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재회(4권) (10/18)

4권

9. 재회

* * *

2008년 5월.

“당신, 우주 한국 들어오는 거 알고 있죠?”

장운시 외곽의 고급주택단지 중에서도 가장 넓고 비싼 3층 저택의 안주인이 익숙한 침묵을 깨고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

창섭은 노크도 없이 들어온 아내에게 못마땅한 얼굴을 내비치더니 대꾸도 않고 읽던 책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일상생활에 유용한 사자성어 모음집이었다. 수자도 딱히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으니 문가에 삐딱하게 선 채 할 말을 마저 했다.

“당신 뜻대로 군대도 가고, 유학도 갔다 오는 거니까 앞으로는 사람 붙여 감시하는 거 그만둬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미동도 없는 창섭을 보며 수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환갑을 넘긴 부부는 드넓은 집에 단둘이 살고 있었지만, 이미 장성한 자식들의 얘기가 아니면 대화가 거의 없었다. 얼마 전 가정을 이룬 큰아들 내외가 집에 들르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에는 사람 사는 소음이 거의 없는 지경이었다.

부부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건 둘째 아들의 군입대와 강제 유학이 이유였다. 자식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수자에겐 커밍아웃 발언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남편의 강압과 독단에 질릴 대로 질려 버렸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앞으론 우주한테 신경 꺼요.”

창섭은 시선을 책에 박아 둔 채 입만 움직여 말했다.

“그거야 저 하기 나름인 거지. 그럼, 이대로 내버려 두자는 건가? 아들이 집안 망신시키는 꼴을?”

“난 우주가 집안 망신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돈만 밝히는 당신이라면 모를까.”

수자는 철천지원수를 보듯 창섭을 노려보았다.

사실 부부가 둘째 아들을 생각하는 사고회로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뜻은 별다르지 않았다. 수자는 남편처럼 자식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곁에 두고 애정을 쏟으며 지원을 해 주고, 나쁜 물을 들인 동창생과 떨어뜨려 놓는다면, 예전의 착하고 다정한 아들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왔다.

다행인 것은 한재유라는 놈이 발랑 까진 근본답게 여자와 살림 차려 애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남편만 섣불리 손대서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면 우주는 엄마인 자신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당신이 뭐 어쩔 건데?”

“이혼소송 당해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있으라고. 우주 건들기만 하면 이번에야말로 인생 걸고 당신이랑 끝장내 버릴 테니까.”

창섭은 그제야 책에서 눈을 떼고 흉흉한 기세로 수자를 쏘아보았다.

“…….”

이혼 얘기를 꺼낸 게 처음은 아니지만, 체면과 권위를 중시하는 창섭에게 가장 잘 먹히는 협박이라는 걸 수자는 알고 있었다.

수자는 우주가 제 형처럼 평범하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는 모습을 볼 때까지 충분히 설득하고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희생이고 모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택시 안에선 걸그룹이 부르는 k-pop이 흐르고 있었다. 밤중인데도 선글라스를 낀 중년의 택시 기사가 흥얼거리고 있는 걸 보면 꽤 유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주는 창문을 반쯤 열고 영종도의 바다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져 버려서 별로 볼 만한 건 없었지만, 6년 만에 돌아온 한국의 공기를 한껏 음미하고 싶은 마음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또 시원하게 내쉬었다.

창밖으로 서서히 도심이 나타나고 환한 불빛들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이미 퇴근 시간은 지난 터라 차가 밀리진 않았다. 서울에서 산 게 고작 대학 신학기 시절뿐이라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체감하지 못했지만, 빽빽 들어찬 고층 빌딩과 대낮인 듯 환하게 빛나는 야경이 뉴욕 못지않은 대도시처럼 느껴졌다.

출발하기 전 우혁이 공항에 마중 나온다고 했었지만, 회사 일로 바쁠 테니 유난 떨지 말라고 일축하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볼일이 있기도 했다. 그 때문에 가슴이 설레었다.

재유를 보러 갈 거니까.

우주는 어느새 노래에 리듬을 맞추며 발을 까딱거렸다.

택시는 서울 중심부를 향했고, 전통적인 부촌이라 여겨지는 동네로 들어섰다. 거리마다 고급주택들이 즐비했고, 집마다 담이 높아서 가로등이나 작은 상점들 외엔 불빛도 전혀 없이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겼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우주는 택시비를 현금으로 건넨 뒤 차에서 내렸다. 장시간 앉은 자세에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늘려 가며 기지개를 켰다. 밤이 깊어지자 조금 쌀쌀했다. 품이 넓은 회갈색 카디건을 조금 여민 채 재유가 일하는 식당을 바라보았다.

규모가 제법 큰 모양인지 내부는 밖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주는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몰래 숨어 있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50m 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참… 변한 게 없네.”

가로등 뒤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데, 옛날 생각이 나는 바람에 혼자 피식거리며 웃었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종례를 하자마자 눈에 든 전학생을 뒤쫓아 다니며 몰래 훔쳐보고는 혼자 설레며 좋아했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재유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비행기를 타고 직장 앞에 숨어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자기가 봐도 미친놈이 맞는 것 같았다.

30분쯤 기다리자 부산스러운 말소리가 들리더니 예닐곱 명이 떼로 식당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입구에서 헤어진 한두 명은 마을 어귀 방향의 내리막길로 갔고, 나머지는 우주가 있는 정류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에 재유가 있었다.

남색 후드티에 청바지, 야구모자를 눌러쓴 모습에도 한 번에 발견할 수 있었다.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우주는 몇 발짝 더 떨어져서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긴 채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오늘 들어온 컴플레인 관련해서 토론하고 있는 듯한데, 재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보조를 맞춰 주고 있었다.

“버스 온다.”

멀리서 마을버스가 오자 우주는 자연스레 무리 주변으로 다가섰다. 우주는 마지막으로 줄을 선 재유의 뒤에 바짝 붙어 버스를 타려고 시도했다. 버스카드를 찍고 올라탄 사람들과 달리 우주는 현금 천 원을 내고 들키지 않게 재유의 뒷자리로 가려고 했는데,

“거스름돈 가져가요!”

버스 기사가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이목이 집중됐다. 아차 싶어 돌아본 순간 재유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우주는 뜨끔한 표정으로 얼른 시선을 돌리고 거스름돈을 챙겨 고개를 숙인 채 뒷자리로 향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쯧….”

서프라이즈가 허무하게 끝나 버려 시무룩하게 얼굴을 구기면서 재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요하지도 않고 아는 체도 않는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직 직장 동료들과 함께라서 섣불리 다가갈 순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주는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재유의 후드를 소심하게 만지작거렸다. 괜스레 가슴이 벌렁거렸다. 쫓아다니면서 들킨 것도 처음인데 4년 만에 만나는 거라 더 초조하기도 했다.

버스는 산길을 내려가 네 정거장을 더 지나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재유가 동료들과 내리자 우주도 얼른 뒤따라 내렸다. 지하철역에 들어서자 표를 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재유는 우주를 의식하는 모습도 없이 태연하게 동료들과 어울려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가 버렸다.

우주는 서둘러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개찰구를 통과해 재유가 갔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전철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거야….”

막차가 근접한 시간이라 북적거리는 통에 쉽사리 찾아지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우선 전철에 오른 뒤 찾아보기로 했다. 타자마자 두리번거리며 그의 모습을 찾았지만, 옆 칸에도, 그다음 칸에도 재유는 없었다.

낭패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 내릴 역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내린다면 만날 수 있겠지. 여덟 개 역을 지나 재유의 집 인근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튕겨 나오듯 내리고는 계속 찾아봤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타지 않은 건가.

우주는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곧이어 도착한 전철이 막차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좌우를 정신없이 돌아보며 재유를 찾았다. 머릿수가 많아질수록 헷갈리기 시작했다. 엇비슷한 실루엣이 보였지만 재유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날 피해 도망간 건가. 아니면 아까 눈이 마주쳤을 때 내가 아닌 줄 안 건가.

감동적인 재회를 바라고 공항에서 곧바로 달려왔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침울해졌다. 플랫폼엔 점점 사람이 뜸해지고 결국 우주 혼자 남았다.

형네 집으로 갈까, 호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재유가 어디 사는지 만이라도 확인하자는 생각으로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주소만 알지 이 동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서 제일 가까운 출구로 빠져나왔다. 우주는 거리의 표지판과 건물에 붙은 주소를 확인해 가며 헤매기 시작했다.

골목을 몇 번이나 되돌아갔을까. 겨우 비슷한 주소를 찾아낸 우주는 조용한 주택가 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주변에 대학이 있는지 고만고만한 4~5층짜리 원룸 건물들과 빌라가 줄지어 있었고, 중간중간 들어선 주택은 빨간 벽돌로 지은 구옥들이었다.

드물게 편의점이나 치킨집, 껍데기집 같은 상점들이 나왔는데 가게마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재유가 매일 지나다니는 거리를 걷는다고 생각하니, 문득 마음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미국에서 재유와 짧은 만남을 가진 뒤 우주는 곧바로 영어 공부와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술도 거의 안 마시고 생활패턴도 정상적으로 바꾸었으며 진교를 비롯한 다른 유학생들에게 틈틈이 도움을 받아 꾸준히 노력한 결과 이듬해엔 경영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는 공부에만 매달려 한 학기 빠르게 졸업장을 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전공에 대한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경영대학에 들어간 건 결국 아버지 때문이었다. 사진이나 디자인에 관심이 있기도 했는데, 자신의 실력으로 세계에서 이름난 예술대학의 문턱을 넘기도 힘들었고, 그저 취미로 즐기는 게 본인 인생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돈으로 유학을 하고 있으니 약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선이나 결혼은 끝까지 버티며 부모님을 설득하리라 다짐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학벌도 중요했다. 학벌이 있으면 성공한 모습을 보여 줄 가능성이 커지니까. 결혼을 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여 주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도이자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온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휘두를지 짐작이 갔지만, 그대로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미국에서 차츰 생활에 적응을 하고 사람들도 많이 사귀어 그곳에서 삶을 이어 갈 수도 있었지만, 결국 돌아온 건 재유 때문이었다.

재유 곁에서 재유의 딸과 함께 친구처럼, 또는 가족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꼭 함께 살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가까이 살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으며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은 것만 생각했었다.

여기가 재유가 사는 곳이구나. 골목 곳곳에서 재유가 무엇을 했을지를 상상하며 걷다 보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주가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재유는 이 동네에서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이 길을 걸어 출퇴근을 하며 살아왔다.

나도 여기에 살고 싶다-

좋은 동네였다. 지하철역과 그리 멀지도 않고, 병원, 마트, 약국, 학교까지 주변 시설이 잘 갖춰졌다. 지구대도 가까이 있어 순찰차들이 도는 걸 보니 치안도 좋은 것 같았다. 이곳에 자리 잡는다면, 재유가 날 스토커 취급할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자 오르막길이 나왔다. 거의 다 온 것 같았는데, 재유네 집은 좀 더 올라가야 나오는 걸로 결론짓고 두리번거리며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자기에게 다가온 조심스러운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길 찾으면서 실실 웃기나 하고. 수상쩍게.”

익숙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커다란 덩치가 펄쩍 뛰다시피 들썩였다. 뒤돌아보니 바로 뒤에 재유가 있었다. 우주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배를 잡고 키득거렸다.

우주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웃으며 다가오는 재유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너 진짜 둔하다. 진짜 눈치 못 챘어?”

“뭐… 뭐야. 난 네가 나 못 알아본 줄 알고….”

풉, 하고 웃는 얼굴이 활짝 핀 꽃 같았다. 우주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재유의 얼굴에 푹 빠져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듯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그럴 리가 있어? 너 버스 정류장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진짜? 근데 왜….”

재유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우주의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미리 말 좀 해 주지.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고.”

우주는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재유의 손을 낚아채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좁은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읏….”

곧바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입술을 덮었다. 재유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난감해하는 게 보였지만, 그는 곧 눈꺼풀을 닫고 기꺼이 키스를 받아 주었다.

맞붙은 우주의 입술에 곡선이 그려지며 혀가 삐져나와 재유의 입술을 간질였다. 재유의 입가에서도 긴장된 숨과 함께 옅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고 싶었어. 우주야.”

듣고 싶었던 말이 귓전에 울렸다. 우주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재유의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이마와 눈썹을 어루만지며 얼굴을 확인했다. 스물여덟의 재유는 그새 미모가 무르익은 건지, 한층 세련되어 보였고 귀여운 건 여전했다.

“나도…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이 마음을 단순히 ‘보고 싶었다’라는 단순한 표현에 담을 순 없었지만, 진심을 눌러 담아 재유에게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주 돌아온 거야?”

“응. 이제 안 갈 거야.”

우주의 말에 품에 안긴 재유가 볼을 목 언저리에 갖다 대며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우리 집에 가자.”

재유가 우주의 손을 붙들고 골목을 나가려 했다.

“뭐? 안 돼.”

우주가 난감한 듯 그 자리에서 버텼다. 돌아보는 그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가 이내 표정을 지우고 덤덤하게 물어왔다.

“왜?”

“희지랑 처음 만나는 건데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공항에서 바로 와서 옷도 꾀죄죄하단 말이야.”

부스스해 보이긴 해도 꾀죄죄는 아니라고 말한 재유는 내심 섭섭한 눈치였으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늦긴 했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유의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희지가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 아쉬운 대로 다음 기회를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재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럼 어디로 가려고? 잘 데는 있어?”

“형네 집 가면 돼. 참, 나 핸드폰 샀어. 잠깐만.”

우주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고 1번을 꾹 누르자 재유의 바지춤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확인한 재유가 도도독 키패드를 누르며 저장을 했다. 그러더니 곁눈으로 우주의 핸드폰에 달린 폰 줄을 눈치채고 놀란 듯 말했다.

“아직 갖고 있었구나.”

재유가 서울에 왔을 때 길에서 산 커플 핸드폰 줄이었다. 낡아서 빛을 잃었지만, 하트 두 개가 나란히 겹쳐져 여전히 예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응. 이것도.”

우주가 자랑하듯이 왼손을 쫙 펴서 보여 주었다. 검지에 순금 링이 끼워져 있었다. 재유가 선물한 커플링이었다. 재유는 벌게진 얼굴을 가리듯 손으로 뺨을 덮으며 웃고만 있었다.

“근데 어떡해…? 난 폰 줄 잃어버렸어. 희지가 갖고 노는 걸 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

“걱정 마. 또 커플로 사면 되니까.”

미안해하는 재유의 목을 감싸 안고 다시 키스했다. 새끼손가락에 목걸이가 만져졌다. 살짝 잡아당겨 줄에 매달린 반지를 확인하면서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우주는 입속에 가둔 부드러운 입술을 더 깊게 음미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마구 날뛰고 있었다.

***

집에 가니 벌써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조심조심 까치발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자 안 자고 있던 우유가 쏜살같이 달려와 발치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희지와 이모님은 TV가 켜진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들은 이모님이 몸을 일으키며 벽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이고, 깜빡 잠들었네. 웬일이야? 좀 늦었네?”

“죄송해요. 친구가 찾아와서 잠깐 얘기 좀 하느라고….”

“그래? 좀 전까지 아빠 기다리다 막 잠들었어.”

“네. 제가 눕힐 테니까 이모님 어서 들어가세요.”

이모님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겉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재유는 배웅하기 위해 현관 앞에서 이모님이 신발 신는 걸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3개월 전부터 아이를 봐 주시는 이모님은 유치원에서 알게 된 희지 친구 엄마를 통해 고용했었다. 간식도 직접 만들어 챙겨 주고 희지와도 잘 놀아 주셔서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겠다 판단했고, 희지도 이모님을 무척 잘 따랐다. 이따금 재유에게도 스스럼없이 잔소리를 하시거나 피곤하면 희지의 방에서 주무시고 가셔서 진짜 가족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참, 희지 태권도 학원에서 장난치다가 문에 이마를 부딪쳤대. 살짝 멍들었더라고. 며칠 있으면 나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 그래요? 알겠어요, 이모님. 안녕히 가세요.”

“어, 내일 봐.”

이모님이 나가자 재유는 문을 잠그고 희지를 두 팔에 안아 방 안으로 옮겼다. 앞머리를 걷어내고 이마를 확인하니 엄지손톱만 한 멍이 푸르스름하게 들어 있었다. 워낙 발랄하고 개구쟁이라 정기적으로 무릎이나 이마에 멍을 만들어 오곤 했는데, 사내애들이랑 주로 어울리는 대장부 같은 면이 있는 반면 인형이나 공주 옷을 좋아하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희지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뽀뽀를 해 주고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이제 집안일이 재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지의 방을 정리하고 책가방을 확인한 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꺼내 두고 거실로 나왔다.

청소기를 돌릴 순 없으니 대충 비질과 걸레질로 간단한 청소를 마치고, 냉장고를 열어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나 오래된 반찬이 없는지 확인했다. 쌀을 씻어 불려 두고 베란다에 널어 둔 빨래를 걷어 개켜 놓은 뒤 불린 쌀에 물을 빼 냉장고에 넣어 둔 후에야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재유는 조그마한 어린이 칫솔 옆에 있는 자기 칫솔을 집어 양치를 시작했다. 조금 전 우주와 나눴던 키스의 감촉이 떠올라 마음이 울렁거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초췌하고 어두운 모습은 찾을 수 없이 밝고 건강한 원래의 모습이었다.

몇 달 전 받은 엽서로 그가 졸업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론 이제나저제나 돌아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매일매일 연락을 기다려 왔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제일 우주다운 방법으로 재회를 한 것 같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동안 그가 마음 잡고 열심히 노력해 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긍정적인 말투나 자신감 있는 행동들이 그걸 뒷받침해 주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삶은 달라진 것 없이 시간만 흘러간 것 같았다.

‘내 번호 알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전화 한 통 안 했네, 정말. 독하다고 해야 되나, 무심하다고 해야 되나.’

재유는 액정에 뜬 그의 새 번호를 보며 속엣말을 삼키고 번호를 저장했었다.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책망할 마음은 없었다. 미국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섣불리 짐작할 수도 없거니와 아직은 참견이나 간섭이 어색한 시기이기도 했으니까. 떨어져 있던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앞으로 찬찬히 해 나가면 될 터였다.

재유는 몸에 밴 음식 냄새를 지우기 위해 손가락을 세워 벅벅 머리를 감았다.

자신의 삶이 정체된 것 같지만 그래도 달라진 건 있었다. 올 초에 약간의 대출을 받아 방 세 칸 짜리 빌라 전세를 얻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희지의 어엿한 방을 만들어 준 것이다.

식당 근무가 주5일제로 바뀌어 희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좋은 일이었다. 여전히 주말엔 쉴 수 없지만, 적어도 평일에 이틀은 희지가 학원이 끝나고 돌아오면 함께 맛집을 찾아 외식을 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러 극장에 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식을 키우는 건 해가 거듭될수록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희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어느 정도 키웠으니 걱정을 한시름 덜겠거니 했는데 손이 덜 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생활에 적응시키느라 신경 쓸 것들이 많아졌다.

그런 면에선 희지에게 고마운 점들이 많았다. 바쁜 아빠를 위해 뭐든지 스스로 하려 하고 아빠를 세상 그 무엇보다 좋아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자랄수록 엄마의 부재를 분명히 느끼는 듯했고, 간혹 이유 없는 떼를 쓰기도 했다. 투정을 부리다가도 마음이 풀리면 아빠에게 먼저 다가와 애교를 부리며 예쁜 짓도 잘 했다. 그럴 때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티 내지 않으려는 게 눈에 보여 가슴이 아팠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걸 재유도 알고는 있다. 그래서 희지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게 아닐까 가끔 고민하기도 했다. 세상에 오직 아빠밖에 없는 희지가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닮아 너무 안쓰럽고 가여웠다. 떼를 써도 좋으니 철부지 아이답게 좀 더 어리광을 부렸으면 좋겠지만, 아이는 아빠가 일하는 동안 홀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로 인해 생긴 외로움이나 엄마가 없는 결핍은 재유가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기 힘든 것이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재유는 늘 쓰던 라벤더 향 보디워시의 거품을 씻어 내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마지막엔 찬물로 몸을 헹궜는데도 몸이 뜨끈뜨끈했다. 늘 비슷하게 흘러가던 퇴근길에 우주의 등장 하나만으로 몸과 마음이 평정을 버리고 동요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그의 귀국으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물론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일과 육아가 전부였던 일상에 우주가 등장한다는 건 어찌 보면 파란이었다.

아빠로서의 의무와 누군가의 애인으로서의 위치가 부딪힐 순간이 올 것이 예상되었다. 재유는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희지와 우주 모두 평생을 바쳐 사랑해 주고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거실로 나와 머리를 말린 재유는 희지의 방으로 들어가 조심조심 옆에 누워 아이를 껴안았다. 잠든 얼굴을 보자 세상 제일 예쁜 천사를 마주한 듯 얼굴이 밝아졌다.

“희지야. 우주 삼촌이 곧 너 만나러 올 거야.”

재유는 나직이 속삭이며 아이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너랑 우주 삼촌이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자신으로 인해 희지를 외롭게 하거나 우주에게 다시 상처 주는 일은 없길 바라면서. 재유는 익숙하게 희지의 등을 토닥이며 머리에 뽀뽀를 했다.

***

재유는 약속장소로 전해 들은 종로의 오래된 호텔로 들어섰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고풍스럽고 호화스러운 내부 풍경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쭈뼛대며 서성이는 게 눈에 띈 건지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정중하게 목적지를 물어 왔다. 더듬더듬 식당 이름을 말하자 직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능숙하게 엘리베이터로 재유를 이끌었다. 프렌치 식당은 15층이라는 안내를 받고 마침 열리는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떼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아는 체를 했다.

“왔어?”

“아, 영선아. 회사 일찍 끝났나 보네?”

아는 얼굴이 보이자 금세 표정이 풀렸다. 뛰어왔는지 호흡이 빠른 영선은 재유의 등을 떠밀며 익살스러운 미소와 함께 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어. 완전 칼퇴하고 튀어왔지. 공짜 밥인데.”

“잘됐다. 올라가자.”

혼자 다니기 어색했던 공간에 영선이 동행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층수를 누르자 문이 닫히고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재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살펴보는데, 숨을 고르던 영선이 피식 웃으며 “희지는?” 하고 물었다.

“오늘 이모님 시간 괜찮대서 잠깐 봐 주기로 하셨어.”

“그래? 학교는 잘 적응해?”

“응. 그새 친구도 사귄 모양이야. 아침에 교문 앞에서 손잡고 들어가더라고.”

“벌써 남친 생긴 거야?”

“여자애였거든?”

“욱하기는. 희지 나중에 시집가면 울겠다?”

“희지는 결혼 안 하고 나랑 평생 살 건데?”

“누가 그래. 희지가?”

“당연하지.”

“크큭…. 네 딸 참 효녀다. 아빠 듣기 좋으라고 거짓말도 해 주고.”

놀리는 영선을 향해 웃으며 눈을 흘기는데 도착 벨이 울렸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석으로 가니 우주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밤색 카펫이 깔린 바닥을 걷자 홀 사이사이에 샴페인을 전시한 고급스러운 장식장들이 눈에 띄었다. 고급스럽고 중후한 분위기의 식당은 아직 초저녁임에도 빈 좌석이 거의 없었다. 원형 테이블엔 분홍빛 스프레이 카네이션과 드라이 플라워가 조화롭게 꽂혀 있었고, 우뚝 서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우주와도 잘 어울리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오, 염우주! 때깔 좋아졌다?”

“영선아, 오랜만이다.”

우주와 영선은 가볍게 포옹을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셋이 한 자리에 있는 모습이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어쩌다 고등학교 동창회가 열린 셈이었다. 새삼 그 시절 영선이네 셋방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놀던 생각이 나는 바람에 재유는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리에 앉자 반듯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이 메뉴를 주고 사라졌다. 무심코 메뉴를 펼쳤는데, 호텔이라 그런지 재유로서는 음식마다 붙은 가격표를 보기만 해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디너 코스 어때?”

“난 좋아!”

우주가 권하고 영선이가 받아치자 순식간에 메뉴가 결정되었다.

“왜 이렇게 비싼 데로 왔어. 너 이제 막 졸업한 거 아냐?”

“맞아. 오늘 이후로 쫄쫄 굶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맛있게 먹어야 돼?”

재유의 핀잔을 능숙하게 받아넘긴 우주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일단 먹자, 재유야. 난 좋기만 하구만.”

괜히 가격 얘기로 분위기를 망칠지도 모르니 재유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우주가 직원을 불러 주문을 하고, 이쪽을 보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오늘 먹고 맛있으면 희지 데리고 한 번 더 오자.”

“…그래.”

희지 얘기에 표정이 풀린 재유는 세팅된 테이블을 보며 희지가 여기 오면 얼마나 좋아할까를 상상하고는 금세 마음이 흐뭇해졌다.

식전 빵과 버터가 나오자 우주가 빵에 버터를 발라 재유의 접시에 놓고 어서 먹어 보라며 눈짓을 했다. 영선이가 그 모습을 보고 쯧쯧거리며 핀잔을 줬다.

“하던 짓 어디 안 가네. 어릴 땐 풋풋했는데, 지금 보니까 주책이다, 야.”

“내가 뭐? 부러우면 너도 남자 데리고 오던가.”

재유는 우주에게 내가 먹을게, 라 말하곤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던 영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휴, 이 꼴통들… 결국 다시 만난다니. 사람 참 안 변해, 그치?”

“네 덕분이지. 미국 갔을 때 네가 희지 봐 줘서 뭐… 이렇게 된 거야.”

재유는 괜히 큼큼거리며 턱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쑥스럽고 민망해서 영선의 시선을 피하고 빨리 다음 메뉴가 나오길 기다렸다.

“나도 고마워, 영선아. 한국 오면 너한테 제일 먼저 맛있는 밥 한번 사고 싶었어.”

“알면 됐어. 그니까 앞으론 강아지를 전해 달라거나 그런 부탁은 하지 마라. 아, 희지는 내가 고모니까 언제든지 봐 줄 순 있지만.”

영선은 두 사람의 치하에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희지에 관해서는 진지하기만 했다. 영선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실제로 희지를 봐 주는 날은 거의 없지만, 정말 급한 사정이 있을 때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싱글 파더인 재유에겐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어릴 때부터 똑 부러지고 제 앞가림 잘했던 영선은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취직되어 지금은 홍보팀 대리로 일하고 있다. 영선은 가까이 살면서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었고, 그건 재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로 술에 취해 뻗어있는 걸 둘러업고 집에 데려와 재워 주거나, 영선이 덕질하는 데 필요한 일이 있으면 주저 없이 재유를 갖다 쓰는 수준이었다.

재유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우주와 희지, 그리고 영선이 곁에 있는 인생을 꿈꿔 보았다. 귀여운 딸과 연인과 친구가 함께 하는 삶이라. 최고였다. 앞으로 이런 일상이 쭉 지속된다면 그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학교 시절 얘기를 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겹치는 친구들의 근황이나 잊지 못할 선생님에 대한 에피소드, 고향 마을에 새로 생긴 건물 따위의 얘기였다. 한참 향수에 젖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부라타 치즈와 트러플이 얹혀진 샐러드와 자연산 농어구이, 라따뚜이가 차례로 나왔다.

“참, 술 한잔할까? 화이트와인 괜찮아?”

우주는 직원을 부르려 손을 들었는데, 영선이 말렸다.

“재유는 술 전혀 안 마셔. 나도 와인은 좀 안 받아서. 독주 체질이거든.”

“그래? 재유 넌 왜? 희지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실은 영선이 때문이지. 영선이 주사가 워낙 드세서 술이라면 이제 질려 버렸거든.”

재유가 놀리듯이 험담을 늘어놓자 영선이 발끈하고 나섰다.

“얼레? 내가 무슨 주사가 있다고 그러냐?”

“내가 너 업고 언덕길 올라갈 때마다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리고 가끔 너 싫은 남자 떼 낼 때도 꼭 술 마시면서 나 부르잖아. 남친 역할 할 때도 있었고. 안 그래?”

별생각 없이 꺼낸 얘기였는데, 우주는 ‘남친 역할’이라는 단어에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눈치 빠른 영선이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변명하기 시작했다.

“야, 너 우리 사이 오해하면 안 된다? 난 이 남자 저 남자 다 좋아하는데, 재유만은 남자로 안 보거든? 그냥, 여동생 같은 느낌이야. 희지까지 세트로 있으면 얘네가 우유랑 동급으로 보여서 내가 보호자처럼 느껴진다고.”

재유도 아차 싶어 응응,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주의 눈치를 살폈다.

“너희는 여전히 잘 지내는구나. 오해 안 해. 니들 사이 잘 아니까. 그럼 넌 나한테 시어머니야? 아니, 시누이인가?”

“크… 그런 셈이지. 그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해라?”

우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알았으니까 앞으로 나도 좀 껴 줘. 그리고 앞으론 술 취하면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재유 부르지 마. 가짜 남친 역할도 내가 해 줄게.”

“그건 안 돼!”

한순간 불쾌함에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제일 놀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재유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쏠리자 무안해진 재유가 물잔을 들고 몇 모금 들이켰다.

“하이고, 둘 다 엄청 챙기네. 낄 틈이 없구만? 니네, 나한테 밥 많이 사야겠다?”

“얼마든지 사 줄게.”

마침 타이밍 좋게 후식이 나왔다. 재유는 더운 뺨을 손부채로 몇 번 팔랑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주의 은근하고 집요한 시선에서 장난기 섞인 웃음을 읽었지만, 눈을 피하며 짐짓 모르는 체했다.

상큼한 레몬 셔벗과 부드럽고 바삭한 밀푀유가 차려졌다. 한입 떠서 입에 가져가자 맛있는 음식이 주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꼭 희지를 데리고 오고 싶었다. 영선이도 너무 맛있다며 하이톤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참, 우주 너 이제 한국에서 뭐 하면서 살 거야?”

“친구랑 회사 차리려고.”

“그래? 무슨 회사?”

“디자인 회사야. 지금 준비 중인데, 앞으론 좀 바빠질 거야.”

우주가 재유를 보며 양해를 구하듯이 눈을 찡긋거렸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거여서 적잖이 놀랐다. 흥망을 떠나서 겨우 스물여덟인데 회사 차릴 생각을 했다는 게 재유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물론 재유도 앞으로 일을 더 배우고 돈이 충분히 모이면 30대 중후반쯤 자신만의 가게를 차릴 꿈을 갖고 있기도 했다. 아직은 먼 미래라 막연하게 상상만 하는 자기완 다르게 유학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자기 회사를 차린다니. 사업가 아들로 자라서 스케일이 다른 건가. 왠지 그가 낯설어 보였다.

“시작부터 사장이네? 장난 아니다.”

“이제 노가다 시작이지. 할 일이 산더미야.”

“암튼 열심히 해서 잘 키워 놔. 나중에 회사 때려치우고 싶을 때 나 좀 고액연봉으로 써 주고. 알았지?”

“나야 고맙지만, 우리 회사 완전 구멍가게야. 대기업이 훨씬 낫지.”

“그냥 보험 하나 들어 두는 거지. 여자는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결혼하고 애 생기면 장담 못 하잖아.”

“그것도 그렇겠다.”

셔벗을 입 안에 녹이며 가만히 듣고 있던 재유는 문득 두 사람의 대화가 부러워졌다. 좀 더 평범하고 순탄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면 자신에게도 더 넓은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물론 식당 일이 싫은 것도 아니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10여 년 전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과 지금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자신이 뒤처진 기분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희지 좀 부탁하면 안 될까? 재유랑 좀 더 있고 싶어서.”

반쯤 녹아 버린 셔벗을 티스푼으로 뒤적거리고 있는데, 별안간 희지 얘기가 나와서 재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갑자기 그런 게 어딨어.”

재유는 깜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디저트 포크가 바닥에 떨어지며 제법 요란한 소리가 났다. 재유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는 영선이 넉살을 부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우주 너, 이 호텔에 방 잡아 놨구나. 맞지?”

“맞어. 재유도 바쁘고 시간도 안 맞아서 얼굴 볼 시간이 없었거든.”

“어쩐지 비싼 거 멕이더라니.”

직원이 얼른 다가와 포크를 치우고 새것으로 갖다 주는 사이 재유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만류했다.

“영선아, 그럴 거 없어. 너 내일도 출근하잖아.”

“희지 학교 데려다주고 출근하면 돼. 지각하지 뭐. 핑계 많으니까 걱정 마.”

“그래도 그럴 수는….”

“그럼 내가 새벽 6시까지 책임지고 재유 돌려보낸다. 됐지?”

우주의 호언장담에 얘기 끝났다는 듯이 영선이도 오케이를 외쳤다.

“내가 재유 10년 보고 너랑도 동창이고 친군데, 니네들이 다시 만난다니까 그 정도야 해 줄 수 있지 뭘. 희지는 걱정 마. 나랑 자는 거 좋아하니까. 내가 잘 얘기할게. 너도 이모님이랑 희지한테 미리 전화 좀 해 주고. 알았지?”

“아… 안 되는데….”

우주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꼬리를 접으며 애처롭게 재유를 보고 있었다. 자세까지 기울이며 재유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재유는 난감하듯 그를 바라보다 휴우,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결국 수락한 재유는 실실거리며 계산서를 집어 드는 우주를 향해 눈을 흘겨 주었다. 우주는 놀리듯이 윙크를 하고 재유와 어깨동무를 한 채 카운터로 향했다.

***

객실은 평범한 더블룸이었다. 커튼이 걷힌 커다란 창밖으로 도심의 야경이 눈부시게 펼쳐져 더없이 환상적이었다. 우드 톤의 인테리어와 깨끗하고 하얀 침구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샴페인과 두 개의 잔까지, 재유 눈엔 모두 달달하고 로맨틱해 보였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오랜만이라 작은 방인데도 들어서자마자 해방감을 느꼈다.

객실 문이 닫히자마자 우주가 뒤에서 재유를 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재유도 단단한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드디어 둘만 남았네.”

“갑작스럽긴 한데…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었어.”

희지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영선이 걱정을 덜어 주었으니 오늘 하루만은 들뜬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몇 마디 잔소리를 더 들을 줄 알았던 우주는 기쁨을 숨기지 않고 낮게 웃으며 재유를 더 꼭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선 스위트룸 잡고 싶었는데”

“응?”

“방이 작아서 미안.”

재유는 어울리지 않게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내는 그를 돌아보며 말도 안 된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뺨에 닿은 우주의 입술이 부드럽게 살갗을 스쳤다.

“무슨 소리야? 정말 멋지고 좋은데.”

“그럼 다행이고.”

우주가 턱을 붙잡아 돌린 채 입술을 덮었다. 맞붙은 입술이 떨어질세라 뒷덜미를 받친 손에 힘이 실렸다. 그가 고개를 비틀고 몸을 더 숙이자 재유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고 안으로 혀가 침범해 들어왔다. 부드러운 혀는 계속해서 예민한 점막을 쓸어올렸다. 몰아붙이는 기세에 숨쉬기가 버거워진 재유는 우주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는 모양새가 됐다. 숨 쉴 틈을 주지 않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을 살살 핥으며 간지럽혔다.

그가 돌아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제대로 키스는 처음이었다. 한껏 숨을 몰아쉰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얼굴 빨개졌어.”

“너도 마찬가지야.”

재유는 쑥스러움에 팔을 풀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우주는 재킷을 벗고 그 옆에 모로 누웠다. 장난스레 재유를 덜렁 자빠트리며 턱을 괸 채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샴페인 준비했는데. 넌 안 마시겠구나.”

“목만 축이는 정도면 마셔 볼게.”

“혹시 술 안 마시는 거. 그 일 때문이야?”

우주가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댄 채 물었다. 재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거두어졌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우물쭈물한 재유가 눈을 내리깔았다.

“…맞아. 원래도 술이 싫긴 했었지만, 술을 끊을 이유는 아니었어.”

아직도 우주 앞에서 그 일을 얘기하면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털고 가야 할 일이었다. 세월이 지났으니 그때의 실수에 대한 빛깔이 달라지기도 했다. 희지가 생겼으니. 그래서 재유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다.

“술 먹고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게 너무 수치스럽고, 너나 인애한테도 미안해서 그날 이후론 술 안 마셨어. 가끔 식당에서 술자리가 생기긴 하는데, 거절하는 게 힘들긴 해도 희지도 어리고 하니까….”

우주는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는 듯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랬구나. 그럼 미국에서 술에 쩔어 사는 내 모습 보고 많이 실망했겠다.”

재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우주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아니? 그런 생각 전혀 안 했어. 괴로워서 술 먹는 기분 잘 아니까. 그래서 더 안타깝고 미안했어.”

“근데… 그게 이유라면 이제 조금씩 마셔 봐도 되지 않아? 잘 모르지만, 요리를 할 거라면 술맛도 알아야 할 텐데?”

“응. 전통주 시음회에 가거나, 요리 재료로 쓰는 술은 마셔 보지. 가끔 손님한테 술 추천을 해 줘야 할 때도 있고. 맛을 모르면 음식이랑 얼마나 궁합이 맞는지 모르니까.”

우주가 상체를 일으켜 재유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암튼 난 그때 일은 잊은 지 오래니까 너도 부담 갖지 마. 알았지?”

“…응.”

우주도 과거의 일은 어느 정도 희석된 모양인지 별다른 의미를 두려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의 사려 깊은 마음 씀씀이가 새삼 고마웠다. 다정하고 너그러운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희지는 뭐 좋아해? 먹는 거나, 장난감이나 뭐 그런 거.”

우주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밝게 물었다.

“음… 매운 거 빼고 다 잘 먹어.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태권도도 잘해. 요즘은 디즈니 만화영화 잘 보고. 참, 얼마 전에 핸드폰 사 줬거든? 이제 학교 다니니까. 그걸로 사진 열심히 찍고 있어. 나도 찍고, 이모님도 찍고, 영선이도 찍고. 우유 사진이 제일 많긴 해.”

“엄청 귀엽겠다. 빨리 보고 싶어. 희지도, 우유도.”

“셀카보다 주변 사람 찍어 주는 걸 좋아하는 거 보고 네 생각 많이 났어. 너도 옛날에 틈날 때마다 사진 찍어 줬잖아. 몰래 찍기도 하고.”

“뭐? 어떻게 알았어?”

뜬금없는 얘기에 토끼 눈이 된 우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너 옛날 서울 집에서 컴퓨터를 좀 뒤졌지. 깜짝 놀랐어. 별의별 사진이 다 있던데?”

“그걸 봤단 말이야?”

우주는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라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어댔다.

“그래, 이 응큼한 것아. 야동도 엄청 많더라?”

재유도 몸을 일으키고 우주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생각지 못한 기습에 입이 떡 벌어진 우주는 귓불까지 붉히고 있었다.

“와… 너무해. 그런 얘길 왜 지금에서야 하는 거야.”

우주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베개를 던지고 재유를 덮쳐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겨드랑이에 허를 찔린 재유가 자지러지며 몸을 웅크렸는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전투적으로 엉겨 오는 녀석을 상대하기에 체격의 한계를 느낀 재유는 짧은 손톱으로 꼬집거나 할퀴어 보려 했는데, 셔츠의 미끈한 촉감에 오히려 깔짝이며 긁어 대기만 한 꼴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침대 모퉁이로 도망치는데도 우주는 장난기 어린 눈을 부릅뜬 채 달려들었다. 재유는 우주와 함께 한참을 뒹굴며 깔깔거렸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지 우주는 간지럽히던 걸 멈추고 재유를 팔다리로 꼭 껴안은 채 침대 한가운데로 벌렁 드러누웠다. 숨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면서 재유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은은하게 풍기는 살 냄새를 들이마셨다. 뜨끈한 재유의 귓불에 입을 맞추자 아직 정리되지 못한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사실… 희지가 생긴 게 한때는 불행처럼 느껴졌어. 그런데 지금은 아냐. 가족이 없는 너한테 와서 네 딸이 되어 준 것만으로도 희지한테 고맙고, 벌써 그 애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한참 웃고 났는데도 별안간 재유의 코끝이 매워졌다. 그동안 홀로 희지를 키우며 했던 고생들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쉽지 않았을 텐데, 희지까지 포용해 주는 모습에 다시 한번 반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우주는 입술이 닿는 대로 귀뺨부터 시작해 코끝과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당연하지. 네 딸인데.”

입술을 한껏 오므리고 볼에 쪼옥, 소리가 나도록 빨 듯이 입 맞추자 재유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지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스킨십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재유는 안도감과 함께 정욕이 일었다. 자신을 품에 안은 채 속박을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우주는 어른스러워진 얼굴만큼이나 섹시해 보였다.

“참… 디자인 회사는 어떻게 된 거야? 아까 얘기 들었을 때 깜짝 놀랐어.”

귀국 이후로 우주는 재유의 퇴근 시간에 맞춰 차로 데리러 와서 집에 바래다주었다. 그 외에 얼굴 볼 시간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새 자리 잡을 준비를 시작한 걸까. 재유는 허리에 감긴 팔을 살짝 풀고 우주를 향해 몸을 비틀었다.

“아… 사실은 너 일하는 식당 근처에 작은 단독주택 하나 얻었어. 사무실로 쓰려고. 걸어서 10분 정도?”

한국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여독을 풀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사무실 계약까지 했다니. 거기다 같은 동네에. 우주의 대담한 결정과 빠른 실행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왜 그 동네로….”

“왜긴. 너 자주 보려고 그러지.”

“그런데 뭘 디자인하는데? 너 전공 경영학이잖아.”

“동업자가 있거든. 그 친구가 주로 디자인 잡을 거고, 난 회사 운영이랑 영업이랑 겸하게 될 거야. CI나 제품이나 편집디자인 같은 거 뭐… 여러 가지 하려고 해. 일단은 시작이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일 많이 따서 기반 잡는 게 목표야.”

“대단하다, 정말.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단할 거 없어. 안 망하게 죽도록 발로 뛰어야지.”

“그래도….”

“나중에 사무실 초대할 테니까 너도 자주 놀러 와. 알았지?”

“그래. 그럴게.”

재유의 이마를 매만지다 가볍게 입을 맞춘 그의 표정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앓는 소리를 해도 앞날에 대한 포부가 섞여 있었다. 곧잘 이런 표정을 하곤 했었다. 미래를 향한 거칠 것 없는 도전,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 그를 뒷받침하는 능력은 성인이 된 그가 가진 큰 매력으로 보였다.

“샴페인 한잔할래? 나 목마른데.”

우주가 칭칭 감쌌던 다리를 풀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갑자기 자유로워진 재유의 사지는 제멋대로 침대에 널브러지며 잠시간 저릿함을 느껴야 했다.

아이스 버킷에서 샴페인을 꺼내 능숙하게 코르크를 딴 우주는 목을 축일 수 있을 정도만 따라서 슬쩍 잔을 건넸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잔을 받아든 재유는 혀끝에 살짝 묻히는 수준으로만 마셨다. 톡 쏘는 탄산과 함께 달큰한 맛이 감돌아 술 같지가 않았다.

“근데 회사 차린 거… 아버지가 도와주신 거니?”

자기 잔에도 샴페인을 따르던 우주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더니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건 아니야. 미국에서 나도 일했어. 틈틈이 모은 돈도 있고, 동업자 돈도 있고, 투자받은 곳도 있거든. 그럭저럭 내 힘으로 해 가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집엔 인사하러 갔었어?”

“아니. 어머니랑 형한테는 연락했어. 아버지는 아직…. 형이 결혼하고 회사로 들어가서 일하고 있으니까 아마 나한텐 관심 없을 거야.”

재유는 아직도 그가 아버지와 등지며 살아가는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아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기에겐 염창섭이 원수 같은 존재이지만, 핏줄의 일이란 또 다른 법이다. 그 일로부터 제법 시간도 지났다. 우주도 마음속 어딘가에선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몰랐다.

자식을 키워 보니 그랬다. 또 집 나간 제 아버지를 생각해도 그랬다. 완전한 남이라면 미워하기만 해도 된다. 한데 피를 물려주고 이어받은 사이는 미움과 더불어 보다 복합적인 감정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원망의 이면엔 측은함과 안쓰러움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모·자식 간의 인연을 ‘질기다’라고 표현하겠지. 그 사실이 재유의 가슴 한편을 쿡 찔렀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널 위해서. 물론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재유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주는 재유의 기분을 눈치챈 듯 일부러 더 밝게 웃어 주었다. 거의 마시지 않은 재유의 잔을 낚아채서 테이블 위에 놓고 옆으로 다가가 바짝 끌어안았다.

“무슨 소리야. 도움이 안 된다니.”

우주의 입술이 다가와 재유의 입술 표면에 가볍게 스칠 정도로 살살 비벼 댔다.

“이렇게 나랑 만나 주고 같이 밥 먹어 주고 뽀뽀해 주면 얼마나 힘이 나는데.”

“…….”

“우리 집 일 신경 쓰지 마. 이제 학생도 아니고 낼모레 서른인데 서서히 집에서 독립할 나이잖아.”

그의 표정에 잠시 씁쓸함이 떠올랐으나 금세 코를 씰룩이며 장난스럽게 얼버무렸다. 그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직 둘 다 과거에 매인 감정을 모두 털어내지는 못했다.

우주 말대로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새로운 관계를 다지고 우리의 삶을 정립해 나아가야 할 때다. 재유는 우주의 눈을 진중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우주는 말이 없었다. 다시 입술을 마주 비비며 지그시 바라보는 모양새가, 어쩐지 성적인 관심사로 옮겨간 듯했다. 자못 심각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일순 뒤집힌 분위기에 재유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긴. 오래 참았지. 호텔 방에 들어온 지 벌써 1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해도 돼?”

숨기지도 않고 직진으로 의도를 밝힌 우주는 입술을 재유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당황한 듯 뒤로 조금 물러서자 저도 쑥스러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안아도 처음인 것처럼 부끄러워하는 게 너답다”는 소리를 제가 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갑자기라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밖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일어서려는 재유를 우주가 붙잡아 침대에 앉혔다.

“내가 다 준비해 놨으니까 그럴 거 없어.”

재유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에 앉힌 그가 입술로 뺨을 뭉개듯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콘돔과 윤활제가 들어 있었다.

주도면밀한 자식. 저도 부끄러워하면서 잠자리를 앞두고 몰아붙이는 소질은 나이가 들어도 퇴보하지 않았나 보다. 재유는 활활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우주의 목을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너 먼저 씻고 와.”

***

재유가 욕실에서 나오자 우주는 속옷만 입은 상태로 태연하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어서 이리 와 앉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하체에 타올을 감은 재유의 몸을 보며 기대에 찬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침대로 다가가자 속옷 아래 그의 성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쭈뼛거리며 마주 보고 허벅지에 앉은 재유는 창밖의 야경이 거슬리는 듯 시선을 힐끔거렸다.

“커튼 닫는 게 좋지 않을까? 맞은편 빌딩에서 보이면 어떡해?”

“불 거의 다 꺼졌으니까 괜찮아. 신경 쓰이면 불 좀 끌까?”

“응. 꺼 줘.”

우주가 머리맡에 있는 터치패드로 수면 등을 제외한 불을 모두 껐다. 은은한 조명과 서울의 야경이 더해지니 한층 분위기가 살아났다.

우주가 달콤한 시선으로 재유를 눈에 담고 있었다. 걸쳐 있던 타올을 가볍게 풀어 바닥에 던지고 부드럽게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날개뼈가 도드라진 등을 쓰다듬으며 곧바로 입술을 덮었다. 금방 씻고 나와 촉촉한 몸이 살갗에 기분 좋게 달라붙었다.

“근데… 공부 안 하고 운동만 했어? 몸이 왜 이래?”

입술을 떼며 품에 안긴 재유가 갈라진 복근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스무 살 적엔 퉁퉁하고 단단한 일자 배였는데 지금은 응축된 근육에 굴곡이 생기고 더 탄탄하게 덩어리진 모습이었다. 일부러 얄궂으면서도 야릇한 손길로 쓰다듬었기에 우주의 울대가 꼴깍였다.

“둘 다 열심히 했지. 미국에서 네가 살 빠졌다고 구박했었잖아.”

“내가 언제 구박을 해. 그냥 그땐… 보기 안쓰러워서 그런 거지.”

어색하게 시침을 떼는 재유가 시선을 피하자 우주는 눈을 가늘게 접고 능청스럽게 속살거렸다.

“너 보여 주려고 열심히 했어. 오늘만 기다리면서. 근데 드디어 이런 날이 왔네? 내가 얼마나 꿈꾸고 기대했는지 넌 모를 거야.”

피이, 입술을 내밀며 샐쭉거린 재유는 흘긴 끝에 미소를 흘리고, 제 본심도 순순히 털어놓았다.

“…나도 너 많이 기다렸어. 그동안 수고했어, 우주야.”

우주는 어깨와 목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을 음미했다. 재유의 목에 있는 링 목걸이와 우주의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겹쳐져 어슴푸레한 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긴장된다. 너무 오랜만이라.”

“너도 긴장할 줄 아는구나? 근데 나만큼은 아닐걸. 오랜만이니까 살살 부탁해요.”

미국에서 관계를 가진 이후로 처음이니 슬쩍 겁이 난 재유는 긴장된 목소리로 당부했다. 재유의 말에 우주가 나도, 하며 소곤거렸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노력해 볼게.”

우주는 얼굴을 기울여 입술을 포개고 재유를 끌어안았다. 뽀얗고 여윈 재유의 몸이 품 안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심장이 저릴 만큼 두근거렸다. 볼을 부여잡고 이마와 눈, 코와 입술, 턱과 목까지, 불면 날아갈까 쥐면 흩어질까 애타는 심정으로 입을 맞추었다. 오물오물 뱉는 가느다란 재유의 숨이 아련하고 감미롭게 들려왔다.

엉덩이를 받친 채 재유를 조금 위로 들어 올리자 얼굴이 편편한 가슴골에 닿았다. 뺨을 갖다 대고 심장 소리를 들으니 자신의 맥박과 함께 둥둥 울리고 있었다. 코끝으로 유두를 좌우로 쓸어 대자 단단해진 재유의 페니스가 우주의 윗배를 슬쩍 부딪쳐 왔다.

“아아….”

우주는 젖꼭지를 입에 물고 혀를 굴리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보드랍고 예민한 돌기들이 혀에 닿아 점점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파르르 떨리는 재유의 팔이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기분 좋은 신음을 내고 있었다.

“여기 빨아 주는 거 좋아하지? 이쪽만큼 예민한 반응이 나오니까. 너무 귀여워….”

페니스를 살짝 움켜쥐자 재유가 난감한 듯 흘겨보았다. 우주는 어여쁘고 애틋한 마음이 퐁퐁 솟아나 좀 더 괴롭혀 주고만 싶었다.

“여전히 예뻐. 여기에 내 이름 새겨 놓고 싶을 정도로.”

“하으… 이 변태….”

우주는 으흐흐 웃으며 순순히 인정했다. 각오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옆구리를 움켜쥔 채 혀끝으로 재유의 몸을 더듬어 갔다. 입을 맞추고, 침을 바르고, 양껏 깨물어 대도 모자라기만 했다. 입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쪽쪽 빨고 핥아 대며 집어삼킬 듯한 애무가 이어졌다. 엉덩이를 콱 움켜쥐며 자신의 아랫배에 밀착시킨 우주는 고개를 숙인 재유의 귓불을 축축할 정도로 핥고 깨물었다.

“재유야. 일어서 봐, 완전히.”

“…뭐?”

어쩔 줄 모르는 재유의 허리를 받쳐 주며 일으키자 예쁘고 꼿꼿한 성기가 바로 코앞에 닿았다. 우주는 엉덩이를 감싸 안고 골반부터 얼굴을 비벼 대며 서서히 중심부의 뜨거운 곳으로 향해 갔다. 귀엽게 꿈틀거리는 성기가 탐스러웠다.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주는 움푹 패인 골짜기를 혀로 쓸어올리고, 고환을 더듬어 입속에 머금었다.

“하읏, 살살… 해 줘.”

재유의 애원에도 탐욕스러운 혀를 멈추기는 힘들었다. 동그란 고환이 조금씩 단단해지자 이번엔 모든 열기가 기둥 끝으로 쏠리도록 쉬지 않고 혀끝으로 음경을 쓸어올렸다. 오른손이 엉덩이를 조금씩 더듬어 움푹 들어간 가운데 부분을 향했다. 움찔거리는 작은 구멍이 빨아들이듯, 받아낼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우주는 항문 주름을 손가락으로 꼼꼼하게 쓸어내린 뒤 조금 후를 기약하며 손을 물렸다.

이어 왼손으로 페니스를 쥐고 혀끝으로 슬쩍 귀두를 맛보았다. 탱탱해진 음경이 탄력 있게 꿈틀거리고 갈라진 틈 사이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우주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귀두를 입속에 삼켰다. 그리고 혀를 휘감아 쭉쭉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재유는 버티기에 힘이 들었는지 벽을 짚고서 녹아내릴 듯한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 좋아, 하! 으응… 우주야, 흐으으… 하윽…!”

우주는 성실하게 혀를 굴려 가며 귀두의 테두리를 샅샅이 핥았다. 혀끝이 감겨 올라갈 때마다 우주의 음심이 온몸에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시선을 들어 집요하게 재유의 기색을 살폈다. 치켜뜬 눈에 소유욕이 차올랐다. 눈을 내리깐 재유와 시선이 엉키자 노골적으로 입에 문 것을 목구멍 끝까지 집어삼켰다.

우주는 양손으로 엉덩이를 꽉 붙들어 잡은 채 다문 입술에 더 힘을 주고 야살스럽게 혀를 놀렸다. 목젖까지 닿을 듯 가득 채워진 성기를 힘주어 입 안에 가두고, 붙잡은 엉덩이를 밀었다 당겼다 반복했다.

“으읏! 흐응…. 안, 돼… 그만!”

재유가 사납게 움직여대는 턱을 붙잡고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럴수록 우주는 팔로 허벅지를 감싸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엉덩이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재유의 페니스는 그의 입속으로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흐으윽…!”

입속에 뜨거운 것이 솟구쳐 나왔다. 입천장에 닿은 재유의 것이 움찔거리며 정액을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우주는 고민하지 않고 입 안에 가득 찬 액체를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읏, 또… 삼키면 어떡해!”

“뭐 어때, 맛있기만 한데.”

“맛있긴 뭐가… 아 진짜….”

우주는 벌게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재유의 허리를 받치고 침대에 슬쩍 밀어트렸다.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앉은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목을 끌어안아 입술을 맞물렸다. 재유도 어느새 손을 우주의 가슴에 밀착한 채 입을 벌리며 혀를 감아 왔다.

“아팠어?”

“…….”

재유는 대답 대신 머뭇머뭇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곧 서른이 다 되어 가는 나이인데도 잠자리에서 여전히 순진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재유는 역시 제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도발해 오는 반전 모습도 좋았지만, 어차피 곧 보게 될 터였다. 밤이 길었다.

우주는 재유의 몸 위로 체중을 실으며 달라붙었다. 얼굴이 가까이 맞붙자 슬금슬금 고개를 돌리려는 걸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우주는 목덜미부터 입술을 묻었다. 힘있게 쪽 빨아당기자 아픔이 느껴졌는지 재유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주는 목 언저리와 어깨, 쇄골, 턱과 뺨에도 키스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제 목에 감긴 재유의 양손을 바닥에 펼쳐 두고 깍지를 꼈다.

“…….”

엄지로 재유의 손바닥을 쓸어올리던 중 피부의 거칠한 감촉에 언뜻 놀랐다. 예전에 느꼈던 여리고 보들보들한 손이 아니었다. 우주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재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휘어잡은 채 다시 손가락을 맞물렸다.

“주방 일 하다 보면 계속 물 묻히고 있어야 해서….”

“누가 뭐래? 예쁘기만 한데.”

우주는 손가락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고 자신의 뺨에 재유의 손을 갖다 댔다.

열아홉 살 때부터 공장일과 주방일도 모자라 혼자서 집안일까지 하다 보니 손가락 마디가 조금씩 굵어지고, 매끈하던 살결엔 어느새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그동안 겪었던 고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재유의 손을 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내가 평생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줄게. 으레 남자들이 결혼 전에 하는 허세 섞인 호언장담을 진심으로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린 결혼할 수 없었고, 자신은 아직 재유의 삶을 경제적으로 책임질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같이 살고 있지도 않으니….

우주는 얼른 성공해서 재유를 좋은 집에 살게 해 주고 돈 걱정 없이 희지를 교육시키고 싶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내가 한국에 와서 행복하니?”

재유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폐부를 얕게 들썩이며 동그란 눈을 한 재유가 우주를 올려다보았다.

“…네 옆에 있고 싶으니까. 네가 나이 들고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도 난 너밖에 없을 테니까.”

진심을 담은 말에 그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얕게 숨을 뱉은 재유가 꺼칠한 손으로 우주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만 행복하면서 네 곁에 있고 싶어. 그래도 된다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숫기 없이 말했다. 재유의 손이 어느새 우주의 머리칼 사이를 쓸어넘기고 단단한 턱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매만지고 있었다.

우주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두 다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상체에 밀착시켰다. 재유를 단단하게 끌어안은 힘에 당황한 그가 새된 목소리를 흘렸다.

“흐앗! 잠깐…. 갑자기 뭐야. 아읏!”

노골적인 삽입 자세에 긴장한 재유는 우주의 어깨를 밀쳤지만, 밀려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도 되지. 그렇게 해 줘, 꼭. 너 아니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이제.”

우주는 제 어깨에 걸쳐진 발목을 손으로 꽉 붙잡고 발뒤꿈치와 발가락 끝까지 게걸스럽게 핥아 나갔다.

“읏…. 너무, 하윽… 간지러워!”

재유는 발가락 안쪽을 핥고 있는 우주를 보며 몸을 비틀어 댔지만, 아무리 발가락을 구부리려 해도 혀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혈관 속까지 젖어 들도록 빨아 댔다.

“다 내 껀 거 알지? 네 몸 구석구석 다.”

“히익… 잠깐만…!”

우주가 두 발목을 잡고 위로 올리자 순식간에 재유의 몸이 반으로 접히며 둔부가 고스란히 눈앞에 드러났다. 우주의 입술이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두텁고 뭉툭한 혀에 힘을 주며 핥아 대자 입구가 뻐끔거렸다.

우주는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처박은 채 고개를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코끝부터 윗입술, 혀, 아랫입술, 그리고 턱까지 맹렬하게 구멍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올렸다.

“흐윽…. 그만, 천천, 히… 아윽!”

우주는 재유의 안달 난 신음을 즐기며 입술을 모은 채 입구와 그 주위의 연한 살을 쭙쭙 빨아들였다. 지나친 쾌락을 참지 못한 재유의 엉덩이가 음란하게 들썩이며 얼굴을 향해 박치기를 해 댔다. 그럴수록 입술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젖은 타액과 뜨거운 숨결이 안쪽까지 느껴졌다. 배 속이 저릿저릿하고, 귀두 끝으로 피가 쏠렸다. 우주의 손아귀에 발목이 잡힌 탓에 자세를 비틀기도 쉽지 않았다.

“아앗…! 우주야… 쫌….”

삽입하기도 전에 또 사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데, 우주의 손이 겨우 발목을 풀어 주었다. 긴장했던 팔다리가 풀리자 재유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반신에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여전히 입구가 움찔대고 있었다.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우주가 재유의 상체를 일으키더니 목을 받친 채 제 허벅지에 눕혀놓았다. 아기 안듯 재유를 아래에 눕힌 우주는 윤활제를 손에 들고 아래에 듬뿍 짜냈다.

“흣… 차거….”

“내 목에 팔 둘러 봐.”

“뭐?”

“들어간다.”

“흐윽…!”

젤을 펴 바르며 항문 주위를 지분대던 손가락 하나가 미끌리듯 순식간에 재유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우주가 어깨를 들어 입으로 입을 막아 버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키스를 이어 가야 했다.

숨 쉴 틈도 없이 혀가 밀고 들어오고, 손가락은 구멍의 넓이를 가늠하듯 내벽을 긁어 대고 있었다. 재유는 우주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린 채 이윽고 손가락 두 개가 들어오는 감각을 느껴야 했다. 바르르 몸이 떨렸다.

“하아… 아…!”

“아프지 않아?”

“으응… 기분, 좋아… 하앗!”

우주가 몸을 숙인 채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예민한 자극이 더해지자 온몸이 들썩이며 안이 조여들었다. 이미 많이 빨려 벌겋게 부어오른 유두를 촉수 같은 혀가 쏘아붙이듯 빨아내자 전에 없이 도드라진 모양새로 부풀고 있었다.

마침내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오며 빡빡하게 들어찬 내벽에 자극이 거세졌다. 몸이 활처럼 휘다가도 아래를 빠듯하게 채운 손장난에 재유의 골반은 의지를 벗어난 것처럼 퍼득이며 경련을 멈추지 못했다. 우주는 재유의 반응을 보며 공처럼 만져지는 지점을 손끝으로 압박했다. 봐주지 않고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아아… 흐윽… 흣. 우주, 야… 하읏!”

재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배 위에 정액을 뿌렸다. 황홀감에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정의 여운이 온몸을 휘감아 짜릿짜릿한 기분이 감돌았다.

우주는 꽉 물어 대는 속살을 살살 간질이며 재유가 잠시간 후희를 즐길 수 있도록 얼굴 곳곳에 타액을 묻히며 키스를 퍼부었다. 재유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우주의 입술을 느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주가 손가락을 빼내자 축 늘어졌던 몸이 튕기듯 경련하며 바르작거렸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사정해 버린 성기를 우주의 손이 위를 향해 모아 올렸다. 재유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남은 정액을 마저 토해 내며 신음을 흘렸다. 제 쾌락을 솔직하게 인정한 듯한 날것의 소리였다.

성적 만족감에 숨을 고르는 재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우주는 여유가 없어진 몸짓으로 상체를 휙 돌리더니 희멀건 배 위의 흔적을 타올로 닦아 냈다.

“재유야, 다리 잡고 있어 봐.”

“뭐라고? 왜….”

우주가 두 다리를 활짝 벌려 들어 올리자 재유는 얼떨결에 자신의 허벅지를 잡고 있는 민망한 자세를 하게 되었다. 우주는 엄지 끝으로 제 속옷을 성의 없이 끄집어 내렸다. 발기할 대로 발기한 페니스가 탄력 있게 뱃가죽에 들러붙었다.

콘돔을 뜯어 힘줄이 솟은 성기에 씌우는 우주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재유는 아직 숨을 고르기에도 벅찬 상태였지만, 고개를 바짝 세워 우주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확실히 고등학교 시절보다 살집이 줄어든 게 눈에 보였지만, 쭉 뻗은 어깨선과 팔의 굴곡, 꽉 짜인 가슴 근육과 팽팽한 복근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뺨을 묻고 비벼 대고 싶었다. 활짝 벌려져 노골적으로 내보인 제 하반신의 부끄러움도 잊은 채 우주가 빨리 덮쳐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넣는다?”

“응… 살살….”

우주는 재유의 허리를 붙잡은 채 입구 안으로 귀두를 비집으며 천천히 밀어 넣었다. 재유는 삽입이 시작되자마자 잔뜩 긴장한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아… 숨 쉬어, 재유야.”

“흣… 아파… 천천히 해 줘.”

큰 숨을 몰아쉰 우주는 일단 성기를 빼냈다. 윤활제를 넘칠 듯 손바닥에 짜내고, 입구 언저리에 지긋하게 발라 두었다. 손가락 세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자 아까보다 수월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대로 몇 번 끝까지 왕복했다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벌리자 입구는 손쉽게 미끄러지듯 늘어졌다.

재유는 양손으로 제 오금을 붙든 채 온몸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우주는 입구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재유의 몸 위로 천천히 기어올랐다.

재유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단단히 붙들고 남은 손으로 한쪽 엉덩이를 움켜쥔 채 다시 구멍 속으로 성기를 집어넣었다. 윤활제 덕분인지 이번에는 밀어 넣는 대로 쑥 빨려 들어가 절반 가까이 삼켜졌다.

“하아….”

아래의 충격에 오금에서 저절로 빠져나간 재유의 두 손이 우주의 등을 감으며 발발 떨었다. 우주는 진득하게 눈을 마주 보며 재유를 진정시키려는 듯 얼굴을 기울였다. 흉흉하게 덤벼드는 성기와는 달리 다정한 키스가 얼굴 곳곳에 내려앉았다.

귓불을 마지막으로 핥아 올린 우주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느린 속도로 성기를 끝까지 박아 넣었다. 벌어진 재유의 허벅지가 처량하게 푸득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밀어내거나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우주는 터놓은 길을 천천히 왕복했다. 눈가에 물이 맺힌 재유의 얼굴이 너무나 야하고 선정적이었다. 성기가 들어갈 땐 얼굴을 찡그리며 흡, 소리와 함께 숨을 참고, 나올 땐 입을 벌린 채 숨을 내뱉으며 우주와 눈이 마주쳤다.

정수리에서 손을 떼고 몸을 살짝 띄운 우주는 재유의 아랫배와 가슴을 쓰다듬으며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성기가 들어갈 때마다 재유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양손으로 젖꼭지를 괴롭히자 고조된 교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아… 이제 못 참겠다.”

“아…!”

우주가 재유의 어깨를 꽉 붙들고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재유의 안에 빨려 들어가듯이 허리 짓은 점점 격렬해졌다. 안쪽 어딘가를 자극한 건지, 재유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손으로 우주의 팔을 쥐어뜯었다.

“아… 잠깐… 앗! 우… 주야… 쫌… 하윽….”

몸을 숙여 키스를 하자 재유의 뜨거운 몸과 완전히 착 달라붙었다. 우주는 다시 한번 성기를 끝까지 빼냈다가 뿌리 끝까지 있는 힘껏 밀어 올렸다. 턱까지 찬 숨을 뱉어내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입술이 뺨에 닿았다.

애원하는 눈빛으로 매달린 그의 얼굴을 보니 좀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차올랐다. 우주는 끓어오르는 하반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덧 재유의 두 다리가 우주의 허리를 휘감은 채 끌어당기고 있었다.

재유를 안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떨어져 있던 동안의 그리움이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재유일 것이다.

“네 옆에 있을 거야. 항상.”

우주가 잠시 행위를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재유는 귓가에 흩어지는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두 다리로 허리를 더 강하게 옭아맸다. 내벽으로 느끼는 그의 쾌감이 우주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재유가 두 손으로 우주의 뺨을 감싸며 웃어 주었다. 재유의 리트머스 종이가 또 한 번 색을 발하며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도.”

헉헉대면서도 망설임 없이 덧붙인 재유의 말에 쿵쿵 심장이 울렸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떨림이 재유에게도 전해졌을까.

우주의 허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꼭 끌어안고 콱콱 박아 올리자 재유의 손이 손끝을 세워 등을 할퀴기 시작했다. 내벽에 꽉 물리듯 달라붙은 성기가 쫀득거리며 재유의 안을 들락거렸다. 찰박한 마찰음이 외설적으로 들릴 때쯤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쾌락에 젖어 든 재유는 언제 봐도 사랑스럽다.

“아… 우주야… 나, 흐읍!”

배 언저리에서 뜨뜻한 감각이 느껴졌다. 몸과 몸 사이에 끼인 재유의 성기에서 정액이 스멀스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우주의 것도 사정하며 요동쳤다. 전신의 모든 쾌락이 재유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사정을 하고서도 하반신의 긴장이 멈추지 않았다. 재유의 안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다. 축축한 이마에 뺨을 맞대며 우주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아… 우주야. 너무 기분 좋아… 후우….”

재유는 우주의 몸에 엉겼던 팔다리를 풀고 축 늘어졌다. 힘이 쭉 빠진 몸에 달라붙은 우주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

아직 구멍에 물고 있는 우주의 페니스는 여전히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다.

우주는 몸을 일으키고 재유를 빤히 바라보며 성기를 쓰윽 뽑아냈다. 재유는 내벽에서 스르륵 빠져나간 아릿한 감각을 느꼈다. 낮은 신음이 흘렀다.

무심코 바라본 천정의 매립형 조명에서 야경의 빛을 받아서인지 무지개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깔이 우주의 뉴욕 집에서 봤던 햇살과 닮아 있었다고 회상하며 슬핏 웃음을 흘렸다.

재유는 땀에 푹 젖은 몸을 일으키려고 한쪽 팔꿈치를 바닥에 짚었다. 그런데 우주가 벗겨낸 콘돔을 팽개치고 두 번째 콘돔을 뜯고 있었다.

“뭐야…? 또 하게?”

“4년 치 메우려면 밤새도 모자라.”

“안 돼! 우리 내일 일해야 되잖아.”

잡아먹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 아직도 배 위엔 세 번째 사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아직 만족을 못 한 건가. 우주는 타올로 사정액을 민첩하게 닦아 낸 뒤 바닥에 툭 던졌다. 맹렬한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가와 재유의 엉덩이를 꽉 붙들고 번쩍 안아 올렸다.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으악… 내려줘!”

“…….”

재유는 기우뚱한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그의 목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우주는 재유를 받쳐 들고 침대를 돌아 유리창 맞은편 벽으로 향했다. 당황한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우주가 일순 기가 막혔다.

재유는 다리가 떡 벌어져 안겨 있는 자세가 불편하고 민망했다. 그런데 우주가 팔을 들어 재유의 하반신 간격을 노골적으로 벌렸다. 어느새 팽팽하게 힘을 받은 페니스가 회음부 언저리에 닿았다. 흠칫 놀란 재유가 우주의 목에 얼굴을 묻고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더 하려고 그래….”

“넌 주말에 일해야 하고, 쉬는 날이라도 둘이서만 보내기 힘들잖아. 오늘만 봐줘. 응?”

우주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탁하는가 싶더니, 제 성기를 입구에 슬그머니 갖다 댔다. 손에 움켜쥔 엉덩이를 조절하자 페니스가 서서히 입구를 압박해왔다.

“으읏!”

입구는 착실하게 귀두를 삼켰다. 우주가 팔에 힘을 뺄수록 재유의 몸이 스르륵 내려와 성기를 삼켰다. 좀 전까지 충분히 길들인 탓에 뿌리 끝까지 말쑥하게 빨려 들어갔다. 우주는 엉덩이를 붙들고 앞뒤로 흔들어 가며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중력에 의해 박혀 내려오는 축축한 내벽의 감각이 무겁고 질펀하게 느껴졌다.

“으윽… 너무, 깊, 단 말, 이야…! 핫… 아윽!”

재유는 의지와 상관없이 아래위로 출렁거리는 하반신이 도무지 자신의 몸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욕정의 화신이라도 된 마냥 거칠게 몰아붙이는 우주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의 목에 매달린 채 맥없이 대롱거리고 있는 꼴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버텨 보려 했지만, 벌어진 틈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침을 흘려 댔다.

우주의 머리통 너머 통창으로 야경이 비쳤다. 빌딩의 불빛들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고정된 점이 아니라 위아래로 난잡한 선을 그려 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생소한 각도로 전립선을 긁어 대는 찌릿함에 자신의 성기가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야말로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눈물이 삐져나와 시야가 흐려지자 재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으읏… 못… 버텨…. 하윽… 그만… 그, 만….”

재유의 애원에 우주는 허리 짓을 멈추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입술에 닿은 목덜미를 흡착하듯 빨아들였다. 방금 했던 거친 행위와 선명하게 남긴 키스 마크로 모자랐던 음욕이 조금이나마 충족된 것 같았다.

“좀 심했지? 미안….”

우주는 엉덩이를 떠받친 손을 조금 내려 재유가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호흡을 가다듬으려던 재유의 몸이 우주의 힘에 너무도 쉽게 뒤집혀 버렸다. 엉덩이 사이에 여전히 그의 성기가 물려 있었다. 허전해진 손은 가까스로 침대 위에 안착했다.

우주가 한쪽 다리를 들어 제 팔오금에 걸쳤다. 모로 기울어진 상체와 위아래로 벌려진 다리 사이로 성기가 퍽, 짓찧듯 박혀 들어왔다.

“아흑… 너 진짜….”

아래에서 위를 향해 치고 올라오는 강한 힘에 재유의 몸뚱어리가 종잇장처럼 나부끼며 흔들렸다. 조금 전 사과하던 모습이 무색하게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재유는 하반신의 반동으로 차량에 장식용으로 붙여 놓은 강아지 인형처럼 고개가 달랑거렸다. 침대에 짚은 손이 후들거렸다. 바닥에 디딘 한쪽 발은 발꿈치가 점점 들리며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졌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자 우주가 곧바로 지탱해 주었지만, 골반의 움직임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소정의 원망을 담아 우주를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린 재유는 쾌락에 휩싸인 그의 얼굴을 보며 아찔하게 탄식했다.

“아흑….”

다리를 꽉 붙잡고 하체를 짓이기는 우주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얼굴은 물론 목과 어깨까지 시뻘게지고 이마와 목에는 굵은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한계까지 체력을 높인 듯 팔과 어깨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고, 벌어진 입에선 재유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제 몸으로 이렇게까지 흥분한 우주의 모습은 아찔할 만큼 섹시했다.

“알았, 어. 그러니까, 읏… 침대…에서, 할 수 있게만, …해 줘. 너무, 민감해….”

끙끙 앓는 소리에 조금은 정신이 들었는지 우주는 잡고 있던 자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재유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바닥에 내디뎠다.

후우, 후우, 턱까지 오른 숨을 빠른 속도로 뱉어내는데, 우주가 팔을 붙잡아 당겼다. 재유의 상체가 그를 마주 향했다. 체위가 바뀌어서 그런지 구멍에 물려 있던 성기가 뽁, 민망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우주는 재유의 엉덩이를 바짝 당기며 입술을 맞부딪혔다. 흥분이 고조된 만큼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 코가 사정없이 부딪히고 혀를 아프게 잡아당겨 쭉쭉 빨아들였다. 잡아먹히는 듯한 키스가 끝나자 재유를 그대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혔다. 그리고는 포대 자루를 뒤집듯 가뿐하게 재유의 몸을 굴려 엎드리게 했다.

“금방 끝낼게.”

“뭐? 읏…! 잠깐만….”

골반을 잡아 엉덩이를 끌어 올린 우주는 주저 없이 제 하반신을 갖다 댔다. 재유가 도망치듯 엉금엉금 기어 앞으로 나가려 하자 틈을 놓치지 않고 성기를 단번에 찔러 넣었다. 재유가 고개를 쳐들고 신음을 흘렸다.

“흐읏… 너… 진짜….”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기면서도 끝내 거부하지 않고 제 하반신을 은근하게 밀착시킨 재유가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우주는 몸을 굽혀 등허리와 날개뼈에 입술을 댄 채 부드럽게 애무했다.

“흐으윽… 아응!”

재유의 입구가 다시 조여들었다. 엉덩이를 꽤 오래 붙들고 흔들어 댔던 탓에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우주는 하얀 백지에 붉은 도장처럼 남은 자국 위에 자신의 손을 덧대었다. 다시 한번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허리를 흔들었다.

연한 안쪽 살을 붙잡고 양옆으로 벌리자 부풀어 오른 입구에 잔뜩 흥분한 성기가 사정없이 들락거렸다. 더 빠른 속도로, 더 깊게, 더 오래 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났다.

우주는 그대로 엎어져서 재유의 등을 짓누르고 몸을 완전히 바닥에 붙이게 했다. 그 위에 팔굽혀펴기 자세로 엎드렸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육체는 솔직하게 욕망에 충실했다.

우주는 체중을 실어 온 힘을 쏟아 하반신을 콱콱 내리찍었다. 매트리스가 요동치며 삐걱거렸다. 반동으로 떠밀려 가는 재유의 어깨를 붙잡고도 멈출 수가 없었다.

“우읍… 아윽, 염, 우주… 아윽, 악, 이제, 안, 돼… 으응…! 흣….”

“재유야… 하아…!”

결국 못 참고 그의 안에 사정하고 말았다. 좀 더 오래 하고 싶었는데…. 우주는 아쉬운 대로 바짝 몸을 붙이고 내벽이 움찔거리는 감각을 여과 없이 느꼈다. 그 반응에 따라 제 성기도 여전히 꿀렁였다.

“하아… 재유야. 너무 좋아… 미치겠어.”

뒤통수를 붙잡아 돌려 입을 맞췄다. 기진맥진한 재유의 입술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하아… 나 이제 몰라. 진짜 씻을 힘도 없어.”

우주는 그제야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귓가와 뺨에 쉴 새 없이 뽀뽀했다.

“미안. 내가 씻겨 줄게.”

“으으… 못 일어날 것 같다고….”

우주는 이대로 좀 더 있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성기를 빼냈다. 아쉬운 마음에 재유의 등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두 번째 사정인데도 콘돔을 덮은 페니스에 정액이 넘쳐흘렀다.

콘돔을 벗긴 뒤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수건을 적셔 가져왔다. 재유는 그 자세 그대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뒷목까지 벌게져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였다.

재유의 어깨를 잡고 몸을 뒤집자 배 언저리와 침대에 미끈한 정액이 번져 있었다. 우주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쿡 웃음을 터트리며 목과 어깨부터 차례로 재유의 몸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재유는 그가 해 주는 대로 힘없이 몸을 맡기면서도 폭주했던 애인을 향해 미소 짓는 걸 잊지 않았다. 우주도 그 미소를 보며 만족한 듯 후후 웃었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아 낸 우주는 재유를 들쳐메고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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