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 만남
* * *
1999년 3월.
재유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고3 교실이 3층 건물에 3층이라니. 이해하지 못할 교실 배치에 속으로 푸념하며 건물로 들어섰다.
1·2학년 교실이 있는 1층과 2층은 새 학기의 들뜸이 떠들썩하게 느껴진 반면 3층에 들어서자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고 서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1반은 복도 맨 끝에 있는 교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맞은편 입구로 들어오는 건데. 재유는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복도를 지나갔다.
1반은 건물 끝에 있어 교실과 복도가 합쳐진 구조였다. 다른 반보다 훨씬 컸지만, 입구는 칠판 옆에 나란히 붙은 앞문 하나밖에 없었다. 보통은 과학실이나 음악실로 쓰는 교실인데 여기도 학생 수가 많은 건지 모조리 학급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문이 하나라 들어가기만 해도 눈길을 끌 수 있어서 앞으로 드나들 일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지금은 다행히도 문이 열려 있었다.
교실 밖엔 웬 여학생이 서 있었다. 왜 안 들어가고 있나 경계하고 있던 재유가 지나치려 하자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저기요.”
“…네?”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재유는 당황하며 흠칫 물러났다. 단정한 단발에 뽀얀 얼굴의 여학생은 명찰이 노란색인 걸 보니 2학년이었다.
“이것 좀… 전해 주실래요?”
작은 소리로 말하는 여학생이 건넨 건 하늘색 봉투의 손편지였다. 고개를 푹 숙인 거로 보아 용기 내서 말을 걸었나 보았다. 겉면엔 ‘염우주’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쓴 건가, 아니면 좋아하는 선배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나,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난감했다.
“누군지 모르는데….”
여학생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으로 재유를 봤다. 그러다 손끝으로 교실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맨 끝에 헤드폰 꽂고 있는 사람이요.”
가리키는 방향에 헤드폰을 쓴 남학생이 있었다. 수신인을 확인한 재유는 여학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로 단숨에 들어왔다. 첫날부터 문 앞에서 여자애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반 애들한테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교실은 떠들썩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조용하지도 않았다. 군데군데 여자애들이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고 잡지를 보며 킥킥대는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3학년의 시작인 날이라서일까. 간혹 긴장의 침묵이 돌기도 했고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재유는 슬금슬금 눈치 보며 편지 주인의 자리로 다가갔다. 밖에서 봤을 때보다 몸집도 튼실하고 키도 커 보였다. 곱슬기가 있는지 머리숱이 많은 건지 풍성한 머리카락은 유독 새카맸다.
염우주는 CD 케이스에 끼워진 속지를 꺼내 가사를 보고 있었다. 큰 키에 안 맞는 작은 책상에서 그걸 보고 있자니 저절로 구부정한 자세가 되는 모양이다. 몸을 숙이고 있어 곁에 사람이 다가온 것도 눈치 못 채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 봤자 못 들을 것 같기도 하고 초면에 이름을 부르기도 꺼려져서 재유는 그냥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 두었다.
기척을 눈치챘는지 염우주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부리부리한 눈이 순간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이거… 누가 전해 달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시선을 내려 그가 보고 있던 가사집을 봤다. 전부 영어로 된 글씨였다. 되돌아오는 말이 없자 쭈뼛대며 돌아섰다.
재유는 교실을 휘둘러보며 빈자리를 찾아봤다. 교단 바로 앞자리만 비어 있었다. 제일 주목받는 자리였다. 거기다 옆자리는 여학생이고. 재유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어차피 아는 얼굴도 거의 없으니 뻘쭘하게 시간 보내는 게 싫어 일부러 조금 늦게 온 참인데, 학기 첫날이라고 교실은 대부분 차 있었다. 재유는 작게 한숨 쉬며 얼른 가서 앉아 버렸다. 시선들로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졌다.
책상 선단에 딱 붙은 교단을 보자 속이 답답했다. 책가방을 벗어 필통이라도 꺼내려는데 선생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을 보더니 여기저기 작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유는 얼른 필통과 노트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방을 걸어 두었다.
담임은 얼굴이 희고 인텔리해 보이는 깔끔한 인상에 안경을 꼈다.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는 재유도 저 선생의 평판은 왕왕 들었다. 이 지역 실업고에 재직할 때 학생을 체벌하던 중, 분에 못 이겨 책상과 의자까지 집어 던지며 팼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를 일이었다. 저 샌님 같은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졸업하리라.
“내 이름 말 안 해도 알지?”
이름은 모르겠고 학주였다는 건 안다. 고3 담임을 맡은 걸 보니 이제 학주는 아닌가 보다. 담임은 1분단 앞자리로 가서 가지고 온 프린트물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프린트물을 받은 학생이 뒤로 돌아 머릿수를 헤아리더니 분배를 시작했다. 곧 종이 팔락거리는 소리가 온 교실에 울려 퍼졌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계속 자율학습하고 12시에 집에 가. 그리고 급식실 완공됐으니까 내일부터 급식 시작한다. 괜히 도시락 싸 와서 교실에 음식 냄새 풍기지 마라.”
“…….”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낮고 엄했다. 교실은 얼어붙은 듯 차분해졌다.
“아. 그리고 학급 임원은 작년에 해 본 애들이 해. 거 누구냐, 주완이가 반장 하고 미정이가 부반장하고. 불만 없지?”
호명된 애들은 물론 반 전체가 아무 반응이 없자 담임은 양손으로 교탁을 넓게 펼쳐 잡으며 학생들을 빙 둘러봤다. 고3이니까 대단하게 일 안 시킬 테니 걱정 말라고 짧게 덧붙이며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정해진 반장과 부반장은 시무룩한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내일은 진로상담 할 거니까 프린트물 나눠준 거 부모님이랑 제대로 상의해서 작성해 와. 그리고 자리는… 그냥 니들 편한 대로 앉아라. 키 큰 놈들은 앞자리 금지고.”
담임은 건성으로 조회를 마쳤다. 성가신 일을 끝낸 듯한 표정으로 기다란 대나무 지시봉을 교탁에 한 번 탁 내리쳤다. 별 의미 없는 습관으로 보였지만, 교실에 긴장이 더해졌다.
담임이 교실을 나가자 곳곳에서 한숨과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작년까지 학주였던 담임은 보기보다 훨씬 미움받는 모양이었다. 젠장, 염병, 좆됐다, 하며 담탱이가 어쩌고저쩌고 욕하기에 바빴다. 대학에 가느냐 마느냐, 얼마나 좋은 대학에 가느냐가 결정되는 해이니만큼 새 학기에 늘 겪던 일도 남다르게 다가오는 고3이니까.
자리 배치로 주변이 웅성대자 재유도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키가 178cm는 되었기에 맨 앞자리에 앉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다들 분주하게 자리를 탐색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이미 친한 애들끼리 모여 앉았고 앞뒤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고려하며 눈치 게임을 하는 듯했다. 문과라서 3분의 2는 여학생들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정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운동장 쪽 창가는 여학생들이, 복도 쪽은 남학생들 자리가 되고 있었다.
남자애들도 삼삼오오 자리를 잡아 갔다. 이럴 땐 친구가 없는 게 좀 서러웠다. 자리를 정해주고 갈 것이지, 귀찮으면 번호순대로 앉으라고 하던가. 재유는 괜히 속으로 담임에게 구시렁댔다.
적어도 세 번째 자리 뒤로 앉을 순 없을까. 공부해 대학 갈 것도 아닌데 너무 앞자리는 부담스러웠다. 남는 자리가 없는지 열심히 주위를 살피는데, 등 뒤로 불쑥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염우주가 있었다. 아깐 앉아 있어서 내려다봤는데 서 있으니 올려다봐야 했다. 우주는 재유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우주가 말없이 턱짓으로 뒷자리를 가리켰다. 아까 제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멍하니 서 있는데, 재촉을 했다.
“안 오고 뭐 해?”
낮고 은은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자 얼굴이 아까보다 유순해 보이는 듯도 했다. 우두커니 서 있으니 다른 애들의 어깨가 툭툭 부딪혔다. 방해가 된다는 걸 깨달은 재유는 가방을 쥐고 뒷자리로 갔다.
우주는 원래 앉았던 제 자리를 비워 주고 옆자리로 옮겼다. 재유는 그가 앉았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해서 앉게 된 자리는 4분단 바깥쪽 맨 끝줄이었다.
중고등학교 통틀어 처음 앉아 봤다. 반 전체 학생들이 한눈에 보였다. 교탁과도 멀어 딴짓하기 딱 좋았다. 원래 노는 애들이나 일진들이 앉는 자리였다. 뜻하지 않게 좋은 자리에 앉게 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우주는 책가방에 있던 책들을 서랍에도 넣고 사물함에도 넣으며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뒤돌아 손만 뻗으면 사물함이 닿았다. 팔도 길었다.
재유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먼저 말을 걸기가 꺼려졌다. 기회는 또 있을 테니 그때 말해야지, 생각했다.
첫날이지만 제법 공부 분위기가 잡혔다. 공부와 관련 없는 책을 볼지언정 떠드는 애들은 없었다. 그나마 4교시쯤에야 조금 떠들썩해졌다.
계속 문제집만 보던 우주가 서랍에 손을 넣어 부스럭댔다. “먹을래?” 하고 물으며 과자봉지를 보여 주었다. 처음 보는 과자였다. 우주는 꼭 라면처럼 생긴 과자를 주먹으로 퍽퍽 부숴서 스프를 탈탈 털어 넣더니 봉지째로 흔들었다.
맛이 궁금하긴 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젓고 읽던 소설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우주는 더 권하지 않고 과자를 몇 번 집어 먹다가 앞자리 애를 툭툭 건드려 봉지를 건넸다.
그게 짝이 된 후 교실에서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
마지막 종이 치자 재유는 얼른 가방을 집어 들고 교실을 나왔다. 답답했던 교실 분위기를 빨리 털어 내고 싶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급해졌다.
“한재유!”
누군가 큰 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계단뿐 아니라 건물 전체에 자신의 이름이 울리는 것 같아 재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돌아보자 우주가 순식간에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학생들의 시선이 마주 선 재유와 우주에게 한 번씩 머물다 갔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계단을 마저 내려가는데 우주가 바짝 따라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해서 그런가. 과자도 권해 줬는데 너무 무뚝뚝하게 반응해서 시비를 붙이려는 건가. 별걱정이 다 들었다. 우주는 일진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조금 두려워졌다.
그나저나 통성명한 적도 없는데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명찰을 언제 본 거지?
재유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현관에 낡은 운동화를 내려놓고 발을 쑤셔 넣었다. 뒷굽을 당기는 손이 떨렸다. 옆에는 커다란 농구화가 보였다. 비싼 메이커였다. 삥 뜯어 산 건지도 몰랐다.
이왕 시비가 붙을 거면 학생들이 별로 없는 곳이 좋겠지. 재유는 기습적으로 현관을 벗어나 건물 뒷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잡히더라도 일단은 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뒷길은 동아리방으로 쓰는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옆으로 음악실이 있었다. 좀 더 내려가면 낡은 매점 건물과 새로 완공된 급식실이었다. 재유는 매점으로 가기 전 왼쪽으로 돌아 교문 쪽으로 가야지 했는데, 뛰는 게 무색하게 음악실 앞에서 팔이 잡혀 버렸다.
“한재유. 왜 그래?”
흰색 농구화가 빙 돌아 재유 앞에 섰다. 재유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왜 도망가냐고.”
눈도 못 쳐다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잡힌 팔이 신경 쓰였다. 길고 커다란 손이 팔꿈치를 감싸 꼭 붙잡은 힘이 동복 재킷 안까지 전해졌다.
우주는 “아, 미안.” 하며 잡은 팔을 얼른 놓아주었다. 재유는 잡혔던 팔을 손으로 쓸었다. 팔꿈치가 해져 우둘투둘한 보풀이 만져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우주가 비스듬한 자세로 재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미간을 찡그리고 걱정스레 살피는 듯도 했다. 재유는 일단 안도했다.
좋은 자리도 맡아 주고 과자도 주려 했는데 이름 한 번 크게 불렀다고 너무 과민반응을 했나 싶었다. 지레 겁먹고 도망쳤던 자신이 한심했다.
“…무슨 일인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으니 우주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자세히 본 그는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눈썹도 머리 색만큼 진했으며 속눈썹도 숱이 많고 긴 편이었다. 처음 봤을 땐 무서운 인상이라고 느꼈는데 입을 벌리며 웃는 게 천진해 보이기도 했다. 잘생긴 애였다. 새 학기 첫날부터 여학생에게 편지를 받을 만큼.
“떡볶이 먹자고.”
“뭐?”
뜻밖의 말에 재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음… 짝이니까?”
재유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학교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말을 얼마 만에 듣는지 헤아려 보았다. 전학 온 이후로도 처음이고 그 전 학교에서도 가물가물했다.
“나 배고파. 가자.”
“아니, 난 집에….”
재유는 앞에 버티고 선 그를 지나쳤다.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우주는 더 빨랐다. 뒷길을 빠져나와 하교하는 학생들 틈에 섞였는데도 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으로 몸을 틀며 걸었다. 마치 손님을 낚으려는 호객꾼 같았다. 늘 혼자 걷던 길에 큰 덩치가 달라붙으니 어색하고 긴장됐다.
“야 염우주!”
부르는 소리에도 우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친구가 부르니 이 녀석도 떨어져 나가겠거니 했는데, 우주는 뒤돌아 아는 체를 할 뿐 재유와 걷는 속도를 유지했다. 우주 옆으로 자연스럽게 두 명이 더 합류했다.
“피시방 가자니까?”
“안 가. 집에 갈 거야.”
“지랄. 지가 스타 하고 싶다 그랬으면서.”
“니들끼리 가. 내일 가든가.”
“뭔 개소리야? 낼부터 야자 하는데.”
“이따 시간 되면 접속할게.”
쯧, 소리를 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눈짓하자 둘은 앞서서 뛰기 시작했다.
“갈 거지? 떡볶이.”
교문이 다가오자 우주가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거절의 말을 하려고 입을 우물거리는데 우주가 기다란 팔로 재유의 어깨와 목을 휘감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양팔이 파닥거렸다. 우주는 씨익 웃으며 재유를 잡아끌었다.
집에서 밥 먹으려고 했는데…. 재유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입술만 달싹여서 말했다. 슬쩍 올려다보니 그는 못 들은 것 같았다.
도착한 곳은 교문 앞 떡볶이집이었다. 옆으로는 오래된 문방구와 슈퍼가 있었고 사이사이 주택들도 섞여 있었다.
우주는 예상과 달리 재유를 붙잡고 화를 내지도, 따져 묻지도 않았다. 정말 떡볶이를 먹으려고 했나 보았다.
재유는 지금 이 상황이 좀 어이가 없었다. 개학 날 같은 반 친구와 떡볶이를 먹게 될 거라곤 예상 못 했기 때문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우주의 씩씩한 태도 때문에 휩쓸린 것뿐이지만, 이런 상황이 오랜만이라 신선하다가도 한편으론 어이없게 느껴졌다.
“이모님, 떡볶이랑 순대 3인분씩 주세요.”
우주가 큰 소리로 주문을 하며 제일 안쪽으로 성큼성큼 가서 앉았다. 재유도 잡혔던 어깨와 목을 어루만지며 마지못해 따라갔다. 조금 있으니 다른 학생들까지 들이닥쳐 좁은 가게 안이 북적거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리가 없을 뻔했다.
“근데 둘이 먹기에 좀 많지 않아?”
재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떡볶이값이 신경 쓰였다. 학생들 상대라 싸게 팔아도 6천 원이나 되었다. 재유는 재킷 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가진 돈을 헤아렸다. 이런 식으로 삥을 뜯는 건가 싶어 다시 긴장했다.
“여기 맛있잖아. 다 먹을 수 있어.”
“그래? 난 여기 안 와 봐서….”
우주는 컵에 물을 따라 앞에 놔주고 나무젓가락도 뜯어 세팅했다. 재유는 어색한 상황에 입술을 꾹 깨물며 우주를 힐끔 살폈다.
빳빳하게 다려진 교복 셔츠와 새것으로 보이는 감색 재킷, 가슴팍에 반듯하게 달린 하얀색 명찰은 아까와 달리 단정한 인상을 풍겼다. 옆자리에 놓아둔 검은색 책가방은 농구화와 같은 브랜드였다. 재유는 괜히 위축되어 테이블 아래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항상 혼자 다니는 것 같긴 하더라.”
“나 알고 있었어? 난 오늘 너 처음 봤는데….”
물을 홀짝이던 재유가 플라스틱 컵을 입에 댄 채로 물었다. 우주는 또 씨익 웃으며 물을 한 번에 들이키고 말했다.
“보통 전학생은 눈에 띄니까. 더구나 너처럼 호리호리하고 잘생긴 애면.”
“뭐? 누가 그래?”
“척 보면 그렇잖아.”
재유는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하게 물만 홀짝이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음식이 나왔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살집이 보기 좋게 오른 이모님이 쟁반에서 떡볶이와 순대, 어묵 국물을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커다란 접시에 산처럼 쌓인 순대를 보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우주는 얼른 먹어 보라며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순대를 한 입 먹자마자 망설임이 쏙 사라졌다. 재유는 자기도 모르게 먹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주도 떡볶이 국물에 순대를 찍어 먹고 떡볶이도 먹었다. 둘 다 볼이 볼록해졌다.
재유가 우주처럼 순대를 집어 떡볶이 국물에 묻히자 우주가 쿡 웃었다.
“…너 되게 잘 웃네.”
“어. 오늘 좀 기분이 좋아서.”
“왜?”
“그냥. 떡볶이가 맛있어서?”
우주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티슈를 슉슉 뽑아 재유에게 건네고 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툭툭 쳤다. 재유는 아, 하며 티슈로 입가를 쓱쓱 닦았다. 그 모습을 보더니 또 피시식 웃었다. “어서 먹어. 많이 먹어.” 하며 떡볶이를 두 개나 집어넣은 그는 먹성 좋게 턱을 움직여 댔다.
이걸 언제 다 먹나 싶었는데 젓가락질이 점차 느려진 재유와 달리 우주는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순대에 떡볶이 국물을 싹싹 비벼 야무지게 먹었다. 어묵 국물까지 시원하게 들이켜는 모습에 재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는 먼저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좁은 통로를 이리저리 피하는 몸놀림이 덩치에 비해 날렵해 보였다. 재유도 가방을 챙겨 들고 뒤따랐다.
우주가 떡볶이값을 치르고 있었다. 재유는 주머니에서 돈을 모두 꺼내 동전들을 거르고 천 원짜리 세 장을 헤아려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지폐를 건넸다.
“이거 왜 줘?”
“떡볶이값. 잘 먹었어.”
우주는 픽 웃더니 돈이 든 손목을 낚아채 그대로 재유의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가 먹자고 했는데 네가 왜 내.”
“…같이 먹었으니까.”
“그럼 다음에 사 줘.”
재유는 붙잡혔던 손목을 괜스레 한 번 손에 쥐었다.
“너 뭐 타고 가?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건 못 본 것 같은데.”
“난 걸어가면 돼.”
“그래? 그럼 버스 타고 가면 안 돼? 터미널 혼자 가는 거 심심한데.”
우주가 짝다리를 짚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서 재유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불량해 보여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버스비를 아끼려 걸어 다녔지만, 떡볶이값도 굳었으니 버스비를 지출해도 될 것 같았다.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우주는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떠들어 댔다. 주로 이 지역에 관한 얘기였다.
“너 전학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지? 저기 시민회관에서 가끔 영화 상영해 줘. 개봉영화는 아니고, 좀 지난 영화들이긴 한데 그래도 사람들 많이 가서 봐. 저번 주에는 〈텔미썸딩〉 틀어 주더라. 장운중학교 옆에 시장통 있지? 그 근처에 지금 영화관 짓고 있는데 올여름에는 완공된대.”
“그래.”
“저기 저 교회는 장운시에서 제일 큰 교횐데, 우리 학년 향선이 알지? 모르나? 암튼 걔네 아빠가 목사야. 엄청 부자래. 목사 아들이 맨날 메이커 입고 다닌다고 애들한테 욕 좀 먹었지. 걔가 좀 쫌스럽거든.”
“…….”
“참, 너 장진강에서 수영한 적 없지? 물이 얕아서 여름에 물놀이 많이 하거든. 저기 저쪽 봐봐. 밤에는 저 다리 밑에 가지 마. 일진들이나 실고 애들이 저기 모여서 불 피워 놓고 술 마시고 그러니까.”
우주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지나가는 곳 하나하나 세세하게 설명을 해 줬다. 재유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단답을 해 주는 게 다였지만, 우주가 해 주는 얘기를 재밌게 듣고 있었다. 넌 왜 이렇게 말이 없냐고 타박하지도 않고 열심히 떠들어 대는 그가 내심 고마웠다.
이 지역에서 유일한 버스터미널은 12대 정도의 버스가 정차할 수 있는 아담한 곳이었다. 고속버스는 맨 오른쪽 3칸을 사용해 서울과 부산, 대전, 대구만 오가고 있었고, 나머지 정차장은 노선이 단순한 시내버스이거나 읍면 단위를 오가는 중·단거리 버스들이었다.
두 사람은 매표소에서 번갈아 버스표를 사고, 앉을 자리가 없어 어정쩡하게 서서 주변을 구경했다.
터미널은 학생들과 주민들로 꽉 차 어수선했다. 매점에서 파는 핫바와 김밥 냄새, 담배 냄새와 화장실 냄새가 뒤섞여 퀴퀴한 공기가 집요하게 콧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재유는 달리 할 말도 없어 오가는 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는 터미널에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주말이면 서울에 놀러 가는 학생들이 많아서 항상 만원 버스가 된다는 얘기, 터미널 앞에 앉아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한테서 가끔 물건을 사 가면 엄마한테 혼난다는 얘기, 맞은편 스티커 사진기에서 동네 변태가 오줌을 싸 놓는 바람에 소란이 일어났던 얘기 등 지치지도 않고 계속 말을 했다.
마치 대화가 끊기면 안 될 것처럼 하나라도 더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재유는 우주의 말에 가끔은 웃고 가끔은 찡그리며 열심히 들었다. 재유가 미소를 보일 때면 우주도 덩달아 웃었다.
10분쯤 기다리자 재유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왔네. 먼저 갈게.”
재유가 인사하며 버스 쪽으로 향했다.
“그래. 잘 가.”
“어….”
버스에 올라탄 재유는 요금통에 버스표를 넣고 중간 자리에 앉았다. 공기가 꿉꿉한 터미널에서 벗어나니 숨통이 트였다. 출발을 기다리는데 시커먼 머리 하나가 창문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우주는 창문을 톡톡 두드리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크게 소리친 우주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시동을 걸었는데도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손을 흔들어 댔다. 3월 초여도 햇빛은 쨍한 날이었다. 우주의 밝은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버스가 후진하고 터미널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재유는 도리 없이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나마 웃어 주었다.
***
집에 돌아온 재유는 라디오를 들으며 한창 인형 눈 붙이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작은 협탁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왼쪽에 놓인 인형들을 하나씩 집어서 빠르게 접착제를 바르고 눈알을 톡톡 붙인 후 오른쪽으로 휙 던져 놓았다. 개당 7초면 완성된다.
방 한 칸에 주방이 딸린 셋방에서 엄마와 단둘이 사는 재유가 조금이라도 돈을 벌려고 엄마를 설득해 겨우 하게 된 알바였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하면 한 달에 10여만 원 정도는 벌 수 있었다.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제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과 손을 놀리는 단순 작업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라디오에서 5시 정각 알림이 들리자 재유는 하던 일을 멈추고 완성된 인형을 봉지에 세심하게 담았다. 눈알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형 봉지를 현관 입구 쪽에 놔두고 겨우 세 걸음 걸어 싱크대로 갔다. 불려 둔 고사리의 물기를 짜고 냄비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참치캔 절반 분량과 다진 양파를 볼에 넣고 밀가루와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들었다.
냄비 물이 끓자 고사리를 데치면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중불로 예열했다. 능숙하게 고사리 냄비를 체에 거르고 찬물로 식혀 놓은 후 참치전 반죽을 프라이팬에 넓게 펴 발랐다.
갑자기 밖에서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출입문의 불투명 유리창에 여자의 윤곽이 비쳤다.
“엄마? 벌써 왔어요?”
“나야.”
주인집 딸 영선이었다. 재유는 얼른 문을 열어 주고 다시 불 앞으로 가 참치전을 뒤집었다.
“오. 좋은 냄새. 찌짐 부치냐?”
“좀 줄까?”
“아냐, 됐어. 이거 엄마가 갖다 주래.”
영선이 들고 온 냄비를 재유에게 내밀었다. 방금 한 듯 따끈한 김치찌개였다. 재유는 한 칸짜리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 옮겨 담은 후 영선이네 냄비를 얼른 설거지하고 행주로 닦았다.
“아주머니한테 감사하다고 꼭 말씀드려. 잘 먹을게.”
영선은 그런 재유를 실눈을 뜨며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크으… 내가 너 나중에 델꾸 산다. 나한테 시집와라, 재유야!”
살림 솜씨에 감탄한 듯 영선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개구진 목소리로 말했다.
재유는 두 번째 참치전 반죽을 프라이팬에 펴다 말고 뜨악한 표정으로 영선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모습에 영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울겠다. 뻥이야! 형규 오빠 땜에 넌 눈에도 안 차거든?”
형규 오빠란 요즘 한참 인기 있는 아이돌 멤버였다.
“놀랬잖아. 농담하지 마.”
“어쭈. 이 누님이 널 받아 준다는데 감히 튕겨? 이 자식이!”
영선은 저보다 15cm는 훌쩍 큰 재유 옆에서 잽을 툭툭 날리며 깨방정을 부렸다. 파를 썰던 재유는 영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알았어, 미안해, 위험해.”를 연발하며 몸을 사렸다.
“넌 몇 반이야?”
“1반. 넌?”
“7반. 친구들이랑 다 찢어지고 혼란스럽다 진짜. 어떻디? 반에 맘에 드는 애 있었어?”
“…….”
“하긴. 친구도 없는데 맘에 드는 여자애가 있을 리가 없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재유에게 영선은 재미없다는 듯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있잖아. 친구.”
“나랑은 반이 달라서 못 놀잖아. 내 친구들이 너랑 친하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더라. 걔 왕따 아니었냐면서. 너 말하는 거 본 적이 없대. 울 학교가 딴 건 몰라도 왕따는 없었는데. 네가 맨날 혼자 다니니까 그런 오해나 사는 거잖아. 도 닦냐?”
“곧 졸업할 건데 뭐.”
영선이 무친 고사리를 보고 “나 좀 줘 봐.” 했다. 재유가 비닐장갑 낀 손으로 고사리를 입에 넣어 주자 “오, 맛있다.” 하고 중얼거렸다.
재유는 혼자가 편했다. 그 전 학교에서도 친구는 더러 있었지만, 전학 오기 직전에는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 재유의 삶은 달라졌다. 대기업에 다니던 아빠가 하루아침에 실직을 한 것이다. IMF로 회사가 도산해 버렸다고 했다. 아빠는 새로 직장을 찾을 거라며 매일같이 집을 나섰지만, 일자리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모아 둔 돈을 생활비로 쓰던 차에 아빠는 하필 도박에 손을 댔다.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집 안에선 현금이나 통장, 금붙이들이 사라졌고 아빠는 그때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빠가 집문서까지 팔아넘긴 것이다. 엄마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생 일해 본 적 없이 살림만 살던 엄마는 식당에 나가야 했다. 원래도 몸이 약했는데 하루 12시간씩 설거지를 했다. 그마저도 경험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뺏겼다.
재유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살던 작은 단층 주택은 남의 소유가 되었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재유를 데리고 친하게 지냈던 언니의 집에 방 한 칸을 빌려 신세를 졌다.
그래도 불행은 계속됐다. 아빠는 주변 이웃들에게도 돈을 빌린 모양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아빠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재유와 엄마를 찾았다. 그중엔 재유와 제일 친했던 친구 아버지도 있었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아빠는 사채에도 손을 댔다. 무섭게 생긴 덩치들이 엄마에게 협박을 하고, 재유의 학교까지도 서슴없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은 최악이었다. 엄마는 눈에 띄게 말라 갔다. 제대로 된 일을 할 수도 없는데 갚을 빚이 수천으로 늘어났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재유는 혼자가 되었다. 동네는 물론 학교까지 소문이 퍼져 친했던 애들도 하나둘 재유에게 다가오길 꺼렸다. 서열화된 권력 구조가 존재하는 남고 안에서 왕따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중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도 바닥을 쳤다. 재유는 학교에서 동급생에게 맞고 다니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여겼다.
9월 말쯤 재유는 아빠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날은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학교에 쫙 퍼져 있었다. 회사 부도를 막아 보려다 여기저기 빚을 지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한강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교실 분위기는 암울했다.
집에 일찍 가 봐야 남의 집 살이로 눈칫밥만 먹으니 재유는 야자 끝날 시간까지 꽉꽉 채워 하교를 했다. 집 앞엔 아빠와 웬 젊은 여자가 함께였다. 아빠의 새 애인인 듯한 여자와 엄마가 뭐라 뭐라 싸우는 소리, 아빠의 뻔뻔한 다그침이 뒤섞여 골목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창피했다. 억울함에 눈물도 났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빠였지만, 월급 봉투를 꼬박꼬박 가져다주니 가장으로서 나쁘지 않았었는데. 고작 직장 하나 잃었다고 가족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아무리 빚이 늘어나도 아빠를 기다렸던 엄마는 허망하고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 울지도 않았다. 엄마는 아빠의 뺨을 연거푸 내리치더니 혹시 몰라 준비해 둔 이혼 서류에 도장을 받아 내고 두 사람을 보내 줬다.
그 후로 찔끔찔끔 아껴 썼던 돈마저 바닥을 드러냈고, 신세 진 집에선 빚쟁이들 때문에 속 시끄럽다고 대놓고 핀잔을 줬다. 그나마 적선하던 한 끼 밥조차 챙겨 주지 않았다. 그 무렵엔 밥도 굶기 일쑤였다. 정말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었다.
‘재유야. 이 동넨 더 못 살겠다. 딴 데 가서 살자.’
‘…어디로요?’
‘오늘은 학교 가지 말고 집에 있어. 누가 찾아와도 절대 문 열어 주지 말고.’
엄마는 그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미리 짐까지 싸 두었다. 재유는 엄마까지 저를 버리고 갔을까 봐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빌려 쓰는 반지하 방에 가로등이 어둡게 비치는 그 밤, 컹컹 짖는 개 소리와 쿵쿵 문을 두드리는 빚쟁이들 소리에 재유는 주먹을 꼭 쥐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행히 엄마는 다음 날 밤늦게 돌아왔고 그 길로 야반도주를 했다.
차비만을 쥔 채 두 모자는 고향을 찾아갔다. 엄마와 아빠가 나고 자란 곳이라고 했다. 부모님을 여읜 엄마완 달리 아빠의 일가친척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었다.
재유는 그날 조부모를 처음 뵈었다. 반대하는 결혼을 한 탓에 친가와 연을 끊어서 왕래 없이 살아왔던 것이다. 엄마는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울면서 이혼 서류를 보여 주었다. 죄송하다고 연신 빌면서 내 자식은 살려야겠으니 애 아빠 빚 좀 해결해 달라고 애원했다.
돌아온 건 물바가지 세례와 ‘아들 잡아먹은 년’이란 저주에 찬 목소리였다. 재유가 아무리 말려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쥐어박고 발로 차며 엄마를 모질게 대했다.
‘아빠가 도박해서 빚진 거지 엄마는 아무 잘못 없어요. 여자까지 데리고 왔다니까요? 곧 새 며느리 생길 것 같으니 잘 먹고 잘사세요. 우리 찾지 마시고요!’
재유는 처음 보는 노인들에게 악을 쓰며 엄마를 이끌고 그 집에서 나왔다.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심장이 떨리고 손이 부들거렸다. 다시는 그 지역에 발도 붙이기 싫었다.
지난 2년 남짓 시간 동안 재유의 인생은 말 그대로 180도 달라졌다. 자기 방도 따로 있는 안락한 집에서 꼬박꼬박 용돈 받으며 마음 편하게 학교 다니던 한재유는 사라졌다. 대학도 포기했다.
이곳에 전학 왔을 무렵엔 오히려 혼자가 편해질 시기였다. 학교도 귀찮고 친구도 귀찮았다. 그저 빨리 졸업해서 돈이나 벌었으면 싶었다.
막 무친 고사리를 영선은 맛있다고 했으나, 재유 입에는 쓰기만 했다.
재유는 남은 설거지를 하기 위해 수세미에 퐁퐁을 짰다.
“참, 너 아까 버스 타고 오더라? 웬일이냐? 맨날 걸어 댕기더니.”
“…봤어? 어쩌다 그렇게 됐어.”
“오늘 첫날이라 바쁜 일도 없었을 텐데.”
영선은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심드렁하게 품속에서 뻥튀기 봉지를 꺼냈다. 재유 입에 하나 물려 주고 저도 한입 베어 물며 재유가 설거지하는 걸 지켜보았다.
친구 많고 성격 좋은 영선은 재유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남중 남고만 다니던 자신이 여학생과 친구가 될 줄은 몰랐는데, 영선의 친화력은 말 없고 숫기 없는 재유마저 가뿐히 굴복시켰다.
이것저것 음식 나누기를 좋아하는 아주머니의 심부름 탓에 영선은 뻔질나게 재유네 셋방을 드나들었다. 꼭 심부름이 아니더라도 심심할 때나 아주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찾아오기도 했다.
곧 익숙한 영선의 수다가 시작됐다. 담임 욕부터 시작해 문제집 사러 서점 갔다가 형규 오빠가 실린 잡지까지 사 버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오늘따라 귀가 따가웠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도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입에 단내가 날 때까지 떠들었다. 재유는 영선의 수다에 관심은 없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러다 수다가 끊길 때쯤 재유가 드물게 질문을 했다.
“근데 너… 염우주라고 알아?”
영선은 같은 반 친구 얘기를 먼저 꺼낸 재유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유는 눈을 피하며 설거지에 열중했다.
“염우주? 알지. 근데 왜?”
“짝 됐거든.”
“아, 그래? 걔 유명해. 인기도 많고. 참, 규신기업이라고 들어봤어?”
“규신기업?”
“여기서 제일 큰 회사잖아. 자동차 부품 만드는. 그 집 아들이야.”
재유는 놀란 듯 영선을 바라보았다. 규신기업이라면 영선의 아버지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철물점을 운영하는 주인집 아저씨는 툭하면 아내에게 가게를 맡겨 놓고 조기축구를 비롯해 향우회와 청년회 등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었다.
사람 만나는 걸 워낙에 좋아하고 중년 남자임에도 아주머니보다 수다력이 센 사람이다 보니 오다가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재유를 붙잡고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하곤 했다.
덕분에 규신기업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들어왔다. 장운시에서 새로 유입된 인구 절반은 그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들어오고, 원주민도 많이 다닌다고 했다. IMF 때는 신규 인력을 받지 않았지만, 위기를 넘긴 후에는 건재하게 살아남았다.
규신기업으로 인해 인근에 비슷한 업체들도 많이 생겨났고, 쌀농사만으로 먹고 살던 이 지역이 공업도시의 이미지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재유에게 대학 안 갈 거면 거기나 취직하라며 종종 말하곤 했다. 재유도 귀가 솔깃했다. 어차피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 쭉 살아야 할 거라면 배달일이나 자잘한 알바보단 이왕이면 큰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염우주가 그 집 아들이었다니.
“왜 말이 없어? 네가 물어봤으면서?”
“그냥. 부잣집 애였구나.”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성격도 괜찮아. 친구도 많고. 너도 친하게 지내 봐.”
“좋은 애 같다고 생각은 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모를 거리감만 더 생긴 것 같았다.
재유는 마지막 그릇을 헹구어 엎어 놓고 손을 탈탈 털었다.
친하게 지내 봤자 졸업하면 남남이 될 터였다.
부모들끼리 돈으로 엮여 얼굴 붉히는 사이가 되면 자식들끼리의 우정도 박살 난다는 걸 몸소 겪은 재유였다. 더구나 그런 대단한 집안의 아들이면 보나 마나 좋은 대학에 가서 탄탄대로를 걸을 테고 저와는 다른 인생을 살 것이다. 1년도 안 남은 고3인데 뭐 하러 공들여 새로운 친구를 만들까.
재유는 다 만든 고사리 무침과 참치전을 접시에 옮겨 담았다. 지켜보던 영선도 냉장고 옆에 있던 밥상을 펼쳐 수저를 놓았다. 재유는 그 위에 접시들과 김치찌개를 두고 식탁보를 덮었다.
“아줌마 끝날 시간이지?”
“응. 지금 마중 가려고.”
재유는 나가기 전 방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예전에 살던 자기 방보다도 비좁은 곳이었다. 가축들을 키우던 닭장을 허물고 세입자를 들이기 위해 지은 작은 간이건물이었다.
처음 이 집에서 잤던 날 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 몸이 휴식을 원하는데도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다.
여기 산 지 6개월이 다 돼 가는데 오늘따라 첫날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재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가을, 영선의 집에 이사 왔을 때 재유 모자의 상태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딱하기 그지없었다. 재유는 지금보다 훨씬 말랐었고 몹시 지친 얼굴로 작은 짐가방 두 개를 덜렁 들고 있었다.
조부모의 물세례를 받고 버스를 탄 모자는 무작정 연고도 없는 장운시로 흘러들었다. 서울과는 고작 2시간 거리인 경기도 외곽으로 온 까닭은 단순했다. 엄마의 여고 시절 펜팔 친구가 여기 살았었다는 이유였다. 물론 펜팔은 끊긴 지 오래였다.
아저씨는 귀찮은 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며 두 사람을 들이는 걸 면전에서 반대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사람 가려 받아도 멀쩡하게 생겨서 사고 치는 사람도 많다며 대단한 방도 아닌데 일단 지켜보자 해서 지금의 셋방에서 살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귀찮은 일 없이 지나가기도 했다.
엄마는 이사한 다음 날 식당에 일자리를 얻어 일을 시작했고,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살림살이를 늘려 갔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엄마의 부탁으로 재유만 주소지를 이전해 동거인으로 등록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재유가 이 학교로 전학 올 수 있었다고.
“아줌마 이제 저녁 타임까지 일하시나?”
“어. 내일부터는. 말려 보긴 했는데 고집을 꺾지 않으시네.”
“걱정되겠네. 잘 모시고 와.”
영선의 작은 손이 재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재유는 키가 자라 엉덩이께까지 오는 짧아진 잠바를 걸쳐 입고 현관문을 잠갔다. 영선에게 인사 대신 웃어 주고는 좁은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섰다.
***
재유는 골목 집을 나와 오거리가 있는 로터리를 거쳐 샛강 다리로 향했다.
아직은 3월 초라 강바람이 매서웠다. 재유는 구부정한 자세로 재빠르게 다리를 건넜다. 건널목 한 개를 지나면 나오는 시청과 우체국, 소방서 등 관공서들이 밀집한 식당가에 엄마가 일하는 백반집이 있었다.
아직 끝나려면 20분 정도 남았지만 재유는 식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옆 좁은 골목에 서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응달이라 며칠 전 내린 눈이 담벼락 끝에 지저분하게 굳어 있었다.
이럴 때 워크맨이라도 있으면 음악 들으면서 기다릴 수 있는데. 재유는 낡은 운동화 앞코로 뭉친 눈을 툭툭 찼다. 단단하게 굳어 발만 아팠다.
서울 살 때 빚쟁이들이 집에 난입해서 돈 되는 물건들은 죄 들고 가 버렸다. 그중에 아빠가 일본 출장 가는 동료에게 부탁했다며 사다 준 워크맨도 섞여 있었다. 재유는 그날 속으로 아빠에게 쌍욕을 했다.
“춥지? 이거 써.”
어느새 엄마가 식당에서 나와 손에 든 목도리를 재유에게 둘러 주었다.
“아냐, 엄마가 해요.”
“엄만 계속 주방에 있다 나와서 좀 더워.”
재유는 엄마가 목도리를 감기 편하도록 상체를 조금 숙였다.
“고3 첫날인데 어땠어?”
“별거 없었어요. 손님 많았어요?”
“아니. 이 시간에는 별로 없잖아. 이제 곧 들이닥치겠지. 어서 가자.”
엄마는 자연스럽게 재유에게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무릎이 아파 그런 것이다. 약하게 다리도 절고 있었다. 엄마는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그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재유는 성실했던 아빠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변할 수 있었을까 싶었지만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망가지자 엄마도 망가졌다.
평범한 주부였던 엄마는 빚쟁이의 모욕과 주변의 음흉한 소문, 저임금의 육체노동을 견뎌야 했다. 어느새 얼굴엔 웃음이 사라지고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났다. 신경통과 관절염을 달고 살았고, 가족력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고혈압과 당뇨도 시작됐다.
재유도 이사 왔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려고 했으나 엄마가 난생처음 재유의 뺨을 내리치며 무섭게 반대했다. 엄마가 하는 고생의 명분이 오로지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재유는 믿고 의지할 데라곤 엄마밖에 없었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때로는 마음이 힘겨울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무릎 때문에 늦은 오후까지만 일한다던 엄마가 마감 시간까지 일을 늘리기로 했다. 원래 쭉 풀타임으로 하고 싶어 했지만, 식당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다. 낯선 타지 사람을 고용하는 게 께름칙했는지 몇 달간 수습 기간을 두고 나름 테스트를 했나 보았다. 드디어 정식 직원이 되자 어제 엄마는 그 사실을 알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재유는 애써 어두운 마음을 몰아내고 엄마의 팔을 꼭 감싼 채 걷기 시작했다.
건널목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타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키가 껑충한 남자애가 앞을 막아섰다. 염우주였다. 손에는 비닐을 뜯지 않은 CD가 몇 장 들려있었다. 식당 옆 레코드 가게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아… 그래요.”
시커먼 남자애가 꾸벅 인사하니 엄마는 당황스러운 듯했다. 재유도 멀뚱멀뚱 우주를 보기만 했다.
아까 버스 타고 집으로 간 게 아니었나. 여전히 교복을 입고 가방 멘 차림이었다.
“아, 저 재유랑 같은 반 됐거든요. 그리고 짝꿍이에요.”
“그랬어요? 잘됐네요.”
우리 엄만 줄은 어떻게 알고 ‘어머니’ 소리가 나오는지. 더구나 초면은 아닌 듯한 말투였다. 재유는 엄마의 어깨를 꽉 붙들며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우주는 그런 재유를 보지도 않고 엄마랑만 대화했다.
“어머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제 아들 친구잖아요.”
“아… 그러네요. 평소에 이모님이라고 부르다가 어머니라 그래서 깜짝 놀랐어. 재유야. 이 친구가 식당에 밥 먹으러 자주 왔거든. 밥을 어찌나 복스럽게 잘 먹는지. 같은 학년인 줄은 몰랐네. 우리 재유 잘 부탁해요.”
엄마도 이 상황이 어색한지 반말과 존대가 섞인 말투로 예의를 차렸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제가 재유 잘 챙겨 줄게요.”
우주는 엄마를 향해 넉살 좋게 입을 헤벌리며 웃었다. 어른 앞이라 그런지 우주의 표정이 순진해 뵈기도 하고 맹해 보이기도 했다. 잘생긴 얼굴에 요상한 인상을 주는 애다. 처음엔 무서워 보였다가 떡볶이 먹을 땐 잘 웃는 게 신기했고 버스에서 손을 흔들 땐 착해 보였다.
그래도 재유는 예기치 않은 우주의 등장이 불편했다. 더구나 규신기업 아들이라는 걸 알고 나니 우주와 저 사이에 선이라도 그어진 듯 가까이하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아들 친구’라는 말이 조금은 기분 좋게 들렸다. 엄마는 전학 온 후 친구를 못 사귀는 걸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아까 버스 안 탔어?”
재유는 우주 손에 들린 CD에 무심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사고 싶은 앨범이 있어서 잠깐 들렀는데 너 지나가길래 얼른 나왔지.”
“…….”
아까 봤는데도 뭐가 그리 반가운지 우주는 활짝 웃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유가 말이 없자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한쪽 어깨에 멘 가방을 어설프게 추어올렸다.
“어머니, 그럼 다음에 또 밥 먹으러 갈게요. 재유야 내일 보자!”
“그래요. 다음에 또 봐요.”
우주는 아까처럼 엄마에게 꾸벅 인사하고 다시 레코드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는 “잘됐다. 친하게 지내면 좋겠네.” 하고 말했다. 재유는 별 대꾸 없이 엄마를 데리고 다리로 향했다.
엄마가 언제 나를 저한테 맡겨 놨다고. 잘 챙겨 준다는 말은 또 뭐고.
재유는 속으로 우주에게 투덜댔다. 고등학교 생활을 조용히 마감하고 끝내려던 참인데 오늘 하루만 해도 염우주란 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러 번 끼어들어 왔다. 그것도 재유가 한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평범하게 같이 하교하고 떡볶이를 먹고 엄마에게 자신을 친구라 소개하는 것까지.
우주가 저에게 나쁘게 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났다. 가난이 들킨 것 같은 자격지심일까. 재유는 짧고 낡은 남색 잠바를 내려다보며 우울해졌다.
우주를 떠올리면 신경 쓰이는 것투성이였다. 생긴 것 자체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키에, 덩치에, 선 굵은 얼굴 하며, 거기다 배경은 또 어떻고. 얼마나 대단한 집 아들인지는 모르지만, 아저씨의 설레발을 들으면 그저 그런 회사는 아닌 게 분명했다. 이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유지는 되겠지.
엄마의 걸음걸이에 맞추다 보니 올 때완 다르게 다리를 건너는 속도가 배는 느려졌다. 재유는 목도리를 풀어 다시 엄마의 목에 둘둘 말아 주었다. 엄마의 어깨너머로 레코드 가게가 보였다. 우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3월이라도 해는 빠르게 졌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 강바람이 시리게 뺨을 때렸다.
하루 겪어 본 게 다지만, 우주는 나쁜 애는 아니었다. 일진인 것 같지도 않았고, 영선의 말을 들어 봐도 어느 학교에나 있는 잘생기고 성격 좋은 인기 있는 남학생인 것 같았다. 거기다 공부까지 잘하면 선망의 대상일 테고.
오늘 저에게 보여 준 호의는 그저 혼자 다니는 전학생에게 베푸는 작은 선의라고나 할까.
전학 초기에 그런 식으로 재유에게 접근하는 애들이 더러 있었다. 우주의 표현대로 ‘호리호리하고 잘생겨서’가 아니라 그저 전학생이라서, 혹은 고3을 코앞에 둔 시점에 전학을 온 사정이 궁금해서.
한데 그 관심도 오래가진 않았다. 곧 수능이 다가왔고, 선배들의 수능이 끝나면 이제 자신들의 차례라는 압박감이 교실을 짓누르고 있었다. 고2 2학기 말이라도 애들은 고3처럼 공부했다. 그러니 말 없고 우중충한 전학생과 굳이 친해질 필요가 없었다.
우주도 그럴 것이다. 하물며 고3인데 얼마 안 가 제 공부나 신경 쓰겠지.
재유는 완전히 해가 진 골목을 돌고 돌아 집에 도착했다. 밥통에서 밥을 퍼서 차려 놓은 반찬을 놓고 엄마와 단출한 저녁을 먹었다. 더 이상 그 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
번호순대로 진로상담이 시작되자 교실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학생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간혹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물론 수업을 안 해서 신이 난 무리도 있었다.
담임의 무감한 당부와는 달리 재유는 엄마와 상의하지 않고 진로상담지를 혼자 작성했다. 모자에게 대학 얘기는 금기와도 같았다. 괜히 가지도 못할 대학을 가고 싶다 투정 부릴 수도 없었고, 엄마에겐 이미 충분히 괴로운 현실을 또 한 번 일깨우는 화두였으니 굳이 머리 맞대고 앉아 논의할 거리도 아니었다.
하나둘 상담이 진행되자 어떤 애는 울상을, 어떤 애는 후련한 얼굴을, 또 어떤 애는 똥 씹은 표정을 하고 돌아왔다. 상담 시간을 보아하니 공부 좀 하는 것 같은 애들은 10분을 훌쩍 넘고 그게 아니면 5분 정도로 끝이 났다.
어차피 성적에 따라갈 수 있는 대학은 대충 정해졌는데, ‘진로 상담’이 아니라 ‘대학 상담’이라고 이름 붙여야 하는 거 아닌가? 고등학생의 진로가 대학 진학만 있는 것도 아닌데, 어제 처음 본 선생이랑 5분에서 10분 사이에 대학 외의 진로를 어떻게 결정한다는 건지.
어차피 담임과 나눌 얘기란 ‘어느 대학’이 아니라 대학을 ‘가냐 마냐’에서 끝날 테지만. 저는 5분도 걸릴 것 같지 않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우주는 20분이 다 돼 가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우주가 특별히 공부를 잘하거나 지역 유지의 아들인 걸 감안해 담임과 사담을 나누거나 혹은 둘 다일 것이다.
그런 집에 태어나 그렇게 생겨서 공부까지 잘하면 좀 재수 없지 않나. 인간미가 없어 보일 것 같았다.
재유는 책상에 모로 엎드려 노트를 펼치고 의미 없는 낙서를 했다. 곧 우주가 돌아온 기척이 들렸다.
“넌 무슨 과 갈 거야?”
우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속삭이듯 물었다. 나긋한 저음이 귀에 거슬렸다. 몸을 기울여 밀착했는지 그의 어깨가 등에 닿았다. 재유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간격을 벌렸다.
“…나 대학 안 가.”
“진짜? 왜? 왜 안 가는데?”
“…….”
어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우주는 할 말 없게 만드는 질문을 잘도 했다. 재유가 대학을 안 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의외인 듯, 우주는 ‘왜’에 대한 이유가 정말 궁금해 보였다. 사실대로 말해 줘야 하나 잠깐 고민할 정도였다.
“취업할 거야. 2학기부터.”
“아 그래… 아쉽다.”
“뭐가?”
“2학기 땐 학교 안 나올 거 아냐.”
재유는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책상 모서리를 뚱하게 보고 있었다. 짝이 없으면 공부를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저라면 옆자리가 비어서 편할 것 같은데 뭐가 아쉽다는 걸까.
“그럼 어디로 취업할 건데?”
또 할 말이 없어졌다. 너희 아버지 공장에 이력서 쓸 건데, 하면 어떤 얼굴을 할까 궁금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재유는 또 입을 닫았다.
“서울로 취직하긴 힘든가?”
“넌… 서울에 있는 대학 갈 거야?”
“어. 일단 목표는 그래.”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우주의 말은 재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빠가 실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재유는 자신이 대학을 갈 거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야자도 하고 학원도 다녔다.
하고 싶은 거나 되고 싶은 건 없었지만, 막연하게 고고학이나 고미술학을 전공하면 어떨까도 생각했었다. TV에서 본 고고학자가 문화재를 복원하는 게 폼나 보였기 때문이다.
“난 장운에서 취직할 거야.”
“그렇구나….”
입술을 꾹 다물고 눈가가 늘어뜨리는 게 우주는 정말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유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설마 대학 가서도 연락하고 지낼 생각이었나?
뜻밖에도, 갑자기 자신의 대학 생활이 한순간 머릿속에 그려졌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한번 상상하자 멈추기 힘들었다.
만약 여건이 돼서 대학엘 갈 수 있다면, OT도 하고 MT도 가고 단골 술집을 만들어 밤새 술도 마시고 시험 기간엔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그리고 만약, 우주와 같은 대학에 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달았지만, 잠깐 설레기도 했지만, 결국엔 씁쓸했다.
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유의 차례라며 직전에 상담을 마친 녀석이 상담실로 가라고 알려 왔다.
“잘하고 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우주가 웃어 주고 있었다. 격려하듯 다정한 미소였다. 오늘은 뭐가 기분이 좋아서 또 저렇게 웃나. 재유는 제가 했던 망상이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보일 듯 말 듯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상담실로 향했다.
“대학은 안 가고, 취업은 규신기업?”
“네.”
담임은 재유의 진로상담지를 슥 훑어보더니 등받이에 삐딱하게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어머니랑 상의 된 거지?”
“네.”
“어디 보자. 야자도 안 한다고?”
“…네.”
야자 얘기가 나오자 담임은 골치 아픈 듯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썼다. 재유는 긴장감에 자세를 고쳐 앉고 간절하게 담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집이 좀 어려워서 야자를 하긴 힘들 것 같아요.”
이 학교는 1·2학년은 10시까지, 3학년은 11시까지 야자를 해야 했다. 작년에 막 전학 왔을 때도 야자 때문에 힘들었다. 엄마는 식당 일을 마치면 재유가 올 때까지 봉투 접기나 헤어핀 만들기를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실고나 상고로 전학시켜 주지 왜 인문계로 보냈는지 엄마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지금 재유의 상황은 알바해서 급식비라도 벌어야 했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매여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전학 오기 전보다 성적도 많이 떨어졌구만. 중간은 해야지. 규신이 공돌이 뽑는다 해도 성적 좀 보는데? 작년부턴 뽑는 인원도 좀 줄었고.”
“중간고사랑 기말고사 열심히 할게요. 성적 다시 올릴 수 있어요. 야자 안 해도 할 수 있어요.”
재유의 마지막 성적은 35등이었다. 집이 망하기 전 성적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이었지만, 수업 시간에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성적을 충분히 올릴 수 있었다. 올려야만 하고.
혹시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두려워 담임의 입만 쳐다보며 호소하듯 손까지 꼭 맞잡아 쥐었다.
“흐음… 야자 안 한다고 공부하는 애들 괜히 바람 넣고 그러지 마라.”
담임의 긍정적인 대답에 재유는 자신 있다는 듯 힘있게 말했다.
“네. 집에 갈 때도 조용히 갈게요. 학교에 있을 때도 공부만 할 거예요.”
담임은 여전히 못 미더운지 재유를 빤히 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재유는 크게 안도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야자를 빼는 건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겠다 결정해도 입시생의 기강과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1학기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야자를 해야 했다. 생계가 몹시 곤란하거나 예술대학을 목표로 하는 몇몇만 입시 학원을 위해 야자를 뺐다.
재유는 야자를 안 해도 된다는 기쁨과 동시에 제 처지가 어지간히 밑바닥이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는데 왜 야자 안 하는 걸 허락받아야 하는지. ‘야간자율학습’에 자율은 없다. 고등학생은 여러모로 귀찮고 불편했다.
“아 참. 혹시 마음 바뀔지도 모르니까.”
담임은 책상 한편에 놓인 서류 더미 사이에서 웬 팸플릿을 하나 꺼내 주었다. 대학 소개 홍보 책자였다.
“국도변에 가다 보면 대학 하나 있는 거 알지? ‘장운보건대학’이라고 작년에 생긴 건데, 생각 있음 다시 와. 여긴 성적은 안 봐. 남자가 하기에 물리치료과도 괜찮고. 솔직히 2교대 공장보단 기술 배워 먹고 사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좋지. 안 그래?”
“…네.”
“그럼 가 봐.”
재유는 담임에게 고개를 숙이고 상담실을 나왔다. 손에 쥔 팸플릿을 보자 헛웃음이 났다. 제 사정을 알면서 이런 걸 건네는 건 무슨 심보일까. 재유가 대학을 가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논밭이 펼쳐진 산 중턱에 막 지어진 건물 하나짜리 대학은 아니었다.
재유는 허탈한 듯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 상담은 5분이 채 안 돼서 끝났다. 그래도 얻은 성과가 있으니 잡친 기분을 빨리 추스르고 싶었다.
복도를 걸으며 팸플릿을 접고 또 접어 작은 조각으로 만들고 교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남학생 끝 번호인 재유가 들어오자 여학생 하나가 교실을 나섰다.
자리로 돌아가 책상에 엎어지려는데 우주가 옆에서 어깨를 툭 쳤다.
“잘 끝났어?”
잘 끝난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뭐. 재유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수고했다는 듯 웃으며 뭔가를 건넸다. 납작한 네모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나 먹으라고?”
“어.”
“…고마워.”
“까 줄까?”
“아니, 됐어.”
지금 안 먹으면 당장이라도 까 줄 기세여서 재유는 껍질을 벗겨 내고 초콜릿을 입 안에 넣었다. 재유가 초콜릿을 우물거리자 자기도 하나 까먹으며 픽 웃었다.
초콜릿 안에 딸기 요거트 맛이 났다. 달콤한 향이 입 안에 감돌았다. 맹물에 갈색 시럽이 물감 퍼지듯 당분이 몸에 퍼졌다. 단 게 들어오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얘기 잘됐어? 담임이 뭐래?”
“그냥 뭐….”
얘는 거리감 조절이 안 되는 게 확실했다. 만난 지 48시간도 안 됐는데 짝꿍이랍시고 십년지기 친구에게나 할 법한 질문을 툭툭 던졌다. 그게 실례가 된다는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이 지역 풍토가 원래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건지 재유는 헷갈리고 있었다.
“취업하기로 했어.”
“그래…. 그럼 야자는? 야자는 하지?”
“아니. 오자만 끝내고 갈 거야.”
“진짜? 하아….”
또 시무룩한 얼굴이다. 재유는 저 표정의 의미를 가늠해 보려다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에 우주의 반응을 무시하고 교과서를 펼쳤다.
염우주. 내가 너랑 친해져 보려 해도 너네 공장 들어가려면 공부를 해야 된단다. 그러니까 너는 서울에 있는 대학 가고, 나는 너네 공장에 갈 거니까 각자 알아서 공부에만 집중 좀 하자.
재유는 하지도 못 할 말들을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교과서를 보는 척했다. 곧 옆자리에서도 책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교과서를 읽으려니 머리가 뱅뱅 돌았다.
어차피 세상은 천재가 바꾼다. 하지만 바뀐 세상을 발전시키는 건 20등에서 50등까지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2학년 담임이 개학 첫날 했던 말이었다. 그 당시엔 재유처럼 아버지가 실직한 아이들이 반에 너덧은 되었을 때였다. 재유는 그 말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럼, 세상을 바꾼다는 천재들이 IMF도 만든 건가. 지금 이렇게 세상을 좆같이 바꾼 게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뭐 하러 애써 공부를 하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 한 올이라도 붙잡아 매 두고 싶었다. 한땐 어른이 되면 이름을 날리는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청운의 꿈을 품었다면 지금은 구체적인 계획과 현실적인 목표가 재유를 채웠다.
세상을 발전시킨다는 35등이지만, 더 발전시킬지도 모를 20등 언저리가 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읽히지 않는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
오늘부터 시작이구나.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 재유는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아침 먹은 게 부실해 빨리 밥을 먹고 싶은데, 지금 가면 줄을 오래 서야 했다. 재유는 다른 애들과 섞여서 북적거리는 줄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15분 뒤에 갈 생각으로 책상에 엎드리는데,
“재유야. 뭐 해? 밥 먹으러 가자.”
옆에서 등을 툭툭 쳤다. 우주는 금방이라도 튀어갈 기세로 의자를 붙잡고 서 있었다. 재유는 귀찮아서 눈만 내밀고 말했다.
“난 좀 있다 먹을게.”
“무슨 소리야. 빨리 가야 빨리 먹고 잠깐이라도 놀지.”
“아직 배 안 고파. 먼저 먹고 와.”
“…….”
말이 없길래 갔나 보다, 했는데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털썩 다시 앉았다.
“그럼 기다렸다 너랑 가지 뭐.”
재유는 눈을 피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들러붙나 짜증이 나려고 했다. 역시 예사 오지랖이 아니다.
“야, 염! 안 가고 뭐 해? 빨리 텨.”
“아 씨, 벌써 백 명은 줄 섰겠다.”
앞자리의 턱이 좁은 까불이와 범생이로 보이는 안경이 우주를 재촉했다. 어제 우주에게 피시방 가자던 애들이었다. 우주는 남 속도 모르고 앞자리 놈들을 등에 업었다.
“들었지? 가자. 그리고 오늘 급식 처음 하는 날이잖아. 학교에선 밥 혼자 먹는 거 아냐.”
상투적인 멘트에 도덕책이라도 읽는 줄 알았다.
“아 진짜, 빨리 좀 가자니까?”
까불이까지 짜증을 냈다. 사내새끼들이 밥이 뭐 대단하다고 같이 먹겠다며 저렇게 안달인지 몰랐다. 지들끼리 갈 것이지 우주를 기다린답시고 발까지 굴러 가며 드릉드릉하고 있었다. 대단한 우정이시네요, 들.
재유는 순식간에 급식 첫날 밥을 늦게 먹게 만드는 원흉이 되어 있었다. 급식실을 향해 떠나는 학생들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안경 놈도 재유를 째려봤다. 재유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집안의 우환 때문에 속에 화가 많아서 그렇지, 재유는 원래 소심했다. 제 의견보단 남의 의견을 따르고 키에 비해 목소리도 작았다. 영선의 말마따나 왕따로 보일지언정 혼자 있는 게 편했는데 반 친구들이 무시하는 건 참아도, 저를 미워하는 것 같은 상황은 견디지 못했다.
재유가 일어서자마자 앞자리 녀석들은 용수철처럼 튀어 갔다. 우주도 제가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더니 재유의 팔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하는 사이에 급식실을 향해 덩달아 전력 질주를 하게 되었다.
급식실은 새 건물 특유의 먼지 냄새와 음식 냄새가 섞여 바글바글한 시장통 같았다. 그래도 재유의 배는 밥을 달라고 요동을 쳤다.
식판에 배식을 받고 무리에 떠밀려 빈자리에 앉았다. 우주는 맞은편이었다. 반찬은 계란말이와 시금치 무침, 제육볶음에 된장국이었다. 후식으로 요거트도 있었다.
그렇게 같이 가자고 촐싹대길래 대단한 점심 회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같이 온 놈들은 식판에 코를 박고 먹는 데 바빴다. 재유도 허겁지겁 밥을 떠 넣었다. 반찬도 국도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이전 학교에서는 일찍부터 급식을 했었는데, 전학 와서는 다시 도시락으로 회귀해야 했다. 아직도 급식을 시작 안 한 학교가 있나 싶었다. 하는 수 없이 점심 저녁 도시락을 두 개씩 싸서 다녔다. 그때도 아주머니의 도움이 있었다. 재유는 한동안 영선과 도시락 반찬이 같았다.
영선이네가 없었다면 엄마와 재유는 객사 내지는 아사였을지도 모른다. 한 끼 밥이 그렇게 소중한지 살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다시 식판 밥을 먹고 있자니 괜히 울컥해 목 안쪽이 칼칼했다. 사실, 우주와 함께 달릴 때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 한구석에선 급식실에 같이 가자고 권해 준 게 내심 고마웠다.
같은 반 친구들과 섞여 급식실을 가고,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시시껄렁한 대화로 점심시간을 보내는 게 새삼스러웠다. 생각 없는 해면체들의 무리에 다시 섞인 느낌이랄까. 일상을 회복한 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점심시간이 너무 오랜만이라 재유는 가슴 한쪽이 들썽거렸다.
“우주, 안녕.”
여자애들 무리가 지나가다 우주에게 알은체를 했다. 우주는 산처럼 쌓였던 밥을 절반이나 해치운 상태로 손을 들어주곤 다시 밥을 퍼먹었다.
“오빠, 이거 드세요.”
조금 있다가는 후배로 보이는 여자애가 초코 과자를 우주의 식판 옆에 두고 냅다 도망쳐 버렸다. 이번에도 우주는 과자를 힐끔 보더니, 이번엔 국을 퍼먹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인기 많은 티가 난다. 재수 없는 거 맞다. 좀 부럽기도 하고.
“와 씨. 사람이 몇인데 이거만 주고 가네.”
까불이가 과자를 홀랑 뜯어서 테이블 중앙에 펼쳤다. 벌써 밥을 다 먹은 앞자리 녀석들이 제 것도 아니면서 태연하게 과자를 씹고 있었다.
까불이는 이현근이었고, 안경은 김성종이었다. 가만 보니 얘네들은 우주가 여학생들에게 관심받는 걸 덩달아 즐기거나, 이렇게 군것질거리를 얻어먹기 위해 우주와 함께 밥을 먹으려 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어제 우주에게 전해 줬던 편지도 재유에겐 문화충격이었다. 남고에서는 그런 예쁘고 화사한 편지 봉투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전학 온 첫날엔 쉬는 시간에 여자애들이 교복 치마를 옷핀으로 고정해 남자애들과 말뚝박기를 하고 있었다. 재유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암울한 기분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남녀공학은 별세계이자 사랑과 전쟁이었다. 고3들도 예외는 없었다. 수능이 코앞인데도 한 학년 선배들은 마음에 드는 후배에게 낯간지러운 연애편지를 써서 꽃이나 선물과 함께 보내기도 했다. 접선 장소는 주로 매점이었는데, 급식실이 생겼으니 이곳이 바로 사랑방이었다.
“방학 때 형태가 쟤한테 고백했었다던데. 차였나 보다. 너한테 과자 준 거 보면.”
주인은 손도 대지 않은 과자를 다 해치운 현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형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찾고 있었다. 하여간 못됐다.
“그만해.”
우주가 밥을 먹다 말고 현근에게 으르듯 말했다. 재유와 눈이 마주치자 쯧, 잘게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뭘 그만해. 너 친한 여자애들도 많잖아. 이럴 때 두루두루 모여서 밥도 같이 먹고 주말엔 밖에서 만나서 놀러도 가고 그러면 좀 좋냐? 이기적인 새끼.”
“원래 가진 것들이 더한 법이지.”
조용히 요플레 뚜껑을 뜯고 있던 성종도 거들었다.
심드렁한 우주의 반응과 달리 재유도 그들의 의견에 공감했다. 재유가 여자애들을 볼 기회는 학원밖에 없었는데, 잘생긴 애랑 친하게 지내면 여자애들과 접촉할 기회가 월등히 많아졌다. 재유도 한때 친구들과 그런 식으로 피자집에서 미팅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었다. 재유는 쑥스러워 한마디도 못 하고 끝나 버린 성과 없는 만남이었지만.
“아 쫌, 그만하라고.”
우주가 아까보다 성난 목소리로 두 녀석을 노려봤다. 현근과 성종은 “잘났다, 이 새끼야.” 하고 픽 웃으며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재유는 싸움이 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하는데, 우주는 별말 없이 계란말이를 집어 들었다. 게다가 두 놈들은 퇴식구에 식판을 반납하더니 당연한 듯 새 식판을 집어 들고 다시 줄을 섰다. 우주도 그렇고 쟤들도 그렇고 먹성 하난 끝내줬다.
“쟤들 말 신경 쓰지 마.”
평소의 나직한 목소리로 우주가 말했다. 재유는 국을 떠먹다 말고 우주를 봤다.
“내가 뭘 신경 써?”
친한 여자애들이 많다는 걸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다 가져서 이기적이라는 걸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헷갈렸다. 재유는 정말 궁금해서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는데, 우주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번엔 착해 보이는 얼굴이다.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신경 안 쓰지도 말고.”
재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먹던 국을 다시 떠먹었다. 열심히 먹고 있는데도 절반밖에 줄지 않았다.
우주가 제 식판에서 제육을 한 무더기 덜어 줬다. 은색 식판의 반찬 칸이 대부분 비어서 국에다 밥을 말려던 참이었는데 제육이 수북이 채워졌다. 재유가 왜 날 주는 거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손 안 댄 거야.”
우주는 눈도 안 마주치고 여상하게 말하며 다시 밥을 한술 떴다. 도시락과 급식 인생 통틀어 고기반찬을 뺏어 가면 뺏어 갔지 제 걸 덜어 주는 애는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넌 고기 안 좋아해?”
우주는 어깨를 으쓱할 뿐 말이 없었다. 먹성으로 보아 식판 모든 반찬 칸에 고기만 채워 먹어도 부족할 것 같은데. 설마, 적선하는 건가? 재유는 떨떠름하게 젓가락을 들어 제육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우주가 히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공부 열심히 하더라.”
“…그냥 뭐, 성적 좀 올리고 싶어서. 대학 안 가도 공부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리고 다들 공부하는데 혼자 딴짓하기도 그렇고.”
규신기업의 커트라인에 맞추기 위해 공부한다는 걸 이제 와 말하자니 왠지 뜨끔하기도 해서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다.
“너도 열심히 하던데 뭘.”
“너, 나 보고 있었어?”
한쪽 눈썹을 치키며 흥미로운 듯 바라보는 우주 때문에 헛웃음이 났다. 제가 먼저 얘기 꺼냈으면서 누굴 스토커 취급하는 건지.
“보고 있었냐니… 옆에 있으면 보이니까 그렇지.”
우주가 이번엔 하나 남은 계란말이를 건넸다. “됐어, 너 먹어.” 하는데도 씨익 웃기만 했다.
“그럼 나 보는 문제집 같이 볼래?”
재유는 제육을 입에 문 채로 눈만 들어 우주를 봤다. 그 말은 조금 반가웠다.
재유가 보는 교과서와 참고서는 작년에 선배들이 사물함에 버리고 간 것이었다. 깨끗한 걸 골라 주워 왔지만, 문제집을 보면서는 조금 걱정되는 게 있었다.
작년 수능은 갑자기 쉬워졌다. 그동안은 400점 만점에 300점 넘기도 힘들었는데 처음으로 만점자도 나왔고, 적어도 380점은 넘어야 의대나 S대 법대를 갔다. 어렵게 출제된 작년 문제집보다 00년도에 맞춘 새로운 문제집이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당장 모의고사도 코앞이었고.
대학도 안 갈 거면서 진지하게 출제 트렌드를 우려하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지만, 재유는 염치없이 되물었다.
“그래도 돼? 너 보기도 바쁠 텐데.”
“당연하지. 예상 문제지 뽑아 논 것도 있는데 그것도 복사해서 줄게.”
“예상 문제지? 네가 만든 거야?”
“아, 그건 아니고. 주말에 과외 하거든. 거기서 준 거야.”
매일 11시까지 야자에 주말엔 따로 과외까지 받아야 한다니. 역시 수험생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재유는 저처럼 사회생활을 일찍 하는 게 스트레스일지 공부 압박을 받는 고3 생활이 스트레스일지 가늠해 보았다. 어느 게 더 힘들다 판단할 순 없었지만, 재유는 처음으로 우주가 안쓰러웠다. 보아하니 게임도 좋아하고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던데 앞으로는 그런 시간도 줄어들겠지.
그러다 도리질을 쳤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제 처지에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재유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우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마워. 잘 볼게.”
우주는 대답 없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제 입가를 검지로 톡톡 쳤다.
“나 또 묻었어?”
재유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어 입가를 닦았다. 혀끝에서 고추장 맛이 났다. 제육이 맵진 않았지만, 양념이 빨갰다. 많이 묻었나 걱정돼서 손등으로 닦으려는데, 우주가 손을 낚아채 저지했다.
“휴지 가져다줄게.”
배가 고프긴 많이 고팠나. 밥을 보고 정신없이 먹어 대는 엉성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쏠렸다.
현근과 성종은 그새 새 식판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야, 서울엔 DVD방인가? 그런 게 있다던데. 너도 가 봤어?”
현근이 처음 먹는 것처럼 고봉밥을 퍼먹으며 물었다. 이제껏 저를 없는 취급했던지라 말을 걸 줄은 몰랐던 재유는 캑캑거리며 잔기침을 했다.
“아니. 안 가 봤는데.”
쥐어짜듯 겨우 말하자 휴지를 갖고 오던 우주가 등을 퍽퍽 두드려 줬다. 사레들린 것보다 그의 행동이 더 당황스러워 팔을 슬쩍 밀쳐냈다. 우주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재유를 살폈다. 다시 기침을 하면 물이라도 떠다 바칠 기세였다.
“그래? 거기선 야한 영화도 볼 수 있대. 여자랑 들어가서 뭔 짓을 해도 모르고.”
재유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자세히는 몰랐다. 영화를 보여 준다곤 해도 미성년자는 못 가는 거로 알고 있는데.
“글쎄, 난 잘-”
“넌 꼭 그런 얘기만 하냐.”
재유가 대답하려는데 우주가 못마땅한 듯 말을 가로챘다.
“뭐 임마,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근데 너 서울에서 여자 사겨 본 적은 있어?”
초면에 첫마디로 DVD방 방문 이력과 여자친구의 유무를 묻는 현근을 보니 오지랖은 이 동네 특성이 맞는 것 같다. 말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데, 우주가 이번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한 번.”
잠깐이지만 재유도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긴 했다. 숫기 없고 소극적인 재유 때문에 금세 싫증이 난 건지 뽀뽀도 못 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로도 한 번인가 고백을 받기는 했지만, 그땐 이미 집이 기울기 시작해 연애에 관심 둘 여력이 없었다.
“진짜? 언제? 얼마나 사겼는데?”
“고1 때. 여름방학에 잠깐 만났어.”
“어디까지 갔는데?”
“여름방학 때 잠깐 만난 거래잖아. 진도 빼 봤자 얼마나 뺐겠냐?”
“설마 손도 못 잡아 본 거 아니지?”
“이거, 이거, 여름성경학교 가서 지 혼자 착각하고 그런 거 아냐?”
교회는 다닌 적도 없고, 뽀뽀는 못 했어도 손까지는 잡아 봤는데.
재유는 속으로 반박하면서도 겉으론 관심 없는 척 웃기만 했다. 여자친구 얘기가 나오자 역시 분위기가 활발해졌다. 현근과 성종은 자기네들끼리 떠들며 재유의 첫 연애에 대한 추측을 재유만의 망상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우주는 듣고만 있었지만, 집중도가 높았다. 여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에 눈을 크게 뜨며 재유를 향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씁쓸한 듯한 실망의 빛을 띠더니, 옆에서 떠들든 말든 재유의 얼굴만 화난 듯 쏘아보고 있었다.
“근데 왜 지금은 안 사겨? 전학 와서 너 좋다는 애 없었어?”
“…….”
“왜 말이 없냐? 너 첨 전학 왔을 때 매점에서 여자애들이 네 얘기 쑤군거리고 그러던데. 잘생겼다고.”
재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백은커녕 말 붙이는 여자애 한 명 없었다. 볼품없는 교복에 삐쩍 마르고 죽상을 하고 있으니 호감이 생기려야 생길 수도 없을 터였다.
“저렇게 입을 딱 닫고 있으니 뭔 재주로 여자가 생기겠냐? 한 번 사귄 것도 용타.”
현근은 “에이 재미없다.” 하며 어제 오락프로그램에 나온 걸그룹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밥도 다 먹었는데 두 번째 식판을 먹고 있는 놈들을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시선이 느껴졌다. 우주가 입매를 굳히며 재유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얜 또 뭐가 불만이어서 저런 얼굴을 하나.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주는 기본적으로 착하고 좋은 애인 건 맞는데, 급식 먹으면서는 좀 이상했다. 무심했다가 친절했다가 기분 상한 것처럼 표정을 구겼다가…. 다채롭다, 다채로워.
“먹고 와. 우리 먼저 갈게.”
우주가 먼저 일어서며 재유 쪽을 내려보며 가자고 턱짓을 했다. 재유도 얼결에 식판을 들고 따라나섰다.
급식실을 나오자 올 때완 다르게 우주는 재유를 앞서서 먼저 걸어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가는 뒷모습이 무뚝뚝했다. 밥 먹을 때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갑자기 핀트가 나간 건지 애처럼 저렇게 티를 내나 몰랐다.
우주는 뒷길로 가지 않고 매점으로 향했다. 이미 간격이 벌어져 우주는 멀찍이 걷고 있었다. 아까 먹은 게 모자랐나. 하긴. 저 정도 체격이면 많이 먹는 것도 당연하지.
재유는 따라갈까 하다가 괜히 군것질로 돈 낭비하기 싫어 혼자 교실 쪽으로 갔다.
식사가 끝나가는 시간이라 본관 뒷길은 활기가 넘쳤다. 간식거리를 손에 들고 가거나 동아리방에 모여 수다를 떨기도 하고 식후 땡 시간인지 어디선가 담배 냄새도 솔솔 풍겨 왔다.
오랜만에 반 친구들과 밥을 먹어 기분이 좋았었는데. 재유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우주 때문에 재유까지 기분이 잡쳤다.
초콜릿도 주고 급식도 같이 먹자 해 주고 엄마한테 잘 챙겨 준다고도 했으면서 저 기분 나쁘다고 재유를 내팽개치고 휙 가 버렸다. 성격 좋은 동급생인 척하더니 순 제 맘대로 하는 애새끼였다. 그럴 거면 잘해 주지나 말지. 문제집도 안 빌려주겠지.
잠시나마 친구들 틈에 섞여 떠들썩한 점심시간을 보내 설레었던 마음이 다시 굳어졌다. 줄곧 혼자였으니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다 해서 마음 상할 것도 없는데, 괜히 우주가 미웠다.
재유는 터덜터덜 걸어 현관에 도착했다. 신발을 벗으려 몸을 숙이는데, 뒤에서 누군가 팔을 잡아채는 바람에 몸이 기울어졌다. 으악, 비명이 터지고 넘어지려는 걸 우주가 허리와 엉덩이를 받치고 있었다.
“뭐, 뭐야!”
간신히 균형을 잡은 재유는 우주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급식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의 시선이 몰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찮아?”
“뭐야 너. 왜 갑자기 잡아당겨.”
볼썽사나운 모습을 수습하려 재유는 괜히 교복을 털며 물었다.
“치사하게 혼자 가냐?”
제가 먼저 시작해 놓고 뒤집어씌우는 게 어이가 없었다.
“뭘 혼자 가. 네가 먼저 매점으로 갔잖아.”
재유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마음과 다르게 제 목소리가 꼭 투정 부리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섭섭했던 게 티가 났나 싶어 조마조마했다.
“밖으로 나가자. 교실 가 봐야 허리만 아프지.”
우주는 쿡 웃으며 현관을 벗어났다. 또 멋대로 혼자 나가지. 재유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따라나섰다. 건물을 빙 돌아 운동장이 보이는 화단 쪽으로 나가자,
“이거.”
하며 우주가 주머니에서 캔 사이다를 하나 건넸다. 가만 쳐다보니 “따 줄까?” 묻길래 얼른 받아들었다.
“이거 사러 간 거였는데 홀랑 가 버리고 없어서 뛰어왔어.”
“…너 화난 거 아니었어?”
말을 꺼낸 순간, 이런 걸 묻고 싶진 않았는데, 하고 생각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말로 먼저 나가 버린 거였다. 그런데 희한하게 뱉고 나니 확인하고 싶었다.
갑자기 정색하고, 나 모른 척한 거 맞지 않냐고, 왜 그런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알아야 풀어 주든 조심하든 대응을 하지 않겠나. 좀 전에 혼자인 게 더 편했다는 생각은 취소다. 그렇게 화난 등을 보이면서까지 툴툴 가 버렸으면서.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거로만 보였으니 잘못한 게 없는 재유는 억울했다. 화풀이엔 돌직구로 맞서야 했다.
“혹시 나 때문에 화난 거야?”
직설적으로 묻자 우주가 입술을 말아 물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반응을 보니 제대로 짚었나 보다.
확실히 우주는 청소년 드라마의 주인공 같을 때가 있었다. 모범생이긴 한데 단순히 재미없는 놈이 아니라 나이답지 않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 반의 중심이 되는 애어른 같은 애. 때로는 익살맞고 때로는 진지한, 완벽할 것 같지만 적절하게 빈틈도 보이는 허술함까지. 이런 애가 어른이 되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재유는 우주의 입에서 나올 말을 신중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저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하면 이유를 묻고, 고치고 싶었다. 고작 이틀을 함께한 것뿐이지만, 재유는 우주에게 관심이 있었다. 근 2년 만에 새로운 학교 친구를 사귈 기회였다. 그것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뒤돌아볼 정도로 눈에 띄는 아이가 먼저 호감과 배려를 보여 줬다.
제 인생에 닥친 불행을 해석하고 곱씹기 위해 우울과 자기연민에 빠져 일부러 혼자 지내는 걸 선택했지만,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먼저 다가갈 용기도 없었고, 누가 다가와 주지 않을 거란 자포자기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 문제집을 빌려주겠다는 호의가 아쉬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왕 한 학기 동안 짝으로 지낼 거, 좋게좋게 고등학교 시절을 마무리하고 싶은, 일종의 유도리였다.
“…명찰 삐뚤어졌다.”
“어?”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생뚱맞은 명찰 지적에 재유는 잠시 벙쪘다. 담백하고 건조하게 입매를 굳힌 우주의 손이 왼쪽 가슴께로 다가왔다. 재유는 시선을 내려 손의 움직임을 좇았다. 우주 말대로 ‘한재유’의 ‘유’ 쪽이 위로 들려 있었다. 곧 길고 두툼한 엄지와 검지가 명찰을 이리저리 조정하며 바른 위치로 놓았다.
마른 나뭇가지에 순이 돋아 개화를 앞둔 벚나무 교정에서,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농구를 하는 소리와 교실 안에서 호들갑스럽게 수다 떠는 소리가 버무려진 가운데, 우주의 애타는 한숨이 가느다랗게 들려왔다면 그건 착각일까.
명찰에서 거둬들인 손이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바지 주머니 속으로 꽂혔다.
“저쪽으로 가자.”
속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놈이다. 남겨진 사람을 어리벙벙하게 만들고는 자연스럽게 혼자 앞서나간다.
큼직한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운동장 응원석 한편에 자리 잡은 우주가 사이다를 따서 재유에게 건네고, 재유 손에 들린 걸 제가 가져갔다.
“넌 어제 나 처음 봤다고 했지?”
“어….”
“내가 널 더 먼저 알았잖아. 난 작년에 너 전학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대화의 갈피를 잡지 못한 재유가 미간을 좁힌 채 우주를 보았다. 우주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농구 하는 녀석들을 보는 것도 아니고 운동장의 마른 흙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자기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가만히 허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너한테도 시간을 좀 줘야 하는데, 잘 안 되네.”
그 말을 하는 우주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아리송한 얼굴로 우주를 보던 재유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캔의 표면에 맺힌 수분 때문에 재유의 손이 젖어 들었다. 그게 화가 난 이유라는 걸까.
“이런 말 진짜 처음 해 보는데….”
“뭔데?”
줄곧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자기를 의식해서인지 우주는 헛기침을 하며 괜히 운동장을 빙 둘러보았다.
“앞으로도 나랑 같이 점심 먹을 거지?”
이런 말 처음 한다는 게 사실인지 우주는 쑥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뒷목을 벅벅 긁으며 귀를 붉혔다. 재유는 맥이 탁 풀렸다. 오히려 제가 우주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말이 우주 입에서 나오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바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만 좋다면 난 뭐….”
“그럼 우리 점심시간 되고 15분쯤 있다가 급식실 가는 거 어때?”
원래 재유의 계획이었던 점심 스케줄이었다. 거기에 우주가 추가된 것뿐이었다.
우주의 말은, 앞자리 놈들을 떼 놓고 둘이서만 같이 점심을 먹자는 거였다. 확실히 이런 덩치에 10개월 후면 성인이 될 녀석이 꺼낸 말 치곤 안 어울렸다.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그래서 귀여웠다.
혈색 좋은 건강한 뺨과 숱이 빽빽한 머리카락, 검은 칠을 해 놓은 듯한 새카만 눈썹이 꼭 개구쟁이 소년처럼 보였다. 지금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며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데도 덩치는 튼실하고 다부져서 묘한 엇박의 매력이 있었다.
“그래. 좋아.”
그런 녀석이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재유의 한마디에 혀까지 쏙 내밀고 헤벌쭉 웃는 게 또 우스웠다. 장운에서 제일 큰 기업의 아들이라는 이 녀석은 세상 다 가진 재수 없는 놈처럼 보였는데, 가진 것을 뽐내고 젠체하며 오만하게 구는 성미는 아닌가 보다.
작년에 전학 온 자신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우주는 거리도 없이 다가왔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어필했다. 비록 한 학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재유는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같이 사진 찍을 친구 하나는 생겼다는 생각에 가슴이 또 한 번 들썩거렸다.
***
3월 중순이 지나갈 무렵, 오자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재유는 엄마 대신 헤어핀 조립을 하고 있었다. 조립이라기보다 까만색 똑딱핀에 조그마한 플라스틱 캐릭터를 본드로 붙이는 일이었다. 앙증맞은 고양이도 있고, 눈이 땡그란 강아지도 있고, 귀에 리본 달린 토끼도 있는 거로 보아 유아용 헤어핀인 것 같았다.
야자를 안 하게 된 날부터 지역 일간지를 긁어모으며 알바 자리를 찾았는데, 공중전화로 동전만 날리고 신문에 엑스 표만 늘어갈 뿐, 재유를 써 주는 곳은 없었다. 고등학생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핸드폰은커녕 집 전화와 삐삐마저 없어서 그런지, 열에 한 번 면접을 가도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마음은 급한데, 훌쩍 자란 몸과 달리 뜻대로 되는 일은 잘 없는 열아홉이었다. 이러면 야자를 안 하는 보람도 없어진다. 재유는 시간이 아까워 한숨이 났다.
엄마는 풀타임 식당 일을 하면서도 손부업 거리를 계속 가져왔다. 밤늦게 집에 와서 새벽 2시까지 본드 냄새 맡아 가며 일을 했다. 그 덕에 수입은 조금 늘었지만, 그렇다고 대단치도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사채업자가 모자를 찾아 셋방 문을 두드리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엄마는 아빠와 아빠 본가에서 알아서 할 거라고 안심시켰지만, 한번 겪은 충격이 재유 안에서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집 근처에만 와도 어슬렁거리는 덩치는 없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사채빚은 그렇다 쳐도 지인에게 빌린 돈까지는 어쩔 수 없는지 엄마는 아빠가 몰염치하게 꿔 간 돈들을 이웃들에게 꾸준히 갚아주고 있었다. 그래서 월급이 늘었어도 빚을 갚고 월세와 생활비를 쓰고 나면 재유에게 떨어지는 용돈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매점에서 컵라면 하나 사 먹는 것도 종일 고민해야 했다. 정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처음 이사 왔을 때처럼 마냥 우울하진 않았다. 우주 덕에 그새 앞자리 친구들과도 제법 친해져 학교에서 혼자인 모양새는 일찌감치 멀어졌다.
우주와 단둘이 급식 먹는 걸 못마땅해하긴 했지만, 현근과 성종은 꽤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현근은 쏟아내는 말마다 개그콘서트 뺨칠 정도로 유머 감각이 출중했고, 성종은 의외로 문학 소년이어서 새로 나온 신간이나 문예지 같은 것들을 재유에게 선뜻 잘 빌려줬다.
우주는 약속대로 문제집도 빌려주고 과외에서 받았다는 예상 문제도 뽑아 주었다. 게다가 재유가 어려운 문제로 머리 아파할 때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매점에서 캔커피를 사다 주기도 했다. 얻어먹을 것 같아서 매점에 가자고 하면 한사코 거절하는데, 우주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너무 친절하달까, 배려가 지나치달까.
급식 첫날, 우주는 오자 끝나고 교실을 나서는 재유를 조용히 따라나섰다. 재유는 곁에서 신발을 챙기는 우주를 보고 물었다.
‘밖에서 저녁 먹게?’
이럴 땐 과묵한 반항아 컨셉인지 입을 꾹 닫고 마이웨이였다. 본관을 나와 운동장 둘레길을 걸으면서도 재유는 옆에서 걷는 우주가 의아해 여러 번 질문했다.
‘어디 약속 있어?’
‘…….’
‘아님, 너도 오늘은 야자 안 해?’
‘…….’
‘지금 외출하면 저녁 못 먹는 거 아냐?’
‘…….’
‘…설마, 나 배웅하는 거야?’
내내 묵묵부답이던 우주가 마지막 질문에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거, 들어 봐.’
우주가 건넨 건 CD였다. 사각의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는 금발의 어린 소녀가 이마를 짚으며 웃고 있었고, 그 뒤에 할리우드에서 아역으로 유명한 소년이 어딘가를 향해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영화 〈마이 걸〉 OST였다. 재유도 중학교 때 비디오로 본 적 있었다. 별 재미는 못 느꼈지만, 소녀의 아버지 직업이 장의사라 기억에 남아 있던 영화다.
‘저녁 먹고 갈래?’
말도 없이 쫄래쫄래 따라와서는 뜬금없이 CD를 내밀길래 뭐 하는 수작인가, 고심하고 있는데 우주가 밥을 먹자고 했다. 그땐 알바 자리 알아보는 게 급해서 거절하고 바로 집에 돌아왔다가 그 바람에 CD까지 챙겨와 버렸다.
재유는 친구들과 점점 친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에 자주 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요즘 유행하는 가요나 팝송은 라디오를 통해 알고 있어도, 자기네들끼리 돌려보는 비디오나 게임 얘기 같은 건 잘 몰랐다. 라디오에서 가끔 들어 아는 정도 빼고는 거의 무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하교 시간이 같은 토요일엔 친구들과 피시방에도 가 봤다. 최근 유행하는 스타를 같이 할 수는 없었지만, 우주의 아이디로 테트리스 정도는 재미있게 즐기다 나왔다.
재유네 집에는 컴퓨터나 비디오는커녕 CD 플레이어나 TV, 전화기, 하물며 삐삐조차 없었다. 가전이라고는 오로지 소형 냉장고와 밥통, 라디오뿐이었다. 그것도 모두 중고로. 지금 입고 있는 교복과 체육복도 아주머니가 알음알음 누가 입던 걸 구해다 준 것이었다.
그래서 우주가 빌려준 CD도 들어 볼 수가 없었다. 딴에는 생각해서 빌려준 모양인데, 재유는 속지를 꺼내 트랙 리스트나 가사만 봤을 뿐이다. 유명한 올드팝 〈My girl〉의 멜로디는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노래들이 들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게다가 우주는 빌려줘 놓고 까먹었는지 노래에 대한 감상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근데 왜 하필 〈마이 걸〉인지.
우주는 한산한 교문 앞에서 CD를 받아든 재유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덤덤한 듯하면서도 강렬하고, 말은 없어도 할 말이 많은 눈빛으로 재유를 훑었다. 시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더듬듯 집요한 눈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눈에 허탈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저녁 꼭 먹고, 내일 보자.’
누군가 자신을 면전에서 오래도록 빤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재유는 시선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진이 조금 빠졌다. 뒤돌아 걷는 우주는 조금 쓸쓸해 보였다.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함부로 말할 수 없고 속으로 묵혀야만 하는 오랜 비밀. 까발릴 것인지, 이대로 숨길 것인지 고민하는 듯한…. 열아홉 살의 하찮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번뇌가 느껴졌다.
그래서 재유는 들어 보지도 못한 CD를 아직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의 우주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 알고 싶었다. 언젠가 음악을 들어 볼 기회는 있을 테니까.
그날 이후로 우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재유를 배웅했다. 하교해서 알바 자리에 전화 돌리고 인형 눈 붙이는 게 고작인데, 중동에 파견 나가 국위선양이라도 하는 것처럼 파이팅 넘치게 힘내라고 기운을 북돋아 줬다.
그런 말을 해 줄 때면, 파릇한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져 정말 힘이 나는 것만 같았다. 오늘도 집에 오면서 그 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곤 했다.
재유는 마지막 똑딱핀까지 장식이 잘 붙었는지 확인하고 이번엔 인형 뭉치를 열었다. 눈이 흐리멍덩한 손바닥만 한 토끼에 밀짚모자를 씌우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유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강아지가 달린 똑딱핀으로 고정시키고 본드를 집어 들었다. 이걸 누가 돈 주고 사갈까 싶은 못생긴 토끼가 꼭 현근을 닮아서 내일 하나 가져가 놀려 줄까, 하며 혼자 킥킥대고 웃었다.
그때, 밖에서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재유는 손을 멈춘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설마 빚쟁이는 아니겠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가 안심시켰다.
“재유야. 재유야!”
하지만,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금 불안이 번졌다. 토끼 인형을 팽개치고 얼른 문을 열었다. 아주머니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어떡하니, 네 엄마가….”
“엄마가, 왜요?”
“식당에서 전화 왔는데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으로 갔댄다. 이게 뭔 일이라니 진짜? 빨리 가 보자. 옷 입어, 얼른.”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에 피가 빠져나가듯 휘청거렸다. 잠시 현실을 가늠하느라 눈을 부릅뜨고 막혔던 숨을 크게 몰아쉬어야 했다. 팔을 붙잡아 준 아주머니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린 재유는 서둘러 잠바를 꿰어 입고 집 밖으로 튀어 나갔다. 엄마에게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
“아휴, 진짜 고집도 참. 이 몸으로 또 어딜 간다 그래. 그러다 나중에 병원비 더 깨져, 재유 엄마. 그러지 말고 그냥 며칠만 입원해.”
“저 진짜 괜찮아요. 수액만 다 맞고 가면 거뜬해요.”
“거뜬하기는? 얼굴이 허옇게 떴구먼. 이러다 또 일 날까 걱정돼서 그래.”
“의사도 며칠 쉬면 괜찮다고 했어요.”
“검사도 제대로 안 했는데, 돌팔이가 뭘 알아. 아까 보니까 혈압도 높더만.”
“그거야 원래 있는 거고요.”
응급실에 누운 채 포도당을 맞고 있는 엄마와 아주머니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검사 좀 더 받자는 재유의 설득이 먹히지 않자 아주머니가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는 과로였다. 식당 일에 부업까지 하느라 수면 부족과 감기까지 겹쳐 기력이 달리는 바람에 순간 기절하고 만 것이다. 내내 서서 일하느라 무릎도 성하지 않고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엄마의 마른 팔에 꽂힌 주사가 지나치게 커 보였다. 그 팔을 감싼 낡은 스웨터가 엄마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거의 맨몸으로 집을 떠나온 터라 변변한 옷가지도 없이 장터의 떨이 옷으로 산 거였다.
한땐 엄마도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고 원피스를 즐겨 입었었는데. 사모님 소리는 못 들어도 가끔은 백화점에 구경도 가고 경양식집에서 돈가스로 외식도 했던 삶이, 지금은 하루 이틀 병원비가 아까워 서둘러 퇴원을 하고, 변변한 피검사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가난이 사무치게 서러운 순간이었다. 엄마가 일할 수 없게 되면 당장 밥을 굶어야 할 수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입원시키고 엑스레이에 CT까지 찍게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재유는 애써 미소를 짓는 엄마를 앞에 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지 멀쩡하게 다 자라서 알바도 못 하고 마음 편히 학교만 다니는 게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아유, 그럼 택시라도 타고 가. 재유야, 너 얼른 콜택시 하나 불러라.”
재유는 엄마가 준 지갑을 들고 원무과로 갔다. 모자의 2주일 치 생활비가 응급실 진료비로 지출됐다. 한 달 꼬박 부업을 해서 받은 돈임을 알고 있었다. 지갑에 이 돈마저 없었으면, 또 아주머니께 신세를 질 게 뻔했다.
택시가 도착하고, 재유는 엄마와 아주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재유는 들어오자마자 보일러부터 돌렸다. 간이건물일지언정 비교적 최근 지어진 거라 다행히 기름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막상 겨울엔 기름값이 아까워 별로 틀지 않았지만, 아픈 엄마에겐 따뜻한 방바닥이 좋을 것 같았다.
이불을 깔아 엄마를 눕히고 아픈 다리를 주물렀다. 엄마는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눕자마자 축 늘어졌다. 마른 허벅지와 뼈마디가 한 손에 잡힐 듯 약했다.
엄마와 함께 있는데도 재유는 외로웠다. 이럴 때 형제라도 있었으면 의지가 됐을까.
어릴 때부터 주위에 재유처럼 외동인 애들은 거의 없었다. 형이나 누나, 남동생이나 여동생들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동생을 낳아 달라 떼쓴 적은 없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엄마는 재유를 낳기 전에 몇 번 인가 유산을 했던 걸로 알고 있었다. 재유가 다섯 살쯤에도 임신을 했었지만 동생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그 때문에 엄마의 몸이 약한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보호 아래 학창 시절을 보내는 철부지였는데, 재유는 한순간에 가장이 될 수도 있는 처지가 되었다. 취직을 해서 엄마도 돌봐야 하고 집안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한참을 엄마의 종아리를 주무르다 무릎 언저리에서 바스락거리는 비닐의 촉감이 만져졌다. 파스에 비닐을 안 떼고 붙인 건가 싶어 바지를 둘둘 걷었는데, 노란 박스테이프가 나왔다. 파스 대신 붙인.
“…….”
엄마는 사실, 죽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닐까. 엄마는 정말 나랑 같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까. 엄마는 내가 취직하고, 결혼하고, 며느리를 보고, 손주를 보는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있을까.
“파스 살 돈 없어? 왜 그래요, 진짜?”
저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유는 엄마의 무릎에 너덜너덜해진 노란 테이프를 거칠게 떼어 냈다. 땀 때문에 점성을 잃은 테이프는 쉽게 떨어져 나갔다.
“…엄마 괜찮아.”
벌게질 대로 벌게져 빨갛게 부풀어 오른 피부를 보자 재유는 울컥했다. 괜찮다는 소리가 진절머리가 났다. 엄마의 끝없는 희생이 정말 자식을 위하는 걸까. 정작 지켜보는 자식 입장에서는 고통스럽기만 한데.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엄마 다 나을 때까지 식당에 못 나간다고 전화할게요.”
재유는 꾹꾹 감정을 억누르며 이불을 덮어 주고 물수건을 짜서 이마에 얹어 주었다.
“직원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안 돼, 재유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아픈데 그런 사정도 못 봐줘? 엄마 내일 일 나가면, 나도 학교 그만두고 공사장 갈 거예요.”
“…….”
엄마의 희생이 처절한 가책으로 다가와 재유를 무참하게 찔러 댔다. 그 미련한 고집은 가학적이다 못해 궁상맞아 보였다. 사춘기 때도 안 했던 반항이 하고 싶었다.
재유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엄마는 말없이 돌아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엄마를 말없이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뻗어 다시 발과 종아리를 주물렀다. 작게 들썩이는 마른 어깨와 도드라진 발목뼈를 보며 또 한 번 울컥했다.
엄마를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착한 심성 때문에 본인만 희생하면 모든 게 잘될 거라 생각하신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엄마의 체력과 정신력이 따라 주질 않았다. 밤낮으로 일을 해도 돈은 늘 모자랐고, 과거에 비해 현실은 지난하고 참담했다. 체념과 무기력이 엄마를 잠식하고 있었다.
재유는 팔을 들어 소매에 눈물을 찍었다. 목소리에 울기를 지우려 괜한 헛기침을 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화내서 미안해요. 엄마 아픈 거 속상해서 그랬어요. 잘못했어요.”
이렇게 된 게 엄마 잘못도 아닌데. 엄마도 피해자였다. 재유는 괜히 엄마에게 화풀이한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아팠다. 몸이 아픈데도 일을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 속은 오죽할까. 엄마는 등 돌린 채로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재유는 엄마가 잠들 때까지 팔다리를 주무르며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짚어 갔다. 계란죽을 끓이고, 빨래를 개키고, 토끼 인형에 밀짚모자를 마저 붙이고, 중간중간 엄마를 간호하고 아침이 되면 식당과 학교에 전화를 하고, 방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엄마를 간호한다….
재유는 머릿속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슬픔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고 생각했다.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계획을 세우고, 시간이 되면 해야 할 일들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계획한 대로만 하면,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면 언젠간 빚도 다 갚고 엄마가 절박하게 일에만 매달리진 않을 거라 생각하며 애써 웃었다. 제 감정을 속이려는 억지웃음이었다.
***
“어떻게 된 거야?”
우주가 교문 앞 떡볶이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재유를 보자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엄마가 새벽부터 부산하게 밥을 차려 주고 오늘은 학교 가라며 등 떠미는 바람에 7시에 도착한 학교였다.
재유는 우주를 흘긋 보고는 다시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던지라 무슨 말로 둘러대야 하나, 골이 다 아팠다.
재유는 교실로 가는 지름길 말고 운동장 아래의 좁은 길로 돌아갔다. 50m쯤 되는 짧은 길이지만, 양옆으로 벚나무가 촘촘히 심겨 있어 꽃이 핀 가지들이 차양막처럼 길을 감싸고, 이제 막 비치기 시작한 아침 볕이 꽃잎의 색깔을 입어 엷은 빛으로 예쁘게 펼쳐져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삐삐 번호도 안 가르쳐 주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전화라도 해 주지. 내 번호 알잖아.”
재유 주위로 또 호객꾼처럼 옆에 착 달라붙다가, 아예 앞에서 뒷걸음질로 걷는 우주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사실 우주에게도 전화로 알리고 싶긴 했다. 하지만 학교와 식당에 연락한 것도 영선이네 전화를 빌린 거라 전화통을 오래 붙잡고 있기 싫어서 관뒀다. 더구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면 요금이 더 비싸다고 하기에 영선이네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찔린 것도 있었다.
“별일 없었어.”
“왜, 무슨 일인데?”
우주는 그냥 넘어가려는 재유가 답답한지 아예 팔을 붙잡으며 멈춰 세웠다.
“엄마가 좀 아프셔서.”
“아… 그랬구나. 어머니는 괜찮으셔?”
우주는 괜히 몰아세웠다는 표정으로 누그러진 말투를 하며 길을 터 줬다. 잔뜩 힘준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바뀌자 픽 웃음이 났다.
“어. 많이 좋아지셨어.”
“다행이다. 난 또….”
“또 뭐?”
“아니 난 그냥, 네가 연락도 없이 안 나오길래 어디 아프거나 아니면… 또 갑자기 전학 간 거 아닌가 했지. 담임은 말도 안 해 주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진짜.”
걱정을 했다니 고맙기도 하고 기분이 좋긴 한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마중 나와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었다. 재유는 툴툴거리는 우주의 얼굴을 빤히 보며 걸음을 늦췄다.
“그럼 나 기다린 거야? 이렇게 일찍?”
“어.”
우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왜?”
고마운 거야 고마운 건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 친구가 학교를 빠지는 일에 이렇게까지 관심 두는 애가 있나? 지금이야 연락이 끊겼지만, 재유가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제일 가깝게 지냈던 상율이 놈과도 이런 식으로 서로를 걱정했던 적은 없었다.
제가 알던 친구 간의 거리감과 우주가 보인 거리감에 상당한 격차가 있다고 느꼈다.
“왜는 뭐. 보고 싶었으니까.”
그 말에 재유는 걸음을 완전히 멈췄다. 우주는 몇 걸음 더 앞서다가 멈췄다.
“빨리 가자. 컵라면 먹고 들어가게. 나 배고파.”
뒤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비스듬한 옆얼굴이 붉어졌다. 저도 낯간지러운 말을 한 건 아는가 보다. 다 큰 사내놈 얼굴이 뭐 그리 보고 싶다고 밥도 안 먹고 아침 댓바람부터 법석을 떠는지. 생각보다 쓸데없는 일에 진지한 싱거운 놈이었다.
“가자.”
재유는 헛웃음을 지으며 멀뚱히 서 있는 우주의 팔을 어깨로 툭 쳤다.
“너도 라면 먹을 거지?”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 있는 귓불을 슥슥 문지르며 묻는 목소리가 아주 신이 났다. 라면 먹자는 말을 ‘놀이동산 갈 거지?’라고 묻는 꼬맹이처럼 기대에 부푼 모양새다.
“미안. 나 밥 먹고 왔는데.”
“아… 그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진 않지만, 아까 먹은 밥이 아직 속에서 울렁거렸다. 기분과 다르게 몸도 무겁고 머리도 아팠다. 도저히 라면을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너 먹고 와.”
“아냐. 나도 됐어.”
“왜, 배고프다며. 같이 가 줄까?”
“음. 그럼, 먹으러 갈까?”
안 먹는다더니 금세 말을 바꾼 우주가 이까지 드러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재유도 덩달아 웃었다. 언젠가부터 학교에선 웃을 일이 전혀 없었는데 3학년이 되고서는 웃을 일도 많고, 평범했던 예전의 학교생활보다 좀 더 재미있었다. 우주 덕분에.
“근데, 너 집에서 막내지?”
재유가 묻자, 우주는 별로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켰다는 듯이 입꼬리를 삐죽이며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표정도 딱 막내 같았다.
“다 티나. 어릴 때 재롱 좀 떨었나 봐?”
“야! 재롱은 좀 심하다. 그냥 뭐… 개다리춤은 좀 췄지.”
재유는 풉, 소리와 함께 웃음이 터졌다. 일부러 놀려 준 건데 ‘재롱’이라는 말에 발끈하더니 ‘개다리춤’을 말할 땐 뻐기듯이 말하는 우주가 여느 집 막냇동생처럼 사랑스러웠다. 덩치는 좀 큰 관계로, 다소 징그러운 사랑스러움이었다.
어떨 때 보면 애교도 많을 것 같다. 얼굴을 굳히고 있으면 제법 무서운 인상인데 입을 헤벌리고 웃거나 익살스럽게 코를 찡그릴 때면 영락없는 장난꾸러기 꼬마 같았다. 그 꼬마가 장난감을 사 달라고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떼를 쓰거나 아양을 부리는 모습이 현재의 얼굴을 봐도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평소엔 성장 드라마 주인공처럼 입바른 소리도 할 줄 아는 범생이 같은데, 지금처럼 운동화를 구겨 신거나 머리카락 한쪽이 삐죽 솟아 있는 걸 보면 딱 손 많이 가는 어린애 같았다.
조금 뭉툭하지만 큼직하니 우뚝 솟은 콧날과 또렷한 눈빛의 잘생긴 눈은 확실히 여자애들에게 어필할 만했다. 거기다 웃을 때 시원하게 벌어지며 볼륨을 드러내는 통통한 입술과 가지런한 치아까지. 그 사이에 볼펜을 물어도, 막대사탕을 끼워 넣어도, 심지어 담배를 물고 있어도 제각각으로 지성과 장난기와 시크함까지 소화할 것 같은 근사한 입술이었다. 역시 좀 재수 없다. 같은 남자로서 질투도 나고.
“보여 줄까?”
“뭘. 개다리춤을?”
재유는 으으, 소름 끼친다는 듯 부르르 떨며 멀찍이 떨어졌다. “아, 왜. 나 다리 좀 떤다니까?” 하며 쫓아오는 우주를 피해 운동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얘가 정말 자리 깔고 양손으로 머리를 빡빡 넘겨 가며 다리를 떨어 댈까 봐 얼른 매점이 있는 뒷길로 방향을 꺾었다.
이렇게 일찍 매점에 온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매점은 닫혀 있었다. 우주는 예상했다는 듯 가방에서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까지 꺼내고 가판대 옆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채 익기도 전에 휘휘 저어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라면을 후루룩 마시듯 뚝딱 해치웠다. 정말 배가 고팠나 보다.
먹기도 많이 먹던데 컵라면 하나 가지고 배가 찰까, 걱정도 잠시, 가방이 뭔 요술 상자라도 되는지 크림빵과 단팥빵, 거기다 500mL 우유까지 꺼내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밥을 복스럽게 잘 먹는다는 엄마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우주가 밥 먹는 모습을 본 어른들은 다 그를 예뻐할 것 같았다.
우주는 됐다고 만류하는데도 재유 몫으로 챙겨 온 컵라면과 빵과 우유를 출출할 때 먹으라며 굳이 가방에 넣어주었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억지로 가방 지퍼를 여는 걸 말려 보려 했는데, 아무 저항도 없이 느긋하게 지퍼를 닫더니 태연하게 메 주려고까지 해서 어이없는 헛기침만 났다. 얄미워서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려다 마음 씀씀이가 예뻐서 그나마 참았다.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앞자리 녀석들이 뒤를 돌아 아는 체를 했다.
“한재유, 별일 없냐?”
“얼굴 좀 꼴았네. 담임은 암말 없던데.”
“집에 일이 좀 있었어.”
“뭔 일?”
“잘 해결됐고?”
“어. 잘 해결됐어.”
현근과 성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볼일 끝났다는 듯 돌아서서 하던 일을 했다.
그렇지. 이게 보통 결석했을 때 보이는 남자 동급생들의 반응이었다.
그럼 우주는 왜 그러는 걸까?
우주가 다른 친구들 대하는 걸 보면 대체로 말도 잘하고 부탁도 잘 들어주곤 하지만, 재유에게처럼 뭔가를 미리 준비해서 건네주거나 됐다는 데도 억지로 챙겨 주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 있으면 우주는 종일 재유 곁에 딱 붙어 있었다.
짝이니 수업 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재유가 교무실에 볼일이 있거나 화장실을 갈 때면 저도 일이 있는 것처럼 슬쩍 따라나서곤 했다.
우주 혼자 다른 볼일이 생겨 나가 봐야 할 땐 ‘가기 싫다’를 수없이 연발하며 마지못해 다녀왔다. 아주 초스피드로. 어쩌다 재유가 ‘같이 갈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만면에 바보 같은 웃음을 띠며 모터로 작동하는 기계장치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급식도 둘이서만 먹고, 오자 끝나면 교문에 배웅하는 것까지, 밀착 경호? 전담 마크? 굳이 비유하자면 그런 식이었다.
“너 혹시, 담임한테 나에 대해서 뭐 부탁받은 거 있어?”
재유는 앞자리 놈들이 못 듣게 우주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까칠하고 포악한 담임이 사실은 재유의 어려운 사정을 배려해서 반에 성격 좋은 애 하나를 지정해 네가 얘 좀 찰 챙겨 줘라, 하고 부탁하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우주는 고개를 약간 물리고 재유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얘가 뜬금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나, 분석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런 적 없는데.”
하기야 초등학생도 아니고 수능 앞둔 고3한테 담임이 그런 부탁을 할 리는 없었다. 너무 앞서나간 생각이었나. 그럼 우주는 왜….
“근데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줘?”
우주는 뻘쭘한 듯 이마를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지르더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곤란한 질문도 아닌데 입으로 쩝 소리를 내면서까지 겸연쩍어했다.
“그냥, 뭐. 작년에 봤을 때부터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왜?”
2학년 때 재유는 3반으로 전학 왔고 우주는 2반이었다. 복도에서 오다가다 마주쳤을지도 모르지만, 재유는 그 당시 땅만 보고 걷던 쭈구리 시절이라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너 방학 때 장운문고 잘 갔었지? 거기서 자주 봤거든. 그래서 같은 반 되고 나서도 반갑더라고.”
“아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재유를 보며 우주는 목울대가 출렁이도록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는 제 목을 벅벅 문질렀다.
확실히 서점을 자주 가긴 했다. 오락실이나 피시방에 갈 여유는 없으니 남는 시간에 마땅히 즐길 만한 여흥이 없어서 서점에 가서 만화책이나 소설들을 뒤적거리다 오곤 했었다. 책을 산 건 단 한 번뿐이지만, 만만하게 시간 때우기 좋은 장소였다.
우주는 한 번 보면 단번에 기억에 남을 정도로 눈에 띄는 애였다. 그런데도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자기가 어지간히 쭈그리고 다녔다는 생각에 조금 민망했다.
“왜? 내가 잘해 주는 게 이상해?”
“어. 쫌….”
“에이, 설마.” 하고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우는 듯한 표정을 짓길래 재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서 그래. 난 너한테 해 준 것도 없는데 잘해 주니까…. 고마워.”
“에이, 됐어.”
재유가 속삭이듯 말하자 뭘 그런 걸 다 말로 하냐는 뉘앙스로 손을 휘저었다. 우주는 쑥스러워할 때가 정말로 귀여웠다. 다시 생각해도 덩치와 안 어울리는, 다소 징그러운 귀여움이다.
가족에게 듬뿍 사랑받고 자란 막내다 보니 성격도 둥글둥글하고 정 줄 줄도 아는 애인 게 티가 났다. 재유는 그런 우주가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너 이거 볼래?”
우주가 《수험생을 위한 한국 단편선》이란 책을 내밀며 물었다. 재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받아들었다.
조회가 시작될 때까지 읽은 김유정의 〈봄봄〉은 아주 재미있었다. 둔탱이 같은 머슴을 데리고 살 점순이의 미래가 딱했다. 그래도 머슴이 너무 착해서 점순이 말도 잘 듣고 일도 열심히 하며 알콩달콩 잘살 것 같았다.
재유는 점순이의 은근한 마음을 몰라 주는 순박한 머슴이 바보 같기도 하고 욕심 많은 장인에게 당하기만 하는 게 안타깝기도 해서 읽는 내내 탄식을 하고, 어쩔 땐 쿡쿡 웃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주가 쳐다봐서 눈이 마주쳤다. 우주는 그런 재유에게 씨익 웃어 주기도 하고 뭘 보고 그렇게 웃나, 페이지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삭막한 고3 교실에도 자잘한 봄은 있었다.
***
3교시가 끝나 가면서 재유는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아침 먹은 게 잘못됐는지 1교시 끝나고는 화장실에 뛰쳐 가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 냈다. 으슬으슬 몸이 춥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몸이 떨리고 눈 밑 살을 실에 꿰어 잡아당기는 것처럼 경련도 일었다.
재유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교실 뒷벽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도 끝나려면 20분이나 남아서 맥이 빠졌다.
우주는 재유를 보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여태 귀찮을 만큼 괜찮냐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묻곤 했는데, 재유가 식은땀까지 흘리자 저도 좀 놀란 모양이다. 팔꿈치로 겨우 디디고 있던 몸이 허물어지고 고개를 떨구자 우주가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재유 아파요!”
당황한 우주가 이름을 불러 대며 몸을 흔드는 바람에 머리가 조각조각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50대 중반의 국어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 말고 재유 자리로 와서 목덜미며 이마며 짚어 보더니, “얘 좀 업어라.” 말했다.
업혀 나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재유는 인상을 쓰며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성종이 순식간에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몸을 일으키고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우주의 등짝에 엎어 놓았다. 업힌 채 교실을 나가면서도 저에게 집중된 이목이 부담스러워 안 그래도 뜨거운 얼굴에 욱신욱신 열이 올랐다.
1층 양호실로 올 때까지 어찌나 빨리 뛰는지 우주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바닥에 머리가 짓눌린 채 누군가 퍽퍽 발로 짓밟는 느낌이었다. 좀만 천천히 가지. 재유는 고개를 꺾으면 바로 보이는 뺨에 더운 숨을 내뱉으며 우주를 원망했다.
양호실에 하나 있는 침대에 눕혀지자 생각보다 훨씬 아팠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양호 선생님과 우주의 얼굴이 천장과 함께 빙빙 돌았다. 목소리도 웅얼웅얼 분명치 않게 들렸지만, 38도 어쩌고 하는 거로 봐서 열이 많이 났나 보다. 아무래도 엄마를 간호하다 열감기가 옮은 것 같았다.
목이 말라서 몽롱해지려는 의식을 붙잡고 우주에게 물 좀 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까무룩 눈꺼풀이 감겼다.
***
정신이 들었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눈을 뜨면 어떨 땐 우주가 있었고, 어떨 땐 천장만 보였다.
한참을 자다 겨우 정신이 든 재유는 아직도 눈두덩이가 홧홧하고 귀가 달아오르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누운 자리에선 벽시계가 보이지 않고 커튼도 닫혀 있어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마를 짚어 보자 아직 뜨끈한 것 같기도 하고 미지근한 것 같기도 해서 열이 내린 건지 애매했다. 그래도 욱신거리는 두통은 잦아든 상태였다.
열을 식히려 그랬는지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접혀 있었다. 바짓단도 마찬가지였다. 셔츠 단추는 모두 풀어져 가슴팍이 드러나 있었고, 바지 지퍼도 내려간 채 속옷과 함께 골반까지 노출되었다.
재유는 민망해서 얼른 바지춤을 추스르고 단추도 잠갔다. 손이 굼떠 단추 잠그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꿉꿉한 땀 냄새가 훅 끼쳤다. 등에 달라붙은 셔츠도 찝찝하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 상태면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곧 종이 울리고 시끌벅적한 복도의 소음이 들려왔다. 쉬는 시간인가 보았다. 교무실에서 담임도 만나고 교실에 들러 가방과 교복 재킷을 가져오려면 지금 가야 했다. 끙, 소리를 내며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에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괜찮아? 재유야, 정신 들었어?”
“…….”
드르륵, 쾅! 양호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우주가 나타났다. 양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와 재유의 가방, 교복 재킷이 있었다.
우주는 손에 든 걸 내려놓고 스스럼없이 다가오더니 이마와 뺨과 목덜미를 아무렇지 않게 만졌다. 재유는 흠칫 놀랐지만, 커다란 우주의 손이 차갑고 기분 좋아서 그냥 만지게 뒀다.
“지금 몇 시야?”
“6시.”
“아… 그럼 지금 집에 가도 되겠네.”
“열 한번 재 보고.”
우주는 헤매지도 않고 양호 선생님 책상 위에서 체온계를 들고 왔다. 그러더니 목까지 잠긴 재유의 셔츠 단추를 풀려고 했다.
“내가 할게.”
쇳소리가 나는 제 음성이 귀에 거슬렸다. 재유는 우주의 손을 쳐내고 스스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단추가 잘 안 빠지길래 두 번째 단추로 손을 옮겼는데, 웬일인지 덜덜 떨리기만 하고 단춧구멍에서 좀처럼 단추를 빼낼 수가 없었다.
빤히 쳐다보는 우주의 시선이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픈 모습 보인 것도 꼴사나운데 맘처럼 손이 움직여 주질 않아 짜증이 났다.
“괜찮아. 금방 해 줄게.”
재유가 한숨을 내쉬자 우주는 다정한 목소리로 상체를 굽혀 순식간에 단추 네 개를 풀었다. 앞섶을 벌려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꽂아 준 우주는 기다리는 동안 면도크림을 바르듯 손바닥으로 입과 뺨을 연신 문질러 댔다.
같은 남자이긴 해도 직접 단추를 풀어 주고 체온을 재 주는 행위는 어린아이에게나 해 줄 만한 일인데 그는 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민망한 건 재유였다. 학교에서 이렇게 아픈 것도 처음이라 이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삑- 소리가 나자 우주는 체온계를 꺼내 눈금을 확인했다.
“아직 미열이 있네. 양호 선생님이 열 떨어뜨리는 게 우선이라고 병원 가는 것보다 여기서 지켜보자고 해서 일단 해열제 먹였었는데, 기억나?”
재유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은?”
“퇴근하신다던데? 나한테 양호실 열쇠 맡기고 가셨어.”
벌어진 셔츠를 추스르고 단추를 잠그려고 하는데, 우주가 말렸다.
“옷 입지 마.”
“왜?”
“처음엔 오한이 너무 심해서 이불 덮어 줬는데 떨리는 거 멈추니까 땀 엄청 흘렸어. 그래서 옷도 벗겨 놓은 거야. 젖어서 찝찝하잖아. 내 옷 입어.”
재유가 괜찮다고 하며 단추를 다시 잠그려는데, 우주가 제 교복 상의를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괜찮다니까.”
셔츠를 벗자 반팔 티셔츠가 나왔다. 우주가 팔을 교차해 그것마저 벗으려 하자,
“잠깐잠깐… 셔츠만 입을게 그럼.”
재유가 한 번 더 팔을 뻗어 만류했다. 우주는 상체의 절반이 드러난 상태로 “그럴래?” 하더니 다시 티셔츠를 끄집어 내렸다.
“그럼 너 맨살에 재킷만 입고 가려고 했어?”
“그래도 상관없는데?”
재유는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못 말린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네가 무슨 솔리드냐? 애들이 뭐라 그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재유가 타박을 하는데도 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벗기려 들었다. 재유가 움찔하며 우주의 손을 붙잡자,
“고집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며 남은 단추를 전부 풀었다. 땀 때문에 맨살에 달라붙어 즈윽, 진득한 마찰을 내며 셔츠가 떨어져 나갔다. 재유는 한기 때문에 팔짱을 끼며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우주는 상체가 휑한 재유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옷을 입혀 줄 것처럼 셔츠를 벗기더니, 우뚝 서서 차렷 자세로 벗은 몸을 지그시 보고만 있었다. 재유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어 우주를 올려다본 상태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설마 볼품없이 마른 몸을 속으로 비웃고 있나, 괜히 움츠러들어 팔짱을 더 단단히 꼈다.
“왜 그렇게 빤히 봐? 말라서 보기 흉해?”
우주는 대답도 않고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마치 쏘아보듯이 재유를 주시하며 취조를 하는 형사처럼 굴었다. 눈빛을 세세히 읽을 순 없었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느꼈다. 그 말이 자신의 몸에 대한 것임을 재유는 확신했다.
기세에 눌려 더는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감당하기 버거워 시선을 내렸다. 말이 아닌 눈빛의 언어를 일방적으로 쏟아내는데, 그게 제대로 와닿지 않고 바로 앞에서 튕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한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우주가 벗어 둔 셔츠를 집어 드는데, 우주가 “잠깐만.” 하며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우주는 창가에 있던 작은 대야와 수건을 세면대로 가져갔다. 대야의 물을 갈고 이미 젖은 수건에 새롭게 물을 적셨다. 교복 바지에 흰색 티셔츠만 입고 구부정한 자세로 수건의 물기를 짜는 우주의 모습을 보며 재유는 어딘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긴장된 한숨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뜻 모를 그의 행동에 자신이 긴장했었다는 게 의아했다.
“너 계속 여기 있었던 건 아니지?”
“응. 수업받다가 쉬는 시간이랑 점심시간에 왔었어.”
“그랬구나…. 그럼 네가 아까도 땀 닦아 준 거야?”
“응.”
“옷도 네가 벗겨 놓고?”
“…응.”
우주는 돌아보지도 않고 세면대를 향한 채 말했다. 아침의 벚나무길에서처럼 귀가 붉어져 있었다. 좀 전에 그런 눈빛을 보고 나서 그런지 귀엽거나 사랑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평온하지만은 않은 분위기였다.
재유는 알 수 없는 수축과 긴장이 우주와 저 사이를 맴돌고 있다 느꼈다. 어느새 몸의 한기가 사라지고 다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땀만 좀 닦아 내고 가자.”
우주가 수건을 쥐고 목과 귀 뒷부분을 닦아 주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도, 물렁하게 실실 웃는 표정도 지운 채 딱딱한 얼굴로 몸을 닦는 데만 열중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목에서 빗장뼈를 따라 내려온 수건은 좀 더 아래로 향했다. 그때까지 팔짱을 끼고 있던 재유의 팔을 우주가 억지로 들어 올렸다. 몸을 닦는 데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담은 힘이었다.
겨드랑이를 스치는 차가운 감촉에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우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겨드랑이를 따라 옆구리를 닦았다. 땀을 닦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듯한 태도였다.
대야 물에 수건을 적셔 꼭 짜내더니 이번엔 재유의 반대쪽 팔을 들어 올렸다. 체모에 슥슥 비벼지는 수건의 거칠한 감촉이 퍽 간지러워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수록 우주는 붙잡은 팔을 감아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아플 때 누가 간호해 주는 거.”
머쓱함을 견디지 못하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재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팔오금을 닦던 우주가 눈을 들어 재유를 봤다. 계속 말해 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4학년 땐가, 계속 열나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적 있었거든. 지금보다 훨씬 아팠어. 그땐 병원도 갔다 왔는데 며칠이 지나도 안 낫는 거야. 엄마는 24시간 내 옆에 붙어 있으면서 병간호해 주고, 아빠도 회사 하루 쉬고 엄마랑 같이 나 돌봐 주고 그랬거든. 근데 내가 약을 계속 못 먹으니까 아빠가….”
안쓰러운 얼굴로 안달복달하며 좌약을 넣어 줬었다. 감기에 좋다며 먹지도 못할 귤을 사 오기도 하고 아무리 졸라도 안 사 주던 바이오맨 장난감을 사다 주기도 했다.
“아… 암튼 누가 보살펴 주는 거 오랜만이라고.”
재유는 갑자기 아빠 얘기가 튀어나와서 당황스러웠다. 전학 와서 아빠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건 처음이었다. 엄마와도 아빠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말을 하다 갑자기 끊은 재유를 보고도 우주는 담담하게 제 셔츠를 입혀 주었다. 팔을 끼워 주고 단추를 잠가 주고 재유에겐 조금 긴 소매를 한 번 접어 주었다.
“엄청 크다.”
우주는 제 옷을 입혀 놓고 헐렁하게 남는 셔츠 자락을 붙잡으며 팔락거렸다.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재유의 우울한 기분을 눈치챘는지 볼을 툭 건드리며 가볍게 말했다.
“뭐 좀 먹어야지.”
“아 참. 지금 저녁 시간이잖아. 너 밥은? 지금 급식실 가야 되는 거 아냐?”
“에이, 나 혼자? 같이 먹어야지.”
우주는 올 때 들고 온 커다란 비닐봉지를 펼쳤다. 처음엔 매점에서 산 걸로 보이는 간식거리가 나왔다. 사탕, 초콜릿, 캐러멜 같은 달달한 것들을 쏟아내고 뒤이어 꺼낸 건 3단짜리 도시락 찬합이었다.
맨 밑에는 한입 크기의 주먹밥이 색깔별로 세 종류가 있었고, 두 번째 칸엔 간장에 양념한 소불고기와 구운 더덕, 삶은 꼬막과 백김치가 있었다. 마지막 칸엔 파인애플과 키위, 딸기가 들어 있었다.
파인애플이나 키위 같은 수입 과일은 그렇다 쳐도 아직 3월인데 철이 아닌 딸기가 나오자 재유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꼬막도 제철은 지났고, 이 근방에선 구하기 쉬운 재료도 아닌데 싱싱해 보였고 살도 실하게 올랐다. 보온병도 두 개 있었는데, 전복죽과 황태를 넣은 미역국이었다.
“이게 다 뭐야? 어디서 난 거야?”
“집에서 가져다줬어.”
“너 매일 저녁에 이렇게 먹어?”
“아니. 평소엔 급식 먹지. 오늘만 부탁한 거야.”
“…네가 부탁드린 거야? 어머니한테?”
간이 약한 반찬들에 죽까지 있는 걸 보면 딱 환자를 위한 차림이었다. 다 펼쳐 놓고 보니 침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양도 많았다.
“엄마가 만든 거 아냐. 너 점심도 안 먹었잖아. 뭘 먹여야 될지 몰라서….”
“그래도 그렇지, 이 많은 걸 언제 다 먹어.”
“다 안 먹어도 돼. 너 또 토하면 소용없잖아.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어.”
우주는 비싼 재질로 보이는 기다란 필통 같은 꾸러미를 열어 은색 수저와 젓가락을 꺼내 재유의 손에 들려줬다.
집이 규신기업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느 정도 부잣집인진 몰라서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었는데, 도시락 갖다 달랬다고 이렇게 환자 식단의 음식들을 저녁 시간에 맞춰 직접 학교까지 보내 주는 걸 보니 우주네 집의 재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엄마가 만든 게 아니라니 살림을 해 주는 가정부가 있는 모양이었다. 재유는 드라마에서 봤던 재벌 집이라도 되나, 하며 순수하게 놀랐다. 맨날 교복 입고 급식 먹는 모습만 알고 있었는데, 몰랐던 이면을 본 것 같아 새삼 우주가 다르게 보였다.
‘우와, 대단하다.’ 하고 우러러본다거나 ‘네가 그렇게 대단한 집 아들이냐?’ 하는 비꼼이 아니라, 그런 집에서 자랐으면서도 뻐기는 듯한 태도나 다른 애들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더 그랬다.
우주가 규신기업 아들이라는 걸 영선이가 알 정도면 학교에 있는 애들 대부분이 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우주는 친구들이 놀리면 큭큭 웃으며 놀림도 당하고, 다른 애들에게 가끔 돈을 꾸기도 해서 그런 생각을 전혀 못 했다.
귀하게 자란 티가 안 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런 티를 내지 않는 거였다. 일부러 안 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성격이 형성된 것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건데도 전혀 위화감 없이 주변과 녹아드는 그런 애였다.
“빨리 먹어 봐. 죽 먼저 먹어 볼래? 아님 고기라도. 응? 영 안 땡기면 과일이라도 좀 먹고.”
우주는 펼쳐 놓은 음식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얘한테 뭘 먹여야 거부감 없이 먹을까, 골몰한 것처럼 보였다. 분명 배가 고플 시간일 텐데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재유가 먹기만을 기다리는 우주를 보자 텁텁했던 입 안에 식욕이 돋았다. 재유는 삶은 꼬막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이거 이거? 내가 먹여 줄게.”
“내가 애야? 너나 얼른 먹어.”
“애는 아닌데 환자잖아. 단추도 잘 못 잠그는 게 얌전히 좀 있어라. 밥 먹고 병원도 가야 되는데.”
우주는 꼬막을 잽싸게 집어 입 앞에 들이밀었다. 이럴 거면 수저랑 젓가락은 왜 들려 준 건지.
“이걸 진짜… 먹여 준다고?”
“당연하지. 빨리 먹어.”
먹지도 않은 밥이 체할 것 같았다. 우주는 가끔 보면 재유를 손발 쓰는 게 서투른 어린애처럼 대할 때가 있었다. 초콜릿을 까 준다거나 캔 뚜껑을 따 준다거나 지금처럼 밥을 먹여 주려는 것처럼.
그게 재유를 의아하게 했던 거리감이었는데, 정작 우주는 전혀 어색함 없이 당연하다는 듯 해 주곤 했다.
또 하나는, 스킨십이었다.
어깨를 밀착해 재유가 보던 책을 들여다본다던가, 이름을 부를 때 손가락으로 손등을 툭툭 친다던가, 입가에 뭐가 묻었을 때 간혹 휴지 말고 제 손으로 닦아 준다던가. 휴지로 닦아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말이다. 보통 사내놈들이라면 손등만 스쳐도 질색을 하며 인상부터 쓸 텐데 우주는 제가 먼저 만지고, 닿고, 스쳤다.
그것도 재유에게만.
생각해 보니 그랬다. 현근이나 성종이는 물론 같은 반에나 심지어 옆 반에도 친한 애들이 많았는데, 그 애들과 스킨십은커녕 어깨를 부딪치거나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어깨동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근데 너, 혹시 나….”
남자 좋아하는 거니? 재유는 무심코 물으려다가 실례가 될 것 같아 얼른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직감이 그랬다.
“너, 좋아하냐고?”
“어…?”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우주의 착각에 어안이벙벙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발상도 방금 떠오른 건데, 당연히 그 대상이 제가 될 거란 가정을 하고 물은 게 아니었다.
아, 그, 아니, 저, 쩔쩔매며 감탄사만 내뱉고 단어 하나 말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데,
“좋아하지. 그러니까 빨리 좀 먹자.”
우주는 태연스럽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떡볶이 좋아하냐는 물음에 당연하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엄마 좋아해?’라고 일곱 살짜리 꼬마에게 물었을 때 당연하듯 ‘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응….”
재유는 우주가 내미는 꼬막을 받아먹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꼬막을 씹는 재유를 보며 우주는 귀엽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그러면서 또 귀가 빨개졌다.
저 웃음도, 빨개진 귀도 이상하긴 했지만, 재유는 이게 제가 생각하는 고백은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좋아한다’고는 했는데 그게 뭐, 어때서,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하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바람에 재유는 제 짐작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꼬막이… 정말 맛있었다. 육즙이 툭 터지는 쫀득한 살점을 씹자 재유는 순식간에 먹는 데만 집중하게 됐다. 점심도 굶고 땀도 많이 흘려서 그런지 고기도 잘 들어가고 주먹밥도 맛있었다.
우주는 재유가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음식을 먹여 주고 입가심으로 그놈의 초콜릿까지 까서 기어이 입에 넣어 주고 나서야 밥에 손을 댔다.
재유는 우주가 떠다 준 물을 홀짝이며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재유가 꽤 많이 남겼는데도 다 먹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들 급식실에 몰려가 잠잠해진 복도와 창가 너머 해가 지기 시작하는 주황색 하늘, 텅 빈 운동장, 그 주위로 솜 뭉텅이처럼 피어 있는 벚꽃까지.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었다.
잘 먹는 우주가 보기 좋았다. 헤벌레 웃는 것도 귀엽고, 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주는 것도 고맙고, 의외로 애교가 있는 점도 막냇동생 같아 정겹게 느껴졌다. 정작 동생은 있지도 않았지만, 이런 동생이라면 안 때리고 예뻐해 줬을 것 같다.
우주는 방학 동안 서점에서 일방적으로 재유와 안면을 트고, 학기 첫날 연애편지도 전해 줘서 같은 반으로 만나니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지 않았을까? 잘은 모르지만, 혼자 다니는 모습만 봐 와서 괜히 더 잘해 주고 싶고, 아프다니까 짝으로서 양호실에도 데려다주고 밥 못 먹은 게 불쌍해 맛있는 음식도 먹여 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우주는 여자애들과도 곧잘 말하고 친하게 지냈다. 유명인사처럼 복도를 지날 때마다 아는 여자애들 여럿과 꼭 인사를 했다. 급식실에서도 간식거리를 주면서 애정을 어필하는 여자 후배들에게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다. 그냥 받고 말 뿐이었지.
“근데 너, 여자친구는 없어? 내가 전해 준 편지는 어떻게 됐어? 답장해 줬어?”
다 먹은 도시락을 챙기고 있던 우주가 손을 멈추고 빤히 마주 봤다. 허리에 손까지 올리며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왜… 내가 뭐 말실수했어?”
우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고, 소리를 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제가 황당한 말을 했나 보았다.
“아, 고3이라서 이성 교제는 좀 그런가? 너도 대학 가서 사귀기로 한 거야?”
우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왜, 말을 해 줘야 알지. 뭔데?”
“점순이가 답답하긴 무지 답답했겠어. 그치?”
“갑자기 뭔 소리야?”
“아닙니다요. 여자친구 없다굽쇼.”
뺀질뺀질 능구렁이처럼 말하는 게 꼭 놀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봄봄〉 얘기가 왜 나오는 건지 원.
결혼시켜 준다는 빌미로 3년째 일만 부려 먹는 장인에게 따지지도 못하는 머슴을 보며 속 터질 점순이를 재유도 십분 이해했다.
근데 그게 지금 이 상황에 적절한 비유인가? 저야말로 머슴밥 먹는 머슴처럼 생겨서는.
“없으면 없는 거지 왜 놀리고 그래?”
“아이고, 화나셨어요?”
“이게 진짜….”
약이 올라 한 대 때려 주려는 재유를 실실 웃으면서 피하던 우주가 손목을 턱 붙잡았다.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근데 너 병원 가야 된다니까? 얼른 가자.”
“그래. 아까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웬 병원?”
“선생님이 혹시 모르니까 가 보라고 했어.”
“안 가도 돼. 이 정도는 집에 가서 푹 자고 일어나면 좋아져. 네 덕에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정말이었다. 막 일어났을 때만 해도 몸도 무겁고 현기증 때문에 머리도 핑 돌았지만, 지금은 한결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아픈 이유의 절반은 마음의 병이 아니었나 싶었다. 우주와 밥 먹으면서 웃고 떠들고 했더니 몸에 독소가 빠져나가고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기운이 났다.
“그리고 넌 야자 해야지 가긴 어딜 가.”
“나 오늘 야자 안 하는데?”
“왜? 누구 맘대로?”
“허락받았어. 담임한테. 너 병원 데려다주라고.”
끙차, 침대에서 일어난 재유를 우주가 팔을 붙잡아 지탱했다. 밥도 떠먹여 줬는데 이 정도 스킨십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재킷도 입혀 줬다.
“그럼 난 알아서 갈 테니까 넌 집에 가. 피시방 가든가. 오랜만에 야자 땡땡인데 공부도 안 될 거 아냐.”
우주는 뾰로통한 얼굴로 재유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 쥐어박았다.
“너 때문에 뺀 건데, 왜 그렇게 섭섭한 말을 하냐?”
“…미안해서 그러지. 나 때문에 오늘 신경 많이 썼잖아.”
이미 받은 것도 많은데, 이 이상 폐 끼치기 싫은 마음에 한 소리였다.
“됐거든? 너 가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그래도 따라나서 주는 우주가 고마워 더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 병원 말고 집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합의를 봤다. 재유도 길 가다 휘청거리는 건 좀 무서웠다. 그런데 이번엔 택시를 타고 가자며 난리였다.
“택시 말고 좀 걷자. 종일 누워 있었더니 답답해.”
“괜찮겠어? 걸을 수 있겠어?”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지금이 겨울도 아닌데 왜 호들갑이야. 그리고 너랑 같이 가잖아. 그럼 됐지.”
우주는 재유의 보호자 역할이 퍽 기쁜 듯 “히, 그러네?” 하며 히죽였다. 그리고 앞뒤로 책가방 두 개를 메고 도시락 가방까지 어깨에 걸친 채 재유를 부축했다. 짐이 무거울 것 같아 팔은 받치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운동장으로 나오자 야자 1교시 종소리가 들리고 모든 교실에 훤하게 형광등 불이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왔던 것처럼 돌아가는 길에도 벚나무길을 택했다.
나 오늘 말 되게 많이 했네.
거의 종일 양호실에 있었는데도 우주와 평소보다 더 많은 대화를 했다. 티격태격. 아웅다웅. 주거니 받거니. 그게 새삼 신기했다.
서울 살 때도 친구는 있었지만, 이렇게 단시간에, 이렇게 깊게 친해진 친구는 없었다. 10대가 끝나가는 마지막 자락에 들어서야 겨우 10대 다운 학창 시절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재유는 반에서 늘 주변 인물이었다. 성격 자체가 그랬다. 선생님들한테도 이름보단 번호로 기억되고, 제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다른 친구들에게 맞춰 주었으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에게도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자신을 내보이는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여자애들한테도 호기심에 기인한 고백을 받긴 했지만,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매력은 없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감으로 살아온 10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재유는 늘 부모님께 눈치 보는 위축된 환경에서 자라 왔다. 아빠가 실직하기 전이라도 화목하기만 한 가정은 아니었다. 아빠는 아플 때나 자식을 걱정하는 친절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마저도 중학교 들어가고는 다른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변변한 대화조차 없었다. 아빠는 가족들 앞에서 위신 세우려는 근엄한 가장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엄마는 아빠 앞에서 순하기만 했다. 초등학생이던 재유가 밥 먹을 때, TV에 한눈을 팔면 아빠는 말없이 주먹으로 밥상을 쾅 내리쳤고,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냉큼 TV를 끄는 식이었다.
외아들이라고 오냐오냐 키우지 말라는 아빠의 입버릇처럼 엄마는 재유의 예의범절이나 공중도덕에 대해 지나치게 통제해 왔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어른에게 함부로 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골목에서 재유가 다른 데 정신 팔려 이웃 아저씨에게 인사하는 걸 깜빡했을 때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어김없이 손바닥을 맞았다.
“…너 우리 집 전화번호 몰라서 전화 못 했다고 했지?”
“왜? 가르쳐 주게?”
“사실… 우리 집에 전화기가 없어.”
해는 금방 졌다. 학교를 나와서도 이어지는 벚꽃길은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 빛을 받아 어떤 곳은 환하고 어떤 곳은 어두웠다. 미색의 파스텔을 입힌 것 같은 부연 빛 아래에 우주가 서 있었다. 가로등이 벚꽃을 비추고, 그 아래 우주의 얼굴도 희미하게 비췄다.
“삐삐도 없어. 그래서 번호를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그리고 저번에 빌려준 CD도 아직 못 들어 봤어. 플레이어도 없으니까.”
“…….”
우주는 좀 놀란 듯했다. 재유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 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을 덤덤하게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차분히 말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으며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우린 빈털터리로 이사 왔어. 말 그대로 맨몸으로 야반도주. 아빠가 IMF 때 실직하고 도박 빚을 졌거든. 집이 망해 버린 거지. 지금쯤 아빠는 어디서 딴 살림 차려 살고 있을 거야. 그래서 엄마랑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땐 진짜 굶어 죽기 직전이었어.”
아빠 얘기가 나오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아빠는 재유가 ‘아빠’라고 부르는 걸 고쳐 주지 않았다. 아니,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빠’라 부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또래 남자애들 중 이 나이까지 ‘아버지’ 대신 ‘아빠’라고 부르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그 사실은, 지금에 와서야 아빠가 저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닐 거라 믿는 단 하나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하찮긴 했지만.
“엄마는 몸이 안 좋으셔. 일하다 쓰러지셨는데도 병원비 때문에 약만 받아서 집에 왔어. 그것 때문에 내가 집에서 간호해 드렸고. 그래서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했어. 예전 생활로 조금이라도 돌아가려면 얼른 일해서 돈 버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재유는 특별히 주목받지도, 대단히 특출나지도 않았던 자신의 10대를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0대의 마지막 친구가 되어 준 우주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형식으로.
막 어둑해진 한산한 길거리의 엷은 가로등이 비치는 벚나무길이 감상적인 기분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렇게 솔직해진 건지도 모른다. 들어주는 우주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10대 후반에 생긴 불행의 응어리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으로 풀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무거운 돌덩이를 내뱉는 듯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랬어? 힘들었겠네.”
우주는 처음과 달리 놀란 눈을 하거나 어설프게 위로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대신 팔을 붙들던 손이 내려와 재유의 손을 그러쥐었다. 좀 놀라긴 했지만, 인적이 드문 길이라 내버려 두었다. 잡은 손은 여전히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좋은 집주인 만나서.”
“집주인?”
“너 영선이 알지, 고영선. 1학년 때 너랑 같은 반이었다던데.”
“어. 알아. 조그맣고 목소리 큰 애.”
우주는 아무렇지 않게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잡은 손에 힘을 더해 잡는 게 느껴졌다.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영선이를 묘사하는 어투에 웃음이 났다.
“그 집에서 방 얻어 살거든. 걔네 부모님도 그렇고 영선이도 그렇고 다들 엄마랑 나한테 잘해 주셔.”
“잘됐네.”
집이 망했을 때, 재유는 제 인생도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 실패감과 체념이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게 편했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아픈 엄마를 볼 때나 과거와 다른 환경을 겪을 때면 쉽게 포기하고, 편하게 체념했다.
엄마에게 손가락질하고 악다구니를 쓰는 어른들을 보며 재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봤던 세상은 적의와 악의로 가득했다. 돈이란 건 십년지기 친구도 돌아서게 하고, 가족 같았던 이웃도 돌을 던지게 했다. 누구는 그것 때문에 쫓기듯 야반도주를 하고 한강 다리에 떠밀리듯 올랐다. 이제껏 살아왔던 과거를 한 톨도 남김없이 부정하게 했다.
재유는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한 잘못과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았다. 아빠가 재산을 들고 도망간 것을 막지 못하고, 엄마가 재유 뒷바라지를 하느라 힘들게 일하고 있는 게 모두 제 탓 같았다.
그런데 전학 온 뒤 학교에서는 누구도 재유를 몰랐다. 이곳에서는 마치 IMF가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악의 없이 재유네를 도와주는 이웃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도 재유는 밑바닥에 깔린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너도 만났잖아. 너도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픈 걸 걱정해 주고 밥을 먹이려고 기를 쓰는 그를 보면서 재유는 오랜만에 새로 알게 된 사람에게 정을 주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네가 친구 해 줘서 좋다고.”
“아… 친구….”
우주는 조용히 웃었다. 기쁜 듯 보이면서도 어딘지 허탈한 웃음이었다. 뜻 모를 애매한 표정도 지금만큼은 혼란을 주지 않았다. 재유는 그저 이 길에서 느끼는, 약간의 낭만이 섞인 해방감을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우주가 고개를 숙여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내일이면 또 우울해질지도 모르지만, 재유는 우주에게 마주 웃어 주며 느긋한 하굣길의 행복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