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너의 옆자리
* * *
2015년 10월.
퇴근길 버스에 오른 재유는 오늘 하루가 그런대로 무난하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넘치는 오더 때문에 종종걸음 칠 일도 없었고, 밑에 있는 녀석이 재고 파악을 제대로 못 해서 식자재가 텅 비는 일도 없었고, 컴플레인 때문에 조리장의 얼굴이 구겨지는 일도 없었다.
늘 반복되는 것 같은 매일이지만 이렇게 평온하게 지나가는 하루도 드물었다.
마음 졸이는 일 없이 평탄하게 굴러갔던 하루에 안도하며 재유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드폰을 꺼내 앙증맞은 음표가 그려진 앱을 실행시켰다.
구닥다리 MP3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는 아빠를 타박하며 편하게 핸드폰으로 들으라고 희지가 가입한 계정을 공유해 준 것이다. 아빠 출퇴근 시간엔 안 들을 테니 자기가 학원 가 있을 시간엔 듣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MP3에 넣어둔 음악들도 얼마 없어서 늘 같은 음악만 돌려 들었던 재유는 최신곡부터 제 아버지 세대의 음악들까지 바로 검색해 들을 수 있는 편리함에 쉽게 안착했지만, 아쉬운 마음에 오랫동안 모아뒀던 MP3 파일들도 핸드폰으로 옮겨두었다.
재유는 쉽게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번 손에 익으면 물건도 오래 쓰고, 한번 마음을 열면 상대를 사려 깊게 배려하는 정을 줄 줄 알았다.
그렇게 한번 마음을 준 것들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쉽게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고루하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그런 보수적인 면이 여리여리하게 생긴 재유의 외양을 듬직하고 강인해 보이게 만든다는 걸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재유가 인생에 단 하나뿐이었던 사랑을 제 손으로 내버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아니, 영선이밖에 몰랐다. 그런 영선마저 이제는 곁에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한 대기업을 줄곧 다니던 영선은 허구한 날 그만둔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어느새 잔뼈가 굵은 과장님이 되었고 새로 들어온 신입과 눈이 맞아 몇 년 동안이나 죽네 사네 하며 지지고 볶는 연애를 했더랬다.
언젠가는 헤어졌다며 죽상을 하고 몇 날 며칠을 술만 퍼마셨는데, 얼마 후엔 호주 멜버른에 있는 지사에 홀랑 지원해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고는 좁아터진 한국 말고 넓은 땅덩어리에서 자유롭게 살 거라며 전혀 홀가분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었다.
그 후론 어찌어찌 화해했다가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더니 세 살 어린 신랑을 데리고 그야말로 홀가분하게 한국을 떠나 버렸다. 그게 올봄의 일이었다.
그대 나를 잊은 건가요-
어쿠스틱 기타와 잔잔한 피아노만으로 채운 전주에 진부한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희지가 채워 넣은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와중에 재유가 학창 시절에도 원로 취급을 받던 가수의 노래가 들려오니 뜻밖일 수밖에.
재유는 딸아이의 선호 곡들을 한참 살펴보았다.
최신 아이돌 음악부터 10년 전 유행했던 소몰이 창법의 발라드, 70년대 미국 포크송을 번안해서 부른 노래, 심지어 판소리까지 여러 장르의 노래가 한두 세대를 걸쳐서 폭넓게 포진해 있었다. 희지가 잡식성 리스너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재유와 영선의 영향으로 90년대 가요들은 익숙하긴 할 테지만,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아이가 할머니 세대에 유행했던 간드러지는 뽕짝을 듣는다는 게 신기하고 맹랑하기만 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먹이고 씻기고 입히며 품에 끼고 사는 자식이어도, 아이는 자랄수록 점점 새로운 모습만 보여 줬다.
엄마 없는 제 처지를 일찍이 깨달은 희지는 어느 정도 머리가 컸다고 생각하는지, 요즘은 같이 사는 아빠에게도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해 댔다.
쉬는 날에 집에 박혀 청소나 빨래를 하고 있으면 그런 건 제가 할 테니 운동 좀 하라며 요 앞에 새로 생긴 헬스장을 끊으라고 강요를 했다. 어느 날엔 비타민과 마그네슘 따위의 영양제를 종류별로 사 놓더니 아침마다 챙겨 먹으라며 엄포를 놓았다.
식탁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영양제를 하루라도 빼먹으면 눈을 흘기며 으르렁대는 게 꼭 영선의 어머니가 남편을 구박할 때의 잔소리 같기도 했다.
아직 다 자란 것도 아니면서 벌써부터 아빠의 건강 걱정을 하는 게 안쓰러웠다. 재유는 30대 중반 나이에 어디 하나 아픈 곳 없이 쌩쌩하게 건강했지만, 어린 딸의 마음을 생각해서 희지가 하라는 대로 기꺼이 따랐다.
엄마도 없는 아이가 엄마처럼 생각했던 영선이 고모까지 떠났으니 이제 믿고 의지할 데는 오로지 아빠뿐일 희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버스가 20분 정도 걸려 집을 향해 달리는 동안 재유는 아는 노래가 나오면 속으로 따라부르고,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머릿속에 새기며 늘 보는 차창 밖 풍경을 건성으로 바라보았다.
정류장에 내린 재유는 쌀쌀한 날씨에 재킷을 여미며 겨울을 맞아 장사를 재개한 붕어빵 포장마차로 걸음을 재촉했다.
희지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게 요 슈크림 붕어빵이었다. 어릴 때부터 기분 상한 일이 있더라도 붕어빵만 입에 물려 주면 입을 삐죽이면서도 냉큼 받아들어 입에 욱여넣고 보는 아이였다.
재유는 붕어빵이 다 좋은데 겨울에만 먹을 수 있다는 게 불만이었다. 집에서 만들어 줘 봐도 희지는 길에서 만난 붕어빵 포장마차에만 반응하며 눈을 반짝였다.
매일같이 들르니 재유가 사 갈 종류를 훤히 꿰고 있는 아주머니가 슈크림 두 개와 재유 몫의 단팥 세 개를 종이봉투에 담고 단골 서비스로 하나씩 더 담아 주었다.
재유는 값을 치르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길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을이 무르익어 힘을 다한 이파리들이 나무에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일렁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마를 지저분하게 내리덮어서 손으로 대충 정리하는 동안 음악은 다음 트랙으로 넘어갔다.
피아노 연주로 단조롭게 시작된 음악은 어쩐지 처연하게 들리는 현악기와 아코디언 소리가 더해져 쓸쓸한 가을밤 분위기에 곧잘 어울렸다. 중저음의 남성 보컬이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은 듯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노래 제목을 확인했다. 요즘 나오는 로맨스 드라마의 OST인 듯했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마음속에 술렁이는 동요가 일어났다.
멈춰 있던 다리가 우뚝 선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파란불로 바뀐 신호등을 주시하면서도 재유는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가슴 한쪽 비어 있던 구멍에 시린 바람이 들어찬 듯 서늘했다.
우주 생각이 났다.
‘바람을 타고 꼭 돌아올 거라고. 바람이 되어 내 곁에 머무를 거라고.’
노래 가사를 되새기는 순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당황하여 얼른 얼굴을 훔쳤지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서 질질 짜는 모습이 한심스러워 감정을 추스르려 해도 멈추기는커녕 점점 더 격해졌다. 소리를 내며 울 뻔했다.
신호등은 벌써 빨간불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힘들 것 같아 발길을 돌려 포장마차 옆길의 좁은 골목으로 갔다.
재유는 흐느낌을 죽이고 꺽꺽거리는 숨을 애써 다잡았다. 노래는 점점 고조되어 슬픈 목소리가 한층 짙어졌다.
어쩐지 보컬의 목소리가 우주와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노래의 분위기가 옛 기억을 소환했다. 꼭 지금같이 낙엽이 떨어지던 계절에 아무도 없던 길을 둘이서 걷다 남몰래 입을 맞춰 주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갔다.
우주가 결혼한 지도 5년이나 지났는데.
잊으려고 다 떨쳐 냈어도, 미련한 속마음이 한 귀퉁이에서는 그리움을 키워 내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평범한 하루의 끝에 갑자기 생각나는 걸 보면.
분명 살면서 옅어진 그였는데. 어느 때는, 잃어버린 단추처럼 기억에서 지워지기도 했었는데.
재유는 울음을 삼키며 겨우 빌라 입구까지 도착했다. 격정으로 몰아쳤던 음악은 벌써 끝이 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랩음악이 정신 사납게 귀에 달라붙었다. 재유는 이어폰을 떼어 내고 계단을 올랐다. 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감정을 추스르며 서러운 숨을 뱉어냈다. 눈을 벅벅 닦고 코를 킁 들이마신 뒤 비밀번호를 눌렀다.
희지는 거실에서 우유를 안고 있었다.
운 사실을 감추려 머쓱하게 고개를 돌린 채 붕어빵을 내밀었는데, 희지는 아빠를 보지도 않고 우유만 살폈다. 재유는 소파 한구석에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 얼른 세수를 하고 나왔다.
희지는 어느새 붕어빵 봉투를 끼고 꼬리 부분을 조금 떼어 우유의 주둥이에 들이밀고 있었다.
요즘 부녀의 주된 걱정거리는 바로 우유였다. 희지만큼이나 환장을 하고 붕어빵에 달려들던 녀석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재유는 마음 한구석이 찡하게 쓰라렸다. 개도 평생 사료만 먹고 사는 건 질리는 법이라 종종 닭죽을 해 주거나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삶아 특식을 만들어 주곤 했는데, 요 한두 달 새엔 그마저도 입에 대질 않으려 했다.
짐승도 사람처럼 죽을 때가 되면 곡기를 끊는 건가.
재유는 혼자 생각을 말한 적은 없지만, 희지도 어느 정도 예감은 하는 것 같았다. 도무지 입 안으로 뭘 삼키려 하질 않아서 3일에 한 번꼴로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돌아오는 게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노화였다. 나이가 드니 이곳저곳이 성치 않은 것이다.
반질반질하던 눈은 허예져서 앞도 보이지 않았고, 슬개골 탈구로 산책은커녕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벅차했다. 심장도 나빠져 가끔 기침 같은 숨을 힘겹게 토해 내면 희지와 재유는 제 숨이 다 막히는 것처럼 목을 쓰다듬어 주며 안절부절못했다. 아침저녁으로 우유에게 먹이는 약이 두세 개는 됐다.
“TV에 나온 거 보니까 어떤 강아지는 20년도 넘게 산다던데.”
우유가 먹지 않는 붕어빵을 저도 먹을 생각이 없는 듯 한쪽으로 치워 놓은 희지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빠 고3 때 길에서 우유 주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럼 아직 더 살 수 있는데 왜….”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난 말끝이 물기로 흐려졌다. 재유는 수건을 빨래통에 집어넣고 얼른 희지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졌다. 우유가 아픈 것도 안쓰러웠고, 울먹거리는 딸도 마음 아팠다.
우유를 오거리 시장에서 주운 건 15년 전이었지만, 그전에도 사람 손을 탔던 개였다. 처음 만난 당시에도 새끼강아지는 아니었다. 동물병원에선 정확한 나이를 가늠해 주지 못해도 열다섯보단 훨씬 더 들었다고 진단했었다. 사람 나이로 치면 팔순 정도라는 설명과 함께.
“우유 아프니까 우리가 잘 돌봐 줘야지. 우리가 슬퍼하면 우유도 마음 아플 거야.”
우유와 희지를 동시에 쓰다듬은 재유의 마음도 착잡하기만 했다. 영선이도 떠난 마당에 우유까지 이 지경이니 요즘 희지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다. 집에 오면 우유만 끼고 있거나 집 밖에 산책을 나가도 멍하니 빈 하늘만 올려다보기 일쑤였다.
사춘기에 겪기에는 연이은 이별이 버거울 만했다.
영선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매일같이 얼굴 보고 사는 건 아니었어도, 희지는 이따금 연락해서 아빠에게 말 못 할 고민을 영선에게 터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만큼 영선의 빈자리는 재유에게도 크게 다가왔다. 성장기의 여자아이 몸에 대해 지식이 없는 자기를 대신해 영선은 희지를 붙잡고 이것저것 가르쳐 왔다.
올 초만 해도 둘만 먹는 쓸쓸한 밥상에 예비부부를 모셔다 놓고 한참을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낼 땐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았는데. 어려도 눈치는 있는지 그녀가 결혼해서 호주로 떠나자 희지는 영선에게 먼저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다.
“울지 마. 더 예뻐해 주고 잘 보살펴 주면 되지.”
아이는 말이 없었다. 희지의 품이 답답한지 우유는 몸을 뒤채더니 스스로 일어나서 힘겹게 물그릇이 있는 곳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걷는 모양이 위태롭기만 해서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재유는 쓰러지는 몸을 언제든 받칠 기세로 손을 지척에 띄우며 오리걸음으로 뒤따랐다.
몇 모금 물을 할짝이던 우유가 이번엔 재유 품으로 기어들었다. 얼른 우유를 잡아 올려 무릎 위에 내려놓고 늙어 탄력을 잃은 뻣뻣한 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희지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눈물을 훔치면서 별말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뒷모습에 대고 뭐라 말하려던 재유는 입만 벙긋거리며 닫힌 문만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유가 떠난다면 한차례 폭풍이 쓸고 지나갈 것이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일이지만, 재유는 어린 딸을 위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아직은 애 엄마가 살아 있던 시절, 영선을 통해 건네받았을 때부터 재유는 우유를 우주와의 연결고리처럼 생각해 왔다. 이름도 두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우유’였다. 일부러 지은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우유였다. 강아지를 버린 몹쓸 사람이 지은 이름이었지만, 그마저도 운명처럼 느껴져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를 떠난 후에도 우유를 보며 위로받았던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꼭 우주와 얽힌 사연 때문이 아니더라도, 재유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힘들었을 때나 살면서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유에게 얻는 에너지가 상당했다. 자식과는 또 달랐다.
우유가 있으니 그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한 적도 많았다. 이 조그만 개에게 준 것 보다 받은 게 더 많았는데. 재유는 축 처진 우유의 모습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괜찮을 거야. 다 잘될 거야.”
힘없이 쌕쌕거리는 여린 생명을 오래도록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계속 되뇌었다. 괜찮지 않은 자신을 다독이듯이.
***
디너 타임 예약에 맞춰 장어구이와 백숙 손질을 얼추 마무리한 재유는 벽시계를 확인하고는 잠시 쉬고 오겠다며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휴식 시간 10분은 정해진 누군가에게 보고하지 않는 대신 제 차례가 돌아오면 주방에 있는 모두가 알아듣게끔 알려 주고 돌아온 뒤에는 복귀했노라 또 한 번 소리를 질러야 했다.
너른 주방에 비해 비좁은 직원 휴게실에 들어선 재유는 선풍기부터 강풍으로 돌려놓고 주방모를 벗어 던졌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찬바람이 부는데도 주방 일이란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고 또 모자란 것이었다.
디너 직전 타임은 하루 중 제일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꼼꼼하게 신경 써도 어딘가에서 돌발상황이 생긴다. 정신없는 주방에서 누군가 양념통을 헷갈려 음식 간이 잘못 들었다든가, 쌓아 둔 접시가 와르르 무너진다든가, 알레르기 체크를 깜빡하고 넣지 말아야 할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든가 하는. 사소하고 간단한 실수는 얼마든지 빵빵 터졌다.
이 호텔에서만 7년 차인 재유는 어느새 노련한 한식 조리사가 되었고, 신메뉴에 대한 아이디어도 수렴될 만큼 조리장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도 손님이 들이닥치기 직전에는 쉬는 시간조차 마음이 초조했다.
이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재유는 곧 호텔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애초에 평생 호텔 밥 먹을 생각도 없었다. 고급한정식은 배울 것도 많고 재미있는 분야라고 생각해 왔지만, 일이 고되었고 조직 생활도 맞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식당 차릴 시기를 가늠해 왔는데,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3년 전, 재유는 절반의 대출을 끼고 강북에 20평대 아파트를 장만했다. 차곡차곡 갚아온 대출금보다 더 큰 금액으로 집값이 오르기도 했고, 초기 자본도 어느 정도 마련된 상태였다.
요즘은 쉬는 날마다 오며 가며 찜해 둔 동네에 가게 자리를 보러 다녔다. 이미 선보일 메뉴나 식당 컨셉 등은 머릿속에 구체화 된 단계였다. 내년 봄쯤에는 호텔을 그만두고 자신이 차린 식당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들썩거렸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처음 받은 월급이 115만 원이었고 희지는 겨우 세 살이었다. 지금은 작으나마 어엿한 집도 생기고 희지도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 모아 둔 돈은 많지 않지만, 앞으로도 열심히만 하면 희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혼자서도 충분히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유는 속으로 자신의 노고를 조용히 칭찬했다.
우유만 좀 더 기운 차리면 좋을 텐데.
두고 나온 우유 생각에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재유는 땀에 절은 몸이 조금 서늘해지자 캐비닛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홈 카메라로 우유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유의 상태를 체크하고 희지에게 메시지를 보낼 시간이었다.
“…….”
핸드폰 액정에 부재중 전화 5통과 함께 웬일인지 음성메시지까지 들어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모르는 번호였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자 눈이 번쩍 뜨였다.
재유는 은연중에 희지를 떠올리며 전화 회신보다 음성메시지를 먼저 듣기 위해 다급히 손을 놀렸다.
[저, 여기 한진병원인데요, 한희지 학생 보호자 되시죠? 환자가 지금 많이 다쳐서 응급실에 있거든요. 지금 치료받고 있으니까 음성 확인하시는 대로 빨리 오셔야….]
순간 손에 힘이 풀려 핸드폰을 그만 놓쳐 버렸다. 재유는 얼른 주워들어 다시 귀에 갖다 댔다.
[…아직 의식이 없거든요. 동건동에 있는 한진병원이니까 빨리 오세요.]
얼음으로 만든 손이 목덜미를 움켜쥔 듯 소름이 끼쳤다. 믿기지 않는 음성 내용에 재유의 몸이 의자를 박차고 불쑥 솟았다. 기세와 달리 다리가 후들거리는 바람에 허우적거리며 캐비닛을 겨우 붙잡았다.
희지가 다쳤다고. 응급실이니까 빨리 오라고.
재유는 조리복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이 겉옷만 챙겨 들고 휴게실을 뛰쳐나왔다. 또 넘어지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다리에 힘을 꾹꾹 주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정신 빠진 눈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가 세게 부딪혀서 주저앉을 뻔했다. 누구인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리복을 입고 있으니 아마 동료일 것이다.
“나… 나 지금 좀 나가 봐야 되거든? 병원… 병원에 가야 되니까 말 좀 전해 줘.”
재유는 뒤에서 뭐라 뭐라 지껄이는 소리에 대꾸도 않고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흥분과 걱정으로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재유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벽에 기대고 층수를 가리키는 숫자만 시뻘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쯤 학원에 있을 시간인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응급실이라는 건지.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온 재유는 보이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매달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딸이 다쳤다고, 의식이 없을 정도로 아프다고, 어떡하냐고.
아무나 상관없으니 나에게 괜찮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호텔 로비는 호화로운 실내장식과 평온한 조명 빛이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엔 잘 드나들 일 없던 곳이라 입구를 찾는 데 조금 헤맸다. 사람들은 여행 가방을 손에 들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예약을 확인하거나 인테리어에 감탄하며 설렌 표정으로 차분하게 로비를 오갔다.
문득 고립감을 느꼈다. 세상을 향한 억울함이 치밀었다.
내 딸이 다쳤다는데, 아파서 병원에 있다는데, 니들은 웃음이 나고 신나 죽겠냐?
재유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린애들에게 곧잘 생긴다는 병치레도 있었고 여기저기 깨지도 다친 적도 많았지만, 지금처럼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응급실에 실려 가긴 처음이었다.
의식이 없다고 했으니 일이 나도 크게 난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어디 공사장 앞을 지나가다 떨어지는 뭔가에 맞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엉켜 뒤죽박죽이었다. 택시를 타고서도 빨리요, 아저씨 더 빨리요, 소리를 스무 번은 넘게 했다. 절박한 목소리에 택시 기사도 동요했는지 막히는 서울 한복판에서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차를 몰았다.
응급실 입구에 차가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어 재낀 재유는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진 것도 잊은 채 벌떡 일어서서 응급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곧장 안내 창구로 향했다.
“한희지요. 희지… 어딨어요? 희지요, 어디에….”
“아, 한희지 환자 보호자세요?”
“네. 제가 아빠예요. 지금 어디 있어요?”
숨넘어갈 듯이 재촉하며 묻는 재유를 의식한 듯 간호사는 차트를 급하게 뒤적거렸다.
“지금 엑스레이 검사받으러 갔어요. 아마 10분쯤 걸릴 거예요.”
“거기… 거기가 어디예요?”
“곧 끝날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시면 돼요. 저기 앉아계시면 이쪽 통로로 나올 거예요.”
간호사가 가리키는 앞쪽 의자와 왼편의 복도를 차례대로 훑은 재유는 얌전히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섰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실려 온 거예요?”
“길에서 쓰러진 걸 누가 신고해서 구급차로 실려 왔는데, 폭행당한 것 같아서 여기 선생님이 경찰에 신고했어요. 곧 경찰들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폭력이라니. 경찰이라니. 누가 희지를 때렸다고?
재유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누군가 목을 틀어쥐고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 전해졌다. 엄마의 죽음에도, 인애의 죽음에도 느끼지 못했던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을 제대로 느꼈다.
“…얼마나 다쳤는데요?”
“담당 선생님 곧 오실 테니까 오시면 자세히 물어보세요. 검사 다 끝나 봐야 저희도 제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간호사가 더 말해 줄 게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재유는 그제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검사실이 있다는 복도만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서성거렸다.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검사실을 직접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발을 떼는데, 멀리 복도에서 유니폼을 입은 남자 하나가 베드를 밀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발이 떨어질 것 같았는데 누군가 발목을 채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희지가 분명하다는 직감이 왔다.
남자가 베드를 밀고 오는 속도가 비정상적이었다. 너무 느렸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얼굴을 봤을 때, 재유는 또 한 번 주저앉을 뻔했다. 베드 난간에 손을 짚어 바퀴를 멈춰 세웠다.
“…희지야. 희지야?”
한눈에 보기에도 심하게 맞아 얼굴이 탱탱 부어 있었다. 손을 대서 흔들어 깨우면 더 아프기라도 할까 봐 섣불리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재유는 울음이 억눌린 소리로 이름만 불러댔다. 희지는 의식이 없는 건지, 자고 있는 건지 부름에 반응이 없었다.
내 딸에게 누가 이렇게 심한 짓을 했을까. 눈에 보이기만 하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두려움에 떨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잘못될까 봐 무섭고, 이성을 잃은 저 자신이 무섭고, 앞으로 닥쳐올 무언가가 어둡고 포악한 것일까 봐 재유는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
직원들이 빠져나가는 퇴근 시간 무렵, 우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 후로 세 시간 동안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퇴근도 하지 않고 줄곧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발신인은 김민수 실장이었다. 재유의 신변에 긴급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한재유 씨 딸 한희지 양이 상해를 입어 입원 중입니다. 한재유 씨가 직접 병간호하고 있습니다. 호텔은 잠시 휴가를 냈습니다. 폭행을 당한 경위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 중입니다. 진척이 있을 시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메시지 말미에는 병원 이름과 병실 호수가 있었고, 재유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우주는 손가락을 톡톡 두드려 사진을 확대했다. 병실 복도에서 수거용 카트에 식판을 넣고 있는 초췌하고 무표정한 옆모습이었다.
헤어진 애인이 잘살면 잘사는 대로, 못 살면 못 사는 대로 마음이 쓰린가 보았다. 우주는 사진 속 재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재유는 그동안 착실하고 무난하게 잘 살아왔다. 별다른 풍파도 없이, 어찌 보면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애인 비슷한 것도 만들지 않았고 주기적으로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는 친구도 없었다.
우주는 재유와 헤어진 이후로 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것 같았다. 제가 옆에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모습이 미묘하게 달랐다. 희지와 함께할 때만 웃었고, 혼자 있을 땐 표정이 없었다. 제게 보여 줬던 행복한 미소나 설레는 표정, 새침한 얼굴은 사라진 것 같았다. 감정 없는 인형처럼.
차라리 재유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연애의 재미라도 알길 바란 적도 있었다. 쉬는 날엔 집에서 벗어나 사람들 만나서 술도 한 잔 꺾고 떠들썩하게 지내는 꼴 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미련한 놈은 하루하루가 그날이 그날이었다.
우주가 알기로 재유는 저를 제외하고 제대로 사귄 사람이 이제껏 한 명도 없었다. 사별한 장인애와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재유가 그녀를 떠올리며 얘기할 때 애틋한 감정을 내비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재유에게 유일한 낙은 자식을 키우는 거였다. 아버지로서만 산다더니 정말로 애만 키우고 살았다. 희지랑만 외출하고 여행가고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자식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아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단다.
우주는 헤어진 애인이 잘사는 것보다 못 사는 모습을 보는 게 훨씬 마음이 쓰리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다 못해 미어졌다.
자식한테 올인하며 사는 삶은 자기 자신을 해친다. 삶의 근간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기분일 거다. 자신의 어머니와 전처의 어머니가 그랬듯.
재유의 얼굴에 생기라곤 없었다. 워낙에 얌전하고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컴컴한 그늘까지 더해져 마치 죽어 있는 인형 같았다.
나 어떡하냐. 너 이런 일 생긴 거 아는 척할 수도,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없는데. 어떡하냐 재유야.
우주는 착잡한 마음에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헤어진 이후로 사진으로만 접했을 뿐 한 번도 재유를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 주소나 직장이나 핸드폰 번호는 훤히 꿰고 있었지만 찾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없었다. 찾아가 만나면 또 냉정한 얼굴을 마주할까 봐. 마음을 내줬는데 거부당하는 건 이제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갔다. 만날 용기는 없지만, 소식을 모르면 미칠 것 같았다.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든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막말로 재유가 새장가를 들더라도 내가 알아야 했다. 미련이나 집착이래도 상관없다.
재유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결혼도 했고, 이혼도 했고, 다시 혼자가 되었는데도 한재유라는 사람이 제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떨쳐지지가 않았다.
이 정도면 둘 사이에 마가 껴도 단단히 낀 거다. 평생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우주는 그의 흔적을 쫓으며 사는 동안 힘겹게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과 재유를 다시 만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였다. 아직도 이별의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았으니까. 지금처럼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재유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우주는 자꾸만 재유의 번호로 손이 갔다. 전화를 해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너 괜찮냐고. 많이 힘들지 않냐고. 내가 옆에 있어 줘도 되냐고 묻고 싶고 위로하고 싶었다.
해가 짧아진 사무실의 밤은 적막했다. 러시아워도 훌쩍 지나 거리에서 들리는 소음도 잠잠해졌다. 우주는 책상에서 벗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울긋불긋한 서울의 야경이 오늘따라 처연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전화를 걸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오늘도 혼자인 밤이 깊어갔다.
***
희지를 일반 병실로 옮긴 지 3일이 지났다. 재유는 호텔에 사정을 말하고 밤낮으로 병원에 붙어 있었다. 한시라도 희지가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응급실에 실려 온 날, 경찰이 왔다 갔었다. 학교 근처 골목길에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누군가 이미 병원보다 먼저 신고를 했었다고 한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입과 머리에서 피가 많이 난 상태였다고 했다.
경찰은 아직 희지가 의식이 없으니 주변 탐문과 CCTV로 일단 가해자를 찾고 피해자 진술을 받기 위해 다시 한번 병원을 찾겠다 말하며 돌아갔다.
희지는 다행히 그날 자정을 넘겨서 의식을 찾았다. 의사는 외견상 얼굴과 팔다리에 타박상이 심한데 엑스레이 결과 뼈가 부러진 곳은 없다고 했다. 뇌진탕이나 뇌출혈이 의심되니 CT 검사를 권했고, 결과는 가벼운 뇌진탕으로 회복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다.
재유는 눈가의 찢어진 상처와 입술이 터져 딱지가 진 희지의 얼굴을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남몰래 가슴을 치며 눈가를 붉혔다. 팔다리에도 곳곳에 쓸리고 찢긴 상처와 멍 자국이 선했다.
“희지를 골목으로 끌고 간 건 총 네 명인데, 때린 건 한 사람이네요.”
다시 찾아온 경찰은 믿지 못할 소리만 했다.
병실과 조금 떨어진 복도에서 희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온 경찰은 재유에게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그 말을 소화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학교폭력이겠거니 어림짐작하고 있었는데, 희지를 때린 사람은 연고가 없을 것 같은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라고 했다. 학교도 멀었다. 거기다 여학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스무 살을 넘긴 20대 초반의 성인 남자들이었다.
재유가 알기로도 희지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기색이 없었다. 집에서도 늘 친구들과 카톡을 주고받았고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친구들끼리 무리 지어 학원도 같이 다니곤 했다.
희지의 친구들은 대부분 재유도 알았다. 그 부모들의 연락처까지 공유하고 있어서 안면 트고 지내 온 나날이 족히 7~8년은 됐다. 학교에서 터진 문제는 아니었던 거다.
그럼 열아홉 살 여자애가 두세 살 많은 남자 셋을 대동해서 중학교 2학년인 희지를 억지로 끌고 가 저 혼자 죽도록 팼다는 건가? 왜?
“그럼 그 학생은 만나 보셨나요? 희지를 왜 그랬답니까.”
“오늘 보호자랑 같이 경찰서에 오기로 했어요. 이제 조사해 봐야죠. 희지 학생은 뭔가 말한 게 있습니까? 언제쯤 얘기가 가능할까요?”
“…….”
희지는 아직 그날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충격이 컸는지 이틀 동안은 아빠를 보면서 억울한 표정으로 울기만 했다. 가끔 입을 열면 아빠 물, 아빠 화장실, 하며 필요한 말만 했다.
재유는 물을 가져다주고 부축해 화장실에 데려다주면서도 억지로 그날 일을 말하라 다그치진 않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애가 닳을 지경이었지만 아이가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며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빌라 주차장에 있던 차량 블랙박스로 폭행 당시의 영상을 마주했을 때, 재유는 살의를 느꼈다. 제 딸보다 고작 한 뼘 더 큰 여학생인데도, 희지가 맞은 만큼 때리고 짓밟으며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었다.
“아직은 말이 없어요. 희지가 준비된 것 같으면 연락드릴게요.”
재유와 비슷한 나이일 것 같은 경찰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연락 달라고 말하고선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재유는 다급히 경찰을 붙잡아 세웠다.
“저도 그 학생 만나 볼 수 있나요?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아야 되잖아요.”
“흠….”
경찰은 곤란함과 귀찮음이 섞인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쪽도 미성년자라 아마 피해자를 따로 볼 순 없을 겁니다. 저희도 조사가 안 끝난 상황이니까요. 아, 그리고 피해자 쪽에서 합의를 제안할 수도 있을 텐데, 사건 경위를 파악하고 나서 어떻게 진행될 건지 아버님한테 말씀드릴 테니까 일단은 기다려 주시죠.”
“…합의요?”
재유는 합의를 들먹이는 눈앞의 경찰 놈이 가해자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희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데,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합의라니. 생전 그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순하고 멍해 보이던 얼굴이 험하게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경찰은 아차 싶었는지 말투가 온순해졌다.
“아, 합의를 하시라는 게 아니라 가해자 쪽에서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미리 대비하시라는 차원에서…. 아무튼 제가 잘 조사할 테니까 믿고 맡겨 주세요.”
재유는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서는 경찰을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노려보았다.
합의는 얼어 죽을. 사람 때리고 돈으로 수습한다고? 집채만 한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와도 택도 없는 소리였다. 경찰에서 적당히 마무리하려 한다면 검찰까지 끌고 갈 생각이었다.
다음 할 일이 생각났다. 회복에 차도를 보이고 있으니 하루에 서너 시간 희지를 봐 줄 간병인을 구한 다음 변호사를 찾아야겠다. 대출을 더 받고 집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승률 좋고 비싼 변호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우주는 점심시간 이후 잡혀 있던 회의도 미루고 사무실을 나섰다.
외근을 제외하곤 회사를 지키는 붙박이장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워커홀릭이던 대표가 처음으로 회의를 등한시하는 모습에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직원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별일이라고 의아해했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운전석에 오른 우주는 충동적으로 예전에 살던 동네로 차를 몰았다.
이사 온 이후 처음 가는 거였다. 혹시나 그 동네를 가보면 며칠 동안 했던 고민에 대한 결심이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최후의 보루였다.
우주는 재유를 다시 만나 보기로 했다.
희지의 소식을 알게 된 이후부터 소주를 댓 병은 퍼마신 것처럼 머리가 혼란스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이라도 재유를 만나러 갈 것처럼 두 다리에 힘이 팍 들어갔다가도 한순간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금세 결심했다가 돌아서면 생각이 바뀌고, 또 마음먹었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다시 연인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동네를 가는 건, 재유를 다시 만나는 결심에 이별의 아픔 따위로 거리낄 게 있는지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아직도 과거에 맺힌 게 많아서 재유를 원망할 것 같으면 안 만날 것이고, 그럼에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면 오늘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어쩌면, 재유와 다시 이어질 수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적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크게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한 사람이랑 붙었다 떨어지는 걸 세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강심장도 아니었고 지금의 이 거리감이 딱 좋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진짜 다시 이어지길 원하는 걸까, 자문해 봐도 확실히 모르겠다. 그저 첫사랑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그가 몸에 박힌 가시처럼 성가스럽고 자꾸 눈에 밟히고 마음에 거슬렸다.
재유는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알지도 못할 텐데.
그러는 사이 차는 옛 동네로 들어섰다. 전철역을 끼고 있는 대로변에 프랜차이즈 카페와 대형 음식점 몇 개 생긴 것 빼고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몇 블록 더 지나자 전에 살던 골목길이 나타나 우회전을 했다.
들어서자마자 실망감이 일었다. 약국 건물이 없어졌다. 대신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4층짜리 상가 건물이 자리했다. 옆에 있던 칼국수 집도 없어진 걸 보니 건물 두 개를 허물고 새로 지은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하게 돈을 융통해서라도 그때 건물을 사 두는 건데, 때늦은 후회도 들 만큼 아쉬웠다.
그땐 그만한 경제력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차곡차곡 포트폴리오를 쌓아온 회사는 업계의 주목을 떠나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감각 있고 센스 좋은 디자인 회사라는 눈도장을 찍게 되었다.
전시와 광고 포스터에서 영역을 넓혀 영화 포스터로 발을 넓힌 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기존의 획일적이고 다소 촌스러웠던 인물 중심 구도에서 벗어나 서정적인 풍경과 손글씨로 휘갈긴 듯한 폰트로 만들어진 포스터의 영화가 천만에 가까운 흥행을 끌었고, 곧바로 비슷한 류의 디자인이 영화계와 드라마 판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눈썰미 있는 유저들이 ‘유제이디자인’이 만들어 온 그간의 작업물 이미지를 긁어모아 커뮤니티에 올리면서 회사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우주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자체 개발 디자인을 패키지 형식으로 세상에 내놨다. 사옥 1층에 전시공간을 만들어 회사를 대표하는 선과 색채, 패턴과 폰트까지 통합 브랜드 디자인으로 잘 꾸며 놓고 방송에 노출시켰다.
영화에만 주로 출연하던 인기 남자 배우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전시장을 방문해서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감탄하고,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감성적인 모습이 전파를 타자 일반인에게 공개된 전시장은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사람들로 항상 바글바글했다.
우주는 디자인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기획하고 제작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영업을 맡다 보니 프로젝트의 A부터 Z까지 진행 상황을 파악해 디자이너들에게 엇나간 방향성을 잡아줄 정도로의 일머리도 있었다. 그렇게 만든 작품들을 적당히 부풀리고 잘 포장해서 다음 일을 딸 때 값을 높여 부를 정도로 배짱과 수완도 갖추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응당 그래야 되는 줄 알고 발주처 담당자에게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추고, 일을 따기 위해 동동거리며 영업을 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선을 넘는 갑질을 일삼거나 무리한 일정을 요구하며 디자이너들의 노고를 가볍게 치부하는 거래처는 우주 쪽에서 먼저 거절했다.
그렇게 해도 일은 차고 넘치게 들어왔다. 설사 일이 끊긴다 하더라도 우주가 보기에 새로 도전할 미개척 분야는 많았다. 50여 명 되는 직원들을 어렵지 않게 먹여 살릴 자신도 있었다.
날 때부터 부잣집에서 태어나 좋은 집에서 좋은 것만 먹고 자랐던 우주는 부모와 사이가 틀어진 뒤 월세 50짜리 약국 2층 투룸에서 살며 작업실이나 다름없던 영세한 디자인 회사를 7년 만에 6층 규모의 사옥으로 확장하고 미대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회사 1위의 디자인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부모의 배경 없이 이만큼 이룩한 것에 대한 주위의 치켜세움이나 부러움 섞인 시선과는 달리 우주는 자기 자신을 박하게 평가했다.
지금 갖고 있는 걸 그때도 갖고 있었더라면, 하는 끝도 없는 미련 때문이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나 다름없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굳은살이 배긴 재유의 손과 발을 위해 피부관리숍 회원권도 끊어 주고 싶었고, 목 좋은 곳에 예쁜 식당도 차려 주고 싶었고, 평범한 더블룸 대신 스위트룸을 잡아서 밤을 보내고도 싶었고, 태권도 학원도 겨우 다니던 희지에게 재능을 발견할 때까지 피아노고 발레고 온갖 예체능 학원을 다 끊어 주고도 싶었다.
젊어지는 샘물이 있다면 딱 한 바가지씩만 얻어서 재유와 함께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일곱 살만 젊어질 수 있다면.
제 부모와의 입장 정리를 끝내고 순수 내 힘으로 장만한 집에서 같이 살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재유는 과연 그렇게 해 주었을까.
7년 전에 내가 어떻게 했어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직도 가끔 그런 생각들을 한다.
제가 생각해도 질기고 끈질긴 마음이었다. 돌이킬 수 없으니 더 아쉽고 질척거렸다.
재유에 대한 미련과 집착은 닦이지 않는 냄비의 기름때 같았다. 뻑뻑하게 눌어붙어서 떼 내려 하면 코팅도 벗겨지고 생살도 벗겨지겠지.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동네 풍경에 우주의 마음은 착 가라앉았다. 생전 피우지 않던 담배가 당겼다.
그대로 언덕길을 올라 재유가 살던 빌라로 차를 몰았다. 좀 낡은 것 빼곤 다행히 그대로였다.
우주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냥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세탁소는 그대로네, 마트는 이름이 바뀌었네, 초등학교 운동장은 인조 잔디로 바꿨네, 같은 평범한 감상을 중얼거렸다.
골목 어딘가에서 당장이라도 여덟 살 희지의 손을 잡은 재유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벌렁거리는 가슴에 개구리라도 넣어놓은 것처럼 팔딱거렸다. 우주는 다시 약국 자리가 있던 골목으로 돌아와 갓길에 차를 대고 핸드폰을 꺼냈다.
다시 잘해 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옛정을 생각해서.
문득 지나가는 식으로 안부를 물을 수도 있는 거고.
우주는 번호 목록에서 재유의 이름을 찾으며 빈약한 논리로 방어막을 쳤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떨렸다. 매일같이는 아니더라도 줄곧 재유를 생각하며 지내왔지만, 두 사람의 간극은 7년이었다.
20대 후반의 청년들은 이제 30대 중반의 무르익은 나이가 되었다. 계산 없이 호감만으로 인간관계가 시작되지 않고, 헤어진 옛 애인이 갑자기 전화를 해 온다 하더라도 일단 의심부터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고 보니 재유가 자신의 결혼과 이혼 소식을 아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건 아무리 노련하고 비싼 흥신소라도 파악할 수 없는 정보였다.
초조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는 동안에도 신호음은 흘러갔다. 그냥 끊어 버릴까 했는데 뚝,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을까 봐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우주니?
“…….”
우주니, 묻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번호를 아직 지우지 않고 그대로 뒀나 보았다. 나처럼.
그러고 보니 서로 번호를 알고 있는데도 우린 전화 한 통, 문자 한 장 없었구나. 생각해 보니 둘 다 참 독하다.
“…나야.”
이번엔 건너편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 재유는 말이 없었다. 아마 전화한 의도를 파악하고 있거나 너무 뜻밖이라 얼어붙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냥 병원이나 집을 찾아갈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옛 동네에 왔으니, 옛 생각이 나서, 옛 동네를 떠나기 전에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충동에 이 상황이 벌어졌다. 후회하긴 늦었다.
대화를 이어 가야 하는데, 선뜻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희지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일 텐데, 저까지 나서서 보태는 게 아닌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런 건 통화 버튼 누르기 전에 전부 파악하고 마음의 준비를 끝냈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 재유와 있을 때는 좋아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냥 막 들이대고, 어떻게든 관심 끌어 보려 무모한 짓을 벌이기도 했을 텐데.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지금도 무작정 들이대는 건 마찬가지긴 했지만.
-우주야.
재유가 또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의 통화에도 별다른 감정이 비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듣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목소리였다.
재유가 어떤 표정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손바닥도 축축해졌다. 그의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미미한 바람 소리마저도 거슬려 차 안에 틀어뒀던 히터를 꺼 버렸다.
“어… 나야.”
-…….
“…….”
-지금… 우리 집에 올 수 있어?
뜻밖의 제안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마의 땀을 훔쳐 내고 허벅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무뚝뚝하게 전화가 끊기거나 왜 전화했냐고 타박을 받을 줄 알았는데,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고서도 먼저 만나지 않겠냐고 제안해 왔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주는 당연히 수락했다.
“바로 갈게.”
-주소 문자로 보낼게.
그렇게 말하고 재유가 전화를 끊었다. 이미 집을 알고 있으니 ‘주소가 어떻게 돼?’라고 묻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약국이었던 건물 1층은 편의점과 카페로 변신했다. 하지만 우주의 눈엔 예전의 약국 건물에서 2층으로 드나드는 재유가 아른거렸다.
그러는 사이 문자가 도착했다. 우주는 주소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핸들을 잡아 돌렸다.
***
재유의 집 근처에 들어선 우주는 습관처럼 동네 분위기를 살폈다. 주소만 알았지, 찾아가는 건 처음이라 조금 헤맸다.
앞으로 수시로 들락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네에 뭐가 붙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자신이 익숙하기도 하고 어리석게도 느껴졌다.
아직 만나서 제대로 된 얘기도 못 했는데 뭘 앞으로 수시로 들락거린다는 건지.
아파트는 수유, 노원으로 이어지는 강북 어디쯤에 위치한 대단지였다. 지어진 지 15년이 넘은 복도식 아파트가 산등성이를 타고 수십 채가 솟아 있었다.
모양이 거기서 거기인 아파트가 빽빽하게 세워져 있어 동수를 찾는데도 한참을 헤맸다. 평일 오후인데도 주차 자리가 없어 옆 동에 겨우 세우고 건물 절반을 돌아와야 했다.
10층을 누르고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에서 거울을 본 우주는 자신의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 외부 미팅이 생길지 몰라 늘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곤 했는데, 살림집에 방문하는 것치고 무뚝뚝하고 생뚱맞아 보였다. 친근하게 보이려 괜히 머리를 흐트러트렸다가 이건 아닌 듯해서 고개를 털었다. 우주는 머리를 다시 원래대로 정돈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뜸 들이는 것 없이 곧바로 문이 열렸다. 그래서 한 번 더 놀랐다.
좀 천천히 열릴 줄 알았고, 그러기를 바랐던 것도 같다.
눈앞의 이 희멀건 하고 어여쁜 얼굴을 보기까지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덜 됐으니까.
재유는 희멀건 하고, 어여쁘고, 눈가가 빨갰다. 문을 열기 직전까지 울고 있던 것이 티가 났다.
빨간 눈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게 나라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놀라움, 부르긴 했지만 정말 올 줄은 몰랐다는 당혹감.
7년 만에 만나는 게 우는 얼굴이라니. 우주는 가슴이 지근지근 밟히는 것처럼 저렸다.
“…들어와.”
현관문이 완전히 열리고 우주는 재유의 영역으로 또 한 번 들어갔다.
처음 와 보는 집인데도 그가 사는 집이라 생각하니 몸속 어딘가가 술렁거렸다. 오랫동안 땅속에 묵혀 둔 타임캡슐이라도 여는 기분이었다. 그 안에 든 걸 손에 쥐어 보며 ‘아, 그때 내가 이런 걸 갖고 있었지’ 깨닫는 낯설고도 익숙한 그리움이 번졌다.
우주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눈앞에 보이는 거실을 힐끗 훑었다. 안 그런 척 자세하게.
벽에는 희지와 우유의 사진들이 채워져 있었다. 재유와 희지, 영선과 희지, 죽은 장인애와 갓난아기인 희지도 있었다. 혹시나 자신과 희지의 사진도 있지 않나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희지는 사진마다 묶음 머리, 땋은 머리, 올림머리 등 범상치 않은 솜씨로 보이는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철마다 예쁘고 소녀스러운 옷들로 꾸민 모습이었다.
우주는 희지가 여덟 살이던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잠깐 본 게 다지만, 사진만 봐서는 엄마 없는 아이 같지 않게 부모에게 듬뿍 사랑받고 자라온 것처럼 느껴졌다.
거실의 커튼과 테이블보, 주방의 식탁보에도 재유의 흔적이 있었다. 천 한 귀퉁이에 캐릭터화된 희지와 우유가 자수로 앙증맞게 새겨져 있었다.
익숙한 기시감이 몰려왔다.
사진 속의 우유는 강아지와 소녀의 사진이 프린팅된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는데, 사진마다 옷 색과 디자인이 제각각이었다.
집에서 죄 이런 것만 만들며 시간을 보내나 보다. 원래부터도 소소하게 집을 꾸미고 장식하는 걸 좋아했던 재유인데, 처음으로 생긴 자기 소유의 집이니 더 공들여 꾸민 것이 티가 났다.
제가 가진 모든 재주를 부려 혼신을 다해 이 가정을 꾸미고, 가꾸고, 지탱해 왔으리라.
대단하다, 한재유. 아버지가 집안 살림 날려 먹고 엄마도 없이 서울에 올라와 세 살배기 자식 하나 달고 시작해서 번듯한 집까지 장만하다니.
애인이었던 사이인 걸 떠나서도 그의 순탄치 못한 삶에 떠올려 봤을 때 재유는 늘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 인정하고 나면 끝까지 책임을 진다. 여린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한결같이 성실하고 뚝심이 대단했다. 그런 모습도 하나하나 다 사랑했는데. 재유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이다.”
꽉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연 재유는 지금 벌어진 상황에 적응이 필요한 듯 자기 집인데도 안절부절못하며 눈을 피한 채 서성거렸다.
“우유는 어디 있어? 안 보이네.”
우주는 희지가 병원에 있는 걸 알기에 일부러 우유의 행방부터 물었다. 일부러 평범하게 보이려 꺼낸 안부였는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당황스러웠다. 우주는 소리 안 나게 목 안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미안해. 갑자기 불러내서….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무슨 다른 뜻? 물으려는데, 힘겹게 쥐어짜인 듯 비틀린 재유의 얼굴을 보자 입이 꾹 다물렸다.
지금 재유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 상태였다. 그걸 억지로 누르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혹시 너 아내 되는 분이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알게 되면 내가 잘 설명….”
“한재유.”
아, 그런 다른 뜻.
재유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결혼했다는 거. 근데 이혼한 것까진 모르나 보다.
얼굴도 모르는 ‘아내 되는 분’ 걱정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전화한 자기를 여기까지 부른 정도이니 그의 심정이 어떤지는 훤히 알 수 있었다. 여림과 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던 재유는 지금, 겹겹이 싸매져 있던 표피를 벗겨 내고 약한 속살만 드러낸 상태였다.
“그런 건 신경 쓸 것 없어.”
헤어진 애인 입으로 전처에 대한 걸 들으니 우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구절절 읊을 상황이 아니었다.
우주는 재유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걸 꺼리는 것처럼 흠칫거리며 반 발짝 물러섰다.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후두둑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무슨 일인데. 응? 재유야.”
재유는 입을 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주저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말 좀 해라. 그렇게 쌓아 놓지만 말고. 넌 모르겠지만 난 지난 5년 동안 너 사는 거 하나도 안 빼놓고 다 지켜보면서 살았어. 너한테 차이고도 네가 오라는 말 한마디에 헐레벌떡 숨도 못 쉬고 달려왔다고. 그러니까 그 조막만 한 얼굴에 울음 좀 삼키지 말고 나한테 말을 해. 네가 말만 하면 네 딸 희지 그렇게 만든 연인지 놈인지를 잡아다가 껍데기라도 벗겨 놓을 테니까.
“우유가… 어떡해, 우주야. 우리 우유….”
“…우유?”
희지 얘기가 나올 줄 알았던 재유의 입에서 뜬금없이 우유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항상 재유의 집에 오면 꼬리를 빙빙 돌리며 반겨 주던 우유가 안 보였다. 그제서야 집 안의 기묘한 침묵에 위화감이 들었다.
“우유 어딨는데.”
재유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또르르 뺨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방 하나를 가리켰다.
우주는 열린 틈으로 방 안을 살피다 속 시원히 잘 보이지 않아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재유가 자는 방인 것 같았다. 싱글침대 바로 옆에 놓인 강아지 침대에 우유가 자는 듯 고이 누워 있었다.
“요즘 내가… 바빠서 신경을 못 썼는데. 오늘 아침에 와서 밥 주려고… 미안해서 간식도 평소에 우유가 좋아하는 걸로 사 왔는데… 얘가 처음엔 눈을 맞추면서 쌕쌕거리더니….”
“…….”
“최근에 몸이 안 좋긴 했어.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내가 밥 먹이려고 일으켰거든? 근데 갑자기 몸이 너무 뻣뻣해지는 거야. 그래서 병원 가려고 했는데… 우주야. 지금이라도 병원 가면 괜찮지 않을까? 아, 그래야겠다. 내가 너무 멍청했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재유야, 잠깐만.”
우주는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가에 서서 횡설수설하는 재유의 말을 멈추게 했다. 옆으로 누운 우유의 등을 쓸어내리자 뻣뻣한 털에 감싸인 몸통이 꼭 플라스틱 같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전혀 없었다. 우유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
그러니까 아까 전화했을 때 재유는, 우유의 죽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7년 만의 전화 통화라는 것도 잊은 채 패닉 상태로 옛 애인을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우주는 곧장 일어서서 재유의 팔을 붙들고 거실 소파에 앉혔다. 안절부절못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재유의 어깨를 잠시간 지그시 눌렀다.
“잠깐만 여기 있어. 내가 우유 다시 보고 올게.”
우주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핸드폰으로 ‘반려견 장례’를 검색했다. 전화로 예약을 마치고 장롱에서 작은 담요를 꺼내 차갑게 식은 작은 몸을 조심스레 감쌌다. 돌돌 말린 우유를 다시 눕히고 강아지 침대를 통째로 들고 방을 나섰다.
생명이 다한 몸을 만져 본 건 우주 역시 처음이었고, 그게 또 우유여서 충격도 받았으며 심하게 당황도 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심적 동요를 눌러야 했다. 둘 중 하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새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재유는 우주가 손에 든 것을 보고 다시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가자.”
“…어, 어딜?”
“4시까지 오면 우유 장례 치를 수 있대…. 재유야. 우유, 보내 줘야지.”
재유는 오열을 할 것처럼 얼굴이 엉망으로 찌푸려지다가도 꾹 눌러 참는 듯 흡, 흑, 하며 표정을 풀기를 반복했다. 너무 참기만 했다.
오래 키우던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나면 자식이 죽은 것과 비슷한 심정이 된다는데. 재유도 꼭 그런 마음이겠지. 더구나 희지까지 다쳐서 병원에 있는 상태이니 오죽할까.
10년을 넘게 키운 재유만 못하겠지만 우주 역시 우유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재유의 고통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전해졌다.
***
의정부에서도 외곽에 있다는 애견 장례식장을 가는 길은 무거운 방문 목적에도 불구하고 제법 따스하고 화사했다.
서울을 벗어나니 제법 시골 풍경 같은 정취가 있었다. 색색이 물든 나무들로 뒤덮인 얕은 산들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끝도 없이 나왔다. 낮게 드리워진 단풍나무가 심긴 길을 지날 땐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너무 예뻐서 잠시 넋을 잃기도 했다.
재유의 무릎에 늘어진 우유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교외에 잠깐 바람 쐬러 드라이브를 나온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집을 나서기 전, 재유는 희지에게 우유의 죽음을 알리고 영상통화로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당장 우유를 데리고 오라고, 아니면 내가 우유한테 가겠다고 아우성치는 희지를 한참이나 달래고 다독이는 재유의 모습은 아이의 아빠답게 의연하고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막혔던 둑이 터지듯 재유는 무너져내렸다. 그런 재유를 달래는 건 우주의 몫이었다.
우유를 앞에 두고 엉망으로 울며 통곡하는 재유의 목소리는 우주가 전에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마음 놓고 우는 모습을 보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속 깊은 곳에서 꺼내 놓은, 원초적인 슬픔 같은 그의 울음은 우주의 마음도 자근자근 저며 놓았다. 부르르 떨리며 들썩이는 어깨가 너무 외롭고 고단해 보여서 뭐라 한마디 위로의 말을 붙이지도 못하고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유가 어쩐지 요즘 나 볼 때마다 안 떨어지려고 하긴 했었어. 몸이 안 좋긴 했어도 3년쯤은 더 살 줄 알았는데… 흐읍….”
“…….”
“아… 내가 요즘 일이 있어서 별로 신경을 못 써 줬거든. 설마 나 편하게 해 준답시고 일찍 떠난 걸까? 나 우유한테 미안해서 어떡하냐, 으흑….”
“…….”
“그런데 참 신기하지? 우유 처음 만날 때도 네가 있었는데, 떠나는 날도 네가 있네. 하하….”
“…….”
“우유가 좋아하는 간식 좀 더 가져올 걸 그랬다. 옷도 지금 것보다 노란색이 더 잘 어울리는데… 흐윽….”
재유는 차 안에서 내내 우유에 관한 단상을 생각나는 대로 입 밖에 내며 어떨 땐 웃고, 어떨 땐 울었다. 그 울음은 잠깐의 흐느낌이었다가 다음 말로 이어지기도 하고, 길고 긴 통곡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 놓고 횡설수설하며 웃고 우는 게 서울에서 의정부까지 가는 2시간 남짓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주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제 속에 있는 걸 마음껏 발산하길 바랐다. 이 차 안에서만이라도, 제 앞에서만이라도 이렇게 우는 게 오히려 안심됐다.
재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희지 친모가 죽었을 때도, 아버지 장례식장에도 자신은 그의 곁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손으로 직접 거둬서 이제껏 키워 온 우유의 마지막이라도 곁에 있어 줘서 참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만나고 16년 동안 그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나 싶었다. 필요하고 중요한 시기에는 자기는 항상 다른 곳에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재유는 훈련소에 있었는데, 자기는 부모님한테 게이란 게 들켜서 힘들단 핑계로 형과 여행을 하고 있었다. 재유가 소문 때문에 공장에서 따돌림당하고 있을 때 저는 집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재유가 두 번이나 날 찰 만했다. 애인으로 난 좀 별로였다.
우유를 쓰다듬으며 떨리는 그의 손이,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지척에 있는데도 어쩐지 잡을 수가 없었다.
드문드문 가정집이 보이는 산길로 접어들고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서야 목적지가 나왔다.
통나무집 한 채와 연갈색 벽돌로 지어진 단층 주택 하나로 꾸려진 반려견 장례식장은 앞마당이 넓게 자갈로 덮여 있었고, 뒤로는 화장 시설과 산뿐이었다.
단조롭고 투박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인테리어를 새로 했는지 깔끔하고 환한 분위기였다. 안내를 받아 대기실에서 장례 절차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추모실에서 잠깐의 의식을 마치고 화장만이 남았을 때, 재유는 감정을 추스른 듯 제법 담담한 모습을 되찾았다.
화장이 끝나기까지 40분 정도가 걸리니 통나무집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고 장소를 옮겼다.
재유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데크에 마련된 흡연 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진으로는 봤지만, 저 입술에 담배가 물려 있는 모습이 새롭게 생소했다. 앞으로 다가가니 담배를 내밀며 권하기도 했다. 우주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고 재유의 입속에서 흘러나온 희부연 연기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기분이 오묘하고 불편했다. 물론 성인인 재유가 기호품이라 할 수 있는 담배를 피우는 게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닌데도 묘하게 어색했다. 요리사니까, 그런 직업적인 청결을 따지려는 게 아니었다.
회사에만 가면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흡연자이고 밖에서 일로 만나는 사람들은 회의가 끝나면 담배부터 찾는 사람들 천지였는데, 재유가 담배 피우는 모습은 좀 보기가 그랬다.
평생을 가도 담배가 뭔지도 모르고 살 것 같은 말갛고 순수했던 이미지가 제 안에 콕 박혔나 보다. 마치 다섯 살 때부터 나에게 꾸벅 인사하던 이웃집 꼬마 녀석이 어느 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담배 피우면서 꾸벅 인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주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흔들며 혼자 조금 웃었다.
“너 바쁠 텐데 시간 많이 뺏었지.”
“아니야. 바쁜 거 없어.”
“그래도… 놀랐을 텐데.”
“놀라긴 네가 더 놀랐겠지. 그래도 너 혼자 여기 안 와도 돼서 다행이다. 너 혼자 했으면 더 힘들었을 거 아냐.”
“…….”
별로 대단한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재유는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벌써 경계를 하며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절대 선을 넘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아. 재유에게 자기는 여전히 유부남이었다.
우주의 사정을 모르는 그는 착실하게 잘살고 있는 누군가의 남편을 꼬여 낸 전 애인의 입장이라도 된 듯 잔뜩 주눅 들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해서 우선은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넌 요즘 무슨 일이 있는데? 신경 쓸 일이 있다며.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내가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어.”
아무래도 희지의 사정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다는 듯 재유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넌 잘 지냈지?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많이 어른스러워졌다. 뭐, 그때도 어른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반가운 안부를 묻듯이 말투마저 가벼워진 재유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검지로 재를 툭 털고 다시 필터를 빨아들인 그를 보자 코웃음이 샜다.
아까는 눈물을 달고서 나한테 매달릴 것처럼 쳐다보더니.
“이혼했어. 1년 좀 넘었나.”
“아… 그래. 미안, 힘들었겠네.”
그는 혼자서 무슨 상상을 하는지 턱 언저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이혼하느라 감정적으로 힘든 건 하나도 없었는데. 오히려 후련하게 도장 찍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며 빠이빠이 했는데.
우주는 뭐라 반박하려고 입을 달싹이려다가,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멈칫했다. 꺼내 보니 수연의 전화였다.
이혼 후 연락 한 번 안 했는데 이 상황에 전처의 전화라니. 우주는 이 절묘한 타이밍이 어이가 없었다. 진동을 죽이고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오늘 고마웠어. 바쁜 것 같으니까 먼저 가 봐. 난 버스 타고 가면 돼.”
재유는 야속하게도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 절반 이상 태운 담배를 항아리에 흙을 채워 만들어 놓은 재떨이에 비벼 끄고서 정말 괜찮다고, 더 신경 쓸 것 없으니 어서 가 보라는 표정으로 우주를 채근했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그냥 이대로 안녕, 잘 가, 하는 것처럼 미련 없는 행동과 말투였다.
그게 가장이라는 것쯤은 이제 알았다. 처음 헤어졌던 스무 살엔 몰랐지만, 공원에서 헤어졌던 7년 전에도 몰랐지만, 지금은 눈에 보였다. 그의 미련이.
“이렇게 외진데 버스가 언제 올 줄 알고 널 두고 가.”
“걱정 말고 가. 내가 애야?”
애가 아닌데도 애 같아서 그렇다. 안 보이는 데 내놓으면 또 엎어져서 울고 있을까 봐 불안해서. 담배는 내가 피우고, 담배 피우는 나한테 건강 생각해서 끊으라고 잔소리할 것 같은 네가 오히려 담배를 물고 섧은 한숨을 쉬니 애가 타서 그렇다고.
“나 하나도 바쁜 거 없고, 이 산골에서 너 혼자 집에 가는 거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그냥 내 차 타고 가. 나도 절반은 우유 보호자였는데 우유 마지막, 끝까지 지켜봐 줘야지.”
핸드폰이 또 울렸다. 우주는 수연의 전화인 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핸드폰을 아예 꺼 버렸다.
재유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거두지 못한 채 보고 있었지만, 우주는 재유의 등을 떠밀고 통나무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지금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표창장을 준다고 장관이 불러도, 거래처에서 거액의 계약서를 팔랑거려도 상관없었다. 당연히 이혼 후 처음 연락한 수연의 용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카페에 들어간 두 사람은 화장이 다 끝날 때까지 머리를 맞대고 재유 핸드폰에 든 우유의 사진들을 보며 잔잔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우주는 제대로 키운 적도 없는데 우유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보다 많았다. 10년을 넘게 끼고 산 재유는 오죽할까. 우유를 처음 데려왔던 거, 우유가 좋아하던 거, 우유와 놀러 갔던 거, 우유가 아프던 얘기까지 주고받고 나니 재유도 제법 마음이 진정된 듯 보였다.
화장을 마치고 넓은 앞마당에 작은 분묘를 만들었다. 몸이 작으니 묻혀 있는 영역도 작았다. 분묘 앞에 세워 둔 나무 팻말이 외로워 보였다.
그에게 우유는 먼저 떠난 부모보다, 애인이었던 자기보다도 더 가족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도 떠나는 순간까지 저와 재유를 이어 주고 갔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재유가 분묘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또 한 번 울었을 때, 우주도 코끝이 찡해졌다.
평생 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타임캡슐의 뚜껑을 기어이 열었다. 열었다는 행위 자체에 후회나 아쉬움은 없었다. 그 안에 든 게 중요한 거였다.
예전엔 탐스럽게 반짝거렸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빛이 바래고 낡아 버렸다. 당연한 거였다. 시간의 힘은 무시할 수 없으니.
그걸 들여다보면서 옛 추억에 잠겨 잠시나마 그 시절을 기분 좋게 회상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재유에 대한 마음까지 색이 바래진 않았다.
아직도 소중했고, 여전히 갖고 싶었다. 답답한 타임캡슐 안에서 꺼내 매일매일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자신을 발견했다.
애초에 담아 두기로 정한 건 내가 아니라 재유였으니까. 먼 훗날 다시 열어 볼 것을 기약하며 그 마음을 상자에 도로 집어넣기 싫었다.
재유를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으로 남겨 두고 싶지 않다.
이제 더는 누군가가 조사한 보고서로 그의 행적을 알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을 땐 연락해서 만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 가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오랜 친구로서라도, 그도 아니면 동창의 신분으로라도. 그냥 제 안에서 재유가 과거에서 벗어나 내 삶의 일부분이라도 함께해 주길 바랐다.
재유는 끝내 희지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오늘은 이것만으로 만족했다.
언젠가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그땐 재유와 희지가 곁에 있지 않을까.
***
“한재유 씨, 나오세요.”
다섯 명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유치장은 재유를 포함해 세 명이 들어앉아 있었다.
쥐색 벽에 테두리가 선명하고 희끄무레한 얼룩을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던 재유는 거듭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재유 씨, 전화하신다면서요. 빨리 나오세요!”
철장 밖에서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신경질 섞어 부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재유는 뒤늦게 헐레벌떡 일어나느라 몸이 기울어져 두 손을 바닥에 짚어야 했다. 무릎이 꺾이고 바닥을 개처럼 긁어 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옆에서 낄낄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자마자 고함을 지르고 유치장에 갇히는 게 부당하다며 난동을 부리던 덩치 큰 사내와, 한숨을 푹푹 쉬고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학하던 안경 낀 청년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보기 좋게 넘어진 재유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조롱의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저 모자란 놈보단 내가 낫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 두 개를 거쳐 경찰관을 따라간 곳은 빈 책상 서너 개와 철제 캐비닛이 있는 작은 사무 공간이었다. 들어올 때 압수됐던 자신의 핸드폰과 지갑, 담배와 라이터가 담긴 바구니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경찰은 그 옆에 사무용 전화기를 당겨 통화를 하라며 턱짓을 했다. 짧게 끝내라는 심드렁한 말도 덧붙였다.
재유는 핸드폰 전원을 켜서 영선의 어머니 번호를 찾아 액정의 숫자를 차례대로 눌렀다. 신호음이 끊이지 않아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연결된 전화로 미심쩍은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 지역 번호가 찍혀서 받지 않으려다 혹시나 싶어 받은 것이다.
“…저예요, 어머니. 재유요.”
-아이고, 깜짝이야. 난 누군가 했네. 이 시간에 그래, 웬일이야?
“…….”
걱정스러운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감정이 뜨겁게 북받쳐 올랐다. 재유는 떨려 오는 목소리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죄송한데… 희지한테 좀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으응? 무슨 일인데 그래. 넌 어딘데?
“제가 지금… 유치장에 있는데, 희지는 병원에 있거든요.”
-…….
돌이켜보면 지난 일주일은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살면서 경험해 본 적 없던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희지가 갑자기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경찰과 처음으로 대화를 해 봤으며 변호사 사무실도 처음 가 봤다. 자식 같던 우유가 세상을 떠났던 날엔 헤어진 첫사랑이 찾아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다음엔….
희지를 때렸다던 여자애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재유는 그놈과 만난 지 1시간 만에 경찰에 붙잡혀 현행범으로 체포됐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버렸다.
인생의 변곡점이 있다면 지금이 아닐까. 살아오면서 어쭙잖지만 나름대로 마음에 굳게 새기며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제 몫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은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제가 살아가야 할 태도를 정해 주고, 흔들릴 때에도 바로잡아 주는 이정표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신념이, 믿고 살아온 기준점이 한순간에 뒤집혀 버린 듯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혼란스럽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됐다. 이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내 삶엔 어떤 변화가 생겨날까.
“…죄송해요.”
수화기 너머에선 상황의 심각성을 판단하듯 조용하기만 했다. 다그치거나 수선을 피우지도 않았다. 침묵에 짓눌려 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듯했다. 평소라면 이런 민폐를 끼친 것에 죄스러워 뭐라 변명이라도 지껄였겠지만, 지금은 그만한 일을 살필 여력조차 없었다. 자기 자신조차도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지금 바로 올라갈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
재유는 북받치듯 눈물지으며 희지의 병원과 자기가 있는 경찰서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놓고 한숨을 내쉬는데 지켜보던 경찰관이 빨리 가자며 채근했다.
“죄송한데… 전화 한 통만 더 해도 될까요?”
“안 되는데. 하루에 한 통만 할 수 있어요.”
“딸이… 병원에 혼자 있어서요. 잠깐만이라도 통화할 수 없나요?”
경찰관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 전화기를 내주면서 물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딸이 몇 살인데요.”
“열다섯 살이에요.”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놀란 표정이 잇따랐다. 그렇게 다 큰 딸이 있냐는 반응이었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로 예상했을 것이다. 재유를 처음 본 사람들은 많이 쳐 줘야 30대 초반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중학생 딸이 있다고 하면 처음엔 놀라지만, 이다음의 반응은 두 단계로 발전한다.
‘어릴 때 사고쳤구만.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인물값 어지간히 했나 보네, 쯧쯧.’에서 시작해 ‘그래도 젊은 사람이 애 키우느라 고생하네.’로 끝난다. 지금 앞에 있는 경찰은 ‘딸도 있는 양반이 좀 참지, 애는 어쩌라고 이런 데 들어와 있나.’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재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희지의 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할머니가 갈 거라고, 아빠는 당분간 일이 생겨 못 갈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전해 줘야 하는데 마지막 번호 한 자리를 남겨두고 손이 멈췄다. 누가 손가락을 붙들고 있기라도 한 듯, 끝까지 번호를 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 희지의 목소리를 들었다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희지를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재유는 끝내 전화를 하지 않고 다시 문 두 개를 거쳐 유치장으로 돌아갔다. 입이 험한 덩치와 안경잽이는 벌써 안쪽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철컹, 등 뒤로 금속 문이 단단히 닫히는 소리에 어깨가 들썩였다.
***
희지를 때린 열아홉 고3 여자애는 송지현이라고 했다.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찾아온 건 우유의 장례 다음 날이었다.
병원 위치와 연락처를 경찰에서 알려 준 건지 직접 알아본 건지는 몰라도 가해자 가족이 피해자에게 너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재유는 또 한 번 분개했다. 합의는 절대 하지 않을 각오로 변호사까지 알아봤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허탈하고 어이가 없었다.
남자는 대기업 로고가 박힌 명함을 내밀며 저자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로 두면 병실 안까지 들어갈 기세길래 문전박대하다시피 쫓아내 버렸다.
가해자 가족이 찾아온 낌새를 차린 희지는 그날 일에 대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처음엔 ‘묻지 마 폭행’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학원이 끝나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다짜고짜 남자 한 명이 멱살을 잡고 골목 안쪽으로 끌고 가길래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려고 했는데, 남자의 뒤로 일행인 듯한 두 명의 남자들과 한 명의 여자가 더 나타났다고 했다.
손과 입이 결박당하고 조용히 하라는 협박을 듣고 나자, 여자가 남자들을 헤치고 나와 뺨을 때리는 것을 시작으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희지는 자기를 때리는 여자를 처음 봤지만, 누군지 알 것 같다고 했다.
한 달 전부터 카톡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이상한 메시지들이 왔었는데, 그 메시지의 발신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걸레라고, 더럽다고, 그딴 식으로 사니까 좋냐고, 그렇게 해서 얼마 받냐는, 입에 올리는 것도 치욕스러운 욕지거리가 주를 이룬 내용이었다.
처음엔 사람을 착각하고 잘못 보낸 줄 알고 무시하고 차단했는데, 발신 번호 없는 문자메시지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내 끈질기게 괴롭혔다고 했다.
재유는 자신의 무심함과 어리석음에 가슴을 쳐야만 했다. 엄마처럼 따르던 영선이 떠나서 외로운 거라고, 우유가 아파서 힘든 거라고 짐작하며 희지의 어두워진 얼굴을 가볍게 치부했었다.
“그 언니는 내가 진짜 원조교제 하는 줄 알고 있었어. 학교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니게 해 준다고 협박하면서 행동 똑바로 하고 다니라고 막 발로 차고…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에 얼굴도 차고…. 근데 아직도 모르겠어. 왜 그 언니가 날 그런 애로 생각했는지. 난 진짜로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아빠… 나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 죽겠어, 진짜.”
선뜻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재유는 아직도 퉁퉁 부어 있는 눈가로 뚝뚝 눈물을 흘리는 희지에게 ‘왜 아빠에게 말 안 했냐’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저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다. 아빠가 다 해결할 거라고, 왜 그랬는지 다 알아내고 네 앞에서 사과하게 만들고 벌 받게 해 줄 거라고 굳게 약속했다.
***
첫날 소득 없이 돌아간 가해자의 아버지에게선 만나고 싶다고 계속 문자가 왔었다. 재유는 경찰이 알려 주지 않는 자세한 내막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일단 만나서 묻기라도 해야 했다.
병원 1층 카페에서 만난 송진우는 40대 중반의 멀끔한 중년 남자였다. 일부러 차려입은 듯한 양복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입어 몸에 밴 듯, 걸맞은 매너를 갖춘 사람이 할 수 있는 차림이었다.
황갈색 코트와 미색 머플러를 반으로 접어 옆자리 의자에 걸쳐 둔 송진우는 자식이 친 사고의 합의를 위해 찾아온 사람답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침착한 태도로 안경을 검지로 끌어 올리며 차분하게 재유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일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깊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가식 같지 않았다. 주먹을 꼭 쥔 채 그를 외면한 재유가 됐다고 할 때까지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시선을 떨어뜨린 그는 그제야 나이다운 주름이 깊게 패였다. 그 표정엔 고뇌와 상심, 걱정과 두려움이 읽혔을 뿐 다른 사심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찾아와서 당황하신 줄 압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힘드셨겠습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깍듯한 송진우의 발언에 재유는 내심 차분해진 마음으로 안심하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어거지로 피해자의 잘못을 들먹이며 물타기를 하고 합의해 달라 난동을 부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제가 여기 나온 건 그쪽 딸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서예요. 그 외에 다른 말은 들을 것도, 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쪽에서 매너 있게 나와도 자식끼리 폭력이 오갔던 상황이었다. 재유는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회유는 필요 없다는 듯 합의에 대한 화두를 냉정하게 일축했다. 남자는 예상했다는 반응을 하고서도 난관에 부딪힌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희 애도 아직 미성년자입니다. 더구나 이런 일을 저지른 것도 처음이고…. 재판까지 가기 쉽지 않을 텐데 꼭 끝까지 가셔야 합니까.”
“저희 애한테 한 걸 보면 미성년자가 한 짓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겠던데요. 거기다 다른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작정하고 때린 건 누가 봐도 고의니까요.”
송진우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사적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더 거슬렸다. 이런 일에는 아무리 사람 좋은 척 얌전히 앉아 있어도 얼굴을 맞대는 것 자체로 기분이 상하고 심사가 뒤틀리는 법이다.
재유가 만난 변호사도 가해자가 미성년자이고 초범이니 기소가 되어서 재판을 하더라도 소년원은커녕 선고유예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걸 좌우하는 게 합의 여부라고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희지가 맞은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법은 불공평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동화 속에나 나오는 말이었다.
피해자는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아도 가해자 얼굴 한 번 보기 쉽지 않았고, 직접적인 사과도 받을 수 없다. 그 여자애가 희지를 찾아와 고개를 조아리지 않고, 구구절절 대필할 것이 분명한 반성문을 희지가 아니라 판사가 보게 되더라도 모든 건 합법의 범위였다.
그것이 억울해서라도 재유는 합의하지 않을 것이다. 재판이 끝나고도 그 여자애가 사과하러 오지 않는다면, 오더라도 억지 사과를 한다면, 이 비분강개한 일을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릴 생각이었다.
변호사와 상의하여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가해자의 적당한 정보를 실은 팩트를 청와대 신문고와 주요 커뮤니티에 뿌려 저절로 신상이 알려지게끔 만들 것이다. 그래서 제가 한 짓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참교육시키리라 마음먹었다. 안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고 길에서 개처럼 얻어맞은 내 딸이 너무 불쌍하니까.
“그쪽 딸은 왜 그랬답니까. 희지도 그날 처음 본 사람이라던데. 낼모레면 성인 될 여자애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기보다 약하고 어린 애를 그렇게 때렸대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진심으로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재유가 나이 지긋한 아저씨를 괴롭히고 협박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보세요!”
“…저도 자세히 듣진 못했어요. 지금 애 엄마한테 가 있는데, 입을 열지 않더라고요. 저희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습니까?”
“다만… 짐작 가는 일은 있습니다.”
재유는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죽이며 빨리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왜 자꾸 뜸을 들이는지 답답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송진우의 말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한재유 씨. 장운시에서 산 적 있으시죠.”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알고….”
난데없이 거기 살았던 적이 있냐는 질문에 경악부터 차올랐다.
“장인애라는 여자… 언제 만났습니까.”
재유는 그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듣지 않는 게 좋겠다는 예감이 무섭게 차올랐다.
“저도 장운시에 산 적이 있습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살았네요. 일 때문에 잠시 전근한 상태였어요. 와이프랑 애는 서울에 두고 혼자 방을 구해 회사를 다니고 있었죠. …그곳에서 잠시 만났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젊은 혈기였던 것도 같고 외롭기도 했고 가정에서 벗어나니 기분이 들떴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냥 가볍게 연애하는 식으로 만나던 여자였는데….”
그 여자가 인애였다고 한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팔걸이 끝을 붙잡은 재유의 손이 희게 질렸다. 지금이라도 저 남자의 입을 막고 싶었다. 뒷이야기를 듣지 않고 당장이라도 일어나 자리를 뜨고 싶었다.
“집안 사정도 어려워 보였고, 나이답지 않게 그늘진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서 저도 모르게 끌렸습니다. 솔직히 밥도 사 주고 여기저기 데려다주면서 기분도 내고 싶었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제가 유부남인 걸 알고 나서 연락이 끊겼지만요.”
점잖은 얼굴 거죽과 멋지고 중후한 목소리로 뱉어내는 이야기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처자식에 대한 지조도 내팽개치고 자기 좋을 대로 스무 살짜리 여자애한테 유부남인 걸 속인 채 갖고 놀다 버렸다는 얘기였다. 눈앞의 신사인 척하는 또라이는 생각보다 더 미친놈 같았다. 엄청난 과거를 제멋대로 미화시켜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눈빛도 간간이 드러냈으니까.
“이런 미친….”
재유의 얼굴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송진우는 비난을 감수한다는 듯이 덤덤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더 가증스러워 보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여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러고 한참을 잊고 살았는데… 1년 전쯤에 회사 일 때문에 다시 그쪽에 갈 일이 생겼어요. 그때 장인애 씨가 이미 고인이 된 지 한참이나 지났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우리 관계를 알고 있던 동료 직원이 아직도 그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처음엔 그냥 안타까웠어요. 잠깐 만났던 사이일 뿐이니까요. 그런데….”
얘기는 지금부터라는 듯 송진우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숨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사선으로 틀어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다시 재유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시선에 몸이 뻣뻣해졌다.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장인애 씨가 낳았다는 그 딸… 나한테 임신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지만, 왠지, 예감이 안 좋았어요. 마지막 만나던 날 평소보다 화가 나 있었고, 뭔가 말을 삼키는 것 같았던 그 얼굴이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발밑에 뭐가 걸려 있는데 모르는 채로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아만 보자는 거였는데… 전 그저 희지의 이름과 학교만 알아낸 상태였어요.”
그런데 우연히 희지에 대한 걸 딸인 송지현이 보고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모양이라고. 그래서 희지를 찾아가서 그런 일을 벌인 것 같다고.
“…….”
날카로운 장검이 살을 가르고 지나가면 이런 느낌일까. 베인 것 같지도 않은데, 살 틈을 비집고 피가 새어 나오는 걸 보고 나면 이미 늦었듯, 저 남자가 휘두른 칼이 얼마나 깊게 베어 들어왔는지, 처음엔 알 수 없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지껄이는 걸까.
재유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송진우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의 자세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생전 처음으로 사람 면전에서 상스러운 욕을 내뱉었다. 이성은 이미 깡그리 구겨졌다.
“야 이 개새끼야! 네가 뭔데 내 딸 뒷조사를 해. 순진한 어린 애 꼬셔서 바람이나 피운 더러운 새끼가…. 네까짓 게 뭔데 이제 와서 애 엄마를 욕보이고 희지가 어떻니 저떻니 떠들면서 지랄이야!”
재유가 흔들어 대는 바람에 안경이 삐뚤어지고 머리 모양도 망가졌지만, 그는 잠자코 멱살을 잡힌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숨을 크게 내쉰 그는 가면을 하나 벗어내고 될 대로 되란 식의 상기된 태도로 말했다. 금단의 말이었다.
“희지를 멀리서 처음 봤을 때 바로 알 것 같았습니다. 저를 많이 닮았더군요. 허락만 해 주신다면, 희지를 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에요. 전 이혼도 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희지한테 도움 될 만한 일을 해 주고 싶어요. 유전자 검사를 해도 좋을….”
거기까지 들었을 때 눈이 뒤집혀 버렸다. 그 뒤론 저보다 족히 열 살은 많을 점잖은 신사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남의 자식 두들겨 팬 네 딸 교육이나 똑바로 시킬 것이지, 어디서 내 귀한 딸을, 지 딸일지도 모른다고, 개소리를 지껄여-
평생 폭력을 위해 써 본 적이 없는 손이라 빗맞기 일쑤였어도 때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때 재유는 정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송진우가 죽어 버리길 바라는 것도 같았다.
한번 시작한 주먹질은 스스로 멈추지 못했다. 오히려 더 세게 때리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테이블 모서리에 손등이 찢겨 피가 흘렀다. 조준을 잘못해 바닥에 빗맞은 손에서 뼈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도 났다.
헛도는 주먹질이 성에 안 차 재유는 테이블 옆에 있던 장식장에 진열된 텀블러를 닥치는 대로 손에 쥐었다. 한계까지 팔을 들어 올려 송진우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자 둔탁한 타격음이 났다. 재유는 그러고도 몇 번을 더 팔을 휘저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분명 제가 때리고 있는데도 자기가 맞고 있는 것처럼 아팠다. 누군가 빨리 멈춰 주길 바라기도 했다. 바닥에 깔린 송진우의 머리에서 피가 번지고 텀블러에 묻은 피가 손을 더럽혔다. 제 피인지, 앞에 퍼질러 누운 개새끼의 피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희한하게 우주 생각이 났다.
단 한 번 인사불성으로 인애와 관계를 가졌을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흐릿하게 스쳐 가고, 인애가 찾아와 어떤 식으로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는지가 불분명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병실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희지가 갓난아기 시절부터 걸음마를 떼고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기까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후에,
우주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애가 생겼으니 헤어지자고 했을 때, 배신감에 충격받았으면서도 끝까지 가지 말라 붙잡았던 고통스러운 얼굴이.
며칠 전 우리 집에 왔을 때 사과라도 제대로 해 둘걸. 그때도 자신을 보던 그의 얼굴은 예전 그대로였는데. 따스하고 애틋하게 바라봐 주던 그 눈빛을 제대로 마주 보기나 할걸.
여러 명이 달려들어 재유의 양팔을 결박하고 송진우에게서 억지로 떨어뜨려 놓았다.
몸을 웅크린 채 콜록대는 송진우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바닥에 쏟은 피가 상당했다. 널브러진 머리에서, 찢어진 눈가에서, 뭉개진 입술에서 피가 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유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으며 경계하는 사람들, 수군대며 욕하는 게 분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재유는 좀 전에 짐승처럼 날뛰었던 제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번아웃을 겪었다.
송진우가 하는 말이 정말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내 인생은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였다.
무슨 정신으로 경찰서까지 끌려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뚝뚝한 형사 앞에서 끈질기게 반복하는 질문을 받고 소지품을 압수당한 뒤 유치장에 갇혔다. 그 뒤로 쥐색 벽에 테두리가 선명하고 가운데는 희끄무레한 얼룩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재유는 희지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 주고 싶었다. 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육아에 대한 부담은 강박이 되어 오히려 자신을 옥죄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이 시시각각 자기를 향해 좋은 아빠가 되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없는 아이니까 내가 더 잘해야 한다고. 그 말을 바위에 계명을 새기듯 가슴에 새기고 다녔다.
아빠니까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참고, 아빠니까 더 늦게까지 일하고, 아빠니까 아이가 원하는 걸 하게 해 주고, 아빠니까… 그와도 헤어졌다.
아직 어린 희지에게 아빠의 사랑이 남자 애인에게로 분산되는 걸 보여 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빠는 그래서는 안 되니까.
그런 제 인생을, 송진우가 부정했다.
그럼 안 되지. 내가 어떻게 지키고 키워 온 소중한 딸인데. 풍족하게 키우진 못했더라도 금지옥엽으로 애지중지 길러온 내 딸이다. 피가 섞이든 안 섞이든 하등 중요하지 않다.
우주를 잃었어도 희지를 키우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었다. 희지를 키우면서 불행했냐고. 아니, 전혀. 아무리 뼈 빠지게 희생하더라도, 다시 우주와 헤어지더라도 자신은 희지를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자꾸 우주 생각이 났다.
이미 다 지나가서 닳고 닳은 기억이 되었는데, 붙잡지 못한 것이 허망하기만 했다. 마음에 얼룩이 남아버렸다.
저 얼룩을 걸레로 닦으면 지워질까. 벽지를 새로 발라도 흔적이 남을까. 페인트를 칠하면 새것 같지 않을까.
글쎄. 벽을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방법 외엔 얼룩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멋모르고 지나온 과거가, 재유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한참동안이나 희지를 생각하고, 인애를 생각하고, 또 우주를 생각해도, 유치장의 밤은 너무나 길고 고통스러웠다.
***
8층 병동은 복도가 무척 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주는 다행히 곧바로 803호를 찾을 수 있었다. 손에는 쿠키 상자와 주스 세트가 들려 있었다.
6인실은 꽉 차 있었다. 환자 이름 중 희지의 이름을 발견한 우주는 열려 있는 병실 안쪽을 슬쩍 둘러보며 재유의 모습을 찾았다.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좀 전까지 점심시간이었는지 병실에선 희미하게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자신 있게 댈 만한 핑계는 없었지만, 하루 온종일 한씨 부녀 생각뿐이라 인내심이란 게 폭발해버렸다.
왜 여길 찾아온 건지 재유가 의아해하겠지. 일단 뻔뻔하게 나가 보는 수밖에.
우주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서 침대마다 하나하나 기웃거렸다. 날은 좋아서 창문으로 훤하게 햇살이 들어오는데 대부분 커튼을 치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베드 끝에 걸린 환자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오른쪽 가운데 침대에 ‘한O지’라는 이름으로 가운데 글자가 동그라미로 바뀐 팻말이 걸려 있었다. 커튼으로 꽉 막혀 있어 재유나 희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재유야.”
목을 가다듬고 이름을 불렀으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밖에 나갔나 싶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잠시 기다렸지만 재유가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커튼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시간대를 잘못 찾아왔나 싶어 우주는 잠시 나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복도로 나가려는데, 익숙하지만 누군지 바로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쪽도 마찬가지인지 갸웃거리며 우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 그, 맞지?”
“…아주머니?”
“맞네! 아유, 이게 얼마 만이니?”
뜻밖의 얼굴은 정말 반가웠다. 아주머니는 우주를 얼싸안고 군대에서 전역하고 돌아온 아들인 양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뻐하셨다. 우주도 얼떨떨했지만, 금세 입이 귀에 걸린 채 아주머니의 키에 맞춰 몸을 구부리고 정다운 손길을 받았다.
이렇게 반가워하실 줄 알았으면 종종 인사라도 드릴걸. 재유를 보러 그 집을 드나들며 아주머니의 밥도 적잖이 얻어먹었었는데. 지난 세월이 못내 아쉬웠다.
“잘 지내셨죠? 영선이는 잘 있어요?”
“응? 넌 모르나? 우리 영선이 올 초에 호주 갔잖어. 결혼식 때 안 왔었나?”
“아… 결혼한 건 알고 있었는데 호주 간 건 처음 들었어요.”
“그동안 연락 안 했나 보네.”
우주는 괜히 죄송해서 뒷목을 쓸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주머니는 주름만 조금 늘었다 뿐이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매로 사람 좋은 웃음을 보여 주는 게 호탕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럴 게 아니라, 잠깐만.”
커튼을 슬쩍 열어 희지의 상태를 확인한 아주머니가 우주의 등을 밀며 복도로 향했다.
“희지 지금 자고 있거든. 나가서 얘기하자.”
아주머니는 희지를 혼자 두고 멀리 갈 수 없다며 맞은편에 있는 공동 탕비실 쪽으로 데려갔다. 복도에는 걸터앉을 의자 하나 없었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산만한 통로에서 드문드문 대화를 이어 가야 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하다만. 어떻게 알고 온 거야? 혹시 너도 재유 연락받았어?”
“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지나던 길에.”
아주머니 말마따나 15년 만에 만났는데 둘러댈 말을 거짓으로 지어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리니 “으응, 그랬어?” 하는 미심쩍은 목소리와 알 만하다는 눈빛이 돌아왔다.
아주머니에게 ‘친구 딸이 아프대서 우연히 소식 듣고 와 봤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표정만 슬쩍 보고서도 무슨 마음으로 여기에 온 건지 다 아시는 눈치였다. ‘아직도 그렇고 그런 사이 맞지?’ 아주머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무 살 적 재유가 셋방에 틀어박혔을 때, 그 집 앞을 지켰던 우주를 딱하다 하시며 먹을 것도 주시고, 햇빛 피하라고 양산도 갖다 주신 분이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유의 딸을 돌봐줄 정도로 정이 깊은 사람이란 건 그때도, 지금도 간단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둘의 관계를 색안경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는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영선과 더불어 그런 분이 지금 재유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희지… 상태는 어때요? 괜찮대요?”
“에휴. 의사 말로는 다발성, 뭐라더라. 손상? 둔상? 그런 거라고 앞으로 한 2~3주 있다 퇴원하면 된다는데… 몸 다친 게 대수냐? 뼈 나간 데 없다 해도 저 어린 것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성한 데 없이 골고루 얻어맞았는데. 방금도 점심을 두 숟갈도 안 먹고….”
“누가 그런 건데요? 학교 친구가 그런 거 아니에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맞았다? 막연히 학교 문제겠거니 생각했던 우주의 예상이 빗나갔다. 전해 들은 사실로는 가해자가 여학생이라고는 했는데. 아직 수집되지 못한 정보에 답답함을 느낀 우주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아니래. 처음 보는 사람이었대.”
“그게 누군데요?”
“몰라, 말 안 해. 지 아빠 없어서 그런지 하루종일 한두 마디밖에 안 했어.”
안 그래도 내내 궁금하던 거였다. 재유를 보러 온 건데, 당사자가 안 보였다.
“재유는 왜 없어요? 어디 갔어요?”
우주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던 아주머니가 희지 걱정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재유 소식을 묻자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우주는 아주머니의 반응에 가슴부터 내려앉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유, 이게 무슨 일이라니 정말. 나도 어제 급하게 연락받고 올라온 거거든.”
“왜요, 아주머니. 어떻게 된 건데요?”
“아니 글쎄, 이놈이… 지금 유치장에 있다더라고.”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한재유와 유치장. 기가 막혔다.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단어의 조합이 한 문장이 되어 아주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엔 실없는 소리라도 들은 듯 코웃음을 쳤다. 아주머니가 뭘 잘못 알고 온 거라고, 어딘가 착오가 있을 거라 진심으로 믿으며 바라보는데, 아주머니는 시선을 조금 내리면서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곧이어 충격으로 입이 벌어졌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전신이 징징 울렸다.
“재유가 왜요?”
목소리가 떨렸다. 재유와의 재회가 점점 이상한 방식으로 꼬여 가고 있다. 무슨 일로 들어갔든 유치장에 갇혀 있을 재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희지 말로는 누구 만나러 잠깐 나갔다가 그 길로 안 들어왔다던데? 그 사람이랑 뭔 일 있었던 거 아냐?”
“그 사람이 누군지 희지는 알아요?”
“아니. 희지도 그건 모른대. 그나저나 걱정이다. 지 아빠 유치장에 있다는 거 알면 얼마나 속상할 거야….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키우던 개가 죽었다고 하루종일 강아지 사진 보면서 훌쩍거리는데.”
“재유는 뭐래요? 왜 거기 들어갔다고 말 안 했어요?”
“그런 얘긴 안 하더라고. 그냥.”
새로 입원한 환자가 있는지 병실 입구에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아주머니의 말이 끊겼다. 두 사람은 자리를 비켜 주느라 출입문에서 좀 더 멀어졌다. 닫혀 있던 커튼들이 하나둘 열리고 병실은 점점 더 번잡해졌다.
“재유는 전화로 그냥 희지 며칠만 좀 봐 달라더라고. 그 얘기밖에 안 했어. 나도 짐 챙겨 올라오느라 정신없었고.”
“그래요…. 참… 아주머니는 식사 좀 하셨어요? 여기서 식사 어떻게 해결하세요?”
“으응, 나 말고 간병인 하나 더 있는데 좀 있다 2시에 올 거야. 그때 먹고 오면 돼.”
2시부터 6시까지만 봐 주는 간병인이라고 했다. 나머지 시간은 아주머니가 고스란히 희지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병문안하기 좋은 시간인지 복도에 부쩍 사람들이 많아졌다. 병실 안쪽을 둘러보니 침대 머리맡에 붙어서 기도를 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느 환자 곁에는 유치원생 자녀 여럿이서 큰 소리로 핸드폰 동영상을 틀어놓기도 했다.
아직 커튼이 걷히지 않는 자리는 희지의 침대뿐이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병실에서 희지는 아직 잠들어 있을까. 잠은커녕 제대로 몸이나 회복할까.
재유를 볼 줄 알고 기대했던 마음이 무참히 깨졌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주머니를 봤으니 희지까지 보고 가고 싶었다. 우주는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먼저 아주머니께 간병인 구하는 일을 부탁했다. 몇 명이든 상관없이 희지 옆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24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낯선 간병인을 희지 곁에 두는 게 안쓰러웠지만, 환갑이 넘었을 아주머니 혼자서 20시간을 병실에서 수발들게 하는 건 너무 죄송한 일이다. 보조 침대에서 제대로 허리도 못 펴고 주무실 테니까.
내친김에 병실도 옮기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다친 희지는 좀 더 조용한 공간에서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특실이 비어 있어 바로 병실 이동이 결정되었다. 우주는 새로 옮길 1인실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아주머니께 식사를 하고 오시라 말씀드렸다. 그동안은 우주가 병실을 지키고 아주머니가 돌아오시면 특실을 옮기기로 했다.
“그나저나 재유도 없는데 이렇게 해도 되나 몰라.”
“제가 재유랑 희지한테 잘 설명할게요. 걱정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
다시 병실로 들어간 우주는 있을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커튼을 열고 들어가 앉을 수도 없었다. 희지가 아직 자고 있을지도 모르고, 깨어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나타난 ‘우주 삼촌’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만무했다.
하는 수 없이 우주는 다시 탕비실 입구 쪽에 서서 기다렸다.
우주는 이따금 병실 안을 힐끔거리며 못 받았던 부재중 전화들에 회신을 하고 업무 지시를 했다. 미룰 수 있는 일정은 뒤로 조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키가 껑충한 남자가 복도에 서성거리며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진득하게 머물렀지만, 우주는 개의치 않고 자기 볼일을 봤다.
그러다 소변이 급해져 화장실에 다녀왔다.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다시 병실 쪽을 들여다보는데, 커튼이 걷혀 있었고 희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지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이마에 드레싱을 교체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언제 돌아왔는지 아주머니도 계셨다.
“왔어? 이쪽으로 와, 우주야.”
처치를 끝낸 간호사가 물러난 자리에 아주머니가 우주를 불러들였다. 희지는 조금 자랐을 뿐, 기억 속 얼굴 그대로였다. 얼굴 곳곳에 피딱지와 멍이 내려앉아서 마음이 안 좋았지만. 일단은 반가운 마음을 숨길 순 없었다.
갑자기 맞닥뜨려 어색해할 희지와 우주의 사이에 아주머니는 훌륭한 완충제가 되어 주셨다. 아주머니의 반응을 보며 의아한 눈을 하던 희지가 어릴 적 잠깐 인연을 맺었던 우주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듯했다.
“우주 삼촌?”
“…희지야.”
자기를 부르는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에 우주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재유 딸이라 그런가. 더 예뻐진 것 같았다.
“희지도 우주 알어? 어떻게?”
“…인형의 집.”
“응? 인형, 뭐라고?”
의아하게 되묻는 아주머니와 달리 우주는 감격에 겨워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희지는 자신을 인형의 집을 사 줬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새록새록 그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귀엽고 야물딱지던 희지가 자신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하게 벅차올랐다.
“예전에 제가 인형의 집 사 준 적 있거든요. 그거 말하나 봐요.”
희지는 고개를 숙인 채 맞다는 의미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부기가 빠지지 않은 광대와 멍이 가시지 않은 눈가를 보니 제가 다 아픈 듯이 안타까웠다. 재유는 오죽 억장이 무너졌을까.
타박상이 전부라지만,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아물기는 시간이 꽤 소요될 터였다. 당장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정도로 회복된다 해도 눈가에 얼룩덜룩한 멍을 단 채로는 학교에 갈 수도 없을 것이다. 학교가 전부인 그 나잇대 여중생이라면 또래들 사이에서 구설수가 나오지 않도록 이번 사건을 잘 덮는 것도 중요했다.
누구나 겪는 격동의 사춘기를, 재유의 딸은 요란한 사건으로 힘겹게 견디고 있었다. 희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희지 아직도 치즈케이크 좋아하니?”
“…….”
“삼촌이 좀 사다 줄까?”
기억하는 건 둘째치고 아직은 어색한 모양이다. 희지는 입을 꾹 다문 채 이리저리 눈만 굴리고 있었다.
“그런 걸 뭘 물어봐. 그냥 사 와. 새 병실에 짐 옮겨놓을 테니까 글루 갖고 오고. 참, 올 때 커피도 좀 사 와라. 달달한 걸로.”
“네!”
아주머니의 핀잔에 우주가 우렁차게 대답하자 희지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병원 1층 카페로 간 우주는 조각 케이크를 종류별로 다섯 개나 골랐다. 아주머니를 위한 캐러멜 마키아토도 잊지 않았다.
그사이에 연락을 받았다. 김민수 실장은 재유가 유치장에 가게 된 경위와 경찰서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역시 예상대로 가해자 가족과 만난 자리에서 다툼이 있었다.
우주는 지난 5년간 ‘라이프서치’에 의뢰했던 내용을 처음으로 변경했다. 재유의 행적 대신 희지를 때린 가해자와 재유가 만난 가해자 가족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유치장에서 재유를 만나기 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새 병실로 돌아온 우주는 아주머니와 함께 희지를 돌보며 커피를 마시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잠시간의 따스한 평온이었다.
***
아침 일찍 경찰서로 찾아간 우주는 재유가 면회를 거부한다는 얘기만 전해 듣고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했다. 실망도 했지만, 타격은 크지 않았다. 그런 걸로 서운할 정도로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경찰서에 가야 재유를 볼 수 있다는 비현실감과 그런 곳에 그를 두고 혼자 나와야 하는 안타까움이 우주를 괴롭게 했다.
마음은 아팠지만 슬퍼할 여유는 없었다. 곧바로 회사로 향했다. 약속도 있었고, 그동안 못 했던 밀린 일 처리를 해 놔야 밤이 깊기 전에 병원에서 희지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었다.
회사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수연이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
-어디쯤이야? 나 도착했는데.
“다 왔어. 1분.”
-오케이.
익숙하게 코너를 돌아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댔다. 내리자마자 흰색 SUV에서 내린 수연이 우주를 부르며 다가왔다.
“딱 맞춰 왔네. 올라가자.”
두 사람은 1층 전시관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년을 함께 살아서인지 오랜만에 본 수연은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하고 편했다. 수연도 유별나게 반가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애초에 만나게 된 용건이 범상치 않기도 했고.
“내가 가도 되는데.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신경 쓰지 마. 나도 지나는 길이었으니까.”
주말이라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우주는 자신이 사용하는 오피스룸과 기획팀이 있는 6층의 카페테리아로 수연을 안내했다. 직원들의 휴게공간으로 쓰이면서 가벼운 회의가 수시로 이뤄지는 장소였다. 우주는 곧바로 캡슐 커피머신으로 다가가 커피를 내렸다. 수연은 바 테이블 위에 각각 다른 길이의 줄로 매달린 펜던트 조명을 보고 있었다.
수연의 전화를 받은 건 어제 희지가 잠든 걸 보고 병원을 나선 직후였다. 우유의 장례식에서 일부러 받지 않았던 수연의 전화는 다음 날에도 울려 댔고, 결국 전화를 받았던 우주는 그녀의 용건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입에서 재유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수연은 자신이 희지의 변호사라고 했다. 재유가 고용한 희지의 변호사가 바로 수연이었다.
옛사랑과 전처가 송사로 연이 되어 자기 앞에 다시 등장한 셈이다. 인생의 오묘한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함께 살았을 때도 우주의 사무실에 와 본 적이 없던 수연은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사무실 구석구석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디자인 회사라 그런가? 되게 산뜻하네. 로펌은 비싸게 인테리어 해도 딱딱하고 삭막하기만 한데.”
“선배,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커피가 든 머그잔을 건넨 우주는 맞은편에 앉아 곧바로 얘기에 집중할 자세를 취했다.
“알았어, 알았어. 다 얘기할 거야. 근데 우리 만난 거, 2년 만인 건 알지?”
수연은 급하게 용건부터 꺼내는 우주를 타박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우주는 그제서야 이혼 후 처음 만난 수연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수연은 이혼과 동시에 혼인신고를 마치고 6개월 후엔 사내아이를 낳았다. 집안 망신이라며 의절할 것처럼 날뛰는 부모를 잠재우고 아이가 100일이 지났을 무렵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남이 된 수연의 사생활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집에서 따로 살았던 정은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수연도 여기까지 찾아왔을 터였다.
“잘 지냈어? 아기는 6개월쯤 됐나?”
“7개월. 매일매일 전쟁이야. 이제 좀 알갱이가 씹히는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는데, 애 밥 잘 먹는 게 승소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더라.”
수연은 아기에게 밥 먹이는 일을 상기하는지, 만만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축성이 좋아 보이는 머스타드색 원피스에 흰 카디건을 오버핏으로 걸친 그녀는 옷차림부터가 달라졌다. 항상 딱 떨어진 칼 정장만 입고 다니고 어딘가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인상이었는데, 새로운 가정을 꾸린 지금의 모습은 한층 부드럽고 유해진 것 같았다.
“일은 언제 다시 시작한 거야?”
“한 2주 됐나? 학폭 시장 커질 거라고 그쪽 부서를 확대했거든. 아직 몸 푼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작은 건부터 담당하기로 해서 복귀했는데, 첫 사건으로 맡은 거지. 한희지 학생 폭행 피해 건. 알고 보니 학폭은 아니었지만.”
수연의 입에서 희지의 이름이 나오자 우주는 뺨을 굳히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난 이틀간, 보고 받은 것들 중에 그런 내용이 있긴 했다. 가해자 부모가 처음 찾아왔을 때 재유가 만남을 거부하고 곧바로 변호사를 고용해 소송을 준비한다는 것.
그런데 하고많은 로펌 중에 찾아간 변호사가 수연이었다니.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며 희지의 사건을 고민하는 모습을 생각할수록 기묘한 인연에 헛웃음이 났다. 마치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에 배경음악으로 메탈을 깔아 놓은 것처럼 어색하고 쌩뚱맞았다. 물론 재유가 로맨스고 수연이 헤비메탈이었다.
“처음 찾아와서 상담받는데, 어디서 분명 본 사람인 것 같은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은 안 나고. 내가 원래 잘생긴 사람은 잘 기억하는데 말이지. 눈빛이 새초롬하면서도 초연한 게 사연이 있어도 보통 사연은 아니겠구나 싶었거든. 결국 이름 듣고 알아챘지만.”
“…그랬어?”
수연과 같이 살았을 때 생활 공간을 분리하긴 했지만, 일상이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일이 바쁜 두 사람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서 서로 집에 있는 줄 모르고 핸드폰으로 연락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서로의 공간에 남의 집 드나들 듯 지낸 건 아니었다. 5년을 살면서 수연이 재유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
“알았어. 바로 본론!”
우주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수연은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투에서 장난기를 지웠다.
무거운 내용이라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하려던 의도였는데, 우주는 한재유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가볍게 접근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수연은 커피잔을 살짝 밀어두고 깍지낀 손을 바 테이블에 올리며 우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짚고 넘어갈 일을 확인하겠다는 태도였다.
“너, 앞으로 한재유 씨랑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
우주는 약간 기가 차서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그 얘기가 중요한가.
“우정인지, 옛정인지, 아니면 미련 때문인지 좀 헷갈려서.”
우주는 맥이 좀 풀려서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선뜻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조준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생각은 없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지금은 재유의 곁에서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네 상태 보아하니 미련도 맞고 아직 못 잊은 것도 맞네.”
“…….”
“하긴, 내가 알려 주기도 전에 벌써 두 사람 사건 알고 있었는데, 괜한 걸 물은 건가?”
우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무는 걸 무언의 긍정이라 여긴 수연은 자신의 짐작에 확신을 가진 듯 후련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의뢰인의 비밀을 발설하는 건데, 그 정도는 확인해도 되잖아. 그치?”
우주도 수연처럼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인정하고 나니 조금은 쑥스러워 엷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로 잔을 끌어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수연은 잔을 내려놓고 안에 든 검은 액체를 착잡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집한 정보를 풀어야 할 시간이었다.
“재유 씨 얘기 먼저 할게. 상해 사건이야. 그것도 특수 상해.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일방적인 폭행에다 도구까지 써서 그게 흉기로 받아들여질지도 몰라. 아마 기소… 될 거야.”
얼굴빛이 달라진 우주를 보자 수연의 목소리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도 재유가 유치장에 있는 건 알고 있어. 근데 누굴 때렸다는 거야?”
“희지 때린 학생, 그 아버지.”
“재유, 만났어?”
“응. 어제. 먼저 연락 왔었거든.”
수연은 복귀 후 첫 의뢰인이 우주의 옛사랑이라는 걸 알아차린 후 두어 차례 병원을 찾아갔었다. 희지의 피해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지만, 우주와 관련된 사람이라 약간의 사적인 호기심도 있었다.
수연이 보기에 한재유와 그 딸은 둘도 없는 부녀지간 같았다. 희지는 아직 폭행의 상처와 정신적 충격이 남아 있었지만, 여느 사춘기 소녀답지 않게 아빠에 대한 적대감이나 삐뚤어짐 없이 오롯이 아빠를 믿고 의지하는 듯했다. 한재유 역시 희지 앞에서는 든든한 아빠였다. 딸이 없는 곳에선 나약하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희지의 소송 건으로 상의할 게 있다는 그가 경찰서 유치장으로 면회를 와 달라 부탁했을 때 일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희지 변호사긴 한데 한재유 씨 변호사는 아니잖아. 그래서 유치장에서도 길게는 얘기 못 했어. 근데 아마 이 사건 때문에 희지 건도 흐지부지될 수도 있을 거야.”
“그게 무슨… 선배. 아까 희지 사건이 학폭이 아니라고 했지?”
“응. 아니었어. 그 전부터 톡이나 문자로 지속적인 괴롭힘이 있었는데, 희지 입장에서는 모르는 사람한테 오는 기분 나쁜 스팸문자 같은 거였지. 내용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고. 무슨 중2짜리 여자애한테 걸레니 꽃뱀이니…. 그 가해 학생이 희지가 지 아빠랑 원조교제 한 걸로 오해했다나 봐. 그래서 처음엔 문자로 괴롭히다가 나중엔 찾아가서 그렇게… 아무튼 영 이상해.”
희지와 원조교제. 재유와 유치장만큼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우주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직도 안개 속에 가려져 전체적인 윤곽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원조교제건 뭐건 희지를 때린 학생의 아버지를 만나서 죽도록 팼다는 건가. 복수해 주려고? 재유가?
그럼 애초에 변호사는 왜 고용한 걸까.
우주는 자식이 맞고 돌아온 재유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가해자 부모가 어떤 식으로 재유를 도발했는진 모르지만, 그가 이성을 잃고 사람을 때리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재유는 그 사람을 왜 그렇게 때린 거야? 법적 대응까지 준비했다면 가해자 측 만났을 때 가이드라인도 선배가 줬을 거 아냐. 근데 그렇게 사람을 때렸다고?”
“자세히는 몰라. 그것까진 말 안 해 주더라. 자기 사건에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희지 재판을 포기할 생각은 없더라고.”
수연은 우주의 기색을 살피며 긴장을 숨기지 않았다.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지금 일이 좀 꼬여 버렸는데, 상황이 역전됐어. 이제 한재유 씨 쪽에서 합의해 달라 매달려야 할 판이야. 근데… 합의를 해도 실형 나올 수 있어.”
유치장에 있다는 사실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실형’이란 말에 우주는 온몸의 혈관이 타오르는 듯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절대 안 돼.”
수연은 입술을 꾹 붙이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런데 상황이 별로 안 좋아. 둘 사이에 딸들 문제까지 얽혀 있어서 고의성 폭행으로 보일 수도 있거든. 피해자가 가벼운 부상 정도면 어떻게 비벼 볼 수 있겠지만, 폭행 정도가 심해서….”
“…….”
“아무튼 기소되기 전에 무조건 합의해야 돼. 만약 기소되면 합의 봐도 잘해야 집행유예고.”
“선배, 내가 뭐든 다 할 테니까… 합의하면 되지 뭐. 전관 변호사? 그것도 쓸 수 있으면 쓰고. 아니, 써야겠다. 한국처럼 돈이랑 인맥 가지고 법 주무르기 쉬운 나라도 없잖아. 안 그래?”
냉정하게 판단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걸 머리도 알고 가슴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재유는 도움이 필요했다.
“선배가 재유 몰라서 그래. 걘 누가 자기한테 화내거나 욕하면 내가 뭘 잘못했나, 그것부터 되짚는 애야. 그런 애가 감옥이라니, 말도 안 되지.”
하아, 탄식 같은 숨을 내쉰 수연은 전남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사는 동안 늘 무감하고 때에 따라 냉정하게도 보였던 그가 전에 없이 침착을 잃었다.
“불기소로 끝내 줘. 나도 최대한 알아볼 테니까. 합의도 최대한 빨리 해 볼게.”
“그래. 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
수연은 우주의 손에 손을 덮어 꽉 쥐었다. 냉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불안에 떨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한재유 씨, 참 강한 사람이더라.”
우주의 눈이 번뜩였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사소한 정보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거리는 사춘기 소년처럼 간절한 얼굴이었다. 수연은 실소를 흘렸다.
“처음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말이야. 그런 일 처음 당하는 걸 텐데도 참 의연하더라고. 물론 속은 알 수 없겠지만.”
자식이 맞고 들어오면 가해자와 쉽게 합의를 하거나 법을 잘 몰라서 고소할 생각도 못 한다. 법에 무지하거나 자식을 방관하거나, 보통은 그랬다.
“근데 그 사람은 딸의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고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 같았어. 책임감 있고 듬직한 아빠야.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된 것 같은데 참 대단해.”
“…맞아. 내가 제일 잘 알지.”
“난 아직 초보 엄마라 잘 모르지만, 20대 초반에 혼자 애 키운다는 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야. 강해진 반면에 포기하고 상처받은 것도 남들보다 배는 많았을 거고. 둘이 헤어질 때… 재유 씨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지?”
“…….”
“아마 널 포기한 이유도 그래서겠지. 난 재유 씨, 조금은 이해가 간다.”
“…….”
우주의 얼굴에 씁쓸한 회한이 서렸다. 그가 희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때였다. 재유를 사랑하니 당연히 희지도 품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이 핑계를 대며 두 번이나 자신을 밀어낸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의 재유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힘들고 버거웠던 게 아니었을까. 사랑의 감정조차 사치로 여길 정도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애인의 딸로 희지를 대하는 자신과 아빠인 재유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그러니 자신이 아무리 희지에게 최선을 다한다 생각했더라도 받아들이는 재유의 입장은 또 몰랐다.
희지를 예뻐하고 선물을 안겨 주는 자신을 보던 재유는 마냥 기뻐 보이지 않았다. 늘 아이 위주로 시간과 장소를 조정해 만나야 했던 걸 미안해하고, 때로는 부담스러워하고, 그렇게까지 안 해 줘도 된다며 사양하기 일쑤였다.
희지는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니까.
희지의 절반은 염우주가 아닌 장인애의 것이었으니까.
그게 재유의 가장 깊은 콤플렉스인 걸 우주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킬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
재유의 집에 걸려 있는 친모의 사진이라던가, 피부가 흰 것을 빼면 아이의 외모가 친모를 더 닮았다던가, 아이의 입맛이나 사소한 버릇이 친모와 닮았다던가 하는.
우주가 그런 사실을 알아갈 때마다 재유는 죄를 지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가 받아들이는 죄책감은 줄지 않았다.
재유는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했지만, 우주 앞에서는 아이의 존재가 마냥 떳떳하지 못한 것이 극복하기 힘든 딜레마였다.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재유의 생각은 달랐다. 둘을 한꺼번에 품고 살아가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희지를 홀로 키우는 일도 버거운데, 미국에서 돌아와 부모와 등지고 새 출발을 해야 하는 저까지 신경 쓰느라 육아에 소홀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또 그를 괴롭게 했을 것이고, 그 괴로움을 연인과 허물없이 나누지 못한 것에 속앓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희지와 나, 둘 사이에서 양자택일하게 만든 건 우주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때 좀 더 헤아려 줬더라면, 헤어지자고 했을 때 잠시 떨어져서 지금처럼 그를 지켜보기라도 했더라면,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정작 자신은 이진교 같은 사람을 옆에 붙여 두고 그의 불안을 부추겼더란 말이다.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방법이 설익었다.
제 감정에만 휩쓸려 상대에게도 같은 크기의 격류를 바랐었다. 마음이 병들어 가는 그를 보고도 뭐든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했었다. 그래서 혼자서라도 밀어붙이려 했던, 어설프고 이기적이었던 그 마음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신기하네.”
“뭐가?”
“내가 일부러 재유 찾아다니지 않았더라도 결국 선배 통해서 만나게 됐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고 우주는 웃었다. 기쁘기도, 슬프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껏 그를 잊을 수 없었으니, 그래도 그건 사랑이 아닐까. 아직도 이렇게 보고 싶고, 안타깝고, 뭐든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대체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걔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진짜 신기한 애야.”
“그러니까… 첫사랑이지.”
우주의 깊어진 눈을 바라보며 수연은 떠나간 누군가를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재유를 사랑하는 염우주는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가 지닌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아무리 원하고 매달려 봤자 절대 마음까지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진교도 포기하고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참, 선배 나랑 결혼했었던 거, 재유한테 얘기했어?”
중요한 기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수연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내가 왜 말하니? 이제 너도 알았으니까 네가 얘기하면 되겠네.”
수연은 번거로웠던 짐을 떠넘기듯이 말했다. 우주는 다행이라며 어린애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재유라는 사람은 정말로 염우주라는 인간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할 것 같았다.
“재유 씨, 힘들어 보이더라. 네가 옆에서 잘 돌봐줘.”
“고마워, 선배.”
***
우주는 주차장까지 수연을 배웅하고 다시 올라와 자신의 방에서 곧바로 밀린 일에 집중했다. 컨셉에 맞춰 사무 가구와 장식장의 소품들까지 정교하게 고안된 다른 곳과는 달리 순전히 실용적인 용도로만 꾸며진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회의록을 검토하고 기안서에 결재를 하고 견적서를 수정하며 시간을 보내니 해가 제법 기울었다. 일을 하고 났더니 머리가 차분해지며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재유와 관련해 골치 아픈 일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우주는 하나도 번거롭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흥분하고 있었다.
예감이 안 좋으면서도 좋았다.
오랫동안 괴롭게 했던 고질병이 있는데, 좋다는 약을 먹어 봐도 명의를 찾아가 진료를 받아도 낫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정말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우주는 서랍 맨 아래 칸을 열었다. 그 안엔 재유의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넘겨 보던 우주는 셋이서 찍은 사진이 나타나자 손을 멈추고 지그시 바라봤다. 언젠가 희지가 좋아하는 디즈니 특별전시회에 놀러 가서 포토존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막대사탕을 입에 문 희지를 가운데 두고 팔을 뻗어 핸드폰으로 찍었던 기억이 났다. 재유도 희지도 활짝 웃고 있었다. 사진 속 행복했던 표정처럼 우주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