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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가족의 형태 (15/18)

14. 가족의 형태

* * *

부쩍 해가 짧아진 늦가을 저녁이었다. 오후부터 내린 비가 제법 빗방울이 굵어져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수연이 전화로 재유가 유치장에서 나올 시간을 알려 주었다. 48시간 만이었다. 수사는 불구속으로 진행되니 네가 마중 나가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도 해 보고 재유의 사정 얘기도 들어 보라고 덧붙였다.

우주는 거리를 오가는 우산 행렬과 빗방울 때문에 번져 보이는 앞차의 브레이크 등에 초조한 시선을 던지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봐 불안해진 손끝이 부산스럽게 핸들을 툭툭 때렸다.

직좌 신호등에 화살표가 뜨고 좌회전을 하자 경찰서 건물이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우주는 곧바로 딱딱한 회색 건물의 정문으로 향했다. 아직도 이곳에 재유가 갇혀 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

두리번거리며 유치장을 찾았던 처음 방문과는 달리 이번엔 곧바로 직진해서 목적지로 향했다.

“…….”

우주는 순간 숨을 멈추고 자리에 우뚝 섰다. 복도 끝에서 재유가 걸어오고 있었다.

재유는 처음엔 놀란 듯 눈이 커지더니 이내 표정을 지우고 멍하게 우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왜 여기서 이상한 재회를 하고 있는지는 크게 관심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어색한 대치 상태가 잠시간 이어진 끝에 우주가 먼저 한 발짝 다가갔다.

“너는.”

가까이 다가온 우주를 올려다본 재유가 끊어질 듯한 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가 정말 밑바닥일 때도 가만두지 않는구나. 감추지도 못하게.”

덧붙인 말에 우주는 미간을 구겼다. 막상 경찰서 복도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니 가슴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안색이 훨씬 나빠졌고 그새 살이 빠진 듯 뺨도 각지게 패여 있었다. 얼마 전 우유의 장례 때 만났던 모습과도 달랐다. 상실과 무력감에 지배당한 사람처럼 얼굴에 기운이나 의지가 없었다.

겉옷도 없이 얇은 회색 남방과 청바지 차림에는 군데군데 검붉은 얼룩이 튀어 있었다. 특히 오른쪽 소매는 팔꿈치 안쪽까지 자국이 길게 남았다. 그날의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가자. 데려다줄게.”

우주는 재유의 어깨를 감싸고 입구 쪽으로 향했다. 몇 걸음 잘 따라오던 재유가 어깨를 비틀어 팔에서 벗어났다.

“네가 왜.”

밀쳐내는 힘이 미약하고 목소리도 여전히 작았지만, 함께 가는 것을 분명하게 거부하는 태도였다.

“병원에 가야 되잖아.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우리 집이 더 가까우니까 잠깐 들러서 씻고 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가.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가라고. 우리 이제 그런 사이도 아니잖아. 어쩌다 한번 다시 만났다고 해서 네가 나한테 뭘 해 줘야 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

재유는 뭔가 더 말을 꺼내려다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대로 가려는 걸 팔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래. 알았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가라면 갈 거야. 근데, 오늘은 아니야.”

지금 이 시점에, 하필 이런 사건으로 재회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스스로 매듭짓지 못했다. 감정으로만 따지자면 애정뿐 아니라 원망과 미움도, 집착과 소유욕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한데 지난 이별들의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가라는 말에 내성이 생긴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마음 아팠다. 그러나 이제 그 말에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우주는 다시 부축하듯이 재유의 어깨를 감쌌다. 기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우주는 개의치 않고 재유를 안은 팔에 힘을 실은 채 그대로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차를 태우고 오는 내내 그는 말이 없었다. 뭔가를 묻지도 않았고, 제 얘기를 하려는 시도도 없이 차창 밖을 끈질기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차내에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폭풍 전야의 긴장 같기도 하고, 태풍의 눈 속 고요 같기도 한 위태로운 침묵이었다.

풀려났다곤 해도 평생 가 볼 일 없을 것 같은 유치장이라는 곳에서 이틀이나 지내고 나왔다. 보통 일도 아니고 자식과 관련한 일로 시비가 붙어 철창신세를 지고 나온 재유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것도 알겠다.

그의 말대로 우연히 만났다고 해도 그냥 남처럼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사이였다. 아직까지는.

그런데 그게 되나. 너랑 나 사이에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어찌할 바를 몰라 쫓아다니는 제 심정을 그가 몰라 준다고 해서 서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재유 앞에만 서면 쭉 이래 왔던 놈이니까.

그냥 걱정돼서 죽을 것 같았다. 재유가 받았을 상처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제 손으로 치워 주고 싶었다. 또 부담스러워하려나. 이제 나이도 좀 들었으니 고집 좀 그만 부리고 적당히 기대는 법도 배웠으면 좋겠는데.

비는 조금 더 거세져 와이퍼 속도를 최대로 높여야 했다. 늦가을에 퍼붓는 비는 곧 추위가 다가올 것을 예고했다. 아직 겨울이 온 것도 아닌데 한기가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사귀던 동안 둘 다 한 지역에 살며 사계절을 보낸 적이 없었다.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한 시점엔 우주가 대학 때문에 서울로 떠나야 했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5월에 시작해 해를 넘기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분명 첫 만남은 햇살이 쏟아지는 파릇파릇한 봄이었는데 결국에는 거센 비바람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폭설로 끝이 났다.

우린 지금도 한겨울이겠지.

우주는 지금의 재유와의 관계 역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차고 시린 계절을 반복해서 지나는 기분이었다.

히터를 좀 더 올리면서 흘긋 재유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누그러졌지만,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차는 언덕의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 결혼해 살던 빌라인데 집은 다른 집이었다. 이혼 당시 딸에 대한 전남편의 평판을 염려하던 수연의 아버지가 살던 집을 위자료로 생각하라며 우주에게 주려 했지만, 어차피 끝난 결혼 관계를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싶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새로 집을 알아보기도 귀찮고, 5년 동안 살아 익숙한 곳이기도 해서 마침 매물이 나왔다길래 바로 계약하고 옆 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 사람을 데려온 건 처음이었다. 제가 사는 모습을 궁금해하는 어머니와 형도 이 집을 방문하는 것이 이제는 간섭처럼 느껴져 오겠다는 걸 극구 거부했다.

처음 이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집은 세상에 온전히 나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어도 숨이 트이는 공간.

그런 곳에 재유를 들였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이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처음 데려온 게 재유라는 것에 속으로 감동하기도 했다.

우주는 긴 복도를 지나 가까운 욕실로 재유를 안내했다. 곧 탈진해 쓰러질 것처럼 몸에 힘이 빠져 있고,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보고 있기만 해도 애가 닳았다.

“옷 가져다줄게. 문 앞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일 있으면 바로 불러.”

사실은 불안한 마음에 직접 씻겨 주고 싶었지만, 불편해할 테니 그것까지 고집할 순 없었다. 욕실 문을 열어 주고 재유가 들어가길 조용히 기다렸다.

“대신 문은 조금만 열어 놓을게. 그냥, 소리로 확인만….”

걱정돼서 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우주는 말을 멈추고 안색을 살폈다. 갑자기 재유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거렸다. 말을 하려는 줄 알고 고개를 살짝 틀어 귀를 기울였다. 입가를 바라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재유는 웃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헤어진 애인 집에서 샤워를 해야 하는 지금 상황이 어색하고, 최근 들어 당최 웃을만한 일도 없었어도, 우주 앞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웃어 주려 했다.

“…….”

울고 싶었다. 그는 웃고 싶어 하는데, 오히려 우주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그러진 경련 같은 웃음에서 주름을 지워 내고 평온과 안도 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그려 주고 싶다.

재유는 내가 그것을 하게 해 줄까.

우주는 입술을 꾹 붙여 안으로 말아 넣으며 코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힘든 거 안다고, 네 마음 알 것 같다고, 최선을 다해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재유의 축 늘어진 손을 잡고 잠시 힘주어 꼭 쥐었다. 마르고 강단 있는 손가락에 굳은살은 여전했다. 놔주는 게 아쉬워 엄지로 손등을 몇 번 쓸고 나서야 손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재유가 씻는 동안 갈아입을 옷가지를 가져와 문가 옆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말한 대로 문을 반 뼘 정도 열고서 샤워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혹시 넘어지지나 않을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물소리가 끊길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10분쯤 지났을까. 문이 한 뼘쯤 더 열리고 뿌연 수증기 사이에서 발치를 더듬는 하얗고 창백한 손이 나오자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옷을 다 입고 욕실을 나올 때까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우주는 재유의 등을 감싸고 거실 가운데로 이끌었다. 기다란 가죽 소파의 가장자리에 앉히는데, 풀썩 앉았으면서도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생수를 건네주니 절반 정도를 비우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알았어?”

생수병을 양손으로 쥐고 재유가 물었다. 눈은 테이블 한쪽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연 변호사… 이혼한 전처야.”

재유의 눈이 커졌다. 순수하게 놀란 것 같다가 이것저것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는지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러다 곧바로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랬구나. 그럼 다 알았겠네. 내가 왜 거기 들어갔었는지.”

우주는 괜히 죄지은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굳이 수연을 통하지 않아도 알아냈지만, 사람을 써서 뒷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질문에 댈 수 있는 핑계가 수연인 것도 아이러니했다.

“어떻게 알았건 상관없어.”

재유는 덤덤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 일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난 택시 타고 가도 되니까 병원까지 데려다줄 거 없어.”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말했다. 혼자 간단 말에 저도 모르게 재유의 손을 붙잡았다.

“나랑 같이 가.”

“…….”

“이제… 나 놔두고 갈 생각하지 마.”

우주는 낮은 목소리로 어르듯 말하고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고개 숙여 바라본 재유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무슨 말이야.”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너 혼자 보내기 싫으니까.”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꿈지럭거리다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인데도 말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네 상황 뻔히 아는데, 네 기억엔… 이렇게 비 오는 날 혼자 보낼 정도로 내가 매정한 놈이었어?”

재유의 입가에 메마른 조소가 떠올랐다. 허공을 보며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매정한 건 나였지. 넌 아무 잘못 없어. 그러니까.”

또 혼자 가겠단 소리. 듣기 싫었다.

우주는 재유가 말을 맺기도 전에 거부의 의미로 재유를 품속에 끌어당겼다. 기력 없는 몸이 의지를 잃은 것처럼 손쉽게 들어왔다.

막 샤워를 마치고 헐렁한 제 옷을 입은 채 품에 안긴 재유의 몸. 여전히 좋았다.

벗어나려는 듯 미약한 뒤챔이 느껴지자 우주는 더 깊이 끌어안으며 부탁했다.

“아무 걱정 말고 나랑 가. 옆에 있게 해 줘.”

우주는 그의 등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 안에 갇힌 불행과 나쁜 기운을 빼내려는 듯 손바닥에 전체에 힘을 주며 다독였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질 때쯤 재유의 이마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우주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넌 내가 뭐라고… 아직도 이러고 있어. 내가 밉지도 않아?”

“밉기는. 미웠으면 이러고 있겠어?”

우주는 상체를 조금 물리고 재유의 허리에 손을 걸친 채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지치고 곤한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바보 같은 놈. 너도 참 딱하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우주는 착한 아이를 칭찬하듯 재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사람 때렸어.”

우주의 손길에 불안함을 느낀 듯 재유가 눈을 피하며 표정을 지웠다. 잠깐이라도 행복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좀 전의 들떴던 기분을 자책하는 얼굴이었다. 우주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미끄러뜨려 턱을 잡아 그의 시선을 들었다.

“알아. 해결하면 돼.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주면 더 좋고.”

“…….”

재유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그의 자포자기가 이젠 보기 싫었다. 제 처지 때문에 지레 겁먹고 피해 주지 않으려 달아나는 건 이제 정말 사양이다. 그가 떠나서 행복하지도 않았고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희지한테 가자. 보고 싶잖아. 응?”

우주는 벗어나려는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재유가 얼굴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터트렸다.

“너 손….”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던 상처가 눈에 보였다. 오른쪽 손목과 손가락이 조금 붓고 손등 위에 벌어진 상처가 얇은 피부 위로 붉은 자국을 남겨 놓았다. 경찰은 치료도 안 해 주고 사람을 가둬 놓은 건가. 뒤통수로 열이 뻗쳤다.

“병원에 갔었어? 희지도… 만났어?”

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희지 얘기가 나오자 단박에 재유의 표정이 달라졌다. 어딘가 화난 사람처럼, 쏘아보는 눈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제가 허락 없이 희지를 만난 게 화가 난 건가. 아니면 희지 얘기 자체로 화를 내는 건가.

“만났어. 희지도, 아주머니도. 희지가 아빠 기다리고 있어. 손도 치료해야지. 얼른 가자.”

우주는 재유의 안 다친 손을 그러쥐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손이 당겨지며 재유가 버티고 있었다.

“…집에 들렀다 가야 돼. 갖고 갈 거 있어.”

“그래. 갔다가 가자.”

재유는 그제야 움직였지만, 팔려 가는 노예처럼 억지로 끌려오는 느낌이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문제를 강제로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 같았다. 그게 조금 의아했다.

희지는 아빠가 병실에 없는 이틀 동안 어디에 갔는지 모르고 있다. 아주머니도 희지를 염려해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딸에게 유치장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걱정하는 걸까.

우주 역시 희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를 때린 여학생의 아버지를 죽도록 팬 아빠에게 실망하려나. 아니면 ‘역시 우리 아빠’라며 통쾌해하려나.

사실 복수를 하려면 희지를 때린 당사자에게 해야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희지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놨기로서니 재유가 열아홉 여고생을 상대로 폭력을 쓸 리는 없다.

그렇다고 여고생 아버지를 현장에서 체포될 만큼 때렸다는 것도 실은 믿기 힘들었다.

단순히 내가 자식이 없어서, 자식이 맞고 들어온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걸까.

그 사람도 자식 때문에 합의를 위해 찾아온 건데, 대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길래 병원 신세를 질 때까지 패 버린 건지.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갔다. 제가 알고 겪어 온 재유는 그런 상황이 오면 자리를 피하거나 오히려 자기가 맞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더 열 받았겠지만.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재유는 말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아? 뭣 좀 먹었어?”

“생각 없어.”

분명 유치장에서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텐데. 차 안은 말이 없는 둘 사이에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한 번 와 봤다고 이번엔 헤매지 않고 곧바로 그가 사는 아파트를 찾아냈다. 우주는 입구에 차를 바짝 댄 채 비상등을 켜고 재유를 향해 몸을 틀었다. 뒷좌석에 우산을 집어 건네주려는데 재유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

“10분이면 돼. 금방 올게.”

재유는 밖에 비가 오는 걸 잊은 사람처럼 뛰지도 않고 평소 걸음 그대로, 아니, 더 축 처진 채로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퍼붓는 비에 쫄딱 젖어 버린지도 모르는 것처럼 모퉁이를 꺾어 사라졌다. 뒷모습이 애잔했다.

쯧, 우주는 혀를 한 번 차고 차에서 내렸다. 우산을 들고 입구에 서서 재유를 기다렸다.

“…….”

약속했던 10분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초조해졌다.

따라갈 걸 그랬나. 희지의 물건을 챙겨 나오는 건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불안함에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복도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재유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왔다. 짐을 챙겨 온 줄 알았는데, 재유는 빈손이었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뭘 하고 나왔길래.

그래도 재유가 눈앞에 있어서 일단은 안심이 됐다. 젖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나온 모습에 우주는 또 한 번 혀를 찼다.

재유에게 입혔던 검은색 재킷을 벗기고 자기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서 그의 어깨에 걸쳤다. 우산을 씌워 차에 태우는 동안 재유는 순순히 우주를 따랐다.

재유는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멍하게 한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재유는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다.

헤어진 연인에겐 공유할 수 없는, 혼자서 해결해야만 하는 영역에서 치열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다.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기도, 툭 터놓고 얘기해 보라 다그치기도 힘들었다. 우주의 불안이 점점 커져 갔다.

세찬 비를 뚫고 20분쯤 달리자 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재유도 눈치챘는지 상체를 숙여 고개를 쭉 빼고 병원 건물을 쳐다봤다. 그러다 갑자기 차 안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왜 그래. 뭐 찾아?”

“아까 나 입고 온 거. 네가 빌려준 옷 어디….”

재유가 뒷좌석에서 찾고 있던 걸 발견했는지 손을 뻗어 검은 재킷을 가져왔다.

“왜, 추웠어? 그건 젖었는데.”

“괜찮아.”

재유는 흘긋 눈치를 살피며 재킷을 접어 무릎에 내려놓았다. 안에 든 걸 확인이라도 하는 듯 재킷을 더듬어 만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행동에 우주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차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빗소리가 멈춘 차 안에서 우주의 입술 새로 긴장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내 딴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던 재유는 예상과 달리 차에서 내리자 침착함을 되찾은 듯 보였다. 머리를 털어 물기를 걷어 내고 옷매무새를 매만지던 그는 곧 희지를 만나는 것에 긴장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9층 버튼을 누르자 재유가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9층을 취소시키고 8층을 눌렀다.

“희지 병실 803호야.”

“아냐. 901호야. 내가 옮겼어. 1인실로.”

우주는 8층을 취소하고 다시 9층을 눌렀다. 소리도 없이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뭐? 왜?”

“좁고 시끄러우니까.”

“왜 그런 걸 상의도 없이 결정해. 너 진짜….”

병실을 옮긴 일로 타박을 들을 줄은 알았기에 우주는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왜긴. 내가 희지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주는 거야?”

하아,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쉰 재유는 추궁의 시선을 던졌다. 우주는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9층에 도착했다.

재유는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 번 더 접어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이상했다. 왜 젖은 옷을 여기까지 들고 왔는지. 저 옷 주머니에 소지품을 챙겨 왔으면 그것만 꺼내면 될 텐데.

“다음에 얘기하고 일단 가자.”

희지의 병실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새로 고용한 간병인과 아주머니, 그리고 희지가 있었다.

“아빠!”

모로 누웠던 몸을 일으키고 아빠를 부르는 희지의 목소리에 반가움과 투정이 섞여 있었다.

“으이그, 왜 이제 왔어. 희지가 아빠 얼마나 기다렸다고. 우주도 왔네?”

아주머니가 재유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고 우주와도 눈짓으로 인사를 나눴다. 재유는 희지 곁으로 다가가 머리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확인했다.

“많이 기다렸지. 아빠가 미안해.”

“어디 갔다 왔어?”

“천천히 다 얘기해 줄게. 몸 어때, 괜찮아?”

희지는 아빠를 반가워했지만,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듯 입을 삐죽였다. 재유는 아이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연신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 살랑살랑 흔들면서 달래 주었다.

좀 전까지 암울했던 차 안의 분위기가 거짓말 같았다. 재유는 희지 앞에 서자 걱정과 우울을 싹 지우고 태연하게 아빠의 모습으로서만 앉아 있었다. 내내 굳어 있던 우주의 표정도 조금은 풀어졌다.

“아빠 이제 계속 희지 옆에 있을게. 그니까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

“누가 아빠더러 계속 병원에 있으래? 나도 이제 아빠 귀찮거든?”

재유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상처받은 척 불쌍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희지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자 “아아, 진짜 미안해애. 아빠 한 번만 용서해 주라 응?” 혀짧은 소리까지 내면서 자기에게도 부려 본 적 없는 애교를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섭섭하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다. 좀 전까지 세상 죽어 가던 표정이던 그가 딸 앞에서는 낯선 사람처럼 달라지는 게 어딘지 모르게 짠하게 느껴졌다.

내 앞에서 그런 앙탈을 부려주면 하루종일 둥가둥가 업고 다닐 텐데.

희지한테 질투하는 제 모습에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언젠간 꼭 보고 싶었다. 재유가 팔에 매달려 애교 부리고 아양 떠는 모습. 상상만 해도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아빠 없다고 밥도 제대로 안 먹었으면서. 아빠 오니까 입 싹 닦는 거야?”

“아 할머니. 제가 언제 그랬어요.”

“으이그. 목소리부터가 달라졌구만 뭘.”

“그건 밥이 맛없어서 그런 거예요.”

“하긴, 요리사 아빠가 해 주는 밥 먹다가 병원 밥 먹으니까 맛없긴 하지?”

아주머니와 투닥투닥하는 걸 보니 아이의 마음이 좀 풀린 것 같았다. 재유는 “왜 밥을 안 먹었어. 많이 먹고 빨리 나아야지.” 걱정 투로 희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빠가 내 톡도 씹고 전화도 안 받았잖아. 어디 간단 말도 없이.”

“알았어, 알았어. 아빠가 다 잘못했어. 앞으론 절대 안 그럴게. 약속.”

우주는 두 부녀를 아니꼽게 흘겨보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근데 아빠 손 왜 그래?”

“아, 좀 넘어져서 다쳤어. 놀랐지.”

“으으, 이거 봐. 곪겠다. 왜 약도 안 발랐어?”

“괜찮아. 좀 있다 약 바를 거야.”

재유의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풀어진 분위기를 이용해 다친 손에 대한 관심을 가볍게 넘기려는 게 느껴졌다. 우주는 그 얼굴을 찬찬히 봤다. 당황한 게 분명했다.

“이 옷은 뭐야? 아빠 옷 맞아? 다 젖었잖아.”

재유가 협탁에 놓아뒀던 검은 재킷을 희지가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재유가 무서운 속도로 희지 손에서 재킷을 낚아챘다. 희지는 깜짝 놀라 눈이 커져서는 아빠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아… 잠깐 빌린 거야. 우주 삼촌 꺼….”

“…….”

“희지야… 붕어빵, 안 먹을래?”

“…붕어빵?”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심하게 흔들렸다. 불안정한 행동에 우주는 물론 아주머니와 간병인까지 재유를 집중하고 있었다. 병실 안에 이상한 침묵이 돌았다.

“참… 나도 먹고 싶다, 붕어빵. 희지야. 삼촌이 아빠랑 같이 가서 사 올게. 아주머니도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우주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능청스럽게 말문을 꺼냈다. 아주머니도 눈치껏 보조를 맞춰 주셨다.

“어, 나 그 있잖아. 달달한 커피. 그거 맛있더라. 여기 간병하시는 분 것도 같이 사다 줘.”

“네, 아주머니. 희지야. 금방 갔다 올게. 잠깐만 기다려.”

“…네.”

희지는 여전히 얼떨떨해 보였다. 아빠의 저런 표정을 처음 보는 것처럼 충격에 빠져 있었다.

재유는 아까와는 달리 놀란 딸을 달래려 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채 그저 희지를 내려다 볼뿐이었다.

“어서 가자. 손도 치료하고.”

우주는 달래는 목소리로 재유의 팔을 붙잡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걸 억지로 들다시피 데리고 나온 것이다.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재유는 어디로 간단 말도 없이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게 꼭 그대로 쓰러질 듯 위태해 보였다.

“재유야.”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또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걸까. 달리다시피 그를 앞질러 팔을 붙잡아 세웠다. 손이 비정상적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재유야. 왜 그래?”

“우주야… 나, 흐억, 숨이… 숨이 안 쉬어져. 어흑, 우주야….”

재유는 손으로 목을 감싸며 괴로운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었다. 절박한 표정으로 우주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순간 무릎이 꺾이고 우주의 상박을 붙잡아 내리며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재유야, 숨 쉬어. 숨 쉬어, 재유야!”

“우주… 크헉, 우주야. 도와…줘. 허윽.”

산소가 차단된 것처럼 하악대는 그의 입에서 짐승이 내는 듯한 소리가 났다. 눈앞의 재유가 곧 죽을 것처럼 쓰러지자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재유야! 여기요! 도와주세요! 재유야, 한재유!”

복도에서 일어난 소란에 곧바로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아주머니도 병실에서 뛰쳐나와 놀란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어쩐지 불안하더라.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조마조마하더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 재유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숨을 못 쉬는 그를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다.

***

뒷모습이 보였다. TV 화면을 보는 것처럼 뚝 잘려진 네모 안에 상반신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누구였더라.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인데 곧바로 떠오르진 않았다.

아. 인애다. 나랑 결혼했던 여자.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이제는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잊혀져 가고 있던 여자.

웃고 있었다.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자기 앞에서 그런 식으로 웃었던 적이 없었다. 인애는 이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눈앞에서 줌아웃이 된 건지, 인애가 멀어지는 건지 시야가 확장됐다. 넓어진 화면 속에서 희지가 나타났다. 희지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이는 인애의 허벅지에 못 미치게 작았다. 인애가 죽었을 무렵의 세 살이던 모습이었다.

‘어디가?’

물었는데,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인애와 희지가 움직임도 없이 고정된 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희지야, 이리 와.’

희지는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인애는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데려오고 싶었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붙잡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그저 부르기만 할 뿐 데려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데려오는 게 맞는 걸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인애와 희지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재유는 그냥 보고만 있었다. 희지가 멀어지는 모습을.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지만 희지를 데려올 수 없었다. 아니,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난.

***

눈 떠보니 팔에 꽂혀 있는 주사의 이물감 때문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손등에는 거즈가 덮여 있고 손가락에는 깁스가 감겨 있었다. 재유는 한참을 눈을 끔뻑거리며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복도에서 쓰러진 뒤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쓰러진 저를 잡고 울 것 같았던 우주의 표정, 이것저것 처치를 하던 간호사와 의사의 바쁜 손놀림, 걱정스레 바라보며 우주와 얘기를 나누던 아주머니, 심각한 얼굴로 뭐라 뭐라 말하던 희지까지.

아직도 병원인 것 같았다. 정신을 잃은 건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현실 감각이 없었다. 몸이 붕 뜬 것처럼 이상하고 기묘한 기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직도 꿈속인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허리 부근에 엎어져 있는 머리통이 보였다. 우주였다.

“…….”

바보 같은 놈. 보내 줄 때 잘 좀 살지. 속 시끄러운 일들만 생기는데 뭐가 좋다고 자꾸 돌아오나 몰랐다. 갑자기 슬픈 마음이 들어 코끝이 찡했다.

우유가 생명을 다했을 때 전화가 걸려온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던 제 처지가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되었으니까.

다시 만난 그에게서 7년 만이라는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도 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집 안을 둘러보며 우유는 어디 있냐는 말을 일상적으로 건넸다. 머쓱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대하는 그를 보고 나서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우주를 그리워했었는지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부남인 줄 알고 있었으면서 그에게 매달리고 안겨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나 너무 힘들다고. 내가 생각해도 나 너무 불쌍한 것 같으니까 옆에 좀 있어 달라고. 동정이나 연민이라도 좋으니까 안아 주고 위로 좀 해 달라고.

그는 감격스럽게도 그렇게 해 주었다. 우유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쩔쩔매는 저를 대신해 장례에 관한 일 처리를 거리낌 없이 해 줬다. 맨날 나한테만 착하다고 순하다고 그러더니 정작 착해 빠진 건 우주였다.

우유의 장례식장에서 그가 이혼한 사실을 알았을 땐 그럴 상황이 아닌 걸 알면서도 주책맞게 심장이 뛰기도 했다. 우유 때문에 괴롭고 희지 때문에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훌쩍이는 얼굴을 어루만져 주고, 손을 잡아 주고, 등을 토닥여 주는 우주 때문에 그날의 기억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혼자서 쓸쓸하게 신세 한탄을 하면서 우유를 묻어 주고 왔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데 송진우를 만나고 나서는 그 마음도 달라졌다. 아니, 많은 게 달라졌다.

그가 했던 말. 이성을 잃고 그를 쓰러뜨려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당할 때까지 주먹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말.

희지가 내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세상을 향해 욕지거리를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치장을 나올 때까지 희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를 통해 희지의 상태를 전해 듣고 걱정만 할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빠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희지에게 알리는 것이 두려워서 그럴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희지와 직접 통화하는 게 껄끄러운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만이 다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유치장이라는 장소가 주는 위압감 때문일까. 경찰에게 조사받고 갇혀 있을 땐 송진우를 때렸다는 낯선 자신에 놀라서 왜 그렇게까지 흥분했는지 반성도 했다.

그 사람 입장에서야 아무리 인애와 과거의 인연이 있었더라도 우연히 자식끼리 안 좋은 일로 엮였으니 그냥 도발해 본 말일 수도 있는데. 그 말에 눈이 뒤집혀 상황을 역전시키는 순진함을 보이고 말았으니….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 가슴을 치며 후회를 했다.

그런데, 장인애… 죽은 전처이자 희지 엄마. 그 여자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고서야 동창이라는 걸 알았다. 공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이상하게 눈이 자주 마주쳤었다. 그건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는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고, 미리 약속하지 않았는데 우주와 만나는 자리에 따라가도 되냐 물었었다. 결국 고백을 받았을 땐 그동안 날 좋아해서 그랬나보다 하고 넘겼는데, 고백을 거절한 이후로도 인애는 계속 주위를 맴돌았다.

문상만 하고 가도 될 걸 엄마의 장례가 모두 끝날 때까지 곁을 지키고, 공장의 모두가 손가락질하는데 집에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날 잠자리를 가졌다. 아무리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더라도 재유는 분명 인애와 관계를 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섹스의 과정 전체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필름이 끊기는 블랙아웃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임신했다고 초음파 사진을 보여 줬을 때 사기 치지 말라고 인애를 내쫓았겠지.

희지는 조산아였다. 예정일보다 한 달 정도가 빠른 35주에 태어났다. 병원에선 산모 나이가 어리니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희지는 3kg으로 건강하게 세상에 나왔다. 그 당시에는 전혀 의심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서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인애가 정말 음험한 계획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한 걸까.

아니… 시기가 맞지 않다. 인애가 처음 고백한 건 우주의 중간고사가 조금 지난 시기였으니까 여름이 오기 전이었고, 잠자리를 가진 건 훈련소를 퇴소하고 난 초가을이었다.

희지가 정말 송진우의 아이가 되려면, 고백을 거절당한 이후 송진우와 잠자리를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와도 잠자리를 가진 것이 된다.

인애가 정말 그랬을까. 어둡고 사나웠던 인상과는 달리 무언가에 상처받은 듯한 얼굴이 안쓰럽게 느껴지던 사람이었는데.

그땐 인애도 어렸다. 갓 스물 된 여자애가 집에서도 정을 못 붙이고 방황하면서 자기보다 열 살도 더 많은 남자에게 의지하고 관계를 맺었던 것을 이제 와 비난할 수는 없었다. 송진우의 말대로라면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도 몰랐을 테니까.

만약, 정말 만약에 희지가 내 아이가 아니라면, 인애는 모든 걸 다 알고서 일부러 접근해 나를 유혹한 것이 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인애는 송진우의 아이를 임신한 걸 알고 나서 나와 잠자리를 가진 후 내 아이라고 나를 속였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미치도록 괴로웠다. 대체 왜.

스무 살에 애 낳고 사는 게 뭐가 좋다고 날 속여서까지 그런 짓을 했을까. 송진우를 정말 사랑해서? 유부남일지라도 그 사람 아이를 낳고 싶고 기르고 싶어서? 아니면 혼자 키우기 힘드니까 만만한 나를 속여 서방으로 앉혀 놓고 대신 키우게 하려고?

나쁜 년.

일은 일 대로 벌려 놓고 저만 먼저 죽어 버렸다. 이제 와서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우주와 함께 집에 들렀을 땐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확인해 보자. 희지가 정말 내 아이인지 아닌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아이를 볼 자신이 없었다. 우주를 볼 자신도 없었다. 앞으로의 삶을 지금까지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어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달라졌다.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다. 확인하지 않고는.

집을 나온 이후로 우주의 차를 타고 병원까지 무슨 생각으로 갔는지 몰랐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슬쩍슬쩍 돌아보는 옆모습만 간간이 기억났다. 퍼붓는 비만큼 마음속도 축축하게 젖어 지저분한 것들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우주가 입혀 준, 금세 젖어 버린 검은색 재킷을 꼭 쥔 채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지도 못하고.

병실 문을 열고 희지의 얼굴을 봤을 땐 걱정과 달리 익숙하고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안도했다. 혼자 외롭게 아빠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아주머니와 함께 있어서 아빠의 부재를 조금이나마 잊고 있었던 것 같아 몹시 다행이었다.

화난 아이를 달래 주기 위해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말투로 희지에게 매달리며 치댔다.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애썼다. 젖은 옷에 대해 묻기 전까지.

‘이 옷은 뭐야? 아빠 옷 맞아? 다 젖었잖아.’

아무런 사심 없이 천진하게 묻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이건 아니야. 아… 한재유. 진짜, 이건 아니야.

희지를 의심한다고? 15년 동안 제 손으로 밥해 먹이고, 키를 재고, 책가방을 싸 주던 내 새끼인데.

확인해서 뭘 어쩔 건데? 확인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내 딸인데 갑자기 내 딸이 아니게 되기라도 하는 건가? 내 딸을 얼굴이 퉁퉁 붓도록 때린 생면부지 가해자 애비놈 말만 듣고 아이를 의심하다니. 정말 미쳤구나.

거대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쓸려나가 내 존재가 사라져 버리길 바랄 정도로 죄스러웠다. 희지의 얼굴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속이 답답해지고 목이 조여 왔다. 희지에게 뭐라 지껄였는지도 모르게 핑계를 대고 복도를 나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질척거리는 흙바닥에 발이 묶이고, 사방에서 수십 개의 눈알이 쏘아보고 있었다. 뒤에서부터 감겨 온 손이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숨을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섭고 불안해서 그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아빠. 내가 아빠 딸이 아니라면서? 그럼 난 진짜 아빠한테 갈게.’

환청도 들렸다. 이게 마지막인가 싶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난 정말, 살고 싶은데.

우주가 옆에 있는데. 이 미련한 놈이 또 한 번 내 옆으로 와 줬는데.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사실은 정말 그리웠다고 말도 못 해 보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그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도와줘. 나 좀 살려 줘. 나 정말 살고 싶어. 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

의자에 앉아 병실 침대에 엎어져 자는 우주를 보니 눈물이 났다. 얼마나 오래 침대 곁을 지켰는지, 내가 쓰러졌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울고 싶었다.

재유는 턱 끝에 고인 눈물을 벅벅 닦고 찡한 코를 킁 들이켰다.

우주가 유치장에 면회를 왔을 땐 인애의 생각으로 골몰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인간관계가 좁은 편이었지만, 누군가 유치장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보러 온다면 우주는 그중에서도 제일 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무리 헤어진 사이더라도 남들 보기 번듯하게 사는 모양은커녕 사람 때려 유치장에 감금된 모습이라니. 쪽팔리고 수치스럽고 자신이 하등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에 앞서서 우주가 면회를 왔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헤어진 이후에도 자신을 쫓아다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주는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물론 최악의 상황일 때조차 날 찾아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염우주. 정말 지긋지긋한 애다. 어쩜 이렇게 서른을 훌쩍 넘어서도 인연이 끊기지 않는 건지. 정말 지긋지긋하게 미련이 남고 징글징글하게 끊어 낼 수 없다.

어릴 적 만나 사랑했을 때 자의로 헤어진 게 아니어서 그런 걸까.

이렇게 저렇게 사랑하다가, 싸우고 질리고 감정이 메마르고, 결국엔 애정이 고갈되어 스스로 이별을 선택해 헤어졌다면, 지금 다시 그를 만나서도 이렇게 애틋하고 먹먹한 감정이 생겨날까.

그때 해 볼 만큼 다 안 해 봐서, 그 시절에 대한 미련이 남아 이 나이를 먹고도 질척하게 서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걸까.

난 그렇다 쳐도 너는 왜.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은 있을 수 있다. 멋모르고 만나 미성숙한 감정을 이리저리 감추는 법도 모른 채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며 순수하고 열렬하게 사랑했던 순간이, 인생을 통틀어 유일한 기억이기에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박히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보통은 대부분 잊고 살아간다. 자기처럼 먹고 사는 게 바빠서, 키워야 할 자식이 있어서, 풋사랑 말고 인생을 함께 짊어질 만한 상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 보기 위해서.

처음 헤어진 이후 우주는 쉽사리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자신을 놔 버렸다. 스무 살에서 스물세 살까지 군대와 강제 유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성인이 되었어도 세상이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힘만으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럴 수밖에.

지금 보면 그때도 참 어린 시절이었다. 딱 그 나이이기에 할 수 있는 방황이었다.

20대 후반에 재회했을 때 우주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사업을 벌이고 사회인으로서의 성취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너무 몸을 사렸고 사회의 눈을 뱀처럼 두려워했기 때문에.

희지와 우주를 곁에 두고 행복할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오만했는지.

그 당시 재유는 그와 자신의 사회적 격차가 두려웠고, 그의 곁에 있는 사업 파트너를 이해 못 할 정도로 속이 좁았으며, 그의 어머니 말 한마디에 쫄아서 이별을 결심할 정도로 겁쟁이였다.

그래도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땐 이제 그가 지긋지긋한 첫사랑은 청산하고 인생의 방향을 정했나 보다, 씁쓸하게 생각했었는데.

아니,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는 열세 살에 자기가 게이인 줄 깨달았다고 고백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의 부모님 역시 자식이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남자란 건 알고 있었을 거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려졌으니까.

남자와 키스하는 모습, 모텔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우주의 부모님은 사진으로 전부 다 봤었다. 그런데도 결혼 당시엔 영선의 부모님까지 소식을 알고 있을 정도로 떠들썩하게 식을 올렸다.

거기에 우주의 의견은 얼마나 들어간 걸까. 아무리 부모님이 강압적이라고 해도 결혼 같은 걸 억지로 할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결혼은 자의일지라도 그렇게 결정하게 될 때까지 정말 외부의 영향은 없었을까.

정수연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 한눈에도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 여유가 넘치고, 원하는 걸 스스로 쟁취하려는 의지와 동력을 지닌 사람. 행동에 거침도, 부침도 없고 굳이 폼 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선망하는 사람. 말하자면 우주와 비슷한 사람.

그래서 그런지 오만한 태도 없이 마주 앉은 의뢰인을 편안하게 해 주려는 사려 깊음을 그녀에게서 느꼈다.

변호사 상담도 처음이고 소위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것도 처음이라 긴장하고 버벅거리는 걸 그녀는 끝까지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자신조차 애매하게 알고 있었던 걸 정확하게 짚어 주며 사건의 큰 그림을 함께 그려 주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도 느꼈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무수한 판례들처럼 유야무야 넘기지 않고 의뢰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며 끝까지 함께해 줄 변호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송진우와 그 난장을 치고 나서도 정수연 변호사를 불러 희지 사건을 끝까지 맡아 달라 부탁도 했었다.

우주는 그런 수연과 결혼했었다. 지금이야 이혼했다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어땠을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수연과 살 때 우주는 행복했을까. 아니면 외로웠을까.

신부가 누군지 몰랐을 때 상상하는 것과 알았을 때 상상하는 건 차이가 있다.

어떻게 만나고 친해져서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을지, 결혼식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부부관계는 했을지, 하지 않았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을지, 왜 이혼하게 되었는지, 수연은 이혼했음에도 왜 우주에게 내 소식을 알려 주었는지….

난 왜 하필 그 로펌으로 갔을까. 왜 하필 정수연 변호사를 만나게 됐을까.

이제 와서 우주를 만나게 된 이 기적 같은 우연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에게 또 상처를 주게 될지 모르니 절망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자신과 헤어진 후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다 알고 싶었다.

쌕쌕거리며 자는 우주의 숨소리가 문득 희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 팔을 침대 위에 걸치고 그 위에 머리를 댄 얼굴이 무구하면서 귀여웠다.

눈 자체가 크고 부리부리해서 어떨 때 보면 냉정하고 사나워 보이다가도, 웃기만 하면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이었다. 자고 있으니 세상 천진하고 순박하게 느껴졌다. 어릴 때 기억 그 모습처럼.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그가 자는 모습을 수없이 봐 왔지만, 오늘만큼 안타깝고 가슴 미어지는 느낌을 가진 적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길래 내 옆에 다시 찾아와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자고 있는 거니? 내가 널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응?

재유는 시트를 꼭 쥔 그의 손등을 가만히 매만졌다. 큼직하고 잘생긴 손이었다.

“으음… 깼어?”

힘도 싣지 않고 그저 스치기만 할 정도였는데도 우주는 잠에서 깼다. 재유는 얼른 손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컨디션 어때? 아픈 데 없어?”

우주는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켜 눈을 맞춰 왔다. 머리와 이마, 뺨을 차례로 만지고 팔을 주무르며 볼품없이 누워있는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나? 글쎄. 아까 7시에 희지 보고 와서 계속 있었는데?”

“희지는 지금 뭐 해? …희지 좀 보러 가야겠다.”

“희지 지금 자. 지금 가면 깰 거야.”

시간 개념을 아직 잘 모르겠다. 벽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창문의 버티컬 너머로 날이 어두웠다. 정오가 아니니 자정이겠지.

“나 얼마나 잔 거야?”

“음….”

우주가 걱정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멀뚱멀뚱 바라보던 재유는 눈짓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이틀 정도 잤어. 중간에 자다 깨다 하긴 했지만.”

머릿속이 멍했다. 쓰러지기 전 무서웠던 현실이 생각나서 가슴 속이 내려앉았다.

“희지… 어때? 나 안 찾았어? 괜찮아?”

“자고 있다고 했잖아. 걱정 마.”

우주는 재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걱정 말라는 그의 목소리가 진정제처럼 몸 안에 퍼져 벌렁거리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병실은 희지의 병실과 비슷한 구조였다. 여기도 특실인지 뭔지 다른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 쓰기 과분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입구 맞은편에는 소파 세트와 커다란 벽걸이 TV가 있었고, 화장실로 보이는 문과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문 하나가 더 있었다.

재유는 누운 채로 방을 둘러보다 우주를 향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또 신세를 진 것 같아 이젠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넌 왜 안 가고 여기서 자고 있어. 이 병실은 또 뭐고….”

“내가 여기 있는 게 뭐? 너 쓰러졌는데 그럼 깨는 것도 안 보고 그냥 갔어야 돼? 그런 얘긴 나중에 하고 죽이나 먹자. 너 계속 굶어서 안 돼. 배 좀 채워야지.”

우주는 다시 한번 머리를 진득하게 쓰다듬더니 냉장고에서 포장된 죽그릇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죽을 동치미 국물과 함께 세팅하고 나서 침대 상단부를 세워 주었다. 어깨를 받쳐 몸을 일으켜 주고 숟가락으로 죽을 한술 떠서 입으로 후후 분 다음 입가로 가져왔다. 재유는 먹을지 말지 망설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먹여 준다고?”

“응. 빨리 먹어. 갑자기 먹으면 속 아프니까 천천히 먹어야 돼.”

천천히 빨리 먹으라니. 우주는 제가 죽을 삼키는 게 세상 제일 중요한 일이라는 듯 맞은편에 앉아 진지하게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어정쩡한 자세로 죽을 흘릴까 봐 손바닥까지 받치고 있었다. 재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자, 아-”

입을 벌려 죽을 머금자 오랜만에 음식을 받는 목 안쪽에서 기침이 났다. 우주는 티슈를 뽑아 입을 막아 주고 물 한 잔을 컵에 따라 그 앞에 대령했다.

“괜찮아?”

우주는 기침이 멎을 때까지 등을 쓰다듬고, 잠잠해지자 다시 숟가락에 죽을 떠서 눈앞에 디밀었다.

샛노란 죽은 입자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단호박 미음이었다. 재유는 말없이 죽을 받아먹었다. 할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진지하게 죽을 떠 주는 그가 안쓰럽고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골치 아픈 일은 일단 나중으로 미뤄 두고 싶었다.

죽을 먹는 횟수가 많아지자 우주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떠올랐다. 재유는 그 미소가 좋아서 주는 대로 다 받아먹으며 그릇을 싹싹 비웠다.

“잘 먹으니까 이쁘네.”

“나 중학생 학부형이거든? 이제 30대 중반 아저씨라고.”

재유는 티슈로 입가를 닦아 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우주를 어이없다는 듯 흘겨보았다.

“그랬어? 난 또 주는 대로 꿀떡꿀떡 잘 먹길래 애긴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능글거리는 멘트라니. 어릴 땐 마냥 귀엽고 조금 짓궂다 느꼈는데, 지금 보니 나이에 맞게 뻔뻔하고 오글거리는 아저씨 같았다.

그래도 전혀 밉지 않은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그래서 문제였다. 마음이 자꾸 우주에게 매달리고 싶어 했다.

“너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일은? 출근은 했어?”

“당연히 일은 했지. 출근은 안 했지만.”

우주는 소파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종이 뭉치들과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어질러진 상태를 보아 1~2시간 앉아 있었던 건 아닌 듯했다. 아주 작정하고 자리를 깔아 업무 공간을 만들어 놨다.

“어쩌려고 그래. 나 괜찮으니까 이제 가 봐도 돼.”

“음… 싫은데?”

“뭐…?”

재유는 우주를 삐딱하게 올려다봤다.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그와 만나고 가란 말을 벌써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그는 ‘밥 먹을래?’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태연했다. 예전엔 눈에 힘부터 주면서 상처받는 얼굴을 했었는데.

“의사가 2주만 더 있으라고 했어.”

“2주라고?”

무슨 2주일씩이나 입원을 해, 이런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더니 우주가 발끈하고 나섰다.

“발작 때문에 쓰러졌었잖아. 너 손가락도 다쳤었어. 손가락뼈 두 개나 금 갔다던데 아프지도 않았어? 그리고 영양실조래. 그동안 밥은 왜 제대로 안 먹었어? 그 몸을 해서 희지 병간호는 어떻게 하겠다고. 암튼 너 다 나을 때까진 여기 있을 거니까 너도 그냥 그러려니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우주는 맺힌 게 많은 사람처럼 잔소리를 다다다다 쏟아냈다.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손이 아프고 욱신거리긴 했지만, 금까지 간 건 몰랐다.

“퇴원해야지. 어디 부러지거나 못 걷는 것도 아닌데. 누워 있으면 뭐 해. 너한테 폐 끼치는 것도 싫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유는 앞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렇게 병원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됐다.

우주는 심란한 재유의 얼굴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미소 짓고는 가벼운 투로 말을 꺼냈다.

“그렇게 한숨 쉬고 축 처져 있다고 일이 해결돼? 네가 암만 그래도 안 갈 거니까 포기해. 희지도 아직 아픈데 너라도 빨리 기운 차려야지. 너 퇴원하면 가지 말래도 집에 갈 거야.”

안 갈 거니까 포기하라면서 퇴원하면 집에 간다니.

재유는 순간, 그의 팔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모순적인 충동을 느꼈다. 퇴원하면 간다는 그의 말에 영원히 퇴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 먹은 죽이 잘못된 건지 영 마음이 오락가락 갈팡질팡했다.

그렇게 밀어내고 모진 말로 상처 줘도 또 눈앞에 나타난 이 녀석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날을 세웠던 마음이 세월이 지나면서 약해졌나.

그런데, 정말 지쳤다. 이런 우주를 앞에 두고 가네 마네, 헤어지네 마네, 하는 일들이 이젠 부질없이 느껴졌다.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 걸까. 곁에 우주가 있는 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들은 7년의 세월도 잊은 것처럼, 경계도 없이 제 일상으로 가볍게 넘어왔다. 자연스럽다 못해 의례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독한마음 먹고 헤어졌던 지난 두 번의 이별이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다시 만날 건데, 괜히 감정 낭비하면서 뭐 하러 헤어졌을까. 과거의 자신을 조롱하고 싶을 지경이다.

“넌 밸도 없냐? 내가 지겹지도 않아?”

우주는 죽그릇을 치우다 말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다 침대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뭔 소리야. 밸이고 자존심이고 제대로 잘 붙어 있는데? 그리고 너 하나도 안 지겹거든?”

“정수연 변호사한테 다 들었다며. 우리 희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맞았고, 난 그 아빠라는 사람 죽도록 팼어. 그래서 경찰 조사도 받고 유치장에도 갔다 왔다고. 이미 사건 접수돼서 재판 받아야 할지도 몰라. 그 와중에 희지 병간호도 해야 하고, 잘못하면 감옥에 가야 될 수도 있어. 그런데도 왜 안 가고 버티고 있어? 정말 내 옆에서 그런 밑바닥까지 보고 싶은 거야? 내 생각은 안 해? 너 이럴수록 나 진짜 초라해지고 쪽팔리고 미치겠다고.”

말이 마음과는 정반대로 흘러나왔다.

그가 가지 않길 바라면서, 자기야말로 벨도 없이 매달리고 싶으면서, 마지막 발악인지 뭔지를 그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우주는 덤덤하게 듣고 있으면서 재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마와 눈가, 코와 뺨, 입술과 턱까지 그의 눈동자가 어디를 훑고 지나가는지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궤적이 뚜렷한 시선이었다.

“나도 말했잖아. 해결하면 된다고. 지금은 심각해 보여도,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게 될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설마 나랑 다시 사귀거나 그럴 생각인 거야?”

“그러자고 하면 그럴래?”

“하. 미친놈.”

마음은 심란해 죽겠는데 우주는 가볍디가볍게 은근슬쩍 넘어가려고만 했다.

내가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건가, 나만 혼자 오버하는 건가 착각할 정도로 그의 말과 행동엔 막힘이 없었다.

해결하긴 지가 뭘 어떻게 해결한다고. 내가 무슨 심정으로 송진우를 때렸는지, 희지 앞에서 왜 그렇게 발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정신 차려. 괜히 정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테니까 보내 줄 때 가. 괜히 내 옆에 있다가 똥 밟지 말고. 그리고 병실도 옮길 거야. 이렇게 좋은 병실은 너무 부담스러워.”

우주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재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만 보면 너 진짜 고집도 세고 이기적이야.”

“뭐?”

“맞잖아. 너 하고 싶은대로만 하려고 하잖아.”

제멋대로 희지 병실도 옮겨 버리고 가라는 데도 버티고 있으면서, 누가 고집이 세고 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건지. 그런데도 왠지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재유는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

“네 말대로 나 미친놈 맞는 것 같다. 이기적이고 고집도 센데 왜 이렇게 네 옆에 있는 게 좋냐? 정 마음 불편하면 그냥 옛정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도 돼. 근데 난 똥밭에 굴러도 상관없으니까 그런 줄이나 알아.”

또 눈가가 축축해졌다. 중학생 자식이 있는 아저씬데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몰랐다. 살아오면서 감정을 억누르고 속으로 삭이는 법은 어느 정도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우주 앞에서는 자꾸 나약하고 못나진다.

그래. 잘났다, 염우주.

재유는 꾸역꾸역 목을 가다듬고 눈물을 삼키며 마지막 쐐기를 날렸다.

“그래도 병실은 옮길 거야.”

“그래. 옮겨 그럼. 호텔로 옮길까?”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모습에 울면서도 기가 찼다.

“뭐?”

“아니면 내 집으로 갈래? 의사도 간호사도 다 집으로 오라고 하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희 집을 왜 가?”

“그럼 뽀뽀해 버릴까?”

“…뭐?”

“아님 딥키스?”

“하….”

우주가 정말 입을 맞출 것처럼 벌떡 일어나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심장이 뛰었다. 재유는 순간 당황해서 우주의 얼굴을 밀쳐 버렸다.

가볍게 밀쳤는데도 혹시나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곧바로 눈치가 보였다.

이렇게 여지를 주니까 더 뻔뻔하게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하고 싶지도 않은데.

우주는 눈치를 살피는 저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우주의 웃음을 보고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고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얼굴에 뜨끈뜨끈한 열이 올랐다.

“봐줬다.”

그렇게 말하고 또 씨익 웃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진짜 주책맞은 아저씨다. 예전에 뽀뽀에 키스에 잠자리까지 할 거 다 한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입맞춤 한 번으로 얼굴 빨개지는 모습을 보이다니.

“너… 이틀 동안 잠은 어디서 잤어?”

재유는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이틀 동안 병실을 지켰으니 오늘은 집에서 편하게 자라고 하고 싶었다. 우주가 가는 건 싫었지만, 이대로 같이 있다간 뭔가 일이 더 벌어질 것 같아 두려워졌다.

“저기 방 있잖아. 저기에도 침대 있거든.”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용도를 알 수 없었던 화장실 옆문이었다. 보호자용 방도 따로 있는 병실은 드라마에서만 봤는데 이런 곳에 자신이 입원해 있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여기 하루에 얼마야?”

“…….”

“많이 비싸지? 희지 병실도 특실인데. 왜 그렇게 돈을 막 써.”

우주는 잔소리를 듣고도 엷게 웃으며 재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내 사정 좀 봐줘. 너랑 나 사이에 돈 얘기 나오는 거 싫어. 그리고 나 너한테 들어가는 돈 하나도 안 아까워. 돈 쓸 데 없는 이혼남인데 더 못 해 줘서 아까울 정도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해.”

그런가 보다 해, 그런 줄이나 알아, 해결하면 돼. 언뜻 강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들을 우주는 계속 장난식이나 부탁 조로 말했다.

다시 만난 이후로 마냥 퍼 주면서도 재유가 안 받으면 상처받을 것처럼 굴었다. 겉으로는 여유를 가장하는 게 눈에 보여서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너랑 나 사이가 뭔데? 묻고 싶었지만,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다.

“그럼 오늘도 여기서 잘 거야?”

“당연하지. 너 잘 때까지 옆에 있을 거니까 어서 누워.”

“…….”

“손… 잡아도 돼?”

뽀뽀는 막 했으면서 손잡는 것에 허락을 구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우주에게도 모순은 있었다. 일단 입은 맞췄는데, 더 나아가도 되는 건지 멈춰야 하는지 그도 헷갈릴 거다.

우리는 애매했다. 친구도 연인도 아니어서 어정쩡했다.

평범하게 묻는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에 긴장이 묻어났다. 어떻게 거리조절을 해야 할지 그도 고민이겠지.

그러면서도 우주는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뒤집어서 내밀고 있었다.

이 손을 또 잡아도 되는 걸까.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너랑 나, 또 시작하자고? 두 번의 실패를 겪고서도?

우주가 주는 배려와 친절에 익숙해지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있었다. 그런데 그냥 우주를 믿고 나를 내던져 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 또 도망치고 싶을지 모른다. 지난 전적이 있으니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잡고 싶었다. 밀어내는 것이 이젠 힘에 부쳤다. 상처 주는 입장에서도 상처는 받는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지겨운 상황을 벗어나서 안주하고 싶었다. 그를 향해 두 팔 벌려 기꺼이 떠안고 싶었다.

이 무거운 관계를. 관계를 지속해 나갈 책임을.

잡아 주길 기다리는 우주의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 커다랗고 길쭉한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손을 밀쳐 낸다면 우주는 아까처럼 또 웃으며 넘어가 줄까.

마음속에 그어 뒀던 선이, 차오르는 감정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재유는 손을 잡았다. 손은 그저 손일 뿐이니까. 기분에 잡은 것도 아니고 충동도 아니었다. 그저 잡고 싶어 잡은, 본능이었다.

곧바로 우주의 다른 손이 다가와 잡은 손을 꼭 덮었다. 기쁨을 감추지 않는 환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두텁고 따뜻한 우주의 체온이 손을 타고 전해져 온몸을 데우는 듯했다.

“아….”

순간, 연기만을 남기고 불씨가 꺼지듯 생각이 암전됐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참… 우주야. 내가 입고 있었던 옷. 네가 빌려준 거. 검은색 그거… 어딨어?”

“…세탁 맡겼어. 왜?”

“혹시 안주머니에 뭐 없었어?”

“글쎄. 확인 못 했는데? 너 쓰러졌을 때 정신이 없어서 못 챙겼어. 나중에 간호사가 갖다 주길래 바로 세탁소에 맡겼지.”

심장이 부어오르는 것처럼 아파 오며 불안이 번졌다. 선 끝에서 넘실거리던 감정이 다시 사그라들 것 같았다.

“그래…. 나 먼저 잘게.”

재유는 스르륵 자리에 누웠다. 잡고 있는 손도 빼고 싶었지만, 우주가 놔주지 않았다. 재유는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들릴 듯 말 듯 한 엷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붙잡혔던 손이 자유로워졌다. 조명이 꺼지는 게 감은 눈꺼풀 위로 느껴졌다.

등 뒤로 우주의 손이 다가왔다. 토닥토닥.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감정과 기분에 취해 마냥 서로를 사랑했던 10대도 지났고, 현실에 함몰되어 갈등만 반복했던 20대도 지났다. 이제 그와 다시 시작한다면,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최종적 선택이어야 했다.

아직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

노트북을 마주 대고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인 우주는 목 뒤를 주무르며 침대 쪽을 힐끗거렸다. 강북에 위치한 대학병원 9층 2호실에서는 ‘유제이디자인’의 대표이사가 며칠째 자리를 비우고 있어 중요한 안건을 나누는 회의가 조촐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김서라 씨와 함께였다. 지금은 김 부장님이 되었고.

회의의 주요 내용은 당분간 회사 출근이 뜸해질 것 같은 그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과 자신이 맡았던 업무를 부장급 직원들에게 배분하는 것, 앞으로 영업 예정이었던 업체들에 대한 정보와 공략 대상, 그리고 주의사항 등을 영업팀에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김서라 부장은 가끔 질문을 던져 가며 대표가 말하는 지시사항을 꼼꼼히 파일로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우주가 자신의 업무 비서를 채용해 달라는 부탁으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대표가 며칠 자리 비운다고 망할 회사는 아니었지만, 앞으로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모를 ‘재유의 일상 되돌려놓기’에 매달리려면 전화나 인터넷으로만 업무를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이고 웬만한 자잘한 업무까지 스스로 처리해 왔기 때문에 비서의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동호회 수준의 소기업을 운영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 규모가 커졌는데도 우주는 굳이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맡아서 하고 있었다. 이젠 업무를 분배하여 조직 구조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었다.

일하러 좀 가라고, 회사도 안 가고 여기에만 있으면 어떡할 거냐고 파르르 떨며 잔소리해 댈 재유 때문에라도 좀 더 그럴듯하고 촘촘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만 했다. 물론 비서가 필요하기도 했고.

재유는 그런 면에서 칼 같았다. 학교 때 아무리 구슬려도 땡땡이에 회의적이었고, 무단결근은 꿈도 안 꿨으며 웬만큼 아파서는 일을 빠지지도 않았다.

우주가 아는 한 재유가 학교를 빠진 건 어머니가 입원했을 때였고 공장엘 빠진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가 전부였다.

그랬던 녀석이 호텔도 휴직하고 희지 병간호는 못 할망정 병실에만 드러누워 있으니 자기가 나이롱 환자가 된 것 같다며 이 상황을 썩 내켜 하지 않았다.

당연히 불똥은 희지 병실까지 왔다 갔다 하며 하루종일 수발을 들고 있는 우주를 향했다. 대표가 회사를 안 지키면 어떡하냐며 당장이라도 회사가 망할 것처럼 걱정했다. 우주는 그의 소심한 염려가 내심 귀엽기만 했다.

“그럼 한 실장님한테는 따로 연락드리라고 전할게요.”

서류들을 모으고 테이블을 정리하던 김서라 부장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재유가 아직 자고 있어서 두 사람 모두 평소보다 낮은 톤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병원에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재유 곁에서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우주가 고집을 좀 부렸다. 오늘은 오후에 외출할 일이 있기도 하니 그전까진 병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네. 수고하셨어요.”

김서라 부장을 병실 앞까지 배웅하려는데, 언제 잠에서 깼는지 재유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일어났어?”

“응. 근데… 누구셔?”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한식당에서 여러 번 뵀었는데.”

나가려던 김서라 부장이 재유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그럼 우주 회사에… 아, 기억나요. 회식 말고도 몇 번 오셨던 거.”

재유는 그 짧은 틈에 머리를 쓸어 넘겨 정리하고 환자복을 추키며 당황스러워했다. 추레한 모습에 흠이 잡혀 우주를 욕 먹이진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맞아요. 그랬죠. 옛날 생각나고 정말 반갑네요. 다음번에 기회 되면 또 뵙겠습니다. 어서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김서라 부장은 딱딱한 비즈니스 어투였지만 부드러운 미소로 병문안용 멘트를 날리고 우주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뒤 병실을 떠났다.

“저분이 아직까지 계시니?”

“응. 경영지원팀 맡고 계셔. 나이는 나보다 세 살 많은데 일도 잘하고 눈치도 빠르고 회사 사정도 다 알고. 울 회사 실세지, 실세.”

“근데 여기로 데리고 와도 돼? 널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떡하냐고.”

재유는 벌써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달복달이다. 과거에 겪은 바가 있으니 소문이나 남의 시선에 민감한 그의 우려는 알고 있지만, 김서라 부장을 굳이 병실로 부른 건 우주의 의도도 있었다.

“회사에서 몇 명 알고 있어. 김서라 부장님도 그중 하나고.”

“뭐…?”

재유의 당황과는 별개로 우리가 커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주변에 생각보다 많았다. 우주의 가족들과 전처였던 수연, 회사에는 김서라 부장과 마찬가지로 창립 멤버였던 안재영 팀장, 영선과 그 부모님까지.

제 부모님만 빼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하거나, 그냥 지켜봐 주거나, 아예 관심이 없거나, 셋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재유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지나치게 몸을 사려 왔었다. 아이 아빠라는 처지도 한몫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한국 사회 대부분이 동성 커플을 삐딱하게 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재유에게 말했듯 사람들은 타인에게 그다지 별 관심이 없다. 우주는 재유가 조금씩이나마 그런 상황에 적응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뭘… 알고 있다는 거야?”

“내가 게이이고 결혼도 그냥 쇼만 친 거라는 거. 너랑 그런 사이였다는 거, 또 최근에 다시 만난다는 거.”

“…결혼이 쇼였다고?”

재유의 한쪽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김서라 부장이 우리 사이를 알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던 게 결혼에 대한 관심으로 순식간에 옮겨간 듯했다.

“계약 결혼… 뭐 그런 거였어?”

어안이 벙벙한 재유의 표정에 우주는 마침 잘됐다 싶었다. 수연과의 결혼 생활은 동지애를 가진 룸메이트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이참에 해명하기로 했다. 우주는 의자에 앉는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재유를 마주 보았다.

“우린 계약 같은 거 한 적 없어. 굳이 부르자면 가짜 결혼이라는 표현을 썼지. 선배는 나랑 비슷한 사정이 있어서 명목상 결혼이라는 제도가 필요했었고 나도 뭐, 결혼식 한 번 하고 부모님 면 세워드린다는 차원에서 진행한 거였고.”

“…….”

재유는 보편적인 규범대로 사회의 기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보통의 남자였다. 상식을 벗어나지 않고 제도 안에 머무르려 했으며 사람들의 눈밖에 벗어나 손가락질받는 행위를 피해 가려는 유약한 면도 존재했다.

우주는 이제 그런 그가 조금씩 이해되었다. 자신이 그런 쪽에 신경을 안 쓰는 타입이었던 거지, 인간은 원래 그런 것에 거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재유 인생에 최고의 일탈은 남자인 자신과 사귀는 것이었다. 그 일탈로 인생의 많은 부분 마음고생도 했고 뒤늦게 아이가 생겨 죄책감마저 떠안게 되었다. 자신과 희지, 둘 다에게.

그런 그에게 이런 식으로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런 관계도 잡음 없이 잘 유지되고, 마무리도 깔끔하게 끝날 수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럼… 이혼은 왜 했어? 내가 경찰서에 있다는 거 알려 줄 정도면 지금도 연락하면서 잘 지내는 거 아냐?”

“선배가 사랑 찾아 떠난 거지 뭐.”

우주는 푸념 섞인 말투로 은근슬쩍 재유의 손을 잡았다.

재유는 멍해진 얼굴로 손이 잡힌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결혼의 실체를 알고 충격을 받은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안도한 표정도 드러났다.

마음을 꽁꽁 감추고 겉과 속이 다른 말을 잘만 했던 재유에게서 이제 표정이 읽혀졌다. 우주는 새삼스레 그러한 자신과 재유의 변화가, 지난 과거와는 다른 결말로 이어질 거라는 희망으로 보였다.

“나도 너 결혼한다고 했을 때… 의아하긴 했어.”

“뭐가?”

“넌 결혼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거든. 부모님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짐작했어도 결혼할 정도로 그 여자를 좋아하나, 여자와 가능하게 된 건가, 그런 생각 했던 것 같아.”

“흐음… 나도 너만 옆에 있었으면 그런 결혼을 절대 안 했을 거야.”

우주는 오랜 주방일로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한 재유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투정을 부렸다.

“…미안해.”

재유는 우주가 조물거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시선을 피했다. 찔리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죄지은 표정이었다.

가짜 결혼을 한 것이 그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주는 미안하다는 재유의 말에 왠지 위로가 되었다. ‘나도 네가 결혼했다고 해서 슬펐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사랑 찾아 떠나면 되지. 이미 절반은 찾은 것 같고.”

“누가 그래…?”

“절반은 넘어온 거 아니었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더니 또 겁먹은 표정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다. 너무 밀면 튕겨져 나갈지도 모르니까.

우주는 콧잔등을 한 번 찡긋거리고 준비해 둔 초밥 세트로 상을 차렸다. 병원 밥도 잘 나오는 편이긴 했지만, 미음과 죽에서 막 벗어난 재유의 몸에 좀 더 영양가 높은 음식을 채우고 싶어서 소고기나 장어, 전복, 사골국 같은 음식들을 먹여 왔다.

재유는 따로 준비한 음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병실을 옮긴다느니 네 할 일이나 먼저 챙기라느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희지는 밥 먹었대?”

재유는 젓가락에 손도 대기 전에 희지 얘기부터 꺼냈다. 요즘 그는 밥 먹기 전에,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에, 또 생각날 때마다 희지 얘기를 물었다.

“그럼. 희지도 초밥 먹었어. 친구가 병문안 온다길래 같이 먹으라고 넉넉히 사다 줬어. 지금은 아마 마카롱 먹고 있을걸? 그니까 걱정 말고 너도 어서 먹어.”

“희지 마카롱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조사 좀 했지. 희지 SNS. 네가 만들어 준 것도 사진 찍어 올렸더라?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어?”

“희지가 뚱카롱을 좋아하거든.”

“뚱카롱?”

“안에 크림 빵빵하게 든 거. 레시피 보고 한두 번 해 줬어.”

“좋겠다, 희지는. 나도 먹고 싶은데. 나중에 해 줄 거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면서.”

“안 달게 해 주면 되잖아.”

“…기회 되면.”

망설이듯 쭈뼛거리면서도 재유는 수락을 해 주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우주는 입을 헤벌리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광어지느러미 초밥을 간장에 콕 찍어 입에 갖다 댔다. 재유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먹기를 채근하는 우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초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재유에게 잘했다는 의미로 한 번 더 웃어 줬다.

재유는 공황발작이었다.

희지의 병실을 박차고 나온 뒤 복도에서 쓰러지긴 했지만, 기절하지도 않았고 의식을 잃지도 않았었다.

곧바로 달려온 의료진들 덕에 응급처치를 받고 약물을 투여해 안정을 찾았지만, 그 후로도 발작은 더 있었다.

주로 희지 앞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딸을 보면 발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반복되다 보니 자기도 알아차리고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희지도 처음엔 놀라기만 하더니 아빠가 저만 보면 얼굴이 퍼렇게 질리며 숨도 잘 못 쉬는 걸 보고서는 재유의 병실에 오기를 꺼렸다. 아빠 얘기만 꺼내면 심각한 표정으로 우울해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재유는 바로 옆 병실에 있는 희지를 만나러 가는 대신 메신저로 대화를 시도했다.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뭔가를 적어 보내고 희지가 좋아하는 캐릭터 굿즈나 옷 같은 걸 기프티콘으로 보냈다.

그런데 희지에게선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재유는 가슴을 치며 속을 절절 끓였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병원에선 발작을 일으키는 원인에서 거리를 두기만 하면 약물로 호전될 수도 있다고 했다. 손가락 부상이나 영양실조도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니 통원 치료로 지켜볼 수 있다고. 의사는 일주일만 입원해도 된다고 했지만, 자신이 우겨서 2주일간 재유를 잡아 두기로 했다.

우주는 차라리 재유가 다리가 부러지거나 거동이 힘들어져서 제 손으로 씻겨 주고 옷도 갈아입혀 주며 혼자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으면 싶었다.

회사 일에 큰 지장을 주지도 않았고, 병원에서 먹고 자는 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재유를 24시간 보며 수발을 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마저 느껴졌다. 여러모로 안 좋은 가운데 유일하게 좋은 점이었다.

재유는 계속해서 초밥을 집어 주는 손을 밀어내며 너도 먹으라며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주는 얼른 초밥을 입에 쏙 넣고 이번엔 참치뱃살을 집어 재유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렇게 너 한입, 나 한입 먹고 먹여 주며 초밥이 줄어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근데 오늘 어디 외출해? 아니면 방금 그 부장님 오신다고 그렇게 입은 거야?”

재유는 그릇을 정리하고 있는 우주의 옷차림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병실에서는 편한 면바지나 트레이닝 팬츠, 티셔츠만 입다가 오늘은 타이까지 갖춘 멀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아니, 누구 좀 만나려고.”

“누구 만나는데?”

“거래처. 일 때문에 잠깐. 나 보고 싶을 것 같아서 그래? 금방 올 건데.”

“그래….”

외출한다는 소리에 재유는 시무룩하게 말꼬리를 감았다. 우주는 그릇들을 주방이 있는 방에다 가져다 놓으며 몰래 키들거렸다. 불룩거리는 뺨을 마사지하듯 손끝으로 진정시키며 웃음을 정돈했다.

그리고 링거대를 밀며 화장실로 가서 재유의 양치를 도왔다.

손가락에 깁스를 한 것뿐이어서 거동에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주는 입원 이후로 재유를 과하다 싶게 ‘보필’했다.

처음 하루 이틀은 재유가 펄쩍 뛰며 만류했지만, 계속 들러붙으니 어느 순간 포기했는지 세수를 시켜 준다는 제 호들갑에 얼굴을 맡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우주는 병간호에 소질이 있었다. 그게 재유이기 때문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삼시 세끼 상을 차리고 식후엔 약을 챙기고 산책도 시켜 주고 간식도 사다 나르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화장실 수발과 옷 갈아입는 것, 목욕 등은 곧 죽어도 자기가 하겠다며 발끈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그마저도 싱글벙글 재밌기만 했다.

재유가 아기였다면 응가도 닦아 주고 기저귀도 채워 줄 텐데. 쑥쑥 크라고 베이비 마사지도 해 주고 보들보들한 배에다 입을 대고 배 방귀도 해 주고 싶은데.

물론 재유는 서른다섯 성인 남자고 그의 딸조차 기저귀를 뗀 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아저씨 주제에 뽀얗고 청순한 게 새록새록 얼마나 예쁜지 몰랐다.

아파서 혈색 없던 피부도 처연하니 고왔고, 잘 먹여서 조금씩 살이 차오르는 뺨도 어찌나 탐스러운지 입에 물고 좀 빨아 보고 싶었다.

10대 때의 재유도 풋풋하게 귀여웠고, 20대의 재유도 말가니 예뻤던 게 30대가 돼서는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은근한 완숙미를 풍겨 대서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 그때마다 침을 좀 흘렸을지도.

병실로 들어설 때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데도 재유의 주변으로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 때도 일었다. 실제로 빛이 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럴 때마다 아랫도리가 슬금슬금 반응을 보이는 것이 참으로 속이 타고 민망스러웠다. 10대 때 씌워졌던 콩깍지는 아직도 단단하게 탑재되어 있었다.

우주는 재유 곁에 딱 붙어서 치약도 짜 주고 컵에 물도 받아 주며 거울로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오른손이 다쳐서 왼손으로 서툴게 칫솔질을 하는 모습에 어느새 칫솔을 뺏어 들고 재유의 안쪽 어금니를 닦아 주고 있었다.

재유가 민망함에 어깨를 움츠리다가 입가에서 침이 흘렀다. 우주는 그것을 무심코 받아먹을 뻔했다. 쭈욱 늘어져 재유의 엄지발가락에 툭 떨어진 그것이 아쉬워서 입맛도 쩝쩝 다셨다.

아무래도 병이었다. 하루빨리 ‘재유 일상 되돌려놓기’를 완성하지 않으면 퇴원도 하기 전에 재유를 깔고 누워 일을 벌일 판이었다. 우주의 눈에 순간적으로 투지가 불타올랐다.

“올 때 뭐 사 올까? 먹고 싶은 거 없어?”

양치를 마치고 재유를 침대에 앉힌 뒤 색연필과 컬러링북을 세팅해 준 우주가 물었다.

손을 놀리기를 좋아하는 그에게 제법 복잡하게 칸이 나뉜 컬러링북은 지루한 병원 생활에 안성맞춤이었다.

사 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절반 이상이 알록달록했다. 불편한 왼손으로도 재유는 색연필을 골라 칸을 채워 나가는 걸 재미있어했다. 그 모습도 막 글씨 연습을 시작하는 아이처럼 귀엽기만 했다.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음… 그럼 너. 너 먹을래, 라고 말하진 않고 삼계탕으로 합의를 봤다.

우주는 재유의 옆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정수리에 입을 맞춘 뒤 금방 다녀올게, 하고 병원을 나섰다.

요즘 재유는 이 정도의 스킨십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입술에 뽀뽀라도 할라치면 아직은 아니라는 듯 목을 움츠렸지만, 끝내 밀어내진 않는다.

혀를 섞으면 자제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우주도 그 이상은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손도 트고, 정수리도 텄으니 앞으로는 혀도 트고 그 이상도 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

초겨울이어서 최근엔 기온이 부쩍 내려갔지만, 오늘은 실구름 몇 점이 떠다니는 맑은 날씨라 추위가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실내에 있다 밖으로 나오니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재유에게 말한 것과 달리 오늘 약속은 거래처가 아니었다. 송진우와의 만남이었다.

폭행 사건 이후로 송진우도 다친 몸을 치료하느라 좀처럼 약속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어제 저녁때쯤 병원에 와도 좋다는 연락을 수연을 통해 받았었다.

재유에겐 딱히 비밀로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안 그래도 희지 때문에 시무룩하니 일이 잘 해결되면 말해 줘도 늦지 않을 것이다.

송진우와의 합의는 명목상 중요했다. 아직 조사 단계라 검찰로 넘어가진 않았어도 언제 법원에서 연락이 올지 알 수 없는 마당에 합의라도 해 놔야 했다.

물론 재유가 기소될 리는 없었다. 희지와 더불어 재유의 변호까지 맡은 수연의 로펌은 이름값만큼 수완이 좋았다. 막 검사 옷을 벗고 변호사로 개업한 인물을 미리 섭외해 둔 것이다. 만약 사건이 검찰로 넘어간다면, 굳이 담당 검사를 찾아가지 않고도 전화 한 통만으로 불기소를 끌어낼 수 있는 부장검사급 전관 변호사였다.

수연의 말로는, 한몫 단단히 챙길 시기에 살인범도 정치범도 아닌 재유의 상해 사건이 그 새내기(?) 변호사에겐 인맥이 작용한 ‘아량’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돈을 적게 받는 것도 아니면서 드럽게 생색을 내는 놈이었다.

기소될 위험이 없는데도 우주가 굳이 송진우를 만나 합의를 하려는 것은 내내 풀리지 않은 의문 때문이었다.

수연이 알아본 바로는 송진우 역시도 희지를 알게 된 경로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고 있다고 했다.

송지현은 왜 희지가 제 아빠와 원조교제를 하는 사이라고 오해했을까?

희지는 원조교제는 물론 송지현을 알지도 못한다고 했고, 우주도 그 말을 믿었다.

송지현이 제 아빠를 통해 희지의 정보를 알아냈다는 건, 송진우가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중학생 희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어린 여자애를 탐하는 더러운 취미가 있어서 불법으로 유출된 희지의 신상정보를 갖고 있었고, 딸인 송지현이 우연히 발견했다-

이것이 우주로서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김 실장에게 미리 받아 두었던 송진우의 프로필만 봐도 그럴듯해 보였다.

올해 마흔여덟인 그는 서울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유명 철강기업에 입사를 했고, 스물다섯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했으며 스물여덟에 송지현을 낳았다. 3년 전에 부인과 이혼을 했는데, 이혼 사유는 송진우의 잦은 바람기 때문이었다.

외동딸인 송지현은 엄마와 살지만, 아빠와 주말을 함께 보내고 여행도 자주 가는 걸 보니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이가 지나치게 좋으니 제 아빠의 불건전한 상대로 희지를 오해해서 그런 짓을 벌였겠지.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애를, 그것도 남자애들까지 동원해서 패다니. 송지현도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라기는 글러 먹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바람은 숱하게 피우면서도 자식한테는 끔찍한 놈이라… 하여간 드럽게 웃기는 캐릭터였다.

송진우를 떠올리다 보니 화창한 날씨에 상쾌하던 기분이 우중충하게 가라앉았다.

벌써부터 재유가 보고 싶었다. 올림픽대교를 건너 도착한 목적지가 또 병원이라는 사실에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갑갑함을 느꼈다.

약속 시간은 5분 앞으로 다가왔다. 스케줄과 시간약속을 꼼꼼하게 관리하던 평소와 달리 우주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콘솔 박스를 열어 안에 든 비닐봉투를 꺼냈다.

“…….”

우주는 잠시 내용물을 가만히 응시했다.

송진우와 재유의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뒤를 잡아채는 찝찝함이 느껴졌다. 마치 운무가 가득한 산길을 침침한 눈으로 더듬다가 등 뒤로 불쑥 스쳐간 짐승이 늑대인지 토끼인지 모르는 것처럼 모골이 송연할 때가 있었다.

발작이 있기 전, 재유가 집에 들러 10분 걸린대 놓고 30분 만에 가지고 나온 물건이었다.

재유는 검은 재킷 안에 든 이 내용물을 몹시 신경 썼었다. 마치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처럼 젖은 재킷을 옆구리에 낀 채 불안해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우주는 그때의 재유를 보며 안에 든 것이 혹시 위험한 물건인가 싶어 애를 태웠다. 안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약물이라든가 날붙이라든가. 그런데….

칫솔 두 개.

재유는 파란색과 연두색 칫솔을 각각 다른 지퍼백에 담아 비닐봉투로 꽁꽁 싸매 놓았다. 새 칫솔도 아니었다. 희지의 칫솔은 이미 병실에 있을 텐데, 왜 굳이 집에서 쓰던 걸 가져왔을까?

두 개가 각각 따로 담긴 것도 이상했다. 두 개 다 희지의 것일까?

제일 의문인 건 재유였다. 우주가 보기에 재유의 발작은 희지가 재킷에 손을 대자마자 일어난 거나 다름없었다. 대체 이게 무엇이길래….

정신이 든 후에도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재킷을 찾았었다. 그때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우주는 간호사가 핑계를 대며 대충 둘러대고 재유 모르게 일단 칫솔을 숨겨 두었었다.

송진우를 죽도록 패 주고 48시간 만에 유치장에서 나와 곧바로 집에 들러서 가지고 나온 두 개의 칫솔.

혹시 이 물건이 송진우와 관련 있을까? 무슨 이유로?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일단 만나 봐야 했다. 이래저래 내키진 않았지만, 합의도 할 겸 직접 만나 캐 보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이었다.

우주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5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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