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머리칼 끝에서 떨어진 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뼈가 도드라진 등허리와 파인 흉터 위를 훑은 뒤, 마침내 침대 위를 적셨다.
수건을 올려놓기만 한 채 닦지 않은 머리에서는 투명한 물방울이 연신 떨어져 내렸다.
“…….”
개는 두 손을 모으고 그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검은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개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흐헉, 흐……. 무기는 큭, 그쪽에서 사람을 보내오면 거, 거래를 하는 겁니다. 저희는 그, 그쪽이 무슨 단체인지도 몰랐……. 크학!’
‘위치는?’
오늘 낮, 무기상은 손가락 여섯 개가 부러지고 나서야 정보를 토해 냈다.
개는 무기상의 손가락을 짓밟은 채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개의 무게에 짓눌린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그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애원했다.
‘저, 정말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몇 번 위치나 정보를 알아내려 했었지만, 흐윽……. 워낙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단체여서 저희도 아는 게 없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
개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이전의 사람들이 불구가 될 때까지 함구한 데 비해, 이자는 생각보다 빨리 입을 놀린다 싶었다.
개는 엄지가 뒤틀린 무기상의 오른손 위에 손을 올렸다. 고통은 언제나 사람들의 입을 가볍게 만들었다. 흉터가 가득한 손이 멀쩡한 손가락을 틀어쥐자, 무기상의 몸이 발작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허억, 도, 돈을 많이 줘서! 무, 무기를 제값보다 배는 비싸게 주고 샀습니다. 그, 그래서 의심스럽지만 팔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제, 제발 그만…….’
‘…….’
개는 오싹한 빛을 띠는 검은 눈으로 무기상을 바라보았다. 와들와들 떨리는 입술과 고통으로 충혈된 눈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에 했던 거래에 대해 말해.’
개는 잡고 있던 무기상의 손가락을 놓았다. 무기상은 개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운 것처럼 빠르게 말을 토해 냈다.
‘이, 일주일 전쯤 대량으로 무기를 주문해 갔습니다. 언제나처럼 크, 큰돈을 내기에 이유는 묻지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많은 무기는 저희 쪽에서도 무, 물량이 부족해서 약간의 텀을 가지고 납품했습니다. 그, 그런데 어제 마침 납품이 끝나서…….’
납품이 끝났으니, 무기 거래를 미끼로 혁명단과 접촉하는 것은 힘들다는 말이었다.
개는 두려움에 질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무기상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무기를 이용하는 시기는?’
무기상의 눈꺼풀이 경련하듯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빈 공간 안을 울렸다.
‘저, 저희도 그거까진 잘 모릅니다. 제발, 제발…….’
무기상은 자비를 바라는 신자처럼 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개는 자애로운 신이 아니었고, 그는 오히려 인간의 숨통을 찢어 놓는 악마에 가까웠다.
“…….”
침대에 앉아 있던 개는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머리끝에 맺혔던 물이 투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창문 앞에 선 개는 유난히 초조한 눈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노을빛을 받고 있는 황궁의 모습이 개의 까만 눈에 비쳤다.
혁명단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량의 무기를 구입했다면, 전처럼 황궁을 테러하려는 속셈인 걸까?
아니. 황궁을 테러한 것은 테러 조직의 위신을 보여 주기 위한 상징적 사건에 불과했다. 황궁을 두 번이나 습격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클뿐더러 첫 번째 사건만큼의 충격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한 이유가 무엇일까. 거리를 돌아다니는 군부를 몰아내기 위해서?
만약 군부를 몰살한다면 힘을 잃은 황제는 자연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가능성이 없었다.
직접적인 충돌은 소모전으로 이어져 궤멸을 도출하기 십상이다. 또한 하나의 군대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규모의 군대가 필요했다.
개는 혁명단이 그 수준의 무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그만큼의 병력을 가졌다면 지난번에도, 황궁을 테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대체 왜.
일그러진 얼굴이 투명한 유리창에 비쳤다. 개는 손을 뻗어 황궁 위에 손을 대려 했다. 그러나 개의 손끝이 유리창에 닿기 전―
“……!”
문밖에서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개는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휘둥그렇게 뜨인 눈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
개는 답지 않게 멍청한 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사고가 정지된 감각이었다.
그저 ‘공작과 이대로 마주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개는 황급히 방을 서성거리며 숨을 장소를 찾아보았다.
“…….”
그러나 공작의 방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아마 암살자가 침입했을 경우를 대비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방을 설계한 설계자에게 원망이 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이대로 마주치면 손이 떨릴지도 모른다. 갑자기 배 속이 당겨 올지도 모른다. 감전된 것처럼 찌릿한 감각에 몸서리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성기가 서면?
그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
발걸음 소리는 망설임 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개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테이블 밑, 커튼 뒤, 천장. 모두 여의치 않았다.
저벅. 걸음 소리는 이제 코앞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개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개는 망설이지 않고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머리가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개는 숨을 죽인 채 감각을 예민하게 세웠다.
오늘 아침, 공작은 잠든 개를 굳이 건들지 않고 나갔다. 그러니 지금도 잠든 척한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저벅.
개는 문 앞에 멈춰 선 공작의 걸음 소리를 들었다. 작게 부스럭거리던 개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
그러나 방문을 열고 들어올 줄 알았던 공작의 걸음이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개는 방을 스쳐 지나가는 기척을 느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지?
개는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베개가 물로 흥건히 젖어 버렸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개는 공작이 없는 방 안에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밤새 멀뚱히 문을 바라보아도 공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새벽이 지나 아침이 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휘이―
창밖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희부옇게 동이 트는 방 안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
개는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아침을 맞았다. 오늘은 태성도, 공작도 없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아침이라 해서 넋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개는 이른 아침부터 저택을 빠져나와 한적한 도로로 스며들었다.
어제 무기상은 ‘대량으로 무기를 구매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무기를 대량 구매 했다면 분명 장부가 남아 있을 것이다. 장부를 뒤지다 보면 뭔가 나오는 게 있겠지.
개는 녹슨 철제문을 밀어 열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내부가 드러났다. 건물 안은 고요했다. 개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
눈치챘군.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던 건물은 가구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전력의 절반 이상이 죽었을 무기상의 무리가 이 장소를 치웠을 리 없다. 범인은 분명 혁명단이겠지.
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미 그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뒤져 봤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었다.
개는 싸늘한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한시가 급했다. 무기를 넉넉히 구비한 그들이 과연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뒤를 쫓아야만 했다.
“……아직 회복이 덜 되긴 했지만.”
개는 웅얼거리며 힐끗 산을 쳐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저 산의 중턱에는 예전에 개를 납치했던 자들이 이용하던 폐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주인이 없어진 그곳을, 개는 유용한 창고로 이용하고 있었다.
개는 그곳에 묶여 있을 피투성이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자는 추후 조금 더 먹음직스러운 미끼로 쓰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다면 마냥 묵혀만 둘 수는 없다. 숨통만을 간신히 붙여 놓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단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 했다.
개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골목골목을 헤집고 들어가는 걸음이 익숙했다.
“애옹.”
오물이 쏟아져 있는 골목 어귀에서 길고양이가 후다닥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개는 잠시 그곳에 시선을 뒀다가 곧장 깊숙한 골목으로 발을 들였다.
“……알아요.”
그러나 개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멈추었다.
평소라면 사람의 인기척 하나 없어야 할 깊은 골목 안.
“잎사귀 형이 실종되고 난 뒤 제가 급하게 들어와서 걱정되는 거.”
“……?”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이건 분명 태성의 목소리였다.
오늘부터 휴가를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실수 안 해요. 저 그렇게 바보 아니에요.”
“네가 바보라는 게 아니다.”
태성은 혼자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태성의 말꼬리를 잡았다.
개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더 이상 저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
“아니요. 제가 못 미더우신 거잖아요.”
개는 기척 없이 뒤로 물러섰다. 이런 일에서 개의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저도 혁명단의 일원이에요. 제 위치는 저도 잘 알아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개의 입술 근처에서 하얀 입김이 흐트러졌다.
바람이 차가웠다. 어깨 위에 걸친 코트 자락이 뒤흔들렸다.
개는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담벼락 너머에 가려진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파악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소리뿐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하지만 나머지 얘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는 편이 좋겠구나.”
“……알겠어요.”
한풀 꺾인 듯한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개는 멀어지는 기척을 느끼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
머리가 생각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어떤 판단도 내려지지 않았고, 다리는 굳은 것처럼 움직여 주질 않았다.
개는 간신히 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개는 그제야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혁명단?”
입 안을 감도는 단어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개는 태성과 이름 모를 남자의 기척이 완전히 떠나간 후에야 지탱하듯 벽을 짚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성과, 혁명단?
“…….”
개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이 식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질리고, 뺨과 콧잔등이 새빨갛게 얼었다. 귓바퀴도 꽝꽝 얼어, 건들면 그대로 깨질 것 같았다.
지익.
겨우 걸음을 뗐지만 발이 바닥에 끌렸다. 개는 당황했다. 기척을 내지 않고 걷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어릴 때 말고는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는데.
“…….”
걸음이 빨라졌다. 아니. 개는 어느 순간 뛰고 있었다. 귀소 본능을 가진 동물처럼, 위협을 느낀 개는 본능적으로 저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택에 빨리 돌아가서…… 그러고서…….
✵
“헉, 흐…….”
숨이 거칠었다.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조차 없이 뛰어온 개는 창문턱에 서서 눈을 굴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공작의 방 안은 고요했다.
이곳엔 태성도, 공작도 없었다.
끼익.
창문을 밀어 열자 추위에 언 경첩이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개는 창문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방 안에는 훈기가 돌았지만 그뿐이었다. 개는 텅 빈 방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구룩, 구르륵!’
‘가만히 좀 있어……!’
공작의 비밀 조직에 가입하고 싶어 전령 새를 잡으려던 어린아이는 이곳에 없었다.
‘제 이름은 태성이에요. 주태성.’
경계심 없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던 아이도 없었으며.
‘아무튼 밖에 나가실 거죠?’
‘응.’
‘그럼 이거 입으세요. 오늘 엄청 추워요. 얇은 옷 하나만 입고 나갔다가는 감기 걸리실 거예요.’
코트를 불쑥 내밀며 ‘황제의 개’를 걱정하던 순수한 얼굴도 없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개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대체 이 고통은 어디서 오는 걸까.
“왜.”
개는 허공에 물음을 던졌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느리게 달싹였다.
“정말…….”
태성은 혁명단의 일원이었던 걸까. 언제부터?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의 태성은 분명 무력도 없는 순수한…….
“…….”
개는 눈을 내리깔았다.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개는 태성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심 얕은 물처럼 속이 훤히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태성이 혁명단을 알고 있었단 것도, 나아가 그 단체의 일원이었단 것도.
개는 눈살을 일그러트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가슴이 조여드는 통증이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개는 무너지려는 몸을 창문에 기대 겨우 일으켜 세웠다.
“…….”
어쩌면 마음 한편으로는 태성을 ‘내 편’이라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인이 아니라,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인간.
내 편.
그랬구나.
개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주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열린 창문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개의 가느다란 머리칼이 마구 헝클어졌다.
개는 가만히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 머쓱한 듯 ‘형, 늦었죠.’라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지금이라도 모른 척할 수 있을 텐데. 골목에서 본 것은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뇔 텐데.
그러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공작은 오늘도 방을 지나쳐 걸었고, 개는 혼자였다.
융단 위에 주저앉아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은 개의 눈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개는 벽에 머리를 툭 기댔다.
✵
밤은 영원하지 않다. 달도 별도 없는 어두운 하늘이라도, 언젠가는 해가 밝아 오기 마련이다.
개는 회백색의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비가 올 것 같았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숨을 내뱉었다. 아침이 밝았지만 밖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혁명단을 쫓는 일의 필요성이 사라졌으니까.
태성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그가 일주일 뒤면 이곳으로 돌아올 것도 안다. 그런데 굳이 힘들게 혁명단의 뒤를 쫓아야 할까? 태성을 고문하면 혁명단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일 텐데.
“…….”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개는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흉터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던 개는 칼자루를 쥐듯 허공을 그러쥐었다.
고문을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얇은 바늘로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방법부터 잠을 재우지 않거나, 물로 고문을 하는 방법도 있었다.
개는 고문 방법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고집 있는 암살자들과 달리,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에 가까웠다.
개는 둥글게 말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태성의 피부 위에 예리한 칼날을 대고서 저미면, 태성은 울고 말 것이다. 고통에 면역이 없는 일반인들은 칼에 긁히는 상처에도 놀라고 마니까.
그러나 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태성이 혁명단이라면 해내야 했다. 감히 황궁에 위협을 가하는 극악무도한 테러 단체를 이 세상에 남겨 둘 수 없었다.
“…….”
개의 손끝이 움칠 떨렸다. 개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둥글게 말고 있는 손이 마치 천 근짜리 추를 든 것처럼 무거웠다.
개는 눈을 내려 감으며 손을 떨어트렸다. 머리가 아팠다. 어제 본 장면이 잊히질 않았다. ‘혁명단’이라 말하던 태성의 목소리가 지금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했다.
어두운 골목 안, 담벼락에 가려진 두 사람의 기척과 태성의 목소리.
개는 감았던 눈을 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발화자의 모습은 담벼락에 감춰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어제 마주친 그자가 태성이라 확신할 수 없다. 목소리는 비록 태성과 비슷했지만, 목소리 비슷한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래. 태성은 그저 일주일간 휴가를 갔을 뿐이다.
“…….”
하지만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변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개는 눈을 감았다. 그자가 태성이 아니라는 증거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왜.”
개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태성은 혁명단에 들어간 것일까. 언제, 왜, 무엇이, 태성을 그 단체로 이끈 것일까.
개는 미궁에 갇힌 황소처럼, 영영 풀지 못할 난제 속에 갇힌 기분을 느꼈다.
✵
“……씨이, 다들 너무해.”
예성은 오락실 의자에 앉아 게임기를 두들겼다. 화면 속 예성의 캐릭터는 정해진 패턴으로 움직이는 경쟁자와 싸우고 있었다.
“그냥 게임기랑 싸우면 재미없는데.”
투덜대는 예성의 말마따나, 상대방은 예성의 캐릭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마지막 판의 보스 격 캐릭터라기엔 맥없는 최후였다.
―크헉!
예성의 캐릭터가 날린 발차기에 날아간 적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캐릭터의 체력 게이지는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에휴…….”
예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신기록을 달성했다는 알림과 함께 명단이 떠올랐다. 예성은 리스트에 주르륵 뜬 자신의 이니셜을 불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형 이름으로 해 줄까.”
예성은 조이스틱을 툭툭 움직여 태성의 이니셜을 박아 넣었다. 어차피 또 기록을 경신하면 자신의 이름이 형의 위에 올라갈 것이다.
별다른 감흥도 없이 태성의 이름을 1위에 올려놓은 예성은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형은 ‘황제 탄신일’부터 자신의 안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또다시 납치 사건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날의 일은 예성의 머릿속에도 흉터처럼 선명히 남았다. 그 이후로 덩치가 커다란 어른이 자신의 뒤를 지나가기만 해도 흠칫 몸을 떨며 도주로를 찾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태성은 경각심을 갖는 것 이상으로 날카롭게 굴었다. 하교 후에 하는 게임 한 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놀 친구가 없는데 게임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예성은 울며 떼쓰는 것으로 간신히 게임을 사수했다.
예성은 숨을 헐떡였다. 집으로 가는 언덕은 너무 높아서 매번 숨이 찼다.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예성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붉게 물든 예성의 뺨이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어?”
마침내 집 앞에 다다른 예성은 생각지 못한 풍경에 놀랐다. 예성의 순진한 눈망울이 두어 번 깜빡거렸다.
“아저씨?”
집 앞에는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고동색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코트조차 없이 얇은 옷자락만 걸친 개는 가만히 예성을 내려다보았다. 빛 한 줌 닿지 않은 검은 눈이 오싹한 빛을 띠었다.
✵
창가를 넘어온 햇빛이 침대 위를 비췄다. 고요한 얼굴로 잠들어 있던 남자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햇빛을 받은 눈동자가 투명한 빛을 띠었다. 가늘게 뜨인 눈 위로 긴 속눈썹이 나붓거렸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팔을 들어 올린 것은 그때였다. 팔로 눈꺼풀 위를 가린 차현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멀쩡한 방을 놔두고 이 방을 쓰게 된 것도 벌써 3일째였다. 차현이 공작이 아니었으며, 공작위와는 거리가 멀었을 적에 쓰던 방. 그저 허울 좋은 귀족 도련님의 방은 좁고 검소했다.
“젠장.”
차현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침대에서 일어선 그는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검은색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빠져나갔다.
공작이 된 이후 차현은 이 방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이곳에 다시는 발을 들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수치와 패배의 장소였다.
그러나 개와 거리를 두어야겠다 생각한 밤, 집사는 난색을 표하며 쓸 수 있는 방이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손님방은 공작인 차현이 쓰기에는 시설이 좋지 않았고, 다른 방들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나마 관리되어 왔던 방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여전히 좁고 단출했다. 책상과 의자, 책을 몇 개 꽂을 수도 없는 작은 책장 하나, 침대, 너른 창문.
방 안을 단숨에 둘러본 차현은 구겨진 미간을 엄지로 눌렀다. 그는 곧장 제복을 걸치고 나가기 위해 걸음을 뗐다.
딱딱.
문득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차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 새가 고개를 갸웃하며 창문을 부리로 두들겼다. 딱딱. 부리에 부딪힌 창문이 가볍게 흔들렸다. 문을 열라는 뜻이었다.
“구루룩.”
창문을 열자 새는 두 발로 창틀을 뛰어넘었다. 차현은 날개를 푸르르 터는 새의 앞에 딱딱한 빵 쪼가리 몇 개를 떨어트렸다. 새는 딱딱한 빵에도 반색하며 부리를 쪼아 대기 시작했다.
차현은 먹이를 먹는 새의 발목을 보았다. 검은색 끈으로 편지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끈을 풀어 편지를 손에 쥐었다.
“…….”
편지는 간결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차현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침대 맡에 놓인 서랍장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빠르게 적어 내렸음에도 단정한 필체였다.
안기부장, 금요일, 개인 소유의 별장.
차현은 새의 다리에 매듭을 묶었다. 먹이를 다 쪼아 먹은 새는 아쉬운 듯 창가를 종종 뛰어다녔으나, 차현은 새를 창밖으로 내밀었다. 배가 부른 새는 말을 듣지 않는다.
새는 허공을 둥글게 활공하더니 곧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현은 새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팔 위를 내려다보았다.
“…….”
아물기 시작한 상처 위에 반달 모양의 딱지가 져 있었다. 차현은 개가 헐떡이며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던 것을 떠올렸다.
어차피 일순간의 욕구에 불과할 텐데. 그는 작게 혀를 찼다.
✵
“…….”
“…….”
개는 낡은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한기와 함께 주변을 맴돌았다.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개의 살갗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받고 있는 건 피투성이의 남자였다.
“……켈룩.”
“…….”
개는 힐끗 시선을 내렸다. 정신을 잃었던 남자가 피가래 끓는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개는 남자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남자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개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헉.”
개와 눈을 마주친 순간 잎사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입술은 파르르 떨렸고, 그가 묶여 있는 의자는 반동에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명백히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고문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다. 더 이상의 정보는 필요하지 않았다.
“……더러운 황제의 앞잡이.”
“…….”
잎사귀 또한 개가 자신을 고문하지 않을 것을 깨달은 듯했다. 공포에 질려 있던 눈동자에 경멸과 분노의 감정이 떠올랐다.
잎사귀는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황제 발가락 핥는 게 그렇게 좋은가 보지?”
개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잎사귀는 어둠에 잠긴 개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저 눈은 인간의 것 같지 않았다. 즐거움도 고통도 없는 무감정한 눈동자.
저게 사람이라고? 저건 황제가 만든 괴물이다.
잎사귀는 이를 까득 물었다.
“그런다고 황제가 네 공을 얼씨구나 치하해 줄 것 같아?”
“…….”
잎사귀는 바락 목소리를 높였다. 피가래가 들끓었지만 그런 것 따위가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만약 줄에 묶여 있지만 않았더라면 저자의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아니, 저 새까만 눈동자에 무슨 감정이라도 떠오르도록 마구 패 버렸을 것이다.
“황제는 그딴 친절한 인간이 아니야. 일이 끝나면 네 목부터 치려고 할걸.”
개의 몸이 움칠 떨린 것은 그때였다.
개는 비아냥거리듯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린 잎사귀를 보았다. 잎사귀는 고개를 치켜들고 개를 내려다보았다.
“아닌 것 같아?”
“…….”
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개의 까만 눈 또한 한 번의 일렁임 없이 담담했다.
잎사귀는 이를 악물더니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 황제랑 자기라도 했나? 그래서 그렇게 믿는 거야?”
“…….”
마찬가지로 개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잎사귀를 바라보기만 했다. 비웃음 가득하던 잎사귀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씨발, 그냥 죽여!”
“…….”
덜컹, 덜컹! 잎사귀가 몸부림쳤다. 그를 결박한 의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개는 악을 지르는 잎사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코 속으로 파고드는 숨이 차가웠다. 폐부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넌 혁명단이지.”
덜컹덜컹 흔들리던 의자가 뚝 멈춰 섰다. 잎사귀의 맹렬한 시선이 어둠에 파묻힌 개를 향했다.
“‘잎사귀’라고 불리고.”
개는 지문을 읽는 해설자처럼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한 황궁에 폭탄을 설치했어.”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스무고개?”
개는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혁명단이고, 태성처럼 나이가 어리며, 또한 입이 무거운 자.
미동 없이 앉아 있던 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끼익. 낡은 철제 의자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흣…….”
잎사귀는 가까워지는 개의 모습에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공포에 잠식된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왜 혁명단에 들어간 거지?”
“……뭐?”
개는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등졌다. 잎사귀는 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검게 칠해진 그림처럼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왜 혁명단에 들어간 거냐고 물었어.”
개는 고요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잎사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
개는 물끄러미 잎사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순식간에―
쿠당탕!
“큭!”
“말해.”
거센 발길질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개는 넘어진 잎사귀의 위에 올라타 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잎사귀는 당황한 얼굴로 개를 올려다보았다.
“혁명단에 들어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리고 잎사귀는 보았다.
“말해.”
개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왜 들어갔어.”
잎사귀를 고문할 때도, 뺨에 튄 피를 닦을 때도 한 치의 일그러짐이 없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잎사귀는 냉정한 머리와 다르게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크흑…….”
“…….”
잎사귀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개는 바들바들 떠는 잎사귀의 위에서 물러섰다.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에게 날을 세운 잎사귀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먹어.”
잎사귀는 자신의 무릎 위에 떨어진 한 뼘 크기의 빵을 보았다. 개는 어느새 어둠 깊이 묻혀 있었다.
“넌 아직 죽으면 안 돼.”
“…….”
잎사귀는 사나운 눈으로 개를 노려보았다. 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먹지 않으면 저번처럼 강제로 먹일 거야.”
잎사귀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먹어.”
“개새끼.”
개는 욕을 짓씹는 잎사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개새끼. 틀린 말도 아니었다.
✵
달이 높이 뜬 밤이었다. 태성은 하얀 입김을 ‘하아’ 내뿜으며 서둘러 언덕을 올랐다. 예성을 집에 혼자 둔 채 너무 오래 밖에 있었다.
집 근처에 오자 불빛이 켜진 창문이 보였다. 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큼 문 앞으로 걸어갔다.
“이 자식 또 안 자고 있나 보네.”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방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던 예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성은 현관으로 달려오는 예성을 와락 껴안았다.
“형!”
“주예성, 너 왜 지금까지 안 잤어?”
그러나 감동적인 형제의 재회는 잠시였다. 태성의 엄한 목소리에 예성이 도르륵 눈을 피했다.
“으응. 뭐…….”
“늦게까지 안 자면 키 안 큰다니까.”
태성은 예성의 머리를 꾹꾹 누르듯 헝클어트렸다. 그러자 예성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왁 소리를 질렀다.
“아, 아파!”
“그럼 아프라고 하지 간지러우라고 했겠냐?”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예성이 눈을 치켜떴다. ‘씨이’ 하고 내뱉는 볼멘소리가 귀여웠다. 태성은 비식 웃으며 예성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볍게 정리했다.
“오늘 뭐 했어? 이상한 사람은 안 왔고?”
태성은 무릎을 굽혀 예성과 눈을 맞췄다.
예성의 안전에 있어서는 한시라도 의심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그때, 예성을 잃을 뻔했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자신의 무능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상한 사람은 안 왔고 아저씨가 왔는데.”
“아저씨?”
태성은 눈을 깜빡였다. 예성이 ‘아저씨’라 부를 만한 사람이 있었나?
“응. 그때 우리 집에 찾아온 깡패 한 번에 무찔렀던 아저씨 있잖아.”
“……형? 형이 왔다고?”
예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한테 말 전해 달라고 했어.”
✵
쿠르릉.
천둥처럼 요란한 소리가 녹슨 철문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어둠에 잠겨 있던 창고 안으로 빛이 끼쳐 들어왔다.
의자에 묶인 채 늘어져 있던 잎사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남자는 저벅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잎사귀가 아는 한, 이런 실력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하하…….”
잎사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기운이 없는 몸에선 그것마저도 부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폐가 쥐어짜지는 감각과 함께 메마른 기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켁, 켈룩. 크흑…….”
간신히 기침을 멈췄을 땐, 남자가 어느새 잎사귀의 앞에 서 있었다. 남자의 발끝에서 시작되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잎사귀의 머리 위를 덮었다.
잎사귀는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제 따까리 오셨네.”
“…….”
개는 잎사귀의 얼굴을 훑었다. 핏물이 갈색으로 말라붙은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홀쭉했다. 혹독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탓에,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또 뭘 물어보려고 오셨나. 혁명단에서 황제 욕을 뭐라고 하고 있는지 흣, 궁금하면 소상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
그러나 상태가 나빠졌을 뿐 죽지는 않았다.
개는 비아냥거리는 잎사귀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자의 건강이 어떻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오늘도 목숨이 붙어 있으면 되었다. 이자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한 것이다.
개는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 메마른 겨울 숲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네모나게 조각난 햇빛에 눈이 시렸다. 그러나 새까만 눈은 빛을 담지 않았다.
태성은 반드시 이곳에 올 것이다. 올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져 뒀으니까.
“……이제 혁명단에 왜 들어갔는지는 안 물어볼 모양이지?”
개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잎사귀는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개를 가늠하는 것처럼, 혹은 이래도 묻지 않을 것이냐는 듯.
개는 입술을 달싹였다.
“…….”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지금에 와서 물어본다 하여 달라질 것은 없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개는 무감정한 눈동자로 잎사귀를 직시했다.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일주일.”
태성이 휴가를 다녀온다고 말한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그때의 개는 태성을 일주일이나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울적해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예성의 운동회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고서야 쉰 적 없는 태성이 일주일이나 휴가를 낸다니.
게다가 혁명단이 대량으로 구입한 무기를 받았다는 날도 태성이 휴가를 낸 시기와 일치했다.
태성이 휴가를 나간 일주일 사이에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그건 타당하고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아니. 4일 안에 무슨 사건을 벌일 거야. 너희는.”
잎사귀의 눈가가 가볍게 떨렸다. ‘너희’가 ‘혁명단’을 가리키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의 반응은 솔직했다. 만약 앞에 앉아 있는 것이 훈련받은 군인이었다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텐데. 좋은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 이들은 오합지졸과 다름없었다.
“……하, 무슨 얘길 하나 했더니.”
잎사귀는 잔뜩 갈라져 형편없는 목소리를 짓씹듯 내뱉었다.
“헛소리할 거면 그냥 죽여.”
“…….”
개는 턱이 불룩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문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이자는 매번 ‘죽음’을 입에 담았다. 왜일까. 죽으나 사나 달라질 건 없을 텐데.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야.”
“뭐?”
개는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몇 분간 노려본 것도 힘에 부치는 듯, 헐떡거리는 잎사귀에게서 시선을 뗐을 뿐이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개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처럼 반짝이는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겨울 숲이 차가운 바람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파삭.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움찔 몸을 떨었다.
작게 숨을 헐떡이는 소리와 무어라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 그건 분명 태성의 것이었다.
“…….”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개 자신이었다.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닥치자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뒤죽박죽 어지럽게 뛰기 시작했다.
“형……?”
“……!”
태성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흠칫 몸을 떠는 기척이 느껴졌다.
개는 급히 몸을 돌려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잎사귀의 눈은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뜨여 있었다.
“너 어떻게……!”
“입 다물어.”
개는 소리를 지르려는 잎사귀의 입과 코를 강하게 짓눌렀다. 손으로 채 가려지지 못한 잎사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진 게 보였다.
덜컹!
철제 의자가 크게 튀어 올랐다.
“…….”
그리고 일순 잎사귀의 동공이 풀린다 싶더니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개는 황급히 손을 떼어 냈다. 실수였다. 잎사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채 힘 조절에 실패했다.
개는 침착하게 잎사귀의 턱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느리지만 맥이 뛰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손이 스륵 허벅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검은 눈이 기절한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뭘 하려고 했던 건지 목적조차 모호해진 기분이었다.
“형……?”
개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문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텅 빈 창고 안을 울렸다.
“예성이랑 만나셨다고 해서, 그런데 제가 비밀을 놓고 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
며칠 만에 마주친 태성의 얼굴은 여전히 무구해 보였다. 개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태성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옆으로 물러섰다.
“어……?”
그 순간 개의 모습에 가려져 있던 인영이 태성의 눈앞에 드러났다. 의자에 단단히 묶인 남자는 핏물로 지저분한 옷을 입고 축 늘어져 있었다.
놀란 듯 커다래진 태성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형. 저 사람, 죽은…….”
“확인해.”
개는 떠듬떠듬 토해지는 태성의 말을 단번에 끊었다. 그러고 뭐라 설명하는 대신, 핏물로 떡이 된 남자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정신을 잃은 잎사귀의 파리한 얼굴이 정면을 향했다. 그 순간 태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는 얼굴일 테니까.”
눈동자의 떨림이 옮겨붙은 것처럼, 태성은 입술과 손끝을 모두 덜덜 떨기 시작했다. 태성의 입술 사이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투둑 떨어져 내렸다.
“어, 으…….”
“주태성.”
태성의 어깨가 파득 떨렸다. 개는 낯선 발음을 혀끝에 굴렸다. 생각해 보면 처음 이름을 불러 본 것이었다.
“언제 혁명단에 들어간 거지?”
그러나 감상은 잠시였다. 잎사귀의 머리칼을 움켜쥔 개가 새까만 눈으로 태성을 직시했다.
당황한 듯 바지 자락을 움켜쥔 태성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저…… 형이, 무슨 말, 하는지…….”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로 떨렸다.
태성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뒷걸음질 쳤다. 지익. 신발 밑창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창고 안을 선연하게 울렸다.
촤악!
그 순간 새파란 빛을 내뿜는 날붙이가 허공을 갈랐다.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피 냄새가 차가운 공기와 뒤섞였다.
태성은 오한이 든 듯 몸을 떨었다. 덜덜 떨리는 게 과연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움직이지 마.”
개의 흉측한 손에서 핏방울이 뭉글뭉글 뭉쳐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개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잎사귀의 뺨에 끈적한 피가 묻어 나왔다.
“거기서 더 움직이면 다음엔 목이야.”
“혀, 형.”
태성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개가 예성을 찾아왔다고 했을 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태성이 알고 있는 개는 필요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밥도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고, 말도 의사 전달이 가능할 정도로만 했다.
그건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 개는 공작 외에는 딱히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태성은 그런 개에게 다가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높은 산을 정복하는 산악인처럼 몇 번이나 밀려나도 몇 번이고 다시 달려들었다.
“언제부터 혁명단의 일원이 된 거지?”
“형. 왜, 왜 그래요.”
그리고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내가 형과 가까워졌구나’라고 깨닫게 된 순간이 있었다. 그때의 태성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마 개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몰라도 상관없었다. 개는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순수한 어둠만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눈동자가 태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유리 조각이 이미 넝마와 다름없는 잎사귀를 벨 것처럼 들려 있었다. 태성은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베고 찌르면서도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저 사람은, 태성이 알던 ‘형’이 맞나?
“하, 하지……. 마, 말할게요!”
“…….”
태성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잎사귀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하던 유리 조각이 일순 멈춰 섰다.
개는 안쓰러울 정도로 파리하게 질린 태성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 얼마 안 됐어요. 황제 탄신일……, 그때…….”
“…….”
태성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이 희뿌연 입김과 함께 흐트러졌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폐부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이 시렸다.
개는 한숨과도 같은 숨을 짧게 내뱉었다. 태성의 입으로 직접, 그가 혁명단이라 확인받았다. 가슴이 답답하게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너희가 무슨 사건을 벌일 건지 말해.”
“형…….”
태성의 목소리는 애원처럼 애처로웠고, 겨울바람에 뒤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연약했다. 개는 이를 악물었다.
“형이라 부르지 마.”
“형, 이러지 읏, 이러지…….”
촤악! 누군가의 살갗이 터지며 피가 바닥으로 튀었다. 개는 싸늘한 눈으로 태성을 직시했다.
“부르지 마.”
“…….”
태성의 입술이 아교를 묻힌 것처럼 딱딱해졌다. 태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혼란에 잠긴 눈동자가 붉은 피를 흘리는 잎사귀의 모습을 담았다.
“너희가 꾸미고 있는 일을 말해.”
“공작이, 시킨 거예요……?”
개는 손을 움찔 떨었다.
원래라면 대답을 피할 때마다 인질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그래야 시간을 끌지 않을 수 있고, 태성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공작은 황제의 흣, 편이니까 그러는 거죠……?”
태성의 눈에 물기가 한가득 어려 있었다. 코끝을 잔뜩 붉힌 채 입술을 파르르 떠는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앳되어 보였다.
“공작은 관련 없어.”
“그럼 왜요? 저, 이해가 안 가서…….”
태성은 코를 훌쩍였다. 추위 때문인지 울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개는 한숨을 내뱉었다. 움켜쥔 유리가 손에서 미끄러질 것 같아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단면이 개의 손바닥 사이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시간 끌지 마.”
개는 유리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을 잎사귀의 동맥 위에 올렸다. 살갗에 붉은 실선이 생기며 피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말해.”
“혀…….”
태성은 무언가를 웅얼대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 잠시간 손을 덜덜 떨더니, 이내 실낱과도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 가 생각하는 거…… 아니죠?”
개는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한숨을 많이 쉬었던 적이 또 있었나.
“아니라고, 해 줘요.”
“…….”
개는 들고 있던 유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챙!
유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눈발처럼 허공을 갈랐다.
무기를 버린 개는 빈손으로 잎사귀의 머리를 잡았다. 태성의 눈이 커다래졌다.
일전에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았기에, 태성은 지금 개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태성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형!”
태성의 외침에 개의 손이 가볍게 헛돌았다. 그러나 이미 고개가 반쯤 돌아간 잎사귀는 힘없이 의자 위로 축 늘어졌다.
일순간 싸늘한 공기에 모든 풍경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아…….”
태성이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은 건 다음 순간이었다. 개는 늘어진 잎사귀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태성을 바라보았다.
“지금 말해.”
태성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겨울 산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다음엔 네 동생을 마주 봐야 할 테니까.”
“…….”
태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는 시체처럼 늘어진 잎사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고는 흥미를 잃은 듯이 시선을 뗐다.
“예성이, 한테 손대지 마요.”
다시 마주 본 태성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개는 그 얼굴을 마주 보다가 느리게 걸음을 뗐다. 태성에게 가까워지는 개의 그림자가 점점 더 길게 늘어졌다.
“나는.”
태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개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두 눈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이 점점 더 굵어졌다.
“나는 매번 후회만 하지만…….”
태성의 목소리는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빳빳하게 굳었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개는 걸음을 멈췄다.
“이번엔 뭔가, 다를 줄 알았잖아.”
태성의 웅얼대는 목소리가 창고 안을 쟁쟁 울렸다.
개는 잠시 숨을 멈췄다. 뭔가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 기분. 그러나 그게 무어라 명명되는 감정인지 개는 알 수 없었다.
“……!”
그 순간 태성이 몸을 돌려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수풀 사이로 뛰어든 태성이 샛길을 따라 달려 나가고 있었다.
파삭, 파삭!
태성의 몸과 부딪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발에 밟힌 조각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개는 뒤늦게 태성의 뒤를 쫓았다. 필사적으로 달려 나가는 태성은 꽤 재빨랐다. 옷 위로 드러난 피부가 채찍 같은 가지에 긁혀 상처가 나도 신경 쓰지 않은 덕이었다.
“큭!”
그러나 태성이 간과한 사실은, 개는 눈앞에 보이는 표적을 단 한 번도 놓쳐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무 사이를 뛰어넘으며 달린 개는 태성의 머리 위를 덮쳤다. 겹쳐진 몸이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개는 넘어져 신음하는 태성의 우위를 점했다. 배 위를 깔고 앉아 팔뚝을 손으로 짓눌렀다. 태성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눈물이 굴러 떨어지는 관자놀이 부근에 긁힌 상처가 남아 있었다.
“놔! 비켜!”
“…….”
태성은 비명처럼 절박한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얼굴로 태성을 내려다보았다.
“형, 흐윽…….”
태성이 울먹이며 내뱉은 목소리에 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당신을 형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한심해.”
그러나 동요는 찰나에 그쳤다.
태성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맞닿아 있는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심해서…… 죽여 버리고 싶어.”
태성은 짓씹듯 내뱉었다. 둑이 터진 듯 솟아오르는 눈물 너머,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띠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을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거야. 아니, 죽어 버리라고 빌 거야. 당신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길 바랄 거야.”
“…….”
저주 같은 말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악의가 서리지 않은 구절이 없었다.
선명한 빛을 띠던 개의 까만 눈이 흐려졌다. 태성의 시선을 피해 허공을 굴렀다. 목이 졸린 것처럼 심장이 졸렸다. 모래를 쥔 것처럼 손가락 사이가 따가웠다.
“그 말만은 하지 말지…….”
태성은 코를 훌쩍였다. 악의에 차 있던 목소리가 숨소리처럼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사람이라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
“…….”
개는 입을 달싹였다. 너무 많은 말이 치밀어 올라 목구멍이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폐가 굳은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성을 억누르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
그 순간 태성은 개를 밀치고 일어섰다. 잠시 휘청거리던 태성은 다시 샛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옷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
엉덩방아를 찧은 개는 멀어지는 태성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을 때까지, 오래 그곳에 앉아 있었다.
✵
해가 지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빛이 온 세상을 덮고, 그림자는 더욱 짙어져 갔다. 어디론가 뛰어가는 아이도, 멈춰 서 있는 어른도, 길거리에 심어진 가로수나 심지어 발을 디디고 선 땅까지도 모두 그림자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개는 창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빛을 받은 울퉁불퉁한 손이 피에 젖은 것처럼 붉었다. 깊게 팬 흉터 안에 그림자가 차올랐다. 까만 눈동자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개는 차가운 유리창 위에 머리를 기댔다.
“…….”
지평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물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윤곽이 불분명해지는 시간이었다. 개는 의미 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창틀에 놓인 개의 몸에서부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표적을, 태성을 놓쳤다.
그런데도 그 뒤를 더 이상 쫓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의 맥락이 잘리고, 그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떠밀린 듯한 기분이었다. 개는 멍하니 들고 있던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사아아. 불어온 바람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소리가 들렸다. 얼어붙은 손끝이 차가웠다.
흉터가 남은 제 발등을 바라보던 개는 알 수 없는 색으로 얼룩진 눈으로 황궁을 보았다.
황제의 적을 물리치고, 물리치고, 또 물리치는 일. 기억이 없는 어린 시절부터, 스승은 그것이야말로 황제를 위하는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이라 말했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누군가 자신을 ‘황제의 개’라고 불렀고, 그 뒤로는 황제의 적조차 개를 ‘황제의 개’라 불렀다.
충성스럽고, 용맹하고, 더럽고.
수식어가 어떻게 붙든, 살아오는 나날 동안 ‘황제의 개’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개는 그저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 그것만이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에.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걸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창밖을 향해 있던 개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간 것은 그때였다. 우아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발소리가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공작.
개는 하나의 화풍처럼 아름다운 생김새를 가진 남자를 떠올렸다.
“…….”
기대는 짧았다.
공작은 오늘도 방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개는 홀로 넓은 방을 지키게 될 것이고, 겨울의 길고 긴 밤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개는 미련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공작의 걸음이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
“…….”
흰 제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남자가 믿기지 않게도, 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공작을 본 게 얼마 만의 일이지? 따지자면 오래되지 않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못 보고 지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작은 창문턱에 앉아 있는 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짧은 동요가 검푸른 눈동자 위를 스쳤다. 그러나 그건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떨어져 죽고 싶기라도 한 건가.”
“……죽지 않습니다.”
개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을의 빛을 받은 공작의 얼굴은 선이 또렷했다. 웃음기 없는 눈동자도, 반듯하게 뻗은 콧대도, 굳게 다물어진 입술도. 단정하고 인상적인 얼굴은 쉽게 주의를 끌었다. 가늘어진 눈과 시선이 마주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리 와.”
성큼 다가온 공작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개의 팔뚝을 잡아챘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개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끌어 내려졌다.
개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균형을 잃은 탓에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았다. 향수 냄새와 뒤섞인 바깥 공기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개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심장이 술렁거렸다.
팔뚝을 움켜쥔 강한 악력이 기묘하게도 개의 마음에 안정을 불러왔다.
“몸이 찬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 닿아 있던 개를 떼어 냈다. 이번엔 심장이 다른 의미로 술렁댔다.
“옷도 더러워졌고…….”
“…….”
개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말대로 옷은 흙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개는 뒤늦게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이 방에 들어오지 않을 줄 알고…….
아니. 이건 핑계다.
개는 그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시선을 빼앗는 노을빛이 너무 강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움찔, 개의 몸이 굳었다.
“…….”
개를 바라보는 고아한 얼굴은 한없이 적요해 보였다. 무엇을 던지든 파동 없이 잔잔할 것만 같았고, 혹은 별일 아니라는 듯 짧게 미소 지을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온갖 말이 턱 밑까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의 온도가 너무 높아 성대가 녹아 버린 걸지도 몰랐다.
“일단 몸을 좀 녹여.”
“…….”
남자는 개의 팔뚝을 잡았던 손을 미끄러뜨리듯 떨구었다. 순식간에 손목이 잡혔다.
남자는 여전히 장갑을 낀 채로 개를 이끌었다. 개는 반항 없이 남자의 뒤를 따랐다.
“씻고 나와.”
남자는 개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개는 문턱 너머에 있는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얇은 천 사이로 개의 허리가 드러났다.
“그만.”
“……?”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손이 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개는 의욕 없는 눈으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조심성이 없군.”
마주 본 남자의 얼굴에는 기묘한 곤란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문은 닫고 다녀.”
달칵.
남자는 개의 대답을 듣지 않고 욕실 문을 닫았다.
개는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가 다급히 문고리를 붙잡았다. 조급함에 몸이 달았다. 닫힌 문을 밀어 여는 시간이 억겁 같았다.
“가지 마십시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개는 등 돌린 공작에게 입을 열고 있었다.
방을 나서려던 공작이 개를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
할 말.
개는 입을 달싹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공작이 곧장 문을 열고 나갈 것 같았다.
“사람이.”
개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저 되는 대로 내뱉었다.
지평선을 녹여 버릴 것 같은 노을빛이 너무 강했다.
“놔두면 곧 죽습니다.”
✵
노을이 지던 하늘은 어느새 새까만 색으로 번져 있었다. 개는 커피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노란색 스탠드 불빛이 개와 남자의 발치를 밝히고 있었지만, 방 전체를 밝히진 못했다.
“……그래.”
개는 차가운 손을 맞잡고 비볐다. 그러나 얼어붙은 손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장 같은 추위만 손안에 고이는 것 같았다. 개는 흐려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처리해.”
몸이 움찔 떨렸다. 개는 힐끗 시선을 올려 남자의 손끝을 보았다.
통화를 종료한 공작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개는 입을 앙다물었다.
“…….”
흔적이 남지 않게 처리하라는 건, 그자가 죽었기 때문일까.
개는 눈을 올려 남자를 보았다. 어슴푸레한 스탠드의 불빛을 받은 얼굴이 창백했다. 차현은 그런 개를 내려다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흰 장갑을 낀 손이 테이블을 짚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개를 향해 다가왔다. 개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장갑을 낀 손이 개의 눈 밑에 닿았다. 눈물을 닦아 내듯 여린 살갗을 쓸어 내는 장갑에서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자가 죽었길 바라는 건가, 아니면 살아 있길 바라는 건가.”
“……살아 있습니까?”
개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도, 흰 얼굴도, 냉담한 일자를 그리는 입술도 그대로인데. 낮게 토해지는 목소리만이 희미한 이변을 담고 있었다.
차현은 눈을 내리깔아 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밭게 내뱉는 숨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살아 있다.”
“……!”
차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개가 사람을 초주검으로 만들어 놨다고 고백한 직후, 그는 수하를 보내 수습할 것을 명령했다. 이미 죽어 시체가 됐다면 그자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묻힐 것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원칙대로 깡패들을 불법 진료 하는 돌팔이에게 맡겨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수하는 그자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알려 왔다. 돌팔이의 병실에 맡겨진 반시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현재는 숨을 이어 가고 있었다.
“표정이 달라졌군.”
차현은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든 것은 개 자신이면서, 살아 있다는 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허락도 없이 잘도 들쑤시고 다녔어.”
“…….”
개는 표정을 굳혔다.
남자가 그대로 방을 나갈까 두려워서, 잠시 자신의 상황을 망각했다. 몰래 저택 밖을 드나들었다는 걸 들키면 안 되는 거였는데. 게다가 명령도 없이 사람을 해쳤다는 걸 자신의 입으로 실토했다.
건조한 바람을 머금은 것처럼 입이 말라붙었다. 개는 머리를 숙였다. 변명할 것도 없는 실책이었다.
“죄송합니다.”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남자의 손이 개의 턱 아래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매끄러운 가죽의 감촉이 턱 아래를 감싸 쥐었다.
개는 차분하게 자신의 턱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얼굴이 무척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른거리는 불빛을 받은 얼굴이 오묘한 빛을 띠었다.
“하지만 설명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
개는 작게 입을 달싹였다. 설명. 사전적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태성이.”
그러나 둑이 터지듯 터져 나온 말 한마디가 말문을 열었다.
개는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를 생각했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어둡고, 싸늘한 바람이 불던 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골목에서 자신이 ‘혁명단원’라고 말하던 앳된 목소리.
‘그 말만은 하지 말지…….’
‘사람이라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숨소리처럼 고요하게 울려 퍼졌던 목소리까지.
“혁명단의 일원이었습니다. 혁명단은 황궁에 폭탄 테러를 저지른 조직이고…… 저는 그자들의 뒤를 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왜 그래야 하지?”
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왜?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물음이었다.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개는 떠듬떠듬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저는 황제 폐하의 개니까. 제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폐하의 적이 세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만인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분이고, 저는 그분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적을 모두……, 읍.”
그 순간 입이 틀어막혔다. 개는 자신의 입술을 가로막은 커다란 손을 보았다. 입 위에서 매끄러운 가죽의 맛이 느껴졌다.
“네 충성심은 황제 앞에 가서 떠들도록 하고.”
공작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휘어진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말해.”
“…….”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느리게 떨어졌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겪었던 일. 그런 게 중요한가. 하지만 공작은 독촉하듯 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는 작게 손을 오그라뜨리며 입술을 열었다.
“저는…… 태성이 혁명단의 일원이란 걸 알게 되고, 혁명단의 정보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고에 있던 자는 같은 혁명단의 일원으로, 입이 무거워 인질로 사용하려 했는데.”
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일순간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가, 잘못되어서.”
개는 한겨울, 눈발 속에 갇힌 짐승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울렁이던 검은 눈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차현은 무감정한 눈으로 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잘못되었지?”
“잘 모르겠습니다.”
개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즉답했다. 그의 얼굴에 우울이 어룽거렸다.
차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뜻대로 했잖아. 널 형이라 부르던 시종을 겁박해서 혁명단의 꼬리를 밟았고, 그 시종이 아니더라도 숨이 붙어 있는 혁명단원이 있는데……. 저런. 표정이 안 좋군.”
차현은 벼랑 끝에 선 짐승을 사지로 내몰 준비가 되어 있었다. 때로 짐승을 굴 안에서 꺼내기 위해서는 그 앞에 불을 질러야만 하는 법이니까. 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시종을 놓쳐서 그런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사람을 풀까?”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런 일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개는 답지 않게 두 번이나 ‘죄송’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차현은 시답잖게 유쾌함을 느꼈다. 달팽이의 더듬이를 건드렸을 때 놀라 움츠러드는 모습을 본 것 같은, 혹은 공벌레가 황급히 몸을 웅크리는 모습을 본 것 같은 시시한 감상.
“…….”
그러나 아름다운 얼굴에 작은 균열이 갔다.
창백한 얼굴의 개는 옷자락을 그러쥔 손이 벌벌 떨리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두려움에 떨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황제의 개’가 폭풍우 앞에 놓인 찻잔처럼 마구 뒤흔들리고 있었다. 차현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방금 한 말은 잊어. 그냥 해 본 말이니까.”
개는 자신과 가깝게 붙어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턱에 닿아 있던 손이 미련스러운 감촉을 남기고 떨어졌다. 고작 그뿐인데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쉬어.”
“……!”
개는 눈을 번쩍 떴다. 남자가 뒤돌아서고 있었다.
개의 손이 순식간에 남자의 등을 향해 쇄도했다.
“무슨…….”
개는 남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나풀거리는 흰 코트 자락이 개의 손안에서 구깃구깃하게 구겨졌다.
미간에 미세한 금을 그은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할 말이 남았나?”
개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을 잡아 두기 위해서는 계속 할 말을 만들어 내야 했다.
“어디를, 가시는 건지 몰라서. 그래서.”
“그게 너와 무슨 상관…….”
공작의 눈길이 코트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아니, 정확히는 코트 자락을 꽉 쥔 흉측한 손에 닿아 있었다. 옷자락을 너무 강하게 움켜쥔 탓인지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너.”
공작이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억눌린 목소리였다.
“사람을 머저리로 만드는 재주가 있군.”
뒤돌아서 있던 공작이 순식간에 몸을 돌려 가까워졌다.
개는 코앞에 선 공작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장갑을 낀 손이 뺨에 닿는 것을 느낀 순간, 입술이 마주쳤다. 공작은 개의 입술을 물어뜯듯 이를 세웠다.
“……!”
아찔한 고통이 피어오르는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개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혀끝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읏.”
그러나 내뱉어진 신음은 곧장 공작의 송곳니에 짓이겨졌다.
그는 피가 새어 나오는 개의 입술을 핥고, 난폭하게 입술을 겹쳤다. 장갑을 낀 손이 개의 양 볼을 짓눌렀다. 턱이 더욱 크게 벌어지며 뻐근한 고통이 느껴졌다. 혀가 목 안까지 파고들 것 같았다.
“우, 읏.”
목까지 혀가 파고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숨이 막혀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미지의 감각은 공포였다. 그러나 공작의 옷자락을 잡은 손을 놓칠 수가 없었다. 놓는 순간 떠나 버릴 것 같았다.
개는 자신이 무엇에 이렇게 간절히 매달리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장갑을 낀 손보다 맞닿아 있는 입술의 감촉이 더 기껍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입 안에서 뭉그러지는 혀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젖은 신음이 남자의 이에 닿아 부스러졌다.
“흣.”
남자는 개를 커피테이블 위로 밀치듯 앉혔다. 개는 매끄러운 테이블을 짚고 공작의 입술을 받아 냈다.
비집고 나온 타액이 찢어진 입술에 닿아 따가웠다. 그러나 고통보다 찌릿한 쾌감이 먼저였다. 춥, 추웁. 젖어 드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개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공작의 가죽 장갑이 개의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개는 낯선 감촉에 밭은 숨을 흘렸다. 공작의 손끝이 마른 갈비뼈를 더듬더니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다. 개는 막혔던 숨을 헉, 토해 냈다. 젖은 눈동자가 허공을 배회했다.
공작은 개의 몸을 가로막듯 양팔로 테이블을 짚었다. 그의 입술이 개의 목덜미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하, 으읏…….”
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알이 녹을 것처럼 뜨거워서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공작의 젖은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오를 때마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추위에 얼어붙었던 몸에 한순간 열이 올랐다.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흑…….”
그 순간 날카로운 고통이 피어올랐다. 목덜미가 콰득 짓이겨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개는 테이블을 짚은 손가락을 구부러트리며 숨을 헐떡였다.
“……이렇게 쉬운 건데.”
공작은 뜻 모를 말을 읊조리며 개의 귀에 입을 맞췄다. 개는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눈가가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그 순간 공작의 손이 허벅다리 안에 닿았다. 개의 몸이 흠칫 떨렸다. 미끄러지듯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린 공작이 개의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달칵.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재난을 알리는 불길한 소리처럼 개의 귓가를 건드렸다. 곱아 든 손끝이 움찔 떨렸다. 크게 뜨인 검은 눈이 잘게 흔들렸다. 개는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공작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이제는 알았다. 그는 개의 성기를 잡아 흔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개를 쾌락 안으로 떠밀 것이다.
“흣.”
그건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공작의 손이 귀두 아래에 핏줄 선 부분을 문지르면 전기가 오른 것처럼 등골이 바짝 당겼고, 둥글게 만 손으로 기둥을 쓸어내리면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남자가 귓가에 대고 웃음을 흘리면 뇌가 녹을 것처럼 흐물흐물해졌고, 손끝으로 요도구를 쑤시듯 문지르면 눈앞에서 조명탄이 터진 것처럼 시야가 새하얗게 바랬다.
그건 분명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행위였다. 또한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는 행위였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예민하게 세워져 있던 감각이 허물어지고 넋이 나가는 쾌감은 다른 어디서도 겪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그만둬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엉덩이 들어.”
“읏…….”
귓가에서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가늘게 뜬 눈을 잘게 떨었다. 바지는 어느새 지퍼까지 내려가 풀어 헤쳐져 있었다.
장갑 낀 손이 바지 안의 브리프까지 들어왔다. 우악스러운 힘에 밀려 내려간 브리프 위로 귀두부가 빠끔 튀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여린 살덩이 위로 열락에 들뜬 공기가 스쳤다.
개는 숨을 헐떡였다. 열이 올라 눈가가 벌겋게 익어 버릴 것 같았다.
“하, 으.”
“……그래.”
엉덩이를 들썩이는 순간, 바지가 단박에 끌어 내려졌다. 부드러운 섬유가 종아리 위를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함께 끌려간 브리프는 발목 위에 걸려 달랑거렸다. 개는 그것을 떨쳐 내기 위해 발끝을 허공에 내저었다.
“우읏…….”
“벌써 여기가 빨갛게 달았는데.”
발가락이 곧 둥글게 오므라들었다. 개는 숨을 할딱였다.
장갑을 낀 차가운 손이 사타구니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늘어진 성기의 뿌리부터 귀두까지 쓸어내리는 매끈한 장갑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배 속이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다.
촉, 촉. 목덜미를 입술로 물었다가 깊이 빨아들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귀를 울렸다. 움칠 떨린 개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곱아 든 손끝이 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튀어 올랐다. 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흑…….”
공작이 이를 세운 것은 순간이었다.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서 뜨거운 물이 투둑 떨어져 내렸다.
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손을 뻗어 남자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단단한 팔의 근육이 꿈틀 움직이고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헉.”
그 순간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 개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살에서는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성기가 델 것처럼 뜨거워졌다. 개는 덜컥 숨을 들이켰다. 고작 남자의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성기가 바짝 섰다. 배 속이 팽팽하게 당겨 왔다.
“하으, 웃…….”
개는 고개를 수그린 채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전기 꼬챙이에 꿰인 것처럼 팔다리가 저릿저릿했다. 남자의 손안에서 머리만을 간신히 드러낸 귀두 끝이 붉고 매끈한 표피를 드러내고 있었다.
“흐읏.”
남자의 손이 개의 기둥을 가볍게 주물렀다. 개는 헛숨을 들이켜며 다급히 남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남자의 시선이 개의 성기 위에 닿았다. 수치심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오늘따라 더 예민하게 구는군.”
“안, 흣! 우읏, 안……!”
그러나 공작이 멈춰 선 것은 잠시였다. 그는 개의 성기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목을 움켜쥔 개의 손이 함께 흔들렸다. 기둥을 흔드는 손이 사타구니에 부딪쳐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개는 스스로 수음하는 듯한 기분에 퍼뜩 손을 뗐다.
“아, 아. 싫, 안…….”
방해가 없어진 남자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뜨거운 손이 예민하게 달아오른 귀두를 쓸어 올렸다가 단번에 뿌리까지 떨어져 내렸다. 개는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반토막 난 신음을 흘렸다.
뿌리부터 귀두 끝까지 화끈거리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전기가 오른 것처럼 개의 다리 안쪽이 바르르 떨렸다.
“흐으, 읏…….”
사정감이 치밀어 오르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머리가 붕 뜨고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요도 위에 매끈거리는 선액이 맺혔다.
“으…….”
그 순간 남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사정감이 머리까지 치밀어 오르는 순간 떨어져 나간 자극은 마치 고문 같았다. 개는 몸을 옹송그린 채 숨을 할딱였다. 뜨거운 성기 위에 차가운 공기가 닿자 지끈거리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개는 테이블을 쥐어짤 듯이 잡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성기 위에 손이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 개는 흐릿한 눈으로 공작을 보았다. 눈물이 뺨을 적셨다.
“가만히 있어야지.”
“싫, 어…….”
공작은 초점이 흐려진 개의 눈을 바라보더니 곧 입술을 붙여 왔다. 가볍게 닿던 입술이 점점 더 깊게 맞부딪쳐 왔다. 개는 공작에게 떠밀려 휘청거렸다. 뒤로 넘어갈 뻔한 순간,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테이블을 짚었다.
“읏…….”
입술이 떨어졌는데도 혀가 저렸다. 개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공작은 미끄러트리듯 개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귓바퀴를 핥아 올렸다. 얇은 표피에 숨이 닿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개는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공작의 손이 개의 허벅지 안쪽을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개의 다리는 쉽게 벌어졌다.
곧은 모양으로 선 개의 성기는 보기 좋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개의 성기 위에 자신의 성기를 겹쳤다. 핏줄이 굵게 서 있는 두꺼운 성기는 개의 성기를 압도했다.
“읏……?”
개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공작이 두 개의 성기를 한 손에 쥐었을 때였다.
“아, 읏……!”
목 뒤가 쭈뼛 서는 쾌감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개는 헉 숨을 들이켜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발가락이 확 곱아 들며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하기 시작했다.
“하…….”
“이, 이상…….”
남자의 성기는 뜨거웠다. 핏줄이 울룩불룩했고, 개의 성기와 문질러질 때마다 더욱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개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가슴팍을 짚었다. 공작 또한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흐, 으……!”
공작은 개의 바짝 선 목울대에 입술을 맞추고 쇄골을 깨물었다. 그의 턱 아래에 개의 옷깃이 닿았다.
잘근잘근 씹히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에 흰 빛이 팍 터졌다.
“……!”
성기에서 울컥 정액이 토해져 나왔다. 흘러내린 정액이 남자의 손과 성기 위에 잔뜩 튀었다.
개는 마른 가슴팍을 크게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머리가 멍했다.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아?”
그 순간 남자의 손이 개의 엉덩이를 쥐었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양쪽 엉덩이를 잡아 벌린 남자가 꽉 다물린 주름 위에 손가락을 댔다. 정액 묻은 손가락이 입구를 적시듯 문질렀다.
“무, 무슨……. 싫……!”
“쉿.”
개는 몸을 버둥거렸지만 흔들리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개가 앉은 테이블이었다. 거세게 뒤흔들린 테이블이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순간 개는 남자의 팔을 붙잡아 그를 지지대 삼았다.
“가만히 있어야지.”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공작은 개의 귓불을 물었다가 목덜미를 핥았다. 개는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죽은 줄 알았던 성감이 다시 스멀스멀 살갗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공작의 팔을 붙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읏…….”
손가락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개는 역겨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래 구멍에 손가락을 넣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공작이 아니었더라면 눈앞에 있는 자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곧고 긴 손가락이 꽉 조여진 내벽을 벌렸다. 개는 배 속이 더부룩해지는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참을 만한 것은 공작의 입술이 피부 위에 닿을 때마다 미미한 쾌감이 올랐기 때문이다.
추삽질을 하듯 움직이기 시작한 손가락이 개의 내벽을 눌렀다. 배 속이 직접적으로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개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점점 견디기 힘든 감각이 들었다. 불쾌했다.
개는 공작에게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읏……?”
그 순간 나온 것은 말이 아니었다. 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방금.
“아.”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자리가 찔렸다.
개는 온몸이 확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성기로 사정하는 것보다 강렬한 쾌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 머리를 후려쳤다.
“아, 아!”
개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등줄기가 확 휘며 공작에게 온몸을 기대는 꼴이 되었다.
하나의 손가락은 어느새 두 개가 되어 개의 내벽을 콱콱 찔러 올렸다. 배 앞쪽이 눌릴 때마다 눈앞이 희게 점멸했다. 곱아 든 발끝이 퍼뜩 뛰었다.
“히, 읏……!”
“씨발.”
개는 풀 죽었던 성기가 다시 꺼떡거리는 것을 느꼈다. 빳빳하게 선 개의 성기가 남자의 성기와 함께 뭉개지듯 문질러졌다.
낮게 욕을 지껄인 남자는 자신의 것과 부딪치는 개의 성기를 한 손에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구멍에 처박힌 손가락을 추삽질 하듯 움직였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 싫……. 싫어! 이, 이상…….”
“좁아.”
억지로 쑤셔 넣는다면 분명 찢어질 것이다. 개의 구멍은 좁았다. 그는 경련하듯 손가락을 쥐어짜는 내벽을 콱 짓눌렀다. 개의 몸이 파드득 튀고 신음 소리가 짧고 높아졌다.
“흐으, 웃……!”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손이 빨라졌다. 탁, 탁. 두 개의 성기가 뒤엉키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개의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등허리에 전기가 오른 것처럼 튈 때마다 뇌의 한 부분이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배가 뜨거웠다. 성기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
먼저 사정한 것은 개였다. 한계치 이상의 자극을 받은 개의 눈이 퓨즈가 끊긴 것처럼 스륵 감겼다. 개의 머리가 힘없이 가슴팍 위로 떨어졌다.
“큿.”
공작은 개의 사타구니에 사정했다. 희뿌연 백탁액이 느른하게 흘러내려 개의 회음부까지 적셨다.
“하아…….”
그는 작게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식을 잃은 듯 고요한 숨을 내뱉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 머물던 불쾌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
그는 잠든 개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매만졌다. 손끝에서 사락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털을 만지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차현은 잠든 개를 들어 올려 안았다. 개는 보기보다 꽤 무거웠다. 축적된 근육의 양 때문이었다. 그러나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어깨 위에서 흐트러지는 개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
총, 소음기, 칼, 방탄조끼, 가면.
태성은 자신 앞에 늘어진 무기와 방어구를 바라보며 부어오른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드디어 처음으로 혁명단의 일원으로서 전면에 나서는 날이었다.
“하아…….”
그러나 집중이 되질 않았다. 태성은 부어오른 눈을 손으로 꾹 짓누르며 한숨을 내뱉었다.
“…….”
형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황제의 사람이었다. 저열한 새끼.
그자가 예성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왜 혁명단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게다가 그자는 일전에 예성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감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만약 그때 집으로 미친 듯이 뛰어와 예성과 마주치지 못했더라면, 그자가 앞서 예성을 납치하기라도 했다면. 태성은 그자를 ‘형’이라 불렀던 과거의 자신을 평생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죽어서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귀.”
태성은 두 손을 모으고 그 위에 이마를 기댔다. 머리가 아팠다.
“사마귀?”
그때 누군가 태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성은 화들짝 놀라 눈을 들어 올렸다. 그곳엔 가면을 쓰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가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자신을 부르는 별칭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처음 무술 훈련을 했을 때 영춘권 얘기를 한번 꺼냈다고 별칭이 ‘사마귀’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태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준비됐어?”
“아…….”
태성은 여자를 올려다보며 입을 달싹였다.
혁명단의 리더 격인 이 사람은 과거 위기에 처했던 태성과 예성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태성에게 무술을 가르쳐, 어엿한 혁명단의 일원이 되게 만든 사람이기도 했고.
저 사람은 은인이었고, 스승이었다.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잎사귀’의 행방에 대해 말을 해야 하는데.
“……네. 처음이라서 좀, 긴장되긴 하는데…….”
“긴장해. 그래야 무엇보다 네 안위에 신경 쓰게 될 테니까.”
여자는 씩 웃으며 태성의 어깨를 두들겼다. 태성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수십 번 도전했지만 수십 번 말하지 못했다. 만약 ‘잎사귀’의 행방에 대해 말하면? 자연스럽게 그자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야 할 것이다.
그럼 황제의 사람인 ‘그자’는 어떻게 될까.
“…….”
태성은 눈을 내리깔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