸린 개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낡은 장에 걸려 있던 바지를 꺼내 입은 개는 결국 구멍 위에 천을 덧댔다. 천이 되기 위해 넝마가 된 옷 하나를 바닥에 버려둔 개는 곧장 병실을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얇은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답지 않게 어기적거리는 뒷모습이 꽤 우습게 보였다.

태성과 자신의 병실을 빼면 남은 병실은 다섯 개 정도. 개는 창문이 없는 철문 가까이에 붙어 방 너머의 소음을 들었다. 네 군데를 돌아다녔음에도 그가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없었다.

개는 다시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섯 번째 철문에 귀를 댔다.

“……마, 건강…….”

그 순간, 기시감이 드는 목소리가 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개의 미간이 확 일그러진 것은 그때였다.

“…….”

개는 복잡한 감정이 얽힌 얼굴로 철문을 바라보았다. 이 방 안에 그자가 있을 거란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더 병실이 없는 데다가 익숙한 목소리까지 들려왔으니까.

그러나 이 방 안에 있는 것은 그자뿐만이 아니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개는 결국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끼익. 낡은 경첩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뱉었다. 병실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뚝 멈췄다.

“…….”

“…….”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개를 바라보는 두 쌍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혀 들었다.

개는 침상에 누운 잎사귀와, 그의 곁에 앉아 눈을 홉뜬 캡 모자 남자를 보았다.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몇 번이나 엿 먹였던 남자에게는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네가.”

그건 캡 모자를 쓴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를 본 순간 눈이 돈다는 의미를 그대로 이해했다.

“네가 여길 무슨 염치로 들어와!”

개에게 성큼 다가온 모자가 개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개는 서늘한 빛을 띠는 검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꺼져! 나가라고!”

“이 손 꺾어 버리기 전에 놔.”

개는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 모자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어깨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모자의 팔목을 꺾는 것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잠시만요.”

그때 한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개와 모자의 시선이 동시에 잎사귀를 향했다.

“마침 잘 왔는데 왜 보내요.”

피가 말라붙은 입술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매서운 눈동자가 개를 직시했다.

“뭐? 하지만.”

“나한테 온 손님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잎사귀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모자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잎사귀를 보았다. 그러나 잎사귀의 시선은 무섭도록 집요하게 개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모자가 개를 내려다보았다. 멱살을 붙잡힌 개는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모자의 손목을 움켜쥔 개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짜증스러운 듯 개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개는 모자가 읊조리는 한마디를 들으며 미간을 구겼다. ‘운 좋은 줄 알라’는 말은 손목이 부러질 뻔한 그가 아니라 개가 할 말이었다. 그러나 모자는 제 할 말만을 한 채 등을 돌렸다.

그는 병실 한편에 놓인 간이 의자로 돌아가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자리에 앉기 전, 가만히 개를 바라보던 잎사귀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나가 주세요.”

“뭐?”

놀람과 당황이 뒤섞인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모자는 둥그렇게 뜬 눈으로 잎사귀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말문이 트인 듯 다다다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 했는지 잊었어? 그런데도 너랑 저 미친 새끼랑 단둘이 놓고 나가라고?”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개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시끄러운 목소리에 귀가 쟁쟁 울렸다. 저 입을 당장이라도 틀어막고 싶어 몸이 움찔 튀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입에 손이 닿는 일은 없었다. 씩씩거리던 모자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탁해도 안 돼. ‘개미’가 이미 먼저 부탁했어. 너한테서 눈 떼지 말라고.”

“저 안 죽는다니까요. 봐요, 팔다리 멀쩡하게 살았잖아요.”

물론 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 일어나자 한 말이 ‘아직 안 죽었네’였던 거 잊었……! 하, 됐다. 말해 뭐 해. 됐으니까 저 새끼 지금이라도 내보내고 건강부터 챙기자, 어?”

모자는 잎사귀를 억지로 침대에 눕히려 했다.

‘저 새끼’라고 불린 개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자꾸 대화에 훼방을 놓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저자의 급소를 쳐 기절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 솟았다.

“멀리 나가라는 거 아니에요. 문 앞에 있는 건 상관없잖아요. 예?”

“똑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개는 한숨을 내뱉었다. 쉬운 방법을 두고 돌아가려니 속이 답답했지만, 무력을 사용해 일어나는 부작용을 더 이상은 겪고 싶지 않았다.

“죽일 생각 없어.”

“뭐?”

수면 아래 가라앉은 듯 고요했던 태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개는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고문할 생각도 없고.”

개의 새까만 눈에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을 뿐이야.”

말을 마친 개가 입을 다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무거운 정적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가만히 있어도 패 죽이고 싶은 게 뭐라고 씨부리는 거냐, 지금?”

뒤늦게 입을 연 것은 모자였다.

“죽여? 고문? 저 새끼 대가리에도 총 맞았냐?”

“저는 모르죠. 그런데 맞았으면 저렇게 멀쩡하게 못 걸어 다닐 거 아녜요.”

잎사귀는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분개한 것은 오히려 모자 쪽이었다.

“내가 저 개새끼 진짜 쏴 버릴 거야!”

“쏠 순 있고요?”

그러나 펄펄 날뛰려는 그의 머리 위로 찬물이 부어졌다. 모자는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배신감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그 공작 놈…… 아니, 공작분의 사람이라는데 내가 진짜 쏘겠, 하…….”

모자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잎사귀는 픽 웃음을 터트리더니 힐끗 개에게 시선을 보냈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방금도 말했네. 저놈 공작의 사람이라면서요.”

개는 움찔 몸을 떨었다. 잎사귀의 시선이 서늘한 온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작의 사람’이라니?

“그때는 몰라도 지금은 저한테 손대기 쉽지 않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진짜 할 말 있어서 시간 좀 달라는 거니까.”

“……딱 3분만이다. 무슨 일 있을지 모르니까 문은 다 안 닫아 놓을 거고, 그 앞에 내가 서 있을 거야.”

“그 정도는 양보해야죠.”

모자는 해사하게 웃는 어린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푹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그 앞에는 기분 나쁜 기운을 내뿜는 작은 남자가 서 있었다. 잎사귀나 사마귀의 또래로 보이는 어린 남자. 빛 한 줌 들어올 것 같지 않은 저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면 깊은 혐오감이 느껴졌다.

모자는 유난히 파리해 보이는 개의 목덜미에 남은 상처를 짜증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어깨를 꿰뚫리고도 또 어떤 자의 목을 베러 갔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짐승에게라도 물어뜯긴 듯 원형을 찾을 수 없는 상처는 징그럽게까지 느껴졌다.

팍.

병실 문을 나서는 모자의 어깨가 개의 작은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개는 주춤 뒤로 물러서며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어깨에 고통이 감돌았다. 그러나 항변할 새도 없이 모자가 병실을 빠져나갔다.

개는 반뼘쯤 열린 문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잎사귀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3분밖에 없었다. 괜한 실랑이를 만들어 그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개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은 잎사귀에게 시선을 두었다. 잎사귀는 고요한 시선으로 개를 마주 보았다. 고작 몇 초였지만 억겁의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침묵이 개와 잎사귀의 사이에 머물렀다.

동상처럼 서 있던 개는 침묵을 깨기 위해 걸음을 뗐다.

“움직이지 마.”

개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잎사귀의 차가운 목소리가 개의 발 앞에 선을 그었다.

“넌 거기 서서 말해.”

개는 자신이 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표식이라도 붙어 있는 건가 했지만, 표식은커녕 표식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잎사귀는 그런 개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나는 너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생각보다 힘들거든.”

붕대가 칭칭 감긴 잎사귀의 손이 침대 시트를 꽉 그러쥐었다. 잘게 떨리는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기분이 손끝에 엉겨들었다.

“그리고 너 나보다 어리다며. 난 나보다 어린 애한테 존댓말 안 하니까 그렇게 알아.”

“…….”

잎사귀는 개의 시선이 닿았던 손을 황급히 이불 아래로 숨겼다. 그건 단단한 껍데기 안으로 몸을 숨기는 연약한 생명체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개는 시선을 올려 잎사귀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뭔데.”

무언가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린 잎사귀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인 화두에 당황한 개가 새까만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내가 혁명단에 왜 들어간 건지, 다시 궁금해졌나 보지?”

“……!”

개의 눈이 커졌다. 잎사귀의 말은 분명 질문의 어조였지만, 거기에는 확신이 섞여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네가 고문실에서 내게 물은 건 두 개뿐이잖아. 하나는 혁명단의 정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혁명단에 들어간 이유.”

“…….”

개는 달싹이던 입을 꾹 다물었다.

잎사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개는 잎사귀에게 ‘혁명단에 들어간 이유’를 묻기 위해 왔다.

‘운다 해서 죽어 가는 시종이 돌아오지는 않아. 네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면 생각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무엇부터 고쳐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든 게 혼란 속이라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개는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의문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해 왔다. 본능처럼 황제의 적을 죽이고, 그 싹을 뿌리째 뽑았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결과는 무엇이지?

개는 황제에게 버림받았고, 태성은 의식을 잃은 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부유하고 있었다.

“혁명단에 왜 들어갔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개의 눈동자가 흉흉한 빛을 띠고 잎사귀를 향했다.

잎사귀의 표정에 아주 잠시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들었어. 네가 혼자 쓰러져 있는 사마귀를 데리고 혁명단에 침투했다는 얘기.”

“사마귀?”

“우린 서로의 이름을 몰라. 그건 별칭이야. 네가 살린 그 애의 별칭 말이야.”

개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렁였다.

살렸다. 과연 그걸 살렸다고 할 수 있을까. 구부러든 손끝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 애를 고문 장소로 유인했던 네가, 그 애를 살리려 혁명단에 들어온 게 모순된다 생각했지. 그래서 나도 네게 묻고 싶은 게 생겼어.”

잎사귀는 개의 동요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말만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그걸 대답하면 나도 답해 줄게.”

“말해.”

개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혀를 굴렸다. 잎사귀는 그런 개를 바라보다, 열린 문틈에 힐끗 시선을 두었다. 바깥에 있을 남자의 귀가 신경 쓰이는 듯했다.

‘네가 공작의 사람이라는 말, 나는 안 믿어.’

그 순간 잎사귀가 입을 벙긋거렸다.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하는 구화(口話)였지만, 그는 개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 정체가 뭐야.’

그리고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개의 새까만 눈동자가 일순 크게 떨렸다.

밤이 늦은 시각이었다. 긴 코트와 와이셔츠, 바지까지 모두 검은색 일색으로 걸친 차현은 짧게 혀를 찼다.

“쥐새끼가 따로 없군.”

차현은 밤을 틈타 돌팔이의 병원으로 돌아온 자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선 반복적인 일상을 지속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퇴근 후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 저녁 식사를 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었으며, 늦은 밤이 되어서야 어렴풋이 빛나던 스탠드의 불빛을 껐다.

완전히 불빛이 꺼진 늦은 밤. 그는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걷는 차현의 다리 위에서 코트 자락이 너울거렸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는 곧장 익숙한 병실의 문을 밀어 열었다.

달칵.

“…….”

“…….”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유난히 멍한 검은 눈이 차현을 직시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창백한 빛을 띠는 개의 목덜미를 힐끗 보았다.

“아직 안 자고 뭘 했지?”

옷 위로 드러난 목덜미엔 그가 물어뜯은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다. 그게 못내 마음에 들었다.

차현은 성큼 걸음을 옮겨 개의 앞에 섰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개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이름이 중요한 겁니까?”

“……이름?”

뜻밖의 물음에 차현이 미간을 좁혔다.

흐리멍덩한 얼굴을 한 개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 흉터 가득한 손이 무릎 위에서 구부러들었다 펴지길 반복했다.

“…….”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개는 남자와 마주했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너 정체가 뭐야.’

잎사귀가 그렇게 물었을 때, 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지 못했다. 혀가 마비된 기분이었다. 왜일까.

한참을 머뭇거리던 개가 토해 낸 말은 짤막한 단어 하나였다.

‘개.’

‘개?’

황당하다는 듯 내뱉어진 말 끝에 잎사귀의 구겨진 얼굴이 있었다.

‘지금 네 별명 따위 듣자고 널 내 병실에 들여놓은 거 아니야. 네 소속과 이름을 말해.’

소속과 이름.

개는 그 질문을 듣고서야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째서 자신이 대답을 못 한 건지 깨달았다.

과거에는 그를 ‘황제’의 소속이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에게 버림받은 지금, 자신을 여전히 ‘황제의 개’라 이를 수 있을까?

황제는 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는 언제 자신이 개를 곁에 뒀냐는 듯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개가 아닌 새로운 ‘개’를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는 그럴 수 있는 존재였다.

여태껏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왜 이 순간 깨달은 것일까.

‘…….’

개는 입을 다물었다. 잎사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개의 등 뒤에서 끼익, 낡은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캡 모자를 쓴 남자가 약속했던 3분이 지난 것이다.

‘시간 다 됐어.’

삐딱하게 선 모자가 철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는 병실 문 앞에 멀거니 선 개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경계, 혹은 경멸이 섞인 시선. 그러나 개는 그 시선을 맞받아치지 못했다.

‘나는 충분한 대답을 듣지 못했어. 네가 원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고 다시 찾아와.’

개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모자가 개를 문 밖으로 쫓아냈기에, 여지를 남겨 둔 잎사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본다는 건.”

“……!”

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느새 남자가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희미한 달빛을 받는 검푸른 눈동자가 눈앞에서 반짝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흥미가 어린 눈동자.

남자의 커다란 손이 개의 뺨 위에 닿았다.

“누가 네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렇지?”

“……아닙니다.”

일순 머뭇거린 개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세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개의 얼굴은 잘 빚어 낸 동상 같았다.

“너는 거짓말에 익숙하지 못해.”

남자는 단언했다. 개의 목울대가 작게 일렁였다. 뺨을 감싸 쥐었던 남자의 손끝이 개의 관자놀이를 지나 귓바퀴를 더듬고 있었다.

“침묵하는 법이나 자결하는 방법은 배웠어도, 거짓말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을 거다. 소모품에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 놈은 없으니까.”

귓바퀴를 더듬던 남자의 손이 개의 귓불과 안쪽의 얇은 피막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간지러운 감각이 뇌리에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다. 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눈을 하고 모르길 바라면 안 되지.”

웃음기 서린 눈동자가 개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급히 토해 냈다. 마주쳤던 시선이 허공을 향해 돌아섰다. 개는 자신의 귓불을 훑고 목덜미로 떨어지는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뺐다.

“그래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온 거지?”

그러나 남자는 개가 도망치도록 두지 않았다. 그는 개가 멀어진 만큼 허리를 숙였다. 남자가 입은 긴 코트가 개의 다리 위까지 끼쳐 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전보다 더 가깝게 놓인 기분. 개는 아직 다물리지 않은 구멍의 이물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는 것을 느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혁명단의 일원을 만났습니다.”

“그래.”

남자의 손가락이 개의 뒷덜미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 자라난 목덜미에 손가락이 와 닿자,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제 소속과 이름을 말하라, 읏…….”

불현듯 남자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거슬거슬한 딱지가 진 상처 위를 핥아 올렸다.

어젯밤에 씹혔던 상처가 다시 짓이겨질까 두려웠다. 아니. 고통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휩쓸릴까 두려웠다.

“계속 말해.”

“원하는 답을 얻고 싶다면 다시 찾아오라고 흣, 그만…….”

남자를 밀쳐 내기 위해 너른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를 밀기 전에 먼저 침대 위로 밀쳐졌다.

끼익.

남자의 무게가 더해진 침대에서 무너질 듯한 소리가 났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누굴 찾아간 건데.”

개의 위에 올라탄 남자가 달빛을 등졌다. 어둠에 잠긴 듯한 눈동자가 가는 웃음을 지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포만감에 젖은 얼굴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잎사귀를…….”

개는 숨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개의 머리맡을 양손으로 짚은 남자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아’ 짧은 소리를 내뱉었다.

“정보 수집을 하는 자군. 네 정체를 의심할 만해. 하지만 ‘황제의 개’라고 하면 모든 게 설명됐을 텐데…….”

남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두 눈 가득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마냥 흥미로워하는 남자와 달리, 일순 개는 심장이 크게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황제의 개. 자신은 아직도 ‘황제의 개’인 걸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개의 입술 위를 쓸었다.

“쫓겨난 걸 보면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

“네.”

남자의 손길이 닿은 얇은 표피가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왜?”

개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고? 대답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을 벌려 소리를 내면 되는 일이 뭐가 어렵단 말인가. 그러나 어쩐지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을 덧그리던 손이 개의 귓가에 닿았다. 개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곱게 휘어진 눈이 개를 담아냈다.

“혁명단원인 잎사귀에게 저의 정체를 솔직하게 말하면 반감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될 수도…….”

“또 그 눈.”

공작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개의 말을 가로막았다. 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눈’이라니. 자신이 대체 어떤 눈을 한 건지 알 방도가 없는 게 답답할 뿐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온건한 방법을 썼다고.”

“얌전히 있으라고 하셨잖습니까.”

“흥미롭네.”

남자가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믿음이 간다는 식의 웃음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생선 앞에 앉은 고양이를 보는 눈.

개는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말을 꺼낸 것은 개가 아니었다. 남자는 개의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 올리며 물었다.

“네게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개는 눈을 깜빡였다.

이름.

익숙하지 않은 단어는 낯선 언어를 발음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주었다.

“이름…….”

잎사귀가 물어보았으니 필요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가져도 되는 걸까.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황제의 허락도 없이 사용해도 되는 걸까.

다물린 입술에서 침묵이 길어졌다. 공작은 머리칼을 흩트리던 손을 미끄러트렸다. 무방비하게 놓여 있던 개의 턱이 일순 하늘을 향했다. 개는 가까운 곳에 놓인 남자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걸, 지금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

픽 터트린 웃음이 입술 새로 스며들었다. 개는 자신의 입술 위를 핥는 거슬거슬한 혀의 감촉에 아, 소리를 내뱉었다.

그 순간 입술이 깊게 겹쳐 들었다. 그는 익숙하게 개의 입 안을 파헤치고 목구멍 안쪽을 핥아 올렸다. 가늘게 뜨인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고작 입맞춤에 뇌가 녹을 것 같았다.

개는 눈앞에 놓인 남자의 감은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 눈을 매만져 보고 싶단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눈을 감고 있었던 남자가 눈을 떴다. 선명한 눈동자가 개를 직시했다.

“지금까지. 말을 못 했는데.”

“흣…….”

짧은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남자는 바르르 떠는 개의 눈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키스할 때는 눈을 감는 게 매너야.”

개는 어둠 속에서 남자의 숨결을 느꼈다. 맞부딪치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어두운 밤을 틈타 병실에 숨어든 공작은 기어코 개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그는 개의 엉덩이에 덧대어진 천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싫다고 버둥거리는 개의 구멍 안쪽을 긁어냈다. 말라붙었던 정액이 물과 함께 욕실 타일에 떨어져 내렸다.

남자의 손가락이 빠져나왔을 때, 개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에게 기대어 있는 게 전부였다. 벌어진 구멍이 화끈거렸고, 아닌 척 쑤셔진 배 안쪽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어제에 이어 시달린 몸은 종이 인형이라도 된 것마냥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극악무도한 남자는 개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힘이 들어간 성기를 주물러 억지로 세우고, 자신의 것과 함께 문질렀다. 나중에는 성기의 표피가 모두 까질 것 같은 고통마저도 쾌감으로 느껴져 눈물을 터트렸다.

“…….”

개는 따끔거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부어오른 눈 안쪽이 뻑뻑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개는 마른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문대도 눈가만 벌겋게 달아오를 뿐, 부어오른 눈이 가라앉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한숨을 내뱉은 개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좁은 창문 밖, 어둠에 잠겼던 하늘이 어느새 푸르스름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펴 일어섰다.

‘네 소속과 이름을 말해.’

잎사귀가 요구한 것은 개가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멍청하게 앉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개는 알고 싶었다. 알아야만 했다. 태성이 대체 어쩌다 혁명단에 들어가게 된 건지, 혁명단이라는 단체는 왜 만들어진 거고, 혁명단의 무엇이 태성을 이끌었던 건지. 영영 깨지 못할 것처럼 깊은 잠에 빠진 태성을 이해해야만 이 혼란이 끝날 것 같았다.

주먹을 말아 쥔 개는 복도로 나왔다. 개의 시선이 잠시 태성의 병실 쪽으로 향했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작게 울렁였다.

그러나 시선이 멈춘 것은 순간이었다. 개는 곧장 등을 돌려, 잎사귀가 있을 병실 쪽을 향해 가려 했다.

“……어야 힘이 나지.”

“……!”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태성의 병실이 있는 쪽. 어린아이의 가벼운 기척과 훈련을 받은 정교한 기척이 함께 느껴졌다.

개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직 마주칠 때가 아닌데. 아니. 마주쳐서는 안 되는…….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았다. 평소라면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을 텐데 머릿속이 백지 상태였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도 기척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개는 다급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밥만 빨리 먹고 오는 거야. 할 수 있잖아, 그렇지?”

“……네.”

여자의 손에 떠밀려 복도를 걷는 예성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생기를 가득 띠던 뺨은 이미 야윈 지 오래였고,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팔다리를 대자로 뻗어 천장에 매달렸던 개는 두 사람이 멀어진 직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본의라기보다는 힘이 빠져 떨어진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낙법을 취한 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후에야 멈춰 섰다.

“…….”

금세 흙먼지에 더러워진 개는 예성이 사라진 복도 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복도를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끝에 보인 것은 여자였다.

검은색 누빔 옷을 입은 여자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뻗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일정했다.

개는 가면을 벗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리가 나서 돌아와 봤더니.”

두 뼘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선 여자의 키는 개보다 약간 크거나 엇비슷했다. 여자는 새까만 눈을 빛내는 개를 보고도 태연해 보였다. 개는 이와 같은 얼굴을 어렴풋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구면이지?”

머지않은 과거, 언젠가 개는 시장 골목에서 길을 잃었었다.

‘잠깐만.’

그때 철물점을 운영하던 여자는 구더기 굴로 들어가려는 개를 만류하며 말했다.

‘그쪽으로 더 들어가면 위험해.’

‘이곳에선 길을 잃었을 때 하면 안 되는 짓이 있거든. 길을 잃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거. 그러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니까.’

여자는 그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애는 어디에 있어.”

개는 비릿한 쇠 냄새를 풍기는 여자를 흉흉히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함께 사라졌던 예성을 어딘가에 두고 혼자 돌아왔다. 불안감에 눈앞이 하얗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태성에 이어 그 애의 동생까지 깊은 잠에 빠져 버린다면?

“왜 혼자 돌아온 거지?”

“그 애는 다른 단원과 함께 갔어.”

사납게 읊조리는 개와 다르게 여자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가 아득 물렸다. 태성의 동생은 조금의 무력도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 애를 오합지졸 혁명단 일원에게 맡기고 오다니.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 분명했다.

만에 하나라도 군인이 이 앞을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오싹한 생각에 개는 서둘러 걸음을 뗐다. 여자를 제외한 혁명단 일원들의 실력은 믿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에도 급급한 그들이 어떻게 타인을 보호한단 말인가.

“뒤쫓아 가려고?”

“…….”

개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여자는 끈질겼다.

“쫓아가서 뭘 할 건데. 그 애 밥이라도 떠먹여 줄 거야?”

우뚝 걸음이 멈췄다.

개는 사납게 뜬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짐승의 것처럼 날 선 시선은 사람을 본능적으로 두렵게 만들었다. 여자는 오싹한 빛을 내뿜는 눈을 마주 보며 어깨를 굳혔다.

“끝까지 챙겨 줄 거 아니면 나서지 마. 걘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모두 내뱉었다.

사납게 뜨였던 눈에 파동이 일었다. 개의 입이 꾹 다물렸다.

“…….”

방금 전의 예성은 시든 풀잎처럼 메말라 보였다. 몸에는 힘이 없었고, 살이 빠진 뺨은 야위어 있었다. 예성은 힘들 것이다. 개도 알았다.

“그땐 상황이 그래서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못 했지. 지금이라도 다시 인사할게. 사마귀를 우리 쪽으로 데려와 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그 애를 살려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거야.”

개가 침묵을 지키자 여자는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개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흘렸다.

“말 끝났으면 비켜.”

그러나 내뱉는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여자는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개의 팔목을 움켜쥐려 했다. 그 순간 새까만 눈이 서슬 퍼런 빛을 띠고 돌아섰다.

“……!”

검은 손이 순식간에 눈앞까지 뻗어져 왔다. 어느새? 놀랄 시간도 없었다.

여자는 간신히 개의 팔목을 쳐 냈다. 탁! 급하게 쳐 낸 탓에 뼈가 부딪쳤다. 손목 안쪽의 뼈가 징 하고 울렸다. 미간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큭!”

손을 쳐 냈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개는 여자의 다리를 차 넘어트리려 했다. 후웅. 공기가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간신히 공격을 피한 여자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까만 눈이 이채를 담은 것은 그때였다.

개는 타깃의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흉터 가득한 손이 단숨에 목을 움켜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벽에 부딪친 여자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개는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힘을 가하면 기절할 것이고, 시간을 더 들이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에서 힘이 풀렸다. 숨통을 틀어막았던 손이 사라지자 여자가 덜컥 숨을 몰아쉬었다.

“켁, 켈룩.”

개는 무감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자는 혁명단의 우두머리급으로 보이는 인간이었다. 태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잎사귀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대단하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여자가 상황에 맞지 않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는 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숨에 훑어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단순한 상대는 아닌가 봐.”

“무슨 소리야.”

개는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한 상대’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개의 의문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말 길게 하지 않을게. 내가 하려던 말은 간단해. 네가 공작의 사람인 것도 알겠고, 사마귀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 아지트로 온 것도 고마워. 하지만.”

여자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단원들한테 접근하지 마.”

“…….”

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의 기운이 서슬 퍼랬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냥 말을 전하러 온 거야. 하지만 다음엔 경고가 될 거고, 그다음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야.”

경고도, 경고 이상의 것도 무섭지 않았다. 이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가만히 여자를 바라보던 개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네가 공작과 자는 사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어.”

“……!”

이어지는 여자의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홉뜬 눈이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뭘 그렇게 놀라. 공작은 아끼는 수하를 구하러 혁명단의 본거지까지 쳐들어올 사람이 아니야. 귀족 중에서 제일 상식적인 사람이란 건 인정하지만.”

여자는 픽 웃으며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깨에 구멍 냈던 건 미안하다. 치료 잘 해.”

여자의 손이 개의 어깨 위를 가볍게 두드리고 떠나갔다.

개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공작과 잤다. 그게 단순히 ‘한 침대를 쓴다’는 의미가 아니란 걸 알아서 머리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개는 더듬더듬 목덜미를 더듬었다. 뒤늦게 목덜미에 남은 상처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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