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청춘의 끝
* * *
주말 저녁, 재유는 영선과 만날 약속 때문에 야간 출근 2시간 전에 시내에 있는 커피숍에 도착했다. 우주와도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실내를 둘러보니 영선이는 아직인 모양이었다. 재유는 저도 모르게 우주와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넓은 커피숍에는 하와이안 풍의 인테리어에 산세베리아나 황금죽이 심긴 대형 화분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대형 팬이 선풍기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여섯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을 만한 화려한 무늬의 기다란 소파가 테이블을 마주 보고 있는 좌석이었고, 커피숍 내 모든 좌석이 같은 모양이었다.
점원이 메뉴판과 물을 가져다주자 목을 축이고 메뉴를 펼쳤다. 우주와 왔을 때 마셨던 음료와 나누었던 대화까지 세세하게 떠올랐다. 그때 재유는 냉 매실차를, 우주는 우산 꽂힌 파르페를 골랐었다. 인테리어가 화려하고 소파도 멋지지만, 번잡해 보이고 조명이 너무 밝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먼저 와 있었네?”
“응. 왔어?”
“엄마가 김장한다고 자꾸 심부름시켜서 좀 늦었어.”
영선은 익살스러운 3등신 소녀가 그려진 빨간색 배꼽티에 흰 셔츠를 걸치고 청바지를 받쳐 입은 모습이었다. 긴 머리는 얼마 전 밝은 갈색으로 염색했는데 아주머니에게 서울 가더니 발랑 까졌다며 잔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영선은 소파에 핸드백을 멋대로 던지며 털썩 앉더니 재유 앞에 놓인 물컵을 들고 벌컥벌컥 마셔 댔다.
“엄마가 김장 다되면 너도 가져가래.”
“내가 담가 먹으면 되는데….”
“울 엄마 손 큰 거 알지? 잔말 말고 갖다 먹어.”
“알았어. 인사도 드릴 겸 그래야겠다. 김장 때문에 내려온 거야?”
“그렇지 뭐. 네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너도 제법 대학생 같다 이제.”
“이제 2학기니까. 아직도 햇병아리 취급받을 때도 있지만 뭐….”
영선은 점원을 불러 커피 두 잔을 시키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대학 가서 담배를 배운 모양인데, 영선의 부모님께는 재유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영선은 테이블 끝에 있던 재떨이를 앞으로 끌어와 길게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뿜으며 재유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좋아, 요즘은.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니까.”
“그럼 다행이고. 우주랑은 아예 헤어진 거야?”
“…응.”
“전화도 없고?”
“…….”
영선이는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재유를 주시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의중을 떠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재유는 뜬금없는 우주 얘기에 음울한 얼굴로 커피잔 옆에 놓인 각설탕을 만지작댔다.
“근데 왜 우리 집엔 편지들이 자꾸 오냐?”
“편지…?”
“그래. 군대에서 맨날 네 앞으로 편지가 온댄다. 진짜 헤어진 거 맞아?”
“그렇긴 한데….”
“우리 집으로 계속 오는 거 보면 네가 이사한 건 모르나 보네?”
재유의 시들했던 얼굴에서 조그맣게 생기가 피어올랐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
실제로 ‘우주의 편지’라는 말 자체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매일같이 그를 향한 마음을 접고 포기하려 노력하지만, 우주의 소식은 단번에 마음을 뒤집어 버렸다.
편지에 무슨 말을 적어 보냈을까. 날 용서해 주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원망하며 저주할까. 온 신경이 영선의 입에 쏠려 있었다.
“…가지고 왔어, 편지?”
무심코 영선의 옆에 나뒹구는 핸드백으로 시선이 갔다.
“그래. 군대 간 지 두 달 정도 됐다면서? 근데 편지 수가 장난 아냐. 하여튼, 고딩 때부터 스토커짓 하더니 여전하다니까? 자. 여기.”
영선이 가방을 통째로 재유에게 건넸다. 쭈뼛거리며 지퍼를 열자 흰 봉투에 담긴 편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너, 만약 우주가 만나자면 다시 만날 거야?”
“…글쎄.”
“하긴. 다시 만나더라도 어려운 일들이 많겠지. 근데 아무리 동성이고 우주네 집에서 알았다 하더라도 둘 다 성인 아냐? 너도 아직 우주 좋아하는 거지?”
“…….”
“나도 모르겠다. 남 일이라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건가.”
영선은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묻은 얼굴로 담배를 비벼 끄고 입 안에 텁텁하게 남은 연기를 뱉어냈다.
“어렵다, 어려워. 남녀끼리도 이런 문제는 힘든 법인데, 너넨 참 답도 없겠다.”
“…뭐가 옳은 건지 모르겠어. 헤어졌을 땐 내가 없어져야 우주한테 잘된 일인 거라 생각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대로 끝나는 게 안타깝고 속상하고… 보고 싶고 그래. 나 진짜 이중적이지? 우주한테 그렇게 못된 짓을 했는데. 참 이기적이야.”
재유는 속내를 그대로 내보였다. 한동안 가슴 한편에 미뤄 두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던 것이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우주가 떠나고 재유는 삭막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하루종일 공장에서도, 집에서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날이 태반이었다. 말을 거는 사람도 없거니와 자신도 적극적으로 소통할 마음이 없었는데, 너그러운 청자를 마주하자 회고의 형태를 띠고 진심이 발화되었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하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무슨 못된 짓을 했는데? 네가? 그거 때문에 헤어진 거야? 우주네 집 때문이 아니고?”
“내가 참… 쓰레기 같은 짓을 했어. 우주한테도, 인애한테도.”
“인애? 장인애? 아, 장례식 때 온 걔? 걔가 여기서 왜 나와?”
영선은 장례가 끝난 이후에도 장인애가 집까지 배웅하는 걸 보고 의아한 눈빛을 띠었었다. 장인애의 의도가 그저 회사 동료나 동창, 친구로서의 빛깔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재유는 미지근한 커피로 입을 축이며 영선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조마조마하게 견디고 있었다.
“너 설마. 바람 핀 거야?”
“…….”
“진짜…? 혹시, 잤냐?”
“…….”
직설적인 추궁에 재유는 고개를 숙이며 침묵으로 대답했다.
“와… 너, 다시 보인다. 이런 면이 있었네?”
영선은 테이블에서 몸을 떼고서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냈다. 재유는 유일한 친구를 잃을지도 몰랐지만, 영선에게만큼은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다. 자기가 한 짓을 누군가 꾸짖고 비난해 주길 바란 건지도 몰랐다.
“그럼 우주는 그거 다 알고서 너한테 다시 이렇게 편지 보내는 거야? 하, 미친놈들. 딴 사람이랑 그 짓 하고 못 잊는 너나, 그러고도 좋다고 매달리는 우주나. 니네 진짜 꼴통들이었네.”
“…미안해. 너한테까지 안 좋은 모습 보이고 이렇게 폐 끼쳐서. 나도… 잘못했다고 생각해.”
“어이가 없다. 앞으로 우리 집에 편지나 안 날라오게 우주 단속이나 잘해.”
영선은 마치 제 애인이 바람난 것처럼 씩씩거렸다. 당연했다. 우주도 영선의 친구이니까.
영선은 물잔을 들어 연거푸 마시더니 새 담배를 꺼내 피워 물며 기가 찬 듯 재유를 쏘아보았다. 재유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만 깨물었다. 정작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은 떠나고 없었지만, 친구의 앞에서도 떳떳하지 못한 일인 건 사실이었다.
“…진짜 실망했어. 대체 왜 그런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렇게 돼 버렸어.”
“인애는 뭐래?”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한 번뿐이었거든. 공장에서도 그냥 동료처럼 지내고 있으니까. 잘 마무리됐다고 생각해.”
“마무리?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네가 그러자니까 그냥 넘어간 거겠지. 장례식장에서 걔가 널 보는 눈빛이 딱 봐도 감정이 있어 뵈던데, 살까지 섞었으니 그냥 이대로 끝나진 않을걸?”
“설마. 내가 우주랑 사귀고 헤어진 거 다 아는데. 그 일은 자기도 잊고 싶으니까 앞으로 말 꺼내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했었고. …공장에서도 한바탕 소문이 나 버려서….”
“…….”
영선도 부모님께 들어서 알 것이다. 두 사람의 일은 공장뿐만 아니라 좁은 지역사회에서 제법 소문이 돌았다. 동창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동성애에 대한 화두가 씹기 좋은 형태로 소문이 부풀려졌고, 졸업 후 연락이 뜸했던 성종과 현근이 안부를 핑계로 그 사실을 조심스레 알려 주기도 했었다.
당사자인 재유의 귀에 들어온 것만도 추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예쁘장하고 얌전한 겉모양새를 이용해 먼저 덮쳤다느니, 서울에서도 그 방면으로 유명했다느니, 자기네 집 빚을 우주한테 뜯어내려 했다느니.
그건 우주가 염창섭 사장의 아들이어서였다. 그 때문인지 소문에서 비난과 모욕은 모두 재유가 뒤집어쓴 형태로 쏟아졌다.
한번은 아주머니가 골목에서 자전거포 아저씨와 대거리하는 걸 직접 듣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도대체 스무 살밖에 안 되는 남자애가 아무리 돈이 궁하기로서니 뭐 좋다고 동갑내기 친구를 꼬셔서 빚을 갚고 팔자 피고 하냐며 재유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 소문에 열심히 반박하고 해명하고 심지어 싸움도 마지않았던 아주머니가 고마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너무나 죄스럽고 염치없어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영선은 심각한 얼굴로 재유의 얼굴을 보다가, 허공을 향해 담배를 피우기를 반복하며 코웃음을 쳤다. 당시의 일을 자세히 캐묻지는 않지만, 장인애와 흐지부지 결론지은 것에 찝찝함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욕 많이 먹고 다녔나 보네. 공장은 다닐 만하냐?”
“다녀야지. 빚은 갚아야 하니까. 거기 안 다니고 군대라도 가 있으면 이자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거야. 그나마… 다행이지.”
남 일 말하듯 덤덤하게 털어놓았지만, 사실 재유는 많이 시달렸고 지쳐 있었다. 아무리 남들 말에 신경 끄고 일만 한다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욕을 먹는 일은 처음이라 불안과 공포, 체념과 자포자기가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네 성격에 하나하나 붙잡고 해명하지도 못할 거고, 그렇다고 갑자기 빚이 없어져서 공장을 때려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참… 복잡하네.”
그렇다고 네가 장인애랑 잔 게 잘한 일은 아니지만, 이라고 덧붙였다.
“따지고 보면 우주가 먼저 쫓아다녔고 좋아하는 티 풀풀 내면서 기어이 사귀게 된 거였는데. 왜 너만 갖고 난리래?”
재유는 좀 전까지 자신을 무섭게 다그치던 것도 잊고 금세 제 편에 서서 옹호해 주는 영선에게 작은 위안을 얻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혀를 쯧쯧 차면서도 누그러진 영선의 표정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복잡할 거 없어. 그리고 3개월 있다가 다른 지역으로 공장 옮길 거야. 그때까진 버텨야지.”
“그건 뭐. 잘 된 일이긴 한데….”
“영선아. 이제 나랑… 연락 안 할 거야?”
“뭐?”
“나한테 화났잖아….”
별안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과 나누는 오랜만의 대화에 북받친 감정이 울컥 새어 나왔다. 재유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쳐들고 목에 메였던 숨을 억지로 삼켰다. 영선의 한숨 소리가 더 깊어졌다.
“하아… 시답잖은 소린 그만해. 앞으로 전화나 더 자주 하고. 집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쉬는 날엔 밖에도 좀 나다녀. 이 동네가 좀 그러면 나한테 미리 말하고 서울로 바람 쐬러 오든가.”
“…고마워. 영선아.”
눈물짓던 재유를 잠시 다독인 영선은 금세 평소에 나누던 대화로 되돌아갔다. 영선에게 친구는 많았지만,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친구 중 한 명이 자기라는 걸 재유는 알고 있었다. 지치도록 이어지는 수다를 끝까지 묵묵히 들어주는 저에게 영선은 가족과 학업, 진로, 연애, 인간관계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오늘도 영선은 너스레를 떨며 제 대학 생활의 고충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영선이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의 해체설 때문에 팬클럽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것, 서울의 생활비와 늘어난 용돈 때문에 집에 내려올 때마다 아빠에게 잔소리를 듣는다는 것,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복학생 선배를 떼어 내기 위해 아이돌 사인회를 데려가서 팬클럽 동지들의 도움으로 퇴치한 사건 등등.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수다가 퍽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영선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장인애와 잤다는 건 좀 실망했지만, 최근 너에게 벌어진 일들이 예삿일은 아니니까 그런대로 넘어가 진다고. 우주의 편지를 전해 주는 게 망설여졌는데 둘 사이를 붙이고 끊는 것은 자기 손을 떠난 것 같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며.
재유는 테이블 한쪽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기 전, 재유는 친구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하며 영선을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었다.
***
재유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먼 곳에 방을 얻은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영선에게 받은 우주의 편지를 빨리 뜯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일하는 동안에도 계속 신경이 쓰여 탈의실 방향으로 눈을 힐끔거렸다. 오늘만큼은 공장 직원들의 노골적인 조롱도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의 가방에 들어있는 편지들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염려되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우주의 아버지 손에 들어간다면 또 한 번 사단이 날 테니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듯이 집에 들어온 재유는 겉옷도 벗지 않고 가방을 열어 편지 더미들을 꺼냈다. 우선 소인이 찍힌 날짜별로 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주는 훈련소에 들어가고 3일 후부터 꾸준히 편지를 보냈다. 자대배치를 받은 후 사서함 주소가 바뀐 편지들까지 분류하고 나니 가장 최근의 편지는 불과 3일 전에 보낸 것이었다.
재유는 떨리는 마음으로 첫 편지부터 차근차근 읽어 갔다. 처음 내용은 예상대로 원망이 주를 이뤘다. 네가 아니었다면 군대에 이렇게 빨리 오지도 않았을 거고, 학업도 이런 식으로 끊기지 않았을 거라고, 네가 자신의 인생에 큰 걸림돌이며 오점이 될 거라고도 했다.
재유는 손을 오들오들 떨며 숨죽여 계속 읽어 나갔다. 각오했지만, 역시 그에게 비난받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5통째 이후에 원망이 누그러들자 훈련소 생활과 자대 생활에 대한 내용을 적어 보냈다. 그날 날씨와 있었던 일, 받았던 훈련, 선임에게 받는 스트레스 등을 빼곡히 적어 보냈다. 마치 일기처럼 기록을 하고 편지를 보내는 게 습관이 된 것처럼.
이렇게 매일 편지를 적어 보냈으면서 왜 전화는 하지 않았을까.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유도 4주지만 훈련소 생활을 했었다. 사회에 있는 자신에게 거절당한다면, 감옥 같은 내무반 생활과 자유롭지 못한 군인 신분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답장을 받을 수 없더라도, 거부의 편지를 받을지라도 수화기 너머로 듣는 거절의 목소리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우주 역시 자신을 잊지 못해 하루하루 견디고 있었다. 완전히 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하루아침에 잊힐 관계도 아니었다. 지난 추억으로 무르익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반증이었다. 편지의 개수가 그걸 말해 주었다.
그 마음을 짐작하니 다시금 가슴이 쓰라렸다. 이윽고 마지막 편지를 읽었을 때 재유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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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유야. 네가 줬던 끔찍한 상처를 하루도,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어.
왜 그랬을까 이해해 보려고 해도 나로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도 난 안 되는 것 같아.
네가 줬던 상처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너 없이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이라는 거야.
이렇게 결론 내기까지 많이 생각했어.
아직도 못 잊겠고, 아직도 널 좋아해.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미치도록 보고 싶어.
제발 날 두 번 배신하지 마. 넌 영원히 내 옆에 있어야 돼.
그런 모습이 아니고는 내 미래를 상상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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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유는 한참을 편지를 붙든 채 눈물을 쏟아냈다. 울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와 이렇게 되고 나서도 줄곧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은 생각이 바로 이거였다. 이대로 인연이 끝날 리가 없다는 것.
빈 연습장을 찾아 곧바로 답장을 썼다. 이젠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우주가 하자는 대로 해야겠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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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일요일에 널 보러 갈게.
나도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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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있는 곳은 강원도 산골의 전방 육군 부대였다. 재유는 면회 시간에 맞춰 오기 위해 새벽부터 바지런을 떨어야 했다. 부대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우주네 아버지가 사람을 붙여 자신을 미행하는 것이 아닐까 조마조마했었다. 이런저런 신경 쓰이는 일들투성이었지만, 그 모든 불안들이 우주를 보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진 않았다.
위병소에 면회 신청을 하고 면회장에서 대기하는 동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혹시나 자신이 실수해서 부대에 우리 사이가 들통날지도 모르니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조심해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면회장 안에는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애인을 만나러 온 또래의 여자들이었고, 친구를 면회하기 위해 온 듯한 남자 몇몇과 가족 단위의 면회객도 소수 있었다. 재유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입구를 바라보며 1분 1초를 영겁처럼 기다렸다.
면회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입구로 향했다.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우주였다.
뛰어온 듯 숨이 가빠 보이는 그는 재유를 발견하고 곧장 테이블로 다가왔다. 재유도 벌떡 일어나 그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는 다짜고짜 손을 낚아챘다가 홱 떨구고는 재유의 티셔츠에 손을 집어넣어 목깃을 헤집었다. 반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목에 걸린 링 목걸이를 손으로, 눈으로 확인한 후 그는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면회장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반가운 얼굴을 만나는 기쁨에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우리도 앉자. 밥 먹어야지, 응?”
재유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우주의 시선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두었던 도시락을 꺼내 테이블에 펼쳐놓을 동안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햄을 잔뜩 넣은 볶음밥에 닭강정, 돈가스, 동그랑땡과 평소 우주가 좋아하던 밑반찬들, 갖가지 쿠키와 과자까지 테이블이 꽉 차도록 펼쳐 놓았다. 비싼 재료들로 만든 건 아니지만 간밤에 우주를 먹일 생각을 하며 하나하나 정성을 쏟아 요리를 완성해 나갔다.
재유는 수저와 젓가락까지 세팅을 마친 후 목석처럼 서 있는 우주를 자리에 앉혔다.
“많이 식었겠지만 그래도 먹을 만할 거야. 어서 먹어. 그래야 나도 싸 온 보람이 있지.”
우주 손에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 주고 재유가 먼저 한술 떴다. 식은 밥이었는데도 목이 메어 쿡쿡거리는 걸 억지로 삼켜야 했다. 우주가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재유는 그의 눈치를 보며 반찬을 얹어 주거나 사이다를 따라 주며 식사를 거들었다. 그러면서 이따금 그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낯빛은 건강해 보였지만, 여전히 표정이 어둡고 입고 있는 군복이 헐렁해 보일 정도로 핼쑥했다.
다들 떠들썩하게 안부를 묻고 식사를 하는 가운데, 우주와 재유만이 서로의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밥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우주는 예전의 머슴밥 먹던 기세는 사라지고 무심하게 턱을 움직여 음식을 씹어 삼켰다. 그게 슬퍼 보였다.
그래도 우주는 재유가 주는 대로 말없이 다 받아먹었다. 그 모습이 제법 안심이 돼서 음식을 더 싸 올걸, 아쉽기까지 했다. 다 먹고 난 빈 찬합들을 다시 챙겨 가방에 넣는데, 우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와. 나가자.”
면회장 밖으로 나가자 조그만 공원이 나왔다. 곳곳에 벤치도 있었고, 정자도 갖춰진 그럴듯한 공간이었다. 근처에 소각장이 있는지 희미하게 낙엽 태우는 냄새가 풍겼다. 우주는 후미진 곳에 있는 외딴 벤치로 향했고, 재유도 말없이 도시락 가방을 들고 따라갔다. 곳곳에 관목이 심겨 있어 주변으로부터 적당히 차단된 장소였다.
우주가 벤치에 앉자 모자를 벗고는 짧은 머리가 민망한지 까슬한 뒷목을 어루만지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유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뭣부터 물어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맛있었어.”
“다행이다.”
“…….”
“…….”
“…걔한테도 밥해 준 적 있어?”
처음엔 질문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의미를 깨닫자 재유는 당황하여 더듬더듬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장인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냐… 그전에도 따로 만난 적 없었고 그 후로도 공장에서 보는 게 다야. 요즘은 근무시간도 잘 안 맞아서 얼굴 볼 일도 없어.”
“그럼 그 일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사귀거나 그러는 거야?”
말끝에 책망이 묻어나왔다. 다시금 그 일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러붙었다.
“사귄다니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야.”
우주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재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너희 집에서 그 말을 들은 후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 꿈까지 꿨어. 네가 다른 여자랑….”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서 네가 너무 미웠다고, 한탄하듯 그가 말했다.
“절대로 용서 못 한다고 생각했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이런 식으로 우리 사이를 망쳐 버린 널 두 번 다시 안 볼 거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하지? 생각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란다. 그냥 말 그대로 끝이더라고.
그때 깨달았다고 했다. 아, 이건 내가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구나. 아버지한테 우리 사이를 방해받으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것보다, 널 못 보고 사는 게 나한텐 더 나쁜 일이라는 걸 알았다고.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고.
나란히 앉은 벤치에 그와의 간격이 두 뼘이나 벌어져 있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멀리 풍경을 관망하며 읊조린 그의 말은 자백 같았다. 끝까지 부인하려 했지만 더는 꾸며 댈 증거가 없어서 허망하게 죄를 고하는 사람처럼 그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재유를 맥 빠지게 했다. 숨죽이며 바라본 그의 옆얼굴은 예전의 언젠가처럼 붉게 물들지 않았다.
“너한테 염치가 없고 죄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난 네 뜻에 따를 거야.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다고 네 마음이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 다 할게.”
“…죄책감 때문에?”
우주는 고개만 뒤로 한 채 재유를 돌아봤다. 표정 없는 낯선 시선이 지긋하게 따라붙었다. 재유는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말아 쥐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나도 너랑 마찬가지니까.”
“…뭐가.”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목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그의 시선을 감당하기 힘겨워 고개를 돌렸다. 코가 시큰하고 눈가가 홧홧했다. 하찮은 눈물 바람으로 소중한 시간을 얼룩지게 만들기 싫어서 코를 킁 들이키고 헛기침을 했다. 재유의 스르륵 어깨가 젖혀졌다. 우주의 손이 다가와 젖지 않은 뺨을 쓸고 지나갔다.
“…….”
“…….”
그의 얼굴에 서서히 표정이 떠올랐다. 눈썹이 일그러지고 입매가 아래로 쳐졌다. 그 말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이, 들었으니 되었다는 듯이, 재유를 향한 원망을 누그러뜨린 얼굴이었다.
나 정말 속상했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그러니 나 좀 달래 주라고. 아이처럼 무구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 모습에 정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재유는 고개를 사선으로 떨구고 입술을 말아 물며 호흡을 삼켰다. 어깨가 마구 떨렸다. 뺨을 감싸 쥔 손이 부드럽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입술이 이마에 꾹 닿았다 떨어졌다. 재유는 이미 그렁그렁한 눈으로 주위를 불안하게 돌아봤다.
“괜찮아. 아무도 못 봤어.”
“그래도… 여기서도 알려지면 안 되는 거잖아.”
그 말이 우주를 아프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등을 구부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짐짓 장난기를 꾸며 낸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네가 내 애인이라는 거?”
“애인….”
재유는 영영 잃은 줄 알았던 호칭을 되새겼다.
“그래, 애인. 맞잖아. 그치?”
우주는 두 어깨를 지그시 잡고 재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가두듯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맞아. 그래도 우주야….”
“이젠 아버지 아니라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옆에 있는 거야. 내 애인으로서. 그런 각오나 다짐이 없다면 날 더 힘들게 할 뿐이니까 지금 확실하게 말해.”
“…….”
우주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힘이 들어간 눈에는 재유의 대답에 매달리듯 모종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대답해.”
“알았어… 그렇게 할게. 네 애인 맞아, 우주야.”
그의 입가에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못난 행동으로 그에게 깊은 상처를 냈지만, 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봉합할 방법을 찾아 주었다. 그가 준 마음이 분에 넘쳤다.
“이제 나 보고 웃어 줘. 그래야 나도 힘내서 훈련받지. 안 그래?”
“응… 미안해.”
재유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나도 노력할게. 다시 만났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야. 여기서도 잘 버틸 거고.”
“…….”
우주는 재유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이어서 말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나하나 속에 담아 두면 너와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잖아. 이제껏 겪은 일들은 젊은 시절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하자.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텐데, 그런 일들을 겪었으니 앞으론 우리 사이가 더 단단해질 거야.”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재유는 손으로 코와 입을 문지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밭에 싹이 돋은 것처럼 마음에 생기가 피어 올랐다. 우주는 손등으로 재유의 뺨을 쓸어내며 웃었다.
“참, 나 이사했어. 두어 달쯤 전에.”
“그럼 편지들은? 아… 영선이가 줬겠구나.”
“응. 그 집엔 더 이상 있기 싫어서.”
“…잘했어. 새로운 주소 알려 줘. 또 편지 쓸 테니까.”
“응. 근데 나 또 이사해야 할 거야. 곧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됐거든.”
“그래? 이것저것 바쁘겠네.”
“공장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거든. 혹시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어?”
우주는 어깨를 으쓱일 뿐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듯했다.
“글쎄. 회사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정이니까 그렇게 하기로 한 걸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디로 가게 됐는데?”
“아직은 잘 모르지만, 소스 만드는 공장인 것 같아. 케첩이나 머스타드 소스 같은 거.”
“그래? 힘들지 않을까?”
“그래도 지금보단 나을 거야.”
저도 모르게 약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진 않았는데, 실수했단 생각이 들자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우주도 눈치챈 듯했지만 깊게 캐묻진 않았다.
재유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주섬주섬 꺼내 우주에게 건넸다.
“이거… 이번 달 근무표야. 예전처럼 매일 연락할 순 없으니까. 혹시 필요하면 가지고 있으라고.”
“당연히 필요하지. 그래야 네가 집에 있는지 공장에 있는 지라도 알 거 아냐. 흠… 이번 달은 야간 근무가 많네?”
“응. 그래도 네가 전화하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으니까 꼭 전화해 줘”
“나도 매일 전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일엔 몰라도 주말엔 전화할 수 있을 거야. 암튼 잘 간직할게.”
“근데 또 면회를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주말엔 다 주간 근무가 잡혀서. 사실 오늘은 동료랑 급하게 바꿔서 올 수 있었는데.”
우주는 재유의 미간 사이를 바라보며 작게 탄식했다. 예전엔 그래도 간간이 주말 휴일이 잡혔는데 우주가 군대에 가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지시로 의도된 것인지, 곧 떠날 직원에게 주말 휴일은 사치라 생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바꾸도록 해 볼게. 일할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 정도는 해 줄지도 몰라.”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무표를 접어 상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손목시계를 힐끗 보니 면회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이제 겨우 다시 만나기로 한 것뿐,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우주가 2년 동안 여기서 버틸 동안 재유도 새로운 일터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싶었다. 돌아올 그에게 안식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새삼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래서 말인데… 너 휴가 언제 나올 수 있어?”
“100일 휴가 곧 나가. 4박 5일로.”
“그래? 진짜 잘됐다.”
재유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우주가 조용히 마주 웃어 주었다.
“휴가 날짜 미리 알려 주면 휴무 뺄 수 있게 잘 얘기해 볼게.”
“무리할 거 없어. 네가 일하면 일하는 대로, 네가 사는 집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우주를 두고 떠나기 싫어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손을 붙잡고 부대 담장을 넘어 산속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의 눈에 자기를 떠나보내고 자신은 여기 남아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재유는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공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주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할 준비를 했다. 재유는 주위를 살피며 사람이 뜸해진 걸 확인하고는 전보다 얄브스름해진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몇 번이고 당부했다.
“힘들더라도 밥 꼭꼭 먹고 절대 다치지 말고. 알았지? 편지 매일매일 보낼 테니까 너도 꼭 편지 해 줘. 할 수 있으면 전화도 자주 해 주고. 응? 근무시간이든, 자고 있든 전화 꼭 받을 테니까.”
“알았으니까 너무 걱정 마. 너도 아프지 말고 건강 관리 잘해. 응?”
면회 시간이 너무 짧았다. 남아야 하는 우주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동네 형에게 사탕을 뺏겼을 때의 서러운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 울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열심히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매일매일 기다릴 거야.”
재유는 우주를 꼭 안아 주며 속삭였다.
***
우주의 100일 휴가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재유는 그동안 미뤄 뒀던 짐 정리도 마무리하고 틈날 때마다 방을 쓸고 닦았다.
이사 온 집은 작은 방 두 개와 부엌이 따로 있는 어엿한 살림집의 모습이었다. 큰 마당을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다섯 개의 집들이 마주 본 형태였는데, 주로 신혼부부나 아이가 한둘 있는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월세는 그전 집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집 주변은 얕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드문드문 보이는 소규모 공장과 몇몇 농가를 제외하고는 전부 논밭이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15분이 걸렸고, 버스도 1시간 반 간격으로 하루에 10대가 전부인 곳이었다. 그래서 전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 출퇴근을 해야 했다.
재유는 얼마 살지 않고 이사할 계획이어서 사람들과 깊이 친분을 쌓진 않았지만, 마당을 공유하고 있고 대문이 하나여서 그런지 주위에서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총각 혼자 산다고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갖다 주거나, 엄마에게 혼난 아이들이 피신처 삼아 재유의 집으로 기어들기도 했다. 남편들은 아내의 눈을 피해 재유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거나 화투 치는 걸 낙으로 삼았다.
처음 이사 왔을 땐 이런 환경이 부담스러웠는데, 우주를 면회하고 온 이후론 혼자인 자기에게 보여 준 사람들의 관심과 인심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주는 약속대로 매일 편지를 쓰고 자주 전화해 주었다. 재유도 출퇴근 시간에 매일 팬시점에 들러 예쁜 편지지와 스티커를 사고 집에 돌아와 그에게 편지를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가 준 편지와 사진을 보며 휴가 날까지 하루하루 기다리는 게 몹시 즐거웠다.
재유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우주에게 줄 그림을 그리기 위해 2시간 전부터 몰두하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환절기라 길바닥 지천이 낙엽이어서 충동적으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주에게 이 낙엽을 보여 주고 싶었다.
편지지 왼쪽 하단에 낙엽을 붙이고 나머지 여백에는 그림을 채워 갔다. 면회를 했던 당시의 부대 풍경이었다. 공원 내 벤치와 나무들, 부대 건물과 멀리 보이는 높은 산까지 풍경으로 그리고 나서 가운데 부분엔 마주 보고 서 있는 우주와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우주의 군복을 어떤 색감으로 채울지 색연필을 고르며 이마를 찡그리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우주인가? 재유는 화색을 띠고 핸드폰을 낚아채듯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익숙하게 들리던 콜렉트콜 안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잘못 걸려온 전화인가 싶어 끊으려는데 작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야, 인애.
“아….”
-지금 좀 만나 줘.
“…무슨 일인데?”
-집 앞이야. 문 좀 열어.
‘장례식장에서 걔가 널 보는 눈빛이 딱 봐도 감정이 있어 뵈던데, 살까지 섞었으니 그냥 이대로 끝나진 않을걸.’
불현듯 영선이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재유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려.”
마당을 거쳐 대문을 열자 정말 장인애가 있었다. 찬바람에 오래 걸었는지 볼이 빨갰다. 재유는 이 상황이 뭔가 싶어 머뭇거리는데 장인애가 화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이렇게 세워 놓을 거야?”
근처에 편의점이나 커피숍이라도 있다면 거기로 갈 텐데, 이 추운 날 갈 곳은 제집밖에 없었다. 재유는 하는 수 없이 대문을 열고 장인애를 안으로 들였다.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그보다 집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장인애는 그전에도 재유가 핸드폰을 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었다.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재유는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안쪽 방 말고 옷이나 짐들을 두며 쓰고 있는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장인애는 천천히 따라 들어오며 눈으로 구석구석 집을 훑어보았다.
“뭐 따뜻한 거라도 줄까? 커피 있는데.”
“커피는 됐어. 물이나 좀 줘.”
재유는 작은방 바로 맞은편 부엌에서 주전자에 물을 넣고 가스 불을 올렸다. 컵과 쟁반을 꺼내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선이 느껴져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자, 여기.”
찬물과 조금 섞어 바로 마시기 좋을 만큼의 따뜻한 물을 장인애에게 건넸다. 어떤 볼일로 나를 찾아왔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나 임신했어.”
“…….”
풀풀 날아갈 듯 가볍게도 말했다. 눈 밑이 파르르 떨려 왔다. 잠시 멍해졌다가, 심장이 땅에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장인애의 전화를 받던 순간부터 내내 느끼던 불안이 이거였나.
우주의 얼굴이 아른거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선뜻 믿을 순 없었다. 재유는 자연스레 장인애가 이 시간에 외진 집까지 찾아와 거짓말을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런 재유를 비웃기라도 하듯 장인애는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언젠가 찝찝하고 석연찮은 고백을 할 때처럼 자기 할 말을 거침없이 꺼냈다.
“20주쯤 됐어.”
“…그니까, 네 말은… 그때… 그래서… 애가 생겼다고?”
“맞아. 넌 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때 생긴 거 맞아. 네 애도 확실하고.”
장인애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지친 기색이었지만 말투는 될 대로 되라는 듯 담담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재유는 무의식적으로 외투를 벗은 장인애의 배를 살폈다. 임신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배가 홀쭉했다. 정말 임신이라고. 저 배 속에 애가 있다고. 말도 안 됐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상관없어. 내 소문, 너도 들어 봤지?”
실고 동기 녀석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폭주족과 놀러 다니며 가출도 여러 번 하고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들이대서 자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뭐, 어느 정도는 맞고, 어떤 건 틀린 것도 있어.”
뭐가 맞고 뭐가 틀리다는 건지. 가출한 거? 아무 남자와 자고 다닌 거? 방탕하게 놀았던 거? 좋은 소문이 하나도 없어서 다 틀렸다 해도 과연 그럴까 싶을 정도로 미심쩍었다.
“내가 공장 기숙사에서 사는 건 알고 있었어?”
“…….”
이름과 나이 빼고 아는 게 거의 없는데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어이가 없어진 재유는 코웃음을 쳤다.
장인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싸늘하게 시선을 돌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모든 잘못이 재유에게 있다는 듯 자기는 피해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처음엔 나도 몰랐어. 근데 입덧이 점점 심해져서 결국 알게 됐을 땐 벌써 10주였어.”
“왜 그때… 말해 주지 않았어?”
“이미 네가 그날 일은 없던 일로 하자고 해서. 도통 날 좋아하는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재유는 두 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밀려난 얼굴 살이 주름처럼 겹쳐졌다. 한순간에 바싹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너… 다 알잖아. 내가 누구랑 만나는지, 내 상황이 지금 어떤지….”
“널 좋아했던 건 맞아. 지금도 좋아해. 네가 우주를 만나는 건… 그땐 상관없었어. 그래서 네가 힘들 때 네 옆에 있어 주고 싶었고. 결과적으론 네가 술 먹고 방황할 때 그 틈을 파고들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지만… 난 후회 안 했어.”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넌?”
재유가 언성을 높였다. 혼란스러웠다. 버럭 소리 지르자 인애는 구석에 몰린 쥐처럼 몸을 움츠리며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내가 무섭게 한 건가? 재유로서는 폭탄선언을 한 장인애가 백 배 천 배는 더 무서웠다.
“…미안. 조금 흥분해서.”
“…….”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장인애는 잠시 노려보더니 눈을 내리깔고 손끝으로 치맛단을 불안정하게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재유는 고동치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과호흡이 올 지경이었다.
“입덧 때문에 공장도 그만뒀어. 더 이상 숨기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몰랐었다. 그저 공장에서 안 보이길래 근무시간이 맞지 않는 거라 내심 안심했었다.
장인애의 입에서 나올 말이 예상되었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자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주야. 이 일을 어쩌면 좋겠어?
“기숙사에서도 나와서 집으로 갔는데, 임신한 거 들켜서 쫓겨나다시피 나왔어. 어릴 때부터 부모랑 사이가 안 좋거든. 지우고도 싶었어. 그래서 병원도 갔었는데 차마 할 수가 없더라. 왜 그랬는진 나도 몰라. 그냥 낳고 싶었어.”
“…낳겠다고.”
“그날 널 유혹해서 관계를 가지긴 했지만, 너도 마냥 거부하진 않았잖아.”
“후우… 그래. 그래서?”
“막상 이렇게 되니까 너무 무서웠어. 고민만 하다가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고. 혼자 끌어안는다고 해결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럴 바에야 널 설득해서… 받아 달라고 말하려고 온 거야.”
“받아 달라니… 뭘?”
재유는 뻔한 답을 알고서도 물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가 예상을 벗어난 참사를 일으켰고, 기어이 현실 앞에 나타나 책임을 묻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걸까.
“나 지금 찜질방에서 지내고 있어. 돈도 다 떨어져 가.”
“낳을 거라는 거… 진짜야?”
“어. 난 낳고 싶어. 네가 날 버리든 어쩌든 낳을 거야.”
순간 장인애의 말에 기가 막혔다. 재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꽉 물고 장인애를 내려다봤다.
“내가 널 버린다고? 내가 너한테 뭐길래 널 버리고 말고 해? 우리가 뭘 했다고. 우리가 그런 말을 할 만한 사이였어? 밥 한 번 먹어 본 적 없고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는데. 오다가다 인사 몇 번 한 게 다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낳을 거니까 버리든 말든 하라고?”
갑자기 닥친 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을 장인애의 탓으로 돌렸다. 한순간 장인애를 여기에 묶어 두고 도망치고 싶었다. 씩씩거리며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장인애를 노려보았다. 그녀도 지지 않고 재유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같이 잔 건 사실이잖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숨이 멎었다. 장인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 든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거무죽죽하고 희끄무레한 종이쪼가리가 반들거리며 눈앞에 놓였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확인한 종이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었다.
“여자애래. 애가 좀 작대. 조산 위험도 있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 임신하고 술 담배 다 끊었어. 네가 책임 못 진데도 난 얘 낳아서 내 눈으로 꼭 얼굴 볼 거야. 이름도 지어 주고 노래도 불러 주고 머리도 묶어 주면서 예쁘게 키울 거야.”
재유의 미래가 못 박히듯 규정된 순간이었다. 갈퀴 같은 손이 재유를 끄집어 장인애와 함께하는 진창으로 처박으려 했다.
“어떻게… 어떻게 너 혼자 키울 건데? 공장도 그만뒀다면서 무슨 돈으로.”
“그럼 얘 죽여? 너야 말은 쉽지. 애기가 배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어.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고. 책임 안 질 거라면 넌 이제 상관없잖아.”
재유는 손등에 혈관이 보이도록 주먹을 움켰다. 빙빙 돌던 천장, 장인애의 흐릿한 인영, 엄마의 영정사진이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왜 상관이 없어. 내 핏줄이라는 애가 아빠 없이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
“아아….”
재유는 방금 자신이 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20주라는 아기는 제법 커 보였다. 얼굴과 팔다리가 제법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고, 예정일은 내년 4월 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5개월 후엔 아이가 태어난다. 태어난 이후론 우주와 정말 끝이 난다는 뜻이다.
우주와 지내 온 지난날들이, 앞으로 함께하기로 한 약속이 덧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인생은 또 한 번 예기치 않게 재유를 새로운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기 있어.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재유는 겉옷을 챙겨 장인애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집을 나왔다. 한순간도 더는 장인애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정말 지옥으로 끌려 들어갈까 봐 절망감을 안고 무겁게 발걸음을 뗐다.
대문을 박차고 두렁길을 걸었다. 정말로 땅속에서 손이라도 튀어나온 건지, 두 다리가 밑으로 아득히 딸려 들어가는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해가 짧아져 7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어둑해졌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진 시골길에서 얼굴이 창백한 사자의 손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재유는 온 힘을 다해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이 턱 밑까지 찼을 때도 멈추지 않았다. 써늘한 바람이 뺨을 때리고 밤에 활동을 시작하는 산짐승들의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달렸는데도 몸에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재유는 가로등이 끊긴 산어귀까지 올라서야 달리는 걸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역겹게 느껴졌다. 재유는 풀숲에 서서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토하지 않아도 위에 든 것은 쉽게 쏟아졌다. 토사물의 역한 냄새가 재유에게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냄새가 말을 했다. 이게 원래의 네 모습이라고.
한정호가 떠올랐다. 작은 실패로 유혹에 흔들리고 책임을 내던진 그는 자신과 닮아 있었다. 재유는 다시 토악질을 했다.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아이만 없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다. 우주도 용서하고 날 받아 주었으니까. 다시 장인애에게 가서 얘기해 볼까. 너도 아직 어린 나이니, 아기를 키우는 것보다 네 인생을 사는 게 낫지 않느냐고.
아니, 애초에 장인애에게 애를 지우라고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것은 확고한 얼굴로 낳겠다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실수를 늘리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기엔….
아기의 몸이 너무 자랐다. 1시간 전만 해도 있는 줄도 몰랐던 아기에게 벌써 감정이 생긴 건 아니지만, 아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평생 잊지는 못하리라.
장인애를 선택한다면 우주를 다시 한번 배신하는 것이고, 우주를 선택하면 배 속의 아이는 고아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주와 함께한들 행복할 수 있을까.
그날로 되돌아간다면 그런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와 아무 소용없는 후회를 하며 재유는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가 있는 곳이 이미 진창이었다.
***
아침 공기가 더없이 신선했다. 우주는 설렌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요 근래 편지가 오지 않아 불안했었는데, 어제 겨우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재유가 직접 부대로 마중 온다고 했다. 우주는 기쁜 나머지 잠까지 설칠 정도였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세수를 하고 콧노래를 불렀다. 신병들끼리 모이고 대대장에게 휴가 신고도 마쳤다. 뒤이어 스무 명이 넘는 선임들에게까지 지긋지긋하게 신고를 한 후에야 겨우 부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강 실장을 부대로 보낼 테니 함께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따를 생각은 없었다. 이미 재유와 만날 시간과 장소를 맞춰 놓았다. 강 실장에겐 군 동기와 읍내에서 일정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따돌린 후 재유와 만나 함께 떠나기로 한 참이다.
짧은 휴가 동안 재유를 실컷 보고 그 원동력으로 군 생활을 이어 가야 한다.
한 번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른 적 없는 착한 아들이었는데 마음이 무겁기는커녕 가벼운 일탈에 몸에서 활력이 돋는 느낌이었다.
재유만 곁에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어떤 난관이든 헤쳐나갈 수 있었다. 어머니와 형에겐 미안했지만, 이제 재유와 절대 헤어지지 않기로 다짐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젊다는 게 그랬다.
우주는 동기 한 명과 버스를 타고 읍내에서 내린 뒤 재유와 만나기로 한 다방으로 함께 들어섰다. 강 실장은 예상대로 읍내까지 따라붙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좁고 매캐한 다방 안에는 불안한 표정의 재유가 커피를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재유. 기특하기도 하지.
눈이 마주치자 입이 저절로 헤벌어졌다. 도통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간단하게 서로 인사시키고 동기에게 고맙다고 거듭 말한 뒤 커피값을 치르고 둘이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다방 구조를 알고 있었기에 선택한 장소였다.
재유의 손을 잡고 달렸다. 날이 참 좋았다. 좁은 뒷골목 공기도 상쾌하기만 했다. 코너를 몇 번 돌아 골목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이웃한 지역의 버스터미널로 행선지를 불렀다.
“놀랬지? 집에서 차를 보냈는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휴가 내내 집에 붙들려 있어야 하니까.”
“…난 괜찮아. 근데 우주야.”
“응?”
“우리 집 가지 말고 그냥 이 근처에서 지내면 안 될까?”
그제야 재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잠을 못 잤는지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 갈 듯 작았고, 의도적으로 눈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혹시 우리 집 일 때문에 그래?”
“그건 아니고… 내려서 얘기하자.”
“응… 근데 너 괜찮아?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
재유는 미약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스레 살피는데, 재유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는 건가. 재유의 수상한 분위기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생겼음이 틀림없었다.
30분쯤 달려 택시에서 내릴 수 있었다. 터미널 주위로 소규모 장터와 몇몇 숙박업소, 낡은 유흥가 건물들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버스를 타고 장운으로 가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재유는 고집스레 자기 집으로 가기를 꺼렸다. 설마 아버지가 해코지한 게 아닌가 싶어 애가 닳았다.
“…밥 먼저 먹을래? 배고프지 않아?”
“아니. 안 고파. 넌?”
“나도 됐어. 그럼 저기로 가 보자. 일단 짐부터 풀고, 그러고 얘기하자, 응?”
우주는 가까운 모텔을 가리켰다. 그러자는 재유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객실로 들어올 때까지 기운 없이 잔뜩 움츠러든 그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우주는 가방을 내려 두고 군복 상의를 벗어 벽에 걸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숨 막히는 침묵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재유는 방 입구에 서서 그 자리에 소멸이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몸을 구기고 있었다.
“이리 와. 왜 그래, 무섭게.”
우주는 등받이가 해진 1인용 소파 옆에 서서 재유를 불렀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데, 그는 오히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늘 희고 말갰던 얼굴이 납빛으로 어두웠다. 우주는 꼴깍, 소리가 나도록 침을 삼키고 한 발짝 다가가 재유와의 공간을 없앴다. 손을 들어 뺨을 감싸자 곧 자포자기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주야….”
“응. 말해.”
“나 이제… 네 애인 못 해.”
“무슨 소리야?”
“나랑 잤던 여자. …임신했어.”
“응? 뭐?”
충격이 전해지기도 전에 그 이유란 것이 전혀 뜻밖이어서 머리가 잠시 주춤했다. 재유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그 말뜻을 본인이 이해하고 내뱉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로는 분명히 들었다. 해석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이국의 언어처럼, 고대의 사어처럼, 낯선 지역의 방언처럼 난해하고 뜬금없었다.
“…….”
“…….”
내리깐 속눈썹이 가지런하고 예뻤다. 문득 그 청아한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턱을 받쳐 들고 눈두덩에 촉촉 키스를 했다.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아픔이 느껴졌다. 그의 살에 입술이 닿으니 안심이 됐다. 키스를 하면, 방금 들은 말을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잊혀질 것 같아서 우주는 정성 들여 재유의 얼굴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그 말이 이 낡은 모텔 방을 뚫고 나가 산화되길 바랐다.
“나 좀 보고 얘기해. 그게 무슨 말이야.”
“미안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널 보러 가는 게 아니었는데…. 나 때려도 돼. 죽여도 돼. 너한테 미안해서 정말….”
재유가 제 얼굴을 감싼 우주의 손을 붙잡으며 침통하게 말했다. 우주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널 왜 때려. 나 봐 봐. 내 얼굴 좀 봐 보라고.”
감싼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려 눈을 맞추게 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눈언저리에 손을 갖다 대고 가만가만 문질렀다.
“아니잖아. 그치? 그런 거 아니잖아. 내가 너랑 왜 헤어져. 겨우 다시 만났는데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돼, 그치?”
“…낳을 거래. 지울 수가 없대. 이미 5개월이고… 딸이래.”
구체적인 단어가 열거되었다. 머릿속에서 펑 하고 무언가가 폭발음을 일으켰다.
“그런데 왜! 그래서 뭐!”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주야.”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독처럼 퍼졌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손이 먼저 나갔다.
짝- 날카로운 살 소리가 좁은 방의 허공을 울렸다. 재유의 뺨을 때린 걸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 멍하게 손바닥을 응시했다. 자기는 염창섭의 아들이 맞나 보다.
맞은 사람은 이쯤 예상했다는 듯 아무런 저항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문 입술을 굳게 맞물려 턱이 잘게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근데 우리가 왜 헤어져?”
“…….”
“낳으라고 하면 되잖아. 애 키울 돈 주면 되잖아. 아님 너 혼자 키워도 되잖아. 근데 왜.”
“…미안해.”
“닥쳐! 미안하단 소리 좀 그만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넌 아무 데도 못 가. 절대 안 돼.”
분노와 흥분으로 몸이 떨려 와 우주는 제 팔을 끌어안았다.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 보려 안간힘을 쓰며 아랫입술을 물어뜯듯이 깨물었다.
“허… 이런 식으로 헤어지자고. 이렇게 날 버린다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걔도 나도 혼자 키울 상황이 안 돼. 걘 지금 입덧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 난 대체복무 중이고. 내가 일할 동안 누가 봐 줘야 하는데 난… 혼자 키울 자신이 없어.”
“…지금 내 앞에서 그 여자 편드는 거야? 내가 걔 사정 봐 가면서 너랑 헤어져 줘야 되냐고.”
“…….”
사랑이 이렇게 배신을 한다. 대비할 틈도 없이 기습적으로.
눈에 불이 붙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활활 열이 올랐다.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그래서… 그 여자랑 같이 살기라도 한다는 거야? 같이 밥도 먹고 잠도 같이 자고 애 키우면서 결혼…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우주는 ‘결혼’이라는 말을 뱉어 놓고 기분이 더러워져 씻어내듯 입가를 벅벅 문질렀다. 이런 감정은 살면서 겪어 본 적이 없기에 어떤 말과 행동이 튀어나올지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재유는 애를 낳는 게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게 포기만을 강요하고 있다. 아무리 연락이 자유롭지 못한 군인 신분이지만, 들뜬 기분으로 100일 휴가 나온 사람에게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이별을 해 달라니.
어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사랑해서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애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같이 살기만 하지 잠자리도 안 할 거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니까 애가 조금만 크면 그 여자랑 헤어지고 네가 전역하면 너랑 같이 살고 싶다….
이런 허접스러운 변명이라도 기대했다. 그런데 재유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거면 내가 줄게.”
“우주야 제발….”
“내가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돈 얻어다 줄 테니까 그 돈 그 여자한테 주고 애 크는 거 지켜만 봐.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공장 다니면서 일이나 해. 내가 전역할 때까지 그 여자랑 눈도 마주치지 마.”
“…미안해.”
“젠장….”
우주는 그 빌어먹을 미안하다 소리에 신물이 나서 악을 질렀다. 분노를 가둘 육체가 한계치를 넘어섰다.
재유를 죽이고 싶다. 그런 다음 자기도 죽고 싶었다.
우주는 그를 죽이는 대신 촌스러운 장식의 비둘기색 화장대로 다가가 거울을 깼다. 그 위에 놓인 물건들을 바닥으로 내리 쓸었다. 싸구려 스킨로션과 헤어드라이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유리에 베였는지 손바닥에서 뜨뜻한 피가 새어 나왔다. 더 망가트리고 깨부술 게 없나 고개를 휙휙 돌리다 그가 눈에 들어왔다.
“…….”
충격과 증오로 이성이 뒤덮였다. 우주는 자리에서 쓰러져 주먹으로 바닥을 쿵쿵 치며 앞섶을 미친 듯이 쥐어뜯었다.
“그러지 마… 우주야, 하지 마….”
재유는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며 뜯어말렸다. 우주는 재유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론 멱을 잡아 얼굴을 가까이 맞붙였다.
“네가 이러고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미안해….”
“미안하단 소리 좀 제발 그만해!”
으으흑. 신음을 낸 재유는 멱살 잡힌 몸을 옹송그리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나라고 그렇게 살고 싶겠어?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애 아빠 돼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고 싶겠냐고.”
“누가 그렇게 살래? 애 지우면 되잖아.”
“그럴 수가 없다고. 내 아이라는데… 어떻게 지우라고 해!”
“…….”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이런 이유였나. 우주는 헛웃음이 났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에 새기고 가슴에 새겨 내 안에 일부가 된 재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아… 애가 필요한 거였어? 너, 아이가 갖고 싶었던 거야? 그럼 애초에 나랑 사귀는 게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네. 남자끼리 애는 못 만드니까. 넌 네 핏줄이 그렇게 소중해? 아직 세상 밖에 나오지도 않는 애 때문에 나랑 끝낸다고?”
우주는 재유를 거리낌 없이 밀쳐냈다. 몸에 비정상적으로 힘이 들어가 있는 건지 나동그라진 그는 뒷머리가 벽에 부딪쳤다. 그의 눈에 슬픔과 자책이 번졌다.
“그럼 나랑 대체 왜 만난 거야? 아아… 나랑은 언젠가 끝낼 생각이었구나? 딴 사람들처럼 여자랑 결혼도 하고 애도 만들어야 되니까?”
“우주야….”
“넌 선택지가 많아서 좋겠다. 애초에 여자랑 잔다는 게 가능했으니까 떡하니 애도 만들었겠지. 드러운 바이 새끼.”
미안하다는 말 대신 잘못했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헤어져서 미안한 게 아니라, 잘못했으니 애가 생겨 버린 제 사정을 한 번만 이해해 달라고.
재유는 그 여자와 잤던 일을 충분히 사죄했고 자신도 용서한 일이었다. 물론 완전히 잊히진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 하루하루를 훈련에 몰두하려 애썼고 재유와 함께할 앞날만 생각하려 노력했다. 한 번 잔 건 별 게 아니나,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자신을 떠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너… 나 좋아하긴 했어?”
“…….”
“대답해!”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어. 너만 좋아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해도.”
“그럼 그렇게 얘기해!”
재유는 지독하게 지쳐 보였다. 떨리는 눈가, 씰룩이는 뺨, 고집스레 물고 있는 입술로 감정을 가둔 얼굴은 아슬아슬하게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애는 태어나. 그건 변함없어.”
그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고 깨진 거울 조각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우주는 그 동선에 따라 시선을 옮기며 허탈하게 보고만 있었다.
기어이 애가 태어나는 걸 볼 생각인가 보다. 저렇게 잔인한 놈을 이토록 사랑했었나.
재유는 우주가 벗어 둔 가방도 침대 옆에 바르게 세워 두고 뒤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자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냥 가야겠다. 부서진 물건들은 내가 프론트에 말해서 변상할게.”
“…간다고.”
“그래. 나랑 잔 그 여자, 오갈 곳도 없어서 지금 내 집에 살고 있어. 아직도 입덧이 심해서 보살펴 줘야 돼.”
“그 여자한테 간다고….”
재유가 현관 앞에서 나가려다 말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걔랑 산 건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지내보니 좋은 것도 있더라.”
“…….”
“걔도 만만치 않게 밑바닥 인생에 콩가루 집안이라 동질감 느껴지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걔 옆에 있으면 마음만은 편해. 그러니까 그냥, 못난 것들이 끼리끼리 만나서 꼴값하며 산다고 생각해.”
꾸역꾸역 말을 마친 재유가 객실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우주가 달려 나가 한 손으로 문을 쾅 닫으며 그를 막아섰다.
“…나쁜 새끼.”
재유의 몸을 억지로 돌리고 벽 쪽으로 몰아세웠다.
“이렇게 간다고? 이렇게 끝이라고?”
“우주야, 이제 놔 줘.”
“너랑 만나려면 도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소문, 너도 겪어 봤잖아. 네가 나랑 엮여서 좋을 게 뭐가 있어.”
“그래, 좋아! 애 낳아 봐. 낳아서 살아봐. 근데, 애가 태어나면 날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노력할 거야. 성실한 아빠가 되도록. 그래서 나같이 빚만 물려받은 거지 같은 인생 살지 못하게 최선을 다할 거야.”
재유는 확고해 보였다. 며칠간 연락이 안 된 이유가 이거였다. 그 짧은 사이에 임신했다고 찾아온 여자랑 같이 살고, 낳기로 결심도 하고, 나랑 헤어지기로 마음까지 굳혔다.
좀 너무했다. 잔 것까지 눈감고 넘어가 줬는데. 그 여자랑 잤든 어쨌든, 아직 날 좋아한다고 하니까 재유 하나만 보고 다 덮어 뒀는데.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아서 문득 생각나면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데.
다 용서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했을 때 벅차게 울먹였으면서.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어지게 싸 왔으면서. 매일같이 예쁜 글씨로 정성스레 쓴 편지를 보내 줬으면서. 어쩌다 통화할 땐 끊는 게 아쉬워 수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도 들려줬으면서.
그런데도 네가, 그 여자한테 가겠다고.
우주는 낮게 으르는 소리로 따져 물었다.
“그러지 마. 난 어쩌라고. 어떻게 살라고.”
“…….”
“그럼 넌 내 옆에 있으면서 위축되고 주눅 들었어? 날 만나서 행복하지 않았던 거야? 어?”
“그만해. 너한테 이제 난 과거가 될 거야. 너라면… 괜찮을 거야.”
“내가, 괜찮을, 거라고….”
우스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어깨가 떨렸다. 눈을 구긴 채 입으론 키들거리며 웃었다. 우주의 눈에 시커먼 그늘이 덮쳤다. 소름 끼치는 결빙음을 내며 마음이 얼어붙고 있었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머릿속엔 온통 불길한 지배욕이 안개처럼 번져 갔다. 우주는 재유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어 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알아. 네 옆에 있으면 네가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까지 행복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이었으니까.”
“착각?”
우주의 얼굴에 웃음이 멎었다. 재유를 잡아끌고 침대에 거칠게 밀쳐 버렸다. 하반신을 다리 사이에 가두고 상의를 잡아 뜯듯이 벗겨 냈다.
“우주야… 하지, 마!”
“네가 착각한 게 착각인 것 같아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까? 난 그냥 보통 남자고, 평범한 사람이었어. 근데 네가 나랑 헤어진다니까 눈에 뵈는 거 없이 이런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개새끼도 될 수 있는 사람이야. 근데 뭐? 긍정이 어쩌고 어쨌다고?”
그딴 거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고 악다구니를 썼다.
“너한테 미친놈처럼 매달릴 수도 있어. 네가 내 옆에 있어만 준다면 네 애 뱄다는 여자 발가락이라도 핥을 수 있어. 근데 뭐, 네가 날 알아?”
재유는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완력에 의해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험악한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해맑게 웃던 눈이 질투와 분노와 배신감으로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그 눈은 마치 딴 사람 같았고, 다정하게 만지던 손길은 배려 없이 재유의 몸을 휘젓고 다녔다. 더구나 그는 재유의 목에 걸려 있어야 링 목걸이가 없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
“그새 반지도 뺐네? 그 여자가 빼라던?”
“아냐. 하지, 마, 그만, 우주야!”
상의가 벗겨지자 곧바로 바지 위로 손을 갖다 댔다.
“왜? 너도 나랑 하는 거 좋아하잖아. 오죽 좋았으면 나로도 모자라 딴 년하고도 그 짓을 했겠어, 안 그래?”
“으윽, 우주야. 제발….”
“헤어지는 판에 한 번 대 주면 안 돼? 어차피 지조 없이 막 굴리는 몸인데, 안 그래?”
재유가 얼굴과 어깨를 힘껏 때리며 몸부림쳤지만, 우주는 아무렇지 않게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그만….”
“왜, 벌써 흥분돼? 아직 멀었는데 좀 참아 봐.”
우주는 바닥에 나뒹굴던 러브젤을 낚아채고 포장을 뜯었다. 젤을 짜내자마자 한꺼번에 손가락 세 개를 엉덩이 사이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아악!”
우주는 재유의 아픔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휘저어 길을 넓히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분이 풀리지 않았다. 성에 차지 않았다. 망가뜨려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다.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리라. 재유를 꺾어 내 안에 가두겠다는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좋지? 너 이거 좋아했잖아. 내 말 맞지? 지금도 좋은 거지?”
“끄윽… 우주, 야. 아파!”
“걔랑 할 때도 이렇게 흥분했어?”
우주가 재유의 유두를 사정없이 비틀어 꼬집었다. 그러면서도 아래에 파묻힌 손가락을 멈추지 않고 더 난폭하게 쑤셨다. 목과 얼굴을 포함해 상반신 전체가 벌게진 재유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우주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빡빡하게 들어찬 굵은 손가락들이 드나들기엔 젤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손가락은 자비 없이 그곳을 헤집었다. 쪼그라든 재유의 성기를 세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감싸 밀어 올렸다.
“한재유, 이거 왜 안 서? 평생 쓸 일 없을 줄 알았더니, 여자 상대로 총각 딱지 떼고 애까지 만들었으면서. 아, 근데 콘돔을 못 찾겠네. 괜찮지? 너도 그 여자랑 콘돔 없이 했으니까 애가 생겼을 거 아냐.”
“윽, 우주야, 그만….”
“왜. 괴로워? 뭣 때문에 날 이렇게 거부하는데?”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흐윽, 흑….”
슬픔이 이유인지 아래의 아픔 때문인지 그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재유는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목 놓아 엉엉 울었다.
“…….”
우주는 모든 동작을 멈췄다. 노기가 꺾이고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어도 재유가 우는 건 지켜보기 힘들었다. 분노는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한편에 미뤄 뒀던 고통이 밀고 들어와 가슴이 속절없이 메었다.
“…그러게 왜 그 여자한테 간대!”
되돌릴 수 없는 그 시절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우리는 지금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주는 팔을 풀고 비참한 심정으로 재유를 내려다봤다. 그는 눈을 까뒤집고 짐승처럼 거세게 흐느꼈다. 강제로 옷을 벗기면서 났던 생채기가 흰 피부 위에 빨갛게 도드라졌다.
우주는 치욕과 절망을 느끼며 고개를 맥없이 가로저었다. 따귀를 맞아 부푼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이마에 배어든 땀을 닦아 주었다. 제 손으로 만든 처참한 그의 몰골을 견디기 힘들었다.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애원하듯 속삭이고는 아직 가쁜 숨을 쉬며 울고 있는 재유의 입술을 덮쳐 키스를 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뜨거운 타액이 독주처럼 느껴져 입이 썼다.
이 녀석은 정말,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걸까.
재유의 몸을 몸으로 덮어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품 안에 그가 있었다. 이렇게 만질 수 있고, 숨결을 느낄 수 있는데, 그는 만나자마자 줄곧 이별을 얘기한다. 어떻게 우리가 헤어질 수 있을까.
울컥하고 울음이 터져 나와 입술을 뗐다. 흐릿하게 번진 눈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 눈을 몹시도 사랑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슬금슬금 눈치를 볼 때도, 가만히 내리깔며 얼굴을 붉힐 때도, 초승달 모양을 하며 환한 웃음을 보여 줬을 때도.
눈물로 범벅이 된 가느다란 재유의 눈에서 아직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열망의 빛을 애써 찾아보았다. 하지만 슬픔과 좌절에 매몰되어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체념만이 그 눈에 서려 있었다.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먹장 같은 절념. 그것만이 눈에 비쳤다.
이 시간이 지나면 재유가 나를 버려두고 갈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것이 참을 수 없이 비통했다.
“…….”
“…….”
아버지가 이제껏 헛된 일에 기운을 뺐네.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어도 당신 뜻대로 되어 버렸는데.
“너, 진짜….”
우주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애인의 부재, 추잡한 소문으로 미래가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울 때 단 한 번의 관계로 아이가 생겼다. 애정 없는 관계가 실수였다고 해도 약하고 여려 빠진 성격으론 차마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믿을 만한 피붙이 하나 없는 심정까지야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재유에게 자식이 생겼다는 건 어쩌면 살아갈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대가로 자기와 헤어지더라도 기꺼이 책임을 떠안을 것이다.
제 욕망과 행복은 뒤로하고 세상의 눈에 안전해 보이는 울타리를 스스로 짓고 싶을지도 모른다. 계속 내 곁에 있는다면 아버지의 방해로 주위의 시선에 주눅 들고 결국엔 시들시들 말라 버려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른 채 껍데기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가 보지 않은 길이다.
나와 함께한다고 해서 더 불행하다 할 수 없고, 그 여자한테 간다고 해서 행복할 거란 보장도 없다. 애가 생겼다고 억지로 이어진 관계가 어찌 탐탁하기만 할까.
절망적인 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시기에 놓인 최악의 상황이다. 집에선 눈에 불을 켜고 둘을 갈라 놓으려 하고, 자신은 군대에 처박혀 있으며 그 여자는 아이 낳기를 고집하고 있다.
성인이 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감당하기 버거운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럼에도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열쇠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선택은 재유가 한다. 그 처분에 따라 제 인생도 달라질 거다.
우주는 둘의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중요한 기로라는 걸 깨달았다.
“나한테 기대면 안 될까. 그 여자한테 가더라도… 언젠가 나에게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다릴게.”
“우주야. 그럴 수가 없어…. 너도 나처럼 지옥에 빠지게 될 거야.”
“괜찮아. 오늘이 마지막이지만 않으면 돼.”
우주는 다음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재유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짓뭉개진 마음이 형체도 없이 아픔으로 떠돌고 있었다. 그의 몸을 만질 때마다 가슴이 미어터질 듯 저려 왔다.
“…얼마든지 기다릴게.”
품 안에 가두어 둘 수 있을 줄 알았던 육체는 덧없이 떠나가려고만 한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내 것이 되지 않을까.
다시 입술을 맞물었다. 어느새 눈물이 멎고 열 뜬 숨이 쏟아져 나왔다. 재유의 손이 짧게 깎은 머리를 망설이듯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만져지고 있는데도 이 손길이 너무도 그리워져 신음은 탄식이 되고, 실체도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우주는 조금 전 난폭하게 굴었던 곳들을 살살 쓰다듬으며 그의 몸을 만졌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성기가 서서히 힘을 받았다. 곧바로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빡빡한 압박감에 또다시 비명을 들어야 했지만, 그는 거부하지 않고 등을 부여잡으며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은 연인인 건가. 아니면 불륜인 건가. 아니, 결혼은 하지 않았으니 그냥 삼각관계인 건가. 우리 사이를 이젠 뭐라고 해야 할까.
난잡한 생각으로 꽉 찬 머릿속을 텅 비워 내기 위해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하, 앗!”
“으읏!”
사정은 빨리 찾아왔다. 절규와 같은 신음을 토해내며 재유의 배 위에 정액을 흩뿌렸다. 쾌락은 찰나였을 뿐, 그 끝엔 지독한 공허만이 남았다.
우주는 다시는 이런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설움이 담긴 한숨을 뱉어 내며 재유를 간절하게 눈에 담았다. 눈이 붓고, 머리는 심하게 흐트러진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쌕쌕거리고 있었다. 기다린다는 자신의 말에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살펴도 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섹스를 마친 우주가 늘 그랬듯 키스를 하려고 다가가는데, 재유가 얼굴을 돌려 버렸다. 마음이 쿵 내려앉아 다시 시도하려고 손으로 얼굴을 돌렸는데도 끝까지 눈을 피했다.
아. 답을 준 셈이다. 오늘이 기어이 마지막이라고.
우주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욕조 안에 서서 물을 틀어 놓고 한참을 멍하니 섰는데,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재유가 정말 나를 두고 가 버렸다.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
2001년 4월.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희지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