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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2.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16/18)

Epilogue 2.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헉!”

숨을 집어삼키며 눈을 떴다. 쿵쿵, 100m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인해 축축했다. 땀 때문에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이마에 눌어붙어 있었다. 방금 전 꾼 꿈의 여파로 크게 떠진 남자의 눈이 정차 없이 주변을 살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천장이었다. 눈동자만 굴려 옆을 봤다. 아직 어두웠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아직 새벽인가 보다. 남자는 다시 느리게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 있을 것만 있는 자신의 방이 보였다. 그것까지 확인하자 남자는 어쩐지 저릿한 손을 들어 올려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한숨을 쉬었다.

꿈이었다. 꿈….

꿈에서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인 줄 알았다. 아직도 눈앞에 괴물의 흉측한 입이, 혀가, 거대한 이빨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분명 꿈이었을 텐데도 현실인 것처럼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꿈의 여파로 여전히 저릿한 손으로 제 목을 한 번 쓸어내렸다. 꿈속에서 뜯겨 나간 목은 당연히 붙어 있었다. 그야 꿈이었으니까. 현실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가 어쩐지 이질적이었다.

“…뭔 꿈이 이래?”

이상한 꿈이었다. 남자는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을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꿔 본 적이 없었기에 이 꿈이 굉장히 특이하다고 여겨졌다.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고 하는 게 좋을까? 마치 평범한 꿈이 아닌 것만 같았다. 정말로 현실 같은 꿈이었다. 게다가 그간 봐 왔던 판타지 소설의 도입부 같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일단 잊기 전에 기록해 두는 게 좋겠지 싶었다. 아직 밤은 깊었고 다시 잠들었다가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나중에 아쉬울 테니까. 남자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태블릿을 켠 뒤에 기억에 남아 있는 꿈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재밌네.”

적어 놓은 걸 보니 나름 만족스러웠다. 남자는 기록을 마친 후 다시 잠이 들었다.

***

그날을 기점으로 남자는 이따금 같은 꿈을 꾸었다.

정체불명의 게이트가 나타나 거기서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괴물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죽이고 저 또한 죽는 그런 꿈을 말이다.

꿈은 무척 신기하게도 꿀 때마다 계속 이어졌다. 처음엔 ‘우연인가?’ 하며 그저 비슷한 꿈인가보다 했지만, 아니었다. 남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꿈속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남자는 남자일 때도 있었고, 여자일 때도 있었으며, 어린아이였다가, 청년이었다가, 노인이었다가, 지나가는 떠돌이 개였다가, 가로수 밑에 핀 들꽃이 되기도 했다.

꿈을 꿀 때마다 남자는 늘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와중에 남자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죽어야 했으며, 깨고 나서 자신이 다시 꿈을 꿀 때는 그전에 ‘나’라고 여겼던 대상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죽었기 때문인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어쨌거나 계속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꿈에 대한 것을 기록했다.

남자는 꿈을 꾸었다.

남자는 여러 모습으로 그 세상을 보았다. 세상은 이유도 모른 채 철저히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거기서 남자는 여전히 괴물들을 피해 숨고, 서로 살기 위해 발악했다. 지독한 세상이었다. 아니, ‘지독하다’라는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세상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그 순간만은 남자가 보고 느낀 모든 게 현실이었다. 꿈이었으나 다치면 고통을 느꼈고, 찬 바람이 불면 추위도 느꼈으며, 배가 고프면 허기도 느꼈다. 이상했다. 꿈이라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꿈에서 깨어나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때까지도 그건 겨우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꿈이었다.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

남자는 그날도 꿈을 꾸었다.

톡톡. 태블릿의 화면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남자가 지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슬슬 이쯤에서 영웅이 나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잠에서 깨어나면 남자는 이제 당연하다는 듯 꿈의 행적을 좇았다. 오히려 꿈을 꾸지 못하면 아쉽기까지 했다. 태블릿 속의 메모는 갈수록 늘어 갔고, 기록된 이야기들을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나라면 여기서 슬슬 영웅을 집어넣을 거야.’

스크롤을 내리며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흔한 소재지만 이런 이야기에 당연히 등장해야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그런 초능력자 말이다. 멸망해 가는 세상을 구하고, 가여운 사람을 구해 줄 그런 ‘영웅’이 슬슬 나타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꿈속은 여전히 처절했다. 갈수록 더 악화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 만약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건 너무 절망적이지 않은가.

“피곤해….”

태블릿을 한쪽에 치워 놓고 피로한 눈가를 주무르며 남자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있을 것만 있어 썰렁하기 그지없는 집 안을 휘청거리며 걸었다. 찬물을 맞으면 정신이 들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 꿈이 사실은 악몽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차디찬 물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지만 그것과 반대로 몸은 무거웠다.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없어, 꿈을 꾸는 날이면 남자는 온종일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몇 시간을 자든 늘 피로했고, 나날이 생생해지는 꿈의 내용은 일상에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길을 걷다가도 보일 리 없는 것이 보이고,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들릴 리 없는 환청이 들리는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남자는 애써 무시했다. 오늘도 꿈을 꿔 그런 것뿐이라 생각했다.

…남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그곳에 동화되어 갔다.

남자는 회사 앞에 위치한 유명한 카페에 들어섰다. 자신을 발견한 것인지 먼저 와 있던 그의 친구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잠 못 잤어?”

의자에 앉기도 전 친구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저렇게 말했다. 그에 한숨을 쉬며 남자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자긴 잤지.”

“야, 너 얼굴 꼴 좀 봐라. 완전 판다가 따로 없네!”

앞에 앉아 있던 친구가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남자는 뚱하니 액정에 비치는 얼굴을 보았다. 스스로 보기에도 퀭한 얼굴이었다. 눈 밑이 시커멨다. 남자는 푸석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대충 쓸며 말했다.

“일이 그렇게 바빠? 별로 하는 것도 없다더니….”

“그냥, 요즘 좀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무슨 꿈을 꾸길래 그래? 뭐, 가위라도 눌리는 거야?”

“가위는 무슨. 그냥 있어 그런 게…. 좀 이상한 꿈이야.”

남자는 오늘 꾼 꿈을 떠올려보다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회사는 어때?”

“조만간 그만둘 거야.”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어떠냐, 일은 재밌냐, 회사는 왜 관두냐, 저녁 뭐 먹을까 등등 꿈에 대한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고 그날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남자는 또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날 꿈속에 드디어 남자가 바라던 변화가 생겼다.

“헉, 허억…!”

꿈속에서 남자는 상처투성이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손에는 무기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엉성한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 여러 사람의 시체가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보였고, 남자의 발아래에는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남자는 연신 숨이 넘어갈 정도로 헐떡이고 있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고, 시야가 계속해서 흔들렸으며, 한쪽 눈은 피 때문에 불투명했다. 남자는 눈을 깜빡이는 대신 더욱 부릅떴다. 덜덜 떨리는 손에 들린 병장기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눈앞에 현실을 마주했다.

“아.”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 밖으로 툭 튀어 나갔다. 남자의 눈앞에서 거대한 괴물이 목이 찢어진 채 죽어 가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 세계에는 아직 초능력자라고 불릴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괴물들과 비교해 사람들은 절대적인 약자에 불과했다. 괴물들보단 머릿수가 좀 많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남자는 그날 꾼 꿈이, 드디어 영웅이 등장하는 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꿈의 이변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야가 까무룩 어둠에 잠기고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하며, 꿈속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다가도 또 느리게 흘렀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마치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휙휙 빠르게 전환되며, 세상은 과거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그렇게 어느덧 남자가 아는 현재와 비슷한 시점이 되었다.

남자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세상은 괴물이 가끔 나타나긴 했지만 어떤 때보다 살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다 괴물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해 준 영웅들 덕분이었다.

그렇게 계속 사람들은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며 살아갔다. 평화로웠다. 제가 아는 현재와 비슷했지만, 어딘가 조금 다른 세상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지켜보는 건 퍽 흥미로웠고, 또 재밌었다. 다만 계속되는 평화는 ‘보는’ 입장에서는 지루할 뿐이었다. 그러니 남자는 생각했다.

이렇게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기엔 결말이 조금 아쉽지 않은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 눈앞의 세상이 다시금 급변했다.

꿈속에서 남자는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었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던 수많은 관광버스 중 하나를 타고 있었다. 주변에는 남자가 입은 교복과 같은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들이 가득했다. 그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제 팔을 툭 치며, 수학여행이 기대된다며 옆에 앉은 친구가 말했다.

“나도 기대돼.”

아마 그렇게 말했던 거 같다. 남자는 아니 소년은 그렇게 기대에 차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누가 뜯은 건지 알 수 없는 과자를 나눠 먹었다.

끼이익!!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휙 방향을 바꾼 핸들 때문에 차가 기울었다. 타이어가 지면을 미끄러지며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었다.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멈추지 못한 관광버스가 기어코 힘을 못 이기고 뒤엎어진다. 바닥을 구르면서 차창 유리가 깨져나갔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아이들의 비명이 노래처럼 울려 퍼지고, 쿵, 쿵, 지면을 한참을 구른 뒤에야 멈춰 선 버스는 그렇게 그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을 지옥으로 안내했다.

***

“으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익숙한 천장을 보며, 방금 그것이 꿈이란 것을 알았지만 남자는 아직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떨리는 몸을 힘들게 일으키다 침대 시트에 발이 걸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닥을 기듯이 움직여 화장실로 직행했다. 욕지기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올라오는 것도 없어 위액만 몇 차례 비웠을까 힘이 빠져 변기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렇게 불쾌하고 기분 나쁘고 소름 돋는 꿈도 참 오랜만이지 싶었다. 그간 꾸었던 꿈에 익숙해져 있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나? 남자는 망령을 보았다. 자신의 발을 잡아당겨 저 아래로 끌어당기던 손들이 자신을 저주하는 목소리들이 세면대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귓가에 울렸고, 잠에서 깼으나 여전히 눈앞에서 아른거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환영이 마치 현실 같았다.

“…미치겠군.”

머리가 아팠고, 목이 탔다.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단순한 꿈일 텐데 왜 이리도 생생한지 모르겠다. 남자는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어느덧 2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상황에 수학여행이라니, 이미 5년도 더 된 일이었다. 솔직히 그 시절의 일은 제대로 기억도 안 났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나였어.”

여태 꿈속에서 남자는 늘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빌려 그 세계를 구경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버스 창문에 비친 건 고등학생 때 남자와 똑 닮은 얼굴이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한 인물이 꿈에 나온 적이 없었는데, 그렇기에 꿈에서 깨고 나서 더 소름이 돋았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이게 정말 단순한 꿈이라 치부하고 넘어가도 되는 일일까?

누군가는 겨우 꿈 가지고 그리 호들갑이냐 말하겠지만. 겨우 꿈이라 하기엔 이 꿈을 꾼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꿈을 꾸는 간격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남자는 3일에 한 번은 꿈을 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오늘 꾼 꿈엔 자신의 얼굴을 한 고등학생이 나왔다. 그러니 자꾸만 느낌이 이상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집에만 있어 그런 걸까 싶어 남자는 기분 전환 삼아 밖에 나가기로 했다. 퀭한 얼굴이 거울 너머로 보였다.

괜히 보기 싫어 세면대를 지나쳐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찬물로 몸을 씻어 내리면서 꿈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씻고 나니 한결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 조금 가물가물해진다면 좋으련만, 남자는 어느새 습관이 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둔 태블릿을 집어 들어 꿈을 기록한 것이다. 무의식적인 행동에 가까워 다 적고 나서야 남자는 눈치챘다. 그걸 보며 남자가 허탈하게 웃었다.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태블릿을 침대에 던졌다.

옷을 챙겨 입고 지갑과 태블릿만을 든 채 밖으로 나섰다. 남자의 저조한 기분과는 반대로 하늘은 새파랬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다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은 지독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사방에서 매미가 미친 듯이 울어 젖히는 소리 때문에 귀가 다 아팠다. 덥고 피부에 닿는 햇살은 뜨거웠지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기분 좋았다. 그렇게 남자는 목적 없이 도로변을 걸었다.

***

남자는 여전히 꿈을 꿨다.

자신이 어느 소설에서 나올 법한 ‘영웅’이 되는 꿈이었다. 세상은 다시 지독해졌고, 사람들은 영웅을 찾았다. 자신은 꿈속에서 미쳐 날뛰었다. 여러 시련이 닥쳐오기도 했고, 여러 힘을 손에 넣기도 했다. 그것은 퍽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말이다.

꿈속 세계의 시간이 남자가 살아가는 현재와 비슷해졌기 때문일까,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헷갈렸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 남자는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참을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사실 꿈속이라 생각했던 게 현실이고, 현실이라 여긴 곳이 꿈인 것은 아닐까?

꿈에서 깨는 순간과 잠이 드는 순간이 모호해지는 와중에도 남자는 계속 꿈을 꾸었다. 남자는 이제 하루에 한 번, 혹은 깜빡 잠이 들다가도 꿈을 꾸었다.

마침내 멸망을 향해 가던 그 세계를 남자가 구하고 나서야. 그제야 남자는 더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아….”

느리게 떠진 눈을 깜빡이며 익숙한 천장을 보았을 때 남자는 무척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게 남자가 잠에서 깨어난 뒤 처음 느꼈던 감상이었다. 그다음에는 의문이었다.

그건 정말로 꿈이었을까?

남자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꿈이었으나 꿈이 아니었다. 꿈이었지만 자신은 꿈속에서 아픔을 느꼈고 배고픔을 느꼈으며, 모든 것이 현실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남자는 의심했다. 그건 정말로 꿈이었을까? 하지만 꿈이 아니라면 그걸 과연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정말 소설처럼 제가 다른 세계라도 다녀왔다는 말인가? 차라리 조금 특이한 꿈이라 칭하는 것이 나았다. 정말로 다른 세계라니. 말도 안 되지.

“말도 안 된다고.”

막 내린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남자는 제가 생각해 놓고도 말이 되지 않아 코웃음을 쳤다.

남자는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꿈속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더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퍽 편했지만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인지 생각보다 아쉽기도 했다. 사실 꿈의 뒷부분이 어중간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남자는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이유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집에 틀어박혔다. 꿈의 여파는 상당했다. 남자는 이따금 환청을 겪었고, 환영을 보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꿈속의 이야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에 있는 이 내용을 어디에든 털어놓고 싶었다.

멍하니 인터넷을 뒤적이던 어느 날,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사이트가 있었다. 아마추어도 원한다면 글을 투고할 수 있는 사이트였다.

남자는 홀리듯 그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머리가 써야 할 내용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고, 하물며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꿈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둔 태블릿이 있었기에 적어 내리는 건 쉬웠다.

남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시끄럽게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끄집어내 어딘가에 털어놓고, 그저 편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손이 가는 대로 자신의 기억을 기록하듯 적었다. 남자는 이따금 내용을 수정하기도 하고 더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토대는 이미 있었고, 스토리도 있었다. 그걸 소설로 구현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명사도 시점도 뒤죽박죽이었고 그렇게 잘 쓴 글도 아니었다. 필력이 좋지도 않았고, 그럭저럭 읽어 줄 만한 글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어딘가 유치하고 어색한 그 소설을 좋아했다. 어쩌면 공짜로 볼 수 있어서였을지도 몰랐지만 점차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에 남자는 조금 신이 난 것도 같았다. 본래의 목적을 잊고 조금 더 잔인한 내용을 적기도 했고, 주인공의 고난을 겪는 일을 늘리기도 했다. 그렇게 그 소설을 끝까지 썼다. 자신이 꾼 마지막 꿈까지 말이다. 완결을 내고 나니 남자는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아, 진작 이럴걸.’ 하고 허탈하게 웃기도 했다.

마지막 화를 올리고 남자는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꿈속에서 남자는 세계를 구했다. 구했지만, 그건 열린 결말이었다. 그러니 소설도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이후의 남겨진 세계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남자는 그 뒤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러니 더는 꾸지 않는 ‘꿈’을 다시 꿀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잠들기를 몇 번, 결국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한 채 깨어나길 반복한 뒤 꿈을 꾸는 것을 포기했다. 하는 수 없지. 자기가 원한다고 원하는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남자는 포기하고 다시 일상을 즐기기로 했다.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렀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갈 때까지 남자는 여전히 어떠한 꿈도 꾸지 않았다.

“일 관두고 뭘 하고 자빠져 있나 했더니 뭐? 소오서얼?”

깔깔 웃으며 테이블을 치는 친구의 모습에 남자가 멋쩍어하며 뒷목을 쓸었다.

“안 어울려! 네가 소설이라니 미치겠다!”

“…니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역시 괜히 말했어.”

“그래서, 기어이 완결까지 내셨다? 그런데 뭐가 문젠데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뒤가 안 떠올라서.”

“굳이 생각할 필요 있나…. 그냥 열린 결말로 둬도 되는 거 아니냐?”

남자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처럼 말했다.

“뭔가 더 있을 거 같으니까 그렇지.”

“꿈은 안 꾼다며.”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꿈을 꾸질 않으니, 뒤가 뭐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안 된다.”

친구가 소란스럽게 ‘쪼르륵’ 소리를 내며 조금 남은 음료를 마저 들이켰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것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니가 쓴 게 현대 판타지라고 했던가? 그럼 뭐 장르라도 바꿔 보든가.”

“뭐?”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남자가 표정을 찡그렸다. 친구가 손뼉을 짝 치고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밝았다.

“발상의 전환이지! 현대 판타지라고 생각해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 아니냐? 거기선 뭐 연애도 안 했다며. 그럼 이번엔 연애물을 첨가해 보든지!”

“갑자기 노선 변경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뭘 굳이 그걸 공개해야 할 이유도 없고…. 네가 뒤가 궁금하다며? 그럼 그냥 연습 삼아 쓰고 너만 보면 되는 거 아니야?”

친구의 말처럼 이걸 굳이 누군가에게 보여 줄 이유는 없었고, 그저 자신은 뒷내용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꿈이라도 꾸면 좋겠지만, 꿈을 꾸지 않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러니 아쉬운 대로 자신이 직접 생각해도 괜찮은 게 아닐까? 남자는 조금 솔깃했다. 장르를 바꿔 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의견 같았다.

친구가 먼저 밖으로 나가고, 남자는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이미 먼저 온 손님들이 있어 남자는 그 뒤에 멀뚱히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다만 앞에 서 있던 여자들은 직원에게 카드를 돌려받은 다음에도 그 앞에 서서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그들은 쳐다보는데 조금 여자가 대뜸 직원을 불렀다.

“저, 저기요!”

“예?”

그 부름에 여태 모니터만 응시하던 직원이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그 단정하게 생긴 인상에 제일 먼저 시선이 갔다. ‘오늘도 여전한 얼굴이네.’ 하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직원이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자, 여자가 수줍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저,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예, 주세요.”

무심하게 눈을 깜빡이던 직원은 짧게 긍정의 대답을 하고 여자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터치하던 직원이 “여기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마저 무심했다.

정말 건조하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직원의 행동을 눈에 담았다. 할 일은 끝났다는 듯 휴대폰을 건네주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휴대폰은 받은 여자는 그 옆에 있던 일행의 팔을 툭툭 치며, 밝게 인사하고서 가게를 나섰다.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직원은 그저 안녕히 가라는 말을 대충 던졌다.

남자는 바로 앞에서 벌어지던 일렬의 과정을 본의 아니게 전부 구경하게 되었다. 거참, 거기다 보기 싫어도 보이는 통에 휴대폰에 찍힌 번호도 봐 버렸다. 어딘가 낯익은 번호였다. 앞자리가 02로 시작하는 것도 그랬고, 곰곰이 생각하던 남자는 무슨 번혼지 떠올리곤 ‘어….’ 하고 속으로 황당해했다.

‘가게 번호 적어 준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서 가 버린 여자들이 원한 건 직원의 연락처 같았는데, 직원이 적어 준 건 이 가게 번호였다. 단골 가게였던지라 간판에 큼지막하게 적힌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가 버린 그녀들도 그렇지만, 실수인가? 아니 이 상황에서 실수로 가게 번호를 준다고? 좀 말이 안 되지 않나? 알고서 그런 거면 진짜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다.

“손님, 계산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 여기.”

어느새 다시 카운터에 달린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직원이 보지도 않고 남자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허둥거리며 카드를 내밀어 그 손에 올려 주었다. 저보다 키가 작아 보이는 머리통이 나름 익숙하다면 익숙했다. 언제나 손님 얼굴은 보지도 않는 직원은 아마 남자의 얼굴도 모를 것이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열린 문틈 사이로 가을바람이 불었다. 덕분에 직원의 앞머리가 조금 흐트러졌다.

‘아, 왼쪽 눈썹 위에 점이 있네.’

“여기요.”

“…예, 수고하세요.”

직원이 카드를 돌려주는 것을 건네받다가 손가락이 스쳤다. 순간 움찔하고 손을 떨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남자가 인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닫히는 문 너머로 직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아! 이수현! 계산 끝났으면 주방 좀 도와라!”

“지금 갈게요.”

그렇게 남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씻고 남자가 한 일은 태블릿의 메모장을 여는 것이었다. 남자는 고민하다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와중에 남자는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렇게 그날 밤, 신기하게도 남자는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남자는 어째서인지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

거대한 창문 너머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남자는 느리게 꿈에서 깨어났다.

멍한 정신 속에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손끝이 어색하게 움찔 떨렸다. 아직도 손에 마주 잡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다시 눈을 감고 몸을 뒤척이자 피부에 닿는 침대 시트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지?’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방을 훑어보는 시선이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분명 훑어보고 있는데도 초점이 나간 것처럼 어째선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왜 내가 여기 있지?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은 ‘그’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째서 내가 침대 위에 있는 거지? 남자는 당황했다.

남자, 그러니까 박민후는 휭하니 비어 있는 제 오른손을 한 번 보고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익숙한 곳이었다. 그야 자신이 이수현을 만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을 잊을 리가 없었다. 다만…. 어딘지 낯설었다. 익숙했으나 이상하게 너무나 낯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때문인가?

박민후는 멍하니 평화로운 도심을 내려왔다. 기묘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박민후는 머뭇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실크로 된 잠옷을 입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내가 왜 이런 걸 입고 있지?’

무엇하나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박민후가 정신없이 넓은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태블릿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누군가 적어 놓은 글이 있었다. 소설인가? 그 글의 첫 대목을 읽는 순간 박민후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의 삶이 그곳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박민후가 겪은 일과 세상을 구한 일과 그 때문에 죽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박민후가 태블릿을 놓치고 휘청거렸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박민후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먹은 것도 없는 속은 위액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한참을 헛구역질했다. 현기증이 일었다. 세수를 하기 위해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하다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분명 ‘박민후’였다.

하지만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박민후는 거울을 더듬다 자신의 옷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미처 풀지 못한 단추가 뜯어져 나가고 옷이 늘어나든 말든 상관도 안 했다. 박민후가 기억하는 온갖 흉터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등에도, 가슴팍에도, 팔에도, 다리에도, 얼굴에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근육도 좀 빠진 것 같았다.

“하….”

헛웃음이 났다. 박민후는 이게 현실인지 그도 아니면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꿈이었다고?”

박민후가 머리를 붙잡았다. 꿈일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꿈일 리가 없었다. 꿈이어서도 안 되었다. 그 모든 게 꿈이라고? 욕실에 걸려 있던 가운을 대충 걸친 채 박민후는 휘청거리며 태블릿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태블릿을 켰다. 액정에 금이 갔지만 작동은 되었다. 박민후는 그 자리에서 그 소설을 읽어 내렸다. 오후의 밝은 빛이 시커멓게 물들고 다시 태양이 다시 뜰 동안. 그렇게 박민후는 그것을 다 읽자마자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다. 소설 아래에 적힌 리플을 읽을 땐 손발이 떨렸다. 지독한 악몽이 따로 없었다.

박민후는 그곳에 적혀 있던 모든 내용을 전부 삭제하기 위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을 터치했다. 모든 내용을 전부 지워 버리는 건 간단했다. 겨우 화면을 몇 번 터치한 것이 다였다. 허무하기 짝이 없어 박민후는 팔 안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시간이 또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멍하니 있던 박민후는 문득 검게 변한 태블릿 액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의 내용은 자신이 병원에서 눈을 뜬 순간까지밖에 없었다. 당연히 박민후가 이수현을 만난 부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이수현은….”

이수현은?

박민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발을 신을 생각도 못 하고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을 못 기다려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는 실크 잠옷 위에 목욕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대낮 길 한복판에서 보기 드문 복장이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저마다 힐끔거리거나 대놓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지금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박민후는 미친 사람처럼 무작정 뛰었다.

이수현이 이곳에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수현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다. 던전도 몬스터도 없는 세계. 박민후는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깨달았다. 그전까지 그가 있던 곳은 어쩌면 지독한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기억하는 주소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도 못 하면서, 그저 무작정 뛰었다.

이상하게도 이수현의 집은 생각보다 그가 있던 곳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 멀리에 낯익은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심장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거세게 뛰었다. 숨이 찰수록 가까워져 갔다. 드디어 코앞에 단지 입구가 보였다. 박민후가 기억하던 모습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아파트 단지에서 누군가 나왔다. 무심한 얼굴로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박민후는 숨을 멈췄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내뱉어졌다.

“아.”

그였다. 이수현이 진짜 이곳에 있다. 자신이 꿈을, 꿈을 꾼 게 아니었다.

“이수현.”

그를 보자마자 무심코 뱉은 말에 걸어가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고개가 느리게 움직였다. 박민후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홀리듯 한 발짝 한 발짝 박민후는 이수현일지도 모를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남자는 박민후가 다가오기도 전,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심장이 쿵 하고 저 아래로 처박혔다. 손이 덜덜 떨렸다.

“저, 저기요!”

멍하니 자신을 등지고 가버리는 남자를 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 박민후가 남자를 부르며 뛰었다.

“잠깐….”

막 아파트 단지 입구를 나서는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잠시만, 제발…. 제발 잠시만…”

놀란 듯이 커진 눈과 마주쳤다. 남자의 손에 들린 가방이 바닥을 뒹굴었다. 숨이 가빴다.

“제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아니, 충분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 압니다. 진짜. 미안해요. 미안. 미안한데. 제가, 제가 지금 차림이 이렇지만 진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잠시만, 요…. 잠깐만…. 가지 말아요.”

이수현을 꼭 닮은 남자의 팔을 잡으며 박민후는 횡설수설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입술을 물어뜯으며 말을 골랐다.

“제가…. 제가 꿈을 꿨는데. 그러니까 그 꿈에서 당신을 봤어요. 완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아는데…. 진짜 말도 안 됐는데. 나랑 만난 적 있습니까…?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박민후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여태 입을 꾹 다물고 박민후를 뚫어져라 보던 남자의 입이 주저하듯 벌어졌다. 그 모습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설마, 진짜 박민후 헌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뱉어진 목소리가 익숙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목소리가 익숙한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자 박민후는 참다못해 기어이 눈물이 터졌다.

“아, 윽. 이수현, 이수현….”

아, 정말 이수현이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 줄 알았잖아요.”

당황한 듯 놀란 얼굴로 이수현이 그렇게 말했다. 이수현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머리가 어떻게 돼서 헛것을 본 건가 했거든요. 그렇잖아. 그쪽이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거였거든.”

그 말을 내뱉은 목소리가 살짝 격양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수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민후의 양 볼을 붙잡았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그의 눈은 더는 샛노란 색이 아니었다. 검은 그의 눈을 보며 이수현이 시선을 맞췄다. 새까만 검은 눈도 참 좋다고 생각했다.

박민후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이수현의 얼굴 위로 ‘톡’ 하고 떨어져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박민후의 눈엔 그게 마치 이수현이 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수현은 마치 정말로 박민후가 이곳에 존재하는 게 맞냐는 듯이 그의 얼굴을 꼼꼼히 관찰하다가 웃음 지었다.

“진짜네, 진짜로 박민후 헌터네요.”

그 모습에 박민후가 이수현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품 안 가득 그를 끌어안자 그제야 박민후도 그가 정말 여기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이수현이 박민후의 품 안에서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뭐 어때. 이수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제 몸을 강하게 끌어안는 박민후를 마주 끌어안고 생각했다. 자신도 다른 세계에 갔다가 이렇게 돌아왔는데 박민후가 제 눈앞에 있는 것도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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