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3. 첫사랑
* * *
2000년 4월.
오후 3시. 재유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나오는 부품들 속에서 불량품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주간 조를 담당하는 주임이 비교적 손쉬운 라인으로 배치해 줘서 느긋하게 작업을 했다.
우주가 서울로 떠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갔다. 말단인지라 주말엔 좀처럼 쉴 수 없는 재유였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 주는 토요일과 일요일 한꺼번에 휴무가 잡혔다. 입사 8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주가 주말마다 집에 돌아와도 2~3시간밖에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처음으로 이틀을 함께 하게 되니 이만저만 기대가 되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이번 주는 주간 근무라 오늘 밤 푹 자고 내일 오전에 느긋하게 우주를 마중 나갈 수도 있었다.
2시간을 꼬박 채워 일하자 1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재유는 얼른 공장 건물을 빠져나가 공중전화로 뛰어갔다. 삐삐에 우주의 음성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재유야, 나 지금 출발하려고. 너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공장 앞에서 기다릴게. 너무너무 보고 싶어. 내일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 맞지? 처음도 아닌데 너무 기대된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일하고, 이따 보자.]
벌써부터 두근거렸다. 우주가 날 빨리 보고 싶어서 하루 일찍 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시간이 너무 더디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이 3시 반, 퇴근은 8시 반이니까 아직도 5시간이나 남았다.
***
일을 마친 재유가 근무복을 급하게 벗고 캐비닛에 있는 가방에 대충 말아 넣었다. 환절기용 점퍼를 걸치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얼굴을 체크했다. 좀 부스스해 보여 손을 씻으면서 세수를 하기로 했다.
세면장으로 오긴 했는데, 재유는 마음이 급해져 대충 손을 씻고 머리에 물기를 쓱쓱 묻혀 잔머리를 정리한 후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우주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흥분되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재유야. 한재유.”
여자 목소리가 재유를 불러세웠다. 같이 입사했던 동창 장인애였다. 사실, 동창이었던 것도 회사에 들어오고 알았다. 장인애는 아직 근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 모양과 화장만은 알록달록 화려했다.
“왜?”
“혹시 지금 시간 있나 해서. 할 얘기도 있고.”
“나 약속 있는데. 다음 주에 출근하고 얘기하면 안 될까?”
“누구랑 약속인데?”
재유는 순간 곤란해져 머뭇거렸다. 장인애도 우주가 누군지는 알고 있을 텐데. 공장 앞에서 마주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재유는 지레 제 발 저려 이것저것 생각하다 우주를 만나는 흥이 깨진 것 같아 무뚝뚝하게 말했다. 동창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별일 없겠지.
“우주 만나기로 했어.”
“나도 가도 돼?”
“뭐? 글쎄… 갑자기라 힘들 것 같은데? 갈 데가 있어서. 미안. 먼저 갈게.”
재유는 제 할 말만 하고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장인애가 말을 걸어온 게 의아해 고개를 잠시 갸웃했지만, 우주가 정문 앞에서 기다릴 생각에 금세 잊혀진 일이 되었다.
저 멀리 우주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저를 보고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재유도 제멋대로 미소가 터져 나와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우주야, 부르려는데 앞서가던 베테랑 직원 한 명이 그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참, 우주는 사장님 아들이었지. 오래 일한 직원이 우주의 얼굴을 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재유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짐짓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다음에 또 공장 놀러 와.”
“네, 안녕히 가세요.”
직원과 인사를 마친 우주가 재유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씨익 웃었다. 재유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고 퇴근하는 몇몇 직원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 멀리 장인애도 보이는 것 같았다.
“많이 기다렸어?”
“아냐. 나도 좀 전에 도착했어. 짐 놔두러 집에 잠깐 들렀다 왔거든. 하아… 네가 다니는 회사만 아니어도 확 끌어안고 뺑글뺑글 도는 건데.”
우주는 제 아버지 회사인데도 사장 아들이라는 티는 전혀 안 냈다. 둘만 있을 때도 아버지 얘기나 회사 관련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공장을 지칭하는 용어도 ‘재유가 다니는 회사’로 일관되었다. 재유도 그게 편하기는 해서 굳이 수정해 주진 않았다.
“밥 안 먹었지? 어서 가자.”
“응. 너무 배고파. 네가 해 주는 파전 먹고 싶어.”
“집에 가서 해 줄게. 근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거야?”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우주가 즉답했다.
“너 보고 싶으니까.”
“정말?”
“당연하지. 이번 주가 얼마나 길던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나도.”
고개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재유의 귀에 열이 올랐다. 우주는 싱글벙글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는 재유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쪽으로 와.”
우주가 이끄는 곳에 차가 한 대 있었다. 흰색 신형 중형차였다. 우주는 차 문을 열고 어리벙벙한 채 서 있는 재유를 조수석에 밀어 앉혔다.
“이거 웬 차야?”
말없이 성큼성큼 운전석에 올라탄 우주가 기운차게 문을 닫자마자 재유의 얼굴을 감싸고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재유가 파닥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흡착하듯이 입술을 빨아들이는 우주의 기세에 재유도 포기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놀랐잖아. 뭐야.”
재유는 한참 이어진 키스에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우주를 밀어두고 차창 밖으로 주변부터 살폈다. 다행히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미안. 어떡해, 못 참겠는걸.”
“근데 이거 네 차야?”
“응. 오늘 엄마한테 받았어.”
“정말? 멋지다. 네가 벌써 차를 끌고 다니다니.”
“학교 다닐 땐 가까우니까 필요 없고, 집에 올 때만 쓸 거야. 앞으로 우리 이거 타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자. 알았지?”
재유는 차 내부를 신기한 눈으로 훑어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대학 입학 전에 면허를 따기는 했지만 자기 차가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은 몰랐다. 역시, 재력가 집안이라 차 한 대는 우습겠지.
재유는 자신의 처지와 우주의 배경을 비교해 볼 때도 간혹 있었는데, 거기에 함몰되면 우주를 만나고 사랑할 수 없었다. 방 한 칸 셋방과 3층짜리 저택은 티코와 우주선만큼 격차가 났다. 비교할 수준도 되지 않으니 질투나 열등감도 별로 들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들자면 우주가 ‘있는 집 자식’이라는 게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환경이 다르다는 사실이 재유에겐 매력으로 다가왔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면 공감과 위로는 될지언정 팍팍한 현실의 우울은 털어내기 힘들 것이다.
“자가용 정말 오랜만에 타 보네. 신기해. 네가 운전을 한다는 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교복 입고 있었는데.”
“성인 맞거든 이제?”
재유의 볼을 쓸어내리던 우주가 기어를 내리고 핸들을 돌렸다. 재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늘 보던 풍경이지만 통근 버스가 아닌 우주의 차에서 보는 차창 밖은 새로워 보였다.
“집으로 가면 되지?”
“응. 근데… 집 말고 그냥 드라이브하면 안 될까? 가까운 데서 뭣 좀 먹고. 네가 운전하는 차 처음인데 더 오래 타 보고 싶어.”
“당연히 되지. 좋아. 그러자.”
우주는 핸들에서 한 손을 떼고 재유의 손을 슬쩍 잡았다.
“너 아직 운전 경력 한 시간도 안 됐거든? 안전 운전 해 줄래?”
재유가 그의 손을 다시 핸들 위에 올려놓고 눈을 흘기는데, 우주는 그 모습이 또 귀여워 미칠 것 같다는 듯 헤벌쭉 웃으며 조수석을 돌아보기 바빴다.
“잡고 싶으니까 그렇지.”
“그럼….”
재유는 팔짱을 가볍게 끼고 우주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됐지?”
“응. 너무 좋아. 진짜 편해.”
우주가 고개를 슬쩍 돌려 재유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가슴에 몽글몽글 행복감이 차올라 자동차를 탔음에도 비행기를 탄 것처럼 붕 뜬 기분이었다.
***
다음 날, 두 사람은 분주하게 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우주가 집으로 찾아와 엄마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밥상에는 파전도 있었다. 어제 우주가 먹고 싶다 했던 걸 기억하고 있는 재유가 새우와 오징어까지 얹어 부쳐 둔 것이었다.
우주의 차로 엄마를 식당에 바래다준 뒤 1시간 거리의 인근 절에 가서 구경도 하고 사찰 음식도 먹었다. 사진도 많이 찍고 드라이브도 실컷 즐겼다. 시내로 돌아와선 액션 영화를 보고 오락실에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저녁 식사는 새로 생긴 피자집에서 해결했다. 고백하던 날 먹었었던 고구마피자는 어느새 재유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의 데이트에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실컷 해 볼 수 있었다. 주로 신체접촉이었다. 차가 있으니 둘만의 시간은 신세계였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키스를 하며 옷 위로 몸을 더듬는 것까지 발전했다.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는 우주의 집이었다.
재유는 하루종일 돌아다녀 피곤했음에도 집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이 집에 올 땐 항상 그랬다.
‘좀 거만한 집이지? 쌀쌀맞은 집이야.’ 우주가 했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와 주차한 뒤 차에서 내리자 옆으로 세 대의 차가 더 있었다. 차고에 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재유는 3층의 우주 방 외의 다른 곳은 거의 못 가 봤다. 이 집엔 재유가 모르는 공간이 훨씬 많았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어른들 계시지?”
“아마 그럴걸? 근데 저녁 시간 지났으니까 각자 방에 계실 거야.”
“그래? 마주치면 인사드리면 되는데… 왠지 긴장돼서.”
“그랬쪄용? 우리 재유 긴장했쪄용?”
우주가 손으로 볼을 살짝 꼬집으며 애 취급을 했다. 정작 이 집에서 개다리춤 추며 까불던 막둥이 주제에.
“놀리지 마.”
“넵. 알겠습니다. 어서 가자. 너랑 보려고 〈007〉 시리즈 다 빌려 놨어.”
“오, 진짜?”
둘은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현관으로 향했다. 아치형 통로로 만들어진 테라스를 걸어가는데,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우주의 아버지이자 재유의 사장님인 염창섭이었다. 어쩐 일인지 우유와 함께였다. 야외용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우유에게 공을 던져 주고 있었다.
“…계셨어요?”
“왔냐?”
“네. 여긴 제 고등학교 친구 한재유예요. 오늘 자고 가려고요. 작년 9월부터 아버지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
염창섭은 직원이라는 재유의 신원에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 안녕하세요, 아버… 사장님.”
“그래.”
찰나 동안 우주를 예민하게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고졸 친구와 사귀는 것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는 듯했다. 다시 재유를 힐끗 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와중에 우유가 재유를 알아보고 달려와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재유는 긴장했던 마음이 잠시 누그러져 우유를 안아 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유야, 잘 있었어?”
“빨리 들어가자.”
우주는 우유를 재빨리 아버지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손이 빈 재유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우주가 서두르는 기색으로 등을 떠밀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부자였다.
재유는 공장에서 염창섭을 볼 기회가 잘 없었다. 종무식과 시무식 때 본 게 전부였다. 회사에서 그는 위엄 있고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쌀쌀맞은 눈빛과 날카로운 표정에선 날이 선 카리스마와 사장님의 포스가 느껴졌었다.
그런데 집 안에서 편한 차림으로 우유와 함께 공놀이 하는 걸 보니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집에서는 그래도 다정한 면이 한 톨쯤 있지 않을까,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가 우유 예뻐하시나 봐?”
“응. 나도 의외였어. 엄마 말로는 거의 매일같이 산책 다닌다 그러던데? 저번엔 옷도 사다 입혀 주셨대.”
“그랬구나…. 네가 서울에 우유 안 데려간다고 했을 때 좀 걱정됐었는데.”
“사실 아버지가 반대했었어. 혼자 사는데 밥이나 제때 주겠냐면서.”
“정말?”
사람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건가? 무서운 인상의 염창섭과 작고 귀여운 우유를 다시 떠올려 본 재유는 어딘가 매치가 안 되는 조합에 웃음이 났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우유가 예쁨받으니.
거의 두 달 만에 재유는 우주의 방으로 들어섰다. 책장이 조금 빈 것 외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감정이 들었다. 인위적이고 조금은 살벌한 이 집에서 우주의 방은 유일하게 아이가 사는 집 같았다. 입가에 사탕 냄새를 풍기며 흙밭을 구르고 다니는 개구쟁이 아이. 넓디넓은 방에 어머니 입맛대로 채워진 비싼 가구로 둘러싸여 있어도 곳곳에 우주의 흔적이 남아 그럴 터였다.
“바로 비디오 볼까?”
“잠깐만 쉬고 보자.”
재유는 긴장이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이블엔 우주의 소지품이 펼쳐져 있었다. 다이어리와 프린트물, 책 몇 권이 있었다. 슬쩍 들춰보니 헬스클럽 전단지가 나왔다.
“헬스클럽? 운동하게?”
“응. 학교 근처에 하나 생겼는데 한번 다녀 보려고. 그동안 운동 전혀 못 했으니까. 줄까?”
우주는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내 재유에게 건넸다. 지금도 몸이 다부진데 근육이 붙고 어깨가 더 벌어지면 여자들에게 관심 받는 일도 많아지지 않을까? 재유는 그 몸이 보고 싶기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대학은 어때? 이제 제법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지?”
“뭐 그럭저럭.”
“신입생 되면 미팅도 많이 한다던데, 너도 해 봤어?”
탄산수를 마시던 우주가 멈칫했다.
“제의가 많이 들어오긴 하지.”
“흠… 그래서?”
재유는 괜히 책들을 들춰보며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미팅 권유를 받았다는 자체가 속이 쓰렸다. 떨어져 살며 매일 못 만나는 것도 아쉬운데 우주에게 들러붙을 대학 친구들이 경계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주가 갑자기 허리를 접고 푸흡, 소리를 냈다. 이내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듯 하하하,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왜 웃어?”
“바보야. 지금 나 떠보는 거야? 네가 있는데 미팅을 왜 나가. 미쳐 내가…. 무슨 질투를 이렇게 티 나게 하냐? 하, 진짜 귀여워 죽겠네.”
우주는 허리를 숙여 재유 머리통을 가슴팍으로 안고 비벼 댔다. 이대로 서울 집으로 데려가 꽁꽁 숨겨 두고 싶다며 머리를 깨물기도 했다.
“하지 마. 아, 하지 말라고.”
“와아… 한재유 사람 잡는다 진짜. 너 그렇게 입술 삐죽 내밀고 눈꼬리 올라갈 때 얼마나 예쁜지 알아?”
“…혹시 모르잖아. 넌 인기 많으니까. 우린 예전처럼 자주 못 만나기도 하고.”
“내가 아주 너 땜에… 밤마다 잠을 못 잔다.”
우주는 웃음기를 거두고 테이블에 걸터앉아 재유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시선은 재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방금까지 밝게 웃던 눈가가 금세 축 늘어져 왠지 시무룩했다. 우주는 손을 들어 재유의 뺨을 감싸고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재유야. 설마 내가 바람피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바람이라니… 그냥 불안해서 그래.”
“후우. 마음을 꺼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진짜….”
“…….”
“난 서울에 있을 때 대부분 네 생각만 해. 혼자 밥 먹을 때 네가 옆에서 같이 먹어 줬음 좋겠고, 너랑 분위기 좋은 카페에도 가고 싶고, 버스나 지하철 타도 너랑 손잡고 다니고 싶고. 학교에서 커플들 보면 정말 네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이렇게 너만 생각하는데 뭐가 불안해. 그러지 마. 나도 걱정된단 말이야.”
“뭐가?”
우주가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고 바닥에 주저앉더니 재유의 무릎에 얼굴을 얹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쓸쓸하게 울렸다.
“너도 공장에 또래 애들 많잖아. 일 끝나면 직원들끼리 같이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사귀는 사람도 많다는 거 알어.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맞아. 그런 적 없어.”
“그렇겠지. 근데 난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 주면 목소리도 못 들어. 근무시간에 공장에 전화할 수도 없고 삐삐로 연락하는 건 한계가 있잖아. 보고 싶단 말도 잘 안 해 줬으면서.”
재유는 무릎에 놓인 머리에 손을 올려 가만히 쓰다듬었다. 고등학생 때보다 좀 더 기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우주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게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긴 두 팔이 천천히 재유의 허리를 감쌌다. 사탕 냄새 풍기는 개구쟁이가 의기소침해 있었다.
“…미안해. 앞으로 내가 더 자주 전화할게. 나도 매일매일 네가 보고 싶고 네 생각만 해.”
재유는 우주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을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우주의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헤벌어졌다.
항상 이랬다. 먼저 입 맞추는 건 우주가 많았지만 재유가 먼저 해 준 적도 더러 있는데 늘 처음 받는 키스처럼 감동스러워했다. 저 눈은 얼마나 더 커지는 걸까? 그렇게 매번 놀랄 일인가.
“더해 줘. 한 번 더해 줘.”
익살맞게 입술을 들이대는 우주 모습에 웃음이 터진 재유가 한 번 더 뽀뽀했다. 이번엔 좀 길게. 미세하게 꿈틀대는 우주의 아랫입술 때문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음. 너무 좋다. 앞으로도 너한테 계속 뽀뽀 받으려면 어떡해야 돼?”
“이제 그만해. 빨리 영화나 보자. 응?”
“그럼 한 번만 더. 뽀뽀.”
재유는 안달하며 보채는 우주의 이마에 뽀뽀를 해 주고 민망한 듯 입을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주는 아쉬움에 뭉그적거리며 비디오를 틀고 불을 껐다. 그리고 과자 몇 개를 TV 앞에 펼쳐 놓고 카펫 위에 앉아 여기 앉으라는 듯 바닥을 팡팡 쳤다. 재유가 바닥에 앉자 우주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베고 누워 과자봉지를 뜯었다.
암흑의 조직에서 음모를 발견한 주인공이 이국적인 낯선 땅에서 사건을 파헤치며 본드걸과 사랑도 나누고 각종 첨단무기로 악당을 물리치는 시원한 액션이 펼쳐졌다.
재유는 우주의 방에서 비디오 보는 걸 좋아했다. 브라운관 TV임에도 36인치나 되고 와이드 형이라 TV 방송보단 영화를 보기에 제격이었다. 그동안 양옆의 화면이 잘린 채 비디오를 봐왔던 게 아까울 정도였다.
재유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2시간 가까이 끈덕지게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우주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비디오를 갈아 끼우기 위해 일어섰다.
“아흐….”
한 자세로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자세가 휘청였다. 우주가 잽싸게 팔을 뻗어 허리를 받쳐 주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다리를 저리게 한 원흉이 소파까지 부축해 앉혀주었다. 팔걸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길게 뻗은 재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우주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괜찮아? 가만있어 봐.”
허벅지부터 발가락 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우주의 손길로 차분히 풀려 나갔다. 종아리를 주무르던 손은 발목으로 옮겨가 90도로 접기도 하고 일자로 쭉 펴기도 하며 관절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쥐 난 건 아닌데….”
“내가 적당히 일어났어야 되는데. …미안.”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자책하던 우주가 갑자기 재유의 양말을 벗기고 맨발을 주물렀다. 이번에야말로 쥐가 날 것 같았다. 얼굴과 팔을 제외한 맨살이 닿는 건 처음이었다. 곧바로 손을 쳐내려 했는데 우주는 발등을 손으로 감싼 채 금방 끝난다며 재유를 저지했다.
비디오를 보다 난데없이 발 마사지를 받는 상황에 재유는 긴장으로 허리를 굳혔다. 우주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발가락 하나하나를 잡고 늘려 가며 꼼꼼하게 발의 긴장을 풀었지만, 재유는 태연할 수 없었다. 안 씻은 발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서서 일하느라 뒤꿈치에 살짝 굳은살이 잡힌 게 부끄럽기도 했다. 게다가 이렇게 애틋한 손길로 만져 주다가는… 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했다. 여기서 서 버린다면 발을 만져 줬다고 성감을 느끼는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괜찮아 이제. 멀쩡해.”
재유는 무릎을 굽히며 우주의 손에서 발을 빼냈다. 얼굴이 홧홧한 걸 그에게 들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발을 빼앗긴 우주는 얼굴을 잠시 찌푸리더니 재유가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 능글거리는 웃음을 걸었다.
“뭐 어때. 우리 사이에. 너 아플 때도 다 해 줬던 건데.”
“아….”
양호실에서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준 걸 얘기하는 듯했다. 그때 분명 셔츠 앞섶이 훤히 열려 있었고, 바지도 무릎까지 걷혀 있었다. 게다가 지퍼가 열린 채 속옷과 함께 골반 근처까지 내려가 있었다. 우주는 옷을 벗겨 놓은 사람이 자기라고 했다.
“그때 난… 자고 있었잖아.”
“그럼 자고 있을 땐 해도 되는 거야? 난 네가 눈 뜨고 있을 때 해 주는 게 더 좋은데.”
비디오가 끝까지 다 돌아간 TV 화면 속의 노이즈가 우주의 얼굴 뒤로 비치고 있었다. 그 아래엔 살짝 보풀이 일어난 흰 양말이 카펫 위로 나뒹굴었다.
우주는 소파의 방석 부분을 천천히 손으로 쓸며 무릎을 펴고 재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 꺼진 방에 유일한 조명인 TV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등지고 있는데도 두 눈에 빛이 났다. 느적느적 움직인 것처럼 보였지만 몸이 포개진 건 순식간이었다.
우주의 입술이 겹쳐졌다. 그 촉감이 재유의 입술에 아릿하게 스며들었다. 재유는 눈을 감고 우주의 등을 감싸 안았다. 볼을 감싸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따스했다.
조금씩 입술을 빨아 대다 혀가 밀고 들어왔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눈을 들어 보니 우주가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땐 얼마나 만졌는데?”
재유는 입술을 붙인 채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우주가 호흡이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맞췄다. 서로의 몸에 대한 화두를 입 밖으로 내고서 하는 키스는 새삼 느낌이 달랐다. 그동안 해 왔던 애들 장난 같은 가벼운 접촉을 벗어났다. 우주의 손바닥이 척추를 따라 내려가더니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재유는 정말 가까스로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걸 참을 수 있었다.
“여기 빼곤 거의 다 만졌지. 아픈 앨 눕혀 두고 음흉한 짓 하는 놈은 아냐.”
“손으로 만진 건 맞아? 수건으로 닦기만 한 거라며.”
“알고 싶어? 생각나게 해 줄까?”
우주가 다시 입술을 붙이며 셔츠 위로 어깨와 가슴 부근을 쓰다듬듯이 매만져 나갔다. 손길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청바지 위를 스치며 중심부를 진득하게 눌렀다. 재유는 키스를 멈추고 우주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끝까지 생각 안 나면 어떻게 할 건데….”
침착을 가장하며 말했지만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댔다. 이미 반쯤 선 것 같았다. 숨은 가빠졌고 온몸의 말초신경에 번쩍번쩍 불이 붙은 듯했다. 설마설마했던 동성과의 성관계가 이대로 진행될 것 같은 예감이 들자 이마에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걱정 마. 오늘 안 나면 내일도 있고… 내일도 안 나면 다음 주도 있으니까.”
고개를 들어 우주와 눈을 맞췄다. 우주 역시 숨을 몰아쉬며 재유를 마주 보았다. 표정으로 알 것 같았다. 원하고 있었다.
재유는 이럴 때마다 성애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지 헷갈렸다. 섹스는커녕 키스의 경험도 미진한데, 우주와의 성관계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우주가 하고 싶은 걸 참아 가며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우주는 나한테 삽입을 하고 싶은 거겠지. 터놓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키스만 해 봐도 앞서가며 리드하는 자세나 잡아먹고 싶어 하는 눈빛 같은 걸 보면 그런 포지션일 것이다.
문제는 재유가 동성과의 섹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거였다. 남고를 다니며 친구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들은 상식이 전부였다. 그들은 남성기를 넣는 신체 부위를 설명하며 마지막엔 꼭 혐오감을 표했다. 그러기에 재유도 두려웠다.
이제는 재유가 우주의 목에 매달려 혀를 옭아맸다. 그가 내는 낮은 신음이 짜릿하게 흥분되었다. 우주의 몸이 기울어지면서 재유는 소파 위에 거의 드러누운 자세가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찰나 같기도, 영원 같기도 한순간이었다.
“흐으… 흐읍.”
우주의 손이 티셔츠 속을 파고들었다. 맨살에 우주의 손이 닿았다. 엄지로 배꼽 언저리를 쓰윽 밀어내며 옆구리를 움켜쥐는가 하면 겨드랑이를 손등으로 쓸어내리기도 하고, 더 파고 올라와 등을 문지르기도 했다. 우주의 손이 닿는 곳마다 저릿저릿해 몸이 들썩였다. 사람 숨넘어갈 정도로 느린 손길이었다. 우주는 재유가 놀라지 않도록 달래듯이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우… 우주야.”
재유는,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았다. 희열을 느끼다가도 크게 당황했다. 그게 단순히 첫 섹스를 앞두고 느끼는 마음의 불안인지 아니면 감당하기 버거운 자극 때문에 느끼는 몸의 두려움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우주의 손바닥이 배를 쓸어 올라가 가슴팍에 닿았다. 엄지와 검지로 예민한 돌기를 비틀자 재유는 숨을 들이마신 채 몸을 크게 뒤척였다.
“아흑, 우주야… 잠깐만!”
재유가 양손으로 우주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밀쳐냈다. 우주는 반동으로 상체가 휘청거리며 소파 밑으로 나가떨어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는 놀란 얼굴이 재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유…. 왜?”
나동그라진 그를 보며 재유도 깜짝 놀랐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제 모순된 행동이 그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부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순간 놀라서 그런 거였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신조차도 정립되지 않은 성에 대한 욕망과 두려움을 애인인 그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게 한심했다.
손을 잡은 다음 뽀뽀와 키스를 거쳐 몸을 더듬다가 자연스럽게 관계로 이어질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만큼 재유는 우주를 좋아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머릿속에 박혔던 이성 교제에 대한 개념이나 성에 관한 상식이 여자와의 관계 위주로 정립되다 보니 직접적인 그와의 접촉에 한순간 간이 쪼그라들었다.
아무리 마음을 먹었다 해도 오랫동안 이성을 지배했던 관념을 떨쳐내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이미 한 번 넘은 선을 또 넘어야 했다.
재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져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우주야. 미안해….”
우주는 등을 구부리고 떨고 있는 재유를 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찬찬히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역시 처음이니 쑥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미안해. 좀 성급했지?”
“…….”
“많이 놀랬어?”
“…….”
“재유야.”
우주가 눈을 가린 팔을 슬쩍 당겼다. 재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풀고 그와 마주 앉았다.
“괜찮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듬어 주며 우주가 물었다.
“그게… 놀라긴 했는데, 마냥 싫지만은 않았지만… 근데 또 그렇게 갑자기 그러니까 좀 당황스러웠고… 사실 이런 상황을 생각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는데 잘 모르겠어. 나 자꾸 횡설수설하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 암튼… 미안해.”
재유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우주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재유의 발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재유야. 이렇게 할까? 오늘은 비디오 보기로 했으니까 마저 영화 보고, 다음에 만날 때까지 다시 생각해 보자.”
“…….”
“난 너 볼 때마다 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그 이상도 하고 싶어. 근데 네가 싫다면 절대로 안 할 거야. 대신 너도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줘. 어때?”
“…알았어.”
우주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바라본 그의 앞섶이 조금 부풀어 있었다. 그와 자신의 속도는 여전히 맞지 않았다. 앞서서 좋아한 것도 먼저고, 고백을 한 것도 그가 먼저였다. 재유는 그저 따라가기 바빴다. 좋아하는 마음마저 뒤처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우울했다. 태어나 이렇게 간절히 좋아했던 사람은 그가 처음인데.
“사실, 나도 기분 좋았어. 근데….”
“그거면 됐어. 충분해.”
“나 때문에 기분 상했지…?”
“아니야. 이해돼.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그니까 걱정하지 마.”
우주는 오히려 시무룩한 재유를 달래려 애썼다. 연신 머리를 쓰다듬고 눈을 맞추며 예쁘게 웃어 주었다.
“비디오 다음 편 틀까?”
“아니. 긴장했더니 갑자기 피곤해졌어. 그냥 자면 안 될까?”
“그러자 그럼.”
우주는 TV를 끄고 재유를 일으켜 침대로 향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키스하며 뒹굴었는데 침대에는 잠만 자러 가다니. 다 제가 자초한 일이었기에 재유는 가슴이 따끔거리는 가책을 느꼈다.
우주는 재유를 안쪽에 눕히고 그 옆에 모로 누웠다. 아직 그를 볼 낯이 없어 똑바로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재유에게 이불도 꼭꼭 덮어 주었다. 머리를 괴고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더운 콧김이 뺨에 닿았다.
“네가 그렇게 보고 있으면 잘 수가 없잖아.”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 응?”
재유가 살짝 실눈을 뜨고 웃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뭘.”
“…좋아해, 우주야. 잘 자.”
“이러기냐? 하아….”
다시 눈을 꼭 감은 재유의 볼에 쪼옥,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우주는 “속도 모르는 내 남자친구.” 운운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잘 자. 내가 더 좋아해.”
재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커다란 손이 가슴께에 내려앉아 일정한 박자로 토닥여 주었다.
한참을 토닥토닥, 우주가 열심히 재워 주는데도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재유는 눈을 감은 채로 우주를 향해 돌아누웠다. 팔을 둘러 그의 몸통을 껴안고 다리는 무방비하게 하반신에 걸쳤다. 잠결에 나온 행동인 양 가장했다.
“뭐야 이 자세는? 재유야. 재유야?”
그렇게 물으면서도 우주는 재유가 깰까 봐 소곤소곤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유치하게 사랑을 확인받는 기분이었지만, 재유는 끝까지 모른 척 그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묻고 입꼬리를 올렸다. 우주의 몸은 고장 난 것처럼 뻣뻣해졌지만 맞닿은 하반신만은 핏기가 도는지 두툼하게 존재감을 발휘했다.
“이… 무심한 자식.”
허공에서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던 팔이 체념한 듯 재유를 폭 감쌌다. 온몸이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욱신욱신 뜨겁게 반응했다. 오늘 잠을 잘 수 있을까.
재유는 우주에게서 나는 따뜻한 향기를 콧속에 한껏 들이마시며 열기를 가둔 몸을 꼭 끌어안았다. 곧, 이어지고 싶었다. 그땐 봐주지 말라고 우주에게 말해 줘야겠다.
***
2000년 6월.
야간 근무를 마친 후 전자 대리점에 들른 재유의 손에 작은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첫 핸드폰을 샀다. 엄마 것도 같이 두 개였다.
삐삐도 없는 엄마는 필요 없다며 핸드폰 사기를 만류했었지만, 교대근무로 얼굴 보는 시간이 줄어들어 혹시나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할 수 있게 꼭 사드려야지 마음먹었었다. 작년처럼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공장에 들어간 지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재유가 밥벌이를 하고 나니 집안 살림에 여유가 좀 생겼다. 최소한 엄마 병원비와 약값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고, 아빠가 동네 사람들에게 빌렸던 빚도 머지않아 털 수 있었다. 게다가 월급의 일정 부분을 저축할 수도 있었기에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방 두 칸짜리 월세로 옮길 계획도 세웠다.
사실 단조로운 생활을 하는 재유에게 핸드폰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우주가 선물로 준 삐삐를 좀 더 오래 쓰고 싶기도 했다. 통신비는 작년에 공장에 취직한 후 고집을 부려 재유가 내고 있었기에 마음의 빚도 없었다. 대학을 포기하긴 했지만 스스로 번 돈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핸드폰을 산 건,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 주면 난 네 목소리도 못 들어’
이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재유는 걸음을 멈추고 폴더를 열어 보았다. 아직 오전 10시였다. 첫 통화는 우주와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수업을 듣고 있을 테니 점심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 보면 핸드폰 없는 자신과 연락하는 게 불편했을 텐데도 별 내색을 하지 않았던 우주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어서 집에 가서 설명서 보고 조작법을 배워야지. 핸드폰으로 우주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또 설레었다.
***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이번이 세 번째였다. 문자메시지를 해 볼까. 번호를 알려 주고 나 핸드폰 샀으니까 전화해 달라고? 아니, 썩 내키지 않았다.
재유는 별것도 아닌 일에 소심하게 집착하는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계획이 어긋나자 맥이 조금 빠졌다.
벌써 자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저녁 8시까지 출근하려면 적어도 7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를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3시가 넘도록 멍하니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누워 억지로 눈을 감았다.
***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조금밖에 못 잔 탓에 몸이 무거웠다. 평소라면 우주의 음성메시지가 들어와 있을 시간이었지만, 삐삐는 해지해 버려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몸을 억지로 일으켜 마당으로 나가 세수를 했다.
최근 우주는 중간고사와 학교 축제 때문에 바쁘다고 했었다. 그러고 보니 밴드 동아리도 들었다고 했었나. 대학생이니 여러 가지 바쁜 일이 많겠지. 더구나 저번 주에는 과제가 밀려 본가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서운했지만 이해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수도꼭지에 달린 작은 거울로 얼굴을 보니 눈이 퀭해 보였다. 다시 12시간을 서서 일할 생각에 몸이 무거워졌다.
다시 한번 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는 동안 왠지 초조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재유는 우주의 서울 집도 몰랐다. 다니는 학교만 알 뿐. 우주가 축제 때 서울에 와서 같이 놀자고 했었지만, 엄마와 병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으로 거절했었다.
연락이 안 되는 게 이렇게 불안한 일이었나. 그동안 우주가 핸드폰이 없는 자신과 연락하는 게 참 답답했겠다 싶었다. 밥을 차리려다 입맛이 없어 그만두고 출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가는 길에 점빵에서 빵이나 사 먹을 요량이었다.
재유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문을 나섰다. 날씨가 흐린 게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
출근 후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재유는 공장으로 들어서려다 야간 조 주임과 마주쳤다.
“한재유. 공장으로 전화 왔었어. 우주라던가? 전화해 달래.”
“그래요? 전화 언제 왔었어요?”
“10분 전쯤인가.”
“네, 감사합니다.”
당장 전화해 보고 싶었지만 이제 작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재유는 멍한 표정으로 헤드라이트 부품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라인 속도가 느렸다. 손이 놀고 있으니 자꾸 잡생각만 들었다. 마음은 조급한데 시간은 더디 가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그 자리에 서서 바로 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통화할 수 있겠지.
-여보세요?
“우주야!”
-어? 재유니? 안 그래도 공장에 전화했었어. 삐삐 어떻게 된 거야? 정지됐던데?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우주가 고함 수준으로 소리쳐 말하고 있었다.
“해지했어.”
-뭐라고?
“해지하고 핸드폰 샀다고!”
재유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어디 술자리에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잘 안 들려. 지금 동아리 친구들이랑 한잔하고 있는데 금방 갈 거거든? 지금 쉬는 시간이지?
“어.”
-이따 12시 반에 공장으로 전화할게.
“…….”
-재유야!
“아니야. 내가 내일 전화할게.”
재유는 욱하듯이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심통이 나서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하루종일 전화 통화하기만을 기대했건만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그 와중에 소변이 마려워서 더 짜증이 났다. 쉬는 시간은 3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화장실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지춤을 내리고 소변을 보는데, 잠이 모자라선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오늘은 정말 피곤한 하루인 것 같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천근만근이었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뻣뻣해져 걸을 때마다 쑤시고 당겼다. 눈에 콕콕 박히는 아침 햇살은 고문 수준이었다. 수면 부족에 머리까지 지끈거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초록색 대문을 열었다.
결국 그에게 다시 전화하지도 않았고, 공장으로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았다. 핸드폰을 괜히 샀나 후회도 됐다. 생각할수록 우울했다.
집에 들어가자 된장찌개 냄새가 풍겼다. 엄마가 쉬는 날이랬나. 엄마는 끼니를 주로 식당에서 해결하고 집에선 거의 밥을 안 드시지만 재유가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꼭 밥을 차려 두셨다.
“저 왔어요.”
“밥 먹자.”
“별로 생각 없어요.”
대충 옷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누우려는데 말없이 상을 차리는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같이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재유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어났다.
“…저도 주세요.”
“어서 앉아.”
깻잎장아찌와 계란말이, 깍두기 반찬에 재유가 좋아하는 애호박과 두부를 잔뜩 넣은 된장찌개였다. 말없이 한술 뜨는데, 입이 썼다.
“무슨 일 있어?”
“아뇨. 좀 피곤해서요.”
“너 연애하니?”
“…….”
“싸웠니?”
“…….”
난데없이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엄마의 질문에 재유는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티를 많이 내고 다녔는지 제 행동을 되돌아보게 됐다. 첫사랑이라고 어지간히도 질질 흘렀나 보다.
재유가 말이 없자 엄마는 알 만하다는 눈빛으로 웃으시고는 밥그릇에 계란말이를 얹어 주었다. 낮게 헛기침을 한 재유는 눈을 내리깐 채 밥 먹는 데만 집중했다.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에게 화는 나는데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고 이게 화낼 일인가 싶기도 했다. 그저 하루 연락 안 된 일 가지고 마음이 지옥을 넘나들었다.
밥알을 세는 수준으로 먹으니 속도가 더뎠다. 앞에서 엄마는 열심히 밥을 씹고 계시는데도 재유보다 느렸다.
‘엄마는 어쩌다 아빠랑 결혼까지 하게 됐어요?’
빚을 어느 정도 청산하고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 재유가 물었었다.
한동네에서 자란 부모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다고 했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할 정도면 한땐 정말 많이 사랑했겠지. 어떤 식으로 연애했는지 들은 적은 없지만, 엄마는 회한에 젖은 눈으로 재유가 만든 적금 통장을 바라보며 그 시절 얘기를 꺼냈었다.
엄마는 결혼 전에 혼자 길을 가다가 귤이 맛있어 보이길래 노점에서 귤을 사려고 했었다. 천 원어치만 달라고 했는데, 다른 손님이 와서 배를 두 박스 달라고 하는 바람에 상인이 먼저 온 엄마를 우두커니 세워 두고 배부터 팔았다고 한다. 서운한 마음에 당시 애인이었던 아빠에게 얘기했더니 별걸 다 신경 쓴다고 허허 웃으며 넘어갔단다. 귤은 부피가 작으니까 배 먼저 팔아치우고 얼른 담아 주려 하지 않았겠냐며, 금액이 더 크니까 상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엄마는 그 당시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결혼하고 살아 보니 알겠더란다. 아빠는 엄마 편에 서서 엄마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걸.
상인을 옹호한다고 그 사람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제 편을 안 들어주니 엄마의 기분만 상하는데 그걸 모르더라고. 그냥 같이 과일 장수 욕 한 번 해 주고 말면 될 것을.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아빠의 도박 빚보다 그런 사소한 기억들 때문에 더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었다고 했다.
재유는 엄마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한다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재유와 우주는 외모부터 성격과 취미까지 뭐 하나 비슷한 면이 없었다. 그러기에 좋아했지만, 그러기에 모르는 것도 많고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재유가 집과 공장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는 반면 우주는 충실한 연인이면서도 활동적인 대학생이었다. 되도록 많은 시간을 내서 일주일에 세 번이나 내려온 적도 있었지만, 학교 일이 많아지면 한 주를 거르기도 했다. 오해가 생기기 쉬운 장거리 연애의 단점이었다.
“그 사람이 뭐 서운하게 한 거 있어?”
“…네?”
“뭣 때문에 싸웠는진 모르지만 너도 그 사람한테 최선을 다했는지 한번 생각해 봐. 너 얼굴 많이 상했다. 빨리 화해해.”
지금 엄마한테 연애 상담을 받는 건가. 문득 이 상황이 기가 막혀서 씁쓸했다. 제 연애 상대가 우주인 걸 아시면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엄마는 더 이상 밥이 안 먹히는지 결국 밥숟가락을 내려놓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선 엄마한테 깻잎 좀 주고 올게. 많이 만들어서 나누려고 했거든.”
“네.”
엄마가 방을 나가고 재유도 숟가락을 놓았다. 뒷춤에서 핸드폰을 꺼내 열어 보았다. 아무것도 수신되지 않은 기본화면만 떠 있었다. 우주가 아직 이 번호를 모르니 당연한 일인데도 다시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다 반대쪽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냈다.
마지막 수신은 이틀 전 밤 자정 즈음이었다. 재유는 버튼을 눌러 기다란 직사각형의 작은 액정에 뜬 번호들을 확인했다. 모두 우주에게서 온 호출이나 음성메시지였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들기 전까지 틈날 때마다 보낸 것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공중전화로 달려가 우주가 보낸 음성을 확인하고 잠깐씩 전화 통화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
재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문지르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홀로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로 오해하고 실망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우주가 어떤 존잰데. 혼자 쓸데없는 고민을 해 봤자 저만 피곤했다.
아무리 우주가 부잣집 도련님에 인기가 많다고 해도 날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재유는 우주의 말을 믿었다. 그러니 제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주고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해명도 해 줄 것이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었다. 우주 얼굴을 보며 왜 전화 안 받았는지 따지고, 내가 왜 화났었는지 하나하나 다 얘기하고 싶었다. 이 답답한 마음은 우주 말고는 해소되지 않았다.
마음을 다지자 허기가 졌다. 밥을 크게 한술 뜨고 깻잎장아찌를 얹어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입맛이 도는지 꽤 맛있었다. 된장찌개를 밥그릇에 듬뿍 퍼서 비벼 먹고, 짭조름한 계란말이도 열심히 집어 먹었다.
우주를 만나러 가야겠다.
***
다음 날은 마침 일주일에 한 번 있는 6시간 근무일에 주간 조였다. 재유는 일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터미널에 도착해 겨우 서울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시계는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려는지 날이 흐렸지만, 버스를 타니 여행 기분도 나고 우주의 얼굴 볼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평일이라 차가 많이 막히진 않았다. 고속 터미널에 도착해 지하철을 타자 우주와 정전된 전동차 안에서 키스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재유는 고개를 숙인 채 남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지하철에서도 우주와의 추억이 있다는 게 퍽 기뻤다.
충동적으로 서울행을 결정하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저도 참 무심했다. 매번 우주가 내려오니 장운에서만 만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이렇게 버스 타고 지하철 타면 금방인데.
교대근무 핑계도 있긴 했지만, 우주가 서울에 한 번 올라오라 노래를 불렀던 걸 생각하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한 처사였다. 그래서 일부러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학교에 마중 나가 깜짝 놀래켜 줄 심산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대학교 정문에 도착하니 막막해졌다. 너무 갑자기 와 버린 게 아닐까. 벌써 수업이 끝났으면 어쩌지? 날 보면 많이 놀라겠지. 그냥 돌아갈까? 연락하고 다음에 다시 올까….
이놈의 소심병은 고쳐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얼굴은 보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대학교에는 처음 와 본 재유는 이름난 명문대여서 그런지 괜히 주눅 들었다. 여기 학생도 아닌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걸까? 재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차림새를 확인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청바지에 옅은 하늘색 셔츠인데도 유난히 튀어 보이는 것 같았다. 어깨에 멘 크로스백을 고쳐 메고 멋없는 체크무늬 장우산을 돌돌 말아 쥔 채 법대 건물을 찾아갔다.
널찍한 도로와 예쁜 건물들, 너른 잔디밭과 운동장, 분수대와 가로수길이 차례로 나타났다. 대학 내 사람들의 모습도 다양했다. 한껏 꾸미고 다니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동네 슈퍼 나온 듯 추레한 학생도 있었다. 해도 지지 않았는데 잔디밭에 모여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고, 팔짱을 끼고서 깔깔 수다를 떨거나 프린트물을 잔뜩 들고서 뛰어가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뭔가를 적고 있거나 새빨간 염색 머리로 담배를 입에 문 채 기타를 메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우주가 살고 있구나.
저와는 다른 세계였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길이 달라졌다. 새삼 달라진 환경이 확연히 눈앞에 드러났다.
재유 주변은 거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저씨들과 심드렁한 표정의 아주머니들, 허세를 부리며 침을 찍찍 뱉는 20대 초반의 양아치들과 최근에 부쩍 늘어나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중국인 직원들 뿐이었다.
씁쓸한 웃음을 매단 채 법대 건물에 도착하니 정문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재유는 혹시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찾았다.
“염우주! 여기!”
우주의 모습보다 우주를 부르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건물 맞은편의 주차장에서 부르는 소리였다. 긴 생머리에 짙게 화장하고 배꼽티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재유는 저도 모르게 가까운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우주가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어깨에 멘 가방을 건네주자 여자는 자연스럽게 받아서 뒷좌석에 넣었다. 우주는 차를 사이에 두고 여자와 몇 마디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는 여자가 조수석에 타자 자기도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충격이었다. 차를 산 이후로 날 처음 태워 준 거라고 했는데. 학교에는 안 타고 다닌다고 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도 배신감과 슬픔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서프라이즈랍시고 연락도 안 하고 왔나, 후회됐다.
우주의 차가 출발하고 좌회전을 연달아 두 번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쭉 지켜보았다. 재유는 눈에 축축하게 물기가 어리고 억장이 무너질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때 갑자기 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아예 멈춰서 버렸다. 비상등이 켜지고 우주가 운전석에서 내려 번쩍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재유는 아까보다 더 놀랐다. 그 자리에 굳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주는 차 문을 붙잡은 채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였다.
불쑥 찾아와서 화가 난 걸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 이제 나랑 끝내려는 건 아닐까.
다른 여자와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에 화나고 슬펐던 감정이 쏙 들어가고,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당장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우주가 코앞까지 다가와 재유의 팔을 붙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미… 미안해. 갑자기 찾아와서….”
“그 말이 아니라 왜 연락이 안 됐냐고. 걱정했잖아.”
재유는 울컥했다. 전화는 자기가 안 받아 놓고선. 술 마시면서 내 전화도 대충 받아 놓고선. 나더러 왜 연락이 안 되냐고?
“…걱정? 방금 같이 차 탄 여자애랑 내 걱정할 리도 없을 텐데 무슨 걱정? 얼른 가 보기나 해. 여자친구 기다리잖아.”
“뭐라고?”
우주는 단단히 화난 얼굴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재유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며 세워 둔 차로 향했다.
“따라와.”
“이거 놔!”
재유는 가지 않으려 버텼는데도 우주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삼자대면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주는 결국 조수석 앞까지 재유를 끌고 온 뒤 차 천장을 탕탕 쳤다. 긴 생머리가 창문을 내렸다. 여자는 영문 모를 뚱한 얼굴로 우주와 재유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야, 염은정. 너 나랑 무슨 사이야?”
“갑자기 뭔 소리야?”
“빨리 대답이나 해.”
“참내… 사촌이잖아.”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길이었어?”
“너네 본가에. 큰아빠 큰엄마 만나러. 왜 그래?”
재유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뒷걸음질을 쳤다. 손을 놓으려고 했는데 우주가 더 힘을 주어 단단히 잡아맸다. 어디든 좋으니까 당장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우주는 상체를 숙여 여자를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 오늘 집에 못 갈 것 같다. 차 네가 써도 되니까 너 먼저 가라. 연락할게.”
“엥? 갑자기 뭐야. 네가 가자고 했으면서!”
우주는 대꾸하지 않고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낸 뒤 재유를 끌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사촌이라는 긴 생머리가 차에서 내려 우주를 불러 댔다. 재유가 돌아보자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운전석으로 향했다. 우주는 무서운 기세로 재유를 법대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우주야….”
이름을 불러도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몇몇이 아는 척을 하는 것도 무시했다. 재유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보란 듯이 남자의 손을 붙들고 가는 그의 모습을 보이는 게 두려워졌다. 우주가 다니는 학교였으니까. 재유는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우주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번엔 팔을 잡아끌었다.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로 들어섰다.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몇 개의 방을 지나쳐 비어 있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재유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까.
“어떻게 된 거야?”
우주의 시선이 뒤통수로 따끔따끔하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일단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오해해서 미안해. 네 사촌인 줄도 모르고.”
“나 안 보고 말할 거야?”
“…….”
재유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이 멍청하고 바보스럽게 느껴져서 우주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너 삐삐는 어떻게 된 거야?”
“얘기했잖아. 해지했다고.”
“언제? 언제 얘기했는데.”
“너 술 마시고 있을 때. 그때 제대로 못 들은 거야?”
순간 감정이 울컥하고 터져 나왔다. 자기가 듣기에도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런데, 한번 터트리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너 그날 전화 한 번도 안 받았어. 계속 전화했는데. 삐삐 해지하고 핸드폰 샀으니까 앞으로 여기로 연락하라고 말하려고 했다고. 근데 넌 전화도 안 받지, 시끄러운 데서 술 마시고 있지, 내가 한 말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건….”
굳어 있던 우주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괜히 따지고 들었다는 듯 얼굴이 후회로 물들었다. 우주는 격앙된 재유를 진정시키기 위해 팔을 휘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찾아와서 얘기하려고 했어. 너 보면서 말하고 싶어서. 근데 넌 여자랑 차 타고 가 버리고. 아까 그 사람이 사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목소리가 떨리는 중에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해낸 재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 안쪽에 열이 오르는 게 이러다간 눈물 바람을 하는 추태를 보일 것 같아 얼른 뒤돌아섰다.
우주가 놀란 듯이 철렁한 얼굴로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저리 가. 하지 말라고!”
재유가 소리치며 벗어나려고 손을 필사적으로 털어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버둥을 받아내며 더 꼭 잡으려 애썼다. 단단히 마음이 상한 재유를 어떻게든 달래려 애가 탄 표정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재유야. 미안해, 정말. 울지 마. 응?”
“…….”
“그날 아침에 핸드폰 잃어버렸었어. 그래서 공중전화에서 네 삐삐로 음성 남겨 놓으려고 했는데 삐삐가 해지돼 버려서…. 영선이네 전화해도 안 받고, 공장에 전화하니까 너 아직 안 왔다 그러고….”
재유의 퍼덕거림은 멈췄지만, 아직도 볼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우주는 손을 꼭 붙든 채 더 가까이 다가와 조급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근데 동아리 선배가 내 핸드폰 찾았다면서, 핸드폰 찾을 거면 학교 앞에 술집으로 오라는 거야. 친구가 전해 줘서 알았어. 가 봤더니 동아리 사람들에 모르는 사람들까지 엄청 많이 있더라고. 그래서 좀 정신없이 전화 받게 됐어.”
“…….”
“너 출근한 거 알았고 통화됐으니까 안심했었는데 네가 화내고 끊어 버려서 나도 속상했어. 핸드폰 산 줄도 모르고…. 다음 날 또 연락할 방법도 없지, 넌 전화도 안 해 주지.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단 말이야.”
우주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자책하듯 재유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맞잡은 손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너 찾아가려고 했어. 아까 걔, 미국에 사는 작은아버지 딸이야. 이번에 잠깐 휴가차 온 거래. 며칠 전에 왔는데 서울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내 서울 집에서 지냈어. 원래 주말에 같이 집에 내려가려고 했는데 내가 오늘 가자고 해서 걔가 내 차 끌고 학교로 마중 온 거야. 너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장거리 연애쯤은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생겨 버렸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첫 다툼인지라 감정 소모가 심했다.
우주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재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미안해. 내가 네 전화 받았어야 했는데. 저번 주에도 내려가서 네 얼굴 봤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어.”
재유는 또 손을 풀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는 부드럽게 풀려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이 우주를 향했지만, 아직 눈을 마주 볼 용기는 없었다. 해명을 다 듣고 나니 안심이 되긴 했어도 불안함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고작 하루 연락 안 된 게 이렇게까지 돼 버렸네. 난 아까 진짜 무서웠어. 만약 네가 나 발견 못 하고 그냥 가 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난 우리가 헤어지게 되는 줄 알았….”
“아니야. 그냥 단순한 오해잖아.”
단호히 말을 끊은 우주가 팔을 당겨 재유를 끌어안았다.
“무슨 그런 말을 해…. 말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거려.”
“그 오해가 난 너무 괴로웠어.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어딜 가도, 뭘 해도 하루하루 일분일초가 지옥 같은 기분이었다고.”
“미안해 재유야. 네가 그런 생각 안 하도록 내가 더 잘했어야 되는데.”
“…….”
재유는 겨우 눈을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우주는 희미하게 미소를 띤 채 재유의 볼을 쓸어내렸다.
“…왜 계속 너만 사과해? 나도 잘못한 거 많은데. 나 쪼잔하잖아. 이깟 일 가지고 이 난리를 치고….”
“아냐. 내가 다 잘못했어. 내 탓이야. 넌 아무 잘못 없어. 앞으로 또 이런 일 생긴데도 내가 더 노력할게. 응?”
우주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눈에 안 보이는 눈물을 닦듯이 엄지로 스윽 눈 밑을 닦아 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얕게 입을 맞췄다. 키스를 받자 재유도 비로소 싱거운 웃음이 났다. 제가 생각해도 가소로웠다. 이마를 맞댄 우주가 씨익 웃어 줬다.
“아까 너 발견했을 때 네 표정 보고 얼마나 철렁했는지 알아? 네가 날 오해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어. 이번엔 내가 실수했지만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더 조심하고 신경 쓸게.”
“…나도 미안해. 오해해서.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아는데도….”
머쓱한 기분으로 주절주절 사과하려는데 우주가 볼을 쭈욱 잡아 늘이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으이그… 이렇게 예쁜 애인을 두고 내가 딴 여자를 왜 만나냐? 가만 보면 나를 진짜 모른다니까?”
“아아쓰이까 그안해.”
볼이 꼬집혀 어눌한 발음으로 우주를 째려보는데, 이번엔 손바닥으로 볼을 꾹 눌러 오리 주둥이를 만들어 놨다. 얘기하고 보니 별일도 아니어서 화내고 울고 다퉜다는 사실이 우습고 겸연쩍었다. 우주는 금세 화해 무드를 벗어나 장난기 가득한 애인으로 돌변했다.
“그안하아고.”
우주는 꽉 눌린 볼을 재밌다는 듯 손바닥을 이리저리 비틀어 우스꽝스럽게 만들더니 이번엔 푹신한 입술로 오리 주둥이를 뒤덮어 버렸다. 침이 고여 있던 입술이 쪽 빨려서 얼얼했다.
“아이고, 요 이쁜 게 마음도 여려서 내가 데리고 살든가 해야지.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다. 우리 빨리 같이 살자.”
우주가 재유를 품에 안으며 앓는 소리를 했다. 장난인 듯 말속에 진심이 섞여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떨떨한 재유는 차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 못했다.
“왜? 싫어?”
“…아니.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우주가 보여 준 청사진에 취한 재유는 홀린 듯 말을 내뱉었다. 우주는 퍽 감동인지 벅찬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더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 민증으로만 성인 말고.”
“어떤 어른인데?”
“엄마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경제력이랑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것만 있으면 돼.”
“응? 그럼 난?”
재유는 우주의 턱 언저리를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게 너야. 너랑 이렇게 떨어져 사는 게 아니라, 어디서든 함께 있고 싶고 네 옆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빚과 가난에서 벗어나고 우주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겠지만, 우리의 앞에 그런 미래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의심치 않았다. 재유는 분명 그런 미래를 꿈꿨다.
“몰래 만날 수밖에 없고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당당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생각이 그대로 말로 치환되어 나왔다. 조근조근 털어놓은 진심에 마음이 후련해졌다.
“네 그 의식하지 않는 솔직함 때문에 가끔 네 성격이 헷갈릴 때가 있는 거 알어? 그거 프러포즈 맞지? 가만 보면 나보다 더 남자답다니까?”
“…너도 만만치 않거든?”
우주도 강해 보이지만 분명 여린 면도 존재했다. 지금도 별것 아닌 제 말에 순진한 짐승 같은 눈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재유는 우주의 턱을 붙잡아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 좀 아까는 후회했는데.”
“후회라니…? 앞으로 더 자주 와야지.”
“그래. 시간 날 때마다 올게.”
“당연하지. 너 재워 줄 침대 넓고 튼튼하니까 내 옆에 꼭 붙어 자면 돼. 오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오라고. 참… 맞다. 오늘 내려가야 돼?”
“아니. 내일은 쉬는 날이고 모레 야근이니까….”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럼 이틀 밤 자고 가도 되는 거네? 와… 진짜 나 너무 좋아 죽을 것 같다.”
우주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치켜떴다. 금세 입이 헤벌쭉 벌어지며 황홀한 미소가 번졌다.
“근데 내가 집에 가도 괜찮은 거야? 네 사촌 너희 집에서 지낸다며.”
“걘 호텔 잡아 주면 돼. 네가 나 보러 첨 서울 올라왔는데 당연히 우리 집 가서 자야지.”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 혼자 어떻게….”
“걘 신나서 짐 들고 바로 갈걸? 물론 작은엄마한텐 비밀이지만. 그나저나 핸드폰 산 거 보여 줘 봐.”
“아, 여기.”
재유가 핸드폰을 건넸다. 이리저리 핸드폰을 훑어보던 우주는 재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볼에 닿은 그의 체온이 따스했다.
“예쁜 거 샀네? 나가자. 갈 데 있어.”
우주는 재유의 손을 이끌며 강의실을 나갔다. 두 사람 다 들어올 때와는 표정이 180도 달라져 있었다.
연애도 처음이고 이런 오해도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고 서툴렀지만, 오히려 싱겁게 끝나 버린 오늘의 헤프닝이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연락 하나로 죽고 살고 상대의 표정에 따라 감정이 널을 뛰는 스무 살의 재유는 풋내 나는 그를 향한 사랑에 이제 우정 따윈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
우주는 캠퍼스를 거니는 동안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며 너랑 여기를 걷다니 신기하다, 너무 좋다며 계속 떠들어 댔다. 처음 도착했을 때 대학교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오히려 그와 함께 걸으니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처럼 느껴졌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했다.
아까 그가 말했던 갈 데란 학교 인근 번화가의 잡화 노점이었다. 우주는 수십 개의 핸드폰 줄이 진열돼 있는 좌판에서 큰 키를 숙이고 미간에 주름까지 잡은 채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어때? 네 핸드폰이랑 색깔도 잘 맞고 크기도 적당한데.”
우주가 고른 건 두 개의 하트가 겹쳐져 테두리에 큐빅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이었다.
“음. 예쁘다. 나 이거 달고 다니라고?”
“아니? 내 거랑 똑같은 거 달고 다니라고. 이걸로 두 개 주세요.”
재유는 노점 아주머니의 눈치가 보였다. 남자끼리 커플 핸드폰 줄을 사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걱정과 달리 아주머니는 생글생글 웃으며 두 개를 포장해 주고는 “두 개 2만 4천 원인데, 2만 원만 줘요.”라며 값을 불렀다. 다년간의 손부업 경험상 몹시 비싼 가격이었다.
“여기요. 가자!”
“아니, 그게….”
우주가 지폐를 건네고 핸드폰 줄을 청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가서 달아 줄게.”
우주는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번화가를 걷기 시작하는데, 재유는 석연찮은 얼굴로 지불한 값에 대해 물었다.
“너무 비싸지 않아? 일부러 비싸게 받은 건가?”
“에이, 설마. 아닐 거야. 다른 것보다 큐빅도 많이 박혀 있으니까 그 정도 하겠지.”
“그런가…? 그럼 진짜 깎아준 건가?”
“뭐가 중요해. 예쁜 거 잘 샀으니까 됐지? 이거 꼭 하고 다녀야 돼? 알았지?”
알았어. 너도. 재유는 그렇게 대꾸하고 웃어 보였다.
서울 물가가 지방보다 비싼 건 둘 다 살아 본 재유가 더 잘 알았다. 그런데 인생 대부분을 서울에서만 살던 재유는 꼴랑 4개월째 살고 있는 우주보다 더 촌놈일 때가 많았다.
재유는 우주네 집에서 랍스터도 처음 먹어 보고 보디워시란 것도 처음 써 봤다. 그러니 오랜만의 서울 데이트인데 돈 얘기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트 두 개가 좀 낯간지럽긴 했지만 예쁘긴 했으니까.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번화가의 불빛들이 곳곳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주는 사촌에게 전화해서 근처에 호텔 예약해 놓고 짐 가져다 놓을 테니 이틀만 거기서 자라고 했다. ‘울 엄마와 작은엄마에겐 비밀’이라는 말도 함께.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재유는 민망함에 볼이 화끈거렸다.
“됐다. 밥 먹으러 가자!”
“호텔에 짐 갖다 놓는다며.”
“오늘 늦는다고 했어. 초등학교 동창 만난다고. 그새 약속 잡았나 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
“정말 그래도 돼?”
“그렇다니까? 참, 저기 이태리 레스토랑 새로 생겼는데 맛있다고 소문났거든? 같이 갈 사람 없어서 못 먹어 봤는데, 같이 가자. 응?”
재유는 사촌에 대한 미안함과 우주의 집에 간다는 설렘이 왔다 갔다 해서 자꾸만 확인했다. 이모저모로 얼떨떨하고 낯선 기분이었지만 우주와 대학가를 걷는 건 새로운 자극이었다. 괜스레 또 가슴이 떨려 왔다.
“그래. 가자.”
재유는 밥은 내가 사 줘야겠다고 마음먹고서 아이처럼 들뜬 우주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
피자와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배불리 먹은 두 사람의 다음 목적지는 우주의 서울 집이었다. 막상 도착해보니 우주가 사는 집이 평범한 자취방 원룸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축 고층 아파트였다.
11층에 내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깔끔한 우드 톤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적어도 30평대는 되어 보이는 집이 나왔다. 여기에도 실내장식을 좋아하신다는 우주의 어머니가 솜씨를 부린 흔적이 있었다. 거실 분위기를 살려 주는 풍경화가 벽에 걸려 있었고, 가구와 잘 어우러지는 커튼과 조명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살다니. 외롭진 않나? 하긴. 우주네 본가가 워낙 커서 이 정도는 살아야 했을 거다.
우주가 거실 소파에 재유를 앉히고는 커튼을 열었다. 도시의 야경이 화려하게 드러난 게 꼭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너 오는 줄 알았으면 청소해 놓는 건데.”
“깨끗한데 뭘.”
우주가 혼자 사는 집에서 자는구나.
자고 올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막상 이렇게 되니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 댔다.
오늘도 야릇한 분위기가 되는 걸까. 그럼 어떡하지? 저번처럼 거부하면 우주가 상처받을 텐데. 재유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혼자 얼굴부터 붉히는 제 모습이 가소로워 헛웃음을 흘렸다.
“재유야, 나 잠깐 짐 갖다 주러 나갔다 올게. 한 30분쯤 걸릴 거야. 잠깐 TV 보구 있어. 아님 집 구경해도 되고, 욕실 저기니까 씻어도 되고.”
“나 혼자? 같이 갈까?”
“아냐, 금방 갔다 올게.”
“그래….”
맞다. 사촌의 짐을 전해 줘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우주는 작은방에서 커다란 빨간색 캐리어를 가지고 나와서 잠시 현관 앞에 두었다. 그러더니 소파로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재유의 턱을 엄지와 검지로 받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지 말고 기다려.”
그런 말을 남기고 우주는 집을 나갔다.
난 뭘 기대한 걸까. 엘리베이터를 오르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키스하고 곧바로 침대로 가면 어쩌나 하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혼자 한 짧은 망상이었지만 그대로 전개되지 않아 왠지 머쓱한 기분이었다. 재유는 자기 머리를 쥐어박고는 바보- 라고 중얼거렸다.
집구경을 할까 하다가 주인도 없는데 혼자 방 문을 열어 보는 게 왠지 찔려서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드라마가 나왔다. 여자주인공이 엄마와 함께 쇼핑을 하고 있었다.
“참, 엄마한테 전화해야지.”
재유는 엄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랑 내일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고 했더니 별말 없이 그러라고 하셨다. 잘 화해해 보라는 말과 함께.
뭘 알고 그러시는 건가. 그런데 스무 살 다 큰 남자애가 어디서 누굴 만나 뭘 하는지 일일이 캐묻거나 보고하는 것도 우스웠다.
드라마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작 열댓 개인 채널을 돌려 봐도 보고 싶은 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벽시계를 보니 우주가 오려면 15분 정도 더 기다려야 했다. 재유는 다시 드라마로 채널을 돌려 멍하니 보고 있었다.
***
손길이 느껴졌다. 우주인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감촉에 퍼뜩 눈이 떠졌다. 그걸 못 기다리고 그새 잠이 들었나 보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보니 얇은 이불이 덮여 있었고 TV는 꺼져 있었다.
재유는 우주가 바닥에 앉아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얼른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안. 깜빡 졸았나 봐.”
“괜찮아. 더 자도 되는데. 내가 깨웠지?”
“아냐. 잘 데려다줬어?”
“아니, 짐만 맡겨 두고 왔어. 알아서 잘 찾아갈 거야.”
우주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본가에서도 쓰는 보디워시와 같은 라벤더 향이었다. 샤워를 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잔 걸까. 시계를 보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씻었어?”
“응. 뛰어갔다 왔거든. 너 집에 혼자 있으니깐. 너 자고 있길래 땀 냄새 날까 봐 후딱 씻고 나왔어.”
“미안.”
“아냐, 너 자는 얼굴 보는 거 좋았어.”
우주는 그대로 재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키스해도 돼?”
“…….”
그대로 입술을 덮치려는데, 재유가 막아섰다.
“잠깐만… 나도 샤워하고 싶어. 공장에서 씻지도 않았고 하루종일 땀 많이 흘렸거든.”
아… 그냥 키스를 할 걸 그랬나. 키스만 하고 끝날 수도 있는데. 재유는 자신이 샤워 얘기를 꺼낸 타이밍이 우주에게 여지를 줬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래. 갈아입을 옷 가져다줄게.”
우주가 머리를 긁적이며 방에서 옷가지를 들고 왔다. 어색하고도 달달한 공기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재유는 옷을 받아들고 멈칫거리면서 욕실을 찾아 들어갔다.
“옷은 눅눅해지니까 문밖에 두는 게 어때?”
“…….”
우주의 목소리가 욕실 바로 바깥에서 들려왔다. 재유는 상의 단추를 끄르던 손을 멈추고 숨소리도 죽였다.
“아냐, 편한 대로 해. 참, 수납장에 칫솔 새것 있으니까 찾아서 써.”
“…….”
“재유야. 칫솔 찾았어?”
“…우주야.”
“응. 나 여기 있어. 왜? 못 찾겠어? 내가 찾아줄까?”
“…저리 가 있어. 너 거기 있으니까 못 씻겠어.”
“어어. 알았어. 편하게 씻어.”
욕실 문에 달라붙었던 조바심 난 목소리가 멀어졌다. 평소엔 귀엽다 생각했겠지만 재유는 지금 그런 감상을 할 정신이 없었다. 집에 들어왔으니 씻어야 하는, 당연한 걸 하는데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옷을 마저 벗고 물을 틀어 몸을 적셨다. 속에서부터 응축된 한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오늘인 것 같다.
재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우주와 성관계를 할 기회는 많이 있었다. 서로의 집에 단둘이 있을 때도 많았으니 까짓것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재유네 집은 방음이 취약했고 우주네 집은 넓긴 해도 항상 누군가가 집 안에 있었다. 그동안 우주와의 섹스를 꺼리던 여러 요소 중 하나였다. 우주도 재유의 마음을 아는지 그동안 의사를 내비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무리하게 밀어붙이진 않았다. 차에서 시도하거나 숙박업소엘 가자는 회유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주가 혼자 사는 집에 단둘이었다. 재유는 제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내던져 보기로 결심했다. 꼼꼼하게 양치를 하고 전투적으로 머리를 감고 우주와 같은 향이 나는 보디워시로 구석구석 몸을 씻었다.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우주는 소파 가까운 곳에 선풍기 플러그를 꽂고 있었다. 머리를 말려 주려는지 수건도 어깨에 걸고 있었다.
“욕실 잘 썼어.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수건도 푹신해서 기분 좋아.”
“으응….”
우주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에 서서 빤히 재유를 보고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던 재유는 괜히 움츠러들어 제 모습을 점검했다.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반바지가 몸을 감추고 있었지만, 비쩍 마른 몸에 걸친 우주의 옷이 헐렁해 뵈는 게 볼품없었다.
“근데 팬티가 좀 커.”
재유는 분위기를 유하게 바꾸기 위해 허리춤을 잡고 씨익 웃었다. 아마 어색한 웃음이었을 거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가가 경련처럼 떨렸다. 이럴 때 뻔뻔하게 먼저 들이대고도 싶은데 성격상 잘 안 됐다.
안 먹혔나 싶어 뻘쭘하게 수건으로 머리를 완전히 덮고 벅벅 문지르는 그때 우주의 발이 코앞에 보였다. 허리가 당겨지며 수건이 툭 떨어졌다. 부딪힌 입술에 곧바로 우주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알싸한 치약 맛이 났다.
저돌적으로 입 안을 쓸던 혀가 빠져나가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났다. 입술을 뗀 우주가 재유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원한다는 노골적인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네가 싫다면 절대로 안 할 거야’
지난번 본가에서 우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마지막 이성이 재유의 허락을 구하는 듯 탐색하는 눈빛으로 의중을 확인하고 있었다. 성욕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번들거리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네가 자는 방… 어디야?”
우주는 고갯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눈은 한시도 떼지 않았다. 재유는 어깨너머로 문을 흘끗 확인했다. 목에 감긴 우주의 손을 끌어 내려 잡고는 방으로 이끌었다.
명백한 동의의 표현이었다. 우주는 순순히 방으로 끌려오면서도 재유의 손을 힘주어 꼭 붙잡았다. 손등 뼈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억센 힘이었다.
“…불 켤까?”
“아니. 켜지 마.”
문을 닫으니 방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커튼이라도 열까 하다가 관뒀다.
“수면등 있으면 켜 줘.”
“…….”
우주가 익숙하게 침대 옆으로 가서 조명을 켰다. 생각보다 밝았다. 안쪽에 침대가 있었고 반대쪽에 작은 파우더룸과 화장실이 있었다. 잠만 자는 방인지 붙박이장과 작은 서랍장 외에 별다른 가구는 없었다.
재유는 우주가 기다리고 있는 침대로 가서 바로 옆에 걸터앉았다. 바스락거리는 시트마저 떨림으로 다가왔다. 우주 역시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몸을 반쯤 비틀고 재유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힘 조절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어깨뼈도 아팠다.
“너… 내일 학교 가야 되지 않아?”
뜬금없는 질문에 우주의 당황한 얼굴이 비쳤다.
“그렇지… 근데 왜?”
“저… 어디까지 할 거야?”
“아아….”
스스로도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호기롭게 우주를 침대까지 끌고 오긴 했는데, 안 묻고 넘어가기엔 두려움이 너무 컸다.
“걱정 마. 아프게는 안 할 거야. 네가 싫은 건 나도 싫어.”
그동안 들이밀었던 입술과 치근대던 나쁜 손이 무색하게 우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다. 그도 처음인 게 실감이 났다. 그래서 재유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그럼, 안 넣는 거야?”
“…혹시 그걸 바라는 거야?”
이번엔 재유가 말을 잃고 얼굴을 붉혔다. 스무 살 된 사내놈들이 침대에 앉아서 얼굴만 붉히고 있는 꼴이 우스워서 재유는 이 대화를 빨리 끝내기로 했다.
“그게… 네가 넣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어. 맞아?”
“응. 항상 그쪽만 상상했어.”
“단호하네.”
쭈뼛대며 당황했던 그가 여기서는 양보가 없었다. 재유는 고민했던 게 무색할 만큼 어이가 없었다. 피식, 코웃음 치자 우주가 안절부절못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도 나한테 넣고 싶은 거야…?”
“음… 오늘 너 하는 거 봐서.”
우주의 숱 많은 눈썹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 정도로 치켜 올라갔다. 얘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싶은 표정이다. 생각을 거치고 나온 말은 아니었는데. 그저 조금 놀려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얼결에 첫 경험을 앞두고 우주를 시험에 빠트린 모양새였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안타까울 만큼 위에서 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좀, 서툴더라도 이해해 줘.”
말이 끝나자마자 우주가 입술을 덮었다. 좀 전과는 달리 느린 키스였다. 입술을 줄곧 대고만 있다가, 미세하게 살짝씩만 움직였다. 그 미약한 접촉에 오히려 재유가 어깨를 들썩였다. 아랫입술이 그의 입술로 폭 덮였다. 혀로 깔짝깔짝 핥는가 싶더니 살짝 깨물어 오자 아찔한 감각에 눈꺼풀이 떨렸다.
기다란 손이 허리를 감고 다른 손은 목을 받친 채 풀썩 쓰러뜨렸다. 재유는 이제 와 민망해져 눈을 꼭 감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우주는 모로 누워 손등으로 재유의 얼굴선을 쓸어내렸다.
“나 봐, 재유야.”
살짝 눈을 뜨자 우주가 재유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심장 부근에 갖다 댔다. 그의 심장이 고동치는 게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손이 가슴께에서 우주의 뺨으로 옮겨갔다. 눈을 맞추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데, 우주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배 언저리와 등허리를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흐…음.”
손의 감촉이 예민하게 느껴질 때마다 몸이 들썩였지만, 우주의 혀가 치밀하게 감겨 들어와 어디에 정신을 쏟아야 할지 몰랐다. 재유는 목을 끌어안고 소극적으로 숨어 있던 제 혀를 한데 얽었다. 혀를 이용한 키스가 처음도 아닌데 어딘가 뻣뻣하고 서툴게 반응했다.
우주는 재유의 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제 입술로 쭙쭙 빨았다. 그사이 손은 겨드랑이를 쓸어내리며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힘을 실어 골반 쪽을 주무르자 으읏, 재유의 감탄사가 높은 음을 내며 잇새로 터져 나왔다.
손은 멈추지 않고 엉덩이로 가더니 팬티 위로 두 언덕을 오가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주의 입술은 재유의 입에서 코로, 뺨에서 눈으로, 그리고 눈썹과 이마를 지나 귓불까지 뜨거운 숨을 토하며 키스를 퍼부어 댔다. 주황빛 조명이 작게 비추는 방 안이 두 사람의 호흡으로 가득 찼다.
“보여 줘. 다.”
우주는 귓불을 깨물다 말고 눈을 보며 속삭였다. 손은 여전히 엉덩이를 주무른 채. 재유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술을 덮었다. 그의 오른손에 의해 바지가 벗겨 내려갔다.
헐렁해서 한쪽은 쉽게 내릴 수 있었지만 다른 한쪽이 골반에 결렸다. 옷 벗기는 것도 쉽진 않았다. 우주는 키스를 멈추고 몸을 일으켜 재유의 무릎 부근까지 내려갔다. 양손으로 바지를 잡고 내리려는데, 이번엔 엉덩이가 걸렸다. 재유는 민망함에 팔로 눈을 가렸다. 귀에 뜨끈뜨끈한 열이 오르고 숨을 내쉬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우주와의 잠자리를 여러 번 상상해 봤다. 사귄 지 1년이 다 되어 가고 성적인 의도를 담은 키스까진 해 봤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아까 우주는 제가 넣는 쪽만 상상했다고 했던가. 재유는 자신이 아래에 깔리는 상상은 물론 위에 올라탄 모습도 떠올려 봤었다. 어느 쪽이든 시작은 달콤했지만, 끝까지 예상할 수 있던 그림은 제가 우주의 것을 받는 쪽이었다. 덩치 차이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성기가 엉덩이 사이에 들어가 있는 그 상상 속에서 우주는 어떨 땐 노련하게 자신을 리드했고, 어떨 땐 자신만큼 서툴렀다.
지금이 그랬다. 옷을 벗기는 우주도 제가 했던 상상만큼 잘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남의 몸을 처음 더듬는 서투른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주는 재유의 무릎을 세워 입을 맞추곤 허리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공간이 생긴 엉덩이 위를 받친 채 바지춤을 잡고 허벅지까지 끌어 내렸다. 허리에서 손이 빠지자 두 손으로 순식간에 바지를 벗겼다.
“진짜 좀 헐렁하네.”
우주가 빌려준 검은색 속옷이 그의 눈에 비칠 걸 생각하니 긴장감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반쯤 발기된 것을 우주도 보고 있을 터였다. 이런 모습을 남에게 처음 보이는 데서 오는 수치심과 빨리 봐 줬으면 하는 열망이 동시에 느껴졌다. 모순된 감정에 재유는 팔로 가려진 눈을 더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지를 벗기며 자신감을 얻은 손은 허벅지에서 무릎을 지나 정강이와 발목까지 대범하게 나아갔다. 낯선 감각에 정수리가 섬찟했다. 그러고는 곧장 위쪽으로 더듬어 올라와 티셔츠 끝자락을 잡았다. 말아 올린 티셔츠에 드러난 배꼽 위로 우주의 입술이 슬며시 닿았다 떨어졌다. 재유는 이번엔 두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렸다.
“재유야, 잠깐만 들어 줘.”
어깨까지 올라온 티셔츠에 재유는 손을 풀고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여전히 시선은 우주를 보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툭, 티셔츠가 침대 옆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팬티만 걸친 재유의 알몸이 그의 앞에 드러났다. 다시 얼굴을 가리려 손을 들었는데 우주가 가로막았다. 우주는 미세하게 웃으며 재유의 목에서 가슴팍까지 쓸어내렸다.
“…너무 예뻐.”
상체 곳곳을 지그시 누르며 만지는 손길은 몸 전체에 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우주가 뺨을 감싼 채 고개를 돌려 제 얼굴을 보게 했다.
“너도 벗으면 안 돼?”
재유의 물음에 우주는 크게 끄덕이더니 위아래로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팬티까지 단숨에 벗어 던지는 호방함에 부끄러움은 재유의 몫이 되었다. 시선을 돌린 건 아니다. 단단한 목에서 이어지는 각진 어깨와 근육이 볼록 솟은 팔과 두툼한 몸통까지 재유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저절로 옮겨졌다.
우주의 몸은 이렇게 생겼구나. 튼실한 체격인 건 알았지만 근육으로 울룩불룩하다기보다 살 빠진 씨름선수처럼 뼈대와 근육이 건장하고 튼튼한 기골을 가진 몸이었다. 헬스를 다닌다면 저 탄탄한 살 위로 근육의 경계가 생겨날까. 지금도 사랑스럽지만 기대감도 없진 않았다.
눈을 내려 하체를 응시하자 잔뜩 세운 팔팔한 성기가 두 장딴지 사이에서 위용을 드러냈다. 이렇게 컸었나. 재유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같이 화장실 다닐 땐 잘 몰랐는데 예상보다 훨씬 크고 굵었다. 길기도 했다. 살덩어리를 응축시켜 딴딴하게 뭉쳐 놓은 것 같은, 밀도가 높아 보이는 성기였다. 아마 손가락으로 살짝만 튕겨도 차르르한 탄성이 느껴지겠지. 저런 흉흉한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 무섭다… 어떡하냐?”
혼잣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둘만 있는 방 안에서 그가 못 들을 리 없었다. 우주는 아래의 팔팔한 기세와는 달리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적시면서 재유의 위로 다가왔다.
“나도 떨려.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 마.”
우주는 얼굴 옆에 손을 짚고 상체를 숙여 천천히 재유의 몸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제 벗은 모습을 보며 성기를 세운 눈빛은 야릇했다. 재유는 자신을 가둔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서워 보이는 그의 성기는 일단 잊고, 단단하고 매끄러운 살의 감촉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우주가 몸을 더 숙여오며 키스를 하자 배꼽 아래에 그의 성기가 슬쩍슬쩍 닿았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만지는 것만 해 보면 무서움이 덜하지 않을까? 재유는 손을 천천히 내려 우주의 중심부로 다가갔다. 혀가 더 깊게 들어왔다. 골반을 따라 더듬자 까실하게 체모가 만져졌다.
재유는 어쩐지 그 촉감이 재미있어 손끝으로 간질이며 문지르고 손바닥으로 범위를 넓혀서 비벼 보았다. 손바닥 안쪽에 굵은 음경이 닿았다. 조심스레 손을 가져가 살짝 쥐어 보았다. 재유는 손에 잡힌 페니스의 부피감을 가늠하며 꽉 감싸 쥐었다.
“으읏.”
우주는 몸을 움츠리며 목덜미에 숨을 쏟아냈다. 어깨를 둥글게 어루만지는 손에 그의 흥분이 전해졌다.
몸을 일으킨 우주가 재유를 홱 엎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여 몸을 다시 뒤집으려 했지만, 우주가 손으로 등을 강하게 눌러 저지했다.
우주는 자신의 몸으로 재유의 몸을 덮었다. 몸이 닿은 곳 모두 뜨겁게 달아올랐다. 빌려 입은 속옷 위로 우주의 짓눌린 성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재유는 시트에 얼굴을 묻고 잠시 그의 무게를 느꼈다. 귓가에서 바로 숨소리가 들려왔다. 우주는 얼굴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나, 오늘 한 것만으로도 자위할 때 평생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주가 지그시 누른 몸 전체를 천천히 둥글렸다. 탄탄한 몸에 떠밀리는 살의 압박감에 몸 전체가 달아오른 기분이었다. 재유의 손 위로 우주의 손이 겹쳐졌다. 깍지 낀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애정이 느껴져 숨을 토하며 손가락을 오므렸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목과 귀를 오가는가 싶더니 혀로 귓바퀴를 낼름거리며 잘근잘근 깨물었다.
“으으, 음….”
우주의 입술이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입술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어깨와 날개뼈에도 입술이 닿았다. 간지럽기도 하고 민감하기도 했다. 우주는 재유의 모든 면적에 자국을 남기듯 등과 허리를 쉴 새 없이 입술과 혀로 깨물고 핥았다. 겨드랑이와 허리를 더듬는 손이 자극을 더했다.
우주의 혀가 척추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길게 쓸려 올라왔다. 찌릿한 감각에 재유는 시트를 움켜쥐었다. 숨이 더 거칠어져 신음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입술이 허리 아래로 향하자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대범하게 주물렀다. 꽉 움켜쥘 때마다 저릿저릿해서 참지 못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이 없었다. 성기 끝이 바짝바짝 긴장됐다.
“재유야, 조금만 들어 줘.”
우주의 손이 배 아래로 쑥 들어가 당기고 있었다. 엉덩이가 저절로 들리고 무릎이 살짝 세워졌다. 우주가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자 젖꼭지를 스치면서 자극이 왔다. 우주는 등에 입을 맞추며 손가락 끝으로 가슴을 괴롭히고 있었다. 유두가 자극되자 하반신의 긴장이 팽팽하게 더해졌다.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재유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움켜쥔 채 몸을 떨었다.
그동안 우주와의 섹스에 대한 망설임을 자신의 몸이 조롱하고 있었다. 남성의 육체에는 봉인된 줄 알았던 애욕의 감각이 천천히 깨어났고 재유는 착실하게 성감을 느끼고 있었다.
“흡. 키, 키스해 줘.”
재유가 고개를 돌려 우주를 찾자, 우주가 곧바로 위로 올라와 입술을 포갰다. 그의 성기가 이번엔 옆구리에 닿았다. 팽팽하고 딱딱한 것이 연신 꿈틀거리며 톡톡 두드리듯 재유의 살을 때렸다. 재유는 얽혀드는 우주의 혀를 빨아들이며 코로, 입으로, 정신없이 숨을 토해 냈다.
우주의 입술은 키스를 멈추고 다시 어깨와 등허리로 내려갔다. 어느새 두 손이 팬티 끝을 붙잡았다. 반쯤 벗겨지자 재유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내리고 몸을 침대에 완전히 붙여 버렸다. 우주의 손이 멈칫했다.
“괜찮아, 재유야. 보고 싶어.”
우주 얼굴이 다시 올라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며 속삭였다. 숨을 고를 시간을 주며 엎드린 팔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시 허리를 들어 주었다. 우주의 손이 다시 팬티를 잡았다. 앞쪽에 걸린 재유의 성기를 세심하게 꺼낸 후 스르륵 벗겨 내렸다. 그의 손이 중심에 닿았을 땐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엎드린 자세가 오히려 나았다. 알몸이 드러난 모습을 정면에서 보여 줬다면 민망함을 못 참고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는 지금 모습도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으. 너무 챙피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하소연해 봤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우주의 손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만지는 손길이 더없이 야했다. 엉덩이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저도 모르게 그를 제지하려 팔을 뻗었다. 그런데.
“하윽… 우주야!”
우주의 입술이 그곳에 닿았다. 재유는 어깨를 바닥에 붙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우주는 혀끝으로 주름을 하나하나 세듯 천천히 쓸어올리고, 또 쓸어내렸다. 이런 강렬한 자극은 난생처음이었다.
“하. 흐읏. 하지, 마, 우주야….”
그만두기는커녕 재유의 외침에 자극받은 듯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혀로 입구 주변을 헤집으면서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춰 댔다. 코와 입술, 혀가 점점 빠른 속도로 입구 주위에서 마음껏 놀아 댔다. 자극이 너무 강해서 엉덩이를 숙이려 했지만, 우주가 놔주지 않았다. 재유는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우주가 슬그머니 재유의 성기를 움켜쥐고 선단을 매만지자 촉촉한 액체가 주변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우주는 음경을 슬슬 문지르면서 두툼한 손으로 위를 향해 한껏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엉덩이 사이에 박혀 있는 혀는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재유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 야릇한 교성을 질러 댔다. 제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믿을 수가 없을 만큼 이상한 소리였다.
“윽. 우주야. 하아, 그만….”
재유는 절벽에 매달린 심정으로 침대 헤드를 향해 기어오르려 했다. 그런데 억센 손에 허벅지가 붙잡혀 다시 끌려와 버렸다. 우주의 번잡한 혀 놀림과 페니스를 붙잡은 마찰이 속되게 찰박거렸다.
신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점점 낯설은 쾌락에 빠져들어 소리가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손과 혀가 빨라질수록 이성을 붙잡기 힘들어졌다. 꽉 쥔 주먹에 손톱이 파고 들어갔다.
“흐읏, 흑!”
결국 사정을 하고 말았다. 동성에 대한 사랑과 성관계를 경계하며 그와의 사이에 굳이 우정을 끼워 넣어왔지만… 그건 허위였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증거였다.
재유는 정수리를 바닥에 대고 전율에 몸을 떨었다. 하얀 액체가 침대에 튀고 있었다. 재유도 이 각도에서 사정하는 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주의 집, 그의 침대, 그의 손길이 아득하게 꿈만 같아서 몸이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발끝이 동그랗게 오므라들며 아직 몸에 가시지 않은 쾌감을 맛보았다. 아아. 내 몸이 이런 쾌락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몸에 기운이 쭉 빠졌지만 절정의 여운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재유는 생각 없이 얼굴을 묻고 침대에 바짝 엎드려 버렸다. 자신이 뿌린 정액이 배와 가슴에 닿았다. 민망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재유는 파묻힌 얼굴을 조금씩 드러내고 우주를 살폈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주는 만족을 느낀 재유를 보며 상기된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연인에게 첫 사정을 선사한 기쁨을 만끽하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우주는 다시 한번 엉덩이를 있는 힘껏 쪼옥 빨아들이며 입을 맞췄다. 민망해하는 재유를 위해 얼른 일어나 티슈를 뽑아 들었다. 우주가 몸을 뒤집으려 했는데 재유는 계속 엎드린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애틋한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재유야, 찝찝하잖아. 닦아 줄게.”
우주가 어깨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재유는 옆으로 누워 다리를 살짝 오므렸다. 팔로 눈을 가리고 있어도 얼굴이 새빨개진 게 보이겠지. 방금 사정을 마친 성기도 그의 눈앞에 드러났겠지.
하아…. 재유는 제가 닦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일단 참았다. 너 처음 하는 거 맞아? 물으려던 것도 관뒀다. 처음 같지 않게 잘한다는 말인데 그를 의심하는 말 같기도 해서 속으로 삼켰다. 애초에 잘한다, 못한다, 평가하는 것도 우스웠다. 재유에겐 비교 대상이 없었다.
“…기분 괜찮아?”
더럽혀진 이불을 걷어내고 더울까 봐 에어컨까지 켜고 돌아온 우주가 초조한 물음을 던졌다.
“응… 좋았어.”
이렇게 빨리 쌀 줄 몰라서 당황한 속내는 숨겨 두었다.
“다행이다. 연습한 보람이 있네?”
“연습? 누구랑?”
큭, 웃음이 터진 우주가 허리를 당겨 안았다. 재유는 어깨에 어정쩡하게 기댄 채 우주를 올려다봤다.
“당연히 너랑 했지. 내 머릿속에서 넌 수백 수천 번은 내 침대 위에 있었어.”
“뭐야, 진짜….”
씨익 웃은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차오른 음심을 억누르기 힘든 그의 중심이 불뚝불뚝 존재감을 발휘했다.
“또 하려고?”
“내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택도 없으니까 이리 와.”
우주도 사정하고 싶을 텐데 어떻게 해줘야 하나, 뒤늦게 고민하던 차에 다시 입술이 밀고 들어왔다. 사정을 한 뒤임에도 우주의 혀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너무 사랑스러워. 이대로 밤새도 모자랄 것 같아.”
“너 진짜… 그런 말을.”
“뭐 어때, 넌데! 네가 얼마나 예쁜 사람인지 네가 알어?”
“나 남자거든? 예쁘단 말 적당히 좀 해 줄래?”
“너무 좋단 말이야….”
사랑스러워 못 참겠다는 듯 우주는 재유를 와락 껴안고 좌우로 흔들어 댔다. 강하게 조여 오는 구속감에 숨이 막히는데도, 그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싫지 않았다. 재유는 팔을 휘감아 우주의 등을 어루만지며 연인의 품속을 만끽했다.
우주는 포옹을 풀고 재유의 머리를 받쳐 바로 눕혔다. 몸을 일으켜 탄탄한 다리 사이로 재유의 하반신을 가둔 채 몸을 숙여 키스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떨림이 멎은 손이 볼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고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지금 하는 행위가 우주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재유는 자신의 몸을 탐닉하는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아…!”
우주가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들이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탄성이 나왔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좋기도 좋았다. 연인에게 몸을 다 드러내고 애절하게 손길을 기다리는 게 부끄럽기 그지없었는데도 자신에 대한 우주의 소유욕을 느낄수록 심장이 간절하게 부풀어 올랐다.
“내 애인 너무 민감하네? 귀엽게.”
“…그런 말 하지 마.”
“응. 알았어. 그럼 다시 시작한다?”
그의 혀가 빗장뼈에서 어깨로 넘어가며 부드럽게 핥았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가나 싶더니, 손을 잡고 머리 위로 쑥 올려 겨드랑이에 혀를 갖다 댔다. 재유는 간지러움에 순간적으로 팔이 굽혀져 팔꿈치로 우주의 머리를 칠 뻔했다. 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팔마저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강하게 붙들어 둔 채 다시 겨드랑이를 애무했다.
“아윽… 너무 간지러워.”
“그래? 못 참겠어?”
“거긴. 너무 민감하단 말이야.”
“내 말 맞지? 너 민감한 거. 네 입으로 말했다.”
겨드랑이에서 얼굴을 들고 실컷 놀리던 우주가 새로운 공략지로 돌진할 듯한 도전적인 얼굴로 가슴팍에 혀를 갖다 댔다. 유륜 부근을 살살 혀로 긁어 애태우자 재유의 아랫부분이 우주의 볼록한 복근을 때리며 반응했다. 그런데 빳빳하게 세운 혀는 주변부만 질척이지 정작 궁금한 그곳은 달래 주지 않았다.
“으… 우주야.”
“응. 왜?”
“거기….”
“어디?”
재유는 입술을 깨물며 베개의 양 끝을 잡고서 비틀었다. 우주는 재유의 반응을 재미있어하며 태연하게 물었다. 오른쪽도 손으로 문질러 대고 있었지만, 가운데는 만지지 않고 남겨 두었다.
“응. 음, 거기, 해 줘.”
재유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졸랐다. 가슴에서 성감을 느낄 거라 일전엔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자신의 성적 탐구심이 부끄러움을 이겼다. 푸스스한 웃음을 숨과 함께 내놓은 우주는 바짝 선 작은 젖꼭지를 혀로 낼름낼름 핥아 댔다. 다른 쪽은 손가락으로 꾹 눌러 마사지하듯 동그랗게 원을 그려 갔다.
“핫. 하앗. 으음….”
상체가 혀 놀림에 따라 들썩거렸다. 우주는 성에 안 찬 듯 젖꼭지를 덮어 입속에 머금고는 쪽쪽 빨아들였다. 콩알보다 훨씬 작은 살덩어리일 뿐인데 연하고 민감하게 치솟는 성감이 주체가 안 됐다. 탐스럽고 맛있는 과실을 잘근잘근 먹는 듯한 혀와 입술이 판판한 가슴팍에서 농염하게 놀고 있었다.
“난 네 몸 어디든, 얼마든지 빨 수 있어. 그러니까 말만 해.”
저도 처음인 주제에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지껄였다. 그런데 이미 엉덩이 사이를 핥게 내준 재유가 대거리할 주제는 아니었다.
우주는 양쪽 유두를 희롱할 대로 희롱한 후 입술을 아래로 가져갔다. 매끈하고 보드라운 배를 타고 내려와 배꼽을 야릇하게 적신 뒤 더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우주는 곧고 빳빳한 그것을 먼저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제 손에 쥐고 놀기 딱 알맞은 크기라는 듯 손 안에서 통통 튕기기도 했다. 재유는 흠칫 몸을 뒤로 뺐다.
“읏. 하지 마.”
“뭘? 뭘 하지 마?”
“그. 그거.”
“음. 싫은데? 진짜 하지 마? 그건 아니지?”
웃음이 잔뜩 묻어난 말투로 재유의 표정을 확인한 우주는 곧바로 기둥 근처의 체모를 혀로 훑었다.
“으… 흡.”
우주의 손에 잡힌 성기가 꿈틀거렸다. 귀두 끝에선 물이 흘러 그의 손가락에 닿았다. 우주의 머리가 좀 더 아래에 있는 고환을 향했다. 한껏 예민해진 음낭이 그의 입속에 갇혀 버렸다. 혀로 굴리고 입술로 빨아들이자 빵빵하게 부푸는 것 같았다. 고환이 그의 입천장에 닿는 느낌에 허리가 잘게 튀었다.
“아. 너…무 민감해. 흐윽… 아파.”
“안 돼. 참아 봐.”
회음부와 조금 더 아래에 우주의 손가락이 닿았다. 자잘한 주름을 짓누르듯 만지는 손길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누르자 움찔대며 오므라들었다. 우주는 저 조그마한 구멍에 지금 당장이라도 제 것을 집어넣고 마구 박아 대고 싶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손가락은 금세 거두어졌고 무릎을 잡은 우주의 손이 다리를 조금 벌렸다.
아프게는 안 한다고 했지. 오늘은 안 하려나. 재유는 안도와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재유는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우주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지독하게 야하고 선정적이었다. 이건 상상 속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우주가 혀를 길게 뽑아내더니 뿌리 끝부분에서부터 고환, 그리고 음경과 귀두까지 혀로 한 번에 쓸어올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하아….”
재유 역시 오늘 경험한 것을 떠올리며 자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은 모르겠다. 우주가 있는데 평생 자위만 하기는 싫었다. 혼자 해결한다는 건 우주와 떨어져 지내는 걸 의미했다. 재유는 하루빨리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서울과 장운은 겨우 2시간 거리지만 바쁜 두 사람에게는 지독히 멀었다.
성기 끝에서 나온 애액이 어느덧 제 배를 적시고 있었다. 사타구니 전체에 영역 표시하듯 침을 발라 대던 우주의 혀가 귀두를 입에 물었다.
“하윽. 우, 주야, 으윽. 아. 앗…!”
입속의 혀로 귀두를 살살 달래 가며 자극하자 재유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우주는 허리 아래로 손을 넣어 옴짝달싹 못 하게 골반을 움켜쥐고는 다른 손으로는 기둥을 잡고 쉴 새 없이 흔들어 댔다. 재유는 손아귀에 붙잡은 베개를 온 힘을 다해 쥐어뜯었다. 정말 처음 하는 게 맞는 건가. 왜 이렇게 잘하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만, 그, 만해. 아흑!”
우주의 입 안은 점점 재유의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혀와 한데 녹아들어 강하게 빨아들이면서 입속에 전부 채워 넣었다. 우주는 입에 문 성기를 넣었다 뺐다 쉴 새 없이 반복했고 기둥을 쥔 손도 함께 따라 움직였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신음은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재유는 두 손으로 우주의 머리통을 붙잡고 이리저리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만두라는 것인지 더 해 달라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손과 입이 멈추는 건 조금 곤란했다.
하반신에 딴딴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가 움켜쥔 엉덩이 근육도 돌덩이 같았다. 우주는 혀와 손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며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흐윽! 우주야. 핫, 아, 아앗!”
뜨거운 액체가 그의 입 안에 퍼져 들어갔다. 뿜어질 때마다 엉덩이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재유는 우주의 입속에서 환희를 맛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몸을 부르르 떨고 두 번째 사정의 여운을 만끽하며 야릇한 숨을 토해 냈다.
우주는 아직도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재유의 것을 입에 물고 있었는데.
“얼른 뱉어!”
정신이 든 재유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티슈를 슉슉 뽑아 든 뒤 우주의 입에 갖다 댔다. 우주는 골똘한 표정으로 재유를 바라보더니 목울대를 움직여 입 안에 든 걸 꿀꺽 삼켰다.
이게 무슨….
우주가 제 사정액을 먹어 버렸다. 재유는 경악이 떠오른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우주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눈썹을 까딱이더니 재유가 내민 티슈로 재유의 성기를 닦아 내고 제 입은 팔로 쓱 닦았다.
“사정, 한 번 더 할 수 있지?”
“뭐… 뭐?”
우주는 여상한 얼굴로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재유의 가슴팍을 툭 밀어 다시 쓰러뜨렸다.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에 턱턱 얹어놓더니 무릎을 끌어안고는 종아리를 혀로 핥았다.
“아악…! 방금 사정했잖아. 우, 우주야.”
이러다 코피가 나는 게 아닐까. 재유도 한창때라 자위 경험은 하루 네 번까지 있었다. 그런데 혼자 하는 것과 우주와 함께 하는 것은 자극이 달랐다.
우주는 말없이 지그시 재유를 바라보며 발목과 복숭아뼈를 빨아 댔다. 콧김을 씩씩대며 발등을 핥는데, 발목을 부여잡은 손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재유를 보는 눈빛이 저돌적이었다.
우리 애인이 많이 참았구나.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우주의 입술이 또 한 번 시동을 걸었다. 재유는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민감해 죽겠는데, 또 설 것 같았다.
“내 꺼 만져 줘. 재유야.”
들어 올려진 허벅지 사이로 우주의 불뚝 솟은 성기가 보였다. 아까보다 더 팽팽하게 부풀어져 귀두 끝에선 울 듯이 선액을 흘리고 있었다.
우주가 이렇게 섹시했었나. 몸만 큰 개구쟁이 같았는데 지금 보니 어느새 다 자라 제 욕망을 건강하게 분출하려는 멋진 성인이 되어 있었다.
만지고 싶었다. 우주가 재유의 머리에 베개를 하나 더 얹어서 받쳐 주었다. 고개가 들려지니 아래쪽 상황이 더 자세히 보였다. 우주의 성기 바로 밑에 제 것이 슬그머니 다시 일어나려 했다.
우주가 상체를 숙여 이마에 키스했다. 재유는 조심스레 우주의 페니스로 향했다. 굵고 커다란 것이 뜨겁기도 굉장했다. 느낌으로는 성기의 굵기가 한 손에 빠듯하게 들어찬 것 같았다. 재유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올렸다.
“…진짜 크다.”
“하아… 마음에 들어?”
우주가 볼과 귀, 목덜미를 거침없이 애무하며 물었다.
“흡, 왜 그런 걸 물어봐?”
“넌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우니까. 음. 재유야, 좀 더 빨리 해 줘.”
재유는 아까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며 헛돌았다.
“네 것도 같이 쥐어 봐.”
“뭐…?”
“자, 이렇게.”
우주는 아직 민감한 재유의 것을 손으로 몇 번 쓰윽쓰윽 움직여 세우고 나서 제 것과 한데 뭉쳐 손에 들려 주었다. 우주의 것과 맞닿으니 한층 더 뜨거워지고 커지는 것 같았다. 한 손에 잡고 움직이는 게 버거워서 두 손으로 쥐어 보았다.
우주는 만족스럽지 못한 듯 흐음, 소리를 내며 재유의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그러고는 바짝 몸을 붙여 둔부를 밀착시켰다. 제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 민망한 자세에 재유는 순간적으로 성기를 잡던 손을 풀어 바닥을 짚었다.
“안 되지. 다시 해 줘. 너랑 같이 사정하고 싶어.”
우주는 재유와 손을 겹쳐 잡아 두 개의 음경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오래 참은 탓에 그의 성기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고, 분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 그의 근육 곳곳이 욱신욱신 꿈틀거렸다. 귀두가 맞부딪히며 거센 자극이 왔다. 이제는 못 참을 것 같았다. 합쳐져 있는 뜨거운 두 성기에 마찰이 더해질수록 절정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우주야. 기, 분 좋아? 흡.”
“좋아, 너무너무 좋아.”
“다행이다. 흐윽…!”
우주의 찡그린 예쁜 눈이 살짝 젖어 애타게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어서 어떻게든 해 달라는 듯이. 재유의 목덜미를 잡아챈 손과 꿰뚫을 듯 바라보는 눈빛에 관능이 깃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이 그의 전신을 휘감은 듯했다. 우주는 손아귀 힘을 터트릴 듯 꽉 쥐고 아래위로 사정없이 흔들어 댔다. 재유의 손은 그의 속도에 못 따라가고 힘없이 나부끼며 겉돌 뿐이었다.
“아아, 재유야, 한재유… 으읏!”
“하읏! 으응….”
꿀럭꿀럭 갇혀 있던 정액이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재유의 것도 뒤이어 분출되며 움찔거렸다. 두 개의 성기에서 나온 하얀 액체가 재유의 배에서 가슴팍까지 난잡하게 뿌려졌다. 하나는 꾸덕하게 진했고 하나는 약간 묽었다.
재유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이마에 팔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우주는 마지막 남은 정액을 쥐어짜듯 다시 한번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렸다. 함께한 첫 사정이라는 만족감에, 머리에 왕관이라도 씌워져 있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래. 세 번이나 싸게 했으니 네가 이겼다.
“하아… 진짜 너….”
재유의 힘없는 힐난에 우주가 몸을 숙여 잘게 입을 맞췄다. 이렇게 기분 좋은 사정은 처음이라며 재유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기도 했다.
“너무 좋았어, 진짜 최고였어.”
“…바보.”
우주는 티슈로 열애의 흔적들을 닦은 후 침대에 누워 재유를 꼭 껴안았다. 여운을 즐기듯 재유의 뺨과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했다. 자꾸 만지고 싶은지 얌전히 품에 안겨 있는 재유의 볼을 쓰다듬고 어깨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내일 학교 가지 말까? 너랑 더 있고 싶은데.”
“땡땡이치는 건 여전하네. 그래도 안 돼.”
“왜? 내일 수업도 많아서 늦게 끝날 텐데.”
“그러니까 다녀와야지. 너 기말고사 얼마 안 남았다며.”
“그래두. 주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너랑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놀고 싶어.”
재유는 우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속에 폭 안겼다. 살살 달래듯 너른 등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나도 아쉬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학교 갔다 와. 알았지?”
“…할 수 없지. 말 잘 들어야 네가 더 이뻐해 줄 테니까.”
우주가 힘주어 꼭 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배는 안 고파?”
“괜찮아. 근데… 속옷 좀 다시 주면 안 될까? 이불 다른 거 있어?”
“이불이야 있는데 속옷은 안 입고 그냥 이대로 자면 안 돼? 난 좋은데.”
재유는 일부러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흐흐 약 올리는 우주를 흘겨보았다.
“아, 그러지 말고 빨리.”
“알았어. 잠깐만.”
우주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곧장 일어서나 싶더니 기습적으로 재유의 젖꼭지에 쪽, 입을 맞추고는 홀랑 달아나 버렸다.
“너, 쫌! 하아….”
재유는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도 베개를 끌어안아 중요 부위를 가렸다. 우주는 하하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정리하고 새 이불과 팬티를 가져왔다.
“내가 입혀 줄게.”
“됐거든? 빨리 줘.”
“자, 여기!”
팬티를 건네받으려는 순간, 우주가 손을 쓱 빼더니 재유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에 메다꽂다시피 눕혔다. 그러고는 저도 침대에 몸을 던져 재유를 꼭 끌어안고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했다.
“아 재유야아, 그냥 이대로 자자. 응?”
“너 진짜… 이거 놔.”
“안 그럼 한 번 더 한다?”
“하… 이 변태.”
“뭐? 변태? 그래, 나 변태다. 그래도 너 나 좋아하잖아, 그치?”
역시 몸만 큰 ‘애’였다. 첫 경험 치르고는 고삐까지 풀려 버렸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좋아하는 걸. 재유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그래. 좋아해. 됐어?”
“응. 나도 좋아해. 네 찌찌랑 꼬추도. 전부 다!”
“그만해라.”
“엉덩이를 빼먹었네? 서운했겠다. 엉덩이도 너무 좋아!”
우주는 새 이불을 후딱 펼쳐 재유를 와락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엎치락뒤치락 킥킥 웃어 대며 뒹굴뒹굴한 실랑이가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
“혼자 있기 심심하지 않겠어?”
“응. 걱정 말고 갔다 와.”
재유는 나갈 준비를 마친 우주를 배웅하고 있었다. 손에 든 핸드폰에는 어제 산 하트 줄이 달려 있었다. 우주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 많으니까 보고 있어도 되고, 컴퓨터로 게임 해도 되고. 아파트 뒷길 나가면 산책로 있으니까 잠깐 나갔다 와도 돼.”
“네가 목에 이런 자국을 남겨 놨는데 창피하게 어떻게 나가.”
“뭐 어때? 자랑하고 다니면 되지. ‘나 사랑받고 있어요!’ 하고.”
“뭐라고?”
“오늘 밤도 기대해, 자기야.”
“아침부터 진짜….”
다음 날이 되어도 우주의 뻔뻔함은 여전했다. 자기라니…. 저렇게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었는지. 재유도 싫지만은 않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집 잘 보구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우주는 재유를 끌어당겨 입을 맞춘 후 헤벌레 웃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수업 열심히 듣고.”
“으… 가기 싫어.”
“어서 가래도.”
재유는 쯧쯧 혀를 차며 미적거리는 궁둥이를 팡 때렸다. 우주는 타박을 받으면서도 재유의 볼을 부여잡고 한 번 더 키스하고 나서야 현관문을 나섰다.
“…….”
문이 닫히고 재유는 방금 한 입맞춤의 여운을 느끼려는 듯 입술을 매만지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행복하다. 연인이 된 우주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밥을 먹고, 배웅하며 키스를 하는 것이. 애정이 충만해져 가는 느낌이 가슴 속에서 퍼졌다.
문득 생각나서 베란다로 달려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곧이어 우주가 아파트 밖으로 나타났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나 싶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집 쪽을 바라보았다. 재유를 발견하자 양손을 크게 휘저으며 뒷걸음으로 걸었다.
“앞에 보구 가!”
“갔다 올게!”
우주는 드문드문 계속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댔다. 재유는 은은한 웃음을 매단 채 그가 아파트 단지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창을 닫았다.
주방으로 돌아가 토스트 접시를 씻어 둔 재유는 느긋하게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그의 냄새가 배어 있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어제 여기서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 보았다. 실실 웃음도 나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새삼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누워 있다 보니 모자란 잠이 쏟아졌다.
실컷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집 구경을 시작했다.
거실에는 TV와 소파 외에 러닝머신과 갖가지 무게의 아령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TV나 비디오를 틀어놓고 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이 쉽게 연상되었다.
장식장에는 본가에서 아끼는 걸로만 골라온 듯한 피규어들과 프라모델, 소장용 비디오테이프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둘이서 찍은 사진이 액자로 전시되어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듣던 날 찍은 것이었다. 재유는 사진 속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현관 맞은편 방 문을 열자 작은 침대와 옷장, 1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손님방이었다. 우주의 사촌이 여기서 묵는다고 했었지. 그녀는 어제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설마 우리 사이를 들켰을까? 하긴. 눈치 못 채면 이상한 거였다. 순식간에 불길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펼쳐졌지만, 방 문을 닫으며 걱정은 일단 덮어 두기로 했다. 지금 이 행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고 싶었다.
안방 옆의 작은방 문을 여니 우주의 책상과 책장이 있었다. 본가만큼은 아니었지만 여기도 책들이 꽤 채워져 있었다. 주로 영화나 디자인잡지, 사진집 같은 것들이었다.
우주는 영화나 사진, 농구,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취미도 그런 쪽에 맞춰져 있었다. 밴드부 동아리에선 베이스기타를 맡아서 연습 중이라고 했다. 다른 쪽 벽에는 베이스기타를 비롯해 일렉기타 두 개와 클래식기타가 걸려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시작한 거라 재유는 아직 그의 연주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하여간 관심 분야도 다양하고 호기심도 많은 우주였다. 재유는 기타 하나하나 줄을 튕겨 보며 소리 없이 고요한 집에 소음을 내고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가 법대에 간다고 했을 때 재유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자세히 말해 주진 않았지만, 집안의 권유라고 했었다. 영화나 사진에 관심이 많은 우주가 분명 예술계 쪽 전공을 지망하리라 생각했는데 우주는 순순히 부모의 기대를 따른 모양이었다.
공부 잘하는 ‘날라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순종적인 모범생’도 아닌 그가 근엄한 검사나 판사, 변호사가 된 모습을 떠올리면 역시 잘 어울리진 않았다. 멋있기야 하겠지만.
기타들 옆으로 벽에 걸린 액자에는 재유가 합격 기원 선물로 그려 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덜렁대면서도 꼼꼼한 성격이 여기에서 나왔다.
우주는 재유와 관련된 작은 추억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주고받은 쪽지나 함께 본 영화표를 꼭 수집하고 선물로 준 하찮은 것들 하나하나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 그림이 뭐라고 이렇게 예쁜 액자에 걸어 벽에 장식까지 해 두나. 재유는 쑥스러우면서도 이런 사소한 것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재유는 우주의 방에서 자신의 흔적을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에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바탕화면이 뜨자 삐죽삐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탕화면에 제 사진이 있었다.
작년 여름, 피자집에서 알바할 때 카운터에 멍하니 있는 모습을 매장 밖에서 찍은 거였다. 언제 이런 사진을 찍은 걸까. 저땐 이미 사귀고 난 뒤였는데. 재유는 새롭게 드러난 그의 스토커 이력에 혀를 내두르며 자연스럽게 폴더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트 기호로 된 폴더를 열자 폴더 두 개가 더 나왔다. ‘HJY❤’를 먼저 열어 보니 사진 수백 장이 들어 있었다. 우주가 쫓아다닌다고 영선이 귀띔해 줬던 때에 그는 자기를 마냥 따라다니기만 한 건 아닌 듯했다.
전학 초기에 길에서 찍은 것, 학교에서 찍은 것, 알바할 때 찍은 것, 심지어 공장에 입사한 후 집에서 나오는 모습, 공장 앞 공중전화 안에 있는 모습, 엄마와 함께 있는 모습까지. 이거 원.
“허… 이 집요한 자식.”
이제 우주를 만날 때 화장실엘 가거나 잠자는 모습이 찍히지 않을까, 일일이 신경 쓰게 생겼다.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집착적인 모습에 당황스러운 반면 이상하게 좋기도 했다. 날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남모르는 감동이었다.
되돌아가 ‘JY❤WJ’ 폴더를 열어 보니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밥 먹다가 찍은 것, 각자 집에 놀러 갔을 때 찍은 것, 데이트할 때 찍은 것 등 만만치 않게 다양한 사진들이 있었다. 이 사진들은 재유도 대부분 갖고 있었다. 우주가 매번 인화해서 예쁜 봉투에 담아줬기 때문이다.
사진들 속에 ‘^_^’ 폴더가 하나 더 있었다. 열어 보자 동영상 파일들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영상도 찍었었나?’
그런데 제목들이 심상치 않았다. ‘차 안에서 벌이는 낯 뜨거운 두 남자의 사정’, ‘이렇게 예쁜 남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 ‘남자 직장 상사에게 꼴리는 갓 제대한 신입사원’.
이거, 설마. 마우스를 쥔 손이 홀린 듯 파일을 클릭했다. ‘밝히는 남자 후배의 아찔한 도발’이었다.
“아악! 깜짝이야.”
동영상 소리가 너무 크게 설정되어 있어 순식간에 영상을 닫아 꺼 버렸다. 재유는 켕기는 마음에 아무도 없는 방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낮춘 후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더블클릭을 했다.
게이 동영상은 처음이었다. 평범한 사무실에서 건장한 두 남자가 키스한 후 옷을 벗기고, 애무하고, 다리를 벌리고. 그곳에 손가락을 넣어 마구 쑤셔 대자 아래에 있는 남자가 굵은 신음을 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내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이 채워졌고, 여러 체위들로 자세를 바꿔 가며 음탕한 정사가 벌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아랫도리가 강렬하게 치솟았다. 아아. 나는 게이가 맞나 보다. 우주를 만나기 전까진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영상 속 남자들이 자신과 우주로 대입되어 섹스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손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호흡도 빨라졌다.
“하아….”
영상의 정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재유가 먼저 사정해 버렸다. 팬티와 바지가 정액으로 지저분해졌다.
나 지금 뭐 하는 걸까 진짜. 남자친구 집을 뒤지다 야동을 보며 자위까지 해 버리다니. 변태는 나였나.
재유는 푹 한숨을 쉬며 얼른 컴퓨터를 꺼 버렸다. 민망함과 수치심이 찾아왔다. 티슈를 뽑아 대충 닦아 낸 뒤 방을 나와 화장실로 갔다. 손을 씻은 후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못 본 거 맞겠지….
미쳤나 보다. 우주 집에서 혼자 무슨 짓을.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져 이마를 퍽퍽 때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벨 소리를 듣자 흠칫 놀라며 죄책감이 밀려왔다. 설마 우주인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여자 목소리였다. 모르는 목소리.
“…….”
-…인애.
“아… 인애. 그런데 왜?”
-너 쉬는 날이지? 나도 쉬는데 혹시 오늘 시간 있나 해서.
“…볼일이 있어서 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
-그래?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내일 너 야간이야?
“응.”
-그럼 30분만 일찍 나올 수 있어? 공장 뒤에 벤치에서 잠깐 보면 안 되냐?
“…알았어. 저, 근데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아직 산 지 며칠 안 됐는데.”
-주임님한테 물어봤어.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봐.”
내가 핸드폰 갖고 다니는 걸 봤나.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이런 비슷한 얘기를 한 적 있었는데. 무슨 일일까. 공장 일로 그러는 거라면 전화로 해도 될 텐데 굳이 만나서 할 얘기라니.
궁금했지만, 더 깊이 생각할 상황은 아니었다. 우주에게 빌려 입은 팬티와 반바지를 어떻게든 해야 했다. 더구나 팬티는 세 장 째 빌려야 할 판이었다. 재유는 핸드폰을 대수롭지 않게 수납장에 던져 놓은 후 일단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었다.
***
오후 2시, 우주는 마지막 전공 수업과 동아리 모임을 째기로 하고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어젯밤부터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잔소리는 좀 듣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이뻐 죽겠는 애인이 기다리고 있는데 학교가 대수랴. 수업도 귀에 안 들어오고 재유가 내 집에서 뭘 하고 있을까만 궁금했다.
하루종일 이 시간만 기다렸더니, 집에 돌아가는 이 길이 재유가 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2박 3일을 보내는 건 처음이니까.
언젠가 함께 살게 된다면 같이 출근하고, 같이 퇴근하며 저녁 장을 본 후 함께 만든 음식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겠지. 매일같이 쓰다듬고, 뽀뽀하고, 만져대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재유와 나. 상상만 해도 설레었다.
재작년 가을, 복도에서 처음 본 재유는 우주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마른 몸에 하얀 얼굴, 고개를 숙이며 이리저리 눈치 보는 것 같은 소심한 태도가 어쩐지 시선을 머물게 했다. 가늘고 긴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리는데, 잠시 눈이 마주쳤던 순간 우주는 뭔가에 홀린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예쁘다.
그때 우주는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가 소변보는 뒷모습까지 훔쳐보았다.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 지나가는 애를 붙잡고 이름까지 알아냈다.
한재유.
그때부터 우주는 재유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전에도 다른 동성을 보며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껴 본 적 있다고 생각했지만, 재유를 알고는 그 감정이 가짜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애를 떠올리면 언제나 머리가 울렁거리고 몸에 있는 열이 심장으로 쏠렸다.
그 후로 우주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복도에서 서성거리거나 화장실을 기웃거리며 재유의 모습을 찾았다.
하교할 때는 재유를 몰래 따라가 집도 알아내고,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에 자주 데리러 오는 걸 알고는 혼자 밥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겨울방학 어느 날엔 서점에서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말을 걸 만한 구실이 없어 허무하게 기회를 놓쳐 버렸다. 저 애에게 어떻게 접근할까 전전긍긍하며 고민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랬는데, 3학년 첫날에 재유가 먼저 다가오는 기적이 일어나 버렸다. 비록 딴 사람의 편지를 전해 준 것이었지만.
재유가 못 견디게 좋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저 짝사랑으로 끝나면 어쩌나,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기 직전, 재유가 고백을 받아 주고 결국 사귀게 됐을 땐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우주는 몸은 비록 학교에 있었지만, 정신은 온통 어젯밤 일을 되감기 하는 일에 몰두했었다. 제 침대 위에 알몸으로 누워 숨을 몰아쉬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온통 머릿속을 지배했다.
재유가 이성애자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다른 여자애들에게 눈길도 주고 여자친구도 사귀어 봤다고 했으니 당연했다. 동성과의 연애는 꿈꾼 적도 없는 보통의 순진한 남자애였다.
그런 재유가 어제 갑자기 찾아왔고, 집에 함께 와 잠자리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다. 비록 삽입까지 하게 된 건 아니지만 우주는 충분히 만족했다. 평생 키스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재유가 옆에만 있다면. 굴비를 쳐다만 보며 간장에만 밥을 먹는 자린고비처럼 평생 재유만 바라보며 자위로 해결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그가 제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우주는 그 순간만 생각해도 설 것 같았다. 머리가 젖은 채 같은 보디 제품의 향기를 풍기며 헐렁한 제 옷을 입은 재유는 몹시 위험한 존재였다.
침대에서 첫 경험을 앞두고 어디까지 할 거니, 네가 넣니, 하며 ‘오늘 하는 거 봐서 네가 넣어도 되는지 허하겠노라’는 엄청난 시험을 투척하기도 했다.
늘 순하고 조용한 인상이지만 가끔 의도를 갖고 웃는 모습을 보일 땐 입매가 반달처럼 매끈하게 올라간 것이 은근한 색기를 풍긴다 생각했는데, 착각만은 아니었다.
아마 그동안 저와의 잠자리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일 것이다. 우주는 마음을 열어 준 재유가 고맙고 기특할 뿐이었다. 남자끼리는 받는 쪽이 무리가 가는 만큼 우주는 자신의 성향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시청각 자료를 모아 실전에서 어떻게 써먹을지 연구하고 섹스에 필요한 도구들을 사 모아 두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거니까….
우주는 앞서나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집을 향해 전력 질주를 했다.
평소 20분 거리를 10분 만에 달려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헉헉거리면서도 웃는 얼굴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이 있었던가. 아직 호흡이 가빴지만, 우주는 1초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어 애가 탔다.
이 집을 들어가며 처음으로 띵동,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재유가 열어 줄 테니까.
그런데 반응이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문에 귀를 대고 소리가 나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뭔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리고 재유가 나타났다.
“뭐야? 깜짝 놀랐어.”
“다녀왔어, 재유야.”
“수업 벌써 끝난 거야? 너 땡땡이쳤구나.”
대답하지 않고 곧장 입을 맞췄다. 재유가 허우적거리는 걸 팔로 꼭 끌어안았다. 이런 날이 매일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옷, 갈아입었어?”
“응…. 미안해, 맘대로 꺼내 입어서.”
재유는 땡땡이를 따지려던 뾰로통한 표정을 허물고 금세 난처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뭘까. 내 생각하며 자위라도 한 건가? 우리 재유. 예쁘기도 하지.
우주는 재유 몸에 끈끈이처럼 달라붙어 쪽쪽 입 맞추기 바빴다.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게 미안해? 들어가자.”
재유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가서 시원한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그 모습이 퍽 흐뭇한 우주는 물을 마시다가도 입이 헤벌어져 사레가 들릴 뻔했다. 식탁엔 채소와 고기, 과일들이 펼쳐져 있었다.
“장 보구 왔어?”
“응. 냉장고에 반찬이 없더라. 저번 주에 반찬 못 받아와서 그런가?”
“아냐. 요즘은 집에서 밥 잘 안 먹어서 일부러 조금만 싸 오거나 아예 안 싸 왔어.”
“그래? 반찬 좀 하려고 했는데. 닭볶음탕이랑.”
“좋지. 먹고 싶다!”
“시간 좀 걸리니까 느긋하게 씻고 와.”
“알았어, 자기야.”
우주는 천연덕스럽게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재유는 눈을 흘기다가도 이제는 익숙해진 듯 피식 웃고 넘어갔다. 우리가 정말 연인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
저녁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영화를 보기 위해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엔 비디오가 아니었다. 우주는 천장에 매달린 프로젝터를 켜더니 맞은편 천장에서 화이트 스크린을 끄집어 내렸다. 거실의 한쪽 벽면 전체가 스크린으로 덮였다. 불을 끄고 영화를 트니 극장이 따로 없었다.
영화는 아직 국내 개봉이 되지 않은 외화였다. 대만의 유명 감독의 복귀작이라 기대를 모은 작품이었다.
“이거 아직 개봉 안 된 거 아냐?”
“친구가 주더라고. CD에 구워서.”
“그 친구는 어떻게 구했는데?”
“그런 거 다운받을 수 있는 사이트가 있거든.”
“그래? 그럼 혹시….”
“혹시 뭐?”
“아… 아냐 아무것도. 얼른 보자.”
우주는 그런 영상들을 직접 검색하고 다운받은 걸까. 재유는 컴퓨터에 있는 야동에 대해 물어볼 뻔했지만, 가까스로 입을 막았다.
우주가 아까 자기처럼 그런 걸 보고 흥분할 거라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동영상들을 떠올리자 그걸 보며 자위했던 일이 또 생각나 버렸다. 재유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우주는 소파에 앉은 재유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오래전부터 습관이 들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손을 뻗어 무릎을 만지작댔다. 긴 바지를 빌려 입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재유는 마른침을 삼켰다.
영화는 중국 배경의 무협 액션이었는데, 재유의 머릿속은 ‘밝히는 남자 후배의 아찔한 도발’에 머물러 있었다. 영상을 봤을 때의 충격과 긴장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우주의 얼굴을 보니 온통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었다.
우주 걸 넣으면 많이 아플까? 우주는 넣고 싶어 하겠지. 언제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넣기 전에 뭔가 준비해야 되지 않나? 혹시 실수하면 어떡하지. 난 아는 게 전혀 없구나. 나도 좀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뭘?
영화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 누워 있는 우주에게 힐끗힐끗 시선이 갔다. 우주는 어느새 무릎에서 발등까지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팔이 길기도 했다.
재유는 폐부의 숨을 끌어모아 소리 없이 길게 내쉬었다.
삽입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어제의 경험으로 보아 우주가 부드럽게 해 준다면 그리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엇….”
갑자기 우주가 반바지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허벅지 안쪽을 만지작거렸다. 재유는 단숨에 몸을 굳히며 뻣뻣해졌다. 영화 보고 있는 거 아니었나? 위험했다. 어제와 오늘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도 설 것 같았다.
“우주야… 앉아서 보면 안 될까?”
“집중을 못 하겠어.”
“뭐?”
“영화가 뭔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순식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재유의 반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들춰 성기를 꺼냈다. 당황한 재유가 말릴 새도 없었다. 드러난 성기가 우주의 입에 물렸다. 입속의 혀가 살살거리며 끝부분을 자극하자 허리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아직 해도 안 졌거든?”
“뭐 어때. 우리 둘뿐인데.”
우주는 입속에 성기를 머금은 채 옷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등과 허리를 넓게 쓰다듬었다. 혀 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재유는 잔뜩 긴장한 자세로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쳐놓고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그럴수록 우주의 팔이 더 단단하게 앞으로 끌어당겼다.
지금 또 사정하면 어제부터 도대체 몇 번을 싸는 걸까. 재유는 속으로 경악했지만,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자극적인 애무를 끝까지 참진 못했다. 재유는 몸을 숙여 우주의 머리를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으… 우주야. 흐윽…!”
야한 생각을 하다가 당한 것이어서 그런지 사정이 빨랐다.
재유는 우주의 머리통을 감싼 채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또 우주의 입속에 사정해 버렸다는 사실에 목덜미에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아직 초저녁인데 이게 뭐 하는 짓일까. 민망함에 고개를 들기 싫었지만, 숨 막힐 우주를 생각해 팔을 풀었다.
우주는 입 안에서 재유의 성기를 해방시켜 주고는, 짓궂은 표정으로 사정액을 꿀꺽 삼키며 씨익 웃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 맛있다고 저런 걸 꿀떡꿀떡 삼키는 건지. 재유는 두리번거리며 티슈를 찾으려는데 우주가 소파에 올라서서 티셔츠를 벗기려 했다.
“자, 잠깐만.”
재유는 다급하게 우주의 어깨를 막아섰다. 아랫도리로 시선을 내리니 그의 중심이 벌써 팔팔하게 솟아 있었다.
“…….”
“…….”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발 더 가 보기로 했다. 2박 3일을 오롯이 둘만 보내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지금 이 기회를 날리면 언제 시도해 볼지 알 수 없었다.
재유는 그 어느 때보다 성적 호기심이 왕성해졌다. ‘남자 후배의 아찔한 도발’의 영향력은 무시할 게 못 됐다. 정말 그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섹스할 수 있을지가 너무 궁금했다.
“너… 이다음도 할 줄 알아?”
“이다음? 무슨 소리야. 나도 너랑 처음인데.”
재유는 도저히 눈을 못 맞추겠어서 손끝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얼굴을 가렸다.
이다음이라. 이다음이라면…. 말뜻을 되새겨 보던 우주는 제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했어야 했다. 우주는 반성하는 자세로 진지하게 소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다음이라면, 삽입을 말하는 거야?”
“음… 네 꺼… 살짝만 넣어 보면 안 될까?”
우주는 귀를 의심했다. 아직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중국어와 챙챙거리는 칼싸움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넣어 보면 안 될까?’라고 했다. 정말로?
적어도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게 밤을 보낼 줄 알았는데 재유가 먼저 말을 꺼내다니.
항상 자기가 먼저 앞서간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우주가 아무리 앞서가도 재유가 따라 주지 않는다면 관계에 진전은 없었다. 고백도, 연애도,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렇게 미리 치고 나가기도 했다.
거절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갑자기 저도 모르던 초인적인 힘이 솟는 게 느껴졌다. 몸을 숙인 우주는 재유의 허리를 번쩍 안아 어깨에 들쳐메고 방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려 발로 쾅 열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침대에 풀썩 앉혔다.
물론이지. 당장이라도 하고 싶고말고.
“우주야. 잠깐….”
“응. 왜?”
우주의 기세에 겁을 먹었는지 재유는 달려들려는 어깨를 또 한 번 막아섰다. 순간 재유가 하지 말자고 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아까 샤워하긴 했는데… 땀 흘렸으니까 잠깐이라도 씻고 오게 해 줘.”
“아… 그래. 여기 욕실 써. 샤워기도 있고, 안에 수건도 있어.”
“…….”
지나치게 흥분했다. 재유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자 우주는 조금 정신이 들었다.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불을 안 켜도 커튼을 뚫고 나온 미세한 햇빛이 방 안을 그윽하게 감쌌다.
우주는 샤워 타올을 가져와 침대맡에 두고 서랍장에서 젤과 콘돔도 꺼냈다. 혹시 몰라 사 놓았던 것들을 벌써 쓰게 될 줄이야.
천천히, 부드럽게, 열심히 풀어 줘야지. 재유가 씻고 나오면 민망할 테니까 너무 몰아붙이진 말자. 정신 차리자. 처음이니까 너무 아프게 하면 안 되지.
우주는 방 안을 서성이며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손에 땀이 났다. 재유 앞에서 미숙한 모습을 보일까 봐 불안하고 뒤숭숭했다. 그래도 재유의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샤워 소리만 듣고 있어도 벌떡벌떡 서 버렸다.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뿌연 김이 새어 나오면서 재유가 허리에 샤워타올만 감은 채 알몸으로 등장했다.
우주는 뚜벅뚜벅 걸어가 샤워타올을 거칠게 풀어 버렸다. 재유의 등이 벽에 부딪힘과 동시에 입술을 덮었다. 재유도 곧바로 혀를 섞으며 우주의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었다. 부끄러움을 조금 걷어 낸 재유가 참을 수 없이 야하게 느껴졌다.
우주는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고 재유를 침대에 풀썩 눕혔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아 촉촉한 피부가 은은한 햇살을 받아 희부연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재유가 저만 벗은 게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기에 우주는 지체없이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재유의 몸을 달아 올리는 데 집중했다.
어제는 처음이라 신중했고 속도도 느렸지만, 오늘은 본능에 충실하게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입술이 가는 대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재유의 성기까지 내려온 입술이 다시 한번 기둥을 핥았고, 손은 꼿꼿이 선 젖꼭지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안 돼… 그렇게 하면 또 나올 것… 하응…!”
“좀 더 참아 봐. 아직 멀었으니까.”
우주는 양 무릎을 잡고 둔부를 조금 더 열었다. 꿈틀거리는 음경과 탱탱하고 귀여운 고환이 훤히 드러났다. 어제보다 훨씬 음란하고 야했다.
우주는 베개 하나를 들어 재유의 엉덩이 아래에 집어넣었다. 살집이 베개를 눌러 둥글둥글한 모양을 보기 좋게 연출했다. 우주는 긴장된 호흡으로 들썩이는 재유의 아랫배를 쓰다듬고는 조심스레 엉덩이 사이를 벌렸다. 어제도 본 것이지만 오늘은 제가 들어갈 자리라고 생각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우주는 천천히 엎드려 꽉 다물린 채 움찔거리는 그곳에 입술을 묻었다.
“쓰읍… 안 돼, 우주야. 으읏….”
재유의 손이 내려와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다. 우주는 그의 바람을 가뿐히 무시한 채 두 팔로 옭아매듯 골반과 엉덩이를 감싸 안았다.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탐색하듯 천천히 도리도리를 했다.
안쪽 허벅지와 연한 엉덩이 살, 그 안의 가장 깊은 곳까지, 콧대와 입술이 가만가만 문지르며 음미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재유의 가장 은밀하고 깊은 신체 부위가 입술에 닿았다. 남들에겐 평생 보일 일조차 없을 그곳을 탐하고 선점했다는 기분은 우주에게 기묘한 우월감을 선사했다.
연한 피부가 자신의 입술에 의해 헤집어지고 자신의 혀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었다. 잘은 주름을 뾰족한 혀가 집요하게 쓸어 대고 회음부의 뭉툭한 살을 높이 솟은 콧대가 거침없이 짓이겼다.
재유가 다리를 버둥거리고 발꿈치로 시트를 밀어내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럴수록 우주는 아랫배에 모은 두 손을 바짝 끌어당긴 채 재유의 음부와 제 얼굴을 단단히 밀착시켰다.
“흐으… 으응, 흐윽…!”
길게 빼낸 혀를 한 곳에 집중시켰다. 이미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곳에 진입을 시도하는 것처럼 구멍 속을 파고들려 했다. 재유가 허벅지를 조이는 바람에 볼이 짓눌렸지만, 얼굴이 뭉개지는 것도 상관없이 구멍에 집착했다.
시트를 밀어내던 발꿈치가 이제는 우주의 등을 긁어 대고 있었다. 이러다 재유의 다리가 목을 조른다 해도 멈추진 못할 것 같았다.
습한 숨과 번들거리는 땀으로 재유의 가랑이 사이가 젖어 들었다. 우주는 고집스럽게 추저분대던 혀로 회음과 고환을 길게 밀어 올렸다. 골반을 감싸던 팔을 풀어 내고 재유의 가슴팍에 얼굴을 붙였다.
우주는 흥분으로 씰룩이는 재유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며 젖꼭지를 입에 물고 벌려진 다리에 손을 내려 엉덩이를 주물렀다. 쾌락에 절여져 유들유들해진 재유의 몸을 제 손으로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차곡차곡 정복욕이 쌓여 갔다.
재유의 손이 우주의 어깨를 잡고 끌어 올렸다. 키스해 달라는 신호였다. 우주는 곧바로 재유의 입술을 찾아 제 것과 꼭 맞췄다.
재유 얼굴 옆에 팔꿈치를 짚고 다른 손으로 항문 위를 매만졌다. 가장 긴 손가락으로 주름 위를 지분거리자 벌어지고 오므라드는 입구의 수축과 이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키스를 하는 우주의 입술이 호선으로 슬며시 벌어졌다.
“엎드려 봐.”
“…….”
“풀어 줄게.”
우주는 베개를 치우고 재유의 몸을 뒤집어서 엉덩이를 잡아 올렸다. 양쪽 엉덩이를 붙들고 살짝 벌려 보았다. 오물오물 풀어지긴 했지만 작아도 너무 작았다. 도저히 제 것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주변부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꾹꾹 눌러 가며 이완시켜 보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
“…천천히 해 줘, 무서우니까.”
“알았어. 최선을 다해 볼게. 좀 차가울 거야.”
우주는 젤을 조금 짜서 주변부를 살살 문질러 보았다.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손끝으로 힘을 주어 눌러 보았지만, 자신의 굵은 손가락이 억지로 벌리려는 것 같아 오히려 우주가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상처라도 나면 어떡하나, 긴장감에 어깨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괜찮아. 으읏… 한번 해 봐.”
“응. 힘 풀어 봐.”
이번엔 젤을 질척할 정도로 짜서 손끝으로 살살 마사지했다. 끈적한 젤이 손가락과 입구를 충분히 적시자, 숨을 흐읍, 들어 마시고는 힘을 주어 들이밀었다.
쓱 미끄러져서 손가락 한 마디가 단숨에 들어갔다. 안쪽의 연하고 부드러운 살 주름이 만져졌다. 그래도 뻑뻑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으… 으으….”
“괜찮아? 재유야 괜찮아? 아파…?”
“응. 아파. 너무 이상해. 으윽.”
“어떡하지? …뺄까?”
“아냐, 흡…!”
생각보다 아파하는 재유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했지만, 손가락을 살살 돌려가며 점점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구는 어느새 손가락 끝까지 집어삼켰다. 최종 단계를 위한 코스 하나를 넘어선 것 같아 성취감이 느껴졌다. 수고했다는 듯이 재유의 배를 쓰다듬고 엉덩이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췄다.
“조금씩 움직여 볼게.”
“핫. 하아… 알겠어. 흐읍!”
손가락을 살살 뺐다가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재유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아파하기만 한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분명히 전립선이 자극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우주는 자신이 서툴러서 재유의 기분 좋은 부분을 잘 못 찾는 것 같아 자책하고 있었다.
우주는 다시 손가락을 끝까지 넣은 채 온 신경을 집중하고서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여기인가? 여기가 아닌가? 재유의 예쁘고 아까운 몸인데, 자꾸 실수만 하는 것 같아 자존심 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뭔가가 느낌 있게 만져졌다. 오돌토돌한 작은 호두 같은 게 손끝에 닿았다. 혹시나 싶어 힘주어 꾸욱 눌러 보았다.
“끄윽…! 거기… 뭐야?”
자지러지는 교성에 오히려 우주가 깜짝 놀랐다. 저렇게 귀여운 소리를 내다니. 재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기쁨에 긴장이 다소 풀렸다.
“어때? 괜찮아?”
“하응. 모, 몰라. 엄청 자극적이야. 으으….”
여기인가 보다. 우주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공략 장소를 지정해 놓고, 서서히 손가락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재유가 몸을 들썩거리며 상체를 완전히 바닥에 붙여 버렸다. 우주도 그 옆에 몸을 바짝 대고 얼굴 곳곳에 키스해 가며 손가락으로 열심히 자극해 갔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를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아파하는데 그만할까’, ‘좀 더 괴롭히고 싶다’. 우주는 후자로 결정했다.
“하나 더 넣어 볼게.”
손가락 두 개를 시도해 봤다. 아까보다 훨씬 좁긴 했지만 들어가기는 했다. 재유가 흥분하던 부위를 다시 찾아 살살 건들며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히익…! 흐으으….”
재유는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이물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우주는 손가락도 길고 굵어서 한 개만 넣었을 때도 억 소리가 났는데, 지금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마침내 우주의 것을 넣게 되면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아찔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왜 하자고 했을까, 후회도 됐다. 그런데 참 희한하기도 하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데, 아픔 속에서도 조금씩 느껴지는 희열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손가락이 깊숙이 드나들수록 당장에라도 그만하자며 내빼고 싶었지만, 더 해 달라 매달리고 싶기도 했다.
갑자기 우주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고 쑥 빠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짐승처럼 헉헉거렸다. 그때, 다시 차가운 젤이 그곳에 부어지고 있었다.
“재유야. 괜찮아?”
“아픈데… 괜찮아. 하으….”
“좀 아플 거야, 잠깐만 버텨 줘.”
“뭐 하려고?”
“손가락 더 늘리려고.”
“잠깐만. 그럼 자세를… 너 보면서 하고 싶어.”
“알았어.”
재유가 천천히 돌아눕자 우주도 그 위에 엎드려 자세를 잡았다.
“내 목에 팔 둘러 봐.”
우주가 이마에 키스한 후 바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빡빡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고 손에 잡힌 뭉친 어깨를 아프도록 쥐어짰다. 우주는 상체를 휘청일 법도 한데, 팔 하나로 몸을 지탱해 가며 조심스레 재유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우주도 무서웠다.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 재유의 몸이 버텨 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일단 거부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재유의 표정이 좋은 건지, 아프기만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재유의 성기가 반응을 보였다. 빳빳하게 세워져 움찔거리며 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주는 용기를 얻어 손가락을 열심히 휘저으며 자극했다.
재유는 어느새 목을 꽉 끌어안아 어깨를 깨물고 있었다. 아팠지만, 재유가 느끼는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재유야. 지금 넣는 거 어때? 충분히 늘린 것 같은데.”
“후으으… 그래.”
손가락이 빠지자 터놓은 길을 기억하듯 입구가 심하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눈 안이 축축해졌지만, 한계에 다다른 우주의 성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서웠다. 성적인 의도로 사용해 본 적 없는 그곳에 우주의 것을 넣어도 괜찮을까? 죽는 건 아니겠지?
우주도 긴장한 것 같았다.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손이 떨리면서 주저하는 게 보였다. 그는 재유의 엉덩이에 베개를 받쳐 주고 다리를 벌려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우주가 페니스를 입구에 살살 문지르며 시동을 걸었다.
“우주야. 천천히 해….”
“알았어. 후우….”
두 사람은 잠시 행위를 멈추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롯이 두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무섭고 어렵기만 한 첫 경험이지만, 한재유이고, 염우주이기 때문에 서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을 두 사람도 알았다.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그 순간엔 그렇게 생각했다.
“으아악…!”
하지만 물리적인 고통은 달랐다.
우주의 성기가 머리를 디밀고 들어오자 재유의 몸이 까무러치듯 뒤틀렸다. 그 바람에 귀두도 채 삼키지 못한 성기가 쑥 빠져 버렸다. 충분히 각오를 했는데도 하체에 전해진 충격에 재유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우주는 갈 길을 잃은 페니스를 단단히 세우고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쩔쩔맸다.
“미안해. 어떡해…. 아팠지? 미안.”
“아흑… 미안해.”
“아냐 아냐. 난 괜찮아. 많이 아팠어?”
“아니… 으흑….”
우주는 잔뜩 찌푸린 채 아픔에 신음하는 재유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괜찮다고 계속 안심시켰다. 재유가 손을 뻗어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찢어진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우주도 다리를 벌려 재유의 손을 치워 내고 입구를 들여다봤다. 한껏 오므린 구멍이 꽉 다물려 있었다. 적어도 찢어지거나 피가 비치진 않았다.
아직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가 보았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재유는 충분히 용기 냈고 많이 애써 줬다. 우주는 순식간에 삽입의 욕심을 버리고 쉴 새 없이 재유의 얼굴에 입을 맞춰 달래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나 괜찮아. 다시 해 보자. 응?”
재유는 우주의 팔을 부여잡고 아직도 얼얼한 엉덩이의 아픔을 느꼈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픔이 잦아들자 민망함이 찾아왔다. 제가 하자고 했는데 괜히 설레발쳐서 우주에게 상처 준 게 아닌가 걱정됐다. 실망했겠지.
“아니? 오늘은 하지 말자. 너무 갑자기고 너도 많이 놀랬잖아. 다음에 하면 돼지.”
“그래도….”
“아냐, 난 충분해. 오히려 내가 미안해. 다음엔 더 열심히 해 볼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주의 하반신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손가락의 감촉이 남아 있고, 잠깐이지만 재유의 안에 들어갔었다. 무엇보다 아직 재유를 끌어안고 있으니….
“내가 입으로 해 줄까?”
“뭐…?”
“해 줄게. 이쪽으로 누워 봐.”
“어? 어….”
고분고분 자리에 눕자 재유가 엎드린 자세로 고간을 향해 다가왔다. 미숙한 손길이지만 진지한 얼굴로 콘돔을 벗겨 냈다. 기대하던 순간이었는데 막상 재유가 자신의 것을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조금 민망해졌다.
“할 수 있겠어? 다음에 해도 되는데.”
“싫어… 해 볼래.”
재유는 혀를 쭉 내밀어 살살 기둥을 핥아 나갔다. 연인에게 처음 받는 애무여서 그런지 온몸이 사르륵 녹는 것처럼 달짝지근한 기분이 감돌았다.
“아으… 너무 좋다, 재유야.”
재유는 우주가 해 줬던 것을 떠올리며 똑같이 해 주려 애썼다. 입으로 물고 빨아들이며 손으로 기둥을 꽉 쥐고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처음 하는 것이지만 지금껏 받기만 했으니 우주를 만족시켜 주고 싶은 마음에 더 열심히 하려는 것도 있었다.
어제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텐데. 너무 혼자만 여러 번 사정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막상 해 보니 예상보다 쉬워 보였다. 우주가 만족하느냐는 별개겠지만.
“으읏! 조금만 더 세게….”
우주가 얼굴을 붙잡고 쑥 끌어당기자 하마터면 치아로 페니스에 상처를 낼 뻔했다. 그래 봤자 귀두 바로 아래까지만 삼킨 것뿐이었지만 입 안에 가득 찬 것처럼 버거웠다. 그래도 흥분한 우주의 모습을 보니 이대로 빼기는 싫었다. 재유는 점점 빠르게 얼굴을 움직였다. 반은 우주가 움직이는 거였다.
“하아… 혀도 좀 움직여 줘.”
재유는 점점 숨이 차오르고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그의 말대로 혀를 놀려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혀를 움직이려 애썼다.
“옆으로 누워 봐.”
흥분을 억누른 우주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우주는 입속에서 성기를 빼내고 모로 뉘인 재유의 뒤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 두 다리를 모아 딱 붙여 엉덩이 사이에 제 성기를 들이밀었다. 넣으려는 건 줄 알고 깜짝 놀란 재유가 어안이 벙벙해져선 돌아보려는데, 허벅지 사이로 페니스가 불쑥 솟아올랐다.
“어엇, 이거….”
“금방 끝날 거야, 괜찮지?”
우주는 몸을 더 밀착시켜 처음부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반신의 힘이 둔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주가 밀어붙이는 힘이 감당이 안 돼서 몸이 점점 앞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허벅지에 쓸리는 촉감, 두 개의 음경이 엇박으로 합쳐져 비벼지는 자극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졌다. 고환을 밀고 올라오는 그의 성기는 무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우주가 사선으로 손을 뻗어 젖꼭지를 비틀며 자극하자 정제되지 않은 신음이 흘렀다.
“핫…! 으읏, 거기….”
“재유야, 너무 기분 좋아. 하아….”
농염한 숨소리와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 재유도 두껍고 튼튼한 허벅지를 꼭 잡으며 끈적한 마찰을 음미했다. 재유는 팔을 뒤로 뻗어 우주의 목을 감고 입을 맞추려 고개를 돌렸다. 난잡하게 들썩이는 움직임에 입술이 찾아지진 않았지만 키스하고 싶은 열망으로 입술이 닿는 족족 우주의 얼굴 곳곳을 빨아들였다.
재유의 적극성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주도 입술을 쭉 내밀며 재유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엉망진창인 키스였지만 둘 중 누구도 그만두지 않았다.
“다시 누워 봐.”
우주는 자세를 일으켜 재유를 똑바로 눕혔다.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두 팔로 강하게 속박했다. 탱탱하게 부어오른 페니스를 쑥 집어넣자 허벅지 사이로 단단하게 다물렸다. 우주가 다시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속도가 더 빨라지고 고환들끼리 팽팽하게 밀착되어 자극이 더 세졌다. 엉덩이 사이에 묻어난 젤의 영향으로 미끌거림이 순조로웠다. 재유는 돌덩이 같은 허벅지가 엉덩이에 닿을 때마다 구멍이 움찔대는 것을 느꼈다. 거침없이 치받는 움직임에 정말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일었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바로 코앞에 그의 얼굴이 세세히 보였다. 흥분했을 때 이런 얼굴이구나. 아마 우주 자신도 본 적 없을 얼굴을 재유가 보고 있었다. 저를 향해 애달픈 시선을 고정한 채 흥분을 참지 않는 우주의 낮은 신음이 참을 수 없이 기분 좋았다. 넣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주는 다리를 껴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거칠게 왕복 운동을 해 나갔다. 쉴 새 없이 부딪히는 성기와 엉덩이의 찰박이는 저속한 접촉에 온몸의 피가 그곳에 쏠리고 있었다.
“좋아… 이거 좋아… 응, 응, 흐응, 우주야, 으읏…!”
재유는 또 한 번의 사정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제부터 도대체 몇 번이나 가 버린 건지. 아무리 젊은 나이라지만, 우주와 정사를 나누며 몸이 남아날 수 있을까. 묘한 고민이 생겼다.
배에 정액이 뿌려진 감각이 느껴졌으나 우주는 아직이었다. 사정의 민감함과 무거운 우주의 압박에 끙끙 앓으면서도 재유는 그가 사정할 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우주는 다리를 풀고 두터운 몸으로 재유의 몸을 바짝 덮었다. 팔을 등 뒤로 감싸 단단하게 결속한 뒤 가장 깊은 골에 성기를 딱 붙였다.
재유의 얼굴에 잘게 쪼갠 입맞춤을 쪽쪽이는 키스는 사랑스러웠지만, 곧 하반신을 치받으며 밀어붙이는 허리 짓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재유는 팔을 들어 우주의 목을 꽉 껴안았다. 곧 혀가 섞인 키스가 이어져 서로의 입을 넘나들며 비비고 핥고 빨아 물었다.
가슴에 딱 붙은 우주의 가슴이 벅찬 숨으로 들썩이고 손에 휘감은 등의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 꿈틀거리고 있었다. 재유는 스스로 허리를 쳐올려 우주의 추삽질에 동참했다.
그런 재유를 보는 우주의 눈은 사납고 음험했다. 재유의 어깨를 바스러트릴 듯 꽉 쥐어짜고 자비 없이 퍽퍽 허리를 쳐올렸다.
“이러다… 또 싸겠어, 우주야. 으응, 너 좆나 맛있다.”
“으윽. 흐읏…!”
우주는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엉망으로 찡그리며 사정했다. 틈 없이 맞물린 배 사이에 뜨뜻한 액이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무슨 정신에 그런 상스러운 소리를 입에 담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우주는 더없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우주는 몸을 뭉개 버릴 듯 압착하며 재유의 입속에 뻣뻣하게 발기한 듯한 혀를 들이밀었다. 사정이 끝났음에도 질척이는 키스와 온몸으로 비비적대는 애무는 계속 이어졌다. 삽입하지 못한 아쉬움을 날려 버릴 정도로 황홀한 후희였다.
“하아… 이제 진짜 손가락 들 힘도 없어.”
“진짜 이러기냐? 왜 이렇게 야해 빠졌어?”
“그래서… 별로였어?”
우주가 혀를 차며 요망한 여우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놨다. 제대로 맛보지도 않았으면서 맛을 논하다니. 어쩌겠나. 홀려 줘야지.
“별로기는. 앞으로 더 맛있게 따먹혀 줘야지 별수 있어?”
“으휴… 말을 해도 넌….”
재유는 제가 한 말은 생각도 안 하고 안면을 싹 바꾸며 구박을 해 댔다.
“너 욕하는 거 처음 봤어. 되게 섹시해. 더 해 봐. 응?”
“너도 욕 안 하면서. 그냥 잊어버려.”
“머릿속에 콱 박혀서 못 잊을 것 같은데? 아… 앞날이 걱정이다. 이렇게 정기를 쏙 빼고 내일 너 집에 가면 나 이제 어떡하냐? 여기서 그냥 나랑 살자. 응?”
“말은….”
재유는 그만 장난치고 꽉 누르고 있는 몸이나 어서 떼라는 듯 우주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우주는 티슈로 배에 묻은 흔적을 마무리하고 재유 옆에 찰싹 붙어서 얼굴에 입을 맞춰 댔다. 재유는 키스를 받으며 몽롱한 희열에 취했다. 허공에 시선을 두면서도 얼굴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막상 해 보니 별거 아니네.
두려움보단 좋았던 게 더 많았으니 앞으로 섹스에 대한 거부감은 점점 줄어들 것 같았다. 우주의 공이 컸다. 성격만큼 그는 침대에서 다정하고 사려 깊고 애정이 넘쳤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허벅지 사이에 끼….”
“뭐? 방금 한 거? 왜? 괜찮았어?”
“…그렇긴 한데.”
“그럼 다행이지 뭘.”
동영상 보고 배웠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진짜 기분 좋았는데.
“근데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야? 왜 집에 이런 게 있어?”
재유는 젤과 콘돔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까진 궁금증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아, 그거….”
“응.”
“…….”
가벼운 질문에 의뭉스러운 침묵이 돌아왔다. 재유는 고개를 틀어 우물쭈물하는 우주의 뺨을 만지작대며 “말해 봐.”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좀 찾아봤어. 약국이랑 편의점에서 사다 놓은 거고.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나랑 하려고 준비했다는 거야? 나랑 하게 될 줄 알고?”
우주는 부끄럼을 타는지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며 품을 파고들었다.
“그럼 너 말고 딴 사람 누가 있어? 네가 나랑 할지 안 할지 모르는 상태인데… 진짜 만에 하나라도 너랑 하게 된다면, 안전하게 섹스하는 방법을 미리 알아 둬야 한다고 생각했어.”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놈. 재유는 낮에 봤던 바탕화면 속 제 사진이 떠올랐다.
우주가 계획성이 유난히 좋은 걸까, 아니면 자신이 남들보다 굼뜨고 눈치가 없는 걸까.
재유는 몸을 옆으로 돌려 우주와 마주 누운 채 숱이 무성한 눈썹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툭 불거진 눈썹 뼈에 부드러운 털이 우주의 얼굴에서 특출난 개성을 자랑했다.
“나야말로 아무것도 준비 못 하고 넣어 보자느니 그런 말 해서… 뭐랄까. 큰코다친 기분이야.”
그렇게 말하니 눈썹이 씰룩이며 얼굴이 빨개지는 게 또 귀여웠다. 덩달아 재유도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올랐다.
할 거 다 하고 다 벗은 상태에서도 우리는 부끄러웠다. 재유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스무 살의 수줍음을 그와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다음에 다시 해 보면 되지. 난 오늘 시도해 본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어.”
설렘과 벅참과 뿌듯함과 기대가 섞인 복잡한 얼굴로 우주가 입을 열었다. 재유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 곳곳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는 재유가 얼굴을 가지고 놀게 두었다.
“신기해. 너랑 이런 사이가 됐다는 게.”
“어째서?”
“너 같은 애가 날 좋아해 주니까.”
미간을 더듬던 손에 구겨진 주름이 만져졌다.
“말도 안 돼. 나 같은 애가 뭐? 오히려 내가 고맙지.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좋아한다 말도 못 하고 속앓이만 했던 날이 하루 이틀인 줄 알아?”
“그러니까. 그게 어쩔 땐 신기하단 말이야.”
내 어디가 좋다고. 뭐 잘난 거 하나 없는데. 재유는 진심으로 그게 희한하고 별난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만큼 좋기도 좋았다.
우주가 이마를 재유의 이마에 살짝 부딪치며 가재눈을 뜨고 입을 삐쭉거렸다. 저야말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재유는 의심의 시선을 웃음으로 받아치며 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런 게 아니라 기뻐서. 그렇게 좋아해 주는 게.”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는데, 그런 말까지 들으면 나 너무 설렌단 말이야.”
“정말… 가끔 보면 네 그 솔직한 모습이 진짜. 멋있어.”
“정말? 그럼 앞으로도 자주 서울 놀러 와. 그럼 돼.”
“응. 알았어.”
우주는 알싸하게 가슴이 시큰거렸다. 사람의 감정을 이마에 써 붙일 수 있다면, 자신의 이마엔 ‘행복’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럼 뽀뽀.”
재유가 볼에 입을 맞췄는데도 우주는 계속 “한 번 더.”를 외쳤다. 또 시작된 무한 뽀뽀 요구에 재유는 킥킥 웃어 대며 연인의 바람대로 지칠 때까지 입을 맞춰 줬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다시 침대에 들었다.
오늘은 모든 걸 잊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의 병도, 가난한 생활도, 고단한 교대근무도 아득히 먼일처럼 느껴졌다. 떨어져 지내는 연인에 대한 불안감도 모조리 떨쳐낸 채 오직 우주의 따뜻한 품에서 두근대는 심장 소리만 느낄 수 있었다.
***
아침 일찍 우주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재유는 청소와 빨래를 해 놓고 한숨 잔 후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공장에 출근했다.
다시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지만, 한시도 우주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 헤어졌는데도 또 보고 싶었다. 우주와 사랑을 나누었던 순간들을 되새기며 혼자 웃고, 설레고, 민망해했다.
재유는 지금 입고 있는 연회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확인했다. 모두 유명 브랜드였다.
우주는 재유가 갈 때가 다 되어서야 날개옷을 내주는 나무꾼의 표정으로 옷들을 꺼내 놓았다. 재유가 가는 건 싫은데, 재유 주려고 사 놓은 옷들은 입혀 보고 싶었나 보았다.
하긴. 서울 집에 올 걸 대비해서 미리 야한 물품들까지 사다 놨는데 옷이라고 안 사 뒀을까. 그랬으면서 샤워하고 나온 자신에게 제 속옷과 헐렁한 옷들을 내미는 뻔뻔함까지. 아주 용의주도하고 음흉한 놈이었다.
[지금 막 공장에 왔어.]
[저녁은 먹었어?]
[응. 넌?]
[지난 이틀 밤을 생각하면 배 하나두 안 고파!]
[어휴 또 그런다. 어서 저녁 먹고 공부해!]
[알았엉~ 쉬는 시간에 전화해^^ 알았지?]
재유는 통근 버스 안에서 서투른 손짓으로 문자를 찍어 보냈다. 이제 평범하게 우주와 문자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다. 물론 음성메시지를 듣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폴더를 닫으면 우주가 사 준 커플 핸드폰 줄이 핸드폰 길이와 딱 떨어지게 대롱거렸다. 재유는 겹쳐진 하트 두 개를 만지작거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토요일이 왔으면. 이번 주엔 무조건 온다고 했으니 벌써부터 뭘 하며 보낼지를 두근거리며 상상했다.
“야, 한재유.”
버스에서 내려 공장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오늘 출근 전에 잠깐 얘기하자고 했었지. 장인애는 이름만 부르고는 공장 뒤편으로 쌩하니 가 버렸다. 시간을 보니 아직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하는 수 없이 재유도 뒤따라갔다.
“내가 좀 늦었지.”
“나랑 약속한 거 잊어버렸어?”
“미안. 정신이 좀 없어서. 근데 무슨 일이야?”
장인애는 입을 꾹 닫은 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골이 보일 만큼 깊게 파진 흰색 브이넥 니트에 짧은 청치마, 빨간색 굽 높은 샌들을 신은 발톱엔 역시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긴 머리를 정수리에 틀어 올려 언뜻 보면 재유보다 키가 더 커 보였다. 얼굴의 화장은 연했지만, 눈매만큼은 날카롭게 보였다. 재유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손에 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
“저… 이제 옷 갈아입고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도 말이 없었다. 장인애와 이렇게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처음인가?
사실 학교에서 장인애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다. 같은 반이 된 적도 없고, 공장에서도 회식 외엔 별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낯을 가리는 재유에게 동기들이 몇 번 술자리를 권한 적이 있었지만, 한 번도 나가지 않아 별로 친한 동기도 없다.
“…나, 너 쭉 좋아했었거든?”
막상 입을 떼자 장인애는 대담해졌다. 허리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사선으로 돌리고 재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물음을 던졌으니 빨리 답을 내놓으라는 듯이.
장인애의 화려한 옷차림새와 대조적으로 쩔쩔매며 당황한 재유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게 무슨….”
“나 너 좋아한다고. 넌 어때? 나 별로야?”
“그게 아니라… 좀 놀라서.”
“그럼 좋아?”
“…….”
“나랑 사귈래?”
머리로 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재유는 사귀자는 말이 나오자 정신을 퍼뜩 차렸다.
할 말이라는 게 이렇게 성의 없는 고백이라니. 재유는 어이가 없어 새된 한숨이 나왔다.
“아니. 미안한데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사람이랑 사귀고 있고.”
“그래? 여친?”
“…….”
여친은 아니지만 사실대로 말해 줄 생각도 없었다. 우주의 집에서 전화 받을 때까지만 해도 공장에 관련된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얘는 나에 대해 뭘 알고서 좋아한다 말하는 걸까.
더 할 말이 없어진 재유가 공장 건물을 슥 보며 재촉했다.
“암튼 미안해. 출근 시간 다 됐어. 들어가자.”
“…너 먼저 가. 나 담배 좀 피고.”
장인애는 고백을 거절 받고도 표정에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재유는 얼른 돌아서서 공장을 향해 뛰듯이 걸어갔다. 벌써들 근무 준비를 하는지 탈의실이 한산했다. 재빨리 출근표를 찍고 옷을 갈아입은 후 작업장에 들어섰다.
오늘은 자재들을 받는 날이라 낮에 운송되어 쌓여 있는 박스들을 해체해서 재료들을 분류해야 했다. 벌써 몇몇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재유도 얼른 달려들어 일을 시작했다.
“새꺄, 왜 이렇게 늦었냐?”
“아, 뭣 좀 하느라고.”
실고 출신의 동기 녀석 하나가 목장갑을 건네주며 물었다. 입은 걸었지만, 성격은 활달하고 밝은 친구였다. 가끔 말 걸어주고, 쉬는 시간엔 이따금 캔커피를 홀짝이며 잡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하긴 뭘 해? 장인애랑 노가리 까더구만.”
“…봤어?”
“왜? 걔가 뭐래디? 함 하자든?”
“뭐? 아니야.”
재유는 숨을 헛삼킬 정도로 펄쩍 뛰었다.
“근데 뭐 하러 너 보러 여기까지 왔대냐? 걔 오늘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그랬어? 몰라.”
“걔 조심해. 인문계 다니면서 맨날 울 학교 양아치 새끼들이랑 폭주 뛰던 애야.”
“…별말 안 했어.”
재유는 왠지 장인애의 뒷담을 자기가 하는 것 같아 기분이 께름칙했다. 그렇다고 장인애가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고백하는 태도가 석연치 않았고, 차였는데도 덤덤해 보였다. 원래 그런 성격인가? 날 좋아하는 게 맞는 건가? 의아한 점이 많았지만, 깊게 알아볼 생각 따윈 없었다. 오히려 되도록 안 마주치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주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괜히 신경만 쓰일 테니까. 앞으로 장인애의 얼굴을 보는 게 민망해지겠지만, 생각을 털어 버리려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2000년 7월.
우주를 매일같이 만나는 날이 이어졌다. 대학교 첫 여름방학을 맞아 아예 본가에 눌러살고 있는 그는 2교대 스케줄에 맞춰 재유를 차로 공장에 데려다주고, 퇴근 시간엔 늘 공장 앞에서 기다려 2~3시간씩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집에 데려다주었다.
재유는 말로는 피곤하니 매일같이 올 필요 없다고 했지만, 자신에게 정성을 쏟는 우주가 예쁘기 그지없었다. 우주와 함께하는 출퇴근 시간이 너무 즐겁고 기대돼서 공장에 다니는 게 신바람이 날 정도였다.
하루종일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고, 퇴근 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왔어도 잠들기 전에 짧으면 30분에서 1시간가량을 통화하기 일쑤였다.
매일 얼굴을 봐도 할 말은 차고 넘쳤다. 그날그날 공장에서 있었던 일, 우주가 봤던 영화나 사진 이야기, 서로에게 서운했던 점이나 바라는 점, 앞으로 둘이서 함께 하고픈 일 등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다.
이런 게 바로 연애라는 건가. 딱 남들 하는 만큼 요란 떨며 평범하고 순탄하게 여름이 흘러갔다.
재유는 오늘도 야간 근무를 마치자마자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공장 앞이야. 빨리 와!]
밤새 일하고 다리가 뻐근한데도 뜀걸음으로 작업장을 벗어났다. 슬슬 주간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저리 길을 비켜 좁은 통로를 지나 문에 이르자 인애와 딱 마주쳐 버렸다.
눈매가 여전히 무뚝뚝하고 매서웠다. 오늘은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런지 인상이 더 거칠어 보였다. 재유는 눈을 피하고 인애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인애는 재유에게 시선을 꽂은 채 느릿느릿 지나갔다.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고백을 받은 후 종종 마주쳤지만, 두어 번 업무에 필요한 말을 한 것이 전부였다. 재유는 인애가 자신에게 더 할 말이 있다고 느꼈지만, 왠지 불편해져서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너 이 새끼, 연애하지?”
실고 출신 동기가 뒤에서 거칠게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깜짝 놀란 재유는 어깨동무를 벗어나려 몸을 웅크렸다.
“아냐. 무슨 소리야.”
“뻥 까네. 맨날 핸드폰 보고 쳐 웃으면서.”
작은 실랑이가 몇몇 직원들의 이목을 끈 모양이었다. 그중엔 작업장에 들어간 줄 알았던 인애도 있었다.
“그냥, 친구랑 문자 한 거야.”
“채팅으로 여자 하나 낚은 거 아냐?”
“뭐? 아니.”
“씨발놈들, 연애는 염병. 지랄까고 있네.”
한 살 많은 덩치 큰 직원이 쏘아보며 굳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재유는 당황해서 얼른 탈의실로 들어가려는데, 동기가 다시 어깨동무를 하며 소곤거렸다.
“저 새끼, 영장 나와서 그래. 다음 달에 간댄다. 속이 다 시원하네.”
“벌써 세 명 째네.”
“니미, 나도 언제 나올지 몰라. 짜증 난다 진짜. 넌 좋겠다? 여기서 일하면서 군대 까는 거 아냐.”
“…….”
“군대 가기 전에 후회 없이 놀다 가야 되는데. 여자 있으면 새끼 좀 쳐. 너만 재미 보지 말고.”
“…그런 거 없어.”
동기는 탈의실에 들어가서도 한참 푸념을 늘어놓더니 다른 직원이 부르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갔다.
재유는 영장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침울해졌다. 처음엔 영장이 나오자마자 생계 곤란으로 면제 신청을 했었는데 거부됐다. 천만다행으로 산업기능요원 판정을 받았고 지금 다니는 공장이 병역특례업체였기에 얘기가 잘돼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이곳에서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었다.
당장 다음 달 초에 훈련소를 다녀와야 하지만, 그 이후로 재유의 일상은 군대와 상관없이 변함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주는 아니었다. 또래의 직원들처럼 영장이 두려운 처지였다. 이미 학업으로 한 번 연기 신청을 해 뒀다고 했다. 우주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떨어져 지내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외로워졌다.
재유는 옷을 갈아입고 나서 항상 우주가 차를 대고 기다리는 골목으로 갔다. 조수석에 타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우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익숙하게 손깍지를 끼며 손등에 뽀뽀를 하고 차가운 생수를 건넸다.
“수고했어. 밥 먹으러 어디 갈까?”
우주는 깍지 낀 채 핸들을 돌려 차를 출발시키고 재유의 말을 기다렸다.
“일 힘들었어? 기운 없어 보여.”
“아무거나 괜찮아.”
“그럼 부대찌개랑 만두 어때? 3번 국도에 괜찮은 집 있대서. 거기 아침 장사도 한대.”
“응.”
“무슨 일 있었어?”
“…회사에서 하나둘 영장 나오기 시작했거든. 너도 얼마 전에 신검 받았잖아. 네가 언제 군대 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좀 우울하네.”
아직 대학생 신분이라 내년에 가게 되겠지만, 한창 달달하게 연애할 시기에 군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돈 많은 집들에선 없는 병도 만들어서 아들 군대 빼준다고들 하던데 우주네 집은 안 그런 모양이었다. 장남인 형도 특전사로 자원했다고 들었고 우주의 아버지는 그걸 아주 자랑스러워한다고 했다. 우주가 병역 비리로 군대를 빼는 건 영 모양 빠지긴 해도, 26개월은 너무 길었다.
“걱정 마. 편지도 전화도 자주 하면 되니까. 그리고 넌 공장에 계속 다닐 거잖아. 얼마나 다행이야. 대단해 정말.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그러니까 잘 보인 거지. 그리고 네가 면회도 자주 오면 되잖아. 나도 휴가 올 때마다 너랑 지내면 되고. 떨어져 있어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을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러엄, 당연하지. 어차피 갈 거, 너무 걱정하지 마. 잘 견뎌 낼 거야.”
우주는 재유의 볼을 톡톡 치며 처진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다. 이미 군대에 갈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 단단해 보였다. 군대 얘기만 나오면 우울해지는 자기 때문인 건 알고 있었다.
남들 다 가는 거지만 내 애인만은 안 갔으면 좋겠고, 가더라도 사고 없이 건강하게 나왔으면 좋겠고, 전역하고서도 지금 이 사랑이 변함없었으면 좋겠고…. 재유는 벌써부터 고무신 신고 군대 간 애인을 기다리며 수절하는 심정이었다.
“너 쉬는 날 목금이랬지?”
“어. 왜?”
“나랑 어디 좀 가자.”
우주가 백미러를 힐끗 보며 핸들을 돌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어느덧 차는 공장이 있는 동네를 벗어나 국도로 진입했다.
“어디?”
“계곡에 놀러. 오랜만에 이틀 휴일인데, 우리도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야지.”
“이렇게 갑자기? 캠핑 가자고? 준비할 시간도 없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계곡 휴가라는 말에 재유 얼굴엔 언뜻 희색이 보였다. 우주는 다시 손깍지를 끼며 슬쩍 웃었다.
“내가 다 준비할 테니까 넌 몸만 와서 놀면 돼.”
목요일은 당장 내일모레였다. 야간 근무 두 번을 해야 목요일이 왔다. 우주는 아침에 출발하자며 번갯불에 콩을 구우려 했다.
“너 담 달에 훈련소 가면 여름방학 절반은 너 없이 보내야 되는데 이대로 이 여름을 날릴 순 없지. 그동안 열심히 일했잖아. 쉬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맨날 가는 데만 가지 말고, 경치 좋은 데서 편하게 놀다 오자.”
“그렇긴 한데….”
“같이 갈 거지?”
“당연하지. 난 그런 거 생각도 못 했는데. 고마워.”
“밤에 안 재울 테니까 각오나 단단히 해.”
“너… 그러려고 여행 가자 그러는 거지?”
재유는 손을 뿌리치며 눈을 흘기는데, 우주는 껄껄 웃으면서 음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런 엉큼한 놈. 본가로 내려온 후에도 재유가 쉬는 날만 되면 집에 보내지 않으려고 수작을 부렸었는데 아예 2박 3일 여행을 거하게 세워 버렸다.
재유는 코웃음을 치다가도 얼굴이 붉어지는 걸 숨기려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국도의 푸르른 풍경이 유독 포근하게 느껴졌다.
***
야간 근무를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재유는 짐 싸기에 여념이 없었다. 틈틈이 싸 둔 가방에 빠진 게 없나 확인하는 거였다.
오늘은 우주가 공장으로 오지 않고 집으로 데리러 오기로 했다. 새벽까지만 해도 졸음과 싸우느라 선 채로 꾸벅꾸벅 졸기도 했는데, 지금은 또렷이 정신이 들었다.
“아침 안 먹고 가도 돼?”
“가면서 간단하게 먹을 거니까 괜찮아요.”
엄마가 옆에서 거들어 주며 재유가 깜빡한 소소한 것들을 챙겨 주셨다. 요즘 들어 여름 감기에 걸린 엄마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볼 때마다 기침을 심하게 하는가 하면 한여름인데도 선풍기조차 켜지 않고 가을 옷을 입고 있었다.
재유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병원도 꾸준히 다니고 약도 꼬박꼬박 먹는다고 하니 별일은 없을 거라 애써 자위했다. 그보다 우주와 함께 보내는 첫 여름휴가라는 설렘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우주가 잘해 주니?”
“네?”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너도 잘해 주고.”
“네?”
“뭘 자꾸 네네 해. 그냥 같이 다니는 거 보기 좋다고.”
“…네.”
엄마가 뭘 알고 그러시나? 아님 내가 그냥 찔려서 과민반응을 한 건가. 재유는 속으로 뜨끔했어도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약 꼬박꼬박 드시고요, 돌아오는 날에 병원 가는 거, 저랑 같이 가요.”
“엄마 혼자서도 잘하니까 느긋하게 놀다 와. 좋은 구경도 실컷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알았지?”
재유는 그제서야 엄마와 단둘이 살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여행을 간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도 놀러 다니고 싶으실 텐데. 훈련소에 다녀오면 엄마와 가까운 절에 단풍 구경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녀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걱정 말고 잘 다녀와.”
[도착했어. 어서 나와^^]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재유가 밖으로 나왔다. 우주가 늘 차를 대놓는 오거리 치과 앞엔 검은색 SUV가 주차되어 있었다. 아직 오지 않았나. 핸드폰을 확인하며 시장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SUV가 경적을 울렸다.
“재유야, 어서 타.”
재유가 조수석에 올라 뒷좌석에 짐을 두고 안전벨트를 매자 우주는 바로 출발했다.
“차 뭐야? 바꾼 거야?”
“아니? 형 곧 전역하는데 엄마가 미리 뽑아 둔 거 슬쩍했지.”
“그래도 돼?”
“괜찮아. 세차해 놓으면 모를걸.”
“너희 형 화낼지도 모르잖아.”
“우리 형은 안 그래. 걱정 마.”
재유는 우주의 형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얘기도 많이 듣고 사진으로 본 적도 있어서 낯설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우주가 많이 의지하고 좋아하는 형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사이좋은 형제라도 새 차를 멋대로 훔쳐 타도 되나? 재유는 괜히 제가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나중에 우주 형을 만나게 된다면 좀 찔릴 것 같았다.
“근데 짐이 거의 없네? 트렁크에 다 실었어? 그래서 큰 차 타고 온 거구나.”
짐 실을 때 보니 뒷좌석엔 옷 가방으로 보이는 스포츠백 하나뿐이었다.
“응? 저게 다야.”
“캠핑이라며. 텐트 같은 거 없어도 돼?”
“내가 캠핑이랬나? 아닌데.”
“그럼 어디서 자? 계곡 간다고 하지 않았어?”
“별장 있어.”
“별장?”
“응. 어렸을 때부터 엄마랑 형이랑 자주 갔었는데 요즘은 안 간 지 꽤 됐어. 엄마가 형 전역하면 한번 가자는 거 싫다고 했지. 너랑 가고 싶어서.”
“왜… 가족들이랑 같이 가지.”
“너랑 먼저 가고 또 가면 돼.”
우주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운전을 했다. 콧노래도 부르는 걸 보니 즐거워 보였다. 재유도 즐거웠지만, 우주네 집의 재력을 짐작할 만한 화두나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문득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지역 최고 부잣집에서 이렇게 빠지는 데 없이 잘난 아들이, 사실은 그 집 공장에 다니는 가난한 고졸 남자와 사귄다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를 만나고 좋은 일투성이였지만, 이렇게 마냥 행복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둘 사이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실체를 알 수 없고, 그것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재유의 가슴 한구석에 존재했다.
“2시간쯤 걸린댔나?”
“응. 피곤하지? 좀 자도 돼.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아니. 졸리진 않는데….”
“왜? 할 말 있어?”
“혹시 가족 중에 별장 간 거 알고 캐물으면 어떡해?”
“왜? 걱정돼?”
“조금….”
“그럴 거 없어, 재유야. 울 엄마도 내가 너랑 친한 거 아는데, 친구끼리 여행 가는 줄 아실 거야.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여행 기분을 못 내면 안 되지.”
“그래… 그렇지.”
“이왕 떠난 거 재밌게 놀다 오자. 응?”
우주는 여전히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재유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얼굴이 우주의 가슴 부근에 닿자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재유는 휘감긴 우주의 팔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운전하는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지웠다. 시선을 느꼈는지 우주가 틈틈이 머리와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거기 가면 낚시도 하고, 고기도 구워 먹고, 물놀이도 실컷 하자. 밤엔 별도 많아서 하늘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금방 가.”
“…너무 근사하겠다. 요즘 별 본 적이 없어서 빨리 보고 싶어.”
재유는 우주의 어깨에 풀썩 머리를 기댔다. 이제야 여행 기분이 다시 살아났다.
이것저것 불안한 것투성이지만, 어차피 먼 미래는 보지 못할 스무 살일 뿐이었다. 피는 끓어 넘치고 체력은 인생 최고조이며 사랑하는 마음 또한 절절하게 솟구쳐 올랐다. 이런저런 흥분과 감정에 주체할 수 없이 내몰리면서도 결국엔 휘둘리고 마는 스무 살의 여름이 푸르러 갔다.
***
별장은 산길을 한참 돌고 돌아서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외진 곳에 있었다. 집을 짓기 위한 트럭들이 드나들기도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구불구불한 좁은 길과 숨 막힐 듯한 초록에 둘러싸인 곳이었는데, 그 끝에 다다르니 의외로 멀쩡해 보이는 2층 목조주택이 나왔다. 도대체 이 집은 어떻게 지어진 걸까.
도착하자마자 우주가 두꺼비집을 찾아 전기를 올리고 수도를 열었다. 재유는 차에서 짐을 꺼내 내부로 들어갔다.
몇 년간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공기가 탁했다. 환기를 시키고 대충 먼지를 털어내자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구들은 오래돼 보였지만 있을 건 다 있었고, 거실 중앙엔 벽난로도 보였다.
주방에는 식기부터 조리도구, 세제나 수세미 같은 세세한 살림살이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 당장 생활을 해도 될 정도였다.
두 사람은 오는 길에 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짐을 풀었다. 주방에서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바로 계곡으로 향했다.
우주는 곧바로 웃통을 벗어 던지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재유는 평평한 곳에 돗자리를 깐 뒤 수박과 참외를 담가 놓을 적당한 곳을 물색했다.
“우주야. 선크림 바르고 가.”
“우와. 엄청 시원해. 너도 빨리 들어와.”
“살 탄다니까? 어서 바르고 가.”
“좀 이따가. 물 좀 적시고.”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물소리 때문에 제법 큰 소리로 외쳐야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재유는 과일들이 떠내려가지 않게 돌을 빈틈없이 괴어 두었다. 계곡물이 손에 닿자마자 과연 온몸이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재유야, 빨리 와. 이쪽으로.”
“앗 차거…. 잠깐만… 흐으으….”
우주가 다짜고짜 재유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깊지 않아?”
“아니? 전혀. 열두 살 때 처음 왔을 때도 내 키를 넘진 않았어.”
재유는 우주의 손을 의지한 채 조심조심 발을 디뎌 가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발바닥에 흙모래와 작은 돌들이 자글자글하게 밟혔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재유도 부모님과 함께 계곡엘 간 적이 있었다. 아빠가 끌어 주는 튜브를 타며 헤엄도 치고 엄마가 끓여 주는 매운탕을 입천장 데도록 건져 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10년 전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재유의 가족은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사는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여름엔 계곡 휴가에, 겨울엔 썰매장 나들이에, 크리스마스엔 아빠가 사 왔을 게 분명한 산타의 선물까지.
재유는 아침에 기침을 내뱉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번엔 근처 바닷가에라도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도 놀이도 하고 발을 담가도 보고 백사장도 걸어야지.
우주가 뒤로 벌러덩 자빠지더니 팔을 휘저어 가며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재유도 팔에 물을 끼얹으며 서서히 물 온도에 적응했다.
폭이 좁은 계곡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나뭇잎에 가려져 햇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곳이었다. 시원한 물살이 쏟아져 내리는 작은 폭포들도 있었고, 수영을 할 수 있을 만한 적당한 크기의 웅덩이도 있었다. 이제껏 가 봤던 계곡들 중 가장 멋진 풍경이었다.
재유는 판판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물속에서 발을 굴렀다. 다리를 물 위로 끌어 올리면 쪼르륵 살을 타고 흐르는 물의 감촉이 재미있어 몇 번이고 반복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면 우유도 데리고 오라고 할걸. 얕은 물에서 종종거리며 개헤엄을 치는 우유가 눈에 선해 조금 아쉬웠다.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있다면 그땐 우유도 데려와야지.
시원한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는 계곡 한가운데는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동안 공장의 기계 소음에 고통받았던 고막이 상쾌하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물 위에 눈 감은 채 둥실둥실 떠 있는 우주를 보는 것도 즐겁기만 했다.
재유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계곡의 초록과 연인인 우주를 눈에 담으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끽했다.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반쯤 잠긴 손등을 간질이는 물살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들리더니 허벅지에 살결이 닿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우주가 어느새 곁에 앉아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여기 물고기도 있어.”
“그래?”
우주의 말대로 물속을 들여다보니 바위 틈새로 송사리들이 헤엄치는 게 보였다. 바위에 달라붙은 새카만 고둥도 보였다. 재유는 우주와 머리를 푹 숙이고 작은 물고기의 빠릿한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한동안 물속을 쳐다보기만 해도 퍽 재미가 있었다. 고둥을 딸까도 했지만 이미 먹을 걸 많이 사 왔으니 돌아가는 날 따서 집에 가져가 엄마에게 삶아 줘야겠다 생각했다.
두 사람은 물에 담가 두었던 수박을 잘라 먹고 참외도 깎아 먹었다. 시원하고 달았다. 우주는 혼자서 수박 반 통을 해치웠다.
다시 물에 들어가자는 그의 제안에 재유도 웃통을 벗고 본격적인 물놀이에 나섰다. 물웅덩이 끝에서 끝까지 왔다 갔다 하며 수영도 하고, 절대 봐주지 않는 치열한 물싸움도 했다. 우주는 비탈을 올라 뾰족하게 솟은 바위 위에서 다이빙도 했는데 재유는 제법 높은 다이빙대에 겁이 나서 끝내 바위를 오르진 않았다.
“어때. 기분 좋지?”
“응. 여기 정말 좋다. 너무 좋아!”
“거봐. 오길 잘했지?”
우주는 재유가 있는 바윗가까지 헤엄을 치며 다가와 뻐기듯 말했다.
“맞어. 잘했어, 정말 좋아.”
재유가 들뜬 기분에 못 이겨 물속으로 뛰어들어 우주를 와락 껴안았다. 우주는 순간적으로 몸이 기울어졌지만, 간신히 바위 하나를 붙잡아 품속에 뛰어들어 온 재유를 감당할 수 있었다.
“오 뭐야? 유혹하는 거야?”
“응. 키스해 줘.”
우주는 먼저 키스해 달라는 재유의 말에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포갰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우주의 목에 팔을 두르자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우주는 한 팔로 재유를 껴안은 채 바위를 짚어 몸을 일으켰다. 우주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 곳곳을 타고 흘러 가슴까지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서울 집에서 첫날밤을 보낸 이후로 여러 번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적이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재유는 지금 우주보다 적극적이었다. 우주의 목을 끌어안은 채 혀로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가 쇄골을 핥았다. 그것만 했는데도 아래가 빳빳해졌다.
“여기 아무도 안 오는 거 맞지?”
“아무도. 우리 둘뿐이야.”
달아오른 우주는 젖은 머리를 슥 밀어 올리고는 재유의 손을 잡고 조금 위쪽으로 올라갔다. 물이 얕아져 허벅지 위로 넘실거렸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들은 아치 모양처럼 계곡 안을 감싸고 있었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비치는 햇살이 우주의 몸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딴 세상 같아.”
“그러게. 나도 믿기지가 않네. 너랑 이런 데 왔다는 게.”
“재유야. 우리, 매년 여기에 오자. 겨울에도 다시 오자.”
“좋아. 나도 또 오고 싶어.”
두 사람은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서로의 것을 만지며 뜨겁게 키스했다. 우주가 만져 주는 손길이 너무나 뜨겁고 기분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주는 몸을 조금 숙여 목덜미와 가슴팍에 쪽쪽 입을 맞춘 뒤 재유의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뒤에서 손으로 턱을 감싼 채 어깨에 입술을 묻고 살살 문질렀다.
“재유야. 보여 줘. 여기서.”
“…….”
우주가 재유의 바지춤을 속옷과 함께 끌어 내렸다. 재유도 거부하지 않고 다리를 들어 협조했다. 물속에서 건져 올린 자신의 벗은 옷가지를 뺏어 앞에 있는 바위에 얹어 두고 우주의 손길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이쪽에 발 딛고 올라가서 저 앞에 손 짚어 봐.”
“뭐?”
“어서.”
우주는 주춤거리는 재유의 손과 발을 이끌어 바위 위에 자세를 잡아 주었다. 손까지 얹고 나자 재유는 우주의 바로 코앞에서 4족 보행하는 짐승처럼 엎드려 있었다. 밖에서는 물론 실내에서도 해 본 적 없는 자세였다. 고개를 숙이자 제 다리 사이에 우주의 가슴팍과 배가 보였다. 우주의 얼굴은 엉덩이 사이 바로 앞에 맞닿아 있었다.
양 허벅지를 감싼 우주의 팔이 부드럽게 다리를 쓸어내렸다. 우주가 엉덩이 사이로 코를 들이밀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재유의 모든 것이 갖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낮은 신음을 뱉으며 제 얼굴로 회음과 엉덩이를 비벼 댔다. 무릎이 오므라들고 머리로 피가 몰렸다.
“으으. 안 씻어서 싫어.”
“괜찮아. 지금 이대로가 딱 좋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엉덩이에 입술이 닿았다. 흡입하듯 살을 빨아들이고 이로 깨물며 촉촉 입을 맞췄다. 회음과 허벅지 안쪽까지 닿은 혀끝은 지치지도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짙은 애무에 비틀거리며 무릎이 좁아질 땐 허벅지를 감은 팔이 단단하게 지탱해 주었다.
“재유야, 여기에 다리 올려 봐.”
“하… 너무 챙피해.”
“또 그러네. 차고 넘치게 예쁘니까 걱정 마.”
우주는 재유가 잘 버틸 수 있도록 한쪽 발목을 잡아 조금 더 높이 위치한 바위에 놓아두었다. 그의 앞에 하체가 활짝 벌려져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러운 자세가 되었다. 아마 엉덩이 사이의 그곳이 훤히 보일 것이었다.
재유는 수치심에 얼굴이 활활 타올랐다. 그나마 우주가 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미약한 거부의 표시로 엉덩이를 내리고 다리를 오므리자 물에 젖은 손이 항아리를 떠받들 듯 묵직하게 제자리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환한 데서 보니까 진짜 미안하네. 이렇게 작은데….”
우주는 이런 작은 구멍에 이런 짓 저런 짓을 해 놓고는 별로 미안하지도 않은 투로 잔잔하게 말했다. 물소리에 하마터면 묻힐 뻔한 작은 목소리였다. “그럼 앞으론 안 하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두 볼기짝에 물 젖은 손이 착 감겨들었다.
“그러니까 앞으론 더 열심히 풀어 줘야겠단 소리지.”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살을 터트릴 듯 맹렬하게 쥐어짰다. 옆으로 갈라지고 위아래로 뒤틀리고 안쪽으로 모아지는 엉덩이 살 때문에 속에 파묻힌 구멍이 숨 쉬듯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뒤에 대고 말이나 안 했으면 좋겠다. 우주는 엉덩이가 인격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만지고 비틀며 허허 웃기도 하고 “진짜 예쁘다.”, “내 꺼 맞지?” 하며 오만 잡소리들을 했다.
어쩌다 구멍이 타이밍 맞춰 움찔거리기라도 하면 “거봐, 얘도 그렇다잖아.” 하며 재유 빼고 둘만의 대화를 하기도 했다. 수치심을 증폭시키는 데 잔재주가 있었다.
재유는 제 다리 사이에서 유치한 짓을 벌이는 우주가 하찮고 어이없었는데, 귀엽기도 해서 짜증이 났다. 이 행위들을 용인하는 자신이 제일 큰 문제 같았다.
“하으… 흑, 으으읏.”
뭉툭한 혀가 촘촘한 주름 위를 진득하게 쓸고 지나갔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우주는 말을 멈추고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딱 붙이고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식었던 차가운 몸이 순식간에 열을 발산했다. 타액을 넉넉하게 내놓아 구멍 주위를 적셔 놓은 우주는 빳빳하게 혀를 펴서 주름을 핥고 입술로 쭙쭙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항문 주위를 잘게 깨물고 잇자국이 난 살을 달래듯 통통한 입술로 부드럽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물소리가 제법 컸는데도 찰박이는 애무 소리는 선명하게 귀에 꽂혀 들었다. 재유는 턱을 쳐들어 나뭇가지를 노려보았다가 고개를 푹 숙였을 땐 어쩔 수 없이 제 다리 사이를 봤다. 단단하게 힘을 받은 성기의 끄트머리에선 말간 물이 방울져서 마른 바위 위를 동그랗게 적셨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야외에서 사지를 구속받는 것도 아닌데 이 민망해 죽을 것만 같은 자세로 애무를 받고 있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우주를 변태라 놀리지도 못하겠다. 하반신은 솔직했다. 사정을 원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중심부로 향하는데 우주의 손이 더 빨랐다.
“으윽. 또, 그렇게 하면 바로, 나온다고 했잖… 흐읏!”
“알아. 빨리 내보내. 보고 싶으니까.”
애널에 딱 붙인 입술이 요사스럽게 움직이고 기둥을 잡은 커다란 손이 귀두를 향해 쭉쭉 밀어 올리자 재유는 더 버티지 못했다.
“흣, 흐으윽…!”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이렇게 빨리 싸 버리다니. 희멀건 액체가 바위 위에 제멋대로 흩뿌려졌다. 사정을 하자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기진맥진해졌다. 우주는 재유의 사정에 기쁜 듯이 헤벌쭉 웃으며 고환을 핥아 댔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예민한 자극에 등허리가 찌릿했다.
“읏! 하지 마. 민감해.”
“우리 애인, 벌써 가 버렸쪄용?”
“하아… 진짜. 놀릴래, 너?”
“아냐, 아냐. 미안. 우리 돗자리로 가자. 너 추워.”
재유는 상체를 세우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경치가 끝내줬다. 재유는 일말의 죄책감에 사정액으로 더럽혀진 바위 위에 흙을 끌어모아 흩뿌렸다.
우주는 재유가 바위를 내려올 수 있게 손을 잡고 조심조심 에스코트했다. 재유의 옷가지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몸으로 나온 재유는 뭍에 닿자마자 돗자리에 몸을 말아 앉았다.
싱글벙글 웃는 우주를 보기 부끄러워 시선을 돌렸다. 우주는 얼굴에 쪽쪽이는 키스를 한바탕 퍼붓고는 재유의 오므린 팔다리를 펴려고 했다. 저는 창피해 죽겠는데 여유롭기만 한 우주에게 반발심이 생겼다. 재유는 우주의 손을 쳐내고 어깨를 밀어 그를 쓰러뜨렸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발라당 누운 자세로 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헤벌렸다.
“…가만히 있어. 내가 벗겨 줄게.”
“진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벗기려니 조금 쑥스러웠다. 이렇게 환한 곳에서 우주 몸을 보기는 재유도 처음이었다.
우주는 양손을 베개 삼아 눕고는 재유가 어떻게 자신을 벗겨 먹을지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입술을 꾹 물어 다문 사이로 피시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 치고는 바지를 내렸는데 속옷 없이 바로 맨살이었다. 재유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우주는 치열을 드러내며 얄밉게 웃었다. 변태가 맞았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니까 더 커 보여.”
바지를 끝까지 벗기고 전시품을 바라보듯 찬찬히 우주의 몸을 뜯어 본 재유가 새삼 감탄했다. 풉, 웃음을 터트린 우주의 얼굴이 벌게졌다.
“네가 민망해하는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재유는 허리 부근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으로 천천히 몸을 쓸어내렸다. 힘을 뺀 손가락들이 가슴과 옆구리, 치골을 간지럽히듯 만져 대자 이미 서 있던 가운데 토막이 점점 힘을 받았다. 어색한 손길이었지만, 재유는 애정을 담아 성심성의껏 만졌다.
재유는 몸을 숙여 우주의 것을 입에 머금고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몇 번 해 보았다고 조금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무리 해도 크기는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이젠 제법 혀를 쓸 줄도 알았고 리듬을 타서 점점 커지게 만들 줄도 알았다.
“나도 하고 싶어. 네 꺼 내 입에 물려 줘.”
우주가 몸을 들어 재유의 하반신을 제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재유는 자신의 허벅지를 순식간에 들어 올린 우주의 힘에 깜짝 놀라 입속이 텅 비어 버렸다. 대신 재유의 성기가 순식간에 우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흣! 또… 살살해.”
“너도 멈추지 마.”
재유는 우주의 손가락이 입구 주위를 만지작거리는 걸 느끼며 다시 눈앞의 커다란 음경을 입에 물었다. 입과 손으로 열심히 해 보려 애썼지만, 아랫도리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손이 자꾸 헛돌았다.
우주의 몸 어느 곳을 만져도 탄탄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녹음이 짙은 은밀한 계곡엔 한낮의 매미가 사방에서 울어 댔고, 두 사람이 아무리 신음을 내어도 웅대한 물소리는 그 모두를 집어삼켰다. 재유는 입과 손을 열심히 움직이며 연인의 절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읏… 나올 것 같아. 으응….”
“나도, 이제… 흐으으…!”
재유의 사정과 동시에 눈앞에 있는 우주의 성기에서도 하얀 액체가 재유의 얼굴로 흩뿌려졌다. 뜨거운 정액이 움찔거리며 계속 뿜어져 나왔다. 오래 참은 건가. 양이 많기도 하지.
사정을 멈춘 듯한 우주의 것을 다시 입에 물고 조금 빨아들이는데, 스르륵 눈이 감겼다. 두 번이나 쌌더니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왜 이렇게 피곤할까 생각해 봤는데 야간 근무하고 바로 오는 바람에 잠을 전혀 못 잤다. 지금 한창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물놀이나 좀 적당히 할걸, 생각하며 재유는 잠에 취해 버렸다.
“재유야. 재유야?”
“…….”
“이러고 자는 거야? 하하하… 내 남자친구 너무하네.”
우주는 엉덩이를 코앞에 들이민 채 제 배 위에 축 늘어진 재유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와중에 성기는 계속 입에 물고 있었다.
우주는 쿡쿡 웃으며 재유를 슬며시 들어 옆으로 눕혔다. 벌어진 입속에선 정액이 흘러나왔다. 정말 미쳤나 보다. 재유는 눈을 뜨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우주가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춘 기억을 마지막으로 재유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
눈을 떠 보니 석양이 산 너머로 가라앉은 늦은 오후였다. 재유는 여기가 어디인지 한참을 떠올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2층에 있는 침실에서 팬티만 입은 채 누워 있었다. 우주는 옆에 없었다. 우주가 여기까지 날 옮겨다 줬나 보았다. 여행 첫날에 거하게 낮잠까지 자 버린 재유는 잠을 깨려고 손바닥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밖에서 퉁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가 커튼을 열자 우주가 앞마당에 있었다.
“우주야, 뭐 해?”
“깼어? 배고프지. 밥 먹자.”
“응. 내려갈게.”
재유는 가방에서 서둘러 옷을 꺼내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나와 보니 우주는 간이테이블과 대형 그릴을 펼쳐 놓고 고기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유도 테이블을 세팅하며 일손을 도왔다.
“미안해. 또 잠들어 버렸네. 놀러 오자마자.”
“네 특기잖아. 중요한 순간에 나 내버려 두고 자는 거.”
우주는 마당 한편에 있는 아궁이에서 달궈놓은 숯을 그릴에 옮겨 담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미안. 화났어?”
“아니, 전혀. 밤새 일하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당연히 이해하지.”
우주는 재유의 어깨를 끌어당겨 볼에 쪽쪽 뽀뽀하고는 귀엽다는 듯이 웃어 주었다.
“고기 올린다? 고기 다 먹은 다음에 고구마도 구워 먹고 라면도 끓여 먹자.”
“그래. 지금 엄청 배고파서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참, 나 맥주 좀 따 줘.”
재유는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건네주고, 자기 것도 하나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 배 속까지 시원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술 마시게? 맥주 쓰다고 안 좋아했잖아.”
“그냥, 여기서 마시는 거면 안 취할 것 같아서.”
“오오. 한재유. 그럼 오늘 밤 술로 찐하게 달려 볼까?”
“많이는 못 마셔.”
우주가 고기를 구워 접시에 담으면 재유는 고기쌈을 그의 입에 넣어 주면서 배를 채워 갔다. 해는 빠르게 졌다. 밤중의 계곡에선 여전히 세찬 물소리가 났고, 간혹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우주 말대로 밤하늘엔 별들이 쏟아질 듯 촘촘히 박혀 있었고, 밤이 깊어지는데도 별빛으로 산중 구석구석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고기며 술이며 먹을 만큼 먹은 두 사람은 테이블을 치우고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제법 캠핑 분위기가 났다. 우주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더 가져와 건네주었다. 벌써 세 캔 째였다.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아득하고 몽환적인 여름밤이었다. 배도 부르고, 별도 아름답고, 우주도 곁에 있으니 행복했다.
우주와 재유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딱 붙어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불꽃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좋은 분위기에 유일한 방해꾼은 모기들이었다. 모기향을 여러 개 피웠어도 모기들은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안 되겠어. 담요 좀 갖고 올게.”
우주는 안에 들어가서 여름 이불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얼굴만 내놓은 채 이불을 둘렀다. 재유는 홀린 듯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살이 끈적이게 달라붙었지만 이마저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더우면 말해. 알았지?”
“응.”
밤이라 기온은 내려갔어도 불 앞에 있으니 몸이 후끈후끈했다. 알맞게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술이 올랐는지 머리도 알딸딸했다.
“…우주야. 넌 왜 날 좋아하게 됐어?”
“잉?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어?”
“응. 말해 줘.”
재유가 이불 안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우주 쪽으로 돌린 채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얼굴 근육이 살짝 풀어지고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모닥불 탓에 뺨은 불그죽죽 달아올랐다.
우주는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왜 좋아하냐는 물음이 가당키나 하냐는 얼굴로 답을 내놨다.
“첫눈에 반했지 뭐.”
“푸흐으… 그게 뭐야.”
“정말이야.”
재유를 바라보는 눈빛은 따스했지만, 목소리는 진지했다. 우주는 재유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느리게 떼고는 말을 이었다.
“난 초등학교 5학년 때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어.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여자애를 좋아해 보려고 노력도 하고 사귀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자꾸 남자 선생님이나 남자 선배들한테 눈길이 갔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척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속 깊은 곳에 담아 두었던 고백이 되돌아왔다. 재유는 몽롱하게 풀린 눈에 힘을 주며 우주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그런데?”
“넌 달랐어. 그전에도 다른 남자애한테 두근거린 적은 있었는데, 널 봤을 때처럼 그렇게 강렬하게 끌리는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거든. 그때 깨달았지. 평범한 척 속이면서 살아갈 순 없겠구나, 하고.”
“나 때문에, 이제 평범하지 않게 된 거야?”
마지막 어절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재유도 남녀 간의 사랑이 ‘평범’이고 ‘보통’이라고 알고 살아왔는데 우주로 인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셈이었다. 우주는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했다.
“내 모습이 아닌데 남들처럼 보이기 위해 꾸미면서 사는 거, 해 본 적 있어?”
재유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눈에서 시선을 돌려 불꽃을 바라봤다.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이 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우주와 사귀고 나서는 특히 더 그랬다. 만날수록 제게서 없던 면모가 새롭게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보고 싶어 가슴이 저린 느낌도, 뺏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질투도 다 처음이었다. 앞으론 또 자기가 어떻게 달라질까. 알 수 없었다.
“난 못 하겠더라. 그럼 너한테 고백도 못 했을 거고, 우린 졸업과 동시에 연이 끊겨서 각자의 길을 갔겠지. 근데 그걸 상상하면 너무 무서워져.”
“…….”
“자신을 속여 가면서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면 행복할까? 눈앞에 펼쳐진 반듯한 길 말고, 그 바깥에 있는 험한 길이라도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걸 아는데. 다시는 원래 있던 길로 되돌아갈 순 없을 거야. 가고 싶지도 않고.”
우주의 얼굴은 다정하고 목소리는 부드러워 자꾸만 기대고 싶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고 만날 때마다 행복하다고 해도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순탄치 않았다.
사는 곳도, 생활도 다르고 군대 때문에 2년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 우주는 나중에 같이 살자는 말을 습관처럼 하지만 그 ‘나중’이 오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는 미지수였다. 스무 살, 딱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약속이자 바람이었다. 재유는 쓸쓸한 눈을 하고서 우주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네가 내 맘을 받아 주고 지금 이렇게 서로 사랑하게 된 게 정말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 옆에 있어 줘. 이젠 네가 없는 미래는 상상도 못 하겠으니까.”
“넌… 왜 그렇게 날 좋아해…. 난 잘난 것도,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는 뭣도 아닌….”
우주가 목을 끌어당겨 입술로 재유의 말을 덮었다. 입술 전체를 머금어 부드럽게 빨아당겼고 촉촉 작은 입맞춤이 잠시간 이어졌다.
“그렇게 말하지 마. 넌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나한텐 분에 넘치는 사람이야. 그리고 네가 왜 잘난 게 없어? 마음씨도 착하고 예쁘긴 또 얼마나 예쁜데. 그리고 네 손을 거치면 요리든 바느질이든 그림이든, 뭐든지 뚝딱이잖아.”
우주는 모닥불을 빤히 응시하며 느린 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은 힘든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재유는 이불 속에서 우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목덜미에 머리를 괴고 두툼한 허리를 단단히 끌어당기자 우주가 재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난 이미 너한테 많이 받았어. 오히려… 내가 네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지.”
우주는 팔 간격을 벌려 몸을 떨어뜨리고 재유의 턱을 들어 자기를 보게 했다. 미간을 찡그린 그가 낮게 을렀다.
“뭐? 그런 생각 절대 하지 마. 네가 저번에 그랬지? 사람들한테 우리 사이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좀 더 나이를 먹고 자립할 수 있게 되면, 부모님께도 말씀드리고 당당하게 널 소개시킬 거야.”
“…말씀드린다고?”
“당연하지. 너랑 평생 함께 있을 거니까. 물론 반대도 심할 거고 비난도 받겠지. 그래도 난 너 포기 안 해. 그러니까 너도 어디 딴 데 갈 생각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
“알았지? 대답해.”
“…응.”
우주는 따뜻하게 웃음 짓더니 이마에서부터 콧대를 지나 입술까지 입을 맞췄다. 두 팔로 재유를 껴안고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재유도 단단한 어깨에 기댄 채 우주와 함께 살아갈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며 조용히 눈물지었다.
여전히 불안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말대로 함께 있기만 하면 뭐든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꽃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예쁘게도 타올랐다. 재유는 이불 속에서 우주의 손을 찾아 쥐고 말했다.
“우주야. 안으로 들어가자.”
***
2층 침실로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둘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입술이 엉키고, 서로의 옷을 거칠게 벗겨 내리며 어서 침대로 가기 위해 애달프고 조급하게 흥분된 숨결을 토해 냈다.
겨우 침대로 풀썩 내려앉아 마주 보고 누운 두 사람은 짙은 키스를 이어 가며 서로의 몸을 더듬어 댔다.
우주가 이제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팬티를 벗겨 내고 엉덩이를 움켜쥐어 자신의 하반신에 밀착시켰다. 키스를 하던 입술은 점점 밑으로 내려가 가슴을 애무했고, 재유를 더 흥분시키기 위해 손으로 계속 옆구리에서 엉덩이를 쓸어 가며 열기를 뿜어냈다. 만지면서 오히려 더 안달 난 것 같았다.
재유는 이미 자신의 성기가 꼿꼿해져 벌써부터 사정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점점 아래로 향하는 우주의 머리를 끌어안고 어서 제 것을 입으로 애무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우주의 입술이 막 배꼽 언저리를 맴돌고 있을 때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떼어 냈다.
“잠깐! 기, 기다려.”
“왜 그래?”
“우주야. 오늘은 정말로 끄, 끝까지 해 보고 싶어.”
우주가 다시 위로 올라와 마주 보고 누워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숨을 가늘게 뱉어내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언제까지고 제대로 된 섹스를 할 수 없을 테니, 오늘만은 용기 내 보고 싶었다.
“괜찮겠어? 무섭잖아.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줄….”
“아니. 오늘 하고 싶어. 꼭.”
그동안은 잠자리를 가져도 손가락으로 잠깐 시도하고, 마지막까지 삽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재유도 하고 싶었지만, 저번처럼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아파서 엉엉 울어 버릴까 봐 무서운 것도 있었다.
반쯤은 술기운과 반쯤은 낯선 여행지에서의 충동이었다. 우주는 새삼 긴장되는지 숨을 참은 상태에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알았어. 아, 같이 씻을까?”
“아냐. 난 1층에서 씻을 거니까, 넌 여기서 씻어. 시간 좀 걸릴지도 몰라. 저… 준비를 좀 해야 되니까.”
“…….”
“뭘 그렇게 놀라. 남자끼리 하는 방법, 나도 찾아봤어.”
“…그래?”
이번엔 우주가 동요했다.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재유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턱짓으로 욕실 문을 가리켰다.
“네가 먼저 씻으러 가 줄래?”
“어어… 알았어. 네가 여기서 씻어. 내가 1층으로 갈게.”
우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재유의 어깨에 입술을 내린 후 방 문을 열고 나갔다. 재유는 방에 딸린 욕실로 가서 세면대에 물을 틀고 거울을 봤다. 역시 얼굴이 홧홧하게 붉어졌다. 드디어 우주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끝이 떨렸다.
***
“재유야. 괜찮아?”
“어… 으읏. 괜찮으니까 계속 해.”
아까 술을 좀 더 마실 걸 그랬나. 재유는 엎드린 상태에서 자신의 몸에 손가락들이 들락거리는 고통을 참고 있었다. 아니, 고통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우주의 손가락은 어떨 때는 무지막지하다가도 한순간에 짜릿한 쾌락을 건드리기도 했다.
우주가 커다란 손으로 재유의 성기를 쥐었다. 이미 애액을 떨어뜨리고 있는 벌어진 틈을 손끝으로 헤집자 입구가 조여졌다.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어디를 어떻게 하면 좋아할지 우주는 점점 자세히 알아가고 있었다. 재유조차 몰랐던 제 몸의 비밀들이 우주 앞에선 낱낱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아읏… 기분 좋아.”
야릇한 말에 탄력 받은 우주가 항문 주위의 예민한 살과 엉덩이를 살짝씩 깨물었다. 손가락이 점점 빨라지자 재유도 하체를 들썩거리며 오롯이 우주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했다.
“우주야. 이제, 해 줘.”
“…….”
우주는 말없이 손가락을 빼고는 제 성기에 콘돔을 씌워 젤을 듬뿍 적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유에게 긴장 풀라는 듯이 다정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장한 눈썹과 벌름거리는 코, 흥분으로 긴장된 숨을 뱉어내는 입술까지.
“얼굴 보고 할래?”
“아니, 그건 좀 이따가. 지금 네 얼굴 보면 부끄러워서 못 할 것 같아.”
“알았어. 아프면 말해. 바로 그만둘 테니까.”
우주는 자신의 성기를 입구 주위에 문질러 대며 서서히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꽤 시간을 들여 조금씩 넓혀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말 성공할 것 같았다.
재유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려 애썼다. 뭉툭한 둔기 같은 것이 뭔가를 집어넣어서는 안 될 신체 부위에 욱여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재유는 아픔에 입이 벌어졌지만 숨을 천천히 내쉬려 애쓰며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아윽. 우, 움직이지 마. 잠깐만… 그대로 있어.”
충분히 길들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좁았다. 재유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익숙해지려는 듯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얼마나 끼우고 있었을까… 우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재유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후, 후우… 우주야. 차라리 한 번에 끝까지 해 봐. 그게 차라리 낫겠어.”
“…괜찮겠어?”
“…응.”
우주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재유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아 천천히, 그러나 단숨에 밀어 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를 몸속에 집어넣은 듯 온몸에 불덩이가 지펴지는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
우주의 몸도 긴장한 상태였지만 전에 들어가 본 적 없는 곳까지 들어갔다는 기쁨에 낮은 신음을 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좋아서 그러는 건지 아파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주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에 제 몸을 겹치고 목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추며 재유를 달랬다. 살끼리 맞닿은 감촉과 진득한 애무에 몸은 잠시 이완되었다. 하지만 상반신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성기의 억센 힘은 쉽사리 고통을 상쇄해 주지 않았다.
배 속이 꽉 찬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원래 이런 게 맞는 건지, 엉덩이가 찢어진 건 아닌지, 뭐가 기분 좋은 건지, 오늘도 이대로 실패하고 마는 것인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가슴과 배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등에 닿은 우주의 가슴 근육에서 애타는 듯한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조금씩… 움직여 볼게.”
우주는 서서히 길들이듯 터놓은 길을 되돌아갔다가 다시 밀고 올라갔다. 발발 떨리는 재유의 하얀 등줄기를 커다란 손이 쓸어내렸다. 정수리에 불꽃이 튀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털이란 털은 바짝 일어서, 대패로 밀면 닭살까지 깎이지 않을까 싶었다.
우주도 삽입 경험이 전무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이렇게 조인다면 아플 만도 한데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그의 손과 입술은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으으. 우주야. 너무, 아파.”
“그만둘까? 난 괜찮은데….”
재유는 턱이 달달 떨리는 고통을 참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머릿속 상상과 현실의 섹스가 다르다는 건 이미 깨달았으니 끝까지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기서 멈추긴 싫었다.
“아냐. 후… 계속 해 보자. 넌 어때? 아흑… 기분 좋아?”
“어. 이대로 밤새 하고 싶을 정도로.”
“큭. 아앗…! 웃기니까 배가 더 아파.”
“재유야. 조금만 속도 올릴게.”
그 말에 호흡을 고르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재유의 기준에선 조금 올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숨을 언제 쉬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자비하게 들이대는 공격을 막아 보려고 우주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때려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우주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말로 조금만 속도를 올렸는데도 들락거리는 물건이 워낙에 흉흉하다 보니 얘가 날 죽이려고 작정했나,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재유는 쩌릿쩌릿한 고통에 눈에선 눈물이 질금질금 새고 입은 저절로 벌어져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점점 머릿속이 하얘지고 바깥에서 들리던 계곡의 물소리와 쩌렁쩌렁 울리던 풀벌레 소리도 멀어져 갔다.
이대로 참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우주를 발로 차서라도 멈춰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낯익은 감각 하나가 아랫도리를 후비듯이 파고들어 왔다. 아프면서도 미치도록 기분이 좋았다. 우주가 손가락으로 해 줬을 때 느꼈던 감각이 극대화된 기분이었다.
“하윽… 우주야. 이상해. 천천히….”
“괜찮아. 기분 좋아질 거야.”
우주는 재유의 성기를 붙잡아 더 기분 좋게 해 주려 했지만, 자세가 익숙하지 않은지 별안간 제 페니스를 쑥 뽑아냈다. 아흐흑… 한순간 빠져나간 그의 성기는 안쪽에 깊은 존재감을 남겼다. 재유는 엉덩이를 바르르 떨며 울부짖었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듯 구멍이 미친 듯이 우물거렸다.
“난 네 얼굴 보고 해야겠다. 전부 보고 싶어서 미치겠으니까.”
우주는 엎드린 재유를 부축해 천천히 뒤집어 똑바로 눕혔다. 몸을 구부리고는 벌게져서 촉촉이 젖은 얼굴을 스윽스윽 혀로 핥았다. 아랫배에 우주의 것이 툭툭 닿았다. 재유의 것은 그새 쪼그라들었는데 저 숭한 것은 쫄지도 않았다.
우주는 힘없이 널브러져 있던 재유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엉덩이와 허리가 다시 긴장으로 굳어졌다. 군살 없는 두툼한 몸통이 바짝 다가왔다. 이미 터질 듯한 그의 페니스가 성을 내듯 끄덕거리며 엉덩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흑…!”
“재유야. 하… 너무 좋아. 잘하고 있어.”
우주는 흉근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좀 전처럼 모두 넣지 않고 얕게 찔러 넣은 상태로 몸을 낮춰 키스를 했다. 재유가 헐떡이느라 입을 맞추지 못하면 입술로 얼굴과 귓불을 애무하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 곳곳을 만져 주었다.
부드럽게 치고 빠지던 페니스가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대체 몸 안쪽 어느 부분으로 느끼는 건지 우주가 찍어 올리는 그 지점에 닿을 때마다 기묘한 쾌락으로 온몸이 뒤틀렸다.
우주는 재유의 어깨에 팔을 걸고 상체를 압박하며 묵직하게 비벼 왔다. 재유 역시 사지로 그를 옭아매 땀으로 번들거리는 등을 쓰다듬고 딱딱한 허벅지를 종아리로 문질렀다.
우주는 얼굴을 딱 붙인 채로 재유의 반응과 표정을 신중하게 살폈다. 느끼는 게 맞는지, 아픈 건 아닌지, 어떨 때 찡그리고 어떨 때 신음을 쏟아내며 황홀해하는지를 전부 알고 싶어 했다.
눈이 젖었을 땐 눈꺼풀에 입술을 내리고 눈물과 땀이 흐르면 달래듯 혀로 슥슥 핥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초조하기도 하고 꿈꾸듯 눈부시기도 하고, 폭주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흐읏… 우주, 야, 읏, 으응, 흐읍, 거기, 좋아… 흐응… 미칠 것, 같… 아아…! 갈… 것 같… 가… 하읏…!”
재유는 우주의 목에 매달려 그의 살갗을 쥐어짰다. 이런 쾌락이 제 몸 어디에서 흘러나온 걸까. 어떤 환상을 보고 있길래 이런 상스러운 신음을 내고, 침을 흘리며 싸고 싶다 울부짖는 걸까.
우주가 박아 대는 리듬에 따라 끄덕끄덕 흔들리는 이 몸이 어디로든 가고 싶고, 어떻게든 되고 싶다는 낯선 욕망에 사로잡혔다. 우주가 해 주는 거라면, 몸이 부서지고 망가지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우주가 몸을 수그려 젖꼭지에 입술을 갖다 댔다. 입술에 물자마자 거칠게 빨고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아래의 흥분과 더해져 허리가 제멋대로 튀었다. 일정한 속도로 같은 곳을 찧어 대는 성기가 흥건하게 젖은 마찰음을 냈다. 이제 아픔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쏠린 사정감에 재유는 죽을 듯 울부짖었다.
“흐응… 흐으, 으으윽…! 하윽!”
우주의 손이 재유의 성기를 쥐고 몇 번 쳐올리자 재유가 주체하지 못하고 퍼득퍼득 몸을 떨었다. 재유가 사정하자 우주는 상체를 일으키며 정액을 뱉는 끄트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밀어 올렸다. 다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던 페니스의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은근하게 돌리며 재유의 절정이 주는 조임을 느끼고 있었다.
재유는 제가 사정하는 얼굴을 가리려 팔을 들었지만, 우주가 손목을 붙잡아 침대에 찍어 내리고 몸을 붙여 왔다. 가슴을 압박하는 그의 흉부의 들썩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흥분으로 꽉 잠긴 목소리가 애달팠다. 아래가 연결되고 온몸을 맞붙인 채 키스가 이어졌다. 재유는 그곳에 삽입 당한 채 사정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는 것에 약간 멍해졌다. 그런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칭찬하며 달래듯 우주는 달콤하게 키스를 해 주었다.
손목을 결박하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우주가 재유의 다리를 더 벌렸다. 재유의 배 위에 쏟아졌던 정액을 손바닥에 긁어모아 접합부에 덧바른 그는 3분의 1밖에 들어오지 않았던 성기에 제자리를 찾아 주려는지 안쪽으로 서서히 길을 넓혀 가려 했다.
조금씩 안으로 진입하다 원래대로 다시 빼고, 또 조금 더 깊이 밀고 들어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모든 과정이 애가 탈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내벽 점막에 쫀쫀하게 달라붙은 그의 성기의 모양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사정 이후 말랑해졌던 재유의 것이 다시 힘을 받으려 했다.
“아흑… 우주야, 그만….”
“나 좆나 맛있다며? 이걸로 되겠어?”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씨익 웃었다. 지난번 우주의 집에서 삽입에 실패했다가 결국엔 사정하며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되짚으며 복수할 줄은 몰랐다.
재유는 흐트러진 숨을 뱉으며 눈을 흘겼다. 그러자 우주가 다가와 입술을 쪽쪽 물며 훌훌 웃었다.
우주는 두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며 가슴을 맞붙이고 하체를 진득하게 비볐다. 가랑이 사이로 까슬까슬한 음모가 닿았다. 어느새 끝까지 삼킨 모양이었다.
“하으… 살살 해 줘, 으으….”
“노력해 볼게.”
우주는 재유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엉덩이를 터트릴 듯 쥐어짠 상태에서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느리게 물러갔다 한순간 깊이 쳐올리고 스멀스멀 빠져나갔다가 사정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몸이 관통하는 듯한 충격에 재유는 꺽꺽 소리를 내며 우주의 등을 쥐어짰다. 빠져나오려 해도 양 볼기가 단단히 붙잡혔기에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우주는 목덜미와 귓불을 핥고 깨물며 점점 속도를 올렸다. 재유의 손이 어깨를 때리고 겨드랑이를 할퀴어 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털었다. 재유는 울 듯이 신음하며 우주의 입술을 찾았다. 곧바로 이어진 키스에 입이 막혔다. 엉덩이를 주무르는 커다란 손과 구멍을 무뢰한처럼 드나드는 성기가 주는 쾌감에 어쩔 수 없이 부르르 몸이 떨리고 뒷골이 저릿저릿했다.
느껴졌다. 우주가 흥분했음이.
재유는 쉬지 않고 허리를 흔들어 대는 우주의 몸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새빨간 얼굴, 잔뜩 힘이 들어간 목에 들썩이는 가슴, 근육으로 뭉쳐진 단단한 팔까지, 시선에 닿은 모든 것이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보고 있자니 문득 우주를 처음 봤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을까. 우리는 사귀고 1년 조금 넘어서야 제대로 된 섹스를 하는 셈이었다. 앞으론 이런 날이 수도 없이 이어지겠지, 생각하니 더없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우주는 재유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하반신에 온 힘을 쏟아 넣어 끝을 향해 밀어붙였다. 두 사람의 고조된 신음과 살끼리 부딪혀 퍽퍽거리는 마찰음이 난잡하게 귓속을 메웠다.
“허읏… 으응, 하핫….”
“흣, 재유야…! 한… 재유, 크으!”
그의 어깨를 움켜쥔 손톱이 날카롭게 파고 들어가는 것을 느꼈을 때, 우주가 사정했다. 딱딱하게 굳힌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발가락 끝까지 쥐어짠 듯한 힘이 고스란히 재유의 몸에 전해졌다. 전신에 황홀한 감각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재유의 배 위에서도 정액이 튀어 내렸다.
재유는 상체를 일으켜 우주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제서야 삽입된 부위를 처음 본 재유는 제 구멍이 미친 듯이 움찔대며 페니스를 꽉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마에서 배어난 땀이 맞닿은 우주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주는 재유의 등을 감싸 안으며 머리와 이마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그래. 진짜 맛있다 이 자식아.
재유는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주가 재유의 머리를 받치고 아기를 눕히듯이 조심조심 베개로 내려놓았다. 아직도 우주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재유는 심하게 폭주했던 애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맛본 절정의 환희를 만면의 웃음으로 보여 주었다. 재유도 따라 웃으며 우주의 입술을 덮쳤다.
***
얼마나 잤을까. 창가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눈꺼풀이 무거워 재유는 눈 뜨는 걸 포기하고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몇 시에 잤더라. 새벽 3시쯤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바로 잔 것도 아니었다. 우주가 재워 주지 않았으니까.
손을 더듬어 침대 옆자리를 확인했다. 우주의 얼굴이 손등에 닿았다. 쌕쌕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자고 있나 보았다.
재유는 몸을 옆으로 돌려 눈을 감은 채 손끝으로 우주의 얼굴을 더듬었다. 귓불과 뺨, 인중과 코끝이 차근차근 만져졌다. 숱이 많은 눈썹에 손가락이 닿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재밌어?”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깜짝이야… 자는 거 아니었어?”
“아니. 너 언제 깨나 기다리면서 보고 있었지.”
“깨우지 그랬어.”
우주가 몸을 바짝 붙여 재유의 얼굴을 붙잡아 볼을 맞대고 부드럽게 비벼 댔다.
“네가 깨는 순간을 눈으로 보고 싶어서.”
우주는 아침부터 쑥스럽게 하는 멘트를 잘도 날렸다.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의 곁에서 잠을 깨는 날엔 여지없이 충족감을 느꼈다. 재유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우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련하고 행복했다. 하체에 느껴지는 우주의 단단한 중심은 애써 외면한 채 살포시 눈을 감고 맨살의 감촉을 음미했다. 한참을 그렇게 꼼지락대며 이불 속에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몇 시야?”
“11시쯤 됐나?”
“벌써? 일어나야겠다.”
“좀 더 있어. 느긋하게 일어나면 좋잖아. 이러려고 여기 온 건데.”
일어나려는 재유를 쓰러트리고 팔다리를 휘감아 못 도망가도록 우주가 단단히 걸어 잠갔다.
“아앗!”
“왜 그래? 어디 아파?”
“으으… 허리가. 그러게 좀. 하아….”
누워 있을 땐 몰랐는데 몸을 뒤채니 온몸에 타박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안 아픈 데가 없었다.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팔다리까지 욱신욱신 쑤셨다.
“흠… 그건 좀 불가능이었어. 어제 우리 자기가 얼마나 예뻤는데 한 번으로 끝내?”
“우리 어제 처음이었거든? 적당히 하면 안 됐을까? 그리고 예쁘다는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 사내놈한테 그게 뭐냐?”
“음. 그럼, 귀엽다? 사랑스럽다?”
“허, 뭐가 달라?”
“어떡해, 그럼.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걸. 내가 괜히 첫눈에 반한 줄 알아?”
“또 능청 떤다…. 나 목말라.”
“알았어. 갖다 줄게, 잠깐만.”
우주는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팔다리를 풀어 주었다. 그가 방에서 나가자 재유는 옷을 챙겨 입고 가방에서 작은 선물상자를 꺼냈다.
이번 여행을 위한 선물이었다. 우주는 장소 제공에, 운전에, 여행 준비까지 다 해 줬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 안 한 게 마음에 걸려서 큰맘 먹고 마련한 것이었다.
재유는 제 베개 밑에 상자를 숨겼다가 우주의 인기척이 들리자 씁, 탐탁지 않은 숨소리를 내며 그의 베개 위에 떡하니 올려 뒀다.
“자, 마셔.”
“고마워.”
“어? 이거 뭐야?”
물을 건네주던 우주가 베개 위에 선물상자를 발견했다.
“선물. 나도 너한테 뭐 하나는 주고 싶어서.”
“진짜? 풀어 봐도 돼?”
“그럼.”
상자를 열자 반지 케이스가 나왔다. 반지는 장식 없는 단순한 링이었고, 순금이었다. 나름 커플링이랍시고 두 개를 장만한 것이었다.
우주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벙벙한 얼굴로 재유를 바라봤다.
“…맘에 안 들어?”
“뭐? 감동받아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너무… 고마워.”
“다행이다….”
감격에 찬 목소리를 들으니 재유도 뿌듯함에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붉혔다.
반지를 고를 때 사실 더 예쁜 반지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없었다. 게다가 첫 커플링인데 싸구려 백금이나 14k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하는 커플링이니 무리하더라도 비싼 걸로 하고 싶었는데, 그러다 고르고 고른 게 순금 반지였다. 금은 나중에라도 쓸모가 있으니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촌스러운 사고방식도 한몫했다.
“이거 커플링 맞지? 내가 끼워 줄게. 손 줘 봐.”
우주가 둘 중 조금 작은 사이즈의 반지를 골라 재유의 약지에 끼웠다. 그런데 헐렁하게 남아돌아 맞지 않았다. “어라…? 사이즈를 착각한 거야?”라고 물은 우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좀 큰 사이즈로 했어. 네가 약지에 이런 촌스러운 반지 끼고 다니면 사람들이 비웃을까 봐.”
재유는 상자에 남아 있던 반지를 꺼내 우주의 검지에 끼워 주었다. 눈대중으로 골랐지만, 꼭 맞았다. 우주는 말없이 재유의 검지에도 반지를 끼워 주었다. 커플링인데 왜 약지에 맞추지 않았느냐고 따지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맨날 끼고 다닐게. 안 잊어먹고. 그리고 하나도 안 촌스러워. 너무 예뻐.”
우주는 반지 낀 손 두 개를 나란히 겹쳐놓고 찬찬히 감상했다. 피부가 흰 재유의 손가락에 잘 어울렸지만, 우주의 잘생긴 손에도 보기 좋게 어울렸다. 샛노랗게 빛나는 보기 좋은 한 쌍을 보자 파스스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근데 난 일 때문에 손에 끼고 다니진 못해.”
“그렇겠지. 괜찮아.”
“그래서 또 준비한 게 있는데… 우주야, 내 가방에 이거랑 똑같은 색깔 상자 있거든? 그것 좀 가져다줘.”
우주가 기대에 찬 얼굴로 상자를 가지고 침대로 되돌아왔다.
“내가 열어 봐도 돼?”
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상자를 열자 18k 목걸이가 나왔다.
“목걸이야. 아무래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서… 여기다 끼우고 다니려고. 괜찮아?”
“내 것도 있네?”
“응.”
커플링을 준비했다고 해서 남들 앞에 버젓이 끼고 다니며 자랑할 용기는 없었다. 혹시 우주가 서운해할까 봐 염려했었는데 다행히 그는 그런 기색이 없어 보였다.
두 개의 가느다란 실 목걸이는 역시 금색이었다. 우주가 하나를 풀어 반지 위에 겹쳐 보였다. 목걸이가 더해지니 무언가 조화롭게 완성된 것 같았다. 우주는 손에 낀 반지를 빼서 목걸이에 걸었다.
“네가 걸어 줘.”
재유는 몸을 일으켜 링 목걸이를 그의 목에 걸어 주었다. 목이 두꺼운 우주를 위해 넉넉한 사이즈로 했는데, 생각보다 잘 맞아서 다행이었다.
“이러면 잃어버릴 걱정도 없겠다. 잘 어울려?”
“응. 예쁘다.”
“뭐? 예쁘단 말 난생처음 들어 봐.”
“자기는 시도 때도 없이 하면서 뭐.”
“네가 예쁜 건 사실이니까.”
“또또….”
우주가 재유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 재유의 목에도 똑같은 링 목걸이가 걸렸다.
정오를 향해 가는 햇빛이 마주 앉은 그의 벗은 몸을 따스하게 덮었다. 우주는 손끝으로 재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을 비비던 손이 귀를 거쳐 뺨을 쓰다듬고 턱 끝을 붙잡았다. 우주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겹쳤다. 닿을 듯 말 듯 입술만 스치는 간지러운 접촉이었다.
“고마워. 항상 네 생각 하면서 매일 하고 다니고, 소중하게 다룰게.”
우주가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재유는 재차 손으로 팔을 쓸었다.
“나야말로 너한테 뭔가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야. 반지 고르고 다닐 때 정말 기뻤어.”
“나도 너무 기뻐. 이렇게 예쁘고 착한 남자친구한테 사랑받는구나 싶어서.”
우주는 맞닿은 입술을 꾹 눌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꺼번에 머금고 제 통통한 입술로 부드럽게 핥았다. “난 정말 운도 좋지.” 먹먹하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애달프게 아팠다. 오늘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