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7/18)

에필로그

* * *

2019년 12월.

“잘 먹었습니다.”

희지는 밥그릇과 수저를 개수대에 놓고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딸이 밥 먹는 걸 지켜보던 재유는 반찬들을 정리하고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어 버튼을 눌렀다.

“아빠, 지금 해 줄 거지?”

희지가 계단을 절반쯤 내려오더니 난간에 기대며 소리쳤다.

“알았어. 준비해 놔.”

희지는 곧 작은 가방을 가지고 내려와 소파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TV를 켠 후 채널을 신중히 고르고 있다. 재유는 그런 희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행주를 쭉 짜서 탈탈 털고 행주 걸이에 널어놓은 다음 거실로 향했다.

TV에선 중국 경극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다. 문화대혁명 이후 경극 배우들이 홍위병들에게 낙인이 찍혀 박해를 받았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재유는 왜인지 ‘낙인’이라는 말에 움찔했다. 희지는 그레이 톤의 네일 색을 두어 개 골라 놓았다. 재유는 매니큐어 붓의 농도를 조절한 뒤 익숙하게 희지의 손을 받쳐 들어 새끼손가락부터 조심조심 바르기 시작했다.

“너 이거 하고 학교에 가는 건 아니지?”

“하고 갈 건데? 애들 다 하고 다녀.”

“선생님이 뭐라고 안 해? 투명도 아니고 너무 튀지 않을까?”

“당연하지. 수능도 끝났는데 뭐. 아빠. 나 토요일에 친구들이랑 전주 한옥마을 가는 거 알지?”

“응. 알지.”

“가기 전에 한 번만 더 해 주라. 한복 입을 거니까 그거랑 어울리게.”

“알았어. 그럼 꽃 그림 그려 줄게. 동백꽃 어때?”

“응. 좋아.”

수시전형으로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무난히 합격한 희지는 그동안의 수험생활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걱정은 했지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수험생활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아 왔기에 합격이 결정되었을 때 기뻤고 안심했으며, 뿌듯했고 쓸쓸했다.

“아빠, 오늘따라 말이 없네?”

“…그랬나?”

“어.”

희지는 TV를 보며 색이 칠해져 가는 손톱과 아빠의 얼굴을 이따금 보고 있었다. 재유는 다 발라진 손가락을 펼쳐 보며 꼼꼼히 살폈다. 다크그레이와 라이트그레이가 조화롭게 칠해졌다. 액세서리가 든 작은 플라스틱 상자를 열어 별과 하트 모양의 부자재들을 꺼내 놓고 접착제로 세심하게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있지, 희지야.”

“응.”

“아빠가 할 말이 있는데….”

“어. 말해.”

“아빠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근데… 남자야.”

“…….”

재유는 희지의 표정이 몹시 궁금했지만, 고개를 숙이고 손톱에만 집중했다.

“아마 지금은 말이 안 나올 거야. 아빠가 먼저 말할게. 그냥… 예전부터 누군가를 좋아했는데, 그 사람이… 남자였을 뿐이야.”

둘 사이에 말이 끊겼다. 말소리 대신 TV에서는 경극 배우들의 연습량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하루 10시간씩 20년을 꼬박 연습했다는 배우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부녀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재유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계산하고 외워 뒀던 말들이 하얗게 지워진 느낌을 받았다. 입을 뗐을 때부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은 그저 무슨 말을 해야 어색한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사실 말할 타이밍은 계산한 거야. 네가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다렸거든.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근데 아빠로선 지금이 털어놓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

“…….”

“놀랐어?”

“어… 조금. 사실은….”

희지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아빠가 먼저 말할 줄은 몰랐어. 짐작은 했는데… 아빠한테 직접 물어보기는 좀 그랬으니까.”

“…….”

“…우주 삼촌이야?”

“…어떻게, 알았어?”

재유는 그제야 눈을 들어 딸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통에 입속 점막을 꾹 깨물었다.

“표정이 미묘하게 다른 느낌? 쳐다보는 것도 다르고 웃는 것도 다르고.”

“많이, 달라?”

희지는 안절부절못하는 아빠를 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그렇잖아. 우주 삼촌도 영선이 고모도 둘 다 아빠 친군데, 그 표정으로 영선이 고모를 본다면 불륜으로 의심받을 것 같은 표정? 불륜이 나은지 게이가 나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

재유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식이 흘렀다. 희지에게서 직접적으로 ‘게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게 잘하는 짓인지 점점 헷갈렸다. 재유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며 난처해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아빠가 용기 내서 고백한 건데.”

“아냐. 이해해.”

희지는 하던 걸 마저 해 달라는 듯 손톱을 스윽 내밀었다. 재유는 희지의 검지를 붙잡고 핀셋으로 하트 모양의 큐빅을 붙였다.

“…그럼 엄마는? 엄마는 사랑하지 않은 거야?”

“네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어. 희지 널 사랑해 줬고 아빠를 존중해 줬지. 무엇보다 널 낳아 줬으니 아빠한텐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재유는 진심을 말했다. 사랑했냐는 물음에는 긍정할 수 없지만, 희지를 있게 해 준 인애에게 더 이상 미운 마음은 간직하기 싫었다. 그저 일찍 간 인애가 불쌍했고, 남은 자신은 희지가 다 커서 대학 가는 것도 보게 됐으니 일방적으로 품었던 인애에 대한 묵은 감정도 털어놓은 지 오래였다.

“그랬구나. 사랑하진 않은 거네. 엄마랑도 동창이었다면서.”

“…실망했어?”

“글쎄. 엄마는 사진으로만 봐서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엄마한텐 좀 미안하네.”

“그래… 그럴 수 있지.”

희지는 바들바들 떨리는 아빠의 손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땀이 나서 손에 쥔 핀셋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희지는 축축한 재유의 손을 붙잡고 아빠를 불렀다.

“아빠.”

“응? 왜?”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아무리 얼핏 짐작했다고는 해도 소화는 시켜야 할 거 아냐.”

“당연하지. 아빠가…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떡하긴.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생각 좀 정리해 볼게.”

“으…응. 알았어.”

“빨리 이거나 마저 해 줘.”

재유는 손을 허벅지에 벅벅 닦고 다시 핀셋을 고쳐 쥐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희지의 손톱 꾸미기가 이어졌다.

희지에게 털어놓기로 한 건 수능이 끝난 이후 계속 결심했던 일이었다.

희지는 대학을 다니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고, 재유와 우주는 줄곧 반대해 왔다. 우주의 반대가 더 심했다. 희지가 자취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오만 걱정을 사서 하며 희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밤낮으로 설득했었다.

결국 희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두 사람은 2주에 한 번 주말은 무조건 집에 와서 지내야 하고 불상사가 생기면 바로 원룸을 뺀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불상사란, 도둑이 들거나 남자친구가 원룸에 드나드는 거였다. 희지가 혼자 사는 집에 드나든다면 도둑이나 남자친구나 매한가지였다. 우주는 제 대학 시절에 자취하며 했던 짓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희지만 보면 자취 생활의 안 좋은 점에 대해서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우주가 그렇게 고대하던 둘만이 사는 삶이 시작되려는데 그는 희지에 대한 불안이 좀처럼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유 역시 이대로 희지를 품에서 떠나보내는 게 착잡하고 싱숭생숭했다.

그래서 적어도 우주와의 진실을 말해 주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희지가 떠난 집에서 그와 둘만 사는 것이 마음속 빚으로 남을 것 같았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마지막 장식을 붙이고 난 재유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희지는 후후 입김을 불며 반짝거리는 손톱을 확인했다. 그때 도어 벨이 울렸다. 현관을 비추는 액정에 우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지는 재유와 눈을 맞추더니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곧 우주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삼촌은 자기 집에 오면서도 꼭 벨을 누르더라?”

“뭐 어때? 집에 사람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좀 열어 주면 어디 덧나냐?”

우주는 손에 든 짐을 주방으로 들고 갔다. 샤인 머스캣 박스와 작은 비닐봉지였다.

“자. 이건 희지 꺼.”

우주가 비닐봉지를 희지 품에 떠안겼다. 희지는 봉지를 열더니 붕어빵을 입에 물고 투덜거렸다.

“아흐, 살찌는데. 나 방금 밥 먹었단 말이에요.”

“이것도 씻어 줄게. 같이 먹어.”

우주는 박스를 열어 샤인 머스캣 한 송이를 집어 들고 싱크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재유 넌 밥 먹었어?”

“아니. 너 오면 먹으려고 아직.”

재유는 쭈뼛쭈뼛 희지의 눈치를 보며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희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붕어빵을 삼켰다. 그러다 붕어빵 봉지를 내려놓고는 쯧 혀를 차며 밥통으로 가 그릇에 밥을 펐다.

“자, 먹자!”

식탁에 세 식구가 둘러앉았다. 희지는 우주가 씻어 준 샤인 머스캣을 한 알 한 알 입에 넣으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함께 앉아 먹는 식사 자리도 앞으론 줄어들겠지. 재유는 아쉽고 씁쓸한 마음으로 딸에게 지긋한 시선을 던졌다.

“찌개가 좀 짠가?”

우주가 한술 입에 넣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침에 우주가 만들어 둔 김치찌개였다.

“네. 좀 짰어요. 밥 비벼 먹으니까 간이 딱 맞던데요?”

우주는 스스럼없이 요리를 평하는 희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문제였지? 고민하는 것처럼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래? 간장이 과했나?”

요즘 그는 서툰 요리 솜씨로 하나둘 새로운 반찬 만드는 걸 연습하고 있었다. 직업이 요리사인 재유가 집에 와서도 밥하는 게 싫다며, 희지가 독립하면 밥은 제가 다 하겠다, 큰소리를 쳐 댔다.

희지는 우주에게 찌개는 짜도 땅콩은 잘 조렸네, 겉절이는 저녁 되면 시들해지니까 막 무쳐 먹는 게 좋네, 멸치볶음은 더 달았으면 좋겠네, 하며 반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우주는 희지가 말하는 반찬을 차례로 집어 먹으며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재유는 그런 딸과 연인을 바라보며 소소하게 웃음 지었다.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눈에 담으며 행복을 야금야금 주워 먹었다.

희지가 떠난다면, 이제 우주와 또 다른 낯선 세계로 뛰어든다. 하루 치 이야기가 담긴 저녁 식탁과, 한 겹 한 겹 소중한 일상을 쌓아 올리는 내일이 기다린다.

그가 꾼 꿈이, 나의 현재가 되었다. 그 꿈은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다. 인생의 오랜 여정이 끝날 무렵에 그에게 말해 주고 싶다. 네가 준 따듯한 햇살에 난 계속 눈이 부셨노라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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