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흐르는 물처럼(5권) (13/18)

5권

12. 흐르는 물처럼

* * *

2010년 5월.

오거리 골목 신축 단독주택에 들어선 이후, 재유는 다양한 이유로 흥분된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10년 가까이 찾아오지 못했던 이곳은 달라진 외관에도 불구하고 옛 기억을 살리기엔 충분했다.

비어 있던 옆집을 매매해 벽을 트고 멋들어진 새집을 지어 노후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영선의 부모님은, 오랜 시간 아들처럼 아껴온 재유와 그 딸의 방문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셋방과 수돗가, 재래식 화장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대문 옆에 여전히 자리한 살구나무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옛 구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넓어진 앞마당과 새로 생긴 텃밭에서 우유와 종종거리며 뛰어노는 희지에게 과거 아빠가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간간이 들려주기도 했다.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보단 살면서 즐거웠던 기억만 들춰냈다.

그 이야기 속에 아팠지만 다정했던 할머니, 어릴 때도 익살맞고 정이 넘쳤던 영선이 고모도 있었지만, 제일 많이 드나들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우주 삼촌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끼워 넣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헤어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약국 2층이 비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재유는 그 집 앞을 지나며 애써 좋았던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러니 미루고 미뤄왔던 영선의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도 10년 만에야 겨우 결심할 수 있었다.

그와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슴 한구석에 소중하게 간직되었고, 이따금 비집고 나와 그리움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터미널에 내려 옛집까지 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란 두려움보단 그와 함께 걷던 길을 걸으며 그가 보고 싶다는 그리움이 쓸쓸하게 떠올랐다 사라질 뿐이었다.

다시는 발붙일 일 없을 줄 알았던 장운은, 재유가 떠나올 때의 참담했던 기억이 세월의 기간만큼 상쇄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전보다 번화하여 달라진 풍경에 그의 입에선 감탄마저 새어 나왔다.

시내에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들어섰고, 수풀만 우거졌던 강변에는 산책길도 닦아 놓고 분수와 돌다리도 놓여 어엿한 생태공원으로 변모했다.

내친김에 학교까지 들러 볼까 하는 전에 없던 용기도 샘솟을 정도로 재유는 그와의 이별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소화해 냈다고 생각했다. 굳이 우주를 잊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잊으려는 노력이 무의미해서였다.

“아가, 밥 먹자. 재유 너도 빨리 와.”

“네!”

텃밭에 심긴 푸성귀들을 구경하던 희지가 아주머니의 부름에 포르르 현관으로 달려갔다. 재유도 그런 희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어느새 제 가슴께까지 자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점심 메뉴는 비빔국수와 불고기였다. 뜨끈한 계란찜과 상추쌈도 푸짐하게 차려져 보자마자 군침이 넘어갔다. 익숙하게 맛보던 배추김치와 물김치도 상에 놓였다. 아주머니가 철마다 김장 김치나 밑반찬을 택배로 보내 주시거나 명절 때면 차례 음식을 영선이 손에 들려 보내셔서 재유는 물론 희지 역시 아주머니의 손맛에 길들여져 있었다.

“희지 꺼는 여기 있으니까 이거 먹어.”

아주머니는 빨간 양념 대신 간장으로 버무린 비빔국수를 따로 내놓으시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명랑하게 대답한 희지는 익숙하지 않은 쇠젓가락을 열심히 놀려 국수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불고기를 싼 작은 쌈을 내밀더니 희지가 야무지게 받아먹자 껄껄 웃으시곤 젓가락을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년은 어버이날 코빼기도 안 비치는데, 느이라도 와서 얼마나 다행이냐.”

아저씨의 필터 없는 비꼼에 재유는 양심이 쿡쿡 찔려 입술을 말아 넣고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진작에 찾아뵀어야 했는데….”

“뭘, 이제라도 왔으니 됐지. 앞으로 자주 오면 돼. 네 부모 집이다, 생각하고.”

아주머니는 남편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 물을 따라 재유에게 건넸다. 아저씨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가슴팍에 달린 카네이션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러운 자세로 국수를 후루룩 삼켰다. 희지가 학교에서 색종이로 만들어 온 조악한 카네이션이 아저씨 내외와 재유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영선의 부모님이 희지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서울에 오실 때마다 영선의 집에 머무르실 때면 꼬박꼬박 희지와 함께 찾아가 인사를 시켰으니 아이가 서너 살 무렵부터 열 살이 된 지금까지 자라는 모습을 1년에 한두 번은 지켜본 셈이었다.

희지도 할머니, 할아버지란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고, 두 분도 친손녀처럼 희지를 아껴 주었다.

부모가 모두 떠난 뒤 성년을 맞았던 재유는 살면서 이어져 온 모든 불운을 희석시켜 준 ‘인복’이라는 게 있었는데, 단연 영선과 그 부모님이었다.

단 2년 동안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보잘것없는 인연이었지만, 아주머니는 또래였던 어머니의 죽음에 연민과 죄책감을 느꼈고, 남겨진 재유를 자식과 동갑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낌없는 모정을 베풀었다.

아저씨도 겉으론 툴툴댔지만, 이제껏 찾지 않은 재유를 대신해 어머니 산소의 벌초를 도맡아 해 줄 정도로 속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기일마다 제사상을 차리고 명절에 차례를 지냄으로써 벌초를 대신했던 재유는 감사의 의미로 내밀기 부끄러운 사례비를 드린 적이 있지만, 아저씨는 오히려 기분 상한다는 듯 재유의 손에서 봉투를 쳐내버렸다

그 후로 재유는 명절과 어버이날에 무리해서라도 용돈을 포함한 선물을 보내드렸었다. 질 좋은 과일이나 고기 세트, 커플 등산복이나 바람막이 같은 옷들이었다.

두 분도 거기까진 말리지 않으셨고, 재유 역시 다시는 못 해 볼 것 같았던 효도를 하는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곤 했다. 두 사람 성격을 꼭 빼닮은 영선이야말로 이제는 재유와 희지에게 없어선 안 될 정도로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하루 더 자고 내일 가면 좋을 텐데.”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알어. 희지 학교 가고, 너도 출근해야지.”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괜히 우겨 본 듯한 아주머니의 말투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재유는 머쓱함과 죄송스러움에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비빔국수를 입 안 가득 욱여넣어 턱을 느리게 움직였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학교는 안 가도 되지만, 재유는 출근을 해야 했다.

새 직장은 현준의 소개로 들어가게 된 호텔이었다. 현준은 자신이 몸담았던 호텔을 저주했지만, 오래 일한 만큼 그를 따르던 인맥은 여전히 그 호텔에서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을 그만둔 재유에게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고 선뜻 한식당 조리 파트에 이력서를 추천한 현준의 선심을, 당장 일이 급했던 재유는 기껍게 받아들였다. 염치가 없긴 했지만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월급쟁이 신세에 가릴 것도 없었다.

아직도 이따금 연락이 닿아 한 번씩 얼굴을 보는 현준은 특유의 꿰뚫어 보는 눈빛으로 한마디씩 던지곤 했다.

‘요즘은 연애 안 하나?’

뜨끔한 표정으로 얼버무리면,

‘너무 몸 사리지 마. 그러다 또 좋은 사람 놓치면 어떡해.’

이런 식으로 이별을 짐작한 조언을 별 사심 없이 던졌다. 현준이 눈치챌 정도였으니 주방 내에서 우주가 애인인 걸 알았던 직원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었다. 우주에게 주변에 알려지는 게 두렵다고 했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어머니 산소 갔다 바로 갈 거야?”

“아뇨, 여기저기 좀 둘러보고 가려고요. 강변에도 가고 학교에도 가 보고요.”

“마침 잘됐네. 요즘 산나물축제 한다고 볼거리 좀 있을 거야. 희지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시청에서 다른 지자체를 의식해 만들어 낸 축제에서는 지역에서 나는 산나물뿐 아니라 온갖 봄나물들을 전시해 팔고, 으레 축제에서 볼 수 있는 먹거리 천막들과 축하 무대, 퍼레이드 같은 행사도 있다고 한다.

한적하게 강변을 거닐어 보고 싶었던 바람이 깨지긴 했지만, 희지를 데리고 가기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참, 오늘 염 회장도 온댔나?”

문득 생각난 듯 툭 던진 아저씨의 한마디에 국수를 먹던 재유의 손이 멈칫했다.

“그 왜, 너 다녔던 공장. 규신기업 염 회장. 오늘 첫날이라고 테이프 끊으러 올걸?”

애써 밀어 두었던 기억이었는데, 불쑥 우주 아버지의 근황을 알게 되자 가슴이 철렁했다. 사장이란 직함이 업그레이드된 걸 보니 회사의 규모가 커진 건가.

몰랐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알고서도 축제에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젖은 향수는 과거의 오욕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에 의해 순식간에 퇴색되었다.

“그 회사가 축제 후원하기도 하고 시장이랑 친분도 있으니까. 그 양반, 요즘은 아들한테 회사 맡겨 놓고 여기저기 얼굴 비추는 거 취미 들렸나 봐. 저번에 시민 체육대회에서도 음료수 돌리면서 사람들한테 악수하고 갔다던데?”

아저씨는 규신기업과 연고는 없지만,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철물점을 운영하며 쌓아 온 다양한 인맥으로 그만한 정보는 손쉽게 알 수 있는 처지였다. 염 회장이 어떻구 저떻구, 꼭 아랫사람 대하듯 폄하하는 어투에 재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 ‘아들’이라는 게 우주를 말하는 건지, 우혁을 말하는 건지만 궁금할 따름이었다.

재유는 더 이상 염 회장에 대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 부러 희지의 식사를 돕는 척 부산스럽게 행동했다.

“너, 그 아들이랑 아직도 연락하냐?”

아저씨는 과거 우주와의 소문을 약간은 의식한 듯 목소리를 한 톤 낮춘 채 살짝 떠보았다. 남의 감정을 살피는 데 서툴던 아저씨가 그리 말할 정도니 아직도 이 지역에선 공공연하게 떠도는 스캔들인 것 같았다.

재유는 난감함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우물거리는데,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팔을 찰싹 때리며 눈을 부라렸다.

“아이고, 그만 떠들고 국수나 마저 자셔. 상관도 없는 사람 얘기를 왜 자꾸 들먹여, 들먹이길?”

“아니, 나는 그 양반이 둘째 아들 결혼식 앞둬서 그리 요란스럽게 행차를 다니나 해서 그렇지. 아니면 다 늙어서 정치판에 기웃거리려는 수작인가 싶기도 하고.”

변명조로 둘러대는 아저씨의 얘기에 재유는 갑자기 숨이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호흡을 잊은 것처럼, 들이쉰 숨이 목구멍 안에 고여 있었다.

“괜찮아? 아빠 얼굴 파래.”

희지의 걱정스러운 기색에 막혔던 숨이 터지자 기어이 사레가 들렸다. 거세게 압박하는 흉통에 켁켁거리며 목을 감싸고 몸을 수그리면서도 재유는 시뻘게진 얼굴을 들어 희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이고, 얹혔나 보네, 아주머니가 혀를 쯧쯧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유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막혔던 숨이 기침과 함께 뿜어져 나오자 눈에도 물이 맺혔다. 한참을 가슴을 쥐며 괴로워하던 재유는 간신히 숨을 정상으로 되돌리며 눈가의 흔적을 훔쳐 냈다.

“괜찮아요. 아빠 괜찮아.”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애써 웃어 보이자 세 사람은 안도한 듯 다시 식사를 했다. 재유는 여전히 걱정스럽게 안색을 살피는 아주머니를 안심시키려 손을 꼭 잡았다 놓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식탁의 화두는 다시 희지에게로 돌아갔다. 노부부는 학교생활에 대해 관심 있게 물었고, 희지는 곧잘 대답하며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종알대며 비빔국수를 조금씩 씹어 삼켰다.

재유는 아려 오는 가슴을 억누른 채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미 맛을 잃어버린 불은 국수를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놓치길 반복했다.

염 회장의 둘째 아들이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우주가 여자와 결혼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과거의 상상을 비웃듯 맞닥뜨린 현실은 허무했다. 이미 놓아 버린 인연이었지만,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덩굴처럼 재유를 휘감았다.

평생 저만 보고 살아갈 거란 기대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결혼 소식이 빨랐다. 차라리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았으련만. 여자를 안을 수 없는 우주는 게이의 삶을 포기하고 부모가 바라던 안정적인 길을 선택한 것인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재유는 최대한 침울한 티를 내지 않으며 식사를 마치고 영선의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희지와 함께 어머니의 산소를 다녀온 후 곧장 터미널로 향했다.

축제에 갈 줄 알았던 희지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서울로 돌아가면 갖고 싶어 했던 게임팩을 사 준다는 말로 조그마한 입을 원래대로 집어넣었다.

떠나기 위해 찾은 터미널은 처음 도착했을 때의 긴장과 설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장운에서 그와 보냈던 추억들이 빛바래다 못해 시간에 마모되어 부스럼 같은 녹이 생겨 버린 듯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어차피 가슴에 묻은 사람, 근황 좀 알았다고 달라질 건 없다는 걸.

그런데도 재유의 머릿속에는 우주를 찾아가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고, 정말 그 결혼 할 거냐고 꼴사납게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지우기 힘들었다.

정말 날 잊은 걸까. 전부?

가당찮게 삐져나오는 추측을 억누르지 못한 재유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확인해 볼 수도 없는 현실을 애써 더듬고, 짐작하고, 오해하며 아이가 잠든 틈을 타 소리 없이 빙충맞게 웃고 울었다.

***

우주가 집에 들어섰을 때 처음으로 느낀 점은 ‘달라진 게 없다’였다. 외관과 정원은 물론 내부의 구조나 가구, 커튼 색이나 소품 하나하나까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스물두 살에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였다. 그건 우주로 하여금 약간의 향수와 억누른 죄책감, 때늦은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수자가 오랜만에 돌아온 둘째 아들을 수선스럽게 맞이했을 때, 우주는 어머니의 얼굴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수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1년에 한두 번은 집 안 분위기를 바꾼답시고 가구를 교체하거나 없던 문을 만들고 페인트를 새로 칠했으며, 계절에 맞는 색으로 온 집 안의 커튼을 바꾸는 게 취미였던 그녀였다.

한데 지금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인 채 낡아 있었고, 곳곳을 장식하던 크고 작은 화병들은 텅 비었으며 정원에 피어나던 봄꽃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우주는 어머니의 변화를 안타깝고 애달프게, 또 조금은 초연하게 받아들였다.

과거, 자신의 사무실에서 아들에 대한 원망을 쏟아낸 뒤로 그녀는 지나치리만큼 우주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했었다. 할 말이 목 끝까지 차 있는 얼굴로 우주를 대해 왔지만, 일상과 평범을 넘어선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수자가 달라진 것은.

수자는 둘째 아들에게 원하는 것들을 기나긴 인내로 묵혀 두었다가 때가 왔을 때 가차 없이 ‘어머니의 마지막 바람’이라는 형태로 우주를 옥죄었다. 그녀는 천하고 되바라진 동창생과 헤어진 걸 칭찬했고, 여자가 아닌 남자가 좋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주선했으며 그녀가 보기에 유복한 집안의 순종적으로 보이는 여자들의 사진을 갖다 바치며 결혼을 종용했다.

수자의 바람은 일정 부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한 달 뒤 부동산 재벌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를 둔 둘째 며느리를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녀로서는 의외의 성과였다. 아무리 고매한 집안의 여자와의 중매 자리를 만들어 와도 단 한 번도 선 자리에 나서지 않았던 우주가 먼저 결혼을 하겠다며 연락을 해 왔으니까. 손자는 포기하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우주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정만 이룬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저도 살다 보면 마음이 바뀌어 아이를 원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오랫동안 골몰했던 고민이 해결된 기념으로 수자는 실로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 달 전부터 집안 제사에 우주를 부르려 하루가 멀다고 눈물 바람으로 애원한 결과였다. 우주는 상견례까지 치렀으니 집에는 오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의 염원을 하나 더 이루어드렸다.

“다 가신 거죠?”

우혁이 계단에서 내려와 거실로 들어서며 물었다. 얼마 전 태어난 둘째 아이를 2층에서 아내와 함께 재우고 오는 길이었다.

“그래. 느이 셋째 작은엄마가 어찌나 우주 와이프 될 사람에 대해서 물어 대는지, 아주 혼났어. 결혼식 와서 보면 될걸. 주책이지 뭐니?”

수자는 손에 커다란 쟁반을 받쳐 들고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막내 삼촌이 쑥차를 가져왔는데 한번 마셔들 봐. 향이 기가 막혀. 우혁아, 우주야. 너희도 어서 이쪽으로 와.”

창섭은 소파에 앉아서 주변의 소동엔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태도로 석간신문에 파묻혀 있었고, 우주는 멀찍이 떨어진 창가에 서서 무료하게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자는 무뚝뚝한 삼부자들 틈에서 30년 넘게 집안 분위기를 쥐락펴락했던 내공을 발휘해 사내들을 테이블로 모이게 했다.

창섭의 아버지 제사였던 오늘, 미국에 있는 둘째 내외를 제외하고 8남매 식구들이 한바탕 떠들썩하게 제사를 치른 덕에 사람들이 빠져나간 넓은 집 안은 기묘한 적막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안에서 수자의 고조된 목소리만이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내부의 정적을 갈랐다.

“쑥차 어때, 우주야? 나도 오랜만에 마셔 보는데, 괜찮지? 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게 얼마 만이야. 엄마 오늘 기분 너무 좋다.”

“…네.”

단답으로 대화를 끊은 우주의 침묵이 이어졌다. 8년 만에 모인 자리이기도 하거니와 우주의 결혼에 대한 얘깃거리는 친척들 사이에서 이골이 나도록 떠들어 댔으니 가족이면서도 그들 사이에 공통으로 대화할 만한 주제는 별로 없었다.

수자는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 수다를 늘리기 시작했다. 쑥차의 효능에서 시작된 잡담은 제사상 차리는 데 들었던 자신의 수고와 우혁의 둘째 아이에 대한 친척들의 칭찬, 큰며느리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 우주의 처가 될 수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제 집안에 새 식구도 들어올 테니까 집안 단장 좀 새로 하려고. 가구도 바꾸고 정원도 한번 싹 갈아엎어야겠어. 커튼은 무슨 색깔이 좋을까? 우주야. 수연이는 무슨 색 좋아해? 알려 주면 엄마가-”

“아뇨, 어머니. 그 사람은 앞으로 여기 안 올 겁니다.”

“…….”

“저도 마찬가지고요.”

“…….”

“…….”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던 우주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 어딘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아들의 차가운 목소리에 기분 좋게 떠들던 수자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운한 마음에 우주를 나무라려는데, 창섭의 신문 팽개치는 소리에 불안한 얼굴로 입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유학비 갚는다고 설치더니, 그럼 그렇지. 네 눈에 부모는 안중에도 없는 거냐?”

“왜요, 돈 좋아하시잖아요. 유학비 운운하신 것도 아버지가 먼저고요. 그리고 자식을 안중에도 안 두는 건 두 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창섭은 코웃음을 치며 우주를 향해 눈을 매섭게 치떴다. 우주는 아버지와의 기 싸움이 귀찮다는 듯 흘긋 한 번 쳐다보고는 미지근해진 찻잔을 들어 올려 의미 없이 엄지로 쓸어내렸다.

“그럼, 식만 끝내고 앞으로 식구들하고 왕래도 안 할 거라는 거냐?”

“어차피 그동안 살갑게 얼굴 보고 산 것도 아닌데 달라질 거 없잖아요. 저도 아버지처럼 돈으로 다 해결했으면 좋겠네요. 얼마가 들든,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만 있다면, 어머니 아버지와 안 보고 살았….”

“염우주!”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분위기를 관망하던 우혁이 큰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 어머니 아버지도 그만하세요. 우주 얘기는 천천히 들어도 되니까.”

어긋난 가족관계에 아슬아슬한 구심점이 있다면, 그건 우혁이었다. 장남의 한마디는 대치 상황을 갈무리하기 충분했다.

회사에서 차근히 영역을 확장하며 사업의 판을 키우는 우혁에게 간섭을 거둔 지 오래인 창섭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우주 역시 이 집에서 유일하게 기댈 곳인 형의 말에 찻잔을 내려놓고 정돈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여기 온 건, 당부드리고 싶어서예요. 두 분께서 바라는 결과를 얻으셨으니, 앞으로 제 인생에 관여하는 건 이제 멈춰 주세요. 제 삶에 끼어드는 거, 이제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참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낮게 읊조린 우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미련 없이 홀가분한 태도였다. 창섭은 혀를 끌끌 차며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우주도 얼굴을 굳힌 채 현관으로 향하는 걸 사색이 된 수자가 뒤따랐다.

“우주야, 자고 내일 가야지….”

“어머니, 관두세요. 제가 얘기해 볼게요.”

우혁은 우주를 붙잡으려던 수자를 조용히 밀어내며 곁으로 다가왔다.

“형이랑 잠깐 맥주 한잔하자.”

“형, 나….”

“잠깐이면 돼. 올라가자.”

술상을 올려준다는 수자를 만류하고 우혁은 우주를 데리고 3층으로 향했다. 과거 형제의 방이 있던 곳이었다. 우혁은 총각 시절 쓰던 자신의 방 왼편에 있는 작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 있는 맥주캔 두 개를 들고나왔다.

우주는 형을 기다리는 동안 복도 맨 끝에 있는 자신의 방을 힐끗 바라보았다. 처음 재유를 데리고 왔을 때, 집 규모에 놀라 두리번거리던 순진한 얼굴이 떠올랐다. 우주는 생각을 털어내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조소를 지었다.

“이쪽으로 와.”

우혁이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어린 시절 형제들이 비눗방울 놀이나 팽이 돌리기를 했던 곳이었다. 좀 커서는 가끔 얘기를 나누거나 우혁이 밤에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직은 서늘한 밤공기가 스산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정원 곳곳에 심어 둔 조명이 사철나무를 비춘 모습은 기괴해 보였다. 푸르게 보이지만, 이미 늙을 대로 늙어 생기를 잃은 나이 든 나무는 꼭 제 부모를 떠올리게 했다. 우주는 말없이 맥주캔을 열었다.

“너… 결혼 왜 하려는 거야. 너랑 결혼할 여자, 서로 좋아해서 하는 거 맞아?”

“그럴 리가 있어.”

우주는 시답잖은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아까 말한 그대로야. 날 사랑해 마지않는 모친께서 절절히 바라는 일이니까. 살면서 한 번쯤 비위를 맞춰 줘야 될 의무를 느꼈다고나 할까.”

“…….”

하, 우혁이 내쉰 한숨이 깊었다. 그는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바라보듯 우주를 보았다.

“벌써 결혼식 준비도 꽤 진행된 것 같은데. 그쪽에서도 알아? 너 이런 마음으로 결혼하는 거.”

“설마.”

우주는 설명하는 게 힘에 부쳐서 맥없는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형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속여서 결혼하고, 그 여자 인생 망칠 거라 생각하는 거야? 결혼 얘기는 선배 입에서 먼저 나왔어. 나도 결심하기까지 고민은 좀 했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우주는 대답 없이 맥주를 몇 모금 더 들이켰다. 우혁의 말대로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양가 모두 우주와 수연의 결혼을 거의 포기하고 있던 터라 어른들은 반색을 하며 곧장 일을 진행시켰고, 상견례부터 택일에 이르기까지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혼하기로 한 정수연은 미국에 있을 때 만난 인연이었다. 한국에서 법대를 마치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뒤늦게 미국에 온 그녀는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진교를 통해 친해졌다. 공공연히 소문이 돌았던지라 수연은 우주와 진교가 게이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별다른 반감 없이 섞여들어 친하게 지냈던 그녀의 곁엔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 그땐 자세히 몰랐지만, 나중에 수연에게 들은 바로는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해 남자와 함께 도피성 유학을 온 거라 했다.

수연의 남자가 선천적 지병으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진 채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는데, 5개월 전 그녀는 뜬금없이 우주의 회사를 찾아왔다. 손에는 수자가 뚜쟁이들에게 돌렸을 우주의 프로필이 들려 있었다.

대뜸 찾아온 그녀는 ‘결혼할 생각이면 나랑 하자’고 했다. 우주는 코웃음을 치며 밥이나 한 끼 하고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수연은 포기하지 않았고, 구구절절하고 설득력 있는 언변에 그녀의 처지가 저와 참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혼식’은 필요하지만, 결혼 생활에는 관심 없는 듯한 수연의 태도는 낯설고도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수연은 함께 알고 지냈던 진교를 통해 우주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자식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아들을 사지로 밀어붙이는 부모가 있었으며, 일 외에 어느 것에도 관심 두지 않는 회의적인 우주의 모습은 그녀가 찾는 결혼 상대로 딱 들어맞았다고 했다.

수연의 부모는 제 부모와 비슷한 면모가 많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돈밖에 없는 남자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고, 자식이 태어나면 출생부터 노후까지의 인생 스케줄을 짜 놓은 뒤 고분고분 따르도록 조련하며 단계별로 이룩해 나가는 재미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수연이 남자를 잃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수자처럼 곧바로 심리 상담과 함께 맞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 무렵 이미 제 인생에 다시는 사랑이 없을 거라고 결론지은 수연은 극렬하게 어머니와 맞섰지만, 이미 그녀는 한평생 말 잘 듣는 마마걸로 길들여진 상태였다.

‘난 내 가족이 정말 싫고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나에게 목매는 엄마가 불쌍했거든. 자식이 뭐라고. 자식 인생이 제 인생이 되어 버린 엄마가 미련하고 한심했어. 그러다가 또 그깟 결혼이 뭐라고 그거 하나 못 해 주나 싶더라? 나 하나로 인해 다른 형제들한테 폐 끼치는 것도 싫었고. 집안 분위기가 정말 좆같았거든.’

조목조목 저와 결혼해야 할 이유를 대는 수연의 모습은 어딘지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다. 가족에게 상처받았으나 그녀는 끝내 저버리지 않고 가족의 말을 따르며 또 한 번 상처받는 것 같았다.

‘너도 나랑 비슷하지? 너도 보통 집안은 아니니 널 가만두진 않을 거 아냐. 세상 사람 모두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은 이상, 네 인생에 결혼 한 번은 해야 할 거야. 뭐 물론 커밍아웃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네 가족들이 받을 상처는 차라리 연 끊느니만 못할 거고. 난 네가 게이인 것도 알고 못 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아. 나 역시도 죽을 때까지 떠난 사람 잊지 못할 거고. 이미 선 시장에서 네 프로필 나돌고 있어서 나랑도 언젠가는 마주칠 예정이었어. 네 부모 형제 평생 안 볼 작정한 거 아니면, 질질 끌지 말고 나랑 결혼해.’

우주는 아무리 수자가 맞선을 종용해도 나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어머니의 방식은 강압적인 아버지에 비해 유하기 그지없었지만, 늘 저자세로 제 눈치를 보며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우주의 마음 한구석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아버지야 안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각오도 굳혔는데, 어머니는 달랐다.

언제나 자상하고 상냥했으며 끝없이 자식을 믿고 사랑해 주었던 수자는 우주가 끝내 저버릴 수 없는 대상이었다. 우주는 그런 어머니에게 지치지 않고 설득을 시도했었다.

난 다른 사람처럼 살 수 없다고, 재유를 떠나서 평범하게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고, 여자를 상대론 어떤 성적 흥분을 느낄 수 없고 서지도 않는다고 바닥까지 내보였지만, 수자의 반응은 맹목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 것 외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이비 광신도처럼 행동했다. 아들의 부정을 부정하고, 제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우주를 몰아세웠다.

그녀만의 친절하고 상냥한, 우주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마침내 설득을 포기한 우주는 어머니와 결코 합쳐지지 않을 평행선을 유지한 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때 수연이 나타난 것이다.

“선배도 사정이 있어서 계약 결혼 비슷하게 하기로 한 건 맞아. 그쪽 집도 사정이 비슷하거든.”

우혁은 우주의 담담한 고백이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마지막 말인 것 같았다. 동생에게선 앞으로의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남은 맥주를 쓰게 들이키던 우혁은 걱정과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그런 결혼이 얼마나 가겠냐? 안 하느니만 못한 껍데기 같은 결혼이 행복할 수 있겠어?”

“그렇다고 가족 전부를 버릴 수는 없잖아.”

“…….”

“엄마 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럽긴 한데… 그렇다고 계속 피하기만 하면 형이 상처받는다는 걸 깨달았어.”

우주는 눈을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체념에 우울을 섞은 우주의 목소리가 찬 밤공기를 타고 쓸쓸하게 전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상처받는다니.”

“내가 너무 엇나가서 부모님이 형한테 더 심하게 매달렸잖아. 형이 느꼈을 갑갑함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되고. 처음에 재유랑 그런 사이인 거 밝혀졌을 때, 아버지 회사에서 공공연하게 내가 게이라고 소문 나돈 거, 알고 있었어. 나야 이제는 그런 시선이나 편견에 상관 안 하지만, 형이나 부모님은 견디기 힘들겠지.”

우혁은 안경을 벗어 손바닥으로 두 눈을 넓게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형 나중에 회사 물려받아야 되잖아. 그래서 한 번쯤 내가 평범하게 사는 모습 보여 주고 싶기도 했어. 이게 내가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도이고 보답이야. 나도 내가 정말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뜻하지 않게 선배가 나타나서 이렇게 돼 버린 거야. 사람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지만,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살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나. 우혁은 제 동생이 스스로는 깨고 나올 수 없는 유리 상자에 자신을 가둔 것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밝고 꿈 많던 어릴 적 동생의 모습은 지금 우주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난 선배랑 잘해 나갈 거야. 비슷한 면이 많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형.”

“…너 사귀던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그 사람이랑도 헤어진 거냐?”

우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의아한 눈으로 우혁을 보았다.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에 잠긴 우주는 피식 웃으며 형의 말에 반박했다.

“진교 말하는 거야? 형이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걔랑 사귄 적 없어.”

“그래? 내가 착각한 건가.”

우혁은 우주의 회사에 잠깐 들렀을 때 목격했던 동업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었다. 한데 극구 부인하는 우주는 선을 긋는 것처럼 말했다.

“세상 사람 다 사귀더라도 걔랑은 못 사귀지….”

“…….”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우주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그냥… 친구였어.”

“…그래.”

재유와 헤어진 후로 진교는 자주 성적인 의미로 우주에게 접근했었다. 좋게 넘어가는 건 한두 번이었다. 거절을 반복하다 우주가 혐오감을 표현한 뒤론 사이가 서먹해졌다.

우주는 이별의 원인을 진교에게서 찾지는 않았다. 제 마음속에 진교는 여전히 동업자일 뿐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아닌 사이가 될 예정이다.

함께 설립한 ‘유제이디자인’은 진교의 작품을 전신으로 내세워 굵직한 국제 공모전과 사업수주를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우주는 차근차근 그와의 분리를 준비했다.

우주의 거절로 인해 한국에서 더 이상의 동력을 잃은 진교 역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의견을 피력해 왔고, 적당한 지분과 성과급으로 모양새 좋게 보내 준 뒤 홀로서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우주 인생 중 20대에 끼친 진교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진교의 도움으로 인해 대학부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제힘으로 맛본 성취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진교와의 마지막은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지난날의 허망한 오해와 후회가 섞여들었으므로.

“앞으로 집에 오지 않겠다는 건 사실이야? 어머니 아버지 서운해하실 텐데.”

우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에 허리를 기댄 채 우주를 바라보았다. 맥주는 이미 다 마셔 버렸지만, 술이 더 고픈 듯 빈 캔을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아마 두 분도 어느 정도 눈치채셨을 거야. 가짜 결혼인 거. 근데 남들 눈이 그렇게 중요하신 분들이니까 내가 이 정도 해드렸으면 나머진 두 분이 극복하셔야지. 선배를 우리 집에 데려와서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도 그 집에서 사위 행세하는 일은 없을 거야.”

“대단들 하네.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아직도 난 이해하기 힘들다.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

우혁은 어머니의 극성이나 아버지의 억압 방식이 심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늙고 있었다.

그분들이 자라 온 환경이나 학습된 배경에서는 동성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살면서 체득한 사고방식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건 자기 부모님들이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는 우주의 결혼이 결정되자마자 온갖 모임에 참석해 결혼 소식을 알리며 과거의 동성애자 소문은 잘못된 것임을 은근하게 피력하고 다녔다. 이것이 당신 나름대로 자식을 감싸려는 사랑의 방식인 듯했다. 우주의 인생을 보자면 안타까웠지만, 자식된 입장에서도 부모님을 이해해 줄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형은 내가 응석 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이 집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포기한 것들도 많아. 나도 내 나름대로 부모님한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안 그랬다면, 진작에 해외로 도망쳐 살았겠지. 재유를… 데리고.”

헤어진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목이 잠겨 왔다. 우주는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 집에서 사진이 들켰을 때부터 내내 그것을 꿈꿔 왔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 버리고 함께 떠나고 싶다고.

하지만 어렸던 그땐 가진 힘이 없었고, 자립할 힘을 갖췄을 때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우주는 아직도 이별했던 순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원 풍경이 떠올랐다. 여전히 재유가 원망스러웠다. 저를 믿고 기다려 주지 않은 매정한 남자에게 다시 찾아가지 않았고, 도망치듯 이사를 해 버렸다. 그 후론 애써 재유를 제 안에서 떨쳐 내려는 듯 일에만 매달리며 살아왔다.

“어머니 말마따나 징글징글하네. 그럼 차라리 도망쳐 살지 왜 모두한테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결혼을 억지로 하려고 해?”

“…그 사람이 내 옆에 있기 싫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그 사람만 있어 준다면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걘 내 옆에서 상처받고 있더라고. 난 그걸 이해 못 했고. 난 재유랑 아이까지 책임지려고 마음먹었던 내 사랑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어. 재유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었고. 지금에서야 착각이란 걸 알았지만.”

우혁은 부모님과 우주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마음을 한곳으로 정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우주가 좀 더 착한 아들이 되어 줬으면 했고, 우주를 생각하면 가족은 걱정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중간자인 우혁이 그 말을 쉽게 입 밖에 낼 순 없었다. 대신 그는 하나뿐인 동생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약속하기로 했다.

“만약 네가, 다시 되돌리고 싶을 때가 온다면… 그땐 네 편만 들게. 어머니 아버지는 나한테 맡겨도 돼.”

어느 모로 보나 더 희생한 쪽은 우주였고, 부모님은 기어이 자식을 이겨 먹었다. 그때가 온다면, 우혁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지지해 주고 싶었다.

팔꿈치를 양 무릎에 대고 고개를 숙인 우주는 탄식이 섞인 숨을 크게 내쉬었다. 우혁은 고뇌와 회한을 커다란 덩치에 감추고 있는 동생의 굳은 어깨를 토닥였다. 입술을 굳게 사리문 우주의 얼굴이 천천히 올라왔다.

“…고마워, 형.”

우혁은 한 번 더 어깨를 두드리고 테라스를 빠져나가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우주는 형의 뒷모습을 애틋하게 지켜보았다.

***

거실로 들어와 계단을 내려가려던 우주는 발길을 멈칫했다.

왼편에 자신의 옛 방이 있었다.

우주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신 이 집에 오지 않을 결심을 했다. 도리를 했으니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집엔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과거가 남아 있는 듯했다.

황갈색 나무문을 노려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우주는 결국 발길을 돌려 오래된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가구와 커튼도 그대로였고, 어린 시절 사 모았던 비디오와 잡지들, 사진 관련 서적들과 빛바랜 영화 포스터들까지, 자신의 과거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손잡이를 잡은 채 우뚝 서 있던 그는 들이마신 숨을 함부로 내쉴 수 없었다. 밀려오는 재유와의 기억에 짓눌릴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방 곳곳에 그와의 시간을 더듬을 수 있는 기억이 존재했다.

신기한 눈으로 책장에 달라붙어 우주의 수집품을 바라보던 모습, 벽에 달린 농구 골대에 점수 내기를 하자며 조르던 얼굴, 책상에 앉아 함께 찍은 사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표정.

소파에 앉은 재유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했던 일, 바닥에 드러누워 비디오를 보며 서로의 몸을 더듬던 기억, 밤새 술 마시고 부둥켜안으며 대낮까지 잠에 취했었던 날까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너무도 선명하게 손에 잡힐 것 같은 소년 재유의 환영은 우주의 눈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우주는 해묵은 상처를 파헤치듯 방 안 풍경을 둘러보다 구석에 쌓아 둔 상자들에 시선을 두었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상자를 열어 보자 대학 시절 살았던 서울 집에서 가져온 짐이 들어 있었다.

군대에 다녀온 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그 집에도 재유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함께 찍은 사진 뭉치와 앨범들, 그 시절 재유를 떠올리며 썼던 일기, 재유가 만들어 준 벙어리장갑이나 십자수 쿠션 따위가 있었다.

어머니가 집 정리를 하면서 재유의 짐을 버리지 않은 의도가 궁금했다. 훗날 아들의 원망을 들을까 걱정해서인지, 귀찮아서였는지 둘 중 하나일 테지만.

상자엔 군 복무 중인 자신에게 보냈던 재유의 편지들도 섞여 있었다. 반듯하고 예쁜 글씨로 쓴 봉투는 스무 개 정도였고, 비슷한 크기의 소책자나 종이 뭉치들이 끈으로 한데 묶여 있었다.

우주는 사진과 앨범, 편지 뭉치를 집어 들어 책상 앞에 앉았다. 끈을 풀어 내자 오래되어 모서리가 헤진 종이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나왔다. 재유와 봤던 영화나 전시회 티켓, 함께 여행을 갔던 행선지의 버스표 같은 것들도 있었다. 하찮지만, 그와 함께했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소중하게 모아 둔 것들이었다.

옛 생각에 잠겨 하나하나 되새기듯 넘겨보던 우주는 익숙한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언젠가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키지섬의 건축물 두 개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전학 온 학교에서 무기력하게 생활해 온 그가 유일하게 가고 싶어 했던 곳.

수능 대박 기원이라던 이 그림을 선물 받고 나서 자신은 대학에 합격했고, 새해를 맞아 떠난 첫 여행에서 함께 생일을 맞았다. 힘들여 떠올리지 않아도 우주는 그림을 건네주던 재유의 수줍은 얼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땐 정말 이 섬엘 함께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주는 앨범으로 손을 뻗어 한창 사귀던 시절 재유의 사진을 보았다. 아파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에 얇은 선으로 그려놓은 듯한 섬세한 이목구비가 자신의 기억보단 조금 더 앳된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의 격류가 당황스러웠다. 눈가를 더듬어 번지는 눈물을 훔치고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헤어진 이후로 재유에 대한 원망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별개인 것인지 우주의 안에서 가벼이 사라지지 않았다. 떨쳐내려 아무리 노력해도 재유에 대한 그리움은 소리 없이 퍼지는 안개처럼 잠재의식 곳곳에 서려 들었다.

그럼에도 우주는 그 마음을 칼같이 차단했었다.

일견 재유의 말이 맞았다. 헤어진 후에 우주는 전처럼 술로 방황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왔다. 비록 마음은 뻥 뚫린 상태였지만.

지난날 재유를 잊기 위한 자신의 발악을 떠올리던 우주는 옛 기억에 대한 씁쓸한 상념을 털어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 최근 도착한 메시지를 읽었다.

[작업은 곧바로 착수할 예정입니다. 성과가 나오면 즉시 보고서로 작성하여 우편으로 송부됩니다. 궁금하신 점이나 변경사항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발신인은 ‘라이프서치’의 김민수 실장이었다. 보안과 경호업을 가장하고 있지만, 고급스럽고 비싼 흥신소일 뿐이었다.

한 달 전, 우주는 고민 끝에 비밀 유지가 잘되고 일 처리가 깔끔한 업체를 찾아 재유의 행방을 의뢰했었다.

흘러 흘러 결혼을 앞두게 된 지금에야 우주는 그가 궁금해졌다. 애정이라곤 전혀 없는 결혼임에도, 식을 올린다는 자체가 재유와의 종장을 마무리 짓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미약하게나마 거부반응이 일었다.

이대로 접어 두기엔 그간의 세월이 허무했다.

우주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대신, 재유를 지켜보는 삶을 선택했다.

이미 그와의 사랑은 포기했지만, 마음만은 간직해도 되는 거니까. 그것이 자기 인생의 유일한 사랑에 대한 배려이자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위로였다.

10대 후반에서 시작된 끈질긴 사랑은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나니 쓸쓸한 외사랑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재유가 나이 들어가는 걸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 우주에게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결혼한 채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는 것이 비양심적인 태도일 수 있으나, 결혼 상대인 수연이 모든 걸 알고 있었으니 우주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우주는 책상에 흩어졌던 물건들을 챙겨 상자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이거….”

상자 안을 조금 더 살펴보던 우주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저 서울 집에서 가져온 짐이라고 생각했던 상자는 모두 재유와 관련된 물건만 담겨 있었다. 일부러 모아 둔 것이다. 어머니가 집 정리를 하다 깜빡한 것이 아니라, 재유의 흔적을 버리기 위한 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결혼을 결심한 아들이 스스로 정리하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우주는 어머니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물건들을 소중하게 상자 안에 넣었다. 방을 뒤져서 버리기 아쉬운 어린 시절 물건 몇 개를 더 챙겨 넣었다. 상자를 안아 든 우주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옛 방을 둘러보고는 미련 없이 집을 떠났다.

***

재유는 잠든 희지의 방 문을 닫고 피곤한 몸으로 거실에 있는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 새로 산 게임을 더 하고 싶다고 칭얼대는 희지와 한참의 실랑이 끝에 침대에 눕히고 잠들기까지 1시간을 더 보낸 뒤였다.

희지가 3학년이 된 기념으로 산 중고컴퓨터는 주로 아이의 사이버학습이나 게임용으로 쓰였고, 재유는 가끔 레시피를 검색할 때 쓰곤 했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욱신거리는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어깨를 퍽퍽 두드리며 바탕화면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인터넷을 연 재유는 검색창에 커서를 올려놓고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늘진 얼굴 위로 망설임이 스쳤다. 마우스를 쥔 손가락이 불안을 대변하듯 톡톡거리는 소음을 냈다. 결국 키보드로 옮겨간 손가락이 검색어를 입력했다.

[규신기업 결혼]

검색 결과는 최근 것과 4년 전 것으로 나뉘었다. 규신기업의 장남과 차남의 결혼 기사를 최신순으로 정렬한 재유는 맨 처음으로 뜬 지역신문 기사를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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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염우주(염창섭 규신기업 대표의 차남)*정수연

염창섭(규신기업 대표)*홍수자의 차남 염우주 군과 정인상*김향진의 3녀 정수연 양이 결혼을 합니다.

일시: 2010. 5. 15. 토요일 오후 1시

장소: 장운호텔 2층 다이너스티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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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기사는 별다른 설명 없이 정보만 싣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을 열어 봐도 같은 내용일 뿐, 재유가 궁금했던 것들을 알려 주진 않았다.

결혼할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중매였는지 연애였는지, 연애 기간은 얼마나 길었는지, 결혼을 결심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결혼할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인지.

결혼식은 바로 일주일 뒤인 토요일이었다. 영선의 아버지에게 처음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땐 뜬구름 같은 망상만 머릿속에 떠다녔는데, 사실로만 적어 둔 기사를 확인하자 비로소 현실로 다가왔다. 7일 후면 우주는 이제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된다.

정말 결혼을 할 생각인 걸까. 어떤 결심으로 그 같은 상황에 치달은 걸까. 억지로 하는 결혼은 아닐까.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한번 찾아가 만나 볼까. 아니면, 결혼식에 몰래 찾아가 그의 표정을 확인해 볼까….

손가락으로 꼬집듯 입술을 쥐어뜯던 재유는 기사에 집착하는 제 꼴이 별안간 우스워졌다. 이제 와서 자세히 알아봤자 아무 소용 없는 일인데.

아무리 자기와 헤어졌어도, 부모의 강제가 심했더라도, 그가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우주가 착한 아들이긴 했지만, 마마보이는 아니었다. 집안과의 결합이든, 필요에 의해서든 결혼 자체는 우주의 결심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재유는 마침내 허무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우주를 완전히 놓아야 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유제이디자인]

결혼 검색어를 지우고 우주의 회사를 입력했다. 그가 생각날 때마다 찾아보던 검색어였다. 지난 2년 동안 착실히 회사를 키운 우주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행적이 나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습관적으로 새로운 기사가 없나 찾아보던 재유는 결혼 기사 외에 업데이트된 소식이 없는 걸 확인하고 인터넷 창을 닫았다.

재유는 바탕화면에서 폴더를 여러 번 클릭해 희지가 찾을 수 없도록 깊숙이 숨겨 놓은 개인 폴더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엔 헤어진 후로 우주의 회사를 검색해 둔 기사와 사진들을 모아 둔 파일이 있었다. 재유는 파일을 열어 처음부터 꼼꼼히 기사 내용을 정독했다.

미국의 권위 있는 디자인 공모전에서 입상한 소식, 입상을 치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문체부 장관과 악수하는 모습, 매출액 30억 달성과 사옥 확장 소식, 미국의 디자인 전시회에 참가하여 부스 안에서 찍은 우주와 직원들의 모습까지.

사진 속 그의 모습은 그늘져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환하게 웃고 있거나 당차고 자신감 있는 사업가의 모습도 많았다. 헤어진 뒤로 우주의 삶을 인터넷을 통해 몰래 훔쳐보던 재유는 정성스레 만들어 둔 파일 속 그의 사진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젠 보내 줘야지.

진정한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미련으로 놓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이, 결혼할 그에게 짐이 될까 봐 섣부르게 붙잡아 둘 자신이 없었다.

파일을 영구 삭제한 재유의 손이 잘게 떨렸다.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은 목까지 흘러내렸다.

***

2014년 7월.

오더 마감을 하고 난 재유는 9시 30분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보고 지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주문은 끝났지만, 마무리 작업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재유는 각종 식재료와 접시들, 주방 도구들로 초토화된 조리대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더 내쉬었다.

“들으셨어요? 막내가 오늘까지만 하고 그만둔다고 했대요.”

“또?”

“네. 아까 조리장님한테 말했다 그러더라고요.”

“하….”

2년 차 초보 셰프인 성한은 안 그래도 늦어진 퇴근 시간을 1분이라도 앞당기고자 조리대 위를 거침없이 치워 나갔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요즘 젊은것들은 끈기가 없다느니, 그것도 못 버텨서 어찌 밥 벌어먹고 살겠냐느니 하는 꼰대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작 본인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면서 자기보다 좀 더 어린 직원이 그만두면 할 일이 늘어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재유는 성한의 분노가 이해가 가면서도 분노를 풀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호텔은 큰 조직이지만, 인건비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특히 힘든 날이기도 했다. 웨딩홀과 비즈니스룸 연회에서 런치와 디너를 연달아 130인분의 코스 요리로 만들어야 했으니 셰프들은 식사 시간도 따로 없이 조리실 구석에 서서 된장국에 만 밥을 후루룩 마셔가며 음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서버로 채용된 당일 알바 중엔 점심 피로연을 겪은 뒤 일당도 포기한 채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

기실 호텔 한식당은 외부에서 볼 땐 있어 보이고 폼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열악한 처우와 급여 때문에 새로 사람을 구하기도 힘든 처지였다.

대단한 포부를 갖고 입사한 신입들도 석 달 사이에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했다. 호텔 내에서 지원 인력을 보내 주기도 하지만, 다른 주방에 비해 한식당은 이미 직원들에게 기피 1순위였기 때문에 지원을 와도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도망갈 기회만 엿보는 게 다반사였다.

현준의 소개로 온 이 호텔에서 햇수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재유 역시 종종 그만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23년 경력의 조리장에게 더 배울 것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일주일에 두세 번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고된 노동 강도를 버텨 왔다.

50대 중반의 조리장은 달라진 한식의 위상이나 늘어난 외국인 고객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그때그때 메뉴를 개발하고 호텔 콘셉트에 맞춰 진화하되 한식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 온 사람이다.

재유는 깐깐한 고집쟁이인 조리장을 모시며 일을 배우는 게 버거울 때가 많았지만, 이왕 이 바닥에 발을 들인 이상 그동안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최대한 버티며 배울 수 있는 건 모조리 배우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야 훗날 식당을 차릴 때 자신에게 단단한 밑거름이 되어 주고 시행착오 또한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주방 안의 모두가 피곤과 땀에 절어 주방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성의 없는 묵례나 눈짓으로 인사를 한 뒤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재유는 하루종일 서서 고통받았던 다리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치며 직원 출입구 근처의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바지춤에서 담뱃갑을 꺼내든 재유는 한 개비를 꺼내 입에다 물고 불은 붙이지 않은 채 희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야.”

-끝났어?

“응. 지금 가려고. 혼자 있는 거 안 심심해?”

-내가 애야? 올 때 아이스크림 좀 사다 줘.

“애 맞으면서 뭘….”

-애 아니라니까!

재유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도 희지의 목소리에 금세 웃음을 흘렸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딸은 방과 후에 더 이상 도우미 이모님을 고용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아직도 희지가 아기로만 보이는 재유는 늦게까지 혼자 있을 딸이 안쓰러워 처음엔 반대했지만, 학원도 늘렸고 친구들과 놀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는 이유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재유는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 통화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딸기 맛으로 사다 줘?”

-음, 딸기랑 초코 두 개.

“알았어, 꼬맹아.”

재유는 발끈하는 희지를 몇 번 더 놀리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이제 한창 사춘기인데도 장단을 맞춰 주며 아빠의 전화를 귀찮아하지 않는 희지가 여간 고맙고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물고 있던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인 재유는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끼며 느리게 연기를 내뿜었다.

쉬는 날을 제외하고 하루 두 번, 출근길과 퇴근길에 호텔 구석의 흡연 구역에서만 담배를 피우는 재유는 어느새 루틴이 되어 버린 출퇴근 의식에 굳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담배를 배우게 된 계기는 2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아버지 사촌의 아들, 그러니까 재유의 오촌 형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와 한정호의 죽음을 알렸다. 이미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살았던 그의 장례에 상주 노릇을 하는 건 당황스러운 일임과 동시에 또 한 번 인생의 허무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집 나가 새로 살게 된 여자와 붙었다 찢어졌다를 반복하며 새살림을 그럭저럭 꾸려 나간 것 같았다. 다만 도박의 습관은 어찌할 수 없어 결국엔 사이가 틀어졌고, 말년엔 아무도 곁에 없는 쓸쓸한 삶을 자살로 마감했다. 겨우 쉰일곱이었다.

그래도 재유는 한정호가 그 정도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다 간 인생이라 느꼈다. 뒤늦게 아버지랍시고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재유는 장례를 치른 후 한정호가 여기저기 소액으로 갖다 쓴 자잘한 빚들을 처리하면서 아버지의 인생이 참으로 한심하고 애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하나뿐인 아들을 끝내 배신하면서까지 셋방에서 자잘한 돈을 훔쳐 갔던 한정호는 이미 그의 인생에 없는 존재였다. 다만, 그가 살면서 분명히 만들어 두었을 빚이 또 자신에게 돌아올까 봐 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아왔다.

막상 한정호가 죽은 후 그가 남긴 빚이 제 능력 선에서 매듭지을 수 있는 금액임을 확인하자 마음이 안도하는 걸 느꼈다. 그때 재유는 하찮은 제 인생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 때늦은 눈물을 쏟아냈다.

그때, 오촌 형님이 담배를 건네줬다. 아마 형님에겐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모습처럼 비쳤을 것이다. 담배를 건넨 것도 재유가 담배를 피우는 줄 알고 멋쩍으나마 위로할 겸 자신의 담배를 나눈 것이었고.

피어오르는 연기가 공중에서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꾸역꾸역 참았던 재유는 난생처음 입에 문 담배를 필터 끝까지 닿도록 피웠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장례식장 입구 한쪽에서, 처음 보는 오촌 형님의 빗나간 위로를 받으며 재유는 꽁초를 재떨이에 던진 뒤 의미가 불분명한 눈물을 끊어 냈다.

인생은 살면 살수록 젊을 때의 단꿈은 사라져 가고 지독한 현실만이 당연하듯 닥쳐왔다.

서른넷이 된 재유는 이제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들에 일일이 하늘을 저주하며 헛된 원망을 쏟아내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희지가 커 가는 재미를 소소하게 느끼며, 힘들고 지친 일상을 담배 연기로 뱉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결국엔 고아가 되었다. 애 엄마를 앞세우고 홀로 자식을 키우는 남자가 되었으며 마음 다해 사랑했던 남자와 다시 시작해 볼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끝내 헤어졌다.

그래도 인생은 매일같이 힘든 게 아니었고, 살아가는 보람도 가끔은 느낄 수 있었으니 재유는 그럭저럭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했다. 삶은 계속되는 거니까.

괴로운 일일지언정 죽을 일은 아니기에, 재유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하며 묵묵히 살아갔다.

재유는 피워 문 담배를 필터 끝까지 태운 다음에야 은색 스탠드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껐다. 마트가 문 닫기 전에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후텁지근한 밤공기를 들이마시곤 도심 속의 아무개로 밤거리에 섞여들었다.

***

열여덟의 우주는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조바심이 났다. 3반에 새로 전학 온 한재유를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교사보다 먼저 뒷문을 통해 복도로 나섰다.

이미 3반의 시간표를 꿰고 있었던 그는 다음 시간이 체육이라는 걸 알고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남녀공학이었던 학교는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 보통 남자애들이 교실을, 여자애들이 화장실을 이용했지만, 우주가 눈여겨본 전학생은 뭐가 부끄러운지 줄곧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시끌벅적한 복도를 지나 퀴퀴하고 냄새나는 화장실에 들어선 우주는 눈을 이리저리 굴려 아직 그 애가 오지 않은 걸 확인했다. 제일 안쪽의 소변기를 차지하고 선 채 입구를 힐끔거리며 그가 빨리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1분쯤 지나자 재유가 손에 옷가지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섰다.

눈치를 살피며 옷 갈아입을 곳을 탐색하는 눈이 퍽 가엽고 귀여웠다. 우주는 애써 관심 없는 척하며 제일 구석진 칸으로 들어가는 그를 훔쳐보았다. 멋대로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시끄러웠다. 우주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재유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상상했다. 노골적인 상상에 아랫도리가 동하고 귓불이 달아올랐다.

뒤통수에 온 신경을 기울이던 우주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기민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하늘색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재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이 하얘서 촌스럽고 쨍한 색깔도 잘 소화했다. 우주는 화장실을 빠져나간 재유를 얼른 뒤쫓았다.

어깨에서 똑 떨어진 나풀나풀한 체육복 주름 속의 맨 등을 투시하듯 바라보던 우주는 시선을 내려 재유의 발목에 집중했다. 평범한 삼선 슬리퍼와 흰 양말 위로 툭 불거진 가느다란 발목이 유난히 야릇하게 보였다. 걸을 때마다 선명하게 움직이는 복사근과 종아리뼈 사이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손끝으로 만져 보고 싶다는 음란한 생각도 들었다.

저 애는 내가 매일 쫓아다니며 이런 생각 한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재유가 우뚝 멈춰 섰다. 덩달아 멈칫한 우주는 심장이 철렁했다. 재유가 뒤돌아서서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고 온 게 있는 건가? 혹시 나한테 말을 걸려는 걸까? 아님 그냥 우연인 건가?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별생각이 다 머리를 스쳤다. 뚫어져라 얼굴을 바라보는데도 재유는 눈을 내리깐 채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올 뿐이었다. 바람과는 달리 그는 곁을 무심히 지나쳐갔다.

그때, 아주 미약한 손등의 스침이 있었다.

정말로 닿았는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기 그지없는 찰나의 접촉이었다.

그럼에도 우주는 맞닿은 손등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뜨거움을 느꼈다. 무시할 수 없는 저릿한 감각에 손을 쥐었다 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 애도 우주를 돌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우주의 가슴은 툭 떨어지듯 내려앉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울렸다.

‘좋아해.’

억눌렀던 마음이 제멋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에게 다가가려 한 발 내디뎠는데, 숫기 없는 얼굴이 부딪쳐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섰다.

우주는 다시 그를 뒤따랐다. 붙잡고 싶어서 쫓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재유는 같은 속도로 자신에게서 멀어져 갔다.

불러세우기 위해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내질렀다. 하지만 소리는 허공에 흩어지고 텅 빈 적막뿐이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우주는 점점 멀어지는 재유를 닿지 않은 손으로 허우적거리며 쫓아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슴을 움켜쥐자 눈앞이 점멸되었다.

***

한참 만에 눈을 뜬 우주는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간 그로기 상태를 체감했다. 막혔던 폐가 뚫리듯 괴롭게 숨을 뱉어낸 우주는 한동안 가슴을 움켜쥐며 밭은 숨을 진정시켜야 했다.

우주는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비치는 창가와 익숙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현실을 인지했지만 와닿지 않았다.

학교 복도가 눈앞에 선했고, 재유와 닿았던 손등이 저릿했다.

꿈인 걸 알고 쓰러지듯 다시 누운 우주는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어른거리는 얼굴이 몹시도 그리웠다.

재유 어릴 때 진짜 예뻤네.

새삼스러운 꿈의 감상이 튀어나와 가린 눈 밑으로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요즘 들어 재유가 자주 꿈에 나왔다. 오늘 꿈은 특별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처음이었으니. 여전히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우주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다시 잠을 청했다. 또 나타날지 모를 그의 꿈을 꾸기 위해서.

***

밤 11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돌아온 우주는 서류 가방을 소파에 팽개치듯 던져두고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를 내릴까 하다가 오늘 마신 커피 양을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오늘은 오랫동안 컨택했던 대기업의 디자인 협력업체에 선정되어 나름의 성취를 이룬 날이었다. 한국 최대 기업 중 하나인 이곳은 주로 퇴사자들이 차린 회사들과 모종의 커넥션으로만 협력업체를 선정해 왔는데, 그룹 내 인맥이 없었던 우주는 자퇴한 대학의 동기였던 법대 친구와 변호사인 수연의 도움으로 1년여를 공들인 끝에 성과를 낸 것이었다.

‘유제이디자인’은 진교가 빠졌음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우대했고, 그렇게 스카웃한 인적 자산은 전시와 광고 분야의 포스터에서 실력을 발휘해 성과를 보여 주었다.

신생 업체였던 회사는 곧바로 업계에 두각을 나타냈고, 국내외 유력한 광고제나 공모전에서 수상을 한 것이 매스컴에 다뤄져 해마다 매출액이 늘어났다. 2년 전부터는 제품 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대기업들과의 제휴로 서서히 회사의 규모를 늘려 왔다.

회사를 차린 지난 6년 동안, 밤 10시 이전엔 퇴근한 적이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일에 몰두한 결과였다.

사생활이나 취미라고 할 것도 없는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한 것은 그에게 달리 집중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시간이 빌 때 트레이닝룸에서 체력 단련을 하는 것 외에 우주는 주로 회사에서 업무를 보거나 거래처 미팅을 돌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수연과는 원래의 계획대로 친구처럼, 동료처럼 지내왔다. 부동산 재벌인 수연의 아버지가 내준 100평대의 고급빌라에 가벽을 세우고 내부 출입문을 따로 만들었다. 각자의 생활을 분리해 룸메이트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건 의외로 편리했고,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단 한 번, 일요일 오전에 우정에 기인한 식사를 함께했으며 공식적으로 부부로 보여야 할 때는 적당히 사람들을 속여 가며 서로의 배우자 행세를 했다.

결혼이란 것이 어떤 이에게는 족쇄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영원한 행복의 결속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주나 수연에게는 각자가 욕망하는 것을 시선이나 편견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편리한 제도로 사용됐다.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우주는 이런 생활에 어느새 적응되어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지도 않았다.

너무 평온하고 너무 완벽했다.

겉으로 봤을 땐 재력가 부모의 도움 없이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건실한 사업가에다 능력 있는 미모의 변호사 아내와 결혼한 부러운 인생처럼 보였지만, 우주 곁엔 사람이 없었다.

하루에도 새로운 사람을 수없이 만났고, 오랜 시간 알고 지내 친밀한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일과 관련되어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우주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더라도, 아무런 사업적 계산 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함부로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다. 사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사적으로 영역이 확장되거나 관계가 깊어질 만한 사람은 칼같이 쳐냈다.

‘생긴 건 짐승에 상남자면서 완전 초식남이네.’

가까이서 지켜본 수연은 이런 식으로 우주를 놀리곤 했다. 그녀는 명목상 남편이 일 외적으로 흥밋거리를 찾길 바랐다. 차라리 섹파를 만드는 건 어떻겠냐며 제안하기도 했는데, 진교를 통해 마음 없는 육체관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아프게 경험한 그는 두 번 다시 일회성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맥주 한 캔을 비운 우주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맥주 하나를 더 꺼내 자신의 스팟인 안락의자로 향했다. 샤워가운을 입은 커다란 덩치가 넉넉하게 파묻혔다.

우주는 맥주를 홀짝이며 외벽 조명이 비추는 거실의 휑한 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퇴근 후의 일상이지만, 적막하고 고독했다.

이대로 깜빡 잠이 들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끔뻑이던 우주는 터덜터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아직 자는 거 아니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수연이 어둑한 실내와 나른한 우주의 얼굴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옷 좀 갈아입고.”

문을 닫은 우주는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공동공간 중 하나인 중정에 수연이 있는 걸 발견하고 유리로 된 폴딩 도어를 열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난간 아래 빈 화분만 몇 개 놓인 중정은 여름밤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졌던 몸이 더운 공기에 닿자 열기가 끼치며 금세 후끈해졌다.

수연은 우주가 맞은편 의자에 앉을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하며 평소답지 않게 쭈뼛거렸다.

“한잔할래?”

아직 따지 않은 레드와인과 잔 하나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수연이 평소에 좋아하던 프랑스산 피노누아였다. 우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팔걸이에 느슨하게 두 팔을 걸쳤다.

“선배는 안 마셔?”

“나도 됐어.”

“무슨 일인데.”

수연은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것처럼 힘겹게 숨을 내쉬거나 입술을 우물거리며 뜸을 들였다. 괜히 와인 병을 만지작거리며 당장이라도 따라 마실 듯 목 주변을 쥐기도 했다.

“뭔데 그래?”

“후… 차라리 이게 빠르겠다.”

수연은 걸치고 있던 얇은 카디건 주머니에서 기다란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우주의 얼굴에 잠시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물건의 정체를 깨달았다. 수연의 할 말이 뭔지 알아차렸다.

“누군데?”

수연이 내놓은 건 임신테스트기였고, 결과 창엔 선명한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입만 열면 술술 떠들어 대던 달변가가 오늘따라 꿀이라도 먹은 듯 자꾸만 입을 닫았다.

“괜찮아. 말해 봐.”

“…의뢰인이야.”

수연은 목구멍에 잠겨 있던 말을 어렵게 토해 낸 것처럼 말했다.

“…미안해.”

“…….”

혼란에 빠진 듯 동공이 흔들리던 우주는 이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사랑하는구나.”

명쾌한 답을 찾아낸 사람처럼 우주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수연은 면목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사람은 아직 몰라. 너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좀 뜻밖이긴 한데… 나쁜 일은 아니니까. 그렇지?”

눈치를 살피던 수연이 우주의 너그러운 반응이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막혔던 말문이 이제야 터진 듯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그 사람을 다 잊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신경 쓰이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데, 점점 마음을 접기가 힘들어지더라. 임신을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막상 아이가 생기고 나니까… 생각지도 못한 다른 길이 보이는 거야. 그래서….”

수연이 다시 입을 닫았다. 우주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녀의 쩔쩔매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해서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 사람이랑 살아야겠네.”

수연의 한숨이 깊어졌다.

“…정말 미안해. 너한테 진짜, 할 말이 없다.”

“수습할 일이 귀찮긴 하겠지만 이건 사죄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축하해, 선배.”

수연은 뜻밖의 감동을 받은 듯 비로소 완연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혼란과 기쁨과 기대가 뒤섞여 산만하게 몸을 들썩이던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주의 목을 껴안았다. 우주도 기꺼이 수연을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다고 영원히 다음 사랑은 없을 거라며 반항심에 거짓 결혼을 한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인생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결혼 이후 ‘평생 이렇게 사는 게 내 행복이자 미래’라고 떠들던 그녀의 호언장담과 달리 우주는 수연이야말로 새로운 사랑을 할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느껴 왔다. 죽도록 사랑해 봤으니, 다시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미처 예상 못 한 바였지만.

“우리 집엔 내가 알아서 설명할게. 선배도 집에 말씀드리고 슬슬 정리해 보자.”

“사실… 요 며칠 너무 막막했어. 엄마한테 다른 남자랑 애 가졌으니까 이혼하고 재혼하겠다 설득하는 것도 정말 걱정됐는데, 제일 힘들었던 건 너한테 털어놓는 거였어. 내가 먼저 결혼하자 해 놓고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게….”

“너무 마음 쓰지 마. 애한테 안 좋아.”

수연은 민망한 듯 자꾸 입술을 축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동성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지만, 법적으로 남편인 우주에게 태아에 대한 걱정을 들으니 아무래도 어색하고 면목이 없었다.

“난 선배한테 고마운 게 더 많아. 이제라도 선배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응원하고 싶어.”

“고맙긴 뭐가 고맙냐? 이혼남 꼬리표 달게 생겼는데. 그냥 욕해도 돼.”

화낼 줄 알았던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오히려 더 민망하고 머쓱한 법이었다. 수연은 괜히 손으로 무릎을 쓸어 대며 부산스럽게 우주의 눈치를 살폈다. 우주는 아랑곳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 생각나네. 선배 참 부럽다.”

“왜?”

“진짜 가족이 생기는 일이잖아.”

“…….”

“나도 그 사람한테 아이가 생겼을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잘 안 됐거든. 만약 그때 이런저런 사정 다 극복하고 함께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아갈까? …궁금하네.”

남 말하듯 여상하게 꾸몄어도 우주의 표정은 침울해 보였다. 수연은 내내 궁금했던 묻기 곤란한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아직… 못 잊은 거지?”

우주는 고개를 기울이며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 눈썹을 치켜떴다.

“글쎄. 평소에는 거의 생각 안 나는데… 가끔 꿈에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하고.”

“너 가끔 집에 갖고 오는 서류 봉투, 그거 그 사람 관련된 거 아냐? 우연히 봤어.”

“…그건 그냥.”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한 우주가 잠시 눈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하나도 없고 구름에 가린 흐릿한 하현달이 무심하게 떠 있었다.

“그건 그냥, 취미나 습관 같은 거야. 그만둬도 딱히 상관없는 그런 거. 오래 해서 습관 됐고, 안 하자니 아쉬운… 그 정도야.”

우주는 괜히 손바닥으로 하관을 넓게 쓸었다. 별일 아닌 듯 말했지만, 말과 다르게 우주는 꽤 본격적으로 재유의 삶에 개입하고 있었다. 행적이 담긴 보고서와 재유의 모습을 찍은 원본 사진이 담긴 메모리칩이 우주의 서랍장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맨발로 뛰던 과거의 스토커 짓은 두 번의 이별을 거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한층 은밀하고 전문적으로 발전했다.

보고서는 분기별로 한 번씩 우편으로 받았고, 불시에 신상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을 때는 문자나 메일로 받기도 했다. 재유의 이사나 아버지의 죽음 같은 것들이었다.

우주는 한정호의 장례식에 먼 친척의 이름을 빌려 거액의 부조를 하기도 하고, 희지가 다니는 학교마다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처음 ‘라이프서치’에 의뢰를 했을 때만 해도 ‘나 버리고 얼마나 잘사는지 두고 보자’하는 복수심 섞인 마음도 없진 않았다. 그러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고, 그날이 그날 같은 변함없는 삶을 살아가는 재유를 보면서 점점 기운이 빠졌다.

재유는 자신과 헤어지고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헤어질 당시의 말대로 그는 아이의 아빠로서만 살고 있었다. 매일 일만 했고, 일하지 않을 땐 아이와 관련된 것들을 할 뿐이었다.

우주는 문득 그의 삶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만족시킨 삶을 사는 외로운 남자는 우주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담뱃불을 붙이던 재유의 사진이 씁쓸하게 눈앞에 서렸다.

“전 애인 행적 조사를 누가 취미로 하냐? 못 잊은 것뿐이지.”

수연은 우주의 말과 표정의 묘한 불일치를 느끼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 사람 아직 혼자면… 다시 만나 보는 건 어때? 친구로서라도 말이야.”

자기가 생각해도 치사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연은 이혼하더라도 우주가 저처럼 행복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우린 친구조차 될 수도 없고. 두 번 헤어졌는데 세 번이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 그냥 이대로가 좋아.”

우주는 더 이상 그 얘기는 하기 싫다는 듯 와인 병을 따서 잔에 반쯤 채웠다.

“선배는 못 마실 테니까 축배는 나만 할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우주가 4년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는 기념으로 수연을 향해 축사를 외쳤다.

“태교 잘해. 행복하고. 이제 진짜 엄마 품을 벗어날 시간이네. 선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주는 가족에게 이혼 소식을 전할 생각에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한 번은 살아 줬으니, 이제 내 갈 길 찾아도 되겠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입매가 휘어진 수연을 바라보며 우주는 점성이 강한 붉은 와인을 입 안에 모두 털어 넣었다.

***

서둘러 한 결혼처럼 이혼도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수자는 며느리의 외도 소식을 듣고 사돈댁에 달려가 난장을 칠 기색이었으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수연의 바람을 들어줄 능력이 없으니 조용히 이혼을 마무리하자는 우주의 설득에 마지못해 합의했고, 이혼이 성사되었다.

우주의 곁엔 이제 소중한 친구마저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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