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개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얼마 만에 이곳을 지나게 된 걸까.
개는 창문 위에 손을 올렸다. 황궁으로 향하는 풍경이 손끝에 닿을 것 같았는데, 손에 닿는 것은 차가운 유리창의 감촉뿐이었다. 까만 눈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넘실거렸다.
“무섭지 않나?”
등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고개를 돌렸다. 다리를 꼬고 느슨하게 팔짱을 낀 남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폐하를 만나게 되면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개는 힐끗 운전석 쪽을 바라보았다. 칸막이가 쳐진 탓에 운전석에선 남자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대화가 차단된 것을 확인한 개는 자신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황제에게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뛰는 소리가 커졌다. 왜일까. 고민해 봤지만 그 이유는 개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죽는 건 무섭지 않습니다.”
다만 죽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개는 새까만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고요한 얼굴로 개를 마주 보다가 이내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니.”
남자의 목소리는 과장되지 않고 차분했다.
“비극이군.”
개는 눈을 깜빡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 왜 비극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건 암살자로서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었나?
“그나저나 내가 한 말은 기억하고 있겠지?”
“…….”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개는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한 말이라,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새 잊어버린 건가, 아니면 듣기 싫다는 건가.”
개가 슬쩍 눈을 피하며 입을 다물어 버리자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곧장 개의 턱 밑에 손을 넣더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하지만 듣기 싫어도 따라.”
억지로 들린 고개가 불편했다. 사나운 개의 눈에 오싹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 눈을 마주하고도 여유롭게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단독 행동은 불허한다.”
웃음기 어렸던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 싸늘해졌다. 명령에 불복할 경우 무조건적인 처벌이 내려질 거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
오랜만에 듣는 강압적인 말투가 낯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폐하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생길 테니까.”
명령조로 말하던 남자는 순식간에 어투를 누그러트렸다. 그러곤 개의 턱을 쥐었던 손을 놓고 싱긋 웃었다.
“서두르지 마.”
남자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차가 멈춰 섰다.
차창 밖으로 돈화문과 이어진 긴 길목이 보였다. 여기부터는 왕을 제외하고 아무도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내리지.”
개는 남자의 말에 따라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지는 길게 뻗은 처마와 웅장한 몸집의 황궁.
저 안에 황제가 있다.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개는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황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서두르지 말라고 말한 게 조금 전일 텐데.”
“……!”
그러나 개의 어깨를 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개는 화들짝 놀라 남자의 손을 떨쳐 냈다.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개는 당황 어린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남자와의 접촉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황궁을 코앞에 두고 있으려니 어쩐지 불경한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흐음…….”
남자는 개가 쳐 낸 손을 힐끗 보고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더 이상 개에게 접촉하지 않은 채 앞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개는 멀어지는 남자를 황급히 뒤쫓아 갔다.
손을 쳐 내서 불쾌했나?
개는 성큼 황궁으로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불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얼굴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반응에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궁궐 바깥에서 대기하세요.”
어느새 돈화문 앞에 선 남자가 개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개는 근처에 있는 경비병들을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개가 순순히 대답하자 남자는 돈화문 안으로 사라졌다. 남자를 삼킨 나무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개는 그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남자는 서두르지 말라 이야기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궁궐 담을 뛰어넘어, 황제가 있을 희정당의 문을 박차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
그러나 그게 움직이지 않고 남자를 기다리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개는 궁궐의 담을 따라 걸었다. 사박, 사박. 발밑에서 풀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개는 번들거리는 까만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섯 발자국 남았다.
하나. 개는 예민하게 곤두세운 감각으로 누군가의 기척을 쫓았다.
둘.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척은 빠르게 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셋. 개는 걸음을 빨리했다.
넷. 개는 궁궐 담의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리고 다섯.
개의 반대편에서 모퉁이를 돌던 사내는 검찰의 흰 제복을 입고 있었고,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다 개와 부딪쳤다.
“우앗!”
사내가 순간 균형을 잃었다. 넘어지기 일보 직전의 사내는 허우적거리며 개의 몸통을 붙잡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지만,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개를 붙잡아 봤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개와 사내는 순식간에 뒤엉켜 바닥을 나뒹굴었다. 마른 낙엽과 풀들이 흰 제복과 머리를 더럽혔다.
사내는 몸을 옹송그린 채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으으…….”
창백하게 질린 채 앓는 소리를 내는 사내를 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내는 어딘가 몸이 불편해 보였다. 약이라도 먹은 건가. 개는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가뿐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 개는 사내에게 짧은 사과를 건네고 돌아섰다. 이자에게 볼일은 끝났다. 이제 개는 다시 돈화문 앞으로 가 남자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봐, 너!”
그러나 사내가 개를 불러 세웠다. 사내의 목소리는 거칠고 다급했다. 개의 걸음이 멈춰 섰다.
“…….”
사내는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개가 입고 있는 것 또한 하얀 제복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검찰 제복을 입고 있다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정체가 들통 난 걸지도 몰랐다
개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감정이 없는 오싹한 눈동자가 사내를 향하자 그의 몸이 움칠 떨렸다. 그러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화, 화장실 어디 있는 줄 아냐?”
“…….”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개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배를 움켜쥔 손을 보았다.
약을 먹은 게 아니고 화장실이 급했던 거였군.
어쩐지 허탈해졌다. 까만 눈에서 사나운 기운이 빠르게 사라졌다.
개는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며 입을 달싹였다.
“저쪽으로 돌아가면 있습니다.”
“아, 고맙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가 서쪽으로 뛰어갔다. 개는 재빠르게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사내와 부딪친 건 의도한 행위였다. 게다가 개는 사내에게 발을 걸어 아예 바닥을 나뒹굴도록 했다. 그 결과 그는 보기 좋게 개를 끌어들이며 넘어졌고.
“…….”
제복의 안쪽에 칼을 넣어 두는 장소가 있는 것은 일전에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자신에게 날붙이를 쥐여 줄 리 없었고, 개는 스스로 무기를 조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복 안쪽에서 시퍼런 빛을 내뿜는 단도를 바라보았다. 바닥을 나뒹굴고, 사내의 품 안에 손을 집어넣은 수고가 있었다. 개는 만족한 얼굴로 등을 돌려 돈화문 쪽을 향해 걸었다.
“…….”
개는 돈화문 앞에 서서 아무런 말 없이 남자를 기다렸다. 돈화문 앞에 선 경비병들 또한 개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끼이익.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갑자기 등 뒤에서 무거운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문에서 나온 것은 남자가 아니었다.
흰 제복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개를 스쳐 지나갔다. 개는 매가리 없이 걷는 갈색 머리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까만 눈이 무의미하게 허공을 향했다. 개는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그런 공허한 평화는 찰나였다. 개의 눈이 차가운 빛을 띠고 어딘가를 향했다.
“어이쿠.”
개를 스쳐 지나갔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개와 눈을 마주친 남자가 곧 뱀처럼 눈을 휘어 웃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성큼 다가온 남자는 멋대로 개의 손을 잡아채 악수했다. 개는 불쾌감에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남자가 개의 손을 먼저 놓았다.
“김 순경 맞지? 이야, 참 이렇게 만나게 되고!”
“…….”
개는 요란하게 행동하는 남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개가 입은 흰 제복을 보더니 ‘이야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복 멋져, 김 순경! 폐하의 탄신일이라고 다림질이라도 하고 온 거야?”
개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말하는 ‘김 순경’이 누군지 알 수 없어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개를 보고 눈을 가늘게 접어 웃더니, 갑작스럽게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제 대답도 안 하겠다 이거야? 응?”
“…….”
개는 자신의 옆에 선 경비병들을 힐끗 살폈다. 그들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 이 대화에 귀를 열고 있었다. 여기서 더 소란을 일으킨다면 곤란했다.
“하, 차암……. 섭섭한데.”
“죄송합니다.”
개는 일단 순순히 사과했다.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순종적인 말을 내뱉는 개를 보며 히죽 웃었다.
“김 순경.”
“네.”
푸흣. 그 순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는 자신의 앞에서 파안대소하는 남자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경비병들의 시선도 남자를 향했다.
“하하……. 당신 너무 웃기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눈물이 고인 자신의 눈 밑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 남자는 슬며시 고개를 숙여 개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검찰청에 순경 같은 게 어디 있어.”
검찰청에 순경은 없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개는 자신이 시험당했음을 깨달았다.
휙 시선을 돌려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았다.
“너무 놀란 티를 내시네.”
남자는 싱글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개는 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남자를 살폈다. 이자는 검사인지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으나, 몸을 단련한 흔적은 없었다. 자세도 무방비하게 흐트러져 있었으며 약점을 방어하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허점투성이였다.
손만 뻗으면 죽일 수도 있을 만큼.
“…….”
하지만 멋대로 움직이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개는 등에 닿는 시선을 느꼈다. 경비병들이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 무슨 일 있으십니까?”
경비병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발끝에 힘을 줬다. 그들이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지면 지체 없이 도망칠 생각이었다.
이곳은 황궁의 정문인 돈화문이었다. 소란을 일으키면 곤란해지는 것은 개였다.
“두 분 소속을…….”
경비병이 총 위로 손을 가져다 대는 기척이 느껴졌다. 개는 얼굴을 미미하게 구겼다.
아무래도 공작을 기다리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개는 갈색 머리 남자를 쓰러트리고 그 위로 뛰어오르려 했다.
“에헤이, 깐깐하게 나오시기는.”
샐쭉 웃고 있던 남자가 갑작스럽게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
개는 자신을 지나쳐 걷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개와 경비병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마치 경비병의 시선에서 개를 숨기려는 듯한 행태였다.
뭐지?
의문 섞인 까만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자는 자신이 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고발하려던 게 아니었나?
“절 모르십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갈색 머리의 남자, 재경은 경비병에게 불쑥 얼굴을 내밀더니 비죽 웃었다. 경비병은 한순간 가까워진 재경의 얼굴이 부담스러운지 주춤 물러섰다.
“에이. 그런데 왜 이렇게 깐깐하게 구십니까, 섭섭하게.”
“하지만…….”
경비병은 재경과 그의 등에 가려진 개를 번갈아 보았다. 방금 전 두 사람의 기류는 분명 이상했다. 재경이 저 남자를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였고, 검은 눈의 남자 또한 검사답지 않은 수상쩍은 기류를 내뿜고 있었다.
“에휴…….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재경은 한숨을 푹 내뱉더니 자신의 제복 안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 상황에서 칼을 꺼내 들려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보세요. 정말, 이렇게 의심을 받게 되니 서럽고 슬프네요…….”
그러나 재경의 품 안에서 나온 건 칼이 아니었다. 검찰청 소속임을 알리는 소속 증명서가 경비병의 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확인했습니다.”
사실 재경의 소속 증명서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황제가 내정해 준 차현의 보좌관임을 모르는 사람은 황궁 내에서는 없었으니까.
“저 뒤에 있는 분은.”
“제 걸 검사하셨으면 됐지 또 하시려고요?”
경비병이 힐끗 재경의 등 뒤를 보았을 때였다. 소속 증명서를 품 안에 집어넣던 재경이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비병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당황한 듯 횡설수설했다.
“아, 아뇨. 그렇지만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절차요? 지금 절 못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경비병은 총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절차는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경에게까지 그 잣대를 들이밀기엔 그의 담력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황제의 입김과 차현 공작의 손길이 모두 닿아 있는 남자. 잘못 걸렸다가는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경비병은 재경의 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요.”
재경이 샐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끼이익―
경비병이 수세에 몰렸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경비병은 화색 띤 얼굴로 문을 돌아보았다.
문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황궁과 화려한 흰색 제복을 입은 공작은 이질적으로 보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눈에 띄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개는 까만 눈을 깜빡였다.
공작의 시선이 일순 개에게 닿았다. 부드러운 눈매와 곧은 선을 그리는 콧대, 그러나 다물린 입술 때문인지 전체적인 인상은 차가웠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달싹였다.
“검사님!”
그 순간 재경이 남자를 불렀다. 개에게 닿았던 시선이 재경에게로 옮겨 갔다. 남자는 재경을 보며 입술을 끌어 웃었다.
“윤재경 검사.”
“일찍 나오셨네요오.”
남자의 시선이 떨어진 후에야 개는 힐끗 경비병을 살폈다. 경비병은 개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잊어버린 듯, 긴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하죠.”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뚱히 선 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따라와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걸음을 뗐다.
✵
“드실래요? 맛있는데.”
개는 자신의 앞에 닭 꼬치를 내민 재경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꼬치에 꽂힌 고기와 파를 한 번에 뽑아 먹은 재경의 입가에는 붉은 소스가 묻어 있었다.
“…….”
개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딱히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데다가, 남이 주는 음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흐으음.”
재경은 아예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린 개를 보다가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려 웃었다. 지금 이렇게 친절한 얼굴로 닭 꼬치를 내밀고 있긴 하지만, 그도 개가 곱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성격이 굉장히 불같으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도도하시네요.”
생긋 웃으며 말하자 개의 시선이 홱 돌아왔다. 재경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개의 새까만 눈은 죽음에 가까운 오싹한 감각을 일깨웠다.
“노려보지 말고 드시죠.”
그러나 재경은 기죽지 않았다. 다만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닭 꼬치를 흔들 뿐이었다. 개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안 먹더라도 들어요.”
“…….”
개는 재경의 목을 보았다. 턱 밑까지 단추를 채운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밀빛 피부 위에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진작 좀 가져가시지.”
결국 재경의 손에서 닭 꼬치를 받아 들며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윤재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것 참. 검사님, 저도 억울합니다아.”
황궁을 나온 뒤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재경을 보았다. 재경은 실실 웃으며 말끝을 늘렸다.
“그냥 장난 좀 친 것뿐인데요.”
“장난?”
남자가 눈살을 좁혔다. 어째서 초면이어야 할 개와 재경이 함께 있던 건지 설명하라는 것이었는데, 뜻밖의 단어가 들려왔다.
“이크. 말실수였습니다.”
재경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러나 손 위로 드러난 눈은 가늘게 휘어져 있었다.
남자는 보란 듯이 행동하는 재경이 익숙한 듯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똑바로 말해. 어떻게 알았어.”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던 개는 자신의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엔 샐쭉 휘어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재경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잖습니까. 제가 모르는 얼굴이 있을 리가 없는데.”
재경은 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치 품평을 하는 듯한 시선이 불쾌했다. 개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재경을 쏘아보았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는 제복 차림치고는 키가 미달인 데다가아.”
번들거리는 검은 눈으로 재경을 보았다. 재경은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한 듯한 얼굴로 개를 마주 보았다.
“기세가 검사라기보다는 암살자, 아니 ‘황제의 개’라고 불러야…….”
그건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개는 재경의 목을 움켜쥔 채 그를 벽에 밀어붙였다. 재경의 머리가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큭!”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개는 재경의 목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재경의 발끝이 간신히 땅에 닿았다. 손끝에서 소란스러운 맥박이 느껴졌다.
“……!”
개는 크게 뜨인 재경의 눈을 마주 보며 무감정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명령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황제의 개’를 알게 된 인간은 즉살 처분 되는 게 전제였다.
“…….”
개는 발버둥 치는 재경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품 안에 있는 칼을 쓸지, 아니면 이대로 목을 졸라 죽일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그만.”
그러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곧은 손이 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개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남자가 있었다.
“그쯤 해 둬.”
“…….”
개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힘을 풀었다. 지지대를 잃은 재경이 순식간에 미끄러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켁, 켈룩.”
개는 자신의 손에 선명하게 남은 죽음의 감각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편을 죽이려 했으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은 동요 하나 없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서슬 퍼렇네요, 아주…….”
목을 잡고 한참 기침을 내뱉던 재경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개를 올려다보았다.
윤재경은 태어날 때부터 모자람 없는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온 남자였다. 게다가 뛰어난 두뇌 덕에 어린 나이임에도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의 인생은 부족함이 없었기에 재미가 결여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무릎 꿇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래서야, 검사 흉내 제대로 내겠어요?”
재경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는 그런 재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연한 색을 띠는 재경의 눈동자가 도전적으로 개를 쏘아보았다.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 순간 공작의 나긋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개는 눈을 들어 미소하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곳에서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재경뿐이었다.
“……네?”
“두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개 또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
“…….”
그리고 지금, 재경과 개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닭 꼬치를 들고 있었다. 개는 붉은 소스가 말라붙기 시작한 닭 꼬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는 황궁의 보안을 책임지는 총책임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황궁의 주변을 벗어날 수 없다고도 말했다.
‘저도 황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개는 자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황궁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도 해 봤다.
‘폐하를 만나고 싶다면 황궁 바깥에 있어야 할 텐데.’
그러나 남자는 단칼에 개의 주장을 쳐 냈다.
그 결과 개는 자신이 죽이려던 남자와 나란히 앉아 멍하니 시간을 축내게 되었다.
“오늘 행진식 진짜 멋있을 거 같아.”
“벌써 기대돼. 행진식은 밤에 하는 거지?”
아무리 축제가 소란스러워도 개와 재경 사이의 침묵을 깰 수는 없었다. 칙칙한 분위기가 벤치 위를 맴돌았다.
“이봐요.”
얼마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재경이었다. 개는 시선을 옆으로 흘겼다.
“진짜 안 먹을 거예요?”
“…….”
개는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렸다.
“허, 참…….”
멍하니 정면을 쳐다보는 개는 벤치에 올려놓은 구조물처럼 보였다. 지나치게 인간다운 게 흠인 구조물 말이다. 재경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는 개에게서 시선을 떼고 한참 먼 곳을 응시했다. 즐거운 표정의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재경은 뚱한 얼굴로 다 먹은 꼬치를 의미 없이 흔들었다. 쌍팔 년도 가족 드라마 보는 것도 아니고.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
공작의 웃음이 늘은 이유는 저 개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까. 황제의 개는 정말 재미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아까웠다. 목석이 따로 없었다.
그럼 공작은 왜 그렇게 자주 웃게 된 걸까. 일이 생각보다 더욱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곧 커다란 사건이 벌어질 테니까?
재경은 찌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턱을 괴었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이야 자신도 기대하고 있었지만, 더욱더 즐거운 일이 생길 거라 기대했는데 한순간 김이 새 버렸다.
“…….”
재경은 입술을 질근 씹으며 꼬치를 더욱 가열차게 흔들었다. 슬슬 지루함을 견디는 데 한계가 왔다. 모노드라마같이 지루한 풍경을 보는 것은 누워 있을 줄만 알던 신생아 시절 이후로는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이봐요.”
재경은 홱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꼬치를 흔들던 손이 뚝 멈췄다. 그는 입을 벌린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
없다. 개가 사라졌다.
재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수많은 인파 속에서 개를 찾기란 무리였다.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재경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실종은 아니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저기요.”
“네?”
재경은 자신의 앞을 지나던 사람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어깨를 붙잡힌 사람은 하얀 제복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제 옆에 앉아 있던 검은 눈의 남자 못 봤습니까?”
“음……. 검은 눈이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잘…….”
아, 씨발. 재경은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검은 눈이라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니. 이 나라에 사는 사람 90% 이상이 검은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멍청한 질문이 아니었다. 개를 설명할 만한 특징은 검은 눈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재경의 눈앞에 있는 이자가 알 리 없는 사실이지만.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경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살면서 이런 멍청한 질문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멍청한 사람은 늘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진작 자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짜증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재경은 우선 사라진 개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멀리 가기 전에 붙잡아 놔야 했다.
개를 탄신 연회에 데려온 것은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지 일을 망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절대로.
“멀리는 못 갔겠지.”
재경은 쯧 혀를 차며 혼잣말하다가, 이내 움찔 몸을 굳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쯤 황궁의 담을 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재경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갔겠지?”
✵
재경의 걱정과 달리 개는 황궁의 담을 넘지 않았다. 황궁으로 달려가지도 않았고, 어딘가에 은신하지도 않았다. 그저 먹지 않을 닭 꼬치를 쓰레기통에 버리러 나온 것뿐이었다(물론 싫은 인간과 함께 시간을 축내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
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쓰레기를 버릴 만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때마침 쓰레기가 수북이 쌓인 나무 밑을 발견했다. 개는 양념이 말라붙은 닭 꼬치를 들고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잠깐.”
“…….”
사람이 많은 곳은 불편했다. 곤두선 감각을 스치는 사람들의 기척이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개는 귀를 웅웅 울리는 소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리 버리고 돌아가자. 그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은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싫었지만, 남자가 함께 있으라 했으니 별수 없었다.
개가 꾸물꾸물 걸어 나무 근처에 섰을 때였다.
“잠깐이라는 말 못 들었어?”
“……?”
개는 까만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자신의 등 뒤에 선 것이 느껴졌다. 허리 부근에 닿은 칼날이 날카로웠다.
개는 자신이 방심했음을 인정했다. 너무 대놓고 걸어오기에 행인인 줄 알았는데.
“조용히 따라와.”
“…….”
개는 눈을 굴렸다. 등에 닿은 칼날을 쳐 내고 이자를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칼날이 등 뒤에 바로 닿아 있는 만큼 미약한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약한 상처였다.
“그래. 입만 벙긋거려도 바로 찔러 버릴 거니까 조용히 해.”
하지만 개는 이자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자도 자신이 ‘황제의 개’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처리해야만 했다.
비록 윤재경이라는 남자는 공작의 만류로 죽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개는 들고 있던 꼬치를 바닥에 내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가 떠난 자리에 꾀죄죄한 옷을 입은 어린아이들 몇 명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꼬치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털거나 입으로 불어 떨어트렸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훔쳐 갈까 서둘러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아무도 그것을 말리지 않았고, 아무도 이런 상황을 한탄하지 않았다.
거리는 줄곧 사람들로 북적였다. 앙상한 꼬치가 누군가의 발에 차여 굴러갔다. 그리고 검은 워커를 신은 발이 그것을 짓밟았다.
“여기도 없어?”
헉헉 숨을 몰아쉰 재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떠나고 없는 개를 찾을 수는 없었다.
✵
검찰청은 탄신일 일정 동안 황궁의 보안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지도로 짠 전략을 쥐고 있는 만큼 그들은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건 전략의 총책임자인 차현이라면 더더욱 벗어날 수 없는 문제였다.
차현은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어깨에 걸친 하얀색 긴 코트가 차현의 움직임을 따라 펄럭거렸다. 언제나 아름다운 미소가 자리하던 얼굴에 냉엄한 그림자가 어렸다. 불온한 움직임을 쫓는 차현의 얼굴은 차가웠다.
궁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차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차현은 무감정한 얼굴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궁인들은 자신이 의심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차현은 오늘 이 순간, 모든 궁인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누군가를 지목한다면 그자는 더 이상 내일을 살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궁인들은 차현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검사님.”
그리고 그런 차현의 앞으로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차현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선 사내를 보았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흰 제복을 입은 사내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차현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말씀하세요.”
사내는 숙였던 허리를 일자로 세웠다. 그는 또박또박 보고를 시작했다.
“남쪽에 작은 소요가 있어 네 사람을 잡아들였습니다. 두 시간가량 심문했고, 그 결과 테러의 움직임은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네 사람 모두 말다툼이 커진 것뿐이라고 일관되게 진술했습니다.”
냉담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이 긴장한 검사를 가만히 직시했다.
“테러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일관된 진술이 있었고, 인적 사항도 조사해 보았으나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검사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에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차현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구금해 두세요. 작은 소란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검사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차현은 멀어지는 검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불현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중천인 하늘은 아직 푸르기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저물면 황제의 행진 일정이 시작될 것이다. 차현은 비식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
창밖을 쳐다보던 차현의 눈이 복도를 향한 것은 그때였다. 무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차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윤재경 검사?”
차현은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개와 함께 황궁 밖에 있어야 할 이가 왜 혼자 이곳에 있단 말인가.
재경의 얼굴은 답지 않게 어두웠다. 갈색 눈동자는 차현을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재경이 작게 입을 달싹였다. 그는 묘하게 수치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차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꺼림칙함에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곧, 차현은 한 가지 불길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 눈을 내리감은 차현이 순식간에 손을 내뻗었다.
“큭!”
억센 손아귀가 재경의 제복을 움켜쥐었다. 재경은 맥없이 끌려와 차현의 앞에 섰다. 검푸른 눈동자 위로 분노가 넘실거렸다.
“맡겨 둔 건 어디에 내버리고 혼자 온 거지?”
재경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입술을 뗐다.
“……잃어버렸습니다.”
“하.”
차현은 냉소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밀치듯 재경의 제복을 놓았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바로 세운 재경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 있겠지.”
“……이 근방을 전부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재경은 개를 잃어버리고서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많은 인파가 몰린 거리에서 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발견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니, 아무도 없었더라도 재경은 개의 흔적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황제의 개’였으니까. 재경은 그 목석같은 남자가 정말 황제의 것이었음을 그제야 뼈저리게 느꼈다.
개를 찾는 데 실패한 재경은 곧장 황궁으로 복귀했다. 보고하기 전 개가 황궁에 들어왔는지부터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개의 흔적은 없었다.
“찾지 못했다.”
차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경의 말을 따라 읊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지 묻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답지 않은 어두운 얼굴로 재경이 묵례했다. 차현은 차가운 눈으로 재경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네 잘난 머리 열심히 굴려 답을 내놔야 할 거야.”
곧장 등을 돌린 차현이 황궁의 복도를 성큼 걸어 나갔다. 재경은 그가 개를 찾기 위해 황궁을 나서려는 것임을 직감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재경이 차현의 등 뒤에 붙어 입을 열었다.
“지금 밖으로 나가시는 건…….”
“네 머리를 잘 굴리라고, 방금 말했어.”
차현은 이를 악물었다. 개의 순종적이고 맹한 얼굴이 자신을 향한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윤재경에게 맡긴 것이었는데.
착오였던 거지.
게다가 오늘은 황제 탄신일이었다. 아주 조금의 오차도 생겨서는 안 될 중요한 날에 가장 큰 변수가 생긴 것이다.
“……아, 젠장.”
재경은 멀어지는 차현의 등을 보다가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도 모자라 불을 질렀다. 게다가 그 불이 초가삼간까지 다 태우게 생겼으니.
도대체 개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재경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일이 이상하게 어그러지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공작의 말대로 머리를 굴려야 할 차례였다.
✵
바닥에 부딪친 새파란 칼날이 빙글빙글 헛돌았다.
낡은 폐건물 안은 습기 찬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난방되지 않은 듯한 시멘트 바닥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으으…….”
누군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희미한 햇빛이 폐건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쓰러진 남자들은 모두 한 덩치 한다 자부하던 이들이었다.
“사, 살려 주…….”
그러나 호기롭던 덩치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중에서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푸들푸들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애썼다.
“자, 잘못.”
“…….”
혀가 굳은 건지 목이 조여든 건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겁에 질린 그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니.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의 억울함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 탄신 연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일말의 접촉도 없던 사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공통된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모이게 되었다.
‘의문의 후원자’를 뒷배로 두고 끈끈한 단결을 맺게 된 정예 멤버들!
“으, 우윽.”
절대 이대로는 죽을 수 없었다. 남자는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겨우 힘을 주었다. 이마에 핏줄이 설 때까지 이를 아득바득 깨물었다.
움직여!
누군가에게 외치는 건지도 모를 소리를 한참을 되뇌었을 때였다.
“우아, 악!”
덩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놀란 근육들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지만 힘만큼은 어느 때보다 넘쳤다.
그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공격 대상을 찾았다. 곧 자신들을 모두 쓰러트린 ‘괴물’을 찾아냈다.
검찰청의 흰색 제복을 입은 남자는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일어선 덩치를 보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무감정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덩치는 저 소름 끼치는 새까만 눈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씨발, 씨발. 씨발!
저 눈깔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하게 된다. 죽음에 가까운 검은색이 자신을 덮쳐 오는 듯한 착각에 휩싸이게 된다.
덩치는 바닥을 구르던 칼을 발견했다.
죽이자.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 짐승만도 못한 검사 나부랭이를 본보기로 잡아 황제 탄신일의 선물로 내던질 생각이었다.
“죽어!”
덩치는 칼을 들고 개에게 덤벼들었다. 개는 덩치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다가 보란 듯이 뒤로 물러섰다.
“이 쥐새끼 같은, 헉, 게!”
“…….”
덩치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훙, 후웅, 하며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개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타닥. 가벼운 발소리가 폐건물 안을 울렸다.
“허억, 헉.”
그러나 잔뜩 힘을 주어 휘두르는 만큼 덩치의 체력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덩치를 보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시멘트 벽에 개의 등이 닿았다.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던 남자의 퇴로가 막힌 것이다. 덩치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드디어 잡았다……!”
덩치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개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채앵!
그러나 칼날은 개에게 닿지 못했다. 개 대신 둔탁한 시멘트 벽에 칼날이 부딪쳤다. 개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악!”
칼날이 시멘트 벽과 부딪친 충격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칼날에서 시작된 충격은 덩치의 손목으로 직격해 왔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챙강.
결국 칼을 놓쳤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니, 온몸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미 한계를 다한 몸을 억지로 움직인 대가였다.
“흐악, 아…….”
덩치는 몸을 웅크린 채 고통을 조금이라도 무마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무방비한 뒷덜미에 새까만 손이 뻗어져 나왔다.
쿵.
개는 그리 강하지 않은 힘으로 덩치를 벽에 밀어붙였다. 힘을 쓰지 않고 스스로 칼을 놓치게 만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크읏…….”
이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다가는 이자도 정신을 잃을 것이다. 물어봐야 할 것이 있는데 정신을 잃는다면 곤란했다.
“말해.”
“무, 뭘…….”
벽에 얼굴이 눌린 탓에 남자의 발음은 불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왜 날 여기로 데려왔는지.”
“씨, 발……. 그걸 몰라서…….”
덩치가 불현듯 말을 멈췄다. 개는 갑작스러운 침묵에 머리를 갸웃했다. 덩치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크흑, 큿. 크하하!”
덩치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린 것은 그때였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네놈한테 순순히 말해 줄까 봐?”
“…….”
이런 일의 순서는 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걸까.
개는 제복 안에 손을 넣었다. 단도의 매끄러운 손잡이가 손끝에 걸렸다.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하기 싫어한다면 말하고 싶게 만들면 된다. 개는 그런 일의 전문가였다.
✵
폐건물을 나왔을 때, 하늘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개는 풀 무더기에 칼을 문질러 피를 닦아 냈다. 폐건물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
개는 깨끗해진 칼을 다시 제복 안에 집어넣었다.
폐건물 안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 손가락이 잘린 사람도 없었고 크게 상처 입은 사람도 없었다.
개는 자신이 입은 흰색 제복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시간을 들여 고상한 방법을 이용한 보람이 있었다. 제복은 어디 하나 더렵혀지지 않고 말끔했다.
개는 폐건물이 위치한 산 중턱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무성한 풀숲을 가로질러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초행자라면 금방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주위를 살피던 개가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나무가 흔들렸다.
“…….”
기척 없이 사뿐하게 나무 위로 뛰어오른 개는 빠르게 가지와 가지 사이를 뛰어넘어 산을 내려갔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늦을 생각은 없었는데. 개는 어쩐지 초조해진 얼굴로 숲을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덩치에게 들은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폐건물에 모여 있던 이들은 현 황제에게 반기를 든 단체로, 그들은 오늘 있을 탄신 연회를 망칠 계획이었다.
황제의 가장 충실한 개인(개는 움찔 몸을 떨었다) 검찰청(개는 미간을 찌푸렸다)에 위협을 가하고, 그 모습을 공개해 황제에게, 그리고 나아가 국민들에게 이 단체의 존재를 알리는 것. 그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들은 제일 만만하게 보이는 검사 하나를 납치해 죽이려 했다. 물론 그 검사가 어떤 인생을 살아온 사람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검찰청에 소속된 인간들이란 혐오스러운 황제를 위해 일하는 가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황제의 행진식이 거행되는 순간, 때맞추어 자신들의 만행을 거리낌 없이 보여 줄 생각이었다.
황제가 행진하는 길에 놓인 검사의 시체라. 만약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패착은 바로 ‘개’를 납치했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탄신 연회를 어그러트리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실무자들은 동력을 잃었고, 가장 필요했던 검사의 시체도 없었다. 탄신 연회는 무사히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황제를 만나려던 일도 무사히 진행될지는 알 수 없었다.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벤치 주변에 윤재경은 없었다. 개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
노을이 지던 하늘은 어느새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점상들은 하나둘 조명을 켜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노란색 불빛이 피어오르자 먼 곳에서 꽹과리를 치고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누군가가 와르르 웃는 소리, 감탄 어린 비명을 지르거나 박수를 치는 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개는 불현듯 현기증을 느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곳엔 너무 많은 감각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야시장의 외곽으로 벗어나, 골목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는 개의 걸음이 불안했다.
“……!”
그 순간 흰 손이 뻗어져 나왔다. 누군가 개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를 으슥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엄청난 아귀힘이었다. 개는 발버둥 칠 새도 없이 무방비하게 끌려갔다.
쿵!
강한 힘으로 벽에 밀쳐진 개는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머리가 벽에 부딪치며 눈앞이 잠시 흐릿해졌다. 개는 이를 악물고 괴한을 걷어차려 했다.
“……?”
그러나 개는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바짝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개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공작이었다.
“…….”
“…….”
개를 내려다보는 공작의 눈은 차가웠다. 웃음기도 장난기도 섞이지 않은 무감정한 눈동자.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검푸른 눈동자가 개의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멀쩡하군.”
“…….”
공작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겉보기에 그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눈이 마주치면.
“혀가 잘린 게 아니라면 말을 해 보지 그래.”
소름 끼칠 만큼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고작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적을 코앞에서 마주한 것처럼 강렬한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개는 마른침을 삼켰다. 곤두선 신경이 남자를 공격하라 지시했다. 개는 움칠움칠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폐하를 만나야 합니다.”
이번 탄신 연회는 유일무이한 황제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황제의 주적이 모두 스러진 후 처음 열리는 축제. 그러니 오늘은 단 하나의 불상사도 없이 완벽해야만 했다.
개는 폐건물에서 만났던 덩치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보군.”
“……!”
개는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개의 멱살을 잡아 순식간의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너는 지금부터 네가 저지른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변명해야 할 거야.”
조금 전까지 개는 남자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코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격랑이 이는 바다처럼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 감정이 너무 격렬해서 자신에게까지 옮겨붙을 것 같았다.
“널 살린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마.”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개는 불에 덴 사람처럼 남자의 멱살 쥔 손을 떨쳐 내려 했다. 그러나 그 손을 떨어뜨리기도 전에―
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불이 타올랐다. 어둠에 잠겨 있던 골목이 번개를 맞은 듯 잠시 환해질 정도로 커다란 불.
콰앙, 쾅!
폭발음이 연발적으로 대기를 찢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개는 입을 벙긋거렸다.
폭탄이 터지고 있는 곳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황궁이었다.
폭발의 여진은 거대했다. 멀리서 들리던 축제의 소음이 한순간 모두 그쳤다. 들리는 거라곤 오로지 나뭇잎들이 파공음에 뒤흔들리며 내뱉는 사아아, 하는 소리뿐이었다.
긴 침묵, 혹은 정적.
온 세상의 시간이 멎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고 아무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
시곗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개가 눈을 깜빡인 후였다.
개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황제가.
황제가 저 안에 있다.
개는 자신의 멱살을 쥔 남자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목 끝까지 채워져 있던 제복의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목 위에 상처가 남았다. 그러나 이런 부차적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개는 곧장 골목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쾅!
그러나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시 벽으로 밀쳐졌다. 공작은 개의 제복을 움켜쥐고서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는 자신의 앞길을 막은 방해물을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자는 제압을 해야 한다. 개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빠르게 판단했다.
개는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 남자의 양 손목을 단단히 잡고 발을 들어 올렸다. 무릎을 걷어차 쓰러트리고, 제복 안에 있는 칼로 남자의 손을 찍어 내릴 생각이었다.
“윽!”
그러나 남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는 개의 머리를 붙잡아 벽에 밀쳤다.
짧은 충격과 함께 골이 울리는 듯한 어지러운 감각이 들었다. 개는 빙글 도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순식간에 코끝까지 밀려들었다.
흐려지던 정신을 부여잡은 순간, 개는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서걱. 예리한 칼날이 무언가를 베고 떨어지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무엇을 벤 건지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개는 방해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무작정 골목 입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황제가 죽었다면, ‘황제의 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개는 뛰는 방법을,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헐떡거렸다. 고작 열몇 발자국밖에 되지 않는 골목 입구가 아주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골목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
새하얀 불빛이 눈자위로 끼쳐 들어왔다.
개는 팔을 들어 자신의 눈 위를 가렸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갑작스러운 불빛을 감당하지 못했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막아!”
“폐하를 보호해라!”
검은색 제복을 입은 군부 관계자들이 큰 소리를 내며 퍼레이드 카를 에워쌌다.
저 단단해 보이는 퍼레이드 카는 개도 익히 아는 차였다. 황제의 탄신 연회를 위해 특수 제작 한 차였다.
황제가 황궁에 있던 게 아니구나.
탁, 맥이 풀렸다. 개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벽을 짚고 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귀가 먹먹했고 눈앞은 빙글 돌았다.
세상은 언제 조용했었냐는 듯 소란스러워졌다. 개는 불안정한 시선으로 퍼레이드 카를 바라보았다. 경호를 맡은 군인들 사이로 차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가 가려지길 반복했다.
황제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정말 안전한 건지 알고 싶었다.
그 순간, 군인들 사이로 화려한 정복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황제였다.
잔뜩 화가 난 듯한 황제가 떠밀리듯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는 무어라 바락 소리를 지르더니 불현듯 개가 있는 골목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하지만 황제의 시선이 골목에 닿기 전, 뒤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개를 골목 안으로 끌어들였다.
개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공작을 보았다.
“……!”
입술이 거칠게 맞닿았다. 차현은 개의 양손을 벽에 밀쳐 결박했다. 부드러운 입술의 표피가 찢어지며 피가 새어 나오는 감각이 생경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 모두 눈을 감지 않았다. 개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멍하니 눈을 깜빡였고, 차현은 형형한 눈으로 개를 마주 보았다.
개와 입 맞추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짐승에게 성욕을 느끼는 인간이 어딘가에 있기야 하겠지만, 차현은 그런 인간을 혐오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이렇게 입을 맞춘 것은 단지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다. 골목 밖에는 황제와 그를 경호하는 군인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가 황제에게 달려들거나 소리를 지르기라도 한다면 일이 모두 틀어지게 된다.
“…….”
“…….”
차현은 개가 미동도 없이 굳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뗐다. 아랫입술이 찢어진 개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도망칠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차현은 이제 이 맹한 얼굴을 믿지 않았다.
“곧 사람이 올 거야.”
개가 차현의 겉옷을 베고 골목의 입구로 튀어 나간 순간, 그는 자신의 수하에게 연락을 남겼다. 그들은 곧바로 팀을 꾸려 이곳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
눈을 끔뻑이는 개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차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좁혔지만,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웠다.
“나머지는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그는 개를 등지고 곧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퍼레이드 카는 아직 거기 그대로 있었다.
“……꺼지라 하질 않……!”
“……폐하 안 됩니다. 고정을…….”
황제에게 다가갈수록 소란은 더욱 커졌다. 차현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퍼레이드 카 쪽으로 걸어갔다.
“멈추십시오.”
그러나 채 가까워지기도 전에 군인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현은 제복 안쪽에 손을 넣어 소속 증명서를 꺼내 보였다.
“검찰청의 차현 검사입니다.”
“들어가십시오.”
차현의 신원을 확인한 군인은 곧장 몸을 비켰다. 그는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와 황제에게 다가갔다.
“지금 내 명을 거부하겠다는 거냐? 당장 꺼지래도!”
“폐하!”
버럭 화를 내던 황제는 뜻밖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황궁에 있어야 할 차현이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여기에 왜.”
황제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황궁의 보안을 지켜야 하는 차현이 여기에 왜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같은 때에! 황제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분통을 터트리기 전, 차현이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급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황제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말해라.”
“황궁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뒤늦게 폐하의 뒤를 쫓았지만…….”
차현이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황제는 그것만으로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의 분노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튀어 올랐다.
“사실이냐?”
“면목 없습니다.”
차현은 어두운 얼굴로 묵례했다.
황제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드디어 모든 적을 쳐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하나의 적을 물리치자 새로운 적이 고개를 내민다.
아니. 이번엔 더욱 질이 좋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한 성역인 황궁을 건드리다니.
황제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황궁을 노려보았다. 턱이 덜덜 떨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불한당들은 결코 쉽게 죽지 못할 것이다. 끝의 끝까지 살아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숨을 몰아쉬던 황제는 불현듯 먼 곳에 위치한 골목을 돌아보았다. 저곳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놈은 이미 죽었다.
“돌아간다!”
차현은 차에 올라타는 황제의 등을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낮에 잡혔던 네 명의 인간은 황궁을 테러한 범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무고하든 무고하지 않든 그건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황제가 탄 차가 통제된 거리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묵례를 하고 있던 차현은 차가 아예 보이지 않게 될 때쯤에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군인들이 친 인간 바리케이드를 빠져나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 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검사님 어떻게 된…….
“구금해 둔 네 명, 테러범 일당으로 처리해. 지금 당장.”
차현은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연기를 뱉어 내는 황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축제는 끝났어.”
놀이는 끝났다.
✵
탄신일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테러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벌어진 경악스러운 사건. 즐거웠던 축제가 흐지부지 마무리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와 의구심에 사로잡힌 채 뿔뿔이 흩어졌다.
황궁이 테러를 당했다. 대체 누가 그런 대범한 짓을 저지른 걸까?
사람들이 사라진 야시장은 금세 을씨년스러워졌다. 군인들만이 거리에 남아 주변을 수색하고 감시하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형. 오늘 황궁에서 폭탄…….”
“예성아!”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태성과 그의 동생 예성도 있었다.
아직 초등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은 예성의 손은 작았다. 발도 작았고, 키도 작았고, 담력도 작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음에도 태성의 눈에 예성은 아직 아기 같기만 했다.
“쉿, 쉿. 너 그거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마.”
태성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예성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예성은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는 형이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치, 야시장에서 같이 밤새우자고 했으면서……. 형은 거짓말쟁이야.”
“야! 내가 왜 거짓말쟁이야.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니까.”
태성은 억울함에 펄쩍 뛰었지만,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스산했다. 밤이 너무 늦었기 때문일까? 태성은 동생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예성아, 빨리 집에 들어가자. 밤엔 위험해서…….”
타닥.
뒤에서 낯선 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태성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다.
“읍……!”
그러나 뒤를 보기도 전에 두터운 손이 태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태성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지? 살인? 강도?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범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태성은 몸을 버둥거렸다.
“이놈 이거 왜 이렇게 힘이 세. 빨리 좀 해!”
입을 틀어막은 남자가 외치자, 또 다른 남자가 불쑥 태성의 앞에 나타났다. 그자는 태성의 옆에 서 있던 예성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혀, 형!”
“우읍, 읍!”
태성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동생을 납치하려는 것이었다.
태성은 동생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맞잡은 손끝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겁에 질린 예성의 눈에 와락 눈물이 맺혔다.
태성은 애가 탔다. 울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입이 틀어막혀 그럴 수 없었다. 이 순간 자신은 너무 무력했다.
“으읍……!”
간신히 붙잡고 있던 손이 한순간 미끄러졌다. 태성은 입이 틀어막힌 채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댔다.
안 돼.
“형! 혀엉, 읍!”
“형제가 쌍으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남자들이 킬킬 웃으며 말을 주고받았다.
“축제가 일찍 끝나서 한 탕도 못 했는데, 이거라도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태성은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야, 꼬마야.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사람이 서로 돕고 살아야지.”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돕고 살아야 한다고?
태성은 너무 억울했다. 너무 분했다.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어 화가 났다.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 꿈이겠거니 생각하라고.”
남자는 자신의 품에서 버둥거리는 태성의 목덜미를 손날로 내리치려 했다.
“……?”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팔에 마비라도 온 것 같았다.
뭐지? 남자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너 뭐 해, 인마.”
예성을 든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짜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쿵.
태성의 입을 틀어막았던 거구의 남자가 풀썩 쓰러졌다. 태성은 남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같이 바닥을 굴렀다.
“윽……!”
태성은 얼얼한 충격에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고통에 끙끙대는 것은 잠시였다. 태성이 눈을 크게 떴다.
예성이는?
태성은 제 위에 쓰러진 남자를 허겁지겁 밀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밤하늘에 뜬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쿵!
태성은 예성을 빼앗았던 남자가 바닥을 나뒹구는 것을 보았다. 또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한 여자가 높이 뻗었던 다리를 접고 있는 것도 발견했다.
납치범을 쓰러트린 여자는 후, 짧은 숨을 내뱉었다.
✵
황궁에 테러가 일어난 다음 날, 황제가 한 것은 차현을 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검찰 총장이라는 자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모두 떠넘겨?”
고작 하루 만에 검찰 총장은 말끔한 차림새를 잃어버렸다. 테러가 터진 새벽, 잠옷 차림 그대로 황궁에 끌려온 그는 하루 온종일 얻어맞아야 했다. 잔뜩 부은 얼굴과 피범벅이 된 몸뚱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돼지 새끼! 네 배때기에 기름칠이나 하라고 그 자리에 앉혀 준 줄 아느냐?”
“폐, 폐하.”
포박된 채 무릎을 꿇은 검찰 총장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황제의 사냥개라 불리우는 검찰의 우두머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황제의 화를 돋우었다.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 내려온 황제가 정렬해 있던 경비병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새파란 날을 빛내는 장도가 공기를 갈랐다. 그러고 순식간에 검찰 총장의 목에 닿았다.
“네가 일처리를 제대로 못 해 이런 일이 생긴 것 아니냐. 짐승도 제 본분은 열심히 하는데, 너는 대체 무엇이냐.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응?”
옅게 살이 베인 검찰 총장의 목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황제는 칼등으로 검찰 총장의 살찐 턱을 들어 올렸다. 겁에 질린 검찰 총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폐하,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를.”
“용서? 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황제의 눈에 새파란 불이 튀었다.
“나는 이미 널 용서한 적이 있다. 내 이복형제의 밑에서 일하던 너를 이 내가 자애롭게 용서하지 않았더냐.”
검찰 총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황제의 이복형제를 지지하던 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현 황제가 황권 다툼의 승리자가 될 것을 짐작했다. 배신은 쉽고 빨랐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검찰 총장은 피바람이 부는 황실 안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게다가 황제의 편에 선 덕에 ‘총장’이라는 자리까지 받게 되었다.
박쥐라는 오명을 달고 아무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무시하지 못할 권력이 쥐어졌으니까.
“너의 방만으로 인해 네 아랫사람은 큰 고통을 받았다.”
황제는 이자가 언제나 눈에 거슬렸다. 언젠가는 뒤통수를 칠 적을 등 뒤에 두고 있는 찜찜하고도 끔찍한 기분.
“어디 그뿐이냐? 그는 네가 내 눈을 피해 계집을 끼고 나돌 때 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발로 뛰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검찰 총장의 임기를 만들어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수고도 필요 없었다.
황제는 입을 비틀어 웃었다.
“충성심은 공작이 보이고 배는 네가 불렸군.”
칼날로 검찰 총장의 목을 툭툭 쳤다. 검찰 총장이 끅끅 숨을 삼키며 입을 달싹였다.
“너 같은 도둑놈 때문에 황궁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다.”
“폐하, 제발…….”
황제는 검찰 총장의 목에 닿아 있던 칼날을 느리게 치웠다. 그러고 흥미를 잃은 듯 칼을 바닥에 내던졌다.
챙!
흙바닥에 부딪친 칼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었다.
검찰 총장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황제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끝인가? 목숨만 붙어 있다면…….
“죽여라.”
“폐, 폐하!”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냉엄했다.
정렬해 있던 경비병들이 무릎 꿇고 있던 검찰 총장의 양팔을 붙잡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제, 제게 이러실 수 없습니다! 폐하! 폐하……!”
“…….”
차현은 계단 위에 서서 그 소란스러운 풍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능한 검찰 총장이 나태하게 세금을 축낼 때, 그는 더욱 유능한 부하가 되어 주었다. 그래야 게으른 총장이 일선에서 점점 손을 떼고 일감을 몰아줄 테니까.
마침내 총장이 검찰청의 일에 흥미를 잃었을 때, 차현은 검찰청의 내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굳이 선동할 필요도 없었다. 젊은 검사들은 하는 것도 없이 높은 위치에 앉아 있는 늙은 권력자를 쉽게 증오하는 법이었다.
“마지막까지 시끄럽군!”
황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인상을 와작 일그러트렸다.
차현은 계단 위로 올라온 황제에게 짧게 묵례했다. 황제의 사나운 시선이 고개 숙인 차현을 향했다.
“테러범들은 어찌 되었지?”
어젯밤, 진노한 황제는 테러의 배후를 붙잡아 일벌백계할 것을 공표했다. 또한 황궁의 보안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한 차현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 밝혔다.
그러나 차현이 테러 단체 일당을 붙잡아 뒀다는 점, 그리고 그간 황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참작하여 중징계를 내리지는 않았다. 황제는 간단한 징계로 테러범들을 직접 심문할 것을 명령했다.
“범행 일체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배후에 대해서는 실토하지 않아 심문 중에 있습니다.”
“뭐? 아직도 그걸 못 찾아!”
황제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차현은 실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달아오른 황제의 눈을 보다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뭘 보고 있는 거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구르던 황제는, 궁인들의 시선이 힐끗힐끗 자신을 향하자 바락 소리를 높였다. 화들짝 놀란 궁인들이 시선을 발치로 떨어트렸다.
황제는 한참을 더 씩씩거리더니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다들 꺼져라!”
겁에 질린 궁인들은 곧장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차현 또한 황제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잠깐 서라.”
그러나 황제가 멀어지려는 차현을 불러 세웠다.
차현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 냈다.
“이제 검찰 총장 자리가 비는군. 그렇지?”
황제는 거울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차현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그뿐이랴. 차현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자였다.
황제는 차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검찰 총장의 자리는 이제 네게 주지.”
황제는 차현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눈 그늘 짙은 황제의 눈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젯밤 골목에서 보았던 그림자는 분명…….
“됐다. 들어가 봐라.”
쯧, 혀를 찬 황제가 홱 몸을 돌렸다.
차현은 붉은 용포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자신의 저택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 개에게 변명을 듣지 못했다.
✵
“…….”
개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일을 잊은 것처럼 평화로운 푸른 하늘 아래, 황궁의 모습이 멀게 보였다.
“…….”
어제 개를 골목에 두고 간 남자는 지금 이 시간까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개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는 새벽 내내, 불이 켜진 황궁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여태 황제의 적은 황궁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개의 세상에는 황제가 적이라 명명한 사람과 아군, 그리고 아무 무리에도 포함되지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던, 아니 공격하지 못했던 황궁에 폭탄이 터졌다.
황궁은 황권의 집약체였고 상징이었다. 감히 누가 이곳을 공격한단 말인가.
어제까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개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후회했다. 자신을 납치했던 이들을 고문해서라도 황궁에 일어날 테러를 알아냈어야 했다. 단순히 행진식을 망치는 정도의 일을 벌일 거라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됐다.
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황제를 증오하고 이토록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단 말인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던 개가 홱 고개를 돌린 것은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형. 제가 좀 늦었죠.”
“…….”
머쓱한 듯 웃는 태성의 눈은 조금 부어 있었다.
개는 까만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달싹였다. 붉어진 눈가와 부은 눈, 물로 닦아 냈지만 눈물 자국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형.”
탁. 문을 닫은 태성은 그 위에 등을 기댔다. 고개 숙인 태성의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늘 해맑던 얼굴에 미약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형은 여기가 어떤 것 같아요?”
“……?”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성이 말하는 ‘여기’가 어디를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태성은 개의 의문 어린 얼굴을 보다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 나라요. 형 보기엔 어때요?”
“…….”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개는 물끄러미 태성을 보았다.
태성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곧 무언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형. 저는…….”
그러나 태성의 말소리는 금세 잦아들었다. 방 안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개는 잔뜩 힘이 들어간 태성의 양 주먹을 보았다.
“아니에요.”
태성의 얼굴에 나약한 미소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형, 아침 드셨어요? 안 드셨으면 제가 얼른 가져다드릴게요.”
“…….”
개는 눈을 깜빡였다. 오늘의 태성은 어딘가 이상했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이상한 건지 단정 지을 수 없어서 개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아직.”
“아직 안 드셨구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개는 문을 닫고 나가는 태성의 등을 보았다. 작은 등에서 어쩐지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 <개와 늑대의 시간> 1권 끝 ―
개와 늑대의 시간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