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첫사랑 (3/18)

3. 첫사랑

* * *

1999년 8월.

마지막 여름방학이 지나고 있었다. 재유는 작은 종이가방 하나를 덜렁 든 채 터미널에서 우주가 오길 기다렸다. 귀에는 이어폰도 꽂혀 있었다. 자기는 공부하느라 안 쓴다며 출퇴근할 때 듣고 다니라고 우주가 준 것이었다.

처음엔 그냥 주려 했는데 재유가 받지 않으려 하자 빌려주는 거라며 말을 바꿨다. 만날 때마다 CD 서너 장씩 손에 들려 주는 건 이제 예삿일이 되었다. 벌써 집에 쌓인 우주의 컬렉션만 수십 장이었다.

재유는 그날그날 CD를 골라 음악을 듣는 게 퍽 즐거웠다. 지금 꽂혀 있는 건 인기 팝송을 모아둔 ‘MAX’ 앨범이었다. 엔씽크의 〈I Want You Back〉이 쿵짝대며 귓전에 울렸다.

오늘은 처음으로 우주의 집에 가는 날이다. 사실 몇 번이나 가자고 했지만, 우주 아버지의 무서운 인상 탓인지 그동안 가기가 꺼려졌다. 그래도 그가 사는 곳이 궁금했기에 결국엔 수락하고 말았다.

벌써 시간이 오후 5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터미널에는 보충수업을 끝낸 학생들이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재유야, 미안. 오늘따라 담임이 늦어서. 많이 기다렸지?”

재유는 전력 질주를 한 듯 땀을 뻘뻘 흘리는 우주에게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천천히 오지. 땀 좀 봐. 버스표는 내가 사 놨어.”

“그래? 그럼 버스 시간도 좀 남았으니까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

“응.”

우주는 매점에서 재유가 좋아하는 캐러멜 맛으로 두 개를 사 와 포장을 까서 재유에게 주고 자기도 덥석 베어 물었다.

“오늘 진짜 덥다. 그치?”

“근데… 진짜 나 가도 괜찮아?”

“그럼 괜찮지. 오늘 집 비었다고 했잖아. 걱정 마. 어 버스 왔다.”

우주는 제법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속에 욱여넣고 재유의 팔을 잡아 막 정차한 버스로 향했다. 맨 뒷좌석으로 가서 아직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재유를 창가에 앉히고 그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너랑 버스 타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러게.”

재유는 아직 걱정스러운 기색을 다 지우진 못했지만, 해맑게 들뜬 우주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방학 보충수업에 가지 않는 재유는 알바를 풀타임으로 늘려서 좀처럼 우주와 단둘이 만날 짬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늘 우주가 매장으로 햄버거를 먹으러 오는데, 주문할 때만 몇 마디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학교에 있는 우주를 볼 수 없게 되어 재유도 이만저만 아쉬운 게 아니었다. 알바할 때도 우주가 올 시간이면 늘 초조해하며 출입문에 정신을 팔 정도였으니 우주의 집에 가는 게 기쁜 건 당연했다.

좌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10분쯤 지나자 듬성듬성해졌다. 우주가 창밖 풍경에 정신이 팔린 재유의 손을 슬쩍 잡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재유도 주위를 살피고는 다시 창밖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얼마나 더 가야 돼?”

“거의 다 왔어. 다음다음에 내릴 거야.”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니 높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주택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들이 넓고 깨끗해 보였고, 마트나 식당, 카페가 있는 작은 상점가도 보였다. 정류장에 내리자 꽤 커 보이는 공원이 나왔다.

“이 공원 가로질러 가면 바로 나와.”

재유는 말없이 우주를 따라갔다. 아직 늦은 오후라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양복 차림의 남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다른 학교 교복의 학생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엄마, 운동하러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재유는 사람들의 모습뿐 아니라 공원 곳곳을 기억해 두고 싶었다. 우주네 집으로 가는 길이니까 혹시 다시 오게 된다면 혼자서라도 갈 수 있도록. 문득 우주도 자기를 몰래 따라다녔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어 웃음이 났다.

공원을 지나 아스팔트 외길 오르막을 한참 걷고 나니 우뚝 솟은 거대한 담벼락이 나타났다. 담이 높아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주가 대문을 열쇠로 열고 재유를 안내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우주가 재유의 손을 잡았다. 재유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괜찮다고 안심시키며 부드럽게 웃어 주는 우주 얼굴을 보아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상상을 뛰어넘는 집이었다. 영선이가 표현한 ‘으리뻔쩍’이 과연 맞는 말이었다. 정원 계단을 오르자 방금 지나온 게 대문이 아니라 후문이나 쪽문 정도였다는 걸 깨달았다.

중앙에는 수령이 오래돼 보이는 커다란 팽나무가 있고, 곳곳에 동양화에서나 볼 법한 사철나무들이 멋지게 드리워져 있었다. 정원 한편엔 작은 연못도 있었으며 길을 구분 지은 경계는 회양목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정원의 크기만큼이나 넓은 잔디밭도 나왔다.

잔디밭 끝에는 3층짜리 집이 있었다. 무슨 외국에나 있는 집처럼 창문도 크고 널찍한 게 집이라기보단 건축물이나 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것 같았다. 넓게 펼쳐진 테라스는 아치 모양의 통로도 있었고 통유리로 비치는 내부의 모습도 외관 못지않게 화려했다.

재유는 서울에 살 때도 이보다 좋은 집을 본 적이 없었다. 살던 동네가 애초에 부자 동네도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TV에서나 보던 이런 집에 실제로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새삼 우주가 다르게 보였다. 자기에게 늘 손잡아 달라, 안아 달라 조르며 헤실대는 우주가 사실은 이런 집에 사는 도련님이었다니.

“좀 거만한 집이지? 실제로 살아 봐도 좀 쌀쌀맞은 집이야. 너무 넓어서 가족들 얼굴 보기도 힘들거든. 아버지 취향이 좀… 허세가 심해.”

우주는 현관을 열고 재유를 안으로 들였다. 겉에서 봤던 웅장함에 비해 내부는 그나마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보통 가정집에서는 보기 힘든 기둥들이 있고,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뿐이었다. 집 곳곳에 전문가의 솜씨인 듯한 꽃과 화초들이 있었고, 가구와 커튼은 아이보리와 베이지 톤으로 보기 좋게 매치되어 있었다. 은은한 조명들 덕에 환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예쁘다. 누가 이렇게 꾸며 놓은 거야?”

“엄마가. 꽃꽂이도 좋아하시고 인테리어나 장식품에도 관심이 많으시거든.”

“정말 가족들 아무도 없어?”

“응. 가정부 아주머니 계신데 오늘은 엄마랑 같이 외출하신댔어.”

“그렇구나….”

“집 구경 더 할래?”

“아니, 그냥 네 방으로 가자.”

재유는 계속 우주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올라서자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커다란 통창과 샹들리에가 보였고, 3층은 구조는 비슷했지만 화려한 2층에 비해 단조롭고 소박한 느낌이었다. 소박하다고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깔끔하고 시원해 보였을 뿐이었다.

우주는 복도를 따라 맨 끝 방 문을 열더니 재유를 돌아보고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좀 쑥스럽네? 처음으로 내 방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들어가려니까. 뭔가 이상해.”

“…뭐가?”

“좀… 간질간질하달까?”

“우리 집은 잘만 오면서 뭘.”

“그러게. 앞으로 익숙해지겠지?”

우주의 방은 재유네 셋방 네 개는 합쳐 놓은 것 같은 크기에 창문도 세 개나 있었다. 커다란 침대와 책상, 2인용 소파와 테이블, TV, 큰 스피커와 오디오, 비디오 플레이어에다 재유네 집에서 쓰는 소형 냉장고도 따로 있었다. 벽에는 미국 유명 농구선수 포스터와 고전 영화 포스터가 서너 개 붙어 있고, 농구 골대도 달려 있었다.

거기다 한쪽 벽면은 모두 책장이었고, 소설책과 만화책, 영화 잡지, 소장용 비디오테이프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책상은 조금 과장해 재유네 집 공용화장실만 했다. 재유는 저절로 탄성을 지르며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고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방 정말 좋다. 혼자 쓰기 넓지 않아?”

“그럼 너도 여기 와서 살래? 둘이 쓰기 딱이지?”

“뭐? 농담하지 마.”

우주는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넉살을 부리며 재유를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뒤에서 허리를 구부려 재유를 끌어안았다. 재유는 아직 이런 스킨십은 어색해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편하게 있어. 네가 굳어 있으니까 괜히 미안하잖아. 난 떨려 죽겠는데.”

“아니야. 나도 여기 오는 거 기대했어.”

“정말?”

재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었다. 우주는 웃으며 재유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너랑 짝 되고 나서 제일 좋았던 게 뭔 줄 알아?”

“뭔데?”

“너 이렇게 웃는 거. 그 전엔 웃는 모습 한 번도 못 봤었거든. 근데 내 옆에 앉고 나서 웃는 거 보니까 나 때문에 웃는 건가 해서 얼마나 설렜다고.”

그 말도 맞았다. 우주가 실없는 농담을 하거나 얼빠진 표정을 보여 줄 땐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은근슬쩍 만져 대며 어리광 피우는 것도 웃음이 났다.

“근데 지금은 못 봐서 내가 아주 죽겠어. 말도 거의 안 해. 학교 갈 낙이 없어.”

“그래도 아직까진 맨날 얼굴 보잖아.”

“그렇긴 한데 한참 모자라. 그러니까 뽀뽀.”

뽀뽀를 조르면서도 재유가 해 주길 기다리지도 않고 제가 먼저 머리며 이마며 볼에 입술을 갖다 대기 바빴다. 재유의 뽀뽀를 기다리는 건 한세월이었으니 못 참고 그냥 해 버리는 거였다. 재유는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기 힘들어 목을 움츠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정말 좋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오늘이 안 끝났으면 좋겠어.”

재유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우주의 팔을 손으로 살포시 잡았다. 재유 역시 우주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랐다.

“나 목말라.”

“아, 잠깐만.”

우주가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컵에 따라 건네줬다. 재유는 주스를 마시며 무심코 책상 위의 액자들에 시선을 던졌다.

“저거 우리 사진이네?”

“잘 나왔지?”

언젠가 우주가 카메라를 가져왔다며 강변 길에서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사진에 취미가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직접 찍은 사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진 속 재유는 열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우주는 옆에서 재유의 얼굴을 뜯어먹을 듯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친구 사이에도 찍을 수 있을 사진인데, 보는 시각에 따라 연인 관계로도 보일 법한 사진이었다. 그런 사진이 떡하니 책상 앞에 자리 잡고 있어 재유는 쑥스러움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나한텐 왜 안 줬어? 나도 갖고 싶은데.”

“미안. 내일 뽑아서 줄게.”

재유는 테이블에 주스를 내려놓고 또 다른 사진들을 찾아 나섰다. 우주의 어릴 적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기대도 이 집에 온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재유는 슬렁슬렁 걸으며 책장 군데군데 놓인 액자들을 살폈다. 예상대로 우주와 똑 닮은 형과 찍은 것, 어머니와 찍은 것, 형과 어머니 셋이서 찍은 것, 꾸러기 시절 찍은 독사진 몇 개가 있었다. 아버지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만 봐도 우주가 어머니와 형만 가족으로 생각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 너무 미인이시다. 형님도 정말 잘생겼고.”

“형만…?”

어느새 재유 곁으로 와 어깨를 감싸고 있던 우주가 입술을 삐죽였다. 제 형한테도 질투를 하는 게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는데 우주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굴을 들이밀고 본격적으로 키스할 자세를 잡으려 하길래 옜다, 하고 말해 줬다.

“너도 잘생겼어.”

“형보다?”

“하… 그래. 형보다 네가 백배 천배 더 잘생겼다. 됐냐?”

우주는 옆구리 찔러 얻은 대답이라도 흡족한 듯 재유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안 그래도 방 안에 단둘이 있어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얘는 작정을 한 듯 거침없이 들이대고 있었다.

재유는 핑크빛 무드를 흩어놓기 위해 시침을 떼고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았다. 아직은 우정과 애정의 비율이 4대 6이어서 각 잡고 애인 노릇을 하기엔 내공이 부족했다.

“우주야 이거, 너 주려고 갖고 왔어.”

재유는 테이블에 뒀던 종이가방을 건넸다.

“진짜? 저게 뭔가 계속 궁금했는데. 나 풀어 봐도 돼?”

재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쑥스러운 듯 코를 쓱 문질렀다. 우주는 종이가방에서 꾸러미들을 꺼냈다. 하나는 손바닥만 한 주머니였고, 다른 하나는 작은 액자였다.

“네가 이 그림 좋아한다 그래서… 틈틈이 그려 봤어.”

액자의 그림은 키지섬의 두 건축물을 색연필로 그린 것이었다. 우주는 눈망울을 빛내며 재유를 봤다.

“와아… 진짜 고마워! 나 진짜 너랑 여기 꼭 같이 갈 거야.”

재유는 민망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손 안쪽에선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장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우주와 함께 그 황량하고 아름다운 섬에 가는 모습을 조심스레 떠올려 보았다.

우주가 이번엔 주머니를 집어 들고 세세하게 만져 보았다. 앞뒤로 연노랑과 분홍색 천이 섞여 있었다.

“이것도 네가 만든 거야?”

“응. 별건 아니야.”

우주가 주머니를 열자 비닐로 포장된 초콜릿들이 나왔다. 한입 크기의 별 모양, 하트 모양, 꽃 모양이었다.

“이건 오늘 만든 거야. 맛은 그냥 싸구려 초콜릿 맛일 거야.”

“이게 어떻게 별 게 아니야? 으… 못 먹겠어. 아까워서.”

우주가 초콜릿을 가슴에 갖다 대며 눈썹을 시옷자로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재유는 피식 웃으며 입 안 살을 슬쩍 깨물었다.

“근데 어쩌다 이런 걸 다 준비한 거야?”

“나 알바하는 데 대학생 누나 있잖아, 나랑 만나는 사람이 고3이라는 거 알고 있거든. 그 누나가 합격 기원 선물 같은 거 안 하냐고 해서. 직접 만든 거 주고 싶었는데 엿이나 찹쌀떡은 만들기 힘드니까….”

“아, 그 뿔테 안경 쓴 누나? 근데 너 그 누나한테 사귀는 사람 있다고 말한 거야?”

우주는 초콜릿보다 재유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얘기를 했다는 게 더 감동인 듯했다. 소개팅을 시켜 준다는 강권에 지치다 못해 실토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와… 진짜, 내일 당장 가서 내가 남자친구라고 말해 줘야겠다. 아유, 이쁜 게 이쁜 짓도 잘해요.”

“야!”

재유는 인상을 구기며 정색을 했다. 남자친구란 말도 어색한데 그걸 다른 사람한테 말한다는 걸 쉽게 말하는 우주가 얄미웠다. 이쁘단 말은 더 싫었다. 우주는 만날 때마다 입만 열면, 이쁘다, 예쁜아, 예뻐 죽겠다, 소리를 달고 살았다. 처음 들었을 때도 경악을 했는데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됐다.

“그거 다시 내놔.”

“아 왜! 이쁘니까 이쁘다 그러지.”

“그런 거 습관 들였다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샐까 봐 재유는 만날 때마다 입단속을 시켰다. 그때마다 우주는 ‘그래서 귓속말로 하지 않냐’고 따지며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 다 큰 사내놈 이쁘다는 너도 너지만, 나보다 더 큰 놈 좋다고 사귀는 나도 별수 없지. 결국 져 주는 건 늘 재유였다.

“직접 만들었다는 게 너무 감동적이야. 나 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이거 만들면서 우리 재유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 울까? 응?”

우주가 큰 주먹을 말아쥐고 눈가 옆에 갖다 재고 우는 흉내를 냈다. 기가 찼다. 저 큰 덩치로 애교를 부리는 것도 그랬고, 그걸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으이그… 적당히 해. 오늘이 딱 수능 100일 전이잖아. 그래서 뭔가 선물하고 싶었어. 시험 잘 보라고.”

우주는 장난기를 지우고 입술을 꾹 물며 미소를 지었다. 수능 보는 애인 잘 보라고 선물 주는 건 당연한데, 우주는 “어디서 이런 게 나한테 왔나.” 다소 어르신 같은 말투까지 써 가며 퍽 감동한 눈으로 재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재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진득한 손길로 뺨을 어루만졌다.

“정말 대단한 애야, 넌.”

“…응?”

“너랑 있으면 뭐든 잘할 것 같고, 누구든 이길 것 같아. 내가 다 이길게. 앞으로도 내 옆에만 있어.”

우주는 누구를 이긴다는 건지 모호한 말을 하더니 “정말 좋아해.” 하며 한 번 더 고백했다.

그는 키스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길로 재유의 눈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재유가 눈꺼풀을 살짝 내리자 성큼 다가온 우주의 입술이 닿으려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무선전화기였다. 재유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아….”

“…받아 봐.”

우주는 미간 사이를 좁히며 아쉽다는 듯 입술을 꾹 물며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인 것 같았다.

“…그러지 마세요. 우리끼리 해 먹으려고 했어요. 그냥 여기서 컵라면 먹어도 되는데… 네… 네. 알았어요.”

전화를 끊은 우주가 재유의 손을 이끌었다.

“엄마가 밥 먹으러 내려오래. 외출하신다길래 저녁 약속인 줄 알았는데 아주머니랑 장 보러 다녀오셨나 봐. 친구 왔다고 이것저것 차렸다네? 아버지는 없고 우리랑 엄마만 먹을 거야. 가자.”

따지고 들면 친구가 아닌 애인이어서 재유는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우주를 뒤따라가며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저녁 식사 메인메뉴는 대게였다. 커다란 접시에 살이 통통한 대게 여섯 마리가 쌓여 있었고 가리비구이와 해파리샐러드, 미역무침, 오징어 숙회, 전복미역국까지 그야말로 해산물 파티였다.

“우주가 집에 친구 잘 안 데려오는데. 고등학생 되고는 처음일 걸 아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주의 어머니를 가운데로 재유와 우주가 나란히 마주 보며 식탁에 둘러앉았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앞접시에 덜어 준 대게를 한입 베어 물었지만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우주가 그동안 얘기를 많이 했는지 어머니는 재유에 관한 걸 이것저것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전학 왔다는 것과 사는 동네도 알았고, 규신기업에서 일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앞두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혹시나 장차 고졸이 최종학력이 될 친구를 사귀는 걸 못마땅히 여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띠며 재유에게 필요한 걸 묻고 더 먹으라며 아낌없이 밥을 퍼 주는, 정감 넘치는 분이었다. 부잣집 사모님임에도 스스럼없이 농담도 하고 친구 앞에서 아들 흉도 보는 보통의 엄마 같았다.

‘우주 성격이 어머니 닮았네.’

순식간에 우정과 애정이 8대 2로 돌아섰다. 의식적으로도 그래야만 했고.

친구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재유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우주가 셋방에서 얻어먹는 밥에 비할 바 없는 호화스러운 식탁이었지만, 어느새 긴장도 사라지고 어머니의 농담에 맞장구도 치며 저녁 식사가 무르익어 갔다.

삭막하고 딱딱했던 이 집의 첫인상과, 무섭기만 했던 우주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움츠러들었던 게 희석되고 있었다. 이런 화목함과 따스함도 분명 존재하는 집이었다. 우주가 두툼한 덩치에도 아직까지 개구쟁이의 모습을 간직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

재유는 우주와 함께 식당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워지는 마음과는 달리 두 사람은 만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3일 만에 만난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재유는 ‘규신기업’에 생산직으로 무난히 취직을 했다. 담임이 겁주던 것과 달리 서류는 무사히 통과되었고, 면접 때도 얼굴만 확인하는 정도로 입사의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만 2교대 근무라서 주야로 12시간씩 일해야 하는데, 좀처럼 시간대가 맞지 않아 얼굴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재유의 휴일과 우주의 주말이 겹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엄마가 식당에서 나오는 걸 먼저 알아챈 우주가 엄마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는 진짜 아들처럼 착 달라붙었다. 막상 진짜 아들인 재유는 엄마에게 무뚝뚝하게 눈으로만 인사했다. 우주는 타고난 붙임성과 친화력으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성격이었다. 볼 때마다 신기했다.

“우주도 왔네?”

“오늘 식당 많이 바빴어요?”

“저녁 시간대 단체 손님들이 와서 말이야.”

“진짜요? 많이 힘드셨겠다.”

“괜찮아. 우주는 키가 더 큰 것 같네?”

“역시, 어머니 눈썰미 장난 아니시네요. 저 2cm 더 컸어요.”

“밥을 그렇게 잘 먹으니 쑥쑥 크는구나.”

그렇게 엄마를 가운데 두고 셋이서 나란히 집을 향해 걸었다. 재유는 진짜 모자 같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거리기도 하고, 엄마 몰래 우주를 슬쩍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어느새 다리를 건너 오거리 장터 입구 골목을 지날 때였다. 이미 밤늦은 시간이고 시장은 진즉에 파했으니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어디선가 낑낑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 안 들려?”

귀를 기울이자 골목 귀퉁이 전봇대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버려진 듯 라면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재유가 다가가 박스를 열자 흰색 털의 작은 강아지가 있었다.

“버려진 건가?”

“그런가 봐. 여기, 박스에 글씨 써져 있네. ‘우유입니다. 잘 키워 주세요?’”

재유가 강아지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저 좀 데려가 달라 그러는 건지 낑낑거림이 더 심해졌다. 우주는 가방을 뒤져 크래커 봉지를 꺼냈다. 입에 갖다 대니 녀석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먹어 댔다.

“배고픈가? 이걸론 양이 안 찰 텐데.”

재유가 품에 안은 강아지 등을 쓰다듬었다. 발가락이나 항문 부위의 털을 다듬은 걸 보면 분명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인데 얼마나 여기에 있었던 건지 꼬질꼬질한 먼지를 뒤집어쓴 게 내심 속상했다.

재유는 동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귀찮고 쓸데없다는 아빠 때문에 마당 있는 집에 살았어도 병아리 한 마리 키운 적 없었다.

“데려다 키우면 좋겠지만, 지금은 형편이 안 되잖아. 좋은 주인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엄마가 돌아서자 재유가 고개를 떨구고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손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채며 재유의 손을 핥으려 안달이었다. 저 좀 봐 달라는 듯 꼬리도 정신없이 빙빙 돌리고 있었다. 새까만 눈은 축축이 젖어 눈곱도 꼈지만, 말도 못 하게 귀여운 녀석이었다.

키울 수 없는 형편인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이름 때문일지도 몰랐다. ‘우유’는 흔한 이름이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갔다. 우주와 재유의 이름을 합쳐 놓은 것 같아서 재밌다고도 생각했다.

재유는 강아지를 내려놓고 엄마를 뒤따라갔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돌아보며 물었다.

“우주 떡볶이 먹고 갈래? 아줌마가 해 줄게.”

“아니에요, 어머니. 오늘 늦었잖아요. 다음에 꼭 해 주세요.”

“그럴래, 그럼?”

“넵. 저 재유랑 잠깐만 얘기하고 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

“쉬세요, 어머니.”

엄마가 들어가고 대문이 닫히자 우주가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쥐여 주었다. 손을 펴보니 삐삐가 들려 있었다.

“이거 뭐야? 왜 나 줘?”

“왜긴. 주고 싶어서 그러지.”

재유는 아직도 강아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손에 든 뜻밖의 물건을 보고 영문 모를 얼굴로 우주를 올려다봤다.

“아….”

우주가 삐삐를 왜 준 건지 이해는 갔다. 반에서 삐삐나 핸드폰이 없는 사람은 재유뿐이었다. 서울에서는 쓰고 있었지만, 이사 오고는 해지해 버렸다. 혹시 아빠나 빚쟁이들의 연락을 받을까 봐.

“나랑 연락하기 힘들어서 답답했구나?”

“그렇기도 하고… 너 갑자기 근무시간 바뀌거나 그럴 때 쓰면 좋잖아. 나도 너한테 음성 한번 남겨 보고도 싶고.”

“내가 너한테 전화하면 되는데….”

사실 우주를 만나고 연락하는 데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재유가 전화해서 만날 약속을 해도, 우주가 갑작스레 약속을 변경하려면 재유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 전화도 없었고, 공장에 전화하더라도 바쁜 시간대에는 통화하기가 힘들었다. 매번 집주인인 영선이네에 전화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을 거고, 그마저도 대부분 연결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재유는 고개를 저으며 단말기를 건넸다.

“그래도 이건 좀. 통신비도 나갈 거 아냐. 사려면 내가 살 테니까 다시 환불해. 첫 월급 받으면 나도 하나 살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럴 거 뭐 있어. 그냥 받아 주라, 재유야. 나 실은 핸드폰 사려다가 참고 참은 거야. 응?”

우주가 재유 팔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고집을 부렸다.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썩 내키진 않았다. 이미 차고 넘치게 얻어먹고 다니는데 이런 것까지 받으면 우주에게 너무 미안했다. 더구나 월급날도 며칠 후였다.

표정에 변화가 없는 재유를 바라보던 우주는 상체를 조금 숙여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번들번들한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대신, 방금 본 강아지 내가 데려다 키울게.”

“뭐? 네가 왜?”

“너 사실 키우고 싶은데 못 데려와서 아쉽잖아.”

“…….”

“내가 데려가서 잘 키울 테니까, 넌 이 삐삐로 나한테 연락해서 우리 집 와서 강아지도 보고 같이 산책도 시키고. 어때? 좋지, 응?”

“그래도 그건 좀… 너한테 좋은 건 하나도 없잖아. 강아지 키우기 힘들다던데.”

“좋은 게 왜 없어? 삐삐랑 강아지, 너랑 나 사이에 연결되는 게 두 가지나 늘었는데. 그리고 통신비 얼마 안 하는 거 알잖아. 너한테 정말 주고 싶어서 그래. 응?”

재유는 여전히 아랫입술을 오므리며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너도 나한테 그림도 그려 주고 초콜릿도 만들어 줬잖아. 난 선물하면 안 돼? 그리고 강아지 키우는 거 정말 잘할 수 있어. 밥도 꼬박꼬박 주고 매일매일 놀아 줄 거야. 제발 그렇게 하자. 응?”

“그래도….”

재유는 우주의 주머니에 삐삐를 넣으며 돌려 주려 했지만, 우주가 손을 꽉 잡아채며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조건 있어. 나한테도 네가 해 줬으면 하는 거. 그거 들어주면 이거 받아 줘.”

“음. 그게 뭔데?”

“내 생일에 같이 있어 주는 거.”

“생일…?”

여태껏 우주의 생일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서로 생일에 대해서 물은 적이 없었다. 재유는 2월생이라 우주를 알기 전에 생일이 지났었다. 그럼 우주의 생일이 곧 다가온다는 건가? 재유는 거절 못 할 조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일이 언젠데?”

“1월 1일이야.”

“새해 첫날이네? 신기하다. 1월 1일이 생일인 사람 처음 봐.”

“그치? 어쨌든 우리 12월 31일에 서울 가자. 가서 제야의 종소리 듣고 싶어, 너랑.”

“서울에? 그날 거기 사람 엄청 많을 텐데?”

“너 혹시 가 봤어?”

“아니, TV로만 봤어.”

“나도. 꼭 가서 직접 보고 싶었거든. 우리 내년에 스무 살 되잖아. 그 기념으로 너랑 종소리도 듣고 생일도 같이 보내고. 어때?”

재유는 기대에 부풀어 재촉하는 우주를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생일은 처음 알았지만, 특별한 날이니 재유 역시 같이 있고 싶은 건 당연했다. 삐삐 선물에다 강아지까지 거둬 키우겠다니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재유는 결국 졌다는 듯이 웃으며 수락했다.

“알았어. 같이 가자. 됐지?”

우주는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우유 데리러 가자!”고 외쳤다. 언쟁이 끝나고 극적으로 합의를 본 게 기쁜지 후련하게도 말했다.

“아, 잠깐만.”

재유는 집에 들어가 얼른 물병과 먹을거리를 가지고 나왔다. 시장에서 엄마가 사 온 약과였다. 당장 눈에 띈 먹을 것이 그것 밖에 없어서 일단 챙겼다.

헐레벌떡 장터 입구로 돌아가 보니 우유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재유가 박스에서 우유를 꺼내고 우주가 두 손을 모아 그릇처럼 만들어 물을 따라 주었다. 우유는 조그마한 혀를 내밀고 찹찹찹 소리를 내며 맛있게도 마셔 댔다.

“다행이야. 네가 데려가 줘서. 정말 귀엽지.”

“응. 근데 우유 혓바닥 간지러워.”

“혓바닥도 너무 귀여워. 근데 처음 봐. 이렇게 생긴 강아지는. 넌 본 적 있어?”

“포메라니안 같은데?”

“포메…?”

“포메라니안. 불독이나 치와와처럼 품종 이름이야. 되게 비싼 강아지일 것 같은데 왜 버렸을까?”

“그러게. 앞으로 우리가 잘 키워 주자.”

“근데 이름이 우유라는 게 신기하지 않아? 꼭 우리 이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이름 같잖아. 우주, 재유, 그리고 얜 우유. 재밌다, 그치?”

“맞아. 나도 그 생각 했어.”

물을 한참 더 마신 우유는 재유 품에서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헥헥거렸다. 오랜만에 물을 배불리 마셨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재유가 우유에게 뽀뽀하며 쓰다듬어 주자 우주는 저도 해 달라며 어깨를 치대고 앙탈을 부렸다. 재유에게 허벅지를 철썩 맞고 나서야 장터의 뽀뽀 실랑이가 끝이 났다. 새 식구가 된 우유는 순하게 생겨서는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우주와 재유에게 번갈아 애교를 부렸다.

***

1999년 12월.

서울역에서 종각으로 가는 지하철은 몇 정거장 안 되지만 목적지로 향해 갈수록 점점 사람이 많아졌다. 재유는 지하철을 오랜만에 타는 거라 약간 그리운 마음도 있었는데 전동차 안이 금세 사람으로 빽빽해지는 바람에 과거의 감상을 할 여유가 사라졌다. 하긴, 밤 11시 넘어서 지하철을 탄 것도 처음이었다.

99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과 새해 첫날인 내일은 공장이 쉬었다. 재유는 종무식을 끝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우주와 함께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밤도망 이후로 처음 간 서울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재유는 잿빛 도시에 화려하게 깜빡이는 전구들을 보며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떠나올 때는 이후에 다가올 미래가 암울할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전의 과거를 ‘다 지난 옛일’로 떠올릴 만큼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교대근무가 힘들긴 해도 재유가 어엿한 월급을 받아 오니 아빠의 빚을 갚는 속도가 빨라졌다. 엄마도 내심 짐을 덜어낸 기색이었다. 2학기 들어서 우주를 볼 기회가 확실히 줄어들긴 했지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엔 오히려 좋았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주간 근무를 하고 하루나 이틀 휴무 뒤에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야간 근무를 하는 식이었다. 신입이니 주말에 휴무를 주지 않아서 우주를 만나는 건 아침이건 저녁이건 8시 전후 잠깐 보는 게 다였다.

재유가 공장에 적응한 만큼 우주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2학기는 1학기 때와 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한다. 다들 무거운 압박감에 시달려 쉬는 시간조차 크게 떠들지 않았고 야자시간에 땡땡이치는 것도 확연히 줄었다고 했다. 우주는 고3의 마지막 계절을 묵묵히 견디고 무사히 수능을 치러냈다.

수능이 끝난 고3은 한가했다. 오전수업만 끝내면 땡이었다. 우주는 재유가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죄 차지했다. 공장 앞까지 오는 일은 잘 없었지만 통근 버스가 정차하는 곳에 재유를 마중 나오고 배웅도 했다.

재유가 쉬는 날에는 시내에 구경을 가거나 버스를 타고 교외에 나가 바람을 쐬거나 그도 아니면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매일매일 데이트를 즐겼다.

겨울방학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크리스마스이브엔 우주의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주는 원하던 대학 법학과에 특차로 합격했다. 음성메시지로 소식을 들은 재유는 그날 우주를 집으로 불러 음식을 차려 주었다. 영선이네 4인용 밥상까지 빌려서 불고기와 갈비찜, 잡채와 감자전, 미역국과 케이크까지 상에 올렸다. 생일에 어차피 서울 갈 거니까 생일상을 겸하기도 한 것이다.

갈비찜을 집어 먹으며 상다리가 부러지겠다고 핀잔을 주던 영선은 예상대로 우리의 관계를 눈치챘지만, 충실한 친구답게 비밀을 지켜 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우주는 영선에게 질투했던 것도 잊고 예전보다 더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둘 다 말이 많아서 주로 듣는 쪽인 재유는 꽤 시끄러웠지만, 셋이서 노는 것도 퍽 재미있었다.

우주가 여건이 될 때마다 우유를 데리고 나와서 함께 강변을 산책하는 것도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다. 우유는 몸집이 작아서 새끼 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동물병원에 물어보니 다 자란 성견이라고 했다. 나이를 특정할 순 없지만 막 새끼티를 벗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열아홉 스물 정도라고. 이름도 그렇고 나이까지 닮은 우유는 우주의 집에서 잘 먹고 잘 자랐다. 그래도 재유를 보면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꼬리를 치며 반가워하는 게 여간 예쁜 게 아니었다.

우주는 재유가 우유를 예뻐하고 뽀뽀를 해 줄 때마다 저도 해 달라며 입술을 들이밀고 치근덕거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결국 밖에서도 샜다. 길바닥에서도 그러는 바람에 산책을 마치고 들어와서는 꼭 뽀뽀를 해 줘야 했다. 그래야만 주접을 멈췄다.

마지막 10대가 그렇게 흘러갔다. 취직해서 돈도 벌고, 엄마도 빚에 대한 부담을 덜고, 사랑스러운 애인과 믿음직스러운 친구도 대학에 합격하고, 애교 많은 우유도 더할 나위 없이 귀여우니 더 바랄 게 없는 하루하루였다. 이대로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재유야, 괜찮아?”

“아니… 너도 이쪽으로 좀 더 와.”

우주는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재유가 치이지 않도록 큰 덩치로 세심하게 이동하며 재유를 감쌌다. 지하철역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손잡이를 민첩하게 바꿔 가며 조금씩 안쪽으로 옮겨가 재유를 보호하고 있었다. 종로3가역에서 피크였다. 더 이상 사람이 탈 수 없을 것 같았는데도 꾸역꾸역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우주는 재빨리 코너에 재유를 밀어 넣고 출입문 유리와 좌석 기둥을 붙잡아 공간을 만들었다. 등 바로 뒤에 우주의 배와 가슴이 닿아 있었다. 무리할 것 없다고 괜찮다고 해도 우주는 뒤에서 치받는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힘들지? 한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쫌만 참아.”

“아니야. 네가 더 힘들겠다.”

우주 덕에 한결 편해진 재유는 코너의 벽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에 빠졌다. 기둥을 꽉 붙잡은 손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우주를 만나고 배려받는 기분은 여러 번 느낄 수 있었지만, 오늘은 마치 어린애를 대하듯이 보호해 주는 게 영 어색했다. 바깥에서 이렇게 가까이 밀착한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바로 귓가에서 우주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딱 붙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숨에 데워진 귓바퀴가 욱신거릴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입술을 앙다무는 그때, 갑자기 전기가 나간 건지 불이 꺼지고 지하철이 멈춰 버렸다. 종각역까지는 한 정거장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세기말인지라 밀레니엄 버그니, Y2K니, 2000년도를 앞두고 여러 괴담들이 돌았었는데 과연 그런 것인가, 재유도 잠시 공포에 잠겼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갑자기 죽는다는 게 가능할까? 핵폭발도 아니고 겨우 정전인데. 재유는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서울의 지하철은 갑자기 멈추는 게 아예 없는 일도 아니라서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불이 켜질 것도 같았다.

재유는 몸을 조금씩 비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핸드폰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폴더를 열고 미미한 빛을 비춰 준 탓에 사람들의 형체는 대강 볼 수 있었다. 우주는 바로 코앞에 있었다.

“놀랐지? 아마 금방 출발할 거야.”

“…….”

설마 이대로 세상의 끝은 아니겠지만… 끝이 오더라도 우주와 함께 있어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재유는 천천히 후드를 뒤집어썼다. 두 손으로 우주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우주의 입술이 닿았다.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다. 부드럽고 도톰한 그의 입술을 제 입술로 슬쩍 달싹이며 곧 떼어 냈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떼자 우주의 숨결이 볼을 뜨겁게 했다.

전등이 깜빡거리면서 우주의 표정이 보였다. 잔잔한 물에 파장이 인 듯한 눈빛으로 가슴 떨리게 웃고 있었다. 눈에 재유를 담고서.

곧 불이 완전히 환하게 켜졌는데도 지하철은 출발하지 않았다. 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상하니 부끄러워져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번엔 우주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퍼뜩 놀라 고개를 들어 우주를 보았다.

다시 깜빡거리더니 불이 또 꺼져 버렸다. 우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입술을 포개 왔다.

재유는 우주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어깨로 끌어 올렸다. 두툼한 점퍼와 스웨터에 가려져 있는 그의 쇄골을 그러쥐고 손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재유는 숨을 쉬기 힘들어 참지 못하고 입술을 거뒀다. 워낙 틈이 좁아 우주의 어깨에 이마가 닿았다. 안내방송이 들렸다. 곧 출발할 거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예고도 없이 키스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자기가 먼저 덮쳐 버리다니.

고개를 들어 우주를 보는데,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눈코입 위치가 찾아졌다. 우주는 부뚜막에 올라 버린 발칙한 고양이를 보듯 눈 한쪽을 좁히며 익살맞게 웃고 있었다. 재유도 웃음이 났다. 우주는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진짜. 두고 봐.”

우주의 경고를 들은 재유가 킥킥거리며 웃는데, 다시 불이 켜졌다. 재유는 재빨리 우주의 얼굴에서 고개를 떼고 살짝 거리를 뒀다. 그래 봤자 반 뼘도 안 되는 정도였다.

이번엔 지하철이 출발하려는지 크게 덜컹거리며 전동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휘청거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지만 우주와 재유는 둘 다 얼굴이 벌게진 채 방금 전의 해프닝 같은 입맞춤을 되새겼다.

이제 새해가, 기다리던 2000년대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종각역에 겨우 도착해 힘들게 출구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수많은 인파에 압도되었다. 애초에 출구를 빠져나오는 데만 10분이 넘게 걸렸다. 12시가 다 된 시간이어서 보신각 쪽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원래 타종행사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해이기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TV로 볼 때도 물론 많아 보였지만 이렇게 종로3가까지 꽉 차 있을 줄은 몰랐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 봐도 미어터지는 사람들 때문에 숨이 막혔다.

올해 히트를 쳤던 걸그룹이 공연을 하는 것 같았다. 노랫소리에 맞춰 수만 명은 됨직한 사람들의 환호 소리도 들려왔다.

“어쩌지? 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봐. 종 치는 거 못 볼지도 모르겠는데?”

우주가 재유 어깨를 꽉 안고 조바심 난 듯이 말했다.

“그래도 가까우니까 종소리는 들릴 거야. 우리 그냥 뒤쪽으로 가자. 여깄다간 짜부되겠다.”

재유는 우주의 팔을 꽉 잡고 반대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 더 앞으로 갔다가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밀려 종소리를 듣고도 기분이 썩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뒤로 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차라리 종로3가에서 내리는 편이 나았을 것 같네.”

재유가 앞으로 향하려는 사람들을 헤치며 소리치자 우주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힘을 주어 팔을 당겨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안 가?”

우주는 입을 오므리며 쪽, 소리를 내더니 능글맞게 웃었다. 종로3가에서 내렸으면 뽀뽀는 못 했겠지,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하여간 주책이었다. 뽀뽀 한 번 해줬다고 석 달 열흘은 우려먹을 기세였다.

재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른 척하고 다시 우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주는 잠자코 끌려오더니 제가 먼저 앞서가 재유의 어깨를 꽉 감싸 안고서 길을 헤쳐나갔다. 재유는 못 이기는 척 그의 팔에 안겨 사람들 사이를 비집었다.

평소라면 이런 대로변에서 팔짱을 끼거나 어깨를 끌어안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기에 제법 신선한 경험이었다.

우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설사 아는 사람을 마주친다 해도 인파에 떠밀렸다는 핑곗거리가 있으므로 우주와의 스킨십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다. 우주도 이런 걸 생각하고 오늘 여기 오자고 한 걸까? 그동안의 집착을 되짚어 보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음흉한 놈. 아니. 음흉하고 귀여운 놈.

“이제 종 치려나 보다.”

“그러네.”

어느 정도 빠져나왔어도 다행히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걸그룹 공연이 끝나자 사회자가 타종식을 할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제 잠시 후에 여러분과 함께 카운트다운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20세기의 마지막을 떠나보내고 희망찬 2000년, 21세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 이제 20초 남았습니다. …10! 9! 8! 7! 6! 5….]

“으으. 시작한다. 떨려….”

“4! 3! 2! 1!”

2000년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환호가 퍼지고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와아! 21세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원 빌어요!

우주와 재유도 새해 분위기에 흠뻑 취해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껴안고 축하를 했다.

“축하해. 새해 복 많이 받아!”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그리고 생일 축하해!”

우주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벗겨진 재유의 후드를 푹 눌러 씌우고 자신의 외투로 몸을 폭 감싸 안았다. 고개를 기울이며 짧게 입을 맞췄다. 재유도 분위기에 도취 되어 외투 안에서 우주의 허리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입술을 음미했다.

“소원 빌었어?”

열에 들뜬 아이처럼 우주가 물었다.

“응. 너랑 오래가게 해 달라고. 넌?”

우주는 기특한 소리를 하는 재유가 귀여워 못 참겠다는 듯이 다시 한번 꼭 껴안고 말했다.

“난 하루빨리 너랑 같이 사는 거.”

말만 들어도 설레었다. 그런 미래가 정말 올 것만 같았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이, 이 마음이 영원하길 어느새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바로 주변에서 본행사와는 별개로 사물놀이가 시작되었다. 십 수 명의 풍물패가 흥겹게 타악기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 함께 춤추고 소리 지르며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펑! 폭죽 소리도 들려왔다.

우주와 재유도 신나는 장단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맞잡고 풍물패를 따라 환호성을 내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청춘의 시절이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1권 끝.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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