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5. 엇갈림
* * *
손목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주는 이른 아침부터 훈련소 부대 앞을 서성이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재유가 나오길 기다렸다.
어젯밤 하루 앞당겨 논산에 도착한 후 형과 함께 인근 여관에 묵었었다. 잠을 뒤척여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눈은 충혈되었지만 초조하게 제자리를 빙빙 돌며 훈련소 정문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훈련병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로 점점 북적이기 시작했다. 재유처럼 산업기능요원뿐 아니라 사회복무요원, 공중보건의 등 4주 훈련을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대체복무를 하기 위해 퇴소하는 것이라 정문 앞에 모인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혹시 재유의 어머니가 마중 나온 것은 아닐까, 군중 속을 유심히 살폈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마중 나올걸, 뒤늦게 후회가 됐다.
편지로 형의 전화번호를 알렸지만, 재유에게선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답장이 오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지만, 재유의 성격상 아버지가 있는 집에 편지를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여행 소식을 전했으니 마중 온 걸 알고 있을 테지.
운동장에서 수료식이 진행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막바지인 것 같았다. 우주는 바짝 긴장한 채 훈련병들이 언제쯤 나오는지 운동장 쪽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아직 모텔에서 자고 있는 형의 핸드폰도 빌려 왔다. 혹시 엇갈린다면 재유가 전화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손에 핸드폰을 꼭 쥔 채 제자리에서 동동걸음을 치고 있을 때, 사복으로 갈아입은 훈련병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가족이나 연인을 만나 안부를 묻고, 껴안고, 어깨를 토닥이며 각자의 길을 가는 동안, 우주는 아직도 나오지 않은 재유를 애타게 기다렸다.
거의 다 나온 거 아닌가, 내가 놓친 건가, 하던 찰나에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과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다. 짧게 자른 머리 탓에 예쁜 두상이 드러나 슬핏 웃음을 흘렸다. 예뻤다. 침울한 표정이긴 했지만 일단 얼굴을 보고 나니 마음이 크게 안심됐다.
우주는 정문에 바짝 붙어 재유가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바닥만 보고 걷느라 우주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마침내 정문을 넘어서자 떨리는 마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재유야.”
재유는 발길을 잠깐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
방금 겪은 외면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직 화가 난 건가. 곧바로 뒤따라가 소매 아래로 볕에 그을린 붉은 팔을 잡았다. 재유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팔을 거칠게 떼어 내고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한재유… 재유야!”
아무리 불러도 그는 못 들은 체하며 길에 세워져 있던 택시를 타고 떠나 버렸다. 지금 벌어진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우주는 그저 멍하니 서서 그가 탄 택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눈을 떴을 때 자명종이 울리고 있었다. 아침 7시. 엄마가 출근을 위해 맞춰 둔 시간이었다. 힘겹게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이불에 웅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울 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들자 눈에서 또 삐죽삐죽 눈물이 나왔다.
얼마나 잤는지,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문자며 전화며 시끄럽게 울려 대기에 배터리를 빼놓은 핸드폰을 찾아 다시 전원을 켰다.
퇴소하고 벌써 이틀이 지나 있었다. 오늘은 공장엘 나가야 했다.
훈련소에서 돌아와 보니 집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영선이네에게 또 신세를 져 버렸다. 영선은 2학기 개강 때문에 이미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우주도 학교로 돌아갔겠지.
재유는 애써 생각을 갈무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깰 때마다 이 좁은 방이 텅 빈 것처럼 휑해 보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재유는 온몸에 기진함을 느끼며 안에 응어리진 숨을 토해 냈다. 한정호가 가지고 튄 엄마의 예금과 보험 서류를 생각하면 억울함과 허탈함에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저씨의 고집에도 재유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조사를 받는 동안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거나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게 싫었다.
장례를 치르고 훈련소에 복귀한 후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한정호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곁에 있어 주지 않은 우주에 대한 원망이 싹텄다. 그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
재유는 냉장고를 열어 힘겹게 물을 삼키고 상념을 털어내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퇴소 날 제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 귓전에 되살아났다.
냉장고 바닥 언저리에 서류뭉치가 굴러다녔다. 재유는 그것을 공허한 눈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정호가 헤집어놓은 방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그가 최근에 엄마와 만났었다는 얘기는 사실인지도 몰랐다. 서류는 한정호가 남긴 채무를 독촉하고 있었다. 재유를 기가 막히게 한 건, 서류 속 날짜였다. 노름을 하다 진 빚이 아니었다. 그가 아직 회사를 다닐 적에 연대보증을 선 것이었다.
재유는 훈련소를 나오자마자 조부모의 집을 찾았다. 다신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빚 뭉치를 보자 한정호의 면상에 서류를 내던지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날, 우주를 외면했을 때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만나더라도 자신들 사이에 희망은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우주를 뒤로하고 찾아간 조부모의 집에 한정호는 없었다. 재혼한 부인과 몰래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한정호는 결혼하는 여자마다 야반도주를 하는 이력이 있었다. 웃음도 안 났다.
매몰차게 문전박대했던 첫 만남과는 달리 조부모는 재유를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이미 한정호의 밑으로 들어간 돈만 수천만 원이고, 이제 가산이라곤 포목점과 낡은 집 한 채뿐이라며 구구절절 번갈아 가며 한탄을 했다. 요약하자면, 네가 빚 좀 갚아주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재유는 팔과 등줄기에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허탈한 실소를 지은 채 그 집에서 돌아섰을 땐 기온이 높은 한낮인데도 오한이 들고 식은땀이 흘렀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우주의 아버지 공장에 다시 출근해야 한다니. 이율배반이란 이런 것인가. 공장을 때려치우고 군대에 갈 수도 있지만, 뭔지 모를 오기가 생겨 스스로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그야말로 딱 죽고 싶었다.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었다. 재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는 게 고통스러웠다.
***
우주는 자기 방 옆에 있는 체력단련실에서 러닝머신을 최고 속도로 올린 채 달리고 있었다. 방에 가만히 앉아 머릿속을 괴롭게 하느니 차라리 몸을 괴롭혀 정신을 차리고 사태 파악을 하고 싶었다.
재유가 애타게 부르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냉정하게 가 버린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편지로 전한 마음이 무시당한 걸까. 아니, 애초에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긴 한 건가. 열심히 생각해 보아도 답을 알 수 없었다.
형과 함께 돌아오면서 재유네 집에 들렀지만 아무도 없었다. 올 때까지 기다리려는 걸 형이 억지로 끌고 오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형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복학 준비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안 그래도 여행 때문에 많이 미뤄지고 있어서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그를 감시하던 경호원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 밤, 응접실에서 벌어졌던 일이 감쪽같이 지워진 것처럼, 집 안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우주는 기회를 봐서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엄마가 내보내 주질 않았다. 늘 꽃꽂이며 독서 모임 같은 외출로 바빴으면서 그가 돌아온 이후로는 1층 거실을 떠나지 않고 아들의 동태를 살폈다. 마치 감시하듯이.
엄마는 나가려는 우주를 붙잡고 갖은 핑계를 대며 간절하게 사정했다.
‘엄마 곧 저녁 준비할 건데 네가 좋아하는 전복이랑 장어 구워 먹자. 고추장아찌도 새로 했어.’
‘아버지 오늘 늦게 들어오신댔는데 엄마랑 같이 영화 안 볼래?’
‘엄마 머리가 좀 아픈데 네가 옆에 있어 주면 안 될까?’
예상했지만, 엄마도 우리 사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동안 아버지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해도 적극적으로 감춰 주고, 눈감아 주고, 기꺼이 공범이 되어 주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우주는 그런 엄마를 슬프게 바라보며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달린 걸까. 숨이 턱까지 차올라 속도를 줄였는데 버튼을 성급하게 누른 나머지 다리가 적응을 못 하고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턱이 부딪칠 뻔한 걸 가까스로 손을 짚어 얼굴뼈가 으스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대신 정강이와 무릎에 충격이 그대로 전해져 끔찍한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질금질금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우주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에게 그가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비통하기만 했다. 아버지에게 들켰던 그 날보다 지금이 마음은 더 찢어졌다.
감정이 서럽게 북받쳐 올라 우주는 씩씩거리며 제멋대로 울어 버렸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흐르고 호흡이 정리되지 않아 입에서 괴상한 울음소리가 났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왔다. 우주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못 볼 꼴을 본 듯이 얼굴을 잔뜩 구겼다.
“이 새끼가… 못났다 못났다 해도 원… 이렇게까지 못나 빠졌을까. 그깟 일로 쭈그려 앉아서 쳐 울기는.”
우주는 그치려 했는데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그저 할 말만 하고 빨리 사라져줬으면 했다.
“강 비서가 엊그제 병무청 다녀왔다. 네 자원입대 신청했으니까 2주 후에 군대나 가. 이참에 가서 정신 개조 좀 싹 하고 나와. 남자가 좋다느니 그딴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아버지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던지면서도 평소처럼 혀를 끌끌 차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시 한번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
재유는 일하고 있는 내내 시선을 느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 와 주었던 몇몇 동료들은 형식적인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고, 실고 동기 녀석마저도 훈련소에 다녀온 소감 따위를 묻지 않았다.
사내 식당에선 재유를 힐끔거리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가 하면, 말이 통하지 않아 평소에 교류가 없던 중국인 직원들도 재유를 보며 고개를 젓거나 노골적으로 우웩, 하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재유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빨리 집에 가고만 싶어서 일부러 주위에 관심을 껐다. 퇴근 시간이 다 되고 탈의실 문 앞에 도착해서야 사람들이 쑥덕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진짜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
“그렇다잖아. 어쩐지 음침한 게 되게 찝찝하더라. 여자들이랑 말도 안 섞으려고 하고. 술자리도 전혀 안 간다며?”
“걔 사장 아들이랑 동창이잖아. 그 아들 꼬시려고 일부러 이 공장 들어와서 일하고 사장 집에도 들락거리고 그랬다던데?”
“맞어. 그 새끼 고등학교 때도 맨날 사장 아들 옆에 찰싹 붙어 다니기로 유명했어. 사장 아들 좋다는 여자애들도 그 새끼가 뒤에서 다 쳐냈다더라?”
“아 씨, 더러워. 그렇게 살고 싶을까?”
“내 말이. 내 근처에 얼씬만 해 봐라 아주, 거시기를 확 잡아다 꺾어 놔야지.”
“야. 좋다고 더 해 달라 그럼 어떡하냐?”
“뭐? 재수 없게.”
“죽은 지 엄마만 불쌍하지. 아들이 호모인 거 몰랐을 거 아냐.”
재유는 탈의실 문고리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쩌다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인지. 분노와 수치심을 넘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다. 말은 곁가지가 붙고 몸집을 부풀려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막말을 지껄인 놈들에게 주먹질하는 정도로 잠잠해질 수준이 아니었다. 이미 온 공장 사람들이 저를 대고 수군대는 판이었다. 이대로라면 우주의 귀에도, 영선이네의 귀에도 흘러 들어갈 것이었다.
우주와의 거리가 충분히 벌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그는 재유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한재유. 잠깐 나 좀 보지.”
작업반 계장이 재유를 불렀다. 한참을 부른 모양인지 지척에 다가온 그의 얼굴에 불쾌감이 번져 있었다. 계장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않는 재유를 잡아끌어 공장 사무실로 데려갔다.
사무실이래 봤자 철제 책상과 의자 하나, 1인용 소파와 정수기, 소형 냉장고와 철제 캐비닛뿐인 단출한 공간이었다. 곳곳에 얼룩이 묻어 꿉꿉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소파 끝에 앉자 벽에 달린 선풍기가 덜덜덜 소리를 내며 냄새를 더 퍼트리는 것 같았다.
계장은 냉장고에서 드링크 하나를 꺼내 재유에게 건넸다.
“어머니는 잘 보내드리고 왔어? 장례식 때 얼굴 많이 상했던데. 뭐, 지금도 썩 좋은 얼굴은 아니네. 많이 힘들지?”
재유는 푹 꺼진 눈으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표시를 했다.
“이런 말 전하고 싶진 않았는데, 위에서 좀 압박이 들어왔어. 오늘 회사 분위기 봐서 알겠지만… 한재유 씨를 더는 공장에서 받아 줄 수 없을 것 같어.”
“아….”
“사실 대체복무 직원을 해고하는 건 회사에서도 좀 부담이 있긴 한데, 위에서 워낙 세게 말하시니까 원. 아직 뭐 정식으로 결정된 건 아니지만, 일단은 얘기하라고 해서 말이지.”
“…….”
“나나 김 주임도 한재유 씨 성실한 거 어필해 왔고, 지금도 설득해 보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젊은 사람이니까 너무 낙심하지 말고. 알았지?”
“그럼 당장은… 나와도 되는 건가요?”
“아직 퇴사 처리된 건 아니니까. 만약 확정되면 다시 얘기하자고.”
작업반 계장은 좀 더 있다 나오라며 어깨를 툭툭 치며 사무실을 나갔다. 재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빙빙 돌았다.
누가 좀 집까지 데려다주면 좋으련만. 이제 내 곁엔 엄마도, 우주도 없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힘에 겨웠다.
***
우주는 엄마에게 입대일이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듣고는 어이가 없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아직 뭐 하나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는데. 코뚜레를 당겨 도축장으로 소를 끌고 가는 것처럼 아버지는 기어이 우주의 머리채를 잡고 군대로 처넣을 작정이었다. 게다가 소식을 전하는 엄마의 어투에도 미묘한 강압과 명령이 섞여 있었다.
다들 잠들기를 기다리며 우주는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집에만 있다간 영영 재유를 못 볼 것 같은 불안감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새벽 1시가 넘어갈 때쯤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핸드폰을 찾기 위해서였다.
형이 서울로 떠나는 바람에 핸드폰을 빌릴 수도 없었고, 엄마는 집 안에 있는 전화기를 모두 없애 버렸다.
서재로 들어서자 그날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우주는 아랫입술을 꾹 물며 서랍과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졌는데도 핸드폰은 없었다. 버렸을 수도 있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엄마의 방으로 갔다. 자고 있는 엄마의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우주는 떨리는 마음으로 재유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고객이 전화를 꺼두어 연결이….
역시 받지 않았다. 공장으로 전화를 했다.
-네, 1공장입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한재유 씨 근무 중인가요?”
-한재유 씨요? 요 며칠 무단결근인데, 누구세요?
“친구입니다. 그럼 오긴 왔었나요? 훈련소 갔다 오고 나서요.”
-어디 보자… 하루 왔다 일하고 갔네요.
“네… 감사합니다.”
우주는 가슴을 푹 꺼트리며 숨을 내쉬었다. 재유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다 문득 영선이 떠올랐다. 영선이라면 혹시 뭘 알고 있지 않을까? 우주는 외워둔 번호를 키패드에 눌렀다.
-아흐… 여브세여.
“영선아. 나야, 우주. 미안해, 밤늦게 전화해서.”
-…우주? 웬일이야, 이 새벽에. 뭔 일 있어?
“재유가 연락이 안 돼서…. 공장에도 안 갔다 그러고, 혹시 너 아는 거 있나 해서.”
-글쎄? 재유한테 가 보면 되잖아.
“그럴 사정이 아니어서 그래.”
-참나. 뭔 사정이 있길래 그래? 내가 계속 전화했는데도 안 받더니만.
“왜? 왜 전화했는데?”
-몰라서 물어? 아… 너 아직 모르는 거야? 재유 어머니 돌아가신 거.
“뭐… 뭐라고? 재유 어머니가 왜?”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영선에게 재차 확인했다. 훈련소 퇴소하기 직전에 돌아가셨고, 재유는 3일 동안 장례를 치르고 다시 훈련소로 돌아갔다고.
재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우주는 이마를 손으로 덮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고민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전국을 돌며 여행을 하고 돌아와 집에 박혀 있던 시간 동안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었다.
-8월 21일이었나, 울 엄마가 복숭아 나눠주려고 들어갔는데 발견하셔서…. 병원에선 뇌졸중이라고 하더라. 갑자기 그렇게 가셔서 우리도 많이 놀랐어. 너 안 오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재유가 너무 힘들어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참.
“그… 그래서?”
-그래서는 뭐. 암튼 뭔 일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네가 재유 옆에 좀 있어 줘. 재유 지금 제정신 아닐 거야. 아버지라는 사람이 장례식장에 찾아왔었는데, 재유 몰래 집에 들어가서 얼마 있지도 않은 전 재산, 먼지까지 싹 다 털어 갔거든.
“…말도 안 돼.”
재유에게 닥친 불행이 믿기지가 않았다. 우주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뛰쳐나왔다. 엄마의 심정을 헤아리며 집을 나가기를 머뭇거리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어머니의 영정을 지키며 오지 않는 날 뭐라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란 사람의 배신으로 연이은 비극을 겪고 있을 때 곁에 없는 날 얼마나 원망했을까. 훈련소를 나오면서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날 보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난 재유에게 뭐였는지.
좋아한다, 같이 살자, 함께하자, 철석같이 믿게 해 놓고 나는 무슨 짓을 했던 걸까.
그와 약속했던 미래가 산산조각 나 버린 것만 같았다. 다시 이어 붙일 수나 있을까.
아까 다쳤던 무릎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우주는 달리고 또 달렸다. 다리가 아픈 것보다 마음이 너덜너덜 찢어지는 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
우주는 공원 앞 대로변까지 뛰어나와 택시를 타고 재유의 집으로 갔다. 문이 닳도록 드나들던 집이지만 오늘만큼은 낯설게 느껴졌다.
한밤중인데도 용기를 내서 문을 두드려 보았다. 제발 여기 있어 주기를 바라며.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없다면 대체 어디로 찾으러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우주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벌써 시간이 새벽 6시를 향해 갔다. 멀리 어슴푸레 새벽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문을 어깨를 기대고 내내 한숨짓던 우주가 자책하듯 머리를 쿵쿵 찧었다. 그러자 안에서 뭔가 기척이 들려왔다. 짧게 숨을 들이쉬고 문가에 귀를 기울이자 걸음 소리가 났다. 우주는 재유가 이 안에 있음을 확신했다.
“재유야! 재유야! 나야… 문 좀 열어 줘. 부탁이야.”
우주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재차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주기 싫으면 목소리라도 들려 달라 매달렸다.
“아무것도 몰라서 미안해…. 무조건 너한테 왔어야 했는데….”
안에서 듣고 있는 건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았다. 문을 부수고라도 억지로 들어가고 싶었다. 미닫이문이 삐걱거리며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안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주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허물어졌다.
***
우주는 문밖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해는 벌써 이마 위에 있었다. 한낮의 해가 마당 구석구석까지 쨍하게 비치는 게 자신의 변변치 못한 내면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 같아 불쾌했다. 영선의 부모님이 이따금 오가며 먹을 것을 쥐여 주기도 했는데, 민폐라고 생각하면서도 재유가 나오지 않는 한 떠날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왼손을 응시했다.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지만, 빛이 닿지 않는 안쪽엔 볼록한 반지 두께만큼 그늘져 있었다. 습관대로 엄지로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반지를 매만졌다.
반지를 받은 지 고작 두 달 남짓이 지났다.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반지를 나눠 끼며 서로를 품에 안던 두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그 아침이 꿈처럼 아득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재유를 안았던 흥분과 품에 안았던 무게와 손에 닿았던 살의 감촉이 모두 생생한데 그의 웃는 얼굴만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벅차게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시간이 다 된 모래시계처럼 제 안에서 허무하게 쏟아져 나간 기분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과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재유 사이에 뚫을 수 없는 성벽이 생긴 것 같았다.
우주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지친 숨을 내쉬며 어깨를 꺼트렸다. 마당 한가운데 수돗가에 달라붙은 이끼를 쳐다보며 넋이 나간 웃음을 짓기도 했다. 늦여름의 열기에 몸은 뜨거웠지만, 등에 닿은 문은 차갑기만 했다.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끼이익, 낡은 대문이 열리더니 서너 명의 남자들이 문가에 앉은 우주 앞에 다가섰다. 그들은 다짜고짜 팔을 붙잡아 끌고 나가려 했다. 남자들 뒤로 강 실장이 보였다.
“…이거 놔요. 놔….”
우주는 가지 않으려 문고리를 잡고 버텼으나 장정 세 명의 힘을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주먹다짐을 해 보려고도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대문 밖까지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정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우주의 얼굴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안 간다고, 놓으라고! 재유야… 재유야!”
비좁은 골목에서 한바탕 거하게 실랑이가 벌어졌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집집마다 무슨 일인지 동태를 살피려고 하나둘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사장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단다. 여기서 이러면 모두가 곤란해질 뿐이니까 조용히 가자.”
강 실장은 표정을 지운 채 무미건조한 말투로 위협했다. 우주는 삐뚤어진 조소를 내보이며 절대 안 간다고 버티며 발악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고는 생각 못 하는 거냐? 그래 봤자 너만 손해일 텐데. 사장님이 한재유라는 놈을 그냥 둘 것 같아?”
재유의 이름이 나오자 잔뜩 긴장한 몸에 힘이 축 빠져 버렸다. 아직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정말 이대로 끌려가고 마는 건가. 엉망으로 일그러진 우주의 얼굴에 뜨거운 햇살이 잔인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
얼마나 이러고 있었을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바닥에 몸을 붙인 채 누워 있는데, 분명 자기가 움직이는 게 아닌데도 천장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도 그 아래로 아득하게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듯했는데, 재유는 자신의 기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우주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떠올리려 해도, 누군가 웅얼거리게 들리도록 사운드를 조작한 것처럼 무슨 소리였는지 기억이 불분명했다.
재유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술에만 의지했다. 이렇게 빨리 몸을 망가질 줄도 몰랐고, 자신이 이렇게 삶을 내팽개친 채 현실에서 달아날 궁리만 하는 사람인 줄도 몰랐다. 그냥 이대로 웅크린 채 몸이 점점 작아져 소멸하면 좋지 않을까, 이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허망한 생각에만 골몰했다.
속에서 술기운이 욱하고 올라오자 재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싱크대를 붙잡았다. 다 토해 내고 싶었지만, 목 안을 할퀴는 쓴 신물이 목 언저리에 걸려 기분 나쁜 냄새만 주위에 맴돌았다. 재유는 서 있을 기력도 없이 그 자리에서 무릎이 꺾였다.
문득 손에 뭔가가 만져졌다. 손끝으로 더듬어 보고 나서야 그것이 우주와 나눴던 링 목걸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느 틈에 뜯어진 건지 줄은 끊어져 있었다.
실낱같은 기대조차 생기지 않는 앞으로의 삶과 좁은 셋방에서의 초라한 자신이 속을 더 쓰리게 만들었다. 우주가 있든 없든 자신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곁에 없어야 저의 불행이 옮겨 가지 않을까.
끝 간 데 모르고 도망쳐 있었으면서도 현실도피는 계속됐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장막이 씌워진 것처럼 지금의 현실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떻게 해야 이전의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재유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불쾌한 숨을 토해냈다.
똑똑.
“…….”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거뭇한 그림자가 기웃거리며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있었다. 재유는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발치에 소주병이 채여 중심을 잃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보기 좋게 나자빠졌다. 다시 한번 머리 위가 빙빙 돌았다.
똑똑똑똑. 문밖에서 소란이 들렸는지 노크 소리가 다급해졌다. 인기척을 숨길까 하다가 현관에 겨우 손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 다른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사력을 다해야 했다. 끼이익, 소리가 나며 성급하게 열린 문틈으로 여름용 샌들을 신은 발이 보였다.
“으윽, 냄새….”
정신이 또렷하진 않았지만, 여자 목소리란 건 알 수 있었다. 영선인가? 문이 열리자 집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방문객의 손에 어깨가 끌어 올려져 겨우 벽에 기댈 수 있었는데, 몸이 스르륵 기울어 바닥에 얼굴을 대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샌들의 주인은 잠든 재유를 내려다보며 쯧, 혀를 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 술 냄새가 꽉 차 있었고 여기저기 빈 소주병들과 싱크대에 토사물의 흔적도 보였다.
여자는 바둑판만 한 현관에 발을 들였다가 멈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발을 구르며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망설임을 마친 듯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말없이 방 안에 흩어진 옷가지와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
장정들은 우주를 회사도, 집도 아닌 낯선 건물로 데려갔다. 시내에 사무실로 쓰는 건물이 있다는 건 형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와 본 건 처음이었다. 본사 건물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평범한 사무실처럼 보였다. 직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 의아한 점이었다. 이내 오늘이 일요일인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날짜가 가는 개념도 잊을 정도로 우주는 일상이 망가져 있었다.
강 실장은 복도 맨 끝의 사무실 문을 열며 들어가라고 눈짓으로 채근했다. 우주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예상대로 아버지가 있었다. 사무실 내부는 집에 있는 서재와 모양이 비슷해 보였다. 구조와 배치는 물론 흑갈색 나무로 만든 책상과 책장까지.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 우주가 왔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하듯 한참이 지나도록 눈길도 주지 않았다.
우주는 책상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폭우가 퍼부은 듯 피곤과 굴욕이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지 엄마 핸드폰도 훔쳐 가고 도망가서 그놈 집에 죽치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난다. 너, 진짜 나랑 끝을 보려고 그러냐?”
“…….”
도리어 우주가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휴학이니 군대니, 홧김에 나온 말인 줄 알았는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실현되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나오는 걸까.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너 군대 안 갈 수도 있어. 군대 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군대 대신 너 받아 줄 병원 전국에 수두룩하니까 정 가기 싫으면 거기나 들어가. 네 엄만 나 못 이겨. 나갈 테면 나가라지. 누가 겁나나? 두 번 말 안 할 거다.”
우주와 눈매가 닮은 중년 남자는 골머리를 앓게 한 서류를 덮듯 짜증 서린 얼굴로 아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입에서 퍼져 나온 담배 연기가 사납고 맵게 눈을 찔렀다.
“…그럼 재유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군대 가기 전에요. 한 번만요. 아버지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우주는 허물어지는 무릎을 그대로 바닥에 꿇렸다. 내보일 패가 전혀 없는 무력한 흥정에 치를 떨며 남아 있을지 모를 일말의 인정에 기댔다.
“싫으시면…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정신병원에 처넣든지 다리를 부러뜨리든지. 저도 이렇게 아버지한테 휘둘리느니 그냥 없는 자식으로 사는 게 편해요.”
“그건 네 맘대로 안 되지. 넌 사지 멀쩡하게 내 아들로 살아가야 될 거다. 이제 와 그놈 만나서 뭐 하게. 아, 그러고 보니 그놈은 이미 공장에 남색이라고 소문 다 퍼졌다데? 그놈도 내 공장에 더는 못 다닐 거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어요?”
우주는 문득 한없는 슬픔을 느꼈다. 이토록 악랄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가 가여웠고, 이런 사람과 부자의 인연으로 태어난 게 서글펐다.
재유가 집밖에 안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리를 깨고 문을 부숴서라도 얼굴을 보고 안전을 확인해야 했다는 뒤늦은 자책이 우주를 더 깊은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네깟 놈이 하고 다니는 행동이 내 얼굴과 내 회사에 먹칠하는 꼴을 두고 볼 수야 없지. 선택해. 얌전히 내 말대로 하든지, 애미 죽고 애비한테까지 배신당한 놈 기어이 군대에 보내서 폐인 만들든지.”
“다 알고 계시네요? 왜… 그렇게까지 해요? 아버지…! 제발 좀, 절 그냥 있는 그대로 봐 주시면 안 돼요? 좀 받아 주시면 안 되냐고요. 저 착한 아들이었잖아요. 아버지 보기 부끄러운 아들 아니잖아요. 꼭 이렇게까지 주저앉혀야 되냐고요.”
“…….”
울부짖는 아들을 보며 남자의 얼굴에 잠시 떫고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이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착한 아들이었다마다.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 아들이 틀림없었다. 반듯하고 듬직한 큰아들에 비해 장난스럽고 여린 마음을 가진 둘째 아들을 마음 한구석에서는 예뻐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때리고 욕하고 윽박질렀을지언정, 내보이기 민망한 기저에는 자식 사랑이 깔려 있다고 믿었었다. 우주는 그 얄팍한 부정에 매달리고 호소했다.
“…나한텐 죽었다 깨나도 안 될 일이다. 내 뜻대로 해.”
짓씹듯 말을 뱉은 아버지는 더는 보기 싫다는 듯 아예 창가로 가서 아들을 외면했다.
우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흔들림 없는 냉정한 어조에도 창 너머를 바라보는 주름진 옆얼굴에서 찰나의 균열을 발견했다. 재유라도 이 수렁에서 빼내야 했다. 더 이상 나 때문에 재유에게 힘든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주는 바짓단을 잡고 처절하게 애원했다.
“아버지, 제발… 재유 좀 지켜 주세요. 재유는 아무 잘못 없잖아요. 저 아버지 하라는 대로 할게요. 군대도 가고 병원도 가라면 갈게요. 그 애… 아버지 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직원이잖아요. 재유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아들 친구 녀석이라고 생각하시고 재유 좀 돌봐 주세요. 그거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우주는 오늘의 언쟁이 살면서 아버지와 나눈 가장 긴 대화였다는 걸 깨달았다.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북받쳐 올라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지만 애원의 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순간 발치에서 울고 있는 우주의 머리 위로 머뭇대는 손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나, 이내 냉정하게 거두어졌다.
***
잠에서 깼을 때 처음으로 느낀 건 낡고 해진 엄마의 이불과 베개였다. 며칠째 입고 있던 냄새 나는 옷도 벗겨져 있었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리운 냄새에 몸이 편안과 위안을 얻은 듯했다.
누군가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본 살갗인지. 다정한 손길에 도취된 재유는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얼굴과 몸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우주인가.
아니, 우주는 아니었다.
애써 눈을 떠 보니 장인애가 자신과 몸을 겹치고 있었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한참을 머릿속을 더듬었지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나운 눈빛이 순간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재유는 더 이상 생각을 멈추고 장인애를 안았다.
훗날 자신이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 봐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살을 맞대고 싶어서였는지, 모질고 험해 보였던 장인애가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애처로워 보였었는지.
그저 장인애가 자신처럼 무언가에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동질감을 느낀 것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
다음 날 밤, 재유는 홀로 잠에서 깨어났다. 장인애는 돌아가고 없었다.
공장에 나가지 않은 게 벌써 며칠째인지 가물가물했다. 벽에 걸려 있던 일력은 엄마의 마지막 날에 멈춰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부엌 쪽을 내다봤다. 어질러졌던 집 안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심한 갈증에 물을 마시려 몸을 일으키다가 멍한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의 벗은 몸이 고생대 곤충을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낯익고도 낯설었으며, 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문 옆 서랍장에 엄마의 영정사진이 시야에 잡혔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풀지 않았던 짐 속에서 장인애가 꺼내 둔 모양이었다. 사진 속 엄마는 아직 마음과 육신이 아프기 이전의 안온한 모습이었다. 작은 사진을 지나치게 확대한 탓에 상의 윤곽이 불분명했다.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재유는 사진을 멀뚱히 쳐다보며 뇌까렸다. 걸음마와 말을 가르치고 행동의 옳고 그름을 익히게 해 준 존재가 사라진 지금, 재유는 기는 법조차 잊어버린 천둥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꼴로 감정에 함몰된 채 제멋대로 살고 있는 날 보면 엄마가 가슴을 치며 원통해하실까. 아니면 한심한 표정으로 매섭게 다그치실까.
그러다 미닫이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
방 안에 장인애의 흔적을 보고 재유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걸 실수라는 가벼운 말로 덮어 둘 수 있을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장인애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우주에게.
엄마의 온화하고 흐릿한 얼굴이 냉엄하게 책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재유는 무감한 얼굴로 사진을 거꾸로 돌려놨다.
다 안다고. 이제 엄마 심정을 알겠다고 속으로 아우성쳤다. 엄마도 누군가를 대신해 치다꺼리를 했던 억울함을 안은 채 떠났으니 이제 나도 엄마 대신 혼자 남아 빚을 갚아야 할 거 아니냐고. 이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났으니 더는 상관 말라고.
부엌으로 나와 벽에 달린 낡은 거울을 보았다. 그 속에는 누가 봐도 볼품없는 하급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폐인이 있었다. 재유는 그 얼굴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기 싫어 수도를 열고 얼굴에 물을 묻혔다.
컵을 꺼내 물을 받아서 서너 잔쯤 미친 듯이 들이켰다. 속이 받아들이지 않는지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오려고 했지만, 간신히 가슴을 짓누르며 게우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엄마처럼 여기서 죽은 채 발견될 수도 있겠구나.
그게 나은 건지, 다시 문밖으로 나가 세상에 섞이는 게 옳은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영선이네를 떠올렸다. 다정한 이웃에게 이 이상의 민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생각의 갈피를 아예 놔 버렸는데, 영선이네에 대한 도덕적인 양심이 가느다랗게 서자마자 재유는 죄책감으로 온몸이 버드러졌다. 죽더라도 나가서 죽거나 다시 살거나. 둘 중 무엇을 택하더라도 이 방을 나서야 했다.
다시 살자면 공장에 무작정 출근해서 버티든, 부당해고에 대한 신고를 하든, 이도 저도 안 되면 군대를 가든 해야 했다.
방황 끝에 내린 결론은 허무했다. 재유의 세상은 처절하게 무너져 잔해밖에 남지 않았는데 현실은 그대로였다. 외면할 수 없었다.
이젠 우주를 떳떳하게 볼 수 없겠구나.
그제야 자기가 했던 멍청한 짓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억센 손이 턱을 꽉 붙들고 눈앞에 자신의 과오를 똑똑히 들이미는 것 같았다. 재유는 머리칼을 엉망으로 쥐어뜯고 주먹으로 얼굴을 억세게 퍽퍽 내리쳤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탕탕,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뒷덜미가 곤두섰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린 지금, 어쩔 수 없이 빚쟁이들로 생각이 뻗어 나갔다.
한정호가 연대보증으로 떠안은 빚은 그가 채무 변제능력이 없음을 빠르게 판단하고 자식인 자신에게로 넘어왔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았을 엄마에게 그 서류는 죽음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건지도 몰랐다.
“…….”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재유는 벽에 걸린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핸드폰과 지갑을 찾았다. 신세 지는 집에서 소란을 일으킬 순 없으니 골목에라도 나가서 얘기해 볼 심산이었다. 학습으로 체득한 행동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서린 문가에서 탕탕탕,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걸 느낀 재유는 이 와중에 자신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제 얼굴을 자해했던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야. 너 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좀 열어 줘.”
“아….”
노크하던 사나운 기세에 반해 애원하듯 낮게 흐트러진 목소리를 듣자 긴장으로 뻣뻣했던 몸이 그 자리에서 단단하게 굳어 버렸다. 눈을 깜빡이며 반투명 유리를 자세히 바라보자 위압적으로 보이던 인영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우주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재유는 기름칠이 덜 된 녹슨 기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걸어가 문고리를 돌렸다. 문밖에는 총기를 잃은 초췌한 몰골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재유야.”
우주가 이름을 불렀다. 삭풍에 매달린 가지처럼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재유는 목이 메는 느낌에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고 아프도록 문질렀다.
수염이 거뭇하게 자란 그의 얼굴은 안색이 어두웠고 움푹 파인 뺨과 흐릿한 눈망울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짐작게 했다. 하지만 점멸할 듯 꺼져 가는 눈빛 속에서도 드디어 만났다는 안도와 희망이 비쳤다.
“…들어와.”
재유는 힘겹게 입을 떼고 등을 돌렸다.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좌절과 무력함이 그늘처럼 드리운 얼굴에선 예전 같은 생기와 활력을 찾기 힘들었다. 우주를 이렇게 만든 변화가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그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우주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이 방 안에 들어오기 위한 특별한 허락이 필요한 것처럼 조심스럽고 위축된 태도였다.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아무것도 몰라서…. 어머니 소식도, 아버지라는 사람이 한 짓도, 공장에서 네가 겪은 일들도…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너한테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기만 했지,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미안해 정말.”
재유는 눈두덩을 찌르는 듯한 아픔에 질끈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흐르는 듯도 했다. 이렇게 지척에 있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그에게 안길 수도 있는 거리인데, 이 관계가 결코 이어질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날 훈련소에서… 너 모른 척하고 가 버려서 미안해.”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그에게서 사죄의 말을 듣는 게 고통스러웠다. 절박하리만치 애닯은 사과는 염우주라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한 게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한정호가 빚을 남긴 것도, 그의 아버지가 폭력적인 방법으로 아웃팅을 한 것도 우주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가져가려 했다.
장인애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면 그의 죄책감이 줄어들 수 있을까. 재유는 자신이 생각한 고약하고 질 나쁜 방식에 쓴웃음이 났다.
“참 희한하다. 너랑 단둘이 있으니까 그동안의 일들이 현실 같지가 않네. 이상하지? 절대 그럴 순 없을 텐데.”
재유는 여전히 짧은 제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우주는 문밖에 그대로 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어 오히려 다행이었다. 얼굴을 보고 나면, 멋대로 의지를 가진 팔다리가 우주를 향해 뻗칠 것만 같았다.
“…나 군대 가.”
팔에 싸늘한 냉기가 끼치고 기가 찬 숨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우주의 얼굴이 딱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뭔가 대꾸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재유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대로 넘어져 벽에 머리를 박을 뻔한 걸 우주가 달려와 가까스로 팔을 붙잡았다.
“언제…?”
우주는 대답 대신 재유를 끌어 앉히고 마주 앉아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친 데가 있는지, 어디가 아픈 건지 걱정스럽게 탐색하고 있었다.
“갑자기 군대 얘기는 왜….”
“…….”
“언제 가는데?”
“수요일. …3일 뒤야.”
재유는 아직도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아귀의 힘을 느꼈다. 한데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재유는 눈을 내리깔고 쓰게 웃었다. 이제 끝인가. 우리에게 주어졌던 여러 갈래의 길이 한데로 합쳐져 돌아설 수 없는 외길을 향해 쭉 뻗어 나가는 듯했다.
“이런 말 하긴 너무 싫은데… 공장엔 계속 다녀. 힘들더라도 버텨 줘. 내가 다녀올 동안만이라도. 난 어차피 군대에 가야 하는 거였잖아. 어떻게든 해 보자. 이대로 끝낼 수는-”
“아니… 우린 이제 안 돼.”
“뭐?”
재유는 시선을 피하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낮은 천장이 무너져내릴 듯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여기서 붙잡을 순 없지. 아무렴. 원죄가 생겼으니.
말해야 했다. 재유는 빙빙 도는 천장을 붙잡으려 희미한 얼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고 빈털터리가 됐어. 너무 한꺼번에 많은 일이 생겨서 미래가 송두리째 망가져 버렸어. 이젠 삶의 의욕도 없어. 네 탓은 아니지만 네 아버지의 영향도 없진 않아. 난 그날 일을 잊을 순 없을 거야. 이렇게 된 마당에 널 예전처럼 볼 수가 없어.”
“재유야. 제발… 왜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있잖아.”
안달하듯 엉덩이를 들썩거린 그가 두 손을 절박하게 마주 잡았다.
“넌 곁에 없었어. 내가 간절했던 순간에. 엄마 장례식은 그렇다 쳐도, 훈련소 퇴소하고도 일주일이 넘게 넌 코빼기도 안 비쳤어.”
“왔었어. 3일 전에. 네가 열어 주길 기다리면서 밤새 문 앞을 지켰어….”
그 목소리가 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정말 우주였구나. 젖은 뺨에 이미 길이 난 자국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 덮었다.
하나하나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이제 와 달라지는 건 없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마음이….”
재유는 흐읍, 숨을 들이켰다. 그 숨 속엔 후회와 미련도 함께 섞여 들어갔다.
“변했어. 돌아가.”
재유는 제 상박을 잡은 팔을 내치고 돌아앉았다. 우주는 물러나지 않았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어떻게든 눈을 마주 보려 애쓰며 눈가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러지 마. 난 안 돼. 너 없이는 절대….”
“그런 말 하지 마. 우리가 만난 건 겨우 1년 반 정도야. 인생의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해. 금방 잊을 수 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넌 내가 없는 게 더 나을 거야.”
“아니, 난 못 해.”
우주가 억지로 얼굴을 돌려세워 감싸고 제 이마를 맞대었다. 충혈된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우주의 눈물에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문득 그가 편지에 썼던 글귀가 떠올랐다. 둘만의 공간으로 떠나자고 했던가.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방을 싸고 표를 끊어 버스에 몸을 싣고 떠나고 싶었다.
“나… 여자랑 잤어. 어제. 바로 여기서.”
“…….”
찬물을 끼얹는 듯한 뜬금없는 얘기에 우주는 이해할 수 없는 듯한 맹한 표정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실수도 뭣도 아니야. 그냥 그 순간에 그러고 싶어서 그랬어.”
“무슨….”
우주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그런 거짓말 하면 내가 포기할 줄 알아? 그러지 마.”
“거짓말 아니야. 우리 학교 동창이고, 입사 동기야.”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친해진 건 얼마 안 됐지만, 엄마 돌아가셨을 때부터 옆에서 계속 옆에 있어 주고 이것저것 도와줬어.”
“…믿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변명의 여지도, 매달릴 염치도 없었으니 우주의 처분도 바라지 않았다. 처음이 어려웠지, 그다음부턴 쉬웠다. 이게 정해진 수순 같았고, 당연한 절차 같았다. 잠자리를 가진 걸 숨길 수도 있었다. 말 안 하면 이대로 없던 일처럼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실수든 의도든 자신의 잘못이었다. 비밀을 털어놓아서 제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우주는 전역할 때까지 버텨 달라고 했지만, 재유 앞에 놓인 상황이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모아 둔 돈도 털렸고 빚까지 새로 생겼다.
그동안 우주는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빚이 얼마냐고 넌지시 캐묻는가 하면 앞으로 저와 엄마를 먹여 살리겠노라 심심찮게 포부를 말했었다. 그의 말이 진심인 걸 알았다. 뜬구름 같은 미래를 재유도 한때는 달콤하게 꿈꿨었다. 하지만 우주가 전역하고 나서도 다시 나를 만난다면 그는 집에서 내쳐질 각오를 해야 했다.
부모와 형제를 잃은 그가 제 옆에서 고된 일을 하며 함께 빚을 갚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싫었다. 그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지금 끝을 맺는 게 나았다.
“그러니까, 네가 여자랑… 잤다고? 내가 있는데도… 그게 진짜 사실이라고. 나더러 믿으라고?”
“…맞아.”
우린 끝이다. 설마 했던 끝이 기어이 와 버렸다. 재유는 입 안을 깨물며 콧김으로 힘겹게 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야?”
“그런 것까지 해명할 생각 없어. 이제 가. 가고, 앞으론 찾아오지 마.”
우주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부르쥐고 얼굴을 뚫을 듯이 쳐다보았다. 방금 귀로 들은 걸 뇌에서 받아들이지 않는지 힘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
“…….”
그러다 서서히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습기로 축축했던 눈에 원망과 추궁이 담겼다. 커다란 손이 뒷목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거칠게 부딪혔다. 재유를 단죄하려는 듯 포악한 키스였다. 잡아먹을 듯 입술을 삼키고 딱딱 이가 아프게 부딪혔다. 뻑뻑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빨고 핏기가 서리도록 잇자국을 냈다.
“으흐….윽…!”
재유는 그의 어깨를 쥐어짜며 전력을 다해 밀쳐내고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에 뜨뜻한 물기가 만져졌다. 피가 밴 입술 대신 날 선 발톱에 할퀸 듯 심장에서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실수지? 힘드니까… 옆에 있어 줬으니까… 그 사람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지? 그렇다고 말해.”
“…그만해. 우주야. 난 이제 너 못 봐. 전처럼 널 떳떳하게 좋아할 수가 없어. 나 놔줘. 부탁이야.”
“거짓말 마. 너도 나밖에 없잖아. 아직 나 좋아하잖아….”
분노와 애원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우주는 마지막 한 걸음을 물러서면 벼랑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절박한 얼굴로 제 감정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그게 너무, 힘들어… 제발. …헤어지자.”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날 배신해! 네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데!”
“…….”
아무것도 모르고 서로만 바라보며 느꼈던 행복, 미래에 대한 부푼 가슴이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강한 생명력을 가진 피처럼 빨갛게 타오르던 석양이 어둠에 밀려나듯이 우주의 눈빛이 잿빛을 남기고 저물어 갔다. 끝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별해 달라 애원하는 것인지, 한 번만 용서해 달라 비는 것인지 재유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절망으로 꺼트린 눈을 하고 있던 우주는, 울고 있는 자신을 안아 주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재유야! 들어가도 돼?”
“예, 들어오세요.”
영선의 부모님이 열려 있는 문을 노크하며 좁은 방으로 들어섰다. 현관 앞은 이삿짐을 싼 종이박스가 여러 개 쌓여 있었고, 방 안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로 산만했다. 재유는 찬장에서 그릇들을 꺼내 신문지로 하나하나 꼼꼼하게 싸고 있었다.
“짐은 얼추 정리했네. 내일 이사하면 우리가 짐 옮겨다 줄 텐데. 꼭 오늘 가야 되는 거야?”
“아 무슨 소리야. 나 내일 조기축구 있다 그랬잖아.”
아주머니는 남편을 흘겨보더니 신발을 벗고 들어와 재유가 싼 접시들을 상자에 넣어 주었다.
“걱정 마세요. 용달 불렀으니까 편하게 이사할 수 있어요.”
“아유, 그래도 혼자 짐 정리하기 만만치 않을 텐데.”
“기사님이 같이 옮겨 주신다고 하니까 괜찮아요. 짐도 얼마 없어서 금방 끝날 거예요.”
재유는 반찬 그릇으로 쓰던 무늬 없는 흰 접시를 마지막으로 싸서 상자에 넣은 뒤 정 많던 주인집 내외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저 때문에 많이 불편하셨죠? 저랑 저희 엄마 많이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신 거 정말 고마웠습니다.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고 살 거예요.”
“그런 소린 됐어. 너나 잘살아.”
공치사는 듣기 싫다는 듯 아주머니는 얼굴을 찡그리며 재유의 등을 팡팡 토닥였다.
“쯧쯧쯧쯧. 그러게 왜 남자를 좋아해서는 참 내.”
두 사람 뒤에 조금 떨어져 있던 아저씨가 혼잣말인 듯 툴툴거렸다. 재유가 동성 친구인 우주와 우정 이상의 감정을 나눴다는 건 살구나무 집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동성애에 대한 불쾌감과 엄마를 막 떠나보낸 청년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적절히 뒤섞인 표정으로 재유를 비스듬히 보고 있었다.
“당신은 좀 나가 있어. 이렇게 낄 데 안 낄 데 구분도 못 하니까 허구한 날 조기축구에서도 밥값만 축나지.”
아저씨는 뭐라 반박하려다 아내의 눈치를 보며 이내 포기한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유에게 잘 가라,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공장은 다시 다니기로 했다며? 잘 생각했어. 까짓것 드러워도 네 실속만 챙기면 되는 거야. 당장이야 힘들겠지만 살다 보면 별거 아닌 거 돼.”
“…네.”
“그래도 2년 가까이 얼굴 보고 살았는데 이렇게 헤어지려니 아쉽다.”
“자주 놀러 올게요. 영선이 통해서도 안부 전하고요.”
“그래, 그래야지.”
재유는 아주머니를 마당까지 배웅하고 다시 돌아와 작게 숨을 뱉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서울을 떠나 처음 이사 왔을 땐 절망적이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단둘이 먹는 식사는 외로웠어도 엄마와 함께 잘살아 보자며 새로이 다짐하기도 했고,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는 걸 마음 한구석에서 느낀 적도 많았다.
그리고 우주와 함께 밥을 먹고 만화책도 보고 낮잠도 잤던, 행복한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죽은 곳이기도 하고 우주와 헤어진 곳이기도 했다.
재유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삶을 이어 가려 마음먹었을 때 제일 처음 결심한 것이 바로 이사였다.
우주는 지난주에 군대로 갔을 터였다. 엄마도, 우주도 없는 이 집에서 더 이상 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재유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리에서 몰아내려 애쓰며 다시 박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
2000년 11월.
지겹도록 단조로운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재유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매일 반복할 수 있는 일과들이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위안은 되었다.
하루종일 우주 생각을 하고, 잠들기 전에는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워 꼭 울어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이별이 무뎌질 수 있을까.
새로 이사한 집은 마찬가지로 월세였지만 방 두 개짜리 집이었다. 일부러 시내에서도, 공장에서도 멀리 떨어진 외진 곳으로 선택했다. 일부러 이 마을로 온 이유는, 일하지 않는 시간만이라도 물리적으로, 또 심적으로 공장과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주와 헤어지고 몸을 추스른 재유는 무작정 공장에 출근했는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작업반 계장이 해고는 없던 일이 되었다며 다시 공장에 다니라고 한 것이었다. 다만 6개월 후에는 이직을 해 달라며, 사장님 아시는 분 식품공장에 얘기가 됐으니 그쪽으로 옮기라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자세히 물어봤지만, 계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재유는 간신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몇 달만 더 버티면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공장 사람들의 냉랭한 멸시도 그럭저럭 버텨 낼 수 있었다.
우주의 아버지, 염창섭 사장님과는 공장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날 그나마 배려해서 그런 결정을 해 준 걸까. 아니면 그쪽도 마찬가지로 3년이나 저를 밑에 두고 싶지 않아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재유에게는 행운이었다.
장인애와는 다시 출근한 날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의 일에 대해서.
우선 미안하다 사과했다.
장인애는 재유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집에서 두문불출했을 때 그녀는 여러 번 문자메시지를 보내 왔었다. 공장 내에서도 대놓고 편들어 주진 못하지만, 재유를 이해하고 있는 직원들도 더러 있으니 공장에 무조건 다시 나와서 배 째라, 버텨라, 이런 내용이었다.
정작 마주하고 나서 장인애는 무심한 듯 쌀쌀하게 굴었다. 재유는 바싹 마른 입술로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아직 그 사람을 잊지 못했다’는, 같이 잔 상대에게 해괴하고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생각해도 우스운 구실이었다. 뜻밖에도 장인애에게서 ‘별거 아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일은 묻어 두고 동료로서만 지낼 수 있냐 물으니 흔쾌히 그러자는 답과 함께.
여러 가지로 도와준 일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미안하다고, 여러 번 반복되는 사과에 장인애는 귀찮은 표정으로 알았으니 미안하단 소리 좀 그만하라며 자리를 떠났다. 귀찮음을 가장한 건지도 몰랐다. 재유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 후로 근무시간이 겹칠 때마다 마주쳤지만 서먹하게 필요한 말만 하거나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장인애는 재유에게 좋아한다 고백하고 거절당하자 투명인간 취급하더니 엄마의 장례식에선 가족처럼 자신을 보살폈다. 술에 절은 상태에서 밤을 보내고 집 청소를 해 놓고 갔으며, 다시 만났을 땐 없던 일로 하자는 재유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재유는 이제껏 계속된 장인애의 뜻 모를 행동에 속마음이 궁금했지만 일단 사과를 받아 주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