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섬망
* * *
2003년 10월.
벌써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일을 마친 재유는 기다리고 있을 희지와 우유를 생각해 지하철역에서부터 집까지 헐레벌떡 뛰어갔다.
“아이구, 아빠 왔다고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주인집에 들어서자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드는 우유와 기뻐서 깡충깡충 뛰는 희지가 아빠를 반겨 주었다.
“제가 너무 늦었죠? 죄송해요. 애들이 말썽 부린 건 없었어요?”
“아니야. 지들끼리 잘 놀았는데 뭐. 난 테레비 보면서 사과나 깎아 줬어.”
“너무 감사해요, 할머니.”
재유는 현관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희지와 우유를 안아 주며 주인 할머니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첫 출근 어땠어?”
“아직 첫날이라 많이 헤맸죠. 앞으로 차차 적응할 게 많아요.”
“그렇겠지. 열심히 해 봐.”
“네, 감사합니다. 희지야, 할머니한테 인사드리고 어서 올라가자.”
함무니 빠빠이, 하며 혀짧은 소리로 손을 흔드는 희지와 낑낑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우유를 안아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재유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왔다. 5년 만이었다.
대체복무가 끝난 후에 공장에서 남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감사를 표하며 거절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떠나왔다. 단 한시도 인애와 살던 곳에 머물고 싶지 않은 게 이유였다. 그렇다고 우주와의 풍문이 퍼져 있던 장운을 다시 갈 수도 없었으니, 그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서울뿐이었다. 살아 봤던 곳이라 그나마 익숙하기도 했고, 인구가 많아 오히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익명성이 좋은 조건이었다.
호주에서 돌아와 대학에 복학한 영선의 도움도 긴요하게 받을 수 있었다. 이사할 때나 중요한 볼일이 있을 때 영선이 희지와 우유를 돌봐 줘서 마음 놓고 새로운 기반을 다질 준비를 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어서 영선은 앞으로 자주 볼 수 있겠다며 재유의 상경을 반가워했다.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오래 살았던 곳이라도 서울은 거대도시였다. 어릴 때 살았던 곳과는 다른 동네였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늘 자신의 편에서 믿고 이해해 주는 영선의 존재로 인해 새로 시작하는 부담감을 충분히 덜어 낼 수 있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인애의 죽음으로 얼마간의 배상금과 보험금이 주어졌다.
재유는 처음으로 희지의 외가에 찾아가 인애의 죽음을 알렸다. 이미 딸의 죽음을 알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장례식엔 오지 않았지만, 돈을 받으려 딸의 남편을 수소문하고 있었다고 했다.
재유는 알코올 중독으로 덜덜 떨리는 마른 가지 같은 손에 배상금이 든 통장을 쥐여 주고 씁쓸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섰다. 그때 올려다본 하늘은 무심하게 맑았다. 저 돈이 어떻게 쓰일지 뻔했다.
남은 유가족에게 돈을 줬는데도 인애에게 빚을 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찾아와 돈을 요구할지 몰라 미리 잡도리한 것이기도 했다.
재유는 남은 보험금을 한 치의 낭비 없이 신중하게 사용하고 보관해 왔다. 집을 구할 때 전세보증금으로 일부 사용한 것 빼고는 희지를 위해 여러 용도로 쪼개 놓은 통장을 만들어 저금해 두고, 앞으로 착실히 통장을 불려 나갈 계획도 세워 두었다.
아직 갚을 빚이 남았지만, 인애의 목숨 대신 생긴 목돈을 한정호가 남긴 빚에 탕감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전세보증금도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린 딸을 엄마 없이 키우려면 이제껏 살던 셋방 수준으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일부러 무리해서 제 기준에 좋은 조건의 집을 얻었다.
아파트는 너무 비쌌고, 빌라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웃 간 왕래가 차단된 곳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제일 먼저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었다.
그동안 세 들어 살면서 이웃의 중요성을 실감했던 재유는 되도록 앞뒤, 옆집이 가깝게 붙어있어 희지가 낯선 위험이나 사고로부터 주위 어른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신중하게 골랐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대학가 인근 달동네의 오래된 주택이었다. 2층을 독채처럼 사용할 수 있고, 고만고만한 집들이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밀집된 동네였다.
1층 주인 할머니는 자식들을 다 키워 보낸 후 바깥어른과 사별하고 홀로 사시는데, 얘기가 잘되어 어린이집에 다녀온 희지를 저녁 7시부터 두어 시간씩 돌봐 주는 조건으로 얼마간 사례를 하기로 했다.
주위에는 비슷한 연배의 홀로 된 할머니들이나 나이 지긋한 노부부들이 여럿 살고 있어 조부모의 정을 모르고 컸던 희지에겐 안성맞춤인 곳이라 생각되었다.
새로 구한 직장은 한식당의 조리 보조였다. 서울에 오기로 결정한 후 다시는 공장 일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교대근무와 단순 작업이 싫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경력도, 학력도 없는 재유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의 적성이 맞는 곳은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되어 식당에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재유는 엄마가 식당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에, 장사만 잘되고 일은 많이 시키는 애매한 규모의 식당은 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든 식당 일은 고된 법이라 이왕 고생할 거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큰 식당에서 일이라도 차근차근 배워 둘 생각이었다.
오늘 첫 출근한 직장은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산 중턱에 한옥 여러 채를 두고 정원까지 멋들어지게 꾸며 놓아 비싸기로 이름난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피로연이나 돌잔치, 각종 모임까지 단체 손님도 받는 곳이라 요식업 규모로는 5성급 호텔 버금가는 곳이다.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긴 했지만, 제일 늦게까지 연락이 없어 떨어진 줄 알고 포기하려는 찰나 겨우 연락이 왔다. 30분가량 여러 사람과 꼼꼼하게 면접을 본 결과 합격 통보를 받고 오늘에서야 출근할 수 있었다.
일은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12시간 근무였고, 평일에만 하루 쉴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밥을 챙기고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후 퇴근하자마자 집에 돌아와 밀린 집안일과 육아를 해야 하는 빡빡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아빠를 기다리는 딸과 하루종일 혼자 있을 우유가 안쓰럽지만 빨리 새 직장에 적응하고, 일을 배우고, 돈을 모아 희지와 우유를 잘 키우리라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희지야, 어디가. 그렇게 자면 감기 걸린다니까?”
재유는 희지를 씻긴 후 수건을 들고 머리를 말려 주려 아이를 쫓아다녔다. 챙겨 준 간식을 다 먹은 우유까지 뱅뱅 돌아다녀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좁은 방에서 한바탕 술래잡기를 하다 간지럽히기에 항복한 희지를 자리에 눕히기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다.
11시가 넘어서도 초롱초롱하게 잠들지 않는 아이를 한참을 달래고 재우면 이미 자정이 넘어있었다. 9시에는 잠들어야 하는 어린 희지가 늦게 퇴근하는 아빠와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어서 적응한 결과였다.
“우리 딸, 잘 자.”
재유는 희지의 목 언저리까지 이불을 꼭 덮어 주었다.
“…….”
잠든 아이의 무구한 얼굴은 보람이자 낙이고, 고통이자 애달픔이었다. 재유는 희지의 등을 토닥이고, 꼭 둘 사이에 낑겨 자는 우유의 털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그러다 가끔은 우주 생각이 났다.
그것은 얕은 잠 사이에 찾아오는 조각 꿈처럼 고약하고도 달콤했다.
보디워시를 새로 살 때마다 익숙하게 라벤더 향을 고르거나, 주인 할머니가 먹어 보라고 준 마늘종 반찬을 우주도 좋아했던 게 떠올랐을 때, 그리고 우유가 이유도 없이 갑자기 허공을 향해 짖어댈 때, 지금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오를 때.
간혹 그렇게 우주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주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슴이 미어지고 아팠으나, 이내 털어 버리고 자신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다고 지금 삶이 불행한 건 아니었다. 제법 말문이 트여 이것저것 종알종알 말하기 시작하는 희지와, 산책을 할 때면 에너지가 넘쳐 작은 몸으로 자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우유가 사랑스러워 웃음 짓는 일도 많아졌다.
재유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간다고 느꼈다.
우주와 나는 한때 감당 못 할 버거운 사랑에 매달렸었지만, 시간은 그때의 우리를 지나쳐서 또 다른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
한식당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석 달을 넘기고 있었다. 주방은 각자의 할 일이 칼같이 정해지고 위계가 뚜렷한 곳이었다.
재유는 네 살 딸을 둔 기혼남이었지만, 사회에서는 이제 스물넷을 막 넘긴 막내 신분이었다. 아직 정해진 일 없이 누군가 일을 시키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주로 재료를 옮기거나 다듬는 일을 했고 잔심부름은 시도 때도 없이 했으며 어느 날엔 설거지 이모가 펑크 나서 하루종일 어마어마한 양의 그릇들을 닦기도 했다.
처음 한 달은 주방 구조와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어리바리한 모습도 보였지만, 곧 적응해 주방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민첩하게 손을 놀릴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자신을 낮추는 특기도 발휘해 조용히 무리에 스며들어 주위의 평판을 긍정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젊은 나이에 홀로 애 아빠가 된 독특한 이력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처음엔 탐탁지 않은 듯했으나 재유의 착실한 모습에 서서히 매서운 눈초리를 누그러뜨렸다. 원래 주방 음식들을 외부로 반출하는 일은 엄금이었지만, 애 먹이라며 남은 반찬을 몰래 싸 주는 직원도 있었다.
재유는 그것이 동정이나 연민이라도 아무 상관 없었다. 희귀한 재료들로 만든 맛있는 음식과 값비싼 과일들을 희지에게 먹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릴 수 있었다.
그만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절실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언제 어디서든 불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올라갈 수 있는 낯선 건물의 계단도, 아이와 함께 오르다가 넘어지거나 큰 소리로 울어 버리면 너무도 쉽게 삶의 고단함이 찾아왔다. 아프거나 다쳐서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곧바로 생계와 연결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같은 한겨울 날씨에는 아이가 감기나 폐렴에 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잠자리 온도나 날씨에 맞는 옷차림을 예민하게 신경 써야 했다. 엄마 없는 아이를 떼놓고 출근하는 일에도 매번 고비가 찾아왔다. 아침에 헤어질 때 아이가 울면 우는 대로, 웃으면 웃는 대로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영선이 자주 찾아와서 희지와 놀아 주기도 하고, 함께 놀이공원엘 간 적도 있어서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희지는 이제 영선을 고모라고 불렀다. 영선이 집에 왕래하며 이웃들에게 새엄마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자 재유는 그냥 친구라고 사실대로 말하려 했었다. 그런데.
“새엄마 아니고, 고모예요.”
영선은 그 한마디로 주위의 수군거림을 물리쳐 버렸다.
궁금해진 재유가 물은 적이 있다.
“왜 이모가 아니라 고모라고 했어? 이모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아?”
“이모라 그러면 범위가 너무 넓어서 안 돼. 아무리 새엄마 아니라고 변명해도 의심받을걸? 그리고 너 사별한 거 사람들이 다 아는데 이모라고 하면 처제가 전 형부 집에 들락거리는 꼴이잖아. 뒷말 나오기 딱 좋지.”
“그런가….”
“그렇다니까? 남자 혼자 애 키우면 성실하다, 열심히 산다, 소리 들을 텐데 뭐 하러 사실대로 말해서 안 봐도 될 피해를 봐? 괜히 구설수에 오르는 것보단 백 배 나으니까 너도 딱 잡아떼. 그리고 너랑 나랑은 형제나 다름없으니까 상관없잖아. 희지한테는 내가 잘 설명할게.”
재유는 학교를 졸업하고 쭉 사회생활을 해 와서 나름대로 눈치가 좀 생겼다고 자부했는데, 영선의 처세와 빠른 상황판단에는 따라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늘 생각해도 고마운 사람이었다.
지옥 같은 점심 오더를 마감하고 마침내 브레이크 타임이 찾아왔다. 오늘은 유명 대학의 동문 모임 때문에 단체 손님 오십 명 정도를 받아서 더 정신이 없었다.
재유는 지칠 대로 지쳐 늦은 점심을 억지로 밀어 넣고 사물함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폴더를 열어 확인하니 같은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서너 통 와 있었다. 혹시나 희지와 관련된 일일까 봐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지만, 어린이집도, 주인집 할머니도 아닌 모르는 번호였다.
회신을 하려 했는데, 마침 또 그 번호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한재유 씨?
“네. 전데요. 누구세요?”
-저… 안녕하세요. 염우혁이라고 합니다.
***
재유는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기댈 곳을 찾는 손이 허공을 더듬거렸다. 의자 등받이가 만져지자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염우혁. 물론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낯선 목소리의 남자가 우주의 형이라며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염우혁과는 우주의 집에서 사진이 들켰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었다. 아니, 만난 건 아니고 잠시 스친 거였나.
그동안 잊고 산 줄 알았던 과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일로 나에게 전화를 한 걸까.
-여보세요. 한재유 씨?
“네. 무슨… 일이시죠?”
생각 이상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잠시 핸드폰을 멀리 떼 놓고 숨을 내쉬어야 했다.
-잠깐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시간 많이 안 뺏을게요.
“잠시만요.”
좁은 휴게실 안에는 다른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재유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휴게실을 나와 주방을 거쳐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사람 몸통만 한 짬통이 여러 개 놓인 뒷마당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전화로 얘기하기는 좀 그래서…. 지금 일하시는 곳 근처에서 30분만 시간 좀 내주세요. 장소나 시간은 제가 언제든지 맞출게요.
기분이 이상했다. 말하는 뉘앙스가 꼭 자신의 거처나 일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어디서 일하는지 아시는 건가요? 그리고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어디든 상관없어요.
“혹시 제 뒷조사 같은 거 하신 거예요?”
-미안해요. 급하게 만나고 싶어서 실례했습니다. …안 될까요.
재유는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거부감에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알았건 간에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전 이미 우주랑 끝난 사이예요. 이만 끊겠습니다.”
핸드폰을 닫으려는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재유를 붙잡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요. 알고 있어요. 그쪽이 우주랑 헤어진 거.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에요.
입속이 바싹 말랐다. 연신 침을 삼키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주한테… 무슨 일 있나요?”
작게 입술을 깨물며 수화기 너머 대답을 기다렸다.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요.
재유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미 우주의 형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동요하고 있었다. 하나, 만나서 소식을 들으면 어쩔 것이며, 만나지 않아서 생길 궁금증과 후회는 어쩔 것인가.
“…….”
-부탁이에요.
재유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나란히 놓인 짬통 아래 자신의 지저분한 안전화가 초라해 보여 고개를 쳐들었다. 오래된 향나무가 바싹 마른 잎살을 건조하게 매달고 있었다. 향기는 나지 않았다.
“…가게 밖에서 만날 시간은 없어요. 3시부터 4시 사이에 시간 낼 수 있으니까 내일 식당으로 오세요. 어딘진 아실 테죠.”
-그래요. 다시 한번 미안해요. 내일 봅시다.
핸드폰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우주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1년 하고도 4개월 전이다. 전역 후 갑자기 찾아와 어두운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했었다.
그 후로 어떻게 지냈을까.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엘 갔다고 하니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애써 잘살고 있겠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공부도 다시 시작하며 훌훌 털고 자기 삶을 찾아가겠지, 그리고.
애인이 생겼을지도 모르지, 라며 자신을 다독였었다.
한번 생각을 시작하니 점점 더 염우혁의 용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재유는 추위에 볼이 빨개지는 것도 잊고 뒷문 근처를 서성이며 휴식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
염우혁은 약속대로 3시에 맞춰 식당으로 들어섰다. 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착각했다. 3년 반 전, 처음 봤을 땐 머리가 짧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살이 좀 붙고 머리도 반듯하게 길러 단정한 인상을 풍겼다.
재유는 직원들에게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작은 룸으로 염우혁을 안내했다. 따뜻한 녹차를 가져다주고 어색한 모양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풍성한 머리숱에 키가 크고 체격이 다부진 걸 보니 과연 형제라고 할 만큼 비슷한 면모가 많았다. 생김이나 차림새, 행동거지가 바르고 예의가 있어 척 보기에도 부잣집에서 모자람 없이 잘 자란 티가 풀풀 났다. 우주도 저 나이쯤 되면 저런 모습이려나.
재유는 염우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물기가 덜 마른 조리복에, 주방용 모자를 쓴 자국이 머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터였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두 사람의 모습이 클레임을 거는 부유한 고객과 쩔쩔매며 사죄하는 말단 조리사처럼 보일 것이다. 그걸 깨닫고 약간의 박탈감을 느꼈다.
“이렇게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염우혁은 잔잔하게 미소를 얹으며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진주색 찻잔의 뚜껑을 열고 찻잎이 담긴 거름망을 조심스레 들어낸 뒤 잔을 들어 입을 적셨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가만가만 재유의 눈치를 살피다 운을 뗐다.
“재유 씨에게 연락을 해도 되나 고민 많이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 보니 꼭 예전부터 친했던 것처럼 느껴지네요. 우주한테 얘기도 많이 들었었고요.”
“…네.”
재유도 공감했다. 그 역시 우주를 통해 형에 대한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고, 자신이 훈련소 퇴소를 할 때 우리 사이를 다 알고서도 우주와 함께 마중을 와 줬던 사람이다. 그렇다 해도 앞으로 이 사람과 친분을 다질 기회는 없을 터이니 씁쓸한 표정을 지우고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유 씨를 만나면 다른 걸 떠나서 일단 사죄하고 싶었어요.”
그날 저희 아버지가 보였던 무례에 대해서, 라고 조용히 덧붙였다.
“미안합니다.”
염우혁은 턱을 당기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재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재유는 마음에 가라앉은 시름과 고민들을 무표정으로 가리고 짐짓 차갑게 응대했다.
“보시다시피 전 일하는 중이었고 곧 복귀해야 하니까 용건만 말씀해 주세요.”
“그래요. 바로 얘기할게요. …우주가 미국에 있다는 건, 알고 있나요?”
막상 우주의 거취에 대한 화두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목울대가 꿀렁였다. 재유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재유 씨가 우주를, 만나 줬으면 해서요.”
“네…?”
“경비는 제가 다 부담할게요. 이런 말 실례될지 모르지만, 필요하면 사례를 드릴 수도 있어요.”
뜻밖의 이야기에 우혁이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 뚫어져라 봤지만, 그의 태도는 성실하고 진지하기만 했다. 막상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어 보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방금 한 말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의 말대로 우주의 가족과는 썩 좋지 않게 끝을 맺었으니까.
재유는 차분하게 염우혁을 향해 벽을 세웠다.
“실례하시는 게 맞네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형님분을 처음 뵀을 때, 전 그 집에서 제대로 사람 취급도 못 받았었어요. 그땐 만나지 말라더니 지금 와서야 만나 달라니요. 그것도 미국까지 가서…. 전 그 집에서 아직도 우스운 사람인가 보네요.”
저도 모르게 말소리가 격앙되어 떨렸다. 평소의 저답지 않은 격렬하고 무례한 발언이었다.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 평생 그와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가느다란 가능성이 생기자마자 잠잠했던 가슴이 요동치는 걸 보면.
“오해하지 말아요. 재유 씨를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어요.”
“그렇다 해도 정말… 제 뒷조사하셨다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전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대화가 끊기자 휴게실 쪽에서 왁자지껄한 직원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별…했다고 들었어요. 많이 힘들었겠네요.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거 저도 염치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는 재유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어려운 말을 제법 담담하게 풀어냈다. 녹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을 응시했다. 앙상한 가지들을 드러낸 나무들이 한옥과 어우러져 쓸쓸한 풍취를 자아냈다. 우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재유의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부탁할게요.”
우혁의 나긋하고 정중한 말투에 도리어 숨이 턱 막혔다. 테이블 밑으로 얽어 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땀이 찬 손을 바지 위에 쓸었다.
우주 말대로 정말 좋은 형이네. 우혁에 대한 감상을 멍하게 생각하던 재유는 참아왔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주는… 어떤데요?”
우혁은 곧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지는 답변에 심장이 우그러들며 애가 탔다. 초조한 심정으로 남자의 입만 바라보는데, 의외의 말을 털어놓았다.
“학교도 안 다니고 매일 술에 절어 폐인처럼 살고 있더군요.”
“…….”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냐’고 묻던, 암연히 가라앉은 표정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미국 가서 저만 보고 온 거라 부모님은 아직 모르시지만, 나로선 우주를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계속 곁에 있어 줄 수도 없으니까요. 억지로 한국에 데려와서 옆에 두고 정신 차리게 하려고도 했는데, 죽어도 오기 싫다더라고요.”
“왜요?”
“글쎄요.”
“…….”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우혁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담뱃갑과 라이터를 가지런히 모아 찻잔 옆에 반듯이 놓았다.
“그런 말은 들었어요. 우주가 말하길… 어디에 있어도 재유 씨를 잊을 수 없다고요.”
재유는 자신이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끝으로 뺨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그러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듯 우주의 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우주는 아무리 재유 씨가 보고 싶어도 먼저 연락 못 할 거예요. 거절당할 게 두려워서겠지만.”
“…….”
“우주가 자의로 미국에 간 건 아니었어요. 그 문제에 대해선 아버지도 완강하시지만, 어머니도 만만치 않으셨어요. 거기서도 그렇게 생활하는 걸 아신다면 글쎄요….”
정말로 병원에 가둬 놓고 치료만 받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동생이 그렇게 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자기에게 연락하는 걸 마지막으로 시도해 본 거라고.
“솔직히 난, 남자끼리의 사랑…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치료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격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건 사실이고, 주위의 시선이나 사회적인 통념에도 한국에선 비정상으로 통하니까….”
우혁의 말이 마음속 감춰 뒀던 비밀을 억지로 파헤친 듯 잔인하게 들렸다. 재유의 부릅뜬 눈이 힘을 잃고 그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난 내 동생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이고,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그 녀석이 예전 모습을 잃은 채 부모님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고요.”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입을 앙다물며 울먹거리지 않기 위해 재유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태껏 우주와의 관계를 영선과 아주머니는 알고도 이해해 주었지만, 우주의 가족 중에서 인정받기는 처음이었다.
이제 와 그것이 감동이라도 되는 걸까.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요동치고, 울컥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주는 어릴 때 어머니가 가출했던 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가. 늘 잘 웃는 말썽꾸러기였는데, 한 달 동안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울기만 했었죠.”
재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사내자식이 그만한 일로 밥도 안 먹고 울고만 있냐며 윽박지르고 때리는데도 우주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물론 어머니가 돌아오신 후에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 후에도 혹시나 어머니가 떠날까 무서웠던 건지, 고등학생이 돼서도 틈날 때마다 어머니께 실없이 말을 걸고 그 큰 덩치로 애교도 부리더라고요.”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늘어놨지만, 우혁의 표정에도 어두운 상념이 스치는 듯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임에는 그도 매한가지인 사연일 것이다.
“그 후로 또다시 그런 상태가 된 적이 있었어요. 재유 씨가 우리 집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입대하기 전까지 쭉 그랬죠. 우주는 좋아하는 누군가가 자기를 떠나거나 이별하는 걸 쉽게 못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나한테 말은 안 했지만, 군대에서 내내 관심사병이었어요. 동기나 선임들한테 폭행도 당했었고요. 우주 성격대로라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곧잘 적응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어요.”
우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멍한 눈초리로 숨을 가다듬는 재유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재유 씨도 한 번 겪어 봤지만, 우리 아버지는 생각보다 냉정한 사람이에요. 그때 그 일로 우주는 핸드폰도 뺏기고 집에 발이 묶인 채 재유 씨한테 연락조차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우주뿐만 아니라 재유 씨한테도 여러 가지로 해가 되는 일을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아들이 남자를 만난다는 걸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 원인과 책임을 재유 씨한테서 찾는 것 같았죠.”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그때 일이 떠올랐다. 굳이 염우혁에게 듣지 않아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복무는 고사하고 아예 장운에서 발 못 붙이고, 어디서든 사회생활 못 하게 손을 쓸 수도 있다고 예상했어요. 우주가 어떻게 아버지 마음을 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유 씨가 대체복무도 계속 하고, 다른 공장에 이직할 수 있게 설득했다고 들었어요.”
재유는 이제야 소스 공장으로 이직하게 된 내막을 알게 되자 염창섭의 악랄함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 인생을 멋대로 주무르고 휘두르려 했던 것일까.
“저도….”
재유는 말을 하다 멈칫했다. 염창섭 사장에 대한 분노가 우주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졌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우주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렇게 미워했던 아버지에게 내 사정을 봐 달라 애원했을 때 그는 또 한 번 좌절을 겪었으리라.
그러고도 우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군대에 가서도 답장이 올 거란 기대도 없이 내게 편지를 썼고, 전역하고도 가정을 이룬 날 찾아왔었다.
재유는 우혁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며 테이블 아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물에 불은 손끝의 피부 껍질이 희게 부풀어 있었다.
“저도 우주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아요. 겪은 것도 있고. 우주가 날 생각해서 했던 일은 몰랐지만….”
재유는 손을 꼭 쥐고 애써 덤덤한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리를 덧입힌 장지문과 족자에 붙인 산수화, 우혁의 등 뒤에 있는 병풍, 메마른 겨울 정취가 묻은 창밖으로 천천히 시선을 굴렸다. 지난 가을 풍성하게 잎을 매달고 있던 단풍나무가 이제는 삭풍에 잔가지를 떨고 있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어요. 저는 이제 지켜 줘야 할 딸도 있고요. 우주를 만나는 걸 그쪽 집에서 알게 된다면, 또 어떤 해코지를 해올지 모르는 거 아닌가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다시 사귀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한 번, 만나만 달라는 거예요.”
우혁은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애당초 뒷조사를 했다는 것부터 그가 이번 일을 대하는 태도를 짐작게 했다. 아무리 거부하며 핑계를 대도, 우혁은 자세나 표정을 흩트리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재유를 몰아세웠다.
“만약 재유 씨가 우려하는 일이 생긴다면, 제가 책임지고 아버지를 막을 겁니다. 그건 분명히 약속할게요.”
재유는 눈을 깜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긍정의 웃음이라기보다 곤란한 것을 덮으려는 얼버무림이었다.
“물론 아직 어려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감정을 털어놓지 못하고 매여만 있다면, 우주는 앞으로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우주가 덩치도 크고 성격도 활달해서 얼핏 강해 보이지만, 속은 안 그렇잖아요. 재유 씨도 잘 알겠지만.”
거기까지 들었을 때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으로 얼른 눈물을 훔치고 황급히 일어섰다.
“그만 하세요. 전 안 가요.”
우혁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덩달아 일어났다.
“재유 씨.”
재유는 급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표정을 굳혔다.
“제가 사별한 건 사실이지만,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시겠네요. 엄마를 잃은 아이가 아빠마저 안 보이면 얼마나 상처받을지 상상 못 하시겠죠. 안 들은 걸로 하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재유는 우혁을 돌아보지도, 배웅하지도 않은 채 룸을 나와 주방 뒷문으로 향했다.
우혁은 재유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 자리에 털썩 앉아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벌거벗은 겨울나무들이 오후 햇살을 받고 있었지만, 건조한 가지에는 스산한 한기를 띠는 것 같았다.
***
재유는 조리실 뒷마당에서 초록색 머리를 단 도로비로 쌓인 눈을 쓸고 있었다. 낙엽을 쓸거나 눈을 치우는 건 서버들이 맡는 업무였지만, 조리실 뒷마당은 주방 직원들이 주로 출입하는 곳이라 자연스레 재유의 몫이 되었다.
어제도 같은 시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눈을 치웠는데, 오늘도 제법 쌓여 있었다. 재유는 손을 호호 불어 가며 부지런히 비질을 했다.
“적당히 해. 이따 저녁때 눈 또 온다니까.”
“아… 네.”
홀 지배인이 뒷마당에 들어서며 인기척을 했다. 담배를 피우러 온 모양이었다. 재유는 비질을 멈추고 묵례를 했다.
지배인이 담배를 꺼내며 마당 한편에 놓인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더니 재유에게 담배를 내밀어 권했다. 재유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고 어색하게 다시 비질을 시작했다.
“담배 안 폈었나? 별일이네. 주방엔 골초들만 모아 놓은 줄 알았더니. 잠깐 이리 와서 쉬어.”
40대 중반인 현준은 5성급 호텔 경력 20년을 채우고도 총지배인 진급에서 경쟁자에게 밀려 10년 넘게 다니던 호텔에 학을 떼고 퇴사했다 한다. 큰 키에 점잖고 깔끔한 인상, 정장 유니폼을 오래 입어 몸에 밴 젠틀한 매너와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전체적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대인관계 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편안한 인상이라도 식당 내 넘버 쓰리인 상사와 단둘이 있는 건 불편했다. 재유는 별수 없이 현준 옆에 놓인 의자에 주춤거리며 앉았다. 그때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재유는 현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반대쪽으로 몸을 틀어 잠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우혁이 보낸 문자였다.
우주의 형은 포기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만난 이후로 그는 하루걸러 한 번 설득을 위해 전화나 장문의 문자를 보내 왔지만 제대로 된 회신을 한 적은 없었다.
재유는 핸드폰을 닫고 저도 모르게 갑갑한 한숨을 내쉬었다. 재유의 얼굴을 흘끔 보며 연기를 내뿜던 현준이 넌지시 물었다.
“고민 있어? 애기 문제?”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애인?”
“네? 무슨 말씀을….”
깜짝 놀라 현준을 쳐다보자 재유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팔을 내려 재를 털어냈다.
“아직 젊고 한창때인데 왜 그래?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그래도 전 아직 애도 어리고 하니까….”
“없다는 소린 아니네?”
“…….”
수십 년간 사람을 상대하며 접객 일을 해서 그런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속내를 알아차려 버린 그를 재유는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지배인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 어떤 사람이길래 우리 재유 씨를 그렇게 속 끓이게 하는데? 어디 한번 얘기해 봐.”
현준은 군대 같은 주방의 꽉 막힌 위계 사이에서 재유에게 곧잘 숨 쉴 틈을 마련해 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무리 지배인이라도 주방 사정에 대놓고 끼어들 순 없으니 재유가 혼날 때 편들어 주진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심한 척 말을 건네거나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토닥여 주곤 했다.
“실은… 결혼 전에 만났던 사람이 있는데 아직 다 잊진 못했거든요. 그 사람 사정이 좀 안 좋나 봐요. 가족이 찾아와서 한 번 만나 달라고 부탁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현준은 재미없어 보이는 네놈에게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으음,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영선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속마음을 이런 식으로 내비칠 줄은 몰랐지만, 막상 입이 트이니 거침이 없었다.
“아이도 있고 생활도 있으니까 여건이 안 돼서 불가능할 거라 생각은 하는데… 이대로 없던 일로 덮는 것도 힘드네요.”
우혁에겐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사실은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우주의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았었다. 이미 지나간 사랑이라고 애써 되뇌며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다. 하나, 사람 마음이란 쉽게 다듬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현준은 연기를 뱉으며 곁눈질로 재유를 훑었다. 나이답지 않게 꽉 막히고 재미없는 인생 산다 싶었는데, 꽤나 사연 있어 보이는 옛사랑을 떠올리며 귓불을 붉히는 걸 보니 어딘지 발칙하고 색다르게 보는 듯했다. 현준은 픽, 가볍게 웃으면서도 진지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설파했다.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또 어떻게 헤어졌는진 모르겠지만 만약 첫사랑이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건 당연한 거지. 그런 일은 평생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니까.”
“…….”
“그래도 현실에 치여서 그 마음을 묻어 놓지는 마. 살면서 두고두고 괴롭거든.”
현준은 피우던 담배를 눈 바닥에 비벼 끄고 다시 주워 올렸다.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더니 새파랗게 어린 아기 아빠의 어깨에 지긋이 손을 얹어 다독였다.
“애 때문이고 뭐고 간에, 어차피 후회는 하게 돼 있어. 사람은 가끔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살다 보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을 때도 있지. 재유 씨한테 지금이 그럴 때일 수도 있으니까 잘 한번 생각해 봐.”
생각에 잠겨 있던 재유는 어깨에 놓인 손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허허 웃은 지배인은 느긋하게 자리를 떴다. 현준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머릿속이 엉클어져 더 복잡하기만 했다.
무슨 염치로 그를 다시 보나. 나한테 그럴 자격이나 있나. 내 마음 편하자고 만나러 갔다가 괜히 들쑤시게 되면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할까.
재유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빗자루를 들었다. 비질을 시작하려 했지만, 영 내키지 않아 귀퉁이에 쌓인 애먼 눈 뭉치들을 툭툭 흩트려 놓았다. 가슴은 우주 생각으로 일렁이고 있는데, 머릿속에선 희지가 둥둥 떠다녔다.
***
잠결에 얼핏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문을 두드리다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우주는 이진교일 것이라 짐작했다.
오후의 방문객은 어두컴컴한 아파트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불을 켜고 창문의 커튼을 걷어냈다. 우주가 있는 방에 들어와서도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방 꼴을 보고는 팔짱을 낀 채 침대로 걸어오더니 늘어져 있는 집주인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발로 툭툭 건드렸다.
정오를 넘은 시간이지만 창문을 가린 암막 커튼 때문에 우주는 낮과 밤의 구분이 힘들었다. 막 잠에서 깨긴 했지만, 숙취로 아직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보드카와 맥주병, 그리고 지난밤 누군가와 섹스를 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어제 또 첼시에 갔어? 남자랑 나갔다던데, 집에 데려온 거야?”
“그만 소리 질러. 울리니까.”
“미친놈. 나와서 밥이나 먹어.”
“됐어.”
진교는 이불을 걷어 재끼고 이번엔 옆구리를 걷어찼다. 안 일어나고는 못 배기는 신음을 듣고 나서야 그가 방을 나갔다. 식탁에 포장 음식을 차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 음식점에서 사 온 누들과 볶음밥이니 빨리 먹으라고 진교가 소리쳤다.
우주는 갈비뼈에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옆구리를 부여잡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맨해튼 남쪽 강변의 고층 빌딩 중에 우주가 사는 아파트가 있었다. 1년 반 전, 미국으로 오면서 뉴욕 외곽의 작은아버지 집에 사는 것을 거부하고 혼자 살기를 고집해서 겨우 얻은 집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이역만리까지 떠나 왔는데, 친척들에게 사생활이 낱낱이 드러나고 그 소식이 한국에 전해진다면 미국까지 온 의미가 없었다. 그 대가는 6년 안에 경영대학을 마치고 그 후의 진로를 아버지의 뜻에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그 중엔 결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온 이후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우주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저 아버지와 되도록 먼 곳에서, 가능하면 오래도록 안 보고 살 수만 있다면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있었고, 악어의 눈물도 얼마든지 흘릴 수 있었다.
그때 우주는 미국으로 가라는 아버지의 결정이 오히려 반가웠다. 재유가 곁에 없는 한국은 의미가 없었다.
아파트는 두 개의 방이 있었고, 가구는 그전에 살던 사람의 취향대로 모던한 인테리어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레이와 화이트가 섞인 가구와 벽지, 대리석 바닥에 최소한의 생활 도구만을 갖춘 다소 삭막한 공간이었다. 벽에는 흔한 액자나 시계도 걸려 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자 곧바로 갈증이 일었다. 우주는 식탁은 쳐다보지도 않고 어기적거리며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오랫동안 자르지 않아 덥수룩한 머리 모양에 팬티만 걸친 채였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 위 속으로 직행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 하도 마신 탓에 물맛인지 술맛인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갑자기 윗배에 통증이 느껴져 허리를 구부리고 배를 감싸 쥐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얼씨구, 속 버리려고 작정했냐? 밥이나 먹고 술 처먹은 거야?”
냉장고 벽을 짚은 채 겨우 통증을 진정시킨 우주는 병에 담긴 물을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몸이 아까보단 수월하게 물을 받아들였다.
“너 자주 먹는 새우볶음밥이야. 아직 따뜻하니까 그만 고집 피우고 먹어.”
“나 샤워 먼저 할게. 너나 먹어.”
우주는 페트병을 싱크대에 던져 버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안에 들어가 물을 틀자 샤워기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지만, 무언가와 내기라도 하듯 버티고 서 있었다. 경험상 숙취에 더운물 샤워는 현기증과 타박상을 불러왔다.
어제 잠자리를 한 사람은 게이바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비슷한 나잇대의 아시안이었다. 먼저 유혹해 오길래 집으로 데려와 술판을 벌였다.
처음 만난 사람과 하는 섹스는 잠깐의 흥분과 쾌락을 채워 주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주는 발작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떨치지 못했다.
그와 헤어진 지 3년이 넘었지만, 기억은 풍화되지 않았다. 우주는 어찌할 줄 모르고 사무치는 마음을 섹스로 해소했다. 애써 누군가의 모습을 찾으려 낯선 몸을 탐했다. 사정이 끝나면 모든 것이 허무하게 달아나 버렸다. 그럼 우주는 자신이 찾고 있던 게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런 소모적인 관계를 지속해 온 게 벌써 여러 달이다. 매일 잠에서 깨고 나면 삶에 대한 지독한 나른함과 우울감으로 몸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밤이 되면 진정으로 죽지 못한 망령처럼 하릴없이 거리를 떠돌며 술을 마셨다. 혹시 오늘은 내가 찾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한참이나 받아낸 후 우주는 이를 딱딱 떨어 가며 샤워 타올을 걸친 채 욕실을 빠져나왔다. 기력이 없어 순간 넘어질 뻔한 걸 진교가 재빠르게 달려와 팔을 지탱해 주었다.
“야, 너 몸이 얼음장이야. 찬물로 샤워했어? 미쳤냐?”
우주는 진교의 팔을 풀고 혼자 힘으로 힘겹게 식탁까지 걸음을 옮겼다.
진교가 방으로 달려가 담요를 들고 와서 몸을 덮어 주고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이 있는지 확인했다. 방금까지 찬물을 맞은 터라 아직도 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툴툴대면서도 팔이며 등을 열심히 쓸어가며 몸을 덮였다.
“왜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냐? 꼴통 새끼.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술만 처먹으면서. 그런데도 밤에 서긴 서냐?”
“그만해. 앉아서 밥 먹어. 다 식겠다.”
우주는 진교의 팔을 잡아 멈추게 하고 식탁 반대편으로 슬쩍 밀어냈다. 무심한 손에 떠밀려 다시 의자에 앉은 진교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어 팟타이를 성의 없이 휘적거렸다.
진교는 미국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게이바에서 만난 동갑내기였다.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다고 했다. 한두 번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지만, 진교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게 느껴져 얼마간 거리를 두었었다. 후에 그가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다시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지금은 헤어진 모양이었지만, 진교는 생활감 없이 지내는 우주를 내버려 두지 못하고 가끔 이렇게 찾아와 잔소리를 해 댔다.
한 달 전엔가, 진교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우주가 문을 열지 않아 소란이 벌어지고, 옆집의 신고로 경찰까지 들이닥치는 바람에 귀찮은 일이 생긴 적이 있었다. 그때 우주가 앞으론 쓸데없는 일 만들지 말라며 복사한 키를 건네주었다.
“대체 왜 그러고 사냐?”
“…….”
“인생 포기했어?”
우주는 픽 웃었다. 얼굴에 의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멈추고 싶긴 한데.”
“그럼 생활을 해. 제시간에 자고, 깨고, 밥 딱딱 먹고, 일이든 공부든 하면서 좀 사람답게 살아.”
“잘 안 되네.”
우주는 거칠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렇게 살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을 찔러대는 두통과 음식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찌푸리며 내리깐 눈에는 물이 맺혔다. 피곤함과 술기운 때문이었다.
“아니 대체 한국에서 뭔 일이 있었길래 미국 오자마자 이렇게 사는 거야?”
“…한심하지.”
“알긴 아네.”
우주는 안압 때문에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자 물기가 번져 나왔다.
***
“으윽. 끄으으으…. 아아악!”
정신없이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깬 우주는 거칠게 숨을 뱉으며 눈을 떠 보려 애썼다. 온몸이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찔한 느낌이 피부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꿈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한참 동안 새하얀 천정을 노려보았다.
습관적으로 침대 옆자리로 손을 더듬었다.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나 기억을 되짚고 나서야 술만 진탕 마시고 혼자 돌아왔던 게 떠올랐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대며 두통을 없애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뱉은 숨에선 술 냄새가 뿜어져 나와 속이 메스껍고 위가 아려 왔다. 시계를 확인하자 오전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의를 느끼고 화장실로 향했다. 소변을 보며 서 있는데 현기증이 일어 잠시 휘청거렸다. 바지춤을 올리고 거실로 나오자 덜 닫힌 암막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불현듯 기분이 상했다. 우주는 비틀거리며 창가로 향했다.
화풀이하듯 거칠게 커튼을 닫았지만 제대로 닫히지 않았는지 아직도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제대로 닫으려 손을 뻗었는데, 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음울한 모습이 드러났다.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잔 탓에 차림은 꾀죄죄하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피부는 생기 없이 거뭇했다. 그 흉한 얼굴에 진저리를 치며 거울 앞을 떠났다.
똑똑똑.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진교인가. 그냥 무시하고 침대로 갈까 하다가 그가 열쇠를 갖고 있다는 걸 떠올리곤 하는 수 없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벌컥 열고 곧바로 돌아서는데, 이른 아침의 방문객은 어쩐지 예상했던 이진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무심코 뒤돌아 누구인지 확인한 그는 비현실적인 충격을 느꼈다.
한재유.
헛것인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다시 문을 닫으려 했는데.
“염우주.”
목소리도 들려왔다.
정말 재유인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나.
사고가 마비되어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멍하게 문밖의 실루엣을 바라보는데 또 환청이 들려왔다.
“들어가도 돼?”
우주는 목소리에 이끌려 엉겁결에 문을 열고 그가 들어올 공간을 만들었다. 청바지에 검은색 점퍼를 입고 회색 가방을 멘 재유가 조용히 내 집으로 들어왔다.
우주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팔을 움직여 탁, 문을 닫았다. 애써 숨을 가다듬고 눈을 감은 채 다시 한번 기억을 환기했다.
재유는 충청도에 있는 소스 공장에 다니면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분명 돌아올 생각이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었는데.
1년 반이 지난 지금, 미국 뉴욕 중심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혼자서 걸어들어 왔다.
이 상황이 너무 낯설어서 무언가 조작된 스크린을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 너 뭐야!”
긴장과 격정으로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우주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눈앞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를 향해 다짜고짜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외침에도 별말 없이 지그시 보기만 하는 재유가 아직도 환영처럼 보였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려도 실체를 붙잡을 수 없어 숱하게 포기하고 좌절했던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서 있었다. 우주는 기대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저 반듯하고 말간 얼굴이 무언가를 말해 주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너무 어둡네. 불 켜도 돼?”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목에 걸려 있던 숨이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귓전에서 메아리치듯 울렸다. 차분하고 고요하던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현관 옆에 가방을 벗어 둔 그가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스위치를 찾는지 벽을 더듬고 있었다. 우주는 사납게 뜬 눈을 그에게 고정한 채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눌렀다. 재유는 밝아진 조명에 잠시 놀란 듯하더니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기 시작했다.
촤르륵, 커튼이 걷히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마침내 현실임을 실감했다. 정말 재유였다.
커튼이 걷힌 유리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한층 밝아진 채광에 문득 자신의 추레한 모습이 드러난 게 수치스러워 낯이 붉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네가… 왜, 여기….”
재유는 말없이 점퍼를 벗어 창가에 있는 소파에 걸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살이 좀 붙은 건가. 얼굴이 좋아 보이네. 다만 피곤한 건지 눈만은 퀭했다.
“왜… 왜 여기 있냐고!”
“일단 좀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정말 재유인 걸 확인하자 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벼락같은 상황에 자신은 속에서 뱀이 득시글거리는 것처럼 욕지기가 치미는데, 재유는 이런 식의 재회를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대답 없이 꼼짝 않고 노려보기만 하자 재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형이 부탁했어. 너한테 한 번 가 달라고.”
“뭐… 뭐라고?”
우주의 한쪽 눈썹이 경련하듯 꿈틀댔다. 퍽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유에 어이가 없었다.
재유와 형에게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비쳐질까.
인생 포기한 것처럼 사는 동생 때문에 옛 애인을 찾아가 만나 달라 부탁했다는 형이나, 여기까지 와서 기어이 망가진 제 모습을 확인한 그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살고 있는 꼴 보니까 속이 시원해? 나랑 헤어질 때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런 짓 했어?”
“…….”
줄곧 시선을 맞춰 오던 재유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내가 어떻게 살든 네 알 바 아니니까 상관 말고 당장 꺼져.”
우주는 낮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하곤 홱 돌아서서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재유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자리를 지켰다.
“뭐 해. 나가라니까?”
고개를 까딱이며 빈정거리자 재유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왔다.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아무리 니네 형 부탁이라지만, 나도 여기까지 오는 거 쉽지 않았어. 애까지 맡겨 두고 왔다고. 너 만나려고!”
우주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입술이 일그러지며 비소가 흘렀다. 형형하게 틀어진 표정에선 계속 삐딱한 말이 튀어나왔다.
“우와. 감동이다, 진짜. 대단히 고맙네요. 아주 굉장한 결심 했다. 응?”
“비죽이지 마. 안 그래도 너 지금 충분히 이상하니까.”
“그래서. 책임감이라도 느꼈다는 거야? 네가 뭔데?”
재유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가 뭐냐는 물음에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 비애가 된 듯이,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나도 네 소식 들었을 때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어. 근데 그게 안 돼서 여기까지 온 거고.”
“왜? 가진 거라곤 아빠 빽밖에 없는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어졌어?”
재유는 방금 들은 말이 분하고 애가 탄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우주가 붙잡고 있던 문을 낚아채 거칠게 닫았다.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우주의 팔을 꽉 붙잡고 흔들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넌 이미 나한테 그런 존재가 아니니까!”
차분하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높아진 재유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기세에 눌린 우주가 흠칫하며 한 발 물러섰다. 한 번도 이렇게 큰 소리로 화낸 적 없었는데. 의문과 혼란이 차올랐다.
그런 존재가 아니라니. 우린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는데.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다고 여기까지 와서 날 흔드는 걸까.
“네가 말하는 그런 존재가… 뭔데?”
“그걸 몰라서 물어? 나한테 책임질 가족이 생겼다고 금세 너 잊고 잘살 줄 알았어?”
“…….”
“그래. 잊으려고도 했고, 한동안은 사는 게 바빠서 잊고 살기도 했어. 근데, 니네 형 만나서 네 소식 듣자마자 네 생각밖에 안 나더라.”
재유는 힘에 부쳤는지 잠시 숨을 골랐다.
“…잊은 게 아니더라고.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밥도 잘 안 넘어가고 잠도 못 자고 그랬어. 넌….”
점점 감정이 격해진 그가 원망 섞인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넌, 내가 너처럼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으면 제대로 살아질 것 같아?”
“너….”
과거에 자신이 알던 재유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딘지 달라 보여서 혼란스러웠다. 목소리가 떨리긴 해도 이렇게 당차게 제 할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내 옆에 있을 땐 보호받는 존재였는데.
적어도 우주 생각엔 그랬다. 남들의 시선을 걱정하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던 재유였다. 이젠 반대로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 그런 건가.
아. 강해졌나 보다. 눈물도 많고 정도 많아서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유순한 소년이,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건가.
넌 잘살고 있었구나.
나만 바보처럼 과거에 사로잡혀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 같아 피식, 쓴웃음이 났다. 내가 그토록 붙잡으려 했던 기억 속의 망령이 현실 세계에서는 어엿한 가장이 되고 평범한 사회인이 되어 그렇게 살지 말라며 자신을 꾸짖고 있다.
우주는 낮은 목소리로 자조하듯 말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거 네 탓이라고 할 생각 없어. 형 부탁이든 뭐든, 네가 여기까지 와서 신경 쓸 필요는 없단 얘기야. 우리 이제… 그런 사이도 아니잖아.”
재유는 우주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마주 본 눈빛에 망설임이 스치더니 맥없이 다가와 우주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그래도 나 때문인 건 맞잖아. 이제 와 이런 말 하면 넌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넌 내 첫사랑이고, 처음 한 데이트도, 처음 마신 술도, 처음 잔 것도 너였어.
“내가 너한테 한 짓은 영영 잊지 못할 거야. 아마 평생 미안해하고 후회하면서 살겠지. 근데 넌 이렇게 살 필요 없어. 네가 받은 상처, 전부 내 탓으로 돌리고 나한테 다 쏟아 버리고 제발 속 좀 편하게 살아.”
첫사랑. 우주도 그랬다.
술은 전에도 마셔 본 적 있지만, 재유와 처음으로 함께한 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쨌다고. 이미 다 지난 일인데. 우주는 고개를 저으며 비소로 가득 찬 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어깨에 기댄 재유를 거칠게 밀쳐냈다.
“이제 와서 쉽게 말하지 마. 그게 가능했다면 나도 이 꼴로 살진 않았을 테니까.”
“…미안해. 아무것도 못 해 줘서…. 네가 이러면 나도 평범하겐 못 살아.”
“너, 나랑 마지막으로 봤을 때 기억 안 나? 넌 나보다 그 여자랑 네 애가 우선이었잖아. 그런데 지금 이러는 게 다 무슨 소용인데?”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우주의 손을 잡았다. 우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그리움이 느껴져 손까지는 차마 떨칠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마음과 달리 몸은 사소한 접촉에도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는데도,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자신들의 사이가 원망스러웠다.
“네가 곁에 없어도… 널 생각하고 있었어.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처음 만나고 같이 학교 다니고 같이 시간을 보냈던 날들이 하나같이 다 소중한 기억들이니까. 매일 우유를 보면서도 네가 떠올라. 잘 지내고 있을까, 날 어떻게 기억할까, 아직도 원망할까. 옛날 일 떠올리면서도 만약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지금은 어땠을까. 그런 가망 없는 망상들로 하루하루 괴롭기도 했어.”
“…….”
재유가 나에게 바라는 건 뭘까. 솔직한 고백에 일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주인의 이성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난 나 알아서 살 테니까 너도 걱정 말고 그 여자한테 돌아가. 내가 널 몰라? 그 여자랑 애 선택한 순간부터, 내가 죽든 말든 네 처자식 버리지 않을 사람이잖아 넌.”
우주는 결국 손마저 뿌리치며 건조하게 읊조렸다. 내쳐진 손을 보던 그의 눈에 체념이 섞여들었다.
“…인애. 장인애야. 그 여자.”
우주는 어이가 없어져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혀를 찼다.
“그 여자 이름이 뭐든, 내가 알고 싶을 것 같아?”
“…죽었어.”
“…….”
죽었다고.
전혀 뜻밖의 말에 순간 뇌가 정지됐다. 우주는 들이켰던 숨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로. 1년 좀 넘었어.”
담담하게 말하는 재유의 충격적인 소식에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우주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몇 발짝 서성이다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유리를 뚫고 들어온 햇빛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쨍하고 밝기만 해서 어쩐지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빛이었다. 그는 동공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무시한 채 눈을 크게 떴다.
죽었다. 죽었다. 그 여자가 죽었다…. 속으로 되뇌며 말의 의미를 치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머릿속 계산이 바쁘게 돌아갔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되돌아가 의미 없는 가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전역하자마자 재유를 찾아가 돌아와 달라는 애원을 거절당하고 나서 고작 4개월 뒤에 그 여자가 죽었다는 건가.
거짓말. 말도 안 돼.
만약 미국에 오지 않고 재유를 조금 더 늦게, 그러니까 그 여자가 죽은 후에 찾아갔더라면 우린 달라졌을까. 재유는 날 받아 줬을까. 그럼 지금쯤 재유와 그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될 수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생긴 모든 일들이 지랄맞고 심술궂은 신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너… 괜찮은 거야?”
의외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의심과 불안으로 혼란스러웠지만, 또 한 번 슬픈 일을 겪었을 재유에 대한 안타까움이 제일 먼저 비집고 나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런 일을 당한 건지. 괴로웠을 거다. 그래도 아이의 엄마였는데.
그럼 지금까지 홀로 아이를 키워 오고 있었다는 건가. 아까 아이를 맡겨 두고 여기 온 거라고 했었나.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였구나. 이제 아이 엄마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렇다면.
만약에….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인데. 별별 일을 다 겪고도 못 잊은 사람인데.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만약에, 그렇다면….
그 여자의 죽음에 달라졌을 재유의 인생이 마음 아팠지만, 한편으로 그 여자의 죽음이 자신에겐 기묘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색이 있다면 지금 내 마음은 어떤 빛을 띠고 있을까. 어떤 이의 죽음에 이런 감정을 품어도 되는 걸까.
어리석게도 원망으로 가득 찼던 재유를 향한 마음이 점차 다른 빛깔을 발하고 있었다.
재유의 인생에 굴곡이 너무 많았다. 남들은 평생을 살고도 다 못 겪을 불운들이 소년을 갓 벗어난 그의 삶을 흔들어 왔다. 내가 곁에서 방패막이 되어 지켜 주려던 삶이었는데. 장인애라는 여자가 제 것인 양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갔던 삶이었는데.
그럼, 만약에 그렇다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는 걸까.
“안 괜찮아.”
말문을 여는 데 주저하던 그가 목이 메인 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죽은 게? 아니면, 혼자 애를 키우는 게? 되묻고 싶었지만, 우주는 애써 말을 삼키고 재유의 얼굴을 살폈다. 어딘지 불편하고 껄끄러운 기색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고, 다시 살아올 수도 없으니까.”
우주는 전역한 뒤 무작정 찾아갔던 때 만났던 재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 그 여자와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재유는 크게 변화된 건 없어 보였다. 행복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못 잊은 거야?”
그 여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익숙한 질투가 고개를 비집고 나왔다. 3년은 짧지만 정들기는 충분한 시간이다. 두 사람을 엮어 준 핏줄도 만들어 놓았으니 그리운 마음까진 어쩔 수 없는 건가.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 여자와 함께 살던 재유의 모습은 우주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재유가 여자와 함께 아이의 옷을 고르고, 아이의 재롱을 보며 웃고, 유원지에 놀러 가서 사진을 찍고, 같은 침대를 쓰며 끌어안는 모습 따위가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떠올라 시도 때도 없이 우주를 괴롭혀 왔다.
괴로운 환상의 끝에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재유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자신을 향해 악랄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이미 죽은 지 1년이나 지났다는데.
“애가 엄마 없이 커야 하니까. 그게 안타까울 뿐이야.”
재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버석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안도한 건지, 불안한 건지 모를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유는 굳었던 표정을 털어 버리고 고개를 들어 우주를 바라보았다. 눈썹이 아래로 쳐져 움찔거리는 걸 손으로 끌어 올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안 괜찮은 건 너 때문이야.”
아이에 대한 걸 말할 줄 알았는데, 재유가 화제를 돌렸다. 우주는 당혹감이 스치며 우물쭈물했다.
“내가… 왜.”
“아까 말했잖아. 너 이런 모습 보고 돌아가면 어떻게 맘 편히 살 수 있겠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제발 말해 줘.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으니까.”
간절한 애원이 묻어난 얼굴이었다.
어제 퍼마신 술 때문인지 건조한 입속이 물을 찾고 있었다. 혀를 말아 입천장을 쓸었더니 마른침이 목 안으로 넘어갔다.
“그게 왜 중요해? 아직 나한테… 감정이 남은 거야?”
우주의 얼굴에 근본적인 물음표가 떠올랐다. 형의 부탁이 있었다지만 아이를 맡겨 두고 여기까지 오는 게 쉬웠을까. 내 소식 들은 후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다는 건 사실일까.
왜.
***
재유의 가느다란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안타까운 듯한 헛웃음이 흘렀다.
“감정이… 없을 수가 없잖아.”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불현듯 강변에서 처음 ‘좋아한다’ 말하던 재유를 마주한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가슴 속에 조심스러운 희망이 삐죽 고개를 들고 있었다.
꼬르륵-
난데없이 분위기를 깨는 우주의 배곯은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우주는 느닷없이 미칠 듯한 허기를 느꼈다. 요란한 소리가 배 속에서 성대하게 울리고 있었다.
우주는 재유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배를 움켜쥔 채 상체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강하게 식욕을 느껴 본 적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동안은 술만 먹어 대서 뭘 먹는다는 걸 제대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는데.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재유는 우주를 소파로 끌고 와 어깨를 밀어 자리에 앉혔다.
“잠깐 앉아 있어.”
재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살피더니 손을 들어 우주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가려졌던 커다란 눈이 재유 앞에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
“…….”
잠시간 시선이 얽혔다. 흐읍, 숨을 들이켠 재유는 입술을 말아 넣은 채 다시 얼굴을 붉혔다. 가슴에 들불 같은 통증이 번졌다.
몇 번 헛기침을 한 재유는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연 그가 안에 든 내용물을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생수와 맥주, 보드카, 먹다 남은 브리 치즈뿐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번엔 선반을 뒤졌다. 여러 종류의 술들뿐, 먹을 거라곤 식빵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너 좀 자고 있어. 이리 와.”
재유는 못마땅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침대가 보이는 방으로 우주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우주는 잠시 저항하듯 멈칫했지만, 등을 굽힌 채 고분고분 따라 들어갔다. 커튼을 닫아 놔서 방은 어둑했다.
재유가 손을 붙잡은 채 침대로 향하는데, 발에 뭔가 밟혔는지 자세가 기우뚱거렸다.
“…….”
“…….”
재유가 발에 채인 걸 주워 올렸다. 한눈에 봐도 우주의 사이즈가 아닌 빨간색 티셔츠였다. 우주는 멈춰선 재유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누구 올 사람 있어?”
“…신경 쓸 것 없어.”
잠깐의 침묵이 돌았다. 애써 말을 하지 않아도 재유는 상황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부엌에는 술뿐이고 침실에는 다른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결국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입술을 꾹 눌러 닫은 우주는 귓가가 화끈거려 섣불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재유는 시선을 피하는 우주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뭘 물으려는 기색도 없이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어디 가. 가지 마….”
우주는 저도 모르게 팔을 붙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재유는 팔에 얹힌 손을 슬며시 물리쳤다.
“안 가니까 걱정 마. 오다가 한인마트 봤는데, 먹을 것 좀 사 올게. 너 밥 먹어야 돼.”
“그럼 나도 같이 가.”
“금방 갔다 올게. 잠깐만 쉬고 있어.”
재유는 일어서려는 우주를 한사코 침대로 떠밀며 침착하게 종용했다.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집 좀 치워 둘걸. 방탕하게 생활한 대가가 이런 거였나. 우주는 자신을 비웃었다.
“아예 가는 거… 아니지?”
말끝에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그렇다니까.”
재유는 우주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고 손을 거두었다. 뒤돌아 방을 나서는 그의 모습에 유난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슬로모션 같은, 기이한 장면이었다. 조용하게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아 마음속에 불안과 동요가 일었다. 이제라도 붙잡아야 되나.
손을 들어 재유가 만진 볼에 가져다 댔다. 잠깐 스쳤던 손길에도 뺨에만 체온이 올라간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뒤늦게 일어서서 재유를 쫓는데,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주는 다시 한번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정말 재유가, 충청도에서 살던 재유가, 아이가 생겼다며 날 떠났던 재유가, 15시간 걸려 비행기 타고 내가 사는 집으로 온 게 맞는 건가. 날 보려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어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아직도 술기운이 남은 건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재유가 왔는데 이대로 잠들기는 무리였다. 술을 좀 더 먹어 볼까. 그러면 마음이 좀 진정되려나.
우주는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듯 도리질을 치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며 앉아 있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잔뜩 인상을 쓰며 아파트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재유가 건물 밖으로 나와 도보를 걷고 있었다. 좌우를 살피며 방향을 가늠하는 듯했다. 차가 뜸해지길 기다리며 길을 건너고 왼쪽으로 걸어갔다. 우주가 알기로도 한인마트가 있는 길이었다.
자신은 늘 늦은 밤에만 다녔던 거리를, 환한 햇살을 받은 재유가 종종걸음으로 걷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재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가에 버티고 있던 우주는 거실로 향했다. 재유가 두고 간 가방이 보였다. 학교 때 메고 다녔던 책가방과 비슷한 크기였다.
태평양을 건너왔는데 흔한 캐리어는커녕 덜렁 백팩이라니. 손에 들어 보니 무게도 단출했다. 옷 몇 벌이 짐의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럼 떠날 날도 얼마 안 남은 건가.
우주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바닥에 나뒹구는 빈 술병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옷가지도 주워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허기가 지고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미국에 오고서 처음으로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었고, 하고 있었다. 대충 집을 치운 뒤 냄새나는 옷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
재유가 마트에 다녀왔을 때,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났다. 집 안을 둘러보니 나가기 전과는 좀 달라져 있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들과 술병들, 쓰레기들이 말끔히 정리돼 있었고, 얼핏 보인 침실엔 시트도 새로 씌워져 있었다. 그새 청소라도 한 건가.
재유는 비싼 물가에 혀를 내두르며 한인마트에서 사 온 물건들을 묵묵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기와 달걀, 채소들을 냉장고에 넣고 선반에 놓인 술병들을 싱크대 안쪽에 넣은 뒤 쌀과 김, 통조림, 라면들로 채워 넣었다.
재유는 아까 그의 방에서 봤던 다른 사람의 흔적을 떠올리며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낯선 뉴욕까지 오면서 그동안 그가 아무와도 자지 않았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증거들이 눈앞에 보이자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데 그에게 왜 그랬냐고 투정하며 따질 수는 없었다. 내 주제가 그럴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우린 헤어진 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쌀을 씻어 안치는 동안 우주가 하반신에 커다란 타올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이제 보니 전보다 야위고 근육도 좀 빠진 것 같았다. 집 곳곳에 있던 술병들로 보아 염우혁의 말대로 술에 절어 살긴 했나 보다.
우주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잠자리 상대를 찾아 이곳에 데려오는 걸까. 어떻게 하면 우주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어느 것 하나 시원스레 매듭짓지 못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재유는 우주가 다가오는데도 그저 말없이 콩나물을 씻어 손질하는 데 열중했다.
“밥하는 거야?”
“너 배고프잖아. 잠깐만 기다려.”
“참, 거기 마트 비싸지. 한국이랑 비교하면…. 얼마 들었어? 내가….”
“필요 없어. 그냥 둬.”
지갑을 찾으려던 우주가 멈칫하며 재유를 응시했다. 실수한 건가. 기분을 상하게 했나.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제스처로 다가가야 재유와의 어색함을 떨칠 수 있을까. 둘 사이에 떠도는 공기가 제법 까다로웠다.
재유는 콩나물 다듬는 데 집중하는 척을 했고, 우주는 그 모습에 전전긍긍했다. 술은 이미 다 깼지만, 아직 이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주는 몸이 덜 마른 상태였다는 걸 깨닫고 일단 뭐라도 걸칠 생각으로 걸음을 돌렸다.
방에 들어가 머리를 털어 말리고 옷장을 여는데, 하나같이 우중충해 뵈는 게 눈에 드는 옷이 없었다. 와중에 고르고 골라 짙은 갈색 니트와 검은색 면바지를 꺼내 입었다.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니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면도 좀 하고 나올걸. 재유가 들어오는 소리에 급하게 샤워를 마무리하는 바람에 물만 묻히고 나온 꼴이었다. 덥수룩한 머리도 신경이 거슬렸지만 하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재유는 프라이팬을 꺼내 새로운 요리를 하는 듯했다. 우주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주방 가까운 데 놓고 앉아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재유도 눈치챘는지 슬쩍 돌아보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원래도 손이 빠르고 요리를 잘했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는 동안 레벨이 오른 건지 기민한 동작에 낭비가 없었다.
삭막했던 아파트 안에 기름 냄새가 퍼지고, 계란 부치는 소리가 도시의 소음과 은은하게 어우러졌다.
프라이팬에는 계란옷을 입힌 소시지가 구워지고 있었다. 요리하는 재유의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지. 그리운 감회가 슬프게 떠올랐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이와 단둘이 살아왔을 재유의 생활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제대로 상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떤 집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이는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의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재유가 목이 말랐는지 소시지를 뒤집다 말고 냉장고로 가서 물을 꺼내 마셨다. 급하게 마신 건지 생수병을 내려놓고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사레라도 들린 건가. 등을 두드려 줘야겠다고 반쯤 일어섰는데 큼큼, 목을 가다듬는 소리와 함께 기침 소리가 멈췄다. 우주는 들썩이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고 재유를 살폈다. 시선을 눈치챘는지 재유는 부자연스럽게 다시 프라이팬 앞으로 가서 남은 달걀물을 부은 다음 팬을 이리저리 굴리며 계란말이로 마무리했다.
다 부쳐낸 소시지들이 담긴 접시를 들고 그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한시도 떼지 않았던 우주의 눈과 마주치자 어색하게 눈을 내리깔고 식탁 가운데 접시를 놓았다.
“…….”
순간 우주는 쿵쿵대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재유를 그리워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를 원망하고 저주하며 허송세월했던 나날이 무색했다.
여전히 재유가 좋았다.
“어서 먹자. 반찬이 별로 없지만.”
“…아냐. 고마워.”
익숙하게 상을 차린 재유가 우주 앞에 마주 앉았다. 반찬은 포장용 김치와 콩나물국, 소시지부침, 김이 전부였지만 따뜻한 재유의 밥상이었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으려니 설핏 웃음이 났다.
“넌 진짜… 언제 어디서든 나한테 밥을 해 먹이는구나.”
“…내가 해 줄 게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재유는 아직도 사레들린 여파가 남아 있는지 얼굴이 벌건 채 물을 따라 국그릇 옆에 놔주고 머쓱하게 손으로 코를 쓸어내렸다. 우주는 곧바로 수저를 들어 밥 한술과 국물을 떠먹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더없이 훌륭한 식사였다.
군대에 면회를 오면서도 재유는 직접 만든 도시락을 싸 왔었다. 그때도 분위기는 살벌했지만, 밥을 먹고 나서 관계를 회복했다.
침묵이 깔린 식탁이라도, 같은 반찬을 두고 마주 앉아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적어도 최소한의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자신들처럼 헤어진 연인들이라면. 재유와 밥을 먹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한때는 나 혼자만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재유가 만들어 준 밥상이 그걸 일깨워 줬다.
“밥 더 줄까?”
정신없이 먹어 치우자 벌써 한 공기를 다 비운 상태였다. 우주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없이 그릇을 내밀었다. 재유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그릇을 챙겨 갓 지은 밥을 첫 공기만큼이나 수북이 퍼 담았다.
재유가 그릇을 들고 돌아서는데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 본데?”
이진교인가. 아차 싶어서 우주가 문을 열려고 일어서는데, 철컥,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교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
“야, 웬일로 이 시간에 일어나….”
진교는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낯설은 아파트 풍경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집 안에선 음식 냄새가 풍기고 우주가 멀쩡한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맞은편엔 우주에게 밥공기를 내밀며 어정쩡하게 동작을 멈춘 예쁘장한 남자가 있었다.
진교는 그 모습만 보더라도 둘 사이가 보통은 아니라는 걸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낯선 사람이 등장하자 재유는 잠시 움찔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빤히 바라보며 생김새를 관찰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반소매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코와 귀에 달린 큼직한 피어싱과 손목에 걸친 장신구들, 손등의 문신이 눈에 띄었다. 윤기 나는 단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모습이 세련되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우주는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로 둘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이진교. 여기서 만난 친구야… 친구.”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선약이 있는 줄은 몰랐네?”
진교는 제 소개는 해 주면서 같이 밥 먹는 남자의 이름은 대지 않는 우주가 미심쩍었다. 친구임을 강조하는 것도 수상했다.
재유도 진교가 심상치 않았다. 우주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고 익숙하게 아파트로 들어온 모양새가 하루 이틀 왕래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더구나 손에 든 포장 음식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나. 새로 생긴 애인인 건가. 심장이 철렁하며 불안이 엄습했다.
“점심시간이라 잠깐 들렀어. 근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너 여기 친구 없잖아.”
“한국에서 왔어. 진교야, 근데 나 밥 거의 다 먹었거든?”
“뭐 그런 것 같네.”
“저… 괜찮으시면 같이 드실래요? 반찬이 별로 없긴 한데….”
재유는 예의상 함께 식사를 권했다. 진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우주에게 밥을 먹게 한 낯선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차림은 수수했지만, 얼굴이 희고 곱상한 게 여리여리하고 정 가게 생긴 타입이었다. 우주가 저런 스타일을 좋아했었나. 호기심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 괜찮아요. 어차피 우주 밥 먹이려고 들른 거니까. 우주야. 이건 냉장고에 둘 테니까 나중에 데워서 먹어.”
진교는 평소보다 더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자리를 비켜 주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괜히 싱크대 쪽으로 가서 서랍을 열어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유치하지만, 제 나름의 영역 표시였다. 손가락에 라이터를 굴리며 식탁으로 다가간 진교는 경쾌한 톤으로 재유에게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오셨다니까 구경 잘하고 가세요. 우주야, 내일 또 올게.”
“…연락할게.”
진교는 걸음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복도를 몇 걸음 걷던 그는 발을 멈추고 문을 되돌아보았다. 남자를 보던 우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로소 깨달은 게 있었다. 그동안 우주가 방황했던 이유가 저 남자에게 있었다.
***
“…애인이니?”
진교가 나가고 난 후 잠시간 이어진 정적을 깨고 재유가 물었다.
“뭐? 아니야. 그냥 친구. 근처에 살고 같은 한국인이라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어.”
재유는 남자에 대한 걸 되물으려다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와 잔 적이 있는지, 침실에 있던 옷의 주인인 건지, 얼마나 자주 여기에 오는지, 정말 친구가 맞는 건지… 궁금한 것투성이지만, 굳이 헤집어서 알아낸다면 우주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럴 자격도 없었고.
“…….”
우주 역시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다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 어색한 공기를 흩어 버리려는 듯 더 열심히 밥을 먹었다.
“얼른 먹어. 할 일 있어.”
재유가 소시지를 베어 물던 우주를 보며 말했다.
“뭔데?”
“너 머리 있잖아. 좀 다듬어 주려고.”
“머리?”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스스로 잘라 왔던 머리카락이 엉성하게 자란 탓에 숱이 많은 머리가 더 산발처럼 보였나 보다. 우주는 민망한 듯 손끝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걱정 마. 내 딸 머리도 이제껏 직접 잘라 줬으니까.”
“아니… 걱정하는 건 아닌데. 괜찮아?”
“뭐가? 난 그냥, 머리카락에 가려서 얼굴이 잘 안 보이니까 해 주고 싶어서…. 어서 밥 마저 먹어.”
“어? 어….”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함께 식탁을 치우고 창가 옆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가서 필요한 준비를 했다. 우주는 식탁 의자를 당겨 앉았고, 가위와 빗, 분무기를 찾아온 재유는 커다란 타올을 우주의 목에 둘렀다.
“혹시 집게핀이나 바리깡 집에 있어?”
“아니.”
“그럼 좀 어설프더라도 이해해 줘.”
“괜찮아. 평소에도 그냥 내가 대충 잘랐었으니까.”
“왜? 미용실 같은 데 안 가고?”
“…….”
입을 닫은 우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동안 제대로 된 생활을 해 온 것 같지가 않아 마음이 무거운 재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최대한 밝게 말했다.
“괜찮아. 최대한 노력해 볼게.”
집게핀이 없으니 빗과 가위로 어떻게든 모양을 만들어 잘라 보기로 했다. 머리에 물을 뿌려 천천히 빗어 내리고 잘라 낼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앞머리는 눈과 코까지 덮을 정도였고, 옆머리는 귀를 가리고 있었으며 뒷머리는 목 아래께까지 자라 있었다. 전문가는 아니니 스타일을 내는 건 불가능했고, 도구도 부족했다. 그냥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만 자르기로 했다. 재유는 머리카락을 매만져 가며 조심스레 잘라 냈다.
우주는 미간을 좁히며 신중하게 가위질을 하는 재유의 모습을 거울로 훔쳐보았다. 서걱거리는 가위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고 얼굴과 목에 닿는 주춤거리는 손길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어떻게 지냈어?”
“대체복무 끝나고 바로 서울로 왔어. 지금은 한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그랬구나…. 자리 잡기 힘들었을 텐데. 고생했겠네.”
“지금은 적응도 됐고 괜찮아.”
“그럼 요리하는 거야?”
“응. 셰프가 한식 명장으로 유명한 사람이야. 그래서 들어간 거거든. 지금은 아직 잡일만 하는 수준이지만 진급하게 되면 더 많이 배울 수 있으니까. 그래도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도 많아.”
재유의 새로운 직업을 알게 된 우주는 제법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야무진 재유가 공장 일 말고 다른 창의적인 직업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길을 잘 찾아갔나 보다. 식당 일이 힘들긴 하겠지만, 요리만큼 재유와 잘 어울리는 직업도 찾기 힘들었다.
“대단하다. 나도 네가 일하는 식당에서 밥 먹어 보고 싶어.”
우주가 작은 소리로 읊조리자 재유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지 오면 되지. 제일 맛있는 걸로 추천해 줄게. 잠깐, 움직이지 마.”
귀 부분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던 재유가 숨을 참고 가위를 세워 끝부분을 다듬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진지한 모습이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재유의 얼굴을 만질 뻔했다.
“참… 애기 이름은 뭐야?”
“희지야. 한희지. 네 살이고, 지난달에 세 돌 지났어.”
“걱정되겠다. 누구한테 맡기고 왔어?”
“영선이. 영선이가 서울에서 자리 잡는 거 많이 도와줬어.”
“그랬구나. 아직도 친하게 지내나 보네.”
재유는 머리를 자르며 영선과 희지, 우유에 관해 시시콜콜한 일상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영선이를 새엄마로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처했는지, 희지가 주인집 할머니와 지내면서 트로트를 따라 부른다든지, 요즘 부쩍 살이 찐 우유를 다이어트 시키기 위해 새벽 산책을 시작했다든지 등등.
우주는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그의 일상을 그려 보았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상태에서 자신만의 노력으로 아이와 개를 보살피고, 친구와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가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원래 삶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과 달리 잘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 섭섭함도 있었다. 반면에 과거에 얽매여 지금의 삶을 망가뜨린 제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나도 희지랑 우유 보고 싶다. 영선이도 그렇고.”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우유 돌려보냈을 때… 많이 당황했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짐작도 가고.”
미국에 오기 전, 우유를 보면 재유가 떠오르는 게 고통스러워 충동적으로 한 선택이었다. 우유를 예뻐하는 아버지에게 소심하게 복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론 우유에 대한 것은 잊고 지냈었다.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우유가 있어서 나도 희지도 외롭지 않고, 우유 때문에 웃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우유도 너 많이 보고 싶을 거야.”
“…….”
“대신 앞으론 절대 우유 다른 곳으로 안 보낼 거야. 알지?”
“응….”
우유를 생각하면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야 우유를 잘 돌보고 있는 재유를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너… 언제 돌아가?”
“희지 때문에 빨리 가 봐야 해서… 휴가도 길게 못 냈어. 내일 밤 비행기로 가야 돼.”
“그렇게 빨리?”
앞머리를 짧게 다듬은 우주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재유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네가 한국으로 오면 되잖아. 안 그래?”
“내가 가면 다시 만나 줄 거야?”
“네가 나 보는 거 싫지 않으면….”
“…….”
재유는 다 잘라 낸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어 내리며 거울로 확인했다. 거울 속에 정면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오후 햇살이 두 사람 얼굴에 너울거렸고, 열린 창틈으로 실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살랑거렸다.
재유가 달라진 머리 모양에 슬며시 미소 짓자 우주도 따라 웃었다.
“좀 이상한가?”
“아니, 마음에 들어.”
우주가 잘린 머리 모양을 거울로 확인하며 명료하게 답했다. 눈가에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재유는 이 허전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갈 우주가 걱정되고 안쓰러웠다. 평생 남이 해 주는 밥만 먹고 살았을 텐데, 마음을 다친 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재유라면 시도조차 못 해 볼 일이었다.
“등 기대고 머리 좀 젖혀 봐. 면도해 줄게.”
“…면도?”
“내 말 들어. 어서.”
재유는 어깨를 살짝 밀쳐서 등받이에 기대게 하고 턱을 살짝 들어 면도하기 편하도록 우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결에 천장을 향하게 된 시야에 재유가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쉐이브 크림과 면도기를 찾으러 욕실로 향했다.
우주는 천장을 바라보며 재유가 내는 발소리와 소음을 아련하게 마음에 새겼다.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그에게 어떻게 내보여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쉐이브 크림 거의 다 떨어졌네? 이따 좀 사 와야겠다.”
“내가 살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너 가고 나면 어차피 내가 다 해야 할 것들이니까.”
“응….”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 주고 싶은 마음에 한 말이었지만, 재유는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그래도 우주 말이 맞았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니까, 그의 생활을 모두 살펴 주기엔 한계가 있었다.
재유는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걷어 낸 뒤 쉐이브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붙은 우주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라벤더 향에 가슴이 떨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계속… 미국에 있을 거야?”
우주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지만, 재유는 집중한 척을 하며 애써 눈을 피했다.
“글쎄. 만약 내가 한국으로 가면 나랑 같이 살아 줄 거야?”
우주가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지만, 듣는 이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진심을 가장한 것 같아 재유에겐 무겁게 다가왔다. 섣부른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된 마음으로 면도기를 손에 들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나도 잘 모르겠어. 천천히 생각해 볼게.”
날을 새것으로 교체한 면도기가 턱선을 따라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스극스극 소리가 거듭될 때마다 크림을 걷어 낸 우주의 민얼굴이 드러났다. 재유는 면도기를 물로 헹구어 가며 이번엔 턱에서 뺨을 향해 면도기를 움직였다.
“학교는 다닐 거지? 너, 공부하는 거 징징댔지만 사실 좋아하잖아.”
“…경영대학에 다니기로 약속하고 왔어.”
집안 얘기가 나오자 재유는 순간 움츠러들었다. 우주를 그리워한 마음과 별개로 아직도 그날 일은 눈앞에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아픈 기억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눈앞의 그가 중요했고 낭비할 시간이 없었기에 여상한 투로 되물었다.
“그런데?”
“왠지 하기 싫어서. 법대도 그럭저럭 다닐 만은 했는데, 하고 싶은 공부는 아니었어.”
“한 학기 다닌 게 전부였잖아. 그래도 뭔가를 하긴 해야지. 사진을 배워 보는 건 어때?”
“글쎄. 카메라 안 잡은 지 꽤 돼서. 누가 생각나 버리니까.”
“…….”
앞으로 우주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까. 내가 그 안에 개입할 자격이 있는 건가. 괜히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주제넘게 느껴졌다. 때가 되면 같이 살자고, 언젠가는 가족들에게 날 소개시킬 거라고, 나와 평생 함께할 거라고 했던 적도 있었는데. 새삼 지켜지지 않았던 옛 약속이 떠올라 입 안이 텁텁했다.
“난… 네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아까 너 처음 봤을 때 좀 놀랐어. 넌 머리숱도 많고 수염도 빨리 자라서 조금만 관리를 안 하면 산적처럼 보이잖아. 학교 땐 그렇게 깔끔하게 하고 다녔으면서.”
“그랬지….”
“지금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젊잖아. 아직 스물넷인데.”
“이렇게 잔소리하는 거 보니까 형한테 단단히 부탁받고 온 거 맞구나.”
“니네 형… 너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았어.”
“…….”
“가족들이랑은 연락 잘 안 해?”
면도는 거의 마무리되어 코밑을 다듬고 구레나룻의 라인을 잡아갔다. 가족 얘기가 나오자 우주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얼굴이 굳어졌다.
“잘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형님 말씀 들어 보니 아직 부모님은 너 학교 안 다니는지도 모른다던데. 걱정 돼, 우주야. 너 또 아버지랑 싸우고 집이랑 더 멀어질까 봐.”
“여기 온 후론 한국엔 한 번도 안 갔어. 형만 한 번 왔었고. 연락은 뭐… 다들 잘 지내고 계시겠지.”
“아버지랑은 그렇다 쳐도, 어머니랑 형은 좋아했잖아. 그리고 너 여기 집이나 생활비… 다 집에서 받는 거 아냐?”
조심조심 묻는 말투에 우주는 뜨끔했다.
어머니를 통해 돈을 받기는 하지만, 그저 되는대로 살아왔고 미래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허비하기 바빴었다. 다시 아버지 손에 한국으로 끌려간다고 해도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재유가 홀로 된 채 다시 나에게로 왔다. 나를 보겠다고 애까지 맡겨 두고 서울에서 뉴욕까지. 제대로 살라고 자신을 다그친다.
지금처럼 살아가다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점점 도태되어 헛되이 나이만 먹어가겠지. 재유의 기억 속엔 잊혀진 사람으로 남을 것이고. 그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재유 말대로 언제까지고 부모를 속여 가며 타국에서 돈과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혼자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버릴까.
순간 떠올린 청사진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재유 곁에 있는 자기의 모습은 늘 꿈에 그려 왔듯 자연스럽고 평온했다.
그럼 맨몸으로 한국에서 다시 시작한다? 아니… 그건 아니다. 우주는 부풀었던 꿈을 접어 넣었다.
재유도 어린 딸을 키우며 막 새로운 일을 배우고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있으면 짐만 될 뿐이었다. 이런 못난 꼴까지 보였는데, 재유에게 이 이상 초라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최소한 대학 졸업장이라도 딴 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나와 재유, 어머니와 형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괜찮아, 재유야. 다 정리될 거야.”
우주의 단호한 말에 재유도 더 이상 입을 대진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간섭을 해 버렸다.
재유는 수건에 물을 적시고 알맞게 짜내서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로션을 손바닥에 툭툭 덜어 내고 얼굴에 부드럽게 펴 발랐다.
멀끔해진 얼굴을 보자 문득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아까와는 다르게 선명해졌고, 짙은 이목구비와 각진 턱 아래로 곧게 뻗은 목선은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있잖아… 예전부터 너 면도 한번 해 주고 싶었어. 기회는 없었지만. 근데 머리나 수염이 길어도 나쁘진 않네. 여전히 멋있고.”
재유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잘게 웃었다.
“…….”
표정이 굳은 우주가 상체를 바로 세우고 재유를 보았다. 힘이 들어간 눈에 불씨가 피어올랐다.
아까부터 흐르던 묘한 기류가 저만 느끼는 것인지 의아했다. 재유도 저처럼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우주는 손을 뻗어 재유의 손목을 잡았다. 놀란 듯 팔을 움찔 떨었지만,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재유가 머리를 잘라 줄 때부터, 밥을 해 줬을 때부터, 아니,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손끝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면도를 해 주는 그를 보면서 오랜만에 인내의 감정을 느꼈다.
우주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재유의 뺨을 감쌌다. 그 바람에 면도 용품들이 떨어지고,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흩날렸다. 재유는 우주의 어깨를 저지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용서한 거야?”
재유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주의 눈빛을 빠르게 읽어 내려 애썼다.
“묻지 마. 이런 상황에서.”
우주가 고개를 기울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싫으면 안 해.”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
재유는 미안함과 고마움, 설렘과 안도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우주의 허리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미국에 가고자 일단 마음먹은 순간, 영선에게, 주인집 할머니에게, 식당 선배에게 주저 없이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있었다. 희지가 제일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우주를 보고 싶은 마음이 쉬이 떨쳐지진 않았다.
헤어지면서 많은 고통을 견뎌 왔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흘린 눈물도 많았는데, 단 이틀 동안만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도 되겠지.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우주가 망가져 가고 있다는데. 어디에서도 날 잊을 수 없다는데.
그동안 얼마나 자신을 채근하며 몰아세우고, 하루하루 버텨 내기 위해 애썼는지 그의 앞에서 투정을 부리고 위로도 받고 싶었다. 또, 그에게도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여기 온 목적이 그것이니까.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서기까지 3년이 걸렸다.
씁쓸한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장인애의 죽음이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면, 우주를 볼 꿈은 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뒷조사까지 해 가며 동생을 만나 달라던 염우혁이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었겠지.
‘우리가 다시 만난 모습을 내려다보며 인애 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너한테 전혀 미안하진 않아. 난 희지도, 우주도 다 곁에 두고 행복해질 거야. 그 사진을 찍고 우주 집으로 보낸 졸렬한 짓에 대해 단 한 마디 따져 묻지도 못하도록 일찍 떠나 버린 너에 대한 복수니까.’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고 있었다. 그동안은 애써 외면하려고도 했지만, 우주를 내 안에서 떼어 낸 채 살아갈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가 한국에 돌아오더라도, 설사 미국에 정착하게 되더라도, 앞으로는 순전히 그의 것이 된 채 살아갈 것이다. 재유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고 싶어.”
재유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촉촉해지려는 눈을 들어 옛 연인을 유혹했다. 따스하게 웃어 준 그가 재유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예전에 알던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던 맑은 눈빛이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타국이라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그런지 희지나 직장에 대한 걱정은 아득히 멀어졌다. 낯선 땅에서 헤매며 길을 찾아 이 아파트에 들어서고 우주를 본 순간, 이 영역은 오로지 둘만의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책임과 의무를 던져 놓은 이기적인 사람이고 싶었다.
“씻고 올게. 샤워한 지 24시간이 다 돼 가거든.”
“나도 같이 가.”
“너 아까 샤워했잖아.”
“시간 아까워.”
***
“다시 시작하자.”
엉덩이를 바짝 끌어당긴 우주가 아기를 다루듯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샤워를 하며 이미 달구어진 두 알몸이 소파 위에 끈적하게 접착한 상태였다.
“흐흣, 하고 있잖아.”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재유는 입이 벌어진 채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솔직함을 담은 시선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였던 기간 보다 사귀는 사이, 남자친구, 애인 등으로 정의할 수 있었던 시간이 곱절은 넘었다.
다시 시작, 이 말은 만남과 고백과 사랑을 처음부터 해 보자는 거였다. 이미 만나기는 했으니 지금은 고백의 순간이었다. 이후에는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그래도 되는 거야?”
이전의 배신과 이별이 그의 안에서 지워질 수 있을까.
“그래도 돼. 넌….”
아직 술기운에 젖어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라도 상관없었다. 재유는 단정하고 야무진 입매에서 나오는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거스를 수 없는 사람이니까.”
재유의 입가가 잘게 떨리며 숨소리가 멎었다.
우주는 그 모습이 못내 안쓰럽고 예쁘기만 해서 손가락으로 재유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재유가 아파트에 들어선 순간부터 우주는 모든 게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엉망인 몰골과 집안 꼴, 진교의 방문과 형에게 들었을 방탕한 생활이 재유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너무도 잘 알기에, 주인의 심경을 살피는 꼬리 내린 개처럼 몸을 사리고 눈치를 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이다. 먼 타국에서 이대로 살다가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렇게 되면 아버지한텐 최고의 복수가 될 테니 나쁘진 않겠다고 멍청하게 자위하며 몸과 마음을 죽여 간 채 살고 있었는데.
고작 스물넷 먹은 희멀건한 남자애가 뭐라고… 딴 여자랑 애까지 낳은 뻔뻔한 남자한테 다시금 가슴이 뛰는 건지.
“그러니까 이제부턴 나만 생각해. 네 인생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은 없어.”
“…….”
“대답 안 해 줄 거야?”
재유는 감격과 희열을 느끼며 잊혀졌던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허물어진 표정으로 뭔가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목이 메어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벅찬 마음으로 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칠 기미도 없이 계속 끄덕이는 얼굴을 보며 우주는 마치 기적을 마주한 것처럼 가슴 속이 찬란해졌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주 본 시선에선 안타까움과 절박함이 스몄다. 두 혀가 얽혀들었다. 우주가 유두를 손끝으로 살살 건드리자 재유의 숨이 잦아들었다. 욕실에서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페니스가 다시 움찔댔다.
목과 어깨를 입술로 핥고 빨아들이며 하얀 피부에 울혈을 만들었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재유를 반쯤 일으키고는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우주는 입속의 혀로 원을 그리며 젖꼭지를 굴렸다. 빈손은 아래로 내려가 고환을 슬그머니 쥔 채 무게를 가늠하듯 통통 튕겨 냈다.
“아….”
젤과 콘돔을 꺼내기 위해 탁상으로 손을 뻗었다. 재유의 다리를 활짝 벌려 무릎에 앉힌 뒤 손바닥에 윤활제를 짜 내고 두 개의 성기를 동시에 쥐어 아래위로 훑어 올렸다.
재유가 얼굴을 감싸 쥐고 발갛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물었다.
“너도, 읏… 좋은 거지?”
“으응… 미치겠다, 진짜.”
우주는 재유의 엉덩이를 더 바짝 끌어당기고 어깨에 입을 맞추며 강하게 빨아들였다. 손이 빨라질수록 비음이 섞인 재유의 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좀 더, 더 해 줘, 조르기도 했다.
우주는 어깨에 얹힌 열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엉덩이를 들어 무릎을 세우고 입구를 더듬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다른 손은 페니스를 쥔 채 귀두를 매만지고, 입술로는 젖꼭지를 깨물었다.
“아….”
재유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손가락을 늘릴 때마다 내벽이 꽉 차게 조여들고, 귀두에선 방울방울 물이 흘렀다. 젖꼭지가 음란한 혀에 적셔질 때마다 우주의 목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우주는 처음 관계할 때부터 잘했지만, 지금은 더 잘한다. 그 경험치가 자신과 쌓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작은 생채기를 냈지만, 다시 연이 이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재유는 안도했다.
짧으나마 몸을 겹치는 시간이 주어져 자신의 애욕을 풀어 놓으며 그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공허했던 마음을 채워 갔다.
“하아, 하아, 으읏…!”
“…이제 넣어도 돼?”
이런 점만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고 가도 될 텐데, 늘 재유의 의사를 묻고 살펴 가며 둘의 정욕이 평행을 이루고 나서야 제 욕망을 드러냈다.
“…내가, 해 볼래.”
“괜찮겠어?”
“응….”
우주가 콘돔을 뜯어 성기에 씌운 뒤 젤을 듬뿍 짜서 골고루 펴 발랐다. 굵고 커다란 그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스스로 조절하면서 넣다 보면 오히려 덜 아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팔걸이에 손을 짚고, 나머지 손으로 우주의 것을 쥔 채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면서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입구에 빠듯하게 밀어닥친 귀두가 중력에 의해 서서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넓은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읏, 다 들어온 것 같은데?”
우주는 수고했다는 듯이 등을 쓰다듬으며 턱에서 목을 따라 입을 맞췄다. 위에 올라타서 낑낑대는 게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재유의 안으로 들어왔다는 만족감이 너무나 황홀했다.
“좀만 더 내려가 봐.”
느낌상 이미 한참을 들어온 것 같았는데, 재유가 손을 뒤로 뻗어 확인하니 겨우 귀두 부분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쉬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찢어질 듯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비장한 표정으로 하반신에 잔뜩 힘을 주고 더 깊이 품어 보려 안간힘을 썼다.
“후우….”
“수고했어. 이제 움직여 볼래?”
“어. 흐읍, 잠깐만….”
재유로서는 한계치까지 넣었다고 생각했다. 무릎에 힘을 주고 쥐어짜듯 우주의 어깨를 붙든 채 나름대로 피스톤 운동이라는 걸 시작했다.
우주는 엉덩이와 허리를 감싸며 손에는 전혀 힘을 주지 않고 그저 재유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성기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제멋대로 흔들어 대며 마구 쑤셔 박고 싶어 애가 탔다. 그래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소심하게 깔짝이는 재유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되도록 오래, 천천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우주는 혀끝으로 입술의 모양을 따라 그리고, 재유의 입속에 혀를 넣어 마음껏 휘저었다. 눈을 감은 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손으로 성기를 쥐어 아래위로 훑어내니 성기를 끊어먹을 듯 입구를 조여 왔다. 아직 재유는 아파하는 것 같지만, 서서히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이 느껴져 만족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별로지. 읏… 내가 너무 못해서.”
“아니, 너무 좋아. 잘하고 있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이자 재유의 신음이 가느다랗게 흘렀다. 미간을 찡그린 상기된 얼굴이 말도 안 되게 관능적이었다. 평소의 단정한 얼굴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입이 벌어진 채 자신의 눈을 애타게 바라보는 재유를 보자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를 받치며 거들어 주니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우주는 재유의 가슴에 뺨을 맞대고 빠르게 뛰는 고동 소리를 귓속에 담았다.
“읏, 흐으… 윽!”
따뜻하고 축축한 그의 안으로 점점 깊이 빨려 들어갔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한 우주는 숨을 크게 내쉰 뒤 엉덩이를 꼭 움켜쥐고 조금 더 아래로 꽂아 넣었다. 재유의 하반신이 뿌리 끝까지 박혀 내려왔다.
“아악…! 아프, 흐윽….”
비명을 지르며 바들바들 떠는 재유를 그 자세 그대로 안아 들어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재유를 눕히고 페니스를 빼내자 엉덩이 사이가 먹음직스럽게 움찔대고 있었다.
재유는 방금 깊게 찔러 넣었던 충격으로 아랫도리가 저릿저릿하고 엉덩이가 쪼개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우주의 성기가 그렇게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는데, 자신은 수준에 안 맞게 그 위에서 깔짝대기만 했던 것이다.
아랫배를 만져 보니 아직도 우주의 것이 들어와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아픔이 느껴졌다. 우주는 완전히 흥분한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삽입하지 않고 재유의 페니스를 손에 쥐며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무릎과 종아리, 발목으로 내려가다 다시 안쪽 허벅지로 올라와 연한 속살을 깊이 빨아들였다.
“하으….”
이윽고 커다란 손에 잡힌 재유의 성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회음부까지 다다른 혀가 예민하게 질척거리자 아픔만이 느껴지던 입구가 다시 조여들었다.
“할게.”
우주는 무릎을 잡은 채 다리를 벌리고 사타구니 가까이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입구에 귀두를 맞물리는가 싶더니 틈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박아 올렸다. 배가 꿰뚫리는 아픔이 온몸을 강타했다.
“괜찮아?”
“윽, 너무, 오랜만이라, 진짜… 아파. 흐으으….”
“살살 할까?”
“아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나도 하고 싶어. 너랑… 하고 싶었어.”
우주는 페니스를 귀두 언저리까지 빼고서 다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고통에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그와 제대로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에 왠지 모를 애틋함이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하는.
불현듯 첫 삽입을 했던 별장이 떠올랐다. 그때도 죽을 듯이 아팠지만, 끝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인 건 마찬가지다. 3년 만에 만났지만, 우주라면 내 모든 허물도, 못난 자격지심도, 보잘것없는 현실도 낱낱이 드러내며 순수한 욕망을 내비칠 수 있는 상대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주는 허벅지를 매만지며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제 성기가 입구를 들락거리는 모습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입을 벌린 채 허덕거리는 얼굴도, 빨갛게 솟은 젖꼭지도, 봉긋이 선 채 머리를 까딱이는 페니스도, 옆구리에 박힌 점들마저 각자의 색기를 뿜어내며 우주를 흥분시켰다.
“크윽…… 읏, 윽…. 핫….”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속도가 빨라지면서 재유의 몸은 완전히 우주의 컨트롤에 속박되어버렸다. 무자비하게 찔러 대는 성기가 고집스럽게 내벽을 긁어 대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황홀감에 휩싸였다.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더니 우주가 깍지를 껴 오며 상체를 숙였다. 우주는 체취를 확인하듯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뺨과 입술을 비벼 댔다.
“재유야. 너무, 보고 싶었어. 매일매일….”
흥분에 찬 목소리가 독백처럼 흩어졌다.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 건지 재유의 허리를 안아 일으켜 세우고 입술을 덮었다.
꽉 붙들린 채 고정된 허리 아래로 무지막지한 힘을 실을 성기가 박혀 올라왔다. 우주는 성기를 차올리는 동시에 재유의 하체를 내리꽂으며 거칠게 움직였다. 목을 끌어안은 채 등과 어깨를 사납게 할퀴어 댔지만, 목구멍까지 압박감이 느껴져 손이 헛돌고 있었다.
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흘렀다. 침을 닦아 낼 정신머리도, 우주를 말릴 기력도 없이 안에서 느껴지는 짜릿짜릿한 감각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성기가 우주의 배를 찰싹찰싹 때려가며 젖어 들었고, 목구멍까지 쥐어짠 신음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흑, 염우주… 흣…!”
한데 몸을 겹치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의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었다. 재유는 제 몸에 합체라도 시키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우주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구멍 속을 채워 넣어도 한참이나 모자랐다.
“재유야… 약속해. 이제 나 안 떠난다고.”
“응… 읍, 약속, 할게…! 흐윽….”
허리를 멈춘 그가 입술을 덮어 깊고 깊게 키스했다.
내일 가 버리고 나면 언제쯤 우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아무런 방해와 편견 없이 평범하게 그의 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감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재유는 자신이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붙들고 있던 우주의 어깨를 밀어뜨리고 팔을 뒤로 짚으며 일어나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텅 빈 내벽이 다물어지지 않고 젤과 뒤섞인 애액을 쏟아냈다. 그 감각에 소름이 돋아 허벅지가 절로 오므라들었지만,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엎드린 자세로 얼굴을 가렸다.
재유가 스스로 바꾼 체위로 곧장 다가온 우주는 엉덩이를 바짝 끌어당겼다. 한계에 이른 제 성기를 재유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쌓아 왔던 감정을 토해 내듯 허리를 몰아붙였다.
“으윽, 천천히… 흡!”
그가 느꼈을 그리움과 외로움, 애정과 원망, 갈망과 바람 등이 재유의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지금은 맞닿아 있는 우주의 몸이 어느샌가 신기루처럼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닐까 불안하고 두렵기만 했다.
해가 기울어 가고 도시의 불빛들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시시각각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몸과 마음이 그의 곁에 있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 우주의 움직임이 거칠어질수록 재유는 우는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고 시트를 쥐어뜯으며 버티려고 애썼다.
그의 손이 배를 감싸 안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등에 밀착된 가슴이 한없이 뜨겁고 포근했다. 우주는 가슴과 배를 어루만지며 뒷덜미와 어깨에 쉬지 않고 입을 맞췄다. 다른 손은 페니스를 꼭 쥐고는 위를 향해 밀어 올렸다.
몸을 꿰뚫듯 안에 박힌 성기가 절정을 향해 사정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마침내 재유의 것에서 희멀건 액체가 흩뿌려졌다.
“하앗…! 으으으, 으응….”
“흐으….”
욕실에 이어 두 번째 사정이었다. 그와 섹스하는 날이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자신을 내던진 채 육체관계에 몰두했던 게 얼마 만인지.
헤어진 후로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긴커녕 자위조차 제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우주와 섹스했던 때를 떠올리며 앞으로의 인생에서 다시는 이렇게 애정을 담은 손길을 느껴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순간은 또 재유에게 한 번 찾아왔고, 그 감각은 여전히 우주를 통한 것이었다.
지금의 한재유는 서울의 한식당에서 잡일을 도맡아 하는 말단 조리사도, 네 살 아이의 아빠도, 운이라고는 쥐뿔도 없이 이리저리 채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남자도 아니었다. 자신을 못 잊어서 삶까지 망가질 뻔했던 가련한 남자에게는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재유 역시 그런 상대방을 여전히 사랑하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우주는 이제 더 이상 지나간 옛사랑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 품에 안겨 있는 이 시간이 흘러가는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우주도 곧 재유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사정했다. 재유는 간신히 침을 삼키며 우주의 두 손을 잡고 자신의 배 위로 감싸 안았다. 두 사람 모두 체력과 감정 소모가 심해져 금세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우주는 재유를 끌어안은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가쁜 숨소리가 한참이나 방 안을 떠돌았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자 해가 완전히 지고 퇴근길의 번잡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재유야.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재유는 몸을 돌려 우주를 보았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주가 재유의 뺨에 이마를 대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배어나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가지 마.”
“…….”
“가지 마, 재유야. 여기서 나랑 살자.”
“…내가 옆에 없더라도, 난 항상 네 거야.”
재유가 우주의 얼굴을 붙잡아 올리고 뺨에 입 맞추며 말했다.
“내가 널 어떻게 보내니….”
난 널 여기 혼자 두고 어떻게 떠나야 할까. 삼켜진 말이 불씨가 된 듯 목이 막히고 가슴이 타들어 갔다. 재유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호흡을 갈무리도 못 한 채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우주의 얼굴에서 입가가 슬며시 휘어졌다.
“기다려… 꼭 돌아갈 테니까.”
우주의 억눌린 목소리가 분명하게 말했다.
***
다음 날, 공항에서 이별한 후 두 사람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다시 만날 때까지 연락하지 않고 1년에 단 두 번, 서로의 생일인 1월과 2월에 엽서로만 안부를 물었다. 헤어지기 전에 우주가 그렇게 하길 원했고, 재유도 받아들였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갔다.
〈3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