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9/19)

10장

빛을 받아 갈색을 띠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흐트러졌다. 사륵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잔상을 남기며 귓바퀴에 닿았다.

크고 곧은 손이 귓바퀴 위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모양 좋은 손끝이 얇은 피막 같은 귀 안쪽의 살을 쓸어 올렸다. 하얀 침대 위에 죽은 듯 놓여 있던 남자의 몸이 움칠 튀어 올랐다.

“일어났나?”

“…….”

개는 멍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눈은 떴는데 머리가 공회전을 하는 것처럼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억을 담당하는 회로가 처음부터 다시 조립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인식되는 것은 그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남자가 웃고 있다는 것과, 그가 자신의 귓가를 지분거리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아직 덜 깬 건가.”

남자는 개의 귓불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개는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에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만졌으면 좋겠는데. 개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만…….”

그 순간 개가 까만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제 목소리를 듣고서 놀란 것이다.

원래부터 낮은 목소리였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조금은 쉬어 있는 것도 같았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목이 왜.

“……!”

개는 마침내 한 가지 기억에 도달했다.

어젯밤 개는 뒷구멍에 남자의 손가락을 넣고 사정했다. 남자가 거칠게 추삽질을 하듯 손가락을 쑤셔 넣을 때마다, 눈앞에 폭약이 튀는 것처럼 지끈거리고 배 속은 뜨겁게 달아올랐었다.

갑작스럽게 온 신경이 엉덩이 사이에 있는 구멍을 향하는 듯했다. 어젯밤에 벌어졌던 구멍은 부어 아직 다물어지지 않았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벌어진 구멍이 움찔거리며 오므라들었다.

당혹감에 빠진 개는 입술을 달싹였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어제는 경황이 없었다. 누가 흔들면 흔드는 대로 흔들렸고, 도저히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흣.”

남자는 그런 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귓불을 만지던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크게 확장된 까만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위험 신호가 적색으로 깜빡였다. 개는 순식간에 침대에서 튀어 올라 남자와 멀어지려 했다.

“어딜.”

그러나 탈출은 실패했다. 남자에게 팔을 붙잡힌 순간 침대 위로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풀썩. 등 뒤에서 푹신한 침대가 꺼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탈출을 꾀하려 했지만 머리맡에 단단한 두 팔이 기둥처럼 섰다. 개는 홱 시선을 올려 공작을 보았다.

햇빛을 받은 공작의 얼굴에 아름다움이 반짝였다.

그는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더니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얼굴이 빨간데.”

개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얼굴이 붉어져 뜨겁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뺨은 만지면 델 것 같았다. 개는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읏.”

“눈이 부었어.”

공작이 얼굴을 가린 팔을 곧장 떼어 냈다. 개는 붉어진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공작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개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작의 부드러운 손끝이 개의 눈 아래에 닿았다. 그제야 눈 안쪽이 뻑뻑하게 부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개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입술은 엉망이고.”

개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젯밤 남자가 깨물어 상처가 난 곳에서 쓰라린 고통이 번져 나갔다.

“목은…….”

웃음기 서린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개는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집요한 공작의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불그스름한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공작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개는 움찔 몸을 떨며 시선을 굴렸다. 머리맡을 짚고 있던 커다란 손이 개의 관자놀이와 뺨을 모두 덮었다.

“조르는 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공작의 얼굴은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거지.

깨달음은 늦었다. 공작의 입술은 이미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축축한 혀가 목덜미를 느리게 핥아 올렸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읏……!”

개는 물벼락은 맞은 고양이처럼 펄쩍 뛰며 공작의 어깨를 밀쳐 냈다. 온 힘을 다해 밀쳐 냈기 때문인지 공작은 쉽게 물러났다.

“누가 보면 겁탈이라도 당하는 줄 알겠군.”

“…….”

그러나 떼어 낸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산뜻하게 휘어진 공작의 눈 안쪽, 눈동자가 짙은 색깔로 가라앉아 있었다.

개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눈매가 공작을 향했다.

“쉬어.”

예상과 달리 공작은 쉽게 물러섰다. 개는 침대에서 일어서는 공작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눌렸던 침대가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공작의 다리 곁에서 잠옷 가운이 나풀거렸다. 웃음기가 서려 있던 얼굴엔 어느새 냉정함이 내려앉았다.

“혁명단의 일에는 더 이상 끼어들지 마.”

“그건.”

개는 순간 욱 치밀어 오른 말을 입 밖에 냈다.

혁명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니? 적의 목을 베는 것은 언제나 개의 일이었다.

“…….”

그러나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고 혀는 뻣뻣하게 굳어 버린 기분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언어가 되지 못했다.

‘그 말만은 하지 말지…….’

‘사람이라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

벌벌 떨며 울음을 터트리던 그 얼굴이 머릿속에서 잊히지를 않았다.

개는 입을 다물었다. 혁명단의 와해를 위해서는 태성의 목숨도 취해야 했다. 알고 있었다.

“혁명단의 일은 앞으로 우리 쪽에서 해결할 거다.”

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해결. 그건 혁명단을 곧 ‘처리’하겠다는 의미였다.

개의 눈동자에 혼란이 어렸다. 혁명단이 궤멸하든 영영 세상에 없는 단체가 되든, 그건 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다. 감히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는 단체라니. 없어져 마땅했다.

하지만 태성은.

“……저.”

작은 목소리가 굴러 떨어졌다. 돌아서던 남자의 시선이 개를 향했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식은땀이 날 것처럼 손끝이 차가워지고 팔다리가 욱신거렸다.

“…….”

태성도 혁명단인데, ‘태성만은 죽이지 말고 데려와 달라’는 부탁이 과연 옳은가. 그것도 황제의 개인 내가, 황제의 사람인 공작에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머릿속에 시한폭탄을 박아 넣은 것 같았다. 가쁘게 달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귀를 쟁쟁 울리는 것 같았다.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

개는 눈을 홉떴다. 공작의 얼굴이 코앞에 놓여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눈매가 개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공작은 초점이 돌아온 개의 눈을 보더니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더 할 말이 있나?”

“죄송…….”

사과는 이어지지 않았다. 입술이 부딪쳤다.

“흣.”

공작은 부드럽게 개의 입술을 물고 놓았다. 혀가 섞이지 않는 입맞춤은 부드러웠다. 사락 감겼던 공작의 긴 눈꺼풀이 느리게 걷혔다.

“얌전히 있으라는 의미야.”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선 곧장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개는 사라진 공작의 자취를 쫓으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

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덧씌워지고 덧씌워진 손은 지저분했다.

단 한 번도 이 손으로 해 왔던 일을 후회한 적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공작의 말대로 얌전히 있을 때가 온 걸지도 몰랐다.

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궁은 언제나처럼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는 듯.

공작이 혁명단의 일을 처리하면 돌아가자.

개는 아침 해가 밝아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정말 모든 임무를 끝내고 황제의 뜻대로 죽자고.

개는 종일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공작의 당부대로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다.

아니. 어쩌면 밖에 나가기가 조금은 두려워진 걸지도 몰랐다. 또 무언가 잘못될까 봐.

개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몸을 풀며 시간을 죽였다. 시간은 꽤 느리게 흘러갔다.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던 시기에는 순식간에 흘렀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개는 창문턱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공작을 기다렸다. 그러나 파랗던 하늘 위로 붉은 노을빛이 깔려 오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공작은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다.

개는 고요한 방 안에 앉아 새하얀 빛을 내뿜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공작이 아무런 말 없이 늦게 온 적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

개는 오늘 아침 ‘혁명단을 해결하겠다’ 말한 공작을 떠올렸다. 설마 벌써 혁명단의 꼬리를 잡은 것일까.

심장이 울렁거렸다. 개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초조함인지 불안함인지 모를 감상이 뒤섞여 속이 뒤틀렸다.

‘얌전히 있으라는 의미야.’

개는 나지막이 속삭이던 공작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얌전히, 얌전히 있어야 했다. 더 무언가 망가지기 전에. 개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

그러나 가만히 있기엔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웠다. 불안함이, 초조함이,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자꾸 개의 머릿속을 쟁쟁 울려 댔다.

달칵.

개는 결국 창문을 밀어 열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제야 폐부 가득히 공기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개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 늦은 시각에 저택의 담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개는 그저 저택 안의 정원을 산책할 생각이었다.

창문 밖으로 나온 개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잡아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러고 바닥과 몸의 거리를 잰 후 가볍게 착지했다. 살을 엘 것 같은 바람이 콧잔등을 스쳤다. 개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정원은 희미한 조명에 잠겨 있었다. 개는 싸늘한 바람 소리 외에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저택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잠시 뒤 저택에서 시선을 뗀 개는 묵묵히 정원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기척 없는 발걸음 아래로 희미한 조명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땅바닥을 보며 걸어 나가던 개의 고개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오고 있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충동적으로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개의 발길이 닿는 곳은 저택의 정문 쪽이었다. 울음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공작님. 흑, 공작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발요…….”

“야, 꼬맹아. 여기서 울어 봤자 소용없대도 그러네! 빨리 가! 너네 부모님이 너 안 찾으시냐?”

정문에선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경비의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작은 어린아이는 섧게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공작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개는 눈을 깜빡였다.

“아, 안 돼요. 공작님을…….”

그 순간 철문 너머에 있는 아이와 개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개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아저씨.”

예성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눈물에 흠뻑 젖은 눈이 절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성이, 한테 손대지 마요.’

그 순간 어째서 태성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소름 끼칠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개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예성의 눈에 와락 맺혔던 눈물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자, 빨리 가! 여기 앞에서 이러지 말고!”

경비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예성을 무력으로 제압해야겠다 생각한 건지, 솥뚜껑처럼 두터운 손으로 마른 팔을 잡아챘다.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예성은 경비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시, 싫어요! 공작님을 만나야, ……놔요!”

지익, 직. 신발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성의 눈동자가 개를 향해 돌아섰다. 태성을 닮은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아저씨!”

“…….”

허공에 뻗어진 예성의 작은 손이 개를 잡을 것처럼 허우적댔다. 발갛게 부은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졌다. 개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예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성이, 한테 손대지 마요.’

서늘한 목소리가 주술처럼 개를 옭매고 있는 것 같았다.

개는 다리 곁으로 늘어져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주먹 쥔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개는 예성을 바라보던 시선을 홱 돌렸다. 무시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공작은 얌전히 있으라 했고, 개는 동의했다. 그러니까.

“형이, 형이……!”

개는 걸음을 멈췄다.

예성이 절박하게 외치는 ‘형’은 단 한 명뿐이었다.

태성.

“무, 뭡니까!”

“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경비의 팔목을 붙잡은 채였다. 거미줄처럼 달라붙은 개의 손에 핏줄이 섰다. 경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예성의 팔뚝을 놓았다.

“……당신 뭡니까? 갑자기 왜 나서서…….”

개는 서늘한 눈으로 경비를 바라보았다. 개와 눈이 마주친 경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경비는 당황한 듯 눈을 피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살을 확 일그러트렸다.

“아. 공작님 침실 상대십니까?”

“…….”

경비는 자신이 고작 ‘침실 상대’에게 졸았다는 사실이 불쾌한 듯, 한껏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개는 그런 경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무언가 다리에 확 안겨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형이, 형이…….”

개의 다리를 껴안은 예성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둥그런 뺨이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바지가 축축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형, 형이…….”

예성은 코를 훌쩍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다시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겁에 질린 듯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허, 별꼴을 다 보네. 저 꼬마랑 아는 사이면 밖에 나가서 얘기해요. 공작저에는 못 들여보내니까.”

경비는 삐딱한 눈으로 개를 훑어보았다. 도련님처럼 곱상한 인상의 남자는 꽤 야릇한 감상을 불러일으켰지만,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오래 품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고로 공작이라면 절세미인 정도는 끼고돌아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쩝’ 소리를 내며 다른 생각에 빠진 경비를 뒤로한 채 개가 걸음을 옮겼다. 예성은 개의 다리에 매달려 질질 끌려왔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마지막 어른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개는 경비가 대화를 듣지 못할 곳까지 와 예성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공작을 만나야 한다고 한 거야.”

“흐윽, 욱……. 아, 아저씨…….”

예성의 말은 반이 울음이었다. 개는 조급한 마음에 예성을 채근하고 싶어졌다. 개의 미간이 빠르게 좁아졌다.

“저희 형……, 형 좀 살려 주세요. 제발…….”

“…….”

그러나 조급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형을 살려 달라’는 말이 도통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살려 달라는 건 목숨이 위험하다는 의미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태성이 왜. 태성은, 태성이 위험할 이유가……. 개는 이국의 언어를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살려 달라는 게 무슨 의미야.”

“아저씨, 형을…….”

개는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예성을 억지로 떼어 냈다. 의지할 수 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가자 예성은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말해.”

개는 예성의 어깨를 구길 듯이 움켜쥐었다. 예성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힘을 조절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예성의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형이, 형이 피가…… 흑, 너무 많이 나요.”

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저 때문에…….”

예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딸꾹질 같은 울음소리만이 개의 귓가를 때렸다. 밤을 밝히는 달빛이 너무 짙었다.

금요일 밤. 높게 뜬 달이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어둠을 비췄다.

“…….”

가면을 쓴 여자는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밝은 빛을 뿜어내는 밤. 그건 아름답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특히 누군가를 암살하러 온 자들에겐 더욱 더.

여자는 숨을 죽인 채 호화스러운 별장을 쏘아보았다. 익명의 후원자가 전한 말에 따르면, 안기부장은 매주 금요일마다 은밀한 성생활을 위해 이 별장에 드나든다고 했다.

여자의 이가 뿌득 갈렸다. 안기부장은 고문의 귀재였다. 그리고 변태였다. 그자는 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든 사람들을 불순분자로 낙인찍고 고문실로 끌고 갔다. 끔찍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여자는 품 안에 있는 서늘한 총신을 만지작거렸다. 그자는 오늘 자신의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여자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기 중인 단원들이 보였다.

한 명을 제외하고.

여자는 가까이에 서 있는 단원에게 말을 걸었다.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단원이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마귀는?”

“잠깐 동생을 보고 오겠다 한 뒤로 안 보여.”

여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싸늘한 추위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혹시 첩자였던 건…….”

“그건 아니야.”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가면으로 가려진 여자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첩자였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어.”

단호한 어투였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있는 목소리. 단원은 더 이상 여자의 판단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설마 누구에게 잡힌 건가?”

“일단 그 얘기는 일이 끝나고 해.”

여자는 냉정한 목소리로 질문을 끊었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밤길을 밝히며 달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순식간에 몸을 낮췄다.

“들어온다.”

여자의 말에 단원들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별장 안으로 들어서는 차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황궁이 폭발했던 직후, 사람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테러범들에게 열광했다. 그들은 잠시나마 자유를 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생을 묶어 놓는 두꺼운 사슬처럼, 영영 끊어지지 않을 것 같던 황궁이 무너지다니. 아무리 일부라 해도 말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혼란으로 비춰졌을 것이고, 누군가에겐 변화의 시작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낮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군인들과 시시때때로 감시하는 시선이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소극적으로 변했고, 황궁을 위협했던 테러 단체는 공포 속에 잊혔다.

그러니 다시 그때를 재현할 때였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신들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해야 했다. 여자는 화려한 빛을 내뿜는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지도자들을 단순히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결코 완벽한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 부당함을 느끼고, 스스로 삶을 쟁취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처벌은 반드시 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는 형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여자는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블라인드가 걷힌 창 너머로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도시가 보였다. 불이 꺼지지 않는 높은 건물과 음산하게 가라앉은 낮은 건물의 대비가 뚜렷했다. 마치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을 보는 듯한 기분.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차현은 턱을 괴고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침묵에 잠긴 도시는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고요를 지키고 있었다.

끼익. 그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턱을 괴고 있던 손끝으로 뺨을 툭툭 건드린 그는 짧게 혀를 찼다.

개에게 오늘은 늦게 들어갈 것이라 말하지 못했다.

차현은 오늘 아침 멍한 얼굴로 입맞춤을 받아들이던 개의 얼굴을 떠올렸다. 잘 벼려진 칼처럼 다루기 어렵지만, 막상 손에 쥐면 만지는 대로 솔직하게 반응하는 예민한 몸. 그건 차현의 욕망을 빚어 놓은 것처럼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작 개에게 발정하는’ 것이 싫어 시간을 낭비한 자신이 꽤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 발작적으로 거부했을까. 어차피 욕정의 대상일 뿐인데.

잠자리 상대에 대한 흥미는 일시적이었다. 그러니 쓸모가 있을 때까지 이용하다가 때가 되면 내버리면 된다.

타닥.

생각에 잠긴 그의 귓가로 조급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차현은 몸을 돌려 문을 보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소리가 문 앞에 멈춰 선다 싶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검사님.”

발소리의 주인은 윤재경이었다. 다급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여유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귀를.”

재경은 한달음에 차현의 옆에 와 섰다. 조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개와 혁명단 일원들이 대치 중입니다.”

예성은 ‘형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됐다.

개는 예성의 작은 몸을 들고 뛰었다. 무게감 있는 몸뚱이가 개의 목덜미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예성이 말한 장소는 도심의 한가운데였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 장소. 골목길을 달려 나가는 개의 뒤를 새하얀 달이 쫓아왔다.

“어디로 가야 돼.”

“저, 저기로.”

예성의 작은 손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타닥. 언제나 기척 없이 움직이던 개의 발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뛰어가는 개의 옆으로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여기예요!”

개는 몸을 우뚝 멈춰 세웠다. 밤거리는 조용하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피 냄새는 강렬했다. 개의 품에서 뛰어내린 예성이 순식간에 달음박질쳤다.

“형!”

개는 예성의 뒤를 쫓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뺨을 스치는 공기가 차가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피 냄새가 끼쳐 들어왔다.

“형, 형. 아저씨 데려왔어.”

멈춰 선 예성은 작은 몸을 더욱 작게 웅크렸다. 건물의 그림자가 예성의 머리 위를 덮쳤다. 그림자에 스며든 예성은 지금 당장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림자에게 먹어 치워진 사람이 있었다.

개는 예성의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있었다. 그건 개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처럼 보였다.

“…….”

그러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림자에 잠식당한 채 바닥에 늘어진 것은 태성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태성이 누운 시꺼먼 바닥에는 붉은 액체가 가득 고여 있었다.

“아저씨 제발 형 좀…… 형 좀 살려 주세요.”

“…….”

달빛이 너무 강했다. 그림자가 끝도 없이 짙어지고, 달빛을 받는 곳은 눈이 부실 정도로 시렸다. 차가운 공기가 숨통을 막았다. 개는 짧은 숨을 내뱉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태성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익숙한 죽음의 냄새가 났다.

개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재촉했다. 그제야 보이지 않던 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

웃고 떠들고, 울고 저주하던 앳된 얼굴은 시체처럼 질려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 낯설었다. 그러나 저 얼굴은 분명 태성의 것이었다.

“…….”

개는 빛이 들지 않는 까만 눈으로 태성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은 손끝이 욱신거렸다. 파리한 눈꺼풀을 닫고 있는 태성의 피부는 차가울 것만 같았다. 만지는 순간 개마저도 얼어붙을 것처럼.

죽은 것을 확인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개는 토막 난 숨을 내뱉었다. 뱉어진 숨은 허공에 희부연 자국을 남기고 흐트러졌다.

딱딱하게 굳은 듯한 무릎을 굽혀 예성의 옆에 앉았다. 개는 울음을 참는 소리를 들으며 태성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차게 식은 피부가 시멘트 바닥처럼 서늘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미약하지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급히 태성의 코밑에 손가락을 댔다. 가느다란 숨이 손끝에 닿았다.

살아 있다.

개는 숨통을 조여 오던 긴장이 발끝에서부터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 안도한 나머지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 아저씨……. 왜, 왜 그래요?”

개가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자, 예성은 불안에 떨며 물었다. 그러고도 조바심이 나는지 팔을 덥석 끌어안았다. 개는 제 팔에 매달린 예성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안 죽었어.”

“우윽…….”

기쁜 소식임이 분명한데, 예성은 간신히 멈췄던 울음을 다시 흘려보냈다. 개는 물러질 것처럼 부은 예성의 눈가를 바라보다가 태성에게 시선을 주었다. 머리를 적신 피가 붉었다.

피.

개는 뒤늦게 태성의 머리에 손을 댔다. 핏물에 젖어 딱딱하게 굳은 머리카락 사이로, 질퍽거리는 피의 질감과 함께 움푹 파인 머리가 느껴졌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이건 둔기에 맞아 생긴 상흔이었다.

“…….”

눈앞이 아마득해졌다. 이 정도라면 단순히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어떡하지. 누구에게 보여야 하는 거지.

의사?

개는 입술을 깨물었다. 태성이 혁명단인 이상 의사에게 보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의료 기록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고, 그중 특이 사항이 있는 경우 해당 환자는 반드시 조사를 받게 되어 있었다. 조사가 간단한 질의응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멀쩡했으나 조사가 끝난 후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개는 공작을 떠올렸다. 그는 상처를 스스로 꿰맬 수 있을 정도로 치료에 능숙하며, 다친 사람을 은밀하게 봐주는 돌팔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부재중이었다. 저택 밖에 있는 공작을 찾아 헤매기에는 태성의 상태가 위급했다.

개는 피 묻은 손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얌전히 있으라는 의미야.’

개는 입술에 닿았던 나긋한 울림을 떠올렸다. 남자의 말을 어기지 않으려 했다.

“…….”

태성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죽길 바란다’며 악의에 차서 외치던 이는 온데간데없고, 다 죽어 가는 아이만 이곳에 있었다.

부욱.

개는 자신의 옷을 찢어 태성의 머리에 감았다. 제대로 지혈이 될 리 없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나았다.

단단히 매듭을 묶은 개는 예성에게 시선을 두었다.

“혁명단, 어디에 있어.”

“네, 네……?”

예성은 눈물범벅인 채로 되물었다. 개는 조급함에 못 이겨 예성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네 형 죽이고 싶은 거 아니면 말해. 빨리!”

예성은 놀란 듯 입술을 달싹였다. 조그마한 소리로 흘러나온 이름은 개도 익히 아는 장소였다.

개는 서둘러 태성을 등에 업었다. 차가운 몸은 마른 장작처럼 딱딱했다. 태성의 뺨이 개의 어깨를 짓눌렀다. 발밑에 추를 단 것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명물 시장’.

황실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 재래시장이자, 국내 시장 중에서 부지가 가장 넓은 곳.

그리고 한때 황실에 충성했던 구더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혁명단의 본거지는 바로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예요. 그런데 다들 없어서…….”

“…….”

개는 새까만 어둠에 묻힌 문을 바라보았다. 어느 상가의 뒷문처럼 보이는 그것은 겉으로 보기엔 낡아 빠졌지만, 보안만큼은 확실했다.

달칵.

개는 닫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걸쇠가 찰각거리는 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눈이 가늘어졌다.

“아, 아저씨. 여긴 안 될…….”

예성이 초조하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쾅!

개는 발로 문을 걷어찼다. 강한 힘에 의해 문이 뒤흔들렸다.

쾅, 쾅!

조용한 시장 골목 안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가득 찼다.

“어, 어.”

그리고 마침내 문고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걷어차인 문이 잔뜩 찌그러진 채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뱉었다.

끼이익.

낡은 문 사이로 어두운 내부가 드러났다.

“안내해.”

“네, 네.”

개는 예성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비릿한 쇠 냄새가 가득했다. 이렇게 냄새가 심하다니. 무기고인 건가? 개는 미간을 찡그렸다.

건물의 통로는 어두웠다. 게다가 앞서 나가는 예성이 길을 골라 주지 않았다면, 몇 번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만큼 복잡했다. 개는 개미굴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늘어진 태성의 몸을 추슬러 업었다.

“다, 왔어요.”

예성이 멈춰 선 곳은 어느 문 앞이었다. 작은 문을 밀어 열자 쪽방이 드러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곰팡이와 물 샌 자국이 남아 있는 천장이었다. 장롱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방 안에는 급히 챙긴 짐 몇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여기가 저랑 형이 앞으로 살 곳이라고 했는데…….”

태성이 급하게 처소를 옮긴 것은 자신 때문일 것이다. 등에 업은 태성의 몸이 새삼 차가웠다.

“…….”

개는 묵묵히 태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꺼풀을 내리감은 파리한 얼굴은 시체라 해도 믿음직했다.

태성의 코끝에 손을 대 보았다. 색, 색.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성은 끈질기게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머리에 감아 놓았던 천은 붉게 젖어 더 이상 지혈의 용도로 사용하기엔 힘들어 보였다. 개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태성의 머리를 꽉 짓눌렀다. 찬 바람을 맞은 피부가 따끔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 잘못이에요.”

태성을 보던 시선이 예성을 향해 돌아갔다. 예성의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형이 갑자기 짐을 챙겨서 떠나야 한다고 했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주고, 그냥 가야 된다고 그래서…… 화가 났어요. 저는 집에서 떠나기 싫은데, 친구들도 그 동네에 있고 아직 게임 순위도 못 올려 놨는데…… 가야 된다고 화내니까.”

예성은 눈물샘이 고장 나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연신 닦아 냈다.

“오늘 이 안에만 있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화나서 형한테 대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밖에 나왔는데…… 형이랑 만났어요. 우윽, 형 화 많이 났는데 제가 큰 소리를 내서…… 군인, 군인들이.”

예성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밤늦게 돌아다니는 게 수상하다고 형을 잡아가려고 했어요. 도망치려고 했는데 제, 제가 너무 느리게 달려서…… 형이.”

울음과 함께 이어지던 말이 멈췄다. 개는 몸을 웅크린 채 끅끅 숨을 삼키는 예성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툭툭 떨어진 눈물이 노란 장판 위를 적셨다.

개는 시선을 돌려 태성을 보았다. 미동도 없이 가느다란 숨을 내뱉는 태성은, 자신의 동생이 울고 있음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개가 아는 태성이라면 지금쯤 동생을 어르고 달래야 할 텐데.

“…….”

눈을 감은 채 피를 흘리는 태성의 모습이 낯설었다.

태성은 그저 동생을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당해야 했던 걸까? 태성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인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못 해 본 것도 아직 많은데.

그러니 태성은 아무리 혁명단이라는 배후를 두고 있더라도,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개는 어느 순간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성을 공격했다는 군인들은 아직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죽여 달라 애원하게 만드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홱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이곳에 들이닥칠 이들은 하나뿐이다.

혁명단.

개는 새까만 눈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문 너머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이 부서진…….”

“침입…….”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들어왔다. 개중엔 분명 노인의 것도 있었다.

노인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개는 그 사실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뿐이었다.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무기로 쓸 만한 것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개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철컥.

그 순간 문밖에서 총의 슬라이드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위협적인 소음에 목뒤가 뻣뻣하게 당겨 왔다.

개는 새까맣게 벼려진 눈으로 문 너머를 가늠했다. 몇 명이 있는 거지. 여섯? 일곱?

쾅!

불시에 문이 거친 소음과 함께 열렸다.

여덟.

개는 썰물처럼 밀려들어 오는 행렬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덟 명 모두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신원을 알아 가는 건 무리겠군.

개는 태성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은 여전히 피에 젖어 있었다. 심장이 울렁였다.

“……?”

“……!”

개는 양손을 들어 올려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들이 제각각의 감정으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당혹감과 놀라움, 대개는 그랬다.

“그쪽……?”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선두에 선 여자였다. 검은색 일색인 옷을 차려입은 여자는 당혹스러운 듯 눈을 끔뻑였다. 개의 머리를 향해 조준되어 있던 총구가 아래로 내려갔다.

“저 새끼!”

그러나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비명 같은 소음이 귀를 때렸다. 개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면으로는 체형을 숨길 수 없다. 남자의 몸체는 꽤나 익숙한 느낌을 풍겼다. 무엇보다 저 남자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저 새끼가 우리 뒤를 쫓던 황제의 개새끼라고! ‘잎사귀’를 납치했을 그 새끼!”

개는 이를 아득 물었다. 캡 모자를 쓰고 시장 골목을 누비던 남자. 개와 남자가 서로를 알아본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 개새끼!”

남자는 이성을 잃은 듯 총을 내던지고 개에게 달려들었다.

멍청한 선택이었다. 총을 버리다니.

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허점투성이의 남자를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쏘아보았다. 만약 누군가 총을 쏜다면 이자를 방패 삼아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개는 그가 지척까지 왔을 때 옆구리로 파고들어 목을 움켜쥐려 했다.

“하, 하지 마세요!”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어린아이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예성에게 쏠렸다.

“……아저씨한테 화, 화내지 마세요. 아, 아저씨는 잘못 없어요.”

예성은 겁에 질린 듯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제 형의 손을 꽉 붙잡은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와락 쏟아져 내렸다.

“형이, 형이 아파서……. 그래서 아, 아저씨가 형을 옮겨 준 것뿐이에요.”

“무슨 소리를…….”

누군가 황망히 중얼거린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쓰러져 있는 태성은 죽은 사람 같았다. 혈색 없는 입술이 차가워 보였다.

가면 너머의 얼굴들이 아연히 흐려졌다. 캡 모자를 쓰고 시장을 누비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라진 잎사귀의 자리를 메운 어린 남자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가고 있었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의 얼굴 위로 잎사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 애도 저렇게 됐을까? 죽었을까? 그 애는…….

“……!”

그 순간 남자는 인력처럼 자신의 몸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느꼈다. 우악스러운 팔이 남자의 목을 감아 조이더니 철컥, 차가운 총신이 턱 아래에 닿았다.

“살려.”

개는 차가운 눈으로 사위를 살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니까.”

남자를 잡아끄는 순간, 개는 남자의 몸에 매어진 작은 총을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예비용 총. 개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훔쳐 턱을 겨냥했다.

주변이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시선들이 긴장으로 딱딱했다.

“……네가 그런 건가?”

개는 목소리가 들린 곳에 시선을 두었다. 선두에 선 여자가 강렬한 눈빛으로 개를 쏘아보고 있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여자의 눈이 낯익었다. 저자는 분명 어디선가 마주친 자다.

그러나 여자의 정체를 파악할 시간 따윈 없었다. 개는 말없이 남자의 턱에 댄 총구를 더욱 바싹 들이밀었다. 방아쇠가 살짝 당겨지자 사람들이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저, 저……!”

“치료하세요.”

당황한 사람들 가운데 여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잠시 개의 눈치를 살피더니, 쓰러진 태성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런…….”

왜소한 체구인 줄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자는 노인이었다.

그는 당황한 듯 태성의 몸을 살피더니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빨리 옮겨야 하네. 더 늦으면 이 애는 죽을 거야.”

“……!”

개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방 안을 채우던 예성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개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밑이 꺼지고 목이 졸리는 기분. 총구를 움켜쥔 손이 잘게 떨렸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개를 경계하던 혁명단원 중 한 명이 다급히 나섰다. 그는 노인의 지시에 따라 태성을 들더니 곧장 방을 나서려 했다.

개는 바짝 타들어 가는 신경이 태성을 향해 집중된 것을 느꼈다. 힘없이 떨어진 태성의 팔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울음을 터트린 예성이 남자와 노인을 따라 방 밖으로 사라졌다. 개는 초조함이 절정에 다다른 것을 느꼈다.

탕!

“윽……!”

그 순간 귀가 터질 것 같은 총성이 방 안을 울렸다.

개는 어깨를 붙잡고 휘청였다. 총알이 어깨에 박혔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큿!”

턱에 닿아 있던 총구가 흔들리자 품 안에 있던 남자도 순식간에 개를 밀치고 달아났다. 개는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달아난 남자가 총을 주우려 하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개는 이를 악물었다.

탕!

“읏, 미친!”

남자의 머리를 향해 쏘려 했지만, 휘청거리는 몸 때문에 총알이 팔을 스쳤다. 피가 터져 나오는 팔을 움켜쥐고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개를 노려보았다.

“흐윽…….”

그러나 남자를 상대할 시간은 없었다. 개는 자신의 양 어깨가 꿰뚫렸음을 깨달았다. 고통에 숨이 거칠어졌다. 개는 새까만 눈을 들어 정면을 보았다.

“…….”

여자의 총에는 소음기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냉담한 시선으로 개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개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개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총을 쥔 손에는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는 방아쇠조차 당길 수 없었다. 개는 다가오는 여자의 뒤편을 보았다.

문.

지금 도망칠 수 있는 출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달칵.

개의 손에서 작은 총신이 떨어져 내렸다. 흉악한 짐승의 손에서 모든 무기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저자는 끝이었다.

“……잡아!”

아니, 끝인 줄 알았다.

모두가 방심한 순간 개는 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개는 어두운 길을 빠르게 뛰어나갔다. 이미 한번 지나온 길이었기에 출구를 찾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문이 뜯어진 입구에서 들려오는 바람 부는 소리가 나침반처럼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다. 개는 망설이지 않고 달렸다.

“놓치지 마!”

터널 안처럼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개는 눈앞을 아찔하게 찔러 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태성은 살 수 있을까? 피가 많이 났는데, 문제가 생기더라도 역시 의사에게 데려가야 했던 걸까. 그 애가 살 수 있는지만이라도 확인받고 싶은데.

쉴 틈 없이 달려 나가던 개의 발이 조금 느려졌다. 후회가 자꾸 발목을 붙잡았다.

휘이잉. 좁고 긴 복도 안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흐릿해진 시야로 문을 보았다. 새하얀 달빛을 받은 바깥의 풍경이 환했다.

“큭!”

그 순간 누군가 개의 등 뒤를 덮쳤다. 개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몇 번이나 뒹굴었을까.

철컥.

싸움에서 진 쪽은 개였다. 양 어깨에 부상을 입은 채로, 완벽하게 훈련된 여자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저 애를 데려다준 건 고맙다.”

여자는 개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하지만 이젠 작별 인사를 할 차례야.”

“…….”

개의 입에서 식식, 거친 숨이 토해졌다.

달빛에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낯익은 눈동자.

개는 그제야 여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겠군. 개는 우스운 감상에 입술을 끌어 올렸다.

여자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개는 눈동자를 굴려 새하얀 바깥을 바라보았다.

구구―

그 순간, 어디선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방아쇠를 당기던 여자의 손가락이 우뚝 멈춰 섰다. 여자는 놀란 얼굴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회색 깃을 가진 새가 허공을 빙빙 맴돌더니 누군가의 어깨에 발톱을 박고 앉았다.

“그 총 거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문 앞에 선 남자의 발치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흰 제복을 입은 그는 그림처럼 웃으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 <개와 늑대의 시간> 2권 끝 ―

개와 늑대의 시간 2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