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가족의 형태(6권) (16/18)

6권

14. 가족의 형태

* * *

노크를 하고 병실로 들어간 우주는 송진우가 누운 모양을 스윽 눈으로 훑었다. 2인실이었지만 환자는 송진우뿐이었다.

창가에 자리한 침대에 불편한 모양새로 앉은 그는 거치대에 태블릿을 펼쳐 놓고 거즈가 덮인 왼손으로 화면을 톡톡 누르고 있었다.

당신도 딸한테 이모티콘이라도 쏘고 있나? 우주는 눈썹 한쪽을 치키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갔다.

“염우주라고 합니다. 한재유 씨 대리인으로 왔습니다.”

남자는 우주를 보더니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사실 그의 상태는 우주가 보기에도 자못 심각해 보였다. 어깨를 다쳤는지 오른팔에는 깁스를 감고 있었고, 머리통 전체를 감싼 붕대는 왼쪽 눈까지 사선으로 덮여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에도 붓기와 멍이 있어 미리 사진으로 보았던 평소 얼굴과 전혀 달라 보였다. 전치 5주라더니 진단이 과장은 아닌 듯했다.

“변호삽…니까?”

입을 여는 게 고통스러운 듯 중간중간 호흡 섞인 말로 묻는 그는 우주를 상대하는 게 귀찮은 기색이었다.

“아니요. 한재유 씨 가족입니다. 우선 사죄의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가족…. 우주는 자신을 재유의 가족이라고 제 입으로 소개하고도 좀 놀랐다.

뜬금없게도 무의식이 뱉어낸 지칭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친구. 동창. 전 남자친구. 전 애인.

모두 맞는 말이었지만, 하나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족이 제일 낫다. 이왕이면 연인 겸 가족으로.

암. 그렇고말고. 연인이니까 병간호도 해 주고 가족이니까 합의도 하러 온 거지.

“전 한재유 씨와 얘기하고 싶다고 전했는데요.”

송진우는 아파서 그러는지, 재유가 오지 않아 짜증이 난 건지, 좀 전보다 더 심하게 얼굴을 구겼다.

우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과 달리 변호사가 동석하지 않은 점이 의아했다. 제 딸인 송지현의 화려한 변호인단을 보면, 자신의 변호사를 고용 못 할 정도로 재력이 없는 남자는 아니었는데.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재유가 지금 만날 상태가 아니라 제가 대신 온 겁니다. 앞으론 저와 얘기하시면 됩니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직접 오지도 않는군요. 그래서, 한재유 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말의 내용과 달리 재유를 원망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우주는 침대 발치에 선 채로 남자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보조 의자가 있었지만, 침대 옆에 붙어 앉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재유는, 송지현 양이 일으킨 폭행 사건을 덮지는 않을 겁니다. 재유가 그쪽을 때렸다고 해도, 애초에 사건의 원흉은 그쪽 딸에게 있으니까요.”

사실이었다. 합의가 급하다고 해도 희지가 폭행당한 일을 거래 조건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주 역시 반대한 일이었다. 선고유예를 받아서 송지현에게 아무런 응징을 못 하더라도, 끝까지 제대로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따라서 희지가 다친 것에 대해 그쪽이 제시한 합의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제 의견입니다만, 재유로 인해 불편함을 끼치게 된 점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고 싶습니다. 원하시는 금액에 맞춰 합의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다소 사무적인 딱딱한 말투로 제안한 우주는 송진우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사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가 맞은 피해 사실을 들먹이며 송지현에 대한 고소 취하와 함께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쪽에서도 송진우가 어떻게 나오든 그에 맞춰 다양한 갈래의 플랜이 세워져 있었지만, 이쪽은 손해 하나 없고 저쪽만 밑지는 거래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합의는 됐습니다. 아니, 합의서는 작성해드릴 수 있지만, 돈은 됐다는 말입니다.”

우주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저자세였다.

송진우는 애초에 재유를 벌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처럼 고민하는 기색 없이 바로 결론을 말했다. 아무리 제 자식이 먼저 잘못했다 해도 저만큼이나 두들겨 맞으면 없던 분노도 생길 텐데, 그게 가능한가?

“그럼 송지현 양에 대한 고소 취하를 원하십니까?”

“…….”

송진우는 좀 전의 시원스러운 답변에 비해 딸의 일은 아무래도 고민이 되는 듯 말이 없었다.

“저야 그걸 원하긴 하지만, 한재유 씨가 끝까지 재판을 하겠다면 굳이 취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우리 지현이가 희지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그때는 취하를 고려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우주는 의아한 걸 떠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피해자 가족이 자신을 때렸을 때 오냐, 잘 만났다, 돈도 뜯어내고 자식들 일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텐데. 앞에 앉은 낼모레 오십의 바람둥이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쪽에서 원하는 대로 말만 하면 다 들어줄 태세였다. 그럴 리는 없는데. 뭔가 다른 원하는 거라도 있는 건가.

“그건 상의해 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내일 저희 쪽 변호사가 찾아와 합의서를 작성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세요.”

송진우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가 생각난 듯 우주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희지는… 괜찮은가요? 많이 다쳤던데, 잘 회복되고 있습니까?”

“지금은 밥도 잘 먹고 많이 나아졌어요. 아직 학교는 못 나가지만, 곧 퇴원해도 될 정도로 호전됐습니다.”

너무나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어보길래 우주는 저도 모르게 희지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했다.

“다행이네요.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한번 병문안 가 보고 싶기도 했는데, 제 상태가 이래놔서…. 희지가 뭘 좋아하는지 안다면 제가 좀 보내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우주는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떠나서 기본적으로는 온화하고 매너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오랜 조직 생활로 다져진 사회성과 처세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아랫사람이 보기에 멋진 커리어와 중년의 너그러움을 가진 젠틀한 임원급 상사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 상사는 어린 신입사원들에게는 관대하고, 그들에게 절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금 송진우가 희지를 걱정하는 게, 평소 그가 나이 어린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봐도 되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밀도 있는 걱정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물론 자식이 폭행한 피해자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지만, 이건 마치… 희지가 딸의 친구나 조카, 더 나아가 딸을 걱정하는 아빠처럼 절박해 보이는 면이 있었다.

“아니요. 그쪽에서 주는 도움은 저희가 불편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무튼 제가 희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우주의 미간이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주름지고 있었다. 이렇게 차분하고 사려 깊은 사람을 재유는 왜 그렇게 죽자사자 때렸을까. 이제는 좀 물어봐야겠다.

“그쪽은 희지를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송지현 양이 그쪽한테서 희지에 대한 걸 알아내고 찾아갔다고 하던데요.”

그는 방금 전 질문에 이제까지와는 달리 눈에 띄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피하고 싶은 주제인 것을 떠나, 우주가 그 사안을 언급할 자격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한재유 씨의 어떻게 되는 가족입니까? 다른 형제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매형이나 매제도 아닐 테고.”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우주의 표정이 써늘하게 식었다.

우주는 침대 발치에서 몇 걸음 거슬러 올라갔다. 손만 뻗으면 송진우의 얼굴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삐딱하게 선 채 무감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재유의 인적 사항을 어떻게 알고 계시죠? 경찰에서 그런 것까지 알려 줍니까? 아니면, 몰래 뒷조사라도 한 겁니까?”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우주는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어깨를 잡고 침대 머리맡으로 슬쩍 밀어뜨렸다. 깁스를 감고 있는 어깨였다.

그리 대단한 힘을 쓰지도 않았는데, 다친 팔에 충격이 전해졌는지 다리를 버둥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그 바람에 태블릿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역시 이 사람도 대답 없는 딸에게 메시지를 주야장천 보내고 있었다. 우주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잡은 손에 아귀힘을 더했다.

“제가 누구이건 간에 물어볼 만해서 묻는 겁니다. 희지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나 얘기하세요.”

뒷조사를 했건 어쨌건,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겠지.

“아니면 당신 진짜, 딸보다 어린 여자애들을 성적 대상으로 보고 희지한테 접근하려고 한 겁니까? 당신 딸이 원조교제로 오해한 게 사실이었어요?”

붙잡힌 어깨를 털어내려는 남자의 눈가에 핏발이 섰다. 우주는 상체를 숙이고 신중하게 송진우의 얼굴을 살폈다. 문화재로 둔갑한 짝퉁이 어느 공장에서 찍어 낸 위조품인지 표식을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무리 점잖은 척해도 뒤가 구린 사람인 건 틀림없다. 그러니 멀쩡한 거죽으로 여중생 뒷조사나 하고 다녔지. 가정 있는 사람이 숱하게 바람피우고 다닌 건 말할 것도 없고.

“내가 희지를… 뭘 어째? 개소리, 하지 마.”

송진우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치부가 남에게 드러났다는 데서 오는 모욕이 아니라, ‘나를 뭘로 보고, 내가 그런 쓰레기라니 말도 안 돼.’라 항변하는 듯한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우주는 잡고 있던 어깨에 힘을 풀고 그를 다시 일으켜 앉혔다. 답답함과 짜증 섞인 손길로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그의 입에서 몇 번의 신음이 더 새어 나왔다.

“희지한테 그쪽 딸이 사과하게 만든다면서요. 당신 딸은 알고 있습니까? 알아야 제대로 사과를 할 수 있을 테니 아마 알고 있겠네요.”

“…우리 지현이는, 아직 몰라요. 내가 나중에… 나중에 다 얘기할 거예요!”

이번엔 조금 겁먹은 것 같았다. 역시 딸이 약점이었다. 당장이라도 제 딸을 찾아가 추궁할까 봐 우주의 팔을 붙잡고 꼴사납게 안달을 냈다.

우주는 송진우의 팔을 거칠게 걷어내고 빈정 상한 얼굴로 물었다.

“하, 그럼 사과시킨다는 것도 거짓말입니까?”

“아니에요. 사과하라고 할 거예요. 우리 지현이가 잘못한 거니까 반드시 사과해야 되고요. 안 그럼 희지… 희지가 너무 안됐잖아요.”

아까부터 거슬렸다. 묘하게 희지를 걱정하고 감싸는 듯한 태도.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걸까. 점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우주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읍시다. 재유한테는 말했습니까? 당신이 희지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그건… 한재유 씨하고만 얘기할 겁니다. 이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마세요. 이만 돌아가 주세요. 더 괴롭히면 경찰을 부를 겁니다.”

아직도 겁먹은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그가 자신 없는 말투로 답했다. 우주는 송진우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재유는 알고 있다.

송진우가 경찰에게도, 딸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재유에게는 말했고, 재유도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게 뭔진 몰라도, 이 사안에서만큼은 공범이 되어 진실을 숨기고 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저도 내막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때 당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기대되네요.”

우주는 아직도 시선을 피하는 그의 턱을 잡아 세우며 분명한 경고의 의미를 전했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차갑게 노려보고 손에서 턱을 털어내고는 병실을 벗어났다.

복도는 한산했다.

두어 명의 환자가 불편한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가거나 링거대를 지지대 삼아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보호자로 보이는 30대 남자는 어깨에 수건을 두른 채 우주를 앞질러 뛰듯이 화장실로 향했다.

부딪힐 뻔한 걸 슬쩍 피하는데,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쩍 내리꽂혔다. 번쩍임에 가린 어둠이 불길하고 사악했다.

재유가 숨기던 두 개의 칫솔.

모양과 색이 달랐고 각각 다른 봉투에 싸져 있던 수상한 물건.

남에게 보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불안한 기색으로 감싸고 있던 그것. 재유의 수상한 스위치. 희지가 건드리려 하자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던 기폭제.

우주의 걸음이 빨라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달음에 차까지 달려온 그는 잠시 허공을 노려보며 숨을 골랐다.

설마. 아닐 거야. 예감이 틀리길 바라면서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로브 박스를 열어 서류뭉치를 꺼냈다. 어제 오후 김 실장이 재유의 병실에 퀵으로 보내온 송진우의 프로필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마침내 찾던 것이 나왔다.

우주는 송진우의 입사 후의 이력을 손가락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1999~2002년 현진철강 장운 공장 근무]

“…….”

문득 뇌리를 스치는 예감이 있었다.

프로필에 있는 송진우의 사진과 희지의 얼굴을 머릿속에 대입해 보았다. 눈매가 닮은 것도 같고 전체적인 인상을 보면 아닌 것도 같았다.

우주의 손에 의해 종이 뭉치가 구겨졌다.

이제야 칫솔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우주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손끝이 부들거리고 턱이 덜덜 떨렸다.

-김민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송진우에 대한 건 더 알아낸 게 있습니까?”

-현재 인터넷 기록과 채무관계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여자관계도 더 나오고 있고요.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 조사해 주세요. 그리고 송진우가 한재유와 딸에 대해서 뒷조사를 한 것 같은데, 그것도 알아봐 줄 수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또 하나, 송진우가 장운시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만났던 여자관계에 대해서도 알아봐 주세요. 빠를수록 좋아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멈춘 우주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말씀하십시오.

김 실장의 채근에도 우주는 한동안 한숨을 내쉬며 고민하고 있었다.

“…유전자 감식을 했으면 하는데요. 오늘 중으로 결과를 알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지금 송진우가 입원한 병원입니다.”

-네.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우주의 팔이 축 늘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슬픔과 분노가 점점 크기를 부풀려 자신을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와. 씨발. 좀 세다. 아니, 많이 세다.

처음 희지 소식을 들었을 땐 그냥 학교에서의 다툼 정도로 여겼었다. 그래도 여차저차 재유는 합의를 받아 주고, 희지는 법적인 절차를 마무리한 뒤에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고? 그래, 거기까진 인정.

근데 재유가 발작 때문에 희지 앞에서 맥도 못 추고 절절매는 이유가, 아니, 더 나아가 애초에 송진우를 폭행했던 이유가 희지의 출생 시기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고?

우리가 처음 헤어졌던 스무 살 그해, 그러니까 15년 전부터 일이 꼬여 버린 거라고….

이건 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풀리는 일인지 감도 안 잡혔다.

친모라도 살아 있으면 바른대로 불 때까지 족쳐서라도 알아낼 텐데. 얼굴도 가물가물한 장인애라는 여자의 무덤을 파헤쳐 모든 걸 실토하게 한 뒤에 다시 뒈지라고 백골의 멱이라도 틀어쥐고 싶었다.

만약 희지가 재유의 친자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재유에게는 그 사실을 알려야 할까? 알게 된다면, 그는 과연 받아들이려 할까?

제 자식도 아닌 아이를 15년이나 키워 왔는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그 결과로 희지의 인생이, 또 재유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하는 걸까? 어떻게? 갑자기 딸이 아니게 되고 아빠가 아니게 되는 건가? 그럼 두 사람은 나를 두고두고 원망하지 않을까….

다른 걸 다 떠나서, 난 무얼 확인하고 싶은 건지. 희지가 재유의 딸이 아니라면, 난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희지의 존재로 어긋나 버린 재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되돌리고 보상받을 수 있을까.

“허, 그래서….”

재유가 칫솔 두 개를 챙겨 나와 희지를 보자마자 발작을 했던 게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자신조차도 희지의 친자 여부를 떠올리며 혼란과 당혹이 일었는데, 당사자는 오죽했겠는가.

우주는 다시 핸드폰으로 재발신 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민했다. 성급하게 감식을 맡긴 건 아닌지 이제 와 후회가 밀려왔다. 희지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그냥 아이일 뿐인데. 재유는 또 어떻고.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언제까지 감추려고 했을까.

복도 지지리도 없는 놈. 몰래 혼자 유전자 검사 해 보려고 칫솔 챙겨 놓고도 희지 얼굴 보자마자 까무러쳤으면서. 저 혼자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젠장. 젠장. 젠장.

우주는 성질에 못 이겨 핸들을 내리쳤다. 이대로는 재유 얼굴도, 희지 얼굴도 못 볼 것 같았다.

우주는 차에서 내려 다시 송진우의 병실로 올라갔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자리에 누워 있던 그놈이 인상을 쓰며 문가를 보고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안 들려 있어서 다행이었다. 칼이 있었으면 낯짝을 그어 버렸을 거고, 총이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머리통을 날려 버렸을 거다.

역시 뒤가 구린 놈이었다. 구린 거로도 모자라 추잡하고 역겨운 새끼였다.

“재유한테 한 말, 다시 한번 지껄여 봐.”

우주는 단숨에 베드로 다가가 송진우의 멱살을 챘다. 한쪽 눈을 붕대로 가린 그놈은 당황과 노기를 동시에 띠고 있었다. 켁켁거리며 일그러진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이제 와서 모르는 척 개수작 부리지 말고, 재유한테 뭐라 그랬는지 다 까 보라고!”

“왜, 왜 그럽니까. 아까 얘기 다 끝난 거 아닙니까?”

숨쉬기가 버거운 듯 콜록거리는 송진우는 목을 옥죄는 우주의 팔을 뜯어내려 버둥댔다. 붕대에 가린 반쪽 얼굴이 공포로 물들고 있었다.

“끝나긴 뭐가 다 끝나. 사실대로 말해. 장운시. 희지 친모. 희지 뒷조사한 거. 진짜 몰라?”

“그건….”

“재유한테 희지가 네놈 딸일지도 모른다고 했어, 안 했어?”

송진우는 숨을 참던 와중에도 우주의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당혹과 허탈이 읽혔다. 한계에 다다른 듯 송진우의 손이 다급하게 시트 위를 쳐 대자 우주는 잡고 있던 멱을 침대 위에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아아악-

분에 못이긴 우주가 침대를 뒤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속에 차오른 울분이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재유가 옳았다. 이런 놈을 미리 곤죽이 되도록 때려 두길 잘했다. 그런 개소리를 듣고도 가만있으면 사람이 아니지.

“잘 들어요. 송진우 이 개새끼야.”

우주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아직도 고꾸라져 있는 남자의 뺨을 툭툭 쳤다. 크게 치켜뜬 우주의 눈이 광기로 희번덕거렸다.

“네 놈이 이제까지 살면서 이룬 거, 얻은 거, 감춰 둔 거. 그게 너한테 소중한 거라면 이제부턴 눈 부릅뜨고 잘 지켜야 될 거야. 발랑 까진 네 딸내미까지 포함해서. 앞으로 재유랑 희지 앞에 네놈이랑 네 딸년 낯짝 들이대는 순간 내가 다 박살 낼 거거든?”

이 분노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 틀어박혀 일만 하면서 무료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러다 재유를 다시 만나게 돼서 재미없던 일상이 흥분과 기대로 채워지고 있었는데.

“이 미친 새끼가… 네가 뭔데?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 함부로 지현이를 들먹거려?”

송진우가 뺨에 경련을 일으키며 되받아쳤다.

“허, 송진우 씨. 내가 너보단 어려도 네깟 놈 인생 조지는 거 못 할 만큼 착하진 않거든? 내가 못 할 것 같으면, 한번 해 봐. 어떤 꼴 나는지 감수는 하고.”

그런데 지금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옥죄고 싶었다. 처단하고 싶었다. 재기하지 못하도록. 그게 정당하고 옳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야 재유에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재유를 보며 조심스럽게 미래를 그려 볼 수 있게 됐는데.

그 바람을 송진우가 앗아갈 것만 같았다. 또 헤어지게 되지 않을까 무서워 죽을 것 같다.

송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악에 받친 눈으로 노려보았다. 우주도 지지 않고 냉담한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왜? 너도 재유 딸 건드렸는데 네 딸만 꽃밭에 놔두려고 했어? 그렇겐 안 되지. 네가 무슨 생각으로 돈도 싫다, 희지 안부 좀 알려 달라 이딴 식으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재유랑 희지 건드릴 거면 네 거 다 뺏길 각오하고 들이대. 알았어?”

“미… 미친놈.”

우주는 잠시간 말없이 송진우를 노려보았다. 협박이자 경고의 눈빛이었다. 중년의 남자는 살기 어린 침묵이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성한 팔을 짚으며 침대 모퉁이로 몸을 웅크리는 모습에 우주는 조소를 지으며 병실을 나섰다.

***

0.0001% 불일치.

의뢰인 1 한재유(M) & 의뢰인 2 한희지(F)는 생물학적으로 친자관계임을 반영하는 근거가 없음.

하. 하하, 하하하.

머리를 떨구고 눈을 감은 우주의 어깨가 공허하고 바싹 마른 웃음으로 들썩거렸다. 괴로운 건지, 기쁜 건지도 분간이 안 갔다.

희지가 재유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후로 만 하루가 지났다.

어젠 결국 재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이따금 울리는 그의 전화도 받지 않고 그 길로 바로 집으로 향했다.

우주는 유전자 검사 결과가 집으로 도착했는데도 바로 열어 보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평소엔 잘 마시지 않는 위스키를 꺼내 쓰러져 잠들 때까지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았고, 마실수록 떠오르는 얼굴은 고통을 더해 주었다.

삼계탕 사 간다는 약속도 어기고, 몇 번이나 걸려온 전화도 무시한 채 회피하고 미뤄 뒀던 진실은….

희지가 네 아이가 아니었네. 하하.

왜 지금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됐을까. 태어나기 전에 알았다면, 아니 태어나고도 아이에게 정들기 전에 알았다면 우린 달라졌을까.

헛소리다. 헛꿈일 뿐이다. 이제 와 달라질 건 전혀 없는데 그런 가정은 아무런 힘이 없다. 지난 세월이 야속하고 허무할 뿐.

지금에 와서는 이 망연한 사실을 덮어야 할지 들춰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괴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파 위에 놓인 핸드폰이 또 울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재유였다.

절망스럽게도 이렇게 힘들고 괴로울 때 가장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재유였다. 손잡아 줬으면 좋겠고 안아 줬으면 좋겠고 머리를 쓸어내리며 토닥여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쉽사리 핸드폰에 손이 가질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던 진동이 뚝 끊겼다.

네가 뭘 어쩔 건데.

우주는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그를 보는 게 괴롭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 다시 헤어졌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잊으려고 발버둥 치다 마음에도 없는 결혼까지 했었으면서. 만날 수 없는 그의 뒤나 몰래 캐고 다녔으면서.

소심하게 철벽 치던 재유가 전화해 줬는데 왜 받지를 못하는 건데…. 지금도 미치도록 보고 싶으면서.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욱신거리는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누르자 물기가 배어 나왔다.

우주는 기운 없는 몸을 소파 위로 뉘었다. 다리를 질질 올리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흐느꼈다.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뒀다.

거실 한편에 유일하게 밝혀 놓은 스탠드 조명의 따뜻한 빛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지만, 오로지 자신만의 공간으로만 생각했던 이 집은 오늘따라 무척이나 춥고 쓸쓸했다.

재유를 데리고 왔을 땐 어느 곳을 바라보더라도 집이 꽉 차 보이고 훈기가 가득했는데.

네 옆으로 가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 재유야.

우주는 재유가 앉았었던 소파의 한 귀퉁이에 몸을 더 깊숙이 묻었다. 이미 그의 체취나 향기는 사라졌어도, 몸을 구길 대로 구겨서 웅크려 놓고 그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의 자식인지도 모르고 젊은 날을 애 키우는 데에만 써 버린 불쌍한 놈. 그런 놈을 내내 사랑해 왔던 불쌍한 나.

재유를 처음 만났을 땐 하루빨리 성인이 되기만을 바랐었다. 얼른 커서 얼른 뭐든 배우고 열심히 살다 보면 사회에서 자리 잡아 원하는 삶을 거머쥘 줄 알았다. 어른이 되기만 한다면.

그 원하는 삶이란, 그때도 지금도 ‘재유와 함께 하는 삶’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내 인생 내 뜻대로’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살아온 삶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의 강압에 밀리고, 장인애의 등장에 좌절하고, 어머니의 애원에 꺾이고, 이젠 송진우까지 등장해 지나온 인생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얼마나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삶이었는지. ‘내 뜻대로’가 참 안 된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사는 건 참 힘들고 어렵다. 이게 다가 아니라는 듯 늘 이면을 보여 준다.

짧게 울린 진동에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우주야 무슨 일 있어? 걱정되니까 전화해 줘.]

우주는 누운 채로 핸드폰에 찍힌 글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걱정한다고, 무슨 일 있냐고, 전화해 달라고.

치잇… 아랫입술이 들썩거리며 삐죽 튀어나왔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아니면 동시에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걱정하는 거였으면 빨리 좀 알려 주지. 어린애 같은 유치한 감정이 들었다. 좋으면서도 밉고, 미우면서도 보고 싶었다.

이 상황에 재유 문자는 참 시의적절했다. 액정 속 글자에서 재유의 목소리가 들리고, 재유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배어든 것 같았다.

‘내 뜻대로’의 삶을 방해한 사람들 때문에 그는 늘 도망자였다.

수용 범위를 넘어선 불행들이 겹쳐져서, 남들의 시선이 무섭고 두려워서, 아빠로서 의무와 책임을 저버릴 수 없어서.

그랬던 재유가 지금은 곁에 있다. 연락 없는 걸 걱정하고, 자신을 필요로 한다.

우주는 그게 너무 안심이 돼서 질질 눈물이 나고, 하하 웃음이 났다.

그랬다. 삶은 이게 다가 아니라는 듯 늘 이면을 보여 준다. 좌절과 고통뿐 아니라 용기와 희망까지도.

재유를 처음 만나고 16년이란 시간이 지날 동안, 우리가 헤어졌던 게 허무하고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으니, 곧 그에게 갈 것이다.

우주는 웅크린 몸을 일으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밤새 퍼마신 술, 치열한 생각과 고민, 재유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 감정적 고뇌도 모두 털어냈다.

지금이야말로 두 다리를 바닥에 딱 붙이고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 굳건하고 꼿꼿하게. 그래야 저보다 더 휘청거릴지 모를 재유를 지탱할 수 있을 테니까.

재유가 걱정된다니까 가야지. 가라고 하면 안 가지만, 오라고 하면 와야 한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우주는 무겁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적었다.

[지금 가도 돼?]

[언제는 내 허락받고 병원 왔어?]

적어 보낸 말은 비난이면서 빨리 안 오고 뭐 하냐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우주의 얼굴에 울음보다 웃음이 더 짙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송진우 따위에 휘둘리는 건 지는 거다. 그렇게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며 우주는 이를 깨끗이 닦고 몸도 개운하게 씻었다.

집을 나서 병원으로 가는 길이 무거우면서도 가벼웠다. 이상한 느낌이다. 발길을 질질 끄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재유를 보면 말해 줘야겠다. 너 때문에 힘들었는데, 너 때문에 다 괜찮아졌다고. 그러니까 너는 나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그냥 웃어 주라고.

***

우주는 좌측 복도를 꺾어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들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했다. 손에는 희지에게 줄 쿠키와 음료가 들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재유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늘 하던 대로 희지의 병실 문을 먼저 두드렸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들어가 보니 베드가 비어 있었다. 저녁 타임 간병인이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희지는 잠깐 전화한다고 나갔어요.”

“아, 네.”

우주는 손에 든 꾸러미를 내려놓고 병실 밖을 나와 야외정원 입구로 향했다.

간병인 말대로 희지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얕은 돌을 따라 희지가 있는 벤치 쪽으로 간 우주는 거리를 조금 띄운 채 걸음을 멈췄다.

“…….”

막상 희지를 보자 마음이 복잡해지고 당혹감이 일었다. 저 어린것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굳이 이제 와 뭘 확인하겠다고. 희지가 재유의 딸이 아닌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는데.

“…지금 막 오셨어요. 네. 또 전화할게요.”

기척을 눈치챈 희지가 이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두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우주는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희지를 향해 웃어 주었다.

희지는 영선이 고모라는 말과 함께 어서 받아 보라며 핸드폰을 쥔 손에 반동을 주었다. 우주는 받아든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고 희지에게 양해를 구하듯 눈짓을 하며 다시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영선아.”

수화기 너머에서는 대답 대신 깊게 내쉬는 숨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고비를 한 단계 넘긴 후에 내쉬는 안도 같은 것이었다.

“얘기해 봤어?”

-어. 충격이 크긴 했는데, 조금씩 받아들이는 모양이야.

영선은 아빠가 왜 갑자기 자신만 보면 발작을 해 대는지 희지에게 설명을 한 참이었다. 아주머니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은 영선은 우주와도 몇 번 통화를 했었다.

그녀는 뜬금없는 우주의 등장에 반가우면서도 당황한 듯,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재회의 시점이 범상치 않은 사건 속에서 벌어진지라, 우주와 재유의 관계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것은 이 상황에 다소 번거로운 작업쯤으로 치부했다.

-재유는 여전히 그래?

“…제일 답답해하고 있지. 희지 달래 주고 싶어서 미치는데, 얼굴만 봤다 하면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희지는 뭐래?”

희지 쪽을 힐긋 보니 난간 너머의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무슨 표정을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우주는 희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귀에 댄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내가 달랜다고 되나. 그냥,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야. 아플 때 옆에 있어 줘야 될 아빠가 그러고 있으니.

희지의 어깨가 들썩였다. 눈물을 훔치는 것 같다가 곧바로 환자복 위에 걸친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데크 바닥의 조명이 희지의 허리 부근까지만 밝히고 있어서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더 왜소해 보였다. 저 조그만 머릿속이 얼마나 진창일까. 이번에는 우주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요즘은 친구들이 놀러 와서 마냥 축 처져 있진 않아. 한동안은 핸드폰도 안 쳐다보더니 그래도 친구들 연락받고 나서는 기분이 많이 나아진 모양이야.”

-다행이다. 나라도 옆에 있었으면 희지가 덜 힘들 텐데…. 그나저나 너도 양쪽 왔다 갔다 힘들어서 어쩌냐.

영선은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처지를 한탄하며 절절맸다.

“너랑 전화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좋아졌어. 너랑 너희 어머니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너희 어머니도 장운시에서 왔다 갔다 많이 힘드실 텐데.”

-울 엄마 재유 아들처럼 생각해. 그래도 네가 이것저것 챙겨 줘서 좋아하시더라.

“내가 뭐, 한 게 있나.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또 전화할게. 희지한테 가 봐야겠다.”

-그래. 잘 달래 줘. 힘들면 아무 때나 전화해도 된다고 꼭 얘기해 주고.

영선은 이미 희지에게도 여러 번 했을 당부를 우주에게도 다짐받은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우주는 천천히 희지에게 다가가 두 보쯤 간격을 두고 멈춰 섰다. 어깨를 움츠리다 돌아선 희지는 역시나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영선이가 통화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 달래.”

“…네.”

우주는 희지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춥지? 삼촌이 간식거리 사 왔는데 들어가서 먹을래?”

“…….”

발치를 내려다보던 희지가 느리게 고개를 저어 먹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희지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상세 불명의 공포증으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었다. 길 가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끌려가 정신을 잃도록 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주머니와 있을 때나 친구들이 문병을 왔을 땐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는데, 잘 때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복도에서 낯선 사람을 마주치면 깜짝깜짝 놀라며 불안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고민 끝에 아주머니는 영선에게 상황을 알렸고, 희지는 영선과 하루 두 번 꼬박꼬박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재유 다음으로 심리적 유대가 깊은 사람이었기에 마음을 다잡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빠가 자신만 보면 왜 발작을 일으키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희지는 조용히 감정을 삭이며 저 나름대로 상황을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눈에 띄는 감정 변화 없이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여느 10대 소녀 같지 않은 게 오히려 더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애는 애다. 겨우 열다섯 살인 희지가 겪기엔 감당하기 힘들게 분명했다. 우주는 칫솔 두 개와 친자가 아니라는 감식 결과지가 떠올랐다. 자신의 성급한 행동이 죄책감이 되어 마음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그럼 녹차라테라도 마시자. 좀 식었겠지만 그래도 마실만 할 거야.”

우주는 희지의 어깨를 감싼 채 병실로 이끌었다. 아직은 움직임이 불편한 듯 느리게 걷는 희지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병동 복도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와 계셨다.

“아이고, 같이 있었구나. 화장실에도 없길래 어디 갔나 했지.”

“할머니….”

희지는 팔을 뻗으며 다가가더니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아 침대로 옮겨 앉았다. 아무래도 우주보단 편하게 생각되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니 말투에 애교가 조금 묻어났다.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두세 번 병원을 방문했다. 새로 옮긴 특실이 한결 편해졌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다. 간병을 마치면 주로 재유의 집에 머물렀는데, 병실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예 간병인 대신 주무시고 가기도 하셨다.

희지 역시 새로운 병실에 적응했다. 아빠가 부재한 이상한 상황에서 오랜만에 나타나 좋은 병실로 바꿔 주고, 달달한 간식거리를 사다 주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는 우주 삼촌에게도 서먹한 거리감을 좁히고 점점 경계의 눈빛을 누그러트렸다.

우주는 약삭빠르게 7년 전에 썼던 방법을 또 써먹었다. 태블릿PC 두 대로 희지가 좋아할 만한 게임을 다운받아 함께 게임을 하며 친해지는 재미에 맛이 들렸다. 재유와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진 것과 더불어 병원 생활의 또 다른 활력이었다.

우주는 음료를 꺼내 희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엷게 미소를 지어 준 희지는 아직 따끈한 테이크아웃 잔에 입술을 갖다 댔다.

“참, 오늘 희지 친구 자고 가기로 했대.”

아주머니는 달달한 커피를 홀짝이며 말씀하셨다.

“그래? 친한 친구니?”

“거, 희지 말로는 ‘찐친’이라더라. 그게 뭔 말이냐?”

“제일 친한 친구요. 베스트 프렌드, 뭐 그런 거예요. 맞지, 희지야?”

“네.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친구예요. 지금 학원 끝날 시간이라 한 30분 있다 올 거예요.”

희지는 친구 얘기를 하더니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찐친’이 자고 가는 게 꽤나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친구는 부모님 허락은 받았대?”

“네. 친구 부모님도 울 아빠 알고 아빠도 걔 부모님이랑 다 알아서 옛날부터 한 번씩 같이 자고 그랬어요. 아빠도 아까 재밌게 놀라고 톡 왔어요.”

“…아빠한테 톡 보냈었어?”

“그냥… 오늘 친구가 자고 갈 거라고만 했어요.”

시시때때로 기프티콘을 날려 댄 보람이 있나 보다. 핸드폰을 붙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재유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럼 삼촌이 맛있는 거 사다 줘야겠네? 치킨 어때? 아님 피자?”

“에잉? 밥 안 먹고? 희지 너 아까 저녁도 안 먹었잖아. 밥 차려 논 거 아직 있는데.”

치킨이나 피자 따위를 한 끼 식사로 치지 않는 아주머니가 못마땅한 얼굴로 희지와 우주를 다그쳤다.

“할머니, 나 친구랑 같이 먹을래요. 걔도 밥 안 먹고 올 텐데.”

아주머니는 그럼 밥 한 숟갈만 먹어 두자 하시고, 희지는 피자가 먹고 싶다며 아웅다웅이었다. 우주는 그 사이에서 밥이랑 피자 둘 다 조금씩 먹으면 된다, 중재하며 핸드폰으로 배달 앱을 찾았다.

“아빠는 뭐 하고 있어요?”

“이제 가 봐야지. 삼촌도 막 병원에 온 거거든.”

“…이따 친구랑 아빠 보러 가도 돼요?”

“흠….”

우주는 어떤 답을 해 줘야 할지 고민했다. 잦은 발작 이후로 두 사람이 얼굴을 못 본 지 일주일째였다. 희지에게 톡을 받아서 재유의 기분은 나아졌겠지만, 아직은 방심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나서 주셨다.

“희지야. 할머니 일찍 들어갈 거니까 일단 오늘은 네 찐친이랑 둘이서 신나게 노는 것만 생각해. 너 다 나으면 맨날 지겹게 아빠 볼 텐데 뭘.”

“그게 아니라….”

“알어. 많이 섭섭한 거. 아빠도 너한테 많이 미안하고 면목 없어 해. 우리가 조금만 기다려주자. 네 아빠 뻔하잖아. 너밖에 모르는 팔불출인데 그 성격 어디 가냐? 금세 돌아와서 너 옆에 착 끼고 부둥부둥 해 줄 거니까 몸이나 빨리 낫고 아빠 걱정해.”

아주머니는 희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평소의 명랑한 목소리로 사안의 경중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일단은 피자 맛있게 먹고, 친구랑도 재밌게 놀아. 알았지?”

“네….”

희지는 서운함에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친구와 보낼 시간이 기대되는 모양인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희지에게 아빠를 돌려줘야 했다. 친할머니처럼 생각하는 아주머니만 못하겠지만, 우주도 재유의 딸을 위해 노력하는 어른이고 싶었다. 골치 아픈 일들은 어른들에게 맡겨 두고, 희지가 또래들처럼 외모나 이성에 대한 고민만 했으면 좋겠다.

우주는 피자를 결제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며 희지를 향해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대고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희지를 보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서로만을 믿고 의지했던 귀엽고 안쓰러운 부녀의 상봉을 하루빨리 보고 싶었다.

***

우주는 재유의 병실로 향했다. 901호에서 902호로 가는 길이지만, 입구가 나란히 붙어 있지는 않았다.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꺾자, 맞은편 복도에서 나타난 재유와 입구에서 딱 마주쳤다.

“재유야.”

우주는 자리에서 멈칫했다. 외부로 통하는 문은 어디에도 없는데 어디선가 조각 바람이 불어와 그의 주위로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환자복을 입은 초췌한 모습의 재유가 이쪽을 보며 조그맣게 웃고 있었다. 이제 왔냐고, 어서 오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고작 하루 못 본 것뿐인데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을 마주한 것처럼 가슴 속이 뭉클했다. 이제 안 보고는 못 살겠다.

“왔어?”

“응… 많이 기다렸어?”

“기다리긴…. 들어가자.”

재유가 쑥스러운 듯 팔을 감아 제 상박을 쓸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조금 전의 대화가 왠지 감동스러워 ‘들어가자’는 그의 말을 속으로 따라 했다.

“주사 뺐네? 왜?”

재유의 어깨를 감싸고 병실로 들어온 우주는 링거대 없이 가뿐해진 거동에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방금 뺐어. 영양제뿐인데 더 맞을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래도 된대?”

“응. 크게 상관없다던데?”

“그래? 그럼 나한테 말하고 같이 가지. 아님 여기서 해 달라고 해도 되는데.”

“그냥, 병실에만 있기 갑갑해서.”

재유를 침대에 눕히려는데, 그가 되려 팔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넓은 자리에 자신을 앉혀 두고 정작 저는 1인용 소파에 앉으려는 걸, 우주가 다시 끌어당겨 옆자리에 바짝 앉게 했다.

무릎이 닿아 환자복과 면바지가 슬슬 쓸리는 소리가 났다. 우주는 재유의 두 손을 잡고 어깨를 틀어 더 가까이 마주 보았다. 아직 손가락에 깁스를 풀지 않아서 오른손은 조심스럽게 만졌다.

“밥은… 먹었어?”

“먹었지. 안 먹으면 네가 또 잔소리할 거니까.”

“잘 아네.”

우주는 기특하다는 듯 재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가까이 다가선 얼굴에 열없이 움츠러든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저씨 주제에 예쁘고 귀엽고 참 별일이다.

“그렇다고 이제 영양제도 안 맞는 거야? 너 영양실조인 거 까먹었어?”

“네가 몸에 좋은 거 많이 사다 줘서 이제 충분하거든? 너무 잘 먹어서 살찔 것 같다고.”

“더 쪄도 돼. 포동포동한 모습도 궁금한데 난?”

툭툭 불거진 손가락 뼈마디가 적나라하게 만져지는데 살찐다고 엄살이라니. 우주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재유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말랑말랑한 살집의 촉감이 벌써부터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흐뭇했다. 빨리 더 살찌우고 싶었다.

“어제… 온대 놓고 못 와서 미안해.”

“많이 바빴니?”

“응. 조금….”

이번엔 우주가 슬쩍 눈을 피했다. 말도 없이 송진우를 만나고 감식 결과에 괴로워하느라 온다는 약속도 못 지켰으니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미리 연락만 해 주면 괜찮아. 걱정했으니까.”

“…….”

우주의 미간이 미안함과 안도감으로 우그러졌다. 걱정했다는 말을 들으니 용기가 났는지도 모른다. 우주는 마른침을 삼키고 재유의 목 언저리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사실, 어제… 송진우 씨 만났어.”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재유의 입에서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샜다. 자신을 다그치지 않을까 염려하던 우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재유의 눈을 봤다. 당황과 혼란이 짧은 순간 읽혔지만, 이내 차분하게 눈빛을 수습하며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합의 때문에?”

“그것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참. 합의는 잘됐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자 재유가 고개를 기울여 걱정스레 얼굴을 살폈다.

“너한테 그런 일까지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근데… 이젠 그 사람 만나지 마.”

그의 허락 없이 이것저것 손쓴 차에 마음이 조금 찔리고 있었는데, ‘그런 일’이라 칭하며 선을 긋는 듯한 말에 문득 서운했다.

“재유야.”

우주는 묵직하게 이름을 부르고선 입매를 굳혔다.

“너랑 희지 관련된 일이 나한텐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 일인 거, 정말 몰라?”

“…….”

“아니야?”

재유는 한 번 더 되묻는 목소리에 잡혔던 손을 풀고 반대로 우주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나도 하나 물어볼게. 솔직하게 말해 줘.”

우주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해진 그의 눈이 더없이 맑아 보였다. 까만 눈동자를 감싼 눈꺼풀이 감겼다 뜨였다. 그 안에 담긴 투명한 눈망울이 올곧게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나도 다 말할 테니 너도 다 털어놓으라는 듯, 서로 감추지 말고 다 꺼내 보이자고,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나 쓰러졌던 날, 주머니에 든 거 말이야. 간호사 중에 옷 챙겨 뒀다가 다시 갖다 줬다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 네가 가져간 거… 맞지?”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는 조금 긴장한 듯했다. 우주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들썽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래. 내가 가져갔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유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도 번졌다.

“미안해. 멋대로 가져가서. 그리고… 거짓말해서.”

“넌 미안하다고 하지 마. 미안할 짓은 내가 했지. 앞으로도 할 거고.”

재유는 이제 와 뭘 더 숨길 게 있냐며, 바닥을 다 드러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또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려나 싶어 심장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재유는 잡은 손을 꼭 쥐고 그런 게 아니라는 듯 도리질을 치며 우주를 안심시켰다.

“인애 죽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얘긴데.”

“뭐? 인애?”

우주는 갑작스레 인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희지의 친자 여부가 화두에 오를까 봐 가슴이 죄어 왔다. 그 얘기를 재유에게 숨겨야 할지 밝혀야 할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았는데. 초조함에 이마를 문지르자 땀이 조금 배어 나왔다.

“엄마가 갑자기 없어져서 그런지, 희지가 완전 아빠 껌딱지가 돼서 퇴근하고 나면 나만 졸졸 쫓아다녔거든.”

“아….”

긴장이 풀리며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우주는 일단 안심하고 재유가 말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의 시선이 어깨너머 허공에 닿아 있었다.

“희지 때문에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밥 먹을 때도 내 무릎에 앉아서 먹으려고 하고, 장난감을 사다 줘도 조금 관심 갖다 말고, 진짜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었어. 잘 때도 옆에 딱 붙어서 목을 꼭 껴안고 자고, 내가 잠깐 등만 돌려도 엄청 서럽게 울었어. 그땐 나도 군인 신분으로 소스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라 벌이도 별로였고 일도 진짜….”

너무 힘들어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맨날 무거운 상자를 수십 개씩 나르고 팔이 빠져라 소스 저으면서 딸기잼 만들고 케첩 만들고… 일 끝날 때 되면 땀범벅이 될 정도로 푹 젖어서 집에 가는 길도 죽을 맛인 거야. 다리도 막 후들거리고. 근데 애 엄마가 없으니까 퇴근을 해도 쉴 시간이 없었거든. 오히려 퇴근 후가 더 바빴어. 장도 봐야 되지, 애도 봐야 되지, 빨래랑 청소도 해야 되지, 밥도 차리고 반찬도 만들어야 되지…. 그땐 하루하루가 정말 지옥 같았어.”

재유의 목소리가 점점 물기에 젖어 들었다. 우주는 괜찮다고 다독이듯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은 집안일 다 하고 방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데 희지가 몸을 날려서 내 위로 엎어지더라고. 딴에는 관심을 받고 싶어서 애교 부리고 장난을 친 건데, 난 희지 무릎에 옆구리를 맞아서 정말 억 소리도 못 할 정도로 너무 아픈 거야. 그때 희지한테 막 소리를 지르면서 짜증을 냈어. 아빠 힘든데 얌전히 좀 있지,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냐고 엄청 화를 냈거든.”

“…….”

“그랬더니 희지가… 웃더라고. 아빠가 무뚝뚝하게 소리 지르니까 잔뜩 겁에 질려서 얼굴이 바짝 굳었는데도… 날 보면서 그냥 웃어 주더라. 그날, 희지 재우고 나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겨우 세 살이었는데. 엄마 없어지고 나서 아빠도 없어질까 봐 얼마나 불안했겠어.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내가 너무했지.”

재유는 그때 일을 아직도 후회하는 듯 자책했다. 두 눈에 서서히 물막이 어리고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려 왔다. 우주도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가에 열이 올랐다.

“요즘 들어 그맘때 희지가 자꾸 생각나. 좀 더 잘해 줄걸. 좀 더 많이 안아 줄걸…. 그때 희지가 진짜 예쁘고 귀여울 때였는데.”

“…너도 겨우 스물두 살이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린 나이야…. 그런데도 혼자서 그렇게 예쁘고 착하게 잘 키웠잖아. 대단해 너. 정말 대단해.”

재유는 결국 눈에 매달린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그래서… 그래서 미안해, 우주야.”

“…뭐가?”

우주는 재유의 두 뺨을 감싸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 주며 되물었다.

“희지는….”

재유는 치미는 울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우주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희지는 내 딸이야.”

재유는 죄를 고하는 것처럼 힘겹게 말을 토해 냈다. 내내 그의 마음을 옥죄었을 납덩어리를 우주 앞에 힘겹게 펼쳐놓았다.

“…….”

우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물과 ‘희지는 나의 딸’이라는 새삼스러운 정의가 가슴을 비틀며 쥐어짜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무렴. 네 딸이고 말고. 네 딸이지 그럼.

친자가 맞거나 안 맞거나, 그게 뭐 대단할까. 그렇다고 15년 키운 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희지가 인애를 엄마로 알고 있으니까… 희지는 내 딸이고, 인애의 딸이야. 네가 그것만 이해해 준다면… 너한테 가고 싶어.”

재유가 우주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붙잡힌 손에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15년 전, 부정과 배신에 대한 죄책감,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는 감정으로 괴로웠던 시간들,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으며 편해지고 싶은 바람,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픈 열망까지.

“사랑해, 우주야.”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우주는 잠시 멍해졌다.

재유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변화를 시도하려 한다. 고여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미지의 방향으로 흘러가려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과 함께.

우주의 안에서, 내내 자신을 아프게 해왔던 뾰족한 것들이 속에서부터 울컥 치솟았다. 숨을 크게 내쉬자 그 뾰족한 가시가 목구멍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

우주는 잡힌 손을 당겨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품 안으로 밀려 들어온 그가 서럽게 흐느꼈다. 우주의 속도 뭉클하니 미어졌다. 고통과 행복이 동시에 밀려왔다. 회한 비슷한 감정도 느껴졌다.

재유는 우주가 유전자 감식을 한 것도, 희지가 친자가 아니라는 검사 결과도 알지 못했다. 아마 알고 싶지도 않을 거고, 칫솔을 어떻게 했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희지는 내 딸이야.

전혀 새롭지 않은 사실을 되짚어 말한 것은, 앞으로 우주에게 생길지 모르는 호기심이나 의심을 차단하려는 의지였다.

내 딸이 확실하니, 네가 가져간 칫솔은 잊어버리고 송진우를 다시 만나 그 이상을 캐내려 하지 말라고 못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앉았다. 우주의 안에 천근만근 무거운 비밀이 자리했다.

우주는 어깨에 기댄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얇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잘게 비집고 들어왔다. 손바닥의 감촉을 잔잔하게 느끼며 하릴없이 미소를 지었다.

우주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혼자 비밀을 묻기로 했다. 누구도 찾지 못하게 꽁꽁 싸매고, 밀봉한 비밀에 돌덩이를 매달아 심연에 가라앉혔다.

재유가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해 줬고, 나에게 오겠다 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네 딸이면, 내 자식도 돼.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끌어안은 어깨에 얼굴을 묻은 우주는 품 안에 들어온 그를 가슴에 새기듯 한참 동안 마주 안았다.

“나도 사랑해.”

가슴 속에 온기가 피어올랐다. 창문에 핀 성에꽃에 입바람을 불어 찬기를 녹게 하는 따스함이었다.

***

병실의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우주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서른다섯 먹은 남자 둘이서 소파에 딱 붙어 손 붙잡고 울고 껴안고 해서 그런가.

이미 날도 저물어 창밖으론 도시의 불빛이 무르익고 있었다. 공기가 달라지자 병실 안 풍경도 달라 보였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말랑말랑하고 쫀득쫀득한 ‘분위기’라는 것이 주위를 감돌았다.

아. 재유에게 키스하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뺨을 부여잡고 잘게 입을 맞추던 우주는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마지막으로 쪽 빨아들이고 나서야 얼굴을 놓아주었다. 부끄러움에 그러는지 재유는 감은 눈을 뜨지도 못했다. 색색거리는 뺨이 발갰다.

우주가 콧등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자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그가 그제야 눈을 떴다.

작은 눈코입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예쁜 얼굴이 콧김을 뿜으며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빨리 퇴원해서 집에 좀 데려갔으면 좋겠다. 괜히 2주일이나 입원시킨다고 했나 후회가 됐다. 재유가 그런 얼굴로 보고 있으니 바지 안쪽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방으로 들어갈까?”

“뭐? 안 돼.”

“주사도 뺐는데 뭐 어때.”

“아직 아주머니 안 가셨잖아. 좀 이따 여기로 오실 텐데.”

“아, 그러네.”

안 된다는 재유의 말에도 아쉬움이 묻어났다. 우주는 하는 수 없이 등을 바짝 당겨 안고서 다시 입술을 묻었다. 입가와 입술을 차례로 빨고, 조심스레 혀를 세워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입을 좀 더 벌리자 손쉽게 혀가 찾아졌다. 우주는 첫키스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맞물린 입술에 서서히 몸이 달아올랐다. 서로를 욕망하는 게 분명하게 느껴지는 두 몸이 소파 위에서 비비 틀리며 다리를 얽어 댔다.

재유의 등이 들썩거리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흥분에 더 흥분된 우주는 손을 내려 엉덩이 살집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점점 숨이 가빠지기는 우주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숨소리와 젖은 접촉음만이 병실을 채우고 있었다.

“잠, 잠깐만….”

환자복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데 재유가 다급하게 가슴팍을 밀어냈다. 입술을 빼앗겨 초조한 짐승을 달래듯이 재유가 턱을 붙잡고 짧게 여러 번 키스를 해 줬다.

“이러다 일내겠다. 지금 말고 나중에….”

우주의 뺨에 얇고 연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흐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파는 입구 바로 맞은편에 있어서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우주는 번들거리는 입가를 손으로 훔치고 엄지로 재유의 입술도 스윽 닦아 주었다. 재유가 우주의 손목을 붙잡고 키득거렸다. 우주의 입꼬리도 내려갈 줄을 몰랐다. 보기만 해도 좋아서 안달이 났다.

“면도한 지 얼마 안 됐구나?”

손가락으로 우주의 턱을 매만지며 재유가 말했다. 간지럽고 야릇한 감촉에 재유의 손을 감아쥐고 손가락마다 쪽쪽 입을 맞췄다.

“여기 오기 전에 씻고 왔어.”

“밥은 먹고 온 거야?”

“음, 아니? 그러고 보니 배고프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식욕이 돋았다. 좀 전까진 밥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어젯밤부터 술만 마신 탓에 하루종일 먹은 게 없었다. 성욕과 식욕은 닮은 구석이 있다더니, 채워지지 않은 성욕 대신인지 배 속이 텅 비었다는 게 이제야 의식이 됐다.

배에서 요란하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우주는 배를 움켜쥐며 재유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한테 맨날 밥 밥 거리더니 너는 왜 안 먹고 다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재유가 득달같이 나무랐다. 우주는 어리광부리듯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볼을 비벼 댔다. 실실 웃음이 났다.

“혼나니까 좋다.”

“뭐라는 거야.”

“더 혼내 줘.”

“못 살아, 진짜. 잠깐만 있어.”

재유는 냉장고를 뒤져 쟁반에 음식을 차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아주머니가 해 준 밑반찬들과 먹다 남은 볶음밥을 데워서 내온 것이었다.

“변변찮아서 어떡하지? 그냥 배달시킬까?”

“아니? 이게 좋아.”

“그래도 양이 모자랄 텐데…. 즉석밥 있는데 그거라도 더 먹을래?”

“어. 주세요.”

재유는 볼이 미어터지게 볶음밥을 욱여넣은 우주를 흘기면서 즉석밥을 찾았다. 그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음식을 퍽퍽 씹으면서도 우주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았다.

혼자 산 지도 꽤 됐고 본가에도 가지 않았으니 우주의 밥은 늘 외식이나 배달 음식이었다. 음식 해 주는 사람을 쓰지도 않아서 누가 해 주는 밥을 먹는 게 정말 오랜만이다.

비록 냉장고에 남은 음식일 뿐이었지만, 재유가 차려 준 것이니 집밥을 먹는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아주머니의 소고기 장조림과 멸치볶음, 미역무침도 무척 훌륭한 맛이었다.

재유는 우주에게 미래를 그려 주는 사람이었다. 곁에 있으면 늘 그랬다. 자신이 앞으로 되고 싶은 모습과 살고 싶은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멋진 집, 행복한 삶, 영원한 사랑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조금 더 일상적인 생활의 정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를테면 저녁으로 차린 찌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거나, 밥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무릎에 누웠을 때처럼 맨들맨들한 살의 감촉이 느껴진다든가, 자기 전 침대에 드리운 조명에 그의 얼굴이 주황빛으로 물든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구체적인 영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럴 때면 우주의 가슴이 절로 뻐근해졌다.

재유는 쟁반 옆에 즉석밥을 데워다 주고 물도 떠다 주었다. 그때 환자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하던 얼굴이 화하게 피어났다.

“희지가 사진 보냈어. 볼래?”

“응.”

재유가 바짝 다가앉아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직 누르스름한 멍이 남은 얼굴에 알록달록한 캐릭터 밴드를 붙인 희지가 친구와 함께 병실 이곳저곳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재유는 손가락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본 사진을 보고 또 봤다. 눈가에 찔끔 눈물도 맺혔다.

“이쁘다. 희지.”

우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까다로운 척 희지 사진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마침내 결론지었다는 듯 신중하게 말했다. 재유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이쪽을 보며 쌜쭉 웃었다.

“그치? 이쁘지?”

“응. 너 닮아서 이뻐.”

재유는 사진과 우주를 번갈아 보고 히죽히죽 웃으며 코를 훌쩍였다. 정말 자기를 닮아 이쁜 건지 계속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우주는 입에 든 밥을 꿀꺽 삼키고 ‘아이고 이뻐라’ 하며 재유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나, 어제 희지 보러 갔었어.”

속삭이듯 고백하는 재유가 멋쩍게 고개를 숙였다. 우주는 새로 뜬 밥을 입속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정말? 괜찮았어? 아프거나 그러지 않았어?”

“응. 잠든 거 몰래 본 거지만. 그래도 전처럼 숨차거나 심장이 조이고 그러진 않더라.”

“잘됐다, 진짜. 앞으로 조금씩 시도해 보자. 점점 좋아질 거야.”

“그래야지.”

희지는 친구와 함께여서 그런지, 아까 영선과 통화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피자를 먹어서 그런 건지 오늘따라 서비스가 후했다. 저 이쁘다는 소릴 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샤랄라 넘기며 외모를 뽐내는 익살스러운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재유는 사진을 받은 감동을 폭풍 문자로 되돌려줬다. 예쁘게 잘 나왔다, 몸은 괜찮냐, 더 먹고 싶은 건 없냐, 아빠도 같이 놀고 싶다, 양치는 꼭 하고 자야 된다 등등 잔소리를 섞어서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자판 위에 부지런히 도도독거렸다. 정작 희지는 노느라 답장도 없는데 저 혼자 열심히 쓰고 또 썼다. 밥을 먹던 우주는 금세 뒷전이 되었지만, 재유의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우주의 핸드폰도 부르르 떨렸다.

[삼촌. 피자 잘 먹었어요. 울 아빠랑 재밌게 놀아 줘요.]

희지는 우주에게 아빠의 안부를 묻는 문자를 종종 보내곤 했다.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희지도 아빠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웃기는 부녀다. 질투도 좀 나고.

우주는 상체를 조금 떨어뜨리고 몰래 사진을 찍었다. 문자를 보내는 재유의 진지한 옆모습이 아주 잘 찍혔다. 방금 찍은 사진을 희지에게 전송하며 [니 아빠 이러고 논다]는 문자를 적어 보냈다. [ㅋㅋㅋㅋㅋㅋㅋ]가 한참 만에 답장으로 왔다.

다 먹은 쟁반을 치우자 아주머니가 노크를 하며 병실로 오셨다. 애들이랑 피자 한 조각 먹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우주 더러 희지 병실에 한 번씩 들여다보라 당부하셨다. 빈 반찬 통을 챙겨 나간 아주머니를 배웅한 두 사람은, 또 새로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너 씻고 나왔다며. 나 혼자 씻을 수 있다니까?”

“또 씻어도 돼. 나 벌써 땀 냄새나.”

우주는 니트의 앞섶을 잡아 코밑으로 끌어당기며 킁킁댔다.

“거짓말.”

“진짜야. 너 그동안 링거 때문에 시원하게 못 씻었잖아. 씻겨 준대도 고집부리고.”

“그러니까, 주사도 뺐으니까 이젠 괜찮다고.”

“그래도 아직 깁스하고 있으니까 안 돼. 내가 씻겨 줄게.”

우주는 재유의 허리를 잡고 들다시피 화장실 안의 샤워부스로 끌고 갔다.

“혼자 할 수 있다니까 왜 이렇게 유난인가 몰라, 진짜.”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유의 귓불이 벌겋게 익어 가고 있었다. 우주는 짐짓 그것을 못 본 체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잘 수납해 넣었다.

재유가 갈아입을 옷과 수건, 로션 등을 선반 구석에 정리해 두고 오른손에 감긴 깁스와 딱지가 생기기 시작한 상처 위의 드레싱을 조심스레 벗겨 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비닐과 수건을 동원해 칭칭 싸매 줬는데 이젠 제가 씻겨 줄 거니까 그런 번거로운 과정은 생략해도 될 터였다.

“왜? 나랑 같이 샤워할 생각 하니까 두근거려? 그냥 씻겨 주기만 할 건데.”

“아 뭐래.”

“벗겨 줄까? 옷.”

“…….”

그 말이 은밀한 신호가 되었는지 둘 다 말이 없었다. 밀고 당기는 장난기가 사라지고 떠도는 공기가 묵직해졌다. 잔잔한 수면 위에 금방이라도 바다 생물이 튀어 오를 듯 오묘한 긴장이 떠돌았다.

우주가 먼저 손을 뻗어 재유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곧 얼굴이 겹쳐지고 입술이 닿았다.

키스는 더디게 흘러갔다. 뺨에 손을 덮고 고개를 숙인 우주의 자세는 그를 덮칠 듯 호전적이면서도 입술을 잘게 물며 빨아들이는 행동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우주는 귓불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머리카락 새를 얽어서 더 끌어당겼다. 입 안에 머금은 입술을 혀로 살갑게 핥아 올리자 안긴 몸이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뒷덜미와 허리를 잡힌 채 품에 안긴 재유는 우주의 등을 가볍게 껴안았다.

우주는 입술을 맞붙인 채 아릿하게 조금 웃었다.

되돌아온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함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꿈이라면 너무 달콤한 꿈이다. 깬다면 잔혹한 꿈이 될 것이고.

가슴 속이 뻐근하게 차올랐다. 벅참과 그리움, 사랑스러움과 소중함 같은 감정이 소록소록 피어났다. 입술 사이로 새는 재유의 숨결이 볼을 간지럽히자 우주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혀로 입술을 핥고 코끝을 얕게 깨물었다.

“알았어. 네가 씻겨 줘. 아저씨 몸 다 됐다고 욕하지나 말고.”

자신 없어 하는 말투에 우주는 콧방귀를 뀌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처럼 삐쩍 말라도 오동통 살이 쪄도 예뻐 보일 걸 뭘 그리 걱정하나 몰랐다.

살살 옷을 벗기고 드러난 재유의 맨몸에 우주는 숨을 들이마신 채 침을 꼴깍였다.

애초에 게으름을 피우는 성격은 되지 못하고 몸과 손을 가만두지 못하는 생활 습관에 오랜 주방 생활로 다져진 마른 근육이 몸 곳곳에 균형 있게 잡혀 있었다. 조금 마른 게 영 안타까웠지만, 타고난 흰 피부와 탄성 있는 살결로 나이가 무색하게 보기 좋은 몸을 갖고 있었다. 은근하게 피어나오는 색기에도 정작 본인은 자각 없는 수더분함이 우주를 더 흥분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우주는 재유의 턱을 쥐고 살살 흔들며 가볍게 혼내듯 치아로 입술을 물었다 놓아주었다.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도 사랑스러울 거란 말을 해 준 적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나나 보다.

“손가락 아프면 말해.”

“너도 씻는다며.”

재유는 저만 벗고 있어서 조금 억울했는지 양말만 벗은 채 샤워기 물 온도를 맞추고 있는 우주에게 툴툴거렸다.

“…나중에. 지금은 다치게 할까 봐.”

우주는 그를 등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몸을 씻기는 과정은 담백하게 흘러갔다.

저도 옷을 벗고 그에게 몸을 치대고 싶은 욕구를 여러 번 참았다. 물이 튀든 옷이 젖든 상관없이 묵묵히 비누칠을 하고 살살 쓰다듬으며 거품을 씻겨 내렸다. 우주는 차오르는 성욕을 애써 외면하며 거품이 미끄러져 내린 맨살에 간간이 입술을 갖다 댔다.

재유는 벌게진 얼굴로 씻겨 주는 손길에 따라 몸을 숙이기도 하고 다리를 벌리기도 하며 차분하게 목욕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샤워부스의 유리벽을 통해 간간이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우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 일어나는 행위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나에게 오고 싶다는 말. 이제는 서로의 곁에 있기로 한 결심.

우주는 희지의 비밀을 속 깊은 곳에 묻기로 결심했고, 재유는 희지와 둘뿐이던 삶에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기라도 하듯 우주는 신중하게 팔과 다리를 꼭꼭 문질러 닦았고, 재유는 그런 우주를 보며 조용히 동조했다.

장차 달라질 앞으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이 필요한 것처럼, 과거를 매듭짓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우주와 재유는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엇갈린 시간과 빗나간 감정들을 추스르고, 서로의 고단함이 거품과 함께 물에 씻겨 내려가길 바라며 쇄신의 과정은 한동안 지속됐다. 씻김으로 과거가 사라지거나 잊혀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덧씌울 앞날이 두 사람 앞에 놓여져 있었다. 그러니 서로의 곁에서 조금씩 웃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불편하면 이쪽으로 좀 더 와.”

우주는 재유의 배려를 선뜻 받아들였다. 곁을 파고들 듯 그에게 바짝 붙어 편하게 자리를 확보했다.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히 넓은 침대인데도 재유의 배려가 지나쳐 오히려 이쪽 자리가 넉넉하게 남았다.

재유는 벽에 상체를 기대고 겨드랑이에 모로 누운 우주를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우주가 옆구리에 달라붙어 안겨 있는 꼴이었다.

병실의 모든 불을 끄고 나자 야경에 의지한 불빛들만이 버티컬 사이로 드문드문 비치고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재유의 표정까지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재유가 왼쪽 팔을 목 아래로 넣어 팔베개를 해 주었다. 우주도 오른팔을 겨드랑이 아래로 집어넣어 마른 몸을 둥글게 껴안았다. 가만가만 내쉬는 숨소리가 이마를 간지럽히고 귀와 맞붙은 그의 가슴팍에서 심장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함께 누워 보는지. 감회 어린 표정이 우주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너 다시 만났을 때. 우유 장례 치를 때 말이야.”

목욕 후 다시 깁스를 끼우고 드레싱을 덮은 손으로 우주의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그가 말문을 열었다.

“네가 아직도 날 좋아한다는 거 바로 알겠더라.”

재유는 쑥스러움에 말끝이 흐려졌다. 우주는 입을 헤벌리며 기대감이 비친 미소를 지었다. 이왕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말을 끝까지 하기로 마음먹은 듯 재유는 평정을 찾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어. 꼭 데이트 같다고. 우유 묻은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희지는 병원에서 울고 있을 텐데. 그런 마음이 들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내가 왜 이럴까, 죄책감이 생기면서도 네가 옆에 있는 게 너무 설레더라고.”

“근데 왜 안 그런 척했어? 솔직하게 말해 주지.”

우주는 지난 시간이 아쉽다는 듯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감추며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진짜 안 되는 줄 알았거든. 우리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안 좋은 상황에서 재회하기도 했고. 근데 어이없게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너무 많이 울어서 얼굴이 흉해 보이진 않을까, 무슨 말을 해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한테 안 질리고 계속 날 좋아해 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그런 생각 했어.

“예전에는 그런 생각이 들면 너한테도 미안하고 희지한테도 미안해서 내 욕심이 과한 것 같았어. 애 아빠가 이러면 안 되는데, 너한테도 너무 욕심부리면 안 되는데, 그랬거든. 널 마음껏 좋아하지도 못하고, 속 끓이면서 질투나 하고… 그런 마음 때문에 결과적으로 너만 상처받고 끝나 버렸지만.”

“알았으면 이제부턴 나한테 잘하면 되겠네.”

코끝이 알싸해진 느낌에 우주는 부러 심통 난 듯 뻐겨 댔다.

“아직도 그런 마음 안 드는 건 아니야. 지금도 너랑 희지한테 미안해. 근데….”

목이 메었는지 잠시 말을 쉬는 재유에게서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죄책감 때문에 의연한 척 냉정한 척 날 세우는 거 이제 싫어. 나도 너 너무 좋아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옛정이든 동정이든 네가 안 갔으면 좋겠고, 계속 나만 좋아했으면 좋겠고… 그냥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어. 안 그런 척 숨기고 헤어져 봤자 결국 또 만났고, 아직도 이렇게 좋은데 뭐 하러 그렇게 꽁하게 사나 싶더라고. 좋으면 그냥 좋은 건데. 그치?”

질기게 달라붙은 의무감과 죄책감 때문에 제 사랑도 지키지 못했던 나약한 남자였음을 시인한 그는 무언가 초월한 것처럼 눈매를 굳히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말은 눈을 제대로 맞추고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재유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 오늘 너한테 이 말을 들으려고… 이때껏 너 못 잊고 좋아해 왔던 것 같다.”

재유도 자세를 바르게 일으켜 우주를 두 팔로 감쌌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우주야. 우리… 같이 살자.”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스읍, 멍하니 숨을 죽였다. 아깐 예상치 못하게 사랑 고백을 하더니, 이젠 살림을 합치잔다. 우리 재유가 달라졌어요, 마음속 외침이 들려왔다. 우주는 팔을 뻗어 재유의 허리를 꼭 쥐고 그 말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다시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신… 희지 대학 들어갈 때, 그때 살자.”

곧바로 조건부가 붙어서 조금 김이 빠졌다. 그래도 아직 재유의 기습이 얼얼해서 우주는 숨을 가늘게 뱉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희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게 해 주고 싶어. 내 욕심인 건 알지만… 근데 나, 너랑 꼭 같이 살고 싶어. 네가 싫다고 해도 네 옆에 꼭 붙어서 살 거야. …그래도 돼?”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한다면서 미안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재유가 머뭇머뭇 뺨에 입을 맞췄다. 우주는 혀를 쯧 차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어떻게 널 이기겠냐. 이만큼 다가와 준 것만도 감지덕지지.

“하려면 제대로 해 줘야지.”

우주는 뒷머리를 끌어당기고는 입술을 포갰다. 저항 없이 딸려 들어온 몸이 긴장으로 굳어진 게 느껴졌다. 달래듯 재유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인 그가 입술을 맞댄 채 푸스스 웃었다.

“나 할 말 더 있어.”

멀어지려는 입술을 쫓아가듯 찾아 물던 우주가 아쉽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뭔데?”

“퇴원하면, 너희 부모님 뵈러 가자.”

우주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오늘 재유가 나를 기절시키려 작정을 했구나.

그는 조금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너희 형도 만나서 인사드리고.”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돼?”

재유는 우주의 가슴 부근을 바라보며 이마를 만지작댔다. 충동적으로 입에 낸 말은 아닌 듯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너희 부모님, 나한테도 그렇고 자식인 너한테도 모진 부분이 있다는 거 알아. 우리 모습이 그분들한테는 잘못이고 불효처럼 느껴지셨겠지.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닐 거거든. 너희 부모님 속을 다 알진 못하지만, 내가 겪어 봤던 그분들이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랑 다시 만나는 거, 언젠가는 알게 되실 텐데 다른 사람 통해서 아시는 것보다 우리가 먼저 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괜찮겠어?”

부모님 때문에 해묵은 상처로 그의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운 우주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재유가 마음먹어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먼저 인사드리는 건 자기도 생각 못 해 본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들이랑 같이 살 사람인데 모르는 얼굴도 아니고 이제 와서 뒤로 뺄 필요 뭐가 있어. 처음이야 물론 반대도 하실 거고 문전박대하실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인정해 주시겠지.”

“…….”

“혹시 알아? 이 질긴 것들, 그래 우리가 졌다, 하실지.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노력이라도 해 봐야지. 우리가 먼저 찾아뵙자.”

“너, 많이 달라졌구나.”

우주는 그의 손을 쥐고 심장에 가져다 댔다. 감정이 북받쳐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 부모님도 만나도 형도 만나러 가자.”

제 뜻을 이해해 준 게 고맙다는 듯 재유가 활짝 웃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행복하지만, 마음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 재유에게서 부모님 얘기를 들을 줄 몰랐다. 그것도 허락 비스무리한 걸 받으러 가자는 말을.

재유는 우주가 본가와 왕래하지 않고 부모님께 적지는 걸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게 여겨 왔다. 우리가 헤어졌던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반대였다. 두 번의 이별 모두 그랬다. 넘는 게 불가능해 보였던 부모님이라는 벽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재유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우주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재유는 장애물을 걷어내고 있었다. 과거에 우주가 같이 맞들고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염원했던 걸 그는 이제야 들어주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진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해결하려 한다.

재유가 마음을 먹고 발을 떼니 일이 진행이 된다. 다음 단계로 착착 넘어가진다.

역시 우주에게 미래를 그려 주는 사람은 재유뿐이었다.

“근데… 안 해 주는 거야?”

“응? 뭐가?”

“하려면 제대로 해야 된다며.”

지금이 키스할 타이밍 아니냐고, 이런 것까지 내 입으로 얘기해야 하냐는 표정으로 쌜쭉이는 재유 때문에 우주는 입이 반쯤 벌어졌다.

“안 되겠다. 내가 해 줘야지.”

재유가 턱을 감싸 쥐며 우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스윽 문질렀다. 어슴푸레한 빛이 재유의 얼굴을 훤히 비췄다. 곡선으로 휘어진 눈매가 웃고 있었다.

“…….”

우주는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재유가 손가락으로 우주의 아랫입술을 뒤집어 축축한 점막을 톡톡 두드렸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입술이 닿자 우주는 뒤늦게 웃었다.

“나 오늘 생일인가?”

우주는 커다란 손으로 재유의 귀와 뺨을 뒤덮고 입술을 맞붙이며 말했다. 재유도 식식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제 입술로 천천히 문질렀다. 얇고 부드러운 점막과 치아가 선명하게 만져졌다.

“아니다. 생일보다 더 완벽한 날이네.”

우주의 손이 뒤통수를 둥글게 쓰다듬고 목과 어깨로 미끄러져 갔다. 빳빳한 환자복의 질감이 손바닥에 닿고 상박을 지나 허리와 겨드랑이, 가슴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단추를 하나하나 끌러내는 손길에 재유가 어깨를 굳혔다. 스치는 정도였던 입술의 접촉을 힘을 주어 빨아들이면서 좀 더 빽빽하게 맞부딪혔다. 단추를 마저 풀어 낸 우주가 가슴께를 쓸며 어깨 뒤로 옷을 벗기자 제 손으로 씻겼던 하얀 몸이 드러났다.

우주의 가슴이 부풀며 큰 숨이 들어찼다. 딱 떨어지는 일자 어깨에 움푹 들어간 쇄골, 실내에서만 일한 탓에 웬만해서는 햇빛 볼 일 없는 깨끗하고 맑은 피부, 조금만 힘주어 만지면 금세 붉어지는 연한 살결, 숨을 내쉴 때만 슬쩍 드러나는 지방 없는 복근까지. 익히 알고 있지만, 언젠가부턴 상상으로만 떠올려야 했던 재유의 육체였다.

재유가 쑥스러워 눈을 피한 것도 모르고 우주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눈앞의 상체를 더듬었다. 팔을 감싸 몸을 가리려고 하자 우주가 부드러운 손길로 팔을 물리쳤다.

“아까 제대로 못 봤단 말이야.”

아랫배부터 위를 향해 쓸어올리는 손길에 재유는 흠칫 몸을 떨었다. 가슴까지 올라온 손이 왼쪽으로 흘러 톡 튀어나온 돌기를 지나자 긴장된 숨이 터져 나왔다.

“자기는 보여 주지도 않으면서.”

재유의 말에 우주가 곧바로 입술을 겹치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조심스레 재유를 자리에 쓰러뜨렸다. 베개에 닿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아직도 샴푸 향이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우리 자기 급하기는. 이제 곧 볼 건데.”

호색한 취급에 눈을 흘긴 재유가 양 볼을 꾹 눌러 우주를 응징했다. 짓눌린 뺨을 이리저리 비틀어 짜자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우그러졌다. 우주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털털 웃었다.

재유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찬찬히 더듬었다. 검지로 이마를 쓸고 짙고 빽빽한 눈썹을 따라 그리며 눈두덩의 굴곡을 따라 숱 많은 속눈썹을 간질였다.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을 새기려는 듯 손길은 느긋하고 시선은 꼼꼼했다.

얼굴 한가운데 우뚝 솟은 콧대를 여러 번 간질이며 미끄러진 손가락이 입술을 지나 뺨으로 향했다. 한껏 웃고 있는 우주의 얼굴 근육을 느끼며 귓불을 잡아당기고 목을 감싸 턱 끝에 살짝 입을 맞춘 재유는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속삭였다.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우주야.”

얌전히 얼굴을 내주던 우주는 손등으로 재유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랬구나…. 나만 그런 거 아니었네? 근데 난 너 만나고 매일매일 무서웠어. 네가 이번에도 밀어내면 어떡하나.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아님 끝까지 밀어붙여야 하나.”

웃는데도 울 듯한 얼굴로 우주가 말했다.

재유는 제 뺨을 쓰다듬는 손을 입술로 가져와 입을 맞췄다. 장난치는 분위기였다가도 쉽지 않았던 지난날로 인해 금세 시무룩해지는 우주가 안쓰러웠다.

“병원에서 같이 지내면서 네 옆에 있는 게 너무 좋은데, 가라고 할 때마다 불안해 미치는 줄 알았어. 내가 희지 일까지 너무 심하게 간섭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랑 내가 진짜 끝일 것 같아서 일부러 억지 부렸어.”

“…….”

“나 원래 그러잖아. 너랑 관련된 일엔 마음이 급급하고 주변 사정 상관없이 고집부리는 거. 근데 난 안 돼. 너 잃어 봤으니까… 다시 반복하는 거 싫으니까. 앞으로도 그럴지 몰라. 그래도 안 떠날 거지 이제?”

재유는 우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간절한 목소리와 애달픈 눈이 슬프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우주만 곁에 있으면 늘 이런 기분이었다.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재유는 목을 감싸며 얼굴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도 너 잃어 봤어. 너 없이 살아 봤자 좋은 것도 별로 없더라. 우리가 이제껏 만나면서 부모 반대도 겪어 보고 다른 사람 끼어들어서 오해도 하고 질투도 하고 또 각자 결혼도 해 봤는데, 이 나이 돼서 더 겪을 것도 없어.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무서울 것 같지도 않고. 내가 가라고 해도 너 안 떠날 거잖아. 그치?”

재유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입을 맞췄다. 거친 숨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팔로 지탱하던 우주의 몸이 마주 겹쳐지며 키스가 시작됐다. 이제까지의 그답지 않은 인내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거칠게 밀어붙이는 입술에 금세 호흡이 가빠졌다. 입술이 입술을 깨물고, 치아와 치아가 부딪히며 나누는 성급한 입맞춤은 두 사람 모두를 달아오르게 했다.

재유는 자신을 뒤덮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벗은 제 상체로 니트 안의 단단한 근육을 비비고 문질렀다. 우주의 한 손이 재유의 등허리 아래로 비집고 들어가 허리를 꼭 껴안았다. 살짝 들린 하체에 묵직한 그의 중심이 찌르고 들어왔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재유는 입술을 벌리고 더운 숨을 토해 내며 니트 안에 손을 넣어 맨 등을 쓰다듬었다.

“말이 돼? 좋아서 환장하겠는데 널 떠나는 게 가능하겠어? 지금도 네 안에 쑤셔 넣고 흔들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데.”

우주의 눈이 열기로 번뜩였다. 젖은 혀를 밀어 넣자 재유의 손톱이 등에 박혔다. 별것 아닌 접촉에도 우주는 쌓였던 성감이 폭발하듯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재유와 헤어진 7년 동안 섹스 없이 살아왔고 또 살아졌다. 쌓였을 땐 자위만으로 해소를 했고 딱히 부족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육체의 해갈을 위한 낯선 사람과의 섹스는, 끝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어릴 때 충분히 겪어 봤다. 그 허무함을 아는 우주에게 쾌락을 위한 하룻밤 인연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욕에 둔감하게 살아왔다고 해서 무뎌진 건 아니었다.

상대가 재유가 되고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잊고 지냈던 육체의 감각들이 단번에 솟구치고 있었다. 혈관 구석구석 피가 세차게 돌고 온몸이 하나의 감각기관이라도 되는 양 재유가 만지는 곳마다 예민하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주는 입술이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점막을 빨고 치열을 더듬으며 혀를 찾아 입 안 구석구석을 갖고 놀았다.

“말해 봐. 나 없을 때 내 생각 하면서 혼자 한 적 있어?”

재유가 숨을 헐떡이며 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옷 속에서 팔을 크게 휘저으며 니트를 위로 들췄다. 우주는 상체를 일으키고 옷을 벗어 침대 아래로 내던져 버렸다. 그 홀가분한 몸짓에 재유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치아로 깨물었다.

“장난해? 생각하기 싫은데도 떠올라서 미치는 줄 알았어.”

우주는 성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재유를 노려보았다. 바지의 버클을 풀고 골반까지 끌어 내리자 속옷 안에 갇힌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랫배에 찰싹 달라붙어 밴드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귀두가 살짝 젖어 있었다.

“…….”

재유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이 삼켜진 게 부끄러워 귀가 뜨끈뜨끈했다. 곧바로 상체를 숙인 우주가 귓불을 물고 핥았다. 맞닿은 아랫도리의 접촉이 아까보다 끈적해졌다.

두 개의 음경이 딱 붙어 아랫배 사이에서 비벼지고 뭉개졌다. 우주는 혀를 뾰족하게 세워 귓속을 핥고 귓불에 침을 적셔가며 빨아 댔다. 귀에서 나는 적나라한 소리에 재유는 다리를 베베 꼬며 콧소리를 닮은 신음과 함께 거친 숨을 쏟아냈다.

“나도… 네가 내 엉덩이에 쑤신 다음에… 흐으, 긁어 주고 박아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어. 윽….”

말하면서도 부끄러움에 온몸이 타는 듯 화끈거렸지만, 서른다섯이나 먹어서 성욕을 감추는 것도 모양 빠지는 짓이었다. 재유의 말에 우주의 콧김이 흥분한 소처럼 씩씩거렸다. 목덜미에 코를 박은 그가 빳빳하게 혀를 펼쳐 귀 뒷부분을 검질기게 핥았다.

엉덩이에 큼지막한 두 손이 예고도 없이 팬티를 열고 쑥 들어왔다. 재유는 단단한 어깨에 팔을 감은 채 엉덩이를 띄웠다. 아랫배에 크기를 키운 퉁퉁한 성기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망측하지, 애 아빠가 그런, 생각하는 거….”

입으로는 아버지로서의 도덕적인 준칙을 말하면서 입을 헤벌린 채 아랫도리를 흔들었다. 우주가 코웃음을 쳤다. 재유의 얼굴엔 아직 미약한 죄책감과 수치심이 남아 있었다.

“아니? 너무 야하고 섹시해서 미치겠는데.”

우주는 보란 듯이 움켜쥔 엉덩이를 뭉개지도록 꽉 쥐어짜고 양옆으로 벌려 가며 음탕하게 주물러 댔다. 그럴수록 성기끼리의 접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숨기지 마.”

우주는 몸통으로 가슴을 꽉 눌러 무게를 더했다. 재유의 입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축축하게 흘러나왔다.

“으으… 답답해. 벗겨 줘.”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병원이지만, 모두가 잠들어 있는 듯한 적막한 시간이었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청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재유는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초겨울 바람 소리와 자동차 소음은 물론 병실 안의 냉장고 컴프레셔 소리, 가습기의 물소리까지 또렷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소리들이 그와 사랑을 나누는 소리와는 분리된 것처럼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지금 우주가 바지를 벗기려 두 발목을 잡아 올리는 바람에 엉덩이를 까고 있는 이 풍경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재유는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두 다리를 얌전히 내려준 우주는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고, 마치 재유의 몸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시선으로 집요하게 희롱했다. 눈을 번득이며 아랫입술을 혀로 적시고 내려다보는 얼굴이 못돼 보였다.

“누구 오는 거, 아니겠지?”

재유는 얼굴이 붉어진 채 괜한 말을 지껄였지만, 우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제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노골적인 시선이 창피하면서도 좋았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잊고 있던 욕망이 들끓었다.

“문 잠갔잖아. 걱정 마.”

우주와 헤어진 후로 재유에게 섹스는 과거의 추억이거나 청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먼 나라 얘기였다. 평생 안 하고 살 수도 있겠다고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우주가 다시 나타났다. 자신을 만지고 싶어 하고 안지 못해 안달하는 인생의 유일한 남자.

아까 씻겨 준답시고 몸 이곳저곳을 만질 때마다 발기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어찌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던지.

엉덩이에 꽂은 채 박아 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상상 속에서 수없이 자신에게 박아 대고 쑤셔 줬던 상대는 당연히 우주였다.

빨리 어떻게든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 우주의 시선만으로도 갈 것 같았다.

우주의 두 손이 목 아래로 향했다.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에 애가 타면서 숨이 조였다.

그의 몸이 기울어지며 입술이 닿았다. 재유는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열었다. 곧바로 축축한 혀가 들어와 입 안의 혀와 마주 닿았다. 입속에서 혀끝을 살랑살랑 간질이는 느낌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무게를 실어 아래로 내려간 우주의 두 손은 성적인 의도가 한층 짙어진 접촉으로 이어졌다. 판판한 가슴을 짓누르는가 하면 살덩이를 끌어모아 주무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유륜 주위를 살살 쓸어 가며 애간장을 태웠다.

“으으….”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짓뭉개며 비틀자 재유는 어느새 굵은 혀를 한껏 머금어 쭙쭙 빨고 있었다. 질펀하게 뒤섞인 혀 때문에 입 안에 침이 고여 들었다. 우주의 타액은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정신없이 삼키고 또 삼켜도 모자랐다.

조여든 성기가 우주의 것과 맞붙어 아랫배가 질척거렸다. 재유는 두 다리를 들어 우주의 바지와 속옷의 경계를 발바닥으로 긁어 내렸다.

거칠던 키스가 쪽쪽 짧은 입맞춤을 하며 부드러워졌다. 우주가 하의를 속옷까지 한 번에 벗어 내리자 아랫배에 맨살의 성기가 느껴졌다. 재유는 누운 채 우주의 페니스를 흥분된 눈으로 내려다봤다.

우주의 것을 처음 봤던 스무 살, 어린 마음에 부럽기도 하고 넣으면 얼마나 아플까 두렵기도 했던 성기였다. 얼굴은 순진해 뵀는데 발기하면 음란해지는 것이 묘하게 재유의 음심을 건드렸었다. 다부진 체격에 걸맞은 성기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덩치에 달린 거라면 이 정도는 커야지, 수긍도 됐었다.

그런데 우주는 성인이 되고 젖살이 빠지면서 지금의 슬림하고 탄탄한 체형으로 자리 잡은 듯했다. 군대에 가서까지 성장이 멈추지 않고 키가 컸다고 했다. 지금도 190cm 가까이는 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봤을 땐 마르고 앙상해 보였는데 헤어진 후로도 관리를 한 것인지 길쭉한 팔다리에 보기 좋은 근육들이 실하게 달려있어 만져 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몸이었다.

우리 나이 또래의 남자 배우 중에 닮은 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재유는 손으로 우주의 엉덩이를 붙잡아 당기며 생각했다. 20대 땐 키만 큰 이미지에 조·단역을 주로 하다 느지막이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댄디하고 스윗한 이미지로 변신해 주연급으로 올라간 배우와 몸이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옷 입는 것도 세미 정장 아니면 편한 차림일 땐 면바지와 니트, 깔끔한 셔츠여서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다. 이런 스타일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건 재유도 익히 알고 있었다.

우주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고 잘생긴 이혼남이 아닐까. 이제 나이도 들었는데 적당히 못생겨지면 안 되나.

재유는 유치한 질투를 하며 우주의 팔을 쓸고 등근육을 손으로 조이며 입속으로 들어온 혀를 슬쩍 깨물었다.

이미 평생 같이 있겠다고 약속도 했고, 사랑한다 고백도 했고, 알몸으로 키스를 하고 있는데도 더 가지지 못해 안타까웠다. 우주도 이런 마음이면 얼마나 좋을까.

재유는 슬금슬금 손을 내려 튼실하게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손가락 끝으로 만졌다. 목과 가슴을 쓸어내리며 게걸스럽게 입술을 빨던 우주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아직 안 돼. 나 너무 오랜만이라 네가 만지면 금방 쌀 것 같아.”

조용히 속삭인 우주가 상체를 일으키고 재유의 몸을 끈덕지게 훑으며 만지기 시작했다. 가슴 아래로 내려온 두 손이 아랫배를 지나 엉덩이 아래로 들어갔다가 골반을 따라 사타구니의 고랑으로 미끄러졌다.

아랫도리 중심부에 길을 닦아 내듯 길쭉한 손날이 궤적을 그리며 몇 번이고 같은 부위를 쓸어 댔다. 그때마다 재유는 베개를 비틀어 쥐며 뒷머리를 헤집었다. 못된 손이 집적대는 Y존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아랫배가 참을 수 없이 간질거렸다. 입구가 오그라들며 엉덩이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으윽… 만져 줘. 하아… 사정하고 싶어.”

재유는 숨이 많이 섞인 소리로 애원했다. 우주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따라 무릎 뒤를 잡았다. 위를 향해 들려진 종아리 사이로 고개를 슬쩍 비틀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아직 못 본 데가 있어서.”

오금에 넣은 손을 더 끌어 올리자 무릎이 바닥에 닿고 엉덩이가 천장을 향해 솟았다. 허리까지 한껏 들려 몸이 구겨진 재유의 얼굴 위로 우주의 얼굴이 쑥 나타났다. 아마 구멍은 우주의 입술 바로 밑에 있을 것이다.

“아… 이건 진짜, 너무 창피해… 흐윽!”

우주는 얼굴이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오른 재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혀끝으로 입구를 진하게 핥았다. 생경하고도 익숙한 감각에 재유는 몸서리를 쳤다. 팔다리가 버둥거려 자세가 흐트러지려 하자 우주는 허벅지 사이에 재유의 상체를 끼우고 팔로 허리와 허벅다리를 단단히 껴안아 고정했다. 이제 재유는 팔 외에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손가락 아프면 말해. 알았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우주의 혀가 다시 입구 주위로 내려앉았다. 손가락에 금이 간 상태인 재유는 차라리 깁스를 풀어 버리고 싶었다. 오른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우주를 만지고 느끼는 데 거슬리기만 했다. 지금은 통증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재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구 주위를 슬렁슬렁 깔짝이던 혀가 점점 힘을 실어 진득하게 핥아 대기 시작했다. 재유의 신경은 우주가 훤히 보고 있을 엉덩이의 중심에 온통 쏠려 있었다. 우주는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다양한 각도로 항문 주위의 살들을 괴롭혔다. 혓바닥의 헐떡임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민망함과 수치심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는데, 끈질기게 따라붙는 집요한 시선에 눈이 고정된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피하기가 힘들었다.

우주는 꽉 다물린 입구를 혀끝으로 살살 건드려도 보고 엉덩이를 터트릴 듯 꽉 붙잡아 양옆으로 벌리기도 하며 뾰족하게 세운 혀를 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흐으으… 아흐, 으응!”

연한 주름을 파고드는 혀가 느껴지자 재유의 고개가 가슴 쪽으로 구부러지더니, 비명 같은 신음과 함께 베개 위로 뒤통수가 내리꽂혔다.

우주는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며 충실하게 애무를 했다. 아래에서 위로 쉴 새 없이 혀를 쓸어올리고 엉덩이를 깨물며 둔부에 짧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양팔로 허벅지를 꼭 붙잡고 있는데도 재유가 허리를 들썩이고 몸을 비비 틀어서 우주의 몸이 좌우로 우스꽝스럽게 흔들렸다. 그런데도 달라붙은 혀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입술이 회음을 타고 고환에 닿자 재유의 종아리가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우주는 머리와 어깨를 잔뜩 구부려 딴딴하게 뭉쳐진 고환을 빳빳한 혀로 핥아 올리고 탱탱한 알을 입속에 머금은 채 혀를 굴렸다. 헐떡이는 재유의 숨소리에서 최음제라도 퍼진 듯 게걸스럽게도 핥고 빨았다. 우주는 아예 입술을 입구에 딱 붙인 채 즙이 나오는 과일을 빠는 짐승처럼 쭙쭙 소리를 내며 빨아 댔다.

재유의 신음이 흐느낌으로 변할 때쯤 우주는 품 안의 다리를 풀어 주었다. 구겨진 자세 탓에 잘 보이지 않았던 재유의 성기가 힘겹게 고개를 꺼떡이고 있었다. 우주는 상체를 숙여 곧바로 재유의 아랫도리로 엎어졌다. 보드랍고 결 좋은 체모가 얼굴을 간질이자 조금씩 입속에 머금은 채 예민한 살을 입술로 비볐다. 뺨에 재유의 성기가 닿자 기진맥진하게 풀어진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우주가 엉덩이 사이로 손을 넣어 구멍 주위를 중지로 살살 간질였다. 재유의 엉덩이가 잘게 튀었다. 아직 타액으로 젖은 구멍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진입을 시도했다. 입술로 음모를 지근거리던 우주가 재유의 물건을 입에 물었다.

흡, 숨을 참은 재유는 목소리가 크게 터지려는 걸 간신히 손으로 막았다.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단단한 살덩이를 빨고 있던 우주는 재유의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며 입구 안을 파고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흐, 살살… 어떡해, 나 금방 나올, 흐윽, 것, 같아.”

재유는 앓는 소리를 내며 우주의 머리칼을 쥐었다. 가장 예민한 성기가 우주의 입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흡입을 하듯 빨아 대는 입속의 압력을 견디기엔 그동안의 공백이 너무 길었다.

재유는 뒤통수를 비비며 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단속해도 괴상망측한 신음이 멋대로 새어 나갔다. 입구 주위의 살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손톱만큼 파고들었다. 재유는 거부감에 입구를 꽉 조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잠, 잠깐…. 하으, 오늘은 거기에 못, 하는 거 흐응, 알지?”

입을 한껏 오므리고 살 막대기를 쭉쭉 빨아올리던 우주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날 뭘로 보고. 아무리 급해도 너 다 나으면 할 거야. 대신 내 입에 싸 줘야 돼. 알았지?”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는 우주 때문에 어이가 없어서 짧게 혀를 찼다.

“입에 넣은 채로… 말하지, 흑, 말아 줄래?”

방심한 사이 중지가 좀 더 깊이 살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재유를 예민하게 살피던 우주가 얼른 귀두를 물고 늘어졌다. 입속에 머금고 뭉툭한 머릿살을 혓바닥으로 부지런히 쓸어올렸다.

“손가락에 쥐 나겠어. 왜 이렇게 좁아.”

아무리 굵어 봤자 손가락 하난데 재유의 안은 압박감이 상당했다. 도저히 손가락을 늘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주는 입구에 꽂은 채 손가락을 살살 돌려 가며 속살을 달랬다.

“너랑 헤어지고 처음, 하는 거니까… 흐으으….”

우주는 음경을 입에 문 채로 실룩실룩 웃었다. 헤어진 동안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막상 그의 입으로 들으니 손도 안 댔는데 사정할 것 같았다.

재유는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금세 까먹은 듯 미간을 잔뜩 구기며 우주의 어깨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런 재유와 눈을 맞추며 목구멍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한계치까지 머금었다가 귀두까지 빨아올리고, 사선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혀로 기둥을 쓸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자 입구가 손가락을 끊어 먹을 듯 꽉 조여 댔다.

“윽, 우주야, 하으으, 가겠어, 흐응, 그마안… 아으!”

재유의 다리가 우주의 등 위로 감겨 올라갔다. 발바닥으로 짓누르는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재유가 엉덩이를 살짝 띄운 채 허리를 부르르 떨자 입속에 뜨뜻한 정액이 퍼졌다. 잔뜩 시달린 얼굴이 쥐어짠 것처럼 찌푸려졌다.

사정한 재유의 얼굴만 봐도 성기에 피가 몰렸다. 정액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아래에 꽂힌 손가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우주는 정액을 삼켜 가며 더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성기를 빨았다. 재유는 이제 괴로운 듯 끙끙 앓으며 다리에 힘을 주고 우주의 몸통을 죄었다.

우주는 손가락을 빼내고 얼른 재유의 몸으로 엎어졌다. 사타구니를 꽉 맞붙인 채 등 뒤로 팔을 둘러 상체를 꼭 껴안고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아직 사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재유가 사지를 감싸 우주를 깊이 끌어안고 입술을 맞댔다. 혀를 내밀어 잡아 물고 입술을 엉망으로 빨며 난잡한 키스가 이어졌다. 맞댄 입술 사이로 괴상한 숨소리와 신음이 오고 갔다.

우주는 이제 재유의 엉덩이를 콱 움켜쥔 채 마치 삽입을 할 것처럼 가랑이 사이의 좁은 틈을 찌르며 허리를 흔들었다.

우주의 무게에 짓눌리고 허릿심에 압도당한 재유는 질식할 것처럼 숨이 모자라면서도 혀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엉덩이를 음탕하게 박아 대며 맹렬하게 꿈틀거리는 근육이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 우주의 뒤태를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방금 사정했는데도 예민한 부위로 거칠게 들락거리는 우주의 물건 때문에 구멍이 다시 조여들었다.

“재유야, 재유야… 흐윽. 한재유….”

꽉 맞붙은 배 사이로 우주가 사정했다. 뜨거운 액체가 체온을 한층 덮여 주었다. 재유는 축축해진 입술로 짐승 같은 숨을 내뿜는 우주의 아랫입술을 아릿하도록 빨았다. 그리고 사지를 조이며 그의 몸을 꼭 옭아맸다.

이렇게 좋은데. 이젠 절대로 안 헤어져야지. 재유는 저로 인해 사정에 다른 우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우주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뺨이며 입술이며 목이며 할 것 없이 키스 폭탄을 정신없이 퍼부었다. 얼굴 전체에 침을 묻히기로 작정한 듯 곳곳에 입술이 스쳐 갔다. 재유는 잘게 웃으며 기꺼이 우주의 키스를 받았다. 너무나 황홀해서 천정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우주는 제 목에 감겨 있던 손을 끌어 내려 침대 바닥에 붙였다. 재유의 다리가 스르르 풀어져 축 늘어졌다. 묵직하게 들러붙은 우주의 몸이 가운데를 중심으로 은근하게 무게를 더해 비비적거렸다. 아랫배에 짓이겨진 두 개의 성기가 끈적하게 뭉개졌다. 아직도 숨이 거친데 입술 새로 나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최고의 후희였다.

“너를 안고 있는 게 현실 같지가 않아.”

우주가 턱을 이로 살짝 깨문 다음 쪽, 입을 맞췄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재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심전심이랄까. 재유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벅차올라서 좋아한다, 사랑한다,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손 괜찮아? 아픈 거 아냐?”

우주가 오른손을 들어 깁스를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깁스가 감기지 않은 손가락에 쪽쪽 입을 맞추고 혀로 잘근거리며 장난을 쳤다. 재유는 고개를 저으며 우주의 목에 팔을 감고 웃었다.

“넌 왜 그렇게 날 좋아해? 내 어디가 좋아서?”

재유는 정말로 그게 궁금했다. 우주의 한결같은 순정이 고맙고 감동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해 줄지 은근히 기대하며 우주의 귀 뒤 살을 살살 매만졌다.

“나 얼굴 보잖아. 몰랐구나? 아님 그새 잊었나? 내가 얼마나 외모지상주의잔지. 살면서 너처럼 예쁜 사람 본 적이 없어.”

재유가 미간을 찌푸리고 으이구, 하며 우주의 코를 잡아 흔들었다. 예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저런다.

“진짠데. 한결같이 안 믿네.”

입술을 삐죽이며 흘겨보는 재유의 얼굴에 또 한 번 뽀뽀 세례가 쏟아졌다. 우주는 모로 누운 채 한쪽 다리를 재유의 하반신에 감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우리, 이제 같이 살면 어디가 좋을까? 내가 너희 집에 들어가도 좋은데.”

우주는 잠시 호흡을 정리하나 싶더니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재유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희지 대학 들어가면 살자니까 벌써부터 김칫국이야.”

“에이, 그건 너무하다. 4년도 더 남았는데? 중학교 졸업하고 같이 살면 어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던진 질문에 재유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희지를 이해시킬 명분과 우주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말을 고르고 있었다. 우주는 표정 풀라는 듯 뺨을 살짝 잡아당겼다.

“상황 봐서… 희지가 납득할 수 있다면, 그때 생각해 보자.”

우주는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희지만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 소녀의 예민한 감성은 넘기 힘든 큰 산이었지만, 우주는 도전정신이 솟구쳐올랐다.

“그럼 약속했다.”

재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마른 허리를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뜨겁고 사랑스러운 몸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뺨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진하게 키스한 우주가 몸을 빙그르르 돌려 재유 위에 다시 올라탔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포개졌다.

지난 세월 동안 재유와 몸을 섞으면서 이런 기분인 적이 있었던가.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해서 얼얼한 가슴이 마비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걱정되는 밤이었다.

***

막 잠에서 깬 재유는 미동도 없이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주변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간신히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얇은 커튼 너머로 커다란 발코니가 있었고, 그 뒤로는 한겨울에도 곳곳이 푸른빛을 띠는 정원이 내다보였다.

오늘은 날씨가 좋을 모양이다. 재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시트에 폭 잠긴 몸이 침대 밖을 벗어나는 걸 거부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 될 수 있다니.

이 집에 들어오고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그것이 제일 신기했다. 이 넓은 침대에 혼자 잠에서 깨야 한다는 게 조금 고역이었지만.

재유는 누운 채로 나른한 팔다리를 쭉쭉 늘려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실을 나와 방 하나와 욕실을 지나쳐 도착한 주방에서 커피를 내렸다. 냉장고에서 요리할 재료들을 조리대에 꺼내는 동안 커피 향이 은은하게 주방에 퍼졌다.

머그에 커피를 가득 따르고 정원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거실 창가로 가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재유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창가에 모로 기댄 채 얕은 돌담으로 경계를 나눈 데크와 잔디밭, 담을 따라 이어진 조경용 소나무와 가지가 앙상해진 과일나무들을 구경했다.

입주민들이 사용하는 공동정원에는 멋들어진 야외용 캐노피와 우아한 테이블 세트가 휴식공간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재유는 거기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과 마찬가지로 다들 개인 정원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한번은 들어오는 길에 구경이나 해 볼까 하다가 혼자 앉아 있는 게 뻘쭘할 것 같아 그냥 발길을 돌린 적도 있었다.

재유는 지금 우주의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벌써 4주째이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시원섭섭했다.

한겨울인데도 풍성해 뵈는 정원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내부를 둘러봤다. 지나치게 넓은 실내공간은 살풍경했다. 극강의 공간 낭비라 해야 할까.

처음 왔을 땐 유치장에서 나오는 길이라 정신이 없어 제대로 못 봤는데, 임시 입주를 위해 두 번째로 들렀을 때 재유는 이 집이 아직 이삿짐이 도착하지 않은 빈집인 줄 알았다. 2년째 살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땐 입이 떡 벌어졌다.

우주는 어떻게 이런 집에 혼자서 살아왔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쓸쓸해졌다.

이 집은 수연과 함께 살았던 집과 구조가 똑같다고 했다. 현관을 두고 좌우로 메인과 서브로 나뉜 공간에 가벽을 세워 서브 공간에서 살았다던 우주는 이혼 후 옆 동으로 집을 옮겼는데도 그전처럼 똑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게 편하고 익숙해서 그랬다나.

우주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훌륭한 인테리어로 장식된 좋은 집에서 자랐지만 그건 어머니의 취향이었고, 대학 시절 살던 아파트나 뉴욕의 아파트,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도 누군가 꾸며 놓았던 인테리어를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우주는 먹고 자는 공간을 별로 가리지 않는 털털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 좁아터진 셋방에서도, 지은 지 20년이 넘은 빌라에서도, 약국 2층의 허름한 투룸에서도 느긋하게 퍼질러 앉아 먹고 자고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디자인 회사를 운영한다는 사람이 자취하는 고학생도 아니고 가구까지 이렇게 최소한으로 들여놓고 산다니. 녀석의 미적 감각에 의심이 들었다.

좋게 말하면 털털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미학적인 취향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재유가 꾸며 놓은 집에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한사코 들어와 살고 싶어 했다.

재유는 그 대목에서 의심이 갔다. 취향이 없는 것 같은 우주의 유일한 취향이라면 넓은 공간에 필요한 도구들만 갖춰 사는 것인데 왜 굳이 살림살이로 꽉 찬 오래된 아파트에 살려고 하는지.

물론 우주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같이 살게 될 날을 4년에서 1년으로 줄이기 위한 우주의 노력은 가상하기까지 했다. 그게 바로 재유가 이 집에서 지내고 있는 이유였다.

그는 지금 희지와 함께 여행 중이다. 그것도 해외에서.

재유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일주일 뒤에 희지가 퇴원했다. 말끔하게 나아서 2학기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학교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녀에게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약을 꾸준히 복용해도 공황장애 증상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가끔씩 희지를 보면서 숨 쉬는 게 힘들 정도로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을 흘렸었다.

희지 역시 퇴원 후 돌아간 집에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우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우유가 쓰던 물건들을 붙들고 눈물짓는가 하면 우유가 없는 허전함을 못 견뎌서 귀가도 점점 늦어졌다.

보다 못한 우주가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서 두 사람을 설득했다. 마침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기도 했고, 희지에게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으니 재유의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동안 희지를 데리고 여행을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희지의 안정을 위해 영선을 만나러 호주에 가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왕 떠난 김에 호주 말고도 유럽 여행을 해 보자고 말이 나왔다.

물론 재유는 반대했다. 희지를 아빠 없이 먼 곳에 보내는 게 불안했고 리모델링 비용과 여행 비용을 우주가 감당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멀쩡한 집을 큰돈을 들여 뜯어고친다는 게 재유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발상이었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그에게 금전적으로 빚지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그는 돈 얘기에 부담 갖지 말라며 서운해했지만, 적응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주가 곁에 있게 됐으니 앞으로의 삶이 달라질 거란 예상은 했어도,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가 연달아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 우주는 치사하게 희지를 먼저 공략했다. 언제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둘이서 아주 짝짜꿍이 되어 ‘이러저러하니 우리는 이렇게 결정했다’, 하며 통보해 왔다. 해외여행을 가 본 적 없는 희지가 눈을 반짝이며 아빠의 허락을 구하는 얼굴을 봤을 때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유를 한국에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재유는 희지와 우주 없이 이렇게 휑한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게 두려웠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아이의 아침밥 걱정 없이 느지막이 일어나 호텔에 일하러 가고, 퇴근하면 우주의 집으로 돌아와 DVD로 영화를 보거나 욕조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곤 했다. 집에선 음식도 일절 하지 않았다. 레토르트 음식을 사다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고, 배달 음식도 종종 시켜 먹었다.

이따금 약속을 잡아 술을 한잔씩 하기도 했다. 주로 김현준 지배인과 대폿집에서 새벽까지 수다를 떨거나 희지의 ‘베프’ 아빠와 호프집에서 치맥을 먹었다. 우주와 희지가 하루에 한 번씩 유럽 어딘가에서 전화를 걸어 주니 혼자서 울적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재유는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총각 시절의 자유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동안은 엄두도 못 내고 상상도 못 했던 일상을 그가 선물해 준 것이다. 혼자 지내 보고 나서야 재유는 자신에게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희지와 우주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건 한 달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가 돌아오는 날이 왔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휴가도 냈다. 그것도 일주일이나. 재유로서는 무리한 요구였지만, 다행히 조리장님이 허락해 주셨다. 우주도 이번 여행 때문에 한 달이 넘게 회사를 비웠는데 둘만의 시간을 위해 이 정도 억지는 부리고 싶었다.

재유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가에 미소도 절로 그려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가서 다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에 담가 놓고 요리를 시작했다. 밑반찬들은 어제 다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으니 오늘은 메인요리만 하면 된다. 우주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고춧가루 팍팍 친 동태찌개였다.

재유는 우선 동태가 다 해동됐는지 확인하고 알과 곤이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두부와 채소들을 먹기 좋게 손질한 뒤 큼직한 냄비를 꺼내 불에 올렸다.

무가 익기를 기다리며 재유는 바지춤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첩을 열어 그동안 우주가 보내 준 여행 사진들을 봤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처음 간 곳은 독일이었다. 우주는 서유럽을 가자고 했으나 희지가 반대했었다. 대학에 가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등은 혼자서 배낭여행으로 갈 거라며, 열다섯의 로망을 훼손해선 안 된다고 진지하게 피력하는 바람에 동유럽으로 노선을 바꿨다.

프랑크푸르트로 시작해 뮌헨과 베를린을 찍고 체코로 넘어간 두 사람은 체스키크룸로프 마을이 너무 예뻐서 일주일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아침마다 동네를 산책하고 오후에는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관광객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희지는 감기에 걸려 버리고, 우주는 음식이 안 맞아 힘들다며 재유의 애를 태웠다.

오스트리아의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를 돌며 영화 속 장면을 흉내 낸 모습들, 헝가리의 유람선에서 찍은 부다페스트의 야경, 슬로베니아의 항구 마을에서 팔에 나란히 헤나를 새긴 사진들이 차례로 나왔다.

누가 보면 두 사람이 부녀인 줄 알 것이다. 다정한 우주의 미소와 환해진 희지의 얼굴에 재유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다음으로 넘기자 재유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 나왔다. 뜬금없이 러시아로 들어간 두 사람이 키지섬에서 찍은 것이었다. 여러 개의 돔으로 이뤄진 독특한 모양의 성당이 배경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그려 준 그림이기도 했고 언젠가 둘이서 꼭 가 보자고 약속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 사진을 처음 받았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았다. 정작 자신은 잊고 지낸 추억이었는데, 우주는 제 딸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약속을 지켜 주었다. 다음엔 자기와 함께 또 올 거라며 약속을 업데이트하기도 했다.

재유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털털하고 헐렁한 것 같지만,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 그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꼼꼼했다. 지나간 말도 모두 기억했고 약속했던 일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와 함께 저 성당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에 버킷리스트가 하나씩 채워졌다. 재유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나이를 먹어 가는 게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냄비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재유는 홈버튼을 눌러 핸드폰 배경 화면을 한 번 더 보았다. 당연히 성당 배경의 우주와 희지의 셀카였다.

칼칼하게 양념을 한 뒤 시원한 맛을 더하기 위해 콩나물 한 줌을 넣고 쑥갓도 듬뿍 올렸다. 불을 살짝 줄여 놓고 조리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리가 필요한 공간에 비해 지나치게 큰 주방은 아무리 어질러 놓아도 별로 티가 안 났다.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있던 재유는 핸드폰에서 익숙한 벨 소리가 울리자 얼른 손을 씻고 물기를 털었다. 희지의 영상통화였다. 재유는 주방 한쪽에 달린 거울을 보며 까치집을 대충 쓸어넘기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희지야!”

-아빠, 뭐 하고 있었어?

“동태찌개.”

-와, 진짜, 나도 먹고 싶다.

희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격해졌다. 재유는 얼른 냄비 위로 카메라를 비췄다.

-대박. 엄청 맛있겠다. 여긴 다 좋은데 음식이 진짜 별로야. 아아, 아빠가 만든 오삼불고기 먹고 싶어. 김치찌개도!

“한국 오면 너 먹고 싶은 거 다 해 줄게. 쫌만 참아.”

영선이 아무리 한식을 해 먹인다 해도 멜버른은 식재료가 다양하지 않고 비싸기도 해서 희지는 통화할 때마다 아빠 음식을 찾아 댔다. 러시아를 마지막으로 유럽 투어를 끝낸 우주와 희지는 애초에 여행의 목적이었던 영선을 만나기 위해 호주로 날아갔다.

우유의 죽음과 폭행 사건이 겹쳐 힘든 시간을 보냈던 희지는 여행 이후 표정이 몹시 밝아졌다. 더 이상 아빠를 데면데면 어색해하지도 않고 틈날 때마다 사진과 톡을 보내며 미주알고주알 하루 일과를 공유했다.

모든 게 우주의 덕분이었다. 그의 고집대로 여행을 보낸 건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하자 더 보고 싶었다. 희지도. 우주도.

-요리하는 중이면 우주 삼촌 아직 안 만났겠네?

“응. 이제 씻고 공항 가야지. 넌 오늘 뭐 할 거야?”

재유는 시간을 확인했다. 우주의 도착 시간이 2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급해져 한 손으로 핸드폰을 멀찍이 든 채 다른 손으로 틈틈이 주방 정리를 했다.

-고모랑 쇼핑센터 가기로 했어. 서점도 가고. 근데 여긴 책이 비싸대.

“그래도 사고 싶은 책 있으면 사. 아빠가 준 카드 있잖아. 현금 모자라면 영선이 고모한테 달라고 하고. 아빠가 송금해 주면 되니까.”

-알았어. 아빠, 보고 싶어.

언제는 호주가 너무 좋다며, 여기서 살고 싶다며 재유를 서운하게 했었는데, 이런 말도 종종 해 준다. 재유는 밀려오는 감동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빠도 우리 딸 너무 보고 싶어. 아프지 말고, 또 전화해 줘.”

-알았어. 아빠도 아프지 마. 우주 삼촌이랑 동태찌개 맛있게 먹고.

재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로 핸드폰 속 희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대형 전광판에서 멜버른발 항공기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깜빡거리자 재유는 서둘러 입국장 게이트로 달려갔다. 이미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재유는 손에 든 피켓을 조심스레 펼쳤다. 출발하기 전 집에서 급하게 만든 것이었다. 16절지 스케치북에 굵은 매직으로 ‘염우주 어서 와’를 큼지막하게 쓰고 그 옆에 마침표를 가장한 깨알 같은 하트를 그려 넣었다. 작고 소심한 애정 표현이었다.

“어, 온다. 온다.” 하는 주변의 웅성거림에 출구 쪽을 바라보니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재유도 목이 빠져라 게이트를 살피며 피켓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멀리서 사람들 사이로 키가 껑충하게 큰 그가 짐을 실은 카트를 밀며 나오고 있었다. 밤색 터틀넥에 베이지색 팬츠를 입은 우주는 팔에 울 코트를 걸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재유는 피켓을 높이 쳐든 채로 그를 향해 옆으로 종종 걸었다. 반가운 마음이 숨겨지지 않아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우주야!”

목소리를 들은 우주가 달리다시피 카트를 밀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뭐야. 하트가 너무 작잖아.”

귀신같이 조막만 한 하트를 발견한 그가 서운한 표정으로 앙탈을 부렸다. 재유는 스케치북을 덮으며 쑥스러운 듯 코를 매만졌다. 우주는 환하게 웃으며 재유를 와락 껴안았다.

“다녀왔어.”

“…잘 왔어.”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품을 느끼고 있었다. 재유는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우주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어디 보자. 내 꺼 잘 있었나?”

우주가 상체의 간격을 벌리고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민망한 듯 미간을 접으며 시선을 피한 재유가 작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빨리 코트나 입어. 밖에 추워.”

우주는 씩 웃으며 다시 재유를 안고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오뚝이처럼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래. 빨리 가자. 너랑 단둘이 있으려고 일부러 빨리 온 거니까.”

재유는 어깨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치이, 입술을 삐죽이며 슬쩍 웃었다.

우주는 호주에 도착한 뒤 5일간의 짧은 트래킹 일정을 마치자마자 바로 한국으로 온 참이었다. 희지는 일주일을 더 머무르고 구정 연휴에 맞춰 영선 부부와 함께 들어오기로 했다.

천금 같은 둘만의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일주일 중 나머지 3일은 리모델링이 끝난 재유의 아파트에 이삿짐을 정리하는 일을 해야 했지만, 단 며칠간이라도 둘만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근데 떠날 땐 캐리어 하나뿐이지 않았어?”

주차장을 걸어 우주를 도와 차에 짐을 실은 재유가 물었다.

“응. 이것저것 사다 보니 짐이 늘어서.”

원래 들고 갔던 것보다 사이즈가 더 큰 캐리어 하나와 짐가방 두 개가 새로 생겼다. 재유는 트렁크와 뒷좌석에 짐을 나눠 싣고 운전석에 올랐다.

“너 운전하는 거 첨 본다. 아 설레. 너무 잘 어울려.”

조수석 바깥에서 코트를 벗고 허리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본 우주가 말했다.

“얼른 타기나 해. 안 그럼 두고 가 버린다.”

좋으면서 괜히 틱틱대는 재유는 눈도 못 마주치고 히터부터 빵빵하게 올렸다.

대체복무를 마치고 서울로 이사 와 무리해서 따 둔 면허가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를 키우며 운전할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였다. 애석하게도 차를 살 여력이 없어 신분증으로만 썼던 장롱면허였다.

재유는 우주를 마중하기 위해 틈틈이 도로주행 연수를 받았다. 비록 우주에게 빌린 차였지만, 장기간 여행과 오랜 비행으로 피곤한 우주를 택시나 지하철로 데려오긴 싫었다.

“이 차, 앞으로 네가 타고 다니면 되겠다.”

차 문을 탁 닫은 우주가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가 차 쓸 일이 뭐가 있다고.”

“희지랑 나 태워 주면 되잖아. 너 출퇴근 할 때도 쓰고.”

“호텔에 주차할 데도 없어. 그리고 지하철이 훨씬 편하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마.”

재유는 여지를 두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주의 빌라 지하 주차장에는 세대별로 다섯 칸의 주차 공간이 주어졌다. 우주는 그중 두 칸을 쓰고 있었다. 검은색 세단과 하얀색 SUV였다. 재유는 짐을 싣기 편하도록 SUV를 끌고 왔다.

“아 왜, 나 태워 주는 거 싫어?”

“또 억지 부리네. 안 된다니까.”

그러지 않아도 이 차를 끌고 오면서 기스라도 나면 어쩌나 신경이 바짝 곤두섰는데 아예 타고 다니라니, 안 될 말이었다. 비싼 유지비도 벅찰 게 분명했다. 재유의 으름장에 우주는 풀이 죽었다. 얄밉게도 그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팔에 매달렸다.

“이거 형이 타라고 준 건데 난 쓸 일 없어서 주차장에만 짱박아 논단 말이야.”

“형님이 주신 거니까 더더욱 안 되지.”

“그럼 내가 사 주면 타고 다닐래?”

“그만 푼수 떨고 얼른 벨트나 매.”

“싫어. 네가 매 줘.”

우주가 팔짱을 단단히 끼더니 고개를 팩 돌리며 토라진 척을 했다. 희지랑 여행 다니더니 사춘기 소녀가 된 것도 아니고 참….

재유는 쿡 웃으며 상체를 숙여 조수석 벨트를 잡아당겼다. 뺨에 우주의 입술이 기습적으로 닿았다 떨어졌다. 재유는 눈을 마주치며 웃어 주었다. 덩치도 큰 게 어째 하는 짓이 점점 귀여워진다.

“나 올해 안에 차 살 거야. 그때 많이 태워 줄 테니까 섭섭해하지 마.”

재유는 뾰로통한 입술에 짧게 입 맞추며 벨트를 채웠다. 그동안 연애할 때마다 급한 일만 아니면 꼭 차로 출퇴근을 시켜 주던 우주였다. 재유는 내심 자기도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예기치 않은 사건 때문에 식당을 차릴 계획이 늦춰졌지만, 그때가 되면 어차피 차가 필요했다. 아마 경차나 소형트럭이 될 테지만. 우주의 키를 생각해서 좀 더 큰 차를 사 볼까, 재유는 잠시 고민했다.

우주는 표정을 풀고 팔을 둘러 재유를 껴안았다. 채워 달래서 채워 줬는데, 그새 벨트를 다시 풀러 버렸다.

“그냥 얌전히 받아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듯 말하는 목소리가 아찔하게 감미로웠다. 우주는 손으로 뺨을 감싸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코끝이 닿고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우주는 입꼬리를 올린 채 입술을 꾹 눌러 뽀뽀를 했다. 차가운 그의 입술에서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의 머리가 기울어지더니 입술이 더 깊이 겹쳐졌다. 퉁퉁하고 몰랑한 입술이 재유의 작은 입 전체를 덮어 왔다. 재유는 우주의 터틀넥 자락을 붙잡았다. 신축성이 좋아 당기는 대로 늘어지자 손가락을 슬금슬금 움직여 목덜미를 붙잡았다.

우주는 입속 점막에 재유의 입술을 가두고 흡입하듯 쪽쪽 빨았다. 재유가 좋아하는 키스의 방식이었다. 목 안쪽에서 작게 신음이 울렸다. 아직 녹지 않은 손이 뒷머리를 잡고, 입술을 간질이듯 자극하며 혀를 놀려 댔다.

재유는 그의 어깨를 힘주어 더듬었다. 빠는 힘이 점점 거세져 코로만 숨쉬기 벅차질 때쯤 우주는 가두었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참았던 숨이 벌어진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안팎의 온도 차에 차 안 유리창은 뿌옇게 김이 서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도 빨고 싶은데.”

우주의 손이 가슴께로 불쑥 치고 올라왔다. 가슴팍의 정점을 더듬지도 않고 곧바로 찾아내더니 그 위에서 손가락 끝을 뭉그러뜨렸다. 윽, 재유의 입에서 당황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주를 제지하려 손목을 붙들고 내리는 순간 아랫입술이 아릿할 정도로 쪼옥 빨렸다.

머리로는 그를 말려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한 달을 독수공방한 몸은 지조도 없이 기울어져 창문을 향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우주는 운전석 등받이를 손으로 짚으며 덮칠 듯 몸을 포개 왔다.

살덩이들이 밀고 밀리면서 부드럽고 달콤한 쾌감이 일었다. 우주는 재유의 입술을 뒤집어 치열을 훑고 혀를 잡아당겨 입속에 머금은 채 빳빳한 제 혀로 살살 쓸어 댔다.

옷 위로 더듬는 손이 유두를 쭈욱 당겨 꼬집고, 엄지와 검지로 캡슐 알약을 굴리듯 가지고 놀았다. 입술이 짓이겨지고 젖꼭지가 뭉개질수록 내내 참아 왔던 신음이 터질 것 같았다.

재유는 허물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팽팽하게 당기며 자신을 덮친 어깨를 강하게 밀어냈다. 우주는 눈을 보고 웃으며 입술의 질척한 타액을 혀를 내어 빨아들였다. 팔을 당겨 재유를 일으켜 주고는 어깨에 찰싹 달라붙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한재유 기사님. 빨리 집에 데려다주세요. 얼른 하고 싶어요.”

“…….”

저를 갖고 노는 게 분명했다. 재유는 약이 오른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혀를 길게 빼서 귓바퀴를 주욱 훑은 우주가 볼에 입술을 대고 사정없이 빨아들였다. 자국이 남도록 의도했을 것이다.

재유는 룸미러를 통해 볼에 생긴 붉은 울혈을 확인하고 한 번 더 째려보며 핸들을 잡았다. 히터를 송풍으로 돌려 유리에 서린 김을 빼자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다.

상기된 얼굴로 운전을 하는데 자꾸만 옆자리가 신경이 쓰였다.

운전 연수를 받았다곤 해도 아직은 바짝 긴장하며 차를 몰아야 하는 초보운전자이건만, 우주는 아예 상체를 옆으로 돌리고 뚫어져라 재유만 보고 있었다.

신호 때문에 차가 멈추면 손을 잡고 주물럭거리거나 입술과 볼에 쪽쪽 입을 맞춰 댔다. 한 달이나 뽀뽀를 못 해서 한이 맺힌 듯 차만 섰다 하면 못 괴롭혀서 안달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둘만 있을 시간은 충분한데 뭘 이리 서두르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그만 앞 좀 보시지? 너 땜에 신경 쓰여서 사고 나겠어.”

“그럼 안 되지. 나 신경 쓰지 말고 운전에 집중해.”

재유는 턱까지 척 괴고 뻔뻔하게 말하는 우주를 쏘아보았다.

“어휴. 집중을 하게 해 줘야 집중을 하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그러지 말고 여행 얘기나 좀 해 봐.”

재유는 어색함에 바짝 들이밀고 있는 우주의 얼굴을 툭 밀쳤다. 정면으로 꺾인 얼굴이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긴장했더니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통증까지 느껴졌다. 제 상태를 눈치챈 건지 우주가 쓱 웃으며 상체를 조금 띄웠다.

“희지 영어 많이 늘었어. 네가 사 준 회화책 있잖아. 그거 여행 내내 손에 들고 다니더니 호주 가선 입을 곧잘 떼더라.”

“정말? 아, 귀여웠겠다. 나도 희지 영어 하는 거 듣고 싶어.”

“어려서 그런지 배우는 게 빨라. 한국 돌아오면 영어 공부 제대로 할 거래.”

“오오. 그럼 영어 학원 끊어 줘야 되겠다.”

“희지는 독학으로 할 거라던데?”

“그래? 뭐, 돌아와 보면 알겠지. 너랑 여행 다니는 게 좋았나 보다. 또 가고 싶으니까 영어 공부에도 관심이 생겼겠지.”

재유를 향해 사선으로 상체를 튼 우주가 눈을 빛냈다.

“지금 그거, 나 칭찬한 거지?”

재유는 그가 하는 짓이 귀여워 고개를 슬쩍 돌려 씩 웃어 주었다.

“칭찬은 무슨. 고마워서 그러지. 참, 고맙단 말은 얼굴 보면서 제대로 해야 되는데.”

고마운 말로 다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유는 다 떠나서 그가 희지에게 보여 준 정성과 애정에 큰 감동을 받았다.

아무리 연인의 딸이라 해도 열다섯 아이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신경 쓸 것도 많고 배려할 것도 많을 텐데, 그는 희지의 치유와 환기를 위해 그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주었다.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식당과 화장실 위치를 알려 주고, 숙소마다 방을 따로 잡아 전화와 톡으로 체크해 가며 희지를 살펴 주었다. 희지가 마음에 드는 여행지에서 며칠 더 머물고 싶은 눈치라도 보이면 군소리 없이 숙소를 검색해 가며 여행 계획을 새로 짰다.

그에게 평생 의리를 지킨다는 약속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마 우주에게 빚진 마음을 다 갚지 못하리라.

그동안 홀로 아이를 키운 이후로 주변에서 늘 들어왔던 말이 있었다.

혼자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까, 아빠 혼자 안됐네,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런 말이 동정이나 연민 같아 재유에겐 그다지 위로가 되진 않았다. 그냥 안쓰럽고 딱하니까 위해 주는 말을 한마디 던져 주면, 재유도 별 감상 없이 귓등으로 흘려 버렸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누가 대신 키워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들 좋을 대로 불쌍하다 여기며 저와 희지를 아래로 보는 것 같은 심상이 깔려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네 딸이면, 내 자식도 돼.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런데 우주가 해 주는 말은 달랐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건네던 그의 위로는 딱딱하고 거칠한 마음의 표면을 살살 달래듯 포근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희지가 생긴 게 그를 배신한 대가였고, 우주는 그로 인해 20대 초반을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어쩌면 그 후의 인생까지도.

아이가 태어난 배경부터 자라 온 현재까지의 사정을 다 아는 우주는 제가 치른 희생도 잊어버리고 희지를 제 딸처럼 위하며 아껴 준다. 과거는 깡그리 잊은 듯 발 벗고 나서 준다. 이런 사람을 저버리는 것은 정말 못 할 짓이다.

우주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재유를 빤히 보더니 다시 몸을 기울여 어깨에 착 달라붙었다.

“이따 집에 가서 제대로 해 줘. 아, 고맙다는 말은 됐고. 말보단 몸으로 보여 주는 게 좋겠다.”

벅차오르던 감정의 맥이 뚝 끊겨 버렸다. 재유는 자기 팔에 얼굴을 비벼 대는 우주를 힐끗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으이그… 넌 맨날 진짜….”

막혀 있던 올림픽대로가 뚫리자 재유는 입술을 씰룩이며 액셀을 밟아 속도를 올렸다.

***

집에 도착한 우주는 짐을 현관에 옮기자마자 주방에서 풍겨 오는 동태찌개 냄새에 황홀해졌다. 제가 사는 집에서 착실하게 찌개를 끓여 놓고 공항으로 마중 나온 재유가 사랑스러워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재유는 졸졸 따라붙는 우주를 피해 달아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 밥도 못 차리게 등 뒤에 딸려 오는 몸을 털어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럴 때마다 우주는 싫은 내색은커녕 허리를 꼭 껴안은 채 어깨에 턱까지 걸며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피곤하니까 몸부터 담그라니까.”

“싫어. 욕조에 들어가면 금방 자 버릴 것 같아서 그래.”

“졸리면 자야지.”

“싫어. 희지 한국 올 때까지 한숨도 안 잘 거야.”

“입만 열면 싫대. 애도 아니고. 그리고 말이 돼? 어떻게 일주일 동안 안 자냐?”

“할 수 있거든?”

“뻥 치시네. 눈이 졸려서 죽을라 그러는구만. 밥 먹으면 금방 잠들겠다.”

“아닌데? 안 잘 자신 있는데?”

“휴… 내가 지금 서른여섯이랑 얘기하는 건지 열 살 초딩이랑 얘기하는 건지 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우주와 티격태격 시시껄렁한 투닥거림을 하면서도 재유는 반찬을 덜고 찌개를 데워 상을 차려 냈다.

“그럼 밥 먹을 동안만이라도 떨어져.”

재유가 우주의 얼굴을 밀어내며 의자를 뺐다. 우주는 얼굴에 침까지 묻혀 가며 뽀뽀로 법석을 떨고 나서야 자리에 앉는 척을 했다. 그러다 재유가 맞은편으로 가서 앉자 우주도 얼른 제 의자를 빼 들고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왜, 밥도 여기서 먹게?”

“아니? 네가 먹여 줘. 아-”

핫, 참, 재유 입에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소리가 나와도 우주는 천연덕스럽게 입을 쩍 벌리고 앉았다.

“둘만 있는 동안에는 이제껏 못 한 거, 앞으로도 언제 할지 모르는 거, 다 해 볼 거야. 나 맘 단단히 먹었으니까 말리지 마. 빨리, 아아-”

으이구, 못 살아, 재유는 우주 볼을 쭈욱 잡아당기다 결국엔 밥숟가락을 들었다.

앓느니 죽지. 재유에게서 한숨 섞인 헛웃음이 나왔다.

하기야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그의 말대로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재유에게도 이 시간은 소중했다. 망설임이나 자존심 같은 마음이 끼어들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다소 망측하긴 했으나 이렇게 연애 놀음을 하는 것도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 썩 나쁘지 않았다.

재유는 약간의 현타를 애써 무시한 채 간질거리는 마음으로 우주에게 밥을 떠먹여 줬다. 토실한 동태살을 발라 먹여 주자 우주도 진미채를 집어 제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뽀뽀를 했다. 재유는 입술을 떼고는 민망해져서 그냥 킥킥 웃어 버렸다.

“나 이거 먹으려고 기내식도 굶었잖아.”

“잘하는 짓이다. 우리 곧 30대 후반이야. 소싯적 생각해서 밥 굶고 밤새고 그러지 마. 기력 딸려.”

두 그릇째인 밥을 아예 국물에 말아 먹여 주며 재유가 말했다. 불편할 텐데도 우주는 넙죽넙죽 잘만 받아먹었다.

“우리 보약 한 재씩 해 먹을까? 정력에 좋은 걸로.”

“말을 말자, 말을.”

사고가 왜 꼭 저렇게 흐르는지, 재유는 쯧쯧 혀를 차며 물을 따라 건넸다.

“난 몰라도 너는 먹어야 돼.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 나가잖아. 약 잘 짓는 데 좀 알아봐야겠다.”

“아이고, 염우주 씨. 됐고요, 밥이나 마저 드세요, 응?”

“나 오늘 말리지 말라고 했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얼굴로 으름장을 놓은 우주가 아직 음식을 씹고 있으면서 또 입술을 들이밀었다. 재유는 절반은 포기한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고분고분 얼굴을 내주었다.

“참, 알고 있지? 나 아직 생일 선물 안 받은 거.”

“…….”

1월 1일이 생일인 우주는 희지와 함께 빈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생일을 맞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돌아오면 생일 선물로 원하는 소원을 들어줄 테니 생각해 놓으라고 했던 재유였다.

두 번째 이별했을 때 생일상을 차려 주고도 뻥 차 버렸으니 우주는 그 이후로 생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을 게 분명했다.

그런 고로 우주가 뭘 요구하던 전부 들어줄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이렇게나 기대에 찬 음흉한 표정이라니…. 아무래도 제 발등을 찍었나 보다. 분명히 요상 망측한 걸 계획한 게 틀림없다. 재유는 싱글벙글한 그의 표정이 왠지 불안했다.

“뭔데 그래. 자, 이제 말해 봐.”

다 먹은 식탁을 함께 치우고 설거지하려는 재유를 만류하며 우주가 눈을 빛냈다. 이리 와 봐, 하며 재유의 손을 짐더미로 잡아끈 그는 캐리어를 열어 쇼핑한 물건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거 다 네 거야.”

“뭐라고? 뭐가 이렇게 많아? 다 나 땜에 산 거라고?”

“응.”

“미쳤어… 이게 다 뭐야.”

이민 가방 수준으로 커다란 캐리어에는 새로 산 옷들과 머플러 같은 의류가 들어 있었다. 점퍼와 코트 같은 아우터들만 다섯 벌이었다. 거기에 겨울용 셔츠와 다양한 색깔의 니트, 티셔츠, 바지 등등이 꽉 차 있었다.

다른 짐가방 두 개에는 모자와 신발, 시계 같은 액세서리가 있었고, 기념품으로 보이는 잡동사니들도 셀 수 없었다. 유럽 어느 도시 풍경을 담은 풍경화나 재유 얼굴의 초상화, 게다가 스노우볼과 크리스탈이 박힌 손톱칼은 왜 있는 건지.

재유는 기가 막혀서 잔뜩 늘어놓은 선물들을 착잡하게 내려다봤다. 우주는 짐더미 속에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서 “이거 예쁘지? 희지랑 같이 골랐어.” 하며 선글라스를 펼치고 얼른 써 보라며 주접을 떨고 있었다.

“내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건 도대체 왜 바리바리 사 온 거야? 돈 아깝게.”

“너만 여행 못 갔잖아. 예쁘고 좋은 거 볼 때마다 너 생각나는 걸 어떡하냐 그럼? 이것도 많이 자제한 건데.”

우주가 입을 한발 내밀고 서운한 기색을 비치자 재유는 아차 싶었다. 여행지에서 제 생각을 하며 하나하나 물건을 골랐을 마음이 고마운 건 당연했다. 다만, 양이 감당이 안 돼서 그렇지.

“그게 아니라, 적당히 사 오면 되는데 너무 많아서….”

“너도 나 두고 어디 여행 가 봐. 안 그럴 수 있나.”

재유는 달래 줄 겸 우주 옆에 앉아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알았어. 고마워, 우주야. 잘 쓸…게.”

“그럴 줄 알았어.”

우주는 금세 뻐기는 표정을 했다. 떨떠름하게 굳은 재유의 볼에 입을 맞추더니 이번엔 짐 속을 헤집으며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가 꺼내든 건 고급스러운 천으로 포장된 상자였다. 직접 상자를 열어 이쪽을 향해 보여 주었다. 화이트골드 목걸이에 커플링으로 보이는 반지가 세트로 담겨 있었다.

“이거… 뭐야?”

우주는 바지춤을 뒤적이더니 샛노랗게 반짝이는 작은 것을 눈앞에 꺼내 보였다.

“여행 가기 전에 짐 싸다가 발견했어. 네가 예전에 준 커플링. 기억나?”

“…당연하지.”

“이거 보니까, 새로 또 사고 싶은 거 있지? 예전엔 네가 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선물하려고.”

재유는 조금 놀랐다. 목에도, 손에도 없어서 잊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반지를 간직하고 있었나 보았다. 재유는 머쓱함에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근데 난, 지금 없는데.”

“그래도 가지고 있지? 버린 거 아니지?”

“응. 집에 있어.”

몇 번이나 버리려고 했는데, 물건도 제 쓰임을 아는지 재유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바느질 상자에 무심하게 보관해 뒀던 게 떠올랐다. 우주는 무척 안심한 표정으로 반지 두 개를 들고 목걸이에 끼우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이거를 이렇게 같이 줄에 끼워 가지고… 됐다! 자. 네가 해 줘.”

얇은 줄에 링 두 개가 짤랑거렸다. 재유는 작은 큐빅이 박힌 세련된 디자인의 반지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거기에 제가 사 줬던 금반지가 붙어 있는 게 이질적으로 보였다.

“근데 안 어울려. 여기에 금반지는 너무 샛노랗고 촌스러워.”

“뭐가 안 어울리냐? 예쁘기만 한데. 안 해 줄 거야?”

우주의 재촉에 재유는 하는 수 없이 링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늠름한 목에 반짝이는 장신구가 퍽 귀여웠다. 재유는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

“너 목에 하고 다니라고 안 해. 희지 보기 껄끄러울 거 다 알어. 그냥 갖고만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재유는 우주를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삐지기도 잘 삐지고 억지도 잘 부리면서 이런 면에선 속이 깊고 다정했다. 같은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희지의 의심을 살까 우려하는 재유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배려를 해 준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언젠가 하고 다닐 날, 분명히 올 거야.”

우주는 재유 몫의 링 목걸이가 남겨진 상자를 잘 덮어 손에 쥐여 주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땐 특히나 더 잘생겨 보였다.

“근데, 생일은 너면서 선물은 왜 내가 받아? 설마 이거 다 받아 주는 게 네 생일 선물이라는 거야?”

“으응, 그럴 리가. 내 선물은 이거.”

우주가 캐리어 안쪽의 포켓에서 작은 상자를 건넸다. 검은색 상자에는 금색으로 휘갈긴 브랜드 이름만 있지, 내용물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재유는 의아한 얼굴로 우주를 봤다.

“이게 뭔데? 나 주는 거야?”

“응. 정확히 말하면, 네가 ‘입어’ 주는 거지. 그게 네가 나한테 주는 생일 선물.”

그의 표정이 다시 심술궂게 변했다.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는데. 불안함이 다시 도진 재유는 왠지 상자를 받아들기가 께름칙했다.

“나 짐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너 이거 입고 나와. 내가 직접 입혀 주고 싶은데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우주는 대놓고 도발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대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저를 골탕 먹이려는 게 분명했지만, 생일 선물이라니까 하는 수 없이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여자 속옷 같은 건 아니지? 그럼 나 안 입는다.”

“절대 아니거든? 얼른 입고 나오기나 해.”

우주는 콧김으로 사악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재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며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머뭇거리며 상자를 열자 의외로 얌전해 보이는 흰색 면 옷감이 비쳤다. 재유는 일단 안심하고 상자 안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속옷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

속옷을 꺼내 펼치자 평범한 브리프가 나왔다. 최소한 망사라거나 레이스가 달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우주가 이런 취향이었나.

재유는 잠시 속옷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런 무늬도 장식도 없고 허리 밴드도 없이 얇은 고무줄로만 만들어졌다. 할아버지들이 흰색 메리야스와 함께 입을 만한 그런 속옷이었다.

그런데, 펼친 속옷을 뒤집어 본 재유는 뒷목이 뻣뻣해졌다. 입에선 탄식이 흘렀다.

“하아… 그럼 그렇지.”

뭐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제 무덤을 판 게 틀림없다. 그것도 거한 삽질과 함께.

속옷 뒷면엔 정체 모를 구멍이 손바닥만 하게 뚫려 있었다. 성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노골적인 뚫림이었다. 그 와중에 재유는 구멍 테두리의 촘촘한 박음질에 내심 감탄을 했다.

대체 이런 속옷을 언제 어디서 사서 희지 몰래 가방에 숨겨 온 건지. 그의 치밀함과 주도면밀함에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재유는 입을지 말지 내적 갈등을 겪으며 속옷 한 번 보고, 거울 한 번 보고를 반복했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결정짓기로 하고 레버를 올려 물을 틀었다. 세수만 하고 공항에 간 거라 몸이 찝찝했다. 속옷을 선반에 두고 샤워부스로 들어가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입었어? 빨리 나와. 재유야아.”

이런 미친놈…. 놀리는 게 분명한 말투에 하마터면 육두문자가 나갈 뻔했다.

“기다려. 씻고 나갈게.”

“같이 씻을까? 나도 씻어야 되는데.”

“됐거든? 저리 좀 가!”

“알았어. 꼭 입고 나와야 돼. 알았지?”

마지막 말은 무시한 채 재유는 신경질적으로 샤워볼에 보디워시를 펌핑했다.

그래. 업보지 업보. 지난날 그의 생일을 우울하게 만들어 준 대가를 지금 치른다고 생각하자. 이걸로 생일에 대한 기억이 덧씌워질 수 있다면 하는 수 없지.

재유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도 꼼꼼하게 몸을 씻었다.

욕실에 베스가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재유는 허리끈을 질끈 묶고 욕실 밖을 나섰다. 뒤편에 뚫린 구멍의 테두리가 엉덩이에 쓸리는 촉감은 굴욕적이었다.

재유는 우주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그다지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부끄럽긴 했지만, 어차피 볼 거 다 본 사이이고 섹스를 하려면 결국 다 벗어야 하기에 샤워 후에 굳이 옷을 다시 주워입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차라리 다 벗는 게 낫지, 뒤가 뚫린 팬티 한 장만 입은 모습을 보이려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소위 ‘플레이’를 목적으로 이 속옷을 사 온 거라면, 재유도 ‘눈을 가리는 플레이’로 응수하고 싶었다. 그럼 이 민망한 속옷을 입은 제 모습 따위는 못 보겠지.

“하도 안 나와서 욕실 문 따고 쳐들어갈 뻔했잖아.”

성큼성큼 다가오는 우주를 보자 재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을 쳤다. 목부터 귀까지 열이 올랐다.

“이리 와. 왜 이래, 귀엽게.”

“뭐?”

남의 속도 모르고 우주는 키득키득 웃으며 바짝 다가와 벌게진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차라리 빨리 침대로 가서 모조리 벗어 던지고 뒤엉켰으면 했다.

“내가 준 거 입은 거지?”

재유는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찾아 입은 거냐며 매듭을 잡아당겼다. 말릴 새도 없이 발밑에 가운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뒤태 좀 보자. 먼저 침대로 가 봐.”

“…꼭 그래야 돼?”

우주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없이 재유의 등을 떠밀었다. 침대까지 다섯 걸음 정도 되는 거리가 천 리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발을 내디디자 뒤에서 꽂히는 시선이 물리적인 접촉을 일으킨 것처럼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박음질 라인이 엉덩이 살갗에 쓸렸다. 평소에는 느껴 본 적 없는 생소한 부위였다. 재유는 창피함을 못 참고 후다닥 걸어 침대에 풀썩 앉아 버렸다.

“안 돼. 엎드려야지.”

곧바로 뒤따라온 우주가 우악스럽게 엉덩이를 들더니 몸을 반대로 엎어 놓았다. 재유는 고개를 돌려 슬쩍 우주의 얼굴을 봤다. 아니나 다를까, 팬티 속 드러난 부위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재유는 얼른 고개를 시트에 파묻었다.

등 뒤로 우주의 몸이 겹쳐졌다. 촉촉하고 습한 피부끼리 달라붙자 몸이 파드득 들썩였다. 우주는 몸을 덮은 채 은근한 힘으로 살을 비벼 댔다.

“앞뒤 다 뚫려 있는 것도 있었는데 너 생각해서 이걸로 산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에 재유는 진저리를 쳤다. 예예, 아이고 고맙습니다, 감사라도 하라는 건가. 코웃음을 치는데,

“다음엔 그걸로 준비할게.”

“너, 이 씨….”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재유는 휙 고개를 돌려 우주를 째려보았다. 큭큭 웃는 얼굴이 그대로 내려앉아 입술을 덮었다.

“화내지 마. 너무 야해서 조절이 안 돼서 그래.”

야금야금 입술을 물어 당기며 우주는 손을 아래로 집어넣어 재유의 배를 감쌌다. 짓궂은 생일선물을 바란 것 치곤 입술과 손길이 부드러웠다.

재유는 어깨를 비틀며 우주의 머리통을 잡고 입술을 맞부딪혔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벌어지더니 혀가 입속으로 쑥 들어왔다.

우주는 한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 턱을 고정하고 집요하게 혀를 얽었다. 콧대가 짓눌릴 정도로 입술을 꼭 붙인 채 힘주어 혀를 빨고, 배를 쓰다듬던 손을 가슴으로 옮겨 유두 주위의 살을 손끝으로 비비적댔다.

재유는 실눈으로 우주의 얼굴을 살폈다. 약이 오르긴 했지만, 키스를 하는 그의 얼굴은 야릇하고 섹시했다. 약간 찡그린 미간과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눈매, 우뚝 솟은 코와 민트 향이 나는 저속한 혀까지, 하나같이 약 오른 마음과는 다르게 재유의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장난스러운 표정도, 익살맞은 말투도 제 앞에서만 유독 그러는 걸 알기에 하나하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재유는 점점 부풀어 오르는 우주의 성기를 엉덩이로 느끼며 수치심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어차피 연인끼리 합의된 ‘어른의 놀이’이기 때문에 그깟 속옷 하나 입어 주는 건 이제 와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몸을 비비며 키스를 했을 뿐인데, 재유는 여기까지 생각이 발전했다. 오히려 ‘앞이 뚫린 속옷’을 그에게 입혀 보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다.

미쳤지, 미쳤어. 재유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차오르는 숨을 그의 입속으로 불어 넣었다. 우주는 한참이나 물고 빨던 혀를 놓고 조근조근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서 쭙쭙 소리를 내는 짧은 키스가 입가와 뺨을 지나 귓바퀴로 옮겨갔다.

커다란 손이 골반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몸통이 침대에서 떨어져 개처럼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우주는 비슷한 자세로 재유의 몸을 천막처럼 덮어 하체를 엉덩이에 강하게 쳐올렸다.

윽, 순간 박히는 줄 알고 크게 당황한 재유가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혀가 귓바퀴를 쓸고 귓불을 빨았다. 꼿꼿한 성기가 내리꽂힌 사타구니의 얼얼함에 재유의 무릎이 오므라들었다. 용케도 우주는 팬티 구멍 사이의 속살을 겨냥해 잘도 찔러 넣었다.

얇은 천 사이를 파고들며 침범해 오는 페니스는 음낭과 허벅지 사이의 골을 향해 집요하게 파고들며 점점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배를 감싸 쥔 두 손아귀가 예민한 피부 위를 거침없이 만져 댔다.

재유는 동물적인 움직임에 따라 온몸이 꺼떡꺼떡 흔들리며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가랑이 사이에 우주가 흘린 쿠퍼액으로 질척였다. 그 물기로 재유의 오므라든 항문과 회음까지 적시고 있었다.

“흐읏… 이상해, 아윽!”

“이상해? 뭐가? 후우… 좋지 않아? 옷감에 계속 쓸려서 난 죽겠는데.”

우주의 손이 팬티 앞섶을 향했다. 살짝 젖은 속옷 위를 손바닥으로 힘 좋게 짓뭉개자 재유의 성기가 아랫배와 맞비벼져 찌릿찌릿 전류가 느껴졌다. 거기다 샅을 찔러 대는 그의 페니스 때문에 성감이 허리를 타고 정수리까지 번쩍 튀었다.

재유는 성기를 주물러 대는 우주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잡고 힘을 주었다. 속옷 안에 숨겨져 있지만, 그가 만져 주는 것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목덜미에 씩씩거리는 숨이 쏟아져 내리고 성기의 치덕임이 잦아들면서 등 위에 달라붙은 우주의 몸이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져 갔다.

후우, 팬티 뒤편에 드러난 속살로 입김이 뿜어져 왔다. 재유는 이마를 시트 위에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두툼한 입술이 입구 위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하아. 예술이네. 엎드려서 그런지 팬티가 늘어났어. 아까보다 훨씬 구멍이 커져서 고환이랑 고추까지 훤히 보….”

“아 제발! 그만 좀 말해.”

“사진 찍어서 보여 줄까?”

“죽는다, 진짜.”

입구 위의 속살에 입술을 치덕대며 우주가 잘게 웃었다.

“알았어. 안 할게. 다리 좀 벌려 봐.”

스스로 벌리기 전에 그의 손이 허벅지 간격을 넉넉하게 띄워 놓았다. 넓게 펼쳐진 혀가 고환 끝에서부터 회음을 지나 벌름거리는 항문까지 단번에 핥아 올렸다.

“흐으으….”

하얀 엉덩이가 애처롭게 떨려 오자 우주의 하복부에 다시금 열이 올랐다. 하나 더 사 올걸, 앞뒤 다 뚫린 것도 사 올걸, 색깔별로 다 살걸, 자신의 짧은 생각에 머리를 치며 후회했다. 엉덩이 한가운데 뚫린 재유의 밀부가 음탕하고 야살스러운 요부의 얼굴 같았다.

우주는 주저 없이 엉덩이골에 코를 박았다. 혀를 세워 드러난 살 이곳저곳을 꾹꾹 누르고 항문을 파고들어 힘주어 핥았다. 재유의 허리가 잘게 튈 때마다 콧대가 짓이겨져 구멍 주변 살들을 뭉갰다.

입술에 달라붙은 여린 주름은 최고로 보기 좋았다. 부드럽고 쫀득한 분홍 속살을 홀린 것처럼 빠는 것 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예민한 자극에 엉덩이가 흔들리면 파묻힌 얼굴도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그래도 좋다고 빨고 핥았다.

우주는 속옷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넓게 벌렸다. 신축성이 좋아서 그런지 늘리면 늘리는 대로 쭉쭉 벌어졌다. 양 엄지로 입구를 넓게 펼치자 움찔거리는 내벽이 슬쩍 비쳤다. 뾰족하게 힘준 혀를 집어넣어 얕은 삽입을 하듯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말랑거리던 속살이 어느새 바짝 힘이 들어가 우주의 혀를 조여 왔다.

재유는 엎드린 자세에서 엉덩이만 치켜든 채 점막을 들쑤시는 감각을 선뜩하게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하으… 아, 흐으으….”

우주는 콧대를 박은 채 고개를 흔들기도 하고 입술을 푸르르 떨기도 하며 안을 마구 휘저었다. 추읍, 쪽, 쯥 거세게 빨아들이며 들러붙었던 혀는 한참 만에 엉덩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재유의 허벅지가 후들거리고 뒤꿈치가 멋대로 들썩였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집요한 애무로 느슨해진 탓인지 내벽에 들어온 손가락은 단번에 끝까지 밀려 들어왔다. 재유의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벽을 헤집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점 속도를 냈다. 손가락을 삼킨 항문 주변에 침을 묻혀 가며 열심히 핥고 있었다. 구멍을 예의 없이 들쑤시면서도 부드럽게 혀를 놀리고, 다른 손은 음낭을 쥔 채 살살 주물렀다.

재유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아득한 감각에 시트에 닿은 어깨를 비비 꼬며 절절맸다. 내벽을 긁던 손가락이 개수를 늘리자 이번엔 가장 예민한 부분을 보란 듯이 찔러 댔다. 재유는 퍼뜩 고개를 쳐들고 자신이 듣기에도 오그라드는 교성을 질러 댔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가지런히 겹쳐진 손가락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전립선을 꾹꾹 짓눌렀다.

지나친 쾌감에 손을 뻗어 우주의 손목을 막연히 붙잡았다. 그를 만류하려던 발발 떨리는 손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했다. 오히려 고환을 조물딱대던 손이 음경으로 뻗어 나가 애액을 줄줄 흘리는 페니스를 속옷 밖으로 꺼냈다. 드디어 바깥 구경을 하게 된 재유의 성기가 해방감을 느끼기도 전에 우주의 손에 의해 바깥쪽으로 한껏 휘어졌다.

“아아… 흐응! 으으… 응, 흐윽, 흑…!”

함부로 휘저어진 내벽의 점막과, 강한 힘으로 페니스를 쭉쭉 잡아 올리는 손아귀에 원망스러울 정도로 쾌감에 벌벌 떨었다. 참을 수 있는 대로 참고, 한계까지 참고도 조금 더 참았는데, 이제는 극한까지 몰려 버린 재유가 부르르 엉덩이를 떨며 정액을 뿜어냈다.

우주는 기다렸다는 듯 페니스를 최대한으로 꺾어 입 안에 물고 가두었다. 세차게 뿜는 정액을 흠뻑 빨아들이고 볼이 패이도록 귀두를 짜냈다. 재유가 쏘아 올리는 정액이 입천장에 따끔하게 달라붙었다.

“아흑, 진짜… 너, 흐읏!”

손끝에 닿은 극점을 몇 번 더 찌르자 재유의 자세가 무너져내렸다. 손가락을 뽑아낸 입구는 숨 쉬듯 옴찔거리며 벌어졌다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입속에서 해방된 재유의 페니스는 속옷 밖으로 삐져나와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짓눌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정액을 질금질금 뱉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우주는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흥분이 됐다.

“하아, 같이 가고 싶었는데… 왜 못 보내서 안달이야.”

“그러게 왜 벌써 사정해. 좀만 더 참지.”

우주가 손에 묻은 정액을 혀로 핥으며 재유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커질 대로 커져 흉하게 꿈틀대는 성기를 달고 얄미운 입으로 잘도 말하는 우주를 씩씩거리며 흘겨봤다.

“지가 당하는 거 아니라고 막말하네.”

“좋았으면서.”

“칫…. 네가 너무… 후우, 잘하니까, 그런 거잖아.”

우주는 재유의 등에 엎어져 쉴 새 없이 잔 입맞춤을 했다.

“밤새도록 해 줄 수도 있는데.”

재유는 엎드린 몸을 바로 뉘어 우주의 등을 껴안았다. 아직 사정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뽀뽀 세례를 받으며,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이 털레털레 웃었다.

“그럼 해 봐, 어디.”

우주는 침대 밖으로 휙 날아가더니 서랍을 뒤져 콘돔 줄과 오일 병을 들고 다시 번쩍 올라왔다. 콘돔 하나를 뜯어 제 성기에 돌돌 씌우고 있는 그를 보며 재유가 물었다.

“그걸 다 쓰는 건 아니지?”

“안 될 거 없지? 시간도 별로 없는데.”

“시간이 없긴. 우리 희지 오기 전까진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맞아. 그러니까 이걸로도 모자라지. 나중에 나가서 더 사 와야겠다.”

재유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한국 돌아오면 어디를 가자거나 뭘 하자거나 말이 없더니…. 우주는 내내 이럴 계획이었던 거다.

“왜? 싫어?”

“…밥은 먹여 줄 거지?”

흐흐흐, 우주는 응큼하게 웃으며 콘돔을 다 씌운 제 페니스에 오일을 펴 발랐다.

“뭘 걱정해. 내가 너 굶기는 거 봤어?”

그럼 먹인 만큼 굴리겠다 이건가. 재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거라도 벗고 하면 안 돼?”

재유가 속옷의 허리춤을 붙잡으며 말하자 오일을 발라 번들거리는 페니스를 자위하던 우주가 도리질을 쳤다.

“이번엔 입고 하고, 다음에 할 때 벗자. 아깝잖아.”

“답답한데….”

“내가 안 답답하게 해 줄게.”

재유의 페니스는 속옷 구멍 밖에 사선으로 삐져나와 반쯤 시들어 있었다. 우주는 속옷의 앞부분을 쭈욱 잡아 벌려 재유의 성기를 원래대로 바르게 세워 주곤 손으로 몇 번 쳐올렸다.

으음, 재유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무릎을 한껏 벌리자 음경부터 음낭, 회음과 항문까지 세로로 길게 드러났다. 우주의 입에서 애타는 숨이 새며 목울대가 크게 들썩였다.

“…천천히 해.”

재유의 엉덩이 아래에 허벅지를 갖다 댄 우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회한 후로 삽입은 처음이었다. 재유와 희지가 연이어 퇴원하고, 그 이후론 여행 준비로 정신이 없어 둘만의 짧은 만남이 있었을 땐 주로 손장난이나 애무를 동반한 페팅이 전부였다.

재유의 안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따뜻하고 황홀했는지 기억하고 있는 우주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프면 말해. 알았지?”

“말하면, 그만두긴 하는 거야?”

네가 그럴 리가 있냐는 의심의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점점 여유가 없어졌다. 우주는 잔털이 없는 부드러운 허벅지를 손으로 넓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력해 볼게.”

우주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항문 주름에 귀두를 치댄 채 슥슥 문지른 우주는 터질 듯 팽팽한 기둥을 붙잡고 선단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컥, 준비 삼아 들이쉰 숨이 제멋대로 터져 나왔다. 재유는 끔찍하게 아프고 찢어지는 듯한 감각에 시트 위를 다급히 팡팡 내리쳤다.

“후우… 아직 무린가?”

“아윽… 하아, 흑… 아파.”

우주는 곧바로 성기를 빼내고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충분히 늘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꽉 다물린 입구는 손가락 세 개를 받고도 힘겨운 듯 애처롭게 뻐끔거렸다.

우주는 차곡히 접은 손가락을 내벽 안에서 가지런히 펴며 입구를 늘렸다. 완전히 시들어 버린 재유의 페니스를 입에 머금고 쭉쭉 빨며 손가락을 긁어내렸다. 성기의 자극에 따라 점막이 찰지게 달라붙어 조이고 있었다.

입속에서 성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자 손가락을 빼고 입구에 오일을 들이부었다. 양 엄지로 입구를 잡아 벌리며 오일을 흘려보내자 조금씩 오물오물 삼키는 게 보였다. 우주는 재유의 오금을 붙잡아 하체를 활짝 열어젖힌 채 다시 성기를 들이밀었다.

미끌거리는 오일과 쫀득한 점막이 잡아당기듯 귀두를 쑥 삼켜 물었다. 재유의 꼭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가슴팍이 아래위로 거칠게 들썩였다. 우주는 상체를 기울여 목과 쇄골에 키스를 퍼부었다. 삽입이 좀 더 깊어졌다.

“흐으… 재유야. 나 밤새 꽂고 있으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좋아.”

절반쯤 들어간 페니스가 쥐어짜이는 통에 몹시 아팠지만, 우주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물어지지 않는 재유의 입이 밭은 숨을 내뿜으며 아래의 고통을 인내하고 있었다.

우주는 등을 휘어 볼록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핥았다. 유륜 전체를 입에 머금고 혀끝으로 긁적이며 달래자 재유가 뒷머리를 감싸며 붙잡아 당겼다. 더 해 달라는 듯이. 우주는 요구대로 입에 물려진 젖꼭지를 힘차게 빨았다.

재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우주가 제 가슴을 빠는 모양을 지켜봤다. 상체의 들썩임에도 먹성 좋은 새끼 짐승처럼 그의 입술이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우주는 유륜의 미세한 돌기들을 짓뭉개듯 혀로 핥아 올리고 젖꼭지를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그러면서 어깨와 팔, 가슴과 옆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재유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쉬지 않고 애무했다.

젖꼭지가 퉁퉁 부어오르도록 양쪽을 오가며 빨아 준 덕에 맞물린 아래의 화끈거림이 차차 진정되고 있었다. 우주는 가차 없이 조여 대는 재유의 몸속으로 더 깊이 들어왔다.

“하도 조여 대서 쪼그라든 줄 알았어.”

“아… 안, 돼…!”

밀어 넣은 성기를 약간 물리고 포인트를 겨냥해 허리를 팡 쳐올리자 재유가 우주의 목을 쥐어뜯으며 자지러졌다. 격심한 쾌락에 몸을 바르르 떨렸다. 참는 건 여기까지, 라는 듯 우주는 계속해서 허리를 털며 그곳을 들쑤셨다. 입이 헤벌어진 재유는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신음과 숨소리가 뒤섞인 애처로운 단말마만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거…기, 거기, 가 너무 꽉… 닿아, 서, 아응, 살살… 아흣!”

우주는 팔을 둘러 재유의 몸통을 꽉 안으며 박아 넣기 시작했다. 얕게 치고 빠지는 성기가 집요하게 한 곳만을 찔러 댔다. 정확하게 흥분점만을 노린 움직임이었다. 우주의 목에 매달린 재유는 펄펄 끓어오르는 쾌락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지게 뭉친 아랫배의 흥분과 쾌감이 이성을 날려 버릴 것 같았다.

오일의 점성과 애액이 뒤섞여 접합부의 음탕한 소리가 고막에 꽂혀 들었다. 허리를 튕기는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단단한 어깨에 매달려 입술이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혀를 내어 우주의 귀와 턱을 빨았다.

스스로가 우습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얌전한 척 쑥스러운 척 애 아빠의 체면을 생각해 고상을 떨어 봤자 아래에 깔려 헐떡이고 허리를 흔들어 대는 제 꼴은 상스러운 방식으로 쾌락을 원하는 한낱 남자일 뿐이었다. 재유는 더 느끼지 못해 안달하는 짐승처럼 우주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문득 애 키우며 일만 하던 시절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자제하고 절제하면서도 아등바등 살아온 지난날이 제가 가진 본래의 삶이라 여겼었는데, 우주 하나 끼어들었다고 180도 달라졌다.

이미 두 번이나 헤어져 봤으니 세 번째 만남도 별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솔직해지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자신에게 본연의 욕망을 끌어올리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결국 모든 감정이 드러나고 만다. 애정과 선망은 물론 질투나 투정 같은 못난 감정까지도. 그러면 우주는 넉넉한 가슴으로 받아 주고 존중하고 품어 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재유는 팔을 뻗어 몸통 전체를 끌어안았다. 굵은 성기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허리에 사지를 감았다. 흥분으로 일그러진 잘생긴 얼굴에 입술을 묻었다. 헐떡이는 두 몸뚱어리가 진득하게 맞물리며 쾌락의 끝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우…주야.”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니 꿀 떨어지는 얼굴로 잘게 입을 맞춰 준다. 재유는 제 안으로 감싼 성기를 녹일 듯 꽉 조였다. 그의 말대로 밤새 꽂고 있었으면 딱 좋겠다.

“으응, 재유야.”

온몸이 흔들리는 진동에 헐떡이면서도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단단하게 뭉친 성난 엉덩이를 손으로 감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헤어지쟤도… 절대 나, 떠나면… 흐윽, 안 돼….”

우주는 마주 웃어 주었다. 희게 질린 재유의 얼굴과 벌겋게 색이 번진 작은 입술을 내려다보며 달래듯 귀를 핥고 물었다. 재유의 안은 습하고 따뜻했다. 그 속을 제 성기로 채웠다는 만족감이 밀려왔다. 축축한 점막에 온몸이 달라붙은 것처럼 나른하고 황홀한 감각이 차올랐다. 우주는 참을성 있게 얕은 지점을 일정하게 쳐올리며 휘감은 가슴팍을 꼭 붙들었다.

“걱정 마.”

뺨에 입술을 묻고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재유는 울부짖듯 야릇한 신음을 쏟아냈다.

“흐응, 으으으…. 하윽, 흐.”

“네 입에서 헤어지잔 말, 이제 안 나오게 할 테니까.”

흐느낌이 터져 나오더니 재유의 아래가 요동을 쳤다. 우주는 온몸의 신경 줄이 펄떡이는 것처럼 축축하게 연결된 성기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욱신거림을 느꼈다. 맞닿은 배 사이에 눌린 재유의 성기는 잠잠한데 페니스를 콱 물고 있는 구멍 속은 날뛰듯 펄떡이며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뒤로만 간 것이다. 우주도 너무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라 얼떨떨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으… 시… 싫어, 그만, 빼… 빼 줘, 으흑!”

우주는 상체를 일으키고 재유의 목덜미부터 아랫배까지 손바닥으로 찬찬히 쓸어내렸다. 으스스 소름이 돋아나 바짝 선 솜털까지 만져지는 듯했다.

뒷머리를 비비며 정신없이 허리를 떠는 재유가 즐깃한 속살로 성기를 쫀쫀하게 물어 대는 것을 잠시 음미했다. 점막이 달라붙듯이 재유도 저에게 더 집착하고 끈기 있게 안착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우주는 재유가 오르가슴에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 어깨를 붙잡고 허리를 진득하게 비벼 댔다. 그 느릿한 몸짓도 자극이 되는 듯 사지로 우주를 바짝 조이며 엉덩이를 발발 털었다.

우주는 슬그머니 웃음을 지으며 재유의 뺨에 얼굴을 부비고 성기를 천천히 뒤로 물렸다. 그런 다음 있는 힘껏 팡 쳐올렸다. 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까지 열어젖혔다.

“아흑!”

몸통에 매달린 재유가 골이 난 듯 짜증 섞인 신음을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주는 입매를 늘어뜨리며 입가에 짧은 키스를 쪽쪽이고 살살 달랬다.

커튼을 뚫고 나온 오후의 햇빛이 재유의 달아오른 얼굴과 몸을 감싸듯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몹시 예뻤다. 우주는 이대로 재유를 제집에 가둬 두고 늙어 죽을 때까지 살을 맞부대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벽 깊숙이 박힌 성기를 조금씩 움직이자 간신히 숨을 조절하던 재유의 폐부가 기세 좋게 차올랐다. 우주는 점점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제까지 많이 참은 탓에 더는 흥분을 몸 안에 가두는 데 한계를 느꼈다. 안을 헤집는 성기에 박동이 느껴질 것처럼 쾌락이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성심성의껏, 그러나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몸짓으로 점막을 들쑤셨다. 아래에 쏠린 쾌감은 차차 밀도 있게 뭉쳐졌다.

재유는 그가 둘러 안은 제 몸통이 으스러지는 게 아닐까 무서워졌다. 눈앞에 툭 불거진 목의 힘줄이 흉흉하게 불거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끈질긴 마찰로 이미 데일 듯한 열기를 느끼고 있었는데도 아래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아…. 아으응, 핫, 흐응, 하아, 앗!”

“흐으으…!”

우주의 입에서 낮게 헐떡이는 신음이 쏟아졌다. 콘돔을 씌운 성기였지만, 재유는 우주가 제 안에서 사정을 할 때마다 지릿거리는 물줄기가 감질나게 내벽을 자극하는 걸 항상 느껴 왔다. 잊은 줄 알았던 감각이었는데, 그의 사정이 익숙하고 그리운 쾌감으로 다가왔다. 미세하게 긁어 대는 자극은 내장에서부터 뇌까지 연결된 어떤 신경 줄에 전류가 흐르는 집게라도 갖다 댄 것처럼 찌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한차례 정액을 퍼부은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무겁게 짓눌렀던 몸도 떨어져 나가 오싹함이 더해졌다. 재유는 뱃속의 공허한 감각에 손으로 제 아랫배를 드문드문 더듬었다. 축 늘어진 채 우주가 페니스에 들러붙은 콘돔 끝을 붙잡아 찢어내듯 벗기는 모습을 헉헉, 숨을 몰아쉬며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두 번째 콘돔을 뜯어낸 그가 다급한 손길로 얇은 고무 막을 다시 씌우고 있었다.

우주는 성관계에 있어서 항상 ‘세이프 섹스’를 지향했다.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애무에 정성을 쏟았고, 아무리 급해도 콘돔과 윤활제 없이 삽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단 한 번, 콘돔 없이 삽입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100일 휴가 때 이별을 알리던 모텔 방이었다. 눈이 뒤집히도록 분노했던 당시에도 그는 배 위에 사정액을 뿌렸었다. 헤어진 후에도 그런 식으로 저를 안았던 걸 내도록 후회했다고 한다.

우주는 욕망에 솔직한 육체와 맹렬한 성욕을 갖고 있으면서도 재유의 몸을 제 몸보다 아껴 주었다. 건강하게, 때로는 발칙하게 허용범위 안에서 애욕을 발산하려는 그의 모습이 남자답고 늠름하고 또 섹시했다.

그런데 아무리 세이프 섹스를 한다 해도, 저렇게 지치지도 않고 금세 발기해 버리는 살 몽둥이가 과연 제 몸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재유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더 위험해진 게 아닐까. 둘만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집에서 과연 두 발로 걸어나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걱정됐다.

“휴우….”

우주도 우주지만, 저도 저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탄탄한 흉곽과 기운 넘치는 잘생긴 페니스를 보며 어느새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은근히 다음 라운드를 기대하고 있음을 깨달은 재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주는 채 다물어지지 않은 입구를 손가락으로 휘젓고 나서 오일을 조금 더 짜냈다. 미끌거리는 오일이 깊은 골을 따라 뻐끔거리는 입구에 닿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간 진득하게 펴 바르고는 이번엔 제 물건을 붙잡아 쓱쓱 밀어 올렸다.

재유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그가 몸을 기울였다. 입구에서 몇 번 치대던 성기를 밀어 넣자 끄트머리가 쑥 들어왔다. 허리를 가볍게 쳐올렸는데도 긴장이 풀어졌던 내벽이 완전히 열리면서 남는 부분 없이 뿌리 끝까지 박혔다.

“으윽! 살살 좀 하면 누가 잡아먹냐?”

“응. 너. 네가 나 잡아먹잖아. 우리 처음 했을 때, 나한테 좆나 맛있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 따지려는데 치사하게 말할 틈도 안 준다. 아까보다 수월하게 진입해 온 성기는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금세 내벽 이곳저곳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들어올 때마다 그의 고환이 엉덩이에 맞부딪혀 튕길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몸이 완전히 반으로 접힌 자세 때문에 전에는 들어온 적 없는 내벽 끝까지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봐. 내 것이… 완전히, 다… 먹혀 버렸잖아.”

“하윽… 좀… 그만, 으으, 흑, 하으으…!”

오일과 애액이 엉망으로 뒤섞여 찰박거리는 소리가 음탕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접합부에서 흘러내리는 액체가 입으나 마나 한 속옷을 흥건히 적신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워지고 눈앞이 하얘질 때쯤 우주의 혀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이미 벌어져 있던 입술에 타액까지 흘러 추저분한 입가를 애타게 핥고 빨았다. 거칠게 파고드는 삽입 때문에 몸이 흔들려 입술과 혀는 제대로 맞물리지도 않았다.

이대로 하다간 정신을 잃는 게 아닐까. 굵은 선단이 전립선을 긁고 뿌리까지 박히면 까슬한 체모가 따끔하게 짓이겨졌다. 반동에 밀려 나가지 않도록 우주가 어깨를 꼭 붙들고 있었다. 꿰뚫고 들어오는 속도에 엉덩이가 부들거리면서도 지나치게 달콤해서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재유는 울다시피 소리를 지르며 팔뚝에 매달려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우주의 미간이 좁혀지고 짐승 같은 신음이 쏟아졌다. 자제하지 않고 모든 힘을 저에게 쏟아붓는 게 분명했다.

“아흑, 안, 돼. 진짜, 아아, 아으응, 흐윽!”

몸 전체를 퉁퉁 튕기며 사정없이 허리를 치대던 끝에 둘은 거의 동시에 사정했다. 재유의 페니스에서 길쭉한 액체가 튀어 오르더니 이마와 턱, 가슴과 배까지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우주는 재유의 속살에 마음껏 정액을 흩뿌리고도 몇 번을 더 허리를 쳐올렸다. 그럴 때마다 미처 나오지 못한 재유의 사정액이 삐죽삐죽 솟았다.

재유는 제 안에서 펄떡이는 우주를 느끼며 부들부들 사지를 떨었다. 탈력감을 느끼면서도 온몸이 징징 울리고 있었다.

“하아… 나, 속옷 다 젖었어. 벗고 싶어….”

두 손으로 정수리를 감싼 채 얼굴에 뽀뽀를 퍼붓던 우주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꽂은 채로 사타구니를 비비적대고 있었다. 벗고 싶다는 말을 오해한 걸까. 이러다 안에서 또 커질까 봐 두려워졌다.

“…왜? 왜 또 그런 표정 짓는데?”

우주는 나른하게 눈썹을 꿈틀대며 재유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왜 이제야 다시 만났나 후회돼서.”

“말 돌리지 말고 떨어져. 무거워.”

진심이 아닌 것 같은 표정으로 약하게 어깨를 밀어내는 재유가 시선을 피한 채 입술을 씰룩였다.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재유와 완전히 이어진 일체감 속에서 우주는 황홀한 후희를 느꼈다. 10대 때부터 그를 지켜봐 온 사람으로 장담할 수 있었다.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도 귀엽고 섹시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격렬한 섹스는 못 할 테니 미리미리 듬뿍듬뿍 해 둬야 했다.

우주는 재유의 젖은 이마를 쓸어 넘겨주고 입술을 머금어 쪽 빤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성기를 빼냈다. 안에 고여 있던 윤활제가 희부연 액체로 바뀌어 주르륵 빠져나왔다. 재유의 말대로 속옷이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엉망으로 늘어진 속옷의 구멍이 둔부에 착 달라붙은 모습에 우주는 머릿속이 다시 붉은 열기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그만 보고 나 좀 일으켜 주지?”

“어… 알았어, 알았어.”

우주는 되도록 천천히 속옷을 벗겨 주고 재유를 일으켰다. 그런 후에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 나가 생수병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뚜껑을 따서 재유에게 마시게 한 뒤 저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다 마신 생수병과 여기저기 흩어진 섹스의 부산물들을 주섬주섬 챙겨 휴지통에 버린 우주는 씻겨 준다는 핑계로 재유를 들쳐 안고 욕실로 향했다.

둘만의 달콤한 휴가는 지금부터, 라는 생각으로 물을 틀자마자 다시 허옇고 얼룩덜룩한 알몸뚱이에 달라붙었다.

재유는 알면서도 속아 준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천천히 먹어.”

우주가 잔에 커피를 채워 주며 말했다. 재유는 식탁 의자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 찌그러진 홀케이크를 접시에 덜지도 않은 채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었다. 너도 먹으라며 눈짓으로 말하자 우주도 피식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잠에서 깬 재유는 당장 배가 고픈데 음식을 해 먹기는 고사하고 렌지에 돌려먹는 것도 귀찮아서 바로 꺼내먹을 수 있는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우주의 생일 케이크였다. 익숙지 않은 솜씨로 우주가 돌아오기 전날 반나절을 투자해 만든 것이었다.

“이걸 이렇게 먹을 줄은 몰랐는데.”

케이크를 입 안에 가득 넣고서 수저로 생크림을 툭툭 치대던 재유가 속상하고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 케이크에 촛불을 붙였을 때만 해도 우주의 감동 어린 눈빛과 재유의 생일축하 송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장난삼아 얼굴에 크림을 묻혀 가며 놀던 게 한순간 야릇한 분위기로 돌변해 버렸고, 두 사람은 그대로 식탁에 엎어져 일을 치렀다.

방치된 케이크는 그대로 냉장고에 들어가고, 이틀이 지난 후에야 배 속의 아귀가 위장을 할퀴는 것 같은 허기를 느낀 재유에 의해 다시 세상 빛을 봤다.

우주는 재유에게서 1m 이상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들러붙었으며, 재유의 온몸을 손으로, 입술로, 페니스로 사랑해 주었다. 툭하면 입술을 빨고, 유두를 괴롭혔으며 몸에 난 점의 개수를 세는가 하면 온갖 근육의 모양에 대해 찬사를 담은 품평을 하기도 했다.

특히 페니스에 관한 칭찬이 압권이었다. 재유가 위에 올라탄 자세를 했을 때 출렁이는 모양새며 휘어지는 각도, 틈 사이로 뿜어내는 애액의 농밀함에 대해 심도 깊게 설명한 우주가 아무래도 여기에 꿀을 발라 논 것 같다며, 아니라면 제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빨아 대고 주물 거릴 리가 없다고 진지하게 설파했다. 만질 때마다 끈적끈적 손에 착 감기고, 냄새를 맡으면 나는 달콤한 향이 마치 최음제 같다며 입만 열면 주접이었다.

결국 그는 이름까지 갖다 붙였다. 그 별칭을 처음 들었을 때 재유는 한창 밑에서 헐떡이는 와중이라 침이 목에 걸려 사레까지 들려 버렸다.

꿀이 흐르는 예쁘고 단단한 봉, 일명 ‘꿀봉이’였다. 덧붙여 판판하고 밋밋한 유두에는 ‘꿀찌찌’라는 애칭이 생겨 버렸다.

그 후로 우주는 ‘꿀봉이’와 ‘꿀찌찌’가 재유의 제2의 자아라도 되는 양 말을 걸며 대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꿀찌찌야, 너는 퉁퉁 부어서도 왜 이렇게 예쁘기만 해?’ 묻다가 대답을 듣는 척 유두에 귀를 가져다 대더니 ‘아아, 더 예뻐지고 싶으니까 더 빨아 줬으면 좋겠다고? 알았어.’ 하며 한참을 쪽쪽 빨고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 다시 귀를 기울이더니 ‘응? 오른쪽 꿀찌찌가 섭섭해한다고? 오케이, 그럼 이따가 봐. 왼쪽 꿀찌찌야.’ 하면서 번갈아 잘도 빨아 댔다.

재유는 우주가 하는 짓이 민망하고 요사스러워서 등을 퍽퍽 두들기고 발로 뻥뻥 차며 진절머리를 쳤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아, 왜애. 꿀봉이도 나한테 할 말 있다 그랬단 말이야.’ 하며 지치지도 않고 뻔뻔하게 다리 사이로 기어들었다.

처음 콘돔 줄을 봤을 땐 설마 저걸 다 쓰겠나, 방심했던 재유는 정말로 우주가 추가로 콘돔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으며, 둘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언제 어디서든 붙어먹었다.

침대는 물론 방마다 도장 깨기를 하듯 욕실, 거실, 주방, 다이닝룸, 현관과 서재까지. 붙어먹는다는 표현이 께름칙하고 남사스러웠지만, 지난 며칠간 두 사람의 행동을 그보다 잘 설명하는 수식은 없었다.

“단언컨대, 내 생애 최고의 생일 케이크였어.”

그래, 저 표정… 저 표정이다. 익살맞으면서 뻔뻔하고 상대방을 놀려먹을 의도가 다분히 섞인 저 얄궂은 표정.

꼭 애정 표현을 그렇게 유치하게 해야 하나. 재유는 말할 힘도 없이 그래, 놀려라, 나는 먹을란다,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왜 그동안 짐 정리 안 했어?”

“…그냥 보관만 하기로 한 거잖아.”

이제 내일이면 입주 청소를 하고 이삿짐을 옮겨야 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우주가 슬쩍 떠보듯 짐을 들먹였다.

재유의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동안 짐과 가구들을 보관하는 장소를 고민하다 우주가 제집에 두면 된다고 해서 옮겨 놓은 거였다. 우주가 사용하지 않는 제일 큰 마스터룸은 희지와 재유의 짐은 물론 웬만한 가구들을 욱여넣고도 공간이 넉넉했다. 그 덕에 재유는 이 집에서 지내며 편하게 옷가지나 생활용품들을 꺼내 쓸 수 있었다.

아마 우주는 여행하는 동안 재유가 아예 짐을 풀고 이 집에 눌러앉길 바랐나 보다. 안 될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진 그를 보자 마음이 짠해졌다.

“희지 학교가 멀잖아. 그래도 자주 놀러 올게.”

“자주 얼마나?”

“음… 최소 일주일에 한 번.”

“그래. 그럼 되지 뭘. 참, 희지 학교는 내가 등하교시켜 줄 수 있어. 그냥, 알아 두라고.”

우주는 가볍게 말하며 웃었다. 이럴 땐 안쓰러워서 가슴 한구석이 짜르르 저려 왔다. 이 큰 집에 그를 남겨 두고 가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소엔 집착하고 몰아붙이다가 이렇게 한 번씩 약한 소리를 하면 마음이 자갈밭이었다.

재유는 케이크를 씹어 삼키고 커피를 입에 털어 넣은 뒤 우주의 허벅지에 올라탔다. 큼직하고 남자다운 손이 자연스레 허리와 엉덩이에 감겼다.

“몸만 커다랗지, 아직 애야 애.”

“그래서 싫어?”

웃음기를 담고 있었지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올려다보며 우주가 물었다. 재유는 대답 대신 뺨을 감싸 코끝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럼 일주일에 한 번은 네가 여기로 오고, 나머지 6일은 내가 너네 집 가면 되겠다.”

재유가 해 준 뽀뽀가 기분이 좋았는지 우주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그럼 같이 사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런가? 에이, 어차피 같이 살기로 한 거 미리미리 연습하는 거지.”

“치….”

“왜 치야, 내 말 틀려?”

풉, 웃은 재유가 다시 입술을 내려 이번엔 우주의 입에 도장을 꾹 찍었다.

“나 배고파. 케이크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어.”

“피자 먹을래?”

“응. 고구마 들어간 걸로.”

“알았어. 금방 시킬게.”

“그럼 나 영화 고르고 있을게.”

우주가 그러라는 의미로 엉덩이를 툭툭 치자 재유는 허벅지에서 내려와 서재로 향했다. 우주도 핸드폰을 켜며 얼른 뒤따랐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짐이 꽉 들어찬 방이었다. 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비디오 키드답게 그의 서재에는 DVD용 책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온갖 장르의 영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유는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살면서 놓쳤던 영화들, 보고 싶었는데 미뤄 뒀던 영화들을 하루에 한 편씩 보는 게 낙이었다.

우주가 돌아오고 나서도 하루종일 몸으로 대화를 하다가 지금처럼 날이 저물 때쯤 끼니를 때우며 영화 한 편을 보곤 했다. 그러다 다시 밤늦은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한데 뒤엉켜 침대로 향했다.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말대로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느낌에 적잖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DVD는 나라별로 가지런히 분류되어 가다나 순, ABC 순, 숫자 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선택적 결벽증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짐이 없는 다른 방에 비해 오히려 더 깔끔하고 정갈해 보였다.

“그거 기억나? 너 대학 기말고사 앞두고 종로에 있는 심야극장에서 봤던 거.”

재유는 한국영화 코너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 그거. 제목 뭐더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그거 전에 한 번 보고 서랍장에 넣어 둔 것 같은데. 한번 뒤져 봐.”

우주가 책장 아래에 딸린 서랍장을 가리켰다. 서랍을 차례대로 열어 보던 재유는 마침내 찾는 것을 발견했다.

2000년대에 사는 남자가 70년대에 사는 여자와 무선통신으로 연결되며 생기는 일을 다룬 스토리였다. 재유가 공장 다니던 시절, 쉬는 날 서울에 곧잘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 함께 봤던 개봉 영화 중 하나였다.

“찾았다! 어… 근데 이건 뭐야?”

DVD를 들어 올리자 재유의 눈에 사진 뭉치들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우주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후다닥 달려와 서랍을 거칠게 닫으며 몸으로 막아섰다.

“염우주. 좀 비켜 볼래? 뭔지 확인 좀 해 보게.”

“아무것도 아냐. 그, 그냥… 옛날 물건들 모아 놓은 거야.”

말을 더듬는 게 더 의심스러워 재유는 서랍장에 달라붙은 몸뚱어리를 전력으로 밀쳐냈다. 떨어져 나가서도 안절부절못하며 곁에 착 달라붙어 만류하는 그의 몸짓이 퍽 애처로웠다. 재유는 가소로운 듯 우주를 힐끗 쏘아보고 다시 서랍장을 열었다.

“너… 이거, 이 사진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신경질적으로 사진을 넘겨보던 재유는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우주와 헤어져 있었을 시기에 찍힌 사진들이 분명했다. 주로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과 집 근처, 호텔 앞에서 몰래 숨어 찍은 것이었다.

“혼내 주세요. 잘못했어요.”

우주가 고개를 푹 숙이고 꼬리 내린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네가 찍은 거야?”

잠시간 아무 말 없더니 우주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님, 다른 사람 시켜서 한 거야?”

우주는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이없고 기가 찬 것도 잠시, 재유는 뇌리를 번뜩 스치는 어떤 생각에 말문이 흐려졌다.

“아… 그래서 송진우가….”

“뭐? 송진우?”

재유는 우주의 상박을 붙잡고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그 이후로 송진우 만난 적 있어?”

“아니? 네가 만나지 말랬잖아. 그럴 시간도 없었어.”

억울한 듯 말하는 어조였다. 재유는 재차 캐물었다.

“그럼 송진우 뒷조사도 한 적 있어?”

우주는 침묵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재유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

2주 전, 재유는 송진우를 만났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경상도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근무지는 논밭이 둘러싸인 가운데 휑뎅그렁한 건물 한 채가 놓인 외딴곳이었다. 주변에 드물게 농가가 한두 채뿐인, 편의점 하나 없는 그곳까지 재유는 쉬는 날을 이용해 버스 타고 택시 타며 걸음을 했다.

건물 내 빈 사무실로 안내받은 재유는 부쩍 핼쑥해진 송진우를 마주했다. 근 두 달 만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일하게 됐네요.”

그가 꺼낸 첫마디였다.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인지 재유의 기억보다 말투가 어눌했고 젠틀한 세련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푸석한 모습이었다.

재유는 일말의 미안함과 아직 남은 분노로 인해 그를 앞에 두고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재유 씨도 이런저런 힘든 일이 있었겠지만, 저도 보시다시피 뭐… 많은 변화가 생겼죠.”

“…….”

“지현이도 마음 정리가 좀 돼서… 그래도 다행히 대학은 들어가게 됐어요.”

송진우는 그간의 일을 회상하듯 힘없는 목소리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지현이가 곧 희지를 찾아갈 겁니다.”

송진우는 그렇게 말하고 쓰게 웃었다. 잠자코 듣던 재유는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아, 사과하러 갈 거란 말입니다. 허락을 하신다면요.”

악연이다. 애초에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희지와 송지현도, 자신과 송진우도. 앞으로 만날 일도 없어야 한다.

“허락… 못 합니다. 다시는 저희 앞에 나타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재판도 흐지부지될 텐데 앞으로 더 볼일도 없을 거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발뺌하실 겁니까?”

송진우의 말투는 격앙되어 있었다. 저를 원망하는 것 같은 눈빛과 뻔뻔하고 냉정한 목소리.

그의 다그침에 재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뭐 하는 짓입니까, 지금!”

송진우는 테이블에 걸치던 체중을 등받이에 실으며 놀란 듯 말했다. 재유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제가 심하게 때렸던 거,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앞뒤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일… 희지 친자…에 관한 거, 덮어 주세요. 앞으로 희지를 찾지 마세요.”

“하… 이제 와서 전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전처에게도 전부 까발려져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고, 회사에서도….”

재유는 송진우의 말도 끊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그를 만나러 온 목적이 이것이었다.

“희지는 이제껏 제 딸로 살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지현 양이 있으니 이해하시겠죠.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아빠일지도 모른다며 친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일은 저로서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어요. 근데 만약… 희지가 그걸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희지가 그 사실을 알고 싶어 할까요?”

“…….”

“희지는 부족한 환경일지는 몰라도 행복하게 자랐어요. 그건 제가 자신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알던 아빠가 친아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행복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빠인 저를… 또 송진우 씨를 원망하지 않을까요? 죽은 인애까지도요. 당신은, 그 원망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또… 협박하는 겁니까?”

재유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정했다.

“협박하는 거 아니에요. 간곡하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희지는 몰라야 합니다. 어른이 된 다음에? 아니요, 희지는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을 해서도, 나중에 아이를 낳아서도 그 사실을 몰라야 해요. 희지는 죽을 때까지 제 딸로만 살아야 합니다.”

“…….”

재유가 허벅지에 주먹을 꼭 말아쥔 채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다해 사죄하고 간절함을 담아 애원했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에 희지까지 휘말리게 할 순 없었다.

둘 사이에 무겁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처자식을 두고 인애와 바람을 피우는 하찮은 인간이었더라도 자식인 송지현을 위하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 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외동딸을 키우는 입장이니 통하는 게 있을 거라고, 재유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희지 곁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재유는 무릎 따위 얼마든지 꿇을 수 있었다. 전 재산을 바칠 수도 있었다. 희지가 다치지만 않는다면.

“송지현 양이 사과하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지에게는 제가 잘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

“참 대단하네요. 당신 친구라는 사람도 무례하기 짝이 없더니, 이제 그쪽까지 이런 식으로 나온다니….”

“…제 친구가 어떤 무례를 범했든, 그것까지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우리를 찾아오지 마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재유는 거의 울다시피 빌고 또 빌었다. 혀를 쯧 차던 그는 재유를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재유 씨 마음은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도 당분간 한재유 씨 얼굴 보고 싶진 않네요. 그러니 그쪽도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재유는 송진우가 나가고서도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제발 저 멀쑥한 얼굴을 다시 볼 일 없길 바라고, 이대로 인연이 끊기길 바랐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재유는 무릎을 꿇은 채 송진우를 향해, 생전 찾아본 적 없는 하늘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간절하게 빌었었다.

***

그 이후로 송진우와의 기억은 애써 한편에 밀어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쑥 또다시 그가 화두에 올라왔다. 재유는 입 안 살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왜? 나 없는 동안 송진우 만난 적 있어?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재유야!”

재유는 다그치는 그의 얼굴을 고민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당시 송진우가 보였던 반응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저 제가 때렸던 일 때문에 심하게 다쳐서 원망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주로 인한 뭔가가 더 있었던 것이다.

“넌 송진우한테 뭐라 그랬는데? 혹시… 협박한 적 있니?”

팔이 붙들린 상태로 추궁을 받고 있던 우주는 재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불안해하는 자신에 비해 아무 거리낌이 없는 말투였다.

“네가 만나지 말래서 그 후로 안 만난 건 맞아. 근데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보험 하나 만들어 뒀어.”

“뭘 어떻게 했는데?”

“별다르게 한 건 없어. 내가 뒷조사하고 있다는 거 알려 준 것밖에.”

“왜 그랬어. 그러다 그 사람이 앙심 품으면 어떡해….”

재유는 안타까운 듯 말꼬리가 늘어졌다.

“알아 나도. 그놈이 앞으로 너 찾아오면 안 되는 거잖아. 그건 이제 내 인생에도 중요한 일이야. 난 내가 할 일을 했어. 재유야… 너도 희지도 평생 그 사람 얼굴 볼 일 없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송진우가 제 부탁을 들어줄지 아닐지를 당장은 판단할 수 없었다. 이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흐르고, 모든 세월이 지나 봐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어? 그래도 만약에 그 사람이 다시 불쑥 찾아온다면… 어떻게 할 건데.”

“이런 일은 내가 아무리 장담한다 해도 미래의 일까지는 알 수 없겠지. 그런데-”

“…그런데?”

재유는 초조한 심정으로 우주의 말을 되뇌었다. 구겨진 미간을 길쭉한 검지가 다가와 주름을 펴려는 듯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건 장담할 수 있어. 만약 그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난 네 옆에서 함께 방법을 찾을 거야. 최선을 다해서, 내 모든 역량을 쏟아서 너랑 희지가 다치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게 무슨 일이든 할 거야. …그럼 네 마음이 좀 안심이 될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재유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어.”

“걱정하는 네 마음 다 알아. 그래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현재를 망치진 말자.”

“…….”

과거 언젠가 들었던 말이었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걱정하는 자신에게 우주는 늘 그런 말을 했었다.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했던 일들이 아무 일 없이 끝나는 게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럴 때에는 미리 했던 걱정이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현실은 늘 상상과 예측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그럼 하는 수 없이 그 현실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고 미래를 도모해야 했다.

일견 우주의 말도 맞다. 사서 걱정하면 현재를 망친다. 하지만 쉽사리 불안을 떨칠 수 없는 제 성격을 버리기도 힘들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이럴 땐, 조금만 걱정하고 조금만 불안해하면서, 그냥 피자 먹고 영화 보면 되는 거야.”

“…뭐?”

“우리 오늘 이 집에서 마지막 날이잖아. 그런 어두운 생각 하면서 보내기엔 시간이 아깝다고. 안 그래?”

“…….”

재유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힘없이 웃어 버렸다. 결국엔 우주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겠지. 그럼 혼자였을 때보단 든든한 제 편이 있는 지금이 훨씬 나을 테고.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렇지! 역시 우리 재유 똑똑해.”

우주는 한시름 놨다는 듯 재유를 껴안으려 했다. 한데 재유가 가슴팍을 밀어내며 그를 저지했다.

“근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런 사진을 찍어 왔던 거야?”

재유는 제가 찍힌 사진을 팔랑거리며 우주의 엉덩이를 팡 두드렸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우주가 눈을 내리깔고 백기 투항했다.

“또 그럴 거야?”

“아니, 절대. 절대 안 그럴 거야.”

재유는 우주를 위아래로 훑으며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의기소침해진 그가 커다란 몸으로 재유를 뒤덮으며 갑자기 앙탈을 부려댔다. 아아아앙, 어울리지 않게 콧소리도 냈다.

“이제 진짜 안 그럴게. 한 번만 용서해 주라. 너 보고 싶어서 그랬단 말이야. 응?”

“참 내…. 어려서도 쫓아다니더니 어쩜 커서도 그대로냐?”

“그러게. 난 왜 그럴까?”

“말 돌리는 거 하고는…. 암튼 약속했어.”

“당연하지. 내가 또 그러면, 희지 동생이다.”

“얼씨구. 내가 너까지 키워야 돼?”

“에이, 안 그러겠다는 얘기지.”

재유는 귀까지 벌게지며 쩔쩔매는 우주의 모습을 기가 차게 바라보았다. 애교까지 부려가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그의 태도에 어릴 적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 슬그머니 웃음이 나려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재유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꾹 눌러 참았다.

어쩐지. 우유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도, 유치장에 마중을 왔을 때도 묘하게 의연하던 우주였다. 실은 훨씬 전부터 제가 사는 모습을 염탐해 왔을지도 몰랐다.

재유는 그것이 분해서 우주의 엉덩이를 재차 갈겼다. 앞으로는 나아질까. 저놈의 집착이.

딩동. 도어 벨이 울리자 우주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재유의 손아귀에서 줄행랑을 쳤다. 꽁무니를 빼는 뒷모습을 보며 재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재유는 알아서 피자를 척척 세팅하고 DVD를 재생시킨 뒤 손을 잡아끄는 우주를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케이크를 먹었는데도 피자 냄새가 풍기자 다시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허기가 느껴졌다.

우주는 고구마피자 한 조각을 건네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재유는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피자를 받아 허겁지겁 입속에 집어넣었다.

영화는 주인공이 동아리방에서 주운 무선통신기계를 재주껏 고쳐 과거를 사는 여자와 대화를 하는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배불리 피자를 뜯은 두 사람은 어느새 딱 붙어 어깨를 맞대고 진지하게 영화에 집중했다.

과거에 봤던 영화라도 나이 들어 다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그 시절 유행하던 패션이나 헤어 스타일이 촌스럽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묘사하기 힘든 아득한 감성과 추억이 물씬 풍겨서 그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이 메고 다닌 저 가방 있잖아.”

“음… 테크노 가방?”

“크큭… 맞어. 테크노 가방이었지. 이름도 촌스럽다 진짜. 저 때 저 가방 학교에 메고 다닌 애들 몇몇 있었는데. 지금은 다 버렸겠지?”

“글쎄. 혹시 알아? 지금 메고 다니면 복고 취급해 줄지.”

“에이, 설마. 왜? 하고 다니게?”

“미쳤어? 그거 메는 순간 희지가 길에서 아빠 모른 척하고 떨어져서 걸을걸?”

재유는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두 사람은 드문드문 기억나는 스토리를 말하기도 하고 주연 배우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기도 하며 영화를 봤다.

우주는 꽤 많은 걸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그날 극장에서 봤던 앞자리 관객의 애정행각이라든가, 영화가 끝나고 먹었던 음식 메뉴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갈비탕과 만두를 먹었더랬다.

“나도 저런 기계 있었으면 좋겠다.”

“왜? 누구랑 통신하려고?”

“과거의 나. 3학년 첫날의 나한테.”

우주는 재유의 머리를 끌어당겨 몇 번인가 입을 맞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자랑. 나 지금 재유랑 키스도 하고 더 야한 것도 하고 앞으로는 같이 살기로 했다고 자랑할 거야.”

“…그게 뭐야.”

“뭐긴. 미래에 그렇게 될 거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거지.”

농담 같은 우주의 넉살에 뭉클해졌다. 재유는 그의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기댔다. 입가에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정말 행복하다고 느낄 때 나오는 웃음이었다.

저런 기계가 있다면 재유는 미래의 자신과 얘기해 보고 싶었다.

지금 우주가 곁에 있어 너무 행복하니까 행여 삶이 힘들고 퍽퍽해지더라도 그를 떠날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지난 과거를 통해 몇 번이고 증명되었으니 앞으로도 분명 행복할 거라고.

우리는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오래전 읽다 만 책을 다시 열었는데, 그만 책갈피를 잃어버려 첫 장부터 되짚어 읽어야 하는, 그런 연애였다. 다시 읽어도 언제나 마음을 울리는 글귀 같은 사랑을, 우주가 나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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