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세 번째 첫사랑 (18/18)

〈외전〉세 번째 첫사랑

* * *

2016년 6월.

한식당 ‘솔’에서는 단장을 모두 마치고 개업을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한 자리가 마련됐다. 지배인인 현준과 셰프인 재유의 가족이 전부이지만 둘만 운영하는 작은 식당이기에 제법 북적북적해 보였다.

“자, 이제 절 세 번씩 하시고.”

고사상을 준비해 준 아주머니가 활기찬 목소리로 개업 의식을 진행했다. 아직 뜨끈한 시루떡과 돼지고기 편육, 명주실을 감은 북어까지 아주 제대로였다. 초에 불을 붙이고 술을 따른 재유가 긴장된 표정으로 현준과 함께 절을 했다.

“오시는 손님들 맛있고 편안하게 식사하고 가게 해 주시고 큰 말썽 없이 장사 잘되게 해 주십시오.”

현준이 큰 소리로 개업 기원을 하자 박수가 터졌다. 참석한 손님은 현준의 부인과 대학생 딸들, 영선의 부모님과 희지, 그리고 우주가 있었다. 오픈은 저녁부터이고 우선은 가족들에게 점심 대접부터 해야 했기에 재유는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등갈비찜과 솥밥이 잘되고 있는지 확인한 뒤 제일 먼저 나갈 한입 요리들의 담음새를 살폈다.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의 첫 손님인 가족들에게 선보일 요리인지라 왠지 긴장되고 흥분도 됐다.

손님들은 안내에 따라 한 테이블에 나눠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능숙한 서버인 현준이 차례로 음식을 내가자 테이블은 음식에 대한 칭찬과 담소로 금세 시끌벅적했다.

주방에서 홀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라 재유는 손님들의 반응과 식사 속도 등을 체크해 가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이따금 힐긋거리는 우주와도 몇 번 눈이 마주쳤다. 재유는 그때마다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간간이 리필 요청도 있었는데, 특히 닭만두와 감태말이 육회의 인기가 좋았다. 음식을 넉넉히 준비했기에 재유는 기쁜 마음으로 새 접시를 꺼내 플레이팅을 이어 갔다.

“크으… 술 땡긴다. 재유야, 술 없냐? 지배인님, 술 좀 주시오.”

“넵, 지금 갑니다.”

재유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운 아저씨가 큰 소리로 술을 찾자 현준이 미리 준비해 둔 술들을 서빙했다. 희지는 무알코올 하이볼로, 나머지는 능이주로 잔을 채웠다. 손님들이 즐겁게 마시고 맛있게 먹는 동안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인테리어가 볼수록 고급지고 멋지다며 오너들의 노고에 대한 칭찬과 대박이 날 것 같다는 덕담이 이어졌다. 현준의 딸들과 희지의 학업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오더니 영선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철물점 현황과 우주가 입은 스리피스 정장에 대한 사담까지 주제는 들쑥날쑥했다.

고기와 식사가 나가고 후식만을 남겨 뒀을 때 아주머니가 그만들 앉으라며 재유와 현준을 불러들였다. 의자를 마련해 식탁에 더불어 앉고 면면을 둘러본 재유는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그동안 여러 사건들이 있기도 했고, 원래는 혼자 차리려던 거라 더 늦춰지리라 생각했는데, 오랜 꿈이었던 창업이 이뤄지니 감회가 남달랐다.

옆에 앉은 우주가 슬쩍 몸을 기울이며 귓속말로 “배 안 고파?”하고 물었다. 재유는 웃으며 고개를 젓고 찬물로 목을 축였다.

“근데 둘이서만 해도 괜찮겠어? 바쁠 때 손 모자라는 거 아냐?”

아주머니가 배도라지 차로 입가심을 하시며 물었다.

“테이블도 몇 개 없는데 둘이면 충분하겠지. 나중에 장사 잘되면 사람 더 써도 되고.”

“맞아요, 어르신. 애초에 스무 명을 정원으로 생각하고 만든 거라 그렇게 바쁠 거 없어요. 우리 한 셰프 실력으로 충분하고, 저도 만만찮게 잘합니다.”

현준이 이번엔 감자술을 따라 주었다. 아저씨는 아이고 맛나겠다, 하며 기껍게 잔을 꺾었다.

“크, 이 양반 참 볼수록 정 가네. 그래, 옛날에 같은 식당에서 일했었다고?”

“예, 그때부터 제가 우리 한 셰프 인성에 반하고 요리 실력에 딱 꽂혀서 이번에 식당 차린다길래 눈치 없이 꼽사리 좀 꼈습니다.”

“이이가 그동안 재유 씨 칭찬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다니던 식당 그만두고 재유 씨랑 한식 다이닝 한다길래 저도 바로 그러라고 했어요.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어디 가서 사장님 소리 한번 들어보라고요.”

같은 호텔리어 출신인 현준의 처가 한마디 거들며 이쪽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재유는 멋쩍게 어깨를 움츠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겸손의 말과는 다르게 현준은 ‘솔’의 개업 시기를 앞당긴 개국공신이었다. 50대 중반이 지난 그가 남의 밑에서 월급 받기 지겹다고 은퇴를 말하길래 슬쩍 권했더니 얼씨구나 하며 덥석 손을 잡아 왔다. 수지맞은 건 오히려 재유였다.

5성급 호텔과 이름난 한식당에서 접객업만 30년이 훌쩍 넘는 그는 개인적인 단골도 꽤 있었고, 청와대에서 의전이 있을 때 파견 형식으로 일할 정도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고급 인력이었다. 그런 현준의 추천으로 재유는 이 동네에 식당 터를 잡고 전체적인 컨셉과 타겟층, 메뉴까지 정립할 수 있었다.

인근에 대사관이 많고 외교관 사택단지가 있어서 외국인 손님도 받을 수 있고, 프랜차이즈가 거의 없는 동네라 나름의 개성을 갖춘 식당가에서 희소성이 있는 한식 다이닝을 차리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렇게 해서 주 5일 런치와 디너를 예약제로 운영하는 ‘솔’이 탄생했다. 물론 초기 예약은 현준의 단골과 우주의 인맥으로 채워졌다. 다소 무리한 도전이긴 했지만, 오픈일을 목표로 인테리어를 하고 메뉴를 개발하며 들였던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곧 빛을 발할 거라 생각하니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처럼 가슴이 들떴다.

“아이구, 우리 희지도 아빠가 식당 차리니 좋은가 보다. 오늘따라 안 남기고 다 먹는 거 보면.”

아주머니가 희지에게 본인 몫의 한과를 입에 쏙 넣어 주고 등도 쓰다듬으며 예뻐라 하셨다.

“아빠 밥 원래 잘 먹어요, 저.”

“그러니 어디 가서 웬만한 밥 입도 안 대지. 재유가 미식가로 키워 놨어, 아주. 어여 먹어, 이것도 먹어 봐라.”

아저씨의 후식까지 다 받아먹은 희지는 이제 배 터지겠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심리 상담을 받으며 한국에서의 일상을 다시 시작한 희지는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재유의 뜻대로 송지현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공범이었던 남자 셋의 사죄를 받고 나자 희지는 잠시간 우울기를 또 겪어야 했다.

예상대로 송지현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재유는 딸아이의 마음속에 남은 분함과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희석되도록 인내하며 달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새로 인테리어를 마친 깔끔한 집에서 새 학기를 시작한 것은 꽤 도움이 되었다. 물론 여행의 여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부녀는 그렇게 지난겨울의 악연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희지의 환한 얼굴이 내심 기쁘고 벅차서 웃음이 나오려는데, 테이블 밑에서 우주의 손이 쑥 들어왔다. 재유는 티 나지 않게 표정을 정돈하고 우주를 향해 지그시 웃음 지었다. 행복했다.

슬슬 자리를 파할 시간이 되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날 즘이었다. 다들 배를 두드리며 악수도 하고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를 나누는데, 밖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어서 나와보라는 듯이 경쾌하게 두 번 울리는 소리에,

“도착했나 보다.”

라며 우주가 재유를 향해 윙크를 했다.

“누구 오기로 했어?”

“응. 개업 선물.”

“뭐?”

“어서 나가 보자.”

우주의 말에 모두들 우르르 식당 밖으로 몰려나갔다. 주차 공간에 커다란 분홍색 리본을 달고 있는 흰색 SUV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우주에게 뭐라 뭐라 말하더니 차 키를 건넸다.

“이야, 이게 개업 선물이라고? 염 대표 스케일 장난 아니네. 이거 이번에 출시된 거 맞지? 실제로 보니까 엄청 크네. 옵션까지 다 했으면 꽤 나갔겠는데?”

현준이 눈을 번득이고 차 주위를 뱅뱅 돌며 “캬아, 외제 차 중에선 이 차가 안전성 하나는 최고지” 하고 감탄을 했다.

재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헛웃음을 털어놓는데, 우주가 손에 차 키를 쥐여 주었다.

“우주야 이거… 하아….”

그러지 않아도 식당이 자리를 좀 잡으면 차를 사려고 했는데 발 빠른 우주가 선수를 쳤다. 개업 날짜에 맞춰서 차를 구입했다면 이미 몇 달 전부터 알아보고 다녔을 텐데 어쩜 그동안 한마디 내색도 없었는지….

“이제 네 차야. 이거 타고 짐도 싣고 편하게 다녀. 희지도 타야 되니까 일부러 튼튼한 걸로 골랐어.”

“뭐야, 상의도 없이 갑자기….”

너무 당황스러워서 평소 늘어놓는 잔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아주머니가 우주의 등짝을 내리치면서 핀잔을 줬다.

“차를 살 거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고사상 하나 더 마련하는 건데. 어쩌누? 아까 상 다 치워 버렸는데. 우주 너, 서 있지 말고 저기 슈퍼 가서 막걸리나 한 통 사와라. 그거라도 뿌려야지.”

“가게에 막걸리 있습니다, 어르신. 제가 갖고 나올게요.”

듣고 있던 현준이 가게에서 반주로 먹으려던 막걸리를 잽싸게 들고나왔다.

아니, 저, 그게….

사람들을 말리려던 재유는 엉겁결에 막걸리병을 손에 든 채 바퀴마다 흘려 주며 아주머니의 등쌀로 안전 운행 기원까지 주절거리게 됐다.

“사고 안 나게… 잘 부탁드립니다…?”

어리바리한 자동차 고사가 끝나고 허리를 펴자 사람들 틈에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우주를 발견했다.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잠깐 쏘아본 뒤에 막걸리병을 처리했다. 손에는 차 키만 남았다.

“아빠, 나 애들이랑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거기까지 태워 주면 안 돼?”

유리를 통해 차 내부를 힐끔거리던 희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 우리도 터미널에 좀 떨궈 주고. 이왕 새 차 생겼으니까 시승식은 해야지. 안 그래?”

아저씨와 아주머니까지 나서자 재유는 현준을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디너 손질은 다 해 놨잖아. 얼른 모셔다드리고 와. 내가 가게 보고 있을게.”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그렇게 해서 운전대를 잡은 재유는 옆좌석에 우주를, 뒷좌석에 아저씨 내외와 희지를 태우고 짧은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차는 묵직하고 안정감 있게 미끄러졌다. 좋은 질감의 가죽 시트가 몸에 착 달라붙듯이 편안했다. 큰 차체에 걸맞게 내부 크기도 넉넉했다.

사실 우주가 개업 선물을 준비할 줄은 예상했었는데, 그게 차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냥 화분이나 하나 사 올 것이지, 하던 마음이 운전대를 잡고 나서 쏙 들어갔다.

“할머니. 여기가 경복궁이고 여긴 광화문 광장이고, 저기에 세종대왕이랑 이순신 장군 동상도 있어요. 더 내려가면 시청이고 왼쪽으로 꺾으면 종로예요. 나중에 올라오시면 저랑 같이 종로랑 경복궁에 놀러 가요. 맛있는 것도 먹고요.”

희지가 들뜬 목소리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처음으로 아빠가 모는 차를 타는지라 신난 모양이었다.

“오야, 그르자. 내달에 또 올라올 테니까 그때 우리 희지랑 서울 구경 좀 제대로 해야겠다.”

“아 가게는 어쩌고?”

“당신이 보면 되잖아. 김 사장이랑 맨날 쏘다닐 때 가게 지킨 게 누군데?”

“에이, 할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되죠.”

“그렇지! 같이 오면 될 걸 꼭 나 떼놓고 갈려고 해. 희지야. 할아버지는 인사동이랑 한옥마을 갈란다.”

“어? 거기도 방금 지나갔어요. 여기서 가까워요.”

“으응, 그래? 고만고만하게 다 붙어 있구먼?”

뒷좌석에서 티격태격 서울 관광에 대한 계획을 듣자니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이 멈출 줄을 몰랐다. 우주도 이쪽을 돌아보며 흡족한 듯 웃어 주었다. 사직터널을 지나자 막혔던 도로가 한적해졌다.

“희지야. 삼촌이랑 아빠도 끼워 줄 거지?”

“그럼요. 운전할 사람 있어야 되잖아요. 아빠가 하면 되겠다. 이 차가 우주 삼촌 차보다 더 크니까. 그쵸 삼촌?”

“당연하지. 대가족 태우고 다니기에는 이 차가 훨씬 낫지.”

오랜만에 들뜬 딸을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희지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식당을 개업하고 새 차가 생긴 일이 제법 기쁜 것 같았다.

우주는 그동안 개업 준비로 바쁜 재유를 대신해 희지의 학원 셔틀을 해 주었다. 지난번 사건이 학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일어났던지라 안정될 때까지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우주가 자처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걸리던 터라 재유는 그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그렇게 매일 얼굴 보며 운전해 주다 보니 여행을 다녀와서도 두 사람의 친분은 여전했다.

재유는 신촌으로 차를 몰면서 룸미러로 뒷좌석을 훑어보고 옆자리의 우주를 힐끔거렸다. 이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부모님과 다름없는 아저씨와 아주머니, 생살 같은 내 딸 희지, 언제나 곁을 지켜 주는 든든한 연인 우주까지.

오픈 첫날의 긴장과 흥분을 다스리기에 충분한, 안온하고 평화로운 초여름의 한때였다.

***

2016년 11월.

우주는 차 안에서 내리지도 않고 ‘솔’의 간판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응시했다. 요즘 그의 신경 줄을 갉작이는 일들이 이 조그마한 식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차 문을 거칠게 닫은 그가 출입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 왔어?”

테이블 중에서도 명당인 안쪽 창가 자리에서 재유가 웃으며 다가왔다.

“배고프지? 금방 차려 줄게.”

“…으응.”

오늘도 있었다. 신경 줄의 원흉 원, 투, 쓰리가.

재유가 자리를 비운 사이 뚝 멎었던 소음이 다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시끌시끌해졌다. 우주는 불퉁한 표정으로 명당자리가 잘 보이는 옆 옆 테이블에 앉아 원, 투, 쓰리를 주시했다.

식당 손님도 아니면서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한식 셰프인 재유에게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대접받는 저들은 재유보다 여덟 살에서 열 살은 족히 많은 중년의 여성들이었다.

식당을 개업한 이래로 우주는 일부러 식사 시간을 늦춰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솔’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이 시간엔 현준도 스크린 골프를 치러 나가기 때문에 오로지 둘만 있을 수 있는, 소중하고도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한데 최근 들어 저 여성분들이 재유와의 금쪽같은 시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만 벌써 두 번째다.

우주는 핸드폰을 보는 척하면서 불만스럽게 테이블 너머를 쏘아보았다. 주방에서 재유가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나올 때까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늘은 언제 끝나? 안 바빠?”

“이따 역삼동에서 미팅 하나 있어. 6시쯤이면 끝날 거니까 사람들이랑 저녁 먹고 희지 데리러 가면 돼.”

“그렇구나. 많이 먹어.”

재유가 물을 따라주며 예쁘게 웃어 주었다. 우주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마주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채소와 고기가 적당히 섞인 반찬에 찰진 오곡밥이었다.

“…….”

“…….”

밥상을 마주하고도 두 사람의 신경은 뒤쪽 테이블에 쏠려 있었다. 그동안엔 재유가 차려 준 점심을 재유가 지켜보는 동안에 맛있게 퍼먹는 게 하루의 낙이었는데.

“으음, 냄새 좋다. 희지 아빠, 꽈리고추 조렸어?”

“어머, 그러네? 돼지갈비 냄새도 나고. 좀 전에 밥 먹었는데 냄새 맡으니까 또 땡긴다.”

“아유, 내 말이. 저번에 희지 아빠가 싸 준 꼬시래기 무침도 얼마나 맛있던지, 그날 저녁에 식구들한테 내놨더니 바로 동났다니까? 내가 하면 왜 그런 맛이 안 나나 몰라?”

“이따 가실 때 싸 드릴게요. 그럴려고 좀 많이 했어요.”

밥을 먹으려고 할 때마다 꼭 저렇게 끼어들어서 반찬까지 얻어가곤 하니 곱게 보려야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어머, 정말? 그럼 우리야 고맙지.”

“친구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식사하세요.”

“네네, 그러세요. 맛있게 들어요.”

꼭 자기들이 사 준 밥인 양 생색도 자기들이 냈다. 우주는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 다시 밥을 밀어 넣었다. 와중에 꽈리고추 조림이 정말 맛있어서 밥은 잘만 들어갔다.

“희지 아빠, 잠깐 일루 와 봐. 하던 얘기 마저 해야지.”

결국에는 재유도 뺏어간다. 자기들끼리도 할 말이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 꼭 그 사이에 재유를 끼우려고 했다.

“잠깐만. 먹고 있어, 금방 올게.”

“으응… 다녀와.”

미련 넘치는 목소리와 가지 말라는 표정으로 간절하게 붙잡았는데, 야속한 재유는 등을 돌리고 건너 테이블로 가 버렸다. 식욕이 가시려 했다.

원, 투, 쓰리는 희지의 친구 어머님들이었다. 재유까지 끼워서 기어이 학부모 모임을 만든 그들은 이름까지 있었다.

동소문파. 무슨 조폭도 아니고 중학생 학부모 모임 이름이 그렇게 살벌할 일인가.

재유가 막 서울에 이사 왔을 때 삼선교 근처에 살았다는데, 인근 어린이집에 다니며 친분을 쌓은 ‘원’과의 인연으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원’은 동네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일명 ‘다희 맘’이었다. 희지와 다희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줄곧 함께 다녔다. 그래서 재유와 다희 맘의 역사도 오래되었다고 했다.

나머지 ‘투, 쓰리’는 초등학교 친구들의 학부모이다. 가정주부 겸 개인투자자인 ‘민서 맘’과 소기업에서 주 3일 회계 일을 봐 준다는 ‘하윤 맘’까지.

그들이 최근 들어 모임을 자주 가지는 이유는 아이들의 고등학교 진학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진학할 고등학교는 집 인근의 자사고인데 경쟁률이 0.8에도 미치지 않는, 다시 말해 절대 떨어질 일이 없는 인문계 학교였다. 그러니 그냥 모여서 수다 떨기 좋은 아지트로 ‘솔’을 점찍은 것뿐이었다.

친하려면 아빠들이랑 친할 것이지. 그럼 이렇게 브레이크 타임에 우르르 쳐들어올 일은 없을 텐데.

물론 재유는 아빠들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부부 동반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오기도 하고 이따금 아빠들과 따로 만나서 치맥을 먹기도 했다.

우주로서는 재유가 같은 입장의 학부모를 만나는 데 달리 유감은 없었다. 다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부가 뽀얘?”

“아휴, 희지 아빠가 언제는 안 뽀얬어? 아직도 솜털이 보송해 뵈는구만.”

“그러게 말이야. 저번에 같이 학부모설명회 갔더니 글쎄, 사람들이 내 막냇동생으로 보더라니까?”

이런 식으로 외모에 대한 노골적인 칭찬과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진득한 시선이 줄곧 거슬렸다.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기 센 맘들이 ‘솔’을 사랑방 삼은 것도 모자라 젊은 애 아빠 하나를 놓고 눈요기를 하며 부둥부둥하는 걸 두 눈 시퍼렇게 뜬 애인이 지켜봐야 하는 꼴이었다.

허. 예쁜 건 알아 가지고. 저분들만 없었으면 재유가 직접 싸 주는 고기쌈을 받아먹으면서 손도 잡고 뽀뽀도 좀 하고 그럴 텐데.

우주는 쌈도 싸지 않고 돼지갈비를 우걱우걱 집어 먹으며 혹시나 저분들이 재유의 솜털을 만지지 않을까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혼자 독식하던 재유를 악의 무리에게 억울하게 뺏긴 기분이었다.

“하아….”

밥을 다 먹었는데도 동소문파는 30분을 더 머물며 끝까지 재유를 놔주지 않았다. 우주도 맛있게 먹은 꽈리고추 조림까지 야무지게 챙겨갔다.

재유는 빈 테이블에서 커피잔을 치우다 은근하게 돌아보며 눈치를 봤다. 자기도 뭔가 찔리긴 했나 보다.

“아주… 사이들이 좋으시네? 너랑도 그렇고.”

“응, 뭐… 오래 알고 지낸 분들이니까. 많이 기다렸지?”

“…….”

그걸 말이라고. 커피 다 마셨으면 얼른들 가 보시라고 등 떠밀고 싶은 걸 겨우 참았는데. 우주는 말없이 재유의 손에서 쟁반을 뺏어 주방 싱크대에 담가 놓고 출입문으로 가서 문을 잠갔다.

“뭐야, 문은 왜 잠그는데….”

“지배인님 곧 오실 거 아냐. 잠깐이라도 뽀뽀 좀 할라 그런다.”

우주는 쭈뼛대는 재유의 손을 붙들고 복도 끝의 외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이미 인테리어를 했을 당시부터 찜해 둔 스팟 중 하나였다. 창가에서도 안 보이고 CCTV로도 잡히지 않는, 엉큼한 짓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우주는 모퉁이에 재유를 세워 손으로 벽을 짚어 가둬 놓고 입술부터 쪽 빨았다.

“아흣! 살살 좀 해. 아픈데….”

재유의 얄미운 투정에도 개의치 않고 다시 입술을 집어삼켰다. 빼앗긴 것을 되찾은 기념으로 아래턱을 쥐고 탐욕스럽게 입술을 핥고 혀를 빨았다.

“으응… 천천히….”

뒷머리가 모서리에 박힌 채 물러설 곳도 없는 재유를 더 바짝 몰아세우며 한참을 키스하자 울컥했던 속이 그나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분들 사이에 끼어서 동남아 여행을 가시겠다고? 나랑도 안 가 본 해외여행을?”

진학 얘기는 뒷전이고 애들이 졸업하기 전에 따뜻한 나라에서 콧바람 좀 쐬고 오자는 게 오늘 모임의 주된 얘기였다. 추궁하고 나니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가긴 어딜 가. 그냥 나온 말이지.”

재유는 키스의 여파로 붉어진 뺨과 거칠어진 숨으로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냥 나온 말이 아니던데? 민서 어머니가 당장이라도 예약할 기세던데?”

우주는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재유를 휙 돌려세웠다. 앞섶을 열고 팬티 속에 얌전히 모셔둔 꿀봉이를 약간의 힘을 실어 지긋하게 눌렀다. 재유와의 첫 해외여행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질투를 담아서.

“으읏, 어디까지 하려고…. 옷 버려, 우주야.”

“지금 옷이 문제야? 앞치마 좀 벗어 봐. 아니다, 그냥 입고 있어. 오랜만에 좀 비벼 보게.”

그새 반쯤 서 있는 제 페니스를 꺼내고 재유의 엉덩이를 까서 그 사이로 쏙 집어넣었다. 회음부의 살집과 고환의 탄성이 넉넉하게 내려앉았다. 귀두 끝에는 앞치마가 감질나게 스치며 은밀한 음심을 자극했다.

재유의 팬티와 바지를 한꺼번에 끄집어 내리자 무릎 언저리에 걸쳐졌다. 재유는 벽에 달라붙어 난감한 숨을 쉬면서도 무릎을 모아 성기를 조여 주었다.

“으응, 우주야… 나 안 갈 거라니까? 그분들… 괜히 장난으로 그러는 거야. 아흐으….”

우주는 재유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아 벌리고 움찔거리는 입구를 바라보며 골반을 치대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심히 꼴려서 당장이라도 쑤셔 넣고 싶었다. 우주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처음 해 본 것도 아닌데 유니폼 플레이는 언제라도 벌떡벌떡 서게 만든다.

“보아하니 데리고 다닐 짐꾼으로 이미 점찍은 것 같은데. 진짜 안 가?”

“으윽, 안… 갈 거야. 나도, 너랑 같이, 흐으응, 가는 거 아니면… 아흣…!”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재유의 신음이 애원 조로 바뀌었다. 우주는 봐주지 않고 한 손으론 꿀봉이를, 다른 손으론 가슴팍을 더듬어 꿀찌찌를 자극했다.

마음 같아서야 느긋하게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며 다양하게 즐기고 싶었지만, 곧 현준이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만약 현준이 잠긴 문을 달칵거리기라도 한다면 재유에게 오히려 역풍을 맞을지로 몰랐다.

다시금 동소문파가 원망스러워 빠드득 이를 갈며 속도를 끌어올렸다. 퍽퍽퍽퍽, 살끼리 부딪히는 추삽질 소음이 높아지고 컥컥대는 숨이 점점이 끊어질 때쯤, 단정하고 정갈한 앞치마 안쪽에 정액이 쏟아졌다.

“아흐흐… 내가 못 살아, 정말….”

재유는 벽에 짚은 팔에 얼굴을 묻고 푸념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주는 꿀봉이를 꽉 쥔 손으로 몇 번을 더 쳐올리고 꿀찌찌를 번갈아 비틀어 짰다. 재유는 이제 잔소리를 멈췄다.

두 손으로 바들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고개를 꺾어 키스를 요구하는 재유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고 나자 그제야 조금씩 웃음이 났다.

“진짜 안 갈 거지?”

“참내… 그게 그렇게 싫었어?”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응?”

“안 가.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보고 싶어서 하루도 못 참을걸.”

그제야 우주는 흐흐흐, 소리 내며 활짝 웃었다. 왼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바지춤을 대충 잡은 채 주방에서 키친타올과 물티슈를 갖고 나왔다. 두루마리 몇 줄을 뜯어 얼른 자기 것을 훔치고 다리를 굽히고 앉아 재유의 가랑이를 벌렸다. 재유는 민망한지 여전히 벽을 보고 있었다.

질척해진 앞치마를 벗기고 꼼꼼하게 다리 사이를 닦아 주었다. 다음으로 엉덩이 살집을 두 손으로 쥐고 활짝 벌리며 그 사이에 코를 짓이긴 채 한껏 들이마셨다. “다음에 제대로 보자.”고 속삭이며 혀끝으로 입구를 긁어 올리자 재유가 몸을 사선으로 틀고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우주는 또 좋다고 웃었다.

“그동안 나 많이 참은 거거든? 너도 안 갈 거면 그분들한테 제대로 말해 놔. 알았지?”

“흐으… 알았어. 걱정 마.”

동소문파 어머님들이 재유와 이성적으로 얽히거나 사심이 있을 거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집돌이에서 벗어나 인간관계의 저변을 넓히고 활동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걸 보면 흐뭇하기도 했다. 그저 둘만의 시간이 줄어들거나 자기 빼고 여행을 간다거나 하는 불상사만 없으면 상관없었다.

재유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새 앞치마를 가져다준 우주는 달아올랐을 제 뺨도 쓱쓱 문지르며 잠갔던 문을 열었다. 곧 주차장에 현준의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타이밍 하나는 자기가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

“어머, 오늘도 식사하러 오셨나 보네?”

“근데 어째? 희지 아빠 잠깐 나갔는데.”

“희지한테 급하게 줄 거 있다고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대요.”

“…….”

재유가 없는 재유의 식당에서 동소문파가 우주를 맞아 주었다.

우주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운전하느라 보지 못한 문자를 확인했다. 학교에 가져가야 할 프린트물을 놓고 가서 금방 전해 주고 온다는 내용이었다.

흐음… 그럼 이곳에 어머님들과 나뿐이란 말이지.

“재유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얼굴도 여러 번 뵀는데 정식으로 인사드려도 될까요?”

우주는 4~50대 임원급에게 주로 써먹는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 테이블로 다가갔다.

“아유, 그럼요. 우리도 희지 아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동창이라면서요?”

“예, 맞습니다. 염우주라고 합니다.”

“사이가 진짜 좋은가 보네. 이렇게 밥 먹으러도 자주 오고.”

“희지 아빠 친구라 그런가? 이쪽도 만만찮게 잘생겼어.”

“말해 뭐 해? 난 처음 봤을 때 배우인 줄 알았잖아.”

“팔다리 긴 것 좀 봐, 눈썹은 또 얼마나 진해? 우리 하윤 아빠는 머리도 벗겨질라 그러는데. 내가 여기 올 때마다 호강한다, 호강해.”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우주를 자리에 앉힌 어머님들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찬찬히 뜯어보며 외모에 대한 품평을 서슴지 않았다.

“그나저나 밥은 어째? 이거라도 먹을래요? 허기나 달래게.”

“아, 예. 잘 먹겠습니다.”

재유를 빼고 제일 막내라는 하윤 맘이 가방에서 바나나와 고구마를 테이블에 꺼내 놓았다. 각자 집에서 가져온 간식거리들을 펼쳐 놓고 먹는 것도 흔한 일이라 우주는 넙죽 받아 바나나 껍질을 까서 베어 물었다.

“그런데 모임이 오래되진 않은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재유랑 친하게 되신 거예요? 그 녀석이 낯도 가리고 내성적이라 어머님들이랑 같이 있는 거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좀 놀랐거든요.”

따지고 보면 동소문파 멤버들은 자기와 헤어졌던 시기의 재유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준을 통해 직장에서의 재유의 모습은 얼추 그려진 상태였으나, 학부모로서의 모습은 이 여성분들이 더 잘 알 터였다.

또한 재유의 주변 인물들이니 연인으로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자세하게 알아야 했다. 얘기해보고 별로면 만나지 말라고 종용하고, 좋은 사람들이면 당연히 자기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건, 탐색전이다. 다년간의 사업 경험으로 예민하게 길러온 ‘사람 보는 눈’을 제대로 발휘할 때였다.

“난 그냥 어린이집 등하원 할 때 잠깐씩 안면 트면서 알게 됐죠. 베이비시터 아는 사람 있냐고 묻길래 내가 구해 주면서 친해졌어요. 희지 아빠가 일이 늦게 끝나잖아. 좀 커서는 갑자기 퇴근이 늦어지거나 할 때 희지 데려다 밥 먹이고 재워 주기도 하고. 우리 다희랑 엄청 친해요. 다희 동생도 희지 좋아하고. 나중에 대학도 같은 데로 갈 거라던데? 성적도 엇비슷하거든, 걔네들이.”

제일 오래 알고 지낸 다희 맘은 재유와의 에피소드가 많았다. 희지가 네 살 적부터 친했다 하니 10년도 넘은 인연이었다. 우주가 학원 셔틀을 해 주기 전까지 종종 희지를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준 것도 다희 맘이라고 했다.

우주는 “아, 그러셨구나.”, “정말 친절하시네요.”를 추임새로 덧붙이며 어느새 동소문파의 수다에 녹아들었다. 그러다 다음 말이 나왔을 때 귀가 쫑긋거리고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애들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엄마들 중에 말 많고 이간질 잘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그 엄마가 한번은 희지 아빠한테 그렇게 달라붙어서 재혼 생각 없냐고, 자기가 참한 여자 소개시켜 준다고 어찌나 연락하고 떼를 써 대는지… 희지 아빠가 아주 난처했다고, 그때.”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뭘 어떡해요? 평소에 사람이 좋으면 모를까, 순진한 희지 아빠한테 질 나쁜 여자 소개시키면 어쩌라고. 아니면 그 엄마가 작업해 보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암튼 내가 희지 아빠 핸드폰으로 번호 차단시키고 단톡방에서도 내보냈어.”

우주는 속으로 ‘다희 어머님, 나이스!’를 외쳤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라지만, ‘재유의 재혼’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어? 나도 그런 적 있었는데?”

“네? 뭔데요?”

이번엔 민서 맘이 관련 썰을 풀었다.

“우리 아파트에 여대생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 학생이 희지 아빠가 유부남인 줄 모르고 혼자 좋아했었나 봐요. 빵집 사거리 있죠? 그 앞에서 희지 아빠가 쩔쩔매면서 그 여대생한테 번호 따이고 있더라니까?”

이런 칠칠치 못한 자식…. 우주는 뒷골이 당겨서 몰래 숨을 나눠 뱉으며 목을 이쪽저쪽으로 꺾었다. 테이블 아래 손에 쥔 바나나는 처참하게 뭉그러졌다.

“어머, 진짜? 하긴. 희지 아빠가 좀 동안이야? 그럴 만도 하지.”

“동네에서도 인기 짱이긴 해. 세탁소 사장님이랑 마트 캐셔 보는 아주머니도 예뻐하잖아.”

아무래도 단속할 일이 늘어난 것 같았다. 재유가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만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남들한테 내놓고 다니다가 열불 날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번호… 줬대요?”

“아아뇨? 내가 가서 슬쩍 아는 척해 줬지. 희지 아빠 어디 가는 길이냐고. 그랬더니 그 학생이 놀래 가지고 얼른 사과하고 내빼더라고요.”

우주는 이번에도 속으로 민서 어머님을 향해 흡족하게 박수를 쳤다.

알고 보니 동소문파는 재유와 희지를 지켜 주는 맘벤저스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윤 맘은 회계와 부동산에 밝은지라 4년 전 재유에게 집을 사라며 권유했던 사람이었다. 남는 시간에 물건도 추천해 주고 문외한이었던 재유에게 대출이며 세금이며 꼼꼼하게 챙겨 주기도 했단다.

당시에는 무리해서 샀던 집이 지금은 재유의 가장 큰 자산이 되어 있었다. 식당을 차릴 꿈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재유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이 달라붙나 보다. 우주는 지금껏 들은 얘기만으로 어머님들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어머님들, 저보다 한참 연배시고 저도 재유 친군데 말씀 편하게 하십쇼.”

“어머, 그럴까 그럼?”

이미 절반은 말이 짧았던 어머님들은 반색을 하며 곧바로 반말을 텄다. 우주는 넉살 좋게 웃고는 예예, 하며 받아 주었다.

“근데… 제가 누님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아유, 그럼 우리야 좋지. 희지 아빠처럼 다희 어머니, 민서 어머니, 그러기도 애매하잖아?”

“맞습니다. 앞으로 잘 모실 테니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가게는 아니지만 편하게 자주자주 놀러 오세요.”

“그래애? 우리도 이런 꽃돌이들 자주 보고 좋지 뭐.”

이제는 누님들의 능청맞은 호칭이나 오글거리는 멘트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우주는 마치 제 가게인 양 커피도 리필해 주고 과자도 나눠 먹으며 누님들에게 한창 아양을 떨었다.

그때 식당 안으로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우주의 업무비서였다. 오늘 중으로 검토할 서류가 있어서 전해 주러 온 참이었다. 서류만 얼른 받고 돌려보낸 뒤 다시 자리에 앉자 누님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나저나 우리 동생은 무슨 일 해?”

“그러게? 아까 그 사람이 대표님이라 그런 것 같은데.”

“젊은 나이에 대표도 하고 멋지네. 아직 마흔도 안 됐는데.”

“아, 저….”

우주는 대답 대신 명함을 꺼내 능숙하게 한 장씩 돌렸다. 집에서 소액으로 주식 투자를 한다는 민서 맘이 회사 이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머머머, 유제이디자인? 여기 유명한 데 아냐? 우리 둘째도 여기서 만든 굿즈랑 포토 카드 몇 개 갖고 있던데?”

“아니 그럼, 디자이너였어?”

“어쩐지. 사람이 되게 세련되고 있어 보이더라니.”

“대표님도 몰라뵙고 우리가 너무 주책이었네, 그치?”

우주는 손을 들어 휘젓고는 에이, 아니에요, 하며 누님들의 호들갑에 겸손을 떨었다.

“디자이너는 아니고 경영 위주로 하고 있어요.”

“대단하네, 젊은 사람이.”

민서 맘이 별안간 손뼉을 짝 치더니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나중에 우리 애들 회사 구경 한번 시켜 주면 안 돼? 견학 프로그램 같은 거 있나?”

“저야 언제든지 환영이죠. 누님들도 시간 되시면 애들이랑 같이 놀러 오세요.”

“어머, 정말? 잘됐다.”

때마침 재유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뛰어온 모양인지 볼이 빨갛고 점퍼에 찬바람 기운이 잔뜩 묻어났다. 그는 학부모 모임에 우주가 끼어 있는 이 상황에 설명이 필요한 얼굴이었다.

“왔어? 우리끼리 수다 좀 떨고 있었어.”

팔을 끌어다 자리에 앉히자 재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예쁘고 귀여워서 재유를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유한테 들었는데, 이번 겨울에 태국으로 여행 계획하신다면서요?”

“응, 그랬지. 근데 희지 아빤 안 간대서 그냥 부부 동반으로 갈까 생각 중이야.”

“부부 동반이요? 누님들.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재유도 같이요.”

재유가 이번엔 몸까지 완전히 틀어서 추궁의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반대하던 여행 얘기며 누님이란 호칭까지, 놓친 게 많은 그는 선뜻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우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동소문파에 숟가락 얹어서 여행 좀 가 보려고. 어때? 괜찮지?”

“아유, 괜찮고말고. 이참에 애들 떼놓고 어른들끼리 찐하게 놀아 보자고.”

“그래. 애들 고등학교 들어가면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재유가 얼빠져 있는 사이 여행 계획은 일사천리도 진행되어 바로 다음 날 스케줄 합의를 보고 예약까지 마쳤다. 푸껫에 3박 5일로 다녀오는 단체 패키지여행이었다.

첫 해외여행을 둘이서만 가는 게 아니라 다소 아쉬움은 남았지만, 우주는 형님들과 누님들을 보필하며 성실하게 짐꾼 노릇을 했다.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먹으라면 먹고, 사진 찍으라면 찍고, 모이라는 시간에 재깍재깍 모이며 보낸 3박 5일은 퍽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밤중에는 둘만의 시간으로 충분하게 서로를 채우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

2018년 1월.

퇴근길 엘리베이터에 오른 재유는 마트에서 산 간식거리 봉지를 들고 있었다. 요즘 희지가 잘 먹는 그릭요거트와 피자 호빵, 우주가 좋아하는 뻥튀기와 바나나우유였다. 자기 몫으로는 초코파이와 검은콩 두유도 샀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씨라 복도식 아파트로 칼바람이 불었다. 재유는 종종거리며 달려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빠 왔어?”

“재유야, 이제 와?”

우주와 희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태블릿으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보나 싶어 고개를 쭉 내밀었더니 우주가 전원을 꺼 버려 태블릿이 검은 화면으로 변해 버렸다.

“응. 근데 뭐 보고 있었어?”

“사진들 좀 봤어.”

“무슨 사진?”

“그냥… 풍경 사진 같은 거?”

“아….”

분명 쇼핑몰 사이트인 것 같았는데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우주가 수상쩍었다. 두 사람은 보던 것에는 관심을 끈 건지 재유의 손에서 봉지를 낚아채 가더니 각자 먹을 간식들을 펼쳐 놓고 TV를 켰다.

재유는 점퍼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조명 같은 거 보고 있지 않았나? 중얼거리며 문밖을 응시했다.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요즘 희지가 방학이어서 그런지 우주는 희지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브레이크 타임에 종종 둘이서 함께 밥을 먹으러 오기도 했다. 한번은 재유가 밥 다 먹고 요 앞 새로 생긴 카페에 같이 가 보자 했더니 자기네들끼리 갈 데가 있다며 거절했었다.

식당 휴무일에 학원에 데리러 갔을 때는 우주가 전화로 희지를 데리고 갔다며 먼저 들어가라 한 적도 있고, 집 근처 카페에서 둘이 머리 맞대고 종이에 낙서 같은 걸 하는 것도 목격한 적이 있다.

편 먹고 따돌리는 거야 뭐야. 소외감 생기게. 의심쩍은 기분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우주가 방에 들어와 있었다.

“TV 보는 거 아니었어?”

어쩐지 서운해서 목소리가 퉁명했다. 머리를 털어 말리며 괜히 눈도 피했다.

“물소리 멎는 거 듣고 바로 들어왔지. 벌써 옷 다 입었어?”

우주가 히죽히죽 웃더니 팬티 속으로 거리낌 없이 손을 집어넣어 차지게 주물러댔다. 거실에 희지가 있는데도 재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만지려면 만져라, 하는 심정으로 내버려 두고 커다란 덩치를 요리조리 피해 얼굴에 스킨을 덜어 발랐다.

우주는 선을 몹시 잘 지키는 애였다. 특히 희지와 있을 땐 더 그랬다. 둘만 있을 땐 온갖 음담패설과 실없는 잡소리들을 늘어놓다가도 희지만 왔다 하면 안면 싹 바꾸고 ‘털털하고 껄렁한 불알친구 컨셉’의 말투와 행동,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다가도 능구렁이처럼 틈이 나기만 하면 금세 표정을 허물고 뽀뽀를 하거나 몸을 만져 댔다. 신기방기한 능력이었다. 처음엔 재유도 적응이 안 됐는데 이젠 알아서 하려니,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얼른 머리 말리고 나와. 희지가 호빵 데우고 있어.”

“응….”

스킨을 바른 재유의 얼굴에 침을 묻히며 급하게 쪽쪽거리고 나서야 우주는 방을 나갔다. 재유는 이럴 때마다 피식 웃었다. 오해받지 않을 만한 타이밍도 알아서 계산해서 스킨십을 멈추는 것도 곧 잘했다.

거실로 나가니 두 사람은 이미 TV에 열중한 상태였다. 래퍼를 선발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재유도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아 소파 방석에 등을 기대고 두유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빨았다.

희지와 우주는 서로 응원하는 래퍼가 달라서 가끔 말다툼을 했다. 저 래퍼는 메시지가 너무 심오해서 별로라고 하니 희지는 잘생기고 귀여워서 괜찮다고 응수했다. 저게 무슨 잘생긴 얼굴이냐고, 보는 눈이 그렇게 낮아서야 제대로 된 남친이나 사귀겠냐고 우주가 열을 냈다.

래퍼에서 시작된 말다툼이 요상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나중에 남친 생기기 전에 괜찮은 놈인지 허락받고 사귀라는 우주의 말에 희지가 그럼 나 시집갈 때도 그럴 거냐고 따져 댔다.

“너 시집 안 가고 아빠랑 평생 산다며…?”

재유가 한마디 끼어들자 희지는 난생 첨 듣는 얘기라는 듯 쌩을 깠다. 허허, 이 아빠 좀 보게, 하는 표정과 여고생답지 않은 걸걸한 웃음으로 호빵 껍질도 깠다.

“그럼 나더러 평생 두 홀애비들 모시고 살라고? 아 됐습니다요. 남친이고 결혼이고 알아서 할 테니까 뻥튀기나 드세요, 네?”

재유는 기가 막혀서 상처받은 척 오버를 하며 우주와 협동 작전을 펼쳤다.

“아빠 빼곤 다 도둑놈이야. 몰라? 너 어릴 때 아빠랑 결혼한다고 했던 거 정말 기억 안 나?”

“맞어. 삼촌도 빼고 다 도둑놈이야. 희지 너 사귀는 사람 삼촌이 먼저 만나 보고 이놈이면 됐다, 할 때까지 결혼은 안 돼.”

희지는 두 30대 후반의 아저씨들에게 절대 기죽지 않았다. 피자 호빵을 불량스럽게 씹으며 아빠와 삼촌을 향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아빠는 그렇게 착해서 스무 살에 날 낳았어? 그게 도둑이 아니야?”

“…….”

“삼촌은 결혼했을 때 신부 보여 주면서 나한테 허락받고 결혼했어요?”

“…….”

스무 살 아니고 스물한 살이었는데…. 재유는 들리지도 않게 구시렁거리고는 이제 고2가 되는 딸을 흘겨보았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지는 자기가 응원하는 래퍼가 결국 파이널에 진출하자 “아싸!”를 외치며 깨춤을 췄다.

희지가 오두방정을 떨며 환호하는 사이 우주가 이쪽을 건너다보며 ‘네 딸, 여우야 여우.’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재유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만만치 않겠다’고 동의했다. 이럴 땐 재유와 우주가 한편이었다.

“삼촌, 오늘 자고 갈 거죠?”

재유가 간식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가는데 희지가 기지개를 켜면서 물었다. 프로그램이 끝나니 자정이 넘은 새벽이었다. 우주는 아직 바닥에 앉은 채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멍하게 돌리고 있었다.

“응. 왜?”

“내일 출근하는 길에 저 신사역에서 좀 태워 주세요.”

“그렇게 일찍 무슨 일인데?”

“거기 만화 카페 새로 생긴 데가 엄청 예쁘고 깔끔하다고 해서 애들이랑 가 보려고요.”

“그래. 내일 9시에 출발할 건데 괜찮아?”

“네, 좋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희지는 주방으로 쏙 고개를 내밀고 “아빠 잘자.”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우주는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냉큼 TV를 끄고 재유의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페이크용 이부자리를 폈다. 재유도 설거지를 마치고 딸아이 방의 기색을 살피며 방으로 들어왔다.

우주가 처음 이 집을 들락거릴 당시에 그는 거실 소파에서 잤는데(물론 그것도 페이크였지만), 희지가 밤중 화장실 이용이 불편할 거란 핑계로 당당하게 방으로 쳐들어왔다.

재유는 벌써 침대에 쏙 들어가 이불을 들추고 있는 우주를 보며 바닥의 이부자리를 귀찮은 듯 슥슥 밀고 옆에 누웠다. 아우 따땃하다, 우주가 제법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며 이불로 폭 감싸 주었다. 재유도 자연스럽게 팔을 둘러 뜨거운 몸을 껴안고 편하게 자리를 고쳐 잡았다.

우주는 예고한 대로 일주일에 3일에서 7일은 이 집에서 먹고 자고 출퇴근을 했다. 집에 제법 그의 물건도 쌓여 있었다. 옷장에는 빽빽하게 옷들이 걸려 있었고, 남는 방 하나에 책상을 더 놓고 필요한 서류들을 쌓아 놓아 필요할 때마다 쏙쏙 빼 갔다.

처음엔 좁은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기분을 느낄까 봐 미안하기도 하고 신경 쓰이기도 했는데, 적응되니 이제 그가 안 오는 날은 섭섭할 지경이었다. 희지도 마찬가지인지 어느새 우주가 집에 없으면 ‘외박하는 철없는 이혼남 삼촌’ 취급을 했다.

“잘 자, 자기야.”

죽부인처럼 꼭 껴안고 여기저기를 조물대던 우주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전에 감돌았다. 재유도 푹신한 입술에 조용히 굿나잇 키스를 하고 하루 치 피곤을 그의 품 안에서 털어 버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너도 잘 자. 꿈나라에서 또 만나.

재유는 희지가 아기였을 때 해 줬던 말을 우주에게 해 줬다. 꼭 껴안고 있는데도 꿈에서 또 보고 싶었다.

***

재유는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퇴근한 현준을 보내고도 한참을 식당에 남아 이것저것 정리를 했다. 남은 식자재에 날짜를 표기해 냉장고에 넣어 둔 뒤 주방 물청소를 하고, 인터넷으로 발주를 넣고, 직접 사와야 할 물건들의 리스트를 꼼꼼히 확인했다.

식당은 홍보나 마케팅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입소문을 타서 제법 예약 손님들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간간이 블로그와 SNS에 사진과 후기가 올라오기도 했다. 이제 지인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자력으로 꾸려 나갈 자신감이 생기자 하루하루 일하는 게 즐거웠고 돈을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지막으로 가스와 전기를 꼼꼼하게 확인한 재유는 출입문을 잠그고 쌀쌀한 날씨에 몸을 부르르 떨며 돌아섰다. 주차장에 우주가 우뚝 서 있었다.

“어? 왔으면 들어오지. 춥게.”

타박을 하면서도 입꼬리는 씰룩씰룩 올라갔다. 자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 멋지고 근사해서 절로 웃음이 났다. 터틀넥에 커다란 흰색 셔츠를 겹쳐 입고 기다란 코트를 단정하게 여민 모습이 새삼 두근거리고 설렜다. 이런 예쁜 녀석을 20대 시절에 실컷 봐 두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오늘 희지 안 데리러 가도 된댔지?”

“응. 약국 누님이 태워다 주신대.”

어느새 희지 친구 부모님들과 호형호제하는 우주는 아빠인 자기보다도 아이의 스케줄을 훤히 꿰고 있었다.

재유는 앞으로 바짝 다가가 우주를 살짝 올려다보며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우주도 기분이 좋은지 서글서글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나 데리러 온 거야? 너 오늘 좀 멋있다. 프러포즈라도 하나 봐?”

우주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점퍼 주머니에 있던 재유의 손을 찾아 쥐고 자기 차 조수석으로 에스코트를 했다. 재유는 인근의 공용주차장에 세워 둔 자신의 SUV를 미련 없이 내버려 두고 그를 따라 검은색 세단에 올랐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드라이브 좀 하자고.”

허리를 굽혀 벨트를 채워 주며 뺨에 입술을 찍은 그가 조수석 문을 닫고 보닛을 빙 돌았다.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가 꼭 머플러처럼 자연스러운 멋이 있었다. 재유는 헤드라이트에 비친 찰나의 우주의 모습을 지긋하게 눈에 담았다.

운전석에 오른 그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자 재유는 자연스럽게 제 손을 겹쳐 쥐었다. 비슷한 일상 속 평범한 퇴근길이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차 안의 온도는 알맞게 따뜻했고 엉덩이도 따끈했으며 잡은 손의 체온은 뜨거웠다.

느리고 감미로운 발라드가 연주곡으로 흐르는 차는 북악산 드라이브 코스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천천히 달리자 어둑한 교목 숲 사이로 드문드문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최근 들어 팔각정에 진입하려는 차들이 많아져 그곳을 지날 때만 잠시 멈칫하고, 차는 막힘없이 스카이웨이를 따라 미끄러졌다.

차 안에서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재유의 식당과 우주의 회사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희지의 옷을 사기 위해 쇼핑을 약속하고, 관심 있는 영화나 드라마 얘기도 나왔다. 별거 아닌 말들도 차 안에서 단둘이 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 잠시 대화가 끊기면 재유는 못 부르는 솜씨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했다. 늦가을까지만 해도 줄지어 달리는 자전거 라이더들이나 굉음을 내며 앞질러 가는 삐까뻔쩍한 바이크들에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었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라 도로는 한적하기만 했다.

인왕산까지 한 바퀴 돌고 나서 차는 다시 도심으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빌딩의 불빛도, 나무들 사이의 가로등도, 도로 위의 신호등도 반짝반짝 예쁘기만 했다. 어딘가에 떠 있을 달과 별이 내는 빛처럼 소담하고 정다운 기분을 들게 하는 풍경이었다.

매일 보는 익숙한 도시인데도 우주와의 드라이브는 마음속 어딘가를 간질이는 설렘이 있었다. 야경을 담은 그의 얼굴이 알록달록 예뻐서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차는 재유가 사는 동네로 진입했다. 큰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나오는 대단지 아파트가 집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차는 좌회전 차선으로 빠지지 않고 그대로 직진을 했다.

“집으로 바로 안 가? 드라이브 더 하다 가게?”

“그냥. 이대로 가기 아쉬우니까 동네 한 바퀴 더 돌자고.”

희지가 다니는 고등학교 방향이었다. 가끔 아침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학원도 이 부근에 있어서 지난 1년 동안은 자주 가 봤던 곳이었다. 자잘한 상가들과 주택가가 조화롭게 나뉘어 있고 유해시설도 거의 없어서 학교들이 밀집한 곳이기도 했다.

“어? 저기 공사 거의 다 끝났나 보네? 예쁘다.”

차가 골목으로 들어서자 단독주택들이 밀집한 구역이 나왔다. 산길로 이어지는 언덕 초입에 눈에 띄던 집터가 한동안 공사 중이더니 제법 그럴듯한 외관의 형태를 갖춘 모양새였다. 그전에도 예뻤던 세모 지붕 집이어서 그걸 허물고 새집을 짓는 게 아깝다고 생각한 터라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음. 그러네?”

우주가 평이하게 답하더니 그 집과 담벼락을 맞대고 차 속도를 줄였다. 재유는 고개를 꺾어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담장 안을 기웃거렸다. 새로 지은 집도 연붉은 벽돌로 지어져 너무 거창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정감 있어 보였다.

“…재유야. 이 집 어때? 좋아? 여기 살면 어떨 것 같아?”

“어떻긴. 산책하기도 좋고 도로도 깨끗하잖아. 언덕이 높지도 않고 버스도 바로 탈 수 있으니까. 여기 살면 편하긴 할 거야. 비싸서 그렇지. 우리 동네에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은근 알부자라 그러던데?”

속도를 완전히 줄이고 주차 모드로 차를 세운 우주는 핸들에 두 손을 올리고 몸을 기울인 채 고개만 돌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은은하게 미소를 띤 얼굴이 어쩐지 짓궂어 보였다.

“잠깐 들어가서 구경해 볼래?”

“뭐? 남의 집을 왜? 그러다 신고당할라.”

이 나이에 일탈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다짜고짜 남의 집은 왜 들어가자는 거지? 뜬금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자니 우주가 싱글싱글 웃으며 입술을 샐쭉였다.

“재유 씨. 잘못했어요. 미리 사과할게요.”

말은 용서를 구한다면서 얼굴은 익살스럽게 우는 흉내를 냈다.

“…뭔 소리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재유가 “뭐 잘못했는데?”, 하며 미간을 좁혔다.

“어쨌든 난 너한테 미리 다 말하고 사과까지 한 거다?”

“뭔데. 응? 뭐가?”

우주는 벨트를 풀어 주더니 얼른 내리라며 고갯짓을 했다.

“들어가자. 우리 집.”

그러고는 먼저 차에서 홀랑 내려 버렸다. 이번에도 우주는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재유는 그의 여유로운 웃음과 흥겨운 발재간을 멍청하게 바라보다 허, 기가 막힌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 문을 열어 준 그는 익숙하게 대문에 달린 도어락 터치패드를 눌렀다. 그런 우주의 등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며 재유도 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넓지도 좁지도 않은 앞마당이 나왔다. 조경은 아직인 건지 유목 몇 그루만 심겨 있는 흙바닥이었다.

우주는 씨익 웃으며 재유의 손을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재유는 손을 잡아당겨 버티며 그의 급발진을 멈춰 세웠다.

“잠깐만. 우리 집이라니… 무슨 소리야?”

“우리 같이 살기로 한 거, 잊었어? 여기로 이사하자고.”

“갑자기 이사를 어떻게… 그게 무슨 말이야.”

물론 잊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같이 살자는 말은 재유 본인이 먼저 했었다. 희지가 대학에 간 다음에.

우주는 4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며 고등학교 들어가면 같이 살자고 졸랐었다. 그런데 약속이고 자시고 이미 일주일에 절반 이상을 한집에서 자는데 거의 살림 합친 거나 다름없지 않나? 희지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라 우주도 미련을 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들어가서 설명할게. 일단 집 구경부터 하자. 응?”

당최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심정으로 외관을 둘러보는 재유를 이번엔 어깨를 붙잡은 채 집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신발장과 선반으로 이뤄진 넓은 현관에 들어서자 자동으로 중문이 열렸다. 외부와 달리 집 안 인테리어는 이미 완성되어 청소까지 마친 듯했다. 우주가 먼저 들어가 불을 켜자 입구 오른편에 2층으로 이어진 계단과 복도가 나왔고 정면은 너른 거실과 주방이 이어졌다. 우주는 얼떨떨한 재유를 이끌고 2층으로 먼저 올라갔다.

“여기는 희지 방이고, 여기는 패밀리룸. 그리고 여기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고기도 구워 먹고. 어때? 예쁘겠지? …그리고 여긴 네 취미 방. 여기서 너 하고 싶은 거, 만들고 싶은 거 하면서 시간 보내기 좋을 거야.”

“…….”

좁은 복도를 따라 이어진 2층은 방이 네 개였다. 밖에서 봤을 때 그리 커 보이진 않았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오밀조밀 알찬 구조였다.

처음엔 남의 집을 허락도 없이 도둑 구경하는 심정이었다가 우주의 설명을 들으며 이모저모 살펴보니 점차 재유도 집 안 내부에 관심이 생겨났다. 그래도 찜찜한 건 여전했다.

“이거… 희지도 알고 있어?”

공용 욕실을 보여 주며 욕조를 자랑하던 우주를 돌려세웠다. 이것저것 종알대는 얼굴이 아주 신이 나셨다. 우주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덧입힌 채 재유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2층은 거의 희지 의견을 반영해서 설계한 건데?”

“하… 이것들이 진짜. 그래서 그동안 나 따 시킨 거야?”

“따는 무슨? 서프라이즈라고 보통 하지.”

재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우주를 불만스럽게 올려다봤다.

“너희들끼리 쑥떡쑥떡 하고 나 몰래 약속 만들고 그랬잖아. 내가 반대할까 봐 그랬던 거야?”

“에이, 서프라이즈라니까? 아직 덜 끝났어. 1층 내려가 보자. 응?”

두 손으로 양팔을 붙잡은 우주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커다란 덩치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였다.

서프라이즈로 계획한 거라면 대성공이었다. 재유는 정말 깜짝 놀랐다. 무척 당황했고, 다소 섭섭하기도 했다. 반면 고마움과 미안함도 있었다.

같이 살자고 약속만 했지, 재유는 그동안 한 게 없었다. 우주는 제 큰 집을 방치하다시피 하며 재유 부녀와 함께 살기 위해 좁고 낡은 아파트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가 하루빨리 같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서인지 그동안 좁은 방과 욕실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게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한데 희지의 학교 때문에 동네가 먼 우주의 집으로 합칠 수도 없었고, 우주를 아예 들어와 살라고 하기에도 집이 좁았다. 그렇게 현실적인 문제들로 같이 사는 계획을 차일피일 미뤄 왔다.

그나마 최근 들어 희지가 대학 가는 시기에 맞춰 주택 자금으로 따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우주는 어느새 희지까지 설득해 동네에 이렇게 멋진 집을 지어 떡하니 내놨다. 당연히 놀랍고 기뻤으며 미안하고 고마웠다.

“넌 진짜… 멋지고 폼나는 건 죄 네가 해야 직성이 풀리지?”

재유는 한껏 위로 솟은 우주의 광대를 손으로 살짝 꼬집으며 잡아당겼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 건지 통통하게 뭉쳐진 광댓살이 번번이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튕겨 나갔다. 그 감촉이 재밌어서 몇 번 더 잡아 꼬집었다. 우주는 으흐흐 웃으며 허리로 손을 내려 재유를 바짝 끌어당겼다.

“이제 주소지 좀 합치자고. 불만 없지?”

“…너랑 희지가 계획하고 찬성한 일인데… 내가 무슨 수로 반대를 해.”

“그럴 줄 알았어.”

한참을 입을 헤벌리고 있어서 저러다 잇몸이 마르는 게 아닌가 싶었던 우주의 입술이 작게 오므라들며 재유의 입술에 꾸욱 뽀뽀를 했다.

“그럼 이제 1층 구경하러 가 보자.”

그렇게 다시 우주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 1층은 우주의 방과 재유의 방, 서재와 공용 욕실이 있었다. 자기 방을 소개하던 우주는 드레스룸에 들어서자 몸을 숙이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네 방 드레스룸이랑 이어지게 해 놨어. 이건 내 아이디어야. 어때, 끝내주지?”

드레스룸 구석에 작은 출입문을 열자 과연 재유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안쪽으로 둘이 함께 쓸 수 있는 욕실도 별도로 있었다.

우주는 두 사람이 표면적으로 ‘친구’이기에 방은 따로 만들었다고 했다. 희지와 같이 사는지라 한 방 쓰는 것도 힘드니 드레스룸을 연결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비밀통로를 만든 셈이다.

“나중에 희지 대학 가면 네 방으로 옮길 거야. 그래서 네 방을 제일 크게 만들었어.”

나중을 생각해 큰 그림까지 그려 둔 설계에 재유는 혀를 내둘렀다. 다시 쭈욱 찢어진 그의 입꼬리에 정말 잇몸이 마르려 했다.

예쁘고 깔끔한 집이었다. 이제껏 살았던 수많은 셋방과 낡은 집들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집이었다.

결혼을 약속한 예비부부가 함께 살 집을 구경할 때 이런 기분이 들까? 재유는 생전 느껴 본 적 없던 새로운 설렘에 마음이 점점 부풀었다. 이런 집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해 주는 그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재유는 아이처럼 해맑게 들뜬 우주의 팔짱을 단단히 끼고 이미 구경을 마친 집을 보고 또 봤다. 머릿속은 벌써 어떤 가구를 채울지, 벽은 어떻게 꾸밀지, 커튼은 무슨 색이 어울릴지 바쁘게 돌아갔다.

“집 너무 좋다…. 빨리 이사하고 싶어.”

주방에 서성이며 괜히 창문도 한번 열어 보고 물도 틀어 보던 재유에게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어느 틈에 들은 건지 등 뒤에 우주가 바짝 다가와 허리를 껴안았다. 어깨에 턱을 걸친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음 달에 바로 옮기자. 어때?”

달콤하고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재유는 우주의 팔에 손을 덮으며 ‘그러자’고 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기분이 좋더라니. 유달리 그가 멋있어 보이더라니.

우주는 기분 좋은 하루의 끝을 황홀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 본 그의 얼굴처럼 재유도 한껏 웃고 있었다. 이어진 키스는 무척이나 길고 감미로웠다.

***

“자, 한 장씩 넘기면서 성함 옆에 도장 찍으시고 계약서 겹쳐진 곳에도 찍으시면 됩니다.”

안경 낀 중년의 중개사가 손가락으로 짚는 데마다 재유는 긴장된 마음으로 신중하게 도장을 찍었다. 맞은편에서 함께 도장을 찍는 젊은 남자도 진지한 얼굴이었다.

“자, 다 됐습니다. 그럼 14일에 이사하시고 이 계좌로 잔금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중개사는 임차인에게 계약금 영수증을 내밀며 말했다. 재유의 아파트로 이사 올 예정인 세입자는 영수증을 꼼꼼하게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이사하는 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무사히 전세 계약을 마친 재유는 긴장이 풀리자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난생처음으로 임대인의 입장이 되어 제 명의의 집에 세입자를 들인 소감은 복잡미묘하고 얼떨떨했다.

자기에겐 평생 일어나지 않을 일이거나, 되더라도 늘그막에나 가능하려니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집주인으로서 도장을 찍었다. 옆에 앉은 우주가 어깨를 툭 밀며 사근사근한 웃음을 보였다. 재유는 옆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희지를 포함한 세 식구는 지난달에 새집으로 이사를 마쳤다. 상의도 없이 공동명의로 한 걸 뒤늦게 알고 재유는 남은 아파트를 처분해 우주에게 집값으로 주려 했다. 그 과정에서 다소 실랑이가 있었다. 우주는 세를 줬다가 나중에 희지한테 물려주라며 집을 파는 걸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외동인 희지가 언젠가는 피붙이 없이 혼자 남을 텐데,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고 살려면 제 몫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건 아빠인 재유가 물려주는 재산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희지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집이면 더 좋을 거라고 한참을 설득했다. 결국 설득에 넘어간 재유가 세입자를 찾은 지 보름여 만에 전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계약을 마치고 서류를 챙긴 재유는 상대와 간단하게 악수를 나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5평 정도 되는 부동산 사무실의 좁은 공간에 접이식 철제의자를 끄는 소리가 제법 시끄럽게 울렸다.

그쪽도 두 사람이 함께 나왔다. 20대 후반이라는 남자 두 명이었다.

남자 두 명이 계약을 원한다고 부동산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는 집을 험하게 쓰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다. 자기도 처음 마련한 내 집이었으니 이왕이면 깨끗하게 잘 관리하면서 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고는 어느 정도 불안을 덜 수 있었다.

진중하고 무게감 있어 보이는 키가 큰 청년과 발랄하고 유쾌해 보이는 미남인 청년은 오래된 아파트인데도 워낙 관리가 잘되고 예쁘게 잘 꾸며 놓아 단번에 계약을 결정했다고 한다. 입에 발린 말일지언정 집주인인 재유의 미적 감각을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는 그들이 호감으로 보인 건 당연했다.

게다가 청년들에게서는 어쩐지 오묘한 분위기가 풍겨 나와 시선을 뗄 수 없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키 큰 청년이 유쾌 발랄 청년에게 ‘형’이라고 불렀으니 친구 사이는 아닐 텐데, 그렇다고 형제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의심에 쐐기를 박은 건 계약 당사자인 유쾌 발랄 청년이 도장을 다 찍은 후 키 큰 청년에게 불쑥 몸을 기울여 뭐라 뭐라 귓속말을 하고는 환하게 웃을 때였다. 키 큰 청년도 마찬가지로 상대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는데, 그때 분명 귓불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이들은 커플이 확실했다. 우주 역시 도중에 눈치를 챘는지 재유의 옆구리를 가볍게 툭 치며 눈짓으로 몰래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사이인 걸 일부러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나란히 앉아 줄곧 어깨를 붙이거나 상대의 허벅지에 살짝 손을 올려놓는 간단한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양 행동했다. 마주 보는 시선에서도 상대에 대한 애정이 느껴질 정도로 스스럼없이 연인끼리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새로 들인 세입자가 젊은 게이 커플이라니. 우주와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새삼스러운 인연에 재유는 어쩐지 그들에게 마음이 동했다.

아파트 상가에 딸린 부동산 사무실을 나오자 주위가 꽤 시끄러웠다. 3월이라 제법 날씨가 풀려 보도블록이 깔린 넓은 인도에서 미취학 아동들이 부모들과 함께 나와 킥보드를 타거나 비눗방울 놀이 따위를 하고 있었다.

우주와 재유는 젊은 커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부동산 앞에서 나란히 마주 섰다.

“살면서 불편하거나 고장 난 거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 주세요. 오늘 이렇게 만난 거, 정말 반가웠어요.”

“저희야말로 좋은 가격에 좋은 집 얻었으니 사는 동안 깨끗하게 잘 쓰겠습니다.”

재유와 유쾌 발랄 청년이 집주인과 세입자로서의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우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두 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시간 괜찮으시면 어디 가까운 데서 차라도 한잔 어때요?”

“어… 그럴까요? 이따 가구 보러 가긴 할 건데, 30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괜찮지?” 그가 키 큰 청년을 올려다보며 묻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재유도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긴 했지만, 이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우주를 향해 눈썹을 까딱이며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큰길까지 내려온 네 사람은 2층에 자리한 카페에 음료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제 한 동네 살게 될 텐데 안면 텄으니 앞으로 잘 지내 보자는, 일단은 그런 허접한 명분이었다.

“우와, 디자인 회사에 한식당 운영하시고… 전부 사장님들이셨네요. 멋지십니다.”

유쾌 발랄 청년이 먼저 명함을 건네기에 네 사람은 차례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사장님은 한 명 더 있었다. 키 큰 청년은 옆 동네에서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점을 운영하는 스물일곱의 이석훈이었다. 유쾌 발랄 쪽은 이석훈보다 한 살 많은 정세준으로, 최근에 IT 기업에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데 두 분은 예전부터 친했었나 봐요. 어떻게 같이 살게 되신 거예요?”

우주가 얼음이 짤랑거리도록 빨대를 휘젓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고는 정세준에게 물었다. 카페 사장님이나 숫기 없어 보이는 이석훈보다 서글서글하고 시원한 미소를 장착한 정세준과 우주를 중심으로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방금 질문은 사실상 ‘너희들 커플 맞지?’라는 말을 돌려 물은 것이었다.

“제가 이 녀석하고 살고 싶어서 몇 달을 조르고 졸라서 같이 살게 된 거예요. 사실 저희가 사귄 지 꽤 됐습니다. 원래는 고등학교 선후배였거든요.”

에두른 질문에 돌직구 답변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이석훈을 향해 싱긋 웃었다. 무뚝뚝한 청년은 미세하게 볼을 붉히며 괜히 카페 내부를 둘러보는 척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게이인 걸 숨기지 않는다고는 하나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자기들의 관계를 밝히는 모습에 재유는 적잖이 놀랐다.

“그럼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거예요?”

“뭐 전 그때부터 좋아하긴 했는데 사귄 건 이 녀석이 졸업하고 나서였어요. 제가 알바하는 데 맨날 쫓아다녔거든요. 한 7년쯤 만났네요.”

놀랍게도 두 사람은 7년 동안 약간의 다툼은 있었으나 단 한 번의 헤어짐 없이 쭉 만나 왔다고 한다. 둘 다 지방 출신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취로 서울살이를 시작해서 집안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위기가 있을 때에도 시간을 갖자는 둥 헤어지자는 둥 이런 얘기는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이제 나이도 차고 점점 주변에서 이성 교제에 대한 의구심이 짙어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큰맘 먹고 커밍아웃을 감행했다고 한다. 정세준 집에서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는지 다소 부침이 있긴 했지만, 서서히 인정해 주는 분위기라고 했다. 문제는 이석훈 집안이었는데, 위로 줄줄이 형과 누나들만 다섯이라는 그는 부모님보다 형제들이 더 펄펄 뛰는 상황이라고.

불안함을 느낀 정세준이 같이 살면 안 되냐고 먼저 제안했고, 이석훈도 형제들의 날뜀을 무시한 채 흔쾌히 그러자고 해서 동거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자기들과 비슷한 듯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유는 공감도 갔고 어느 부분에선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시작해 7년 동안 만남을 이어 오는 건 이성 간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정을 듣고 나니 오히려 동거 시점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동안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크고 기회도 많았을 텐데 그들은 현명하게 거리를 조절하며 사랑을 키우고 적당한 시기가 왔을 땐 물러섬 없이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나 너넨 우리보다 상황이 더 나았잖아, 하는 시기 따위는 없었다.

흘려보낸 지난날에 대한 후회는 없다. 자기와 우주는 처해진 상황마다 최선을 다해 버텨 왔고 삶을 향한 분투를 이어 왔다. 그러한 과거가 없었다면 오늘의 행복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이가 어린데도 배울 점이 많다는 것과 같은 동성 커플들의 사연을 실제로 듣는다는 새로운 자극이 있었다.

그동안은 우리들의 고민거리나 시시콜콜한 감정 따위를 공감해 줄 만한 주변 사람이 없었는데, 이 커플에게는 어쩐지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이렇게 먼저 터놓고 얘기해 주니 벽이 낮아질 수밖에.

어느새 약속한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사이 희지에게서 ‘언제 오냐’는 톡이 와 있었다. 우주와 셋이서 만든 단톡방이었다. 일요일은 다 같이 대청소를 하기로 정한 날이라 시간을 더 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질문 좀 실례지만, 두 분도 커플이신 거 맞죠?”

조심스럽게 묻는 내용과 달리 정세준은 확신에 가까운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아마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는 걸 그들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들의 사연도 중간에 끊지 않고 편하게 털어놓았겠지.

우주와 눈이 마주쳤다. 재유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내놓으며 슬며시 웃었다.

“네, 맞아요. 저희도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커플입니다.”

“우와… 그럼 두 분이야말로 진짜 오래되셨네요. 아까 계약서 쓸 때 보니까 나이가… 거의 20년이 다 된 거잖아요?”

“그런 셈이죠. 우리 얘기도 해 주고 싶은데….”

우주가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단톡방 내용을 읽은 모양인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저희도 같이 삽니다. 그런데 집에서 우리 딸이 빨리 들어오라고 난리네요.”

“…딸이요?”

“…딸이요?”

이석훈과 정세준에게서 거의 동시에 놀란 되물음이 터져 나왔다. 숫기 없어 보이던 이석훈은 눈이 땡그래져서는 입도 다물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우주와 눈을 맞추며 피식 웃었다.

“네. 이번에 고2 되는 딸이 있어요.”

“고, 고등학생이라고요?”

“고…등학생….”

역시, 딸이 있다는 것보다 고등학생이라는 딸의 나이에 더 놀란 듯했다. 재유는 마지막 남은 카페라테를 천천히 삼키고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음 만날 약속을 기약했다.

“조만간 술자리 한번 마련하면 좋겠네요. 저희는 오래되긴 했지만, 줄곧 만나 왔던 건 아니라서 술 없이 얘기하기엔 좀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우주의 손이 다가와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재유는 동성 커플과 함께하는 자리라 그런지 평소보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조용히 손길을 받았다.

“다음에 만날 땐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럼요. 저희도 세준 씨랑 석훈 씨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앞으로 종종 만나서 동네 형·동생으로 지내면 좋죠.”

“형님들도 다음엔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임대차 관계로 만나 어색했던 호칭까지 정리하고 나서 짧은 만남은 끝이 났다. 그들과 헤어진 두 사람은 서둘러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운전은 재유가 했다.

“재밌었다. 그치?”

“그러게. 계약만 하고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우리랑 비슷한 커플이 세입자라니. 상상도 못 했어.”

“우리 사이 대놓고 밝히는 거 처음인데 너 하나도 안 놀라더라?”

뜻밖의 만남이 그에게도 즐거웠는지 우주는 차에 타고부터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끌어내고 싶은 반응이 있는 것처럼 옆구리도 쿡쿡 찔렀다. 얘는 오늘도 참 주책이구나 생각하며 재유는 핸들을 돌려 코너를 돌았다.

한 동네라 집으로의 도착이 빨랐다. 재유는 차고에 주차를 하고 시동을 껐다. 주차한 자리 옆에는 우주가 타고 다니는 대형 세단이 있었다. 두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규모에 비해 넓게 지어진 차고는 온갖 잡동사니를 수납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둘이서만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올 때면 올라가기 전에 키스를 하거나 그 이상도 간간이 하곤 하는 은밀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럼 쫄아서 움츠러들 줄 알았어? 나보다 열 살 어린 애들 앞에서까지 부끄러워하고 민망해하고 그래야 돼?”

도착하자마자 안전벨트의 잠금을 번갈아 풀어 버린 우주가 덩치를 기울이며 얼굴을 맞붙였다. 코끝이 나란히 닿고 입술이 스칠 만한 거리였다.

“귀여워서 그랬지. 네가 먼저 술자리 제안할 줄도 몰랐고. 이런 모습 처음이니까 좀 설레더라.”

장난인 척 서슴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그가 귀엽기는 재유도 마찬가지였다. 훌훌 웃음이 터트리자 우주의 코끝이 좀 더 진득하게 맞닿았다.

“귀여운 건 한창 20대인 걔네들이 귀여운 거고.”

“뭐? 걔들이 귀엽긴 뭐가 귀여워? 누가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키 큰 애? 머리 곱슬인 애? 개들이 나보다 더 귀여워?”

딴 놈 보고 귀엽다고 한 걸 응징이라도 하듯 우주가 코끝을 얕게 깨물었다. 아, 아, 재유는 괜히 엄살을 부리며 두 손으로 우주의 얼굴을 감싸고 거리를 약간 떨어뜨렸다.

커다란 눈과 긴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거리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안에 든 애정의 크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때문에 낯선 사람 앞에서도 자신을 그의 연인이라 소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걸… 우주도 당연히 알겠지.

“당연히 귀여운 건 우리 우주 못 따라가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 네가 최고야.”

오늘처럼 그의 주책이 자기에게도 옮는 날이 있었다. 재유는 뺨을 단단히 붙잡은 채 눈썹과 콧등, 볼과 턱까지 촉촉 입맞춤을 쪼아 댔다. 입술 언저리에 닿았을 때 그의 입꼬리가 사르륵 올라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우, 뭐야. 오늘 대청소하면서 힘 좀 아껴 놔야겠네.”

늦은 밤에 이어질 섹스를 예고하며 넌지시 투정하는 소리에 재유의 입술도 헤벌어졌다. 우주의 손이 뒷목을 감아 오며 얼굴의 각도를 달리해 입맞춤이 깊어지려는 순간, 희지의 전화로 키스는 무산되었다.

“…누구 딸인지 몰라도 참 성실해. 10대 때 보통 대청소 하자 그러면 몰래 도망도 좀 치고 그래야 되는 거 아냐?”

벨 소리가 야속하다는 듯 가볍게 툴툴거린 우주가 재유의 입술을 한데 머금고 쪽 빨아들였다. 재유는 달콤한 통증을 느끼며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어서 들어가자. 더 잔소리 듣기 전에.”

두 사람은 몸에 옮겨붙으려는 열기를 가까스로 진화하고 계단을 올랐다. 현관이 나올 때까지 옆구리를 딱 붙이고 아슬아슬할 때까지 입맞춤을 나누기는 했지만.

***

2018년 9월.

재유네 식구는 장운시 오거리 골목에 있는 살구나무 집에 명절을 쇠러 왔다. 점심나절 도착해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거실 한복판에 모두 모여 두 돌배기가 온 집 안을 활개 치고 다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명절은 오랜만에 영선이 부부도 함께였다. 호주에서 아예 눌러사는 딸과 사위, 그리고 귀여운 손녀까지 연휴에 맞춰 한국을 방문한 게 오랜만이다 보니 아주머니 내외도 특히 기분 좋은 명절이었다.

아주머니는 집이 북적북적한 게 너무 신난다며 점심 설거지가 끝나기 무섭게 떡과 식혜를 내오셨고 아저씨는 사과와 배를 깎아서 자식들 하나하나 입에 넣어 주시며 즐거워하셨다.

“제인이가 너 닮았나 보다. 엄청 활발해. 호기심도 많고.”

“그러게? 애기들은 저렇게 노는 게 건강한 거라던데.”

아기는 잠시 사과를 받아먹나 싶더니 커튼 뒤에 숨어 까꿍도 하고 TV 장식장을 헤집기도 하고 소파에 기어 올라가 방방 뛰기도 하며 놀기 바빴다. 아기를 보며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두 동창생들의 얘기를 들은 영선은 한숨을 푹 쉬며 푸념을 내놓았다.

“맞아. 엄청 건강해. 너무 건강해서 나랑 제인이 아빠가 감당을 못 할 정도야. 내가 30대 중반에 애 낳았잖아. 요즘 시대엔 그리 노산도 아닌데 체력이 안 따라 준다. 희지 봐라. 10대 체력이라 아무리 쫓아다녀도 지치지도 않는 거.”

영선의 말대로 희지는 제인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말도 걸어 주고 까꿍 놀이에 장단도 맞춰 주며 아기를 물고 빨기 바빴다. 어린 제인이가 희지를 잘 따르기도 했다. 꺄르르 웃기도 잘 웃고 발음이 불분명한 옹알이로도 둘 사이에 제법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예전에 영선이가 달동네 셋방에 찾아와 어린 희지와 놀아 주던 모습과 겹쳐 보여 재유는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영선이가 한국에 살기만 한다면 자기도 아이를 봐 주고 육아의 고충도 들어줄 텐데. 아주머니 내외가 외동딸 영선에게 늘 하는 말을 재유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살구나무집의 명절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아주머니가 송편 반죽을 하는 사이 몇몇이 뒷산에 올라 솔잎을 따오고 팥소와 깨소, 꿀까지 차려진 가운데에 둘러앉아 취향대로 송편을 빚었다. 아기 제인이를 보는 건 희지의 몫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방 안에서 아기와 마주 앉은 희지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누가 누가 잘 빚네에서 시작한 대화의 주제는 서로의 근황을 심도 깊게 나눈 후에 3일간의 명절 스케줄로 옮겨갔다.

“아침에 일찍 움직이고 점심때는 시청 사거리에 있는 갈빗집에 가자.”

추석 당일에 영업하는지 식당에 미리 전화해 봤다며 홀로 생밤을 까던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네… 저희도 그쯤 되면 아마 마무리될 거예요.”

“그럼 12시쯤에 바로 식당에서 만나면 되겠네?”

“네, 그럴게요.”

아침에 영선이네가 차례를 지내는 사이 재유네는 성묘를 다녀와야 했다. 희지의 할머니와 인애를 방문하는 일이었다.

아저씨 내외의 배려로 재유의 어머니는 아저씨네 가족 묘지에 줄곧 모셔 왔다. 반면 공동묘지에 묻혔던 인애는 몇 년 전 폐묘를 하고 인근 납골당에 새로 유골함을 이전했다. 제법 거리가 있어서 점심때를 맞추려면 새벽부터 바지런을 떨어야 했다.

재유는 명절만 되면 이럴 때가 조금 곤욕스럽고 우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데리고 인애의 납골당을 방문해야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재회한 이후로 인애에 대한 화두는 그들에게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다. 둘 사이에 먼저 인애의 얘기를 꺼낸 적은 없으나 희지에게서 엄마 얘기가 가끔 나왔다.

우주는 인애와의 친분은 없었지만,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었으니 희지에게 적당히 보조를 맞춰 주고 자연스럽게 넘어가 주었다.

첫 명절을 함께 지낼 때도 재유는 그의 성묘를 말렸었다. 그런데도 우주는 한사코 따라나섰다. 희지를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만, 서운한 티 하나 내지 않고 묵묵히 부녀의 성묘를 지켜보았다.

재유로서는 그런 우주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내색은 안 하지만 아마 마음 한편으로 섭섭하고 앙금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연인을 보며 죄책감을 떠안고 가는 건 재유 본인의 몫이었다. 그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이거 너 닮았다. 이쁘지?”

우주가 한참을 오물조물 빚어낸 송편 하나를 코 앞에 들이대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헤벌쭉 웃는 그를 보면 가슴 언저리가 묵직하게 시큰거렸다. 재유는 평소보다 더 밝게 웃으며 그러네, 예쁘네, 하고 말했다. 이럴 땐 저보고 예쁘다는 소리를 해도 별로 발끈하지 않았다.

딩동-

송편 빚기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갈 때쯤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입구와 제일 가까이 앉은 영선의 남편이 “제가 나가 볼게요.” 하며 얼른 뛰어나갔다.

아주머니와 영선이 솔잎을 깔아 놓은 찜통에 송편을 옮겨 담는 동안 재유는 우주와 함께 뒷마무리를 했다. 거실에 넓게 깔아 둔 횟집용 비닐을 걷고 걸레로 방을 훔치는 사이 영선의 남편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형님들, 좀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떤 남자분이 오셨는데 우주 형님 찾으세요. 같이 사는 형님도 있냐고 물어보시고.”

재유는 우주와 말없이 눈을 맞췄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이런 표정을 주고받으며 서둘러 마당으로 나가보았다.

“…….”

“…….”

열린 문틈으로 정장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얼핏 보였다. 재유는 대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너무 놀라는 바람에 멈칫 뒷걸음질을 쳤다.

20여 년 전 단 한 번 봤던 사람인데도 뇌리에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강 실장님.”

우주가 놀란 목소리로 문 앞의 남자를 불렀다. 그래. 강 씨였던 것 같다. 그때도 우주가 강 비서님이나 강 실장님이라고 불렀었지.

훈련소 입소를 며칠 앞두고 공장에 출근한 자기를 데려다가 우주네 집에 떨궈 줬던 사람. 염창섭 회장님의 수행비서라는 사람이었다. 기억에서보다 주름도 많아지고 흰머리도 희끗희끗해서 다른 사람인가 착각할 뻔했지만, 그 사람이 맞았다.

강 실장은 우주의 부름에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목 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곧 아랫사람인 듯한 젊은 남자 두 명이 양손 가득 꾸러미들을 들고 대문 앞으로 왔다. 골목 안쪽까지 차가 들어올 수 없어서 오거리에 주차를 하고 여기까지 낑낑거리며 들고 왔을 것이다.

그렇게 대문 앞에 놓인 것들은 명절 선물로 보였다. 고급스러운 보자기에 싸인 상자 두어 개와 알이 큼직한 배, 곶감 등이 차례로 놓였다.

“여기 두고 갈 테니까 가지고 들어가거라. 아버님이 보내신 거다.”

이거였다. 인애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명절 때마다 재유의 마음을 곤욕스럽게 했던 이유. 바로 우주의 가족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자기와는 다르게 부모님이 장운시에 계시는데도 영선네에서 명절을 쇨 수밖에 없었던 우주. 그런 우주와 전처의 납골당에 함께 다니며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나.

“…….”

재유는 저도 모르게 북받쳐 올라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순식간에 흘러내렸다.

우주는 강 실장을 앞에 두고 울음을 터트린 재유를 보고 당황했는지 몸을 기울이며 괜찮냐고 계속 물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어깨를 감싼 손을 미끄러뜨려 다정하게 팔을 쓸어 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진짜 이걸… 보내셨다고요.”

강 실장은 재유를 흘끗 보며 기색을 살피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어젯밤에 갑자기 지시하셨어.”

재유는 강 실장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급하게 얼굴을 닦아 추스르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감정이 쉬이 다스려지진 않았다.

“어머님은 아직 힘들어하시니까 이번 명절은 됐고… 내년 설에나 한번 다시 찾아와 봐.”

찾아오라는 마지막 말을 할 때의 강 실장의 시선이 재유를 향했다. 잠시간 복잡한 시선이 부딪혔다. 오래되어 굳어지고 해묵었던 응어리들이 약한 통증을 일으키며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강 실장님.”

재유는 목이 멘 소리로 겨우 인사를 전했다.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가 다시 그의 입에 걸리더니 우주에게 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소중한 아들의 절친한 친구에게 전하는 인사 같았다. 그러고는 이제 볼일 끝났다는 듯 함께 온 남자들과 함께 등을 돌려 골목을 벗어났다.

다시 시작하기로 했을 때, 그러니까 우주와 희지가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은 그의 부모님을 찾아뵈었었다. 예상했던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1년간 몇 번 더 찾아갔더랬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우혁의 언질이 있기 전까지 재유와 우주는 수없이 그 집을 찾고도 발 한쪽 걸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이런 날이 다 있네…?”

마당 안쪽에 선물상자를 쌓아 둔 채 덩그러니 서 있던 두 사람은 잠시간 침묵하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좁은 골목집에서도 스카이라인에 예쁘게 걸쳐진 노을이 아주 잘 보였다. 날이 맑아서 밤이 되면 어여쁘고 선명한 보름달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려는 일이 그분들에겐 불쾌할 걸 알면서도 재유는 우주를 위해 하는 데까지 해 보고 싶었다.

가족과 인연을 끊고 남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게이이기 때문에 가족에게 내쳐지거나 스스로 등진 경우도 많았다.

우주는 내색하지 않지만, 자기를 만들고 낳아 주신 분들에게 성 정체성 때문에 부정당하는 일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런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 역시 몹시 슬픈 일이었다.

재유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우주가 부모님에게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온전히 이해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렇게 작은 틈을 만들어 준 그의 아버지에게 간절하게 감사했고 마음 깊이 감격했다.

“다음 설엔… 아버님 좋아하시는 막걸리 좀 만들어서 찾아봬야겠다. 어머님 좋아하시는 꽃도 사 가고.”

“그래. …그러자.”

우주의 눈에도 작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벅차고 어릿한 감정이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가 이내 해맑게 변했다. 서로의 눈가를 닦아 주고, 발간 노을을 담은 서로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얼마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늘 송편은 아주 맛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내년 추석에는 염 씨네 집에서 송편을 빚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가 생겨난 하루였다.

***

어머니의 성묘와 인애의 납골당 방문을 마친 재유네 식구는 아저씨가 말한 시청 사거리의 갈빗집에서 원 없이 돼지갈비를 실컷 먹고, 입가심으로 커피까지 마셔 줘야 한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따라 카페에서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테이블 세 개를 붙여 앉은 일행은 아저씨 내외와 영선의 세 식구, 재유네까지 합하면 총 여덟 명의 대가족이었다. 재유는 너무 배가 불러서 평소에 마시지 않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도 오늘따라 부드럽게 잘만 넘어갔다.

평생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명절을 지낸 적이 없었기에 복작이며 한데 밥을 먹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경치를 구경하는 명절 연휴가 신기하고 재밌기만 했다.

식구가 더 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영선이더러 둘째 낳을 생각 없냐고 물었더니 조만간 계획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자리에 앉은 모두가 출산 계획을 반겼고, 그중에서도 희지가 제일 기뻐했다. 그 모습에 도리어 영선의 눈가가 빨개졌다.

언젠가 아홉 명의 가족이 될 날을 기대하며 각자 성이 다른 이색적인 가족의 커피 타임은 마무리가 되었다.

다음 스케줄은 장운 인근에 단풍이 멋지다는 사찰 구경이었다. 재유와 우주만 제외하고서. 두 사람은 오랜만에 모교에 방문한다는 핑계로 단풍 구경은 다음 해로 미루기로 했다.

차 두 대에 나눠탄 식구들을 배웅한 재유와 우주는 소화도 시킬 겸 느긋하게 시내를 걸었다. 이미 그 시절에 다녔던 만화방이나 피시방, 피자집 같은 곳은 다른 가게로 바뀌거나 건물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우주와 함께 걷고 있었기에 옛 기억을 떠올리기는 충분했다.

터미널과 강변, 엄마의 식당과 서점 등등을 지나면서 우주는 그때처럼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여기 같이 걸어가는데, 네가 딴 데 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팍 돌려서 눈이 마주쳤었거든? 그때 와… 나 심장 떨어질 뻔했다고.”

이런 소소한 기억에 다소 양념을 가미한 실없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20여 년을 줄곧 함께하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의 찰나의 시간 동안 함께한 공간에서 공유하고 있는 기억은 생각보다 많았다. 둘이서 실컷 웃고 떠들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장운고가 가까워졌다.

“학교가 이렇게 작았었나?”

지금은 편의점이 된 떡볶이집을 지나고 자전거 보관소를 지나 교문 안에 들어서자 그리움과 낯섦이 동시에 느껴졌다.

“건물들이 새로 생겨서 그런가 봐. 저건 기숙사인가? 우리 땐 없었는데, 그치?”

“그러게. 그래도 옛날 생각 많이 난다.”

본관 뒷길을 걷자 개학 첫날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며 무작정 조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학교에서 급식실 건물이 지어진 해의 최초 사용자였던 자신들의 첫 식사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었다. 그때 이 녀석은 여학생들이 주는 초콜릿을 잘도 받아먹었더랬지.

재유는 우주를 향해 눈을 한 번 흘겨주고는 그날의 감상을 장난삼아 시기했다. 우주는 파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상체를 접어 재유의 가슴팍에 안기려 했다.

그래. 벌써 20년이 다 된 일인데 이제 그만 잊어 주겠다, 재유가 용단을 내리자 우주는 몹시 감읍할 따름이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동아리방과 매점을 지나고 운동장까지 가로질러 학교를 둘러본 두 사람의 발걸음은 당연히 벚나무길로 향했다.

숱하게 이 길을 함께 걸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우주는 지금보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덩치 큰 소년이었다. 재유는 이 길을 걸으며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여 주던 그의 마음이 궁금했었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이제는 매일 아침에 눈 뜨면 곁에 있고 밤에는 함께 잠드는 사이지만, 이 벚나무길에 서 있는 우주는 그때의 그 소년을 소환해 온 것처럼 감상에 젖게 했다.

재유는 그때 이 길에서는 잡아 주지 못했던 우주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붉게 물든 벚나무잎을 쓸고 지나갔다. 아직 때가 덜 타고 나름 순수했던 이 길의 소년들은, 청년이 되었고 아버지가 되었고 이제는 서로의 동반자가 되었다.

“사랑해.”

우주가 말했다. 그때처럼 쑥스러워하며 귓불을 붉히고서.

나도 사랑해.

재유도 말했다. 이번엔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가까이에서 큰 소리로.

벚나무의 이파리들은 갈 빛을 띠고 있었지만, 재유의 눈에는 이마 위의 흩날리는 벚꽃잎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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