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6/19)

7장

솨아아. 물소리와 향긋한 냄새가 가득 찬 욕실에서 후끈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울에 낀 희뿌연 김 너머로 어렴풋이 욕실의 풍경이 보였다. 나무 재질로 마감한 벽과 흰 수건이 걸린 수건걸이가 비춰졌다.

곧 온몸이 축축이 젖은 흰 얼굴의 남자가 거울 안으로 들어왔다. 얼기설기 자른 머리칼 끝이 목덜미와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수건을 빼 들었다.

“…….”

개가 머리를 탈탈 털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대리석 바닥 위에 원을 그렸다.

개는 젖은 발로 척척한 소리를 내며 욕실 앞까지 걸어갔다. 그러고 태성이 문 앞에 두고 간 새 옷을 주섬주섬 갖춰 입었다.

빳빳한 새 옷을 입은 개는 자신의 팔 위에 코를 박았다. 섬유 유연제 향이 은은하게 풍겨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개의 머리에서는 샴푸 냄새까지 풀풀 풍겼다. 개에게선 더 이상 그 꿉꿉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안심하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를 들어 올려 킁킁 냄새를 맡은 개는 이번엔 팔을 들어 겨드랑이 냄새까지 맡았다. 오늘은 샤워 후에 바르라는 이상한 점액(보디로션이라고 했다)까지 발랐기 때문에 향이 더욱 진했다.

개는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유독 심했던 악취는 이제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냄새가 문제였다. 이것저것 뒤섞인 진한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껏 암살자로 살아온 개는 냄새도, 기척도, 그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밤의 손님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애완견 같은 것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개는 황제의 적을 몰살하기 전까지는 공작의 신세를 져야만 했다.

만약 공작의 도움 없이 길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개는 얼마 가지 않아 존재를 발각당할 것이다. 바깥은 테러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군인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렇게 잡혀 버리면 황제를 만나지도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개는 머리를 탈탈 털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개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물 자국이 남았지만 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

개의 시선이 불현듯 창밖을 향한 것은 노란 햇빛이 발치에 닿았을 때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은 유유자적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개는 빛이 들어오지 않은 그늘 속에서 창밖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혁명단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

‘아, 알았어. 아는 대로 다 말할 테니까, 제발……!’

일곱 명의 깡패들 중에서 쓸 만한 정보를 가진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자는 비교적 최근에 시장 골목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과거의 혁명단과 지금의 혁명단이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고 전했다.

‘그들은 과거의 오합지졸들과는 달라, 쿨럭. 우리도 그 새끼들의 꼬리를 잡으려고 꽁지 빠지게 쫓았는데도 못 잡았다고……!’

뺨과 눈두덩에 열상이 나고, 열 손가락 중 여덟 손가락이 꺾인 채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듣기로는 국가 요직에 앉은 사람이 숨겨 주는 것 같았어. 내, 내가 사령관님께 들은 거니 확실해.’

사내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눈치를 살핀 것이 무색하게도 개는 감정을 숨긴 눈빛으로 사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사내는 지레 찔려 기억을 비틀어 짜냈다.

‘그, 그리고 이건 지금은 군부에서만 알고 있는 사실이야. 이, 이제 다 말했으니 날 놔 줘. 풀어…… 컥!’

개는 시끄럽게 소리치는 사내의 목을 쳐 기절시켰다. 이자에게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으니 더 깨워 둘 필요도 없었다.

“…….”

개는 머리를 털었던 수건을 침대 위에 대충 올려 두었다.

일곱 명을 일일이 고문하느라 시간이 많이 들었다. 그 탓에 불쾌한 냄새도 깊숙이 배어, 씻는 데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개는 침대에 걸터앉아, 들고 나온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예성이 준 사탕이었다.

개는 봉지째 구겨지고 녹아 서로 엉겨 붙은 사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나 이것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장 골목에 갔을 때는 깡패들을 쫓고 그들을 취조하느라 사탕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저택에 왔을 때는 외출한 흔적을 남길 수 없기에 버리지 못했다.

바스락.

개는 구겨진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홱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공작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개는 황급히 사탕을 바지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개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공작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왜 그렇게 놀라.”

공작은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았다.

개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며칠간 공작이 다가올 때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다.

남자에게선 찬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날씨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어느덧 제복 위에 코트를 걸쳐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개는 부쩍 가까워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더니 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개는 가는 숨을 뱉으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요새 안 하던 짓을 하는 것 같은데.”

“…….”

남자의 손끝에 젖은 머리칼이 걸렸다.

개는 숨도 쉬지 않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눈매가 시선을 끌었다.

“뭐, 나쁘지 않으니 됐나.”

그 한마디와 함께 남자의 손이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꽤 묵직한 무게감을 주던 손이 떠나가자 괜스레 아쉬워졌다.

……아쉽다?

개는 까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지금처럼 냄새가 나는 편이 사람답잖아.”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개는 움찔 떨며 안도했다. 머리 이야기였다. 다행히 오늘도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동자에 미묘한 장난기가 섞였다. 그는 손끝으로 개의 머리칼을 만지다가 손길을 귓가로 옮겼다. 개는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지푸라기 같았는데 말이야.”

“…….”

공작은 요즘 개의 머리 상태에 관심이 많아진 듯했다. 개는 이 패턴이 며칠 새 익숙해졌다. 긴장했던 몸에서 축 힘이 빠졌다.

남자의 손길은 꽤 부드럽고 섬세했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

남자는 공예나 만들기에 취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상태가 좋아진 개의 머리카락을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게 아닐까. 만족스럽게 완성된 작품을 만져 보는 공예가처럼 말이다.

젖은 머리카락이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마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목덜미 위를 스쳤다. 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간질간질한 감각은 남자의 손을 떨쳐 내고 싶은 마음과 그대로 두고 고분고분하게 있고 싶은 양가적인 감정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개가 두 가지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남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개는 힐끗 눈을 들어 올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개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고는 등을 돌렸다. 개는 멀어지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손끝에서 흐트러지는 머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

개는 머리를 만지던 손을 내리고 남자를 삼킨 욕실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에서 달큼한 냄새가 풍겼다.

바깥의 날씨는 점점 더 서늘해지고 있었다. 이제 거리에 얇은 긴 옷 하나만 걸치는 사람은 개밖에 없을 정도였다.

“…….”

그리고 시장 골목 또한 서늘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아니. 이곳은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개는 여전히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골목을 느릿느릿 걸어 나갔다. 그러나 오늘은 개에게 덤비는 깡패들도 없었고,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도망가는 기척도 없었다.

개는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아예 건물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

왜지?

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봤자 없는 기척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개는 하릴없이 시장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가게고 건물이고 모두 문을 굳게 닫은 채 불청객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

개는 2층 건물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외벽에 설치된 배관을 타고 올라가 창문을 뜯어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낡은 창문이라면 아예 깨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저 집 안에 있는 게 혁명단일지, 무고한 어린애일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개는 늦은 오후까지 골목골목을 뒤지고 다녔다. 그때까지 개가 발견한 것은 쥐 새끼 몇 마리(정말 쥐였다)와, 바퀴벌레 몇 마리뿐이었다.

“…….”

개는 허탈한 얼굴로 터덜터덜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나? 단연코 없었다.

개는 공작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생각했다. 왜 그 골목에 아무도 없었을까. 아니, 왜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허억. 아, 깜짝이야!”

공작의 방 창문을 넘어오며 한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형! 왜 창문으로, 읍……!”

“큰 소리 내지 마.”

개는 가뿐하게 몸을 띄워 순식간에 태성의 앞에 당도했다. 개의 상처 가득한 손이 태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태성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그리고 개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소리 안 지른다고 약속해. 알겠으면 고개 끄덕여.”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는 태성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툭 내려놓았다. 그러나 태성을 사로잡은 공포는 쉽사리 떠나가지 않았다.

“흐, 욱…….”

숨을 몰아쉬는 태성의 얼굴이 창백히 질려 있었다. 개는 그제야 태성의 이변을 눈치챘다. 개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형, 놀랐잖아요. 갑자기 창문으로 들어오시니까…….”

개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성이 먼저 입을 달싹였다. 창백히 질려 있던 태성은 손등으로 마른 두 눈꺼풀을 문지르더니 이내 씩 웃었다.

“방금 그건 비밀로 할게요. 비밀 맞죠?”

“……응.”

개는 태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태성은 어색하게 개의 시선을 피하더니, 자신의 창백한 뺨을 괜스레 매만졌다.

“형. 저 지금 퇴근해야 해서……. 음, 내일 뵐게요.”

“…….”

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못 했다.

태성은 개에게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이고는 곧 문을 닫고 나갔다. 개는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공작이 저택에 돌아온 듯했다.

개는 당장이라도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시장 골목이 싸늘했던 이유,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

‘갖고 싶은 게 있나?’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주겠다고 말하는 거다.’

어느 날 남자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개는 사냥감을 쫓는 짐승처럼 새까만 눈을 빛냈다.

혜화동에 위치한 ‘명물시장’은 황실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한 재래시장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며, 그만큼 내부에 많은 점포와 골목이 있었다. 이곳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시장의 끝을 보지 못했다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장소들이 늘 그렇듯, 이곳에도 묘한 괴담이 있었다. 시장의 깊숙한 곳에서 황실의 비밀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든지, 황제의 사생아가 자라고 있다든지 하는 것들.

물론 그것들은 소문에 불과했다. 인간을 불신하는 황제에게 사생아가 있을 리 만무했고, 비밀 실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시장통에서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곳에 비밀이 있다는 것. 그것만은 확고한 진실이었다.

처리장, 무법 지대, 비밀의 무덤. 이곳을 부르는 이름은 많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겁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겐 무력이 있었고 정보가 있었다. 나라조차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 누가 그들을 두렵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고작 5일 남짓한 시간 동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약에 취해 늘어진 약쟁이들도, 소문을 퍼트리길 좋아하는 촉새들도 모조리 모습을 감추었다. 지저분한 골목이 쥐 새끼 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이곳의 인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악마 같은 불청객을 떠올렸다. 그자는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눈에 띄면 있는 대로 잡아 고문하는 끔찍한 인간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진 테러는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곳의 사람들까지.

그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불청객이 또다시 찾아왔을 때, 그 희생자가 자기가 아니길 바라면서.

“……오늘은 안 오는 건가?”

하지만 오늘은 불청객의 머리털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자는 언제나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소식이 없었다.

“그놈 어제 허탕 쳐서 오늘은 안 오려는 건가?”

“카악, 퉷. 그 호로 새끼, 내 손에 걸리면 콱 조져 버리는 건데!”

낮이 되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히 이 무법 지대를 침범한 불청객을 씹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썅, 나한테는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새낀데 말이야.”

덩치 하나가 좌판에 앉아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함께 앉은 다른 덩치가 킬킬대며 종이에 싼 대마를 입에 물었다.

“네 말이 맞다. 그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새끼한테 꼼짝 못 하는 놈들이 병신 아니냐?”

덩치는 빈 잔에 술을 따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를 실수로 치고 말았다.

“아, 씹. 뭐야?”

덩치는 외려 자신이 방해를 받은 듯 성을 냈다. 눈에 띄게 낡은 후드를 입고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린 것은 그때였다.

“…….”

“…….”

개는 새까만 눈으로 덩치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들 것 같던 덩치가 움찔 몸을 떨었다.

“허, 거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니쇼!”

그는 혼자 바락 화를 내더니 곧장 등을 돌려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개는 자신의 뒤에 앉은 덩치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아침부터 이곳에 앉아 길거리를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앉아 있는 개에게 주인의 시선이 몇 번 닿았지만, 왜인지 쫓겨나지 않았다). 거리는 정오가 지난 후에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던 건가. 뒤집어쓴 후드 너머로 검은 눈이 번들거렸다.

개는 어젯밤 공작에게 ‘갖고 싶다’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시장에서 입었던 옷을 갖고 싶습니다.’

공작은 뜻밖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시장에 갈 때 입은 옷은 낡고 후줄근한, 당장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 가지고 싶은 건 없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개는 이것저것 가지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그 옷뿐이었다.

어제 왜 골목이 텅텅 비어 있었던 걸까. 그 의문을 곱씹던 개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이 너무 요란하게 움직인 것이다.

이런 일을 겪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황제의 적을 하나하나 추적하고 그들에게 죽음을 선물할 때, 너무 무분별하게 움직인 탓에 일을 망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개는 공포에 질린 표적들이 두더지처럼 땅 깊숙이 숨어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

그런 사정으로 현재 개가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식당에 앉아 있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은 효과가 있긴 한지 어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개는 제 뒤편에 앉은 사람들의 기척을 살폈다. 이번엔 저들을 잡을까. 하지만 술을 진탕 마신 사람을 고문하는 건 효율이 떨어졌다. 술을 마시면 고통에 무뎌지는 법이니까.

개는 다시 거리를 둘러보았다. 알음알음 혁명단의 정보를 얻는 것은 시간이 많이 들었다. 이곳에 혁명단원은 없는 걸까?

개는 세상에 없는 이상형을 찾는 사람처럼 몇 명의 덩치를 떠나보냈다.

그렇게 얼마간이나 사람들을 관찰했을까.

“…….”

개는 무게를 잡고 걸어가는 흉악한 인상의 덩치를 발견했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저자는 개가 상상해 온 혁명단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게다가 얼굴에 난 흉의 크기나 표정으로 보았을 때 꽤 큰 역할을 맡았을 것 같기도 했다. 저자라면 분명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

개는 소리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의 표적이 정해졌다.

곧장 남자의 뒤를 쫓았다. 꽤 멀찍이 떨어진 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기척이 없는 개의 걸음걸이 때문인지, 남자는 아직도 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로변을 걷던 남자는 어느 순간 골목으로 사라졌다. 개는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남자의 뒤를 쫓아 들어가려고 했다.

“…….”

“…….”

문득 개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기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개는 홱 고개를 돌려 행인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 또한 개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는 이자를 알고 있었다. 당황한 듯 짧은 신음성을 내뱉는 것을 보면 남자 또한 개를 아는 모양이었다.

“……비켜!”

남자가 튀어 나가듯 뛰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남자의 앞에 서 있던 덩치가 속수무책으로 떠밀렸다.

개는 달려 나가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으며 더욱 확신했다. 저자는 분명 일전에 개의 뒤를 밟았던 자다. 이틀 전 깡패 일곱 명을 상대했을 때, 개의 뒤를 쫓다 도망치듯 숨은 그자.

상황 판단을 끝낸 개는 곧바로 남자를 뒤쫓기 시작했다. 개의 머리 위에 씌워졌던 후드가 벗겨지고,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까만 눈이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의 것처럼 집요해졌다.

“헉.”

개는 순식간에 남자와 가까워졌다. 남자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개가 자신의 등 뒤를 바짝 추격하자 덜컥 숨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 낭패감과 공포심이 뒤섞여 떠올랐다.

촤악!

그리고 남자는 갑작스럽게 몸을 틀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흙바닥 위에 남자의 발자국이 스키드 마크처럼 짙게 새겨졌다.

남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좁은 골목 안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갔다. 그 뒤를 개가 쫓았다. 개는 조금도 헐떡거리지 않고 남자의 발자국 위를 밟으며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낮이나 밤이나 어두운 골목 위로 깜빡거리는 전등 빛이 희미하게 비춰 오고 있었다.

챙강.

누가 찬 건지 모를 빈 깡통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개는 깜빡거리는 전등 불빛 너머로 잡힐 듯 가까워졌다가 한순간 멀어지는 등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남자는 이곳의 지형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남자는 잡히려는 찰나마다 잔꾀를 부려 개의 손아귀에서 멀어졌다. 좁은 골목인 만큼 남자가 가진 지식은 큰 보탬이 됐다.

“하…….”

개는 작게 숨을 헐떡였다. 얼마나 남자를 뒤쫓고 뒤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치기로는 남자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는 멈추지 않았다.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가로등의 불빛이 정전되듯 꺼졌다, 다시 켜졌다.

개는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술 궤짝을 보았다. 초록색 병이 깨져 흐트러진 바닥은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그러나 개는 머뭇거리지 않고 유리 조각을 뛰어넘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유리 조각이 신발 밑창에 박히는 선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멀어진 남자는 갈림길 사이에 서 있었다.

놓치면 안 된다. 개는 속도를 높여 남자의 뒤로 근접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

가로등의 불빛이 암전되듯 꺼졌다.

개는 어둠속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가늠하기 위해 감각을 예민하게 세웠다. 남자가 발을 질질 끄는 소리와 헐떡거리는 숨소리,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까지 빠짐없이 들렸다.

달칵. 그리고 다시 불이 들어왔다.

개는 숨을 작게 헐떡이며 환하게 드러난 갈림길 사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개의 눈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길 간격이 좁은 탓인지 남자의 뜀박질 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왔다. 남자가 왼쪽으로 간 건지 오른쪽으로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자는 분명 비밀을 가지고 있다.

어설프게 개를 뒤쫓던 모습과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모습들. 그 단서만으로도 확실했다.

목적이 무엇이든 저자는 반드시 개의 뒤를 다시 쫓을 것이다.

갈림길을 번갈아 보던 개는 사납게 눈을 치뜨고 등을 돌렸다. 표적을 놓치는 것은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그러나 개는 한번 놓친 표적을 두 번 놓치지는 않았다.

개는 패배감으로 얼룩진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후드를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저택에 돌아온 개는 곧장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 창문 턱에 앉아 신발 밑창에 박힌 유리를 뽑아 떨어트렸다. 반짝거리는 유리 조각들이 정원수 사이로 떨어져 사라졌다.

신발의 처리를 끝낸 개는 곧장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흰색 양말 위에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개는 양말을 잡아 뺐다. 발바닥 군데군데 날카롭게 찔린 상처가 있었지만 모두 깊지 않았다.

“…….”

개는 상처 위를 손끝으로 꾹 짓눌렀다. 날카로운 통증에 몸이 움칠 떨렸다. 그러나 이미 딱지가 앉은 상처에선 피가 나오지 않았다.

상처를 확인한 개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피가 나오지 않는다면 구태여 상처를 더 살펴볼 이유가 없었다. 피 냄새도 나지 않고 핏자국도 남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상처는 눈에 띄지 않는 발바닥에 있었다. 공작에게 들킬 일은 없겠군. 개는 작게 안도했다.

완벽한 증거 인멸을 위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양팔을 교차해 후드 티를 들어 올리자 개의 배 위에 자리한 얕고 깊은 흉터가 드러났다.

“……!”

그러나 상의를 완전히 벗어젖히기도 전에 개의 눈이 둥그레졌다. 개는 후드 티를 가슴팍 위까지 들어 올린 채로 눈을 끔뻑였다. 놀란 얼굴이 문을 향해 홱 돌아갔다.

저벅, 저벅.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는 분명 공작의 것이었다.

개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벗다가 만 옷과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해진 바지, 바닥을 뒹구는 피 묻은 양말까지. 개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황급히 문과 창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문으로 뛰쳐나간다면 곧장 남자와 마주칠 것이다. 운이 좋으면 남자를 지나쳐 도망칠 수야 있겠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뒤를 잡힐 것이다. 그러니 문밖으로 나가 도주하는 것은 보류였다.

그렇다면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개는 피처럼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하늘은 보기만 해도 불안한 기류를 자아냈다. 개는 후드 티를 들어 올렸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긴,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더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날 것이다. 개가 창문으로 뛰어내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당장에 도주를 의심받고 또다시 공작에게 추격당하는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개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방 안을 서성였다.

공작의 발소리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1분. 아니, 1분도 되지 않아 공작이 들어올 것이다.

아직 자신의 뒤를 쫓던 그 수상한 자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이 밖을 나돌아 다녔다는 걸 공작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저벅, 저벅.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비구름을 몰고 오는 천둥소리 같았다.

개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숨을 곳이 없을까. 아니. 숨어 봐야 남자에게 금방 들킬 것이다. 옷에 밴 냄새는 지독했고, 남자는 이 냄새를 맡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아.”

순간 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호랑이에게 쫓기다가 동아줄을 본 사람처럼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개의 신형이 순식간에 방에서 사라졌다.

달칵.

개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흰 제복 위에 긴 코트를 걸친 차현은 습관처럼 자신의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그건 개와 지내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개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차현의 퇴근을 기다린 듯 시선을 보내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오늘, 개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차현은 아쉬운 얼굴로 미미하게 입술을 당겨 웃었다. 일부러 그 얼빠진 얼굴을 보기 위해 앞당겨 퇴근했는데 말이다.

솨아아.

물을 틀어 놓은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오늘도 자신이 한발 늦었던 걸까. 그는 문 열린 욕실 안으로 시선을 보냈다.

“……하.”

그러고 그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열린 샤워 부스 안에 선 개는 쫄딱 젖은 쥐 새끼 꼴이었다.

“지금 옷까지 입고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게다가 낡은 후드 티와 바지, 양말까지 모두 챙겨 입고 물줄기를 맞고 있으니 그 모양새가 더욱 처량했다.

차현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솨아아. 샤워 부스 안에 떨어진 물방울들이 바닥에 부딪쳐 퉁퉁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개는 흠뻑 젖은 얼굴로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속눈썹까지 젖은 탓에 앞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현은 개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선 그의 눈가를 엄지로 닦아 냈다. 그러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개가 맞고 있는 물줄기는 소름끼칠 만큼 차가웠다.

차현은 한숨을 내뱉고는 샤워기의 물을 껐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군.”

“…….”

개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물이 들어간 눈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남자가 마른 손으로 눈꺼풀을 닦아 냈기 때문인지 견딜 만했다.

그나저나 들킨 건 아니겠지. 냄새는 더 이상 안 나는데.

개는 초조한 감상을 숨기며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새까만 눈을 마주 보다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병이라도 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몸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다행스럽게도 공작은 냄새를 맡지 못한 모양이었다.

개는 고개를 기울여 축축하게 젖은 후드에 귀를 문댔다. 물이 들어가서 그런지 귀가 먹먹했다.

남자는 그런 개를 보더니 무언가를 집어 개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닦고 나와.”

개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머리 위로 떨어진 건 흰 수건이었다.

개는 자신의 시야를 가린 수건을 황급히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등을 돌려 욕실을 나가고 있었다.

개는 멀어지는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른 수건으로 귀를 문대 닦았다.

공작과 씻지도 못한 채 대면할 뻔했던 날로부터 하루, 개는 다시 시장 골목에 와 있었다.

어제 흠뻑 젖었던 옷은 태성의 손길 한 번에 마법같이 보송해졌다. 뭐라고 했더라. ‘세탁기에 넣었다가 건조기에 넣으면 금방 끝나요!’라나.

아무튼 태성 덕에 어제와 같은 옷을 입게 된 개는 식당 한편에 앉아 대로변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빼빼 마르고 인상에 탐욕이 가득한 노인과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산만 한 덩치들, 그리고 오물 바닥에 누워 있는 약쟁이들까지. 골목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아무래도 어제의 짧은 평화가 이들에게 큰 안심을 준 모양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위협받는 삶을 살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위험은 언제든 다시 도래할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위험이란 당사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척에 다가와 머무는 법이었다.

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저들 중 한 명이라도 잡아 정보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안심하고 있는 사냥감만큼 잡기 쉬운 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오늘 목표는 저런 잔챙이들이 아니었다.

개는 자신이 쫓는 하나의 기척을 잡아내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비켜!’

어제 잡지 못하고 놓쳐 버린 그 남자. 개는 그자의 기척을 좇고 있었다.

그러나 망부석처럼 앉아 몇 시간을 기다려도 소득은 없었다. 겁먹은 거북이가 딱딱한 껍질 속에 머리를 숨기는 것처럼, 그자 또한 모습을 감춘 것이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개가 몸을 일으켰다.

어제의 일은 그자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침묵을 지키겠지.

이쯤 되니 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그자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개는 후드를 눌러쓰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러고 길거리를 감시하듯 선 군인들의 눈을 피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공작의 취임식이 이틀 남은 날의 일이었다.

공작의 취임식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개는 오늘도 시장 골목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식당 안에 잠자코 앉아 표적이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았다. 개는 어두운 골목 안에 스며들어 이곳저곳을 파헤치고 다녔다.

그자는 분명 이곳의 지리가 익숙해 보였다. 분명 이곳에 살거나, 혹은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자일 것이다.

개는 어둠 속에 기척을 죽이고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표적과 비슷한 기척을 가진 이는 없었다.

하지만 개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을 계속해서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개는 오늘도 그자가 이곳에 오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

개는 무던한 얼굴로 막다른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더지 굴에 숨은 짐승을 기다리는 것은 개가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표적이 얼마나 잘 숨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거대한 고래도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에 몸을 드러내고, 지렁이도 비가 오면 땅 위로 올라온다. 어디에 숨든, 누가 숨든,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머리를 드러내게 되어 있었다.

개는 얌전히 몸을 돌렸다. 오늘은 이곳의 지리를 거의 다 외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개는 새까만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다음엔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작은 소음이 방 안을 울렸다. 죽은 듯 침대에 누워 있던 개가 불현듯 눈을 떴다.

“…….”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이 비춰 오는 곳. 그곳에 공작이 서 있었다.

공작은 눈을 내리깐 채 흰 장갑을 손에 끼우고 있었다. 장식용 칼까지 허리에 찬 공작은 탄신일 때만큼이나 화려해 보였다.

아.

개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쳤다. 오늘은 공작의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개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장갑을 끼운 그가 시선을 돌려 개와 눈을 마주한 건 그때였다. 선과 색이 뚜렷한 남자의 얼굴이 새벽빛을 받아 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이런.”

그는 개가 일어날 줄 몰랐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의도치 않은 일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은 개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늦게 올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명확하게 들렸다. 개는 어슴푸레한 빛 속에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분명 장난기가 뒤섞여 있었다. 개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남자는 늦게 귀가할 것이라 했다. 그것은 곧, 더 오래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

개는 잠시 표적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뒷모습을. 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럼…….”

“……!”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개는 자신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개는 놀라 황급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있어.”

남자는 개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개는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당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 어리벙벙한 얼굴을 보고 픽 웃음만 터트릴 뿐이었다.

그는 별다른 해명도 없이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개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형. 오늘도 나가세요?”

개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눈썹을 늘어트린 태성이 있었다. 개는 자신의 주변을 서성이던 태성의 손에 웬 옷이 한 벌 들려 있음을 확인했다.

“응.”

그러나 그뿐이었다. 시종인 태성이 손에 무언가 들고 있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개는 짧게 대답한 뒤 태성을 지나쳐 가려 했다.

“형.”

개는 시선을 돌렸다. 지나가려던 개를 불러 세운 태성이 무언가를 망설이는 얼굴로 눈을 굴렸다.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 ‘아으…….’ 하는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형, 솔직히 저택 안에서 산책하시는 거 아니죠?”

“…….”

개는 까만 눈을 깜빡였다. 흰 얼굴은 무감정해 보였지만, 사실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안 거지?

“저는 여기서 일하잖아요.”

태성은 침묵을 지키는 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변명처럼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데굴 눈을 굴린 태성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니까…… 저택을 돌아다니는 게 제 일인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형이 없으니까, 저절로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형이 옷을 그렇게 구린 걸 입는 게…….”

태성의 시선이 개의 옷에 닿았다. 개는 태성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허름하고 때가 탄 옷은 태성의 말 그대로였지만, 그게 태성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옷에 왜 관심을 갖지. 개의 얼굴에 미묘한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튼 밖에 나가실 거죠?”

그러나 개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태성이 개에게 한 발자국 다가오며 그리 물었기 때문이었다. 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이거 입으세요.”

태성은 자신이 들고 있던 옷을 내밀었다. 꽤 따뜻해 보이는 검은색 코트였다.

“오늘 엄청 추워요. 얇은 옷 하나만 입고 나갔다가는 감기 걸리실 거예요.”

“…….”

개는 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코트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엉겨들었다. 낯선 감촉이었다.

개는 잠시 코트를 만지작거리다가 몸 위에 걸쳤다. 그러자 후드가 코트 안에 말려 들어가 움직임이 불편해졌다. 개는 인상을 찌푸리고 어깨를 꿈틀꿈틀 움직였다.

“헉, 형 제가 꺼내 드릴게요.”

개의 기묘한 어깨춤을 본 태성이 황급히 등 뒤에 섰다. 태성의 손이 개의 어깨 위에 닿았다.

개는 일순간 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을 느꼈다. 암살자가 등을 내준다는 것은 목숨을 내준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형, 그런데 제가 괜한 걱정 하는 거 아는데요…….”

하지만 태성은 개의 목숨을 노리지 않았다. 태성은 개의 적이 아니었다.

태성은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황제의 개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자신을 그저 ‘좋은 형’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아이.

“몸조심하세요. 형이 아무리 강해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태성은 개의 코트 안에서 후드를 슬슬 꺼내며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공작님은 형한테 위험한 일이나 시키고…….”

“…….”

개는 움직임이 한결 편해진 것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눈을 내리깐 채 공작을 탓하는 태성의 얼굴이 불퉁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이 일을 시킨 건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스스로 일을 자처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구태여 이런 사정을 태성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개는 태성에게서 슬그머니 멀어졌다. 개와 눈을 마주한 태성의 앳된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갈게.”

개는 홱 몸을 돌려 창문으로 걸어갔다. 태성에게 외출을 들킨 이상 구태여 문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창문을 열자 태성의 말처럼 싸늘한 기온이 훅 끼쳐 왔다.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개는 잎사귀 없이 텅 빈 나뭇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창문턱에 발을 디뎠다. 그러고 곧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텅 비어 있는 나무를 밟아 봤자 눈에 띌 뿐이었다.

바닥에 착지한 개는 곧장 튕겨져 나가듯 담을 향해 뛰었다. 높은 담을 손쉽게 뛰어넘어 저택에서 멀어졌다.

개가 시장에 도착한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다.

개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기 전 후드를 눌러썼다. 후드에 반쯤 가려진 개의 까만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자는 오늘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개는 확신했다.

“……렇게 위험하다고요?”

“그래, 인마.”

개가 시장 골목 안으로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캡 모자를 눌러쓴 남자와 후드를 뒤집어쓴 어린 남자가 대화를 나누며 시장 골목에 가까워졌다.

“그놈은…… 됐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냐.”

“아, 왜 말을 하다 말아요.”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캡 모자를 쓴 남자, 통칭 ‘모자’는 픽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더 묻지 마라. 그냥 위험하니까 우리 둘이 같이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

“저희가 한 일들 중에 뭐 안 위험한 일이 있었나요. 매번 위험하다 해 놓고 멀쩡히 돌아왔는데 괜히 위협은…….”

모자는 후드를 쓴 동행인, 자신의 조직에서 가장 어린 잎사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신입이 들어왔으니 이젠 제일 어린 건 아닌가. 어쨌든 입술을 비죽이는 잎사귀는 성인이 됐다고는 하지만 아직 치기를 버리지 못한 어린애였다.

“어른 말 들어, 인마. 나중에 무릎 까졌다고 징징대도 ‘호오―’ 안 해 준다.”

“저도 됐거든요!”

남자는 애써 웃음기 어린 표정을 유지했지만 눈가가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리는 새까만 눈.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냥감, 혹은 표적으로 보는 듯하던 소름 끼치는 그 눈.

그자에게 아슬아슬하게 쫓겼던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오한이 들었다. 그자는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냥에 특화된 육식동물이나, 무쇠로 만든 기계 같았다.

“너 맨날 가던 곳이 어디냐? 거기 가서 정보나 좀 얻고 돌아가자.”

“아저씨 일은 안 하고요?”

모자는 힐끗 시선을 돌려 잎사귀를 보았다.

“어. 오늘은 네 일만 하고 돌아가자. 예감이 안 좋다.”

시장 골목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쩐지 오싹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 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앞서 나가는 잎사귀의 뒤를 쫓았다.

“…….”

그리고 불현듯, 모자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검은색 긴 코트를 입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남자. 긴 코트 때문인지 이곳과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모자는 자신도 모르게 잎사귀의 팔을 낚아챘다.

“아, 놀래라! 갑자기 팔을 왜 잡아요.”

“……어.”

그 순간 모자는 벼락같은 깨달음에 입을 크게 벌렸다.

“뛰어!”

개는 갑작스럽게 뒤를 돌아 멀어지는 두 명의 남자를 보았다. 한 명은 일전에 봤던 그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허둥지둥하며 달려 나가는 꼴이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물론, 하나든 둘이든 중요한 건 아니지.

개는 빠르게 남자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멀게 느껴졌던 거리가 한순간 좁혀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이리 와!”

모자는 다급히 잎사귀의 손목을 잡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골목은 두 사람의 그림자도 숨겨 줄 수 있을 것처럼 은밀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개가 바라던 것이었다.

캡 모자를 쓴 남자가 이곳의 지리에 밝다는 이점은 이제 소용없었다. 개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시간 동안 이곳을 누볐고, 외웠다. 어디가 인적이 드문지, 어디서 고문해야 조용하게 처리할 수 있는지도 이젠 안다는 말이었다.

개는 토끼를 모는 사냥개처럼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유유히 몰아갔다. 그들은 자신이 개에게 몰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개의 의지에 따라 순순히 움직여 주었다.

“허억, 헉.”

모자는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척을 의식했다. 타닥. 일부러 내는 듯한 뜀박질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모자는 급히 숨을 몰아쉬며 뺨을 문질러 닦았다. 살이 아릴 정도로 날씨가 추운데 관자놀이 부근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라면 곧 잡힐 것이다.

도망치는 쪽의 체력은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추격자의 뜀박질 소리는 일정했다. 이대로라면 분명 잡힌다. 그렇다면…….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천천히 말을 토해 냈다.

“무슨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헉, 흐……. 갑자기 무슨 소릴…….”

앞서가던 잎사귀가 뒤를 돌아보려 했다. 모자는 주먹을 꽉 쥐고 목소리를 높였다.

“뒤돌아보지 말라고!”

“아, 알겠어요.”

잎사귀는 모자의 고함 소리에 놀란 듯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놀란 잎사귀를 달래 줄 시간은 없었다. 모자는 달리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기 시작했다.

“계속 뛰어. 계속, 멈추지 마.”

모자는 멀어지는 잎사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로 가뿐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

그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개에게 온몸을 부딪쳤다.

개는 갑작스럽게 부닥쳐 온 남자를 피하지 못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언가 발에 부딪혀 우당탕 넘어지고 쏟아지는 굉음이 들렸다.

“큿.”

개는 눈살을 찌푸린 채 위를 보았다. 캡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개의 몸통 위에 앉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개의 까만 눈에 흉흉한 빛이 떠올랐다. 약한 자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남자는 개를 붙들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개는 순식간에 몸을 뒤집어 남자를 자신의 아래에 깔았다. 그러고 그의 머리칼을 잡아 바닥에 내리찍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남자의 입술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흑!”

“혁명단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

개는 싸늘한 검은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탓인지 정신을 못 차리고 웅얼댔다.

“몰라. 모른다고.”

“네가 혁명단에 대해 모른다면.”

개는 단숨에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신음하던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개는 커다래진 남자의 눈을 내려다보며 무감정하게 통보했다.

“나는 지금 널 죽이고 저 남자를 쫓아갈 거야.”

“…….”

남자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남자가 미친 듯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위에 올라탄 개의 몸이 거세게 흔들릴 정도였다.

“난 모른다고! 모른다니까!”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자의 얼굴은 언제나, 하나같이 추했다.

개는 자신의 얼굴로 뻗어진 남자의 오른손을 잡아 꺾었다.

“아악!”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야.”

개는 한 손으로는 남자의 오른손을 비틀고, 다른 손으로는 맥박이 뛰는 목을 붙잡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남자는 고통에 헐떡였다. 그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말없이 개를 올려다보았다. 오싹할 정도로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뭘…….”

“넌 혁명단원이야.”

개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무감한 얼굴로 남자를 정의했다. 그러자 남자는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자는 혁명단원이다.

개는 아무런 감정도 묻지 않은 흰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혁명단은 어디에 근거지를 두고 있지.”

황제의 적은 명령 없이도 즉살 처분 하는 것이 원칙이다. 개는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꺾어 죽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흣, 물어보고 싶은데.”

“……?”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반문이었다. 개는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왜 혁명단을 쫓는 거냐.”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남자의 얼굴에 묘한 기류가 스쳤다. 어떻게든 반격을 할 것처럼 비장해 보였다.

그러나 오른손이 부러지고 목이 잡힌 남자가 개에게 깔린 채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개는 대답을 할까, 아니면 하지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곧 판단을 내렸다. 표적이 죽기 전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았음’을 후회한다면 좋지 않을까.

“나의 주인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즉결 처분이 원칙이다.”

개는 짧게 답변했다.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큭.”

예상외의 것이었다. 개는 기침하듯 웃음을 터트리는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역시 그랬나.”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예감이 등골을 스쳤다. 개는 남자의 왼손에 들린 검은 총신을 바라보았다.

“……!”

개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멀어졌다 하더라도 총알을 피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피슉!

소음기를 낀 총에서 총알이 발포되었다. 어두운 골목 안에서 피가 튀겼다.

순백색의 홀 안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여유로운 얼굴의 사람들은 저마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유유히 홀 안을 걸어 다녔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세 개 달려 있었는데, 홀 전체를 빛낼 정도로 반짝거렸다.

“……새로운 바람이 불지 않겠어요?”

“호호, 그렇겠죠. 폐하께 신임을 받는 젊은 인재니까요.”

흰 대리석으로 지은 이 호텔은 외벽도 내벽도 모조리 하얗기만 했다. 그야말로 사치의 표상이라 해도 무방했다.

‘황제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지어진 황실 소유의 호텔. 정재계의 인물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이곳에서는 지금 파티가 한창이었다.

다만 이 파티의 주인공은 황제가 아니었다.

“차현 검사장……. 어이쿠, 이젠 총장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렇게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현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사르르 접힌 눈꼬리와 반듯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 위로 샹들리에의 빛이 쏟아졌다. 차현 앞에 선 언론사 사장은 잠시 넋을 놓은 듯 입을 벌렸다가, 곧 큼큼 헛기침했다.

“검찰청에도 드디어 변혁이 일어나겠군요. 전 총장은 아무래도 문제가…….”

그러나 그가 더 말을 붙일 시간은 없었다. 그가 넋을 놓았던 사이에, 기회를 노리던 또 다른 이가 차현의 옆에 섰다. 차현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해 나갔다.

홀 안 곳곳은 대한제국의 휘장이나 크림색 생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단정한 유니폼을 걸친 웨이터들이 은쟁반을 들고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샴페인을 권했고, 손님들은 기꺼이 잔을 받아 들었다. 사람들의 취기가 오를수록 이곳의 분위기는 더욱더 화기애애해졌다.

군인들이 나돌아 다니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바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차현은 자신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화사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비싼 드레스와 시계, 구두를 걸친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깥의 상황에는 무관심했다.

“새로운 총장님을 위해 우리 술을 들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그들은 이런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데 익숙해 보였고, 누군가를 억압하여 만들어 낸 이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도 보아라. 황궁에 테러가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앞날에 대한 일말의 걱정도 없이 새로운 권력과 결탁하기 위해 부나방처럼 달려들고 있지 않은가.

차현은 입술을 끌어 올려 부드러이 웃었다.

“이렇게 축하해 주시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입에 발린 말은 지겨웠다. 차현은 샴페인 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잔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는 이런 장소에서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저 투명한 잔 안에 누가 무슨 짓을 해 놓았을 줄 알고 겁도 없이 마신단 말인가.

“잠시 폐하께 보고해야 할 일이 있어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차현은 텅 빈 잔을 내려놓는 사람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를 붙잡은 채 몇 날 며칠이고 떠들 기세던 사람들이 ‘폐하’라는 호칭에 움찔 몸을 떨었다.

“하하, 폐하를 뵈러 가셔야 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못다 한 이야기는 이따가 다시 나누기로…….”

사람들은 아쉬운 얼굴로 차현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차현은 그들에게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짧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사실 황제를 만날 일은 없었다. 그저 이 지겨운 자리를 뜨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인기인은 피곤하겠구만그래.”

차현이 채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앞에 섰다. 차현은 희끗한 머리를 반듯이 빗어 넘긴 노인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네 주변에 사람이 조금 많아야지. 더 일찍 인사하지 못한 걸 용서하게.”

그는 얼마 전, 자신의 딸과 취임식에 함께 자리하겠다던 감사원장이었다.

차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감사원장은 황제가 칩거에 들어갔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자에겐 황제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닙니다. 먼저 찾아뵀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차현은 가볍게 묵례하며 감사원장의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긴장한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차현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내 딸아이가 자네의 취임식에 가고 싶어 하더군.’

저 여자군. 차현은 건조하게 판단했다.

“아니야, 자네의 취임식인데 내가 찾아가는 게 맞지.”

감사원장은 손을 휘휘 내저었으나 내심 차현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유망한 남자가 늙은 권력을 대우해 주는 것은, 그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과 같았다.

감사원장은 샹들리에 불빛을 등진 차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네에게 축하주도 못 권했구만.”

“괜찮습니다.”

차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감사원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그와 어울려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얘야, 이리 와 봐라.”

감사원장은 차현의 거절을 받아들이는 대신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내내 근처에 서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차현을 넋 놓고 바라봤다는 사실을 들켜 부끄러운 건지 얼굴을 조금 붉히고 있었다.

“내 딸일세. 인사하게.”

감사원장의 딸은 조용하고 겁이 많아 보였다. 저런 아비의 밑에서 자랐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러나 차현의 이목을 끈 건 그뿐이었다.

차현의 웃는 얼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얘기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아. 바, 반갑습니다.”

여자는 차현과 눈도 못 마주치고 대답했다.

감사원장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쯧 혀를 찼다. 여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내 자식들이 숫기가 없어 말이야. 자네가 이해하게. 서로 인사도 했으니 이제 축하주를 들까 하는데. 이봐!”

감사원장이 손을 들자, 주변을 서성이던 웨이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퍽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하마터면 조소가 튀어나올 뻔했으나 차현은 입술을 간신히 끌어 내렸다.

“함께 건배하자고.”

웨이터에게서 샴페인 잔을 건네받은 감사원장이 차현의 앞에 하나를 내밀었다.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황금색 샴페인을 내려다보던 차현은 다시 한번 거절하기 위해 입을 뗐다.

“저는.”

“어허, 어른이 줄 때는 그냥 받는 걸세.”

차현은 그림처럼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원장을 내려다보았다.

뒤늦게 이 늙은이를 공경하는 척했던 건 자신의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자를 가장 먼저 권력에서 도태시켰어야 했을지도.

“한 잔만 받겠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차현은 감사원장이 내민 술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원장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미소가 떠올랐다.

술을 들이켰다. 어쩐지 제가 아는 것과는 미세하게 다른 맛이 느껴졌다.

차현은 이런 종류의 약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미약.

차현이 공작이 아니었으며, 가문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차남이었을 적. 그는 이 바닥의 인간들에게 꽤 만만하고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이제 자네도 총장이 되었군. 정말 축하하네.”

차현은 빈 술잔을 입술에서 뗐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내걸고 감사원장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 자식까지 팔아먹는 사람이다. 아마 감사원장은 남모를 꿍꿍이가 있을 테지만, 그가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차현은 오래지 않아 그가 분통을 터뜨리며 홀을 나가길 기대했다.

“흣…….”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길목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자신의 팔을 움켜쥔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자가 총을 꺼내 들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과민 반응 하고 말았다.

총알을 맞은 사람이 살아남는 경우는 단 두 가지다. 하나는 미리 튼튼한 방탄복을 입어 둔 경우, 다른 하나는 총알이 운 좋게 급소를 피해 간 경우.

어쨌든 총알은 발사되었다. 개는 방탄복 따위 입지 않은 상태였으니, 살기 위해서는 총알이 빗맞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총알은 급소를 지나지 않았다. 그건 개가 남자의 오른손을 꺾어 두었기에 일어난 행운이었다. 남자는 왼손을 다루는 데 능숙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총알은 방향을 잃고 개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를 입히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살과 피가 터지는 소리가 나고,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개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뜨거운 피가 흘러나와 손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개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뒤를 쫓았지만, 총을 든 이를 쫓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대로 조준하지도 않고 쏜 눈먼 총에 몇 번이나 맞을 뻔했다.

“…….”

개는 낡은 후드 티의 팔 부분을 뜯어 묶어 둔 상처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총을 맞았을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뒤늦게 밀려왔다. 팔이 욱신욱신거렸다.

개는 이를 악물고 허공을 쏘아보았다. 이번엔 꼭 붙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표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건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개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기도 했다.

개는 가라앉은 얼굴로 저택의 담을 뛰어넘었다.

세 번을 놓쳤다. 세 번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자는 이제 다신 시장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무슨 수로 잡아야 하지? 본거지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개는 창문을 넘어 공작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달이 높게 뜬 늦은 밤, 방 안은 어두웠다.

공작은 취임식이 있다고 했다. 미리 예고한 대로 늦을 모양이었다.

개는 가라앉은 눈으로 방 안을 살피다 곧장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

개는 상처를 묶었던 천을 풀었다. 그러자 상처에 말라붙었던 천 조각이 ‘직, 지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드러난 상처는 누군가 헤집은 것처럼 흉하게 찢어져 있었다.

개는 굳은 피를 물로 닦아 냈다. 아릿한 고통이 피어오르더니 곧 세면대 위로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개는 입술을 질근 깨물고 상처 주변에 남은 불순물을 모두 씻어 냈다.

어둠 속에서도 개는 어렵지 않게 움직였다. 넓은 방을 가로지르는 개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달칵.

개는 공작이 자신의 발목을 치료했을 때 꺼내 보였던 구급상자를 찾았다. 그곳에는 역시나 지혈제와 붕대가 놓여 있었다. 개는 상처 위에 지혈제를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

치료를 모두 마친 개는 터덜터덜 걸어 침대 위로 엎어졌다. 그러고 자책하듯 자신의 머리를 침대 위에 비비다가, 이불을 구깃구깃 쥐어 보기도 했다가, 곧 몸을 뒤집어 흉흉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자는 혁명단의 일원이 확실했다. 아마 먼저 도망친 어린 남자 또한 혁명단원이겠지.

혁명단원 두 명이 그곳에 온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단원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이득이 있는 장소라든가, 아니면 그곳에 무언가를 숨겼다든가.

하지만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정체를 발각당한 이상 빠르게 철수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빨리,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개는 힐끗 창문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만약 아주 늦게 온다면…….

그때 번들거리던 개의 눈이 커졌다. 문밖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평소와 조금 달랐다. 묘하게 빨라진 것 같기도 하고,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한 걸음걸이였다.

달칵.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개는 고개를 돌려 문가를 보았다. 그리고―

“나가.”

“……?”

그곳에는 남자가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비틀거리던 남자가 나지막이 욕을 지껄이더니 곧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개는 단숨에 가까워지는 남자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가라니. 어디로 가라는 거지?

“나가라 했을 텐데.”

그러나 그는 개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침대의 머리맡을 짚고 몸을 굽혔다.

끼익. 남자의 무게에 스프링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느껴졌다. 그러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

한 뼘 정도 떨어진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냄새. 화한 향수 냄새로도 감춰지지 않은 이 지독한 향기는 분명 약의 냄새였다. 정확히는 미약 말이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남자의 눈이었다.

싸늘하게 식어 있을 거라 생각한 눈은 기묘한 열락을 띠고 있었다. 팽창된 동공과, 초점이 맞지 않는 듯 찌푸려진 눈가.

그 사실을 깨닫자 가까이 붙은 남자에게서 열기가 느껴졌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옷자락에서는 추운 겨울의 냄새가 풍기는데 몸은 이토록 뜨겁다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미약의 효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이런 일을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개는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온 숨소리가 예민한 개의 귓가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개는 어쩐지 초조해져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다친 팔 탓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나가라고…….”

공작이 말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개는 퍼뜩 눈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자유로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단단하고 곧은 손 아래 아름다운 얼굴이 감춰졌다.

희뿌연 달빛을 받은 남자의 얼굴은 오묘한 음영을 그리고 있었다. 작게 떨리는 손끝과 굳게 내리감긴 채 깔린 긴 속눈썹. 달빛을 받아 창백하리만치 빛나는 피부.

개는 이만큼이나 연약해 보이는 공작을 처음 보았다.

신화 속 한 장면을 그려 낸 것 같은 풍경은 단숨에 개의 시선을 빼앗았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검푸른 눈동자가 별안간 개를 직시하지 않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쳐다볼 만큼.

“……!”

그의 향수 냄새가 한순간 훅 더 가까워졌다.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의 눈에 사납고 고압적인 감정이 넘실거렸다.

사륵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개의 뺨을 건드렸다. 달빛을 등진 얼굴은 완연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눈 감아.”

눈을 감으라고? 개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암살자에게 눈을 감으라는 요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공작은 알 것이다.

“…….”

그러나 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남자의 찡그려진 눈가와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숨소리, 초점이 흐려진 듯한 눈동자. 그런 것들이 생소한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개는 낯선 것에 쉽게 익숙해지는 동물이 아니었다.

“읏.”

움찔 몸이 떨렸다. 남자의 옅은 신음이 귓바퀴를 느리게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시각이 차단된 순간부터 청각과 후각, 촉각의 신경이 더욱 예민해졌다.

“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남자가 개의 귓가를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개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타인의 은밀한 정사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

달칵, 지익.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이건 타인의 은밀한 정사를 지켜볼 때의 기분이 아니었다. 여태껏 수많은 사람의 추태를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대체 왜 오늘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남자가 아주 강력한 미약을 먹었기 때문일까. 약의 기운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 걸까.

“……빌어먹을, 늙은이.”

답은 알 수 없었다. 지금 개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남자의 몸이 아주 뜨겁다는 것, 그리고 남자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자극적이라는 것.

“……흣.”

차현은 울룩불룩 핏줄이 돋은 검붉은 성기를 움켜쥐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쾌감보다는 욱신거리는 고통이 먼저 내리쳤다. 차현은 이를 악물었다.

미친 늙은이. 연회장 한가운데서 이딴 약을 쓰다니.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었다 해도 그렇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것은, 차현이 이딴 발정제에도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감사원장의 기대에 찬 얼굴이 점점 의아함으로 물들다가 초조함, 마침내 터질 듯한 분노로 가득 차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꽤 즐거웠다.

그러나 마냥 통쾌한 결말은 아니었다. 감사원장이 분노하며 연회장을 뛰쳐나갔다면, 차현은 뒤늦게 밀려온 약 기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

지금은 이 꼴이라 해도 말이다.

차현은 긴장한 듯 온순히 눈을 감은 개를 내려다보았다. 개의 흰 뺨과 흐트러진 머리칼, 그리고 붉어진 귓가를 보며 성기에 선 핏줄을 문질렀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성기를 뿌리까지 쓸어내린 차현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감았다.

“하아…….”

개는 자신의 손끝이 자꾸 움칠 뛰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았기에 다른 감촉들이 너무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축축하게 젖은 숨소리와 살성이 쓸리는 소리가 귀 안으로 박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개는 몇 번 실눈을 뜨듯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마다 희미한 달빛을 받은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개는 시트 위에 놓인 손을 주먹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이쯤 했으면 눈을 떠도 되지 않을까.

눈을 감고 있는 것은 개의 오묘한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가까이 붙은 남자의 몸이 뜨거워서 개의 머리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슥슥 살덩이를 문지르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소리가 너무 자극적으로 들렸다.

“읏…….”

간간히 튀어나오는 남자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도.

역시 눈을 뜨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개는 빠르게 판단했다. 그리고 어영부영 망설이지 않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개는 바로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서리 낀 유리창 너머로 보듯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다. 그러다 조금씩 시야가 밝아졌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놀란 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우선 남자의 얼굴이 여전히 가까워 놀랐고, 그다음엔 스스로가 차라리 눈을 뜨지 않는 편이 좋았 거라고 생각해서 더 놀랐다.

남자는 수음을 하고 있었다.

개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희미하게 드리워진 흰 얼굴 위에 외설적인 색깔이 뒤섞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공작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눈을 감아야 하나?

공작이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으니, 그대로 따르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개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본 똑같은 얼굴일 뿐인데 말이다.

“흣.”

그때 남자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멍하니 그 표정까지 지켜보다가, 뒤늦게 남자의 눈꺼풀이 스르륵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개는 다급히 눈을 감았다.

“이런.”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괜스레 찔린 개의 몸이 움칠 떨렸다.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들킨 건가? 만약 들켰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눈 떠.”

개는 자신의 뺨을 두들기는 두 손가락의 감촉을 느꼈다. 개는 남자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장 눈을 떴다. 까만 눈 위로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팔 들어.”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개는 아직 약 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린 남자를 보았다. 역시 눈을 뜬 걸 들킨 모양이었다. 이렇게 벌을 내리려는 것을 보아하니.

개는 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었다. 벌의 수위가 낮아 다행이었지만, 하루 종일 이 자세로 있으라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더 위로 뻗으라고.”

“……?”

개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무슨 의도로 지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옷 벗겨 줄 테니까.”

아. 그런 거였군. 개는 남자의 명령을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영문을 모른 채로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는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옷을 벗으면 팔에 감은 붕대가 드러난다.

남자는 붕대를 보면 당연히 의아해할 것이고, 왜 붕대를 감은 건지 물을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비밀스러운 외출에 대해서도 실토해야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됐다.

개는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했던 팔을 황급히 내려 양 옆구리에 딱 붙였다. 각 잡힌 차렷 자세를 보는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괜찮습니다. 저도 옷을 벗을 줄 알고, 남의 손이 몸에 닿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는 답지 않게 줄줄 변명을 토해 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더 미묘해졌다.

“남?”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개의 옷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다 치자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급해 보이던 남자는 약간의 여유를 되찾았지만, 역시 약 기운이 다 가시지는 않은 듯했다. 개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우연히 미약을 먹게 되면 개를 찾아왔다. 인간을 불신하는 황제는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가장 뒤탈이 없는 짐승의 입을 빌려 약 기운을 빼냈을 뿐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약에 취한 모습을 보여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놀랍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말해 줘야 하나.

“씻고 나와.”

그러나 개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뗐다. 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자의 명령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섰다. 그러고 개는 제 옷 위에 튀어 있는 희뿌연 점액을 발견했다.

“…….”

개는 물끄러미 옷을 내려다보다가 그 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옷 위로 미끄러운 액체가 번졌다.

잠시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개는 이윽고 얌전히 옷을 벗었다.

태성은 바닥에 풀썩 대자로 엎어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 거친 숨을 내뱉었다. 태성은 빙글 도는 시야를 가누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걸로 몇 번이나 진 거지. 이젠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자와의 대결에서 태성이 이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잡아.”

태성은 자신의 앞에 뻗어진 단단한 손을 보았다. 솔직히 이젠 다리도 덜덜 떨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약한 정신머리로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어.”

“헉, 제가 언제……. 흐, 지금 일어나려고 했거든요?”

태성은 땅을 짚고 일어나 후들거리는 다리로 섰다.

노르스름한 백열등 하나만 불을 밝히는 공간. 태성은 ‘흐아압!’ 하는 기합과 함께,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