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3/19)

3장

개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공작의 방 안을 감시하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그건 그저 시선에 불과했다. 직접 칼을 맞부딪치는 것도 아니니 충돌이 생길 일은 없었다.

개는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

아직 절뚝거리긴 하지만 부축 없이도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퉁퉁 부어올랐던 발도 원형을 되찾았고, 무리한다면 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정말 뛴다면 도로 앓아누워야 하겠지만 말이다.

개는 일어서서 방 안을 걸었다. 아직 밖을 나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개는 넓은 공작의 방을 운동장 삼아 돌고는 했다.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은 발목을 회복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 이상의 이점은 없었다. 움직임이 적어지자 근육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개로서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었다.

개가 절뚝이는 걸음걸이로 욕실의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걸음을 멈춰 세운 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였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방을 둘러보는 중이었나요?”

“…….”

눈을 깜빡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빙긋 웃는 남자와 고개를 숙인 사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사용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만 순종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개의 눈에는 사용인들이 힐끗 눈을 들어 방 안을 살피려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분명 처음엔 개의 존재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 증거로 남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용인들이 개를 볼 수 없도록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사용인들이 개를 볼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그건 역설적이게도 남자에게 감시가 붙은 직후에 이뤄진 일이었다.

공공연한 진실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남자는 개의 존재를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공작의 남녀 편력’에 관한 근원 모를 소문은 개의 존재를 더욱 희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공작의 방에 있을 잠자리 상대보다, 공작이 이제껏 얼마나 많은 잠자리 상대를 방 안에 들였는지를 더욱 궁금해했다.

공작의 전략은 탁월했다.

“지루해 보이는 얼굴인데…….”

개는 방문을 닫고 들어오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 남자는 퍽 달큼하게 굴었다. 영 익숙해지지 않는 태도. 개는 창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향해 시선을 굴렸다.

남자의 손이 개의 뺨에 닿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개는 흠칫 몸을 떨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개는 한 번도 아름다운 명화를 직접 눈에 담은 적이 없었지만, 만약 보게 된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라 예상했다. 손을 뻗어 실체를 만져 보고 싶은 마음.

“방 안에만 있기 지루한가요?”

개는 잠시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긍정했다.

“예.”

“곤란하네.”

남자는 나긋나긋한 말씨로 개를 달래듯 속삭였다. 개는 어쩐지 귀가 간지러워져 손바닥으로 귀를 문질렀다. 그러자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이리 와 봐요.”

그리 말한 남자는 개를 이끌고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개는 창문 너머의 침입자가 긴장한 듯 몸을 떠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나뭇잎이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러나 가늘던 개의 눈이 커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가에 걸터앉은 남자가 개의 몸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 끼워 넣은 것이다.

남자는 창 너머의 침입자를 등지자마자 비스듬한 미소를 입술에 걸쳤다. 침입자에게 자신의 표정이 보이지 않으리라는 안도에서 오는 태도였다.

“방 안에만 있는 게 지루하다면 바깥에 나가 보는 건 어때.”

남자는 개의 귓가에 입 맞추듯 속삭였다. 개는 간지러운 감각에 몸을 떨었지만, 동시에 두 눈을 크게 깜빡이며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바깥으로 나가게 해 준다는 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간단한 심부름만 해 준다면 나갈 수 있어.”

“…….”

그러나 기대감에 부풀었던 마음이 금세 훅 가라앉았다.

개는 고요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간단한’ 심부름을 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개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일 게 분명했다.

개는 황제의 명령 없이는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그리고 ‘간단한 심부름’이란 개에겐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의 목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했다.

개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바깥에 나가고 싶었다. 꼭 황궁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더라도 몸을 쓰고 싶었다. 심부름 말고 다른 것은 안 되는 걸까.

개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창문 너머의 무언가를 힐끗거렸다.

“바깥의 불청객이 신경 쓰여?”

개는 말없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길게 뻗은 단단한 손으로 개의 손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럼 ‘네’, ‘아니오’로만 대답해.”

개의 양팔을 잡고 작은 몸을 제 다리 사이에 끼운 남자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깥으로 나가고 싶나?”

개는 입을 달싹였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수많은 변명들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가 스러졌다.

결국 내뱉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네.”

남자는 개의 얼굴을 보았다. 생기 없어 보이는 얼굴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새까만 눈이었다.

남자의 손이 개의 뺨에 닿았다. 개는 힐끗 창문 너머를 살폈다.

“탁월한 선택이야.”

남자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개의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개는 순간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다.

“윽.”

발목에 닿은 충격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순간 발이 꼬였다. 남자는 뒤로 넘어지려는 개의 팔을 황급히 잡아끌었다.

“…….”

“…….”

그러나 남자는 곧 자신이 무언가를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는 황제의 개였고, 훌륭한 솜씨를 가진 암살자였다. 꼴같잖게 넘어질 줄 알고 붙잡았으나 개는 이미 낙법 자세를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손목을 붙들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는 개를 보았다.

“하.”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손목을 놓아 주자 개는 가뿐한 걸음걸이로 물러섰다.

“괜한 짓을 했군.”

남자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개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

“…….”

개는 미약한 경계심이 어린 얼굴로 남자와 거리를 뒀다. 또 귓속에다가 무슨 말을 속닥거리면 그땐 정말 급소를 찌르기 위해 손이 나갈지도 몰랐다.

“이리 와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줄 테니까요.”

그러나 남자는 개에게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개는 머뭇거렸으나 저무는 해를 등진 남자의 얼굴이 퍽 아름다워서, 그곳을 향해 다시 걸어 들어갔다.

개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붕대를 새로 감싼 발목은 어제보다 상태가 나아졌고, 엊그제보다는 훨씬 더 좋아졌다.

발목의 상태를 확인한 개는 바로 발을 바닥에 디뎌 걸음을 옮겼다. 약간의 무리를 감수한다면 절뚝거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개는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워 문 바깥의 기척을 더듬었다.

창 바깥에는 공작의 방을 감시하는 불청객이 있었기 때문에 창문으로는 뛰어내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개는 문밖의 기척이 가장 적어지는 순간에 방문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태성은 오늘 동생의 운동회가 있어 휴가를 받았다고 하니 개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개는 느릿느릿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밖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복도가 고요해진 순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개는 일정한 속력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황궁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답게 정돈된 저택의 복도를 걸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풍경을 감상할 시간도 심미안도 개에겐 없었다.

공작의 방을 감시하던 불청객은 공작의 방을 마저 감시해야 하는지, 아니면 복도로 빠져나간 개를 감시해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한 듯했다. 개는 자신의 뒤를 멈칫멈칫 따라오던 기척이 곧 공작의 방 근처로 다시 돌아간 것을 느꼈다.

“…….”

남자가 말한 그대로였다.

개는 복도를 걸어 나가 불청객의 시선에서 벗어난 후,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저택의 뒷문으로 향했다. 이따금 피치 못하게 마주치는 사용인들이 있었지만 개는 유령처럼 조용히 그곳을 지나갔다.

‘사용인들과 마주쳐도 그냥 지나가.’

개의 이 기묘한 외출을 기획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내 방에 있는 너와, 밖에 있는 너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을 거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개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누군가 본다면 키스를 하고 있다고 오해할 만큼 가까운 거리.

‘네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너를 다르게 볼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꾸며 낸 상황에 불과했다.

‘위치’를 입에 올릴 때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개는 남자를 직시했다. 습관처럼 웃고 있는 검푸른색 눈동자가 황궁의 호수처럼 깊고 차가웠다.

“…….”

개는 벽 뒤에 몸을 감추고 기척을 죽였다. 뒷문 근처를 지나던 사용인 두 명이 무언가를 속닥거리고 있었다.

“정말? 공작님 방에서 피 묻은 천을 치운 애가 있대?”

“그래. 공작님 그렇게 안 보였는데 취향이…….”

사용인들의 기척은 멀어지다가 곧 사라졌다. 개는 그제야 감췄던 몸을 드러내고 뒷문을 빠져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얇은 옷가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뒤뜰에 우거진 나뭇잎들이 솨아아 흔들리며 흩뿌린 풀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개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의 말대로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는 정도야 산책 삼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개는 몸을 푸는 행위 같은 이 외출이 꽤 마음에 들었다.

방 안을 감시하던 불청객의 시선도 없었고, 재잘재잘 떠드는 태성도, 사용인들도 없었다. 뒤뜰엔 온전히 개 하나뿐이었다. 사박사박 밟히는 잔디를 헤치고 뒷담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공작의 저택을 두르고 있는 높은 돌담은 보통의 사람에겐 경외심을 안겨 줄 만큼 공고하게 느껴졌다. 물론 개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개는 돌담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칠거칠한 벽을 매만지는 손끝에 신경이 집중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미묘하게 헐겁게 박힌 돌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개는 그곳에 시선을 주었다.

‘이리 와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줄 테니까요.’

남자는 개에게 말했다.

‘뒤뜰에 있는 돌담, 거기에 이걸 끼워 놓고 오면 돼.’

개는 돌을 밀었다. 그러자 돌 사이로 희미한 틈새가 생겼다.

개는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작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

종이는 복잡하게 매듭지어져 있었고, 또한 무엇을 넣었는지 둥글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개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종이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종이로 묶인 매듭은 자칫하면 찢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개는 어설프게 묶인 매듭을 풀듯 손쉽게 풀어 헤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의 다 풀어졌을 즘이었다. 개는 매듭을 풀던 손을 멈췄다.

“…….”

개가 종이를 풀기 시작한 건 단 하나의 생각 때문이었다. 종이에 감싸여 있는 건 덩어리진 물건이 아니었다. 감촉으로 보아 가루가 분명했다.

종이에 감싸인 가루라.

‘이 안에 들어 있는 게 약이라면.’

남자는 지금 누군가에게 감시를 받고 있다. 그리고 감시받는 상황에서는 이런 위험한 일을 자처해서는 안 됐다.

물론 운반을 개가 맡았으니 저택 안에서 들킬 일은 없지만, 이게 밖으로 유통된 후 누군가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남자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일단 확인을 해 보자. 약이 아니라면 다시 매듭지어 벽에 끼워 두면 될 일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약이라면.

남자에게 종이를 펼쳐 봤고, 이런 건 인편으로 보내는 게 나을 거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손이 멎었다. 순간 돌처럼 굳은 개는 눈을 깜빡였다.

이걸 왜 고민하는 거지.

개는 풀다 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종이는 단 하나의 매듭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개가 손 한 번만 움직이면 스르륵 풀려 버릴 매듭.

“…….”

개는 자신이 풀었던 매듭을 다시 엮기 시작했다. 희멀건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바삐 움직이는 손길에는 미묘한 당황이 섞여 있었다.

종이를 다시 완벽히 묶어 낸 개는 벽의 틈 사이에 종이를 끼워 넣었다. 벽의 틈새에 딱 맞물리게 종이가 끼워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곳에 종이가 끼워져 있다는 걸 모를 정도였다.

임무를 마친 개는 힐끗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역시나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이내 바삐 돌담에서 멀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개가 떠난 벽 너머에 누군가 나타났다. 갈색 머리의 남자, 윤재경은 설렁설렁 걸으며 벽의 어느 부분에 손을 댔다.

“아휴, 차암……. 검사님은 귀찮은 일만 나한테 시킨다니까.”

재경은 차현의 보좌관 역할을 자처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현재 차현의 명령으로 공작의 저택까지 걸어온 터였다.

제복의 단추를 반쯤 풀어 헤친 재경은 손끝에 걸린 종이를 밖으로 빼냈다. 그러자 복잡하게 접힌 종이가 벽 사이에서 툭 튀어나왔다.

피로에 전 재경은 별다른 의심 없이 제복의 안주머니에 종이를 넣으려 했다.

“어라.”

매듭이 문득 눈에 띄지만 않았어도.

순서가 틀린 건 아니지만 매듭은 분명 반대로 접혀 있었다. 그리고 재경이 아는 차현은 이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 이것 참.”

재경이 히죽 웃으며 반듯이 접힌 종이를 자신의 눈높이에 맞췄다.

“조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검사님이겠는데.”

뱀처럼 요사스럽게 휘어진 눈이 즐거움을 담았다. 시시하고 지루한 일을 싫어하는 남자는 이런 일상의 균열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복 안주머니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황가의 편집적인 의심은 그리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황가는 급격하게 뒤바뀌는 세상에 부딪치면서도 그 명맥을 억지로 이어 나갔다. 입헌 군주제의 성격을 띠던 체제를 다시 전제 군주제로 바꾸었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은 국가의 보안에 위협을 끼쳤다는 이유로 잡아들였다.

공포는 빠르게 번져 갔다.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은 죽거나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황실과 관련된 일을 자신의 삶에서 배제시키려 했다.

어디를 가든 군인이 사람들을 지켜보았으며, 방송 매체는 연일 연예계 가십과 스포츠 이슈에 대해서만 떠들어 댔다.

시간이 흐르자 공포는 점점 익숙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계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랏일 하는 누가 청렴하지 못하고 누가 부패했다는 이야기들은 염증이 날 뿐이었다.

사람들은 획일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나라는 안정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간신히 얻은 평화를 잃고 싶지 않아 했다.

그 시기를 종횡무진 활약하던 군인과 정치가들은 작위를 받거나 높은 직위를 약속받았다. 나라는 아첨꾼들과 큰소리를 낼 줄 아는 짐승들로 가득 찼다.

황가는 더 이상 전통성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전통성은 그저 권력자가 좋을 대로 붙였다 떼었다 하는 허울 좋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유교적 가치를 중요시했던 황궁은 암투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너무 많은 것을 묻어 두었다. 권력자들이 단물을 빨아내고 빨아낸 제국은 이가 다 빠져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젠가와 같았다.

실바람이라도 불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볼품없는 탑.

“폐하께서 심기가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오늘도 오지 않으신 걸 보면.”

“크흠, 뭐 한두 번 그런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은 하나같이 반백의 머리에 아집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현은 그 가운데 앉아 찻잔을 들었다. 내로라하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순백색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 차현은 꽤나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래도 멀리 보자면 그 살인마 놈을 멀리 내쫓은 게 여러모로 득이 됐지.”

차현은 말을 꺼낸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노인이라 칭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나이임에도 장정처럼 커다란 몸을 가진 남자는, 젊었을 적 황가에 방해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죄책감 없이 죽이던 이였다.

“안기부장, 말을 조심하게. 그래도 폐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던 충직한 개였지 않은가.”

흰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고고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저 남자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거짓 자백을 토해 내게 만들던 이였고,

“틀린 말도 아니지. 폐하의 개새끼를 처리하지 않았으면 그놈에게 목이 따이는 건 우리가 됐을 거야!”

“그 고약한 말투는 고치질 않는 건지 고치질 못하는 건지.”

천박한 말투를 내뱉는 노인도, 점잖은 체 혀를 차는 노인도, 이곳에 앉아 있는 모두가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아무튼 자네가 직접 나서서 처리해 주니 우리가 한시름 놨네.”

그리고 그건 차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차현은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노인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별말씀을.”

흰 제복의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무해하게 웃는 차현은 퍽 청렴해 보였다.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저 배운 분들의 지혜를 빌린 것뿐입니다.”

차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차현은 생긋 웃으며 원탁에 둘러앉아 있는 늙은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이곳에 배운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시대의 흐름에 잘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어느 시골구석에서 깡패 노릇을 하거나 부랑자로 살다 죽어 버렸을 목숨들이다.

그리고 그 거렁뱅이 같았던 과거는 그들의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부러지고 누렇게 변색 된 이와 검게 때가 탄 손톱 밑, 얼굴에 남은 흉터.

전부 차치하고도, ‘배운 사람’이라는 얄팍한 빈말에 진심으로 좋아하는 멍청한 모습들만 봐도 그랬다.

“하하, 이 늙은이들을 칭찬하는 말로는 과하구만.”

차현은 말없이 웃었다. 진심으로 과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점잔을 빼는 얼굴이 역겨웠다.

“아무튼 그래, 폐하에 관한 문제는 곧 잠잠해질 거야. 자네들도 알지 않나. 매번 한참 예민해졌다가 곧 괜찮아지고는 했던 걸.”

“쯧.”

안기부장이 불만 어린 얼굴로 혀를 찼지만 그뿐이었다. 모두가 감사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은 미소를 띤 채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오랜 시간 권력의 줄타기에서 살아남았다는 자신감, 그렇기에 이 나라의 황제조차도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고 믿는 탐욕스러운 얼굴들.

차현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그럼 원래 안건이었던 조세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시작…….”

“……관련 폐하의 승인…….”

변화를 모르고 우물 안에 박혀 버린 두꺼비들은 눈이 어두워 자신의 발밑이 무너지는 것도 알지 못한다. 우스운 일이었다.

차현은 회의장을 나오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늙은이들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웃어 주느라 고역이었다.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오늘도 폐하는 회의에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차현은 눈을 들어 운전석을 보았다. 운전석에는 보좌관인 재경이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야릇하게 접어 웃었다.

“충격이 크신가 보네요. 원래 소중한 건 가까이에 있을 때 모르는 법이죠.”

재경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폐하의 충격을 운운하는 태도라기엔 퍽 경박했다. 차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노래 좀 그만 부를 순 없나?”

“듣기 싫으십니까아?”

재경은 말끝을 늘리며 키득대기 시작했다. 차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경은 지루하지 않은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드는 병자였다. 그러므로 재경에게 말려들어 반응하는 순간, 그는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이 분명했다.

차현은 룸 미러에 비치는 재경의 휘어진 눈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군.”

차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재경이 저런 식으로 웃고 있다는 건 필히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검사님은 눈치가 차암 빠르시다니까요.”

재경은 이 질문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실실대기 시작했다. 차현은 대답 없이 시선을 보냈다. 직진하던 차가 코너를 돌았다.

“이걸 좀 보실래요?”

차현은 재경이 품 안에서 꺼낸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이 종이가 자신이 일전에 개에게 건넸던 것임을 곧바로 깨달았다.

“매듭이 반대로 묶여 있던데.”

재경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차현은 룸 미러에 비치는 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종이를 보았다.

“들킨 거면 어떡합니까?”

“글쎄.”

차현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매듭 묶인 종이를 위로 튕겼다가 받아 냈다. 그러고는 곧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 원래대로 진행해.”

차현은 종이를 다시 재경에게 건넸다.

품 안에 종이를 쑤셔 넣은 재경이 시들시들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꽝인가 보네요.”

“이걸 열어 봤으면 분명 먹어 보기도 했을 텐데, 아직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질 않으니까.”

차현은 자신이 뱉은 말이 새삼 우습게 느껴졌다. 개는 무감정하고 말이 없었지만, 꽤 알기 쉬운 면모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는 무모함이 그랬다.

“간만에 재밌는 일이 생기는 줄 알았더니.”

재경은 아쉬운 듯 푹 한숨을 내뱉더니 직진 도로를 달리는 데에 집중했다.

차현은 얼마 전 자신에게 총을 쏘았던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자는 현재 감옥에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있을 터였다. 배후를 밝히기 위한 작업 중 하나.

“…….”

차현은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을 가볍게 까딱였다.

활용도가 떨어진 패의 목숨을 깔끔하게 끊어 주는 것도 차현의 역할이었다. 그는 몇 단계를 거쳐 쥐도 새도 모르게 죄인의 식단에 들어갈 독을 손끝에서 굴렸다.

보고서에는 고문에 의해 죽었다고 적어 둬야겠군.

그는 차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고 자신의 죽은 형과 아버지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외출을 허가받은 개는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보고 있었다.

물론 발목이 다 낫지 않아 나무를 뛰어오르거나 담장을 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대신 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풀이나 벽 뒤에 숨어 사람들을 주시했다. 어쩐지 사냥법을 처음 배웠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물론 그 시절에 배운 사냥법이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가을이 시작된 바깥의 날씨는 서늘했다. 얇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개의 손끝과 코끝이 온통 붉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개는 시린 코끝을 옷소매로 문지른 뒤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나 발돋움을 하지 않고선 나뭇가지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개는 미미하게 얼굴을 구겼다가 이내 발을 나무 위에 올렸다.

그러나 두 발로 나무를 기어 올라가기엔 위험 요소가 컸다. 우선 발목이 문제였고, 두 번째로는 얇은 옷가지가 문제였다. 남자는 일전에 옷을 찢지 말라고 경고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개는 나무에 올렸던 발을 내리고 나무의 단단한 껍질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날카롭고 거친 나무의 표면은 개의 얇은 옷을 손쉽게 찢어 버릴 것 같았다.

개는 나무에 미련을 둔 듯 한동안 머뭇거리다, 이내 어깨를 늘어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푸르스름하던 하늘에 어느새 짙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온 사방이 주황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개는 까만 눈으로 노을 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아침부터 저택을 돌아다닌 덕에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을 파악해 둘 수 있었다. 개는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뒤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개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뒤흔들었다.

“…….”

개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오랜만에 움직인 탓인지 가쁜 숨이 밀려들었다.

황제의 명령을 따르며 적의 목을 벨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폐 안쪽, 아주 깊숙한 곳까지 숨이 차오르는 느낌.

개는 괜스레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가 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흉물스러웠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불현듯 자신의 머리 위에 긴 그림자가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개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엔 흰 제복을 입은 단단한 몸이 서 있었다.

“방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러서기 위해 자세를 잡았던 개의 몸이 멈칫 굳었다. 개는 잠시 그 자세를 유지하다가, 머뭇머뭇 몸을 바로 세웠다.

“맞았네요.”

남자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은밀한 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개가 방을 나왔을 때만 해도 잠잠하던 기척이 남자가 다가오자마자 가까워졌다.

남자를 감시하는 게 맞았군.

“이리 와요.”

개는 자신에게 손을 뻗는 남자를 보았다. 개는 멀뚱멀뚱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남자의 손을 지나쳐 걸었다.

“…….”

“…….”

남자는 자신의 옆에 와 멀뚱멀뚱 서 있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쩐지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뻗었던 손으로 개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개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쥔 남자의 곧고 긴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에 닿은 낯선 감촉이 어색했지만 남자 또한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정말 눈치가 없는 거 알고 있나?”

밀어를 건네듯 속닥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남자를 감시하는 시선을 느끼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결국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는 감시가 있을 때는 귀애하는 사람 대하듯 대하라 말했다. 그러나 개는 남자처럼 유려하게 말할 자신도 없었고, 살갑게 행동할 자신도 없었다. 감시의 시선 아래에서는 고개를 젓는 것만이 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남자 또한 그것을 알았는지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남자는 개에게 퍽 살갑게 굴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개는 남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귀가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방 안에 들어온 개가 가장 먼저 하게 된 것은 뜻밖에도 목욕이었다.

물론 개는 ‘목욕을 하라’는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지금 상황에 왜 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개에게 남자는 화사하게 웃으며―

‘얼굴에 뭐가 묻었네요. 바깥 활동이 아무리 즐겁다 해도 그렇지 두더지랑 친구를 해서 쓰겠어요? 다음엔 조심해요. 옷에는 풀이 많이 묻었는데 지렁이와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죠? 머리카락도 이렇게 푸석해서야……. 새가 자기 집인 줄 알겠네요. 이렇게 부주의한데 제가 어디 눈이나 떼겠어요. 절 생각해서라도 조심해 주세요.’

나긋나긋하게 이어지던 남자의 말은 100명의 사람에게 두들겨 맞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정신없이 쏟아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멍하니 듣고만 있던 개는 결국 남자의 말을 납득하기를 포기했다. 그러고 남자가 무슨 말을 더 잇기 전에 황급히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두더지니 지렁이니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다.

문밖에서 남자가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는 그것마저 두려워서 물을 틀고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물 안에 머리가 잠기자 물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개는 느릿느릿 씻으며 뭉그적거렸다.

마침내 욕실에서 나왔을 때, 남자는 목 끝까지 채워 놓았던 제복의 단추를 풀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서류를 두 가지로 분류하여 놓다가 불현듯 개를 보았다.

“한결 낫네요.”

남자는 욕실 문에 붙어 서 있는 개를 보며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그려진 미소는 비록 진심이 담겨 있지는 않더라도 시선을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개는 남자를 경계하던 것도 잊고 잠시간 눈길을 주었다.

“이리 와요.”

남자는 개를 불렀다. 개는 남자의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남자는 개의 팔을 잡았다. 아직 물기가 남아 축축한 살갗이 남자의 손아귀에 엉겨들었다.

“자꾸 말썽을 부리면 벌을 받게 될 테니 주의하세요.”

남자는 그 말만 남기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개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불쑥 커져 이제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개는 감정을 알 수 없는 까만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네게 맡겼던 종이를 누가 건드렸던데.”

남자가 허리를 숙여 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놀란 걸 보니 맞나 보네.”

개는 남자가 잡고 있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무의식중에 팔을 움찔 떨었던 모양이었다.

폭력을 가미한 취조라면 일말의 반응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이런 식의 질문에는 취약했다. 개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해야만 했다. 누구도 친밀한 접촉을 하며 속삭인 적이 없어 방심했다.

개는 자신을 바라보는 검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직시했다.

“난 분명 벌을 주겠다고 말했어.”

남자가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렸다. 개는 미묘한 초조함이 뒤엉킨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대낮의 도로는 기묘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녔고,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교통들, 색색의 다양한 차들이 수없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이상한 풍경이었다. 적어도 개에게는.

개는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길거리였다. 개도 저 길을 지나 본 적이 있었고, 사람들은 모르는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러니 특별할 것이 없어야 마땅했다.

“…….”

마땅하지만.

개는 이런 환한 대낮의 길거리를 처음 보았다.

개의 위치는 언제나 황제의 옆자리였다. 그가 황제의 곁을 떠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적의 목을 꺾을 것을 명령받았을 때뿐이었다.

개가 보는 낮의 하늘이란 오로지 황궁에서 보는 네모난 하늘뿐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황제의 분풀이 상대가 되어 주거나, 그의 술주정을 듣고 있을 때면 그마저도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생활에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개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날들이었고, 황제는 주인으로서 응당 해도 될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저 그뿐인 일.

다만 그때의 일을 떠올린 건, 처음 본 풍경이 이국의 것처럼 생경했기 때문이다. 같은 거리라도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개를 놀라게 했다.

얼마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개는 불현듯 자신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풍경만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는 힐끗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그러고 곧장 낯선 풍경을 마주했다.

“…….”

“…….”

남자는 차 시트에 고요하게 기대어 있었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 두 눈두덩과 일정한 숨소리. 남자는 잠들어 있었다.

개는 까만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남자가 정말 잠든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함부로 손을 뻗어 남자의 코 아래에 대 보는 당돌한 짓은 하지 못했다. 기감이 발달한 남자는 개가 손을 뻗는 순간 잠에서 깰 것이 분명했다.

개는 결국 남자에게 손을 뻗는 것은 포기하고 그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항상 깨끗한 흰 제복만을 입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눈에 띄지 않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개는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와 다를 것 없는 너절한 옷이 눈에 들어왔다.

“…….”

개는 다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말없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개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난 분명 벌을 주겠다고 말했어.’

남자는 개에게 벌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개에게 ‘벌’이 될 만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황궁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개는 두려웠다. 남자가 ‘황궁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엄포를 놓는다면, 개로서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차례 탈출을 실패한 경험이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남자가 내린 벌은 ‘황궁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아침 해가 밝기 무섭게 후줄근한 옷을 꺼내 입더니 개에게도 비슷한 옷을 건넸다. 그러고는 이렇다 저렇다 설명도 없이―

‘이게 네 벌이야.’

하고 말했다.

개는 힐끗 남자를 보았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씩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깨어나려는 것이다. 개는 언제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냐는 듯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차가 멈췄다. 개는 칸막이가 쳐진 운전석을 힐끗 보고, 남자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남자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듯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앞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치 두껍게 씌워졌던 꺼풀이 한 겹 벗겨진 듯한 얼굴.

“아.”

그러나 그 얼굴이 개를 향해 돌아섰을 때, 남자는 다시 미소를 덮어쓰고 있었다.

“내리지.”

남자는 긴 다리를 바닥에 디뎠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남자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주위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명물시장’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 장소는 거대한 동굴처럼 보였다. 개는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이곳과 가장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남자는 예상외로 이곳이 퍽 익숙한 듯했다. 그는 시장의 골목골목으로 흘러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자의 뒤를 쫓던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

길을 잃었다.

분명 큰길을 지나왔을 땐 꽤 많은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던 것 같은데, 남자를 잃어버린 골목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곳에는 노점상도 몇 없었고, 그마저도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개는 주위를 살펴보다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한낮인데도 밤의 골목에 들어온 것 같은 스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완전히 고립되었다.

개는 남자를 잃어버린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입을 달싹였다.

“…….”

자신이 도망치는 것이면 몰라도 남자를 이런 식으로 잃어버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자는 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알았다면 지금쯤 길을 되돌아오고 있지 않을까.

개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개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남자의 기척은 찾아낼 수 없었다. 가만히 서서 숨소리를 죽여 보아도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어쩐지 당혹스럽고 초조해졌다.

개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머리로는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칠 수 없다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왜?

도주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만약 한번 더 잡힌다면 그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개는 질문이 익숙하지 않았다. 답변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향한 물음에도 답할 수 없었다.

골목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이곳으로 걸어간다 해도 남자를 찾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개는 주춤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개가 주변을 살펴보는 건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함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근처에 남자가 없다면 개는 지체하지 않고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애당초의 목표는 그것이었으니까.

개는 점점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불현듯 들린 인기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개는 홱 고개를 돌려 기척이 난 곳을 보았다.

“어라…….”

“…….”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 사람은 우선 생물학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는 대충 올려 묶고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잠옷처럼 입고 있었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여자도 그저 눈을 깜빡였다.

“…….”

“…….”

짧은 침묵이 골목을 맴돌았다. 그리고 먼저 움직인 것은 여자였다.

여자는 이 골목에 몇 없는 허름한 상가를 지키는 상인인 듯했다. 개는 자신을 등지고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한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는 몸을 돌렸다. 남자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개는 다시 깊은 골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개는 돌아보지 않았다. 표적도 아닌 사람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개가 계속 걸음을 옮기자 여자가 등 뒤에 따라붙었다.

개는 결국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뒤를 밟히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

“…….”

여자는 차가운 빛을 띠는 개의 까만 눈을 마주하고 움찔 몸을 떨었다. 사람을 사냥하던 사냥개의 눈빛은 섬뜩한 감각을 일깨우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뿐, 여자는 개의 뒤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골목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그쪽으로 더 들어가면 위험해.”

“…….”

여자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험하다니. 그런 말은 개에겐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개는 여자를 뒤로한 채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여자는 끈질기게 개의 뒤를 쫓아오며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개는 흉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위험하다고. 가면 후회할 거야.”

여자는 개의 위협적인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개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여자의 목을 힐끗 보았다. 이번에도 길을 막으면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면 더는 막지 못할 테니까.

“길을 잃은 거지?”

뜻밖의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

까만 눈에 서려 있던 흉흉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개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더니 곧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자신은 길을 잃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곳에서 길 잃는 사람 종종 나오니까, 그쪽도 그런 것 같았어.”

여자는 살풋 찡그린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툭 말을 토해 냈다.

“나도 그쪽이 좋아서 말린 거 아니야.”

개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해 냈다. 후줄근한 옷을 입은 여자의 손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드러난 팔도 단단해 보였고, 뺨에는 희미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냥 그쪽이 이쪽의 생리를 모르는 것 같으니까 붙잡은 거야.”

개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 몸에 남은 흔적들은 단순한 노동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곳에선 길을 잃었을 때 하면 안 되는 짓이 있거든. 길을 잃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거.”

하지만 암살자는 아니었다. 암살자로 일했다기에는 몸에 남은 흉터가 너무 적었다. 여자는 조금 더 양지에 있는 일을 하던 이리라.

“그러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니까.”

경호원이나 그와 엇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이다. 개는 확신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걸까. 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살폈다.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일행이 있어도 길이 엇갈려 버릴 테고.”

“…….”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일행과 엇갈린다’는 말에 개의 몸이 움찔 굳었다. 아까의 흉흉하던 기세와는 명백히 달랐다.

여자는 맹한 얼굴로 움찔거리는 개를 보고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일행이 있는 거면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여자는 자신의 가게 문을 열고 고갯짓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 같았다.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제정신으로는 못 나오게 될 테니까, 들어갈 생각 말고.”

개는 힐끗 골목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희미한 탄내와 시체 썩는 악취 같은 것이 풍겨져 나왔다.

개는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를 찾기 위해 골목으로 향한 것은 이 냄새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섣불리 길을 떠났다가는 여자의 말마따나 아예 일행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개는 고요하게 잠들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개는 결국 이곳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잘 선택했어.”

개는 얌전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발을 들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한 쇠 냄새가 밀려들었다.

개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가게 안에는 연장으로 쓸 수 있을 만한 다양한 쇠붙이들이 널려 있었다.

“좀 지저분한데, 신경 쓰지 마.”

개는 문가에 걸려 있던 몽키스패너를 만지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개에게 낡은 의자 하나를 끌어다 주었다.

“앉아 있어. 마실 거라도 가져다줄게.”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작은 쪽방 안으로 사라졌다. 개는 여자가 사라진 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는 분명 실력이 있는 자였다. 일에서 손을 떼고도 꾸준히 관리한 듯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손에 남은 굳은 살 역시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는 흔적이었다. 개는 여자가 웬만한 장정 한 명쯤은 거뜬히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개가 무방비하게 여자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개보다 약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는 ‘황제의 개’였으니까. 이 나라의 누구도 개보다 강하지 않았다.

남자라는 예외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언제나 그랬을 것이다.

“…….”

개는 여자가 건네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쪽방 문을 바라보던 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달칵. 여자가 쪽방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집에 커피밖에 없어서.”

개는 여자의 손에 들린 종이컵 두 개를 보았다. 쇠 냄새로 가득 차 있던 가게 안에 단내가 풀풀 피어올랐다.

“자. 받아.”

“…….”

개는 자신의 앞에 불쑥 내밀어진 종이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여자를 보았다.

“안 받고 뭐 해.”

여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제 몫의 커피를 후루룩 들이켰다. 개는 그제야 여자가 내민 종이컵을 받아들였다.

뜨거운 종이컵 안에는 희뿌연 거품이 둥둥 떠 있는 갈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개는 종이컵을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연갈색의 액체가 흔들리며 단내가 풀풀 피어올랐다.

“……?”

이게 뭐지.

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커피의 모습을 떠올렸다. 황제에게 진상되는 커피는 언제나 최고급 도자기 잔에 담겨 나왔다. 이런 종이컵이 아니라.

색깔도 이렇게 부옇지 않았었다. 투명한 물에 진한 갈색 잉크를 푼 듯한 액체, 그것이 개가 알던 커피였다. 냄새도 달기는커녕 무척 썼고.

남자가 먹던 커피도 마찬가지였는데.

개는 얼굴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종이컵에서 뿜어지는 단내가 지독했다. 꼭 독을 숨기기 위해강하게 맛을 낸 음식 같았다.

“안 먹어?”

여자는 다시 커피(라고 부르는 액체)를 후루룩 들이켰다. 개는 가만히 종이컵을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가판대 위에 올려놓았다.

“안 마실 거면 진작 말하든가.”

아깝게 괜히 탔네. 여자는 중얼거리더니 자신 몫의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여긴 어쩌다가 들어온 거야.”

“…….”

개는 가만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에 왜 오게 되었는지 말해서 개가 이득을 볼 것은 전혀 없었다.

“왜 여기까지 오게 됐냐고.”

여자는 개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개는 아무런 대답 없이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철물점 내부를 살폈다.

“시장을 둘러볼 거면 입구 쪽만 돌아도 상관없어. 그런데 그쪽은 굳이 여기까지 들어왔잖아. 따로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가게는 낡은 것치고는 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물쇠나 갖은 공구들이 널려 있는 가판대에는 먼지조차 거의 없었다.

“너 외국인이야?”

“…….”

불현듯 개의 고개가 가게의 문을 향했다. 멍해 보이던 까만 눈에 싸늘한 빛이 번졌다.

여자는 개의 눈을 보고 잠시 움찔 몸을 떨었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에도 이 눈에 졸았다가, 금세 무장 해제 된 개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벙어리인가 보네.”

대답하지 않는 개를 비꼬듯 말했을 때였다.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던 가게 문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쾅!

거세게 문이 밀어 열렸다.

개를 향해 있던 여자의 몸이 뒤늦게 문 쪽으로 돌아갔다.

개는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거구의 손에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주인장! 주인장 어디 있어?”

“이 집은 손님이 왔는데 접대가 없어, 접대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거구의 남자 두 명이었다. 흉악한 인상의 남자들은 살갗 위에 요란한 문신을 새기고 왈패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댔다. 울룩불룩한 그들의 커다란 덩치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들의 몸을 보았다.

근육을 거대하게 부풀려 위협적인 몸을 만들었지만 저건 실전에서 쓰이는 근육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은 실력의 증거라기보다는 멋내기용에 가까웠다.

물론, 근육을 키운 만큼 평범한 인간들에 비해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평범한 사람’에 비해 말이다.

개는 시선을 돌려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라면 분명 저 두 명의 거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두 명이 한 번에 덤빈다면 좀 어려울까. 그래도 저들보다 실전 경험이 많을 여자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그러나 여자는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졸개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대신 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자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인장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여자와 눈을 마주한 거구의 남자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개는 쨍하고 찢어지는 목소리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장사할 자세가 안 되어 있어. 손님이 왔는데 째깍 와서 인사를 해야지. 안 그러냐?”

“네. 맞습니다!”

살찐 여우를 닮은 남자가 묻자 돼지 같은 남자가 기합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개는 부하인 듯한 돼지 같은 남자를 보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 있었는데 폼이 영 시원치 않았다. 개는 긴장한 듯 미세하게 떨리는 부하의 손끝을 보았다.

“주인장, 우리가 이 시장을 지켜 준 게 몇 년이야, 응? 벌써 6년째라고.”

“…….”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개는 다시 부하의 칼 쥔 손을 보았다. 칼을 저렇게 헐겁게 잡아서야, 발로 한번 걷어차면 바로 떨어트릴 모양새였다.

무기를 잃은 졸개들을 무너뜨리는 것쯤이야 개에게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벌써 6년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이 말이야.”

살찐 여우 같은 남자는 ‘자원봉사’라고 말한 뒤 뿌듯한 얼굴을 했다. 옆에서 돼지 같은 남자가 ‘형님, 똑똑하십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따라붙었다.

여자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저번 주에도 자릿세 받아 갔잖아요.”

“아, 그러니까! 그 쥐똥만 한 돈 받고 우리가 자원봉사 했다고!”

개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는 남자를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시끄럽게 구는 입을 조용하게 만들 몇 가지 방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봐 주인장, 저번 주라니 말 잘했네.”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않은 것은 남자가 급작스럽게 목소리를 내리깔았기 때문이다. 개는 웅웅 울리는 귀를 벅벅 문질렀다.

남자가 칼부림을 하든 가게를 때려 부수든, 그건 개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명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 자신에게 일어난 일도 아닌데, 나설 이유가 없었다.

“내 부하가 여기서 칼을 샀는데 말이야. 칼이 잘 안 들잖아, 응?”

개는 힐끗 가게를 돌아보았다. 웬만한 쇠붙이는 다 있었지만 칼은 없었다. 그럼에도 거구의 두 남자는 뻔뻔했다.

“배때기에 꽂아 넣으려 했는데 안 꽂혀서 도리어 이 새끼가 죽을 뻔했다고.”

개는 부하의 손에 들린 칼을 보았다. 사람의 피부에 쑤셔 넣었다면 필연적으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특히 칼날과 칼자루가 맞물리는 부분에 핏물이나 살점이 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칼은 몹시 깨끗했다. 다만 날이 조금 무뎠는데, 아무래도 부엌에서 쓰던 걸 가져온 것 같았다. 칼자루에 때가 탄 데 비해 칼날이 두꺼웠다.

“우리가 여기서 몇 년을 봉사했는데, 우리한테 이딴 불량품을 팔면 되겠어?”

“…….”

개는 주먹을 꽉 쥐고 입을 다물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눈은 곧장이라도 저 거구들을 쓰러트릴 것처럼 차가웠지만, 결코 주먹을 내뻗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요.”

“하 씨, 이년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칼을 쥔 부하가 위협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여자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다른 남자가 자신의 부하를 말렸다.

“됐어. 주인장,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이 칼 좀 환불해 줘야겠어.”

남자가 껄렁한 자세로 서서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치켜들자 살찐 여우 같은 인상에 비열함까지 더해졌다.

“물론, 거기에다가 생명 수당까지 더해서 줘야 하는 건 알지?”

“얼마 드리면 되는데요.”

여자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 솥뚜껑같이 큼지막한 손으로 턱을 문지른 남자가 히죽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300은 줘야 하지 않겠어?”

“지금은 못 줘요.”

여자는 단박에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는 여자에게 성큼 다가와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그러면 애초에 싸구려 칼을 팔질 말았어야지!”

“내일까지 줄 테니까, 칼 두고 나가요.”

여자는 자신의 어깨를 쥔 남자의 손목을 꽉 붙잡더니, 단숨에 떼어 냈다. 남자의 얼굴에 잠시 얼떨떨함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에이 씨발, 아침부터 기분 잡쳤네.”

여자에게 잡힌 손목을 팍 뿌리친 남자가 괜히 카운터를 발로 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카운터가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 개와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 씨. 깜짝아!”

“뭐, 뭡니까!”

살찐 여우 같은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돼지 같은 남자도 펄쩍 뛰어올랐다. 개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눈에 담으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눈을 깜빡였다.

“씨, 앉아 있으면 소리를 내야지!”

“…….”

개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이마에 힘줄이 섰지만 그는 빨리 이 가게를 나가고 싶어졌는지, 칼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고는 가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 거지 같은 새끼들! 지들이 노름하다 잃은 돈 수금으로 때우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씨발, 돈 못 받아 뒈진 귀신이 붙었나.”

여자는 뒤늦게 광분하더니 카운터에 놓인 칼을 집어 들었다. 개는 눈을 들어 여자를 보았다. 손을 떨던 부하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칼을 쥐고 있었다.

“깡패 새끼들. 지들 좋다고 끼고 도는 황제랑 다를 게 없어.”

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황제’라는 단어가 신경을 거슬렀다.

그러나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여자가 등을 돌려 쪽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되돌아 나온 여자의 손에는 칼 대신 흰색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바득바득 이를 갈더니 개를 향해 홱 시선을 주었다.

“그쪽 잠깐 거기 앉아 있어. 나 소금 뿌리고 올 거니까.”

“…….”

밖으로 나간 여자는 봉지에서 꺼낸 하얀 가루를 허공에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개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생경한 풍경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

그리고 카운터에 비스듬히 놓인 액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활짝 웃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여자의 옆에는 앳되어 보이는 소녀 한 명이 함께 있었다. 둘은 닮아 보였다. 가족이거나, 적어도 오랜 친구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 개는 여자의 옆에 있는 소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개는 사진 속의 여자가 입은 옷에 주목했다.

검은색 정장과 꽉 올려 묶은 머리. 역시 여자는 누군가의 경호원이었던 모양이었다.

개는 사진을 조금 더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뺨에 흉터가 없었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경호원은 왜 관둔 거고 뺨에는 흉터가 언제 생긴 거지?

그 이상으로는 무언가를 더 발견해 낼 수 없었다. 개는 그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때마침 소금 한 봉지를 모두 바깥에 뿌린 여자가 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욕해서 놀랐다면 미안해.”

여자는 빈 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사실 별로 미안하지도 않은 투였다. 여자의 시선이 힐끗 개를 향했다.

“사실 나는 저 새끼들 한 손으로도 무찌를 수 있거든?”

그녀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비밀을 토해 냈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손으로도 무찌를 수 있다니. 과장이 심한 것 같은데.

“그런데 봐, 난 그 새끼들한테 손끝 하나 못 대. 왜 그런 줄 알아?”

개가 무슨 생각을 하든 여자는 변명 같은 말을 이어 갔다. 여자의 얼굴에 씁쓸함 섞인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정부는 치안에는 관심 없어. 그것도 다 돈이거든. 뭐 하나라도 아껴서 자기들 배를 채워야 하니까 안 하는 거야. 대신 자경단이니 뭐니 하는 깡패 새끼들한테 어느 정도 자율권을 주고 치안을 담당하게 시킨 거지.”

여자는 남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개는 제 앞에 앉아 한숨을 뱉는 여자를 보았다.

“그니까 살려면 굽신굽신 고개 숙이는 수밖에 없어. 치안을 담당하는 게 깡패 놈들인데 개겼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검찰은 있어 봤자 정치범이나 잡으니 쓸모도 없고.”

여자는 개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개 또한 마찬가지였다.

“깡패 새끼들이 운영하는 사설 감옥이나, 검찰에서 운영하는 감옥이나. 거기서 누가 고문받아 뒈지든 말든 그딴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개는 여자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개가 이곳에 앉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괜히 길을 나섰다가 남자를 잃어버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때문에 개의 온 신경은 가게 밖을 향해 있었다. 여자의 말에 신경이 팔려 남자를 놓쳐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선 안 됐다.

“네가 벙어리라 말해 주는 거다. 어디 가서 내가 말했다고 이르지 마.”

“…….”

여자는 물끄러미 창밖만 내다보는 개를 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내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가 별말을 다 했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개가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는 개의 재빠른 동작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 이봐!”

개는 여자의 부름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표적을 찾는 개의 눈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가게를 뛰쳐나온 개는 곧장 어느 한 곳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곳에는 키가 훤칠한 남자의 뒷모습이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었음에도 눈에 띄었다.

개는 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아.”

아니. 뛰어가려 했다. 발목이 다 낫지 않아 실제로는 기척만 냈을 뿐이지만.

저벅. 절뚝이는 기척에 가게 앞을 지나치던 남자의 걸음이 멈춰 섰다.

“없어져서 놀랐잖아.”

돌아선 남자의 얼굴에 그린 듯 반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개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여기서.”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선 개의 순종적인 얼굴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이 오롯하게 남자를 담았다.

“날 기다리고 있던 건가.”

“…….”

남자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감상이 스쳐 지나갔다. 개는 멍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남자에게 여러 번 이 말을 들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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