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먼 길 (12/18)

11. 먼 길

* * *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재유는 학원이 끝난 희지를 데리고 백화점 구경을 다녀왔다.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엔 쉴 수 없으니 희지에게 줄 선물을 미리 사 주기 위해서였다.

희지는 운동화 한 켤레와 손바닥만 한 캐릭터 인형 하나만 골랐다. 더 비싼 거 골라도 된다고, 갖고 싶었던 거 없냐고 계속 물어도 희지는 아이답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쓰려서 원피스와 코트, 가죽구두를 충동구매 해 버렸다. 예산을 훨씬 웃도는 가격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동안 재유의 일 때문에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지내 오던 희지는 떠들썩한 분위기일수록 더 쓸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휘황찬란한 거리의 풍경과 품 안에 가득한 선물 때문에 평소보다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어딜 가도 사람들에 치여 버스를 타는 것만 해도 꽤 애를 먹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1시간이 넘게 버스에 갇혀 있던 재유는 희지의 손을 잡고 지친 얼굴로 정류장에 내렸다. 아빠 손에서 선물 가방 하나를 뺏어 든 희지가 물었다.

“근데 우주 삼촌 크리스마스에도 안 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희지는 소식이 뜸한 우주 삼촌을 궁금해했다. 재유가 일하는 주말엔 이모님 대신 어느새 우주가 희지와의 시간을 보내 주고 있었던 탓이다.

우주와 만나지 않은 것도 벌써 일주일째다. 이태원에서 도망치듯 헤어지고 난 뒤 둘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재유는 기분 좋은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평범하게 대꾸했다.

“우주 삼촌은 일이 너무 바빠서 출장 갔어. 한가해지면 희지 보러 올 거야.”

“그게 언젠데?”

“글쎄… 아마 좀 걸릴 거야.”

“흥! 어저께 우주 삼촌 집 보니까 불 켜져 있던데? 차도 그대로 있고.”

“…그랬어? 그래서, 가 봤어?”

“어. 근데 문을 안 열어 줬어.”

“…….”

“삼촌이 벌써 출장에서 돌아왔나? 근데 아마 너무 피곤해서 잠들어 버리고 희지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었나 봐.”

이럴 땐 집이 가까운 게 한스러웠다. 재유도 출퇴근길마다 우주의 집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언제나 눈이 약국 2층으로 향했다. 쉬는 날엔 괜히 동네 주변을 서성이다 우주의 집을 한 번씩 지나치기도 했다. 그러다 이진교가 그의 집에서 나오는 것도 보게 됐다.

허탈함에 속이 쓰라렸다. 우주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에게 미안했고 또 자신의 더한 밑바닥을 보여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1월 1일이 우주 삼촌 생일이랬는데. 그래서 내가 선물 주기로 했단 말이야.”

“아… 그랬어?”

그래. 그날이 우주 생일이지….

이제껏 두 사람은 서로의 생일을 단 한 번씩밖에 함께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가 유일했다. 우주의 생일엔 종각에 있었고, 자신의 생일엔 공장 퇴근길에 데이트를 하며 축하했었다. 그땐 내년을 기약하며 생일마다 해 주고 싶은 일들을 떠들어 댔었는데.

재유는 옛 추억이 그리운 듯 털털 웃었다.

우린 지난 세월 동안 뭘 하며 살았던 걸까. 그 시간 동안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닌데…. 곁에 없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다시 만나고 1년도 되지 않아 서로의 생일이 다가오기도 전에 다퉈 버렸고 마음 편히 얼굴도 못 보는 상황이 됐다. 그를 그리워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도.

“희지야, 삼촌한테 무슨 선물 줄지 골랐어?”

“당연하지!”

“그게 뭔데?”

“가족사진. 아빠랑, 나랑, 우주 삼촌이랑 찍은 거.”

“뭐? 왜 가족사진을….”

“우주 삼촌이 갖고 싶다고 했단 말이야. 그래서 그날 사진 찍으러 가려고 했거든.”

“…….”

재유는 넋을 잃은 듯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무심코 희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희지가 긴장한 얼굴로 아빠를 올려다봤다.

아빠, 왜 그래? 희지의 말에 재유는 공허한 시선을 거두고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미안해, 희지야. 아빠가 잠깐… 배가 아파서 그랬어.”

“아빠 괜찮아? 약국 들렀다 갈까?”

여기서 제일 가까운 약국은 우주네 집밖에 없었다. 재유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집에서 희지랑 맛있는 케이크 먹으면 금방 나을 거야.”

“아빠 케이크 먹고 싶었어?”

금방이라도 우주의 집에 뛰어갈 것 같던 아이가 케이크 소리에 와하하 웃으며 반색을 했다.

“응. 얼른 사러 가자. 희지가 좋아하는 걸로.”

“좋아!”

뭣 때문에 그렇게 배알이 틀리고 뭣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을까.

우주가 바라는 건 10년 전에도, 현재에도 자기와 함께 살아가는 것, 단 하나였는데. 왜 그렇게 밀쳐내지 못해서 안달이었는지. 생일선물로 갖고 싶어 했다는 ‘가족사진’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사무칠 정도로 잘 아는데.

“근데 희지는 우주 삼촌이랑 가족사진 찍는 거 괜찮아?”

“당연하지. 근데, 영선이 고모도 불러서 같이 찍으면 좋겠어.”

“그래…. 근데 1월 1일은 빨간 날이라 사진관 문 안 열 것 같은데. 나중에 우주 삼촌이랑 영선이 고모한테 다시 물어보자.”

“그래!”

희지는 폴짝거리며 동네 빵집으로 먼저 달려나갔다. 해맑기만 한 아이를 보자 가슴이 저미듯 아팠다.

희지는 이제야 겨우 우주를 가족으로 인정해 주었는데, 가족사진을 찍어 주고 싶은 아이의 바람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재유 스스로가 그런 사진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우주 없이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재유는 케이크를 사고 일부러 그의 집을 피해서 좁은 골목길로 돌아갔다. 그가 원했던 대로 그동안 연락하지 않고 시간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마음만 괴롭고 사이만 벌어졌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나만 생각해서 우주를 곁에 두든가, 완전히 끝을 내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

2008년이 3일밖에 안 남은 날, 퇴근한 재유는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우주의 사무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우주를 봐야 했다. 매일같이 송년회 예약으로 정신없이 바빴는데 이대로 가다간 우주도 못 만나고 해를 넘겨 버릴 것 같았다.

아침부터 마음먹었던지라 긴장과 두려움으로 하루를 보냈다. 어떤 얼굴로 우주를 봐야 할지, 자기에게 화가 많이 났을지가 걱정되어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한편으론 미국에서처럼 풀이 죽어 술로만 지내지 않을지도 염려되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기적이게도 먼저 연락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존재했다. 원래 재유의 말을 잘 듣는 우주이지만 당분간 시간을 갖자는 말까지 착실하게 들어줄 줄이야.

그래도 내색은 하지 말아야지. 내가 잘못한 게 더 많을 테니까.

골목에 들어서자 아직 대문이 열려 있었고 우주의 차도 보였다. 그립고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이진교도 함께 있으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용기 내서 순식간에 현관까지 들어와 버렸다.

어둑한 사무실에 우주의 방에서만 열린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가 혼자 있기를 기대하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노크를 하려 방으로 향하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우주의 목소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뜻밖에 여자 목소리였다.

“…….”

재유는 숨까지 멈춘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우주의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잘 계셔. 가끔 네 소식 묻기도 하시고.”

“그러실 거 없어요. 세월이 흘렀어도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저도 잘 알잖아요.”

재유는 조금 뒷걸음질 쳤다. 하필 이런 타이밍이라니. 찾아온 목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우주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어머니께 연락은 드린댔는데, 형처럼 얼굴 보고 지낸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더불어 어머니까지 피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재유도 안타까웠다. 우주의 어머니가 작은아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재유는 그냥 뒤돌아 나갈까 하다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대화를 듣고 싶은 마음에 발소리를 죽였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나와서 살 거니? 한국 오면 회사에 들어와서 아버지랑 형을 도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네 멋대로 엉뚱한 회사 차려 버리고, 가족도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그런 비좁은 월셋집에서 혼자서 살 거냐고. 결혼은? 결혼도 해야 되잖아. 엄마도 많이 참았어. 그동안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려고 네 아빠 성질머리도 참아 가면서 막아 줬잖아!”

재유는 ‘결혼’이란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끝까지 이해 못 할 거야.’

엄마가 생전에 해 줬던 충고가 떠올랐다.

우주는, 아버지는 제쳐 두고라도 어머니에게까지 이해받지 못했다. 물론 재유도 알고 있었다. 처음 관계를 들켰던 날,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에 원망과 경멸이 들어 있었으니까.

여전하시네, 다들.

재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 팔을 감쌌다. 앞으로 무슨 말이 오갈지 두려우면서도 자리를 뜨기 힘들었다.

“어머니… 전 결혼 못 해요. 할 수가 없어요. 여자한텐 도저히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요. 더 이상 어떻게 말씀드려야 납득하시겠어요.”

우주가 지친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지진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좋은 여자를 못 만나 봐서 그래. 너도 이제 혼기가 찼잖아. 네 형처럼 아이도 낳아야지. 언제까지 가족 등지면서 겉돌래? 집에 돌아와야지, 응?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인 건 사실이잖아!”

“맞아요. 저 어머니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해 못 해 주시면 전 어떻게 해요.”

“그 재유라는 애. 걔도 애를 낳았다는데 넌 왜 여자를 못 만나고 왜 결혼을 못 하는데? 왜 아직도 등신처럼 걜 만나는 거니? 난 걔가 정말 지긋지긋해. 네가 이러고 사는 거 다 그놈 때문 아니냐고!”

“어머니….”

어머니의 갈라진 목소리가 가슴을 도려내는 칼 같았다.

알려지기 전, 아직 우주의 친구 신분이었을 때 그의 집에 놀러 가면 늘 따스한 표정으로 배려해 주시고 음식 취향을 물으시고 이부자리를 걱정해 주시던 평범한 친구의 어머니였는데.

지금의 재유는 귀한 아들의 인생을 망쳐 놓은 천하의 몹쓸 놈, 저는 애 낳고 할 거 다 했으면서 앞길이 창창한 우주의 발목을 잡고 안 놔주는 원수 같은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재유도 자식이 생기니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했다. 알고 싶지 않은데도 그 마음이 저절로 알아졌다. 내 자식이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을 버리기 싫은 거였다. 그래서 편리하게 화살을 재유에게 돌리고 나면 내 자식은 아무 상처도 받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오리란 미련한 집착이었다.

그런데 어찌해야 할까. 어머니의 생각이 바뀌실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 오랜 세월 버리지 못했던 우주에 대한 마음이, 어머니에겐 처절한 피눈물이 되어 버렸다.

“저 어머니까지 원망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어릴 땐 그저 아버지 하란 대로 살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버지든 어머니든 재유 건드리시면 저 정말 아무도 없는 데로 도망쳐서 숨어 살 거예요. 그러니까….”

짝-

뺨을 내리치는 날카로운 살 소리가 들렸다. 재유는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쁜 자식, 못된 자식,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

울부짖는 목소리로 우주를 퍽퍽 때리는 소리가 사무실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더 듣고 있을 수 없던 재유는 뒤돌아서 현관문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마당에서 돌아보니 창가에 기다란 우주와 작디작은 어머니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재유는 지하철역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고 심란한 감정에 휩쓸렸다. 누군가 어깨라도 부딪힌다면 죽도록 두들겨 패거나 죽도록 얻어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머리끝까지 화도 나고, 엉엉 울고 싶기도 하고, 되돌아가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빌고 싶기도 하고, 그냥 콱 죽어 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걸음은 멈추지 않고 집으로 가는 전철로 향했다.

늦은 시간에도 꽉 찬 전동차 안에는 연말 모임의 여파인지 사람들에게서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악취처럼 풍겼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와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숨이 찬 것도 아닌데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손마디가 희게 불거질 정도로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너절하고 더러워 보였다. 차내의 모든 악취가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비루하게 느껴졌다.

재유는 집보다 몇 정거장 앞서 내린 뒤 무작정 걸었다. 걸으면서 내내 남의 눈을 신경 쓰지도 않고, 눈물을 참지도 않았다. 창피한 것도 잊은 채 슬픔에 함몰되어 고통스러운 울음을 토해 내기 바빴다.

***

사무실을 나온 우주는 차에 올라타 손이 가는 대로 차를 몰았다. 마음 같아선 아무 술집에라도 들어가 진탕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진교가 형에게 연락했다고 했으니 조만간 형이 올 줄 알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그동안 전화로만 일상적인 안부를 전해 왔고 어머니도 회사 일이나 집의 위치 따위는 묻지 않았었다. 물론 찾아뵙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재유와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알고 있을 어머니의 의중이 두려워 일부러 피한 것도 있었다.

차는 한남동을 지나쳐 강변북로로 들어섰다. 밤중이라 한산해진 도로에서 우주는 마음껏 액셀을 밟았다.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마음이 개운해지진 않았다.

감정이 격해진 어머니를 달래고 사죄하느라 진이 빠져 버렸다. 자식으로서 못 할 말을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일이 터질 걸 예상하고 거리를 둔 것이었는데, 결국 어머니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 버렸다.

차라리 아버지랑 그런 갈등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럼 자기도 익숙하게 반항과 분노를 거리낌 없이 표현했을 텐데. 이제껏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지켜 주고 보듬었던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쏟아내니 마음속 굳건히 존재했던 비빌 언덕 하나가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다.

우주는 핸드폰을 꼭 쥔 채 핸들을 잡았다. 창문을 열자 강바람이 따갑게 뺨을 적셨다. 오늘따라 도시의 불빛들이 차갑고 냉담하게 느껴졌다. 자신과 재유를 축복해 주는 한 줄기 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손에 쥔 모든 것이 파도에 흔적 없이 허물어지는 모래성 같았다.

부모의 도움으로 유학 다녀온 주제에 남의 돈으로 사업하는 회사는 아직 이렇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재유와의 관계는 벼랑 끝처럼 위태로웠다. 하물며 지금 몰고 있는 이 차도 형이 준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제가 가진 능력은 미약하기만 했다.

스물여덟.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은 많은데 마음은 자꾸 성급해지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초라하기만 했다. 차라리 스물일 때가 꿈이나마 컸고,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무모함도 있었다.

재유 앞에선 뭐든지 뚝딱 해 내고, 척척 해 주고, 싹싹 정리하는 멋진 모습들만 보여 주고 싶었다. 지난번 이태원에서처럼 그렇게 못나고 비참한 모습은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워낙 강해서, 재유가 곁에 있을 때도 문득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곁에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그에게 전화하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좌절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혼자서 끙끙 앓아 대기만 했다.

그런데도 재유가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재유가 위로해 준다면 어떻게든 부딪쳐서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왜 이렇게 연락하기가 힘이 드는지.

강바람 때문인지, 서글픔 때문인지 뺨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래도 용기 내 전화를 해 볼까. 우주는 손에 쥔 핸드폰을 뚫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그때, 핸드폰 액정이 켜지며 불빛이 깜빡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수신인을 확인했다. 그의 이름이었다.

“…….”

설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와서 핸들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주는 곧바로 창문을 닫고 속도를 줄였다. 핸드폰을 쥔 주먹으로 눈가를 벅벅 닦은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폴더를 열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유야.”

-…우주야.

“응, 나야.”

-지금 어디야?

눈을 들어 교통 표지판을 찾았다. 어느새 양화대교까지 와 있었다.

“아… 일이 많아서 좀 전에 퇴근했어. 집에 가는 길이야. 너는?”

-나도 집에 있어.

“나… 너 보러 가도 돼?”

-와. 나도 너 보고 싶어.

“알았어. 30분 안에 갈게.”

전화를 끊은 우주는 곧바로 강변북로를 빠져나왔다. 다시 속도를 높이고 재차 눈가를 어루만지며 운 자국을 지우려 애썼다. 짧게 오열하다 피식 웃었다. 그걸 반복하며 재유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

창문을 열고 운전한 탓에 아직도 겨울 찬바람이 머리카락에 스며 있었다. 문 앞에 선 우주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오던 집이었는데 오랜만에 들어서려니 조금은 망설여졌다. 우주는 긴장된 표정으로 벨을 누르는 대신 노크를 했다. 작은 소리였는데도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복도 전체가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문이 열렸다.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옅은 하늘색 니트를 입은 재유는 방금 샤워를 한 듯 아직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희지가 자고 있는 걸 아는 우주는 살금살금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재유는 우울한 기색의 우주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피곤해 보인다.”

“…….”

재유의 얼굴도 파리하게 지쳐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이거… 희지 주려고 산 거야. 크리스마스 선물.”

우주가 들고 있던 종이백을 건넸다. 늘 가던 아동용 의류 매장에서 점퍼와 모자, 장갑을 샀는데 건네주지 못하고 차에만 두고 있었다. 재유는 천천히 받아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고마워. …일단 씻고 와.”

재유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갈아입을 옷을 건네고 우주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작은 침묵도 견딜 수 없던 우주는 순순히 말을 따랐다.

머리를 감고 대충 샤워를 마친 우주가 조심스레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 앉아 있던 재유가 일어나 우주 앞에 섰다.

“드라이기는 못 켜니까 방에서 머리 말려 줄게.”

재유는 손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우주를 바닥에 앉히고 침대에 앉아 뽀송한 새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 주었다.

“그동안 나 안 보고 싶었어?”

우주의 물음에 잠시 손이 멈칫했던 재유는 다시 머리통을 문지르며 물기를 털어냈다.

“보고 싶었어.”

“그럼… 생각이란 거, 해 봤어?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우주는 긴장을 감추려고 입술을 꾹 물었다. 재유는 대답 없이 머리 말리는 데 집중했다. 얼추 말렸는지 수건이 걷어지고 재유의 손바닥이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손가락 끝이 귓불과 뒷목에 닿을 때마다 훈기가 느껴졌다.

“…우선 자고 내일 얘기하자.”

재유는 별말 없이 방을 나가서 수건을 빨래통에 넣고 돌아왔다. 우주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재유가 이불 한쪽을 들추고 먼저 침대 안쪽에 누웠다.

“이쪽으로 와.”

“…….”

우주가 저항 없이 옆에 눕자 재유는 이불을 덮어 주며 폭 감쌌다. 대답을 듣지는 못했어도 따뜻한 재유의 몸이 만져지자 안도감에 마음이 풀어졌다.

“우리 우주….”

재유는 우주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등을 쓰다듬었다.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내가 네 앞에 안 나타났다면 좋았을걸. 재유는 뒷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길에서 실컷 울고 집에 돌아온 재유는 희지를 재우고, 우주도 품 안에 재우고 싶었다. 다른 걸 떠나 어머니와 힘겨운 실랑이를 벌이고 홀로 집에 들어갈 그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커다란 몸이 품속에서 들썩거렸다. 재유는 너무 울어 눈이 빠질 듯 아팠는데도 또 눈물이 새어 나오려 했다.

“우주야. 다 괜찮아질 거야.”

“어떻게? 어떻게 괜찮아지는데? 내 옆에 계속 있어 줄 거야? 너 나랑….”

“우주야…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그냥 자자. 너 내 옆에서 재우고 싶어서 연락한 거야. 안 그럼 못 잘 것 같아서. 내가 토닥토닥해 줄게.”

재유가 우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닿은 입술을 한껏 오므려 꾹 누른 깊은 키스였다. 뺨을 이마에 갖다 대고 다시 우주의 등을 토닥였다.

***

눈을 떴을 때 희지가 곁에 있었다.

“아빠! 우주 삼촌 깼어!”

희지는 우주의 머리맡에 얼굴을 내밀고 반갑게 웃었다. 침대 밑에 있던 우유도 폴짝 뛰어올라 꼬리를 흔들며 얼굴을 핥아 댔다.

“삼촌 밥 먹어요. 아빠가 미역국이랑 불고기 했어요.”

우주가 정신을 차리면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침대에 걸쳐 있는 희지와 우유를 보니 자연스럽게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리 희지, 오늘도 예쁘네? 학교 안 가니까 심심하지?”

“아뇨? 늦잠 자니까 좋은데요? 이따 학원에서 친구들이랑 놀 거니까 괜찮아요.”

“그랬구나. 우리 희지, 삼촌이 안아 줄까? 우유도 이리 와!”

우주가 몸을 숙여 읏차, 소리를 내며 희지와 우유를 안아 올렸다. 방을 나가자 재유는 부엌에서 밥을 푸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짓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희지와 우주가 식탁에 모이니 재유도 불고기 접시를 식탁에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희지도.”

“잘 먹겠습니다!”

“…응. 고마워.”

우주가 한술 뜨자 재유도, 희지도 숟가락을 들었다. 희지는 우주의 밥에 불고기를 놔주면서 생긋 웃었다.

“삼촌 내일모레 생일이니까 아빠가 만든 거래요. 많이 먹어요!”

“그랬어?”

생일에 챙겨 주면 되는데 왜 미리 미역국을 준 걸까. 생일날 못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재유는 잠시 눈을 마주치며 뭔가 말하려나 싶더니 희지가 반찬 흘리는 걸 보고 냉큼 행주를 가져와 닦았다. 대화가 끊기며 잠시 어색해졌는데 재유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밥 먹고 애들이랑 산책 갈 건데, 어때?”

“좋아. 가자.”

“오늘 사무실 안 나가도 돼?”

“너랑 점심 먹고 오후에 가지 뭐.”

“…이것도 먹어. 마늘종 좋아하잖아.”

재유가 수저에 마늘종을 놔주자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속에 넣었다. 고3 어느 날, 재유가 시장에서 마늘종 한 단을 사서 무침을 만들었는데 한 끼에 절반 이상을 먹어 버린 일이 있었다. 밥도 세 그릇이나 먹었더랬다.

그 후로 우주는 마늘종을 볼 때마다 그날 일이 생각났다. ‘그렇게 맛있어?’ ‘좀 싸 줄까?’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라고 말하던 재유의 기쁜 듯한 얼굴과 알싸한 마늘종의 맛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우주는 오늘 밥상도 잊혀지지 않을 거라 직감했다. 소고기가 넉넉히 든 구수한 미역국과 달고 짭짤한 불고기, 동그랑땡과 계란말이, 시금치와 숙주나물까지. 함께 잠들었는데 언제 일어나서 이 많은 음식을 만든 건지.

재유는 예전부터 기분이 울적할 때면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요리나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하거나, 코바늘로 수세미를 만들거나 정 할 게 없으면 낙서처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아마 어제 단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이별하는 방법도 재유다웠다. 헤어지자고 할 거면서 씻기고, 재우고, 먹인다.

어느 정도 예감했다.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이별의 목전까지 와 버렸다. 재유의 표정이, 말투가, 얼굴의 그늘이 그것을 차근차근 각인시켜 주었다.

그래도 막아야지. 헤어지는 것만은.

늘 맛있던 재유의 음식이 오늘은 더 맛있었다. 우주는 어느새 두 그릇째 먹고 있었고, 남은 밥을 미역국에 말아서 김치와 함께 차곡차곡 입속에 밀어 넣었다. 재유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꼼짝없이 붙들어 놔야지, 하며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행동거지에 반해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울리는 게 문제였다.

“우주 삼촌. 가족사진 언제 찍을 거예요?”

“음… 오늘 찍을까?”

“오늘? 진짜요? 그럼 나 저번에 아빠가 사 준 옷 입고 찍을래!”

“그랬어? 그럼 그거 입고 찍어야지. 제일 예쁜 걸로 입어.”

“참! 영선이 고모도 있어야 되는데? 어떡하지?”

듣고 있던 재유가 희지를 말리고 나섰다.

“희지야, 밥 다 삼키고 말해. 자꾸 흘리잖아.”

우주는 질세라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영선이 고모는 없어도 돼. 우리끼리 찍자. 응?”

영선을 빼고 찍자는 말에 희지가 시무룩해졌다.

“안 돼. 영선이 고모한테 전화해 볼래!”

“한희지. 영선이 고모 벌써 출근했을 테니까 사진 못 찍어. 그만하고 마저 밥 먹어야지.”

재유가 단호한 말투로 다그치자 희지가 입을 삐쭉 내밀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우주는 상심한 희지의 입에 계란말이를 갖다 댔다. 희지는 아빠를 흘겨보면서도 우주가 주는 건 넙죽 받아먹었다. 우주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남은 밥을 먹어 치웠다.

가족사진이라. 지나가는 말로 희지한테 흘리긴 했는데, 재유는 찍어 줄 생각까진 없나 보다. 입가에 번진 씁쓸한 웃음을 손바닥으로 넓게 쓸어 없앴다.

다 먹고 일어선 우주는 익숙하게 밥상 치우는 걸 거들었다. 희지는 벌써 겉옷을 입고 우유의 간식과 배변 봉투를 챙기고 있었다.

“설거진 다녀와서 내가 할 테니까 나가자.”

“그래. 어디로 갈 거야?”

“희지 학교 뒤에 있는 공원. 너 가 봤던가?”

“아니.”

“오늘 가 보면 되겠네. 가자.”

바깥 공기는 차가웠지만 드물게 구름도 적고 공기도 맑은 산뜻한 겨울 날씨였다. 방학이라 학교 부근에는 사람이 뜸했다. 재유는 우유의 목줄을 잡고 걸었고, 우주는 희지의 손을 잡고 뒤따랐다. 희지는 학교 앞에서 먹었던 피카츄 돈가스라던가, 문방구 앞에 놓인 오락기에 대한 얘기를 쫑알댔다. 우주는 아이의 말에 웃어 주고 맞장구를 치며 재유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공원에 도착하니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얕은 산에 산책길을 내고 가운데에 널따란 광장을 만들어 놓아 근처 사는 주민들이 애용하는 장소인 듯했다. 배드민턴을 치는 젊은 사람들, 아이들과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부모들, 운동기구에서 능숙하게 몸을 놀리는 어르신들까지.

우리도 여기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평범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남들 눈에 가족처럼 보이지 않을까. 우주는 실없는 상상을 했다.

희지가 아는 얼굴을 만났는지 광장으로 달려 나갔다. 친구로 보이는 또래 아이와 함께 우유를 둘러싸고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재유는 희지에게 멀리 가지 말라고 큰 소리로 외친 뒤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뽑아서 우주에게 건넸다.

“여기 잠깐 앉을까?”

“응….”

매점 앞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시선이 달랐다. 재유는 희지가 뛰고 있는 걸 주시했고, 우주는 재유만 보았다.

“우주야 너… 이 동네에서 이사 가.”

우주는 막혔던 호흡이 터지듯 거친 숨을 내뱉었지만 예상한 바여서 침착을 가장했다. 제 손에 들려 있던 캔커피를 따서 재유 앞에 놓고, 재유의 손에 든 걸 열어 한입 마셨다. 뜨듯한 단맛이 입 안에 퍼졌다. 방금 들은 말이 별일 아니라는 듯 우주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애썼다.

“사무실까지 옮기긴 힘들 테니까, 집이라도 이사해.”

“…….”

떠들썩한 공원의 소음이 딴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재유를 마주 본 테이블에선 기묘한 평화 속 이질적인 침묵이 맴돌았다.

“그만하자, 이제.”

벽이 높고도 견고해 보였다. 우주는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왜 그러고 싶은지나 얘기해 봐.”

“얘기하면?”

“그래도 안 헤어져.”

“갑자기 그러는 거 아니야. 얼마 전부터 계속 생각했어.”

“알아. 그러니까 왜.”

재유는 어깨너머로 희지를 보며 눈을 맞춰 주지 않은 채 손에 꼭 쥔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교 때문이야? 이제 그만둘 거야. 친구도, 동업자도, 회사도 다.”

“나 때문에 그럴 거 없어.”

“왜 그럴 게 없어? 난 상관없어. 사무실 접는 거 별일 아니야. 진교 보내고 다시 시작하면 돼. 너랑 헤어지는 것보단 그게 더 나아.”

“…얼마 전에 사무실에 쿠키 주러 갔을 때 너 일하는 모습 봤어. 참 멋지고 근사하더라.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잘나고 예쁜 사람들이라서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어. 나랑은 비교되게.”

재유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비쳤다. 눈빛은 황량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게 이유라는 거야?”

“이진교 씨도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그 사람 때문만은 아니야. 우린 애초에 남자끼리고, 난 초등학교 다니는 애도 있어. 우리가 앞으로 잘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몇 달, 몇 년은 잘 지내겠지. 근데, 그걸 너희 부모님이 계속 두고 보실까? 게다가 이진교 씨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른 누군가가 너한테 접근하는 걸 볼 때마다 난 열등감을 느끼겠지. 이번에 깨달았어.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질투하는 내 모습이 참… 구리더라고.”

“그만.”

우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쇠로 달군 꼬챙이가 몸 안쪽을 할퀴는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하나하나 얘기해 보자. 지금 헤어지지만 않으면 몇 달, 몇 년이 걸리더라도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그래. 우리 부모님은 시간이 필요해. 아직은 포기가 안 되시니까. 그건 내가 차근차근 설득할 수 있어. 설사 설득이 안 된다고 해도 상관없고. 네가 정 부모님이 마음에 걸린다면 나도 끝까지 포기 안 할게. 그리고 내 주위에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들이 있어도 내 눈엔 다 너만 못해. 그럼 된 거 아냐? 그리고 네가 애 아빠라는 건 너만 극복하면 될 일이야. 내가 아무 상관없으니까. 다른 사람 눈 따윈 신경 쓰지 마. 다른 사람들, 생각보다 우리 인생에 별 관심 없어.”

“우리 인생….”

재유가 씁쓸하게 후후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인생이지. 그런데 우주야. 난 네 인생이 너무 소중해. 그래서 그래. 내 옆에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방해가 되면 안 되잖아.”

“방해? 더 나은 삶?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너만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떤 마음인지. 솔직하게 말해 봐. 진짜 이러는 이유가 뭔지.”

재유는 여전히 희지를 드문드문 바라보고 있었다. 냉정하리만치 올곧은 자세였다. 우주는 재유의 눈짓 하나, 말투 하나에 매 순간 상처받고 있었다. 자신을 보지 않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너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거 느끼지 않았어. 우리 집은 사글셋방이고, 너희 집은 3층짜리 저택이었어도 그냥 잘사는 남자친구 정도였지. 내가 너희 공장에 들어갔을 때도 내 힘으로 취직한 거니까 거리낄 게 없었어. 그런데, 우리 사이가 들키자마자 난 공장에서 내쫓기듯이 다른 지역으로 가야 했고, 넌 6년째 집에도 안 들어가게 됐잖아.”

“…….”

“너 미국에 있는 동안은 떨어져 지냈으니까 마음에 담아 두고만 있었는데, 널 다시 만나고 옆에서 그걸 지켜보니까… 생각보다 못 견디겠더라.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니… 답이 나왔어.”

“그래서 헤어지는 게 답이라는 거야? 내가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게 너랑 헤어지는 이유라는 거야? 넌 왜 그렇게 날 집에 못 들여보내서 안달이야? 내가 결혼이라도 하길 바래? 우리, 사랑해서 만나는 거 아냐?”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는 재유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잊을 자신 없어.”

“재유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재유는 표정을 지우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주는 저만 안달 난 것 같아 속이 뒤집혔다.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나더러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그런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헤어지자니. 소리라도 지르며 그를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재유는 차분하기만 했다. 눈빛은 결연했다. 어딘가 자신을 억누르는 힘이 있었다.

“우리가 남자끼리가 아니어도 한계는 명확했을 거야. 애 딸린 홀아비랑 젊은 총각을 세상눈이 곱게 보지 않을 테니까. 하물며 너희 집에선… 법대도 그만두게 만들고, 추잡한 소문이나 퍼지게 만든 내가 아직도 널 만나고 있다면, 내가 부모라도 반대할 거야.”

“그건 내 문제야. 나랑 우리 가족 문제라고.”

“아니, 내 문제이기도 해. 그걸 감당해야 하는 내 입장은 생각해 봤니?”

갑자기 재유가 움찔하며 반쯤 일어섰다. 희지가 뛰다 넘어질 뻔했는데 다행히 중심을 잡고 친구와 마주 보며 깔깔 웃고 있었다. 재유는 다시 자리에 앉아 계속 희지를 주시했다. 우주는 그런 재유를 보며 안중에도 없는 자신이 선 밖으로 내쳐지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왜… 갑자기 중요해졌어?”

우주는 힘없이 물었다. 커피를 쥐고 있는 재유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난 다 버리고 너한테 갈….”

“다 버리고 나한테 온다고 내가 행복할 것 같아? 넌 영원히 집에 돌아가지 않을 자신 있어? 너희 엄마, 아버지, 형, 이제 형수님이랑 조카까지 있는데. 가족 등지고 나만 보면서 살면, 그게 온전히 네 모습이야?”

“…….”

“그래. 사실, 그런 상상 하기도 했어. 마음 한쪽이 텅 빈 널 끌어안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냐. 근데 우주야… 그게 얼마나 가겠니.”

“그런 말 하면 내가 예전처럼 포기할 줄 알았어? 네가 하는 말, 하나도 설득 안 돼. 그땐 아버지 앞에서 네 손 붙잡고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사랑한다면서 내 미래를 생각해서 헤어지자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린 이제 성인이잖아. 우리가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어. 애초에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면서 살 순 없는 거잖아.”

재유가 손을 들어 커피를 더 마시고 다시 희지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이별을 말하는 그는 울음을 비치지도 않았고, 감정이 격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어린 딸의 놀이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아빠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한재유, 넌 한 가진 성장했구나. 처음 헤어졌을 땐 끝까지 냉정하지는 못하더니.

“처음 들켰던 날, 우리 모습 찍은 사진 있잖아. 그거 누가 찍은 건 줄 알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거… 인애였어. 인애가 우리 사진 몰래 찍고 너희 집에 보낸 거야. 나도 인애가 죽은 후에 알게 된 거라서 왜 그랬는진 몰라. 넌 아직 너희 아버지가 사람 시켜서 한 일로 알고 있지?”

뜻밖에 장인애가 등장해 우주는 잠시 멍해졌다.

“그런… 그게 무슨….”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넌 그동안 아버지를 오해하고 이제껏 원망해 왔을 텐데.”

첫 이별의 단초가 희지의 친모에게서 나왔다니.

우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톱니는 어디서부터 잘못 끼워진 걸까. 우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혼란스러운 듯 테이블 주위를 서성거리다 문득 광장에 있는 희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희지는 목줄을 잡고 친구와 함께 우유가 달리는 대로 뛰어놀고 있었다. 장인애가 재유를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을 아이.

“…….”

어린 희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우주는 희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정이 들어 버린 희지까지 미워하고 싶진 않았다.

장인애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가족들은 알게 됐을 거고, 아버지의 다른 반응을 상상할 순 없으니 바뀌지 않는 과거를 붙잡고 늘어질 순 없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삶을 바꿔 나가면 그뿐.

만약, 내가 스스로 밝힐 기회만 있었어도… 하는 착잡한 아쉬움만 있을 뿐이다. 놀라긴 했지만 장인애는 죽은 사람이니 현재의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우주는 다시 재유 앞에 단단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상관없어. 언제 알려져도 알려질 일이었어.그게 지금 와서 우리가 헤어질 이유는 아니야.”

“나도 인애를 원망할 생각은 없어. 인애 때문에 우리 사이가 알려지고 힘든 일들이 일어났지만, 난 이제 희지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어. 내가 언젠가 인애랑 잔 거 후회한다고, 너한테 죽을죄를 지었다고 한 적 있지?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까지 말하지 마. 나한테도 희지는 소중해.”

우주는 괴로운 얼굴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안 돼. 넌 희지한테 잠재적인 위협이야.”

“위협이라니… 왜?”

재유가 한 말이 우주를 찔렀다. 재유와 서먹할 때도 희지는 예뻤는데. 희지 주려고 인형도 사고, 동화책도 사고, 일부러 희지가 좋아할 만한 장소들로 데이트 약속을 잡으며 아이를 우선으로 했는데. 앞으로 희지가 커 나갈 기쁨을 재유와 함께 만끽하려 했는데….

그런데도 부족했나. 그 마음이 외면당한 것 같아 서운함이 밀려왔다.

“한 번 겪어 봤잖아.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지. 식당에서 말들이 나오고 있어. 쉬는 시간에 매번 찾아오고 사무실도 가까워서 우리가 만나는 걸 직원들이 자주 봤으니까. 그냥 친구 사이는 아닌 것 같다고.”

“…….”

“난 희지에게 아빠가 동성애자이고, 사실은 우주 삼촌이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라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아. 남들이 떠들어 대는 소문이 희지 귀에 들어가서도 안 되고.”

우주는 결국 말문이 막혔다. 희지는 어리지만 영민한 아이였다. 언젠가 재유를 보며 붉어진 얼굴을 희지가 보더니 ‘삼촌, 울 아빠 좋아해요?’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재유를 어떻게든 구워삶아 설득할 자신이 있지만, 희지는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딸이지만 아이의 삶이나 미래까지 자신이 컨트롤 할 수는 없었다. 방법도 몰랐다.

“네 말대로 우린 성인이고 살아갈 모습을 스스로 정할 수밖에 없어. 난 희지가 자기 삶을 찾아 떠나갈 때까지 온전히 희지 아빠로서만 살고 싶어. 희지한텐 내가 전부니까.”

“…….”

그럼 난? 난 어쩌라는 거냐고. 또 네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사라져야 하는 거냐고 속에서 울부짖으며 아우성쳤다. 역시 손에 쥔 건 모래성이었나. 물에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려 한다.

“그럼… 이렇게 헤어지자는 거야?”

“…….”

“넌 또 날 이렇게 쉽게 버리는구나.”

“…….”

“왜 헤어져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렇게 사랑하는데. 넌… 나 안 보고 살 수 있어? 난 그렇게 못 해. 재유야.”

어깨너머로 아이를 주시하며 담담하게 듣던 재유가 시선을 돌려 우주를 똑바로 봤다. 차분하고, 아름답고, 냉정했다.

“넌 전처럼 망가지지 않을 거야. 내가 달라졌듯이 너도 변했어. 너한텐 회사도, 가족도, 친구도 있으니까 의지하면서 잘해 나갈 수 있어. 넌 그 사람들 저버리지 못할 거야.”

우주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내내 참았던 울분을 쏟았다.

“너 진짜 못됐다…. 왜 너만 중요하고 내 말은 안 듣는 건데?”

재유도 일어섰다. 쥐고 있던 캔커피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처음 헤어졌을 때도… 이런 얘기 했었지.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지는 건 계속 만나더라도 같은 문제로 부딪히고 싸우게 될 뿐이야. 난 이제 정리할 거야. 너도 과거도 사랑도. 이제 난 희지뿐이야.”

우주는 비참한 기분으로 재유를 노려보았다. 아직 할 말이 많은데. 끝난 게 아닌데. 어찌할 도리 없이 주먹을 꼭 쥔 채 재유를 등지고 돌아서 버렸다.

“나, 이제 예전처럼 다 버리고 못 떠나. 희지 학교도 친구도 여기 있으니까, 네가 이 동네에서 나가.”

뒤통수에 들려오는 쐐기를 박는 말투에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너무 잔인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사랑해도 상처를 주니 미웠다.

우주는 가지가 성긴 겨울나무를 품은 건조한 흙을 바라보며 공원을 벗어났다.

“…미안해.”

큰 소리가 난 것에 놀랐는지 희지가 우유를 데리고 곁으로 다가왔다.

“아빠 왜 그래? 우주 삼촌이랑 싸웠어?”

“…….”

“삼촌 왜 먼저 가? 나 때문이야?”

“희지 때문 아냐. 아빠랑 삼촌이랑 싸웠어. 이제 삼촌… 안 올 거야.”

재유는 희지를 보며 슬프게 웃었다. 일부러 이곳에서 이별을 말한 건 의도한 것이었다. 희지가 마취제 역할을 해 줄 것이기 때문에, 그를 덜어 낸 자리에 오롯이 들어찰 수 있는 존재는 희지뿐이기에, 일부러 희지가 있는 곳에서 헤어지고 싶었다.

얼떨떨한 아이의 표정이 금세 아빠에게 동화되어 울상이 되려고 했다. 재유는 얼른 자세를 낮춰 희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희지 목마르지? 주스 사 줄까? 아님, 호빵?”

재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스크림이요.”

“그래, 가자.”

재유는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희지를 데리고 매점으로 들어갔다. 겨울에는 절대로 아이스크림을 사 주지 않는 재유였는데, 손 시린 아이에게 꽁꽁 얼은 하드를 쥐여 주었다.

재유는 희지와 우유를 데리고 우주가 돌아섰던 길을 따라 다시 집으로 향했다. 바람에 눈이 시리다는 핑계로 조금 울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완벽한 보통 날의 시작은 이별이었다.

***

해가 바뀌고 며칠이 지나도록 우주는 머릿속에 붕붕 떠 있는 생각을 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발길은 어쩔 수 없이 재유의 식당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얼굴을 보며 공원에서 못다 한 말들을 하고 싶었다.

재유가 원하는 걸 다 해 줄 작정이었다. 식당에 오지 말라면 안 가고, 소문이 신경 쓰이면 집도 다른 동네로 이사하겠노라고. 진교와 회사도 정리하고 부모님 집에 들어갈 거라고.

다 버려도 재유를 잃는 것보단 나았다. 며칠 동안 괴로운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도 재유는 거부할지 모르지만, 매달리는 것조차 하지 않으면 이대로 끝이므로 하는 수 없었다.

식당은 브레이크 타임인데도 아직 점심 연회의 뒷정리가 마무리되지 않은 건지 메인 홀이 어수선했다. 우주는 서버들 중 아는 얼굴을 찾아보았다. 재유는 주방에 있을 테니 불러 달라 할 심산이었다. 마침 가까이 있던 지배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우주의 얼굴을 알아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한재유 씨 찾아오셨나요?”

“네. 지금 쉬는 시간 맞죠? 잠깐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쉬는 시간인 건 맞는데, 재유 씬 오늘 없어요.”

“오늘 쉬는 날이던가요?”

지배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요. 그만뒀습니다.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요.”

“아….”

우주의 얼굴에 그늘이 생기고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직장까지 그만둘 줄은 몰랐다. 아니, 예상했던가. 사는 집도 한 동네고 식당과 사무실도 10분 거리니 당연한 건가.

나한텐 집을 옮기라더니, 자기는 식당을 그만둠으로써 거리를 뚝 떨어트리는 걸 완성할 작정인가 보다. 목이 콱 막히고 코가 먹먹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무리에서 혼자 떨어진 철새처럼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우주는 당황하고 서운한 마음을 억누르며 겨우 입술을 열었다.

“혹시… 어디로 옮겼는지 아십니까?”

“그건 말을 안 해서 잘 모르겠네요. 주방 친구들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따로 전해 들은 건 없습니다.”

“…….”

쓰디쓴 잔을 비웠을 때처럼 얼굴이 구겨졌다. 고개를 떨군 우주가 납득했다는 듯이 주억거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종종 식사하러 오겠습니다.”

빈말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돌아서려는데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어디로 옮겼는진 모르지만, 당분간은 쉬고 싶다면서… 딸 방학 기간에 맞춰 여행 간다고 했었어요.”

적당한 접객용 미소를 지으며 알려 준 지배인의 정보는 우주를 또 한 번 실소하게 했다. 잠시간 멍하니 서 있던 우주는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식당을 나온 우주는 매섭게 쓸고 지나가는 산바람에 얼굴을 홱 틀었다. 꼭 감은 눈에는 물이 맺혔다. 언 손으로 코트 깃을 세우고 식당을 되돌아봤다.

이곳에서의 기억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우주는 산마루를 등진 너른 한옥을 흐리게 눈에 담았다. 지금의 기억도 머릿속에 새겨지리라. 군대에서, 또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핸드폰을 꺼내 재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기도 전에 냉정한 음성이 귓가를 때렸다.

-지금 전화기가 꺼져 있으니 다시 걸어 주시기….

예상대로 꺼져 있었다. 공원에서 헤어지자 말하고, 식당에 출근하고, 퇴사하고, 다음 날 여행을 간 건가.

바빴겠다, 재유야. 계획을 촘촘하게도 짜 놨네. 내가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헤어지려고 얼마나 머리를 싸맸을까.

가슴이 저리는 것과 동시에 서글픈 연민도 들었다. 재유가 마침표를 찍고 페이지를 덮으려 한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다만 해소되지 않는 건 ‘왜’였다. 왜 그렇게까지 날 밀어내려 할까. 재유도 날 좋아한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를 테두리 바깥으로 내몰고 무엇이 그를 도망치게 하는 걸까.

재유는 필요 이상으로 불안을 확장하고 몸을 사려 왔다. 적어도 우주 생각엔 그랬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다 가진 걸 모두 잃은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걸까. 재유는 손에 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주먹을 틀어쥐고,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 몸을 최대한 웅크린 것처럼 보였다.

그게 그렇게 소중해서 나까지 내칠 정도인가. 그냥 한 발만 더 내딛는 작은 용기만 필요할 뿐인데.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겪어 보지도 못했으면서 왜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 나와 가려는 곳이 황량한 사막이나 질척한 늪은 아닐 텐데. 낭만적인 꽃밭은 아니더라도, 잡초가 섞인 풀밭 정도는 데려다줄 수 있는데.

우주 역시 사랑만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철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넘어야 할 장애물은 존재했고, 분명 주위를 둘러싼 여건이 낙관적이지 않다는 건 알았다.

자신이 원한 건, 지치고 힘들더라도 함께 손을 붙잡고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데 재유가 이렇게 떠나면 우주도 나아갈 동력을 잃는다. 함께할 안식처를 위해 만들어 가던 견고한 성벽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손에 쥔 핸드폰에 덜렁거리는 하트 줄이 눈에 들어왔다. 재유와 처음 사고 나서 습관처럼 8년째 쓰던 거였다. 재회하고 다시 커플 핸드폰 줄로 사기로 했는데, 결국 사지 못했다는 게 쓰라린 후회로 다가왔다.

집에 찾아가도 아마 없겠지. 재유가 이렇게 나오면 길을 잃는 건 자명했다. 앞으로 난 어떻게 될까. 예전처럼 방황하고 허송세월할까, 아니면 재유 말처럼 원래의 일상을 찾게 될까.

냉랭한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가지들이 우주의 허무한 상상을 조롱하는 듯했다. 스산한 바람은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할퀴어 댔다.

처음 헤어졌을 땐 장인애라는 상대와 갓 태어날 아이가 있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됐던 것 같다. 그땐 어렸으니까. 지금은 곁에 다른 사람도 없는데 재유의 선택은 확고했다. 우주는 그의 인생에서 오롯이 내쳐진 것이다.

사랑의 크기만큼 원망과 분노가 솟았다.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과 쓸쓸함이 우주를 괴롭혔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재유에 관해 깨닫지 못하고 놓쳤었던 무언가가 발목을 잡은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 사실이 우주를 절망케 했다.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가 불투명해서. 재유를 다시 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어서. 무력감은 눈가를 적시며 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우주는 낡아서 해지기 시작한 폰 줄을 거칠게 뜯어내고 식당을 뒤로한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재유가 사라진 삶 속으로.

***

새벽안개가 가물거리던 사위가 차츰 밝아지면서 수평선 너머로 자그마한 해가 솟아나고 있었다.

재유는 잡고 있던 희지의 손이 흥분으로 흔들거리는 걸 고스란히 느끼며 고개를 틀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희지는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더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햇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우주와 헤어진 그날, 싸웠다는 말에 침울한 얼굴로 눈치만 보던 희지는 갑작스레 결정된 여행 계획에 아이다운 기분 변화를 보여 주었다. 충동적으로 떠난 터라 목적지도 일정도 없었지만 희지의 아이디어로 해돋이 명소를 찾아올 수 있었다.

새해 첫날 아침이면 TV에서 볼 수 있는 노르스름한 해가 아이의 구미를 당겼다는 게 의아했지만 달리 갈 만한 데를 떠올릴 수 없었던 재유는 한시라도 빨리 서울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채비를 서둘렀다. 그것도 우주의 생일에.

차도 없는 데다 희지와 우유의 짐까지 짊어지고 버스를 타려니 몸이 고단했다. 그래도 마음이 날뛰는 것보단 차라리 나았다. 가만 틀어박혀 있으면 그에게 달려갈지도 모를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치고 시행착오는 적었다. 아이와 개를 데리고 너무 멀리까지 가긴 벅차서 동해가 아닌 강화도를 택했지만, 해돋이를 보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급하게 예약한 펜션은 바닷가에 맞붙어 있었고, 물이 빠져나간 광활한 뻘밭에서 해가 뜨는 풍경은 예상치 못한 장관이었다.

이곳에 머무른 지도 벌써 3일째였다. 그런데도 희지는 낮잠이 길어질지언정 해돋이만은 꼭 보겠다며 새벽마다 잠에서 깨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자연히 재유도 한층 길어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재유는 쭈그려 앉아서 이미 중무장한 희지를 자신의 패딩으로 감싸 안고 떠오르는 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도 안아 달라고 끙끙거리던 우유도 품 안에 넣은 채였다.

돌봐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이별한 재유에게 불행인 동시에 다행이기도 했다. 딸린 식구가 있는 처지는 그런 한가한 감상 따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픔이 덜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떠들썩한 시간이 지나고 문득 침묵이 찾아오거나 모두가 잠든 밤의 고요에 휩싸일 때면 헤어졌다는 현실이 가슴 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럴 땐 솔직하게 아픔을 바깥으로 내놓으며 고스란히 고통을 받아들였다. 예전처럼 술에 의지할 수도 없으니 또렷한 맨정신으로 우주에게 상처 줬던 그 순간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돌리며 숨쉬기 힘들어질 때까지 눈물을 쏟아냈다.

울음이 잦아들면 사무치는 후회가 찾아들었다.

‘그때 미국엘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소식 듣고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혼자 있을 그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해서 찾아간 거였는데…

쓸쓸한 아파트에 혼자 있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였고, 아직도 날 원하는 우주 때문에 몹시도 가슴이 뛰고, 내게 키스해 오는 얼굴이 너무도 황홀했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후회를 하며 재유의 마음은 서서히 기력을 잃어 갔다.

어쩌면 자신의 공포는 그가 한 동네로 이사 오고 사무실을 식당 근처로 얻었을 때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분명한 애정의 증표였지만,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보는 건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약국 2층은 아무리 성심껏 꾸며 놓아도 우주가 전에는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었을 종류의 허름한 집이었고,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어머니의 전화를 피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늘 속이 얹힌 듯 답답했었다.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저렇게 잘난 애가 내가 뭐가 좋다고 이 고생을 하고 사나. 나만 없으면 굳이 가족들과 만나지 않을 이유도 없고, 좋은 집에 살면서 새로 차린 회사도 빵빵하게 지원받아 더 크게 키울 수 있을 텐데.

나뿐만 아니라 희지의 비위까지 맞춰 주느라 물티슈를 들고 다니면서 아이스크림 묻은 입가를 닦아 주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돈으로 주면 자존심 상해할까 봐 올 때마다 양손 무겁게 마트 봉지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될 텐데. 그때 미국에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보잘것없는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부채 의식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우주에게는 한없이 욕심만 내고 빼앗기만 하면서 줄 수 있는 거라곤 초라한 사랑뿐이라서 더 그랬다.

염우주.

재유는 소리 내지 않은 채 입 모양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해, 라고 덧붙인 말 역시 목 안에 잠긴 채 발화되지 못했다.

이렇게 후회한다고 해서 그에게 이별을 고했던 잔인한 방식이 희석되지는 않았다. 자신은 분명 우주에게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줬다. 그것도 우주가 꼼짝 못 하도록 옭아매며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세웠으니, 그는 원망을 넘어 능욕을 느낄지도 몰랐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가도, 품에 안은 작은 생명들을 보면 마땅히 그래야만 했었다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위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이별로 인한 고통과 그에 따른 책임을 제 어린 딸에게로 연결 짓는 것은 끊임없이 경계했다.

희지는 그저 세상 모르는 여덟 살 난 아이일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살아갈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제 나한테 뭐가 남았나. 부모도, 우주도 떠나보낸 휑한 자리에 오롯이 희지가 있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책임질 미래였다.

중요한 시기에 가정을 저버린 제 아버지나 영영 떠나 버린 어머니처럼 되어서는 안 됐다. 희지에겐 아빠가 필요했다. 남자 애인과 사랑에 빠져 가정에 소홀한 무책임한 아빠는 될 수 없었다.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재유는 이제 가슴 속에 감정 하나를 영원히 뚝 떼어 낸 채 아버지로서의 외길만 걸어갈 것이다.

이제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우주와의 관계를 다시 이어붙일 가망은 없어 보였다. 그러기 위해 꽤 노력했다.

우선은 식당을 그만두었다. 이미 이태원에서 싸우고 돌아온 그 밤에 결심을 굳혔었다. 그땐 헤어질 마음까진 없었는데, 이런 일을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바뀌면 직장을 옮길 거라 계획하긴 했지만, 속내는 우주와 이진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더는 가까이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러기 위해선 그 사무실에서 멀어져야만 했으니까.

그 전에 우주의 어머니가 저를 콕 집어 원망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마음을 굳히게 만들었다. 물론 우주는 다 자란 성인이었고, 가족과 연을 끊든 결혼을 하든 제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바는 아니었다. 그건 오로지 우주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내 곁에 있는다면 절반은 내게도 책임이 있었다.

재유는 우주가 제 곁에 있기엔 너무 많은 걸 잃는다 생각했고, 자기 때문에 그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그가 내 곁에 있는 걸 후회할까 봐.

혹시라도 언제고, 나에게 질린 그에게 버림받을까 봐.

그의 곁에서 그를 사랑할수록 거대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언제고 잃게 될 걸 예감한 것처럼 우주를 옥죄지 못해 안달이 날 스스로가 무서웠다.

사랑이 행복과 충만을 가져다준 한편, 고통과 불안도 동반했다. 재유는 내쳐질까 두려워 미리 그를 버린 자신의 비겁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우주를 가져서 불안한 것보다, 가졌던 때를 회상하며 추억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사랑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재유의 품이 답답했는지 희지와 우유가 동시에 몸을 비틀며 품속을 빠져나갔다. 희지가 테라스 난간에 올라서서 해돋이 사진을 찍자 우유는 희지의 발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느린 속도로 꼬리를 찰랑거렸다.

해는 이미 수평선과 제법 멀어져 푸른 새벽을 몰아내며 잔잔한 여명을 뿜고 있었다. 재유는 간헐적으로 부는 새벽바람에 매워진 눈가를 훔치면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4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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