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근주자적(近朱者赤)
6장
출근 직후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던 태성은 곧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잘 웃고 잘 떠들었으며, 개가 듣지 않아도 시답잖은 농담을 던져 댔다.
처음엔 그런 태성을 유의 깊게 살폈다. 아침부터 터트렸던 의미 모를 질문이나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이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곤두세웠던 신경은 곧 무뎌졌다. 태성의 눈에 남아 있던 눈물의 흔적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고, 그 자리엔 헤실헤실 웃는 표정만 남았다.
오후가 됐을 때는 가끔 시선이 갔고, 저녁이 됐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됐다.
개는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형!”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개는 시선을 돌렸다. 문 앞에 선 태성은 개의 시선을 받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
개는 인사 대신 빤히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태성은 개의 침묵을 마주하고도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거나 하지 않았다. 태성도 이젠 대답하지 않는 개의 태도가 익숙했다.
태성은 씨익 웃고는 곧장 문을 빠져나갔다.
탁.
방 안은 곧 고요에 잠겨 들었다.
개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평소의 태성이라면 남자가 집에 올 때까지 방 안에서 무언가를 떠들어 댔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희뿌연 노을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개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황궁과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의 어깨가 움칠 떨렸다. 개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일정한 보폭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개는 이 기척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공작.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개는 차가운 남자의 눈이 자신을 직시하는 것을 느꼈다. 문이 닫혔다.
“…….”
“…….”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개는 남자의 굳은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입을 달싹였다.
상황이 너무 다급히 돌아가 잠시 잊고 있었다. 개는 남자와 입술을 부딪쳤던 기억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 덕에 입술이 찢어졌었는데. 딱지가 진 자리가 갑작스럽게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개는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눈이 사나운 빛을 띠자 남자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너른 방 안을 가로지르는 남자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변명을 생각해 두라고 했을 텐데.”
“…….”
개는 가까워진 남자를 경계하듯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개가 채 물러서기도 전에 턱이 잡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군.”
강한 악력으로 붙잡힌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개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마주했다.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말해.”
“읏.”
손의 악력이 더욱 강해졌다. 개는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개는 남자가 자신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나는 네게 윤재경과 함께 기다리고 있으라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네 멋대로 사라졌지.”
그럼에도 그 목소리는 귀에 박히듯 들어왔다. 개는 남자를 쏘아보던 눈에서 어느 순간 힘을 풀었다.
“어딜 갔다 온 거지?”
“…….”
개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 건지 깨달았다. 다물렸던 개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탄신 연회를 망치려는 세력을 만났습니다.”
얼어붙은 것 같던 남자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단정한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개는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행진식이 예정된 길목에 한 검사의 시체를 전시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하나의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고, 테러를 저지르려 한 것도 조직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황궁 테러의…….”
“잠깐.”
남자는 개의 턱을 붙잡았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뜨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들과 만나게 된 경위부터 설명해.”
“윤재경 검사가 제게 음식을 건넸습니다. 먹지 않을 음식이었기 때문에 버리러 가던 도중에 협박을 당했습니다.”
아름다운 남자의 눈이 개를 향했다. 개는 검푸른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협박?”
“제 등에 칼을 댔습니다.”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남자는 개의 턱을 완전히 놓았다. 남자의 얼굴이 멀어졌다.
“하…….”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곧 힐끗 개를 내려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를 짓씹었다.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군.”
“……?”
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남자를 올려다보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와 대치했던 자들이 황궁에 폭탄을 설치한 겁니까?”
남자의 얼굴에 떠올랐던 분노를 닮은 감정이 서서히 걷혀 나갔다.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개를 내려다보았다.
“…….”
그는 잠시 의미 모를 침묵을 지키더니, 곧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모르겠군.”
개는 눈을 크게 떴다. 모르겠다니. 심문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이런 중대한 사건의 심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리 없는데.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자들이 아예 잡히지 않았을 가능성.
“잡히지 않은 겁니까?”
“그래.”
남자가 곧장 대답했다.
개는 멍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속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왜 잡지 못한 거지? 그자들은 조무래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허술한 자들을 어째서.
“황궁을 테러한 일당은 잡혔어.”
“……!”
그러나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개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역광을 받은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심문이 다 끝나지 않았어.”
개는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심문이 다 끝나지 않았다니. 누가 책임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능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황궁에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는 정보를 알아낼 수 없는 사안은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어제 새벽부터 생각했던, 아주 근원적인 질문을 내뱉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역광에 흐려졌던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는 기척 없이 개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
바스락.
종이 구겨지는 작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개의 눈이 떠진 것은 그때였다.
개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구겨진 종이를 찻주전자 안에 넣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무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
“…….”
개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개는 물끄러미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는 탄신일 때 입었던 화려한 제복 대신, 평소에 입던 단정한 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일어났군.”
남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긴장했던 몸에서 자신도 모르게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탄신 연회가 엉망이 되고, 폭탄이 터지고, 남자와 몸싸움을 한다 해도 하루는 또다시 반복된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아직 늦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폐하를 만나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군.”
“…….”
개는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런 개를 마주 보더니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함께 가지.”
“아니요.”
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남자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직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개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황제를 보고 싶지 않아진 게 아니었다. 여전히 황제에게 자신을 왜 죽이려 했는지 묻고 싶었고, 대답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개의 새까만 눈이 흉흉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황제를 노리던 적들은 모두 자신의 손에 명을 달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남자는 비식 웃음을 흘리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개는 남자의 등을 눈으로 좇았다. 탁. 남자의 신형을 삼킨 문이 굳게 닫혔다.
“이곳에 배정받은 시종이 병가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개는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태성이 병가를 낸 모양이었다.
눈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아프기라도 했던 걸까? 희미하게 운 자국이 남아 있던 태성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오늘은 태성이 오지 않는 편이 좋았다.
개는 남자가 저택에서 멀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남자가 저택을 빠져나가 대문 밖을 나갈 즘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
개는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살폈다. 남자의 수하들이 내는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지만, 방 안을 감시하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불어왔다.
개는 순식간에 창문턱에 서 발돋움을 했다. 가벼운 몸을 날려 순식간에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올랐다.
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저택의 담을 뛰어넘었다. 아무도 개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저택을 빠져나온 개는 곧장 큰 도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제를 노리는 적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앞으로의 계획과 목적을 알아내고, 그 후에 모두 처리할 생각이었다.
황제의 적을 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개의 역할이었으니까.
개는 모든 것을 마무리한 후에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잡히지 않은 겁니까?’
‘그래.’
개는 자신이 끌려갔었던 폐건물을 떠올렸다. 그곳에 있던 덩치들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했지.
목적지를 정한 개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개는 기억을 되짚어 폐건물이 있던 산을 향해 움직였다.
✵
파삭, 파삭.
개는 산을 거슬러 올라갔다. 인적이 없어 구태여 기척을 숨기지는 않았다. 뛰어 올라가는 개의 옆으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개의 새까만 눈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한 개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가볍게 착지해 새까만 눈으로 폐건물의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
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멘트 바닥은 세월의 흐름을 증명하듯 벌어지고 갈라져 있었다. 갈라진 틈으로는 푸른 잡초가 머리를 내밀었다.
파삭.
개는 무성의하게 잡초를 밟으며 입구 앞에 섰다. 거대한 철문은 녹슬어 흉측한 모양새였다. 개는 노랗게 빛바랜 문고리를 꽉 잡았다.
구구구―
여닫이문을 힘껏 밀어 열자 요란한 소음이 쏟아졌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내부로 빛이 끼쳐 들어왔다.
개는 문 앞에 서서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건물 안은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지저분한 자재들과 흙먼지만이 나뒹굴 뿐이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훅 밀려들어 왔다.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 밑창에 흙먼지가 쓸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어두운 건물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
개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바닥에 옅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건 마지막까지 깨어 있던 덩치의 살갗을 얇게 베어 냈을 때 떨어진 것이었다.
물끄러미 핏자국을 내려다보던 개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미세한 흔적을 제외하면 이곳에는 아무런 자취도 없었다. 인위적으로 지워 내기라도 한 것처럼.
개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이곳이 본거지가 아니었던 걸까?
개는 분명 이곳이 그들의 본거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분위기라든가, 손때가 묻어 있던 시설이 그러한 인상을 남겨 주었으니까.
하지만 착각했던 모양이다. 착각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단번에 흔적이 사라질 리 없었다. 그들에게 다른 본거지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개는 눈살을 찡그렸다. 그런 오합지졸에게 다른 본거지가 있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
개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폐건물을 빠져나왔다. 쉽게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일이 어렵게 되자 맥이 빠졌다. 개는 어깨를 늘어트린 채 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산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개는 목적지도 없이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빠앙―
귓가를 때리는 소음에 화들짝 눈을 들어 올렸다. 클랙슨을 울린 차가 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개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새 큰길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
점심시간의 길가는 북적거렸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도 도로는 매우 조용했다. 경직된 분위기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개는 사람들을 따라 걸으며 힐끗 시선을 흘렸다. 장총을 어깨에 멘 군인들이 가로수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군모까지 쓴 본격적인 차림새였다. 군인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거리를 살폈다.
개는 무감한 얼굴로 군인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공작은 황궁에 폭탄을 터트린 ‘일당’을 잡았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군인들이 거리에 나와 있는 이유는 그 뒤에 있을 더 큰 무리를 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야. 저 차 멈춰 세워.”
“네!”
그때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눈을 돌렸다. 어느새 군인 몇 명이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장전해 한 차를 조준하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회색 봉고차가 도로에 급정거했다.
빠앙!
봉고차의 뒤에서 달려오던 차들이 클랙슨을 울리며 멈춰 섰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검문 있습니다. 다른 차로로 가세요. 빨리.”
한 군인이 뒤차를 향해 총부리를 휙휙 흔들었다. 그 위협적인 움직임을 마주한 운전자들은 언제 소란을 일으켰냐는 듯 빠르게 차로를 변경해 사라졌다.
인도로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개는 기척을 죽이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문이 있다. 나와.”
“왜, 왜 이러시…… 악!”
한 남자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러자 군인들이 순식간에 그의 양팔을 제압했다. 그들은 제압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아예 남자의 몸을 봉고차로 밀어붙였다. 안경 쓴 남자의 얼굴이 차체에 부딪쳐 일그러졌다.
“안에 살펴봐. 빨리!”
“네!”
군인들은 봉고차의 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차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참을 뒤져도 이상한 점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
한참 수색하던 군인 하나가 상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입을 가리고 상관에게 귓속말했지만, 그런 어설픈 가림막은 개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이상한 점이 없어?”
상관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그는 군홧발로 부하의 정강이를 걷어차더니 곧 봉고차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이런 의심스러운 걸 몰고 다니는데 이상한 점이 없어?”
“죄, 죄송합니다.”
부하는 쩔쩔매며 머리를 수그렸다. 상관은 그런 부하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리치더니 쯧 혀를 찼다.
“됐어. 일단 데려가. 데려가서 자세히 조사해 볼 거니까.”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개는 봉고차 운전자가 연행되어 가는 것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저자가 정말 무고한 자라면 곧 풀려날 테고, 그렇지 않다면 형을 받게 되겠지.
중요한 것은 저자의 억울함이 아니었다. 저자를 체포함으로써 황제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개는 황궁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
아무 말 없이 황궁을 바라보던 개가 다시 사람들 사이에 껴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골목 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저택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덩치들에게서 정보를 얻어 낼 생각으로 저택을 나온 것인데 그 계획부터 틀어졌다면, 새로운 출발 지점을 잡아야 한다고.
‘……그쪽은 위험하다고. 가면 후회할 거야.’
불현듯 남자를 따라갔다가 길을 잃었던 시장 골목이 떠올랐다. 그곳의 여자가 위험하다고 말한 곳이 있었지. 그곳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꺼려하는 곳에는 어떤 비밀이 도사리는 법이니까.
골목을 빠르게 누비던 개는 어느 순간 낯익은 곳에 도달했다. 태성의 집이 있는 달동네로 통하는 길이었다.
낮에 마주친 달동네의 모습은 더욱 낡아 보였다. 개는 잠시간 그쪽을 올려다보다가 이상한 노랫소리를 들었다.
“황제 폐하는 나빠, 나빠.”
“……?”
분명 불경하기 짝이 없는 가사였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 불경해 놀랍지가 않았다. 게다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어린아이였다.
개는 까만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이런 어린애까지 잡아야 하는 걸까.
어쩐지 주저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였다. 개는 결국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색 가방을 멘 어린아이는 씩씩한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개는 그 뒤를 기척 없이 쫓았다.
마침내 개가 아이의 옷자락을 붙잡았을 때, 홱 고개를 돌린 아이가 개를 올려다보았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
“모두 처리했습니다.”
서류를 보고 있던 차현은 눈을 들어 재경을 보았다. 재경은 황제의 탄신일에 개를 잃어버렸던 기억이 여간 충격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수고했어.”
물론, 차현의 입장에선 얼빠진 듯한 재경이 더 편했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걸치고 서류를 덮었다.
탄신 연회에서 사건을 일으키려 시도한 조직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오합지졸, 그들은 별 볼 일 없는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켜봐 주었는데 말이지.
이들은 별 볼 일 없는 계획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채 ‘개’에게 당하고 말았다. 어차피 별다른 기대도 없었지만, 황제의 시선조차 끌지 못한 채 정리되었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조직.
아니. 이곳을 조직이라 칭해도 되는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에겐 불완전한 황궁 지도로 짠 계획의 허점을 알려 줬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큰 일을 벌였단 말이지.
“기분 나쁘네요.”
“뭐가.”
차현은 정리된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재경이 눈을 찌푸리며 차현의 손에 들린 서류를 흘겨보았다.
“죽은 사람을 기소하라는 서류 아닙니까, 그거.”
“새삼스럽군.”
차현은 픽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재경이 우스웠다.
“이번 건은 총장의 일이니까 그렇죠오……. 어제까지 뒷마당에서 잘 숨 쉬고 잘 놀던 돼지가 하루아침에 죽게 됐다고 생각해 보십쇼.”
“호사를 누리다 갔다고 생각하는데.”
차현은 의자 위에 걸쳐 놓았던 겉옷을 집어 들었다. 재경은 한겨울 길 복판에 내쳐진 사람처럼 자신의 팔을 쓱쓱 문지르더니 과장된 어투로 말을 뱉었다.
“검사님은 너무 차가워. 동상 입겠어요.”
“그래서 그 검사는 어떻게 했지?”
헛소리엔 대답하지 않은 차현이 재경에게 시선을 두었다. 조금씩 페이스를 되찾던 재경이 몸을 움찔 떨었다.
방금 차현이 언급한 이는 황궁 테러 혐의로 붙잡힌 일반인 네 명을 초기에 조사한 검사였다.
“처음엔 그들이 테러범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자료를 보여 준 이후에는 본인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징계는 추후 내려질 예정입니다.”
차현은 문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기 전 재경에게 물었다.
“후에 문제가 생길 여지는?”
“없습니다.”
달칵. 차현은 문을 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따로 보고해.”
“알겠습니다아.”
재경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대답했다.
차현은 자신의 등 뒤에 따라붙는 재경의 기척을 느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불현듯 골목에서 개와 억지로 입술을 맞부딪쳤던 일이 떠올랐다.
놀란 듯 커다래진 새까만 눈동자와 찢어진 입술에서 피어오르던 피 냄새, 건조했던 입술의 감촉.
차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다시 사람을 붙일까.”
“예?”
개가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을 걸 알기에 구태여 사람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는 눈을 떼는 순간마다 골치 아픈 일들을 저질렀다.
지금도 일을 치고 있을지 모르지. 차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차현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가온 재경을 물렸다. 재경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
개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황제는 나쁘다고, 종알종알 노래를 부르던 아이는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그리고 개를 알아본 것은 아이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말간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아저씨, 그때 그 아저씨 맞죠?”
작게 입을 벌린 아이가 곧장 개에게 삿대질을 했다.
“…….”
황제에게도 삿대질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허리 부근에나 올 것 같은 작은 아이에게 삿대질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 낯설었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개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아이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검은색 책가방이 아이의 머리 위로 쏟아질 것처럼 흘러내렸다가 다시 올라갔다.
“그때 아저씨가 구해 주신 덕에 우리 집이 덜 망가졌어요. 감사합니다.”
반짝거리는 아이의 눈은 태성과 닮아 있었다. 개는 아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예성아, 들어가자.’
아이는 그때, 태성을 위협하던 덩치의 목을 꺾은 날 마주친 아이였다. 아마 태성의 동생이겠지. 그리고 태성의 동생이라면 황제를 노리는 세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또 허탕이군.
곧장 몸을 돌려 돌아가려던 개는 불현듯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말갛고 순진한 얼굴에 개를 향한 동경이 배어 있었다. 보면 볼수록 태성과 닮은 아이였다.
“황제 폐하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
그래서였다. 개는 답지 않게 친절을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너희 집에 찾아오던 남자보다 더 무서운 게 찾아올 수도 있어.”
“……귀신이 찾아와요?”
예성은 조금 겁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귀신 같은 건 없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지금쯤 개의 주변은 귀신들로 득시글거려야 했다.
예성을 등진 개는 곧장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작은 발자국 소리가 뒤따라오더니 연약한 악력이 개의 옷소매를 잡아챘다. 개는 당황한 듯 보이는 예성을 무감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아저씨, 벌써 가세요?”
“……?”
뜻밖의 말이었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제를 모욕했음에도 고문하지 않고, 친절하게 충고까지 건네주었다. 그런데 여기에 남아 뭘 더 하라는 거지?
“무슨 할 일이라도 있으세요?”
“…….”
개는 입을 다문 채 예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예성은 무거운 침묵에 굴하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태성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없으시면 저랑 한 군데만 같이 가 주시면 안 돼요?”
개는 당황했다.
소맷자락을 잡은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목을 쳐 기절시켰을 것이다. 그러고 마저 갈 길을 갔겠지. 자신은 단 한 번도 불분명한 목적지에 맨몸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 아이는 태성의 동생이었다. 그냥 길에 버려두고 가도 되는 건가?
개는 머뭇거리며 아이의 목덜미를 곁눈질했다. 잘못 친다면 죽을 것처럼 연약한 목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딱 한 군데만 같이 가 주시면 되는데…….”
개의 침묵이 길어지자 예성의 눈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이를 데리고 갈 어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달동네의 낮은 조용했다.
“…….”
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해가 지려면 적어도 네다섯 시간은 지나야 할 것이다.
아주 잠깐만, 태성의 동생이 어딜 가는 건지만 확인하고 돌아가도 늦지 않겠지.
개는 아름다운 공작을 떠올렸다. 그리고 황제의 탄신일에 화를 내던 모습도 떠올려 보았다.
개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입술 위를 문질렀다. 따가웠다.
✵
“아싸!”
왁 소리를 지른 예성이 펄쩍 뛰어올랐다. 개는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정면을 보았다. 두 눈 뜨고 봐도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lose!」
화면 속, 팔각형의 격투장 위에 붉은 도복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남자 앞에는 검은 머리에 노란색 바지를 입은 남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개는 게임기의 컨트롤러를 잡고 입을 앙다물었다. 저 대신 화면 속에서 움직이던 캐릭터의 처참한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또 하실래요? 지금 800원 남았으니까 네 판 더 할 수 있어요.”
예성은 게임기 앞 나무 의자에 쪼그려 앉아 네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개는 자존심이 상한 듯 눈살을 구겼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럼 넣을게요?”
예성이 작은 손으로 동전 두 개를 게임기 안에 넣었다. 덜컥덜컥. 동전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개의 게임 캐릭터가 다시 살아났다. 개는 긴장한 얼굴로 컨트롤러를 잡고 다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일대일의 전투에서 지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게임 속 캐릭터는 개의 말을 듣지 않고 목각 인형처럼 삐거덕거렸다. 팔다리를 각각 다른 사람들이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개의 캐릭터가 한참 퍼덕거리고 있던 중, 예성의 캐릭터가 그를 공격해 공중에 높이 띄웠다. 붕 떠오른 개의 캐릭터는 막을 새도 없이 연타를 맞았다. 조이스틱을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 봐도 가사 상태에 빠진 것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lose!」
마침내 개의 캐릭터가 바닥에 쓰러졌다. 열심히 컨트롤러를 두드리던 개는 허망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또 졌다.
만약 이게 실전이었다면 개는 두 번이나 죽은 것이다. 그것도 개의 허리 부근에나 올 법한 작은 아이에게 말이다.
“제 친구들은 저랑 하면 재미없다고 이제 안 하겠대요.”
달칵달칵. 예성은 이제 개의 의사조차 묻지 않고 게임기에 돈을 넣었다. 하나씩 줄어들던 숫자가 화면 위에서 사라졌다. 개는 황망한 얼굴로 예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아저씨랑 하게 돼서 너무 좋아요!”
“…….”
개는 화면 속에서 비틀비틀 일어나는 자신의 캐릭터를 보았다. 동전 몇 푼에 억지로 일으켜 세워지는 캐릭터가 이쯤 되니 슬슬 불쌍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이건 개의 명예가 달린 일이었다.
개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이스틱을 쥐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예성의 캐릭터를 쓰러트리리라.
「lose!」
마음먹은 것과 달리 개의 캐릭터는 이번에도 맥을 못 추고 쓰러졌다.
개는 부들부들 손끝을 떨었다. 이건 말도 안 됐다. 예성의 자리에 뭔가 이상한 수를 써 놓은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개가 이렇게 맥없이 당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개는 예성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말하지 못했다. 우선 장인이 도구를 탓하지 않듯 고수는 자리를 탓하지 않는 법이었고, 개는 요구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안 해.”
“네?”
예성은 또다시 개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동전을 넣으려 했다. 개는 황급히 예성의 팔목을 붙잡았다.
“안 할 거라고.”
“헉. 왜요?”
개는 ‘재미없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예성이 ‘친구들은 저랑 하면 재미없다고 이제 안 하겠대요’ 하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 탓이었다.
“아프다며.”
개는 화면 속의 카운트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예성의 손을 놔 주었다. 이젠 동전을 넣어도 회생시킬 수 없겠지.
개는 예성을 내려다보았다. 예성은 놀란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누가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개는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네 형.”
“아…….”
예성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형 어젯밤에 체력 단련 하겠다고 막 밖을 뛰어다녔거든요. 그러다 감기에 걸렸나 봐요.”
“…….”
개는 예성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수상쩍었지만, 정확히 어느 부분이 수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무감정한 눈으로 예성을 살펴보던 개는 불현듯 자신의 그림자가 길어졌음을 깨달았다. 개는 퍼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까만 눈이 커다래졌다.
“이제 가야 돼.”
“벌써요?”
개는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펴고 벌떡 일어섰다. 아직 해가 저물지는 않았지만, 인가와 떨어져 있는 공작의 저택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했다.
개는 곧장 낡은 문구점 앞을 벗어나려고 했다. 또다시 작고 연약한 악력이 개의 소맷자락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랬을 것이다. 개의 눈살이 좁아졌다.
“잠시만요! 진짜 잠깐이면 돼요.”
개가 차마 예성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예성은 다급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예성은 그렇게 외치고서 바로 문구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개는 잠시 문구점 입구를 보다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끌려온 것은 예성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이는 태성 때문이었다. 태성은 자신의 동생을 매우 아끼는 것 같았다. 그러니 만약 저 연약한 몸에 흠집이라도 나면 또 눈물 자국을 묻혀 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 모습은 의도치 않게 자꾸만 개의 신경을 건드렸다. 개는 될 수 있으면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때마침 예성이 개를 놓아 주었다. 개는 더 이상 예성을 기다려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얼마나 갔을까. 멀리서 작은 발자국 소리가, 아니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
개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작은 뜀박질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저씨!”
예성이 헉헉거리며 개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개가 또 어디론가 훌쩍 사라질까 봐 겁이 난 듯했다.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숨을 할딱이는 아이의 뺨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개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예성이 뒤에 숨긴 것을 바라보았다.
“드세요. 다음에 또 저랑 게임해 주셔야 해요?”
한참 헐떡이던 예성은 겨우 숨을 고르고, 내내 숨기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알록달록한 색색의 사탕이었다.
개는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달싹거렸다. 그는 남이 준 음식을 먹지 않을뿐더러, 다음에 예성과 또다시 게임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개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예성이 개의 바지 주머니 속에 사탕을 쑤셔 넣었다.
“안녕히 가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예성이 허겁지겁 뒤돌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잡고자 한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지만 개는 예성을 쫓아가지 않았다.
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급하긴 개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는 골목을 빠져나와 서둘러 공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
개가 저택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때였다. 공작은 해가 다 질 즘에 오곤 했으니 아직 늦지 않았다.
숨을 죽인 채 주변을 살피던 개는 순식간에 저택 담을 뛰어넘었다. 그러고 곧장 나무 위로 뛰어올라 공작의 방 안에 들어왔다. 신속정확한 몸짓이었다.
개는 증거 인멸을 위해 자신이 열고 들어온 창문을 닫았다. 방해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던 노을빛이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쳐 으스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달칵.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개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발걸음은 부러 일정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익숙한 발소리였다.
공작.
“왜 그러고 있지?”
개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었다.
설마 밖에 나갔다 온 걸 들킨 건 아니겠지? 만약 들켰다면 또 입맞춤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가 난 공작은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듯했으니까.
“…….”
그사이에 빠르게 가까워진 공작이 개의 등 뒤에 섰다. 그는 손을 뻗어 개의 등을 감싸듯 창문틀을 쥐었다. 개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로 떨어져 내렸다.
개는 가깝게 붙은 남자의 단단한 몸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등 뒤의 도주로가 막히는 건 좋지 않았다. 개는 긴장을 거두지 않은 채 남자의 기척에 촉각을 세웠다.
“뭘 보고 있었지?”
“…….”
남자의 시선이 개를 향했다. 개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눈을 굴렸다.
……뭘 보고 있었냐니. 개는 뭘 보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냥 방금 막 창문을 넘어왔을 뿐이다.
“흐음.”
작은 신음성을 토해 낸 남자가 개의 어깨를 잡은 것은 그때였다. 개는 까만 눈을 크게 떴다. 방어할 새도 없이 몸이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황궁을 보고 있었나?”
남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명화 속에 그려진 고결한 신처럼. 그러나 개는 이 얼굴 밑에 들끓던 흉포한 감정을 알고 있었다.
“…….”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의 질문이 그저 유도 신문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대답을 잘못하면 안 된다는 사실뿐이었다.
개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읽어 낼 수 없었다.
“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안 할 건가?”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는 개를 부드러운 어조로 채근했다. 개는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궁을 봤습니다.”
처음 해 보는 거짓말은 해로웠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귀를 쟁쟁하게 울렸다.
개는 힐끗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요란하게 뛰는 것치고는 겉보기에 아주 평온해 보였다.
“왜지?”
개는 힐끗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황궁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탄신 연회가 있었던 날 그 골목에서처럼.
개는 마른침을 삼켰다. 거짓말한 게 들통난 것일까. 역시 자신을 떠보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남자의 눈 위에 유리 파편처럼 떠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즐거운 듯 반짝거리다가도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싸늘해 보이기도 한 감정의 단면들.
개는 홀린 듯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가 비식 웃은 것을 깨달았다.
“열렬하군.”
남자는 개의 시선을 그렇게 평가했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작게 묵례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남자는 픽 웃더니 창틀을 잡았던 손을 뗐다. 개는 자신을 가로막았던 단단한 몸체가 사라진 후에야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창밖에서 노을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취임식이 있을 거야.”
회색 융단 위에 비친 붉은빛을 멍하니 보고 있던 개는 불현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가 어깨에 걸쳤던 흰색 코트를 벗고 있었다.
“갖고 싶은 게 있나?”
“……?”
개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저런 것을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멀뚱멀뚱한 개의 얼굴을 보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주겠다고 말하는 거다.”
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취임식과 갖고 싶은 것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
그러나 개는 입을 쉽게 열지 못했다. 가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손에 딱 맞는 칼도 가지고 싶었고, 자유롭게 저택 밖을 나갈 수 있도록 허락도 받고 싶었으며, 가능하다면 정보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또…….
개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갖고 싶은 게 많아진 걸까. 황제의 아래에 있을 때만 해도 개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렇기에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시간은 일주일이나 남았으니까.”
남자는 창문 앞에 선 개에게 힐끗 시선을 두었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해 봐.”
“…….”
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문득, 소맷자락에 남은 구깃한 자국을 발견했다. 이건 분명 태성의 동생이 옷자락을 잡아 남은 자국이었다.
사탕.
주머니 속에 있는 그것을 떠올린 개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곧장 남자를 살폈지만, 그는 다행스럽게도 개에게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개는 주머니 위를 손으로 가렸다. 둥그런 사탕의 감촉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
“…….”
남자가 출근한 아침. 개는 침대에 걸터앉아 사탕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봉지 안에 들어 있는 색색의 사탕. 봉지 위에는 ‘신호등’이라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물론 그 글자의 뜻을 개가 알 리는 없었다.
바스락.
그 위를 만지작거리자 봉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개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힐끗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발소리가 공작의 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개는 사탕을 다시 바지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형.”
태성은 작게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한쪽 눈만 내보이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하하…….”
개가 침대에서 막 몸을 일으켰을 즘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태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서 일어난 개를 보고 황급히 다가왔다.
개는 가까워진 태성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태성의 콧잔등에는 밴드에이드가 붙어 있었고, 뺨에도 채 가리지 못한 상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관자놀이쯤에도 긁힌 상처가 보였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벙긋거렸다.
“아, 형! 이거 별거 아니에요. 저 어제 병가 냈잖아요. 그게 계단에서 굴러서 그런 거거든요? 와 진짜, 형도 계단 조심하세요. 한 방에 훅 넘어가더라고요. 아무튼 앞으로는 앞에 잘 보고 다니자고 생각했으니까, 뭐라고 묻지는 말아 주세요. 아셨죠……?”
그러나 개가 입을 떼기도 전에, 태성이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개는 헤헤 웃는 태성을 보며 미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
태성의 말대로, 그의 얼굴에 난 상처는 어딘가에서 구르거나 넘어져서 생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이라면 저렇게 날에 베인 듯한 상처는 입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정말 계단을 굴러서 난 상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새까만 눈이 예리한 빛을 담았다.
“어, 여기 뭐가 떨어져 있네.”
태성은 개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닥에 떨어진 마른 잎사귀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고……. 허리가…….”
“…….”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는 한심한 눈빛으로 태성을 보았다. 태성은 주먹 쥔 왼손으로 자신의 등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작 잎사귀 하나 주운 태성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형, 아침 안 드셨죠?”
한순간 20년은 더 늙어 보이던 태성이 활기찬 어조로 물었다. 개는 의구심을 순식간에 지워 버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가져올 필요 없어.”
태성은 원래부터 각목 같은 몸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툭 건드리면 부러질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저런 몸으로 밥을 가져오겠다니. 계단을 올라오다가 또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왜요?”
태성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개의 대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고작 밥을 먹지 않겠다고 했을 뿐인데도.
개는 짧게 대답했다.
“밖에 나갈 거야.”
개는 태성을 지나쳐 문을 열려고 했다. 곧장 태성이 개의 옆에 따라붙었다.
“아침도 안 드시고요?”
“응.”
그 순간 개는 어기적거리는 태성의 걸음걸이를 힐끗 보았다. 역시 조금 이상했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비밀을 파헤칠 생각은 없었다.
개는 태성을 빠르게 제치고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등 뒤에서 태성이 펄쩍 뛰었다.
“밥은 드시고 가셔야죠!”
“안 먹어.”
개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막상 방문을 열어젖힌 개는 곧장 나가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주머니 속의 사탕이 바스락거렸다.
“…….”
개는 결국 고개를 돌려 태성을 직시했다. 태성이 움찔 몸을 떨더니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태성의 얼굴 이곳저곳에 가득한 상처를 물끄러미 보던 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쉬고 있어.”
“네?”
태성이 되물었지만 개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왔다.
오늘은 공작과 함께 갔던 시장에 나가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들어가지 못했던 그 이상한 냄새가 나던 골목도 돌아볼 것이다.
늦지 않게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개는 빠르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
황궁이 테러를 당한 전무후무한 사건 이후, 나라는 순식간에 공포에 잠식되었다.
사람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실종되고, 이유도 없이 군인들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법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처벌당했던 날들.
그것은 부당하고 또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공포는 반발심을 이기는 법이었다.
이제껏 모두가 그날을 잊은 것처럼 살아왔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조심했다. 만에 하나 그때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눈총을 주었다.
애써 쌓아 둔 평화가 무너지길 바라는 사람은 이 나라에 아무도 없었다. 이미 이가 다 빠졌기에 털끝 하나라도 건들면 무너져 버릴 평화였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이 아슬아슬한 평화를 사랑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봐,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한 왜소한 남자가 낡고 냄새나는 상점 안에 앉아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언제 만들어 놓은 건지도 모를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으며, 건너편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황궁을 테러한 범인은 잡혔는데, 그놈들 뒷배는 아직 안 잡혔대. 군부에서 나머지 일당까지 잡아들이려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기는 한다는데 도통 못 잡는다나 뭐라나. 근데 황제가 알다시피 미친놈 아니냐. 군부를 엄청 쪼아 대는 중인가 봐, 글쎄.”
사내 둘은 낄낄대며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드는 흉내를 냈다. 그들 사이로 대마 연기가 자욱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그 왜소한 남자는 입 안에 쑤셔 넣었던 음식을 꿀꺽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제대로 씹지 않아 덩어리가 큰 음식물이 힘겹게 넘어갔다.
“그니까 이 군부에서 아무 단체나 잡아다가 ‘이놈들이 진범이요―’ 하고 들이민 거지.”
“그래서?”
남자는 긴장한 얼굴로 힐끗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큰일을 저지르고 은신하는 깡패들이나 황궁 관련자들, 그리고 신원 불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무법 지대였다. 이곳은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고, 그렇기에 정보가 쉽게 모여들기도 했다.
“뭘 어떻게 돼. 다 죽었지.”
사내 하나가 부연 연기를 뿜어내며 킬킬 웃었다.
잠자코 식사하던 남자는 떨리는 손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만 원.”
손끝에 때가 끼고 팔에는 털이 무성한 식당 주인이 손을 휘휘 흔들며 돈을 요구했다. 남자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밀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황제 말이야.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이제껏 계집애 하나 안 들이는 거, 혹시 고자―”
돈을 지불한 남자가 떠나든 말든 신명나게 떠들어 대던 사내가 말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컥!”
목이 비틀린 사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옆에 앉아 있던 일행이 놀라 왁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
막을 새도 없이 급소를 맞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켠 그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이내 풀썩 쓰러졌다.
“…….”
개는 쓰러진 사내 둘을 번갈아 보다가, 그나마 상태가 나아 보이는 하나를 골랐다. 개는 늘어진 사내의 양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그를 질질 끌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
채앵―
바닥에 내던져진 유리 조각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뱉었다. 개는 손에 둘둘 감았던 천 조각을 풀어 쓰러진 사내의 위에 올려 두었다.
사내는 의식을 잃은 채 늘어져서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 댔다. 개는 힐끗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온 놈이, 아악!’
개는 으레 그래 왔듯, 심문에 앞서 손가락 몇 개를 부러트리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무감정한 얼굴로 사내의 손가락을 잡아 꺾자, 무력한 신음 소리가 쏟아졌다. 과거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았을 그의 입에서.
‘네, 네놈 혁명단의…….’
‘혁명단?’
그러나 손가락을 하나 더 비틀어 꺾기도 전에 사내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내의 말을 따라 읊었다.
혁명단.
‘그게 뭐지?’
개는 새까만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움찔 몸을 떨더니 푸들거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가 어떻게 알…….’
우드득. 손가락이 비틀리는 소름 끼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남자는 몸을 비틀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그러나 이런 소란 속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개는 눈물을 흘리며 헐떡대는 남자의 머리칼을 붙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혁명단이 뭔지 말해.’
‘흐으…….’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개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큰 소득은 없었지만 황제를 위협하는 단체가 무어라고 불리는지는 알게 됐다.
혁명단.
불특정 다수로 구성된 이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한다. 사내는 혁명단을 와해시키고 그들의 의지를 꺾는 역할을 해 왔으나, 운 나빠 언론인을 혁명단원으로 착각하고 죽이고 말았다. 그렇게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것이다.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혁명단’은 세력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미약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점처럼 흩어져 서로 연결되지 않은 조직이었기에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사내 같은 깡패들에게 혁명단은 별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은 몰라보게 자라났다. 감히 황궁에 폭탄을 설치하고 터트릴 정도로. 사내는 옛 동료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고 했다.
“…….”
개는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얼룩덜룩하게 남아 흉한 손. 개는 자신의 손을 말아 쥐었다.
혁명단은 황궁을 폭파하려 했으며, 감히 황제를 해하려 했다. 그런 대담한 자들이라면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만만히 여겨서는 안 되었다.
어쨌든 소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예상한 대로 이곳은 수상한 자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오늘처럼 바깥에 정보통을 둔 사람들을 잡아 추적하다 보면 금세 혁명단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팔린 개는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걸음을 옮겼다.
“…….”
개가 정신을 차린 것은 막다른 길을 마주한 후였다.
개는 더러운 시멘트 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홱 몸을 돌렸다. 골목을 되짚어가기 위해서 방향을 튼 것은 아니었다.
“이야, 혹시나 해서 쫓아왔는데 맞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개는 골목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남자를 보았다. 동공이 풀린 한 남자가 해죽 웃더니 개의 몸을 훑었다.
“좋은 옷 입은 도련님이 여긴 어인 일로 행차하셨을까. 길을 잃었나?”
“…….”
개는 까만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묘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 보였다. 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도련님, 여기서는 ‘실수였어요― 죄송해요, 보내 주세요―’ 하는 건 안 통해. 알았어?”
남자는 도망칠 곳 없는 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개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남자에게선 지린내 같은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약을 태운 냄새였다.
“내 말 알아들었으면 있는 거 다 내놔, 도련님. 좋은 말 할 때.”
남자는 개보다 키가 컸다. 개는 남자를 올려다봐야 했다. 남자의 눈에 이채가 띤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남자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개의 얼굴을 훑었다. 이 작은 남자의 얼굴 자체는 작고 말간 인상이었지만, 오싹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까만 눈이 묘하게 사람의 욕구를 부추겼다.
입맛이 돋으니 품이 남는 옷 아래에 감춰져 있을 몸도 기대가 되었다.
남자는 자신의 입술을 날름 핥으며 킬킬 웃었다.
“오랜만에 재미 좀 보겠구만.”
개는 수염이 자란 남자의 더러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아케이드로 덮여 있어 하늘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밤낮을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빨리 처리해야겠군.
“자, 그럼 옷부터……?”
개는 자신에게 뻗어지는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비틀어 꺾었다.
✵
바람이 불자 갈색 머리칼이 얼굴 위로 흐트러졌다. 복도를 걷던 태성은 뺨 위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치우기 위해 어깨로 뺨을 문질렀다.
“악!”
그러고 태성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찌릿한 고통이 뺨을 할퀴고 지나가, 하마터면 공작님 방에 가져다 둬야 할 이불을 바닥에 내던질 뻔했다.
“으으…….”
태성은 작은 신음성을 흘리며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부탁하긴 했지만 그렇게 배려 없이 굴릴 줄은 몰랐다. 훈련을 받는 똥개가 된 심정이었다.
“에휴.”
공작의 방 앞에 선 태성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나무 문이 천천히 열렸다.
“헉.”
그리고 태성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방 한가운데에 개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좀 전까지는 없었는데?
아니. 그 전에, 잠깐 산책 간 줄 알았던 형을 저택 안에서 도통 찾을 수 없어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형은 어딜 갔던 걸까.
“형, 언제 오신 거예요?”
태성은 서둘러 문을 닫고 들어왔다.
늦은 오후, 창을 등지고 선 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다급하게 입술을 뗐다.
“공작은?”
“네?”
난데없는 질문이었기에 태성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개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옷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태성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어…….”
태성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뭐지. 갑자기 왜 옷을 벗는 거지. 다른 델 봐야 하나? 그런데 형은 남자고……. 남자끼린데 굳이 과민 반응을 하며 눈을 피해야 하는 걸까? 아, 그렇다고 또 굳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닌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태성의 눈은 의지를 배반하고 개의 몸을 향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궁금했다. 형 같은 고수는 어떤 몸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탄탄한 몸에 윤기가 흐르고 있지 않을까?
호기심 서린 태성의 시선이 옷 사이로 드러난 개의 몸에 닿았다. 단추를 풀고 아예 옷을 벗은 개의 피부 위에는 깊게 패인 흉터와, 살이 울룩불룩하게 자란 흉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
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벙긋거렸다. 개의 몸에 자리한 흉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태성 같은 문외한이 봤을 때에도 저건 정상적인 흉터가 아니었다.
“받아.”
그러나 태성이 놀라건 말건 개는 태성에게 자신의 벗은 옷을 내밀었다. 태성은 얼결에 이불을 내려놓고 개의 옷을 받아 들었다.
“공작이 오기 전에 처리해.”
“네?”
태성은 개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 비싼 옷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말인가. 태성은 울상이 되어 개를 바라보았지만 개는 더 이상의 대꾸 없이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우왁.”
개는 욕실 문을 닫지도 않고 바지를 벗으려 하고 있었다. 태성은 개가 상의를 벗을 때와 달리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개의 옷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러자 옷에 배어 있던 이상한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그 냄새에 의문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태성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뒷걸음질로 공작의 방을 빠져나왔다.
“…….”
개의 이상한 습관을 알게 됐지만 태성은 개를 욕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야지. 태성은 홀로 다짐하며 개의 옷을 들고 세탁실로 향했다.
✵
처음 시장 골목에 갔던 날, 개는 자신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장까지 막혀 있는 그곳은 지독한 냄새가 고이고 고여 고착화된 곳이었다. 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냄새가 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개는 황급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모두 턴다고 털었으나, 공작이 오기 전까지 머리를 완전히 말리지는 못했다.
공작은 바깥의 찬 바람을 몰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불현듯 개의 머리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젖은 머리칼이 공작의 손끝에 스치는 감각이 생생했다.
‘씻었나?’
그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개는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져 내리는 줄 알았다.
아직도 자신에게 냄새가 나는 걸까. 혹시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죽음을 앞두고도 이렇게까지 심장이 쿵쾅대지는 않았었다. 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좋은 냄새가 나는군.’
그러나 공작은 픽 웃으며 한마디만 던졌을 뿐이었다.
개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공작이 제복을 벗고 잠옷을 걸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그렇게 개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나흘 동안이나 이어졌다. 개는 그 골목에서 일곱 명의 사람을 족쳤다(그 일곱 명 중 죄책감을 갖게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일곱 사람이 모두 도움이 됐던 것은 아니었다. 몇 명은 이미 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중복해서 알려 주었고, 또 몇 명은 정보를 전해 주기는커녕 개에게 강도질을 하려고 하다가 손이 꺾인 채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줄행랑을 친 강도들이 문제였다.
개는 느릿느릿 골목을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분명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기척도 개가 가까워지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꽁지가 빠지게 사라졌다.
“…….”
분명했다. 개는 확신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개를 위협적인 ‘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런 여론을 만들 사람이라면 손이 꺾인 채 도망간 강도들밖에 없으리라.
개는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손과 발만 부러트릴 게 아니라 아예 입도 못 열게 했었어야 했던 걸까.
개는 초조했다. 벌써 4일이나 지났는데 알아낸 게 없었다. 그가 아는 건 그저 ‘혁명단’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느 순간 전조도 없이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 고작 그뿐이었다.
더 늦는다면 그사이에 ‘혁명단’이 또다시 테러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황제가 죽게 된다면.
개는 끔찍한 가정을 그려 보고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순간, 개는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수 명의 기척을 느꼈다.
개는 기척이 나는 곳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꽁지가 빠지게 도망쳐도 추적할 생각이었다. 개의 까만 눈이 번들거렸다.
바스락.
그리고 어디선가 다른 인기척이 들려왔다. 길의 양 끝 모두에 사람이 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의 인형이 빠르게 벽 뒤로 몸을 숨기는 게 보였다.
“네가 요즘 이 구역을 쑤시고 다닌다는 그놈이냐?”
그러나 그곳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개는 자신의 앞에 선 패거리를 올려다보았다.
하나, 둘, 셋…… 일곱.
“조그만 새끼가 겁도 모르고, 씹.”
연장을 든 깡패 한 명이 자신의 손에 침을 퉤 뱉었다.
개는 그 일곱 명의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치켜들었다. 4일치의 정보를 한 번에 알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
인적 드문 시장 골목. 한 남자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캡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른침을 삼켰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지만 다행히 그를 미행하는 자는 없었다.
탕, 탕. 남자는 서둘러 어느 가게의 뒷문을 두들겼다.
문고리에 녹슨 자국이 남아 있는 데다가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뒷문은 도통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끼이익. 그러나 짧은 침묵 끝에 문이 열렸다. 비릿한 쇠 냄새가 훅 코끝으로 밀려들어 왔다.
남자는 열린 문틈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그러자 길고 어두운 통로가 남자의 앞에 펼쳐졌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문을 열어 준 이가 남자에게 타박을 줬다. 남자는 깊게 눌러썼던 모자를 위로 들어 올리며 억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 감시가 쉬운 줄 알아? 들키는 줄 알고 얼마나 쫄렸는데. 불만이면 앞으로는 네가 해라.”
“미쳤어? 내가?”
통로 끝에서 시작된 빛이 문을 열어 준 남자의 퉁퉁한 몸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모자를 눌러썼던 남자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네가 숨으면 뱃살 때문에 들통날 거다.”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이 살은 복살이라고 몇 번 말해야 알아듣냐, 빡대가리야.”
두 사람이 만담을 나누며 통로를 빠져나오자, 희뿌연 백열등이 켜진 5평 남짓한 공간이 드러났다. 서늘한 공기가 살을 스쳤다. 쇠 냄새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한데 섞여 코를 찔렀다.
시멘트 벽 위에 그 흔한 칠조차 되어 있지 않은 삭막한 공간. 게다가 작은 창문도 나 있지 않아, 조명 없이는 금세 새까만 어둠에 빠져 버리고 마는 공간. 그곳에 한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늦었어.”
두 사람은 곧장 합죽이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곧장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두 사람까지 앉으니 테이블이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찼다.
“잎사귀, 새로 알아낸 소식 있어?”
“있어요.”
새까만 어둠을 밝히는 것은 천장에 달린 백열등 하나뿐이었다. 때문에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이상의 밝은 빛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서로의 본명을 부르지 않았으며,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황제가 폭탄을 터트린 단체를 잡으려 했나 봐요. 군부 쪽에서 추적을 맡았는데 단체를 찾기가 힘드니까 그냥…… 멀쩡한 민간인 단체를 잡아넣은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데?”
누군가가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대뜸 물었다. 그러자 ‘잎사귀’라 불린 남자가 어물거리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죽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즉결 처분이 원칙이니까요.”
싸늘한 침묵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그들은 죄책감과 고통이 뒤섞인 얼굴로 어딘가를 쏘아보았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을 길이 없었다. 어떤 이는 주먹을 꽉 쥐었고, 어떤 이는 고성을 내질렀다.
“이런 육시랄 놈…….”
“젠장!”
테이블에 둘러앉은 열몇 명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흥분한 사람이 결국 격정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폭탄을 터트린 건 우리……!”
“그만!”
탕!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에 들끓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주변을 살펴본 노인이 파르르 입술을 떨더니 이내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이야기는…… 모든 일이 다 끝나고 꺼내도 늦지 않네.”
“하지만 어르신.”
이어지려는 소모전을 끊은 것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중년 여자였다.
“돋보기의 말이 맞다. 만약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그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방향에 대해 논의했을 거야.”
여자는 사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은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그들이 여자의 주장에 반발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미 죽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들의 죽음이 의문으로 남지 않게 밝히는 것뿐이야.”
“…….”
침묵이 감돌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자의 말에 동의하거나 수긍한 것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울분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모자. 요즘 ‘그곳’을 들쑤시는 사람에 대해서는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들끓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중앙에 앉아 있던 다른 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늘 이 자리에 가장 늦게 도착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 그게…….”
남자는 조금 당황한 채로 자신에게 질문한 이를 쳐다보았다. 어둠에 미처 가려지지 않은 눈동자들이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모자에 눌린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오늘 몰래 뒤를 밟았는데 말이지…….”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그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발각당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덩치들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자의 표적은 자신이 됐을 것이다.
남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찰나의 순간 마주친 그 오싹한 검은색 눈이란…….
“확실한 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오늘 그 개새끼들이랑 7 대 1로 싸우는데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전부 때려눕히더라고.”
그는 덩치들 사이에 서 있어서 그런지 더욱 가늘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일곱 명의 장정을 쓰러트리는 데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 이 미친. 컥.’
서슬 퍼런 연장도, 거대한 덩치도 그자 앞에선 무력화되었다. 덩치들이 정신을 잃고 쿵쿵 쓰러지는 소리는 멀리서 들어도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
‘혁명단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
“……그리고 그자, 우리를 캐내려고 하는 것 같았어.”
남자는 검은 눈의 사내가 쓰러진 자들을 차근차근 짓이기며 내뱉던 질문을 떠올렸다. 소름 끼칠 만큼 무감정한 목소리와 자비 없는 움직임.
“뭐?”
“뒤를 밟힌 건 아니겠지?”
테이블 위가 한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당장이라도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다.
남자는 그들을 말리듯 손을 내저어 보였다.
“뒤를 밟힌 건 아냐. 내가 오늘 지각을 왜 했는데. 혹시 그자가 쫓아올까 봐 골목골목 쏘다니느라 그런 거라고.”
남자가 변명하자 테이블 위는 다시 잠잠해졌다.
중앙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일단 계속 유의 깊게 살펴보되, 들키지 않게 조심해.”
이미 들킨 것 같은데 말이지……. 남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테이블 중앙으로 검은 총신이 밀려왔다. 소음기가 끼워진 총이 흰 백열등 불빛을 받아 요사스럽게 반짝였다.
“그자가 황제의 사람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죽여.”
남자는 놀란 얼굴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였다. 곧 남자의 얼굴에 비정함이 어렸다.
그는 총을 자신의 겉옷 안주머니 안에 넣었다.
✵
‘개’가 죽은 이후, 황제는 전보다 더 예민해졌으며 더 폐쇄적으로 변화했다. 형식적이라고는 하지만 매일 이뤄지는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그저 대전의 문을 걸어 잠그고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나 황궁 테러 이후, 황제는 걸어 잠갔던 문을 스스로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정력적으로 군사를 지휘하였고, 회의에 참석해 간간이 안건을 상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변화가 아니었다.
황제가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황궁을 테러한 ‘진짜’ 반란종자들을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군부에서 들이미는 인간들이 진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냥 믿고 안심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하나뿐이었다.
……개가 살아 있던 과거에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크흠. 폐하는 오지 않으실 모양이구만.”
차현의 취임식이 3일 앞으로 다가온 오늘, 황제는 조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황제가 없는 조회는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안기부장과 차현, 그리고 감사원장 세 사람뿐이었다.
“업무가 과중하실 텐데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저는 폐하를 조금 더 기다리다가 가겠습니다.”
“고맙네. 혹 폐하가 오시거든 자네가 말 좀 잘 해 주게. 믿고 있겠어.”
황제가 조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멍청한 안기부장도, 탐욕스러운 감사원장도, 총장이 될 차현도 모두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황제는 어젯밤 자신을 보필하러 온 어린 궁인을 첩자로 오인해 칼로 베어 죽였다.
황궁은 일을 덮기 위해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황제는 또다시 대전의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오늘 내내 편전을 지키더라도 황제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하리라.
“자네도 적당히 있다가 들어가라고.”
안기부장은 두꺼운 손으로 차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편전을 빠져나갔다. 차현은 웃는 얼굴로 멀어지는 안기부장을 바라보았지만, 검푸른 눈동자는 웃음기 한 점 없이 차가웠다.
“이보게.”
그리고 마침내 편전에 단둘이 남았을 때, 감사원장이 입을 뗐다. 차현은 힐끗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흰색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노인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아 있으십니까?”
감사원장이 차현을 품평하듯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흰 제복의 단추를 턱 밑까지 채운 반듯한 남자. 차현은 감사원장이 보았던 수많은 사내놈들 중에서도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게다가 일견 선하게 보이는 저 얼굴.
물론 검찰의 수뇌부 자리까지 오른 남자인 만큼 그 속마저 새하얗지 않겠지만, 차현은 감사원장이 아는 이들 중 가장 믿음직한 사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현은 현재 황제의 신임을 받는 유일한 귀족이었다.
저놈을 어떻게든 내 아래로 끌어들인다면.
감사원장의 눈빛이 금광을 눈앞에 둔 사람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이것 참. 우리 사이에 볼일이 있어야 부르나.”
차현에게 성큼 다가온 감사원장이 팔뚝을 툭툭 쓸어내렸다. 매끄러운 제복의 감촉과 함께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차현의 싸늘한 눈길이 감사원장의 손에 닿았다가 이내 부드럽게 풀어졌다.
“폐하께서 많이 예민하신 모양이야. 자네의 취임식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통 얼굴을 비추지 않으시고.”
“폐하께선 공사가 다망하시지 않습니까.”
차현은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감사원장의 눈이 흡족하게 물들었다. 정말 탐이 나는 인재였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축하가 늦었군. 총장이 되는 걸 축하하네.”
차현은 늙은 너구리의 얼굴을 웃는 낯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탐욕스러운 얼굴 뒤에 무슨 생각이 감춰져 있는지 훤히 읽혔다.
“그리고 말이야. 내 딸아이가 자네의 취임식에 참석하고 싶어 하더군.”
“…….”
이게 본론이었군. 차현은 감사원장이 편전에서 나가지 않고 자신에게 계속 시선을 보내온 이유를 깨달았다.
“어때. 괜찮은가?”
차현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감사원장을 내려다보았다. 곧 그 눈동자가 천천히 휘어졌다.
“자제분까지 절 축하하러 와 주신다니.”
미묘한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움찔 몸을 떤 감사원장이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차현은 명화 속의 인물처럼 선하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감사원장은 뒤늦게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그럼 취임식에서 봅세.’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차현은 잠시간 편전에 서서 제좌를 바라보았다. 개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차현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유독 수상하게도 향기 나는 샴푸를 열심히 써 대는 개의 멍청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