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7/19)

8장

“…….”

남자는 오늘 새벽,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어젯밤 개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홀연히 사라졌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어젯밤 나가 그대로 방에 돌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찔러 왔을 때는 이미 남자가 사라진 후였다는 것이다.

개는 눈을 뜬 순간부터 감각을 세워 남자의 기척을 좇으려 했다. 그러나 저택 어디에서도 남자의 발소리를 잡아낼 수 없었고, 개는 남자가 저택 안에 없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남자가 일찍 사라졌다는 것은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혁명단원의 꼬리를 잡으러 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는 이상한 상념에 사로잡혀, 해가 밝아 오는 내내 방 안에 머물렀다.

남자는 어제 개의 위에서 자위했다.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미약을 먹었고, 개는 남자의 영역 안에 있었다. 또한 남자는 다급했고, 개는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니 남자가 개의 위에서 자위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

그래, 특별할 게 없는 일이지.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개는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드디어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아니. 나갈 결심은 꽤 오래전부터 했지만…….

개는 꼬리처럼 달라붙는 변명들에 시달리며, 창틀 위에 올려 두었던 신발을 신었다.

창문을 열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밀려들었다. 개는 태성이 준 코트를 챙겼다. 코트의 팔 부분에 총알이 스친 자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보온에는 문제가 없으니 입고 나갈 생각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개는 단숨에 창문을 뛰어넘었다. 현관문을 여는 것처럼 간단한 동작이었다. 개의 몸은 빠르게 추락했다. 그리고―

“윽.”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개는 평소와 달리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다친 팔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낙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상처가 짓눌렸다. 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고통에 신음하는 것은 잠시였다. 개는 싸늘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

개는 감히 자신에게 총상을 남기고 도망친 이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침내 묘하게 얼빠져 있던 개의 눈에 흉흉한 빛이 깃들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개는 순식간에 그 자리를 박차 사라졌다.

낡고 헤져 시장 골목과 한 몸처럼 어우러지던 회색 후드 티는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되었다. 피를 막기 위해 팔 부분을 뜯어낸 데다가, 옷 군데군데에 피가 말라붙었기 때문이었다(이런 상태는 태성의 손에서도 복구되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복장은 상관없었다. 개는 어두운 골목 안에 몸을 숨기고 거리를 살폈다.

혁명단원들은 일견 이곳의 사람들과는 구분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낡은 옷을 입고, 껄렁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엇보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모습들.

“…….”

개의 새까만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당장 저 거리에 널린 사람들 중에 혁명단원이 있다면?

개가 정체를 파악한 것은 고작 두 명이었다. 이 단체에 총 몇 명의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들 중 몇 명이 행동을 담당하고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자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려는 찰나, 총성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라면 의심스러운 이들을 잡아 일단 고문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너무 날뛰어 혁명단원들이 몸을 사리도록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들이 안심하고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했다.

“…….”

그러나 그들이 안심하고 몸을 드러내는 날은 오늘이 아닌 것 같았다. 개는 몇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사람들을 훑었지만 그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개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던 몸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목에서부터 어깨, 팔, 그리고 발끝까지 근육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개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어제 대치가 있었던 만큼, 그들은 몸을 사리길 선택한 듯했다.

개는 아케이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더 기다려 봤자 소득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슬슬 돌아가야 할 때도 되었고.

개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짙게 남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세 번이나 표적을 놓친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지 말자. 그들은 반드시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이곳에 그들이 바라는 이점이 있는 이상, 그들은 반드시 개의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

황제의 적에게 반드시 죽음을.

개는 자신의 사명을 속으로 읊조렸다.

개가 저택에 돌아온 것은 이른 저녁이었다. 겨울이 가까워졌기에 노을도 일찍부터 지고 있었다. 개는 노을을 등지고 훌쩍 창문을 뛰어넘었다.

차가운 바람이 창문 새로 들어오자, 방 안에 있던 작은 인영이 움칠 떨었다.

“으…….”

자신의 양팔을 움켜쥔 태성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얇은 옷을 입은 태성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추위가 못 견디게 싫은 얼굴이었다.

“형, 빨리 들어와요.”

개는 태성이 덜덜 떨며 자신을 힐긋대는 걸 보다가 훌쩍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을 닫자 그제야 태성이 개에게 다가왔다.

“형은 안 추워요?”

“별로.”

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코트가 꽤 두꺼운 재질이었기에 개의 체온을 유지하기엔 적당했다.

“헉. 형, 코트에 구멍은 언제 난 거예요?”

“…….”

개는 움찔 몸을 떨었다. 태성은 코트에 남은 총알 자국을 보며 비명이라도 지를 기세였다. 개는 눈을 굴려 태성의 시선을 피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내일까지 꿰매서 가져다드릴게요.”

태성이 그렇게 말하며 개의 팔 위에 손을 올리려 했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자리엔 총상이 남아 있다. 개의 본능이 반사적으로 위험 신호를 보냈다.

“손대지 마.”

“윽……. 혀, 형?”

어느새 개는 태성의 팔목을 당장이라도 부러트릴 듯이 잡고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뜬 태성의 얼굴이 점차 고통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개는 황급히 태성의 손목을 놓았다.

“형, 갑자기 손목을 왜……. 놀랐잖아요…….”

“…….”

태성은 방금 전까지 개의 손이 닿았던 손목을 움켜쥐고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개는 그런 태성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당황하긴 개 또한 마찬가지였다.

“……벗어서 줄게.”

개는 답지 않게 순순히 코트를 벗어 태성에게 내밀었다. 태성은 얼떨떨한 얼굴로 개를 바라보다가 코트를 품에 안았다. 코트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개는 코트를 넘겨주자마자 홱 몸을 돌렸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매번 그랬듯, 욕실에 가 씻을 생각이었다.

태성은 멀어지는 개의 등을 보며 입을 우물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형!”

개가 등을 돌렸다. 태성은 사람을 불러 놓고, 코트만 꽉 쥔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태성을 보던 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기에 저렇게 망설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그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태성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내 코트를 그러쥔 손을 가슴까지 끌어 올리며 외쳤다.

“……저랑 다음에 대련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

개는 눈을 깜빡였다.

대련?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얼마 전만 해도 대련은 질 것 같다고 싫어하지 않았던가?

“딱 한 번만요. 정말 딱 한 번만.”

태성은 개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 하나를 펴서 허공에 들어 올리는 게, 어째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내일은 안 돼.”

개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태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형 편하실 때 해 주시면 돼요!”

개는 대답 대신 등을 돌렸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개의 등 뒤로 흥분한 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저는 이만 퇴근합니다. 내일 봬요!”

태성은 그 말을 남기고 곧장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개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상의와 바지를 단숨에 풀어 헤친 개는 곧장 샤워기를 틀었다. 솨아아.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개의 몸이 흠뻑 젖어 들었다.

개는 얼굴의 물기를 팔로 닦아 내고는 선반에 놓인 통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샴푸였다. 개는 곧장 그것을 손에 짜냈다. 진득하고 희멀건 액체가 손 위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개의 몸이 멈칫 굳었다.

“…….”

매번 쓰던 샴푸였다. 다를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샴푸에서 나는 냄새가 불현듯 어떤 기억을 일깨웠다. 개는 도륵 눈을 굴렸다.

‘하아…….’

어젯밤 공작에게선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달짝지근한 미약의 냄새가 났다. 개는 오싹하게 와 닿던 공작의 숨소리를 떠올리며 눈을 굴렸다.

미약을 먹은 황제는 개를 편리한 도구로 이용했고, 공작은 개에게 눈을 감으라고 명령한 채 스스로 약 기운을 빼냈다.

개는 힐끗 자신의 것을 내려다보았다. 사타구니에 늘어진 살덩이가 보였다.

스스로 하는 게 그렇게 좋은가?

샴푸 냄새가 둥둥 떠다니는 욕실은 어제의 공작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달빛을 받은 아름다운 얼굴과 단정한 흰 제복,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외설적인 표정까지.

개는 샴푸를 짰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솨아아. 샴푸는 미끄러운 감촉만을 남기고 모두 씻겨 나간 상태였다.

개는 사타구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말랑말랑한 표피가 손끝에 닿자 눈꺼풀이 가늘게 좁혀졌다.

자위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이따금 술을 마실 때 유흥이 필요하다며 개에게 기행을 시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딱히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미미한 흥분을 동반한 생리적 분출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또 한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

개는 미끄러운 손으로 말랑한 성기를 조물거렸다. 생리적인 반응으로 성기가 서기 시작하자 그 위를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개는 한쪽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의 기억 때문일까. 미미하게 몸이 달아올랐지만 역시 공작이나 황제처럼 고양된 기분을 느낄 순 없었다. 붉게 변한 성기를 문질러도 짧게 소름 끼치는 감각이 들 뿐이었다.

솨아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소리가 개의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다. 개는 빳빳이 선 성기를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문지르다가 손을 늘어트렸다.

그만할까. 역시 괜한 호기심이었던 게 분명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했더니.”

“……!”

개의 고개가 퍼뜩 세워진 건 그때였다.

개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누가 이곳에 다가오는 것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개는 습관적으로 제 주변에서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으려 했다.

“계속하지.”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공작이었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문틀에 기대선 공작이 픽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던 개는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놀란 탓에 조금 수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살덩이가 보였다.

솨아아―

욕실 타일로 떨어진 물줄기가 소용돌이치며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개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더 문질러 봤자 아는 기분만 느낄 것이다. 그런데 행위를 더 이어 가야 할 필요가 있나?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하기 싫다’고 말하기엔 문 앞에 선 공작의 시선이 집요했다.

개는 까만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흰 피부를 따라 흘렀다. 울퉁불퉁한 흉터 위에 긴 궤적을 그린 물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보는 시선이 있어서 하지 않는 건가?”

“…….”

개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활짝 열린 욕실의 문을 노크하듯 두들겼다. 똑똑, 가벼운 타음이 욕실 안을 울렸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면 적어도 문은 닫고 했었어야지.”

개는 곁눈질로 문을 힐끗 살폈다. 역시 문을 닫았어야 했나?

그러나 황제는 개가 문을 닫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시야에 닿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했으니까. 오랫동안 길들여진 습관은 계기가 없다면 고쳐지지 않는 법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개는 항명하듯 대답했다.

공작도 개의 위에서 자위를 하지 않았던가. 혼자 하다가 들킨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이런 압박을 받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따지자면 개가 자위를 하게 된 건 공작 때문이 아닌가. 개는 억울해졌다.

“그럼?”

그는 문턱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팔짱을 풀었다. 픽 터져 나온 웃음이 욕실을 맴돌았다. 남자의 발이 젖은 바닥을 디뎠다.

“보여 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아닙니다.”

개는 미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들켜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호 장치 하나 없는 맨살을 타인에게 보여 봤자 좋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맨몸은 말 그대로 자신이 무장 해제 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또한 무장 해제란 자신이 먹음직스러운 먹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

개는 단숨에 가까워진 남자를 올려다보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을 친 것은 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옷이라도 입고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런 무위의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개는 마치 상위 포식자를 앞에 둔 짐승처럼 빳빳하게 몸을 긴장시켰다.

“하나만 물어보지.”

남자의 팔이 개의 머리 옆을 스쳐 벽에 닿았다. 개는 솜털까지 바짝 선 몸을 작게 수그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야.”

남자의 얼굴에 선량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고 붉은 입술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언제 보아도 새삼스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개는 바짝 긴장했던 몸이 조금씩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혼자 욕실에서 수음하고 있던 이유가 궁금한데.”

“……?”

개의 눈이 커졌다. 멍청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 말이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뭐가 널 흥분시켰지?”

정작 외설적인 말을 내뱉은 공작은 태연했다. 빛을 등진 남자의 눈이 선명한 빛을 띠고 개를 향했다.

“말해 봐.”

“…….”

개는 눈을 굴렸다.

황실에 있을 땐 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명령을 수없이 받아 왔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명령이란 개에게 당연하게 내려지는 것이었고, 명령을 따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일이 왜 지금은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인 끝에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개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솨아아 쏟아지는 물줄기에 눈을 두었다. 어쩐지 목덜미가 뜨거웠다. 심장이 죽음의 순간에 다다른 것처럼 쿵쿵 뛰었다.

“어제 제 위에서 자위하신 걸 보, 곱…….”

“그만.”

공작의 커다란 손이 개의 입을 턱 틀어막았다. 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남자의 손을 힐끗 보았다가 눈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어제 일이 널 흥분시켰다는 말이지.”

“…….”

개는 눈을 깜빡였다. 손을 대기 전, 어젯밤 보았던 공작의 얼굴이 생각나긴 했으니 맞는 말인가.

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소감은?”

“…….”

남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개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건조한 어투로 대답했다.

“똑같았습니다.”

“똑같다니?”

남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개는 남자의 얼굴에서 의문을 읽다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자극을 받지 못한 성기가 다시 힘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더 문질러 봤자 억지로 끌어 올린 감각에 기분이 나빠질 뿐이었다. 이렇게 가라앉은 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개는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 보이는군.”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개의 성기 위에 닿아 있었다. 개는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사타구니에서 떨어지고, 그가 멀어지길 가만히 기다렸다.

“읏……?”

그러나 남자는 개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자의 웃는 얼굴이 코앞에 닿아 있었다.

“그래도 날 보고 자위했다는데 이 정도 봉사는 해 줘야지.”

“……!”

남자의 단단한 손이 뿌리부터 쥐어 오더니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는 파득 몸을 떨었다. 잠시 끊어졌던 자극이 이어지자 성기가 금세 힘을 얻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개의 성기 전체를 쥐고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잠, 그만……!”

뭐지? 개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당황스러움을 뛰어넘는 어떤 미지의 감각이었다.

선단에 닿은 단정한 손가락이 요도 부근을 강하게 문질렀다. 그 순간 배 속이 확 당기며 머리에 열이 올랐다.

“비켜, 비…….”

이상 신호가 개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분명 위험한 일이 생길 것이다. 개는 남자를 확 밀쳐 냈다.

아니, 밀쳐 낸 줄 알았다.

“우으, 읏…….”

요도 구멍을 매만지던 단정한 손이 귀두 아랫부분을 비틀듯 문지르더니 곧 뿌리까지 쓸어내렸다. 빳빳하게 선 성기에 마찰감이 느껴지며 배 속이 확 조여들었다. 개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두려운 감각이었다.

남자의 흐트러진 웃음소리가 귓가로 떨어졌다.

“……!”

개는 남자를 밀쳐 내려던 손으로 그의 제복을 그러쥐었다. 핏줄이 설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복 너머 남자의 피부를 꿰뚫을 것처럼.

그러나 남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개의 성기를 쓰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아……!”

고환까지 쓸어내렸던 남자가 장난치듯 요도 구멍을 손끝으로 꾹 짓눌렀다. 순간 개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개는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위험할 뻔했어.”

“귀에, 말…….”

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는 개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끼워 넣고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의 입술이 귓바퀴에 닿을 것 같았다.

“마, 그만…… 아.”

개가 아는 자위는 이런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전기 고문을 받는 듯 등골이 찌릿하거나, 불에 지져지는 듯 성기가 뜨거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온몸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게 자위라고?

개의 성기를 쥐고 흔드는 건 사실 남자의 손이 아니라 고문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감각이 느껴질 리 없었다.

배 속이 뜨거웠다. 아니 목 뒤가, 뺨이, 성기 끝이…….

아니, 머리가 녹아 버린 걸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개는 자신을 지탱하는 사람에게 머리를 기댄 채 숨을 헐떡거렸다. 무언가 눈에서 투둑 떨어져 내렸다.

“젖었네.”

남자가 불현듯 그렇게 말하더니, 개의 귀두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질금질금 흘러나온 쿠퍼액을 귀두에 잔뜩 묻히듯 움직이는 손가락이 개의 통각을 자극했다. 배 속이 바짝 조여들며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성기가 떨렸다.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만, 이상……. 하지 마, 흐, 읏…….”

남자의 다리가 회음부와 고환을 짓누르고 있었다. 남자의 웃음기 섞인 말소리는 개의 귓가를 핥는 듯했고, 귀두를 집요하게 문지르는 남자의 손은 개를 벼랑 끝까지 떠밀고 있었다.

“싫, 안…….”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힘을 못 쓰던 개가 파득 몸을 떤 것은 그때였다. 붉은 성기 끝은 축축이 젖어 꽤 먹음직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는 개의 회음부를 은밀히 문지르며 귀두 아래의 얇은 표피를 엄지로 밀어 올렸다.

“……!”

그 순간 개의 다리가 확 조여들며 성기가 크게 반동하는 게 느껴졌다. 남자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개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재차 문지르며 성기를 쓸어내렸다.

“읏…….”

퓻, 퓻, 하고 쏟아진 백탁액이 욕실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크게 뜨였던 개의 까만 눈이 그 순간 퓨즈가 꺼진 것처럼 훅 가라앉았다. 그러나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파르르 떨리는 몸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이런.”

“…….”

차현은 픽 쓰러지려는 개의 몸을 가깝게 끌어안았다. 축 늘어진 개는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지만, 품에 닿는 뜨거운 체온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개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올렸다. 지푸라기처럼 바싹 말라 부스러질 것 같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꽤 사람다운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만지다 보면 꽤 감촉이 좋아서, 언젠가 이 머리카락을 계속 만지작거렸던 적도 있었다.

“…….”

“…….”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칼 사이로 개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온순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단잠에 빠져든 것 같은 얼굴.

개의 젖어 든 속눈썹이 낯설었다. 차현은 픽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뒤에서 귀족들을 선동해 황제가 개를 버리게 만들고, 죽음을 앞둔 개를 건져 내 지금껏 살려 둔 이유. 개가 거리로 나가도록 유도하고, 제멋대로 날뛰어 혁명단을 들쑤시게 둔 이유.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개가 이 모든 계획의 마무리를 지을 단 하나의 마침표니까.

그리고 그건 개가 황제의 유일한 약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차현은 개의 몸을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평생을 암살자로 살아온 개는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에 뿌리를 박을 수 있을 만큼 무겁지도 않았다.

개는 그의 인생이 늘 그래 왔듯 불안하게 흔들리다 스러질 것이다.

그것이 차현이 계획한 개의 미래였다.

개는 죽게 될 것이다.

“……!”

개는 물가에 둔 물고기처럼 파드득 몸을 떨며 일어섰다. 당황으로 물든 까만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개는 휘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지하실이 아니라 푹신한 침대 위였다.

……꿈이었나?

꿈속에서 개는 황제의 적을 의자에 묶어 두고 도구를 고르고 있었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역치가 달랐다. 따라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했다.

몇 개의 도구를 만지작거리다가 놓길 반복하던 개는, 문득 뒤에서 이상한 소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덜컹, 덜컹. 무언가 강하게 흔들리는 소리였다. 위화감을 느낀 개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부욱!

그 순간, 개는 적이 밧줄을 풀고 일어선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적은 단순히 밧줄만을 푼 것이 아니었다. 괴물처럼 커다래진 몸으로 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는 괴물과 용감무쌍하게 싸웠으나 얼마 가지 못해 의자에 묶인 처지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의자에 묶인 건 저 괴물이었는데 말이다. 개는 몸을 버둥거렸지만 얼마나 단단히 묶인 건지 도통 끊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개는 괴물에게 전기 고문을 받았다. 몸이 찌릿찌릿하고 생리적인 눈물이 치고 올라왔다. 머리가 다 타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전기 고문은 생각보다 마냥 고통스럽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보고 자위했다는데 이 정도 봉사는 해 줘야지.’

괴물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개가 이지를 잃고 닥치는 대로 말을 뱉어 냈을 때였다. 개는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낮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 울림은 아주 익숙한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눈을 든 개가 마주한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아주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개를 내려다보았다.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검은 눈이 아주 아름다웠다.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개는 꿈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마 물에 빠진 생쥐나 고양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개는 어쩐지 오한이 들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일어났나?”

“……!”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개는 펄쩍 뛰어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침대를 바리케이드 삼은 개가 흉흉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자,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을 받은 공작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봉사해 주고 경계까지 받다니.”

개의 까만 눈이 더욱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개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튀어 나가 공작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까딱하면 공격할 기세로 사납게 눈을 치떴다.

고문실에서의 일은 꿈일지 몰라도, 남자가 개의 사정을 도운 것은 꿈이 아니었다.

개는 침대보를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난밤에 느꼈던 공작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감각을 느끼면서까지 자위를 하는 놈들은 미친 게 아닐까.

“이것 참 슬프군.”

조금도 슬프지 않은 얼굴로 말하며 생긋 미소 짓는 남자는, 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미친 사람이었다.

사람 손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끔찍한 무기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남자의 손에 성기를 붙잡혔을 때, 개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나 덫에 걸린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발발거렸을 자신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개는 미간을 와작 일그러트렸다.

“어제는 사정하자마자 쓰러져서 놀랐어.”

남자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는 제복의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양손에 흰 장갑을 끼웠다. 개는 그런 남자의 몸짓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의 속눈썹이 꿈에서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부족했다면 조금 더 노력해 보지.”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꿈속에서 들었던 말이 현재의 남자 위로 오버랩 되었다.

더 이상은 저 목소리를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개는 우선 남자의 입을 틀어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런.”

침대 뒤에 숨었던 개는 순식간에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여태껏 남자와의 대결에서 이겨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 남자의 입을 막고, 더 이상 어제 일을 언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개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어떤 눈속임이나 기교도 없이 내뻗어진 주먹은 손쉽게 남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개는 여유로운 남자의 얼굴을 보며 다른 손 또한 힘껏 내질렀다.

“이렇게 급하게 굴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그 손 역시 공작의 손아귀에 붙잡힐 뿐, 공격이 되지는 못했다.

개는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개의 까만 눈에 희미한 이채가 돌았다.

보란 듯이 양손을 내뻗은 것은 남자 또한 양손의 자유를 잃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개를 저지하고 있는 한, 남자는 양손을 사용할 수 없다.

개는 남자의 오금을 차 그를 쓰러트리려 했다.

“……!”

그러나 개가 다리를 들어 올린 순간, 공작은 무도회에서 춤을 추듯 개의 몸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한쪽 다리로만 바닥을 디디고 있던 개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개는 한순간 회전하는 시야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급해도.”

풀썩. 개는 자신의 엉덩이에 닿는 푹신한 감촉을 느꼈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남자가 개를 소파 위에 앉힌 것이다.

개는 여전히 두 팔을 결박당한 채 공작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당장은 좀 곤란해.”

얼굴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개는 최선을 다해 몸을 뒤로 뺐지만 등받이 탓에 뒤로 도망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개는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꿈속에서처럼 남자에게선 사향 냄새가 났다.

“음……. 아니, 한 번이면 괜찮을 것 같기도.”

공작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 든 것은 그때였다.

공작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다리 한쪽을 개의 다리 사이에 밀어 넣었다. 아주 은밀하고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난 지금이라도 괜찮은데.”

“……!”

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개는 다급히 양발을 들어 남자의 배를 걷어차려 했다. 개의 발이 허공을 갈랐다. 남자는 그제야 개의 양팔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개는 자유를 얻자마자 소파를 뛰어넘어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여차하면 뛰어내리겠다는 듯, 창문 앞까지 가 선 개를 보며 공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더 경계하지 않아도 돼. 장난이니까.”

“…….”

개는 긴장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까만 눈이 집요했다.

“오늘은 일찍 올 테니 얌전히 있어.”

남자는 개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개는 남자가 방을 나설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넓은 등을 좇았다.

탁.

곧 방문이 닫혔다.

개는 혼자가 된 방에서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개는 안도했다.

“…….”

다시는 남자의 앞에서 자위하지 않으리. 개는 굳은 얼굴로 다짐했다.

그는 스물한 살의 어린 남자다. 그는 자신의 이름보다 ‘잎사귀’라는 별칭으로 더욱 많이 불렸으며, 얼마 전까지는 혁명단에서 가장 어린 단원이었다.

고작 3년 전만 하더라도 잎사귀는 잎사귀가 아니었다. 그는 혁명단이라는 단체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어린아이였다.

잎사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왔다. 대부분의 고위층 자제들이 그렇듯 가난한 사람들을 속으로 우습게 여겼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사건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터지는 법이었다.

‘황궁에서 점점 요구하는 게 많아져.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고.’

어느 늦은 밤. 물을 마시기 위해 나왔을 때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말이 몰락의 시작인 줄 알았다면 아버지를 말렸을까? 잎사귀는 아직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잎사귀의 부모가 간부로 있던 회사는 점점 더 과해지는 황실의 요구에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황제의 뜻을 전하러 온 사자에게, 더 이상 자신들이 황실에 돈을 댈 의무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고작 그뿐이었는데.

국내 최고 기업이 휘청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간 황실의 묵인 아래 이뤄지던 비리가 갑작스럽게 언론에 까발려졌고, 앵무새처럼 입을 놀리던 언론은 곧 회장의 사생활까지 가십으로 이용했다.

짧았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기업이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다시 막대한 로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퍼져 나간 뉴스는 되돌릴 수 없기에, 회사는 비리를 뒤집어쓸 희생자를 구했다.

잎사귀의 부모는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밤이고 새벽이고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는 동안 그들의 생활에는 밤낮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불면은 생각보다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게 뭔데!’

패배감과 우울감에 젖은 얼굴은 시체의 얼굴과 비슷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고 생기가 없었다.

그때의 잎사귀는 자신을 이루는 황금색의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얼마나 쪽팔렸는 줄 알아? 우리 집 이제 거지 될 거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왔어. 근데 이제 학교도 못 갈 거라고?’

아버지는 압류 딱지가 붙은 소파에 앉아 힐끗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눈 그늘이 진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는 철없이 화를 내는 잎사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아버지는 여느 때와 같이 집을 나가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황제의 명령 아래 시체는 찾지 않기로 합의되었다.

어머니는 그 뒤로 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끈 떨어진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올려다보아야 했던 가문의 비극을 맛있는 별식처럼 즐기다 곧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잎사귀에게 함께 죽자고 말했다. 혼자 남을 잎사귀가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잎사귀는 죽기 무서웠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나중에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기사 한 줄로 간신히 알게 되었다. 잎사귀는 현실을 깨달았다.

열여덟. 잎사귀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행복이란 얇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었고, 현실은 발밑에서 넘실거리는 새까만 물처럼 어두운 것이었다. 잎사귀는 강물에 뛰어들기 전 ‘그때 엄마와 함께 죽을걸’ 하고 생각했다.

‘죽으려고?’

그때, 잎사귀는 한 여자를 마주쳤다. 그리고 혁명단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헉, 허억.”

잎사귀는 숨이 턱 끝까지 차는 것을 느꼈다. 달리고 또 달려도 거리가 멀어지긴커녕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큭!”

그리고 마침내 뒷덜미가 잡혔다. 잎사귀는 몸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강한 힘을 느꼈다.

바닥에 엎어진 잎사귀의 뺨 위로 까끌까끌한 돌 조각이 스쳤다. 잎사귀는 인상을 찌푸렸다.

“혁명단에 대해 아는 걸 말해.”

무서울 정도로 새까만 눈을 가진 남자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잎사귀는 곁눈질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사람이라 추측되는 이자는 자신만큼이나 어려 보였다.

그래 봐야 황제의 사람이겠지만.

“저는…….”

잎사귀는 겁에 질려 웅얼댔다. 그러자 남자가 몸을 숙여 자신의 소리에 집중했다. 잎사귀는 비식 올라가려는 입술을 간신히 끌어 내렸다. 그러고―

“엿이나 먹어.”

어차피 미련 없는 삶이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황제의 마지막을 못 보고 죽는다는 것뿐.

잎사귀는 혀를 깨물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황제는 만인지상의 고귀한 존재였다. 그들은 하늘의 자손이라고 불리며 때로는 알에서, 때로는 짐승의 배에서 태어났다.

그 누구도 황제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황제가 휘두르는 권력이 부당하다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황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이다.

“헉.”

황제는 침상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이 엎어진 물처럼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시체처럼 비쩍 마른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다.

“허억, 흐…….”

잠드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심장이 확 조여들며 격통이 일었다. 황제는 몸을 웅크린 채 겨우 숨을 골랐다.

개가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던 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황제는 핏발이 선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헐떡이던 숨이 잦아든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황제는 가슴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고름이 느슨하게 풀어진 옷깃 사이로 황제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손자국이 남은 몸이 창백했다.

“큭큭…….”

황제의 입술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작은 소리가 호탕한 웃음소리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살아 있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 기묘한 생기가 맴돌았다. 방금 전까지 고통에 헐떡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황제의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살아 있는 게 분명해.”

황제는 광인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햇볕이 강해지고 있었다. 침전 안으로 쏟아지는 빛이 황제의 머리 위까지 밝히는 듯했다.

“그래!”

황제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겠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제자리를 빙글 돌더니 별안간 뚝 멈춰 섰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 꿈에 나올 이유가 없지.”

꿈속의 개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래…….”

황제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맹목적인 검은색 눈이 낙인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너 이름이 뭐냐?’

‘…….’

황제가 ‘황제’가 아니었고, 개가 ‘개’가 아니었던 시절.

황태자의 앞에 부복한 꾀죄죄한 아이는 대답 대신 까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이름이 뭐냐고.’

아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벙어리냐?’

‘저자에겐 이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대답을 하는 법도 없지요.’

대답은 아이에게서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옆에 선 내관(그는 현재 비서실장이 되었다)에게 시선을 두었다. 내관은 장차 황제가 될 이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순종적인 개입니다.’

‘개라…….’

그는 비죽 웃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짐승의 이름이 붙여진 줄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그렇군.’

“공작을 불러와라.”

황제는 장지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침전 안으로 불어닥치며 황제의 옷자락이 뒤흔들렸다.

“공작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침전 앞에 서 있던 궁인은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예. 폐하. 분부 받들겠습니다.”

“급한 일이니 곧장 내 침전으로 들라 일러.”

말을 마친 황제는 곧장 침전 안으로 발을 돌렸다.

성큼성큼 내딛던 발이 조금씩 느려지고, 곧 그가 멈춰 섰다.

“네가 죽었을 리가 없지.”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운 자리. 늘 개가 서 있던 자리였다.

“곧 기일이군요?”

“…….”

서류를 보고 있던 차현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운전석에 앉은 윤재경의 색소 옅은 눈이 룸 미러에 비쳤다. 차현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윤재경을 바라보았다.

“아― 너무 노려보지 마세요. 저 손 떨려서 운전하다 사고라도 나면 어떡합니까아.”

“헛소리.”

차현은 단칼에 재경의 투정을 끊어 냈다. 재경은 차가운 목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샐쭉 웃었다.

“그래도 지킬 건 지키셔야죠오. 제가 말씀 안 드리면 매해 잊어버리시지 않습니까.”

무심한 차현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그는 불쾌함을 견디기 힘든 듯 눈살을 좁혔다.

“검사님 아버님이랑 형님 제사 말입니다.”

“하.”

차현은 짧은 탄성을 뱉어 냈다. 답지 않게 짜증을 숨기지 못한 탓에 사나운 표정이 만면에 드러났다. 그는 룸 미러로 보이는 재경에게 시선을 두었다.

“하하, 그렇게 쳐다보시면 진짜 무서운데요.”

재경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여전히 장난기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었지만 두렵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차현은 시선을 차창 너머로 던졌다.

“그래도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도움 안 되긴 매한가지지만, 제사 두 번 안 하게 한 방에 가 주지 않았습니까.”

“…….”

차현은 싸늘한 눈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버지와 형은 사고사 했다. 중앙선을 넘은 덤프트럭이 그대로 차를 받아 찌그러트렸고, 그 둘은 손쓸 새도 없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들이 한 번에 죽었을 때, 차현은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둘은 그렇게 죽어 버려선 안 됐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됐다.

“……아 참, 요새 아주 날아다니는 거 같던데.”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차현은 재경의 말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그는 힐끗 재경에게 시선을 보냈다.

“누가.”

“누구겠습니까아. 개죠.”

재경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축제 때는 좀 후회했는데……. 역시 개든 사람이든 오래 두고 볼 일이에요. 그쪽을 아주 들쑤시는 바람에 일을 빨리 진행할 모양이더라고요.”

차현은 까만 눈과 흰 피부 때문에 더욱 말갛게 보이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제 내내 자신을 경계하던 같잖은 행동도 함께 기억해 냈다.

자위할 때 차현을 생각한 것은 개 본인이었다. 차현은 그 일에 어떤 강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별로 좋은지 모르겠다’는 말에 손을 빌려줬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경계를 받다니.

“게다가 ‘익명의 후원자’와 연을 끊으려던 일도 무산되고 말이에요.”

“그렇겠지.”

차현은 픽 웃음을 흘렸다. 머리끝까지 치달았던 불쾌한 감정 위로 유쾌함이 흩뿌려졌다.

“이것 참.”

재경이 샐쭉 입술을 끌어 올린 건 그때였다. 그의 시선이 거치대에 꽂혀 있는 휴대폰에 닿아 있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다급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네요.”

황제는 폭탄 테러 직후 두문불출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차현을 불렀다는 것은, 예감이 좋지 못했다.

“가지.”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재경이 차로를 옮겨 달리기 시작했다. 차현은 힐끗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남자는 싸리비로 가게 주변을 쓸고 있었다. 온갖 쓰레기들과 약쟁이들이 몰려드는 이 거리는 매번 쓸고 쓸어도 더러워 보였다.

그건 이 거리에 살고 있는 남자 본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에라이.”

남자는 쓸어도 쓴 티가 나지 않는 길바닥 위에 싸리비를 던졌다. 끝이 시커멓게 변한 싸리비가 몇 번 퉁퉁 튕기더니 곧 쓰레기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

남자는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것을 노려보다, 이내 쯧 혀를 찼다. 그는 자신의 가게 앞이 더러워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아이고, 허리야…….”

그는 괜스레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다 문득 웬 고급스러운 신발 두 짝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거지?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

눈앞에 있는 것은 황실 쪽 사람이 아니었다. 그쪽 사람이라면 응당 제복을 입고 있거나 덩치가 산만 해야 할 텐데, 그의 앞에 선 남자는 곱상하디곱상할 뿐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고급스러우니 딱 도련님 같았다.

“웬 도련님이 여기까지 발걸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나가 보쇼. 삥 뜯기고서 울지 말고.”

그는 휘휘 손을 내저으며 눈앞에 선 도련님을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검은색 코트를 입은 도련님은 떠나기는커녕, 까만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느리게 달싹였다.

“당신이 폭탄을 제조한다고 들었는데.”

남자는 조금 놀랐다. 곱상한 도련님처럼 생긴 것치고는 목소리가 꽤 낮았기 때문이다.

“의뢰를 맡기려고? 흠, 도련님. 내 몸값은 도련님 생각보다 비싸.”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였다. 남자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엄지와 검지의 끝을 마주 대 동전 모양을 만들어 낸 남자는 그것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얼마나 생각하고 왔어?”

“…….”

그러나 도련님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이 도련님은 돈거래도 못 하나? 너무 곱게 자라 금전 감각이 없는 도련님이나 아가씨들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들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오랜만에 포식 좀 하겠구만.

남자는 히죽 웃으며 이 순진한 도련님에게 어깨동무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악!”

“황궁 테러에 쓰인 폭탄.”

순식간에 팔이 등 뒤로 꺾여 벽에 밀쳐졌다. 얼굴이 쾅 소리를 내며 벽에 쓸렸다.

남자는 간신히 눈을 돌려 도련님, 아니, 도련님인 줄 알았던 살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만들었어?”

남자는 겁에 질린 듯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그러나 개는 그게 마냥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머리를 굴리는 얼굴.

“아, 아니, 지금 애먼 사람을 잡고 무슨 소릴…… 큭!”

“…….”

개는 남자의 다리를 걷어찼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지만, 개에게 머리를 붙잡혀 넘어질 수도 없었다.

“이, 이보게. 사람 잘못 봤어.”

개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오는 길에 주워 온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있었다. 그건 남자의 입을 가볍게 해 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타닥. 가벼운 기척이 창문 위로 내려앉았다.

개는 창문턱에 무릎을 굽혀 앉아 코트의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

손끝으로 코트를 문지르자 버석하게 마른 핏물이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개는 코트 위에 코를 박고 킁킁댔다. 흐릿하지만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개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코트는 태성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았다. 피 냄새가 나는 코트를 방 안에 둔다면 눈치 빠른 공작이 개의 외출을 짐작할지 몰랐다. 총에 맞았을 때야 공작이 약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들키지 않았다 치지만.

개는 폭탄 제조범이 쏟아 냈던 정보를 되새기며 창문을 열었다. 겨우 꼬리를 잡았는데 외출을 금지당한다면 곤란했다.

달칵. 열린 창문으로 찬 바람이 쏟아졌다. 개는 가뿐한 몸놀림으로 방 안에 발을 디뎠다.

인기척이 없는 방 안은 적막에 감싸여 있었다. 습관적으로 방 안의 안전을 확인한 개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방문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양 문을 잡아 열었다.

“우악!”

때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태성이 파드득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눈구멍이며 콧구멍까지 커진 얼굴이 꽤 우스웠다. 태성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아, 아휴…….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

그러나 진정 놀란 것은 태성이 아닌 개였다. 개는 둥그렇게 뜬 눈을 두어 번 빠르게 깜빡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태성은 방금 반격 자세를 취했다.

평범한 사람은 ‘공격’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대해 ‘방어’ 태세를 보인다. 머리를 감싸 쥐거나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러나 방금 보인 태성의 행동은 분명.

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훈련을 받지 않고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가능한가?

판단은 빨랐다.

불가능했다.

“형, 그런데 갑자기 문은 왜 열고 나오신 거예요? 매번 창문 넘어서 나가시더니…….”

“…….”

개는 툴툴대는 태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언제 난 건지 모를 상처가 태성의 뺨과 턱 위에 잘게 남아 있었다. 딱지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들.

태성은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개에게 시선을 두었다. 선한 빛을 띠는 태성의 눈동자가 개의 까만 눈동자와 맞닿았다.

그 순간 태성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아.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개의 까만 눈이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개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다, 몸을 덮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고작 코트를 벗었을 뿐인데 싸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는 듯했다.

“이거.”

개는 태성에게 코트를 내밀었다. 태성은 불쑥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코트를 습관적으로 받아 들었다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형, 이건 왜……?”

“더러워졌어.”

개는 태성의 얼굴에서 묘하게 빗나간 곳을 응시했다. 개의 미간이 구깃 구겨졌다.

“헉, 벌써요? 일부러 때 타지 말라고 검은색 코트 드린 거였는데…….”

태성은 코트에 남은 더러운 흔적을 찾아 헤매듯, 코트의 양 어깨를 잡고 앞뒤로 돌려 보고 있었다. 허공을 쏘아보던 개의 시선이 태성의 얼굴을 향해 은밀히 돌아섰다.

“…….”

태성의 뺨과 턱에 난 상처는 넘어져 긁힌 것이었다. 태성은 계단이 많은 달동네에 살고 있으니, 어두운 밤길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반격 태세는 그저 태성이 드디어 제대로 된 무술 교재를 찾게 된 덕일 수도 있고.

“형, 이거 어디가 더러워진 거예요?”

“소매에 묻었어.”

개는 태성의 의문스러운 상처와 행동을 스스로 변명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변명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태성의 상처에는 의문을 갖지 않기로 했다.

“뭐가…….”

“내일 입을 옷이 필요해.”

개는 태성의 말을 끊고 제 할 말을 했다. 굳이 피가 묻었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서, 태성이 발발거리며 잔소리를 하게 두고 싶진 않았다.

“옷을 가져다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머리를 긁적인 태성이 말끝을 흐렸다. 검은 코트 자락이 태성의 손에 쥐어졌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형, 매일 어딜 가시는 거예요?”

“……?”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걸 왜 궁금해하는 거지?

태성은 아직 개가 공작의 수하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개의 행선지를 궁금해하는 건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주인이 함구하는 비밀을 아랫사람이 알고자 하다니.

“어, 형을 곤란하게 해 드리려던 건 아니었어요.”

개의 얼굴을 본 태성은 다급히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태성은 당황한 듯 눈을 굴리더니 이내 우물쭈물 무언가를 토해 냈다.

“그게, 그러니까……. 형, 요즘 바깥이 위험하거든요…….”

태성의 눈이 찰나의 순간 싸늘한 빛을 띠었다. 허공을 쏘아보는 눈동자가 증오로 번뜩였다.

“진짜 위험한 사람이 돌아다녀요.”

“…….”

개는 입을 벙긋거렸다. 태성의 낯선 표정은 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위험한 인간이 돌아다니기에 저러는 거지.

“형이 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때 태성의 고개가 개를 향해 홱 돌아섰다. 태성은 새끼손가락을 펼친 손을 개의 눈앞에 들이대더니, 이내 잔뜩 힘을 준 목소리로 말했다.

“꼭이요, 꼭.”

“응.”

개는 묘하게 박력이 느껴지는 태도에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태성은 대답을 듣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약속도 해 주셔야죠.”

“……?”

대답을 했는데 무엇을 더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개가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자, 태성은 어쩐지 답답하다는 얼굴로 양손을 수화기처럼 만들었다.

“형, 약속 몰라요? 이렇게 새끼손가락끼리 엮은 다음에 엄지로 도장 찍는 거요.”

태성은 제 새끼손가락 두 개를 엮더니 곧 엄지끼리 맞닿게 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저런 기묘한 수신호를 개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개가 태성의 손에 손가락을 엮기도 전에 문밖에서 익숙한 기척이 들려왔다. 개는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까만 눈에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엄청 일찍 오셨네…….”

“……?”

개는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귀를 기울이느라 태성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태성은 말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

“공작님 오셨으니까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 참. 그리고 이건 깨끗이 빨아서 드리고, 새 옷은 내일 가져다드릴게요!”

태성은 개가 대답할 새도 없이 후다닥 방을 나가 버렸다. 개는 혼자 남아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저택에 들어온 건 어떻게 안 거지?

달칵.

그러나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문을 밀어젖힌 공작이 곧장 방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제복 위에 걸친 긴 코트가 남자의 다리 위에서 펄럭였다.

그 순간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박제된 그림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던 공작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아.”

공작의 눈빛이 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훑어 내렸다. 개는 언제 공작을 기다렸냐는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공작의 손이 몸에 닿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찌릿 하고 정전기가 오르는 것 같기도 했고,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기도 했다. 아무튼 공작의 손이 몸에 닿으면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건 다 그날 이후의 일이었다.

개는 천하의 원수를 보듯 사납게 눈을 빛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왔군.”

개의 경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공작은 화사한 미소를 그린 채 뼈가 있는 말을 흘렸다. 개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운이 좋아.”

“…….”

개는 그 자리에서 눈동자만 굴렸다. 몸이 바짝 긴장했다.

설마 알아차린 건가?

하지만 공작은 그 이상 무언가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코트의 옷깃에 걸려 있던 체인을 풀었다. 손을 덮고 있던 장갑을 벗었고, 목 끝까지 채워져 있던 제복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벌어지는 제복 앞섶 사이로 남자의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제복 상의가 완전히 벗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는 완벽한 균형을 그리는 날개 뼈의 근육과 등을 바라보았다. 감시하는 시선은 어느새 감탄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개는 시선을 감춰야 한다는 것조차 잊은 듯 남자의 몸을 훑었다.

저런 몸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물론 저 몸은 암살자로서는 적합하지 않겠지만…….

“언제까지 볼 셈이지.”

개가 퍼뜩 놀라 눈을 들어 올렸다.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가 어느새 개를 향해 돌아서 있었다.

개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명화처럼 의뭉스러운 미소였다.

“계속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을 건가?”

“왜 화가 나셨습니까.”

분명했다. 남자는 화가 나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나 공작은 개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방 한가운데 붙박인 듯 선 개를 지나쳐 욕실로 향하려 했다. 개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화가 난 표정을 짓고 계신.”

“표정?”

개의 말을 끊은 남자의 한쪽 눈이 가늘게 접혔다.

그는 같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픽 웃음을 흘리더니, 몸을 돌려 개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

개는 계속 뒷걸음질 쳤지만 개를 따라오는 남자의 걸음이 더 빨랐다. 남자는 어느새 개의 앞에 서 있었다.

개가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고아하게 웃었다.

“말해.”

“보였습니다.”

개는 짤막하게 답했다. 최선의 답이었다.

개는 이제 남자의 표정을 읽어 낼 줄 알았다. 그가 진심으로 웃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개의 위에서 자위했을 때. 개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럼 질문을 하나 할까.”

남자는 허리를 숙여 개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코와 코가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개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그날 개에게 이상한 고문을 한 게 분명했다.

“지금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개는 마침내 남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때리셔도 됩니다.”

“틀렸어.”

시선이 떨어진 것은 찰나였다. 개는 눈을 홉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들끓던 남자의 눈빛에 미묘한 장난기가 서렸다. 개는 자신의 입술에 붙은 남자의 입술을 떼어 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윽!”

그러나 고개를 돌린 순간 턱이 잡혀 돌아왔다.

개는 자신의 양 볼을 강하게 압박하는 힘을 느꼈다. 악력에 입술이 벌어진 순간, 말캉한 혀가 잇새를 가르고 들어왔다.

개의 까만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당황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차현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조차 다물지 못하는 듯 보이는 개의 혀를 가볍게 빨아 당겼다.

“우, 읏……?”

개의 몸이 파득 뛰었다. 겹쳐진 입술 새로 의문 섞인 신음이 뭉개져 떨어졌다. 차현은 빠르게 깜빡이는 개의 새까만 눈을 보며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왜 화가 나셨습니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차현은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마주친 황제는 꽤 의욕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핏줄이 선 눈에선 생기가 돌았고 그의 주변을 떠돌던 술 냄새도 옅었다. 지금쯤 분노와 불안감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차현은 몸을 낮춘 채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체 누가 감히 황제에게 의욕을 불어넣은 거지?

‘내 개가 살아 있다.’

찰나의 순간, 차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그러나 희열에 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황제는 차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가 다시 차현에게 시선을 두었을 때 차현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작, 너는 내 개가 죽었다고 했지만…… 그건 네 착각이다. 네가 멍청하게 내 개를 놓친 게지. 그래. 내 개가 그렇게 나자빠져 죽었을 리가 없다.’

차현은 흥분해 말을 쏟아 내는 황제를 바라보다가, 그의 흥분이 소강상태에 이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폐하.’

‘네가 청장이 된 이후로 처음 내리는 명령이다.’

그러나 황제는 차현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해와 달, 그리고 십장생이 그려진 일월병(日月屛)1)을 등진 황제가 고압적인 어조로 명령했다.

1) 궁전에서 용상 뒤에 치는 병풍.

‘개를 찾아와.’

차현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다른 놈들은 믿을 수 없어……. 그래. 그 돼지 새끼들이 감히 내게 개를 죽이라 명령했지. 언제 내게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 사냥개라면서. 감히, 감히…….’

황제의 얼굴에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차현은 황제의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그자가 죽은 것은 제 두 눈으로 확인한.’

‘시끄럽다!’

황제는 바락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의자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이 내가 살아 있다 말하는데 누가 감히 아니라 고하는 거지! 공작, 내 말이 우스운가?’

‘송구합니다.’

개가 살아 있다고 확신은 못 하는군. 차현은 과하게 반응하는 황제를 보며 곧장 고개를 숙였다. 개가 황제에게 모습을 들킨 것은 아니었다.

‘네게 한 달의 말미를 줄 것이다. 그 안에 찾아내지 못한다면 청장 자리는 물론이고 네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차현은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비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과는 반대로 싸늘한 분노가 타올랐다.

“흐읏.”

차현은 무너지려는 개의 허리를 잡고 혀를 엮었다. 뿌리 부근을 문지르자 개의 눈동자가 녹을 것처럼 풀렸다. 멍하니 흐려진 눈동자가 차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현은 고개를 작게 비틀어 입술을 더욱 깊숙이 맞붙였다. 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렇게나 자극에 약한데 ‘좋은지 모르겠다’고 말했었다는 사실이.

‘그럼 질문을 하나 할까.’

질문을 던진 것은 순전히 충동이었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가까이 한 개의 표정을 살핀 것은 우연이었으며.

‘때리셔도 됩니다.’

‘틀렸어.’

체념한 듯 ‘때려도 된다’고 말하는 개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던 것은 본성이었다.

처음엔 가볍게 입술만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체념한 듯했던 개는 파드득 놀라 뒤로 물러설 테니까. 또한 개는 차현을 경계하느라 다시는 ‘표정이 읽혔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판단을 끝낸 차현은 입술을 겹쳤다.

그러나 의도와 다르게 맞닿은 개의 입술은 불쾌하지 않았다. 일전에, 그러니까 황궁에 테러가 일어났던 날 입술을 부딪쳤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까.

미약한 의문이 들지만 그보다는 놀란 토끼눈을 한 개가 더 구미를 당겼다. 혀를 섞은 것은 ‘조금 더 놀려 줄까’ 하는 심정에서였다.

“푸하, 읏.”

아직까지도 즐거운 기분이 들 줄은 몰랐지만.

차현은 개가 숨 막혀 할 때쯤 입술을 뗐다가 곧장 다시 겹쳐 왔다. 몇 번이나 숨통이 막혔다가 트이길 반복해, 개의 뺨이 붉어졌다.

차현은 개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지분거렸다. 막 자라나는 솜털 같은 머리칼이 손끝을 스치는 감각은 꽤 달가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빗자루처럼 빳빳했는데 말이다.

보송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차현은 목덜미 위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흣.”

개의 몸이 파득 떨렸다. 크게 뜨인 검은 눈에 당황이 역력했다.

차현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놀랍도록 직접적인 반응이었다. 하필 건드린 곳이 성감대였던 모양이다.

개는 지금 당장 도망쳐야겠다고 판단 내린 듯했다. 차현은 자신의 몸을 밀쳐 내려는 힘을 느꼈다. 그러나 후들거리는 팔로는 그를 제대로 밀쳐 낼 수 없었다.

차현은 어쩐지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곤란하게 만들어 볼까.

“우, 읏……!"

개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러나 공작은 자신이 무엇을 했냐는 듯 눈을 접어 웃고 있을 뿐이었다. 개의 새까만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공작은 개의 상황을 봐주지 않았다. 희고 고운 손이 바지 안쪽에 있는 개의 성기를 더듬어 올렸다. 뿌리부터 귀두 위까지. 가벼운 접촉에도 성기의 윤곽이 바지 위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개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학.”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다. 개는 막혀 있던 숨을 헐떡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니,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배 속은 칼에 저며지는 것처럼 당기고, 혀는 아까의 입맞춤으로 인해 녹아 버린 것 같았다.

“시, 싫…….”

개는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 단어를 웅얼거리며 공작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몸은 맘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혼자 하면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아닌…….”

지익. 바지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황급히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공작은 눈가가 붉어진 개를 보며 눈을 접어 웃을 뿐이었다.

“성의니 받아 둬.”

개는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이딴 성의는 줘도 받고 싶지 않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작은 망설임 없이 개의 성기를 브리프 안에서 꺼냈다. 빳빳하게 선 붉은 성기가 허공에 튀어 올랐다.

“흐, 으……!”

그리고 공작은 망설임 없이 개의 귀두를 둥글게 문질렀다. 개는 비틀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눈앞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머리 안쪽에서 반짝거리는 감각이 터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개의 손끝이 남자의 팔뚝 위를 긁어내렸다.

“아, 아. 싫, 안…….”

바짝 선 기둥을 뿌리에서부터 귀두까지 단번에 쥐고 흔드는 손이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이러다가 성기가 타 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목 뒤는 빳빳하게 서고 발끝은 둥글게 곱아 들었다. 개는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 안쪽을 모으려 했다.

“벌리고 있어야지.”

공작의 다리가 개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개는 헐떡이는 숨을 내뱉었다.

더 이상 하면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뇌가 녹을 것 같았다. 시신경이 바짝바짝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개는 남자의 팔뚝에 박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손톱 끝이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싫, 빨리, 흣…….”

공작은 고리 모양으로 만든 손으로 개의 귀두 아랫부분을 문지르고 있었다. 개는 배를 바짝 조이며 몸을 파들 떨었다. 성기 끝이 선액으로 젖은 게 느껴졌다.

빨리 놔. 싫어.

혀끝에 닿은 단어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빨리?”

“으, 흣……. 귀에 말하지…….”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공작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천천히 훑는 것 같았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오싹한 성감을 일깨웠다.

개는 어깨를 움츠리며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웃음소리가 귓가에 솜털처럼 내려앉았다.

“재촉하지 않아도 빨리 해 줄 테니까.”

"아, 아……?”

개는 순간 섬짓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방금, 그거…….

개의 흠뻑 젖은 눈이 공작을 향했다. 공작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개는 공작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싫, 그만……. 하, 하지……!”

그 순간 공작의 손끝이 개의 요도 위를 긁듯이 문질렀다. 개의 허리가 파르르 떨리며 입술이 벌어졌다. 개는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눈앞이 하얗게 질리고 무언가 반짝 튀었다.

“아, 아…….”

개는 몸을 옹송그렸다. 예민하게 솟은 살갗 위를 수십 개의 바늘이 찌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오싹한 성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개는 발끝을 오므리고 온몸을 발발 떨었다. 남자가 긁어내린 요도 구멍에서 픽픽 정액이 튀어 올랐다.

“흐…….”

잠시 물에 처박힌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개는 겨우 헐떡이는 숨을 내뱉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직도 온몸이 전기에 오른 것처럼 찌릿거렸다.

개는 멍한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그 순간, 누군가의 손끝이 머리 위에 닿았다. 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

“…….”

눈물로 얼룩진 탓에 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개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러자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물이 뺨 위를 구르다가 툭 떨어졌다.

개는 선명해진 시야에 공작의 얼굴을 담았다.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가 뚜렷한 개의 얼굴에 유약한 붉은빛이 선명했다.

“…….”

공작은 작게 입을 벙긋거렸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더니, 이내 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남자의 눈썹 사이가 천천히 좁아졌다.

“먼저 씻지.”

공작은 자신이 지탱하고 있던 개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비틀거린 개는 자신의 두 다리로 서 보려 했지만, 곧 균형을 잃고 융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개는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풀죽은 성기는 다시 설 기미가 없어 보였지만, 오싹했던 감각은 아직 개의 손끝을 적시고 있었다.

솨아아.

개는 물소리가 나는 욕실 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안개처럼 희부연 새벽의 햇살이 엷은 커튼 너머로 비쳐 왔다. 차현은 눈을 내리깐 채 장갑을 손에 끼웠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 제복을 몸에 걸치는 것은, 언제나 우스운 기분을 안겨 주었다.

순결이라.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욕망에 시달린다. 갓 태어난 아이는 숨을 쉬기 위한 욕망에 시달리며,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울음을 터트린다.

욕망을 좇는 것.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본성이었다.

“…….”

차현은 침대 위에 불쑥 솟은 작은 인형에 시선을 보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욕망 앞에 눈을 돌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초점이 흐려진 눈이 물에 빠진 조약돌처럼 반짝거리고, 발개진 뺨과 콧잔등은 물에 번진 물감처럼 투명한 빛을 냈다. 색색 숨을 내뱉는 입술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당황스러울 만큼 강력한 감각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이의 다리를 벌리고 좆을 쑤셔 넣고 싶단 천박한 감각.

그건 분명한 성적 욕구였다.

차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욕구를 억누르고 억눌렀던 부작용이 이렇게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고작 ‘개’에게 발정하다니.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곤 이불을 뒤집어쓴 개에게서 시선을 떼고 곧장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성큼 뻗어지는 긴 다리 근처에서 긴 코트 자락이 나풀거렸다.

달칵.

“…….”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방의 침묵을 깼다.

개는 눈을 번쩍 떴다. 잠기운 하나 없는 검은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었다.

완전히 나간 건가?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개는 문 너머로 들리는 발소리가 완전히 잠잠해질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였다. 그러고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선 후에야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개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개가 잠에서 깨어난 건 공작이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였다.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고, 그 소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개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개는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리지 못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어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개는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어제 공작이 개의 성기 위에 손을 댔을 때, 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자위를 하는 인간들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 버려 제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이걸 즐길 수 있지? 해양 생물이라도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을 한 직후 개는 당황했다. 손끝에 달짝지근하게 남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약 성분이 섞인 독을 삼켰을 때 같았다. 몸은 화끈거리고 정신은 붕 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건 꽤 만족스런 감각이었다.

“…….”

멍하니 사타구니에 시선을 두던 개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건 불합리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약이 불법인데 자위는 왜 불법이 아니지.

개는 뒤죽박죽 섞인 생각을 마구잡이로 곱씹으며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망칠까.

드디어 혁명단의 꼬리를 잡았다. 꼬리를 잡은 이상 머리를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개는 한 조직을 괴멸시키는 일의 전문가였고, 제대로 된 군사력조차 갖추지 못한 ‘혁명단’ 같은 조직쯤이야 한 손으로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공작의 저택에 몸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개의 존재를 눈치챈 군부가 개를 쫓는 것보다, 개가 혁명단을 깨부수는 것이 먼저일 테니까.

“…….”

창문을 바라보던 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든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됐다. 아직은 꼬리만을 잡은 상태였다. 몸통도 잡지 못했는데 벌써 이곳을 나가는 건 시기상조였다.

개는 흉터투성이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움켜쥔 듯이 주먹을 쥐어 보았지만, 손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개는 자신의 텅 빈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눈을 들어 올렸다. 가벼운 걸음 소리가 문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똑똑.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개는 대답 없이 문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그것이 익숙한 듯 곧장 문을 밀어 열었다.

“형, 계세요?”

방 안으로 들어오는 태성의 손에는 옷이 들려 있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개와 눈을 마주친 태성이 활짝 웃어 보였다.

“오늘도 일찍 나가실 줄 알고 서둘러 왔는데. 안 늦어서 다행이에요.”

“…….”

개는 옷을 들고 다가오는 태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성의 손등에 새로운 상처가 생겨 있었다. 손목에서부터 검지까지 이어지는 긴 자상.

일을 하다가 생긴 걸까. 태성은 시종 일을 하니 손을 다칠 일이 많을 것이다.

털썩.

“……?”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개의 앞에 옷이 쏟아졌다. 코트와 후드 티, 바지. 전에 총을 맞고 버려야 했던 것과 꽤 흡사한 모양의 옷이었다.

개는 놀란 눈으로 태성을 보았다. 태성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그거랑 비슷한 옷 못 입고 다니셨잖아요. 다 찢어져 가지고. 솔직히 저는 그 옷 마음에 안 들긴 했는데, 형이 좋아했던 것 같아서…….”

“잘 입을게.”

개는 옷을 손에 쥐었다. 새 옷 특유의 빳빳한 섬유가 손끝에 걸렸다.

“큼, 큼. 제가 형 생각해서 최대한 비슷한 걸로 골라 왔거든요.”

개는 헛기침하는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태성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개는 그런 태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태성의 손등에 남은 상처가 신경을 거슬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런데 저기 형, 어제 코트…….”

동시에 말문을 튼 개와 태성의 시선이 마주쳤다. 짧은 침묵이 방 안을 스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태성이었다.

“어, 형 먼저 말씀하세요.”

“너.”

개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목 끝까지 치달은 말은 ‘손에 난 상처는 뭐냐’는 쉬운 질문이었다.

“…….”

그러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태성의 순진한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개는 태성과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나쁜 짓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됐어.”

개는 목구멍에서 맴돌던 질문을 삼켰다. 그러고 태성에게 발언권을 떠넘겼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

태성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개는 도르륵 굴러가는 태성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태성은 입을 몇 번이나 달싹이더니, 곧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코트요, 조금 늦게 드릴 것 같아서요. 저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휴가거든요.”

개는 눈을 깜빡였다. 일주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개는 낯선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입이 쓰고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알았어.”

그러나 그뿐이었다.

개는 입고 있던 상의를 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벗겨진 옷 아래로 개의 흉터 가득한 몸이 드러났다.

“형, 근데 저 없어도 불편함 없으실 거예요. 여기에서 일하시는 분들 모두 저보다 일도 잘하시고 책임감도 있으세요!”

태성은 어쩐지 전전긍긍하는 얼굴로 개의 주변을 서성였다. 개는 후드 티를 끼워 입었다. 새 옷의 서늘한 감촉이 피부 위에 닿았다.

“어, 그리고 제가 애들한테도 다 말해 놨어요. 형 잘 모시라고!”

“응.”

후드 티를 입은 개는 바지 위에 손을 댔다. 태성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지체했지만, 폭탄 제조업자가 말한 자가 도망치기 전에 출발해야 했다. 한시가 급했다.

“형!”

개는 움칠 어깨를 떨었다. 바락 외치는 목소리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개는 미미한 짜증이 섞인 눈으로 태성을 돌아보았다.

“그때 약속해 주셨던 대련이요. 일주일 뒤에는 꼭 같이 해요.”

“…….”

태성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그런 약속을 했었다는 게 뒤늦게 생각났다.

‘……저랑 다음에 대련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딱 한 번만요. 정말 딱 한 번만.’

‘……내일은 안 돼.’

개는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개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옷 갈아입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급히 방문을 빠져나가는 태성을 붙잡자면 붙잡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개는 태성을 붙잡지 않았다.

“…….”

개는 태성이 주고 간 옷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일주일.

일주일이면 거의 모든 일이 끝난 직후일 것이다. 그러니 황제에게 돌아가기 전, 한 번쯤은 대련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도 황궁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개는 태성이 나간 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컥!”

두꺼운 시멘트 벽에 머리를 처박은 덩치가 맥없이 쓰러졌다. 개는 그의 몸을 밟고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폭풍우에 쓸려온 물고기 떼처럼 덩치들이 사방에 늘어져 있었다. 지금 이 공간에, 멀쩡한 것은 오로지 개와 뚱뚱한 남자뿐이었다.

“주, 죽어!”

“…….”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뚱뚱한 남자가 마침내 총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팔이 와들와들 떨렸다. 개는 미간을 가볍게 좁혔다.

달칵, 달칵!

그러나 방아쇠를 당겨도 들리는 건 빈 탄창 소리뿐이었다. 개는 주변에 널브러진 덩치들의 몸에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 오지 마! 씨발, 오지 말라고!”

개는 완전히 주저앉은 채 물러서는 남자에게 성큼 다가갔다. 달칵, 달칵. 개와 남자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빈 탄창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크악!”

주춤 뒤로 물러서던 남자의 등이 벽에 닿았을 때, 개는 남자의 팔목을 세게 걷어찼다. 남자의 손에서 떨어진 총신이 바닥을 쓸며 저 멀리로 밀려났다.

개는 오싹하리만치 새까만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와들와들 떠는 남자의 얼굴에 창백한 공포가 어렸다.

“혁명단에 무기를 제공했지.”

“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엎어져 있던 남자는 급히 자세를 바꾸어 무릎을 꿇었다. 기름이 잔뜩 낀 얼굴에 비굴한 미소가 어렸다.

개는 물끄러미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발을 움직였다.

“크악!”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개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을 짚은 남자의 손가락 하나를 발로 밟았다.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악!”

“무기 공급 경로를 말해.”

개는 남자의 중지와 약지를 발아래 두었다. 남자가 고통에 찬 눈물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남자의 시선이 괴물을 향했다.

“이번엔 두 개야. 다음은 세 개.”

개의 목소리는 낮았다.

“손가락이 모자라기 전에 말하는 게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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