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토사구팽(兎死狗烹)
1장
황제는 개에게 명령했다.
‘사냥을 갔다 오려무나. 털이 아주 예쁜 여우를 잡아 왔으면 좋겠어.’
개는 지금껏 사람만을 사냥해 왔지만, 여우 사냥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령 사냥법이 다르더라도 상관없었다. 개는 황제의 명령을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말이 안 되는 명령이라 하더라도 개는 언제나 임무를 완수하고 황제의 곁으로 돌아왔다.
개는 숲으로 향했다. 황제가 명령한 여우를 잡아 오기 위해. 그러나 밤이 내려앉은 숲에는 개와 여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왼쪽…….’
개는 자신을 쫓아오는 기척을 느끼며 빠르게 숲을 헤치고 나갔다.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넘을 때마다 나뭇잎이 파스스 흐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개를 쫓아오는 암살자 또한 다른 나뭇가지를 밟으며 뛰어넘어 오고 있었다.
파삭, 파사삭.
이미 존재를 들킨 이상 기척을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개는 잠행복 속에 숨겨 두었던 날카로운 암수를 만지작거렸다.
죽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황제는 개에게 여우를 잡아 올 것만 명령했다. 전처럼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거나, 수단을 가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윽.”
그리고 개가 고민하는 사이 암살자의 암수가 개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개는 순간 균형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졌으나, 바닥을 나뒹구는 대신 곧장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개는 황제의 명령 없이는 행동할 수 없었다. 개는 태어났을 때부터 황제의 앞길을 막는 이를 처리하기 위한 암살자로 길러졌다. 개의 모든 판단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이뤄져 왔으며, 그렇기에 선악의 구분이나 자신의 안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 없이는 아무도 죽일 수 없다. 개는 생각했다.
파삭, 파삭.
암살자가 던진 비수가 나뭇잎을 헤치고 쏘아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개는 본능적으로 비수를 피하거나 쳐 냈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것들을 모두 피할 순 없었다.
“하아, 흐…….”
깊게 베인 살갗 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개는 숨을 몰아쉬며 어질한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독 묻은 비수에 찔린 몸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개는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 달리며 가벼운 의문을 가졌다. 개는 황제의 암살자로 살기 위해 대부분의 독을 먹어 왔고, 그에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성을 갖지 못한 독의 종류는 황제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바로 뒤에서 쏘아진 비수가 발목을 꿰뚫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개는 더 이상 달려 나가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작은 자갈들이 잠행복을 찢고 잔 상처를 남겼다.
개는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급히 눈을 들었다. 검은 잠행복을 입은 암살자는 독에 중독되었음에도 눈을 형형하게 떠 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군.”
“…….”
개는 말없이 암살자를 올려다보았다. 낯설어야 할 암살자의 외형과 목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명령하지 않았으니 반격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는 암살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황제가 고용한 그림자 조직의 단원이었다. 암살자는 엎어진 개의 위에 올라타며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꺼내 들었다.
개는 까만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생채기가 난 개의 얼굴을 비췄다.
“…….”
“날 알고 있는 얼굴이군.”
황제에게 배신당한 것을 깨달았음에도 개의 얼굴은 덤덤했다. 개는 분노도 느끼지 않았고 배신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예상했던 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평온할 뿐이었다. 암살자는 그런 개의 까만 눈동자를 보더니 쯧, 혀를 찼다.
“어차피 죽을 테지만, 같은 이의 아래서 일했던 정을 보아 충고해 주지.”
개의 검고 빳빳한 머리칼이 암살자의 손에 거칠게 휘어잡혔다. 개는 신음 한 번 없이 물끄러미 암살자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랗게 벼려진 칼끝이 개의 동맥 위에 닿았다. 심판자처럼 냉담한 시선이 개를 향했다.
“네가 죽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탓이다.”
칼끝이 살갗을 느리게 파고들며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을 앞둔 심장이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개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잘 가라.”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였나. 개는 처음 겪는 일에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죽음은 코앞에 있었고, 그것을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 건 개가 아니었다.
푸슉.
소음기 낀 총이 쏘아지는 소리가 숲을 갈랐다. 일순 암살자의 몸이 크게 반동하더니, 곧 후각을 마비시킬 것처럼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는 홉떠진 암살자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곧 생명이 꺼지는 모습까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챙. 암살자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비틀 흔들린 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젖은 땅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좀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총을 쏠 때까지 개도, 암살자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누구지?
개는 몸을 바싹 긴장시킨 채,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을 든 괴한은 황제의 암살자까지 죽인 이였다.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해야…….
“어딜.”
그러나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목덜미가 덥석 잡혔다. 개는 괴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중독된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게다가 이젠 시야마저 흐려져 괴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챙겨.”
괴한은 힘없이 늘어지는 개의 몸을 자신의 수하에게 던졌다. 개의 빳빳한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흰 얼굴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기절한 건가.
괴한은 무감한 얼굴로 늘어진 개를 보았다. 수하의 팔에 매달린 개는 별다른 미동조차 보이질 않았다. 벌써 기절했나 보군. 괴한이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
“…….”
개의 새까만 눈이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났다. 독에 중독된 탓에 개의 눈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괴한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해독부터 시작해.”
개는 간신히 들어 올렸던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더 이상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해독해.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개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
창덕궁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는 석조 건물 안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넓은 창에 닿아 부스러지는 햇빛과 따스한 빛을 받아 윤기를 띠는 회색 융단, 은박으로 공예된 가구들, 푸르스름한 난초.
바스락. 넓은 방 안, 얇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공기를 적셨다. 씁쓰레한 차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달칵, 누군가 찻잔을 차 받침대에 놓는 소리가 짧은 소란을 일으켰다.
“…….”
하얀 침대 위에 죽은 듯 놓여 있던 개의 눈꺼풀이 떨린 건 그때였다.
개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수면제를 들이마신 것처럼 머리가 몽롱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꿈틀거렸다. 그러나 몸을 뒤척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개는 구역질이 날 뻔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굴렸다.
……여긴 어디지?
낯선 풍경이 눈에 담겼다. 황제의 방만큼 넓은 방 안이 햇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채도가 낮은 색으로 덧칠해진 그림이 걸려 있었고, 섬세하게 꾸며진 장식장 안에는 반듯하게 정리된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풍경은, 넓은 방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일 것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머리 아래로 반듯한 콧대가 보였다. 남자는 옅은 혈색을 띠는 입술에 찻잔을 가져다 댔다가, 이내 곧고 긴 손으로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미학적인 기준이 전무한 개에게도 낯선 남자는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그뿐, 개는 가라앉은 눈으로 남자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한다.
오랫동안 사람의 목숨을 끊어 왔던 개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저 남자는 죽일 수 없다.
그러나 개는 남자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건 허벅지에 매어 두었던 단검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개는 한 손으로도 능히 사람의 목을 비틀 자신이 있었다. 다만 개에겐 명령이 없었을 뿐이다.
남자를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
개는 몸을 낮춘 짐승처럼 남자의 흰 목덜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죽일 수 있다. 남자와 자신의 거리는 고작 서른 발자국쯤. 달려들어 목을 비틀어 버리면 남자는 자신이 죽은지도 모른 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일 수 없다. 개는 혼자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황제가 명령하기 전까지 개는 장식물이나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할 수도 없었다. 개는 감각을 곤두세운 채 숨을 죽였다.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셈이지.”
“……!”
불현듯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개를 향해 돌아선 것도 그때였다.
“황제의 개.”
개는 정체를 들켰다는 생각에 돌격 자세를 취했다.
“윽……!”
그러나 남자에게 달려들려던 개는 꼴같잖게 침대로 넘어졌다.
목을 팽팽히 조이는 것이 있었다. 겨우 삼켰던 구역질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개는 자신의 목을 할퀴듯이 움켜쥐었다.
달칵.
그 순간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가죽의 감촉.
그것이 목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저런…….”
남자는 퍽 안타깝다는 듯 말했으나 그 목소리엔 분명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개는 구역질을 간신히 삼키며 눈을 치켜떴다. 원형 커피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가 턱을 괸 채 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에 당한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멀쩡하군.”
독? 개는 목줄을 끊어 내기 위해 살갗을 긁어 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생각보다 몸이 너무 멀쩡했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네가 죽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탓이다.’
황제는 개를 죽이려 했다. 개는 자신의 코앞에 닥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죽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개는 지금 해독까지 된 채 멀쩡히 살아 있었다. 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혼란스럽나?”
개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돼.”
잠옷 위에 도포 같은 겉옷을 걸친 남자가 우아한 걸음으로 개에게 다가왔다. 개는 경계심 어린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았지만, 사실 그를 공격할 의지는 상실한 지 오래였다.
……물론, 그게 누군가를 해칠 의향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은 건 아니었다.
와장창!
개는 침대 맡에 있던 화병을 집어 깨트렸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부서진 화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쏟아진 물과 생화 사이로 깨진 사기 조각들이 서슬 퍼런 빛을 내뿜었다.
“지금…….”
남자는 개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듯했다. 남자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깨달은 순간 개는 이미 날카롭게 벼려진 조각 하나를 손에 잡아챈 상태였다. 조각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황제는 개가 죽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개는 죽어야 했다.
개는 조각을 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날카로운 사기 조각이 무언가를 깊이 뚫고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읏……!”
그 순간, 우아한 몸짓을 보여 주던 남자가 난폭한 움직임으로 개의 손을 쳐 냈다. 그는 발칙하게도 자살을 꿈꾼 개의 머리를 침대 위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쿵. 개의 머리가 침대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
“…….”
머리를 부딪친 개의 까만 눈이 흐릿하게 풀어지더니 이내 힘없이 감겼다.
남자는 개의 손에서 스륵 떨어지는 사기 조각을 보았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사기 조각은 보기만 해도 섬뜩함을 자아냈다.
“하…….”
남자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과 사기 조각이 박혀 들어갔던 두꺼운 가죽 목줄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런 징조도 없이 자살을 하려 들 줄은 몰랐다.
“이건 못 풀어 주겠군.”
남자는 개의 목숨을 살린 두꺼운 목줄을 내려다보았다. 기절한 개는 자신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졌는지 짐작하지도 못한 말간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무기가 될 만한 것도 다 치워 둬야겠어.”
개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수하가 남자의 뒤로 홀연히 나타났다. 남자는 자신에게 고개 숙인 수하를 보며 머리칼을 이마 너머로 쓸어 넘겼다.
“죽지 않게 잘 감시해.”
“네.”
남자는 기절한 개와 수하를 자신의 방에 남겨 둔 채 문을 열었다. 문밖을 지나던 사용인들이 남자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방문을 닫았다. 인사가 끝나자 사용인들은 흩어지고 비서만이 남자의 옆에 따라붙었다.
“공작 각하, 오늘은 황궁에서 회의가 있습니다.”
“늦지 않게 준비해야겠네요.”
긴 복도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창문에서 햇빛이 떨어져 내렸다. 옷방으로 향하는 남자의 얼굴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가 이내 밝아지길 반복했다.
남자는 문득 따끔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개의 손을 쳐 낼 때 베인 듯, 엷은 상처가 살갗 위에 남아 있었다. 남자는 무감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 이어지는 비서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완연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들어오는 달빛이 아니었다면 방 안의 전경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완연한 어둠.
밤이구나.
개는 간단한 진실을 깨달았고, 목을 찔러 죽으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직감했다.
“…….”
죽는 게 한번 실패했으니 다음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개는 목을 매만지기 위해 손을 들었다.
절그럭.
그러나 목을 만지기도 전에, 수갑이 채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는 달빛을 받아 시퍼런 광택을 내뿜는 수갑을 바라보았다. 손목을 옥죄고 있는 수갑은 길이가 짧아 자해나 살해용으로 사용하긴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개는 손을 들어 목 주변을 만졌다. 날카로운 조각으로 목을 찔렀음에도 살아남은 건 이 목줄 때문일 것이다. 매끄러운 가죽이 손끝에서 불유쾌한 감각을 일깨웠다.
목줄을 긁어내리던 개는 문득 송곳니의 뾰족한 단면을 혀로 핥았다. 목을 찔러 죽는 방법은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혀를 깨물어 죽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개는 이 사이에 혀를 넣고 턱에 힘을 주었다. 말캉한 살덩이는 조금만 힘을 주어도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얇은 표피에서 배어 나오기 시작한 붉은 피가 짙은 쇠 냄새를 풍겼다.
“……각하, ……단체 아직…….”
그러나 혀를 깨물지 못했다. 개는 어정쩡하게 혀를 내민 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청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두 명. 계단을 올라오는 두 명의 사람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냥 둬.”
“네.”
남자다. 오늘 아침 사기 조각을 목에 박으려던 자신을 기절시키고, 독에 중독되어야 했던 자신을 살린 그 남자.
개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 침대 아래로 발을 디디기 어려웠다.
개는 목줄을 끊어 내기 위해 살갗과 목줄을 마구 긁어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문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오늘 어떠셨습니까.”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을 때였다. 개는 우뚝 행동을 멈췄다.
폐하. 그것은 황제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짧게 깎인 손톱으로 긁어내린 피부 위에는 뭉뚝한 상처가 깊게 파여 있었다. 그러나 개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멍한 얼굴을 했다. 피와 살점이 고인 손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황제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던 건가. 그런데 의문의 남자는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린 걸까. 황제는 자신이 죽길 바랐을 텐데.
“폐하께선.”
문 너머로 들려오는 말을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직감이 머리를 후려쳤다. 개는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곳까지 기어갔다. 폐하께선. 그리고?
달칵.
“이런.”
개는 열린 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문 앞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하와 하얀 정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개는 검찰 제복을 입은 남자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침대 위에 네발 동물처럼 선 개를 보더니 이내 눈을 휘어 웃었다.
“깨어 있었네.”
그는 손을 내저어 수하를 물렸다. 수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개는 문 너머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언제 일어났지?”
“…….”
개는 긴장 어린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누군가 섬세하게 깎아내린 듯한 아름다운 얼굴은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개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경계하는 개를 향해 비식 웃음을 흘리고는, 태연한 얼굴로 정복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목까지 단정하게 채워졌던 정복이 풀어지며 남자의 흰 피부와 툭 튀어나온 울대가 옷가지 사이로 드러났다. 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자는 황제와 대체 무슨 사이지.
“마음에 드나?”
의미 모를 말이 툭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개는 까만 눈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튼 채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날 훑어보기에 말이야.”
훑어보긴 했다. 아침엔 죽여야 할 것 같아서, 지금은 그가 황제와 무슨 사이인지 알기 위해서.
그러나 남자의 하얀 정복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작은 얼룩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얀 제복 탓에 그가 검찰청에 소속된 인간이라는 것만 추측할 수 있었다.
“시선이 좀 뜨거워야 모른 척을 하지.”
“…….”
개는 경계하듯 몸을 낮췄다. 남자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살의 섞인 시선을 알아보지 않았는가.
“……푸흐.”
그러나 개의 경계 어린 얼굴에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뜻밖의 일이었다. 개는 무방비한 남자를 보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농담도 못 하겠군.”
남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개를 보았다. 개는 풀어 헤쳐진 정복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흰 목을 보며 혼란스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암습 같은 건 웃어넘길 정도로 실력이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 허세?
개는 난생처음으로 수많은 고민에 휩싸여 타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입 벌려.”
아니. 남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 이번이 두 번째 일이었다.
개는 자신의 양 볼을 움켜쥔 남자의 단단한 손을 느꼈다. 푸르스름한 기운을 띠는 검은 눈이 개를 향해 휘어져 있었다. 어느새.
개는 황급히 남자의 손을 쳐 낸 뒤 뒤로 물러서려 했다.
“재갈을 물릴지 말지 정해야 해서 말이야.”
그러나 남자의 악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개는 뒤로 물러서지 못한 채 남자를 노려보았다. 볼이 짓눌리자 무력하게 입이 벌어졌다. 남자의 긴 손가락이 개의 혀를 잡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상처가 남아 있는데.”
“으우…….”
개는 옅게 신음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상처가 난 부위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피가 멎었던 혀에서 다시 쇠 비린 맛이 느껴졌다.
“실패한 건가?”
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새까만 눈으로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는 이 개의 주인이었을 황제를 떠올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재갈은 잠시 보류하지.”
개의 볼을 눌렀던 단단한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개는 밖으로 끌어당겨졌던 혀를 서둘러 입 안에 넣으며 남자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하지만 다시 죽으려 든다면 말의 자유까지 잃을 수도 있어.”
거둬지는 남자의 손은 책을 만지는 사람의 것처럼 길고 곧았다. 그러나 개는 저 손이 얼마나 억세고 포악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래서 이 남자는 황제의 적인가, 아군인가.
적이라면 아주 두려워해야 할 존재일 것이다. 남자는 암살자보다 더욱 은밀하게 움직일 줄 아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황제가 이 사실을 알까? 남자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죽음을 앞둔 개를 살렸다는 것을 과연 알고 있을까?
아니. 황제는 모를 것이다. 개는 황제가 말했던 마지막 적의 목을 비틀어 죽였고, 그 결과 황제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
개는 혼란스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황제의 아군인가 적인가. 아군이라면 황제의 명을 어기고 개를 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이라면 황제의 편인 개를 어째서 살린 걸까. 살려 둔다면 개는 언젠가 남자의 가장 큰 적이 될 텐데.
아니. 의문은 사치였다. 이자가 황제의 적이라면 지금 죽여야 한다. 개는 남자의 목덜미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남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 없이 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적을 죽이는 것은 개의 존재 이유…….
“욱.”
개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선과 악, 도덕의 경계, 죽여도 되는 사람과 죽여선 안 되는 이를 구분시켜 주던 황제가 없다는 것은 원초적인 공포를 일깨웠다.
‘판단하지 마. 생각하지 마. 명령에만 따라.’
명령이 없다는 건 개에게는 죽음과 같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진 건 그때였다. 개는 혼란과 혼돈으로 흐트러진 눈을 들어 올렸다. 하얀 정복을 입은 남자는 네발 동물처럼 선 개를 무감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네 주인처럼 가만히 앉아 명령이나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남자는 개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물에 빠진 생쥐처럼 떨고 있는 개를 침대에 내던지듯 눕혔다. 까만 동공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생각하지 마.”
강압적인 어조였다. 개는 무정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기묘한 안도를 느꼈다.
“판단하려 들지 마.”
개는 흐릿하게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지 않았다. 근본적인 공포를 맞닥뜨린 개의 머리는 휴식을 요구했다.
“지금은.”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을 듣지 못했다. 평온한 잠이 개를 찾아들었다.
✵
개가 깨어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커피 향과 함께 찻잔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황급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깼나?”
커피테이블 앞에 앉아 신문을 보던 남자가 눈을 휘어 웃었다. 개는 온화한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전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
남자는 황제의 적인가 아군인가. 그것은 개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삶과 죽음은 이 나라의 주인인 황제가 명하는 대로 이뤄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는 황제에게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자신을 버린 황제에게 돌아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황제의 명령이 없다면 개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어제 그것을 절실히 느꼈다.
“오늘은 죽지 않을 모양이지?”
남자는 픽 웃으며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차분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칼 아래로 긴 속눈썹이 내리깔렸다. 하얀 피부색은 남자를 일견 유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래. 죽지 않는 게 네게도 좋을 거야.”
바스락. 남자는 신문을 접어 커피테이블 위에 올렸다. 검푸른 색을 띠는 눈동자가 개를 향해 돌아섰다. 자신을 직시하는 선명한 눈동자에 개는 움찔 몸을 떨었다.
“너와 황궁에 갈 생각이거든.”
개는 눈을 크게 떴다.
황궁.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어쩐지 낯설게 들렸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남자가 왜 이런 말을 한 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개의 존재를 숨겨야 할 남자가 황궁에 개를 데리고 들어간다니. 누군가 듣는다면 멍청하다며 비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만만해 보였다.
“…….”
왜, 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개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물음은 개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대신 개는 손끝을 적시는 기쁨을 느꼈다. 황궁으로 돌아간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목줄과 수갑만 풀린다면, 황궁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황제는 개가 살아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황제의 눈은 황궁의 모든 곳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개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디뎠다.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챙, 하는 쇳소리가 났지만 굴하지 않았다. 언제든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어나려는 순간, 개는 허리도 펴지 못하고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볼품없이 꼬꾸라진 개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목줄이 움직임을 제한해 넘어진 게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물론―”
남자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다리가 다 나았을 때 말이야.”
개는 침대에 엎어졌던 몸을 황급히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두 발로는 설 수 없었고, 네발 동물처럼 무릎을 세워 기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개는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남자를 흉흉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남자는 일부러 기척을 내어 다가오고 있었다.
개는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성큼 뻗어지는 남자의 걸음보다 빠르게 움직일 순 없었다.
남자는 금세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개의 얼굴과 가깝게 붙었다. 웃음기 어린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해독은 빨라도 발목이 꿰뚫린 건 금방 낫지 않더군.”
발목이 꿰뚫려?
개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어에 눈을 깜빡였다. 발목이 꿰뚫려, 발목이…….
“아.”
개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남자의 손이 발목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희고 단단한 손이 붕대로 감싸인 발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눌리며 고통이 피어올랐다.
‘어차피 죽을 테지만, 같은 이의 아래서 일했던 정을 보아 충고해 주지.’
개는 그제야 숲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암살자가 쏘았던 비수가 발목을 관통했던 것 또한.
“이제야 기억이 나나 보지?”
남자는 픽 웃으며 개의 발목을 놓았다.
개는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자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진 않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일 수 있는 걸까.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개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을 퍼뜩 끊어 냈다. 남자를 판단하거나 궁금해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게 직전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를 관찰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려 들고 있었다.
……위험해.
개는 남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리고 침대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그러나 시선을 피했다고 해서 남자의 기척까지 듣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야가 제한되자 다른 감각들이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짚어 가기 시작했다. 암살자로서 벼려진 능력은 개의 통제를 벗어난, 말하자면 생존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남자는 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고 움직였다. 옷자락이 다리를 스치는 소리와 커피테이블 근처로 걸어가 신문을 챙기는 소리, 식어 가는 커피의 떫은 냄새 같은 것들이 오감을 자극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고아한 어투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개는 귓속이 간지러워진 것을 느꼈지만, 인형처럼 반응 없는 얼굴로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
“…….”
붕대가 감긴 솜씨로 보아 상처가 말끔하게 치료됐을 거란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일주일 뒤에는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엉망으로 치료됐다 하더라도 발을 질질 끌어 걸으면 될 문제였다.
일주일.
개는 혼자만의 기한을 정하며 눈을 깜빡였다. 순간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놀라 눈을 들어 올렸다.
“돌아왔을 때 시체를 치울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지.”
문 앞에 선 남자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으나, 검푸른 눈만은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건 무언의 표식이었다. 다시 한번 자살을 시도한다면 가만히 있기 않겠다는.
개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개는 자신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나서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툭 떨어트렸다.
명령도, 지시도, 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남자도 없어졌다.
개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침대에 가만 앉아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고, 무엇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발목이 빨리 나아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이따금 할 뿐이었다.
개는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
햇빛이 쏟아지는 푸르스름한 하늘은 청량했다. 그러나 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은신에 일절 도움되지 않는 청량한 하늘이나 시원한 바람이 아니었다. 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개는 일정한 곳을 목적지 삼아 날아오는 새를 발견했다. 회색 깃을 가진 새는 푸드득 날개를 떨다가 창가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딱, 딱.
새가 부리로 창문을 쪼았다. 개는 새의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옮겨 창밖을 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 그곳에 남자의 수하가 있었다.
“…….”
개는 수하가 이 새를 어떻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회색 깃의 새는 전령을 보내는 새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이 같은 용도의 새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의 수하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딱, 딱, 창문을 두드리는 새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림을 모르는 새의 부리 짓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개는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언제까지고 창문을 두드릴 이 새를 위해 문을 열어야 할지, 아니면 명령받지 않은 일이니 무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제라면 지금 무슨 명령을 내렸을까. 개는 창문 앞을 서성이며 황제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황제의 명령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황제는 그날의 판단과 기분에 따라 명령을 달리 내리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자신의 정적을 아주 잔인하게 죽이라 명했다가, 또 어느 날은 단칼에 죽이라며 자비를 내리기도 했다.
딱, 딱, 딱.
개는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새의 부리 짓을 보며 까만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회색 깃의 새는 부리가 부러질 때까지 창문을 두드릴 기세였다.
물론, 전령 새가 부상을 입든 죽든 그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혹시 이 회색 깃의 새가 남자에게 아주 중요한 새라면. 그래서 남자가 개를 황궁에 데려가려던 계획을 무산시키기라도 한다면.
개는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순간에서나 들었던 커다란 심장 소리가 개의 머리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딱, 딱, 딱.
발목에 전령을 매단 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같은 자리를 맴돌다가, 다시 창문을 두드리길 반복했다.
개는 입술을 질근 깨물다가 다시 창문 너머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의 수하는 여전히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
개는 결국 손을 뻗어 창문 위에 손을 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손끝에 감겼다. 창문을 두들기던 새가 총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개는 창문 위에 댔던 손을 다시 말아 쥐었다. 열어도 되는 건가?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개는 불안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너는 의견을 가져서도 안 되고 의문을 가져서도 안 된다.’
개는 자신이 처음 세상 밖으로 꺼내졌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아직 이름이 없었던 개가, 기억이 있을 시절부터 칼을 쥐는 방법을 가르쳤던 스승을 죽인 날이었다.
스승은 개에게 기척을 없애는 법과 은신하는 법, 무기를 쓰는 법을 제외하고도 말을 잘 듣는 법을 가르쳤었다. 그건 짐승을 복종하게 하는 방법에 가까웠다.
스승은 개가 감정을 표현하거나 의문을 표하면 가차 없이 뺨을 내리쳤다. 개는 쉽게 자신의 의견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개가 그것에 앙심을 품고 스승을 죽였느냐 한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개는 태어난 순간부터 낡은 궁에 갇혀 스승 외의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 개의 세상에서 스승은 신이나 다름없는 황제의 대리자였으며, 그의 행동만이 유일한 정답이었다. 그러니 스승의 폭력은 개에게 어떤 증오심이나 적개심도 안겨 주지 못했다.
게다가 개는 의견을 가져서는 안 됐기 때문에, 스승을 증오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늙은 스승은 그저 명령을 내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개가 스승을 죽인 이유는 간단했다. 스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 딱, 딱.
새는 창문을 열지 않는 인간이 이상한지 다시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개는 긴장한 몸을 움츠린 채 손을 창문 위에 올렸다, 곧장 떼기를 반복했다.
“…….”
창밖의 햇볕이 따가웠다. 개는 창문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우울한 얼굴과 새까만 눈동자에 햇빛이 비쳤다.
입술을 앙다문 개는 투명한 유리창을 바라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손을 말아 쥐려 했다.
달칵.
곱아 드는 손가락에 창문이 밀린 것은 결코 개의 의지가 아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빳빳한 머리칼 사이에 찬바람이 스며드는 것을 느낀 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회색 깃의 새는 열린 창문 틈을 몸으로 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는 작은 날개를 펼치고는 자유를 누리듯 방 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개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날개를 접은 새가 창문 근처에 가지런히 앉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새는 발에 묶인 전서를 개를 향해 내보이며 날개를 한차례 푸드득거렸다.
“구루룩.”
전서를 가져가지 않는 개가 의문스러운 듯, 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새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던 개의 손이 움찔 떨렸지만 그뿐이었다. 개는 새의 발에 묶인 전서를 풀지 않았다.
개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새는 개가 멀어진 만큼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부리를 뻐끔거리며 우짖는 새는 무언가를 바라는 듯 보였다.
“…….”
그러나 개는 미동도 없이 새를 바라만 보았고, 새는 곧 심통이 난 것처럼 팩 몸을 돌려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개는 멀어지는 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열린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새어 들어온 바람에 빳빳한 머리카락이 뒤흔들렸다. 개는 가만히 앉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파란색을 띠던 하늘이 옅은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달칵,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단도를 넣어 두던 허벅지를 습관적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딱딱한 검신 대신 부드러운 재질의 옷자락만 만져질 뿐이었다.
개는 뒤늦게 자신의 손에 채워진 수갑의 존재를 깨닫고 몸을 낮췄다.
“얌전히 있었나?”
정복을 입은 남자는 문에 기대어 서서 개가 하는 우스운 짓을 가만 보고 있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와 개가 앉은 침대로 다가왔다.
개는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기묘하게 푸른빛을 띠는 검은 머리칼이 남자의 하얀 목덜미 위에서 흔들렸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가까이 붙었다.
“목에 새로 난 상처가 없는 걸 보면…….”
개는 남자의 내리깔린 눈을 보았다. 황제를 제외하고 이렇게 속눈썹이 긴 남자는 처음 보았다.
“얌전히 있었다고 믿어도 되겠지?”
남자의 곧은 손가락이 개의 목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목줄을 풀기 위해 긁었던 상처 위를 곧은 손이 무성의하게 건드렸다. 딱지가 막 지기 시작한 상처는 약한 자극에도 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고통은 익숙한 자극이었다. 개는 찡그림 하나 없는 무감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그는 개의 까만 눈을 마주 보다,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 열려 있군.”
개의 몸이 움찔 떨린 것은 그때였다. 남자는 침대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는 창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개는 다문 입술을 더욱 딱딱하게 굳혔다. 남자의 무감한 얼굴과 단정한 태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했다. 개는 점점 초조해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남자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전령 새가 왔나 보지?”
남자의 입이 열린 건 개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개는 놀란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열린 창문 앞에 선 남자의 머리카락이 사락 흔들렸다.
“그래도 창문은 닫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달칵. 남자는 열린 창문을 당겨 닫았다. 개를 향해 돌아서는 남자의 얼굴 위로 주황색의 노을빛과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졌다.
“새 말고 다른 들짐승이 들어올지도 모르거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남자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개는 그제야 남자가 말하는 ‘들짐승’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개와 같은 ‘암살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암살자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는 것치고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개는 정복의 단추를 느긋이 풀기 시작한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록 목줄과 수갑을 찬 채 얌전히 앉아 있다고는 하나, 남자의 바로 뒤에 암살자가 있는데…….
개는 자신의 목에 매어진 목줄을 만지작거렸다. 손톱에 쓸린 상처들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목줄이 없으면 남자를 죽일 수 있었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개는 목줄을 툭툭 긁어내리던 손을 멈췄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개를 향해 돌아섰다.
“너 같은 녀석들은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건가?”
개는 눈을 끔뻑였다. 너무 예상 밖의 말을 들은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달싹거리고 말았다.
“배고프단 얘기를 안 해서 말이야.”
그러나 남자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는 정말 개가 배고프지 않은 건지 궁금한 듯했다. 개는 입을 벙긋거렸다.
“……아니요.”
개는 썩은 볏짚같이 푸석푸석한 머리칼과 작은 키, 허여멀건 피부, 흰자위가 적은 까만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암습에 최적화된 신체였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 버려진 짐승의 생김새에 가까웠다.
그러나 개의 목소리는 낮고, 꼭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남자는 느릿느릿 입을 여는 개가 낯선 듯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 어린 얼굴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먹습니다.”
개는 이채를 띠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침대로 성큼 걸어와 천장에 달려 있던 끈을 잡아당겼다.
“그럼 같이 먹지.”
개가 남자를 보던 눈을 홱 돌려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까만 눈이 문 너머의 풍경을 좇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니. 풍경을 좇는다기보다는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의 시선에 가까울지도.
남자는 목을 빳빳이 새운 채 시선을 문에 고정한 개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똑똑.
얼마 가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에 고정되었던 검은 눈이 그제야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부르셨습니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홀연히 문 앞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 정복을 벗지 않은 남자의 몸은 단정한 선을 덧입은 것 같았다.
남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인다 싶더니 곧 문이 반쯤 열렸다. 개는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기척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세웠다.
“오늘 저녁은 방에서 먹겠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선명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개를 놀라게 했다. 개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방으로 올려 보내 주세요.”
개로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남자의 몸을 훑어 내렸다.
체형이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 서 있는 자세 같은 것들이 문 앞의 남자와 개가 아는 남자가 같은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니 개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에 사람이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탁. 사용인에게 지시를 마친 남자가 문을 닫았다. 개는 돌아서는 남자를 보았다. 어쩐지 몸이 바짝 긴장됐다.
“먹다가 불편한 게 생기면 말해.”
개는 나붓하게 웃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먹여 줄 의향도 있거든.”
뒤돌아선 남자는 여전히 개가 아는 그 남자였다. 개는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키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남자의 집에 온지 이틀째. 개는 처음으로 침대를 벗어났다.
물론, 침대를 벗어났다는 말이 목줄을 풀었다는 말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개는 의자 장식에 묶여 절그럭거리는 목줄을 힐끗 돌아보았다가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개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까막눈인 개가 읽을 수 없는 서류들을 빠르게 읽어 내리며 풀 냄새가 나는 차를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개는 손목에서 절그럭거리는 수갑과 함께 포크를 들어 올렸다. 의자에 목줄이 매어져 있긴 했지만 불편하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전기 고문을 받는 것도 아니고 손톱이 모두 뽑힌 것도 아닌데 불편할 것은 없었다.
둥글게 모양 잡힌 안심 스테이크가 덩어리째 찔러 올려졌다. 주변에 나이프가 없기도 했고, 사람도 아닌 죽은 고기에 칼을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개는 덩어리진 고기를 입에 넣어 뜯었다. 붉은 핏기가 돌게끔 조리된 스테이크 위에 잇자국이 생겼다. 개는 입가에 묻은 핏물을 문질러 닦으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목이 다 나으면 황궁에 간다고 했다. 남자가 자신을 황궁에 데려가기만 한다면, 목줄을 물어뜯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먹을 수 있는 대로 먹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했다.
개는 고기를 크게 물어뜯고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 힐끗 남자를 쳐다보자, 무어라고 빽빽이 적힌 글자를 보던 남자가 눈을 들어 개를 보았다.
“불편한가?”
남자는 불편하면 자신이 먹여 줄 의향이 있다고 했다. 개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으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더 먹어.”
남자는 종이 더미를 다시 빠른 속도로 넘겨 읽기 시작했다.
개는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고깃덩어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바싹 구워진 겉과 다르게 붉은 고기 속에서 핏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개는 턱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
그러나 그렇게 닦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개의 손등은 이미 고기 기름과 핏물로 흠뻑 젖어, 닦는 용도로는 쓸모가 없어진 상태였다.
개는 까만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가, 그나마 닦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옷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렸다. 흰 천이 갈색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만족스럽게 입을 닦아 낸 개는 다시 포크를 들어 이로 고기를 뜯었다. 흘러내린 육즙이 포크를 타고 흘러 옷 위로 투둑 떨어졌다. 개는 옷 위에 점점이 묻은 얼룩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한참 서류만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개에게 시선을 준 것은, 개가 고기를 다 먹고 물끄러미 시선을 보낼 때였다. 남자는 서류 너머로 보이는 개의 까만 눈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새.”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개의 하얀 옷에는 핏물과 고기 기름이 뒤엉켜, 살인 현장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이라도 죽이고 온 건가?”
남자의 말은 농담이라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고, 비꼬는 것이라기엔 모자란 감이 있었다. 어쨌든 좋은 말이 아니란 건 확실했지만 개는 표정 변화 없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요.”
대부분의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개는, 안타깝게도 사람의 어투에 대해서는 아주 어두웠다.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던 스승은 고저 없는 말투를 사용했고, 황제는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에도 기분이 바뀌어 어투로는 기분을 짐작해 낼 수 없었다.
게다가 고문을 당하는 이들은 울며 애걸하거나 저주를 퍼부으며 고함만 질러 대니, 개가 사람의 어투에 어두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령이 없으면 죽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개는 평온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개의 희멀건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엇이 불만인지 미간을 좁혔다.
“농담도 안 통하는 걸 사람인 체 만들어 놓다니.”
남자의 검푸른색 눈동자가 개를 직시했다. 아니. 남자는 개의 얼굴 너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더러운 취미를 가졌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옷은 버려야겠어.”
남자는 앉아 있던 몸을 느긋이 일으켰다. 긴 그림자가 개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개는 자신의 목 앞까지 뻗어져 나온 흰 손을 보았다.
……언제?
그런 생각을 할 즘이었다. 남자의 손이 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개는 의자에서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크게 뜨였다. 개는 의뭉스러운 남자의 미소 어린 얼굴을 보았다.
부욱.
그때 무언가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짧은 손톱이 남자의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연했다.
옅은 혈향이 났다. 개는 피 냄새의 진원지가 남자의 손임을 금방 깨달았다.
“아픈데.”
남자는 조금쯤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여실히 섞여 있었다.
물론, 목소리의 진정성까진 개가 판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개는 퍼뜩 놀라 남자의 손을 놓았다. 남자의 흰 손등 위에 찍힌 반달 모양의 손톱자국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일어선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개는 입을 살짝 벌렸다. 자신이 보았던 남자의 겁먹은 얼굴은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개의 찢어진 옷가지를 손에 쥐었다. 개는 앞섶이 완전히 찢겨 너덜거리는 흰 옷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찢어지고 더러워져 수명을 다한 개의 옷을 끌어 내렸다. 어깨에 간신히 걸쳐졌던 옷이 팔뚝을 스치고 팔꿈치까지 툭 떨어져 내렸다. 부드러운 천이 살을 타고 내려가자 오싹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쳤다. 개는 낯선 촉감에 손을 움칠 떨었다.
개가 바르작거릴 때마다 손목에 매어진 수갑이 흔들리며 쇠붙이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었다. 남자는 흰 손목에서 덜컥거리는 수갑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이래도 손목이 걸리는군.”
남자는 수갑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옷가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불쾌해도 참아.”
투둑.
옷감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옷이라기보다는 완연한 걸레짝이 되어 버린 천 쪼가리가 자신의 몸에서 완전히 떠나간 것을 보았다. 남자는 개의 몸에서 벗겨 낸 옷을 쓰레기처럼 내던졌다.
남자는 거의 벌거벗었다 싶은 차림새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개를 내려다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개는 자신의 팔목을 붙잡는 남자의 긴 손가락을 느꼈다.
“네가 아무리 개라고 해도 목줄을 잡고 가는 건 내 취미가 아니란 말이지.”
개는 눈을 깜빡였다. 목줄을 잡는 게 제 취미가 아니란 건 왜 말하는 거지. 고심해 봤지만 남자의 의중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싫으면 말해.”
남자는 개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건, 이해하지 못했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의자 장식에 매어져 있던 개의 목줄을 풀어 손에 쥐었다.
“편한 대로 해 줄 테니까.”
한 손에는 목줄이, 다른 한 손에는 개의 팔목이 잡혔다. 개는 헐겁게 잡힌 목줄과 자신의 손목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어느 문 앞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달칵.
남자는 닫혀 있던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찬 기운이 얼굴로 훅 끼쳐 왔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방 안에 있는 것은 고문실도 아니었고 감옥도 아니었다. 넓은 욕실이었다.
“씻어.”
의외라고, 개는 생각했다. 남자는 개의 빤한 시선을 받다가 불현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설마 혼자 씻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이자는 죽어 가는 개를 주워 해독하고, 목에 사기 조각을 박아 죽으려던 것을 막았으며, 밥을 먹이고, 또 옷을 찢어 벗기기까지 했지만 씻기고 싶은 생각까진 없는 듯했다.
“혼자 씻습니다.”
물론 개도 황제의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남자에게 몸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개는 욕실로 걸어 들어가, 입고 있던 얇은 바지를 대뜸 끌어 내리려 했다.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문도 안 닫고 씻나?”
“네.”
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남자의 얼굴이 기묘한 것을 발견한 듯 일그러졌다.
“왜?”
개는 생경한 질문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왜냐니. 황제는 개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해야 만족하는 사람이었고, 씻을 때라고 다르지 않았다.
“문이 닫혀 있을 때 사람은 비밀을 만듭니다.”
개는 언젠가 들었던 황제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읊었다. 남자는 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황제의 말이군.”
개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개의 까만 눈을 잠시간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에게도 비밀을 만들지 않으려고?”
남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친 건 순간의 일이었다. 개는 순식간에 뒤바뀌는 남자의 얼굴이 황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농담이 안 통하는군.”
남자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개는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옷을 벗고 물을 틀었다. 투명한 물이 메말랐던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
어젯밤 씻고 나왔을 때, 개는 목줄과 수갑 때문에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입든 옷이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한참 옷을 만지작거리던 개는 결국 옷을 입는 것을 포기하고 맨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개는 자신의 몸에 말끔하게 입혀진 옷을 보았다. 게다가 개의 몸에 일어난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개는 멍한 얼굴로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손목을 꽉 조이고 있던 수갑이 풀려 있었다. 손목이 텅 빈 듯한 감각이 낯설게 다가왔다.
“잘 잤나?”
꽤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개는 남자를 찾기 위해 곧장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커피테이블 앞에 앉아 있을 줄 알았던 남자는 그곳에 없었다. 개는 당황한 얼굴로 테이블 주변을 살폈다.
“그쪽이 아닐 텐데.”
개가 남자를 발견한 것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한번 더 들려온 후였다.
개는 몸을 돌려 욕실 쪽을 보았다. 남자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며 방 안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수갑이 풀리니 어때.”
하늘거리는 소재의 하의만을 걸친 남자는 개를 지나쳐 어딘가로 향했다. 개는 남자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물방울이 남자의 탄탄한 등허리까지 길게 흘러내렸다.
“무엇을 물어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기분이 어떠냐는 얘기야.”
남자는 의자에 걸쳐 두었던 검푸른색 겉옷을 몸 위에 걸쳤다. 개는 자신의 양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수갑에 얽매였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손목.
“……이상합니다.”
“좋은 게 아니라?”
남자가 고개를 돌려 개를 보았다. 개는 남자의 검푸른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힐끗 시선을 내렸다. 손을 쥐었다 펴 보았지만 자신이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말로 정리할 수 없었다. 개는 입을 다물길 택했다.
“네가 더 이상 죽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면.”
남자 또한 개의 감정에 대해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느슨하게 늘어진 겉옷을 정리하지 않은 채 커피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나는 너에게 자유를 보장할 거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말은 꽤 멋지게 들렸지만 그뿐이었다. 남자의 ‘자유’라는 말은 개에겐 추상적인, 말하자면 검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마구 흩뿌린 그림처럼 보였다.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이군.”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까만 눈을 깜빡이는 개를 보다가, 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 비틀리거나 그림같이 그려진 미소는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개가 처음으로 시선을 뺏긴 어떤 것이었다.
“손이 풀렸으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남자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느긋하고 우아했다.
“새를 안으로 들이고 싶으면 들이고, 내쫓고 싶다면 내쫓아도 좋다는 말이야.”
개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좀 전에 보았던 미소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것도 잠시, 곧 그의 얼굴에 다시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죽으려 든다면 이번엔 사지가 묶일 테니 조심해.”
남자는 개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개는 덩그러니 남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
임무 없이 혼자가 된 개는 언제나 그랬듯, 누군가를 미동 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판단 없이 시간을 축낸다 하더라도 개의 감각들마저 쉬는 것은 아니었다.
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기척 소리와, 남자의 수하 하나가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 그리고 창밖으로 들리는 미세한 소음들이 공기처럼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개는 까만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
어느 순간 개의 고개가 창문을 향해 홱 돌아섰다. 햇빛이 부스러지는 유리창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눈이 가늘게 뜨였다. 높은 하늘을 비상하는 새의 그림자가 나무 위로 비치고 있었다.
회색 새가 창가에 내려앉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날개를 한차례 푸드득 떤 새가 고개를 힘껏 치켜들고 유리창을 향해 부리를 내리쳤다.
딱, 딱.
부리와 유리창이 부딪치며 소음이 생겨났다. 개는 유리창과 가까운 침대 자리에 앉아 새를 내려다보았다. 새는 투명한 창 너머 보이는 개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딱, 딱. 새가 다시 유리창을 쪼았다. 개는 창문 위에 손을 올렸다. 손목에 남은 수갑 자국은 햇빛 아래서 더욱 선명했다. 개는 손을 쥐었다 펴며 힐끗 새를 쳐다보았다.
새는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개가 답답한지 종종 걸음으로 창가를 서성였다. 그러고 재촉하듯 유리창을 부리로 쪼아 대기 시작했다.
딱, 딱, 딱.
개는 창문틀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남자는 수갑이 풀렸으니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그리고 ‘새를 안으로 들일지 말지 정하라’고 말했지.
개는 새가 부리를 부딪치는 곳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퉁, 퉁, 하고 유리창이 반동하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 문을 열고 싶은 걸까?
의문은 개조차 알 수 없는 순간에 찾아들었다.
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다시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개는 털실을 굴리는 고양이처럼 창문을 만지작거리다, 어느 순간 날카로운 시선으로 문을 쏘아보았다. 닫힌 문 너머로 낯선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개는 이런 기척을 내는 인간들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과 침전에 숨어들어 비밀을 캐내려던 이들. 황제의 음식에 독을 타거나 호시탐탐 죽음을 노리던 이들.
그들은 암살자와 같은 기술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신뢰를 사 의심을 피하는 첩자들이었다.
어떤 연유로 첩자가 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황제의 개’가 있다는 것을 들켜서 좋을 것이 없다.
개는 방 안에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침대 맡에 걸린 목줄 탓에 몸을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개는 목줄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챙!
날카로운 쇠붙이의 소리가 목줄 너머로 느껴졌다. 개는 얼굴을 작게 일그러트렸다. 과도하게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달칵.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소년에 가까운 나이인 사용인은 긴장 어린 얼굴로 공작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커피테이블 위며 카펫이 깔린 바닥, 침대 위까지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사용인은 재빨리 공작의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밀실이 된 방 안은 고요에 잠겨 들었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울리는 것만 같았다. 사용인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대며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그의 걸음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창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사용인은 마침내 전령 새가 앉아 있는 창문을 밀어 열었다. 회색 깃을 가진 새는 사용인의 정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 듯, 무방비하게 창틀을 넘어 들어왔다.
사용인의 손이 새를 향해 뻗어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통을 억세게 잡힌 새는 몸을 버둥거리며 사용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용인은 퍼덕거리는 새를 거칠게 잡아 누르며 발에 묶인 전령을 앗아 가려 했다.
“구룩, 구르륵!”
“가만히 좀 있어……!”
사용인이 이를 악물며 말할 때였다. 버석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까만 눈이 흉흉한 빛을 띠었다. 사용인의 등 뒤로 차가운 손이 순식간에 뻗어져 나왔다.
✵
개가 남자라고 부르는 공작, 차현은 막 창덕궁 선정문(宣政門)을 넘어가고 있었다. 선정전과 바로 이어진 선정문은 푸른 기와를 얹은 선정전과 마찬가지로, 푸른 보를 일정한 간격으로 둔 모습이었다.
차현은 궁인들이 자신에게 힐끗 시선을 보내는 것을 느꼈다. 황궁이 어수선한 와중에도 궁인들은 가십거리를 씹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현, 그는 선대 공작이었던 아버지와 후계자였던 형이 사고로 죽음으로써 운 좋게 공작 자리에 올랐다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황제의 신임을 사 어린 나이임에도 파격적 승진을 통해 검찰의 수뇌부 자리에 앉은 남자였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얼굴 좋은 낙하산 인사. 궁인들의 입이 간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차현은 선정전 앞에 섰다. 닫힌 장지문 앞에 선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여 오는 것이 보였다. 차현은 익숙하게 인사를 받아들였다. 품계를 따지자면 황제의 비서실장이 검찰 수뇌부에 불과한 차현보다 높겠지만, 그에게는 국가의 체제가 바뀔 때 받은 명예 작위가 있었다.
“폐하,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장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차현은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황제를 보았다. 그는 업무를 보아야 할 선정전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차현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걸쳐졌다.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황제는 수려하게 생긴 미남자였지만, 그의 외형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예민하게 곤두선 분위기였다. 짙은 눈 그늘이 진 눈 밑과 붉게 달아오른 흰자위, 제대로 여며지지 않은 채 흐트러진 용포.
“왔으면 한잔 들지?”
정무를 봐야 할 장소에서 술병을 기울이는 황제의 모습은 잡배와 다를 바 없었다. 차현은 등 뒤에서 장지문이 닫히는 고요한 움직임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또 그 소리냐.”
황제는 마땅치 않은 듯 쯧 혀를 찼으나, 더 이상 술을 권하진 않았다. 차현은 그런 황제를 내려다보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그 일은 어떻게 처리했지?”
황제의 유일한 장점은 본론이 빠르다는 것이다. 차현은 얼굴 가득 피어올랐던 웃음을 차차 거두어들이며 입을 열었다.
“자살로 처리했습니다.”
절대 군주제. 군주는 국가 기관과 법에 구속되지 않으며, 군과 경찰 권력마저 모두 장악하는 정치 체제.
황권이 살아 있는 대한제국은 그런 나라였다.
“자살이라.”
차현은 술잔을 쥔 채 알 수 없는 생각에 빠진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입을 다문 황제의 얼굴은, 일견 광인처럼 보였다.
“돌아가신 황태후마마께서 거두셨을 때부터 ‘개’로 길러진 암살자였습니다. 차후에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연히,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개와 비슷한 몸집을 가진 시체의 얼굴을 부패 상태로 만들고 자살로 처리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차현 자신이었으니까.
“그래. 그놈은 죽었지.”
황제의 분노 어린 눈길이 차현을 향한 것은 그때였다. 차현은 황제의 분기를 읽어 내지 못한 사람처럼 묵례를 해 보였다. 술잔을 쥔 황제의 손이 잘게 떨렸다.
“술맛이 떨어졌다!”
황제가 탁,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차현은 어린아이처럼 분노를 숨기지 않는 황제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넌 나가 봐라.”
황제는 씨근덕거리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차현은 다시 한번 묵례한 후, 뒤돌아 선정전을 나가려 했다.
“너와 나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황제의 목소리가 떠나려던 차현의 걸음을 붙잡았다.
“그래서 널 믿는다.”
차현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장지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황제를 보았다.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가 봐라.”
황제는 휘휘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던 궁인들이 몸을 움직여 장지문을 밀어 여는 것이 보였다.
와장창!
문이 닫히기 무섭게 등 뒤에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차현은 궁인들의 비명 소리와 황제의 고함 소리를 뒤로한 채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창덕궁을 빠져나왔다.
“아휴, 검사님!”
궁궐의 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들과 멀찍이 떨어져 주위를 맴돌던 남자가 차현에게 달려든 것은 그때였다.
“이 저를 두고 혼자 가시면 어떡합니까아.”
차현은 자신의 옆에 붙어 헤헤 웃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았다. 차현을 몹시 반가워하는 게, 어째 남자의 등 뒤에 꼬리가 흔들리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날 보좌하는 게 자네 역할일 텐데.”
차현은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넬 챙겨야 하나?”
“어이쿠.”
갈색 머리의 남자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다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청으로 돌아가시죠.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차현에게 몸을 가깝게 붙였다. 차현은 남자가 품에서 꺼낸 종이를 눈 깜짝 할 새 받아 소매 안에 넣었다.
검게 선팅 된 차에 올라탄 차현은 곧장 종이를 펼쳐 보았다. 종이에는 다급한 필체로 몇 개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개. 공격 성향 드러냄.
“청으로 가기 전에 잠시 집에 들러야겠어.”
갈색 머리의 남자가 가늘게 웃더니, 경쾌한 움직임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네에. 분부대로 합죠.”
✵
“어떻게 된 거지?”
차현은 침실로 올라가며 평복을 걸친 수하에게 물었다.
“그게…….”
평소라면 간결하게 상황 보고를 마쳤을 수하가 웬일인지 머뭇거리며 보고를 미루고 있었다. 차현은 냉정한 시선을 수하에게 두었다.
“무슨 일인지 말하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침실을 향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그럼 말해.”
“……부대의 정체를 알게 된 꼬마가 있습니다.”
차현의 걸음이 멈춰 섰다. 수하가 왜 보고를 망설였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는 즉살 처분이 원칙일 텐데.”
“죄송합니다.”
수하는 변명 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차현은 긴장한 듯 굳은 수하의 등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대에 들어오고 싶다는 의견을 계속해서 피력했습니다.”
간덩이가 부은 애새끼군. 부대의 정체를 알고서도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니. 부대원들이 왜 쉽게 죽이지 못했는지도 가늠이 갔다.
“그러나 원칙상 저희 부대에는 들어올 수 없는 외인이기 때문에, 부대원 중 한 명이 무리한 임무를 하나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수하의 말끝이 흐려졌다. 침실의 문고리를 잡은 차현이 확신하듯 말을 이었다.
“시행했다 이거군.”
수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차현은 부대원들이 잠시나마 담력을 높이 샀을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앳된 얼굴은 용감하고, 또 무모했겠지. 그 결과 지금쯤 개의 손아귀에 목이 꺾여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차현은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됐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달칵. 침실 문이 열렸다.
“……이, 이러지 마세요. 잘못했다니까요!”
방 안에는 뜻밖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차현은 반쯤 찢어진 옷을 걸친 채 가슴팍을 가리고 있는 사용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서 사용인의 몸을 전 뒤집듯 뒤집고 있던 개도.
“그러니까.”
개는 사용인을 뒤집고 있던 상태 그대로 뒤돌아 문을 보았다. 까만 눈에 당혹감이나 죄악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차현은 황당함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미간 사이를 짓눌렀다.
“상황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개는 볏짚같이 푸석한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자신이 잡고 있던 사용인의 다리를 놓았다. 사용인은 개가 자신의 다리를 놓자마자, 뒤집어졌던 벌레가 원상태로 돌아온 것처럼 파다닥 개에게서 멀어졌다.
저는 그냥, 정말로 전령 새 발목에 묶여 있던 전령만 빼 오려고 한 거거든요…….
하, 하지만 맹세코 전령을 보려고 하진 않았어요! 내용이 뭔지 궁금하지도 않고, 저는 전령 새라는 것도 오늘 처음 본 거거든요. 황제 폐하의 이름을 걸고 정말, 헉,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죠. 죄송합니다……. 어디 가서 제가 이랬다고는 하지 말아 주세요.
다른 말 하지 말고 말하라고요? 계, 계속 말할게요. 그러니까 남자라면 갖는 로망…… 같은 거 있잖아요. 막 멋지게 첩보 작전 펼치고, 칼도 잘 다루고, 죽을 위기에서도 절대 죽지 않는 그런 거요. 아시죠……? (방 안에 있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아, 본론이요. 그, 그러니까 그게 사용인 쉼터 있잖아요. 거기에서 혼자 쉬고 있었거든요. 한 달 전쯤인가. 근데 갑자기 어디서 물이 떨어진 거예요. 실내인데 물이 떨어진 게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손으로 닦아 봤더니 피인 거예요.
아, 물론 놀라기야 했죠……. 뺨에 떨어진 게 물이어도 놀랄 일인데 피라니. 그런데 제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완전 멋지게 나타난 아저씨가 제 목에 칼을 대는 거 있죠. 진짜 첩보 영화처럼 파바박 나타났는데. 개멋진…… 헙.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똑바로 말할게요. 그래서 제, 제가 가입하고 싶다고 했어요. 비밀 첩보단. 그런데 다들 절 애 취급 하고 무시하셔서……. 그나마 저를 무시하지는 않는 아저씨한테 가입 방법 좀 알려 달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저한테 공작님 방에서 물건을 가져오면 가입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작님 방에 몰래 들어왔는데 창문에 새가 있기에 중요해 보여서 잡은 거고…….
정말 잘못했습니다, 공작님. 아저씨한테는 제가 정말로 공작님 방에 들어왔다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버, 벌을 받아야 하면 저만…….
울 것 같은 눈으로 용서를 빌다, 슬그머니 자신을 쳐다보는 새 도둑을 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헉.”
무릎을 꿇고 있던 새 도둑은, 개에게 옷을 뜯긴 것이 여간 충격이 아니었는지 겁먹은 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개는 새가슴보다 연약해 보이는 새 도둑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렇게 심약한 심장을 가지고 어떻게 전령 새를 훔치려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심약하든 강철 같든, 새를 훔치려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개가 저자의 옷을 뜯고 몸을 뒤집어 본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명령이 없었다 해도 적을 제압을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소속 낙인을 확인하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튼 정말 잘못했습니다!”
개는 남자의 앞에 넙죽 고개를 숙이는 새 도둑의 목덜미를 보았다. 흰 목덜미는 깨끗하기만 했다. 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낙인은 정말 없는 것 같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잘못을 비는 새 도둑을 보던 개는 시선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설마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만 듣고 새 도둑을 풀어 주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요?”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새 도둑을 내려다보았다. 새 도둑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 폐하를 걸고 맹세할 수 있다 호언장담을 했다.
“밖에서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 거라 생각하고, 이번 한 번만 보내 드리는 겁니다.”
남자는 새 도둑의 말뿐인 맹세를 받아들였다. 개는 어쩐지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무력이 강하니 조무래기는 어떻게 되든 좋다 이건가.
“가, 감사합니다!”
새 도둑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개는 새 도둑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놀란 듯 창밖으로 도망친 새를 떠올렸다. 까만 눈이 새 도둑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좇았다.
“그런데 저…….”
사용인은 자신의 목덜미가 노려지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눈을 굴렸다.
“혹시 저 형도 비밀 조직의 일원이에요?”
사용인의 호기심 서린 눈이 힐끔 개에게 가 닿았다. 개는 까만 눈으로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개와 눈을 마주한 사용인의 몸이 움칠 떨렸다.
그리고 사용인의 시선 밖, 얼어붙은 눈빛을 한 남자가 무모한 어린애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밀 조직원이라, 글쎄요.”
아주 희미한 살기가 느껴졌다. 개조차도 한발 느리게 알아차렸을 만큼 은밀한 살기. 개는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떨 것 같나요.”
그러나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살기를 거두어들인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기를 내뿜은 사람이 남자라는 것은 알아차렸지만, 그 살기가 누굴 향한 것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개는 경계하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만약 살기의 대상이 자신이었다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개는 황제에게, 혹은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에게만 죽을 수 있었다.
황제가 그렇게 할 것을 명령해 왔으니까.
“형도 비밀 조직 맞죠? 그렇죠?”
잔뜩 긴장한 개는 다가온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개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사용인을 향하자, 앳된 얼굴의 사용인이 움칠 몸을 떨었다.
“……우와아.”
그러나 겁먹은 듯 보였던 사용인의 눈에 반짝임이 차오른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진짜 개쩐다.”
사용인은 변신 로봇을 눈앞에 둔 어린애처럼 개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툭 건들면 금방 죽어 버릴 것 같은 사용인이 개의 주위를 맴도는 동안, 개는 기운 빠진 늙은 짐승처럼 표적의 급소 부위를 힐긋거렸다.
“저도 형처럼 되고 싶어요.”
사용인은 동경 어린 눈으로 개를 뜯어보았다. 개는 자신이 모르는 감정을 내비치는 사용인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목에 걸린 목줄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처럼 되고 싶다니. 이걸 찬 처지라도 되고 싶은 건가.
“어……. 그런데 형은 근신 중인 거예요?”
사용인은 뒤늦게 개의 목에 채워진 목줄을 발견한 듯했다. 사용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리더니, 이내 번쩍이는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혹시 수발은 안 필요하세요? 저 잘할 수 있는데!”
개는 앞에서 방방거리는 사용인에게서 시선을 뗐다. 더 보고 있다가는 어쩐지 목을 꺾어 버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수발.”
픽 터진 웃음소리 같은 한마디가 들린 건 그때였다. 개는 눈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섬세한 빛을 띠는 남자는 우아한 걸음으로 사용인의 등 뒤에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아직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사용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그 애의 키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저 친구는 발목과 머리를 다쳐 제대로 거동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웃음기 어린 입술이 사용인의 귀 가까이 붙었다. 개를 향해 있는 검푸른 눈동자가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개는 눈을 깜빡이다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상하다. 머리를 다친 기억은 없는데. 머리칼 사이를 헤집어 봐도 상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헉. 형 어쩌다가…….”
개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자세 그대로 멈춰서 사용인을 보았다. 자신이 언제부터 새 도둑의 형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필요하긴 한데……. 잘할 자신이 있습니까?”
“시켜만 주신다면 뭐든, 뭐든요!”
사용인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남자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개는 기합이 들어간 듯한 사용인의 얼굴과 흰 정복의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저 새 도둑이 자신의 시종이 된다는 말인가?
남자는 어리벙벙한 얼굴의 개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용건이 끝난 남자는 문을 향해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고 문을 열기 전, 그는 수하에게 흘리듯 말을 남긴 채 떠났다.
“감시해. 입단속이 안 돼면 원칙대로 처리하고.”
개는 남자가 나간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개는, 불현듯 들린 큰 소리에 눈을 돌렸다.
“네 목숨이 아홉 개는 되는 줄 알아?”
“아, 왜 그래요!”
남자의 수하가 사용인의 귀를 잡아당겼다. 앳된 얼굴의 사용인은 고개를 한쪽으로 치켜든 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잡아당겨진 귀가 아픈 듯, 까치발을 선 발이 펄쩍펄쩍 튀어 올랐다.
“살려 줬으면 조용히 살아야지. 공작님의 방엔 왜 들어와!”
“어쨌든 일 잘 풀렸으면 된 거죠. 아, 아파요! 진짜 귀 찢어진다니까요?”
수하가 사용인의 귀를 거칠게 놓으며 분통을 토해 냈다.
“어휴, 이 화상!”
개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
일순 개와 눈이 마주친 수하의 얼굴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개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그의 모습을 까만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수하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눈이 동그래진 사용인이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수하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개는 나무 사이를 헤치고 멀어지는 기척에 힐끗 시선을 두었다.
“형 방금 봤어요? 와 씨, 개멋있어.”
“…….”
개는 창턱을 붙잡고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사용인을 보았다. 암살자가 되길 희망하는 새 도둑. 사용인에게 내려진 평가는 그게 다였다. 흥미를 잃은 시선이 닫힌 문 쪽으로 돌아섰다.
“형은 안 멋있어요?”
“…….”
발목은 언제 낫는 거지. 개는 붕대가 감긴 발목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왜 대답을 안 하세요? 제가 뭘 불편하게…….”
무방비한 사용인이 개에게 한달음에 가까워졌다. 개는 다가온 기척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주었다. 사용인은 개의 번질거리는 검은 눈에 움칠 몸을 떨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벌렸다.
“아! 형 머리…….”
사용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개는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지는 사용인의 표정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제 이름은 태성이에요. 주태성.”
개는 평소처럼 멍하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축내려 했다.
“형,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헉, 아니면 뭐 보여 주실 거 있어요? 막 파다닥 하고 무술을 한다거나.”
그러나 사용인, 태성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건지 쉴 새 없이 개의 주위를 얼쩡거렸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하나, 개의 예민한 감각은 태성이 어쭙잖게 무술을 흉내 내는 것이나, 허공에 주먹질을 하다 넘어질 뻔한 것, 개가 자신의 추태를 봤는지 확인하는 시선까지 놓치지 못했다.
“슈슈슉 하고 검술을 한다거나.”
태성은 자신이 넘어질 뻔한 것을 개가 보지 못했단 걸 확인하고는, 곧이어 검술 흉내까지 시작했다. 물론 그건 검술이라기보다는 끈 달린 인형이 들썩들썩 흔들리는 모양새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아, 참. 형 총은 쏠 줄 아세요? 저는 총이 제일 좋아요. 멋있잖아요.”
태성은 몸을 옆으로 돌려 한 손으로 총 쥐는 자세를 취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는 일에만 쓰였던 근육 없는 얇은 팔이 바람에 나부낄 것 같았다.
“이렇게 하고…… 탕.”
팔이 부러지고 싶은 건가. 개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다가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근데 형, 머리는 왜 다친 거예요? 막 100 대 1로 싸우다가 다쳤나?”
태성은 남자와 다른 의미로 위험했다. 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짜증을 느꼈다. 뭔가 속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너.”
개는 처음으로 상위 존재의 명령이나 물음 없이도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
태성은 개의 으르렁거림에 눈을 홉뜨더니, 힐긋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개는 그제야 고요한 평화를 누리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등 뒤에 닿는 햇볕은 따사로웠고, 조심조심 움직이는 태성의 움직임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다. 개는 햇볕 아래 놓인 짐승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형, 주무세요?”
멀찍이 떨어져 커피테이블이나 닦고 있던 태성이 작은 목소리로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잠과 현실의 경계에 놓인 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성은 슬금슬금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열었다. 침대 맡에 앉아 고개를 숙인 개는 여전히 졸음에 빠져 있었다.
“형, 저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태성이 문밖으로 몸을 반쯤 내뺀 채 웅얼거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탁. 문이 닫혔다.
개는 창밖에서 기척을 내던 남자의 수하가 태성을 따라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감시하라던 건 내가 아니고 저 새 도둑이군.
찰나의 순간 잠에서 깨어난 개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흰자와 검은자의 차이가 뚜렷한 눈동자에 잠기운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개의 눈꺼풀이 아래로 감겼다.
사람의 시선과 움직임이 사라진 방 안은 완전한 고요에 빠져 있었다. 현실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없는 곳에 놓여 있는 기분.
깊은 잠에 빠져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앉아서 졸던 모습 그대로 잠든 개의 등 위로 주황색의 노을빛이 비춰 오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창덕궁과 가로수,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솨아아.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창문 틈새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개의 머리칼이 잘게 흔들렸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채앵!
그 순간 서슬 퍼런 빛을 띠는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큭……!”
손목이 꺾인 남자는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자는 암살자였다. 개는 자신이 손목을 비튼 이의 얼굴을 보았다. 새까만 눈이 일말의 잠기운도 없이 흉흉한 빛을 내뿜었다.
그러나 복면 사이로는 특색 없는 눈만 보일 뿐이었다. 암살자의 소속을 특정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개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는 복면인의 목을 잡아 침대에 누르려 했다.
챙!
목줄이 말썽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개는 꼴같잖게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침대 헤드에 묶인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기긱, 긱, 하는 쇳소리를 내뱉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개가 복면인의 팔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자가 개의 움직임 범위 내에서 벗어난다면 곤란했다. 무조건 근접전으로 끝내야 했다. 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킥.”
하지만 개가 목줄에 저지된 몇 초의 시간은 복면인이 반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개는 비웃음 섞인 복면인의 눈을 보았다.
복면인은 허리춤에서 뽑아 든 날카로운 칼로 개의 어깻죽지를 베어 냈다.
촤악!
옷과 함께 베인 상처 부위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흰 옷이 붉은 피로 젖어 들며 쇠 비린내가 코끝을 진동했다.
칼을 치켜든 복면인이 개의 심장을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내질렀다.
“크헉.”
개는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홧홧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치명상은 피했다. 복면인이 칼을 내찌르기 전에 복부를 차 밀친 덕이었다. 배를 걷어차인 복면인이 몸을 옹송그리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개는 비틀거리는 복면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팔을 잡아 침대에 내던졌다. 그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복면인의 다른 팔마저도 꺾어 칼을 떨어트렸다.
개는 부들부들 몸을 떠는 복면인의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
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소음기가 끼워진 총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것을 순식간에 분해해 바닥에 내던졌다. 회색 융단에 부딪친 총의 파편들은 소음조차 내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복면인은 크지 않은 개의 몸뚱이 아래에 깔려 버둥거렸다. 개는 그런 복면인의 머리칼을 잡아 침대 헤드에 내리찍었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복면인의 눈에 초점이 잠시 풀렸다 돌아왔다. 그의 움직임이 한결 둔해졌다. 개는 바르작거림이 줄어든 복면인의 품을 뒤져, 찾은 무기들을 바닥에 내던졌다.
“…….”
개는 마지막으로 복면인의 허벅지에서 찾아낸 단도를 눈으로 훑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은 손끝을 대는 순간 상처를 낼 것 같았다.
“누구의 명령을 받고 왔지?”
푸욱!
복면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개는 복면인의 목덜미를 얇게 베고 침대 깊숙이 박힌 칼날을 보았다. 흰 시트 위에 붉은 핏물이 번졌다.
“말해.”
개는 새까만 눈으로 복면인을 내려다보았다.
복면인은 오늘 낮에 보았던 시끄러운 새 도둑과는 달랐다. 이자의 움직임에서는 분명 훈련받은 티가 났다.
개는 침묵을 지키는 복면인의 얼굴을 보다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을 가린 복면을 거칠게 끌어 내리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쿨럭…….”
그곳에는 길거리를 지나다 볼 만한 평범한 얼굴이 놓여 있었다. 보통의 암살자라면 있어야 할 칼자국이나 피부가 일그러진 흔적, 혹은 뼈가 함몰되었다 붙었던 흔적도 없었다.
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복면인을 살폈다. 복면이 벗겨진 남자는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게다가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내뱉기까지 했다.
……이상한데.
“……명령?”
의심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복면인이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우린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개는 픽 웃음을 흘리는 복면인의 얼굴을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복면인의 눈에 기묘한 생기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우린 자유 의지로 움직일 뿐이야.”
자유.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명령 없이 움직이는 암살자란 존재할 수 없을 텐데.
“공작에게 전해.”
시익, 식, 거칠게 내뱉어지는 복면인의 숨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비죽 올라간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다음엔 반드시 죽을 거라고.”
개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자는 독을 먹었다. 입 안에 숨겨 둔 독 든 캡슐을 깨물거나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방에 들어오기도 전에 약을 먹고 온 것이다.
독을 먹고 들어왔다면 살릴 방법은 없었다. 이자는 틀림없이 죽는다.
개는 침대에 박아 넣었던 칼을 뽑아 고쳐 쥐었다. 복면인은 이제 더 이상 말할 힘조차 없는지 식식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비실 웃음을 흘렸다.
“…….”
개는 기괴한 풍경을 눈앞에 두고도 별다른 동요 없이 목줄을 바라보았다.
이 방의 주인인 남자는 개가 죽지 않음을 증명한다면, 이것을 풀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목줄은 개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으며, 적에게 틈을 내어 주는 불상사까지 만들어 냈다. 자칫 잘못했다면 부상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를 틈.
개는 자신이 쥔 새파란 칼과 목줄을 번갈아 보았다. 날이 선 칼은 가져다 대기만 하면 뭐든 잘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칼자루를 쥔 개의 손이 머뭇거릴 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다.
개는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보았다. 노을이 지던 하늘에는 어느새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달빛만이 비치는 방 안에는 시체로 변한 남자와 개가 놓여 있었다.
달칵. 마침내 문이 열렸다.
남자는 방 안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건지 급히 문을 닫았다.
피 냄새, 개가 들고 있는 새파란 단도와 그 아래 미동도 없이 깔려 있는 시체, 융단 위에 폭격이라도 터진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무기들까지.
“…….”
“…….”
개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칼은.”
개는 자신이 든 칼을 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은 칼은 더욱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 들고 있을 건가?”
개는 대답 대신 칼을 융단 위에 내던졌다. 툭 떨어진 단도가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다 멈춰 섰다.
“일단 처리한 후에 얘기하지.”
개는 자신에게 성큼 가까워지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개의 밑에 깔린 시체를 힐끗 보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남자의 수하들은 시체를 방수포에 싸 창문으로 나가는 것이 익숙한 듯했다. 그들은 빠르게 시체를 처리한 후 침대의 커버와 베개, 그리고 푹신한 매트까지 모두 치웠다.
투박한 손끝에서 깨끗하게 정리되는 방 안의 풍경은 놀라울 정도였다. 개는 자신처럼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의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꽤 놀랐다.
방을 몇 시간 전으로 되돌려 놓은 것처럼 깨끗이 정리한 수하들은 언제 방 안에 들어왔었냐는 듯 사라졌다. 개는 그들이 사라진 창밖을 바라보다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덜너덜하군.”
남자는 커피테이블 앞에 앉아 멍하니 있는 개를 그렇게 평가했다.
개는 힐끗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얕게 베였던 가슴팍의 상처는 붉은 핏자국을 남긴 채 딱지가 지고 있었고, 어깻죽지의 상처는 아직 피를 꾸역꾸역 토해 내고 있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매번 옷을 갈아입히는 보람이 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개는 남자의 반어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까만 눈을 깜빡였다.
“한 번쯤은 알아들을 때도 되지 않았나.”
남자는 초죽음 상태에 가까운 개의 언어 능력에 혀를 찼다. 물론, 남자가 혀를 차든 말든 개는 상관하지 않았다.
“벗어.”
개는 자신의 앞에서 약통을 뒤적거리는 남자를 보았다. 통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 남자가 힐끗 개의 상처를 보았다.
개는 손을 들어 옷을 벗었다. 피에 말라붙은 옷이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 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칼에 베여 너덜거리는 옷은 더 이상 고쳐 쓸 수도 없을 만큼 넝마가 되고 말았다.
“참아.”
남자는 개의 맨살 위에 소독약을 뿌렸다. 화한 감각과 함께 상처가 후벼지는 듯한 통증이 어깨를 강타했다. 그러나 견디지 못할 통증은 아니었다. 통점이 무뎌진 개의 몸은 이 정도의 감각을 통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는 소독약에 흠뻑 젖은 거즈로 상처 위를 닦아 내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지?”
남자가 물었다. 개는 자신의 상처 위에 덮어지는 지혈제를 느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고 싶은 말. 지금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죽은 암살자의 소속은 알아냈나?”
남자는 침묵을 지키는 개 대신 먼저 물음을 꺼내 들었다. 개는 죽기 전 기묘한 생기를 띠던 암살자의 눈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왜? 너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남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살아만 있었더라면 개는 무슨 수를 써서든 남자의 소속을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오기 전에 독을 먹었습니다.”
저런,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안타깝다는 감정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얼굴은 어땠지?”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한 남자가 개의 몸에 직접 붕대를 감아 주고 있었다. 개는 자신의 어깨와 가슴팍에 솜씨 좋게 감기는 붕대의 거친 감촉을 느꼈다.
“기억할 만한 특징이 없었습니다.”
개는 자신의 대답에 남자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징이 없다니. 쓸모없다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황제에게 맞고는 했던 머리가 욱신거렸다.
“그래. 그랬겠지.”
그러나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개는 자신의 가슴팍에 깔끔하게 매어진 붕대를 보다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의 붕대와 발목의 붕대는 비슷한 방법으로 마감 처리 되어 있었다.
“그자는 암살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가 아니었을 테니까.”
개는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암살자를 직접 만나 보지 않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훈련받은 이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내 집에 흙 묻은 발로 들어왔는데, 당연히 훈련은 받았겠지.”
고도로 훈련된 자가 아니고서야 침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자신만만한 투였다.
개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집요하게 좇았다. 남자가 입을 뗀 것은 그가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 앞에 섰을 때였다.
“너는 폐하의 적이 누군지 알고 있나?”
남자는 침대 위에 놓인 흰 셔츠를 집어 들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황제의 적이 누군지 알고 있냐고? 그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으니까.
‘죽여! 눈물로 목숨을 구걸하더라도 오장육부가 모두 뒤틀려 죽게 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거야.’
황제는 자신들의 적들을 격렬히 증오했다. 그들은 황제가 황태자이던 시절 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승냥이들이었고, 마침내 그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 이들이었다.
“네가 아는 적만이 폐하를 증오하는 건 아니야.”
저벅거리는 남자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개는 부러 걸음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짓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죽인 이는 평범한 시민이었던 이 중에 한 명일 거다.”
시민과 암살자. 그것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단어였다. 눈을 가늘게 좁힌 개가 남자의 거짓을 읽어 내려 했다.
“네가 알지 못하는 세상엔 하늘과 땅이 뒤집히길 바라는 사람들이 존재하거든.”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선 거짓을 읽어 내릴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선 그저 희미한 조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신경 쓸 필요는 없어.”
펄럭. 흰 천이 남자와 개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개는 자신의 눈앞에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천을 붙잡았다. 부드러운 셔츠가 손을 덮고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입어.”
남자는 개의 붕대 감긴 어깨와 가슴팍, 그리고 판판한 배를 보았다. 지푸라기같이 빳빳한 머리칼 사이로 까만 눈을 깜빡이는 개는 떠돌이 ‘개’처럼 보였다.
“이번엔 찢지 않도록 조심하고.”
달칵.
무언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목이 허하게 비는 느낌이 들었다. 개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시원해진 목을 매만지자, 목줄 자국이 남은 푸석한 피부가 느껴졌다.
목줄이 풀어진 것이다.
개는 땅에 떨어진 무거운 목줄을 보다, 멀어지는 남자를 보았다. 그의 몸을 조이는 흰 제복처럼, 남자는 순백색의 알 수 없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졌는지도 개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남자를 두려워해야 하는 건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개는 커다란 혼란을 느꼈다.
✵
어린 사용인 태성은 늦은 아침에 공작의 방에 도착했다.
그는 공작도 없는 방 안에 쭈뼛쭈뼛 들어오더니 슬그머니 개의 눈치를 보았다. 어제 개가 던진 ‘조용히 해.’라는 말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검은 눈의 남자는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긴 듯했다. 태성은 그런 개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그를 훔쳐보며 커피테이블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은박이 된 장식장의 먼지를 조심스레 털고, 난초의 잎사귀를 부드러운 천으로 문질러 닦고(내친김에 물도 주었다), 바닥에 미처 닦이지 않은 갈색 얼룩을 문질러 닦았다(커피라도 흘렸나?).
“…….”
태성은 바닥에 엎드려 얼룩을 닦다가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청소를 너무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성이 무슨 행동을 하든 개는 미동도 없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태성은 힐끗 개의 눈치를 살피다가, 문득 개의 목이 허전하게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형 목줄 풀었네요?”
태성은 그렇게 말했다가 덜컥 입을 틀어막았다. 목줄이라고 했다고 또 화내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개는 태성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물론 이 정도의 무시는 익숙했다. 비밀 단체 아저씨들을 쫓아다니면서 투명 인간 취급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 무슨 명상해요? 나도 해 볼까.”
태성은 개를 따라 몇 분간 침묵을 지켰다.
“어우, 속 갑갑해.”
물론,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푸하, 숨을 내뱉은 태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개를 보았다.
햇빛이 비치면 고동빛을 띠는 머리칼과 새까만 눈동자. 개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음에도 어쩐지 오싹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저씨들도 저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태성은 머리를 긁적이곤 쾌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 그런데 저 일하러 오다가 어떤 사람 연행되는 거 봤어요.”
간혹 가다가 기사로 보게 되는 이야기였다. 국가에 비관적으로 굴거나, 권력을 우습게 만들거나, 혹은 별것도 아닌 일을 큰일인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연행되는 일은.
그러나 난생처음 직접 보게 된 일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태성은 반쯤 정신을 잃은 듯 비틀거리는 사람과, 그의 양팔을 잡고 연행해 가던 군인들을 떠올렸다.
“……근데 그 사람 되게 평범하던데.”
그저 눈만 깜빡이던 개의 시선이 돌아간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