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월의 초상
* * *
우주로부터 점심 식사에 초대를 받은 재유는 찾아온 집을 앞에 두고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사는 동네 골목 초입의 약국 2층 주택에 집을 얻은 것이다.
“하… 집 구했다는 게 여기였어?”
“응? 무슨 말 했어, 아빠?”
“아냐, 아빠 혼잣말한 거야.”
이건 뭐 감시하는 건지 뭔지….
사무실에 이어 집까지 한 동네로 결정한 우주의 집착이 귀엽기도 했지만 조금 망측스럽기도 했다. 그동안 사는 곳을 물어도 형네 집에서 잠깐 신세 진다고만 했지, 뒤로는 이렇게 깜찍한 짓을 벌이는지 상상도 못 했다. 기뻐해야 할지, 난감해야 할지 헷갈리는 와중에 희지가 손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아빠! 빨리 들어가자.”
“응… 희지야. 가서 삼촌한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알았지?”
희지는 듣는 둥 마는 둥 우유를 이끌고 벌써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동글동글 청사과가 프린트된 예쁜 원피스를 입히고 머리도 양 갈래로 땋아 올려 한껏 꾸며 주었는데, 소란을 떨며 올라가는 모양새를 보니 오늘도 깨끗한 차림 그대로 집에 귀가하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애인의 집으로 몰려가는 똥강아지들을 보며 퍽 감회가 새로웠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네, 뭐 이런 감상이었다.
재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에 화분을 고쳐 들고 얼른 뒤따랐다.
2층에 오르자 희지는 벌써 벨을 누르고 있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상기된 표정의 우주가 활짝 웃으며 반겨 주었다. 그도 긴장한 건지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희지야, 안녕? 반가워! 난 우주 삼촌이야. 정말 보고 싶었어. 어서 들어와.”
“안녕하세요.”
“어, 그래, 그래.”
우주는 희지에 이어 발견한 우유를 안아 들고 볼을 비벼 대며 뽀뽀를 퍼부었다.
“우유야! 와아, 오랜만이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삼촌도 우유 알아요?”
희지는 우유에게 아는 체를 하는 우주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우주는 당황하지 않고 희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럼, 알지. 옛날에 아빠랑 삼촌이랑 같이 키웠었거든. 재유야, 너도 빨리 들어와.”
우주는 희지에게 우유를 되돌려 주고 재유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희지에게 집 구경을 해도 된다고 말하니 아이는 호기심 가득 찬 얼굴로 거침없이 집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희지야, 뛰지 말고.”
“네에!”
재유는 우주의 옆구리를 툭 치며 슬며시 흘겨보았다.
“이 동네 이사할 거면 왜 말 안 했어? 이사할 때 도와줄 수도 있었는데. 내가 반대할까 봐 그런 거야?”
히히, 우주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우주가 얄미우면서도 귀여운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미워할 수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냥 질러 버렸지. 그리고 너도 바쁘잖아. 짐도 별로 없어서 금방 끝냈어.”
재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은 쉴 새 없이 집 안을 탐색했다. 겉으로 봤을 땐 좁아 보였는데, 방 두 칸에 거실 겸 주방까지 혼자 살기엔 충분해 보였다.
우주 말대로 짐은 별로 없어 소파, 책장, 침대 같은 간소한 가구들만 채워져 있었다. 잠만 자며 생활하기에 딱 좋아 보이는 살림 같아 보였다. 한데 그건 순전히 재유 기준이었다. 우주가 전에 살던 집에 비해선 터무니없이 좁고 낡은 집이었다.
우리가 온다고 요리를 한 건지 음식 냄새가 기분 좋게 퍼졌다. 재유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 이내 털어 버리고 손에 든 화분을 건넸다.
“공기정화 식물이래. 물은 한 달에 한 번만 주면 될 거야.”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는데. 암튼 고마워. 잘 키울게. 참, 나도 이거.”
우주가 소파 테이블에 있던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뭐야?”
“핸드크림. 일할 땐 못 쓰겠지만, 집에서만이라도 꾸준히 발라.”
“…….”
“뭐 해, 빨리 받아.”
각각 다른 향의 핸드크림 세 개가 포장된 꾸러미였다. 우주는 머쓱한 듯 손에 상자를 쥐여 주었다.
“…고마워. 잘 쓸게.”
“다 떨어지면 말해. 또 사 줄 테니까. 알았지?”
우주는 혹시 자기가 기분 상해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 같았지만, 재유는 그런 기색 없이 미소를 되돌려주었다.
“음식 뭐 했어? 냄새 좋다.”
“스테이크 소스 만들고 있었어. 아직 완성되려면 좀 걸리니까 잠깐 기다려.”
“나도 도와줄게.”
재유가 팔을 걷어붙이고 우주와 함께 주방에 달라붙었다. 그동안 희지는 어디서 찾은 건지 야구공과 글러브를 들고 우유에게 공을 던져 주며 놀고 있었다.
우주가 준비한 요리 재료는 치킨샐러드와 크림파스타, 안심 스테이크와 야채볶음밥이었다. 재유가 통마늘과 버섯, 안심을 구울 동안 우주는 옆에서 볶음밥을 만들었다.
요리가 하나씩 완성되면서 우유는 어느새 낑낑거리며 재유의 종아리를 긁어 댔고, 희지도 배고프다며 아우성을 쳤다.
“다 됐다, 많이 기다렸지? 어서 먹자.”
우주가 흥겨운 듯 음절 끝에 약간의 멜로디를 붙여 식탁에 앉길 권했다. 따로 마련한 건지, 어린이용 접시에 스테이크와 볶음밥, 파스타와 샐러드를 담아 내놓았다. 스윗 앤 사워 소스를 뿌린 샐러드 위에는 토끼 모양으로 자른 당근이 곁들여 있었다.
우와, 감탄을 하는 희지에게 씨익 웃어 주고는 맨밥과 고기를 담은 우유의 밥그릇도 잊지 않았다.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많이 먹어. 더 있으니까.”
평소에 한식만 주로 먹었던 희지는 곧잘 먹었다. 우유도 그릇에 코를 박은 채 밥이 액체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흡입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주는 방에서 선물꾸러미를 들고 와서 희지에게 건넸다. 희지는 바로 받아들지 않고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재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곧바로 포장을 뜯어 보았다. 디즈니 공주 인형이 담긴 인형의 집이었다.
꺄악, 기쁨의 비명이 아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우주의 입꼬리도 승천을 했다.
“이거 저 주는 거 맞아요?”
“그러엄! 당연히 희지 꺼지!”
“아빠, 나 오늘 너무 행복해. 너무 기분 좋아!”
“그래? 그럼 기분 더 좋아지게 치즈케이크 줘야겠네?”
“진짜?”
희지는 두 손을 볼에 갖다 대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재유는 핸드폰을 꺼내 얼른 사진을 찍었다.
“우주 삼촌이 너 좋아한다길래 사 놨대.”
“진짜요? 고맙습니다!”
희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우주의 품에 안겼다. 우주는 감동받은 얼굴을 하며 재유와 눈이 마주쳤다.
얼싸안은 두 사람을 보자 퍽 애틋하고 뭉클한 감정이 밀려왔다. 희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우주에게 무척 고마웠다.
재유는 설거지를 하려 했지만, 우주는 내버려 두라며 대충 식탁만 치우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 희지는 곳곳에 위치한 식당이나 예쁜 옷가게, 그리고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나 태권도 학원을 지나며 우주에게 쫑알쫑알 얘기를 해 주었다.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가로수가 길을 감싸고 있었다. 따스하고 바삭한 공기에 스며들 듯이 세 사람은 평범한 서울 한복판의 거리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세차게 줄을 당기며 달려 나가는 우유의 에너지를 느끼면서 재유는 의욕이 넘쳐 오르는 게 느껴졌다.
열심히 살아야지. 희지와 우주를 위해서. 재유는 오늘의 다짐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로 했다.
***
2008년 10월.
한창 피크타임인 저녁 시간대, 재유는 모자란 나물을 다시 무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정신은 산만하기만 했다. 늘 주방에 있으면 긴장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랬다.
우주가 6시에 열두 명을 예약하고 회사 직원들과 회식을 잡았기 때문이다. 들어올 때 잠깐 보고 눈인사만 나눈 채 바로 주방에 들어왔는데, 지금쯤은 메인 접시를 걷고 식사와 후식만 남은 상황이었다.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모습을 보니 문득 학교 때 모습이 생각났다. 우주는 그때도 인기가 많은 중심인물이었는데, 그런 우주와 함께 다녀서 주목받는 일이 껄끄러웠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났다. 그 기억으로 더 긴장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우주는 정신없이 바빴었다. 매일같이 만나고 있긴 하지만, 우주가 시간을 쪼개서 식당 브레이크 타임에 잠깐 얼굴을 비추거나 퇴근하고 나서 재유의 집에 들르는 식이었다. 길어야 30분에서 1시간 얼굴을 보는 짧은 만남이었다.
집에 못 가는 날도 많아 사무실에서 밤샘을 할 때는 재유가 퇴근길에 먹을 것을 사다 주기도 하고, 집에 들러 옷들을 챙겨 갖다 주기도 했다.
우주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회사를 차린 지 5개월도 안 됐는데 직원 열 명을 뽑고 1인분에 15만 원이나 하는 한정식집에서 회식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동안의 노력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는 걸 뜻했다.
무나물과 시금치를 다 무친 재유는 칼이나 그릇 따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현준이 주방 입구에서 “재유 님 잠깐만.”,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지배인님. 왜요?”
“11번 룸에서 잠깐 부르시는데. 지인이야?”
“아… 네.”
“잠깐 얼굴만 비추고 와. 괜찮죠?”
조리장님께 묻는 거였다. 무뚝뚝하고 카리스마 있는 조리장은 홀에서 나온 접시를 확인하다 말고 재유를 흘끔 보더니 현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유는 얼른 손을 씻고 종종걸음으로 우주가 있는 룸까지 달려갔다. 한창 바쁜 시간이니 시간을 많이 낼 순 없었다. 안에선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긴장된 마음으로 이마를 훔친 재유는 노크를 하고 미닫이문을 슬쩍 열었다.
“재유야! 왔어?”
우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재유를 와락 껴안았다. 술을 마신 건지 불긋한 얼굴이 기분 좋게 취한 것 같았다. 재유는 순간 뽀뽀를 받는 게 아닌가 의심하며 잔뜩 굳은 채 얼굴을 뒤로 쭉 빼고 말았다. 우주는 개의치 않고 재유의 등에 손을 얹고 룸 안쪽으로 들이며 직원들에게 소개를 했다.
“여러분 주목! 이 음식들, 여기 이 친구가 만든 거예요.”
“정말요? 잘 먹었어요.”
“엄청 맛있었어요.”
“또 오고 싶어요!”
재유는 자기가 다 만든 건 아니라며 황급히 손사래를 치고 경직된 웃음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남녀의 비율이 고루 섞여 있고 전부 젊은 사람들뿐이라 언뜻 보기에 회식이 아니라 동호회 모임이나 짝짓기 미팅쯤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불편한 기색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뻘쭘하게 뒤돌아 나가려는데, 우주가 여전히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귓속말로 속삭였다.
“희지 그림책이랑 우유 간식 사 놨어. 내일 가지고 갈 테니까 연락할게.”
“알았어. 얼른 앉아서 후식 먹어.”
재유는 다시 한번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얼른 룸을 빠져나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긴장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방으로 가려다가 대화 소리에 멈칫했다.
“대표님, 친한 친구분이신가 봐요.”
“친구 아닌데? 애인이거든요?”
“어우, 진짜….”
“거짓말, 친구분이 아까워요!”
“그건 맞아요.”
능청을 떨며 대꾸하는 우주가 와하하 웃었다. 그 목소리가 가슴 속에 쩌렁쩌렁 울려 댔다. 재유는 얼굴이 붉어진 채 문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직원들한테 커밍아웃이라도 할 셈인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좀 조심하면 좋을 텐데.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지만, 직원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우주의 모습이 밉지만은 않았다. 주방으로 돌아오자 한숨 돌렸다는 듯이 편안한 얼굴이 된 재유는 감상을 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일에 달려들어 반찬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재유는 브레이크 타임에 바깥에 널어 둔 행주를 걷어 개키고 있었다. 식사를 포함해 2시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지만, 근처에 외출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약속을 잡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우주가 찾아오지 않으면 종종 소일거리로 휴식 시간을 채웠다. 낙엽을 쓸거나 서버들을 도와 소독된 식기들을 닦는 그런 일들이었다.
가을볕에 빳빳하게 마른행주들을 알 수 없는 오기로 각까지 잡아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을 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재유 님, 손님 왔어요.”
“아, 네.”
자신과 비슷한 경력의 서버가 고개만 내민 채 할 말만 전하고 나가 버렸다. 재유는 으레 우주인 줄 알고 미련 없이 행주를 팽개치며 자리에 일어섰다. 늘 만나는 메인 홀 입구로 나가려는데, 손님용 테이블에 어딘가 낯익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재유는 설마, 하며 머뭇거리며 그쪽으로 향했다.
“혹시… 저 찾아오셨어요?”
“네. 한재유 씨 맞죠?”
“아…! 우주랑 같은 회사에 친구분….”
남자는 맞다는 의미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 드실래요? 커피랑 녹차 있는데.”
“금방 갈 거니까 괜찮아요. 잠깐 얘기하려고 왔어요.”
재유는 우주의 동업자가 왜 여기에 찾아온 건지 의아했다. 사무실에서 두어 번 마주쳤었고, 어제 회식차 식당에 왔을 때도 얼굴을 봤던 게 기억이 났다.
디자이너라고 했었나. 그래서 그런지 보통 차림새는 아닌 듯했다. 딱 붙는 스키니진에 카라인지 장식인지 모를 천 쪼가리가 검은색 상의의 절반을 뒤덮고, 그 위에 추운 날씨를 고려하지 않은 듯한 얇은 재킷을 걸쳤다. 키도 크고 호리호리해서 옷 태가 잘 받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를 엄두도 나지 않을 과감한 패션을 소화해 낸 얼굴도 샤프하고 세련된 게 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재유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자리에 마주 앉았다. 남자는 어딘지 불편하고 날카로워 보여 재유와 마주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표정으로만 봐서는 예사소리를 하러 온 건 아닌 듯했다.
“저… 무슨 일이신지….”
“…우주랑 다시 만나나 봐요?”
“네? 그게 무슨… 다시, 라뇨?”
다짜고짜 앞뒤도 없이 던진 질문이 꽤나 저돌적이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띄엄띄엄 들었지만 둘 사이는 대충 알고 있었어요.”
“네…?”
“어릴 때 둘이 사귀다 그쪽이 여자 만나 애 생겨서 헤어지고 우주 힘들게 했다는 거. 맞죠?”
“…….”
재유는 기가 막히다 못해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거드름을 피우듯 아무렇지 않게 우주와의 과거사를 읊어 대는 모습이 꼭 시비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쪽은 우주의 동업자로 알고 있는데… 우리 사이가 사업에 문제가 될 일이라도 있습니까?”
“둘이 과거에 만난 건 2년이 채 안 된다던데. 맞아요? 다시 만난 것도 5개월 정도고.”
재유는 테이블 위에 얹어둔 남자의 깍지 낀 손을 바라보았다. 검지를 톡톡 두드리는 움직임이 여유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었지만 냉담한 남자의 표정과 함께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이쪽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 제 할 말만 내던지는 남자를 보니 더 이상 예의를 차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저를 만나러 온 목적이 뭐예요?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그리고 여긴 제 직장이에요. 이 이상 무례한 소리를 하실 거면 더 듣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재유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예전에, 미국 온 적 있죠?”
“그걸 어떻게….”
남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쪽이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 날, 우주가 나한테 열쇠를 돌려 달라더군요. 어이가 없었죠.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기도 하더라고요?”
“아….”
재유는 멍하게 탄식했다. 앞에 있는 남자가 미국에 갔을 때 우주의 아파트에서 잠깐 스쳤던 사람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우주의 집에 자연스럽게 드나들어 애인으로 오해했었던 사람. 현재 우주와 제일 가까이 있고 왠지 그에게 감정이 있어 보이는 사람. 지금 태도로 보아 자신의 연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
“…그쪽 말이 다 맞아요. 지금 만나는 것도 맞고. 그런데 그게 왜요? 왜 내가 그쪽이랑 이런 얘기를 해야 합니까?”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며 두려워졌다. 동요했다는 걸 감추기 위해 경직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잔뜩 굳어 있는 얼굴로 재유를 노려보았다. 눈빛엔 원망과 동시에 체념이 엿보이는 듯했다.
“…….”
재유는 왜인지 그의 표정에 문득 슬픔을 느꼈다.
“난 우주 곁에 5년을 있었고, 지켜 왔고, 보살폈어요. 미국 처음 왔을 땐 걘 정말 엉망이었죠. 그쪽은 하루 이틀 본 게 다겠지만, 우주는 여기까지 오는 거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요. 이제야 기운 차리고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재유 씨는… 과거의 추억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주의 옆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는 제 감정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재유를 향해 공격적인 말을 쏟아내면서도 도리어 그가 상처받은 듯했다.
아. 이 사람은 사랑을 하고 있구나. 아니라면 굳이 자신을 찾아와 앞뒤 재지도 않고 괴롭히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차림과는 달리 분별없이 덤벼들 정도로 멍청해 보이진 않았으니까. 단속되지 못한 감정이 넘쳐흘러 지금 하는 짓에 제대로 된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주를, 좋아합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지만, 확고한 눈빛으로 재유의 물음을 맞받아쳤다. 자격 운운하며 우주 옆에서 물러나라고 자신만만하게 도발을 걸어온 것이다. 재유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5년.
5년 동안 이 남자는 우주 곁에서 무슨 생각으로 지내 왔을까.
우주를 처음 만나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사람의 말대로 우리에겐 공백의 시간이 너무 컸다. 그럼 이 사람은 그 남은 시간을 자기가 채우고 있었다는 건가. 스스로? 아니면 우주의 동의로? 자신은 5년은커녕 2년도 채 함께 보내지 못했는데.
무시 못 할 시간이었다. 그동안 둘에게 쌓인 기억과 추억이 습관처럼 서로에게 남아 있겠지. 더구나 함께 회사를 차리고 일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쉽게 떨어질 수는 없을 거다. 남자가 그저 한번 건드려 보듯이 시비를 건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보다 그가 가진 무기가 강력했다.
그에 비해 자신은 기껏해야 어린 시절을 잠시 함께 보낸 게 전부였다. 그때의 나이를 생각하면 풋사랑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우주에게 줬던 상처까지 들이민 남자는 자존심까지 내던지고 재유를 추궁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우주 옆에서 물러나라는 어처구니없는 협박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
그건 아니다.
우리 사이가 그게 다는 아니었다. 만났던 시간이 얼마나 짧든, 우리에겐 상관이 없다.
그 시절에 나눴던 사랑이 서로에게 뼛속 깊이 새겨져 있어 집안에서 반대를 했든, 애를 낳았든, 유학을 갔든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자기를 잊지 못해 방황하는 그를 찾아 미국까지 갔었으니까.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고 우주를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함께하기 위해 지난 세월 동안 헤어져 있던 걸로 보상해 온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사람에게 우주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겨우 찾은 사랑인데. 다시 만난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앞으로 함께할 날이 얼마나 많은데.
“그쪽 말처럼 우린 같이 지낸 시간은 짧지만… 만나지 못하는 동안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내가 우주에게 잘못했다고 해도, 그쪽한테 사죄할 일은 아니고요.”
“그건….”
“우린 어렵게 다시 만났고,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재유는 남자의 말도 끊고 확고한 기세로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의 도발이 먹히지 않는 걸 깨달았는지 낮게 웃으며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항복의 의미가 아니라 결정적 한 방을 위한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당신은 아이가 있지 않나요? 아이까지 우주한테 떠넘길 겁니까? 아이한텐 뭐라고 하고요? 우주는 자신의 아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살아야 돼요? 우주는 본가에도 못 가고 있는데. 당신과 함께라면 우주는 언제까지고 가족과는 등지고 살아야 할 거라고요!”
재유는 말을 듣다 말고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나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희지를 우주에게 떠넘긴다니. 마치 짐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불같은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얼굴은 모욕감에 일그러져 있을 터였다.
“주제넘게 내 딸 얘기 거론하지 마! 그리고 당신이 우주랑 함께라면 그 집에선 받아 줄 것 같아? 우주가 가족과 화해를 하건 말건 우주가 결정할 일이고,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꺼져.”
재유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쏘아보는 남자를 한동안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
가을이 무르익은 날이었다. 색색의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데, 가슴속은 엉망으로 틀어져 있었다. 재유는 마음 같아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바닥에 구르는 낙엽을 발로 차며 애꿎은 화풀이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쪽은 이진교. 여기서 만난 친구야….’
그의 이름이 기억났다. 이진교. 오랜 기억이라 가물가물했지만 분명 우주는 그를 소개하며 당황하는 듯했다. 친구라고 했었으면서.
생각해 보니 우주를 보러 사무실에 잠깐 들렀을 때도 이진교는 둘이서 얘기할 틈을 주지 않고 바쁜 듯이 우주를 불러 댔다. 그 바람에 10분도 채 우주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회사에 일이 많은 건 알고 있지만, 그는 정말 일 때문만으로 우주를 부른 걸까. 아니면 자신과 만나는 잠깐의 시간조차도 허용하지 못한 걸까.
곱씹을수록 이진교와의 만남이 불쾌했다. 어제 잠깐 룸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는 우주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재유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주와 연애하는 일은 쉽지 않은가 보았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사랑하는 마음에 눈이 멀어 굳이 덮어 두려 했던 문제들을 그 남자가 들춰낸 것이다.
우주와 앞으로도 함께하려면 서로의 가족에게 동의가 필요했다. 아직은 먼 얘기 같지만, 언제고 닥칠지 모를 일인 건 분명했다.
희지는 아직 어려도 안심할 수 없었다. 아이는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엄마 없이 자란 결핍이 있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예민하게 탐색해 온 희지라면. 어쩌면 자신과 우주가 평범한 친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유는 새삼 그 생각을 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우주의 가족과도 과거의 일을 되풀이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만나는 걸 들키고, 까발려지고, 쫓기듯 도망갔던 일들을 다시 반복할 순 없었다. 생각할수록 우리의 앞날이 암울하기만 했다.
재유는 산길을 조금 내려와 별채로 갔다. 스무 명까지 받을 수 있는 소수 모임을 위한 자그마한 한옥이었다. 대청에 걸터앉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당장 우주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재유는 앉은 자리 그대로 드러누웠다. 마루까지 길게 늘어진 오후의 햇빛이 눈을 따갑게 했다. 팔을 들어 이마를 덮고 눈을 감은 채 우리가 처해 진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기로 우주와 약속했는데, 고작 이진교가 다녀간 일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우주네 집과의 일이 반복되는 게 무서웠지만, 그와 헤어지는 걸 반복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아니,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
가벼운 생각으로 다시 만난 게 아니었고, 어떻게든 그와 함께하는 삶을 택했으니까.
그런데 마음은 간사하게도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쉽게 흔들리고 말았다. 아직도 허약하고 어리숙했다.
재유는 결론이 나지 않는 복잡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결국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재유야, 미안. 잠깐 회의하느라 전화 못 받았어. 쉬는 시간 거의 끝났지?
“응, 괜찮아.”
-그리고 말인데… 이따 밤에 못 갈 것 같아. 어쩌지? 지금 상태로는 오늘 안에 일이 안 끝날 것 같아서….
“…….”
-여보세요? 재유야, 미안해. 화났어?
“너… 동업자라는 친구, 어떻게 만났어?”
-누구, 진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이름을 듣자 목 안으로 끙, 앓는 소리가 났다.
-그건 갑자기 왜?
“…같이 잤던 사이니?”
-그….
“…….”
침묵도 대답의 한 종류였다. 전전긍긍하며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재유야, 실은….
“다음에… 얘기하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도 재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 통화를 계속하면 말실수를 할 것 같았다. 우주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안도감은 금세 이진교에 대한 분노와 질투, 희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 등이 뒤섞여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
우주는 강원도에 새로 건설 중인 리조트의 브랜딩 디자인을 맡아 직원들과 2시간에 걸쳐 내부 회의를 마쳤다. 메인 디자이너인 진교가 자리에 없어서 핵심은 내버려 둔 채 부수적인 사항만 논의된 상태였다.
질질 끌었던 회의를 2시간 후에 재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뒤 책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재유가 쉬는 시간임을 알았지만, 식당에 가 보지도 못했다. 우주는 잠깐이라도 재유의 얼굴을 보고 돌아와서 발주처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고 다시 회의에 들어갈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부재중 전화가 찍힌 재유의 번호를 누르며 다급히 재킷을 걸쳐 입고 식당으로 가려 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통화 내용 때문에 우주는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일방적으로 꺼진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우주는 좀 전의 통화에 넋이 나가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재유의 목소리도 낯설었는데, 물었던 질문 자체도 뜬금없었다.
‘같이 잤던 사이니?’
그의 음성에 원망이나 추궁은 없었지만, 오히려 감정을 지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우주를 긴장하게 했다. 마치 답을 알고 묻는 것처럼, 대답 여하에 상관없이 제 행동에 결론을 내린 것처럼 담백하고 냉정한 어투였다.
왜 갑자기 재유의 입에서 진교가 튀어나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유를 사무실에 처음 데려왔을 때, 친구이자 동업자로서 진교를 소개했었다. 진교 앞에서는 머쓱할 재유를 위해 친구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진교는 재유가 자기 애인인 걸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재유의 쉬는 시간에 맞춰 식당에 발 도장 찍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일이 많아 야근을 해야 하는 날에도 잠깐 얼굴을 보기 위해 퇴근 시간에 맞춰 재유를 데려다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새벽까지 일해 왔다는 것도 안다. 그 후로 마주칠 때도 두 사람은 우주를 매개로 서로 ‘친구의 친구’인 채 평범하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곤 했는데, 대체 재유는 무슨 연유로 갑자기 그런 걸 물었을까.
진교와 잤냐니….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그럴 목적으로 게이바를 드나들다 만난 사이였으니까. 만나서 몇 번 잤는데, 깊은 관계를 원하는 것 같은 진교가 껄끄러워 거리를 두었었다. 얼마 후 우연히 만난 술집에서 애인이 생겼다면서 다시 다가오는 그를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어서 오가다 얼굴 익힌 지인쯤으로 생각하며 관계가 이어졌다.
진교가 새로 생긴 애인을 소개하며 몇 번 술자리를 함께한 기억도 있다. 그 애인과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진교의 연애가 끊긴 적은 드물었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만난 회계사, 대학 연합 파티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교수, 게이바 댄서였던 혼혈까지.
그 후로 애인이 바뀔 때마다 진교는 새로 생긴 애인에 대한 찬사와 불만을 반복하며 갈아치우기 바빴고, 어느 시점부터 우주는 그의 연애사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미국에서 진교는 한국계 미국인과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얄팍한 접점과 둘 다 게이라는 정체성에서 비롯된 친절을 우주에게 베풀었다.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나서는 대학에 들어가려는 자신에게 입시에 대한 정보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간신히 그가 다니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우주는 어느새 진교를 절친한 친구로 인식했다. 처음 만났던 계기나 그와 잤었던 일은 우정이란 이름하에 잊혀졌고 굳이 떠올리지 않으면 그런 일이 있었던 것조차 까맣게 잊을 정도로 과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진교와 잤냐니.
재유가 그런 오해를 할 만한 행동을 전혀 한 적이 없는데.
만나는 횟수만 많지 실상 재유의 식당이나 차 안에서 잠깐씩 보는 게 전부라 재유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을 터였다. 만났을 땐 재유나 희지에 대한 일만 화두에 올랐고, 자신의 사생활은 주요 대화거리가 아니었다. 단조로울 정도로 집과 사무실, 재유의 집과 식당만 오가는 생활이라 얘기할 것도 없었다.
우주는 핸드폰 패드의 1번을 꾹 눌러 재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긴 후 반쯤 입었던 재킷을 제대로 입지도 벗지도 않은 상태였다. 발신음이 쌓일 때마다 초조한 마음에 책상 앞을 서성거렸다.
“…….”
끝내 받지 않은 전화를 끊은 우주는 시간을 확인했다. 벽시계의 시침이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주방으로 복귀했을 시간이다.
우주는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쳤다. 당장이라도 재유 얼굴을 보며 무슨 일인지 답을 듣고 싶었지만, 일하는 시간에 방문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지라 함부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갑자기 왜….”
탄식과 같은 혼잣말이 우주의 마른 입술 위로 흩어졌다. 상체를 기울이며 책상에 손바닥을 짚은 우주는 눈을 들어 진교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진교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우주는 거추장스럽게 몸에 걸쳐 있던 재킷을 벗어 책상에 팽개치고 방을 나갔다. 거실에는 네 명의 직원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길었던 회의에 진이 빠진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진교 씨, 아직 안 왔어요?”
“네. 아까부터 안 보이시더니… 아, 오셨네요.”
직원의 말에 우주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진교는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의 회의에 빠진 사람치고 뻔뻔한 얼굴로 저에게 쏠린 시선을 무시하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우주는 겉옷을 벗으며 태연하게 자리로 돌아가려는 진교의 어깨를 밀며 2층으로 향했다. 작은 소란에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2층에도 몇몇 직원이 있었는데, 방에서 작업하는 그들은 문을 굳게 닫고 일하는 편이라 우주는 일일이 살피지 않고 곧바로 테라스로 향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느리게 뒤따른 진교의 발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테라스는 야외용 의자와 재떨이가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직원들이 흡연 장소로 사용했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우주는 여간해선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얇은 겉옷 탓에 몸을 부르르 떨던 진교는 테라스 문을 절반만 닫아 두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어디 갔었어?”
난간에 한쪽 손을 얹고 몸을 튼 우주는 연기를 내뿜는 진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미안. 급하게 볼일 있어서.”
편의점에 담배라도 사 온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2시에 회의 있는 거 몰랐어?”
“아 그거. 어차피 콘셉트는 두 개로 추려졌으니까 결정되면 바로 작업하면 되는 거 아냐. 서라 씨한테 회의내용 공유받을 테니까 걱정 마.”
“…….”
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부터 아이디어의 실마리를 얻을 때까지 집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진행 과정에서 팀원이나 클라이언트의 사소한 언질 하나 가볍게 넘기지 않으며 원하는 아웃풋이 나올 때까지 몸을 혹사시킬 정도로 수정을 거듭하는 완벽주의자 타입의 작업자인 진교가 회의에 빠진 것을 가볍게 치부했다. 그 모습이 전혀 그답지 않았다.
“혹시 재유… 만났어?”
손을 들어 올려 담배를 입에 가져가던 진교가 멈칫했다. 그는 비틀린 실소를 내뱉으며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차가운 눈으로 건너다봤다. 위아래로 아니꼽게 훑어보는, 알 만하다는 눈빛이었다.
“입도 싸네. 그새 일러바치든?”
하, 짧은 한숨이 우주 입에서 터져 나왔다.
“왜 찾아갔는데?”
“그건 그쪽한테 가서 물어봐. 나한테 난리 치지 말고.”
“이진교.”
진교는 화를 꾹꾹 누르며 눈을 부라리는 우주를 보더니 뻐기는 표정을 지우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콧김을 씩씩거리면서 얼굴을 구긴 진교는 얼핏 서러운 감정을 내비쳤다.
“그래. 내가 찾아갔다. 근데 뭐!”
“왜? 네가 재유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
“왜 찾아갔냐고!”
“…네가 여기까지 와서 그 사람 또 만날 줄은 알고 있었어. 근데 적당히 끝내고 나한테 오길 바랐지, 이렇게까지 질질 끌 줄은 몰랐네?”
“…너.”
우주는 진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드는 생각은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진교가 몰카라도 찍으려는 건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헛기침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나한테 감정 있었어?”
“미친놈…. 네가 이런 식이니까 내가 더 짜증 나지. 넌 내가 몇 번 잔 남자들 중 하나였겠지만, 난 너 친구로만 생각할 수 없었어. 그래. 그래서 찾아갔다. 그동안의 내 노력이 너무 억울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럼 그동안 감정이 있는 걸 숨기고 친구인 척 있었다는 건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연애했던 사람들은 다 가짜였나. 아니면 정말로 놀리려고 작정을 한 건가.
“네가 한국에도 안 왔으면 했는데 결국 얼씨구나 와서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니…. 질린다, 질려, 진짜.”
“그래서 재유를 찾아간 거야? 차라리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난 아무것도 모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아무리 친구처럼 지냈어도 너 따라 한국까지 왔어. 네가 사업한다길래 나도 네 옆에 있고 싶어서 네 일 도왔던 거야.”
“네 일? 그럼 넌 사업을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던 거야?”
“그런 마음이 뭐 어때서?”
진교는 손가락을 튕겨 담뱃불을 끄고 재떨이에 집어 던졌다. 노려보는 눈매에 수치심과 억울함이 스쳤다. 우주는 진교의 무거운 표정을 보며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알고 지낸 지 5년째다. 미국에서 이진교의 도움이 없었다면 학교를 마치는 것도, 돌아와 사업을 시작한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회사에 들어간 투자금도 대부분 그의 집에서 흘러들어온 돈이었다.
늘 붙어 있으면서 친구나 형제 같은 친근함을 느끼긴 했지만, 연애 상대로 생각한 적은 전혀 없었기에 그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와 가까이 지내는 일도, 함께 회사를 차리는 일도 벌이지 않았을 터였다.
우주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눌러 댔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왜? 이제서야 골치가 아프냐? 내가 뭐 달라졌어? 나 똑같아. 달라진 거 없어.”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어. 앞으로 어떻게 하자고 그러는 거야?”
“그런 거 없어. 아니 막말로, 그래서 네가 뭘 어쩔 건데? 그 사람이랑 헤어지기라도 할 거야, 아님 회사 접고 남남처럼 제 갈 길 가기라도 할 거야? 다 불가능하잖아.”
“하아… 이진교.”
우주는 그동안 알아 왔던 친구로서의 진교와 저다운 방식으로 뻔뻔하게 구애하는 진교의 모습에서 논리가 통하지 않은 괴리를 느꼈다. 망연하고 먹먹한 애정도 언뜻 느껴졌지만, 금방이라도 뒤통수를 갈기며 ‘서프라이즈!’를 외칠 것만 같아 어느 게 진짜 진교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근데 네 애인도 장난 아니더라? 한 대 맞는 줄 알았다.”
얼빠진 우주의 얼굴을 비웃듯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기대선 진교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알 거 없어. 입 싼 네 애인한테 물어보던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가 먼저 지칠지, 네 사랑이 먼저 끝날지 두고 보자고.”
우주는 경솔했던 자신의 행동과 처신이 뒤늦게 후회되었다. 인생 놓을 것처럼 몸을 막 굴리며 함부로 살았던 과거의 제 모습에 분노가 일었다. 반면에 이제껏 감쪽같이 숨기고 재유를 찾아가 폭탄 발언을 한 진교에게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재유 곁에 있기 위해선 진교와의 관계를 끝내야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무 자르듯 그렇게 쉽게 돌아간다면 세상 살면서 두려울 일이 뭐 있겠는가. 우주는 참담함을 억누르고 불같이 일어난 감정을 끌어 내려야 했다.
“미안해. 몰랐어도… 몰랐던 것까지 미안해. 너무 늦은 거겠지만.”
“뭐야. 사과는 왜 해?”
“난 재유뿐이야.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재유 말고 다른 누구와도 함께할 생각이 없어.”
쳇, 짓씹듯 비웃음을 내뱉은 진교가 차가운 눈초리로 우주를 보았다.
“알어, 안다고! 상관없어. 뉴욕에서 네 집 드나들 때 난 네가 쓰고 버린 콘돔까지 처리했던 사람이야. 그 사람이랑도 어디 끝까지 한번 가 봐. 얼마든지 지켜볼 수 있으니까.”
진교의 집착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미국에서 재회한 이후 재유만 바라보고 재유에게 오해받을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교제로 발전할 만한 관계를 모두 차단해 왔었는데,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일 가까이 있었던 진교가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진교의 존재만으로 재유와의 사이가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벌써부터 자신에게 돌아선 재유의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심장이 끝을 모르고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게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나 걱정해.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한테 오기까지. 그 사람은 너 못 견딜걸? 애 딸린 홀애비 처지로 네 가족과의 관계를 이겨 내지 못할 테니까.”
“너한텐 미안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우린 이미 한 번 겪어 봤으니까.”
“그래! 내 말이! 겪어 봤으니 잘 알겠지.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아니. 다시는 그럴 일 없어.”
우주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진교야. 넌 내 친구고, 소중한 사람이지만….”
차마 뱉기 괴로운 말인데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재유 한 번만 더 찾아가면. 그땐 너랑 끝이다.”
이 대화를 이어가 봤자 해결될 건 없었다. 괜한 감정 소모로 관계만 더 망칠 뿐.
“여기까지 하자. 일도 손에 안 잡힐 것 같다.”
우주는 테라스를 나와 도망치듯 1층으로 내려왔다. 급하게 컴퓨터를 끄고 희지와 우유의 선물이 든 가방과 차 키만 챙긴 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우주는 차를 끌고 바로 재유의 집으로 갔다. 문자메시지를 여러 번 보냈지만 재유에게선 끝내 답이 없었다. 빌라 앞에 차를 세워 두고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2층인 그의 집은 거실에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희지와 이모님이 재유를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퇴근하는 재유와 함께 들어가 이모님을 배웅하고 희지랑 우유랑 놀면서 수다나 떨었을 텐데, 오늘은 선뜻 식당으로 마중을 갈 수 없었다. 어색하게 실랑이하는 모습이 동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살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재유와 차분히 얘기하기 위해선 적어도 희지가 잠들 시간까지 기다렸다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진교 입에서 ‘애 딸린 홀아비’란 말이 나왔고, 재유는 ‘잤던 사이냐’고 물었다. 굳이 둘의 대화를 듣지 않아도 무슨 얘기가 오고 갔을지 뻔한 상황이었다.
우주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짓지도 않은 죄에 용서를 구하는 기분이었다. 오해임이 분명하지만, 제 억울함을 풀고 재유에게 한 점 의혹도 남지 않도록 해명하고 싶었다. 무감하던 재유의 전화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퇴근한 재유가 언덕을 오르는 모습이 사이드미러를 통해 나타났다. 평소처럼 청바지와 맨투맨, 가을용 남색 점퍼와 주방모에 눌린 머리를 가리기 위해 볼캡을 눌러 쓴 모습이었다. 모자 때문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고 고개도 숙인 상태였지만, 지친 기색이라는 건 언뜻 봐도 알 수 있었다.
전화를 걸어 볼까 싶어 핸드폰을 여는데,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에 폴더를 닫았다.
재유는 집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조금 전보다 빨라진 걸음걸이로 우주의 차를 지나쳐 빌라로 들어갔다. 곧이어 이모님이 바깥으로 나왔다.
시간이 11시 반을 넘긴 무렵, 우주는 차에서 내려 빌라 입구에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릴수록 마음은 초조해졌지만, 아직 희지가 잠들지 않은 건지 일부러 전화를 피하는 건지 연결되진 않았다.
[집 앞이야. 잠깐 내려와 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30분쯤을 더 기다렸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빌라 주민들과 마주칠 때마다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머쓱해졌지만, 입구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며 재유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서 겉옷을 챙겨 나오지 않아 쌀쌀해진 날씨에 오들오들 몸이 떨려 오는데, 2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센서 등이 차례로 켜지며 재유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표정은 살짝 굳은 채였다. 그새 샤워를 마친 건지 약하게 보디워시 향기를 풍기고, 머리카락은 아직 젖어 있었다. 우주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는 성큼성큼 재유 쪽으로 향했다.
“재유야.”
“오늘 못 온다더니… 아까 일이 마음에 걸렸구나.”
“그럼 이 상황에서 일이 손에 잡히겠어?”
재유는 우주의 팔에 손을 대보며 얇은 셔츠 차림인 걸 알아차리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춥겠다. 걸칠 것 좀 가져올게.”
고개만 돌린 채 재유가 나지막이 말했다. 밤늦은 시간이라 살금살금 걷는 재유의 가벼운 발소리가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금세 돌아온 그의 손에는 아이보리색 카디건과 겨울용 회색 목도리가 들려 있었다.
“이게 제일 큰 건데, 일단 입어.”
우주는 말없이 옷가지를 받아 몸에 걸쳤다. 어깨가 조금 좁았지만 목도리까지 두르니 추위에 떨리던 몸에 온기가 생겨 한결 편해졌다.
“희지 자고 있으니까 멀리는 못 가. 여긴 좀 그러니까 저쪽에서 잠깐 얘기하자.”
우주는 옆 건물 주차장으로 가는 재유를 말없이 따랐다. 좁은 공간에 4대의 승용차를 겨우 주차할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 가정집 위주의 빌라촌이라 골목은 한산했고 맞은편 주택 담벼락에 서 있는 가로등만이 소소하게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주차장은 이미 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있어서 서서 얘기할 만한 장소로 마땅치 않았다. 재유는 스스럼없이 주차장 벽과 흰색 소형차 사이의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서두를 어떻게 꺼낼지 가슴 졸인 채 재유에게 할 말을 고르고 골랐다.
“오늘… 진교가 너 찾아갔다고 들었어.”
어렵게 말을 꺼낸 자신과 다르게 재유는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가슴께를 바라보며 골몰하는 그가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종잡을 수 없어서 우주는 점점 애가 탔다.
“내가 얘기할게. 전에 미국 갔을 때 봤던 사람, 그 사람 맞지?”
“둘이 전에 본 적 있던가?”
재유에게서 작은 탄식이 터졌다. 실망 어린 웃음기가 입가에 머물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 그때 진짜 정신없었구나. 잠깐 마주쳤었어. 네 집 열쇠 가지고 드나들면서 너 밥 챙겨 주던 거 생각나.”
“…….”
우주는 벽에 머리를 박으며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 시절 이진교는 매일같이 찾아와 똑바로 살라며 쓴소리를 해 댔다.
그땐 그저 귀찮은 간섭과 잔소리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 모습을 본 재유도 진교가 뿜던 묘한 기류를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내가 어리석었어…. 난 그냥 친구로만 생각했거든. 걔가 그런 감정이 있는지 아까 진교랑 얘기하고 나서 알았어. 그런데 재유야. 나한텐 그냥 친구야. 친구이자 동업자, 진교는 나한테 그 이상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변함없어.”
후, 재유는 작게 실소하며 턱을 매만졌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너한테 말도 안 하고 좋아해 왔다면 그저 흘러가도 될 가벼운 마음은 아니겠네. 네가 감당해야 할 텐데… 아니, 나한테까지 찾아왔으니 이제 우리가 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런 삼각관계의 중심에 서는 건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일어날 거라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예전의 재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같이 잔 여자가 임신했다며 헤어지자던 재유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우주도 진교를 포함한 숱한 남자들과 잠자리를 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자신은 재유를 두고 바람피운 것도 아니었고, 책임져야 할 생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떳떳하지도 않았다. 과거의 방탕이 망령처럼 나타나 현재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잊은 일이 된 줄 알았는데, 묵혀졌을 뿐이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과거에 자신은 임신 소식에 분노하며 이성을 잃고 재유를 겁탈까지 할 뻔했다. 헤어진 뒤로도 인생을 팽개친 것처럼 막살기도 했었다. 그로 인해 오늘의 결과가 나와 버린 것이지만.
재유도 진교의 일로 불같이 화를 내며 따져 들지 않을까. 불안함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상처받았을 재유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런 말 한다고 해도 잊어버릴 순 없겠지. 그래도 할 수 있는 선에선 내가 정리할 거야.”
“…….”
“최선을 다해서 모두 되돌릴게. 당장은 진교와 관계를 끊을 수 없겠지만, 너만 믿어 준다면 오해할 만한 말이나 행동… 아니, 네가 불안해할 일들 모두 안 만들 거라고 약속해.”
“…….”
우주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듯 등을 구부려 재유 앞에서 쩔쩔맸다. 간절하게 호소하는 우주를 보니 재유의 마음이 아려 왔다. 물론 그를 믿어 왔고, 지금도 믿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에 믿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잤던 사이냐고 묻는 말에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육체관계까지 있었나 본데, 둘은 하루종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밥 먹고 밤늦게까지 야근하며 밤샘도 하는 사이다.
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절교하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두 사람은 투자를 받아 사업을 벌였고, 회사의 운명과 직원들의 생계도 걸려 있다.
그런 상황인데 그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매 순간 둘을 떠올리며 지금도 같이 일하고 있겠지, 점심시간이니 같이 밥 먹겠지, 오늘은 야근이라는데 둘 사이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이런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들을 머릿속 한편에 밀어 두고 믿어, 믿을 거야, 이렇게 주문을 외우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걸까. 그게 사랑인가.
아니, 그건 가식이고 포장이지 재유가 생각하기에 사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매 순간 우주가 뭐 하고 있는지 문자나 전화로 확인받고 감시하고 또 의심하고… 그렇게 살 수도 없다.
“재유야… 왜 말이 없어. 괜찮아?”
지금 당장 해결될 일이 뭐가 있을까. 차라리 어린애들처럼 삐지고 토라지며 서운함과 질투심을 막 쏟아내고 싶기도 했다. 우주 앞에서 시기 가득한 눈으로 따져 대는 제 모습을 상상했지만, 영 되지 않을 일이었다.
재유는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10년 전 만났던 고등학생 시절도 아니고, 애 아빠까지 되어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야 없었다.
“…….”
한 번 덮고 넘어가는 거다.
그 방법밖에 없다. 의심을 가라앉힐 수 없다고 해서 헤어질 수는 없으니까. 그럼 더 아파질 뿐이므로. 불안해할 일들을 안 만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 약속을 믿어 주는 거다.
재유는 숨을 깊게 내쉬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눈이 마주친 우주는 불안을 지우려 애쓰는 모양새로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아까는 당황하고 기분 나빴는데…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지. 넌 좋은 사람이니까. 내 눈에도 멋진데 다른 사람이라고 네가 안 멋지겠어? 우리가 헤어져 있던 동안에… 널 좋아하거나 만났던 사람 몇몇은 있을 거라 예상했었어. 그렇게 마음 깊이 좋아해 주는 사람까지 한국에 데리고 들어올 줄은 몰랐지만.”
“아냐, 사귄 사람은 너 말고 한 명도 없었어!”
재유는 자신만만하게 발끈하는 우주를 보며 피식 웃었다. 희지를 달래는 것처럼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주의 손이 쓰다듬던 팔을 살며시 붙잡으며 재유의 안색을 신중하게 살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재유의 얼굴에서 미움과 불신이 숨어있지 않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재유는 최대한 그가 안심할 수 있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비로소 안도한 듯 우주는 낮게 숨을 내쉬며 뺨을 어루만졌다.
“아무튼… 그 사람이 찾아왔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널 뺏기고 싶지 않다는 거였어. 그리고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널 사랑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아. 그랬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 입 다물고 있지만은 않았겠지. 나라면 어떻게든 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거야. 한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으니까.”
“재유야….”
우주는 울 듯 말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재유의 말이 신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사랑 고백에 감동받았고 자신을 믿어 주는 태도에 경탄했으며 당장이라도 납치해 가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럼… 나 용서해 주는 거야?”
“난 더한 일도 했는데 뭘. 이렇게 저울을 평행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 사람과의 사이를 확실하게 매듭짓는다면, 난 괜찮아.”
우주는 안도의 탄성을 지르며 쓰러져 기댈 듯 재유를 껴안았다.
“우주야, 쉿!”
다급하게 주위를 살피던 재유가 여기선 안 된다며 품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우주는 곧장 주차장 안쪽으로 재유를 끌고 갔다. 가로등도 비치지 않고 센서 등도 없는 컴컴한 곳이었다.
성급한 우주의 입술이 닿았다. 막을 새도 없이 입술을 가르고 혀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놀란 재유가 퍼득거리며 저항했지만, 상체를 꽉 붙들어 매자 더 이상의 발악을 멈추고 곧 품속에서 얌전해졌다.
키스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서로의 숨을 먹어 치우듯 입술이 뒤엉키며 은근하게 몸을 더듬었다. 낡은 주차장에서의 달콤한 밀회였다.
“…들어가서 자고 갈래?”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졌다. 재유는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용기 내어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일 마무리하러 다시 사무실 들어가 봐야 돼.”
몰아붙이던 기세는 사라지고 다시 죄인처럼 우는 얼굴을 하며 탄식을 했다.
“아… 바쁘댔지.”
재유는 애써 실망을 감추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주말엔 너 일하는 동안 내가 집에서 희지랑 계속 있을 거니까 그때 같이 자자. 응?”
우주가 두 손을 꼭 모아 잡고 거의 빌 듯이 말했다. 절절매는 그가 안쓰러워 뺨에 짧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그래, 알았어.”
우주는 아쉬운 모양새로 재유를 차가 주차된 곳으로 데려가더니 조수석에서 종이가방을 꺼내 건넸다. 내용물을 살펴 본 재유가 피식 웃었다.
“결국 오늘 받긴 받네?”
“그러게.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전해 줄 수 있어서.”
“희지랑 우유가 좋아하겠다. 사진 찍어서 보내 줄게.”
“응. 꼭 보내 줘. 네 사진도 꼭!”
“알았어. 얼른 가 봐.”
차에 탄 우주는 평소 모습처럼 능글맞게 손 키스를 날렸고, 재유는 눈을 핑그르르 돌리며 닭살이라는 듯 웃어 주었다. 차는 방향을 꺾어 내리막길로 향했고, 재유는 차가 골목에서 사라질 때까지 덤덤하게 지켜보았다.
이걸로 됐지 뭐.
우주를 믿자.
그렇게 다짐했는데도 가슴 깊은 곳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을 모두 지울 수는 없었다. 이진교는 우리 사이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우주는 그를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로만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재유가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주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잘게 떨리던 이진교의 눈빛도 잊을 수가 없었다.
***
초겨울 어느 날, 재유는 오랜만에 우주와 시간이 맞아 희지와 함께 놀이공원을 오게 되었다. 바쁜 그가 무리해서 시간을 뺀 것이었지만, 함께 나들이를 간다는 것만으로도 며칠 전부터 희지만큼 들떠 있었다.
하나 기대와는 달리 마냥 행복감만 느껴지는 하루는 아니었다.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인 덕에 10시 30분쯤 도착하긴 했는데, 평일임에도 사람들은 미어터졌고 어딜 가나 대기 줄은 1시간이 넘었다.
더구나 새로 나온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전날부터 눈을 반짝였던 희지는 신장 기준치인 130cm에 미치지 못해 탈 수 없다는 걸 알고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같은 반 남자아이가 타고 와서 자랑했나 본데, 자기는 못 탄다는 사실이 어린 자존심을 다치게 했나 보다. 미리 확인하지 못한 제 실수였다.
이런 데이트를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희지야, 지금처럼만 쑥쑥 크면 내년 봄엔 꼭 탈 수 있어! 아빠랑 삼촌이랑 그때 다시 와서 타면 돼.”
“…….”
두 사람이 희지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지만, 한번 상한 아이의 마음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희지야. 그럼 바이킹 타는 건 어때? 바이킹도 엄청 재밌는데. 저기 봐 봐, 무지무지 높게 올라가지?”
“…바이킹이요?”
“그래! 아빠랑 줄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삼촌이 코코아랑 츄러스 사 올게. 먹으면서 기다리면 금방 탈 수 있어.”
“진짜요? 그럼 탈래요!”
애써 주는 우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이 부족해서 눈이 빨갛게 충혈됐고 뺨이 홀쭉해져서 거칠거칠했다. 그래도 재유를 보며 한숨 돌렸다는 듯 활짝 웃어 준다. 금방 사 올게, 하며 뛰어가는 모습이 제법 의지 되기도 했다.
“아빠! 빨리 줄 서자.”
재유는 희지의 손을 잡고 바이킹 쪽으로 가서 맨 끝에 자리를 잡았다. 만만치 않게 인기 많은 놀이기구라 줄의 길이로 봤을 땐 족히 1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쌀쌀한 날씨에 아이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후드를 씌워 주고 점퍼를 여며 지퍼를 끝까지 올려주었다.
“혹시 다리 아프면 얘기해. 아빠가 업어 줄게.”
“네!”
재유는 조금씩 앞줄로 가면서 우주가 돌아오는지 주변을 살폈다. 20분가량 지났지만, 우주도 줄이 길어지는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희지는 벌써 지루한 얼굴로 의미 없는 발장난을 하고 있었다.
문득 희지가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시선이 머무른 곳은 벤치에 앉은 너덧 살 정도의 여자아이와 그 부모였다. 여느 가족들처럼 아이는 떼를 쓰고 엄마는 다그치고 아빠는 따분해하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는 주변에 차고도 넘쳤는데 왜 그 가족에게만 관심을 두는 건지 재유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빠. 우리 담에는 영선이 고모랑 오면 안 돼?”
희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빛에는 부러움과 서운함이 서려 있었다.
“…왜? 우주 삼촌이랑은 다니기 싫어?”
“그런 건 아닌데, 영선이 고모가 더 좋아.”
“…….”
엄마를 찾는 건가. 평소엔 내색 않다가 가끔 속마음을 비칠 때가 있었는데, 오늘이 그 날인가 보다. 재유는 어린 딸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영선이 고모한테 물어보고 안 바쁘면 다음에 같이 오자. 응?”
“…알았어.”
다행히 줄이 당겨져서 벤치의 가족들은 금세 시야를 벗어났다. 업어 줄까, 물었더니 희지가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서 뭔가 빈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입을 삐죽거리는 희지를 업으려던 차에 우주가 간식거리를 들고 나타났다.
“엇, 희지 코코아 안 먹어? 삼촌이 업어 줄까?”
“아니요.”
희지는 등에 업힌 채 아빠의 목을 꽉 끌어안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난감해진 재유가 우주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리가 아픈가 봐. 츄러스는 좀 있다 먹일게.”
“어… 알았어.”
우주는 민망한 듯 손에 든 음료와 간식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다. 줄이 짧아지는데 희지가 축 처져 있으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사람 많고 떠들썩한 분위기에, 아이들이 좋아서 환장하는 장소에 오고도 이렇게밖에 못 즐기다니. 재유는 이 상황이 안타깝고 애가 타기만 했다.
아이를 키우면 으레 아이에게 모든 걸 맞춘 일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장소도 정해져 있고, 술집은커녕 맵거나 기름진 음식을 파는 식당도 갈 수 없다. 짜증을 부리거나 싫증을 내면 금세 분위기가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수면 시간을 고려해 너무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닐 수도 없다.
그래도 우주는 그동안 희지와 서너 번 나들이를 다니는 동안,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영선이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미혼에 육아 경험이 없는 사람들인데도 오로지 재유 부녀를 위해 기꺼이 하루 일정을 내주었다. 재유 역시 고마운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영선과 우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영선이는 희지가 떼를 쓰면 정말 고모인 것처럼 무섭게 다그치면서 잘못을 바로잡는데, 우주는 쩔쩔매며 달래기만 했다. 그에 따라 재유의 심정도 안타까웠다. 친구와 애인의 차이인가. 미안함의 밀도가 달랐다.
이럴 때면 우주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싱글 파더인 자신이 아니라 평범한 또래의 남자를 만났더라면 굳이 놀이공원 같은 데는 오진 않았겠지. 애 눈치를 봐 가며 만날 약속을 정할 필요도 없고, 애가 깊이 잠드는 시간을 틈타 몰래 사랑을 나눌 필요도 없겠지.
‘우주한테 애까지 떠넘길 생각이에요?’
이럴 때 이진교의 말은 잊혀지지 않고 폐부를 찔렀다. 그럴 일은 단연코 없을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받아쳤지만, 이런 상황이 생기면 그의 말이 맞는 건가 싶어 도리 없이 자책하게 되는 재유였다.
“희지야, 기다리는 동안 삼촌이 목마 태워 줄까? 삼촌 어깨 위에서 츄러스랑 코코아도 먹고. 삼촌이 다 먹기엔 너무 많아서 그래애. 응? 어때?”
희지가 고개를 돌리고 눈만 빼꼼 내밀었다. 우주는 놓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희지가 웃음을 참으며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유는 이진교의 생각에 시무룩했다가 우주의 이런 모습을 보면 새삼 애정이 샘솟는 걸 느꼈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도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나이가 들수록 더 매력적이고 듬직한 남자로 보이게 했다. 재유는 흐뭇함과 안타까움이 섞인 웃음을 몰래 웃었다.
“재유야, 잠깐 들어 봐.”
우주가 손에 들고 있던 간식거리를 재유에게 건네주고 희지를 번쩍 안아 어깨에 풀썩 앉혔다. 희지는 삼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아빠가 먹여 주는 코코아를 홀짝였다.
“뜨거우니까 삼촌 머리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네에!”
기분이 풀린 희지를 보며 재유는 적잖이 안도했다. 우주는 슬쩍 윙크하며 해맑게 웃어 주었다. 기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다 멈칫했다. 가끔 공공장소에서 실수로 스킨십하는 건 줄곧 우주였는데. 그를 향한 마음이 흘러넘치나 보다.
***
재유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우주의 사무실에 가는 길이었다.
어제는 쉬는 날이라 희지와 함께 집에서 수제 쿠키를 만들었는데 양이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우주에게 주려 한 것이다. 동료들과 나눠 먹기 좋게 개별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꾸러미에는 희지가 삼촌의 얼굴이랍시고 만든 쿠키도 섞여 있었다. 조악스러운 생김새라 그의 얼굴이라는 걸 짐작하긴 어려웠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조물조물 반죽하며 모양을 만들던 희지의 얼굴이 생각나 또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무성한 머리숱과 진한 눈썹만은 똑같은 것 같았다.
산길의 2차선 도로를 10분쯤 걸어 내려가 삼거리 골목을 꺾으면 바로 그의 사무실이었다. 원래 가정집으로 쓰였을 것 같은 2층짜리 단독주택은 고급스러운 목재 대문 안쪽으로 자동차 4대쯤 주차할 수 있는 앞마당이 있었다. 실제로 주차장으로 쓰고 있기도 했다.
한편에 조그마한 야외 테이블이 있는 곳은 직원들의 담배 피우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마당 주위로는 별다른 조경 없이 넝쿨 담장이 있었는데, 바로 뒤에 무성히 우거진 숲이라 사생활 보호도 잘되고 경관도 훌륭한 집이었다.
사무실에 오는 건 한 달 만이었다. 퇴근 시간은 재유가 더 늦으니 주로 우주가 식당으로 데리러 왔고, 밤샘 때문에 속옷을 챙겨 줄 일 아니고는 굳이 찾아올 일도 없었다. 요즘은 늦을 것 같으면 우주가 미리미리 옷가지들을 챙겨 와서 굳이 재유가 가져다줄 일도 없었다.
재유는 우주를 잠깐 밖으로 불러내 전해 주기만 할 생각이었으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서 곧장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의 전화를 걸 동안 우주는 받지 않았다. 차가 주차된 거로 보아 미팅 나간 것도 아닌데, 아마 바쁜 모양이었다.
전화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요즘 지자체 CI 입찰 준비와 기존 프로젝트의 시기가 겹쳐 바쁘다고 하기는 했었다. 밤샐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다음 달까진 제대로 된 데이트를 못 할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그래도 매일 야근이 끝나면 재유네 집을 찾아와 2~30분씩은 꼭 얼굴을 보고 갔다.
피곤하니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했지만, 우주는 어김없이 식당과 집으로 찾아왔다. 속으로는 그렇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어 기쁘기도 했다.
어느덧 식당 휴식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쿠키만 전해 주고 갈 건데 뭘. 잠깐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대문을 지나 마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관으로 들어서려는데 1층 방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재유는 다시 마당으로 나와 소리가 나는 창문을 찾았다. 주로 회의실로 쓴다는 제일 큰 방이었다. 블라인드가 쳐져서 다 보이진 않았지만, 틈새로 우주를 포함한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이진교도 함께.
회의를 하느라 전화를 못 받은 거구나.
재유는 잠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이진교가 곁에 있는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우주는 동업자로서만 지내기로 확실히 못 박았다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었다.
믿을 수밖에. 자신이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까.
똥머리를 틀어 올려 펜으로 꽂은 머리 모양을 한 직원이 디자인 시안을 붙여둔 화이트보드를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제일 가까이 앉아 있던 우주가 손을 들어 질문하는가 싶더니, 일어나서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거침없이 써 내려가며 직원들을 설득하는 듯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자신감 넘치는 동작이었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은 별로 없었지만, 볼 때마다 당당하고 매력적이어서 재유는 내심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짙은 회색 바지에 흰 셔츠를 받쳐 입고 팔을 걷어붙이며 일에 집중하는 그는 똑 부러져 보이고 심지어 섹시했다. 재유는 설레는 마음이 동해 입꼬리가 둥그렇게 휘어졌다.
늘 교복이나 후드티를 입은 모습만 눈에 익었었는데, 작은 회사나마 대표 직함을 달고 나서는 그의 차림새가 다소 정교하고 딱딱해졌다. 미팅이나 출장을 자주 다니는지라 어린 나이를 조금이라도 감추고 진중해 보이고자 정장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사적으로 만날 땐 편한 차림 그대로였지만, 이렇게 셔츠 입은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는 건 재유로서도 일종의 눈 호강이었다.
말린 소매 아래로 쭉 뻗은 팔뚝과 힘줄이 도드라진 손끝에 펜을 굴리는 모습을 주시하던 재유는 별안간 눈썹을 찌푸렸다. 이진교가 반론이 있는지 우주를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도 진지하게 듣는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둘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무거워진 듯했다.
의견이 안 맞나. 심각하네.
우주는 이진교를 보며 미간을 주름잡더니 그가 던지는 한마디에 별안간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피식, 웃음을 보였다. 둘 사이에 농담이라도 나왔는지 마주 보고서 키득거렸다. 아주 친한 사이에만 보일 수 있는 허물 없는 웃음이었다. 이내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환한 얼굴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직원들도 덩달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
순간 재유는 자신과 저들 사이에 어렴풋한 벽을 느꼈다. 정확히는, 우주와 이진교라는 교집합과의 벽.
고졸에 공장과 식당에서만 일해 왔던 자신과, 대졸에 유학까지 다녀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저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는 것 같았다.
우주가 가까이 있어 그 계단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으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단 한 단 뾰족한 장애물이 있어 오르기에 결코 만만하지 않은. 그런 층계, 또는 계층.
열등감과 박탈감, 그리고 질투가 섞인 복잡한 감정이 재유를 괴롭혔다. 우주가 저런 표정으로 날 보며 웃은 적이 있던가. 그런 마음 갖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제 맘인데도 쉽게 되진 않는다. 누군가가 그어 놓은 선이 우주를 향하는 길목에 처져 있어 재유의 발길을 머뭇거리게 하는 것 같았다.
재유는 씁쓸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며 사무실을 등지고 돌아섰다.
“안녕하세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직원 하나가 마당을 들어서며 아는 체를 했다. 회식 때 식당에서 봤던 얼굴 중 하나였다. 심부름을 다녀온 건지 양손에 커피가 잔뜩 든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재유는 구겨졌던 표정을 감추고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사장님 보러 오셨어요? 잠깐 불러드릴까요? 잠시만요.”
“아니에요. 그냥 좀 전해 줄 게 있어서… 죄송하지만 이것 좀.”
재유는 현관을 오르는 계단참에 가지고 온 쿠키 상자를 내려놓았다. 직원의 빈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네! 잘 전해드릴게요.”
재유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 서둘러 마당을 빠져나왔다. 과하다 싶게 빠른 걸음으로 식당 방향의 오르막을 올랐다. 아직도 속에서 초조함이 솟구쳐 마음을 가다듬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사업 파트너로만 지낸다고 했어도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의심이 차올랐다.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쉽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걸까.
날씨가 찼지만 해가 밝게 비쳐든 산길의 도로에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알록달록한 빛과 그림자가 내리깔렸다. 재유는 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일하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것도 이해 못 해 주는 자신이 치졸하고 속 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우주가 일하는 동안 이진교에게 무뚝뚝하게 할 말만 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재유는 제 못난 질투가 우습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이진교를 보며 웃는 우주의 모습은 속이 상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막상 눈으로 보면 온갖 난잡한 생각들이 들끓는 속을 잠재우기가 힘들었다.
이럴 때 우주의 얼굴을 보지 못한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질투에 휩싸여 추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재유는 잡생각을 몰아내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탁탁 치며 다시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바지 속에 진동이 울리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올라왔는데, 식당 문턱에 다다라서야 핸드폰을 살폈다. 부재중 전화에 우주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던 재유는 짧게 숨을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재유야, 언제 왔었어? 왜 나 안 불렀어.
“아… 바빠 보여서.”
-그래도 그렇지, 얼굴도 안 보고 그냥 가는 게 어딨어? 나 지금 사무실 나왔거든? 어디쯤이야?
재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자리를 빙빙 서성이며 돌아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좀 전까지 우주가 미웠었는데, 저를 보러 온다는 말에 금세 마음이 풀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가 보기에도 조금 우습고 초라해 보였다.
-재유야?
“나 벌써 도착했어. 지금 유니폼 갈아입고 주방 들어가야 돼.”
재유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주를 돌려세웠다. 만나 봤자 5분 남짓일 시간이기에 괜한 수고로움을 덜어 주고 싶었다.
-그래? 하, 아쉽다. 근데 이거 뭐야, 쿠키? 직접 만든 거 맞지?
“응. 어제 희지랑 만들었어. 희지가 네 얼굴로 만든 것도 있으니까 잘 찾아봐.”
-정말? 고마워, 완전 감동이야!
“고맙긴. 많이 만들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 먹어.”
-흐음… 내가 다 먹고 싶은데. 나눠주기 싫어.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 부리는 걸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나려 했다. 그러고 보니 동성인 친구가 수제 쿠키를 만들어 준다는 걸 직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그냥 우주 것만 만들어서 집에 가져다 놓을걸. 재유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남자끼리의 연애는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참, 내일 우리 집 오는 거 알지? 이모님한텐 주무시고 가시라고 말씀드렸어?
진득하게 시간을 보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우주가 우기고 우겨서 2주에 한 번 그의 집에서 자고 가기로 약속했던 일이었다. 그래 봐야 퇴근 후 희지를 재우고 그의 집으로 가서 밤을 보낸 후 희지가 깨기 전 새벽에 집에 들어가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재유에게도 어느새 그날을 기다리는 게 하나의 낙이 되었다.
재유는 쑥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리며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말씀드렸어. 내일 갈게.”
-다행이다. 너무 기대돼. 이따 전화할 테니까 일 열심히 해. 다치지 말고. 알았지?
“알았어. 너도 수고해.”
전화를 끊은 재유가 제 팔을 감싸고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아, 내가 왜 이러지. 진짜 미친 건가.
우주가 말 한마디로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한다. 좀 전까지 화나고 심통 났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심지어 설레고 흥분된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제법 포커페이스도 가능하고 적당히 없는 말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원래의 제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우주의 말투, 표정, 행동에 따라 제 컨디션이 결정되어 버렸다.
제정신 맞나.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더니, 과연 그랬다. 오늘도 그로 인해 천국과 지옥을 수시로 오갔다.
***
운전을 하는 우주는 마음이 조급했다. 벌써 새벽 1시를 넘긴 시간이라 차가 막히진 않았지만, 오후부터 조금씩 내리던 비가 조금씩 거세지고 있었다. 개의치 않고 액셀을 밟아 속도를 높였다. 집에 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유가 집에 오는 날은 야근도 안 하고 약속도 잡지 않았지만, 오늘은 일주일 전부터 정해져 있던 출장 때문에 직원 한 명을 데리고 포항엘 다녀와야 했다. 오전 11시 미팅이라 재유의 퇴근 전까지 넉넉하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일은 계속 꼬여만 갔다.
계약할 업체의 부장이 외부 일정이 있다며 갑자기 약속 시간을 오후 2시로 미루더니 미팅이 끝나고선 4시부터 낮술을 하자며 우겨 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붙들려 갔었다. 술은 끝까지 고사했지만, 저녁 식사부터 2차, 3차 술값까지 미리 계산해 주고 9시에야 겨우 서울로 출발할 수 있었다.
한 달에 두 번밖에 없는 재유와의 시간이 날아가 버린 것에 우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을의 입장이니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신생 업체, 경험 없는 어린 사장에게 제법 큰 프로젝트를 대행사 끼지 않고 계약해 주는 것은, 겪어 보니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우주는 그동안 작은 회사인 걸 감안해서 큰 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서 했다. 진교는 미대생이 알바로나 할 일들까지 받아 오냐며 불만이었지만, 대표인 자신의 미숙한 역량이나 회사의 규모로 봤을 때 금액보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건 경험이었다. 이 일 저 일 다 받아서 해 봐야 나중에 거를 일들이 눈에 보이게 마련이니까. 그 와중에 여러 인맥이 쌓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물론 매출액도 중요했다. 직원들 월급부터 사무실 월세와 유지비가 들어가는 고정지출은 매달 우주를 긴장하게 했다. 한창 쪼들렸을 때는 급여일 전에 거래처에서 입금이 안 되기라도 하면 형에게 아쉬운 부탁을 해서 사비로 메꾼 적도 있었다.
재유나 영선은 회사 차린 걸 대단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창업의 현실은 달랐다. 저 역시 만만하게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다. 막상 부딪쳐 겪다 보니 펼쳐진 건 가시밭길이었다. 하루가 1분처럼 지나갔다. 우주는 그동안 정신없이 일을 벌이고 또 만들면서 회사를 궤도 위에 올려놓기 위해 자신이 가진 최선의 노력을 다 해 왔다.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홈페이지를 그럴싸하게 꾸미고 온라인 광고도 내걸었으며 홍보대행사에 꾸준히 명함을 내밀고 국내외 디자인 공모전 도전과 입찰에 필요한 자격증 준비 등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이렇게 회사 일을 바짝 조이는 이유는 재유 때문이었다. ‘재유를 좋은 집에 살게 해 주고, 희지를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키는 일’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고 싶어서.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재유와 함께 마트에 간 적이 있었다. 유독 1+1 상품을 눈여겨 보고, 몇 달에 걸쳐 사용하는 간장이나 설탕도 제일 싼 걸로만 고르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받았었다. 물론 재유의 셋방 시절 살림도 봐 왔던 우주지만, 성인이 되고서 직접 돈을 벌고 나니 그런 재유를 보는 감상은 남달랐다.
재유가 다니는 한정식집이 아무리 손꼽히는 유명식당이라곤 해도 기껏해야 달에 200 남짓 되는 벌이였다. 거기다 희지한테 들어가는 지출도 상당하니 절로 살림을 줄이고 아등바등 아끼는 삶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물건을 고를 때 가격 대비 가성비를 따진 적이 없었던 자신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연인 사이라지만 재유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고 생활비를 턱턱 건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우주는 고심 끝에 돈 대신 현물을 사다 바쳤다. 재유의 집에 갈 때마다 희지의 계절 옷과 장난감을 선물로 건네고, 재유의 요리를 먹고 싶다는 핑계로 양손 가득 마트 봉지를 떠안겼다. 한 달에 한 번은 우유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이나 필요한 접종, 사료와 간식, 장난감을 짊어지고 되돌아왔다.
재유는 몇 번 난색을 하며 주의를 주곤 했지만, 그때마다 넉살 좋게 설렁설렁 넘어가는 건 별일 아니었다.
아직 재회한 지 7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주는 재유네의 인생에 책임을 느꼈다. 우주는 그동안 꿈꿔 왔던 가족을 만들기 위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채근하며 일에 매달려 왔다. 재유가 원하는가와는 별개로.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직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섣불리 진행 시키면 재유가 겁먹을 것 같아서 굴뚝같은 마음을 참고 인내해 왔다.
재유는 지나가는 말로 희지가 적응할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희지에게 우선 필요한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을 시간이었다. 가까운 이웃으로 살며 신뢰할 수 있는 삼촌이 되는 것. 그래서 우주는 매일같이 짧으나마 재유를 데려다주며 희지에게 얼굴을 비췄고,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틈날 때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챙겨 보기도 했다.
두 사람과 함께할 날만을 꿈꿔 온 우주는 아무리 진상 같은 거래처 담당과의 실랑이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빽마진도 그럭저럭 넘어가 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싸매는 내부미팅이나 밤새 써야 하는 제안서와 기획안, 잡다하고 귀찮은 각종 페이퍼워크도 어느덧 일상이 되어 갔다.
차는 어느새 집 근처 지하철역까지 도착했다. 비는 조금씩 잦아들어 부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재유는 이미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우주는 제 침대에서 잠들어 있을 그를 상상하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골목을 돌아 약국 2층에 자리한 집을 보니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아직 깨어 있나. 날 기다린 건가.
주책맞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차를 하고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재유는 침대에서 책을 손에 든 채 앉은 자세로 얌전히 자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서 불을 끄는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우주는 발소리를 줄이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약국 2층집은 이사 온 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곳곳에 재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모자란 주방 도구와 세탁 용품들이 채워지고, 잡다하게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재유가 고른 화이트 톤 수납장과 책장도 벽을 채웠다. 다른 쪽 벽에는 요즘 재유가 취미로 만드는 압화가 액자로 걸려 있었고, 여기저기 희지의 그림책이나 장난감, 주방엔 우유의 밥그릇과 사료도 상비되어 있었다.
두 집 살림하는 것도 아니고, 이럴 바에야 같이 사는 게 낫지.
우주는 한 집에 두 남자와 딸아이 하나, 강아지 한 마리가 부대껴 사는 모습을 흥겹게 상상하며 집 안 곳곳의 불을 껐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재유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잠든 얼굴을 잠시 지켜봤다.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자 따스한 숨이 손으로, 가슴으로 전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는데 재유가 작은 소리로 끙끙거렸다. 우주는 숨을 멈추고 잠든 얼굴을 재차 확인하며 까치발을 한 채 욕실로 갔다.
대충 샤워를 마친 우주는 머리를 털어 말리고 바로 침대로 기어들었다. 재유는 기척에 움찔했지만 잠에서 깨진 않았다. 우주는 옆에 딱 붙어 재유가 자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창 너머로 들리는 조용한 빗소리와 재유의 숨소리가 어우러져 자장가가 따로 없었다. 따뜻한 침대와 재유의 체온으로 피곤했던 몸이 흐물흐물 풀렸다.
“으음… 왔어?”
자는 줄 알았던 재유가 몸을 바짝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재유의 어깨를 감싸고 꼭 끌어안았다.
“깼어? 미안해. 많이 늦었지.”
재유도 어린애처럼 가슴에 뺨을 비벼 대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볼에 열기가 퍼졌다.
“아냐. 멀리까지 다녀오느라 수고했어.”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나른한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누운 채 재유를 안고 있을 때면 경직되고 예민했던 머릿속이 보드랍고 푹신해지는 기분이었다.
“너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잠들었나 봐.”
생각해 보니 재유도 일이 늦게 끝나는지라 이렇게 그가 먼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늘 혼자 귀가했던 우주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재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주는 재유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출장의 피로함을 덜어냈다.
“있잖아, 사실 오늘 너한테 할 얘기 있었는데… 깬 김에 말할게.”
“응. 뭔데?”
부둥켜안은 채로 재유가 눈을 들어 우주를 보았다. 아직 잠에 취해서 눈도 절반만 뜬 채였지만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형이랑 밥 한번 안 먹을래?”
“뭐…? 갑자기….”
“너도 한 번 만난 적 있지? 앞으로 계속 얼굴 볼 일 있을 텐데, 정식으로 인사도 시키고 싶고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
갑작스레 진지한 얘기가 나와서 그런지 재유는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우주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식으로 인사라니, 꼭….”
결혼 전에 상대방을 가족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말하는 거냐고 물을 듯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주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재유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너무 부담 갖지 마. 너 만나는 거 형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재유는 갑작스러운 권유에 잠이 달아났다. 눈에 힘을 주며 크게 껌뻑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자랑하고 싶다는 그 말이 더 부담이 됐다. 우주가 미국에 있을 때 우혁이 찾아와 동생을 한 번만 만나 달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솔직히 남자끼리의 사랑, 난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동생이 그렇게 못 잊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했었나.
우혁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 다시 만난다는 거 형님도 알고 계셔?”
“당연하지. 우리 형 너 좋아해.”
“설마….”
“정말이야. 내가 자리 마련한다니까 너 좋아하는 거 뭐냐고, 자기가 예약해 놓겠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아는 형이랑 편하게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우주의 형이 대학 졸업 후 바로 아버지 회사에 들어간 건 우주를 통해 알고 있었다. 2년 전엔 맞선으로 결혼을 하고, 얼마 전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고 했다. 재유는 우주의 형을 자신이 만나도 되는지 신중하게 생각해 봤지만, 답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와 담을 쌓으며 지내는 우주는 사업을 시작한 후 이모저모로 형의 도움을 받아 왔다. 물심양면으로 동생을 지원해 주는 형에게 저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재유도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우주를 친구로서가 아닌 연인으로 소개하고 싶었을 테니까. 재유는 기쁨과 걱정이 교차된 복잡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우주는 꽉 깨문 입가를 그만두라는 듯이 엄지로 살살 매만졌다. 기대와 설렘이 섞인 눈으로 웃어 주었지만, 그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재유는 입가에 있던 우주의 손을 자신의 손과 겹쳐서 뺨 위로 끌어 올렸다.
“…그래. 생각해 볼게.”
“진짜지?”
우주는 가족들에게 연인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재유도 그가 가족들과 영영 끊어진 채 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형부터 시작해서 조금씩이나마 전진하다 보면 어머니, 나아가 아버지에게까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먼 길이 될 테지만, 그 길을 우주 혼자서 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응. 나도 너희 형이 좋아하는 거 알려 줘. 선물이라도 준비하게.”
“아기 선물 주면 뭐든 좋아할 거야. 조카 이제 100일 됐으니까.”
“알았어. 예쁜 걸로 골라볼게.”
우주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오늘 제안한 형과의 만남은 훗날 재유에게 동거를 제안하기 위한 포석 중 하나였다. 재유는 가족과 등지고 홀로 떨어져 있는 자신을 안타까워했고, 그 원인을 본인에게서 찾는 듯했다. 이래서야 우주가 아무리 희지의 마음을 얻어도, 재유가 섣불리 동거를 찬성할 리 없었다.
우주는 부모님에게 이해를 바라는 건 애초에 포기한 상태였다. 그분들이 바뀌길 기다리다간 재유와 언제까지고 제자리걸음만 할 것이다. 다행히 가족 중에 우주를 믿고 지지해 주는 형이 있으니, 서로 인사시키면 재유는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혁 역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놓고 거부감을 드러내진 않았다.
요즘 우주는 셋이서 살 수 있는 작은 단독주택을 자주 상상하곤 했다. 아이와 강아지가 있으니 아파트보단 주택이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도 좋고, 사무실과 식당이 있는 동네도 비싸긴 하지만 아이를 기르기에 더없이 훌륭한 곳이었다.
“그렇게 좋아?”
재유는 피식피식 웃는 우주의 다부진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주는 덩치에 맞지 않게 기다렸다는 듯 폭 안기며 재유의 목 언저리에 뺨을 비볐다.
“당연하지. 둘 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몸만 커다랗지, 아이같이 천진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우주가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그가 정말 내 남자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벅차고 좋아서 때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재유는 제 몸통을 꽉 끌어안고 있는 손길을 느끼며 우주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이제 자야지.”
단순하고 따스했던 포옹이 어느 순간 단순해지지 않았다. 재유의 등을 부여잡은 커다란 손이 엉덩이로 내려가 힘주어 주무르고 있었고, 목에 닿았던 입술은 애무하듯 티셔츠 안쪽 살을 더듬고 있었다.
우주는 몸을 일으켜 재유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재유의 티셔츠를 절반쯤 끌어 올렸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하반신은 성실하게 반응했다. 빳빳하게 선 페니스가 재유의 아랫배를 찔렀다.
풉, 웃음이 터진 재유는 만류하듯 우주의 어깨를 밀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또….”
“우리 언제 마지막으로 했지? 두 달쯤 됐나?”
“무슨 소리야. 이달 초에도 했잖아.”
“그랬어? 근데 안 한 지 1년은 된 것 같아.”
우주가 끌어올린 티셔츠 속으로 얼굴을 묻고 성급하게 몸을 만져 댔다. 정말 할 줄 몰랐던 재유가 움찔움찔 놀라더니 잠이 완전히 깼는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진짜 하려고?”
“응. 안 될까?”
우주가 앉아 있는 재유의 허벅지에 벌렁 누워 허리를 끌어안고 아양을 부리듯이 얼굴을 비벼 댔다. 이미 하반신의 위험한 부위에 입술이 닿아 있었다.
“내일도 아침에 대전 가야 된다고 했으면서. 얼마 못 자잖아.”
“괜찮아. 전혀 안 피곤해.”
우주는 단호하게 자신의 피곤에 대한 우려를 물리쳤다. 재유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응시하더니 픽, 웃고 말았다.
“칫, 그럼 입으로 해 줄게.”
“싫어. 내가 해 줄래.”
“아냐, 네가 하면 한 번으로 안 끝날 거야. 밤샐지도 모르니까.”
재유는 핀잔을 하면서도 그윽한 시선으로 우주를 바라봤다. 허벅지에 달라붙은 우주를 밑으로 밀쳐냈다. 우주는 못 이기는 척 떨어져 나가더니 팔꿈치를 뒤로 짚고 반쯤 누운 자세로 재유를 기다렸다. 재유가 그 위로 미끄러지듯 몸을 숙였다.
우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재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손끝이 떨리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바지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너무 귀여워서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몸서리를 쳤다. 엉덩이를 슬쩍 들어주자 곧 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조금 부풀어 오른 성기가 재유의 눈앞에서 까딱이고 있었다. 재유는 손으로 기둥을 잡고 눈을 감은 채 귀두 끝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우주는 으음, 느른한 소리를 내며 재유의 혀가 닿는 예민한 감각을 여유 있게 즐기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안정적으로 자세를 고쳐 잡은 재유가 허벅지에 팔을 받쳐 기대고 페니스를 입속으로 더 깊게 받아들였다. 입술을 한껏 오므려 볼이 빵빵해진 재유가 꼭 희멀건 다람쥐 같았다. 우주는 등을 동그랗게 말고 자세를 숙여 재유의 머리와 어깨를 어루만졌다.
애무가 익숙지 않은 재유가 해 주는 것으로 사정까지 가긴 어려웠다. 혀는 깔짝대는 수준이었고, 손은 어디를 만져 주면 좋을지 모르는 것처럼 허둥대기만 했다. 하지만 우주는 재유가 가끔 이렇게 입으로 해 줄 때면 가슴이 들썩이면서 심장이 쿵쿵 울리고, 시각과 촉각이 너무도 예민해져 금세 흥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재유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더듬어 젖꼭지를 가볍게 문질렀다. 괴로운 듯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재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성기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우주는 재유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안쪽으로 얼굴을 더 끌어당겼다. 다른 손으로 바지 안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자 일순 재유의 치아가 페니스를 긁었다.
“윽! 어떡해, 아프지….”
“괜찮아. 일어나 봐.”
우주가 재유의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키고 엉덩이를 움켜쥐며 거칠게 끌어당겼다. 악력만으로 손쉽게 엎드려 있던 허벅지를 세워 순식간에 바지와 속옷을 무릎까지 벗겨 내렸다. 재유도 성기를 슬쩍 세우고 있었다.
“거봐. 너도 흥분했잖아.”
“읏….”
인정하기 싫다는 듯 재유는 눈을 내리깔았지만, 이미 뺨과 귓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주는 가느다란 그의 목을 감싸고 허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더 밀착시켰다. 엷은 입술을 혀로 간질이자 재유에게서 얕은 숨이 터져 나왔다. 부드러운 입술을 야금야금 깨물고 핥았다. 입술이 닿아 있는데도 견디기 힘든 간질간질함이 느껴졌다.
우주는 재유의 무릎을 들어 한쪽 다리의 바지를 완전히 벗겨 내고 제 허벅지 위로 앉혔다. 재유는 어깨를 붙잡고 몸을 허우적댔지만, 엉덩이가 사로잡힌 채 하체가 완전히 밀착되어 버렸다. 티셔츠를 벗기려는데, 재유가 흠칫 놀라 아랫단을 끄집어 내리며 부끄러운 듯이 제 성기를 가렸다.
“진짜 할 거야? 내가 해 준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잘하니까 참을 수가 없잖아.”
“거짓말.”
“끝까지 안 해. 너도 새벽에 집에 가야 되잖아.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응?”
“…….”
자, 만세- 재유가 딸에게 하는 말투를 따라 하며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얼결에 진짜 만세를 하며 옷을 벗게 된 재유는 얄밉다는 표정으로 흘겨보았다. 그래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밀착된 하반신에 성기끼리 맞닿은 감각이 선명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우주는 손으로 두 개의 성기를 겹쳐 쥐고 힘껏 흔들어 댔다. 귀두가 비벼지는 마찰에 재유의 무르익은 신음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재유가 우주의 가슴에 손을 얹고 키스를 하며 아랫입술을 감질나게 빨아들였다. 그가 만지는 가슴 언저리에 뜨거운 기운이 퍼지며 흉곽이 들썩거렸다. 우주는 움켜쥔 두 개의 페니스를 위를 향해 거칠게 잡아 올렸다. 서로의 성기 끝에 축축한 물이 흘러나와 윤활제가 없어도 찰지게 달라붙으며 손아귀에서 매끄럽게 딸려 올라갔다.
재유의 손이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우주의 등을 감쌌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서 등을 파고드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소유욕을 느낄수록 손아귀가 거세지고 속도는 빨라졌다.
“으읏… 핫… 으응….”
재유는 성기 끝에 자극이 몰릴수록 엉덩이 사이가 움찔대는 것을 느꼈다. 두 개의 음경을 한꺼번에 휘감아 쭉쭉 밀어 올리는 우주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니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애달픈 성감이 밀려 들어왔다.
잘하기도 하지.
페니스의 크기가 확연히 다른데도 우주는 자신의 흥분 포인트를 꿰고 있다는 듯 노련하게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귀두 끝을 억세게 조이거나, 기둥 중간 부분을 간질이듯 살살 끌어 올리거나, 뿌리 끝부터 귀두 끝까지 힘좋게 밀어 올리며 점점 애가 타게 만들었다.
이진교랑도 이렇게 한 적 있었나-
문득 배배 꼬인 불순한 예감 하나가 실낱같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재유는 혼탁한 상상을 몰아내려는 듯 목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약속을 믿기로 했으니까. 날 이렇게 좋아해 주는데, 과거에 사로잡히면 나 역시 우주 앞에 떳떳할 건 없으니까.
해선 안 되는 생각이라도 한 듯 그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재유는 머릿속에서 이진교를 몰아내려 애썼다. 우주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간절한 눈으로 마주 보며 성기 끝에 차오르는 사정감에 몰입하려 했다.
우주가 시선을 맞받으며 귓가에 들릴 정도로 야릇한 콧김을 뿜고 입술을 덮쳐 왔다. 그의 혀는 능란하게 입속을 휘저었고, 그의 손은 더할 나위 없이 찰지고 음탕하게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런데.
이진교의 엉덩이도 이런 식으로 만졌을까.
그때 우주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두 사람도 키스를 한 적이 있을까.
같이 일하는 동안 예전에 섹스하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할까.
우주는 정말 이진교를 좋아한 적이 없을까.
재유의 다짐과 달리 생각은 꼬리를 물어 점점 의심과 불신이 끼어들고 있었다.
‘정말 그 사람이랑 잤었니?’
묻고 싶었다. 우주를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의 막이 깨진 것처럼 미간이 구겨졌다.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서 그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아귀힘에 압도된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하아…!”
우주의 것도 움찔거리며 사정을 했다. 재유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흥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숨을 몰아쉬며 우주의 목에서 떨어져 나오려는데, 순간 등이 끌어당겨져 입술이 막혀 버렸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키스에 열중하던 우주가 소극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재유를 보고 걱정스레 얼굴을 살폈다.
“재유야, 피곤해?”
“응… 잠깐 씻고 올게.”
“같이 갈까?”
“아냐, 금방 나올게.”
재유는 옷가지들을 들고 화장실로 가서 샤워기로 아랫도리만 대충 씻었다. 사정을 하던 순간의 어수선하던 감정이 찝찝하게 남아 있었다. 쾌락이 물러간 자리엔 치졸한 질투가 채워졌다.
왜 그랬을까.
우주와 같이 있는데도 한순간 그가 멀게 느껴졌다. 떨어져 있던 시간의 공백이 마음 한구석에도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그동안 변화하고 성장하는 20대 초중반의 그의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후회와 안타까움, 그 자리를 지켰던 이진교에 대한 시기와 질투, 다정하지만 때때로 무딘 우주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그 공간을 채워 가고 있었다. 자신도 몰랐던 사이에.
극복할 수 있을까. 우주를 사랑할수록 집착의 그늘이 짙어진다.
재유는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가 보기에도 미운 얼굴이라 속으로 욕을 퍼부어 주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우주가 침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먼저 이불 속에 눕고는 자신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 빨리 오라며 눈짓을 했다. 재유는 가슴이 짓눌리듯 뻐근하게 아파 왔다.
저야말로 우주를 꽁꽁 숨겨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의 일상을 잃을까 마음이 조급하고 애달프기만 했다.
자리에 눕자 그가 팔베개를 해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우주의 단단한 팔과 이불 속 포근함이 그나마 재유를 안심시켰다.
“많이 피곤했어?”
우주가 볼을 만지작거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좋았어.”
“정말? 너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길래 괜히 하자 그랬나 했어.”
“끝까지 한 것도 아닌데 뭐.”
“지금은 기분 괜찮아?”
“응. 괜찮으니까 걱정 마.”
재유는 우주를 안심시키려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밤 동안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쳐 고요한 적막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
핸드폰 진동 소리에 우주는 인상을 쓰며 힘겹게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잠에서 깨 버린 우주는 재유를 살피며 얼른 진동을 껐다. 옆에선 아직 재유가 잠들어 있었다. 발신자는 진교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회사에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이 새벽에 전화를 하는 일은 없었는데. 우주는 핸드폰을 들고 방을 나와 목소리를 낮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염우주다. 우주야!
“…뭐야 너, 이 시간에. 술 마셔?”
-어. 마셨어! 나 좀 델러 와!
“뭐?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택시 타고 가면 되잖아.”
-아 몰라. 너 안 오면 객사할지도 모르니까 빨랑 와. 택시비도 없단 말이야. 지갑 잃어버렸어!
우주는 골치 아픈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내일 대전 출장이 있다는 걸 진교도 아는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 생각하기 귀찮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진교는 고백 이후 사무실에선 전혀 티 내지 않고 잘 지내 왔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겨 버리니 짜증이 나고 잠든 재유를 두고 간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난 못 가. 오후에 사무실에서 보자.”
우주는 뒷말을 듣지 않고 폴더를 닫았다. 진교가 노는 걸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밤중에 불러낸 적은 없었기에 우주로서도 뜻밖의 일이었다. 고백을 거절당한 걸 아직 마음에 둔 건 아닌지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대로 끊어 버린 게 마음에 걸리긴 해도 괜히 재유에게 오해를 살 만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전화가 걸려올까 봐 전원을 끄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
우주는 핸드폰과 재유가 있는 방 문을 번갈아 보며 순간 갈등했다. 결국 진동을 끈 채 무시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발길이 뚝 멈췄다.
포항 건으로 당장 수정 회의와 변경된 견적서를 발주처에 보내 줘야 했다. 이건 출장을 가는 자기 대신 진교가 진행해야 할 일이었다.
우주는 아까보다 더 큰 한숨을 내쉬며 결국 폴더를 열었다.
“야, 이진교. 너 진짜 내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여보세요? 여기 이태원에 있는 술집인데요, 지금 이분 뻗어서 좀 데리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아… 진짜.”
-짜증 내지 마시고요, 저희 5시까지 영업하니까 그 전에 데려가요. 안 그럼 이분 파출소에서 찾아가야 될 거예요.
우주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포항 출장에서부터 꼬이던 일이 새벽까지 이어진 셈이다.
“어디라고요? 이태원? 테라?”
수화기 건너의 소음과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겨우 위치를 알아들은 우주가 전화를 끊고 신경질적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문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번 방 문을 바라보았다.
별일 없겠지.
진교만 얼른 집에 떨궈 주고 재유가 깨기 전에 돌아올 심산이었다.
우주는 급하게 차 키를 챙겨 현관 밖으로 나왔다. 비가 완전히 그쳤지만, 새벽의 도로는 아직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우주가 탄 차가 습한 도로 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
진교가 뻗어있다는 술집은 이태원 한구석 지하의 게이바였다. 어둑한 조명에 시끄러운 음악이 정신 사납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테이블 두어 개를 제외하곤 거의 비어 있었다. 진교는 카운터 바 끝 쪽에 엎어져 있었다.
우주는 남은 손님들이 뿜어 대는 담배 연기를 가로질러 진교에게로 갔다. 얼마나 마셔 댔는지 바에 찰싹 달라붙은 얼굴은 흐물흐물했고 입술 사이로 침이 새고 있었다.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깨워 봤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우주는 인상을 쓰며 진교를 부축했다. 바텐더가 다가와 진교의 것으로 보이는 핸드폰을 챙기라며 눈짓을 했다. 진상 손님을 대하듯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이었다. 우주는 핸드폰을 집어 진교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계산은 다 됐나요?”
“이십만 주세요. 키핑 술이랑 조니워커 한 병 깠는데, 싸움 나서 때려 부신 잔 값도 있으니까.”
“싸움이요?”
“이 사람 저 사람 기웃거리면서 상대를 찾다가 꼴리는 놈이 없었는지 여기로 사람을 불렀나 봐요. 그 사람이랑 나갈 줄 알았는데, 중간에 수틀려서 같이 나가는 걸 거부하다가 한바탕 소란이 있었어요.”
“하… 폐 끼쳐서 미안합니다.”
우주는 진교를 들쳐 메고 남은 팔로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통째로 건넸다. 바텐더는 뾰로통한 얼굴로 지갑을 열더니 눈대중으로 지폐 뭉치를 집어 들고 다시 돌려주었다. 팁은 셀프로 챙긴 모양이었다. 우주는 축 늘어진 진교를 데리고 술집을 나왔다.
차가 주차된 곳까지 가려면 100m쯤은 더 걸어야 했다. 우주는 구겨진 얼굴로 정신 못 차린 진교를 질질 끌며 목적지로 향했다. 부축하느라 피하지 못한 물웅덩이에서 흙탕물이 바지에 튀었다. 진교가 숨만 내쉬어도 기분 나쁜 알코올 냄새가 났다. 우주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진교야. 똑바로 좀 걸어 보라니까….”
우주는 진교의 이런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진교는 자신을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는 것 같아도, 재유와 통화하거나 문자를 하는 것 같으면 알 수 없는 표정의 지긋한 시선을 보내왔었다. 그래도 스스로 마음을 접는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었는데. 자신이 너무 섣부르게 진교와의 일을 얼버무린 것도 있었다.
진교에 대한 감정은 전혀 없었지만 사실 미국에서 신세 진 걸 생각하면 그대로 내버려 두기도 힘들었다.
진교는 연고 하나 없이 홀로 한국에 정착한 교포 2세였다. 갑작스럽게 고백했던 날, 진교는 오로지 자기 때문에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책임을 느끼진 않아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미국에서 1년 넘게 방황하는 자신을 곁에서 돌봐준 것에 대한 우정으로 새벽에 술 취한 이진교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쯤은 별일 아니었다.
다만 재유에게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 잠든 재유를 두고 진교에게 온 것이 괜히 켕기고 기분이 언짢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가 재유를 배웅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진교와는 오후에 맨정신으로 차근차근 대화를 해 봐야 할 것이다. 진교의 의도와 자신의 입장, 앞으로의 관계와 회사의 미래 등등. 이번에는 더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어둑한 새벽 거리엔 진탕 술에 취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모텔에 가니 마니 실랑이를 벌이는 남녀, 구토를 하는 친구의 등을 팡팡 때려 주는 남자, 떠들썩하게 4차를 가자며 아직 영업 중인 술집을 찾는 무리들까지.
그중엔 꽐라가 된 취객이 헌팅이라도 하는지 웬 남자를 어둑한 골목으로 끌고 가는 것도 보였다. 우주는 게이바 골목인 걸 감안하여 대수롭지 않게 골목을 지나쳤다. 그런데.
“…놓으라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에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머리털이 서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재유의 목소리였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공격적인 아드레날린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직감을 확인하기 위해 곧장 골목으로 돌아섰다. 그 바람에 진교가 길바닥에 풀썩 고꾸라졌다.
남자는 재유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재유는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이 뒤집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주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남자의 어깨를 잡아채 있는 힘껏 벽으로 밀쳤다.
“이 개새끼….”
남자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난폭하게 내리쳤다. 남자가 저항하듯 맞받아 공격하려 했지만, 술기운 때문에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몇 대 더 얻어맞았다. 남자는 눈이 돌아간 우주를 보고 금세 꼬리를 내렸다.
“크흑, 아 미안합니다. 미안… 임자 있는 사람인 줄 몰랐어.”
남자는 입술이 터졌는데도 콜록대며 우주의 눈치를 봤다. 재유는 순식간에 폭행 현장이 된 눈앞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남자가 씩씩대는 우주의 멱살을 풀고 슬금슬금 기어가듯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젠장….”
주먹질을 멈추고 나서야 상황판단이 섰다. 재유가 여기 있다는 건 통화 내용을 듣고 따라왔다는 것이다. 새벽에 혼자 나와 진교를 만나는 것도 봤을 것이다.
우주는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힌 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숨을 골랐다. 골목 바닥에는 온갖 쓰레기들과 구토의 흔적이 뒤섞여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우주의 속도 꼭 저 꼴로 난잡하고 더러워졌다.
겨우 기분을 진정시키고 눈을 들자 바로 앞에서 재유가 스쳐 지나갔다. 망설임도, 감정도 없는 듯한 단호한 걸음걸이였다. 우주는 곧바로 뒤따라가 손을 붙잡았다.
“재유야, 잠깐만…. 어떻게 된 거야? 나 따라온 거야?”
“…….”
“저놈은 뭐야? 어쩌다 끌려간 거냐고.”
묻는 말투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재유는 냉정하게 손을 뿌리치며 턱짓으로 진교를 가리켰다.
“놔. 넌 저 사람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났다. 우주는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하고 다시 재유의 팔을 붙잡았다.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와 버린 행동에 후회가 됐지만,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다.
“안 오려고 했는데, 술 먹고 정신을 잃었다니까….”
“알아. 통화 내용은 나도 들었으니까.”
“미안해, 정말. 그런데 다른 뜻은 없어. 그냥 집에 데려다만 주고 다시 가려고 했어.”
우주는 열심히 해명을 하면서도 자신이 뱉은 말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오해할 만한 일을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재유가 과연 날 믿어 줄까. 화나서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랬겠지. 나랑 자고 성에 안 차서 저 사람 찾아간 건 아니겠지. 근데 넌 원래 한 번으로 안 끝나잖아.”
“재유야….”
분노를 꾹꾹 눌러 참는 듯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재유의 이런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악에 받친 말에 우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 그럼 끝까지 안 해서 그랬나? 고집부리지 말고 해 줄 걸 그랬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닌 거 알잖아.”
우주가 이번엔 재유의 두 팔을 붙들고 애원 조로 매달렸다. 날이 선 그의 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이렇게 가지 마. 얘기 좀 해.”
“그럼 이 상황에 너랑 나랑 사이좋게 저 사람 들쳐메고 집에 데려다주잔 소리야?”
“…….”
“집에 가야 돼. 희지 아침 먹여 보내려면.”
“그럼 얘 데려다만 주고 너희 집으로 갈게. 출근하기 전에 잠깐만 나 좀 봐. 이렇게 가 버리면 나….”
“우주야.”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냉담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서워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네가 저 사람이랑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거, 머리로는 알고 있어. 근데… 자꾸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면 나도 믿음이 흔들린다고. 알잖아, 넌.”
“…….”
“질투가 얼마나 괴로운지.”
마지막 말에 재유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내는 데 지쳤는지 결국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울고 싶은 건 우주도 마찬가지였다.
“잘못했어, 재유야. 내가 진짜 멍청했어. 그러니까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응? 이따 집으로 갈게. 금방 갈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이따금 지나가는 행인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재유는 울지 않으려고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진교와 우주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당분간 안 만나고 싶어. 네 얼굴 보면 안 좋은 생각만 떠오를 것 같아. 사실, 아까 했을 때도 그랬어. 너 저 사람이랑 잤다며. 둘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자꾸 상상돼서 나도 미쳐 버리겠으니까.”
“뭐? 아까도… 그랬다고?”
우주는 그의 말에 억울함이 치밀었다. 친구라고, 동업자일 뿐이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지금은 아무 사이 아니라고 못 박았는데. 믿는다고 했으면서. 재유는 지금 이 새벽에 내가 진교랑 몰래 바람피우려고 만나는 것처럼 얘기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하루종일 출장으로 인한 고생이 허무했다.
재유가 기다리니까 늦어지는 일정에 전전긍긍했고,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 비가 오는데도 고속도로에서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다. 재유와 희지를 위해 아버지 도움 없이 성공하고 싶었고, 하루빨리 한집에 살기 위해 아등바등 돈을 불리려고 애썼다.
그런데 재유는, 이런 간절한 마음은 하나도 몰라 주고 그저 한 번의 실수로 저를 몰아세운다. 진교가 날 좋아하는 게 내 탓도 아닌데.
“그게 네가 할 소리야? 나랑 끝내기도 전에 딴 여자랑 잔 주제에. 질투? 그래, 네 덕에 잘 알지. 아주 뼈에 사무칠 정도로 상상했어. 키스 한 번 안 해 본 동정이었으면서 여자랑 자고 임신까지 시켰으니까. 그때도 내 머릿속은 지옥이었어. 이제 내 심정이 이해가 가?”
“…염우주.”
“넌 그래도 그 여자랑 잤으니까 억울하지는 않겠지. 난 네가 미국에 찾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딴 사람이랑 잔 적 없어. 진교도 마찬가지고. 그냥 친구라고, 친구. 빌어먹을 친구!”
“…….”
재유는 우주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에 경악했다. 우리 사이에 있는 소중한 무언가가 쩍쩍 갈라지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인애와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자신을 원망한다는 게 견딜 수 없이 비참했다.
‘드러운 바이 새끼.’
과거, 우주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우리에겐 존재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희지가 뭐가 되니.”
재유는 괴로운 얼굴로 읊조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심장을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와의 미래가, 한순간 어두워졌다.
우리가 처음 헤어졌을 땐 어땠더라.
그땐 어렸고,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었다. 그 어리석음에 혼자서 슬픔에 함몰되어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이를 먹고 사회적 경험치를 충분히 쌓았는데도 그를 이해해 주기는커녕 채근하며 바라기만 한다.
그냥 친구가 술 취했으니까 집에 바래다줄 수 있는 건데, 그 사소한 것 하나 못 넘어가고 땍땍거리며 따져 댔다. 그의 말처럼 딴 여자랑 애까지 낳은 주제에. 덮어 놓고 믿어 주면 될 걸 감히 우주에게 참견하고 간섭하고 귀찮게 했다.
근데 자신은 원래 이렇게 이기적으로 사랑을 하는 놈인 것 같다. 자기에 비하면 감지덕지인 사람이 바로 우주인데.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희지는 정말 뭐가 되는 거니.
삐딱하고 못난 마음은 빌미가 생기자마자 불안과 불신을 부풀렸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관계는 우주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거였다. 나로 인해 집안과 등지고,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돌고 돌아야 하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굳이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그의 인생에 자신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렇게 속 좁고 이기적인 애 아빠한테 쩔쩔매며 살진 않았겠지. 재유는 생각할수록 우주 곁에 있는 제 모습이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제 놔주지 뭐.
우리가 하는 게 뭐 대단하고 뭐 별난 사랑이라고. 고작 이런 오해로 서로의 상처나 헤집는 놈들인데.
참담했다. 자신들의 꼴이 우스워 허탈한 웃음이 났다.
재유는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우주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쳐 버렸다.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재유야, 미안해.”
희지의 이름이 나오자 조금 누그러진 우주가 별 저항 없이 떨어져 나갔다. 자신을 보는 우주의 눈이 다시 간절해졌다. 재유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저 친구나 빨리 데려다줘. 추운데 몸 상하겠다. 이제부터 친구 이상이 될지도 모르잖아?”
재유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우주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해 버렸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삐딱하게 말하지도 말고.”
우주는 몸을 숙여 재유의 얼굴을 붙잡고 애타는 심정으로 눈을 마주했다. 재유의 눈가에 맺힌 것이 금방이라도 뺨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네가 결백하건 말건 상관없어. 이제 내가 못 견디겠어. 넌 내가 희지 엄마랑 같이 있는 거 본 적도 없잖아. 근데 난 네 사무실에 갈 때마다 봐야 한다고. 난 이제 동업자건 뭐건 단 한 순간도 네 옆에 저 사람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아.”
“알았어. 재유야, 알았으니까….”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다고 하는 말, 이젠 못 믿겠어. 그러니까 선택해. 저 사람 계속 볼 거라면 난 너 더 이상 안 봐.”
우주가 재유의 목덜미를 절박하게 움켜쥐었다. 헤어짐을 암시하는 말에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안 본다는 소리 쉽게 하지 마.”
“내가 이렇게 못나 빠진 놈인데 넌 뭐 좋다고 매달려? 그냥 너 좋다는 사람한테 가면 되잖아!”
재유는 이제 북받쳐 울고 있었다. 우주는 재유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믿을 수가 없어 힘없이 이름만 불러 댔다.
“그만해요.”
낮게 잠긴 칼칼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재유는 울음이 목에 걸리는 바람에 꺽꺽대며 기침을 했다.
이진교였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어느새 재유 바로 뒤에 휘청대며 서 있었다.
“그만해요, 한재유 씨. 이번엔 내 실수였어요. 술 먹다가 정말 지갑이 없어져서 하는 수 없이 부른 거예요. 친구끼리 그런 일 흔하잖아요. 미안해요. 앞으론 조심할게.”
이진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건성건성 말하며 옷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재유는 엉망으로 울면서도 고개를 돌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너무 미웠다.
하필 같이 있는 날 불러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론 둘이서 종교 수행을 한다고 해도 못 믿을 터였다.
우주와 매일같이 한 공간에 있는 한, 이진교는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할 것이다. 재유는 우주와의 한계를 이진교의 존재로 조금씩 실감했다.
“나 오늘은 집에서 좀 쉴게. 알아서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모레 회사에서 보자. 재유 씨, 다음에 또 봐요.”
“…….”
“…….”
이진교는 비틀거리며 골목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재유는 원흉을 일으킨 그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인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서 그가 사라질 때까지 주먹을 쥔 채 노려보기만 했다.
이제 둘만 남겨진 상황에 우주에게 화를 내야 할지 계속 울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우주와의 말다툼으로 이별 직전 상황까지 가 버렸는데, 별안간 이진교가 둘 사이를 가로막아 뜻하지 않게 쉬어 갈 타이밍이 만들어졌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 덕에 재유는 조금 냉정해졌다.
이 새벽에 통화 내용을 엿듣고 우주를 쫓아와 길바닥에서 남자들끼리 치정 싸움이라니. 생각할수록 자신이 한심하고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재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어내리며 운 자국을 지웠다.
우주는 말이 없었다. 자리를 뜨는 진교에게 따지지도 않고, 재유에게 변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거짓말이지?”
목소리를 쥐어짠 듯 우주는 겨우 말을 뱉어냈다.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
“…뭘?”
“그냥 화가 나니까 순간 욱해서 한 말이었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사람한테 가라는 그런 말을… 왜 해?”
“…….”
“대답해.”
욱해서 한 말이었던가. 그 순간엔 진심이었던 것 같은데.
우주가 오해하면 오해하는 대로, 믿으면 믿는 대로 주사위를 넘기고 싶었다. 소모적인 다툼에 이미 지쳐 버려 자신이 뱉어 버린 말을 주워 담을 의지도 없었다.
이진교와는 별개로 오늘 일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이제 아무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반쯤은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재유는 입을 열었다.
“아까 했던 말, 어느 정도 진심이야. 나 원망해도 상관없어. 우리, 좀 떨어져서 시간을 가져 보자.”
“젠장,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도망칠 생각부터 해. 네가 달아나면 난 쫓아가서 매달리고 애원하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건데?”
“…하기 싫으면 하지 마. 강요한 적 없어.”
“말 되는대로 막 하지 마.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항상 협박이 통하는 건 아니야.”
“이게 협박으로 보여? 너랑 싸우기 싫어서 그래. 묻고 따지고 변명하고 사과하고… 그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런다고.”
“그럼 우리 사이에 뭘 할 수 있는데? 사귀는 사람들끼리 오해가 생기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져서 끝장을 본 다음에 털 건 털고 묻을 건 묻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런 것도 안 할 거면 넌 나랑 대체 왜 사귀고 왜 만나는 건데?”
“읏….”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던 우주는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재유가 가시 돋친 말을 해 댔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상처받은 얼굴로 금방이라도 저에게서 팩 돌아설 것만 같았다.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된다. 진짜로 떠날지도 모르는데. 그럼 절대 안 되는데.
아.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재유에게 이겨 먹으려는 자신이 어리석었다. 애초에 먼저 잘못한 건 나였는데. 이미 다 지난 임신 얘기는 왜 또 꺼냈을까. 그것도 진교가 있는 데서.
“시간 갖자는 말 하지 마. 그냥 내 옆에 있어 줘, 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부탁이야.”
재유를 끌어안은 우주가 결국 다시 애원했다. 재유의 마음이 풀릴 수만 있다면 매달리며 빌든, 울면서 사정하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언제나 불안했다. 그가 또 사라져 버릴까 봐. 그 꼴을 다시 보느니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존심을 내던지며 매달릴 수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앞으로 네 말만 듣고 너 하라는 대로 할게. 회사도 접을게. 진교랑도 다신 안 만날게. 그러니까 안 본다느니, 시간을 갖자느니 그런 말 하지 마. 너도 마음 아프고 힘들잖아. 응?”
“…염우주.”
애절한 목소리에 재유는 당연히 마음이 약해졌다. 그가 하자는 대로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선뜻, 우주에게 기대고 그에게 안길 자신이 없었다.
우린 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어딘가 모르게.
10년 전 우주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서로의 마음만이 중요했다. 그때도 이런저런 고민은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 모르는 철부지 수준의 난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 희지와 우주 곁을 맴도는 이진교, 그의 가족들이 겹쳐 보여서 사랑 하나만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란 달콤한 낙관이 점점 탁하게 흐려졌다.
자란 만큼, 사회와 주변 환경을 어른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재유는 ‘그와의 미래’는 힘들 거란 절망이 교묘하게 자라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재유는 우주를 안아 주며 ‘나도 미안해, 우리 이제 싸우지 말자.’ 이런 식의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아니. 당분간 연락하지 마.”
왜 그랬는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를 밀쳐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큰길까지 단숨에 달려 나왔다. 정차한 택시에 올라탄 재유는 다급하게 행선지를 불렀다. 차가 출발하자 시트에 몸을 구긴 채 숨을 씩씩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낙망과 체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씨발… 한재유.”
우주는 자신에게서 달아난 재유를 지켜보며 텅 빈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택시를 끝까지 노려보던 우주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
약국에서 몸살 약을 산 진교는 곧바로 2층으로 향했다. 집에 온 건 처음이었다. 주소는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우주가 초대한 적은 없었다.
뉴욕에서는 그럴듯한 아파트에 살더니 한국 집은 동네도 그렇고 건물도 그렇고 진교가 보기에 꼴이 영 후줄근했다. 그래도 우주를 챙기러 여기까지 오는 길엔 오랜만에 그리운 기시감이 들었다.
딩동-
비둘기색 철제 현관문 안쪽엔 기별이 없었다. 진교는 인상을 찡그리며 문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안 나서 문을 두드리려는데 누구세요, 작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진교.”
문 너머가 다시 조용해졌다. 문전박대당하나 싶어 슬슬 뚜껑이 열리려는 찰나에 철컥, 문이 열렸다. 낡은 경첩에서 나는 끼익 소리가 꼭 감옥 철창 열리는 소리 같았다. 우주가 이렇게 구린 집에서 살고 있었나 싶어 얼굴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 근처엔 죽집이 없더라. 밥 안 먹었지?”
우주는 듣는 둥 마는 둥 비척비척 걸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교는 얼른 쫓아가서 부축하며 우주가 침대에 눕는 걸 도왔다.
“얼굴 꼬라지 봐라. 다 죽어 가네.”
“미안하다. 오늘은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전 건은 너 대신 재영 씨가 커버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제안서 작업은 나도 있고, 서라 씨도 있고… 모자란 건 외주 쓰면 되니까.”
“여기까지 올 건 없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우주는 진교의 방문이 마뜩찮았다. 전화로 해 줘도 될 말을 굳이 집까지 와서 들쑤시는 꼴이었다. 재유가 꾸며 놓은 집에 진교가 품평하듯 두리번거리는 것도 보기 싫었다.
“지랄하네. 차라리 오지 말라고 대놓고 말을 해.”
“…….”
“나도 오기 싫었어. 그래도 너 이 모양 이 꼴로 있는 거 뻔히 보이는데 혼자 냅두냐? 미국에서처럼 산송장 될까 봐 그랬다.”
그러면서 우주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우주는 인상을 쓰며 진교의 손길을 쳐냈다.
“괜찮아. 내일쯤엔 나을 거야.”
“쳇. 유난 떤다, 유난 떨어. 내가 만지면 닳냐?”
말투는 변함없이 틱틱댔지만, 진교는 또 한 번 익숙한 상처를 입었다. 우주가 쳐낸 손을 잠시 바라보다 괜히 제 머리칼을 두세 번 쓸어 넘겼다.
“그날 이태원에서 보고 끝이야?”
“…뭐가?”
우주는 그날 일을 진교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았다. 왜 그날따라 술 먹고 불러낸 건지 따질 마음도 없었다. 이 이상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대며 진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너 내 탓 하냐?”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네 연애 사정도 대충 짐작 가고, 그 사람이랑 잘 안 돼서 이렇게 아픈 것도 알겠는데, 내 앞에선 적당히 좀 해. 너 손끝 하나 안 건드리고 지켜보는 나도 죽을 맛이니까.”
진교의 말투가 거슬렸다. 재유와 만나는 걸 봐주고 있다는 식이었다. 우주는 순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자세를 고쳐 앉고 진교에게 물었다.
“너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은 뭔데. 좋아서 만난 거 아니었어? 나한테 네 남자친구들을 줄줄이 소개시켰던 건 뭐냐고.”
진교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고개를 빙글 돌리며 웃었다.
“하나씩만 물어봐라. 정신없으니까.”
진교는 침대 옆에 스툴을 끌어와 앉았다. 한숨을 내쉬더니 팔짱을 끼고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표정을 바꾸었다.
“널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냐고 묻는 거지? 내 마음에 진정성을 의심하는 거고.”
“그래. 궁금하긴 하네. 너 그날 이태원에서도 원나잇 하려고 했다면서. 난 아직도 네가 장난하는 것 같거든.”
침묵이 찾아왔다. 우주는 입을 다물고 있는 진교가 낯설어졌다. 괜한 걸 물은 것 같아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려는데, 진교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너 잊어 보려고 만난 사람도 있고 너한테 질투심 좀 끌어내 보려고 소개시킨 사람도 있었어. 뭐… 섹파도 없진 않았고. 근데 내가 너 좋아한다고 해서 독수공방해야 되냐? 짝사랑인데 수절까지 하라고?”
“물론 아니지. 네가 누구랑 자든 난 아무 상관도 안 할 테니까.”
진교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까딱이고 입매가 비틀렸다.
“네 그런 점이 날 미치게 하긴 하지. 헤픈 나랑은 정반대니까. 너무 순정파라 빈틈이 없거든. 그런 네가 날 좋아해 준다면 어떨까, 그렇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게 너무 궁금하더라고.”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한 거라고 했다.
“네가 졸업할 때까지 그 사람 잊고 나한테 넘어오게 만들고 싶다는 그런 가벼운 도전 의식? 근데 넌 꿈쩍도 안 하더라? 네가 그렇게 질긴 놈인지 몰랐지. 근데 한 해 한 해 지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진심이 됐더라고. 내 문란한 아랫도리와는 별개로 말이지. 됐냐?”
잠시 말을 잃은 우주는 버석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정답 없는 수수께끼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뭔진 알 것 같은데, 와닿진 않는다. 각자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니까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
“…….”
“어쨌든… 난 안 변한다는 것만 알아 둬라. 나랑 재유 사이에 더 이상 낄 생각 하지 말고.”
우주는 진교의 진심을 가늠하기에 앞서 이런 말이 그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교가 떠나면 오랜 우정이 박살 나고 회사가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내줄 마음이 없기에 여지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누가 먼저 지칠지 두고 보자는 거, 진심이니까 자꾸 까먹지나 마.”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진교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우주는 부러 가볍게 치부하며 대화를 끊었다.
“너 그냥 가라. 나 좀 쉬게. 내일 회사 나가면 펑크난 일들 다 메꿔 놓을 테니까.”
우주는 침대에 누워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런 문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그의 등이 말하고 있었다.
진교는 헛웃음을 치며 우주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좋아하는 사람만 아니면 발로 머리를 까고 싶을 정도였다. 푸대접도 적당히 좀 하지.
“…내가 죽까지는 못 끓여 주겠고 대신 밥 먹여 줄 사람 불렀다. 밥 먹고 약은 처먹든지 말든지.”
진교는 침대 머리맡에 약봉지를 던지고 방을 나갔다. 우주는 혹시 재유를 부른 건가 싶어 뭔가 대꾸하려다가 진교가 외치는 소리에 곧 입을 닫았다.
“형님한테 전화해 놨으니까 그런 줄 알어!”
진교는 화풀이하듯 무거운 현관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 나가 버렸다.
왜 저렇게 참견을 못 해서 안달일까.
진교의 마음을 알 것도 같지만, 그 진심을 깊이 아는 게 두려워져 우주는 애꿎은 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형을 불렀다는 소리에 두통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이마를 잔뜩 찡그리며 덜덜 떨리는 몸을 침대에 묻고 이불을 덮었다. 아프니까 재유가 더 보고 싶었다.
또 시작인가. 재유 때문에 끙끙 앓으면서도 거부당할까 봐 무서워 연락도 못 하고 있는 거.
생각해 보면 재유가 떠나려고 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아팠다. 우주는 자신이 여전히 스무 살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사진이 까발려지던 본가의 거실에, 재유가 떠나고 혼자 남겨진 여관방에 우주는 여전히 혼자 있었다.
이대로 또 무너져 버리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거워진 몸이 모래 속에 파묻히듯 꺼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