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른소년
* * *
짧은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여름날이었다. 우주는 평소처럼 재유와 짧은 데이트를 마치고 그를 공장에 데려다주었다. 시내로 돌아오니 밤 9시가 조금 넘었다. 이런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흐르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재유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려 가며 매일같이 만났지만, 날짜가 흘러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재유는 3일 후에 훈련소로 떠난다. 오늘은 그가 훈련소로 떠나기 전 마지막 출근 날이었다. 내일과 모레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재유의 어머니와 함께 훈련소로 데려다주기로 약속했다.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간인데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고 전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답답하고 서글퍼졌다. 자기가 군대에 갈 때면 재유도 슬퍼하고 외로워할까.
재유와 사귀기 전에는 한 번도 군대에 가는 걸 두려워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변심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예쁜 얼굴을 못 보는 세월이 2년이나 된다는 게 속이 쓰리고 애가 닳았다.
우주는 핸들을 꺾으며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엄지로 매만졌다. 그새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이었다. 반지를 볼 때마다 자신이 그의 것이라는 소속감이 느껴져서 은근한 웃음이 났다.
이 반지를 내밀었을 때 머뭇거리며 수줍어하던 재유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볼수록 놀라운 애다.
우주도 그와 떨어져 지내는 불안을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았는데, 재유는 그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 줬다. 지난번 학교에 찾아왔을 때도 그렇고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재유와 섹스를 하게 된 건 우주로서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물론 깊이 묻어 둔 음심은 만날 때마다 그를 덮치고 싶어 했지만 재유가 준비될 때까지 언제고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한데 재유는 스스로 섹스에 필요한 준비물까지 마련해 가며 저를 받아들여 주었다. 우주는 자신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유를 떠올리면 맛있는 것을 먹여 주고, 좋은 곳에 데려가 주고,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12시간씩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 공장 일이 아니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제 옆에 묶어 두고 싶었다.
처음 재유를 따라다녔을 때만 해도 영선의 집이 순전히 재유의 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생각해 보면 사복 입은 모습은 늘 같은 옷이었고,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고 나서는 매점이나 피시방 같은 돈 드는 곳에는 가기를 꺼렸었다.
대문 옆에 붙은 셋방에 처음 들어가 봤을 때 우주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그렇게 살림이 간소한 집은 처음 봤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집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깨끗하게 청소된 방이지만 벽지가 오래돼 보였고 가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좁고 초라한 공간이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거라 짐작은 했었는데 그 방을 보고 나니 자신의 짧았던 상상력과 재유를 지켜 주고 싶다던 다짐이 오만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주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평소엔 잘 연락할 일 없는 강 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규신기업 사장실 비서 역할을 하는 그는 아버지와 동향 출신으로, 우주가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사람이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사적인 업무나 집안일까지 속속들이 처리하는 그에게 재유의 가정사를 알아봐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었다.
정확히는 빚이 얼마인지, 도망간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그 아버지가 빚을 늘릴 가능성이 있는지 등등이었다. 아버지에겐 비밀로 해 달라는 말과 함께.
강 실장님은 정식 코스로 입사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인맥으로 회사 일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뒷세계 출신이라는 건 우주의 가족들도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확한 액수까진 강 실장님도 파악하지 못했지만, 재유의 아버지는 거의 억대의 빚을 지고 새장가를 든 상태였다. 이미 재유의 어머니와는 이혼해서 남남이 되었지만, 슬하의 자식은 재유뿐이었다.
다행히 재유의 조부모가 전답을 처분해 대부분의 빚은 갚은 상태였고, 아버지는 재혼한 상대와 함께 부모님 고향으로 내려가 가업인 포목점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노름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는지 여전히 자잘한 도박장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주는 재유와 그의 어머니가 다달이 갚아 가는 금액과 생활비 여부를 세세하게 파악한 자료들을 강 실장님에게 전해 받고 무력감을 느꼈다.
고등학생 신분인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부잣집에서 태어나 넉넉히 용돈 받고 생활하는 자신이, 스스로 돈을 벌어 성실히 빚을 갚아 나가는 재유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우선해야 하는 우주에게 돈 나올 구석은 부모님밖에 없었는데, 돈이야 그렇다 치고 재유가 받아 줄지도 알 수 없었다.
한번은 재유에게 제가 집을 마련할 테니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서 같이 살면 안 되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재유는 언젠가는 그러고 싶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했다. 빚 얘기도 넌지시 물었지만 그건 제가 알아서 한다며 단호하게 일축했다.
재유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애였다. 갑자기 집이 망해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부터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 성정이었다.
그런 재유가 돈을 쓰는 건 순전히 자기와 만날 때뿐이었다. 재유 형편에 금반지와 금목걸이는 대단한 사치품이었다. 그러면서 우주가 주는 돈이나 비싼 선물은 절대 받지 않았다.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CD 플레이어나 디지털카메라 같은 것을 안기긴 했지만, 그마저도 안 쓰고 처박아 두거나 곧 돌려주곤 했다.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래서 우주는 자신의 용돈을 쪼개 돈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혹시 재유에게 급전이 필요하거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버지의 빚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우주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재유를 생각하는 마음은 커져만 가는데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갔다. 성인이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덜 자란 미숙함과 갖추지 못한 자립이 발목을 붙잡았다. 마음과 현실의 격차는 컸다.
군대를 다녀와 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밥벌이를 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할까. 우주는 그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고민 속에 지내고 있었다.
시내로 진입한 차는 그가 자주 드나들던 단골 서점 앞에 멈춰 섰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곳이라 형과도 자주 왔었고 재유와의 추억도 짙게 배인 곳이었다.
재유가 훈련소에 있는 동안 읽을 책들을 사 주기 위해 온 것이다. 반입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뭐라도 들려서 보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주는 카운터에 있는 주인아주머니께 가볍게 인사하고 신간 소설을 훑어보았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집어 들려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너 어딘데 아직 안 들어와? 전화도 안 받고.
“잠깐 서점 좀 들렀다 가려고요. 왜요?”
-오늘 형 온다고 했잖아. 빨리 와. 벌써 도착해서 밥 먹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 맞다. 형 온댔지? 깜빡했어요. 금방 갈게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엄마가 얘기했던 것도 같다. 재유의 퇴근 시간에 맞춰 서두르느라 엄마가 하는 말을 흘려들었나 보다.
형이 입대한 게 고2 때였는데 벌써 전역할 때가 되었다. 형의 전역을 그토록 기다렸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이 허탈했다. 우주는 책을 덮고 서점을 나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빨리 형이 보고 싶었다.
***
우주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엄마와 형이 나와 반겨 주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형의 얼굴이 다부지고 늠름해 보였다. 키도, 몸집도 더 커진 것 같았다.
“형! 아 미안해. 내가 마중 갔어야 했는데.”
“그래, 이 자식아. 뭐가 그리 바쁘다고 형님 오시는데 이제야 들어오냐? 빠져가지곤. 연애하냐?”
“흐흐. 미안, 미안. 건강하지?”
“그럼. 참, 근데 우주야. 네 친구 와 있는데? 저기.”
“뭐…? 친구 누구?”
형을 따라 응접실로 가보니 재유가 있었다. 좀 전에 공장에 데려다줬는데.
“…….”
우주는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거렸다. 초대하지 않았는데 재유가 이 집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이었다. 등줄기에 오한을 느꼈다. 비정상적인 상황임은 분명했다.
“재유 너… 왜 여기 있어?”
재유는 앉지도 않은 채 소파 옆에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그도 이 상황이 어색한지 불안정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입매를 굳혔다.
“…그게, 일하려고 들어가는데 사장님 운전기사분이 나오라고 하셔서. 차 타 보니까 여기로 데려다주셨어.”
“뭐…?”
안 좋은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형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물었지만 우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엄마를 불러 댔다. 엄마는 재유에게 대접할 요량으로 접시에 쿠키와 차를 내오고 있었다.
“느이 아빠가 양 기사 시켜서 데려오라고 한 모양인데. 약속된 거 아니었니?”
“…….”
재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주는 성큼성큼 걸어 재유의 손을 붙들고 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대로 있다간 일이 나도 크게 날 것 같았다.
하필 오늘…. 내일이면 재유와 내일부터 데이트할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형이 집에 와서 기분 좋았는데.
막 응접실을 벗어나 현관으로 가려는데 계단에서 험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거기 서, 이 개놈의 새끼야.”
아버지의 신경질적인 욕지거리에 재유는 꼼짝없이 굳어 버렸다. 자리를 피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생각한 그때, 아버지는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와 우주의 멱살을 붙들어 쥐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으윽.”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엄마도, 형도, 재유도, 모두가 얼어붙었다. 얼마나 세게 맞은 건지 뺨이 얼얼하고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익숙한 폭력이었다.
아버지는 손버릇이 안 좋았다. 자식으로서 성에 안 차는 모습을 보였을 때 여지없이 주먹과 욕이 날아들었다.
엄마는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로 뭐라 떠들고 있었고, 재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틀어막고 경악했다.
왜 때렸는지 눈을 부릅뜨고 대들려는 찰나, 아버지가 손에 든 종이봉투를 열어 뭔가를 꺼내 우주의 얼굴에 내다 꽂듯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건 수십 장의 사진들이었다. 자신과 재유가 찍힌.
“…….”
카페에서 마주 보고 있는 것, 차 안에서 키스하는 것,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심지어 며칠 전 별장에 가던 날 오거리에 주차해 둔 차에서 찍힌 사진도 있었다.
“너 이 새끼, 기껏 공부하라고 서울 보내 놨더니 이런 짓거리 하고 돌아다녔냐?”
아버지가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목소리가 아득해지며 이명이 들렸다. 재유를 보니 사색이 되어 벌벌 떨며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어디선가 우유가 쪼르르 달려왔다. 재유를 알아보고는 발치에서 안아 달라며 낑낑거리고 있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아버지가 우리 사이를 눈치채고 사람을 붙여 찍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나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일부러 찍어서 아버지에게 보낸 걸까.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도저히 상황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일단 우주 얘기부터 들어 봐요. 네?”
“뭐? 놔, 이놈아.”
아버지가 다시 손찌검하려는 걸 형이 막고 나섰다. 엄마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우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는 적의에 찬 표정으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재유 앞에서 맞은 충격에 목소리가 덜덜 떨렸지만, 눈빛은 맹렬하고 저돌적이었다.
“언젠가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네요. 이 사진들이 왜 아버지 손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맞아요. 저 재유랑 만나고 있어요. 서로 좋아하는 사이고요.”
“뭐? 이런 썩을 놈. 그게 부모한테 할 소리냐? 어디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 뭐? 사내놈들끼리 뭐가 어째? 이 미친놈이….”
“이해하시기 힘든 거 알아요. 저도 지금 당장 아버지를 이해시킬 순 없을 것 같고요. 나중에 천천히 다시 말씀드릴게요. 가자.”
우주는 꼼짝 않고 턱을 덜덜 떠는 재유를 억지로 끌다시피 현관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일단 그를 집에서 먼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차를 태우러 차고로 향하는데, 재유가 팔을 휘저어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놀란 거 알아.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아니… 너 집에 들어가. 난 공장 갈 테니까.”
“이 상황에 공장엘 다시 간다고? 그런 소리 말고 나 따라와. 부탁할게.”
우주는 다시 재유의 손을 붙잡고 차에 태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작정 차를 몰고 운전대가 이끄는 방향으로 밤거리를 배회할 뿐이었다. 재유의 얼굴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세워 줘. 내릴래.”
“잠깐만… 마음 좀 가라앉히고.”
“그냥 세워 줘!”
격앙되어 소리치는 목소리에 우주는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강변에 서자마자 재유는 차에서 내렸고, 곧바로 뒤따라 붙잡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아무 말 없이 가려는 재유를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유야, 제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거 놔. 나 가야 돼. 공장에서 일 마무리 하고 사람들한테 인사도 해야 하고. 너희 아버지가 우리 사이를 알았다고 해도, 난 절대 공장 못 그만둬.”
우주도 잘 알았다.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재유에게 직장은 중요했다. 만약 재유가 공장을 그만둔다면, 현역으로 입대해야 했다. 몸이 불편하신 엄마를 두고 긴 시간 동안 집을 비울 수는 없었다.
“알아. 그럼 내가 공장에 데려다줄게. 잠깐만 얘기하고 가. 응?”
다시 울음이 터진 재유를 안아서 달랬다. 품속에 들썩거리는 어깨가 한없이 약해 보였다. 재유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어둠 속에서도 켜지지 않는 가로등처럼 세상 쓸모없게 느껴졌다.
“걱정 마. 어차피 겪을 일, 일찍 치렀다고 생각하자. 괜찮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된 거야….”
재유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황과 분노, 초조함과 불안의 감정이 새된 울음과 함께 쏟아졌다. 우주도 울고 싶었다.
“…….”
“어떡해, 우리… 우리 어떡하냐고!”
“괜찮아. 잘될 거야.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 재유야. 내 옆에서 버텨 줘, 제발. 내가 다 해결할게. 차근차근 설득시키고,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우린 변함없을 거야.”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재유를 달래기 위해 온갖 사랑의 말을 늘어놓고도 싶었지만, 그 어떤 말도 쉽게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려워 미칠 것만 같았다. 오늘 일로 재유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쿵 내려앉아 버렸다.
***
우주는 한참동안이나 재유를 다독인 후 공장에 데려다주었다. 전화한다고,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온다고, 전화 꼭 받고 날 피하지 말라고 두 번, 세 번 다짐 받고 그를 보냈다.
재유가 떠난 차 안에서 우주는 오늘 일어난 일을 되짚어 보았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재유에게 모욕을 주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막 전역한 형과 엄마에게 무참히 까발렸다. 다시 생각해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에 바득바득 이가 갈렸다.
아까 재유와 집을 박차고 나올 때는, 아무 데로나 멀리 떠나 버리고 싶었다. 우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짧은 인생 살면서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킨 적은 없었다. 그래도 정신만은 또렷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우주는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했다.
첫째, 대학과 공장을 모두 그만두고 재유와 단둘이 도피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
둘째, 재유가 공장을 그만두고 군대에 가면 자신이 재유의 어머니를 돌보며 사는 것.
셋째, 헤어졌다고 속이고 안심시킨 후 몰래 만나는 것.
어느 것 하나 시원한 해답이 되지 않았다. 재유는 엄마를 저버릴 수 없고, 우주가 재유의 엄마를 돌볼 수는 없었다. 자신도 곧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재유가 전역할 때까지 군대를 최대한 미뤄야 하지만, 아버지의 허락 없이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세 번째 방법은 제일 싫은 선택지였다. 안 그래도 남자끼리의 만남에 위축되어 있는 그가 가족들 몰래 만나자고 하면 자신에게서 도망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아아악… 아악…!”
운전대를 퍽퍽 내리치며 고함을 질러 댔지만, 속이 후련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우주는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공장 건물을 노려보았다. 차를 몰아 다시 집으로 향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아버지와 협상을 해야 했다.
***
현관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우주는 성큼성큼 걸어 안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엄마만 오도카니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우주야….”
“아버지는요.”
엄마를 보기 민망해진 우주가 조금 누그러든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소리를 듣고 형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서재에 계셔. 저기, 잠깐만 우주야. 엄마랑 얘기하고 가. 응?”
“…….”
“우혁아. 네가 따라가 봐. 어서.”
우주가 계단을 두 칸씩 뛰듯이 올라가는데, 형이 재빠르게 팔을 잡아챘다.
“우주야, 진정 좀 해.”
“놔. 형한텐 나중에 말할 테니까.”
형을 거칠게 밀쳐내고 서재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형도 곧 뒤따라왔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통화해.”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우주를 곁눈으로 슥 보더니 수화기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저랑 먼저 얘기할 수도 있었잖아요. 재유는 대체 왜 부르신 거예요?”
“이 새끼가 아직 덜 처맞았나.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드럽게 남자랑 놀아나더니 이제 부모도 눈에 안 뵈냐?”
우주는 제가 게이인 걸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한 번쯤 내홍을 치러야 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서서히 집에서 자립하고 나면 결혼 적령기쯤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반대를 하더라도 굳이 허락이 필요치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이 시기에, 이런 구질한 방식으로 알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왜 그런 방식으로만 저를 억눌러요, 왜! 그렇게 하면 제가 고분고분 아버지 뜻대로 할 줄 아셨어요?”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다 한 줄 알아?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넌 내 뜻대로 하게 돼 있어. 내 집에서 내 밥 먹고, 내 아들로 살려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이 사람이 내 피붙이고 아버지라니. 굴욕감이 전신을 휘감고, 눈앞에 서 있는 냉정한 남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입술이 뒤틀렸다.
“아버지가 이제까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는데요. 맨날 때리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쓸모없는 아들 취급이나 해왔으면서. 저 다 필요 없어요. 저도 아버지 아들 노릇 하기 지긋지긋해요.”
“뭐 이 새끼야?”
아버지가 다시 우주를 때리려 손을 올렸다. 형이 둘 사이를 파고들어 내리치려는 손을 붙들었다. 장남에게 약한 아버지는 형을 노려보더니 간섭 말라는 듯 툭 밀쳐냈다.
“한재유 그놈, 군대 가는 대신 내 공장에서 일한다며. 단칸방에서 사글세 내면서 애미랑 둘이 살고. 애비는 어디서 뭐 하는지 집 나가 소식 끊겼다며?”
“사람 시켜 뒷조사하셨어요? 아버지가 우리 미행해서 사진 찍으신 거예요?”
아니면, 강 실장님에게서 정보를 얻은 건가. 우주는 아버지의 측근에게 재유를 알아봐 달라 부탁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너 당장 휴학하고 다음 달에 바로 자원해서 군대나 가. 군대 갈 나이인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안 그러면 정신병원 처넣었을 테니까.”
“무슨….”
“이제부터 차도, 서울 집도, 핸드폰도 다 압수야. 앞으로 내 눈에 그놈 만나는 거 보이거나 들리기만 하면, 그 새끼 내 회사 못 다녀. 아니? 그걸로 안 끝나. 그놈 인생 내가 시궁창 만들어놓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그놈뿐 아니라 그 애미도, 집 나간 애비도 찾아서 가만 안 둘 거다. 그래도 상관없으면 너 좋을 대로 알아서 나가 살아! 그까짓 호적 당장이라도 파 줄 테니까.”
“…….”
아버지는 분노를 넘어 살기를 띠고 있었다. 신이, 욕심과 권위 의식과 지배욕을 똘똘 뭉쳐 만들어 놓은 게 있다면 눈앞에 있는 저 사람 같았다.
***
염창섭 사장님은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난한 집에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중학교도 못 가고 부모와 동생들을 건사하며 살아왔다. 구걸 빼고 안 해 본 일 없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외조부가 운영하는 공업소에 취직해 장운으로 왔다.
성실함과 영특함을 눈여겨본 외조부는 딸과 결혼을 시키고 공업소를 물려주었다. 아들이 없는 집이어서 데릴사위 개념으로 들인 것이었다.
이미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던 처가의 도움과 본인의 기지로 부품 제조업에 손을 댔고 특유의 영업력을 발휘해 사업을 확장하며 외조부의 업적을 넘어선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장운에 뿌리내려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입지전적인 사내였다.
하나, 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의 삐뚤어진 허영과 권위적인 태도는 우주의 성장배경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사업 확장의 근간이 된 처가의 재력을 무시하고 제 말을 어기는 가족 구성원에게 매를 들기를 서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집의 최고 권력자이자 독재자였다. 형이 영화과를 가고 싶은 고집을 꺾고 아버지 뜻에 따라 경영대에 들어간 것을 본 우주가 사진학과를 포기하고 법대에 들어간 것도 학습된 결과였다.
아버지의 성격은 이 서재에서도 잘 드러났다. 해외에서 공수해 온 고급 목재를 쓴 가구들이 즐비했고, 책장에는 제목을 읽기도 힘든 장식용 양장본이 가득했다. 누군가의 컬렉션을 그대로 옮겨놓은 클래식과 재즈 음반이 넘쳐났지만, 정작 입으로 흥얼거리는 건 오래된 엔카나 트로트 뿐이었다. 고가의 위스키들을 과시용으로 진열해 두면서도 꼭 멸치젓에 막걸리만 마셨다.
관리하기 힘들다고 만류하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500평 규모의 3층짜리 대저택을 지어두고, 일곱 동생들을 시시때때로 불러 그들로 하여금 장남인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본모습은 애써 감추고 남들 눈에 비치는 본인의 재력에 도취 되는, 말하자면 취향마저 돈으로 사 버리는 전형적인 졸부였다. 유복하게 자란 엄마가 오히려 소탈했고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우주의 조부모는 일찍 돌아가셔서 장남의 혜택을 못 봤지만, 고모들과 삼촌들은 학업과 유학은 물론 취직과 혼사까지도 전부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물론 그 자녀들의 교육까지도 우주네 형편에 기대다시피 했다. 엄마는 시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어도 시누이와 시동생들의 시집살이에 줄곧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자식들에겐 그렇게 손찌검을 하며 키웠으면서 애들 좀 때리지 말라고 부부싸움을 걸어오는 엄마에게만은 절대로 손을 올리지 않았다. 부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인지, 여자나 패는 못난 사내는 가오가 상한다는 본인 나름의 선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맞지 않으니 형제에게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우주는 한때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가난을 극복하고 자력으로 집안을 일으킨 실업가의 길은 언뜻 존경스러운 인물로 보이기도 했다. 한데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압적으로 손을 올리고, 입을 열 때마다 상스러운 말을 들어야 하는 자식의 입장으로서는 아무리 아버지라도 그를 전부 받아들일 순 없었다.
이렇게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가 주눅 들지 않고 밝은 성격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엄마와 형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지금, 우주는 이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참담했다.
다 버리고 싶었다. 가족도, 학교도, 이 집도. 더 이상 여기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연애 좀 했기로서니 군대와 정신병원을 들먹이는 아버지라니.
물론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엇나가는 자식이라면 제 손으로 망가뜨릴 것이다.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정신병원? 호적을 파? 미쳤어?”
“뭐라고!”
“우주한테 그러기만 해 봐. 난 애들 데리고 나가 버릴 테니까. 당신 그놈의 잘난 회사, 돈 가지고 이 집에서 혼자 살아 봐, 어디!”
어느새 서재에 와 있었는지, 엄마가 우주의 앞을 막아서고 노기를 뿜으며 남편에게 대적했다. 평소 존대하던 말투도 내던진 채였다. 엄마까지 나서자 가족의 분위기가 더 심각해졌다. 우주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허망하게 제 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늠조차 안 됐다.
형이 전역해서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모인 날이었는데, 사진 몇 장이 파국을 불러왔다.
“이 여자가 진짜.”
“아버지!”
줄곧 지켜보던 형이 엄마를 위협하는 아버지를 밀쳐냈다. 몸이 떠밀린 아버지가 세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욕설을 내뱉으며 서재를 나갔다. 아니, 나간 줄 알았는데 되돌아와서 우주를 밀쳐내며 바지에서 핸드폰을 억지로 꺼냈다.
“이건 압수야. 달라진 거 없어. 집이랑 차도 반납해. 군대도 가야 돼. 그건 각오해라. 만약 그놈 또 만나면 입대할 때까지 집밖엔 얼씬도 못 할 거다.”
“…….”
아버지가 나가자 엄마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우주에게 다가와 퍽퍽 등을 때렸다. 그러게 왜 남자랑 연애를 해서 집안에 이런 분란을 만드냐는 듯이.
하나도 아프지 않은 엄마의 주먹이 철퇴처럼 등에 꽂혔다.
***
“우주야, 정말 밥 안 먹을래?”
“…….”
“문 좀 열어 봐. 형이랑 얘기 좀 하자. 형한테 다 털어놔 봐.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응?”
“…….”
“얼굴 보고 얘기해야 문제를 해결하지. 너 그 애도 안 만나고 계속 방에서만 있을 거야?”
“…….”
우주는 겨우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얼굴 봐라… 얼마나 운 거냐? 수염도 안 깎고.”
방 안은 에어컨도, 선풍기도 켜지 않아 눅눅한 습기로 가득 찼고, 창마다 커튼도 꼭꼭 닫아 놓아 어두컴컴했다. 우주는 비칠거리며 침대에 누워 벽을 향해 커다란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다. 이대로 소멸하기라도 하려는 듯 머릿속에 한없는 우울과 슬픔을 욱여넣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제 이후로 집에 안 들어오셨고 어머니는 네 걱정만 하고 계신다.”
“…….”
“네가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안 가는데… 그래도 이렇게만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 안 되잖냐.”
“…형한텐 미안해. 집에 오자마자 나 때문에.”
“난 됐다. 그보다 재유라는 애 곧 훈련소 간다면서.”
“형이 어떻게 알아?”
“강 비서님이 그러더라. 아까 집에 오셨었거든.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 하지 않아? 그 애도 많이 놀랐을 텐데.”
“흐윽… 재유를 볼 자신이 없어. 너무 무서워서.”
재유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났다. 자신만만하게 우리 사이가 변함없을 거라 안심시켰는데, 아버지는 저를 처절하게 무릎 꿇렸고, 굴복시켜 버렸다. 무력감이 우주를 잠식해 갔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만, 아버지 말대로라면 만나자마자 재유의 인생이 망가질 것만 같아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나가려 해도 나갈 수가 없었다. 집 안팎으로 강 실장이 깔아 둔 경호 인력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재유가 날 용서해 줄까?”
“좋아하는 사이라며. 어제 일은 네 잘못이 아니잖아.”
“아니, 내 잘못이야. 그런 아버지를 둔 내 잘못. 그리고 내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조금만 나이가 많았더라면… 이런 학생 신분이 아니라 감싸 주고 보호해 줄 능력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혼자 다 끌어안으려 하지 마. 서로 좋아한다며. 불안이나 괴로운 마음도 다 털어놓고 슬픈 감정들도 나눌 수 있어야 좋아하는 사이 아니야?”
형은 어떤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을까. 어제의 악몽 속에서 형이 집으로 돌아온 건 유일한 행운이었다. 익숙한 위로를 건네는 형의 목소리가 우주를 조금이나마 안심시켰다.
“형은… 내가 이해가 돼?”
“뭐가…?”
“전부 다. 내가 게이인 거, 재유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까 봐 벌벌 떠는 거,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등신처럼 쳐 울기만 하는 거.”
“…누구라도 어제 같은 일을 겪었다면 그렇게 됐을 거다. 그리고, 내 동생인데 이해 못 할 게 뭐 있냐? 내가 빨리 알았더라면 좀 더 도움이 돼 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쉬울 뿐이다.”
끅끅대며 울던 우주는 그제야 얼굴을 들고 형을 올려다봤다.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각자의 시간을 가져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어차피 그 애가 훈련소에 가면 못 만나잖아. 그러니까 너도 집을 벗어나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때? 뭐, 나랑 같이 가야 하겠지만.”
“…알았어. 근데 재유 먼저 만나고. 나 형 차랑 핸드폰 좀 빌려줘. 나 좀 밖에 데려다줘. 응?”
“…일단 씻고 밥부터 먹자. 응? 어어… 야! 우주야!”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건지, 마음고생으로 몸의 에너지를 다 써 버린 건지 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침대 앞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형이 저를 부축하고 다시 눕히자 온몸에 열이 펄펄 끓는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이 뿌예지는 것을 느낀 우주는 형이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안 되는데. 재유를 만나야 하는데. 아. 병원에 가서 틈을 타 도망치면 되겠구나.
우주는 그 생각으로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
이른 새벽, 엄마와 함께 훈련소로 가는 버스에 오른 재유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연락하겠다더니, 퇴근할 때 데리러 오겠다더니, 앞으로 잘 헤쳐나갈 수 있다더니.
우주는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전화나 문자 한 통 없었다.
이대로 버림받는 건가.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제는 혹시나 우주가 집에 찾아올까, 혹시나 전화벨이 울릴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깨어 있는 동안은 그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시시각각 되살아났다. 사장님의 충격적인 행동,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던 경멸의 눈초리, 이런 식으로 처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우주의 형까지.
한데 아무리 울어도 미래가 달라지는 건 없었다. 훈련소를 다녀오면 우주의 아버지 회사로 돌아가 꼬박 3년을 버텨야 한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6개월을 근무하면 다른 산업체로 이직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전에 짤릴 걱정부터 해야 했으니. 그만한 성격의 아버지라면, 능히 재유를 해고하고 군대로 보낼 것도 같았다.
“안 좋은 일 있었니?”
“네?”
“너 요 이틀 새 얼굴이 말이 아니야. 밤마다 울기만 하고.”
숨죽여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계셨나. 엄마는 손수건에 잔기침을 뱉고는 아직 눈이 빨간 재유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손을 잡아 주었다.
“네가 연애한다는 사람… 혹시 우주니?”
“…….”
예상치 못한 엄마의 물음에 사고가 정지됐다.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한 건가, 재유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집과 공장을 빼면 늘 우주와만 만났고, 핸드폰으로도 우주와만 통화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싶었다. 허탈했다. 우주 부모님에 이어서 엄마에게까지 들켰다니.
“…죄송해요.”
재유는 사죄의 말로 시인했다. 이제 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엄마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재유를 돌아보더니 시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긴 했지?”
“…우리가 만나는 거 우주네 집에서 알아버렸어요.”
무슨 용기에 엄마에게 털어놓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재유는 누구에게든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엄마는 절대 이해 못 할 일이었다. 어릴 때처럼 종아리를 내리치며 행실을 단속할지도 몰랐다. 속에서 울컥 감정이 치밀어올라 두려움과 억울함, 슬픔과 외로움이 뒤섞여 눈물로 새어 나왔다.
“그 집에서 많이 놀라셨겠구나. 안 좋은 일 당했니?”
“별거 아니에요.”
엄마는 무슨 말을 하려다 기침이 더 심해졌다. 허리를 구부리고 토할 듯 목 안의 가래를 뱉어냈다. 이러다 목에서 피가 나오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기침 소리가 심각했다. 재유는 엄마의 손을 붙잡고 등을 문지르며 안절부절못했다.
“엄마… 차 세워 달라고 할까요? 괜찮아요?”
됐어, 겨우 말을 내뱉은 엄마는 기침이 잦아질 때까지 손으로 당신의 목을 쥐어짰다. 허리를 세운 엄마는 땀을 닦아 주려는 손을 쳐내고 창밖만 응시했다. 재유는 허탈한 마음으로 엄마의 싸늘한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끝까지 이해 못 할 거다. 그 과정에서 너희들은 상처받고 지쳐 가겠지. 너도 잘 생각해. 아직 젊으니까 극복할 수 있을 거야.”
“…….”
“자세한 얘기는 돌아와서 하자.”
기대한 건 아니지만 역시나 이해받지 못했다. 엄마 입장에서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남자와 연애하고 있다는 걸 갑작스레 알게 된 엄마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주 부모님의 반응도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재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버스 천장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우주 없이 훈련소에 가는 길이 절망스러웠다.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테지, 우주도 날 혼자 보내는 걸 마음 아파하고 있겠지.
우주는 다 잘될 거라고 자신에 차서 말했지만, 그도 제 부모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매몰차게 거절당한 셈이었다.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도 아버지 때문일 수 있었다. 집에서 감금당하거나, 심하게 맞았거나 하는 불길한 상상도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우주의 아버지가 두려웠다. 우유를 예뻐하는 모습을 보곤 실은 마음이 넓고 따스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잠시 안도했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개를 좋아하는 것과 아들의 남자 애인을 받아들이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는데.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을까. 나에게 연락하고 싶은데 못 하는 처지라면….
‘부모님께도 말씀드리고 당당하게 널 소개할 거야.’
그렇게 말했던 우주의 소망이 처참하게 깨져 버렸다.
재유도 속은 만신창이였지만, 상심했을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얼굴을 보기 전에는 섣부른 생각 같은 건 하기 싫었다.
‘난 너 포기 안 해. 그러니까 너도 어디 딴 데 갈 생각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그가 했던 말이 가슴을 쳤다. 우리 사이에 생긴 첫 시련인데, 이렇게 그를 두고 훈련소로 떠나야 한다니. 재유는 이제 우주 걱정뿐이었다.
***
형과 함께 자동차 여행을 시작한 우주는 속초의 해안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2일 후에 포항까지 가는 게 목표였다.
이렇게 떠돈 지 벌써 3일째였다. 형은 아예 해외로 나가자고 했는데 재유와 더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국내 여행을 고집했다.
형이 운전하는 차는 구불구불한 얕은 바위산을 지나 드문드문 허름한 카페와 펜션, 횟집이 들어서 있는 섬마을에 진입했다. 해가 쨍쨍 드는 더운 여름날이지만, 에어컨 바람이 텁텁하게 느껴져 창문을 절반쯤 열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바다 짠내가 차 안으로 훅 끼쳤다.
재유를 만나러 가기로 한 날, 우주는 고열로 쓰러져 응급실 신세를 지고 꼬박 한나절은 깨나지 못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한번 절망했다. 재유의 입소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입소한 지 벌써 3주 차인가. 결국 만나지 못하고 재유를 보낸 것이 내내 가슴에 박혀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받지 못했다.
매일같이 멍하니 답장만 기다리는 게 답답했는지 형이 반은 어거지로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형이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재유를 만나지 못하면 집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장운을 벗어나니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산이며 강이며 바다며 낯선 풍경을 볼 때마다 이 넓은 땅에서 재유와 발붙이고 살아갈 곳 하나 없을까 싶었다.
나에게 얼마나 실망했을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날 원망하고 있겠지. 돌아가서는 무릎 꿇고 싹싹 빌더라도 어떻게든 용서를 구하리라. 아버지에게 들키는 걸 둘째치고, 일단 재유의 마음을 붙잡아 놓는 것이 일 순위였다. 그러지 않고는 돌아가서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해?”
“…그냥. 빨리 시간이 흘러서 나이 들면 좋겠다는 생각? 한 마흔 살쯤 되면 아버지도 나한테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하고 있어.”
“아직 인생 시작도 안 한 놈이 별소리를 다 하네. 지금 네 나이 때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형은 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군대에서 담배를 얼마나 피워 댄 건지 연기를 뱉는 모양이 제법 익숙했다.
“그런 소리는 별로 위로가 안 되네.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젊은 게 무슨 상관이야?”
“스무 살이니까 그렇게 치열하게 사랑도 할 수 있다는 거다. 마흔 되면 그런 사랑이 남아 있겠어?”
“지금처럼 열정은 없어도, 안정은 되겠지. 재유와 마흔이 넘어서도 함께라면, 적어도 걔가 떠날까 봐 두려워하진 않을 거 아냐.”
“글쎄. 그건 그때 가 봐야 하지 않을까? 근데, 우주야. 지금 힘든 것도 언젠가 무뎌질 날이 있을 거다. 지금이 영원할 것 같아도 한 살 한 살 먹어 갈수록 시간은 빨리 가니까.”
형이 내뿜은 담배 연기가 습한 바닷가의 열기와 섞여 차 안의 공기가 후텁지근해졌다. 우주는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 창턱에 팔을 걸쳐 그 위에 얼굴을 얹었다. 여름의 바닷바람이 미미하게 얼굴을 적셨다.
“그러는 형도 겨우 스물네 살이거든? 애늙은이같이.”
형의 손이 불쑥 다가와 우주의 머리를 헤집었다. 형의 권위에 도전하는 동생에 대한 응징이었지만 다정한 손길이었다.
성적이 떨어졌거나 식탁에서 딴생각을 했을 때, 컵을 깨거나 TV 소리를 크게 틀어 놨을 때 등등, 보통의 아버지라면 때리지 않았을 자잘한 일에도 손이 올라왔었다. 그때마다 형은 대신 맞아 주거나 우주의 편에서 열심히 변명을 해 주었다. 형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터울은 적었지만, 형이 아버지 같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다음 주 언제냐? 재유라는 애 수료식.”
“…수요일.”
“데리러 갈래? 논산에.”
“뭐…? 정말?”
“그래. 전라도 한 바퀴 돌고 올라오면 시간 얼추 맞지 않겠어?”
뜻밖의 제안에 실로 오랜만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형은 반색하는 동생을 보고 기가 찬 듯이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새로 꺼내 입에 물었다.
“고마워… 고마워, 형!”
운전하는 형을 와락 껴안는 시늉을 하자 형은 징그러, 저리 가, 소리치며 달라붙는 우주를 손으로 툴툴 털어냈다.
“형, 회 먹으러 갈까?”
“좋아. 술도 한잔하고 오늘은 이 동네에서 자고 가자.”
“그래, 가자.”
작은 부둣가 근처의 2층짜리 횟집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형제가 기분 좋게 차에서 내렸다. 형은 담배를 마저 피우고 간다며 우주를 먼저 들여보냈다.
2층 안쪽에 자리 잡은 우주는 바다 끝의 아득한 경계선을 바라보며 재유를 볼 생각에 입술을 씰룩였다. 해결된 건 하나도 없는데 일단 얼굴이라도 봐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만나면 회를 먹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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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유에게.
네가 훈련소에 간 지 벌써 20일쯤 됐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고 싶어.
아직도 잠에서 깨면 계곡에서 머물렀던 시간들이 떠올라.
네가 내 옆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때문에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아.
만날 수 없는 이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지만, 너를 생각하며 간신히 버텨 내고 있어.
너도 나 못지않게, 아니 나보다도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까.
난 형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어.
어떤 풍경을 보더라도 네 얼굴이 겹쳐져서 내 가슴을 뜨겁게 해.
언젠가 너와 함께 오고 싶은 곳도 마음에 담아 뒀어.
지금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고 평온이 찾아오면 꼭 다시 함께 떠나자.
항상 널 생각하는 우주가.
PS. 내 핸드폰은 아마 연결이 안 될 거야. 019-123-**34로 전화하면 돼.
형 핸드폰인데 아마 바꿔 줄 거야. 전화 기다릴게.
그리고 수료식 때 널 마중 가도 될까?
그날 만나서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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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침번이었던 재유는 동료와 마지막 교대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기상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지만,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수면 시간이 드문드문해 머리가 멍하고 계속 서 있느라 다리가 쑤셔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입소하고 5일이 지나자 우주가 보낸 여러 통의 편지들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는 아버지의 감시에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다. 그 때문에 전화도 받을 수 없고, 입소식에도 올 수 없었다는 걸 이해했다.
익숙하지 않은 훈련 때문에 고된 하루하루였지만, 우주의 편지가 훈련소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 집으로 편지를 부치면 혹여나 우주에게 화가 미칠까 쉽게 펜을 들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앞으로는 친구인 척하며 만날 수도 없을 테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못 만나고 핸드폰으로도 자유롭게 연락할 수 없을 테지.
그래도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니 순식간에 기상 알람이 울렸다. 재유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이제는 몸에 밴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기민하게 침구를 정리하고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후 내무반 청소를 마쳤다.
오늘은 사격 훈련이 있는 날이라 조금 흥분되기도 했다. 진짜 총을 처음 만져 보고 실제로 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훈련 중에선 그나마 제일 기대되는 것이었다.
아침 점호를 마치고 식사를 한 후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훈련소 동기들 역시 사격 훈련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끌시끌했다. 그때 중사 계급의 행정관 한 명이 들어왔다. 입소 첫날에 내무반 생활 규칙을 알려 주었던 사람이었다.
“동작 그만!”
내무반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분대장이 행정관을 향해 경례를 했다.
“충성! 제1 내무반 휴식 중!”
“쉬어. 한재유. 따라 나온다.”
“235번 훈련병 한재유!”
왜 나만 나오라는 걸까. 재유는 잔뜩 긴장한 채 엉거주춤 복도로 따라 나갔다. 행정관은 재유 얼굴을 보고 작게 숨을 내뱉으며 조금 뜸을 들였다.
“한재유. 10분 뒤에 1층 현관 앞으로 나와라.”
어쩐 일인지 뒷목이 서늘해지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재유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행정관의 입만 뚫어져라 봤다.
“어머니께서 어젯밤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네?”
“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신속히 내려온다.”
행정관은 그렇게 말하고 재유의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섰다. 재유는 눈에 초점을 잃고 망연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금 들은 말을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니.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해 봐도 와닿지가 않았다. 지금 행정관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설마 엄마를 다시는 못 만난다는 건가.
느닷없이 닥친 가혹한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
조문객이 거의 없는 장례식장, 영선은 제 엄마와 줄곧 재유 곁에서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었다. 재유는 멍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영정을 지키고 있었다.
“아휴. 저렇게 밥을 안 먹어서 어쩐대니? 다시 훈련소 들어가야 될 텐데, 저러다 몸 다 상하겠다.”
“그러게. 오늘은 무조건 뭐라도 먹여 봐야지, 안 되겠어.”
“이렇게 사람 없는 장례식은 또 처음이네. 재유 불쌍해서 어쩌냐, 재유 엄마도 그렇고.”
“휴… 어떻게든 살아야지.”
“그나저나 매일같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친구 놈은 왜 안 나타나?”
“그러게. 우주가 연락이 안 되네. 소식을 알면 안 올 리가 없는데.”
“근데 저 여자애는 왜 오늘도 와서 버티고 있다니?”
“글쎄… 공장에서 친해졌나 보지 뭐.”
조문객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된 음식들 앞에서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홀짝이는 장인애를 보며 영선도 의아했다. 재유가 저 애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는데….
장인애는 공장 일을 안 가도 되는 건지 장례식장이 정해지자마자 달려와 이틀째 말없이 재유 곁을 지키며 영선과 엄마를 도와 허드렛일을 해 주었다. 뭘 물어도 시큰둥하고 표정 변화가 없길래 그냥 직장 동료에 대한 의리로 그러려니 했다.
“엄만 안 피곤해? 집에서 눈 좀 붙이다 올래?”
“괜찮아. 너나 방에 들어가서 좀 누워 있어. 아이고, 손님 오셨네.”
영선은 엄마의 말을 듣고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중키에 파리한 얼굴빛을 한 중년 남자가 빈소 안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왔다. 한여름인데도 가을용 잿빛 잠바를 걸치고, 어울리지 않는 황토색 정장 바지를 받쳐 입어 한눈에 봐도 남루한 차림이었다. 안색은 어둡고 눈에 피로감이 깃들었지만, 생긴 것만은 오밀조밀 반듯해 젊었을 적엔 꽤 미남이었음을 짐작게 했다.
남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걸어들어와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린 채 훌쩍였다. 남자의 얼굴을 보자 표정이 없던 재유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아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가 재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영선은 엄마의 옷자락을 당기며 소곤거렸다.
“엄마, 저 사람….”
“응. 닮았네.”
재유에게서 아버지 얘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영선은 재유 모자가 장운에 흘러든 원흉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엄마와 재유의 어머니가 서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걸 얼핏 들은 기억도 났다. 이혼했다고 들은 것 같다.
재유는 허망하게 손을 떨어뜨리고 넋이 나간 것처럼 남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영정사진을 보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고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슬픔을 꾸며낸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흐윽, 선례야…. 양선례. 하윽, 재유 엄마….”
재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증오와 경멸의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영선과 엄마, 장인애도 조문객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끄윽… 재유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남자는 엎드린 채 재유의 발치까지 기어 와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어 댔다. 남자를 내려다 보던 재유는 입꼬리를 퍼석하게 씰그러뜨렸다. 냉정하게 발을 털어 남자의 손을 차 내고 갈라진 목소리로 막말을 쏟아냈다. 재유에게서 상상할 수 없던 험악하고 악에 받친 눈이 남자를 향했다.
“미안이라고… 하. 이제와서 어울리지도 않게 엄마 위하는 척하는 거, 너무 가식 아니에요? 그냥 하던 대로 해요.”
“미안하다, 재유야. 아빠가 잘못했어. 아빠가, 이제라도 너한테 잘할게. 아빠 한 번만 용서해 줘.”
“거짓말…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우릴 버리고 떠나지도 않았겠지. 난 이제 아빠 볼 생각 없어요. 아빠도 나 없는 셈 치고 살아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남자는 인정에 매달리듯 아들의 이름만 불러 댔고, 그 모습에 치를 떠는 재유가 무릎에서 남자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리는 남자를 벌레 씹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실은, 얼마 전에 네 엄마 만났었어. 미안하다 사죄하고 돌아와서 같이 살려고 했었다고. 엄마도 다 용서한 건 아니지만, 차근차근 갚아 갈 생각이었어. 아빠가 잘못한 것들, 두 사람 옆에서 속죄하면서 살려고 했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떠날 줄은….”
“뭐?”
충격과 의구심에 재유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엄마와 만났었다고? 다시 함께 살기로 했다고? 재유는 일말의 기대도 없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영선도 남자의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자기가 알기로는 최근에 집에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재유가 훈련소에 있을 때 만났다는 게 타이밍상 절묘하게 느껴졌다.
저 남자가 모자에게 사죄하려고 했다면 그동안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아내의 죽음을 알고 장례식에 찾아올 정도로 소식이 빠른데 처자의 행방을 몰랐을 리도 없을 터였다.
노린 것인가. 뭘? 재유네는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영선은 찝찝한 기운을 지우기 힘들었다.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나 해요? 엄마 왼쪽 다리 거의 망가졌었어. 감각이 없어서 다리 절고 다니면서도 하루종일 주방에 서서 일했었다고. 눈도 침침하고 당뇨 합병증에 고혈압까지, 인슐린 주사랑 약을 달고 살면서 하루에 16시간씩 일했다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아? 식당 일하고 집에 와서 봉투 붙이다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약병 하나 못 집으시고, 119에 신고조차 못 하고 다음 날 아침까지… 그 모습 그대로….”
불귀객이 되셨다.
거침없이 원망의 말을 쏟아내던 재유가 표정을 허물어뜨리며 제 가슴을 아프게 쥐어짰다. 뱉어낸 말들이 그대로 돌아와 박혀 버린 것처럼 망연하게 고개를 떨궜다. 실은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재유는 자리에서 스르륵 주저앉아 엎어진 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제껏 영혼 없는 사람처럼 오도카니 영정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잊고 있던 슬픔이 한꺼번에 몰아친 건지, 한번 터진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다 내 탓이야. 엄마가 죽은 건 내 탓….”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곡소리가 영선의 가슴에 안타깝게 스며들었다.
“재유야. 아빠가 잘못했어. 아빠 말 좀 들어 봐, 응? 이리 와 봐.”
남자가 울고 있는 재유를 억지로 일으켜 얼굴을 들려고 했다.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영선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치며 다가가 남자를 떼어 놓았다.
“가만 좀 놔둬요, 아저씨. 얘기는 나중에 하고요.”
영선은 남자와 재유 사이에 버티고 앉아 죄책감에 요동치는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남자는 잠시 주춤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빈소 밖으로 나갔다.
***
장례 마지막 날, 재유는 영선이네와 장인애의 도움으로 발인과 화장을 끝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아침까지 있었으나 화장터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의 말로는 사망진단서 제출 때문에 장례식장 직원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던데.
재유는 집까지 함께 와 준 장인애와 장례를 도와준 영선의 부모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이제는 엄마가 없는 빈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도 걱정스레 살펴 주는 영선도 뒤따라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엄마! 아빠!”
재유는 방 상태를 보고 뒷목에서 정수리까지 쭈뼛 소름이 끼쳤다.
영선이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다시 헐레벌떡 뛰어온 영선의 부모님은 방을 두리번거리곤 아연실색했다. 냉장고부터 싱크대, 옷장, 서랍장, 이불 속까지 처참하게 뒤집어져 있었다. 쫓기듯 뭔가를 찾았던 것처럼.
그럴 줄 알았어.
재유는 속으로 조소했다. 혹시나 아빠가, 아니, 한정호가 정말로 돌아온 건 아닐까 일말의 희망을 점쳤었던 자신이 우스웠다.
방으로 들어가 엄마가 쓰던 서랍장을 열었다. 안에 있어야 할 귀중품 상자가 통째로 없어졌다. 상자에는 엄마의 통장과 도장, 보험 서류들, 월세 계약서, 재유가 첫 월급 받아 사 드린 하나뿐인 귀금속이었던 귀고리가 들어 있었다.
재유는 이 방 안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현실로 느껴졌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훈련소에 있어야 했고, 엄마는 살아 있어야 했으며, 퇴소를 하면 우주와 만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영선과 아주머니는 허둥지둥 큰 짐부터 치워 나갔다. 아저씨가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고 소리치며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핸드폰을 열었다.
재유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이 방에 있는 모두가 짐작하던 말을 꾸역꾸역 토해 냈다.
“아빠가… 그랬을 거예요.”
재유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지며 착 가라앉았다.
이제 와 한정호를 원망해 봤자 뭐 하나. 줄곧 옆에 있었던 건 난데.
엄마가 그렇게 쇠잔해 가는데도 엄마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재유를 나락으로 빠뜨렸다. 더구나 엄마는 아들이 남자와 연애한다는 사실을 들어야 했다. 그게 아들에 대한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연애한답시고 집에 잘 붙어 있지도 않았고, 우주네 집에서 겪었던 일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엄마를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영정을 지키면서도 우주에게 받은 편지를 두고 오는 바람에 염우혁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 수 없다는 걸 초조해했다.
뭐 이런 호로새끼 같은 아들이 다 있나.
모든 게 달라졌다.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이전의 나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한정호가 처음 자신들을 떠났을 때 느꼈던 상실감이 되살아났다. 엄마와 겨우겨우 이곳에서 자립해 왔는데, 다시 만난 한정호는 지난 시간 우리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어 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재유는 자신이 발 디딘 곳이 서서히 잠식해서 끝도 없는 바닥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