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개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작아지긴커녕 점점 크기를 키워 개의 머릿속을 지배해 갔다.
황제의 적, 알지 못하는 세계, 하늘이 뒤집어지길 바라는 사람들.
어젯밤 남자에게 들었던 말들이 파편적으로 생각을 부추겼다.
개의 삶에서 최우선시된 것은 언제나 황제의 명령이었다. 그렇기에 개의 세상엔 황제와 황제가 아닌 사람, 황제의 적과 황제의 아군만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황제에게 버림받은 그날, 이상한 남자가 개의 삶에 끼어들었다.
그는 황제의 적인지 아군인지도 불분명했으며,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자는 이 방에 찾아들었던 복면 쓴 암살자가 소속이 있는 암살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가 알던 세상에서 그런 암살자란 존재하지 않았다. 명령을 받지 않는 암살자가 존재할 리 없었다.
‘시민이었던 자’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는 아무런 특색도 없었던 암살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다 보면 으레 흉터나 일그러진 흔적이 남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얼굴이란…….
“……근데 그 사람 되게 평범하던데.”
멍하니 깜빡거리던 검은 눈이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걸레를 쥔 채 고개를 갸우뚱하던 태성이 개와 눈을 마주쳤다.
태성은 순간 개의 눈을 보고 파드득 놀라더니,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조용히 할까요……?”
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린 사용인이 입을 다물지 말지 정하는 것은 개의 일이 아니었다.
태성은 아무런 말 없이 시선을 돌린 개를 힐끔 쳐다보았다. 개는 화를 낼 생각이 없어 보였고, 어쩐지 넋이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태성은 괜스레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와 하얀 시트를 반듯하게 접고, 침대의 기둥을 문질러 닦았다. 거기다 부드러운 융단의 먼지를 터는 척하며 개의 주위를 알짱거리기도 했지만, 개는 어제와 달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놓은 태성은 머리칼로 눈을 반쯤 가린 개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돌을 던져도 파동이 일기는커녕 돌을 튕겨 낼 것만 같은, 얼마만큼의 깊이를 가졌는지 들여다볼 수도 없을 만큼 단단하게 언 호수.
태성은 융단 위에 앉은 채 바닥을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개를 올려다보았다. 방 안은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융단을 털어 내던 태성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형은 얼마나 세요?”
개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태성은 침대 위에 돌처럼 앉은 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제가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요.”
그제야 힐끗 개의 시선이 태성에게 돌아갔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태성은 개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형도 알겠지만, 마을을 지켜 준다면서 돈 뜯어 가는 깡패 새끼들 있잖아요.”
태성은 그 단체에 대해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앳된 목소리는 더 이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
개는 꽉 주먹 쥐어진 태성의 손을 보았다. 말아 쥔 손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식은땀을 닦듯 바지에 문대졌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두려운 상황 앞에서 나약한 어린애가 할 수 있는 건 입술을 깨무는 것뿐이었다. 태성은 입술을 악물었다가 고개를 들어 개를 보았다.
“힘이 세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깡패 새끼들도 멋지게 물리칠 수 있으니까요.”
“…….”
까만 눈이 태성을 바라보았다. 태성은 개의 무감정한 시선에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형, 앞으로 제가 잘할 테니까, 저 잘 봐 주셔야 해요.”
태성의 목소리는 꽤 간절하게 들렸다. 언젠가 개에게 살려 달라 애걸복걸하던 이 중 한 명이 저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개의 무감정한 눈이 태성을 향해 깜빡였을 때였다. 태성이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왼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뭐지.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을 왜 저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태성의 모습은 뭘 달라며 손을 내민 사람 같았다.
“아, 제가 인터넷에서 영춘권이란 걸 배워 왔거든요?”
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한번 봐 주실래요?”
“…….”
태성에게서 미련 없이 시선을 뗐다. 태성은 ‘잘할 수 있는데…….’ 하고 웅얼거렸지만, 개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자 슬그머니 물러났다.
✵
태성은 가만히 앉아 있는 개를 두고도 바쁘게 움직였다. 뭐 그렇게 할 일이 많은가 싶을 정도였다. 개는 이따금 태성의 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
발목을 움직여 보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움직이지 않더라도 이 발이 짐이 될 정도만 아니라면 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개를 다그치고 있었다. ‘개는’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생물이 아니었다. 주인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철저하게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는 생물이 개였다.
그런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건 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개는 침대 위를 다친 발로 눌러 보았다. 이 정도라면. 개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형, 저 이만 가 볼게요!”
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선 태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개는 태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봬요.”
태성이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탁.
개는 닫힌 문을 잠시간 쳐다보았다. 태성의 쾌활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이 귀를 두드렸다.
개는 마침내 태성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좌우로 돌려 보자 찌릿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부드러운 침대 위에 발을 두드렸을 때는 어느 정도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수하는 태성이 떠났을 때 함께 기척을 숨겼다. 개는 이때다 싶어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발목에 무게가 실리면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개의 무감정한 눈이 자신의 양발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부상으로 몸에 익은 움직임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나가야 했다. 아니,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이 방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저 황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차피 황제에게 목을 내놓으면 쓸 일도 없는 발목이니, 상태가 악화되어 못쓰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개는 창문에 손을 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손끝에 닿자, 불현듯 잊고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전령 새가 오지 않았다.
개는 회색 깃을 가진 작은 새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뿐.
개는 창문을 밀어 열었다. 바람이 밀어닥치며 개의 뻣뻣한 머리칼이 나부꼈다.
“…….”
개는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근처에 숨어 있는 실력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개는 가뿐한 움직임으로 창문을 디디고 섰다. 그러고 몸을 곧장 바닥으로 내던졌다.
파스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굵은 나뭇가지를 밟고 선 개는 눈살을 찡그렸다. 역시 균형이 맞지 않아 몸이 쉽게 흔들렸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아니었다면 기척을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남자나 그의 수하가 근처로 오기 전에 저택을 벗어나야 했다.
개는 나뭇가지를 밟고 몸을 낮췄다. 저택의 담 아래에서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곳에 있는 자는 개의 기척을 느낄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었다. 담을 디뎌 훌쩍 뛰어넘은 개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
저택 안을 순찰하던 이가 머리칼을 흔드는 인위적인 바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만이 보일 뿐, 담 주변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순찰하던 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졌다. 담에 팔을 기대고 선 개는 눈살을 찌푸리고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
착지할 때 발을 잘못 디뎠다. 발목이 욱신거리더니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고통이 피어올랐다. 개는 절뚝거리면서도 빠르게 저택 주변을 벗어났다.
저택은 번화가에서 약간 외떨어져 있었다. 개는 번화한 거리로 접어들며 ‘남자가 자신의 탈출 소식을 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탈출한 자신을 그냥 둔다면 좋겠지만, 만약 추적조를 붙였다면 그의 수하들은 곧 자신의 뒤를 밟을 것이다. 개는 인파 사이에 섞여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골목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개는 골목골목 이어지는 길을 막힘없이 걸어갔다.
끝없이 이어지던 골목길은 어느새 낡은 인가로 바뀌었다. 어둑한 오르막길을 밝히는 노란 가로등 빛과, 희뿌연 달빛이 머리 위로 비쳤다.
개는 거칠어진 숨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걸음을 빨리했다. 다친 발의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대지 마!”
어디선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벼락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개의 걸음이 멈춰 섰다.
“돈 줬잖아. 왜 또 찾아와서 사람을 들들 볶냐고!”
“이 새끼가 돌았나. 어디서 반말을 찍찍 하고, 어?”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내일 봬요.’
새를 훔치려 했던, 말 많은 사용인의 목소리였다.
개는 힐끗 주변을 살폈다. 아직 추적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잠시 멈춰 선 터라 시간이 지체됐다.
개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리고 그때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 우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가 웅웅 울릴 정도의 소음.
“안 돼!”
고작 이틀을 봐 왔지만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태성은 배알 없는 웃음을 흘리거나, 힐끗 개의 눈치나 살피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식의 절망 섞인 목소리를 내다니. 이 목소리의 주인이 정말 개가 아는 그 인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개는 퉁퉁 부어오른 자신의 발목을 보았다. 걸음을 옮기자 발이 바닥에 조금씩 쓸려 직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척을 뚫고 들어오는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개는 걸음을 멈춰 섰다.
“…….”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지.
개는 몸을 돌려, 온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가는 발이 직직 끌렸다.
“우윽, 흑…….”
평형도 제대로 재지 않은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개는 무심한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바닥엔 연장으로 쓸 것들이 널려 있었다. 벽돌이나 깨진 유리 조각, 무슨 용도로 쓰는 건지 모를 쇠꼬챙이들도 떨어져 있었다.
“니 동생 별로 안 중요한가 보지? 우린 니 동생이 어느 학교 다니는 줄도 알고…….”
그러나 연장은 역시 개의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제의 명령이 없는데 괜히 사람을 죽이게 되면 곤란했다.
뚜두둑.
개의 흰 손이 커다란 남자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남자의 동공이 희미하게 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덩치가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개는 넘어지는 남자를 피해 날렵한 몸짓으로 착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균형을 잡지 못한 발목이 꺾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개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
“…….”
그리고 눈이 마주친 태성은 전혀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태성의 얼굴에 떠오른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두려움? 아니다.
공포? 그것 또한 아니다.
자신보다 연약하고 여린 인간을 꽉 껴안은 태성의 얼굴엔 수치심, 아니, 그보단 모멸감에 가까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개는 별다른 감정 없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예성아, 들어가자.”
태성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개를 보았다.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에 긴 상처가 남아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
태성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아이를 낡은 집 안에 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태성의 눈빛이 작게 일렁였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쾅.
경첩조차 녹슨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개는 대문 바로 앞에 쓰러진 거대한 몸뚱이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성의 목소리가 들린 곳에 와 본 것은 순전히 변덕 탓이었다.
개는 발을 질질 끌어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변덕이란, 생각이 너무 많아진 것의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암살자인 개에게는 결코 좋지 않은 부작용이었다.
돌아가자.
개는 멀리 보이는 황궁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거구의 남자를 쓰러트리면서 발목이 꺾였던 탓인지 전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다.
“…….”
그때, 개의 몸이 움찔 떨렸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위화감이 개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빛을 띠는 검은 눈이 주변을 살폈다.
추격자가 붙었다.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개의 오감이 요란하게 울어 댔다.
개는 높은 달동네에 유일하게 난 통로인 계단과, 자신이 지나온 낡은 동네의 골목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개의 신형이 골목 사이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몸이 성했다면 계단을 내려가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적에게 위치를 발각당해 위험해질 수 있지만, 그것을 감수해서라도 황궁에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룩거리는 발로는 추격자를 따돌릴 수 없었다. 황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개는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골목을 헤치고 들어갔다. 작은 돌들과 깨진 유리, 술병 같은 것들이 나뒹구는 바닥을 거닐면서도 개는 기척을 거의 내지 않았다.
발목만 멀쩡했더라면.
개는 희미하게 들리는 자신의 발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
그리고 어느 순간, 골목을 헤치고 들어가던 개가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섰다. 직후 타닥거리는 착지 소리가 들렸다.
“……이쪽엔 없습니다.”
“저쪽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둠 속 짐승이 먹잇감을 확인하는 듯한 은밀한 눈빛이 추격자들을 향했다. 개의 까만 눈이 반질거리는 빛을 희미하게 내뿜었다.
“상대는 같은 실력자다. 명심해.”
“네.”
추격자들의 인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개는 지붕을 뛰어넘어 사라진 추격자들의 기척을 좇다가, 사위가 조용해질 즘에야 벽에서 몸을 뗐다.
추격자들은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그들의 발은 날이 밝는 순간 묶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추격자들은 이 일대를 길어 봤자 두어 시간 정도 뒤지다가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동안만 몸을 은신해 둔다면 개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끝나겠지.
판단을 마친 개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더 어두운 곳을 향해 움직였다. 직, 지익. 희미하게 발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촤악!
개의 등을 놓친 추격자의 신발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개는 바닥에 굴린 몸을 재빠르게 일으켰다. 발목 때문에 비틀거리긴 했으나 어둠 속에 드러난 흰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흉흉했다.
“쯧.”
개의 등을 노렸던 추격자가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추격자는 방심하지 않고 곧장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방어할 새 없이 단숨에 제압해야만 했다. 검은 눈을 가진 저 작은 남자는 황제의 개이니까.
추격자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개는 자신에게 한순간 가까워지는 추격자를 보며 반격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러나 발목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반격은 무리였다.
개는 곧바로 땅을 굴렀다. 바닥에 깔린 우둘투둘한 콘크리트와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옷과 피부를 찢는 감각이 생생했다.
개는 몸을 일으키며 도주로를 확인했다. 저자가 다시 한번 달려들 때, 그때를 노려 대치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개는 추격자가 자신에게 달려들길 기다렸다. 그러나 추격자는 발목이 성치 않은 상태로도 몸을 잽싸게 움직이는 개를 확인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입에 물려 했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추격자의 손에 들린 것은 호각이었다. 저것을 부는 순간 추격자의 동료들이 이곳에 몰려들 것이다.
개는 이를 악물었다. 볏짚 같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까만 눈이 사납게 빛났다.
“읏!”
추격자는 뒤늦게 개가 자신의 눈앞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개는 추적자의 목을 잡고 그를 넘어트리며 바닥을 더듬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손에 잡혔다.
“……!”
죽이지는 않는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상처만 남기면 된다.
개는 유리 조각을 치켜들어 남자의 양 어깻죽지를 내리찍으려 했다. 추격자가 방어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만.”
개는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 드는 억센 손길을 느꼈다. 버틸 새도 없었다. 추격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개는 날카롭게 치떴던 눈을 둥그렇게 떴다.
챙강! 손에 쥐여 있던 유리 조각이 떨어졌다. 비틀린 손목이 욱신거렸다.
개는 홱 고개를 들어 손목을 쥐고 비튼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달빛 한 줌이 간신히 들어오는 골목에 선 남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남자는 평소 입던 하얀 정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느슨하게 늘어진 잠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검은빛 일색으로 차려입은 남자가 힐끗 개의 발목을 쳐다보고는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찢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그 말이 자신의 옷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흙바닥을 나뒹굴어 더러워진 옷에는 군데군데 찢어진 곳이 보였다.
“정말이지 말을 안 들어.”
개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림같이 웃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유일하게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은 냉담한 눈동자뿐이었다.
남자는 개의 목덜미를 잡은 손을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 개가 땅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그대로 몸을 담벼락에 거칠게 밀어트렸다.
쾅!
개는 자신의 목을 움켜쥔 고아한 손을 느꼈다. 그러나 숨통을 옥죄는 거센 악력은 조금도 우아하지 않았다. 남자는 밀어도 밀리지 않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개는 쉬어지지 않는 숨을 덜컥 몰아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개의 흐려지는 얼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개는 남자의 손목을 긁어내렸다. 남자의 흰 살갗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
“…….”
발목이 다 낫기도 전에 무리를 한 개는 쉽게 정신을 잃었다.
차현은 끈이 떨어지듯 쓰러지는 개를 한 팔로 잡아 들었다.
“돌아가지.”
개에게 역습을 당했던 수하는 차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이내 홀연히 사라졌다. 차현은 늘어진 개를 들고 이내 기척 없는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
“…….”
개는 눈을 깜빡였다. 물고문을 당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온몸이 몰매 맞은 듯 욱신거렸고 특히 발목은 아예 감각이 없었다.
……잘라 버린 건가.
개는 시선을 내려 발목을 보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개의 팔다리는 모두 온전하게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개는 손끝을 움직여 보려 했다. 그러나 욱신거리는 어깨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다.
개는 어깨를 흘겨보았다. 붕대가 감긴 어깨와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때 암살자에게 어깨를 베였었지.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탈출하던 내내 발목의 고통이 심해서 어깨의 고통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산책은 즐거웠나?”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스탠드의 불빛에 비친 남자는 느슨한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커피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왔지만, 즐거웠다면 된 거겠지.”
개는 눈을 돌려 사위를 살폈다. 어둑한 방 안은 밤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거야.”
남자는 서류를 보면서 평이하게 말했다. 완벽한 균형을 이룬 얼굴에는 기쁨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자리하지 않았다.
“황궁에 가는 일정은 더 미뤄질 거다.”
“……!”
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머리가 핑 돌며 눈앞이 잠시 흐릿해졌지만, 개는 꼿꼿이 앉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개는 남자가 무슨 말이라도 이어 주길 바라며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초조함에 몸이 달았다.
허락도 없이 탈출을 했기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옷을 찢지 말라고 했는데 찢어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의 수하를 공격해서? 목을 졸랐을 때 얼마 못 버티고 정신을 잃어버려서?
“…….”
개는 하의만 입혀진 자신의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역시 옷을 찢어서 화가 난 걸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에게 찢어진 옷을 다시 이어 붙이는 능력은 없었다. 그럼 만족할 때까지 때리라고 해야 할까. 찢어진 옷만큼 개가 너덜너덜해지면 만족할지도 몰랐다.
개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차마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맞는 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때리라’는 말이 명령조의 말이기 때문이었다.
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종류의 언어.
“…….”
개는 비 맞은 짐승처럼 기죽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차분한 얼굴로 서류에 적힌 글자만 읽어 나갈 뿐이었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개는 결국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엉망으로 다뤄졌던 발목은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개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융단 위에 나동그라졌다.
“발목.”
엎어진 몸을 돌려 누웠을 때, 개는 자신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커피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어느새 개의 가까이에 와 있었다.
“더 못 쓰고 싶은 게 아니라면 소중히 사용하는 게 좋을 텐데.”
개는 융단 위에 누운 채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
개는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바지 자락을 손에 쥐었다. 손에 닿는 순간 녹아들기라도 할 것 같은 부드러운 옷감이 손끝에 걸렸다.
“황궁에 가는 일정이 왜 더 미뤄지는 겁니까.”
황제의 개로 살게 된 이후 처음, ‘묻지 말라’ 했던 금기를 범했다.
남자는 ‘왜’냐는 물음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조소와 우스움, 혹은 통렬한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확실한 건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분노는 없었다는 것이다.
개는 처음 마주하는 낯선 반응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내지 않는 건가?
“황궁에 돌아가는 조건으로 너에게 제약 하나를 걸어 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자는 자신의 바지 자락을 붙잡은 개를 발로 쳐 내거나, 짓밟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무릎을 굽혀 앉았을 뿐이다. 개는 가까워진 남자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미소 짓고 있었으나 눈만큼은 웃지 않았다.
“다리가 다 나을 때라고 말했었어.”
‘물론, 다리가 다 나았을 때 말이야.’
개는 입을 벙긋거렸다.
분명 그런 제약을 걸긴 했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인간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얌전한 애완동물처럼 자리를 지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개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였다. 황제가 보낸 암살자에게 암습을 당했을 때도 울린 적 없던 생존 본능이, 남자의 앞에서는 수시로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남자가 개의 심장을 꺼내 볼 수 있다면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심장을 갈라 보여 준다면 황제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참아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개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는 자신의 바지 자락을 잡았던 개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죄송할 것까지야.”
전령 새가 오지 않은 날. 남자의 수하가 공작의 방에 개 하나만을 덩그러니 두고 떠난 날. 남자가 평소보다 늦게 도착하고, 혼자 남게 된 개가 저택의 담을 뛰어넘은 날.
그날이 우연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
남자는 웃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는 거지.”
개는 쓸모가 있었다. 그러므로 아직 망가뜨리거나 버려서는 안 됐다.
“그래도 죄송하다면 다리 나을 생각을 해.”
남자가 강한 악력으로 개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개의 팔을 자신의 목덜미에 감아 얹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
개는 암살자를 부축하는 무방비한 남자를 보았다. 목은 죽음과 직결되는 급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곳에 팔을 감게 하다니.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개가 이대로 목을 졸라 버리기라도 한다면 남자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미약한 호기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주 미약해서 개조차도 느끼지 못할 만큼의 호기심.
개는 울대가 튀어나온 남자의 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 목을 졸라 반응을 엿보지는 않았다.
남자는 부축해 올린 개의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개는 뻑적지근해진 어깨의 상처를 살피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다리가 다 나으면, 황궁에 갈 수 있습니까.”
개는 황궁에 돌아갈 때쯤이면 자신이 달변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벌써 두 번째 물음이었다.
“글쎄.”
개를 바라보던 남자가 비식 웃음을 흘렸다. 꼭 맹랑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약속을 어겼는데 조건이 전과 똑같길 원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
개는 자신을 침대 위로 툭 밀치는 남자의 손길을 느꼈다. 그 힘은 강압적이고 억센 것이 아니라 거부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는 순순히 침대 위로 몸을 넘어트렸다.
“내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면 좀 달라지겠지만.”
남자가 ‘이런’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베개에 반쯤 파묻힌 개는 까만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얼굴이 제법 충직해 보였다.
“그러니 우선은 네 다리부터 돌봐.”
예상외로 남자는 당장 실현할 수 있는 명령은 내려 주지 않았다. 개는 등을 돌려 스탠드 불빛이 비추는 곳으로 걸어가는 남자를 보았다.
“…….”
“…….”
커피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는 다시 서류를 손에 쥔 채 고요한 침묵을 지켰다. 개는 희뿌연 불빛도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면 개는 남자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언제 어디서 자는 걸까. 그러나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남자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물을 수 있는 개는 입술을 떼지 못했다.
사각, 사각.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가 시계추의 움직임처럼 일정했다. 평온한 어둠이 지속되고 있었다.
개는 욱신거리는 몸과 눈꺼풀을 잡아당기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스탠드의 불빛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
개가 눈을 뜬 것은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창밖은 한낮을 가리키고 있었고, 공작은 이미 저택을 떠난 지 오래였다. 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방 안에 들어오던 태성이 움찔 몸을 떨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
“…….”
개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서랍장이며, 장식품 같은 것들을 마른 천으로 닦아 대는 태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노골적인 시선에도 태성은 더욱 열심히 물건을 닦아 대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태성이 입을 다물자 방 안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개는 태성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흥미를 잃은 듯 시선을 돌렸다.
개는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발목엔 전처럼 붕대만이 감겨 있는 게 아니라 부목까지 대어져 있었다. 개는 행동을 제어하는 부목이 불편한 듯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다리부터 나으라’던 남자의 말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부목을 떼어 냈을 것이다.
“……어제 종일 주무셨잖아요.”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개는 눈을 돌렸다. 종일?
“저는 더 오래 누워 계실 줄 알았어요. 치료도 해야 하고 안정도 취해야 해서, 재워 놨다고 그러니까.”
태성은 서랍장을 닦던 손을 멈춘 채 웅얼거리고 있었다.
개는 감정을 알 수 없는 까만 눈으로 태성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했다. 더 오래 누워 있길 바랐다는 건가? 하지만 어린 사용인에게 딱히 악의를 살 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
“…….”
개는 이어질 태성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태성은 별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겨 들었다.
개는 말 없는 태성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끝내 돌아가지 못한 창덕궁의 모습도.
황궁을 바라보던 개의 시선이 불현듯 허공을 향했다.
허공에 시선을 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 깃을 가진 새가 창가에 날개를 펼치고 앉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새는 좋은 자리를 가늠하듯 종종걸음으로 창가를 서성이다, 곧 부리를 높이 쳐들었다.
딱, 딱.
개는 새의 부리가 부딪치는 유리창 위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탈출을 감행했던 날엔 왜 오지 않았던 걸까. 창 너머로 느껴지는 작은 부리의 감촉이 의문 하나를 끄집어냈다.
개는 창문을 밀어 열었다.
달칵.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방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왔다. 개는 전령을 매단 채 창 주변에 앉은 새에게 손을 뻗었다.
“…….”
새는 재빠르게 개의 손을 피해 멀어졌다. 회색 깃의 새는 도도한 얼굴로 머리를 치켜들고서 ‘구루룩’ 울었다. 섬세하지 못한 개의 손길에 불만이 있는 듯 보였다.
개는 그런 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이라도 새를 낚아채자면 낚아채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연약한 새는 개의 손안에서 쉽게 짓뭉개질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봤던 건데.
역시 어린 사용인이 그랬던 것처럼 일단 낚아채 봐야 하는 걸까.
개는 사냥에 나선 동물처럼 몸을 천천히 긴장시켰다. 새는 날 수 있는 동물이니 한 번에 낚아채야 했다.
“……새랑 눈싸움해요?”
새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눈을 돌려 태성을 보았다.
“그 새가 그렇게 있는 건 먹이를 안 줘서 그런 거예요.”
태성은 여전히 개를 쳐다보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있다 봐도 무방한 옆모습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새를 낚아챈 건 너였어.”
개는 그런 태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등을 돌린 채 점잔을 빼던 태성의 귓불이 확 붉어졌다. 아마도 새를 덥석 잡았다가 개에게 꼴같잖은 취급을 당했던 게 생각난 듯했다.
“아, 그거야 급했으니까 그랬죠!”
태성이 바락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려세웠다.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
“…….”
개는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슬그머니 돌아서는 태성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튼 다음엔 빵 쪼가리 같은 거라도 준비해 두세요.”
태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랍장을 벅벅 닦았다. 개는 아까 전부터 같은 곳만 닦고 있는 태성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새는 창가에 서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푸드득 날아 방을 빠져나갔다.
✵
누군가 그들을 반군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들을 테러 단체라고 명명한다면 그들은 부정할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국민에 불과했다. 정규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국민이 그렇듯 효명세자가 병마를 떨쳐 내고 조선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는 것과, 그 덕분에 풍전등화의 처지였던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렇게 살아남은 대한제국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일민족인 자신들이 얼마나 우수한 민족인지 잘 알았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심어진 사상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황제의 통치가 적법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한 건.
뉴스에서 연신 연예계 스캔들과 스포츠만을 다룰 때?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음모론이 농담처럼 퍼져 나갈 때? 황가와 관련된 살인 사건 혐의가 한순간 불식됐을 때?
아니.
나와는 상관없다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에게 닥쳐왔을 때. 소중한 친구가, 부모가, 형제가, 자식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됐을 때.
그들은 뒤늦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심은 거대한 절벽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들의 발악은 절벽에 작은 실금조차 만들지 못했다.
사건 총괄 : 차현
평범한 외모의 사내는 전령 새의 발목에 묶여 있던 전령을 와그작 구겼다.
사내의 발악은 죽은 가족의 억울함을 풀어 주긴커녕 그의 목숨까지 위협했었다. 그래서 포기했었다. 잊을 수 없지만 잊으려 했다.
자신마저 억울하게 죽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일상이 무너진 사내에게 비밀의 후원자가 생겼다.
후원자는 제 얼굴도 신원도 밝히지 않았지만 그가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사내가 모르던 진실과 정보들을 넘겨주었고, 그는 후원자가 알려 준 정보를 토대로 복수의 큰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이제 완성이 고지에 있었다.
“……죽여 버릴 거야.”
남자의 동생은 성실한 공무원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알면 안 되는 진실을 알게 된 그의 동생은 무참히 살해당했다. 황제의 신임을 받아 검찰의 수뇌부 자리에 올랐다는 공작, 차현의 기획하에 말이다.
남자는 서랍장 깊숙이 숨겨 두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복수를 완성할 때였다.
✵
오늘따라 줄곧 침묵을 지키던 태성은, 해가 저물어 갈 때쯤 방을 나갔다.
개는 밖을 지키고 있던 남자의 수하가 태성을 따라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부재를 틈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무리를 했다가는 영영 발목을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탈출을 감행한다 하더라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처음의 시도야 남자가 방심을 하고 있었으니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시도까지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남자는 개조차 가늠하기 힘든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냥감의 등 뒤를 노리는 매서운 시선도 가지고 있었다. 골목에서 목이 졸려 기절했던 것만 떠올려 봐도 그랬다.
개는 구부린 무릎 위에 턱을 대고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방 안은 단조로운 색깔의 가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 안은 방음 처리 되어 잡음이 들리지 않았고(개에겐 별다른 소용이 없었지만),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햇살을 받아 고요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
개는 발목을 내려다보다가, 멍하니 허공도 보았다가, 까만 눈으로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언제쯤 돌아오는 걸까. 평소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보냈을 시간이 묘하게 길게 느껴졌다.
지루함.
개는 불현듯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그 말은 아주 낯설고 쓴 독초를 먹은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었다. 신경이 조금씩, 착실히 타들어 가는 느낌.
개는 기운 없는 가축처럼 축 처진 채 문을 바라보았다.
탕―!
벼락같은 소음이 개의 귀를 관통한 것은 그때였다. 개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이 소리는 더 이상 증명할 것도 없는, 명백한 총소리였다.
날카로운 기색이 떠오른 검은 눈이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총소리는 개의 주변에서 들려온 소음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감을 세워도 방 안에 침입하려는 암살자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창밖에서도 가까워지는 기척이란 느껴지지 않았고, 복도에서 느껴지는 것들이라야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놀란 듯한 웅성거림뿐이었다.
바깥에서 들린 것은 분명 소음기도 끼지 않은 총을 쏜 소리였다. 누굴 노린 거지? 이 저택 밖에는 인가가 없었다. 그러니 분명 이 저택 안의 인물을 겨냥한 것이리라.
상식적으로 보자면 이런 커다란 저택에서 표적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건, 수많은 사용인들이 아니라 이 저택의 주인일 가능성이 컸다.
개는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문을 바라보았다. 문밖의 어수선한 기척이 눈과 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개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또한 생각했다.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개는 이미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암살자였으니까.
꺼져 가는 생명을 붙잡지 못하고 서서히 감기는 인간의 눈. 그 위로 남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개는 까만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남자가 다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죽거나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개의 처분은 누가 맡게 되는 거지?
주인에게 멀쩡히 돌려준다면 좋겠다만, 짐승의 처리란 그렇게 좋은 방식으로 인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잘하면 폐기 처분이고, 잘못하면 죽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개는 불안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다, 곧 자신의 다리를 보며 ‘끙’ 불편한 소리를 내뱉었다. 약간의 틈도 없이 닫힌 문과 총소리 이후에 느껴지는 어수선한 고요함. 그건 개에게 기묘한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으로 다가오는 여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중엔 분명히 성인 남자가 인위적으로 내는 걸음 소리도 뒤섞여 있었다.
달칵.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개는 바싹 긴장한 채 몸을 굳혔다.
열린 문 틈새로 피 냄새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비릿하고 톡 쏘는 듯한 쇠 냄새.
……정말 당한 것인가.
“…….”
그러나 방 안에 들어온 남자는 피범벅이 되었다거나 부축하는 사람들을 동반하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혼자였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멀쩡히 방 안에 걸어 들어왔다.
개는 멍한 시선으로 남자를 살폈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였지만, 그게 유달리 다른 점이라 생각할 순 없었다. 게다가 흐트러짐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는 더욱이 남자의 약점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달칵.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평소와 같은 태연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자신이 들은 총소리가 남자를 향한 게 아니었나?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끝을 스치는 이 혈향은…….
그 순간 뒤늦게 남자의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언제나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던 남자의 흰 제복이 길게 찢어져 핏물을 머금고 있었다. 상흔의 상태를 보아 총알은 남자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듯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창을 타고 넘어와 융단을 붉은색으로 적시고 있었다.
개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눈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냉해 보이는 아몬드형의 눈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노을빛을 받은 남자는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였다. 개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너무도 유약해 보여 당장이라도 고꾸러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축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남자를 도우러 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창밖에 있는 남자의 수하들도 고요하게 자리를 지킬 뿐 움직이지 않았다.
개의 시선이 갈피를 잃고 자신의 발목으로 떨어졌다.
“…….”
남자는 별다른 대답 없는 개를 보다가, 픽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소리 없이 걸어 서랍장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어 장식장 안에 놓인 호박색 술과, 은으로 세공된 라이터도 손에 쥐었다.
개는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건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자는 술을 즐기지도,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개는 남자에게서 한 번도 그런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는데 한가하게 술을 마신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제껏 개의 상처를 끔찍이 여겨 온 그라면 더더욱.
개는 크리스털 잔으로 쏟아지는 호박색 양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남자는 술잔을 잡아채며 입을 열었다. 잔에 담긴 액체가 크게 출렁였다.
“한잔 마시고 싶나?”
“아니요.”
남자는 개가 그렇게 대답할 거라 예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개에게 더 이상 종용하지 않고 술잔을 제 입술 위에 댔다. 술이 남자의 입술 너머로 넘어가며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남자는 조금 전 서랍장 안에서 꺼낸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그건 갈고리처럼 보이는 작은 바늘이었다.
남자는 바늘의 끝에 두꺼운 실을 꿰고 라이터를 켰다. 새빨간 라이터의 불이 바늘 끝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남자는 상처를 덮은 제복을 잡아 벌리고, 찢어진 살갗 위에 바늘을 댔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아.”
그제야 남자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찢어진 상처를 스스로 꿰매고 있었다.
바늘이 생살을 뚫었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실이 긴 꼬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벌어진 상처는 깨끗한 천으로 닦아 내도 계속해서 피를 뱉어 냈다. 그러나 남자는 일말의 신음도 없이 깨끗한 솜씨로 상처를 꿰맸다.
그는 이런 행위가 어렵지 않을뿐더러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죽이는 거면 몰라도 치료하는 데에는 괴발개발인 개가 보기에도 남자의 솜씨는 퍽 완벽해 보였다.
남자는 피가 남아 있는 상처 위를 깨끗한 천으로 다시 한번 닦고, 그 위에 거즈를 올렸다. 그러나 한 손으로 거즈를 덧대고 붕대를 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지 그의 손은 번번이 헛돌았다.
“붕대는 감을 줄 아나?”
개는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남자만큼 정교하게 감을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거짓 없이 대답했다.
남자는 무감정한 개의 희멀건 얼굴을 보다 이내 걸음을 뗐다.
“부탁하지.”
개는 남자가 건넨 붕대를 손에 쥐었다.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자 침대의 한 부분이 푹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개는 남자가 잡아 벌린 제복 사이, 울퉁불퉁하게 부어오른 상처를 보았다. 아주 정교하게 꿰매진 상처는 한번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개는 상처를 헤집는 대신 남자의 제복 소매 부분을 잡았다. 그러고 한순간 강하게 잡아당기자―
부욱!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제복의 팔 부분이 거칠게 뜯겨 나갔다.
개는 드러난 남자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 위에 거즈를 덧대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
남자는 자신의 제복을 잡아 뜯은 개를 놀란 듯 쳐다보다,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개는 답지 않게 열중한 얼굴로 남자의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러나 집중한 것에 비해 힘 조절은 잘 되지 않는지 어느 부분은 엉성하게 감기고 어떤 부분은 너무 강하게 조여졌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 어설픔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화두를 꺼내 들었다.
“내게 총을 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
“…….”
붕대를 감던 개의 손이 우뚝 멎었다.
개는 까만 눈을 들어 올려 남자를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
그러나 감정이 없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다. 뇌의 문제로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사람조차도 그 자신의 감정은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입술 끝을 당겨 웃었다.
“김현수. 서른여섯 살. 동생은 4년 전에 자살했고 아버지는 1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지. 하지만 가족이 다 죽었는데도 반성 없이 매일 술이나 마시고 살았어. 마땅한 직업도 없이 말이야. 얼마 전엔 술을 마실 돈도 없어 무전취식을 한 일까지 있었고.”
남자가 막힘없이 범인의 신상을 읊었다. 개는 그 말을 잠자코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범인과 남자는 원래부터 서로를 알고 있던 걸까.
“하지만 이 남자는 나와 직접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왜 이 남자가 갑자기 내게 총을 쐈을까…….”
남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총을 쐈다. 그런데 남자는 범인에 대해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이런 갑작스러운 테러에도 담담해 보였다.
왜?
개는 넝마가 된 제복을 입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남자를 보았다. 그는 오래된 명화 같았다. 누구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의미 불명의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명화.
개는 느리게 입을 달싹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불쑥 치밀어 오른 궁금증에도 질문은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네’, ‘아니요’가 아닌 모호한 대답을 꺼낸 것만으로도 개는 이국의 말을 발음한 것 같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그럼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 볼까.”
남자가 힐끗 창밖을 쳐다본 것은 그때였다. 개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 창을 보았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 위로 검푸른 어둠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 위로 희미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
개는 눈을 떴다. 아침의 어슴푸레한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개를 깨운 것은 창밖의 햇빛이 아니었다.
“…….”
개는 흰색 제복을 목 끝까지 채운 남자를 보았다. 그는 총상을 입었던 일이 거짓인 것처럼 멀쩡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셔츠 소매에 끼운 커프스를 매만지다, 불현듯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아.”
남자는 잠기운 하나 없는 개의 얼굴을 보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남자의 눈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깨우지 않으려 했는데.”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은 개와 남자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기척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으니까. 개는 거짓을 말하면서도 빙긋 미소 짓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민하단 말이야.”
남자는 개의 끈질긴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총을 챙기는 남자를 보다, 힐끗 그의 팔을 눈에 담았다. 상처를 꿰맨 자국이 남아 있을 팔은 제복에 감싸여 보이지 않았다.
개는 가라앉은 검은 눈으로 남자의 몸을 훑었다.
저 단단한 몸에는 어제와 같은 상처들이 여럿 감춰져 있는 걸까.
그가 황제의 방패이기 때문에?
‘그럼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 볼까.’
개는 어젯밤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총을 쏜 남자는 4년 전 동생이 자살했다는 얘길 듣게 됐다. 하지만 결혼을 앞둔 동생에게는 죽을 이유가 없었지. 남자는 뒤늦게 동생의 사인이 자살이 아니란 걸 알게 됐어.’
어둠에 젖어 들기 시작한 남자의 얼굴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차분했다.
‘그리고 나는 폐하의 명령을 받잡아 그 남자의 동생을 자살로 처리했다.’
개는 물끄러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얼기설기 감아 놓은 붕대를 매듭지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지. 이 남자가 왜 내게 총을 쐈다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황실의 비밀을 알게 된 자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무감각해 보이는 개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픽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 폐하는 한시도 빠짐없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를 원하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니까.’
남자가 발음하는 ‘황제 폐하’는 어쩐지 우습게 들렸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뿐이었다. 남자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살린 이유가 뭘 것 같나?’
남자가 개를 살린 이유.
팔의 상처를 꿰맨 남자는 피곤한 듯,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너른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그는 개와 한 침대 위에 누워 자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개는 처음 마주하는 남자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생각했다.
남자는 자신을 왜 살린 걸까.
살면서 이렇게까지 생각을 거듭했던 적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
개는 마른 호수 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남자가 황제에게 가야 할 폭탄을 제거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한 폭탄을 제거하며 그가 끊임없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도. 그건 남자가 황제의 인간 방패 역할을 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그게 자신을 살린 이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처음에는 남자가 자신을 방패막이로 쓰려는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 팔다리를 꺾어 보기 좋은 방패로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나 치료해 주고, 개를 황궁에 데려가겠다고까지 말했다.
“……!”
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개의 뺨을 남자가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남자는 선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물었다. 그러나 남자가 선한 미소를 짓든 폭풍우처럼 음울한 표정을 짓든 개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작 뺨이 손에 닿은 것뿐인데, 개는 목이라도 졸린 사람처럼 파드득 놀라 엉덩걸음으로 물러서려 했다. 이런 간지러운 접촉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짐짝과 다를 바 없는 발목으로는 물러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
뺨을 잡았던 남자가 이번엔 개의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무력화된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묘한 수치심이 개의 까만 눈 위를 스쳤다.
“발목을 다시는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면 소중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남자가 허리를 숙이자 자연스럽게 얼굴이 가까워졌다.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에 놓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은 아름다운 형태를 띠었지만 그 안에 있는 푸르스름한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잊었나?”
“아닙니다.”
개는 입력된 값을 읊는 기계처럼 대답했다. 남자의 차가운 눈이 개의 뻣뻣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을 응시하다, 이내 온화한 빛을 띠며 휘어졌다.
“그럼 다시 물어볼까.”
개는 허벅지 위를 강하게 짓누르던 커다란 손이 떨어져 나갔음을 느꼈다. 숨이 섞일 것처럼 지척에 놓였던 얼굴도 멀어졌다.
“무슨 생각을 했지?”
“……왜 저를 살리셨는지를.”
개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다 곧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것도, 묻는 것도 개의 일이 아닌데. 목이 잠겼다.
“그래서 답은 생각해 냈나?”
“…….”
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 침묵에서 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 지었다.
“지금 당장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런가. 개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황궁에 돌아가면 더는 생각할 수 없을 텐데.
“그나저나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지 묻고 싶군.”
“하겠습니다.”
남자는 어딘가 초연한 냄새를 풍기는 개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의 입가에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칼끝에 자비가 없는 것치고는 맹하단 말이야…….”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을 때, 문밖으로 그의 비서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려왔다. 비서는 문 앞에 서 차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남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잠시 기다려 주세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하지.”
개는 까만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
개는 태성이 가져온 아침밥을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이내 다시 태성을 보았다. 태성은 개의 끈덕진 시선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지 움찔 몸을 떨었다.
“왜, 왜요. 무슨 할 말 있으세요?”
태성은 개가 잠들어 있던 사이 묘하게 건방져진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천성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었다. 처음엔 꽤 떳떳하게 말하는 것 같더니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무덤덤한 개의 검은 눈이 태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개의 검은 눈은 소름 끼치는 감각을 일깨우곤 했다. 그런데 그 눈동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태성은 마냥 무덤덤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내가 너무 건방지게 굴었나?’
그러나 태성이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개는 오늘 아침 들었던 남자의 부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누군가 저택에 찾아올 거야.’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건 이따금 보게 되는 남자의 싸늘한 표정보다 더욱 차가워 개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건방지게 굴어도 그냥 두고.’
개는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태성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의 설명은 이 어린 사용인을 가리키는 것일까. 방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크흠, 큼. 저기 먼지가 있네.”
개는 황급히 뒤돌아 멀어지는 태성의 등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이 방을 찾는 사용인을 굳이 지목해 ‘죽이지 말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누굴 말한 거지.
개는 태성이 멀어지자 다시 자신의 앞에 놓인 아침밥을 보았다. 대단한 음식이 차려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먹음직스러운 한 상이었다.
대충 식사를 마친 개는 힐끗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태성의 것을 제외하면 방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심지어 창문 밖에서 매번 느껴지던 수하들의 시선조차 오늘은 느껴지지 않았다.
개는 남자가 말한 불청객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일단 포기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인물이 당장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
무료해진 개는 식기에 포함되었던 매끈한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무른 음식을 써는 뭉뚝한 칼은 사람의 피부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사실 개에겐 충분히 무기가 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걸로 질긴 살을 뚫을 순 없어도, 여린 막이 씌워진 홍채에는 충분히 상처 입힐 수 있을 테니까.
“다 드셨어요?”
개는 태성이 다가오자 서둘러 칼을 소매 안쪽에 숨겼다. 물론 그건 의식적이라기보다는 습관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오랜만에 살갗에 닿은 차가운 금속성이 오싹한 감각을 안겨 주었다.
“이거 치우고 올게요. 아, 그리고 여기 계속 앉아 계세요! 좀 이따 제가 부축해서 침대에 올려 드릴 거니까요.”
태성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식기를 쟁반째로 들어 방을 나가려 했다. 개는 멀어지는 태성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힐끗 제 소매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
……실수로 숨겼다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태성을 불러 세우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만약 칼을 돌려준다면 ‘칼을 왜 소매에 숨겼는지’ 의심받을 테고, 그 정황이 남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큰 불이익을 받을지도 몰랐다. 개는 창문 너머 자리한 황궁을 힐끗 보았다.
달칵.
개는 결국 태성이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칼을 넣어 둔 소맷자락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정말 무거울 리가 없는데.
때마침 개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가 매일 밤 남자가 서류를 뒤적여 보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개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개의 기세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남자의 수하들이 보이지 않아 고요한 창밖으로 인위적인 기척이 느껴졌다.
파삭, 파사삭.
누군가 나뭇가지를 밟고 창밖으로 가까워지는 기척.
지금까지 지켜본 바, 이런 보법은 공작의 수하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기술이 아니었다. 분명 다른 조직, 혹은 다른 단체에 소속된 이의 것이었다.
“…….”
개는 소매 안쪽에 숨겨 두었던 뭉뚝한 칼날을 손끝으로 잡아끌었다.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반항하지 못할 정도의 흠집은 만들어 놓는다.
개는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단 한 번. 상대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친다면 역습당하는 것은 개 자신이 될 것이다.
곧장 창을 뚫고 들어올 기세던 불청객은 공작의 방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숨소리조차 죽인 개는 창밖의 기척을 향해 촉각을 세웠다.
달칵.
그리고 방문이 열렸다.
식기를 가져다 놓고 돌아온 태성은 방에 들어온 순간 마주친 개의 흉흉한 얼굴을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
“…….”
싸늘한 침묵이 방 안을 감돌았다. 개는 창밖의 기척에 집중하느라 표정을 풀지 않았고, 태성은 그런 개의 얼굴을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 밖에 뭘 두고 왔나.”
국어책을 읽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은 태성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나 그는 기껏 나가 놓고서 문 앞을 계속 빙글빙글 맴돌았고, 갈 데가 없어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문을 열었다.
“…….”
문을 반쯤 열고 얼굴을 빠끔 내민 태성은 개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좀 전에 본 사나운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저 들어가도 되죠……?”
개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태성을 보았다. 태성은 어쩐지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개는 잠시 창밖의 기척을 살폈다. 창밖에 있는 침입자는 방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는지 아예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태성이 있어도 문제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으로 들어온 태성은 잠시 문 근처를 서성이더니 이내 쭈뼛쭈뼛 개의 주변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붕대가 감긴 발목을 힐끗 보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 부축해도 돼요?”
개는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정작 구해 줬을 때는 모멸감 어린 얼굴로 개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땐 다가오려고 했다.
개는 이 어린 사용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문해서 속마음을 실토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고, 사실 썩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개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저 부축해요……?”
그러자 슬금슬금 다가온 태성이 개의 팔을 붙잡았다. 다행히 칼을 숨긴 쪽의 팔이 아니어서 개는 태성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
“…….”
개는 끙끙대며 자신을 부축해 침대로 걸어가는 태성을 힐끗 보았다.
어른이 되어 가는 아이에게선 묘한 풋내가 났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
아직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아 태성은 고요한 방 안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태성도 뻔뻔스럽게 개에게 말을 걸기엔 걸리는 게 있었다.
‘그래도 나랑 동생을 구해 줬는데.’
태성은 올라오는 한숨을 꾹 눌러 참으며, 방 한편에서 시들어 가던 화분의 잎사귀를 꺾어 손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웅처럼 등장해 자신을 구해 준 형에게 감사해해야 마땅했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 사람도 날 불쌍하게 보겠지. 이런 집에서 동생이랑만 단둘이 사는 내가 가엾겠지. 욱하고 치솟은 생각이 태성을 볼품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제껏 태성의 배경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전부 그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고 적선하듯 동정만 보낼 뿐이었다. 공작의 수하들이 태성을 살린 것도 말하자면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리고 동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격을 만들었다. 동정받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선상에 설 수 없었다. 태성이 아무리 ‘강해지고 싶다’고 말해도 그들은 가여운 동물을 보듯 태성을 볼 뿐이었다. 태성은 그게 분했다.
그러나 형은…….
태성은 무감정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고 있는 개를 보았다. 개는 태성이 눈물을 쥐어짜든 탭댄스를 추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성을 바라볼 사람이었다. 태성은 우울한 얼굴로 시든 잎사귀를 툭 뜯었다.
달칵.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태성은 화들짝 놀라 손에 모아 두었던 잎사귀를 다 떨어트릴 뻔했다.
“아직 일이 다 안 끝났나 보네요.”
태성은 문을 열고 들어온 공작을 보며 입을 벌렸다. 태성은 살면서 아직까지 공작보다 잘생긴 남자를 보지 못했다.
“엇, 네. 그러니까…… 지금 막 끝내려던 참이었어요.”
침대에 앉은 개는 묘하게 허둥거리는 태성을 보았다. 남자는 그런 태성에게 빙긋 웃어 주더니, 문을 막고 있던 몸을 조금 비켜 줬다.
“늦게까지 수고가 많았어요.”
“아, 네네…….”
태성은 마른 잎사귀를 손에 가득 쥔 채 방을 빠져나갔다. 개는 태성이 나간 방문을 힐끗 보다 시선을 올려 남자를 보았다.
“종일 침실에만 있으려니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남자는 태성이 나갔음에도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게다가 말투도 나긋했다.
“……?”
개는 의문 띤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당혹감에 동그랗게 뜨인 까만 눈을 크게 끔뻑였다.
뭐지. 뭘 잘못 먹은 건가. 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태연하게 개의 앞에 다가왔다. 예를 갖추듯 허리를 숙인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개의 얼굴과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
그리고 남자의 손이 부드럽게 개의 뺨을 감싸 쥐었다. 언제나 무감하기만 하던 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이 상황은 뭔가 이상했다. 올바르지 못했다.
“……왜.”
입을 뻐끔거리던 개가 간신히 한마디를 토해 냈을 때였다.
“쉿.”
남자는 가늘게 웃는 얼굴로 작은 소리를 뱉었다. 개의 입이 한순간 꾹 다물렸다. 남자는 그런 개를 칭찬하듯 빳빳한 머리카락 사이로 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대로 있어.”
남자의 내리깐 눈이 개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개는 숨이 섞일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낯섦을 느끼면서도 남자의 말에 착실히 따랐다.
멀리서 본다면 두 사람은 분명 키스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모습에 조소를 날리며 힐끗 창밖을 쳐다보았다.
“밖에 불청객이 든 건 너도 알 거다.”
남자의 목소리는 속살거리듯이 작았다. 개는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흐릿한 기척을 더듬었다. 낯설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은 은신 방법.
“그러니 당분간은 내가 귀애하는 사람인 척 행동해.”
크게 뜨인 개의 눈이 한순간 남자를 향했다.
‘귀애하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말한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개의 목덜미에 손끝을 댔다. 오싹함을 닮은 간지러움이 피부 위로 번졌다.
낯선 접촉에 순간 손을 들어 올릴 뻔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팔을 꺾고 목을 조를 뻔했다. 그러나 남자에 한해서만큼은 개는 그럴 만한 실력이 못 되었다.
개는 기가 죽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남자는 고요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린 듯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까만 눈동자에 담겼다.
“네가 저택 밖을 나갔을 때.”
남자는 개를 밀어트려 침대에 눕혔다.
개는 자신 위에 올라탄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그런 개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뒤가 밟혔거든.”
“…….”
개는 입을 다물었다.
뒤가 밟혔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졌다. 하나는 추격을 당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지우지 못한 흔적이 발각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추격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개는 추격조를 피해 기민하게 움직였고, 만약 그때 누군가 개를 추격했다면 개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흔적이 발각당했다는 얘기겠지.
개는 미미하게 얼굴을 구겼다. 평소라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텐데. 그땐 발목의 상태가 나빴고, 태성의 집 앞에 있던 거구의 남자를 쓰러트리느라 힘을 소비했으며, 남자에게 목이 졸려 기절까지 했다. 흔적이 남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개는 결국 순순히 수긍했다.
픽 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이내 자신의 제복 단추 두어 개를 툭툭 풀어냈다. 개는 멀뚱히 제복 사이로 드러나는 남자의 목울대를 보았다.
엉뚱한 곳에 시선이 팔렸을 때였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개의 팔목을 잡아 눌렀다. 우악스러운 악력이었다. 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이건.”
남자가 개의 팔목에서 손을 뗐을 때, 그의 손에는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개는 화사하게 웃는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힐끗 창문을 보았다. 창밖에선 남자와 개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침대 헤드에 가려져 남자가 들고 있는 나이프도 보이지 않겠지.
“내가 가져가지.”
남자는 나이프를 자신의 제복 안에 넣었다. 개는 체념한 듯 축 몸을 늘어트리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솜 빠진 인형처럼 늘어진 개를 내려다보다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남자가 개의 몸 위에서 일어섰다. 개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한순간 사라졌다.
침대 아래로 발을 디딘 남자의 입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꾸 말썽을 부리면 벌을 받게 될 테니 주의하세요.”
“…….”
개는 침대에 누운 채 욕실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남자는 창밖의 불청객을 신경 쓴 듯 부러 기척을 냈다.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너른 등이 반듯한 제복 위로 윤곽을 드러냈다.
탁. 남자의 모습을 삼킨 욕실의 문이 닫혔다. 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자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는 까만 눈은 어딘지 모르게 맹목적인 부분이 있었다.
✵
창밖의 불청객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개의 윤곽에 눈을 가늘게 떴다. 개의 몸은 크지 않았고, 노을을 받는 개의 뒷모습은 얼핏 보면 미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작의 남자 정부인가.
불청객은 귀족들의 취향은 알만 하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
솨아아.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 차현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물방울이 단단한 등허리를 지나 바닥에 떨어졌다.
차현은 물에 젖은 머리를 이마 뒤로 넘긴 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자 상대는 곧 전화를 받았다. 차현은 귓가에 닿는 능청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흰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아이고, 검사님.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답니까.
사람이 없음에도 샤워 부스 안에서는 계속 물이 떨어졌다. 차현은 물기가 미세하게 남은 몸 위에 부드러운 소재의 잠옷을 걸치며 눈을 내리감았다.
“감시가 붙었어.”
―그건 이미 예상하셨던 일이지 않습니까아.
통화 중인 상대, 차현의 보좌관은 진지하지 못한 목소리로 줄곧 실실댔다. 그러나 차현은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제게 공작님을 감시하라고 말했지만, 저는 공작님의 사람이잖아요?
차현은 무감정한 얼굴로 눈을 떴다. 긴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검푸른색 눈동자가 어딘가를 직시했다.
“말조심해.”
―제가 어디 가서 불어 버릴까 봐 겁나십니까?
보좌관의 목소리에 기묘한 웃음기가 섞여 들었다.
―검사님, 저는 재미없는 일은 안 합니다. 아시잖아요. 폐하께 일러바치면 이야기가 너무 뻔해지는데 제가 왜 그런 일을 합니까?
“듣는 귀를 조심하라는 얘기야.”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투명한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잠옷의 옷깃을 적셨다.
―그거야 문제없죠.
눈앞에 있다면 뱀처럼 가느다랗게 웃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감시가 붙었으니 행동을 조심하라’고 말을 전하려던 차현은 가볍게 웃으며 생각했다. 괜히 전화했군.
별다른 용무가 없어진 차현은 전화를 끊고 샤워기의 물을 껐다.
그는 욕실을 나오자마자 마주친 개의 검은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기다렸나요?”
나긋나긋하게 던진 농담에도 개는 멀뚱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차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에 대꾸하지 않는 태도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그는 젖은 수건을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