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평범한 나날. (17/18)

외전 1. 평범한 나날.

‘평화롭다.’

박민후는 잠에서 깰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창밖에선 평화롭게 새가 지저귀고, 때때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생활 소음이 들려온다. 거기다 창밖으로부터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빛도 한몫했다.

박민후는 천장을 보고 있던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저를 등지고 잠들어 있는 이수현을 눈에 담았다.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는 것 같았다. 지금이 몇 시더라, 눈을 굴려 주변에 있을 휴대폰을 찾았다.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에 손이 닿자마자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딩동댕~ 일어나! 아침이야! 일어나….]

박민후는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알람을 꺼 버렸다. 상체를 반쯤 일으킨 자세 그대로 이수현을 돌아보았다. 보통 그는 알람이 울리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번쩍 뜨곤 했다. 알람 소리가 짜증 난다는 듯이 얼굴은 있는 대로 구겨져 불편한 심기를 보였고,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다가 겨우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는 눈을 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힐끔 보니 이제 막 7시였다. 아직 이수현이 나가려면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한 10분만 더 재우고 깨워야지.’ 하며 박민후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이수현의 허리와 매트가 맞닿은 곳에 멋대로 왼팔을 구겨 넣고, 오른손 또한 사용해 그의 몸을 끌어안으면서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러는데도 안 일어난다 이 말이지.

박민후가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베개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덕분에 이수현의 잘빠진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그 목덜미에는 작은 점이 하나 콕 박혀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니 박민후는 본능에 따라 코앞에 있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마음 같아선 이빨로 잘근잘근 씹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이수현이 오늘부터 침대 위에서 못 자게 할 테니 아쉬움에 입술로만 우물거릴 뿐이다.

“음… 간지러….”

목 뒤가 간지러워 박민후의 품속에서 이수현이 뒤척였다. 침대 시트가 그 움직임에 밀리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수현은 잠결에 손을 들어 등 뒤에 있는 박민후를 밀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껌딱지처럼 들러붙은 그가 힘 하나 없는 손길에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수현은 점점 잠에서 깼다. 제 허리를 옥죄는 팔과 어느새 티셔츠 안에 들어와 배를 쓰다듬는 손바닥이라거나, 다리에 휘감긴 무거운 다리도 이수현의 잠을 깨우는 데 한몫했다.

“…그만해.”

“일어났어?”

“음…”

아침이라 가라앉은 목소리를 한 이수현의 대답이 뒤따르자두, 그의 등 뒤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배를 살살 매만지던 손이 티셔츠 밖으로 빠져나갔다. 저를 괴롭히던 손이 빠져나갔으니 이수현은 다시 잠들려고 했다. 베개에 얼굴을 더욱 묻으며 ‘5분만 더….’ 그렇게 중얼거린 거 같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외려 와락 품 안 가득 끌어안고 마는 손길에 절로 얼굴을 찡그렸다. 박민후는 “그래. 더 자.” 하고 귀 바로 옆에서 다정하게 속삭였다. 외려 그게 잠을 깨우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더 자라 재촉하면서도 박민후는 이수현을 못 자게 했다. 귓가를 살짝 물고 입술을 비비는 행동이 어디 더 자라 하는 사람의 태도람. 이수현은 속으로 그를 욕을 했다.

귀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관자놀이를 향하고, 뒤를 이어 매끈한 이마에 도장 찍듯 찐하게 입술을 내리찍더니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와 함께 허리를 옥죄던 손도 다리를 옭아매던 그의 다리도 떨어졌다. 이수현은 이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 아침마다 늘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있었던 이유는 정말이지 너무 졸렸고, 피곤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딱 그런 날이다. 아르바이트 가기 싫은 날. 아, 세상 망했으면.

이수현은 베개에 얼굴을 더욱 파묻으며 저를 괴롭히는 박민후한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민후는 이수현의 얼굴 여기저기에 집요하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했다. 그럴 때마다 ‘쪽쪽’ 귀여운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때 침대 위로 무언가 풀썩 뛰어 올라왔다. 바삭바삭 발소리를 내는 작은 형체가 벽과 이수현의 틈새를 파고들고선 그 축축한 코를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부드러운 혀로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이수현의 얼굴을 여기저기 핥으며 몸을 치대니 몽실몽실한 털이 느껴졌다.

뒤편에서는 다 큰 놈이 치대고 앞에선 작은 놈이 치대니 이수현은 잠들 수가 없었다. 박민후가 구겨진 미간에도 입술을 비비고, 콧방울도 매끈한 볼도 눈꺼풀 위에도 턱선을 따라 지분거리는 입술이 기어코 이수현의 입술 위에 포개졌을 때 이수현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으음, 그만. 그만해요, 착하지….”

눈도 안 뜬 이수현이 박민후의 뺨을 더듬거리듯 쓰다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박민후는 짧게 웃고는 더더욱 입술을 붙여 오는 고약한 짓을 저질렀다. 박민후가 매일 아침 이러니 이 작은 솜뭉치도 곧잘 박민후를 따라 했다.

“…그만, 하라니까!”

히웅.

“드디어 일어났네?”

참다못한 이수현이 박민후의 뺨을 힘주어 저만치 밀어내며 몸을 반쯤 일으키니, 그는 그제야 멈췄다. 아침부터 눈웃음치긴. 이수현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박민후를 흘겼다. 이수현이 어기적거리며 몸을 마저 일으키자 머리맡에 있던 검은 솜뭉치는 반동으로 뒤뚱 넘어지고 말았다. 놀랐는지 귀여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앞발과 뒷발을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이수현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너도 그만해. 매일 네 침으로 세수를 하잖아.”

가볍게 목덜미를 간질이자 꼬리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알아듣지 못한 게 분명하다. 간질이는 걸 멈추니 손바닥에 얼굴을 치대며 더하라 재촉한다. 그 모습이 이수현의 눈에도 정말 귀여웠다. 그러니 사뭇 풀어진 얼굴로 열심히 쓰다듬어 줄 수밖에.

“간장. 네가 아무리 귀엽게 굴어도 이수현은 내 거야. 너무 어리광 부리지 말라고.”

박민후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다시금 뒤에서 허리를 감아 오자, 그 손길에 이수현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널따란 가슴팍에 기대듯 안긴 상태로 이수현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내 거야…”

“응, 나도 네 거야.”

그러면서 박민후는 어깨를 입술로 물며 이갈이 하는 짐승처럼 굴었다.

‘이거야, 원. 내가 개를 두 마리 키우는 건지….’

그러니까… 박민후는 조금 뻔뻔해졌다. 아니, 원체 뻔뻔한 인간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특히 심했다.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해 멍하니 누워 있는 이수현을 깨운답시고 얼굴에 입술 도장을 연달아 찍는 것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몇 번을 밀어내도 다음날 되면 다시 그러니 이수현은 이제 포기하듯 그냥 내버려 뒀다. 좀 미안한 것도 있고.

이수현은 박민후가 제 목덜미며 늘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어깨를 입술로 지분거리는 걸 그냥 내버려 두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한 손으론 제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검은 털 뭉치를 쓰다듬었다.

‘평화롭네.’

그랬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일상은 이렇다 할 사건·사고 없이 평탄하게 잘만 흘러갔다. 그건 그동안 박민후가 바라 마지않았던 일상이며, 이수현에게는 익숙한 하루하루였다. 그리고 이수현은 사뭇 그런 날들이 지루하다 여겼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평화로운 세상이었고, 괴물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지나치게 평화로운 곳이었으니까.

***

그날 이수현이 박민후와 다시 만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약국에 약을 사러 가는 일이었다.

박민후를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생기자 이수현의 눈에 잔뜩 흐트러진 그의 옷차림과 말라붙은 붉은 피가 묻어 있는 맨발이 보였다. 그 모습의 이수현은 탄식하듯 한숨 쉬었다. 대체 어디다 신발은 벗어 두고 이리 맨발로 뛰어온 건지, 애초의 신발을 신긴 했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한껏 울어 꼬질꼬질한 얼굴로 좋아 죽겠다며 웃는 게 퍽 귀여워 보여 이수현은 입 안의 혀를 살짝 깨물었다.

“…그쪽 발 다쳤어요.”

그 말에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 박민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발을 들어 발바닥의 상처를 확인하자 그제야 조금씩 고통이 밀려왔다. 쓰라리고 따끔거렸다. 당연한 고통이 이상하리만치 낯설어 박민후는 조금 주춤거렸다.

그의 발은 이수현이 있는 곳까지 뛰어오느라 여기저기 스치고 베이고 찢어져 상처투성이였다. 아플 게 분명한데도 박민후는 이수현이 언급할 때까지 자신이 다친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이수현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하고 물었으나 박민후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 정도로 병원에 갈 정돈 아니라며 손을 내젓는 그를 마냥 이곳에 세워 둘 수도 없어 이수현은 박민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박민후를 욕실에 밀어 넣고, 이수현은 약을 사러 가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섰다. 당연하게도 그의 집에는 그 흔한 연고조차 없었다. 평소 이수현은 좀처럼 다치는 일이 없었는데, 다친다고 해도 1년에 한두 번 실수로 책에 베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 정도는 침 바르면 나으니 굳이 약이 필요 없었다. 그러니 간단한 상비약을 사서 집에 둬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저, 발을 다쳤거든요. 아무래도 어디 베인 것 같은데… 아,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래요. 제가 잘 몰라서요. 필요한 약 좀 주시겠어요?”

약국에 들어서자 이수현은 뭘 사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약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다행히도 약사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그의 말을 알아듣고 착착 필요한 것들을 가져왔다. 친절하게 사용하는 법도 알려 주었다.

집에 돌아오니 박민후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약국을 다녀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는지 박민후는 옷도 멋대로 그의 옷장을 뒤적여 갈아입은 후였다. 이수현은 제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다가오려 하는 그를 손으로 제지하며 다가갔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자세로 다시 침대 위엔 앉은 박민후를 두고 이수현은 손을 씻고 온 뒤 바닥에 앉았다.

“박민후 헌터, 발 좀 들어 봐요.”

“헌터는 빼라. 이제 헌터도 아닌데….”

습관처럼 부른 호칭을 정정하곤 박민후가 웃으며 손을 뻗어 이수현의 손에 들린 약들을 뺏어 들었다. 이수현은 순순히 약들을 건네줬다. 박민후는 익숙한 듯 약을 척척 바르더니 방수 밴드까지 여기저기 붙인 뒤에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씻고 나왔지만, 박민후의 낯빛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눈 아래는 퀭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거스러미가 올라와 있었다.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손을 뻗어 이수현의 볼을 콕 찔렀다. 그의 손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났다. 이수현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입술을 달싹이자 그걸 보며 박민후가 피곤한 듯 미간을 구기며 웃었다.

“…지금은 좀 쉬자. 피곤하지도 않아? 난 너무 피곤해. 여기 와서 잠도 못 잤어.”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이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찔린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이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쓴 약을 한쪽에 치워 둘 생각으로 몸을 돌리니 박민후가 약하게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이리 와. 같이 낮잠이라도 자자.”

침대를 툭툭 두드리며 박민후가 이수현을 불렀다.

“좁은데.”

“좁아서 좋지.”

그렇게 말하며 제 손을 이끄는 박민후를 이수현은 뿌리치지 못했다. 약 봉투는 그냥 바닥에 내려놓고 순순히 침대 위로 올라와 같이 천장을 보며 드러누웠다. 두 사람이 편하게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침대가 연신 삐걱거렸다. 어째 기분이 이상해 이수현은 몰래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침대는 좁아서 둘이 나란히 누우니 서로의 팔이 맞닿았다. 베개는 하나라 박민후가 이수현의 머리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해야 했다. 들리는 거라고는 서로의 숨소리와 간간이 창밖을 지나다니는 차 소리 정도라 그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기 딱 좋았다. 그러니 이수현은 힐끔 박민후를 보다 눈을 감았다.

박민후와 이수현은 서로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결국 둘 중 누구도 선뜻 먼저 입을 열진 못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여러 질문과 여러 생각이 각자의 머릿속의 자리 잡았으나 두 사람 다 심적으로 지쳐 있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대화를 해 봤자 서로 피곤할 뿐이다. 뭐,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하면 될 일이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졸리지 않았는데,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누워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겨 왔다. 한껏 긴장했던 신경이 느슨해지니 피로가 몰려온 탓도 있었다. 두 사람은 결국 그날 온종일 잠만 잤다.

그리고 다음 날 박민후는 보기 좋게 앓아누웠다.

***

이수현은 아주 죽은 듯이 잠들었다. 분명 잠들 땐 낮잠이라고 하고 잤는데 다시 눈을 뜨니 해가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줄 알았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6시 언저리였고, 날짜를 확인하니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해가 지는 게 아니라 뜨고 있던 거다. 너무 자서 오히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켰을 때 옆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민후 헌터… 아.”

이제 이 호칭은 그만둬야 하는데 그럼 그를 뭐라고 불러야 안 어색할지 몰라 이수현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싶어 박민후의 어깨를 살살 흔들며 그를 깨워 보려고 했다.

“일어나 봐요.”

좀처럼 눈을 뜰 생각을 안 하는 박민후를 내려다보며 이수현은 어깨를 흔들던 손을 옮겼다. 그러다 생각보다 뜨거운 체온에 놀라 손가락을 움츠렸다.

“이봐요. 괜찮아요?”

호칭을 정하지 못하니 부르는 게 남보다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흔드는 손길에 박민후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금방 도로 닫혔지만 말이다. 이수현은 어쩌나 싶어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물수건이라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민후가 있다고 해서 이수현의 일상이 크게 변하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정해진 시간에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하는 게 그랬다. 이수현은 일주일에 3일은 카페에서 일했고, 또 3일은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일했다. 그러고 남은 하루는 쉬었는데 그건 남들이 흔히들 쉬는 주말이 아니라 평일이었다.

박민후에겐 불행히도 오늘은 쉬는 날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제 쉬었으니 오늘은 나가야 했다. 이수현의 인생 계획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고, 몸에 익혀 둔 습관은 쉬이 바뀌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이수현은 몸에 밴 습관대로 움직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대충 끼니를 때우며, 집을 나서기 전까지 틈틈이 박민후의 이마에 놓아둔 물수건을 갈아 주거나 했다.

“저 일하러 가야 해요. 괜찮아요?”

“…응.”

“일단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도록 해 볼게요.”

물론 이 집에 혼자 있을 박민후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혼자 있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야, 아직까진 이수현에겐 그게 당연했고, 또 본인은 여태 그래도 괜찮았었으니까. 은연중에 남들도 그렇겠지, 하는 생각을 한 거다.

그래도 이수현은 근처 약국에 들러 약을 사고, 그 근처 죽집에도 들러 죽을 사서 다시 집에 돌아갔다가 왔다. 덕분에 시간은 아슬아슬했다. 가서 사정을 말하고 점심쯤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수현은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더는 그가 살던 세계가 아니었다. 이제 박민후는 저번처럼 신발을 신지 않으면 발이 쉽게 상처투성이가 되고, 고작 비를 맞는 것으로도 감기에 걸릴 테다.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된 거다. 한편으론 그런 점이 박민후가 이곳에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 주었고 그와 동시에 그가 어떻게 제 앞에 있는 것일까 의문도 주었다.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수현 자신도 이렇게 돌아왔는데 그가 건너오는 것쯤이야 특별할 것도 없지.

“…수현이 왜 또 멍하게 있어. 아직도 몸이 안 좋아?”

“아. 아뇨…”

한차례 설거지를 하며 멍하니 손만 놀리고 있던 이수현은 제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몸을 슬쩍 뒤로 물리며 손을 털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수현은 제게 갑자기 말을 건 사장님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안 좋으면 말하렴.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고 예약도 없어서 널널하니까 괜찮아.”

“아, 그럼. 조금 일찍 들어가 봐도 될까요? 맡은 일은 다 끝내고 갈게요.”

이수현은 사장의 말을 넙죽 받아들였다. 그에 역으로 당황스러워한 건 사장 본인이었으나, 이미 내뱉은 말을 ‘그냥 해 본 말이다.’ 하고 무르기도 뭐했고, 하물며 상대가 이수현이었으니….

“어머, 그래. 그래라. 얘가 안 하던 말을 하는 거 보니까 아직도 멀쩡하지 않나 봐…. 점심 되면 먼저 가 봐.”

“네. 감사합니다.”

물론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었으나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덕분에 이수현은 생각보다 쉽게 집에 일찍 갈 수 있게 됐다.

점심도 거르고 서둘러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박민후가 일어나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이수현이 거의 코앞까지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일어났네요?”

“…….”

“몸은 어때요?”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혼이 나간 듯 넋 놓고 있던 박민후가 그제야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이수현이 보이자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이수현이 어깨를 눌러 저지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수현의 양 팔뚝을 붙들었다.

“왜 그래요? 아직도 안 좋아요?”

“눈을 뜨니까 네가 없어서….”

“일하러 갔다 왔어요. 안 갈 순 없었거든.”

식탁 위를 보니 그가 아침에 사다 둔 죽과 약이 놓아둔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도 꿈인가 했어.”

“그랬구나.”

그렇게 말하는 박민후의 목소리는 물기 없이 버석거렸고,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절 끌어안는 그를 보며 이수현은 제가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아, 혼자 두지 말 걸 그랬네.’

저는 괜찮았으니까 남들도 그럴 줄 알았지. 이수현은 손을 들어 올려 느릿느릿 박민후를 토닥였다.

“…눈을 떴는데, 너는 없잖아. 근데, 그래도, 여긴 네 집이니까…. 어쩌면 잠깐 나간 거겠지 싶었어. 금방 오겠지….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리다 보면, 네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뭐라도 먹고 기다리지 그랬어요?”

“그럴 정신이 없었어.”

박민후는 꿈을 꿨다. 아니, 그건 꿈이라기보단 그가 겪었던 기억의 일부였다. 그 기억은 이수현이 혼자 사라진 그때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이곳에선 이루지 못할 미래를 이야기하며 갈림길 앞에 놓여 있었다. 박민후는 자신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수현이 차라리 혼자서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 있었다. 혼자서도 괜찮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이수현…?’

그렇지만 막상 상상하던 일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박민후는 제 가슴속을 헤집는 상실에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허망하게 손안에서 사라진 온기는 이젠 더는 잡을 수 없었고,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이수현의 모습은 그를 더욱 절망 속에 빠트렸다. 박민후는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에 잡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비어버린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박민후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자 박민후는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죽음만이 남았다. 차라리 죽어서 편해지고 싶었다. 박민후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발아래가 늪지대가 된 것 같았다. 어쩌면 사막의 모래일지도 몰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가 푹푹 꺼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그곳을 벗어났을 때였다.

‘박, 박민후다!’

조용한 거리에 울려 퍼진 말은 무척 작았지만, 그보다 조용했던 거리에서 그 소리는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기폭제가 되었다. 여기저기 몬스터를 피해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이 박민후를 발견하자마자 하나둘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박민후는 그들의 말도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정신이나가 멍하니 발이 가는 대로 걷고 또 걸을 뿐이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맛이 가 있었다. 죽음이 바로 목전에 있던 이들에게 박민후는 빛이었고, 살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추악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그들의 영웅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숨이 꼴딱 넘어갈 지경이었던 이들이 벌떼처럼 달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상은 착실하게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무너지고, 강한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힘들게 걷다가도, 땅이 뒤틀리자 엎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아비규환 속에서 박민후 혼자 고요했다. 그는 땅이 흔들리고 지반이 어긋나는 상황에서도 그저 걸었다. 그렇게 그가 정처 없이 걷다가 겨우 멈춰 선 곳은 무너진 다리 끝이었다. 원래라면 강이 흐르고 있어야 할 그 아래에는 이제 강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었다. 다만 모든 걸 집어삼키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뿐이다.

박민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울이 부서진 것 같은 모습의 하늘은 몹시 기괴했지만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 끝이구나. 이곳도 다른 곳과 다를 것 없이 끝이다. 그의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박민후는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깨어났다. 자신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이곳은 이수현의 집이었다. 베란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건 평화로운 일상의 생활 소음이다. 박민후가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기억은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그것을 짜 맞추느라 그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박민후는 이수현을 다시 만나기 전에 그가 처음 깨어났을 때의 상황과 그때 자신이 읽었던 글을 떠올리고선 그곳의 박민후가 정말 죽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알기로 여태까지 꿈에서 깨는 조건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으니까.

그럼 이곳은 현실인가? 그런데 이수현은 또 어디로 간 거지? 분명 같이 잠들었는데 왜 저는 또 혼자 있나. 얌전히 기다리면 그가 오는 걸까? 나가서 또 그를 찾아다녀야 할까?

박민후가 홀로 초조하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이수현이 돌아왔다. 박민후는 제가 앞으로 한동안은…. 아니, 꽤 오래 이수현이 눈앞에 안 보이면 이렇게 초조해할 거란 걸 알았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이수현이 사뭇 다정하게 그를 도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건 이제 꿈도 아니고, 내가 그쪽 눈앞에서 사라질 일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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