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백
* * *
1999년 5월.
재유는 우주와 막대사탕 하나씩 입에 물고서 학교를 나와 터미널 방향의 대로변을 걷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가 세상의 먼지를 붓칠로 꼼꼼하게 털어 낸 듯 맑고 깨끗한 날이었다. 반짝이는 햇살을 반사한 물결과 푸릇한 초목들을 감싼 강변의 풍경은 한층 계절이 짙어진 느낌이었다.
“정말 괜찮아? 오자 땡땡이친 거. 벌써 세 번째잖아. 담임 알면 혼날 텐데.”
“괜찮지, 그럼. 고3이라 소풍도 없고 수학여행도 없는데 땡땡이라도 안 치면 숨 막혀서 공부하겠어?”
우주는 입 안의 막대사탕을 불량스럽게 굴려 대며 땡땡이의 근거를 정당화시켰다. 재유는 그런 녀석을 곁눈질로 몰래 야렸다.
얜 재수 없는 놈이 맞았다. 공부도 잘했다. 첫 시험인 모의고사를 치르고 우주가 전교 등수에서 노는 걸 알았을 때 역시 인간미가 없다며 재유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런 녀석이 땡땡이를 치는 인간미까지 발휘하고 있었다. 성종의 말마따나 ‘다 가진 놈의 여유’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 어디 가서 놀까? 날씨도 좋은데 만화방이나 갈까?”
“날씨 좋은 거랑 만화방이랑 뭔 상관인데? 거기 가면 바깥 풍경 하나도 안 보이는데.”
“기분이 다르잖아, 기분이. 이런 날은 오다리 좀 씹고 니코틴 냄새도 좀 맡아 가면서 만화방 폐인 흉내 좀 내고 그래야지.”
우주는 한껏 들뜬 표정으로 열심히 재유를 꼬셨다. 학교에서는 세심하게 잘 챙겨 주는 면도 있고 차분하게 공부하는 진중한 모습도 있어서 형 같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땐 꼭 말썽꾸러기 꼬마처럼 굴었다.
그동안 우주가 땡땡이를 치더라도 집에 가는 게 바쁜 재유 때문에 늦도록 같이 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모의고사 끝나고 피시방에서 1시간 정도 같이 게임을 한 게 다였다.
우주는 오늘도 바로 집에 가려는 재유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 붙잡고 늘어졌다. 애초에 야자를 안 하는 재유는 죄가 없지만.
“다들 공부하는데 땡땡이치면서 당당하기는. 다른 애들 보기 좀 그렇잖아.”
그래도 우주가 이러는 이유를 알아서 재유는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우주는 자기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네가 일찍 가니까 잘 몰라서 그러는데 땡땡이치는 애들 은근히 있어. 저번 주 금요일엔 반장도 야자 깠다니까?”
“진짜? 의외다.”
“그치? 그니까 쫌만 놀다 가자. 응?”
우주는 덩치에 안 맞게 아양을 부리듯 몸을 숙이며 비비적거렸다. 재유가 혀를 끌끌 차며 눈을 흘기자 그 모습에 오히려 히죽히죽 웃어 댔다.
“흠... 그럼 오늘만이야.”
“당연하지!”
“농담 아니라 진짜야. 나 다음 주부터 알바 하기로 했어. 시청 앞 패스트푸드점에서.”
“진짜? 우와… 그럼 앞으로 저녁 시간마다 가서 햄버거 먹어야겠다.”
이제 땡땡이친 너랑은 놀아 줄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우주는 반색을 했다.
“나 알바 짤리는 거 보고 싶어? 너랑 노닥거리려고 알바 구한 거 아니거든?”
3월 초에 면접 봤다가 경쟁자가 많아 떨어진 곳이었는데, 재유가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매니저에게 알바 자리 펑크 나면 언제든 바로 일할 수 있고, 무단결근 따위는 절대 없을 거라고 부끄러움도 참고 얼굴을 붉혀 가며 어필한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게다가 시급 1천 8백 원이면 동 시간 손부업보다 몇만 원 더 벌 수 있기도 했다. 하는 거 봐서 주말에 풀타임으로 바꿔 준다고도 했는데, 우주가 첫 직장에 초를 치려고 했다.
“니가 그런다고 내가 안 갈 것 같냐?”
재유는 속도 모르고 깐죽거리는 우주가 얄미워 옆구리를 팔꿈치로 깠다. 살짝 스칠 정도로만 친 건데, 이 녀석은 일부러 한 보쯤 날아가서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엄살이었다.
“아이고 아파라, 은근히 폭력적이야. 아이고 죽겠다.”
앓는 소리를 하며 구부정하게 걷는 품새가 터미널까지 갈 것 같아서 재유는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맨날 먹으면 안 돼. 햄버거가 몸에 좋지도 않은데. 주말에만 와. 알았지?”
“오케이!”
우주는 금세 허리를 꼿꼿이 펴며 옆에 착 달라붙었다. 알았다는 의미로 눈까지 찡긋거리며.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능청과 건들거림이 뒤섞인 몸짓에 넌더리가 나는데도 이럴 때의 우주는 참 잘생겨 보였다. 제 의견대로 밀어붙이는 밉상 짓인 걸 아는데 밉지가 않았다.
저런 끼를 여자애들 앞에서 보여 주면 지금보다 훨씬 인기가 많아질 텐데. 아무리 보기 싫은 척 눈을 흘겨도 재유에겐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었다. 대학 간 후의 미래가 기대되는 녀석이었다.
재유는 자기가 여자애들에게 대시 받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우주가 자랑스러웠다. 현근과 성종이 우주 곁에서 여자애들의 시선을 즐기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더 일찍 친해졌더라면, 작년에 같은 반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재유는 우주와 학교에서 함께할 시간이 앞으로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웠다. 마음 같아선 오랜만에 땡땡이친 우주와 밤늦도록 놀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생 둘이서 놀만 한 데는 마땅히 없었다.
둘 다 술·담배를 안 하니 몰래 술집 가는 재미도 없고, 피시방엘 가더라도 재유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으니 같이 즐길 거리는 딱히 없었다. 집에서 비디오 보면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싶은데, 재유네 셋방은 인형 무더기만 있지, 놀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놈 둘이서 얼굴 맞대고 쎄쎄쎄 할 것도 아닌데 굳이 비좁은 초라한 집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1시간쯤 놀다 나오면 되겠다.”
강변 길에서 터미널 방향의 만화방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재유가 말했다. 우주는 바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1시간 가지고 돼? 밥 먹고 두어 시간 만화 보고 강변에서 바람 좀 쐬다가 칼국수 먹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우주는 늘 땡땡이 스케줄을 꼼꼼하고 빠듯하게 세웠다. 재유가 부업 때문에 일찍 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밥에다 칼국수까지 먹어야 된다고? 배 터지겠다, 터지겠어.”
바람도 살랑살랑, 노을도 일렁일렁, 일찍 들어가기 아쉬운 날씨이긴 했다. 재유도 말과는 다르게 아쉬운 듯, 코를 찡긋하며 애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주는 아직도 넘어오지 않은 재유에게 칼국수의 쫀득한 면발과 멸치로 우린 국물맛에 대한 치밀하고 디테일한 묘사까지 해 가며 마지막 쐐기를 날리려 하고 있었다.
마음이 술렁술렁, 우주의 의견 쪽으로 기울어지려는데, 신호가 바뀌었다.
길을 건너려 발을 내딛자 왼쪽 도로에서 검은 세단이 비상 깜빡이를 켜며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차는 멈출 기미도 없이 횡단보도를 완전히 가린 채 멈춰 섰다.
보행자가 둘밖에 없었기 망정이지, 상당한 민폐였다. 더구나 이 동네에선 잘 보기 힘든 리무진 형 다이너스티였다. 안 그래도 고급 자동차인데 어지간히 광을 냈는지 반짝반짝 윤이 난 모습이 고압적이기까지 했다.
더 놀란 건 뒷좌석 창문이 열리고 안에 탄 사람이 말을 걸었을 때였다.
한눈에 봐도 얼굴이 부리부리한, 아니 무시무시한 중년 남자가 연회색 잠바를 입은 상반신을 기울이고 창턱에 오른팔을 툭 걸치며 뻗었다. 그리고는 이쪽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거친 말을 쏟아냈다.
“이 새끼가… 야자 할 시간에 어디서 땡땡이 까고 난리야? 부모 모르게 니 멋대로 할 거면 학교는 왜 다니고 공부는 뭣 하러 하냐?”
서울에서도 이런 고급 차를 보기는 했어도 그 안에 탄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라 재유는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새끼’ 운운하는 소리에 기가 질려 버렸다.
험악한 표정의 남자는 정확히 우주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재유는 그제야 잠바 왼편 가슴에 새겨진 ‘(주)규신기업’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
재유는 남자에게서 풍겨 오는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너무 놀라 숨까지 죽였다. 우주는 좀 전의 까불거리던 표정이 싹 지워지고 급격히 굳은 모습이었다.
“니 엄마도 너 이딴 식으로 학교 다니는 거 알고 있냐? 그러고도 여편네들 만나서 노가리 까고 밥 처먹고 그러고 다닌다든?”
“아버지!”
우주와 얼굴 생김새가 비슷해서 아버지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인상이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우주가 웃을 때 순둥하고 포근한 인상이라면, 차에 탄 남자는 평생 웃음이라곤 지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날을 세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주도 지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적의를 그대로 드러낸 듯한 매서운 눈으로 차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달리 인상을 찌푸린 것 같지도 않고 분노의 최대치에 다른 것 같지도 않은데 남자는 보는 사람에게 공포를 일으켰다. 게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들에게 하는 말 치고 너무 악의적이었다.
땡땡이건 뭐건 옆에 친구도 같이 있는데, 아들의 사회적 위치나 평판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듯 다짜고짜 맹비난이었다. 더 놀란 건 우주의 어머니에 대한 품평이었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분을 흠잡으며 원색적으로 깎아내리는 모습에 재유마저 모멸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똑바로 해라, 이 새끼야. 다시 학교로 들어가. 학교에 전화해서 확인할 거니까 토낄 생각은 하지 마라.”
우주가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머리가 희끗하게 세기 시작한 남자는 운전기사에게 지시해 곧 차를 출발시켰다.
저 사람이 규신기업 사장님이라니.
“…….”
“…….”
으레 나이가 들면 살아온 품성대로 얼굴의 상이 만들어진다고 하던데, 우주 아버지의 얼굴에는 강압과 욕심, 독선과 천박함이 새겨진 듯했다. 우주의 성격이 밝고 구김이 없어 보여 당연히 아버지도 온화하고 인품이 좋은 분이실 거라 상상했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우주는 차가 떠나는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항기 어린 얼굴에 치욕이 덮여 있었다. 그사이 신호등은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다.
“…우주야.”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우주가 돌아봤다.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애써 웃는 모습에 머쓱함과 자괴감, 수치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슬퍼 보였다.
“우리 아버지. 놀랐지?”
우주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들켰다는 듯 자조 섞인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아, 진짜 꼴사납네. 오늘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너랑 놀려고 했는데. 이런 모습이나 들키고. 미안해. 너도 기분 상했지?”
“…….”
우주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털어내려 일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되돌아오는 말이 없자 끝내 입술을 짓씹으며 표정을 구겼다. 오랜만에 놀 생각으로 들뜬 분위기에 갑작스레 끼얹어진 찬물이 그의 노력으로도 풀풀 날아가지 않았다.
재유가 너무 놀란 탓이었다. 아니, 놀란 건 그렇다 치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어떻게 이 어색한 상황을 다시 되돌려야 할까를 망설이다 침묵의 시간만 길어지고 있었다.
재유는 우주의 어깨에 손을 얹어 괜찮다는 의미로 가볍게 주물렀다. 교복 아래로 단단한 어깨가 만져지는데도 어쩐지 힘없이 축 처진 것 같았다.
우주는 푹 숙인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꾹 다문 입술 끄트머리가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집 갈래? 칼국수 국물맛보다는 못하겠지만, 밥 먹으러 가자.”
재유는 굳이 우주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아도 이해가 됐다. 1년 전쯤, 빚쟁이에게 멱살을 잡힌 모습을 반 친구에게 들켰던 일이 겹쳐졌다. 그땐 빚에 대한 걱정보다 저를 불쌍하게 보던 친구의 눈빛이 재유를 더 비참하게 했었다. 우주가 지금 겪은 수모도 별다르지 않을 터였다. 거기다 대고 너희 아버지가 확인 전화할지도 모르니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고 하기는 싫었다.
어깨에서 손을 내려 우주의 팔을 조금 잡아당겼다. 의아하고 놀란 듯한 얼굴이 시선에 따라붙었다. 재유 스스로도 조금 놀라고 있었다. 우주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지금 만화방 갈 기분도 아니고, 배도 고프잖아. 김치볶음밥 괜찮으면… 먹으러 가자.”
“…좋아.”
침울해 보였던 우주의 얼굴에 뜻밖의 작은 기쁨과 감동이 내비쳤다.
재유는 우주의 승낙이 몹시 기쁜 듯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주었다. 정말 가도 되는 걸까, 고민하는 것처럼 머뭇머뭇 발걸음을 내딛는 그의 등을 감싼 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강변길을 계속 걸어나갔다.
여전히 날은 좋았다. 솜구름 사이로 비치는 노을이 연보랏빛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
골목 초입에 들어왔을 때, 재유는 우주를 잠시 세워 두고 점빵으로 향했다. 슈퍼도 아니고 마트는 더더욱 아닌, 자전거포와 한 건물을 쓰며 쌍으로 붙어 있는 점빵은 규모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딱 구멍가게였다. 낡은 판자로 이어붙여 지붕에 기와를 얹고 내부에 알전구를 밝혀 놓은 작은 건물은 60년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대폿집을 연상시켰다.
뻑뻑하게 밀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산대로 쓰고 있는 나무 책상 위로 담배 진열대가, 그 아래에는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막걸리 병들이 둥둥 떠 있었다.
좁은 통로의 벽에는 종류가 몇 개 없는 과자나 라면이 놓인 진열대와 음료와 술을 보관하는 가슴 높이의 냉장고,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있었다. 실제로 대폿집이었는지 어쨌는지, 손님을 받기 위한 낡은 탁자와 의자도 갖춰 놓았다. 구멍가게치고는 없는 게 없이 실했다.
평소엔 영선의 아버지를 포함해 근처의 공업사와 이용원, 자전거포 아저씨들이 주로 앉아서 막걸리를 걸치며 친목을 다지곤 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계산대 너머 작은 창호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한참 만에 주인 할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란 두 개… 아니, 네 개 주세요.”
할아버지는 이불에 누운 채로 상체만 비스듬히 일으켜 미닫이문을 한 손으로 잡은 채 하품을 했다.
“날계란, 삶은 계란?”
“날계란이요.”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신고는 비닐봉지 하나를 떼어 내 박스 더미 위에 놓아둔 계란판에서 네 개를 골라 담았다.
재유는 밖에서 신발로 바닥을 퍽퍽 긁어 대며 기다리고 있는 우주를 힐끔 보고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우주는 오는 내내 시무룩해 보였지만, 눈이 마주치면 입꼬리를 불쑥 끌어 올리며 재유의 집에 가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뒷맛이 남는 텁텁한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할아버지,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할아버지가 느린 걸음으로 계산대에 도착하자마자 비켜서는 척하면서 음료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을 계산대에 슥 밀어 넣었다.
기분을 풀어 줄 말재주도 주변머리도 없는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묘책은 알코올이었다. 한 번도 술을 사 본 적이 없던지라 머릿속에 비행, 탈선, 반항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벌써 열아홉이 됐는데도 이만한 일에 위축되는 스스로가 어이없다가도 어쩔 수 없이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복을 입고 있으니 더 그랬다.
정작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계란이 담긴 작은 봉지를 큰 봉지로 바꾸더니 술과 계란을 차곡차곡 담아 주었다.
“저이랑 친구였구먼.”
“네?”
할아버지가 봉지를 건네주면서 유리문 밖에 있는 우주를 향해 턱짓을 했다.
“네. 친구 맞는데… 왜요?”
“이 골목 사는 애도 아닌데 자주 오길래.”
“쟤가 여기 왔었어요?”
“으응, 여 앉아서 빵도 먹구 콜라도 먹구 그랬지.”
우주는 가게에서 등을 돌린 채 골목을 둘러보고 있었다.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메고 한 손만 바지 주머니에 꽂은 모습이 불량해 보이기는커녕 단정하고 개구져 보였다.
“…언제요?”
“아, 몰라. 4천 5백 원.”
“아 네….”
더 이상 대꾸하는 게 귀찮아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물건값을 치렀다. 그래도 수확물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마음을 바꿔 붙잡을까 봐 얼른 인사드리고 쌩하니 돌아섰다. 2주일 치 용돈을 한꺼번에 썼는데도 아깝다는 생각은 없었다.
밖으로 나가자 우주가 재유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다 왔어.”
우주가 비닐봉지를 들려고 하자 재유는 손에 든 것을 황급히 뒤춤으로 숨겼다.
골목길 두어 개를 꺾으면 집이었다.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둑해졌는데 아직 가로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골목이 좁고 집들이 촘촘히 붙어 있어 답답해 보였지만 영선의 집은 담 너머로 장독대가 보이고 작은 살구나무가 심겨 있는 정감 있는 단층 주택이었다.
집이 가까워 오자 재유는 긴장감에 손을 꼼지락댔다. 바짝 뒤따르는 우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초록색 철제 대문을 열고 바로 왼쪽으로 꺾어 셋방으로 향했다. 5평 정도 됨직한 마당 중앙에는 작은 수돗가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화분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장독대 옆은 공동 화장실이었다.
막상 데려오긴 했는데, 이런 집이 익숙하지 않을 우주가 불편해할까 봐 내심 초조해졌다.
열쇠로 문을 열고 재유가 먼저 들어갔다. 현관이라고 하기엔 신발 여섯 켤레를 두면 꽉 찰 공간이라 곧바로 안쪽으로 갔다. 우주도 신발을 벗고 따라 들었다.
3평 정도 되는 공간 오른편엔 한 칸짜리 싱크대와 소형 냉장고, 왼편엔 오래된 낮은 장식장과 협탁이 전부였다. 요리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는, 재유의 방이자 엄마와의 공동공간이었다. 셋방은 화장실이나 샤워시설이 없어서 배변이나 씻는 건 모두 밖에서 해결해야 했다.
집을 둘러본 우주는 약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천정이 낮아 우주가 가볍게 뛰기만 해도 정수리가 닿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귀퉁이가 찌그러진 은색 접이식 밥상과 부업거리로 받아 온 커다란 봉지들, 누렇게 변색된 소형 냉장고를 지나 정면에 보이는 방으로 향했다. 미닫이문이 달린 방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지퍼로 여는 천으로 된 옷장과 앉은뱅이책상이 보였다.
“…조금 좁지? 그래도 적응되니까 편해지더라.”
“아니야, 초대해 줘서 고마워.”
“잠깐 여기 앉아 있어.”
황급히 표정을 지운 우주는 싱긋 웃으며 싱크대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깔아 줄 방석이라도 있으면 좋았을걸, 생각하며 재유는 사 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옹색한 살림이 부끄럽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자연스러운 척 행동했다. 그래도 등 뒤의 우주가 의식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얼음물을 만들고 쟁반에 받쳐 우주 앞에 놓았다. 컵 아래에는 직접 실로 짠 흰색 컵 받침도 깔아 주었다. 우주는 잠깐 입술을 적시더니 안쪽 방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말투와 표정은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기가 자는 방이야?”
“어. 근데 저긴 엄마만 주무시고 난 이불 깔고 여기서 자. 그럭저럭 잘 만해. 의외로 공간도 충분하고.”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뻗어 방바닥을 넓게 쓸었다. 재유가 누워서 자는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맞은 편에 앉은 재유와는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 정도밖에 없었다. 우주의 손이 재유의 발끝을 살짝 스쳐 갔다.
“네 말대로 좁은 건 맞지만, 잘 가꿔 온 것 같은데? 애정을 가지고 하나씩 살림을 채운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가꾼다고 표현할 만한 방은 아니야.”
“그래도 이런 거 하나하나 꾸며 놓고, 또 깨끗하고.”
우주가 가리킨 건 컵 받침과 비슷한 모양의 천 조각들이었다. 냉장고 위나 장식장, 협탁 위에 깔개로 쓰기 위해 다양한 사이즈로 만든 것들이었다.
“이거 다 어머니가 만드신 거야?”
“아니, 내가 만들었어.”
“진짜?”
우주는 정말 놀란 듯 눈이 커다래져서는 컵 받침을 들어 실의 짜임이 만든 문양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재유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옅게 웃었다.
“전학 오기 전에 엄마한테 배웠거든. 코바늘로 뜬 거야. 엄마가 이런 거 좋아하셔서 소파 커버도 뜨고 자동차 시트 커버도 뜨고 그랬었어. 옆에서 나도 보다 보니까… 시간 보내기 좋아서 가끔 만들어.”
“진짜 손재주 좋다. 엄청 어려워 보이는데. 참, 작년 교지에 실린 그림 말이야… 그건 뭘 그린 거야?”
“교지? 아….”
전학 온 직후 편집부 동아리 학생 하나가 3일 내로 글이든 그림이든 제출하라고 해서 급하게 스케치한 것이었는데, 운 좋게 교지에 실려 반에서 잠깐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재유도 곧 잊은 일이었는데 우주는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잡지에 나온 사진 보고 그린 건데, 키지섬에 있는 성당들이야. 러시아에 있대.”
“실제로 있는 곳이었구나. 특이하게 생겨서 네가 상상으로 그린 건 줄 알았어.”
“그 정도 상상력은 없어. 그냥 예뻐 보여서 그린 거야. 그 섬이 좀 황량해 보였거든. 근데도 비슷한 건물 두 채가 있으니까 외롭진 않겠더라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근데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있어?”
“제일 잘 그렸으니까.”
당연하듯 말하는 우주의 칭찬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재유는 쑥스러운 듯 돌아서서 찬장의 조리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벌써 물 한 잔을 다 마신 우주가 쟁반을 들고 싱크대로 밀착해 왔다.
“도와줄까?”
“아냐, 금방 해. 넌 앉아 있어.”
“그럼 이거 씻어 놓을게.”
우주가 제가 마신 컵을 개수대에 넣고 정말 설거지를 하려고 하길래 어깨로 툭 밀쳐냈다.
“아우, 성가셔. 덩치도 큰 게. 넌 손님인데 설거지를 왜 해.”
“손님한테 성가시다니…. 가만 보면 날 아주 막 대하는 경향이 있어….”
재유는 금세 시무룩해져선 말꼬리를 흐리는 우주를 보며 픽 웃었다.
“그럼 여기 서서 구경만 할게.”
우주는 방해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비켜서서는 소매를 걷고 넥타이까지 풀어내며 알짱거렸다.
“어… 단추 떨어졌네?”
“응? 그러네. 언제 떨어졌지?”
우주의 교복 셔츠 두 번째 단추가 위태롭게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단추부터 달아야겠다.”
재유는 손에 물기를 닦고 방으로 들어가 반짇고리를 찾아왔다.
“흰색 실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조금 남았네. 여기 앉아 봐.”
재유는 우주 앞에 앉아 길게 늘어진 실을 가위로 잘라 내 단추를 제거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늘에 실을 꿰는데,
“저기, 옷을 벗어서 단추다는 게 편하지 않을까?”
하고 우주의 갈라진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오늘따라 우주는 교복 안에 받쳐 입는 러닝이나 티셔츠를 입지 않았다.
“아냐, 금방 끝나니까. 1분이면 돼.”
재유가 얼굴을 들어 눈을 맞추고 고개를 저었다. 넉넉하게 단추 네 개를 풀어헤친 셔츠에 매듭을 만든 바늘을 찔러 넣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옷을 입은 채로 단추를 달려니 바늘을 단춧구멍에 꿰어 길게 뽑아낼 때마다 가슴팍에 손등이 슬쩍슬쩍 닿았다.
매끄럽고 단단한 살의 감촉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면 이상한가.
그런 생각을 했더니 코앞에서 빤히 저를 보고 있는 우주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가늘게 숨을 뿜으며 오므리는 입술을 보자 왠지 고개를 들기가 어색했다.
큼, 재유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셔츠 안쪽에 여러 번 매듭을 지었다. 순간 얼굴이 셔츠 안쪽으로 향했다. 바느질을 마무리할 때마다 이로 실을 끊는 게 습관이어서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우주의 맨살에 뺨이 닿았다. 이로 잘근거리며 실을 끊는 짧은 순간, 우주의 콧김이 귓가를 훈훈하게 덮어 왔다.
“아 미안…. 다 됐어.”
재유가 얼굴을 떼자 우주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벌겋게 달궈진 귀가 선명하게 보였다. 재유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그를 내려다봤다. 우주는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다음에 또 단추 떨어지면 말해. 내가 달아 줄게.”
“어… 고마워.”
“…….”
재유가 반짇고리를 방에 들여다 놓고 싱크대 쪽으로 돌아섰다. 우주는 아까처럼 도와준다며 곁에 알짱거리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앉은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고 있었다. 제가 빨개진 걸 아는 것처럼, 얼굴에서 얼른 붉은 기운을 없애고 평소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그래 보였다.
이게 친구 사이는 아니다. 적어도 우주는, 자신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음을 재유는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만난 첫날부터 우주가 왜 그렇게 졸졸 따라왔는지, 왜 둘이서만 점심 먹자고 했는지, 왜 저녁 시간마다 밥도 미루고 자신을 배웅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매번 먼저 말 걸어오고, 어딜 가든 따라오고, 가끔씩 저렇게 빨개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오히려 늦게 알아차린 게 한심할 지경이었다.
“배고프지? 밥 먹자.”
“…….”
마음속 혼란이 제멋대로 날뛰기 전에 재유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부터 터트렸다.
“너 완숙 먹어, 아니면 반숙 먹어?”
“난 반숙. 안 터트린 거.”
“알았어.”
완숙 두 개와 반숙 두 개를 다 만든 재유는 식은밥과 김치를 꺼내 볶기 시작했다. 좁은 집에 김치 냄새가 꽉 찼다. 우주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출입문과 창문을 열고 밥상을 펼쳐 냄비 받침까지 깔아 두었다.
처음엔 열악한 환경의 집을 공개하는 게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다른 이유 때문에 뻘쭘하고 불편해질 것 같았다.
한동안 방 안에선 말이 없었다. 프라이팬이 가스레인지에 부딪치는 소리, 밥이 볶아지는 소리, 싱크대에 설거짓거리를 던져 넣는 소리만 셋방을 채웠다. 그 덕에 재유는 잠시나마 여유가 생겼다. 등 뒤에서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는 우주가 신경 쓰였지만, 무시하려고 애썼다.
“양이 좀 적나? 너 모자라는 거 아냐?”
좁은 상에 김치볶음밥을 덜은 그릇 두 개와 반찬으로 감자볶음, 고춧가루 양념한 콩나물무침이 놓였다. 재유가 빈약한 밥상이 신경 쓰여 조심스럽게 묻자, 우주는 이런 진수성찬이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휘저었다.
어색해하던 기색이 없어진 그를 보자 설핏 웃음이 났다. 우주는 어느새 익숙한 공간에 온 것처럼 자세도 편안해지고 표정도 밝아져 있었다.
“니가 만들어 준 건데 무슨 소리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도 안 먹는 건데.”
“하여튼 오버하기는…. 어서 먹기나 해.”
“아닌데? 나 진짜 아껴먹을 건데? 집에 싸가고 싶을 정도라고. 니가 해 준 밥 먹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재유는 유난 떠는 우주를 흘기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감동이면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알았지?”
벌써 한술 뜬 우주는 거의 울 듯이 눈을 일그러뜨리며 밥을 퍽퍽 씹어 댔다. 입 안에 든 음식이 순식간에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이거 봐. 맛있잖아. 너무 맛있다고!”
재유는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우주는 정말 맛있게도 먹었다.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 슥슥 비빈 볶음밥을 뺨이 불룩하도록 욱여넣고 재유가 일품 요리사라도 되는 양 치켜세웠다.
좀 전에 아버지를 만나 기분 상한 일은 애초에 없었던 듯이, 재유가 밥을 해 준 게 정말 기분 좋은 것처럼 해맑은 표정이었다.
가슴 어딘가가 지끈거리는 감각에, 재유는 제 밥을 덜어 주며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많이 먹어.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
“그럼 나 또 와도 돼?”
“네가 괜찮으면 뭐….”
우주가 이번에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래도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뜻밖에 일어난 기쁘고 벅차고 흥분되는 일을 천천히 음미하듯이 감정을 눌러 담은 듯한 얼굴로 재유를 바라볼 뿐이었다.
“잘됐다. 앞으론 너네 집 와서 놀아야지. 사실 너랑 좀 더 있으려고 땡땡이친 거였는데. 맨날 니가 먼저 가 버려서 속상했었거든. 아버지한테 고마워해야 되나?”
또 땡땡이 운운하길래 한 소리 하려다가 불쑥 꺼낸 아버지 얘기에 도리어 재유가 움찔했다. 재유는 밥숟가락을 든 채 눈만 들어 우주를 살폈다.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까 산 거, 좀 꺼내 봐.”
“응? 뭐?”
“나랑 같이 마시려고 산 거 아냐? 술.”
“아….”
재유는 앉은 채로 상체만 돌려 냉장고를 열었다. 최대한 모르게 숨기듯이 넣었는데, 어느 틈에 본 건지…. 재유는 일단 맥주 두 캔을 꺼냈다.
“나 속상할까 봐 산 거 맞지?”
“…….”
재유는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맥주캔을 열었다. 늘 그랬듯 재유 몫을 먼저 따 주고 제 것의 뚜껑을 땄다.
“그럼 나 마신다.”
우주는 맥주를 들어 재유의 캔에 짠, 하고 부딪치더니 크게 서너 모금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목젖의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보는 이에게 음주를 부추길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적어도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한 거리낌은 없어 보여 재유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집이 평소에도 그렇게 분위기가 딱딱하지만은 않아.”
아까부터 내내 두 사람 사이를 떠돌았던 화두에 대해 우주는 포괄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재유는 밥을 먹던 수저를 놓을까 고민하다 평범하게 듣고 있다는 걸 연출하기 위해 조용히 밥을 떠 넣었다.
“가족끼리 놀러도 자주 다니고 좋은 일 있으면 케이크 사다 축하도 하고 누가 안 들어오면 걱정도 하고… 평범해.”
“…….”
“아버지만 없으면.”
이번엔 수저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거의 다 먹어 부스러기만 남은 상태라 재유는 맥주캔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 아버지 보고 많이 놀랬지?”
“…조금.”
“엄청 보수적이고 무대뽀인 사람이야. 눈치챘겠지만. 그래서 엄마나 형이 많이 힘들어했어. 나도 마찬가지고.”
“…형이 있었구나.”
“응. 형이랑 나랑 둘. 지금은 군대 가서 좀 쓸쓸하긴 해. 어릴 때부터 나 많이 챙겨 줬거든. 아버지랑 사이가 별로라 그런가? 형제애는 좋아.”
“다행이다….”
“그나마… 그렇지. 특히 엄마가 힘들어하셨어.”
초등학교 때 엄마가 가출하신 적 있는데 그때 우주도 집을 나갔었단다. 갈 곳이 없어 하루 만에 돌아오긴 했지만. 근데 엄마는 한 달 있다 돌아왔다고 했다. 어디서 뭘 했는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입을 안 여시는 데 집안 분위기가 살벌해져서 조마조마했었다고.
“아버지가 엄마한테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넘어가서 진짜 웃겼어. 난 그때 정말 심각했는데.”
차라리 부모의 이혼을 바랐는데 그러지도 않고 집안 분위기는 예전과 똑같이, 아니 더 살벌하게 변했다고도 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부러 가볍게 말하는 우주가 더 안쓰러워 보였다. 잘난 아들 예쁘다 예쁘다 좀 해 주지, 잠깐 땡땡이 좀 친 거 가지고 무슨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그렇게 욕을 해 댔을까. 나라면 둥둥 안고 동네 사방팔방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인물도 잘났고 공부도 잘하고 어릴 때 개다리춤도 잘 췄을 거고 애교도 많았을 텐데.
‘규신기업 사장님’에 대한 부분은 영선의 아버지에게 들은 게 다지만, 지역사회에서 대체로 대범하고 사업 수완이 좋은 기업인이자 자산가로 평가되는 듯했다.
소기업이었던 장인의 회사를 이어받아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고 공장을 늘려 소형 가전을 만들다 자격을 획득해 자동차 의장 부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꽤 여러 회사에 납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제법 굵직한 자동차 부품 회사로 거듭난 경로에 염 사장의 엄청난 노력과 투지가 있었다는 성공 배경은 재유도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한 기업가의 이면에는 정반대의 사생활이 있었다. 차 안의 노기를 발산하는 얼굴은 다시금 떠올려도 오싹한 광경이었다. 우주는 사업가로서의 세간의 평가와 집에서 마주하는 아버지에 대한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문득 그의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이 일정 부분 꾸며진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 눈빛이….
아버지를 원망스레 노려보던 그 눈은 지난 세월을 농축해 담은 듯 익숙해 보였다. 하루아침에 생긴 적의가 아닌, 오랜 시간 퇴적되어 쌓이고 쌓인 것이었다.
시기나 상황은 다르지만, 재유는 어느 정도 그의 심정에 공감이 갔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대로 ‘아들 취급’을 해 주지도 않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고통과 좌절을 주므로 다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라는 대상에 대한 증오와 번뇌. 무를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지긋지긋한 천륜.
“근데 그게 너무 이상한 거야. 그 한 사람이 껐다 켜는 스위치가.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집안 분위기가 냉골 바닥인데, 안 계시면 뜨뜻한 아랫목이거든. 집에 한 사람만 없으면, 정말 완벽하게 행복한 가족인데. 어릴 때부터 그게 너무 이상하고 안타까웠어.”
너무 터놓고 얘기했다 싶었는지 우주는 쑥스러운 듯 흘러내린 것도 없는 짧은 머리를 슥슥 밀어 올렸다. 재유는 그저 얘기를 차분히 들어주며 조용히 동조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 꿈꾸고 있는지도 몰라.”
“뭘?”
“난… 가족이 갖고 싶거든. 내가 만든, 내 가족.”
“가족?”
“응. 적어도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고 말에 욕이 섞이지 않는 정상적인 대화를 하면서 사는 가족. 먼저 서로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이해할 건 이해해 주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살아가면서 천천히 수긍하고 맞춰 줄 수 있는….”
그런 가족.
“…네 말대로라면… 배우자가 중요하겠네?”
재유의 말에 의구심이 묻어났다. 방금 자기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는데, 우주의 말은 어쩐지 여자와의 미래를 꿈꾸는 것 같았다.
“뭐, 그렇지. 근데 배우자라 그러니까 왠지 거창하다.”
“벌써 결혼을 꿈꾸다니. 대단한데?”
뾰족하게 받아치는 말에 우주가 코를 쓱 문지르며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손바닥으로 뺨을 긁적이며 재유를 봤다. 어딘지 망설이는 듯한 초조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꼭 결혼한다고 가족이 되는 건 아냐. 결혼해서 남들 앞에 번듯해 보이는 가족이 되어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많잖아. 그냥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같이 부대끼면서 살다 보면 겉만 꾸미고 사는 가족보다 나은…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어.”
꼭 이렇게 모호하게 말할 때가 있었다. 신경 쓰지 말랬다가 너무 신경 안 쓰지 말라 그러고, 가족이 갖고 싶다면서 결혼에 대한 건 회의적이고.
우주는 가라앉은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다시 남은 밥을 우적우적 먹었다.
재유는 그의 얼굴을 보며 미묘한 의심을 느꼈다. 툭 터놓고 얘기하는 것 같지만, 전부는 보여 주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게 처져 있었다.
일견 우주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재유의 부모님도 집안의 반대는 있었을지언정 정식으로 혼인신고도 하고 자식도 낳았지만,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한데, 우주가 말하는 ‘진짜 가족’이라는 게 결혼에 구애받지 않는 거라면, 그 가족의 원동력은 ‘사랑’이 밑바탕이 될 텐데, 그 말은 좀 어폐가 있었다.
부모님 세대야 그렇다 쳐도 요즘은 결혼의 밑바탕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당사자의 의사가 제일 중요한 시대가 되었는데, 그가 말한 ‘진짜 가족’에서 굳이 ‘결혼’이 빠져야 할 건 또 뭔가.
갑자기 부탁해도 호화스러운 도시락을 보내 주고, 새것 같은 교복에, 좋은 가방과 운동화에, 과외도 시켜 주는 집에서 우주는 행복해 보이고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바른말을 쓰고, 친구를 염려하고, 장난기가 있는 좋은 녀석이었으니 ‘다 가진 놈’이라고 우스갯소리도 나올 만큼. 그런데 막상 그 집에서 우주는 결핍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우주는 누군가와 빨리 함께하고 싶은 모양이다. 겉으론 보이지 않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마음 깊이 갈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순간, 녀석이 일찍 결혼해 버리면 왠지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유는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며 손에 쥐고만 있던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무심결에 나온 행동이었다. 맥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코끝이 찡해지고 울컥 목이 막혔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욕지기를 겨우 삼켜냈다.
맥주가 이런 맛이었나. 생각보다 너무 맛이 없어서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잘게 진저리를 쳤다.
“…너 술 처음 마셔?”
숨긴다고 숨겼는데, 단번에 들켜 버렸다. 알코올 때문인지, 술도 못 마시는 재미없는 놈이란 걸 들킨 것 때문인지 별안간 낯이 뜨거워졌다. 재유는 세게 기침을 뱉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넌? 많이 마셔 봤나 봐?”
“나? 난 형한테 배웠지. 형 입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셨어. 이젠 휴가 와서도 나랑은 안 놀아 줘서 오늘은 진짜 오랜만에 마시는 거야.”
“형이랑 진짜 친한가 보네.”
우주가 비슷하게 닮은 제 형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술을 마시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재유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부러운 듯이 말했다.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게 목 안으로 넘길 만했다.
“뭐… 앞으론 너랑 마시면 되지.”
결혼이나 가족 얘기를 꺼낼 땐 담담하던 놈이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발목을 바짝 끌어당기며 부끄러워했다. 어깨를 바짝 세운 채 고개를 숙이더니 얼굴까지 붉히며 쭈뼛대고 있었다. 그 반응에 재유까지 덩달아 멋쩍어져 시선을 돌린 채 맥주를 홀짝였다.
“난 어차피 술도 잘 못 마시는데….”
“에이, 섭섭하게 왜 그래. 그럼 나랑 안 마실 거야? 그건 아니지?”
“…….”
10대 후반의 장성한 사내놈 둘이서 쪽방에 마주 앉아 있으니 그런 건가?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맥주 몇 모금에 취한 것도 아닐 텐데.
속으로 하는 생각도 뒤죽박죽, 갈팡질팡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이러저러한 일들 때문에 충격이 컸나 보다. 난생처음 마신 술은 위력이 셌다. 재유는 허무맹랑한 제 생각을 덮으려 손바닥으로 뺨을 툭툭 치고 다시 맥주를 들었다.
“너 소주도 사 왔잖아. 그것도 마셔 버리자.”
우주는 붉어진 귓불을 긁더니 센 척하며 말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제집 살림처럼 소주와 컵 두 개를 들고 다시 상 앞에 앉았다.
“너 규신기업에 지원할 거지?”
재유는 우주가 소주 뚜껑을 따는 걸 무심코 바라보다 갑작스레 나온 화제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말한 적 없는데….”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딨냐?”
턱을 바짝 내밀며 뻐기듯이 말하는 우주는 물컵으로 쓰는 유리잔 바닥에 낮게 깔릴 정도로 소주를 따라서 재유에게 건넸다. 재유는 받은 잔을 마시지 않고 밥상에 내려놓았다.
“울 아버지가 규신기업 사장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응.”
재유는 우주 눈치를 슬쩍 보며 우물거렸다. 미리 말 안 해 준 것 때문에 조금 신경이 쓰였었는데 정작 우주는 “으응, 그렇구나.” 하며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소주는 저에게도 쓴지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거기, 사장은 괴팍한데 회사는 나쁘지 않아. 우리 학교에서도 매년 열 명 정도 취업하거든.”
우주는 응원의 웃음을 담아 격려하듯 어깨를 토닥였다. 워낙 방이 좁아 손만 뻗어도 서로에게 쉽게 닿았다. 우주가 만지고 떨어져 간 어깨가 신경 쓰였다. 교복 소매 안쪽 팔에 짜르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방학하면 바로 원서 쓰고 면접 볼 거야. 중간고사 성적도 좀 올랐고. 네가 많이 도와줘서…. 암튼 여러 가지로 고마워.”
낯간지럽다는 듯 우주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제 잔에 소주를 따랐다.
“월급 받으면… 맛있는 거 사 줄게.”
“정말?”
“그럼. 너한테 신세 진 것도 많은데. 수능 끝나면 술도 사 줄게.”
재유는 벌써부터 밥과 술을 얻어먹은 듯 황홀한 기대를 하는 그를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사실, 내가 먼저 집에 가자고 한 친구는 네가 처음이야.”
“응?”
“서울 살 때도 원래 잘 안 데려오거나, 친구가 우기면 어쩔 수 없이 데려오거나 그랬었거든.”
재유는 ‘처음’이라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열아홉 해 살면서 모든 첫 순간을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기리는 장면들은 몇 개 있었다. 혼자서 처음 버스를 탔을 때나 처음으로 아빠에게 말대꾸를 했던 날, 처음 본 바다의 풍경 같은….
우주가 강변길에서 아버지에 대한 감정으로 북받쳐있을 때 충동적으로 그를 집에 데려오려 했던 순간도 아마 재유에겐 처음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술을 마신 것도 오늘이 처음이니 기억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혼자 간직하려던 속내를 우주에게 조금은 내보이고 싶었다.
“…….”
별거 아닌 말로도 이렇게 벅찬 표정으로 감동받은 듯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으니까.
“취했나 봐. 나 누워도 돼?”
“응. 베개 갖다 줄게. 상 좀 치우고….”
우주는 상을 냉장고 옆에 밀어 두고 재유의 팔을 붙들어 제 앞에 앉혔다. 그리고 재유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천연덕스럽게 풀썩 드러누웠다.
“야… 뭐 해?”
“잠깐만 이러고 있자. 피곤해서 그래. 응?”
우주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서 정말 잘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우주의 뒷머리가 아랫배에 찬찬히 닿았다. 재유는 숨을 살살 내쉬면서 몸을 젖혀 팔을 뒤로 뻗었다. 머리가 아찔한 게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맥주도 아직 남았는데 재유는 소주잔에 손을 뻗었다.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왠지 우주를 내려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술의 힘이 필요했다. 소주는, 맥주와는 전혀 다른 괴상한 맛으로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목 안쪽에 기분 나쁜 열감이 퍼져 재유는 손으로 제 목을 잡아 뜯었다.
“너 소주도 처음이구나?”
“…….”
“좀 감동이다. 술도 안 마셔 봤으면서 나 기분 풀어 주려고 그랬다는 게. 술 사 본 것도 처음이지?”
놀리는 건지 신기한 건지 우주는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재유를 올려다봤다. 허벅지에 뭉근하게 닿아 있는 뒷머리가 신경 쓰여 자꾸만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술 센 척해도, 너도 얼굴 빨개졌거든?”
“맞아. 나 취했어.”
다시 몸을 웅크리고 취한 척, 자는 척 자세를 잡는 우주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하기만 했다.
“베개 갖다 준다니까. 편하게 누워.”
“…이게 편한데.”
우주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자꾸 허벅지 안쪽으로 머리를 고쳐 베려 했다. 대범한 움직임에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우주가 내뿜는 작은 숨이 옷 안의 살을 데우는 듯한 야릇한 기분에 재유는 차라리 다리를 곧게 뻗어 버렸다.
“지금 이거… 이상한 거, 너도 알지?”
“뭐가?”
우주는 눈을 감은 채 반문했다. 꿈결에서 흘러나올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래? 성종이나 현근이 무릎에서도….”
“아니, 전혀.”
우주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얼굴을 대번에 찌푸리며 칼같이 거부반응을 보였다. 생각만 해도 께름칙한지 어깨까지 부르르 떨면서.
“근데 너한텐 왜 이러냐고?”
“…….”
“오늘만 봐줘. 그냥 술 취해서 주정 부린다고 생각해.”
말투는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은데, 정말 술이 오른 건지 아직도 우주의 귓가가 빨갰다. 머리의 무게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이렇게 누워 있는 우주도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웅크린 커다란 등이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지친 짐승처럼 느껴졌다. 약한 모습을 봐서일까. 재유는 자신이 그런 감상을 했다는 게 놀랍진 않았지만,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
“응?”
“그 섬 말이야. 러시아에 있다는…. 나중에 나랑 같이 가자.”
우주는 잠에 취한 듯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날이 머지않은 것처럼, 곧 갈 수 있을 것처럼, 스스로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그때까지 연락하고 지낸다면 뭐.”
“너무하네. 넌 가끔 졸업하면 나 안 볼 것처럼 얘기하더라?”
애써 불만을 감추는 목소리에 헛웃음이 섞여 있었다. 못내 서운한 듯 치이, 하며 어린애들이나 하는 추임새도 서슴지 않았다. 얼굴이 안 보여 표정을 알 순 없지만, 아마 입이 한 발은 나와 있을 것 같았다.
“여건이 안 될 수도 있잖아. 앞으론 생활도 달라지고 얼굴 볼 날도 별로 없을 텐데.”
“난 너 계속 만날 건데? 네가 취업해도, 고등학교 졸업해도, 내가 서울 가서 떨어져 살게 돼도… 난 너 계속 볼 거야.”
목이 잠긴 듯 목소리가 좁아졌다. 우주는 재유의 무릎을 잡고 몸을 한 번 더 뒤채더니 정말 잠들 것처럼 자세를 고쳐 잡았다. 커다란 손이 어루만지며 달래듯 재유의 무릎을 살살 쓰다듬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표현하고, 관심과 걱정을 담은 눈으로 바라봐 주고, 자신이 주는 조그마한 친절에 온 마음을 다해 기쁜 듯이 웃어 주는데. 어떻게 우주를 거부할 수 있을까.
“그래. 그러자.”
그의 옆얼굴에 귀뺨이 실룩거렸다.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재유는 뒤로 물렸던 몸을 앞으로 끌어와 바로 위에서 우주를 내려다봤다. 짙게 까만 속눈썹이 감은 눈 아래로 파르르 떨렸다. 재유는 순하게 잘생긴 얼굴을 조금은 복잡한 심정으로 한참을 보고 있었다.
정말 잠이 들었는지 다리에 서서히 무게가 느껴졌다. 우주의 뺨이 닿은 곳에서부터 열기가 퍼져 나가는 느낌에 얼굴이 붉어졌다. 재유는 조용히 소주를 따라 마시며 우주처럼 술 핑계를 댔다.
속내를 털어놓은 조촐한 밥상도, 평소보다 더 진해진 접촉도, 지금 느끼는 아릿한 감정도, 모두 술 때문이라고.
***
1999년 7월,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중세를 살다 간 노스트라다무스가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한다. 99년 이전에는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던 프랑스 예언가의 말대로라면 지구의 종말까지는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입시가 두려운 일부 고3들은 차라리 대재앙이 지구를 덮어 세상이 한순간에 소멸되기를 빌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차근차근 수능일은 다가왔고, 오늘은 모의고사를 봐야만 했다.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한가하게 공부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건지. 꼭 예언이 아니더라도 2000년 1월 1일이 되면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컴퓨터가 초기화되어 전기도, 인터넷도 안 되는 대혼란에 휩싸인다는데. 그럼 대학이고 직장이고 다 무용지물이 되는 건 아닌지.
그런데도 세상은 잠잠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학교를 가고, 직장을 가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하루의 일과를 살아가며 제 할 일을 했다. 하지만 차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새천년을 앞둔 20세기 마지막 해에 사람들은 세상이 뒤집어질 만한 대격변을 기대하거나,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혼재된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혼란’과 ‘들뜸’과 ‘설렘’이 자리한 세기말이었다. 기묘한 해인 것은 틀림없다.
장운고 3학년 1반 19번 한재유도 그랬다.
종말 때문이 아니라, 우주 때문에.
이름도 참 절묘하지. ‘우주’라니. 미지와 신비의 환상의 세계 같은 그 녀석은 세기말의 혼란, 그 자체였다.
재유는 학교 근처 2층짜리 상가 건물을 기점으로 걸음 속도를 늦췄다. 여기서부터 우주와 등굣길 동선이 겹치는 곳이었다. 지금껏 땅만 보고 걷던 고개를 들어 올려 조금씩 주위를 살폈다. 언젠가부터 재유에겐 이런 습관이 생겼다.
똑같은 교복 사이에서도 키나 덩치가 월등히 커서 한눈에 윤곽을 찾을 수 있었는데, 오늘따라 눈에 걸리는 게 없었다. 그게 아쉬워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헛웃음이 났다. 어차피 교실에 가면 하루종일 함께일 텐데, 그 짧은 등굣길이 뭐라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지.
언제부터 이렇게 우주를 신경 쓰게 됐을까.
우주에 대한 마음을 의식하고 나자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눈에 거슬렸다. 우주가 이발을 하는 주기,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 손이 많이 가는 반찬, 집중할 때 이마를 긁는 습관, 샤프를 잡는 방법, 노트를 정리하는 순서 등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시선을 끌었고 마음이 쓰였다.
재유는 교문 바로 앞 자전거 보관소에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늦을 모양인지 우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험인데 정신 차려야지.
재유는 또 우주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번째 모의고사이자 3학년 들어 세 번째 치르는 시험이었다. 예상대로 첫 모의고사는 망쳤지만, 중간고사에서는 성적이 조금 올라서 이번 시험은 약간의 기대가 생겨났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집중해서 공부해 왔고, 우주가 도와주는 부분도 많았기에 학기 말이 되면 무난히 내신을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일단은 시험에 집중해야 했다. 재유는 교실에서 문제집의 오답을 체크할 요량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험은 부담됐지만, 모의고사는 야자가 없어서 좋았다. 알바도 쉬는 날이니 시험이 끝나면 우주와 함께 집으로 가서 맘 편하게 놀기로 했다.
교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재유는 제 얼굴에 웃음기가 떠다니는 걸 알아챘다. 오랜만에 방과 후가 기대되는 날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우주를 데리고 뭘 하고 놀지를 생각하는 게 사뭇 즐거웠다.
“…….”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교실 문을 바라보던 재유는 기시감을 느꼈다. 문 앞에 여자애가 서 있었다. 재유는 그게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개학 첫날 우주에게 편지를 줬던 단발 2학년이었다.
“…저기요, 이것 좀.”
여학생은 재유를 마주치자 또 편지를 내밀었다. 그날과 똑같이.
2학년도 시험 아닌가? 한가하게 연애편지라니. 고3을 짝사랑하는 사정이야 안타까웠지만, 이번엔 순순히 편지를 전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재유는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보다, 짝사랑은 맞는 걸까?
너무도 당연하게 쌍방은 아닐 거라 결론짓는 스스로에게 조소가 났다.
우주가 저에게 유별나게 친절하고 다정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동성 친구일 뿐인데. 여자친구를 사귀든 연애편지에 답장을 하든 자기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미묘하게 마음속에서 균열이 생겼다.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재유는 왠지 모르게 여학생에게 적대심이 생겨 차가운 눈초리로 말했다.
“이런 건 직접 전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시험 날 아침부터 이런 편지를 받으면 집중 못 하지 않겠어요?”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했는지 여학생의 우물쭈물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안 받아 준단 말이에요!”
여학생은 얼굴이 벌게져 편지를 재유 손에 던지듯이 전해 주고 계단을 뛰어서 내려가 버렸다. 재유는 민망해하는 여학생을 보자 죄책감이 들었다. 그냥 전해 주라는 것뿐인데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 버렸다.
계단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착잡하고 꿀꿀했다. 손에는 볼록한 하트 스티커가 붙은 예쁜 분홍색 편지가 들려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교실로 들어가자 시험 대형으로 자리가 한 칸씩 띄워져 있었다. 시험 날은 번호순대로 앉기에 우주와 제법 떨어진 자리였다.
의자에 앉은 재유는 손에 든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고 예쁜 글씨로 쓰인 우주의 이름이 눈에 거슬렸다. 누군가가 그에게 애정을 갖고 마음을 받아 주길 바라면서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갔을 편지를 보는 심정은 복잡하고 뒤숭숭했다.
편지를 열어 뭐라고 썼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예쁜 여학생이 우주에게 어떤 식으로 고백하고 얼마나 간절하게 마음을 받아 주길 바라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재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학기 초에는 잘만 전해 주던 편지였는데, 이제는 사심이 껴 버렸다.
이 감정이 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재유는 우주에게 다가가려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꼈고, 자신이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마음과 달리 재유는 편지를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전해 주기도 싫었다.
우주의 서랍에 넣어 두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입구에서 마침 교실로 들어서는 우주의 모습이 보였다.
우주도 재유를 찾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받자마자 넣어둘걸, 괜히 심술이 나서 재유는 무심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버스가 너무 늦게 와서 좀 늦었어.”
“…….”
우주는 책상 옆에 다리를 굽히고 앉아 재유를 올려다보며 소곤거렸다.
“어제 알바 끝나고 집에서 공부했어?”
“…….”
“시험 떨리지? 이거 마시고 해.”
“…….”
“재유야, 무슨 일 있어? 컨디션 안 좋아? 왜 말이 없어?”
캔커피를 건네던 우주는 반응이 없는 재유를 보고 점점 미소를 지웠다. 어디가 아픈 건지, 집에 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제가 뭘 잘못한 게 있는지, 재유의 표정을 다양하게 점쳐 보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유는 무릎 위에 쥐고 있던 편지를 툭 건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갖고 있기도 좀 그랬다. 편지를 앞뒤로 뒤집어 보던 우주는 출처를 확인하더니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황급히 바지춤에 쑤셔 넣었다.
“이거 때문에 그래?”
우주의 한마디 말에 재유의 기분이 정의되는 순간이었다.
전에 없이 뚱한 표정도, 시위하듯 입을 닫고 있는 것도 저 편지가 원인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상황은 복잡 미묘했다. 재유는 순식간에 애인에게 어필하는 다른 이성을 질투하는 걸 들킨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란 참… 어떤 표현도 꼭 들어맞는 게 없었다. 좆같았다.
“아냐. 머리가 좀 아파서.”
“…….”
재유는 우주의 말을 곧바로 부정하며 변명했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웃고 싶은데,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됐다. 혼란과 들뜸이 계속되었다. 화가 나고, 슬프고, 안타깝고, 창피하고, 안달이 나고, 짜증이 났다. 온갖 감정과 기분이 널을 뛰며 머릿속을 들쑤시고 있었다. 억누르기 힘든 감정들이 저마다의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가슴 속 연한 속살을 할퀴는 것 같은 생생한 괴로움이 느껴졌다.
“교실 앞에서 누가 전해 달라고 해서 받아놓은 거야.”
최대한 동요를 숨기며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편지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평소 같지 않은 건 전부 티가 나겠지. 재유는 우주의 눈도 못 쳐다봤다.
“…잠깐 밖에서 얘기 좀 할래?”
우주는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호소하는 목소리로 고개 숙인 눈을 마주 보려 했다. 재유는 가방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쳐 놨다. 왼쪽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손바닥을 펼쳐 옆얼굴을 가리며 우주의 시선을 차단했다.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나 문제집 봐야 돼. 시험 끝나고 얘기하자.”
“…….”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우주가 일어섰다. 커다란 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알았어. 시험 잘 봐.”
어깨를 힘주어 한 번 주무른 손은 부드럽게 떨어져 나갔다. 곁눈질로 우주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자 긴장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정신 차리기 위해 펼쳐 둔 책에 집중했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씨를 어떻게든 읽어 보려 잔뜩 인상을 썼다. 지금 보니 펼쳐진 책이 문제집도 아니었다. 어이없는 탄식이 흘렀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하고 편지를 전해 주기만 하면 넘어갔을 텐데, 어색하게 긴장한 모습만 들켜 버렸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우주에게 미안해서 속이 상했다.
점점 교실이 차고 다들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재유도 어수선한 생각을 몰아내고 문제집을 다시 꺼내 집중하려 노력했다.
다들 제 할 일을 하고 있으니, 재유도 혼란과 들뜸을 가라앉히고 시험을 봐야 했다.
***
외국어 영역 답안지가 걷히고 마지막 종이 울렸다. 다들 일사불란하게 책상을 원위치로 되돌려놓고 종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과 똑같은 과목, 똑같은 시간으로 치러지는 시험인지라 아직도 반 분위기가 예민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로 답을 비교하며 가채점도 해 보고 점수를 예상하는 동안 몇 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담임은 올 기미가 없었다.
“어땠어, 시험?”
“…좀 어려웠어.”
머뭇머뭇 눈치를 살피며 묻는 우주에게 짧게 답했다. 두 사람은 하루종일 이런 식의 단답만 주고받았다. 화장실을 갈 때나 급식실에 갈 때면 우주는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재유의 기분을 신경 쓰고 염려했다. 재유는 시험이 다 끝나고 나서도 꽁하게 눈도 못 쳐다보는 제 성격이 답답하고 한심스러웠다.
“야. 담임이 종례 없다고 그냥 가란다.”
교무실에 다녀온 반장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소리치자 반 애들은 담임 욕을 하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유도 필통을 마지막으로 집어넣으며 가방을 쌌다. 최대한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온 신경이 옆자리로 쏠려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른 척 먼저 일어나 우주가 반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제 모습이 우주에게 어떻게 비칠지 하나하나 다 마음에 걸려서 진이 빠질 것 같았다. 재유는 지금,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
“애들 다 가면 잠깐 얘기 좀 하자.”
“…….”
담담하게 말한 우주는 시험지를 정리해 가방에 넣고 내일 보자는 친구들에게 손 인사를 하며 차분히 자리를 지켰다. 재유는 가방을 끌어안으며 책상 밑으로 다리를 달달 떨었다. 긴장감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았다.
“재유야. 나 좀 봐 봐.”
교실이 전부 비워지고 둘만 남았을 때 우주가 말을 꺼냈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재유가 미동도 없자 우주가 재유의 상박을 붙잡아 억지로 돌려 앉혔다. 재유는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책상 모서리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끝이 헤져 나무 거스러미가 돋은 낡은 책상을 집착적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다 네가 그런 편지를 두 번이나 전해 주게 됐네.”
우주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곧바로 편지 얘기를 꺼냈다.
“나 사실… 너 만나고 나서부터 그런 편지 읽어 본 적 없어. 그 후로도 몇 번 받긴 했는데, 편지 받은 거 자체를 깜빡했던 것 같아. 누군지도 잘 몰라.”
“직접 전해 줬다던데… 네가 안 받아 줬다면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묻자 우주가 낮게 웃었다. 드디어 목소리를 들었다는 안도감이 묻어난 웃음이었다.
“아. 그럼 걔였나? 얼마 전에 매점 갔을 때 그랬던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이런 거 공부에 방해되고 부담스럽다고 안 받았어.”
“…….”
“제대로 거절했었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우주는 저 스스로 편지에 대해 열심히 항변했다. 재유가 질투하는 애인처럼 보였다면, 우주는 오해받는 게 싫어서 결백을 증명하는 애인처럼 굴었다. 역시 이상했다. 이상한데, 자연스러웠다.
재유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며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우주가 이성에게 대시를 받을 때마다 무관심으로 대응했던 게 저에게 묘한 안도감을 줬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렇게 열심히 해명을 해 주는 것도 미덥기 그지없었다.
옆자리에 앉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주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공부를 물어보러 오는 여학생들도 종종 있었고, 수업 시간에 쪽지를 받는 일도 다반사였다. 심지어 옆 반에서도 굳이 우주를 찾아와 책을 빌려 가곤 했다.
왜 인기가 많은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훤칠한 인물에 공부도 잘하고 호감형 말투에 친절한 행동거지까지.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이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우주가 연애편지를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왜 제 것을 뺏기는 기분이 드는 건지.
이래도 되는 걸까. 같은 남자인데….
우주의 손이 다가와 재유의 얼굴을 가린 손을 걷어냈다. 무심코 들어 올린 시선에 우주와 눈이 맞부딪혔다. 안타까움이 묻어난 간절한 눈빛이 재유를 향했다.
“왜 그런지 넌 알지?”
아… 재유에게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금세 머릿속에 경계선이 그어졌다. 재유가 우주를 좋아하는 속마음을 안으로 품는 것과 밖으로 꺼내 놓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
재유는 서울을 떠나 전학을 오면서 저를 둘러싼 동그란 금을 쳐두었다. 금 밖으로 나가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튀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과 비난과 모욕으로 비롯된 관심을 받는 건 진절머리가 났다. 하물며 박애나 연민일지라도.
그런데 지금 우주의 말을 인정하면, 스스로 금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남자끼리니까.
그럴 수는 없겠지.
이 분위기가 이대로 흘러간다면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미안해. 내가 괜히 이것저것 참견했네. 그냥 여자 후배가 준 편지일 뿐인데. 걔 귀엽더라. 면전에서 편지를 거부했으니까 상처받았을 거야. 적어도 편지라도 읽어 보고 생각해 봐.”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려 하자 우주가 재유의 팔을 거세게 붙잡아 앉히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재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뭐? 누구….”
“근데, 걔도 나 좋아하는 것 같아.”
우주의 눈이 흔들림 없이 재유에게 꽂혀 있었다. 그 눈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거짓 없이 단호하고 우직하며 한없이 부드러운 그의 눈이 오직 자신만을 향했다. 재유의 엉성한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작년부터 좋아했어. 복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고,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날 알아봐 줬으면 좋겠고….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마음은 계속 커지고….”
“…….”
“…아니다. 걔도 날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은 취소.”
몰아붙이던 그의 태도가 재유를 보며 점점 사그라들었다. 움직임을 멈춘 듯 경악에 찬 자신의 표정이 비췄으리라.
재유는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혼란에 휩싸였다. 교실에 둘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누가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좋아해, 재유야. 진짜 좋아해.”
우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벼르고 벼른 일을 마친 듯 탄식 같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이런 일에는 미숙해 보였다. 당황과 흥분, 침착을 잃은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데도 재유를 피하지 않는 눈빛만은 한결같아서, 다짜고짜 외면만 할 수는 없었다. 우주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마주 본 재유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언젠간 고백을 하고 싶었지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어. 네가 불편할 걸 알면서도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 넌 날 친구로만 생각하는 거 아는데, 네가 너무 잘해 주고, 나한테 계속 웃어 주고… 또 네 옆에 있으니까 네가 나만 봤으면 좋겠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옆에 있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만… 잠깐만.”
진심을 담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재유의 안에 거침없이 꽂혀 들었다. 너무 와닿아서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경직되었다. 시험만 해도 부담스러운 날이었는데, 하루 동안 감당해야 할 에너지가 지나치게 소모된 느낌이었다. 재유는 무작정 말을 끊었다.
분명 좋기는 좋은데, 부푸는 마음 한구석에 불안과 공포도 분명 존재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혼자서 망상을 펼치는 것은 익숙한데, 쌍방으로 마음을 터놓은 다음의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는 아직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재유는 ‘만지고’ 싶다는 우주의 말을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성 친구들보다 동성 친구들이 훨씬 많은 환경에서 자랐으니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진 건 당연히 여자일 거라 의심하지 않았었다. 먼 미래를 어렴풋이 그려 볼 때도 결혼이나 자식을 떠올렸지, 동성 애인과 연애를 하는 제 모습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감정도 아직 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고백을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그에게 실수를 하지 않을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우주도 그래 보였다. 화르륵 붉어진 얼굴이 안쓰러웠고, 애절하게 매달려 오는 감정이 그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미안해…. 먼저 가 볼게.”
적어도 우주를 안심시켜 줄 말을 해 주고 싶은데, 그가 상처받을 게 뻔한 걸 알면서도 재유는 단호하게 일어섰다. 우주 역시, 아마도 이런 고백을 하는 건 처음일 테지만, 재유도 한계인 건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
“오늘은 이렇게 가도, 내일은 평소처럼 대해 줘. 내가 고백한 걸 잊으라는 게 아니라… 네가 모른 척하면 나, 진짜 힘들어질 것 같아. 응? 재유야.”
돌아본 우주의 표정이 너무도 괴로워 보여서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해 준 이 상황이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는데, 고백한 사람이나 고백 받은 사람이나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주가 계속 눈에 밟혔으면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고 설레었으면서. 그 여자애가 편지를 준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상했으면서, 왜 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거나 끌어안는다면 너무도 쉽게 이 괴로움이 끝날 것 같은데. 금 밖으로 나가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일 텐데.
“내일 보자.”
탁한 쇳소리를 내뱉자마자 재유는 우주를 교실에 남겨 두고 돌아섰다.
***
“야! 문 좀 열어 봐.”
저녁 무렵 찾아온 방문객이 발로 문을 툭툭 차며 큰 소리로 재유를 불렀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재유는 화들짝 놀라 얼른 문을 열었다. 영선이 다 마른 빨래들을 두 손 가득 들고 서 있었다.
“얼른 받어. 빨래도 안 걷고 뭐 하냐?”
“아, 미안.”
“나 잠깐 들어간다.”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온 영선의 손에는 만화책 서너 권 정도가 들려 있었고, 카디건 안쪽에서도 몇 권 더 나왔다.
“또 만화책 빌렸어?”
“어. 집에서 몰래 읽으려고 했는데 오늘 엄마 아빠가 밖에 안 나가네. 일요일이면 맨날 산에 가면서. 여기서 좀 놀다 갈게.”
영선은 협탁 위에 만화책들을 쌓아 놓고 주머니에서 쫀드기를 꺼내 봉지를 뜯었다. 끄트머리를 잡고 쭉 찢어서 재유 입에 넣어 준 뒤 만화책 한 권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재유는 쫀드기를 천천히 씹으며 빨래를 개켰다. 정신이 멍해서 그런가, 평소와 달리 손이 느리다 못해 수건을 개다 말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 일 있냐?”
“아니. 그냥….”
“우주랑 싸우기라도 했어?”
“어… 어떻게 알았어?”
우주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그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선은 코웃음을 치며 침 바른 손으로 만화책을 넘겼다.
“주말마다 오던 놈이 안 보이니까 그렇지.”
“아….”
처음 집에 데려온 이후로 우주는 땡땡이치는 건 관뒀지만, 주말 중 하루는 꼭 집에 놀러 왔었다. 토요일에 알바가 없으면 학교 끝나고 같이 집에 가기도 해서 주말 내내 얼굴 본 적도 있었다.
우주가 놀러 오면 영선의 집에서 셋이서 비디오를 보기도 하고, 방에 머리 맞대고 앉아 함께 인형 눈을 붙이거나 엄마가 끝나는 시간에 함께 마중을 가기도 했다.
우주는 주말 과외 스케줄까지 조정할 정도로 재유네 집에 놀러 오는 데에 진심이었다. 재유가 알바를 하지 않았거나 우주가 야자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매일같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3학년이 되고 나서 얼굴이 밝아졌다며 재유에게 친구가 생긴 걸 반가워하셨다. 우주가 집에 있을 땐 소시지를 구워 주거나 과자를 사 오기도 하며 아들과 놀아 주는 기특한 친구를 예뻐하셨는데….
우주가 집에 놀러 오지 않은 지 벌써 2주째였다. 두말할 것 없이 모의고사 날 있었던 일 때문이다.
“싸운 건 아냐.”
“그래? 그럼 왜 안 온대?”
“걔 주말마다 과외 받잖아. 다른 약속이 있을 수도 있고.”
영선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재유를 훑었다. 꿍꿍이속에 감춰 놓은 거 다 안다는 듯 띠꺼운 표정이었다.
“흐음… 우주 생각은 다르던데?”
“뭐가?”
“어제 우리 반에 나 찾아왔더라고.”
“…왜? 뭐랬는데?”
재유는 무심한 투로 물었지만, 영선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 너랑 같이 외출할 일 있으면 전화해 달라고.”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너랑 나랑 주말에 밖에 나갈 일이 뭐가 있어?”
“그치…. 그게 다야?”
영선은 재유의 되물음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표정이 짓궂어졌다.
“니네 뭐야? 연애라도 하냐?”
“뭔 소리야. 갑자기….”
재유는 동요를 숨겼지만, 속으로는 경악했다.
“니네 같이 있는 거 보고 있으면 그래 보이더라고. 특히 우주 눈이 쫌, 뭐랄까. 멜로나 로맨스랄까? 아우, 느끼하더라 야.”
재유는 들켰다는 당혹감과 두려움에 말을 잃고 건너편 벽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신이 그렇게 알기 쉬운 사람인가. 표정만 보고도 알아채다니.
“뭐야, 왜 말이 없어? 진짠가 보네?”
“…….”
“야. 농담이야 농담.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떠봤다는 건가? 재유는 긴장감에 여전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영선은 표정 풀라는 듯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순진한 애한테 괜히 과한 농담을 해서 놀라게 했다는 자책을 했다.
농담이 사실이라 그렇지 영선아, 너무 예리해서 찌르면 피 나겠다, 재유는 허망한 얼굴로 영선을 봤다.
“왜 그런 농담을 해….”
“아 미안해. 안 그럴게, 이제.”
영선은 다시 만화책을 보는 것 같더니 “근데 이상하단 말이야?” 하곤 미간을 좁히며 스읍, 입소리를 냈다.
“뭐가?”
“봤거든. 우주가 너 몰래 따라다니는 거.”
“뭐? …언제?”
“좀 됐어. 너 이사 오고 얼마 안 돼서. 한 번 본 것도 아니야.”
“…정말이야?”
“넌 몰랐나 보네? 우리 집 기웃거리길래 첨엔 걔가 나 좋아하는 줄 알았지. 근데 아니더라고. 걔네 집 엄청 으리뻔쩍하다던데 우리 동네 살 리도 없고. 우리 집이 길 잘못 들어서 올 수 있는 데도 아니고. 이 좁은 골목길에 뭐 하러 왔나 싶었어. 근데 얼마 후에 있잖아, 요 앞 점빵에서 나오는데 우주가 오거리 가구점 앞에 서 있더라고.”
“…….”
“뭔 일인가 싶어 잠깐 지켜봤더니 니가 골목 나와서 다리 건너는 거 졸졸 따라가더라?”
재유는 처음 듣는 얘기에 당혹스러워 손에 든 수건을 이리저리 비틀어 댔다. 눈을 불안하게 깜빡거리며 지난 시간을 되짚어 봤다.
만난 첫날, 우주는 재유의 집을 몰랐을 텐데도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다. 그날 저녁에도 엄마의 식당 앞에서 마주쳤었다. 식당에 자주 밥 먹으러 오는 학생이라고. 밥을 복스럽게 잘 먹어서 보기 좋았다고…. 그것도 우연이었던 걸까? 방학 때 가끔 들르던 서점에선 재유는 그를 본 적이 없는데, 우주는 재유를 자주 봤었다고 했다.
‘저 이랑 친구였구먼.’
‘여 앉아서 빵도 먹구 콜라도 먹구 그랬지.’
점빵 할아버지의 말도 뒤늦게 떠올랐다.
“여러 번 봤다고?”
“응. 방학 때도 몇 번 봤고.”
아아. 작년부터 좋아했다는 우주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믿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머리로 알고 있을 때보다 실제로 맞닥뜨린 사실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우주는 제 짐작보다 더 깊은 관심으로 자신에 대한 애정을 키우고 있었다. 몰래 쫓아다니는 게 애정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내가 우주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날 보려고 우리 집을 알아내고 따라다녔다니.
희열이 느껴졌다. 온몸의 세포가 환희로 요동치고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려 저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갖다 댔다. 둥둥 울리는 박동이 전신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짝사랑하던 상대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흥분에 들떴다.
아직도 이성 한구석에서는 우주와의 인연이 친구 이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감정은 이미 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마음으로는 우주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무감한 척 덮어 두기에 급급했었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껴 본 게 있었던가. 이미 금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이성이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자신이 우주의 생각에 골몰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영선은 제 얘기를 계속 떠들었다. 이미 만화책은 뒷전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너한테 무슨 안 좋은 볼일 있나 싶었어. 이상하잖아. 남자애가 남자애 따라다니니까 뭐 손봐 준다거나 그런 거 예상했지. 하긴, 우주가 그럴 애는 아니지만. 근데 이상하지 않냐? 작년부터 너 쫓아다니고, 우리 집 와서 놀 때마다 맨날 니 옆에 착 달라붙어 있고. 3학년 되고 나서 학교에서도 맨날 같이 다니지? …혹시 있잖아.”
“응?”
“에이 설마….”
“왜 그러는데?”
영선은 요모조모 짜 맞춘 생각을 풀어내면서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걔가 너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는 거 아냐?”
“…….”
재유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영선이 “아닌가.” 하며 한발 물러섰다. 의심쩍은 기색은 거두지 않은 채.
“그게… 많이 이상한 걸까…?”
협탁에 삐딱하게 팔을 기대고 있던 영선이 자세를 곧추세웠다. 주절주절 떠들던 제 말이 영 농담은 아니라는 기미를 눈치챈 모양이다.
“우주 좋은 애잖아. 그런 애가 남자를 좋아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야… 너….”
이번엔 영선의 입이 꾹 다물렸다. 뭔가 큰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심각한 얼굴로 재유를 관찰했다.
“진짜야? 걔가 너 좋아하는 거?”
재유는 ‘나도 우주 좋아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사자도 듣지 못한 고백을 영선에게 먼저 할 수는 없었다. 재유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 돼? 그냥 우주가 이 동네 지나다니는 거 네가 우연히 본 거겠지.”
“…그치? 그렇겠지….”
재유는 애써 들썩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다시 빨래를 개키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 사이를 알게 된다면 영선이 제일 먼저겠지. 저렇게 눈치가 빠른데. 고백 받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우리 사이의 묘한 감정을 주변에 들켜 버렸다. 영선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방금 둘러댄 말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으니 영선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동성연애’라는, 떠올리기만 해도 무서운 단어를 되새기며 우주를 외면했지만, 사실은 그에 대한 마음이 전혀 사그라들지 않아서 혼란만 거듭했었다. 그렇게 자기를 좋아해 준 우주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으로선 선을 넘는 것보다 더 걱정이었다.
우주를 좋아하면서도 애써 억누르고 미뤄 뒀던 마음이 고작 영선이 지나가는 말로 꺼낸 제보에 돌아서다니.
고백을 받아 주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곁에서 멀어지는 건 싫었다. 학교에서 평소처럼 자신을 대하는 우주를 보며 내심 안도했었는데….
자신이 비겁했다. 그동안 그의 애정의 크기를 가늠하며 이리저리 재 본 사람처럼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재유는 빨래를 정리해 넣고 만화책을 보는 척하는 영선에게 가만히 물었다.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영선아. 나 전화 한 통만 써도 돼?”
“어? 어… 여기.”
“고마워. 금방 올게.”
영선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주며 밖으로 나가는 재유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재유는 마당으로 나와 수돗가에 앉아 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엔 거의 해 본 적 없어도 번호만은 외우고 있었다. 번호를 누르자 영선의 핸드폰에 ‘염우주’라는 이름이 떴다. 이름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발신 버튼을 누르자 천천히 신호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신호가 울려도 받지 않자 고개를 숙이며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여보세요.
“…….”
앞으로 한 달.
한 달만 있으면 우주와 저의 삶은 달라진다. 재유는 사회인으로, 우주는 수험생으로. 한 달 뒤면 어렵지 않게 인연을 끊을 수도 있다. 안 보고 살면 그만이니까. 1년 뒤면 더 달라지겠지. 재유는 공장의 고졸 사원으로, 우주는 대학생으로. 그 이후엔…. 우주가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그와의 접점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금을 밟는 건 이렇게 간단한 거였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야. 재유.”
***
재유는 다리 밑으로 갈 수 있는 허술한 간이 계단의 난간을 조심스레 붙잡고 내려왔다. 지나가다 보기만 했지, 강가에 가 본 건 처음이었다.
장진강 주위로 꽤 넓은 풀숲과 공터가 펼쳐져 있었는데, 제대로 닦아 놓은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드나들어 자연스레 생긴 흙길만 있을 뿐이었다. 질 나쁜 애들이 다리 밑에 모여 불 피워 놓고 술 먹는 장소라는 우주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해가 완전히 내려앉지 않아 그런 학생들은 없는데도 재유는 조금 위축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주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레코드 가게에 있다고 했다. 목소리라도 먼저 듣고 싶어 전화한 거였는데, 재유가 먼저 전화한 게 꽤 감동이었는지 지금 만나면 안 되냐고 사정을 하는 통에 영선을 남겨 두고 집을 나섰다.
우주가 주말 저녁 시간에 레코드 가게에 있었다는 게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왜 거기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엄마 식당과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며 영선의 전화를 기다리거나 엄마를 마중 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집요하고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스토커 같은 자식.
재유는 그동안 자기를 따라다녔을 그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샜다. 영선이나 점빵 할아버지도 눈치챌 정도였는데, 그 큰 덩치를 못 알아본 자신의 무심함이 애석했다.
“아….”
수풀 길을 나서자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우주가 보였다. 먼저 와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우주의 사복 차림은 평소와 다르게 설렜다. 유행하는 통 넓은 힙합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요즘 인기 있다는 아이돌 가수보다 본새가 났다. 영선이 죽어라 목매는 ‘형규 오빠’보다 멋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제 눈에 콩깍지가 씐 건가 싶다가도 금세 도리질을 쳤다. 길쭉한 팔다리에 곧게 뻗은 어깨 하며 좔좔 흐르는 귀티에 하얀색 티셔츠가 주는 청량함까지 흡수한 얼굴은 누가 봐도 연예인 같은 특별한 면모가 있었다.
우주는 달려올 땐 잡아먹을 것처럼 무뚝뚝한 표정이더니 재유 앞에 서자마자 머리를 벅벅 넘기며 우물쭈물이었다. 안도하는 듯한 한숨 소리도 들려왔다.
“…오늘은 뭐 안 샀어?”
레코드 가게에 있다더니 빈손이어서 생각난 질문이었다.
“어? 아… 가자마자 전화 받은 거라….”
중얼거리듯 말하고 시선을 피하는 우주가 퍽 귀여웠지만, 금세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우주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재유도 입 안이 바싹 말라 있을 정도로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저쪽에 앉을까?”
우주가 머뭇머뭇 물으며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한산한 둑까지 조금 걸어가 강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높은 건물이 없는 시내의 스카이라인을 따라 해가 넘어간 흔적이 주황빛 띠로 둘러졌다. 예뻤다. 만날 장소를 떠올리다 충동적으로 장진강을 말한 건데, 사람도 별로 없고 분위기도 고즈넉해 잘 고른 것 같았다.
“전화해 줘서 너무 기뻤어. 너 나한테 전화 잘 안 하잖아.”
“전화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지. 맨날 얼굴 보니까.”
“요즘 나한테 말도 잘 안 하면서.”
재유는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숙였다. 우주가 계속 보고 있는 게 느껴져 더 긴장됐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 우주는 평소처럼 행동했지만, 평소와는 분명 달랐다. 재유는 이전처럼 평범하게 그를 대할 수 없었다. 자주 얼굴을 붉히고, 말을 감추고, 시선을 피했다. 우주는 그럴 때마다 멋쩍게 씨익 웃어 줬지만, 그 웃음을 보는 것도 편치만은 않았다.
“미안해. 그동안 내가 좀… 별로였지?”
“너한테 사과 듣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닌데. 그냥… 좋았다고. 오늘 얼굴 볼 줄은 몰랐으니까.”
“…….”
재유는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뭔가 말하려다 마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다물고를 반복했다. 긴장한 거 다 티 나겠지. 그래도 우주는 재유가 입을 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나도 좋았어. 너 볼 생각 하니까.”
재유는 혼란스러운 제 속도 모르고 잔잔하게 흐르기만 하는 강물에 시선을 던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를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벌겋게 달아올랐을 귓불이 신경 쓰였다. 고작 이 말 한마디 했다고 얼굴이 불타는 것 같았다. 강물에 머리를 담그면 치익, 소리가 나지 않을까? 진지한 분위기에 사고가 개그로 흘렀다.
“내가 고백했을 때… 많이 싫었어? 흉하다거나 소름 끼쳤다거나…. 넌 여자친구도 사귀어 봤다 그랬잖아.”
“아냐!”
재유는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우주는 아예 이쪽으로 몸을 틀어 놓고 진득하게 재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라는 말에 잔잔한 미소가 비쳤다.
“흉하다고… 그런 생각은 절대 안 했어. 그냥 좀 놀랐던 거지.”
재유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용기 내어 우주 앞에 내놓고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우주의 입꼬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싫은 게 아니었다면… 반대로 해석해도 되는 거야?”
떨림을 담은 물음이 재유를 향했다. 며칠 결석을 하다 마주친 아침에 벚나무 길을 걸으며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제 말 한마디에 걱정했다가 안심했다가 기대했다가 시무룩해지는 천진한 아이 같던 눈. 재유가 지금부터 꺼낼 말이 무엇이든 그 말에 따라 처분을 고분고분 기다리겠다는, 맹목적이면서도 순종적인 눈이었다. 재유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2학기 되면 너 짝도 새로 생기겠지?”
“…응?”
“난 일 다니느라 학교에 안 갈 거고, 너랑 같이 앉을 사람은 많아 보이니까.”
“…….”
우주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제 귀뺨을 투박한 손길로 몇 번 쓸어내리더니 차분하게 재유의 말을 기다렸다.
“…그 여자애가 줬던 편지도 그랬어. 아니, 그 편지뿐 아니라 너한테 관심 있는 다른 애들까지도. 네가 다른 여자애랑 같이 있는 모습이나 나 말고 새로운 짝이 생긴 걸 떠올려 봤는데… 상상만으로도 되게 싫었어.”
“…….”
“이것도 대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재유는 몸에 수분이 빠져나가는 걸 느낀 듯했다. 졸업할 때까지 짝 없이 혼자 앉으라는 말 같아서 좀 쪼잔한가 싶었지만 재유는 최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우주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 알았으니 남자든 여자든 그의 옆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질투가 날 것 같았다.
우주는 움직임을 정지한 채 굳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입까지 살짝 벌어졌다.
“당장 뭐 어떻게 하자는 거 아냐. 그냥… 이제 친구로만 대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 나도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앞으로도 너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물론 네가 싫다면 안 그래도 되지만….”
재유는 그새 우주의 마음이 바뀌었을까 봐 횡설수설이었다. 고작 말 몇 마디 하는데도 고백을 하는 데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진짜 좋아해.’
우주는 그런 말을 어떤 심정으로 했을까. 재유는 ‘좋아한다.’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인생 다 산 할아버지가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아니, 너무 바짝 긴장하는 바람에 기력이 쇠한 걸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재유 인생 최초의 고백이었다. 손만 잡고 끝나 버린 애들 장난 같던 첫 연애에서도 좋아한다, 사귀자는 말에 ‘그래’라고 답한 게 다였다. 재유는 지금 이 순간의 온도와 습도, 구름의 모양, 바람의 세기, 제 심장의 박동과 우주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평생 기억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에게도 못한 고백을 남자에게 할 줄은 몰랐어서도 그랬고, 그 남자가 우주라서 더 그랬다.
“와….”
우주의 입에서 달콤한 감탄사가 흘렀다. 지금 느끼는 감동과 황홀을 곱씹고 음미하려는 듯 입을 헤벌리며 제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눈에 물막이 씌워졌는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재유를 그윽하게 보고 있었다.
“난…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친구 될 생각은 없었어. 물론 친구인 척은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보자는 게 왜 싫겠어? 난 너한테 고백 안 했어도 네 옆에 계속 있었을 거야. 앞으로 떨어져 살든 군대를 가든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상관없이.”
“…….”
“이제 친구인 척 안 해도 돼서 좋다.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해.”
우주가 환하게 웃었다. 이미 해가 넘어가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밝게 웃는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재유는 떨리는 심정으로 그를 보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근데 너도 마찬가지야.”
“뭐가?”
웃음기를 지운 우주가 내심 서운했던 모양으로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너 영선이랑 진짜 친하더라? 학교에 있을 땐 다른 애들이랑 말도 잘 안 하면서 영선이랑은 장난도 막 치고 빠순이라고 놀리기도 하고. 그리고 너 알바하는 데서도 같이 일하는 대학생 형한테 어깨로 툭툭 막 치고, 응? 장운여중 애들한테도 막 웃어 주고. 또 오라고 손도 흔들어 주고. 너 진짜 내가 그때마다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나, 가만 듣고 있던 재유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연애편지에 초콜릿 주는 애들도 널렸으면서 재유가 바람이라도 피운 양 억울해했다.
‘그러는 너는’, 하며 받아칠까도 생각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제가 했던 질투를 우주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묘한 흡족함을 얻었다.
“그럼 돈 받고 일하는 데서 얼굴 구기고 있어? 그리고 영선이는 너도 봤으니 알 거 아냐. 걘 나한테 형규 오빤지 뭔지 그 가수 얘기만 해. 그리고 이제껏 나한테 얘기했던 짝사랑남만 세 명이야.”
“그래도…. 영선이네 말고 우리 집에 세 들어 살지. 그럼 내가 진짜 잘해 줬을 텐데.”
가정부도 있는 집에서 월세 받자고 세를 놓을 리도 없는데 우주는 가당치도 않은 일을 안타까워하며 발까지 동동 굴렀다.
영선이네도 못 사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세 식구 달랑 사는 집 북적거리는 게 좋다며 아주머니가 일부러 집을 개조해 세를 내주는 것이라 재유와 엄마는 그 덕을 톡톡히 받고 살았다. 영선이도 그랬다. 서로 이성적인 감정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편하게 서로의 집을 들락날락 못했을 거다.
재유는 시시콜콜 말해 줄까 하다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 용감하게 부릅떴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늘어뜨린 우주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이런 날엔 왠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넌… 평소엔 소심해 보이는데 중요할 때 대범하더라. 미치겠다, 진짜.”
아팠던 날 손도 잡았고 몸을 닦아주기는 했어도, 그동안은 우정에 기인한 접촉이었다. 애정을 담아 잡은 손은 저릿한 감각을 불러왔다. 크고 기다란 손이 착 감겨 왔다. 고작 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떨릴 일인가. 재유는 제가 먼저 한 행동인데도 시선을 피하며 부끄럼을 탔다.
“너 전에 여자친구 사겼을 때 손만 잡아 봤다고 했지?”
“응… 근데 왜?”
일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묻길래 대답해 줬는데 이 상황에 꺼낼 줄은 몰라서 재유는 퍽 당황스러웠다.
“앞으론 다 나랑 같이해. 뽀뽀도, 키스도, 사랑도.”
“…….”
“난… 손잡는 것도 처음이야.”
“…그럼 넌 누구 사귄 적 없어?”
“응.”
“단 한 번도?”
“응. 다 처음이야.”
“정말?”
“사귀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거든.”
뻔뻔하게 들이대고 불쑥불쑥 만져 대고 해서 분명 사귄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재유는 여러 의미로 놀랍고 설렜다.
“그러니까 책임져. 원래 손잡으면 책임지는 거야. 우리 형이 그랬어.”
“…그래. 그러지 뭐.”
“와아… 나 오늘 진짜 계 탔네. 한재유. 너 진짜 사람 제대로 홀린다?”
“네가 진짜 형 데려올까 봐 무서워서 그래.”
입이 귀에 걸려 재유의 손을 꼭 쥔 채 조물거리고 있던 우주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재유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가벼운 키스였지만 쪽, 입소리도 났다. 재유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살폈다.
“내가 보고 있었어. 본 사람 아무도 없어.”
“…….”
우주는 말없이 굳어 있는 재유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 천천히 하자. 너 남자하고 연애하는 거, 무섭고 걱정되는 거 알아. 내가 잘할게. 너무 두려워하진 마.”
재유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갑내기이고 겨우 열아홉인데 우주가 해 주는 말이 제법 안심이 되었다.
“근데 있잖아… 이제 너도 앞으로 제대로 말하고 다녀.”
“응? 뭐가?”
재유는 내내 담아 두었던 속내를 꺼냈다.
“편지나 선물 받으면… 공부에 방해되고 부담스럽다는 핑계 말고….”
우주는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 눈을 찡그리며 가늠해 보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아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나 사귀는 사람 있다고 전교에 다 소문낼 거니까.”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좋아서 뺨이 씰룩거리면서 재유는 입으로만 말렸다. 우주는 소심하게 소유권을 주장한 재유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재유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을 매만졌다. 우주의 손은 움찔 놀라 어깨를 움츠린 재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거두어졌다.
예쁜 빛깔로 둘러졌던 노을이 사라지자 가로등이 부족한 강가는 금세 어둑해졌다. 멀리 들리던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짙게 파고들 무렵, 우주의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너 밥 안 먹었어?”
“응. 넌?”
“나도. 밥 먹으러 갈래?”
“그래. 긴장 풀리니까 배고파 죽겠어.”
배를 부여잡고 우는소리를 하는 우주를 데리고 강가를 벗어났다. 슬슬 활동할 시간인지 껄렁해 보이는 학생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남녀가 섞여서 담배를 피우는 무리도 보였다. 우주는 재유를 보호하듯 안쪽으로 걷게 하며 부릅뜬 눈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계단을 올라 강변길로 나오자 다시 유순한 눈을 하며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신 메뉴로 나온 고구마피자를 앞에 두고 배고픈 두 하이틴은 걸신들린 것처럼 피자를 먹어치웠다. 샐러드 바에서 푸짐하게 담아온 접시도 여러 번 동이 났다.
재유는 원래 양식보다는 한식파였는데, 우주의 입맛도 토속적이라 밖에서 밥 먹을 땐 항상 한식 위주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근래 들어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게 피자를 먹었다.
엄마의 퇴근 시간까지 애매하게 남은 시간을 우주는 노래방으로 때우자고 꼬셨다. 우주와 피시방이나 만화방은 가 봤어도 노래방을 간 적은 없었다.
재유는 음치였다. 음악 시간 가창 시험에 단 한 번도 평균 이상을 받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목소리도 작아 자신감 없이 웅얼거리는 수준으로 노래했으니 당연했다. 열 받게도 아빠를 닮은 결과였다. 계속 거절하던 재유는 우주에게 너만 부르라고 단단히 약속을 받은 뒤 노래방으로 향했다.
우주는 이것 보라며, 나를 좀 보라며, 나 지금 멋지다고 말해 보라며 ‘콜미콜미’를 외쳤다. 걸그룹이 부르는 〈내 남자친구에게〉에 율동까지 섞어 재롱을 떠는 우주는 얄밉게 노래도 잘했다. 재유는 낮은 음색으로 탬버린을 흔들며 갖은 아양을 떠는 그를 보고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오늘부터 사귀기로 한 걸 쐐기라도 박듯 우주의 선곡은 사랑 노래 위주였다. 〈미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너의 의미〉 같은 옛노래도 어찌나 절절하게 잘 부르는지. 화룡점정은 〈마이 걸〉이었다. ‘걸’은 ‘보이’로 바뀌었지만.
재유는 왜 그가 〈마이 걸〉 앨범을 들어 보라고 줬는지 깨달았다. 느끼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부르는 우주를 보며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쳐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