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네가 없는 곳
* * *
2002년 10월.
우주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따스한 햇살이 첩첩이 쌓인 산마루를 포근히 덮고, 살랑대는 바람이 만개한 가을꽃들과 활엽수들을 간지럽혔다.
부푼 마음으로 떠들썩한 동기들 사이에 굳은 표정의 우주가 섞여 있었다. 부대를 나서자 전역을 축하하려는 동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읍내로 향하는데, 우주는 홀로 동떨어져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형이 있는 서울엘 갈까, 그냥 집으로 갈까 잠시 망설였으나 졸업반인 형을 귀찮게 하는 게 싫어 장운행 표를 끊고 버스에 올랐다.
2년 만에 가는 집이었다. 휴가 땐 무조건 형의 아파트에서 지냈었다. 어머니가 서운해했지만 1년이 지난 시점부터는 어머니도 서울에서 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우주는 복잡미묘한 심정이 되었다. 입대 초반만 해도 두 번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재유와 헤어지고 나니 갈 곳이 없었다.
결국에는 굴복하고 발아래로 들어온 아들을 아버지는 어떤 얼굴을 하며 최종 선고를 내릴까.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사회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 견딜 뿐이었다.
어느덧 버스 밖 풍경이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릴 적 학교 소풍으로 갔던 산과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 재유와 함께 걷던 산책길과 중앙교, 시내 곳곳에 아직 남아 있는 간판들.
문득 기억들이 떠올라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버스가 도착하고 터미널에 내린 순간부터 재유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함께 빵을 사 먹던 매점, 같이 들락거렸던 화장실, 버스 시간을 확인하던 매표소까지, 곳곳에 그와 머물렀던 흔적들이 있었다.
우주는 곧장 택시를 탈까 하다가 발걸음을 돌려 학교로 향했다. 걷는 내내 재유가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교문 앞 떡볶이집에 다다르자 가슴이 잘근잘근 저몄다. 3학년 입학식 날 떡볶이를 먹으며 처음으로 웃어 주었던 게 떠올라 차마 교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학교 풍경을 보면 마음이 더 못 견딜 게 분명했다.
***
재유는 졸려서 칭얼거리는 16개월 어린 딸을 어르고 달래며 밤잠을 재우려 애썼다. 얼마 전까지는 9시에 꼬박꼬박 잠드는가 싶더니 요 며칠 사이엔 10시가 넘었는데도 아기는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이앓이를 하거나 성장통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하는데,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어 재유는 그저 아이의 비위를 맞추며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딸, 이제 그만 자야지. 그래야 내일 또 어린이집 가서 신나게 놀지, 안 그래? 아빠가 노래 불러 줄게.”
오늘도 12시간 가까이 공장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터라 피로가 쌓였지만 돌아와서 희지를 씻기고 재우는 일은 재유의 몫이었다.
아기는 분명 잠이 쏟아지는데 자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이럴 땐 귀엽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재유는 반쯤 감긴 눈으로 다시 아이를 얼렀다.
한참을 눈을 반짝이며 옹알이를 하던 아이는 마침내 잠들 자리를 잡고 아빠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재유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눈꺼풀을 닫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티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은 언제나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다.
하루 중 이 시간이 그나마 숨이 트였다. 육아는 대개 힘들고 조잡스러운 일투성이라 기저귀를 갈고 밥 수발을 하고 허리를 굽히며 아이를 쫓아다니다 보면, 애들은 잘 때가 제일 예쁘다는 어른들 말에 절로 공감이 갔다.
그래도 희지가 쑥쑥 자라는 걸 보는 건 그가 가진 유일한 낙이었다. 자지러지듯 꺄르르 웃을 때, 알 수 없는 외계어로 옹알이를 할 때, 통통통 달려와 품에 안길 땐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아찔한 심정이었다. 먹는 게 시원찮은 아기가 드물게 밥을 곧잘 먹어 배가 동그래졌을 땐 사랑스러운 마음이 부풀어 올라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재유는 잠든 아이의 이불을 덮어 주고 까치발로 방을 나와 소리 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주방 겸 거실로 쓰는 공간에는 참기름 냄새로 가득 찼다. 인애가 내일 아침 아이에게 먹일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이곳에 이사 온 지도 2년이 다 되어 갔다. 새로 들어간 공장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처음 갔을 땐 그전 공장에서의 추문이 알게 모르게 퍼져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애 아빠라는 게 알려지고 나선 떠들던 입들이 쏙 들어갔다.
일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 케첩 만드는 일은 자동차 부품 공장에 비하면 노동 강도가 열 배는 셌다. 출근하자마자 토마토 상자와 설탕 포대를 수도 없이 나르고 온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엄청나게 큰 소스 통에 재료들을 들이부은 후 케첩이 만들어지기까지 젓고 또 저어야 했기 때문에 한시도 몸을 가만둘 틈이 없었다.
덕분에 없던 체력이 더 바닥나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육아까지 하면 더더욱 녹초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몸을 움직여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과거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들었어?”
“응.”
인애는 중불로 국을 졸이고 설거지를 하려는 재유를 막아서며 잠깐 앉아 보라고 눈짓을 했다. 재유는 말없이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앉은 인애는 식탁에 놓인 물통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벌컥벌컥 마신 뒤 컵을 내려놓고 재유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벼르고 벼르던 말을 꺼내려는 듯했다. 지친 얼굴로 인애의 말을 기다리는데,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너, 이제 나랑 안 잘 거야?”
“뭐…?”
“이제 나랑 잠자리 안 할 거냐고.”
“…….”
재유는 어안이 벙벙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인애가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맞받아쳤다.
“너랑 나 부부 아냐? 결혼식만 안 했지, 혼인신고도 했고 애도 있는데 왜 한 번도 안 해?”
“그야, 네 몸에 부담될까 봐….”
“개소리하지 마. 애 낳은 지 2년이 다 돼 가는데 언제까지 안 할 건데? 날 그렇게 아끼냐?”
“너 낮에도 빵집에 일하러 다니잖아. 희지 어린이집 끝나면 나 올 때까지 애 보면서 집안일도 해야 하니까.”
“핑계 좀 대지 마. 나랑 하기 싫잖아, 너.”
재유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정곡을 찔렸다. 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 애초에 인애와 할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꼭 해야 하나 싶었다.
“지금은 애도 어리고 우리가 할 일도 많으니까. 그리고 공간도 없잖아. 방도 하나뿐인데 희지도 있고.”
“하기 싫다는 거야?”
“…어느 정도 맞아.”
인애는 막상 입으로 듣고 나니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비식 웃었다. 정적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선 익숙한 침묵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애가 임신했다며 날 찾아왔을 때 이런 미래를 예상했다면 마음을 고쳐먹었을까.
당시 재유는 인애에게 현실적인 얘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 모아 둔 돈은커녕 빚까지 떠안은 신세이며 곧 장운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네가 혼자 키운다면 머물 셋방을 마련해 주고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겠다고.
하지만 인애는 단호했다. 그녀 역시 장운에 미련이 없었고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혼자 애를 키우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 출산을 하면 함께 빚을 갚으며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울었었다. 지금껏 인애가 우는 모습을 보였던 건 그때가 유일했다.
재유는 그 이후로 마음 한쪽을 아예 꺼뜨렸다. 우주에게 이별을 고하고 인애와 아이의 보호자로 자신의 인생 궤도를 수정했다.
부모와 사이가 안 좋다는 인애의 말은 사실인지, 재유는 처가 구경도 못 하고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급하게 혼인신고를 했다. 인애를 데리고 산부인과 검진을 다니고 출산 때도 곁을 지켰으며 생활비를 벌며 산후조리와 집안일, 신생아 육아까지 코피를 흘려 가면서도 불평 없이 할 일을 다 했다.
그래서 오해의 씨앗이 심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완전히 가족이 되었으니 남편으로서 아내인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어린 나이에 애 엄마가 된 인애에게 연민도 있고 같이 육아를 하다 보니 동료애 비슷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잘 느끼지 못했다. 하다못해 동창이라는 배경에서 생긴 우정도 우러나오질 않았다. 재유는 그녀와 흔한 스킨십 한 번 하지 않았고, 공장에 나가서도 꼭 필요한 연락 외엔 하지 않았으며 집에서도 육아에 필요한 얘기만 했다.
“그럼 나랑은 평생 안 할 거야?”
“그게 너한텐… 중요한 일이니?”
“그럼 안 중요해, 부분데?”
“…생각해 볼게.”
“뭐, 생각? 너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 있다. 너 나랑 애 땜에 억지로 사는 거냐?”
그러게 왜 나랑 같이 살겠다고 고생을 자처했어? 재유는 속으로 한 생각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해. 희지 깨면 어떡해.”
인애와 자지 않는 건 그녀에 대한 시위도 아니고 우주에 대한 죄책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가 너무 고단해 매일이 피곤의 연속이라 성욕은커녕 식욕도 없었다. 게다가 단칸방에서 애를 두고 무슨 잠자리를 하나. 그러다 둘째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만약 형편이 나아지고 방 개수를 늘리면 애정이 생기고 몸을 섞게 될 날이 있을까. 하지만 당장 그럴 일은 없기에 인애와의 부부관계는 재유로서는 논외였다.
“대체복무 끝나고 다른 일 하게 되면 집도 좀 넓은 데로 옮길 수 있을 거야. 그때 다시 얘기하자.”
“뭐? 그럼 1년도 더 넘게 이 문제를 끌고 가잔 얘기야?”
언성이 높아진 탓에 기어이 희지가 울음을 터트리며 잠에서 깼다. 재유는 작게 한숨을 쉬며 “미안해.” 중얼거리곤 다시 아이를 재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인애는 재유를 노려보며 눈에 맺힌 것을 손으로 아무렇게나 벅벅 닦아 냈다.
***
공장 일을 마친 재유는 대기하고 있던 통근 버스에 올라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 주요 거점들을 통과해 출퇴근 시간에 맞춰 하루 4번 운행하는 게 전부인 18인승 버스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차로 출퇴근하기 때문에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적었다.
종종 카풀을 권하는 직원이 있긴 했지만 입사 초반에 돌았던 소문 때문에 혹시나 민폐를 끼칠까 봐 거절해 왔었다. 그래도 그전 공장보다는 직원들과 꽤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이가 있다는 공감대 때문이었다.
애기 주라며 과일 봉지를 건네는 아주머니들이나 이것저것 자녀 교육에 대해 조언해 주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재유는 어린데도 성실하게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딱한 사정을 가진 직원이라는 이미지가 생긴 듯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나면 집에 돌아가서 희지와 뭘 하며 놀아 줄지, 무슨 간식을 만들어 줄지, 생활비는 어떻게 모아야 할지, 퇴사 후 어떤 직장엘 들어가야 안정적으로 3인 가정을 꾸릴 수 있을지 등등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 갔다.
버스는 집이 제일 가까운 정류장인 우체국 사거리에 도착했다. 재유는 가방을 챙겨 남은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버스에서 내렸다.
겨울을 알리는 비가 오려는지 바람에 습기가 실려 있었다. 재유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스산하게 쓸고 간 된바람에 얇은 잠바를 추키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익숙하게 모퉁이를 돌아 마트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재유야.”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
익숙한 목소리에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재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설마. 설마.
몸은 굳었는데 고개만 서서히 돌아갔다.
“한재유.”
“너… 어떻게….”
둘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실은 묻고 싶은 말이 넘쳤는데, 도무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마트 입구에 서 있는 바람에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걸 깨닫고서야 그의 팔을 끌고 몇 발짝 자리를 옮겼다.
“너 보러 왔어.”
벌써 전역을 한 거구나.
“장소를… 옮기자.”
2년 만에 본 그의 얼굴에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처럼 동요했다. 그와 동시에 조용히 얘기할 만한 장소를 찾는 데 마음이 급급했다. 이 주변은 집 근처라 혹시 또 소문이 돈다면 곤란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아아… 난 끝까지 못됐구나.
재유는 두 손을 모아 코와 입을 가리며 표정을 숨겼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신의 뺨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여기까지 찾아와 내 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가늠도 하지 않고 나만 생각했었다는 이기심에 혐오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트에서 한 블록을 지난 대로변에 제법 커 보이는 커피숍을 골라 들어갔다. 참담함에 폐부가 짓눌린 듯 아파 왔다. 우주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커피… 괜찮아?”
“…….”
“커피 두 잔 주세요.”
침울하게 앉아 줄곧 말없이 고분고분한 그를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졌다. 군대는 이별한 연인을 잊기에 충분한 장소는 아니었나 보다.
여전히 머리가 짧았다. 헤어졌던 당시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더 괴롭혔다. 그는 아직 그 모텔 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커피가 나오고서도 침묵이 이어졌다. 그에게 다시 상처 주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섣부른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이 애태우고만 있는데도, 그가 할 말이 예상되어 이별의 아픔을 다시 겪어야 함을 깨달았다.
“재유야. …나한테 와.”
비탄에 젖은 얼굴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재유는 단말마의 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한편에 꺼뜨렸던 마음이 뭍으로 드러났다.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그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내가 정말 잘할게. 나한테 오기만 하면… 널 위해서만 살 수 있어. 아이가 걸리면 아이도 데리고 와. 내가 너랑 아이도 같이 책임질 수 있어. …우리 그렇게 살아 보자.”
“…우주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줄곧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큰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그가 짓궂은 장난을 하거나 대범한 제안을 하면 재유가 당황하고 주저하다 결국 이끌려 갔었는데, 지금은 반대가 된 것 같았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그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날 만나러 온 걸까.
“사랑해.”
나지막이 뱉은 고백은 절규에 가까웠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을 알기에, 결국 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고백은 종장을 의미했다. 완전한 끝을 위한 마침표. 거기에 달콤함이나 미래에 대한 약속 따윈 없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별을 공고히 다져 박제해두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주의 의도대로 철저히 단념시켜야 한다.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재유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건조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내 딸, 이제 16개월이야. 아직 말은 못 하지만, 감정은 있어. 그 애한테… 엄마를 뺏을 순 없어.”
“…….”
“애를 두고 너한테 가지도 못해.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해. 그러니까 너도 이제 네 삶을 찾아서 가.”
그는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허상을 지그시 보며 대답 없이 멍한 시선을 방치했다. 재유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섰다. 자리를 떠나려는데 그에 의해 손이 붙잡혔다.
줄곧 고개 숙이던 우주가 얼굴을 들어 재유를 보았다. 텅 빈 눈에 오직 자신의 모습만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재유는 가빠지는 숨을 잠재우려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잘… 좋아하게 된 거야?”
“…….”
“그럼 난, 잊은 거야?”
“…….”
재유는 어떤 답도 하지 않고 천천히 자리를 떠나 커피숍을 나왔다.
우체국을 지나고 건널목을 건너고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히며 계속 걷다 보니 모르는 길이 나왔다. 이미 밤중이 된 거리가 어둠으로 짙어졌다. 다시 마트로 되돌아갔을 땐 이미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
“영선아, 언제쯤 도착해?”
-내가 여기 와 봤어야 알지. 방금 충청북도 표지판 지나가는 거 봤는데, 거의 다 온 거 아냐?
“맞을걸? 나도 지금 출발해야겠다.”
-알았어, 이따 봐.
전화를 끊은 재유는 희지에게 뽀뽀를 해 준 뒤 겉옷을 챙겨 집 밖으로 나왔다. 영선이를 만난다고 하니 인애는 뾰로통한 얼굴을 했지만, 나가는 걸 막지는 않았다. 희지 데리고 같이 가서 만나자고 해도 영선이와는 친하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영선은 며칠 전 전화로 갑자기 주말에 내려갈 거라며 시간 비워 두라고 통보를 했다. 무슨 일이냐 물어도 전해 줄 게 있다며 무조건 마중 나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더 컸다.
영선은 처음 인애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 충격받는가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유의 새로운 삶을 응원해 주었다.
이사한 후로 만나진 못해도 꾸준히 안부 연락을 하고 종종 아기 선물을 소포로 보내기도 했다. 평소 사적인 만남이 아예 없이 살던 재유는 옛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조금은 들떠 있었다.
부쩍 낮아진 기온에 뺨이 얼얼한 날씨인데도 터미널까지 빠르게 걸어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타이밍이 좋았는지 서울에서 오는 버스가 막 정차하는 걸 발견했다. 조금 기다리자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멘 영선이 버스에서 내리더니 손짓으로 짐칸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아, 몰라. 빨리 내리기나 해.”
영선이는 요거랑, 쩌거, 하며 짐가방들을 가리켰다. 재유는 묵직한 보스턴백 두 개를 꺼내 양어깨에 걸쳐 멨다.
“이게 다 뭐야?”
“여기도 있어. 요 녀석.”
영선은 어깨에 멘 가방을 슬쩍 열어 보여 주었다. 내용물을 본 재유의 눈이 커졌다. 영선이 들고 온 건 반려견용 이동 가방이었고, 안에는 우유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어디 좀 들어가서 얘기하자.”
재유는 뜻밖의 동행자에 정신이 없었다. 영선이 먼저 앞서나가 터미널 밖을 빠져나가려 하자 얼른 짐을 추어올리고 뒤따라갔다.
터미널 바로 맞은편 커피숍에 들어간 두 사람은 커피와 냉 녹차를 주문하고 음료가 나오길 기다렸다. 재유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 우유가 여기까지 온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우주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짐짓 티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었다.
“여기까지 와 주고… 정말 고마워. 힘들었지?”
“2시간 반 버스 탄 게 단데 힘들 게 뭐 있어. 희지는 잘 있어?”
“그럼. 잘 크고 있지.”
“말문 트였어?”
“아니 아직. 뭔가 말하고 싶어서 계속 옹알대긴 하는데, 알아듣지는 못해.”
“으으… 귀엽겠다. 얼굴 볼 수 있나 했는데. 인애가 나 만나는 거 싫어하진 않았어?”
“괜찮아. 잠깐인데 뭐. 그나저나 네가 바로 돌아가야 한다니까 좀 아쉽네.”
“다음에 또 보러 오면 되지. 암튼 고마운 줄이나 알아라.”
영선은 버스에서 내내 쐰 히터 바람이 답답했는지 서빙된 냉 녹차를 들이켜며 손부채질을 했다. 재유는 그녀를 보며 계속 웃고 있었다. 홀로 상경해 유학하는 영선이 내심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 더 반가웠고 여전히 털털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진회색 코트에 머플러를 두른 모습이 어른티가 나는 게 제법 멋있었다.
“당연히 고맙지. 나 때문에 일부러 여기 온 거 아냐.”
“칫… 아냐, 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뭐. 얼굴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
“부모님도 잘 계시지?”
“똑같애. 엄마가 가끔 너 얘기 하시더라. 가까이 살면 애도 봐 주고 할 텐데, 하면서.”
“꼭 안부 전해드려.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고.”
“우리 사이에 무슨.”
영선은 대학교 3학년으로, 2학기가 끝나면 호주 어학연수 준비로 바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잠깐 짬으로 재유를 만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고.
재유는 그런 영선이 우주와는 연락하고 지내는지 내내 궁금했었다. 우주도 곧 복학할 테니 서울에서 왕래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동안은 섣불리 묻지도 못했었다.
“우주… 만났어?”
앞에 놓인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재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선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못마땅한 한숨을 쉬었다.
“너넨 진짜 왜 그러냐? 셔틀을 시켜도 정도가 있지.”
“…우유를 못 키우겠대? 왜?”
“몰라. 그런 건 말 안 하던데?”
“그래….”
“걔 좀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더라? 뭘 물어도 도통 말도 없고. 군대에서 뭔 일 있었나? 니들 헤어진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영선은 우주 얘기가 나오자 죽상을 하고 있는 재유를 보며 도리질을 쳤다. 뭐라 더 쏴붙일 것처럼 입을 열려다 에휴, 됐다, 하며 또 고개를 저었다.
“암튼, 자! 받아.”
영선이는 반쯤 일어나 이동 가방을 테이블 너머로 건네주고 귀찮은 짐을 벗은 듯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물로 입을 가시며 말했다.
“여기 이 짐들도 다 우유 거야. 보니까 옷들이랑 애견용 쿠션이랑 사료랑 간식거리까지 다 있더라. 참, 이건 예방접종 기록.”
재유는 영선이 건네준 접종 수첩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최근까지 해마다 접종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우유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알 수 있었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감돌았다.
“우주 아버지가 화 많이 나셨겠네.”
“뭐? 왜?”
“우유 많이 예뻐하셨거든.”
지금 생각해도 의외였다. 그렇게 무서운 인상의 염 사장님이 손바닥만 한 우유의 옷을 손수 입히고 함께 산책을 다녔다는 게 아직도 상상이 잘 안 갔다.
재유는 이동 가방 지퍼를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우유가 밖으로 나오려고 발톱으로 가방 안을 마구 긁어 대고 있었다. 다 꺼내 주진 못하고 얼굴이라도 내밀 수 있도록 뜨듯하고 통통한 배를 붙잡아 올렸다. 우유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아 여기가 어딘지 탐색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키울 수 있겠어? 인애가 싫어하면 어떡하냐?”
“괜찮을 거야. 설득해야지. 희지가 강아지 엄청 좋아하는데, 잘됐다. 길 가다가도 강아지만 보면 멍멍! 소리 내면서 따라가려고 하거든.”
“…인애가 반대하면 나 팔아먹어. 내가 키우다 질려서 너한테 떠넘긴 거라고 해.”
“그럴 순 없지….”
“그럼 뭐라 할 건데? 우주가 키우던 개 받아 왔다면 걔가 퍽이나 오냐, 알았다, 하겠어?”
“원래 주인은 나였어. 그동안은 우주가 대신 키워 주던 거고.”
“그거나, 그거나.”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라며 손까지 휘저어 가며 만류했다. 자신보다 더 가정의 평화를 염려하는 영선이었다.
“암튼 내가 알아서 할게.”
“정 키울 수 없는 상황이면 얘기해. 엄마한테 얘기하면 돼.”
“고마워. 근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우유는 가방 안이 답답한 건지 안쓰러운 소리로 낑낑거렸다. 짐 속에서 간식을 찾아 물려 주자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재유는 손으로 부드러운 털을 계속 쓰다듬었다. 길에서 처음 우유를 만났을 땐 엄마와 우주가 곁에 있었는데. 이젠 두 사람 모두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새삼 서글펐다.
“우유야, 이제 우리 집 가서 살자, 알았지? 전보다 좁겠지만, 아기천사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몸을 숙이고 말하자 그새 간식을 다 먹은 우유가 손을 핥아 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다 끝난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우유가 있었다. 다행이다. 우유를 보는 게 꼭 우주를 보는 것 같았다. 재유의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달래졌다.
“너, 괜찮냐?”
영선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재유를 봤다. 눈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사실 괜찮진 않아. 우주가 어떤 마음으로 우유를 돌려보냈을까, 알고 싶어서 미치겠어. 근데… 우주도 이젠 날 잊기로 마음먹은 거니까 그런 거겠지.”
“넌 잊을 수 있어?”
“꼭 잊어야 되나? 우유 보면 계속 생각날 텐데. 아, 그러라고 보냈나 보다. 계속 떠올리면서 지은 죄를 되새기라고.”
재유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비쳤다.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처분하며 홧김에 보냈을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았다. 우유의 따뜻한 온기가 그의 못다 한 마음을 품고 온 것만 같아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그냥 헤어지는 과정인 거지. 원래 이별은 구질구질하잖아.”
“그런가. 그래도 난 우유가 이별 선물이라면 괜찮아.”
영선은 우유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재유를 보며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얘기를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영선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있잖아, 재유야.”
“응?”
언제 알아도 알 텐데 뭐. 영선이 냉 녹차를 컵째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우주 미국 간대. 지금은 아마 갔을 거야.”
“…우주가 그래?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거 아니고?”
“어.”
“얼마나…. 아예 가는 거래?”
“그건 얘기 안 했어.”
“그래….”
재유는 잠시 몸을 굳힌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했지만 커피를 마시는 척 컵을 들어 표정을 수습했다.
“잘됐네. 진짜 헤어져 버렸네.”
“…….”
“나한텐 과분한 사람이었어. 차라리 우주한테도, 나한테도 잘된 일인 것 같아.”
가슴 속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것 같았다. 텅 빈 그 자리가 쓰라리고, 쓸쓸했다.
***
2003년 3월.
시내 유일의 장례식장 3층 2호실에는 젊은 아기엄마의 빈소가 차려졌다. 조문객은 많지 않아 여자의 고향 사람 몇몇과 남편의 직장 동료들로 이뤄진 단 두 테이블뿐이었다. 고향 사람들은 저마다 고인에 대해 기억하는 일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부모한테 말도 안 하고 결혼했었다던데, 진짜야?”
“그랬다니까. 결혼식도 안 올렸었고.”
“남편은 부모가 없다던데. 고아였나?”
“아니 고아는 아니었고, 결혼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댔지 아마?”
“근데 저 여자 고향에선 좀 문란하다고 소문도 돌지 않았었나?”
“어허… 이미 고인인데 그런 소린 뭣 하러 해.”
“하긴. 그렇네.”
“너무 일찍 가 버렸어. 불쌍해서 어떡하냐. 여자 부모가 좀 개차반이었어야지. 아버지란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 허구한 날 행패 부리고, 엄마는 곗돈 들고 나른 사기꾼이라 자식들은 동네에 얼굴 다 팔리고.”
“아 그러게. 그런 부모 밑에서 뭘 보고 자랐겠어? 형제들이랑도 어릴 때부터 친척 집에 뿔뿔이 흩어져서 지냈다더만. 연락은 하고 살았나 몰라.”
“쯧쯧쯧….”
“그 부모가 딸 죽은 거 알고 남편 찾아와서 목숨값 내놓으라 행패나 안 부리면 다행이지.”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뭘 몰라서 그런 소리 하지. 자식을 개 취급하면서 두들겨 패기가 다반사였다니까 그래.”
“진짜 몹쓸 부모들이네.”
“그렇다니까.”
입구 근처의 테이블에서는 남편의 직장 동료들이 마찬가지로 고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교통사고였다고?”
“그래. 애기 어린이집에 맡기고 빵집인가, 커피숍인가 일하러 다녔는데 출근길에 음주운전 사고를 당했대.”
“뭐? 그 시간에 술 처먹고 돌아다니는 인간이 있어?”
“그러게 말이야. 미친놈이지. 손쓸 방법도 없이 그 자리서 즉사했다데.”
“저런… 불쌍해서 어떡하냐.”
“내 말이. 애는 또 어쩌고. 아직 세 살밖에 안 됐는데, 재유 씨 힘들어서 어째.”
“엄마 없이 남자 혼자 애를 어찌 키우나. 쯧쯧….”
“그러게. 나이는 어려도 성실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데. 어찌 이리 날벼락 같은 일이 생겼을꼬.”
“빨리 마음 잡고 다시 출근해야지. 애도 먹여 살려야 될 테니.”
누군가 목소리 좀 낮추라고 일행을 단속했다. 빈소에는 멍하니 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는 고인의 남편과 그 주위로 천진하게 돌아다니는 어린 딸이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진 조문객들은 자못 숙연해졌다.
***
인애의 장례가 끝나고 일주일 후, 재유는 하루 휴가를 얻어 희지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집에 돌아와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집이 넓지 않아 정리할 물건도 별로 없었다.
계절별 옷들과 화장품, 평소 관심 있어 하던 화훼 관련 책 몇 권과 볼품없는 액세서리들, 그 외에 잡동사니들까지 3~4시간 만에 모두 정리가 되었다.
그동안 함께 살았던 날들이 덧없이 느껴졌다. 희지와 저만 남겨 두고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살갑게 지낼걸, 뒤늦은 후회도 들었다.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희지를 키우는 데 있어 엄마인 인애의 몫이 컸다. 딸에게 엄마의 부재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자신에게 저주가 내린 건가. 엄마를 비롯해 인애까지 이렇게 되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근본부터 되짚어야만 하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항상 새벽에 출근하는 재유 대신 인애가 어린이집에 희지를 데려다주고 사거리 빵집에 알바를 가던 길이었다. 음주운전을 했다는 가해자는 찻길도 아니고 보행자도로에서 걷고 있던 인애를 차로 들이받았다고 했다. 인애의 몸은 붕 떠올랐지만, 담장에 가로막혀 다시 차도 위로 굴러 버렸고 어쭙잖게 뺑소니를 시도하려던 가해자는 인애가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도주하려다 차로 한 번 더 친 것이다.
깜깜한 밤이면 모를까, 출근 시간이 막 지난 오전 시간이라 응급구조도, 뺑소니범 검거도 순식간에 이뤄졌지만, 인애의 목숨을 건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희지와 인애가 먹을 아침상을 차려 두었다. 나가기 전, 희지 얼굴을 보려고 잠깐 방에 들어갔었다. 인애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기척에 눈을 뜬 인애가 올려다보며 잠이 덜 깬 얼굴로 ‘잘 다녀와.’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출근한 지 2시간이 지나 토마토 상자를 나르고 있던 재유는 소식을 전해 듣고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뒤덮이는 경험을 했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엘 갔는지도 몰랐다. 인애가 있는 곳은 심지어 응급실도 아닌 영안실이었다. 현장에서의 즉사라고 했다.
인애는 막살던 과거의 모습을 청산하고, 아이 엄마로서, 아내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익숙지 않은 육아에 매진했으며 해 본 적 없던 요리나 살림도 미숙하나마 배우려고 노력했다.
살갑지 않은 남편에게 이따금 상처받곤 했지만, 제 손으로 처음 일군 가정을 내팽개칠 만큼 삐뚤어진 인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희지의 존재는 갓 스물을 넘긴 인애에게 버거운 삶의 무게로 다가왔지만, 어느새 희지는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했다.
재유와 인애가 서먹한 사이였어도, 아이가 있는 집은 으레 웃음소리가 나게 마련이었다. 원치 않는 임신에,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간격을 좁히며 새로운 가정을 일구어 갈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희지를 잘 키우고자 하는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유는 아직 군인 신분에 벌이도 시원찮았고, 인애 역시 별다른 재주도 없는 어린 나이였지만, 오히려 그런 결핍이 두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희지에게 조금이나마 더 나은 가정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런데 무심하게도 장인애는 죽어 버리고 말았다.
희지는 갑자기 보이지 않는 엄마를 애타게 찾는 것 같았지만, 4일이 지난 후엔 어느새 적응한 건지 엄마 없는 생활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죽음이나 부재에 관해 이해할 수도 없으니 상황에 적응을 해 버린 것이다.
인애도 인애지만, 재유의 걱정은 이제 희지에게로 옮겨 갔다. 이제부터 혼자서 세 살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턱턱 막혔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생업과 육아에 매달려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막막하고 팍팍한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겠지.
그래도 나한텐 희지가 있다. 우유도 있고. 그거면 충분했다.
재유는 애써 자신을 타이르며 짐이 빠지고 난 집을 대청소하기 시작했다. 환기를 시키고, 방을 쓸고 닦고, 해묵은 먼지를 털어 내며 희지를 키우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을 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몸을 혹사시켰다.
빠진 짐들이 치워진 옷장을 새로 정리하려고 문을 열었다. 문득 구석에 뭔가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빳빳한 종이 뭉치를 A4용지로 감싸 봉투처럼 밀봉해 둔 것이었다. 인애의 옷을 정리하다 떨어진 것 같았다.
종이를 벗겨 내자 몇 장 안 되는 사진들이 나왔다. 인애가 어릴 적에 찍은 사진들인 듯했다. 사진 속 어린 인애는 몸에 비해 작고 볼품없는 옷을 입어 시무룩하고 주눅 든 아이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희지의 미래와 겹쳐 보여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희지는 재유보다 인애를 더 많이 닮았다. 특히 웃을 때 엷게 파이는 왼쪽 뺨의 보조개가 그랬다. 희지가 사진 속 인애의 나이가 되면 저런 얼굴이 되려나.
절대로 희지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해선 안 된다는 각오가 생겨났음에도,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다. 어린 딸에게 이제는 없는 엄마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사진을 언제쯤이면 보여 줄 수 있을까.
인애에 대한 연민이 피어올랐다.
스물셋 짧은 인생에서 자식을 남겨 두고 간 마지막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진 건 몸뚱어리밖에 없는 유약한 남자와 산 탓에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아등바등 아끼며 얼굴도 못 본 시아버지의 빚을 갚아왔었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까지 하느라 좋아하던 몸치장도 못 하고 또래 여자들처럼 마음껏 놀지도 못했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했는데 딸이 크는 기쁨을 더 누리지 못하고 허망하게 가 버린 인애의 인생이 가련했다. 더불어 앞으로 고단한 인생이 펼쳐질 자신의 신세가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그런데.
사진을 몇 장 더 넘기던 재유는 눈을 크게 뜨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인애의 어릴 적 사진 뒤로 우주와 자신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이 나왔다. 재유는 그 사진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 대궐 같은 집에서 분노한 염 사장님이 내던진 사진들이었다.
“이거… 이 사진….”
이 사진들이 왜 인애의 유품에서 나왔는지 순식간에 알아챘다.
아. 인애가 그런 거였구나. 우주 아버지의 미행도, 공장 내 재유를 싫어하는 직원도, 우주의 주변 인물도 아닌, 인애였다.
왜. 왜 그랬을까.
고백을 거절당해서 복수한 건가. 아니면, 그녀의 비루한 인생에 만만해 보이는 자신을 끌어들여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아 보려 했던 걸까. 기껏해야 혼전임신으로 도망치듯 고향을 등지고 결혼식도 없이 단칸방에서 퍽퍽한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삶이었는데.
가슴속에서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재유는 엎드려 앉은 채 옷장을 주먹으로 퍽퍽 쳐댔다.
끝까지 숨기지도 못할 거면 오래나 살지. 왜… 이제 와서 왜!
끓어오르는 울분을 쏟아낼 당사자는 이미 죽고 없었다.
우주의 집에서 있었던 일은 재유에게 절망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웃팅 사건을 일으켰던 여자와 혼인신고도 하고 아이도 낳아 버렸다. 그 바람에 우주도 저버렸다.
재유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펄펄 끓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저 옷장에, 방바닥에 공허한 분풀이를 할 뿐이었다. 우유가 주인의 감정을 눈치챘는지 주변을 뱅뱅 돌며 낑낑거렸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내 인생도 지금과는 달랐겠지. 여전히 우주와 함께였겠지.
아니. 그럼 희지가 태어나지 못했잖아.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 딸이 아직 남아 있는데. 그렇다고 우주는 잊을 수 있나. 그것도 아닌데….
재유는 갈팡질팡하는 생각의 중심을 바로잡지 못한 채 쏟아지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후회가 또 다른 후회에 덮였다. 우주를 택해도, 희지를 택해도 후회는 마찬가지다.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가슴에 남는 건 죄책감뿐이었다. 애초에 선택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재유는 우유를 껴안고는 지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울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