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이 이야기는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 (14/18)

13. 이 이야기는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

이수현은 살면서 죽음이 무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죽음의 의문을 품고,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상상해 본 적은 있어도 죽음이 막상 코앞에 닥쳤을 때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이수현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이 죽는 순간을 상상했었다. 사람이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보는 나이가 아마 일곱 살 때라고 했던가, 그런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었다. 뭐, 너무 옛날에 봤던 것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수현이 자신의 죽음을 상상했던 건 그가 열한 살이 되던 해였다.

딱히 거기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문득 아주 문득 TV를 보고 있을 때였던가, 아니면 책을 보던 중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 시간 속에서 따분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노래 삼아 딴짓을 할 때였을까.

열한 살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사후 세계라는 것은 정말 있는 걸까? 죽고 난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슬퍼할까? 남겨진 가족들은 어떨까. 돈 쓸 일이 줄어들게 되었으니, 잠깐 슬펐다가 잘됐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나 한 번쯤 해 본 그런 생각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린 이수현은 자신이 죽어도 아무도 울어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슬퍼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게 분명했으니까.

이수현은 자신의 가족 중 누군가 죽는다고 해도 자신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이나 생각해 봐도 울고 있는 자신이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필히 자신이 어딘가 이상한 놈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리는 꼴이 될 테니 이 가정은 그저 속으로만 생각했다.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생각은 꼬리를 물고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누군가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접하기는 의외로 쉬웠고, 거기에 자신을 대입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건 언제나 홀로 시간을 보내던 이수현에게 퍽 재미난 취미 중 하나였으니까. 이수현은 자신이 보았던 드라마나 영화를 떠올렸다. 소설과 만화도 떠올렸다. 그 모든 것에서 죽음은 아주 무섭고 괴롭고 슬픈 것이라 말한다.

과연 정말 그럴까? 죽는 건 정말 무서운 걸까?

아직 어렸던 이수현은 그 말이, 그런 감정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린 날의 호기심을 못 이기고 때때로 물속에 몸을 던졌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물속에 몸을 던졌다.

집 근처 수영장을 밥 먹듯이 갔던 기억이 있다. 세수하다가도 세면대에 받아 놓은 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숨을 참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게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하지만, 이수현은 그것이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일까 어릴 때는 물을 좋아했다. 물속에서 숨을 참고 몸을 맡기는 것을 좋아했다. 힘없이 물 위를 유랑하다 숨을 참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감각이 좋았다. 물속에서 눈을 뜨면 보이는 반짝거리는 수면을 좋아했고,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물소리를 좋아했고, 그리고 물의 중력에 따라 가라앉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마침내 수영장 밑바닥에 가라앉을 때면 이수현은 그때마다 이상한 고양감을 느꼈다. 이렇게 이대로 물속에 가라앉아 질식해 죽어도 괜찮을 거 같다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뭐, 실제로 그렇게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이수현은 그 뒤로도 여러 상황을 생각했다. 자신이 물에 빠져 죽는 상황, 계단을 내려가다 굴러 떨어져서 죽는 상황, 길을 걷다가 위에서 간판이 떨어져 죽는 상황,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이는 상황 등등.

아마 그때가 딱 어린 이수현에게 사고가 일어난 해였다. 집에 가던 중 갑자기 뒤에서 오던 차가 이수현을 치고 가 버렸다.

잊은 줄 알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지금에 와서야 불쑥 떠올랐다.

그 이후로 이수현은 죽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만약 사고를 당해서 자신이 죽는 게 아니라 다친 걸로 끝난다면 그 뒤가 매우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후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하도 호들갑을 떨었고, 이수현의 부모는 주변을 살피고 다니지 않은 이수현을 탓했다. 제대로 보고 다니라며 한 소리 듣기도 했던 터라 이수현은 하는 수없이 그 뒤로 길을 걸을 때 주변을 살피며 다녔다. 아마 주위를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도 그때 그 일 때문에 생긴 거겠지.

그 시절부터 이수현은 사람이 생각보다 더 간단하게 죽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자신은 아차 하는 순간 죽었을 것이다. 운이 좋아 살았을 뿐이다. 그걸 경험하자 그날의 사고가 이수현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뒤로 이수현은 미래를 생각하기보단 현재를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 내일을 기다리기엔 오늘 당장 집에 가다 차에 치여 죽을지도 모르는 게 인생 아니던가.

어쨌든 오늘날에 이수현은 여전히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무섭지 않았지만….

***

“아윽, 갑자기 뭐야…?”

넘어지면서 바닥에 쓸린 피부가 붉게 변하고 까졌다. 그것이 아파 짧게 앓는 소리를 내던 이수현은 그 직후 울려 퍼지는 굉음에 눈을 번쩍 떴다. 훅, 거칠게 모래와 건물의 잔해 같은 것이 튀었다.

투둑, 툭.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해 보려고 몸을 일으킨 이수현은 대체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시야를 뿌옇게 가리며 나부끼던 모래 먼지가 조금씩 걷히자 보인 광경에 그만 두 눈을 의심했다. 이수현은 제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헛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모든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박민후의 옆구리 부근이 찢겨 나간 것처럼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쓸데없는 짓을…!”

박민후가 얼굴을 구기며 조금 전 자신의 옆구리를 찢어 놓은 놈을 쳐다보았다. ‘끼긱’ 돌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사방에 뿌옇게 낀 모래 먼지가 걷히면서 보인 것은 낡고 오래된 조각상이었다. 낡아 빠진 조각상이 ‘뚝뚝’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올리자 벽에 처박혀 있던 백색의 창이 덜컥덜컥 소리를 내면서 스스로 움직였다. 피 묻은 창이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주인의 곁으로 날아갔다.

[어리석긴.]

조각상이 자신의 곁으로 날아온 창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휙, 한 바퀴 돌리며 창 끝에 묻어 있던 피를 털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양새가 아까 까치가 들고 있던 창과 유사했다. 박민후가 “퉤.” 하고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알 만했다. 어쩐지 자신이 그리 공격하는데도 나름 잘 버틴다 싶었다. 그 꼴을 보며 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정말이지 왜 안 하던 짓을 해 가지곤…. 뭐 상관없나.]

“적당히 하지?”

박민후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요동쳤다. 박민후가 그런 그림자를 움켜쥐자 그의 손에도 조각상이 든 창과 유사한 검은 창이 들렸다.

[원래는 예정대로 저 이방인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아쉽지만, 생각해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하구나. 치명상을 입으면 아무리 너라고 해도 한동안은 얌전히 있겠지.]

새가 명안이라도 된다는 듯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조각상이 빠르게 움직였다.

쾅!

박민후가 서 있던 자리에 창이 내리꽂혔다. 한 박자 느리게 지반이 폭삭 무너졌다. 덜그럭거리며 조각상이 고개를 돌려 도망친 박민후를 찾았다.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니? 그러다 상처가 더 벌어질지도 모른단다.]

“좀, 닥치라고!!”

어느새 뒤로 훌쩍 피한 박민후가 오른손으로 창을 움켜쥔 채 몸을 뒤로 젖혔다. 바닥을 디딘 두 다리에 힘을 주자 지면이 움푹 파였다. 창을 든 오른손에 핏줄이 불끈 도드라지고, 그 상태로 창을 쏘듯이 조각상을 향해 집어 던졌다.

파각!

정확하게 조각상의 머리를 부서뜨리고 날아간 검은 창이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검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방금 그 동작으로 옆구리의 상처가 크게 벌어졌다는 게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머리가 날아간 조각상은 더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몇 번 덜컹거리다 그대로 그 자리에 멈췄다. 그걸 보며 박민후가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

박민후가 피를 토하며 제 옆구리의 난 상처를 확인했다. 아직도 ‘파직파직’ 소리를 내며, 서로 다른 빛깔의 전류가 튀고 있었다. 저놈의 새대가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못하고 ‘치지직’ 소리와 함께 타들어 갔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극심한 고통의 절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하마터면 꼴사납게 무릎이 꺾일 뻔했다. 다시 한 번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핏덩이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뱉던 박민후가 흔들거리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이수현의 놀란 얼굴과 마주쳤다.

“아.”

박민후는 그 얼굴을 보고 이 와중에도 오늘은 좀 평소랑 다르게 다양한 얼굴을 보는 거 같단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이런 상처는 보기만 요란하지, 별로 문제 될 건 없다고 말해 줘야 했는데 자꾸만 식도를 타고 피가 차올라 컥컥거리며 피를 뱉어내느라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수현은 이렇게 종종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 착각한다. 그러니 박민후조차 그의 곁에만 있으면 자신도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 착각해 버리고 싶었다. 이런 상처쯤이야 지금까지 몇 번이고 겪어 봤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목이 잘린 적도 있었지. 심장이 짓뭉개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박민후는 여태 살아 있었다. 계속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 세상이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박민후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살아남았다.

“잠깐, 잠깐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수현이 뭐라 말을 했다. 어째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뭉개져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답지 않게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야 했다. 정말로 이수현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래 봤자 자신은 또다시 살아날 테고, 이깟 상처는 그동안 겪은 다른 것에 비하면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괜찮아.”

박민후에겐 제 몸의 상처보다 눈앞에 이수현이 더 중요했다. 방심했다. 조금 전 이수현의 등 뒤에서 빠르게 날아드는 공격에 그를 다짜고짜 옆으로 밀쳤다. 뒤늦게 생각보다 강하게 그를 밀쳤기에 그 과정에서 그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쩌지?’ 하는 생각이 박민후의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한 발 내딛는데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방심하다 생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새삼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다. 박민후가 볼 땐 겉모습만 요란할 뿐이었다. 평소보다 상처가 조금 느리게 치료되고 있을 뿐이었지, 치료가 안 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박민후가 이수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박민후 헌터, 잠깐. 움직이지 마요. 피가….”

뜯겨 나간 허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쏟아졌다. 그 안에 든 장기들은 자신의 패시브 스킬인 [순간 재생] 덕분에 순식간에 세포가 다시 자라나 그럭저럭 붙어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게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걸으면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치유 스킬을 발동시켰으나 소용없었다. 신의 농간인지 상반되는 속성이 몸을 파고들어서 이러는 건지, 스킬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뜨끈한 피가 계속 쏟아졌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러다 안에 든 것까지 옆으로 쏟아질까 봐 박민후가 겉옷을 벗어 돌돌 말더니 그걸로 대충 뜯긴 자리를 틀어막았다. 박민후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쯤 되니 계속 쏟아지는 피는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제대로 치료할 때 번거롭겠지만, 차라리 불로 지져 버리면 임시방편은 될 테니 그 방법을 쓸까? 엘릭서라도 마시긴 해야 했다. 아, 좆같네. 평소보다 치료가 더딘 것이 이제야 조금 신경 쓰였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수현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박민후를 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박민후의 다리가 기어코 꺾였기에 놀라 서둘러 무너지는 그를 붙들었다.

“괜찮아요?”

“지금, 쿨럭…! 하, 내가 문제야?”

“예?”

이수현은 이 와중에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 인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지금 박민후 그가 문제가 아니면 대체 이 상황에 어떤 게 문제란 소린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이수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뒤이어 숨을 헐떡이며 박민후가 내뱉은 말에 이수현은 기어이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너는. 어디, 하아. 다친 덴, 없고…?”

***

이수현은 그 말에 한숨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제정신인가 싶었다. 박민후가 바로 코앞에 있으니 여태 맡아지지 않았던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새삼 속이 메스꺼웠다.

이수현은 피가 배어 나오는 박민후의 옆구리를 보던 시선을 올려 그를 보았다. 조금 창백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입가는 피범벅이었다. 박민후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 때마다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피 때문에 그가 연신 컥컥거렸다. 흔들리는 몸이 돌처럼 무거웠다. 어디를 보나 여기서 걱정받을 사람은 이수현 자신이 아니건만, 눈앞의 샛노란 눈은 자신을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이수현은 그게 참 싫었다.

“…무슨 멍청한 소릴 하는 거야!”

그러니 이수현은 저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박민후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이수현은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박민후가 쿨럭 또다시 피를 토하며 소리 내 웃었다.

“하하! 윽, 괜찮아….”

“지금 웃음이 나와?”

이수현이 제아무리 타인에게 무심한 인간이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완벽한 타인’에 한해서였다. 하지만 박민후는 일면식이 없는 완전한 타인이 아니었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며, 그의 사소한 버릇까지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와 같이 살기도 했다. 그러니 그런 그를 어떻게 ‘완전한 타인’이라는 울타리에 가둘 수 있겠는가. 그 울타리는 이미 부서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이수현은 이제 막 박민후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깨닫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그 대상이 피를 토하고 있다. 자신 때문에 옆구리가 뜯겨 나간 와중에 머저리처럼, 이수현을 걱정하며 본인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수현은 감정 없는 인형 같은 게 아니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둔하고 무심하며 대체로 모든 것에 무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감정이 없단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수현은 지금 눈앞의 박민후가 걱정되었다. 그의 상처를 보니 제가 다 아픈 것 같았고, 다치지도 않은 옆구리가 괜히 욱신거렸다. 이수현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알지도 못하고, 박민후는 바보같이 괜찮다며 웃었다.

“하하. 윽, 괜찮아…. 이런 걸로 안 죽어.”

박민후가 이수현의 어깨 위에 얼굴을 기댔다. 무게감이 쏠려 이수현이 휘청거렸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박민후가 연신 괜찮다고 속삭였다. 간헐적으로 그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더운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가 기대고 있는 어깨가 그가 내뱉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뭐가 괜찮아.”

이수현은 신경질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집어삼켰다. 당장에라도 그를 흔들면서 뭐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구는 게 정말 저답지 않은 일인 것을 알지만 그만큼 참기 힘들었다. 하나도 안 괜찮다고, 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지금 이 상황? 정말 이게 괜찮다고? 옆구리가 뜯어져서 피나 흘리는 주제에 아까부터 뭐가 괜찮다고 그러는 건지 이수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 걱정을 해도 모자를 이 상황에, 그런 꼴로 왜 자신을 걱정하냔 말이다. 지금 걱정해야 할 대상이 누군데 옆구리를 다친 게 아니라 머리를 다친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자신은 멀쩡했다. 겨우 이런 쓸린 상처? 이거야말로 별것도 아닌 상처였다.

“젠장.”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수현은 입 밖으로 넘치려는 말을 집어삼키기 바빴고, 이러다 험한 말이 나올 거 같아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래, 자신이 좀 전에 내뱉던 말이 좀 사망 플래그 같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돼 버리는 것은 너무하지 않는가. 아, 그래. 그러네! 원래 이런 건 한창 싸우는 곳에서는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제가 미처 몰랐네. 마음만 앞서서 그만…. 아, 입을 열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생각하기엔 참으로 현실 도피 같은 생각이었고 멍청한 생각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딴 생각이 들었다.

이수현은 겉으로 한없이 무심하게 굴었지만, 사실 당황하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곤 했다. 제대로 사고하려고 노력해도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 내던져지면 그의 이성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 버리기 일쑤였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듯이 바보 같은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내심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쿨럭, 하. 왜 그래…?”

“…….”

이수현의 모습이 이상했던지 박민후가 그의 어깨에서 얼굴을 들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껏 일그러진 얼굴이 생소했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계속 묵묵부답인 이수현을 보며 슬쩍 손을 들어 올려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에 이수현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털었다. 그제야 박민후를 다시 쳐다본 이수현의 얼굴이 그나마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조금 뚱해 보였지만 말이다. 그걸 보며 박민후는 계속 웃음이 난다는 게 참 이상했다.

“뭐가 웃겨서 웃어?”

“왜 인상을, 쓰고 그래…. 쿨럭, 컥…! 아, 제길. 뭔 말 좀 하려니까….”

박민후는 목구멍을 타고 또다시 울컥 올라오는 것을 삼키며 숨을 가다듬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조금 숨이 가빠졌다. 물론 아까보다는 나아졌다. 아니, 어쩌면 고통에 익숙해진 걸지도 몰랐다. 상처는 여전히 치료됨과 동시에 또다시 터지고 망가지고 있었으니까. 옆구리에서 새하얀 번개가 번쩍였다. 그때마다 그 빛이 재생되고 있던 세포를 터트리고 태워 버렸다. 죽어 버린 피부가 옷에 눌어붙었다. 멈췄나 싶었던 피가 또 흘러내렸다.

“…이런 거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나 박민후야.”

믿고 있던 스킬은 먹통이고, 하물며 인벤토리조차 열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괜찮겠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쯤 어쩌면 하고 생각한다. 게다가 지금 죽는다면 살고자 수없이 발버둥 친 그가 마지막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죽는 것이 된다. 그건 퍽 괜찮은 죽음이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머리가 부러진 조각상 위에 내려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새에게 눈길이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제 만족하냐고, 이 꼴이 마음에 드냐고 비아냥거리고 싶었다. 자신이 이깟 걸로 죽지 않음을 잘 알기에 벌인 짓이 분명했다. 어디 고생이나 좀 해 보라는 개 같은 심보였겠지. 박민후가 눈을 감고 이수현의 품에 몸을 기댔다. 어리광이라도 피우고 싶었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척 그가 받아 주지 않을까.

모든 스킬이 그렇겠지만 [순간 재생]은 만능이 아니었다. 스킬이 발동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세포와 피가 재생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인 기력과 성분,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러니 반복되는 과정에서 몸은 자연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치료하는 과정에서 포션을 마셔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이수현의 품에서 그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듣는 것만이 지금 박민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수현….”

박민후가 제아무리 고통에 무뎌졌다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솔직히 이 상황은 좀 짜증 났고, 다친 상처는 치료되다 말고 다시 터지기를 반복하니 무척 아팠으며, 그게 계속되니 정신을 놔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심연이 저를 부른다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몸을 내던질 정도로.

“너, 지금 괜한, 하아…. 걱정하는 거다? 윽, 그래. 그, 너 잘하는 거 있잖아.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 진짜 괜찮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오랜만에 마주한 이수현이 어딘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계속 자신이 모르던 그의 모습을 이렇게 볼 때마다 박민후는 이게 단순히 제 기분에 의한 착각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수현이 정말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가 저를 걱정해서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거였으면 좋겠다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한 채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요.”

그 순간 이수현이 눈을 감고 박민후의 이마에 제 이마를 살짝 붙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민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리감은 눈이 느리게 떠지며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박민후를 직시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였다.

“…나답지 않은 거. 아는데, 나도 아는데… 그런데.”

하지만 이수현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도 그렇지만, 이방인이여 너도 좀 변했구나. 저번에 봤을 땐 이런 일에 신경도 쓰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만…. 재밌네, 재밌구나.]

그때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새가 비웃듯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이수현이 맞대고 있던 이마를 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각상 위에서 새가 포르르 날아와 두 사람의 곁에 내려와 앉았다.

[상반되는 힘이 몸 안에서 충돌하고 있으니 꽤 고통스러울 거란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뻔뻔하네요.”

“쿨럭, 내 말이….”

지금 약 올리는 건가? 이수현도 박민후도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새가 종종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단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나를 믿지 않으면 당장 다른 뾰족한 수라도 있니?]

새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 되물었다.

“하, 저 말. 믿지 마….”

박민후가 그렇게 말하며, 이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것만큼 작아졌다. 힘없는 손으로 이수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머리로는 박민후의 말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 말을 믿진 않아요.”

하지만 이수현에게 다른 수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박민후가 힘없이 늘어져 있지만 않았어도 그와 함께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보았겠지만. 샛노란 눈은 눈꺼풀에 가려진 지 오래였고, 이제 말을 내뱉기도 힘들다는 듯 그의 몸이 축 처졌다. 그 모습에 이수현은 박민후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겨우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글쎄, 과연 어떠할까? 이방인이여,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나. 당장 숨이 넘어간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을 하고선 신용이 떨어지는 말을 내뱉는다 생각하지 않니?]

고민하는 이수현을 보며, 새가 다정한 어투로 그렇게 속닥거렸다. 이수현은 자신의 귀에 직접 속삭이는 것만 같은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죠?”

[간단하단다. 이방인이여, 그 반지를 가져와라.]

“아, 반지.”

그래, 그 수가 있었다. 바보같이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 나름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 반지는 박민후가 준비한 물건이었다. 새의 말보다는 믿음직했다.

이수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반지를 찾으면 솔직히 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박민후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스킬 명만 말하면 발동하는 반지라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수현의 생각을 짐작하기라도 한 건지 새가 비웃음을 담아 조잘거렸다.

[무얼 꾸물거리는 거니? 혹 내 도움 없이도 스킬이 발동될 거라 생각하느냐? 그럴 리가! 그 스킬을 인간들에게 준 자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지? 바로 나다! 내가 그들에게 힘을 내려 주었다! 비록 이 몸이 가지고 있던 힘을 거의 다 소모했다지만 고작 스킬 하나, 그것도 복사된 스킬 하나 내 맘대로 못 다룰까!]

이수현이 평소와 같이 이성적인 생태였다면 지금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다만 눈앞에 쓰러진 박민후 때문에 이수현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니 새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그가 죽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살리고 싶으면 어서 반지를 찾아오거라.]

“금방 올게요.”

이수현은 조심스럽게 박민후를 바닥에 눕혀 놓고 몸을 일으켰다.

새의 말처럼 반지를 찾아오면 된다. 반지만 찾으면…. 주변을 둘러보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그 자그마한 반지는 어디로 간 건지 도통 보이질 않았다. 빨리 찾아야 했건만 온 사방에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가득했다. 그것과 더불어 땅 위에 가득 자라난 풀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단 쉽겠지만, 그거나 그거나였다. 그냥 그때 받자마자 재빨리 손가락에 끼웠어야 했는데, 괜히 만지작거려서 이렇게….

[역시 손이 많이 가는구나.]

유난히 그 말이 귀에 틀어박혔다. 다음 순간 새가 날갯짓을 한 번 하자, 건물 잔해들이 어지럽게 깔려 있던 바닥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을 이정표 삼아 이수현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위에 두꺼운 돌덩이를 몇 개 치우자, 그 아래에서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수현이 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언제부터 떨리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야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몇 번 헛손질하며 반지를 겨우 집었다. 바닥을 헤집느라 손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반지를 줍자마자 이수현은 다시 박민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모든 것이 분명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이 아주 느리고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이러지 않아도 그는 죽지 않겠지. 박민후의 말을 믿는다. 이런 걱정도 언제나처럼 괜한 걱정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박민후가 그 모양 그 꼴로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 봤자 설득력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라, 다 죽어 가는 사람이 ‘나 괜찮아!’ 하고 말하는 걸 누가 과연 곧이곧대로 믿을까.

새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순간, 자신은 실수한 것일지도 몰랐다.

“…당신의 말을 믿지만, 그래도요.”

이수현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손보다 한 마디 이상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니 새끼손가락에도 꽉 끼듯 맞았다. 이수현이 스킬을 발동시키기 위해 입을 열다 말고 멈칫했다.

아, 스킬 이름이 뭐였더라.

잊지 말자 다짐하며 기억하긴 했지만, 스킬에 대한 설명은 딱 한 번 들었다.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머릿속이 엉망이 된 이수현이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원하는 내용을 떠올리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을 잊은 적은 없었으니까. 그때를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고 곱씹어 보고 몇 날 며칠을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이수현은 진정하기 위해 한숨을 내쉬며, 박민후가 자신에게 스킬 명을 말해주던 때를 떠올렸다.

그들의 등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자신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고, 그의 눈을 살포시 접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샛노란 눈이 노을빛에 반짝거렸다. 내리깐 눈을 슬쩍 들어 올리며 이수현을 보던 박민후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억은 아주 천천히 재생되었다. 그의 입술 모양을 따라 이수현이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피. 에….

“[피에타]”

그 순간 반지에서부터 기이한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팍!’ 소리와 함께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푸드덕,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일어난 후였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고,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빛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윽!”

그 눈 부신 빛에 이수현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 너머로 빛이 스며들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만약이란 것이 있다. 사실 새가 이수현을 속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이수현은 힘겹게 눈을 떴다.

박민후는 괜찮은 걸까?

힘겹게 뜬 눈앞에 보인 것은 두 사람의 주변을 잠식한 광활한 빛이었다. 그건 무척이나 신비로웠고 또한 성스러웠다. 반짝이는 별빛 같기도 했고, 오후의 햇살 같기도 한 빛을 내리받은 박민후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안쪽에서부터 뜯겨 나간 부위에 세포들이 빠르게 자라났고, 거기에 근육이 붙으면서 그 자리에 매끈한 새살이 자리 잡는 게 이수현의 눈에 보였다.

핏기 없는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고, 끊어질 듯 괴롭게 쉬던 숨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해 간다.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수현은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인간이란 생각보다 보이는 것에 방심하기 일쑤란다.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내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곤 하지, 그건 그도 마찬가지란다.]

“예?”

하지만 조용히 한숨 쉬던 이수현을 비웃듯 다음 순간, 눈을 아프게 하던 빛무리를 박민후의 몸에서부터 피어 나온 검은 빛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던 빛들이 어둠에 집어삼켜져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꾸물꾸물 꿀렁거리던 검은 빛이 주변을 맴돌다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너는 그 안에 든 것이 사실은 세상을 멸망시키고도 남을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의 겉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좋아하고, 피를 흘리고 쓰러지자 걱정하는구나. 만약 그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꼭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그런 반응이 여태 박민후가 인간이길 고집하는 이유기도 하지.]

급격히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땅에서부터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소리였다. 이수현이 소리의 출처를 향해 시선을 돌리던 그때 박민후를 붙든 손에서 정전기 같은 따끔거림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느낌에 이수현이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붙잡은 손을 놓고 말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어쩌면 몇 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박민후가 느리게 눈을 떴다. 다만 그의 눈빛이 초점을 잃은 듯 멍했다.

“…….”

“…괜찮아요?”

이수현이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박민후를 불렀다. 얼굴 위로 손을 휘휘 내젓기도 했다. 그 움직임에 여태 멍하니 허공을 보던 박민후가 눈동자만 굴려 이수현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거 같단 생각이 들었을 때 어느새 스멀스멀 바닥을 기어 다니기 시작한 박민후의 그림자가 크게 일렁였다.

아, 이건 익숙한 풍경이다.

그 짐승의 아가리와도 같은 그의 그림자를 보며 이수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어 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그림자가 단숨에 두 사람을 집어삼키더니 그대로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쩌적, 쩍, 쩌쩍.

계속해서 귓가를 맴도는 소음에 까치는 희미하게 정신을 차렸다. 대지가 진동하는 움직임과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 자신의 피부를 툭툭 때리며 굴러떨어지는 무언가를 느끼며, 힘겹게 눈을 떴다.

“헉! 허억…!”

하지만 까치는 눈만 겨우 떴을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쁜 숨을 토해낼 때마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다리가 존재했을 자리에 더는 다리가 없었고 그의 양팔은 기이하게 꺾여 뭉개졌다. 갈비뼈 또한 부러져 겉과 속이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까치는 자신의 몸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치유 스킬을 모두 때려 부어도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피에타]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그 스킬의 주인은 까치가 아닌 하현이었고, 하물며 애초에 그의 수명은 이미 5년 전에 다른 곳에 사용했다. [피에타]를 쓸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에겐 발동조건인 수명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 선택지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쩍, 쩌적, 쩍…!

힘겹게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던전의 ‘하늘’이었다. 쩌적, 금이 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텅 빈 하늘에 금이 가고, 기어이 깨져 유리 파편처럼 조각나 떨어지는 모습은 기괴했다. 조각나 떨어진 자리 너머로 지독한 어둠이 보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 어둠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까치는 이러한 광경을 아주 예전에 단 한 번 본 적 있었다. 까치가 박민후를 더는 그와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결론지었을 때 보았던 광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던전이 클리어된다는 것은 던전이 리셋된다는 뜻이지, 던전 자체가 소멸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형태는 던전이 거대한 힘을 견디지 못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경우다. 즉 비정상적으로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의미기도 했고, 그로 인해 인과가 뭉개져 이 세계가 더는 제구실을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직 살아 있었나?]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비하고 아름다우며, 온 세상의 자애로움을 한데 모은 듯한 저희의 신. 신의 목소리였다. 까치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가 들려오던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움직이는 남은 한쪽 팔로 바닥을 짚으며, 바닥을 기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시야를 막는 건물 잔해를 벗어난 까치가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새가 이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시, 신이시여!”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애원하듯 신을 부르짖으며 까치가 기괴하게 꺾이고 시커멓게 죽어 가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이 닿는 일은 없었다. 까치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울컥 쏟아지는 피를 연신 토해내면서도 다시 힘겹게 바닥을 기었다.

“커헉! 헉…! 저, 저희는! 제 역할을, 다, 했나요…?”

[아아, 그래. 아주 잘해 주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까치가 울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도 감사한지 감사하다고 빌기도 했다. 까치가 다시 한 번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헉, 헉. 그, 그럼 약속대로, 저, 저희에게도. 평화가 오는 거겠죠?”

덜덜 떨리는 손이 눈 부신 빛을 등진 새를 향해 뻗어졌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구원을 바라며 손을 뻗었다. 눈이 부셨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신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어, 우리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흠, 아쉽게도 아무래도 그건 무리인 듯싶구나.]

하지만 까치에 그런 바람은 뒤이어 들려온 대답에 처참히 짓밟혔다.

“그게, 무슨…. 약속,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약속이라…. 내가 그런 약속을 하였던가? 이런, 너희들이 나의 말을 곡해한 것 같구나.]

“이방인을, 헉, 허억! 이방인을 데리고 오면 그땐, 그땐…!!”

풋. 하고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까치는 착각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그럼 저흰, 대체 무얼 위해…?”

간신히 버티고 있던 팔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힘겹게 지탱하던 팔이 기어코 꺾이면서 까치의 몸이 털썩 무너졌다.

[우습구나.]

시야가 깜빡거렸다. 죽음이 코앞이었다.

[정말로 우스워.]

잔인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여전히 다정스레 속삭이는 말이 그렇게 가슴에 사무친다.

[나는 그저 세상이 다시 멸망할 때 영웅이 나타난다면 바뀔지도 모른다, 그리 이야기했을 뿐이다. 너희들이 멋대로 곡해해서 벌인 일이지.]

“신이, 시여…!”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만큼 뚜렷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너희는 그런 역할이었다. 영웅을 정해진 흐름대로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악역이었을 뿐이지. 다만 아쉽게도 일이 틀어져 버려 너희는 이제 쓸모없단다. 하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잖니?]

하늘이 어둠에 휩싸이자 다음으로 땅이 일그러지고 지반이 마구잡이로 뒤틀렸다. 쩌적 벌어지는 땅속 깊은 곳의 무저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헤어질 시간이구나.]

푸드덕 날아오르는 날갯짓 소리가 사라지자 더 이상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

휘이잉…!

살짝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박민후의 그림자가 입을 벌리는 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빛이라고는 하늘에 떠 있는 달빛과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가로등이 다였다.

이수현과 박민후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골목길에 주저앉아 있었다. 박민후는 다시 정신을 잃은 것인지 눈을 감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분명 나아졌지만 여전히 평소보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이수현은 그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대 보았다. 다행히 규칙적인 숨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죽지는 않았구나. 물론 그가 그렇게 쉽게 죽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만일이란 가정을 버릴 순 없었다. 게다가 좀 전의 그 멍한 눈빛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한참 그의 얼굴을 보다가, 박민후를 바닥에 눕혀 놓고 이수현은 몸을 일으켰다. 던전에서 나오니 온몸이 여기저기 결렸다. 근육이 뭉친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고, 근육이 땅겨 쥐가 나는 기분에 스트레칭을 했다. 절로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피곤했다. 눈이 뻑뻑해지는 기분이 들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이수현은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세상은 지독한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집들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이 사는 곳인 것 같긴 했지만, 정말이지 쥐 죽은 듯 조용한 곳이었다.

탁, 탁. 탁, 탁.

그러니 가로등이 깜빡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여기가 대체 어딘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이수현은 잠들어 있는 박민후를 보며 고민했다. 그를 깨운다고 해도 바로 일어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곳에 그를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부축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하는 수없이 그를 업기로 했다. 업을 수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이수현은 그의 팔을 먼저 목에 걸쳐 놓고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붙잡은 채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으아…”

단번에 알겠다. 무리다. 이건 아니야. 절로 도리질 쳐지는 무게에 그냥 손을 놔 버리고 싶었다. 이대로 몸을 일으키면 허리 부러지는 거 아냐? 이를 악물고 좀 더 힘을 주어 한 번에 몸을 일으켰다. 순간 무게가 앞으로 쏠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여기서 넘어졌다가는 얼굴이 박살이 나든가, 발목이 돌아가든가 하여간 사고가 날 게 분명했다. 이수현이 힘겹게 비틀거리며 다시 중심을 잡았다.

박민후와 덩치 차이가 심하다 보니 그저 그를 업는 것뿐인데도 그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는 너무 무거웠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이수현이 비척비척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디디며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고작 몇 걸음 걷는 것뿐인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의 무게는 역시 이수현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뭐지, 뭐가 이리 무겁지? 자신과 키 차이만 조금 나는 것이 아니었나? 그의 근육들을 생각했다. 그럼 이게 전부 근육 무게인가? 미치겠다. 의식 없는 사람은 무겁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아, 무거워!

“…버리고 가고 싶다.”

진심이었다. 이수현은 정말 그를 여기 버리고 가고 싶었다.

이수현은 조금 더 힘겹게 걸음을 옮기다 기어코 멈춰 섰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하는 수 없이 박민후를 한쪽 벽에 기대어 앉혀 두고 몸을 일으켰다.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체력이 약했던가? 그동안 좀 안 움직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아, 죽겠다.”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이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밤바람이 시원했다.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혔다. 그나저나 이상한 게 하나둘 발견되었다. 먼저 날씨가 생각보다 따뜻하다. 막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터라 이렇게 얇게 입고 거리를 걷기엔 지나치게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가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뭐가 뭔지.”

소매로 이마의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내며 이수현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통통, 주먹 쥔 손으로 허리를 두들겼다. 박민후를 한 번 돌아보고서 이수현은 앞으로 걸었다. 길을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싶었다. 큰길이라든지 지나가는 사람이라든지….

처음 와 보는 거리를 걸으니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인기척도 없었다. 풀벌레 소리도 하물며 지나다니는 길고양이조차 없었다. 거기다 보이는 집마다 모든 불이 꺼져 있었고, 앞으로 걸어갈수록 무너져 내린 집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재개발 지역이 아닌 이상 이렇게 무너져 내린 집들이 연이어 보이긴 어려웠다.

바람이 골목길을 배회하는 소리가 사람의 비명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되게 사람 비명 같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고장 난 건지 켜지질 않았다. 머리 위에 떠 있는 달도 그렇고, 지금이 한밤중이란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발치에서부터 스멀스멀 위화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수현은 걷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자 뻥 뚫린 4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 위에는 당연하게도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사람에게 버려진 차들이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도로 곳곳에 무언가가 강하게 밟고 지나간 흔적도 여럿 있었다. 드문드문 핏자국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없는 고요한 도심을 마주하는 것은 매우 섬뜩했다.

어째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걸까. 드문드문 한때 사람이 살았었다는 흔적만이 이따금 보일 뿐이었다. 여전히 이곳이 대체 어디인지조차 짐작 가질 않았다. 집들의 생김새와 건물에 달린 간판, 보이는 풍경을 보면 이곳이 한국이긴 한데…. 하지만 이곳이 서울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조금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돌아가야겠지?”

큰길로 나가게 되면 택시를 잡아탈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이곳에서 택시를 타긴 그른 것 같았다. 일단 아무리 둘러봐도 개미하나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마치 무언가를 피해 사람들이 도망친 것처럼 보이는 흔적들을 보며 이수현은 이곳에서 사람을 찾는 건 포기해야겠다고 결론지었다.

이수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뒤돌아 왔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갈림길에서 잘못 가, 다시 돌아가기를 몇 번 하면서 필히 박민후가 옆에 있었다면 또 길을 잃었냐고 비웃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즐거워져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샜다.

***

툭. 투둑. 툭.

처마에 난 구멍 사이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뺨을 때렸다. 그 차가운 감촉에 이수현이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하늘은 어두웠다. 이것이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잠든 지 아직 한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 이수현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물론 시계를 찾으려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하암.”

절로 하품이 나왔다. 충분히 쉬지 못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아, 이수현은 왜 자신이 여기서 박민후와 처량하게 이러고 있는 건지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러고 있는 거람.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그를 보다가 정신을 차릴 겸 양손으로 제 뺨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아파라….”

조금은 잠이 깼다. 아려오는 볼을 살살 문지르고 있자니, 잠들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 조금씩 떠올렸다.

박민후를 둘러업고 길을 찾아 헤매다 기어코 포기해 버렸지. 혼자서라도 이곳이 어딘지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이 주변엔 사람은 물론이고 길고양이조차 자취를 감춘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텅 빈 골목을 배회하는 바람이 사람의 울음소리 같아 조금 섬뜩했고.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다시 박민후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피로가 몰려와 깜빡 잠이 들었다.

“사람들이 없는 이유는 아마도 던전 브레이크 때문인가?”

그 많은 사람이 단체로 대피할 만한 일이라면, 재난 상황밖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이곳에 있었을 몬스터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제는 피곤해서 놓친 부분이었지만 지금 와서 그 부분이 조금 의문이었다.

다만 이수현이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 이곳에는 이수현과 박민후뿐이라는 사실이다. 몬스터가 남아 있었다면, 저희 두 사람이 이렇게 무사히 잠이나 자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쏴아아아….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갈수록 거세지고, 그런 빗줄기로 인해 시야 가득 물안개가 자욱했다. 이수현은 등을 편히 기대고 멍하니,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보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철문이 차가웠고, 돌바닥 때문에 엉덩이도 시렸다. 하물며 잠을 설친 머리가 지끈거려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두통 때문에 다시 잠들기도 힘들었다.

툭툭, 바닥을 때리던 비가 사방으로 튀기며 이수현의 신발과 바짓단을 적셨다. 다행히 두 사람이 어제 잠든 곳은 머리 위로 처마가 드리워져 있는 곳이었기에 비는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오래가진 못할 것 같았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또 답이 없었으니까.

“피곤해….”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는 박민후의 머리에 툭 머리를 기댔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이제야 도는 것 같았다. 여전히 고요한 세상에는 빗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아.’

이수현은 이건 또 무슨 감성적인 생각인가 싶어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비 오는 날에는 조금 감성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짧게 웃어넘겼다.

이수현은 지금 이 상황이 예전에 그와 봤던 영화와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 그리고 그날은 이수현이 박민후가 제게 품은 감정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그 표정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쉽네.”

지금은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떠오르지만 또 모를 일이다. 기억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시간이 흐르면 흐려지고 곡해될 테니까 이수현은 그 표정을 사진으로 남겨 뒀으면 좋았을 걸 하며 아쉬워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왜 그렇게 사진에 집착했나 싶었는데 이런 이유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 그 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이수현은 사랑을 하고 싶었다.

왜 많고 많은 감정 중에 굳이 사랑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당연한 거라고 이수현은 말할 테다. 그가 살아오면서 보아 온 감정 중에서 사랑만큼 복잡하고 또 강렬한 감정은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은 강렬함의 결정체였다. 다른 어떠한 감정보다도 뚜렷하고 다양했으며,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이수현이 봐 온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웃었고, 울었고, 행복해하다가도 금방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또 화를 내다가, 사랑하는 상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수현이 보아 온 사랑이란 감정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집합체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이수현은 생각했다.

그러니 궁금했다. 알고 싶었고 한때는 자신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기대했다. 이수현은 제가 직접 겪어 보지 못한 것을 책이며, 영화며 그런 허구 속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그렇게 배웠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그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 사랑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동경일 수도 있고, 부러움일 수도 있었다. 이수현은 박민후를 보았다.

‘그와 있으면 알 수 있을까?’

박민후는 자신과는 다르게 감정이 풍부했으니까, 물론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의 감정은 강렬했다. 그의 눈동자에 요동치는 감정을 마주했을 때 이수현은 무척이나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손끝이 저리고 가슴께가 아려 오는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것이 시작이었을지도 몰랐다.

아, 나는 너와 사랑을 해 보고 싶었다.

어두웠던 새벽녘의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눈에 담으며 이수현은 입술을 달싹였다.

“…뭘 하려고 해도 일어나 있어야 뭘 하든가 말든가 하지.”

이수현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에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았다. 아마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확연히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싫지 않다는 게 이수현을 낯설게 만들었다. 그러니 박민후가 빨리 눈뜨길 바랐다.

그가 눈을 뜨면 겸사겸사 지금 이 지저분한 몰골도 어떻게 하고 싶었고 말이다. 피 묻은 옷은 굳어서 시커메졌고, 먼지 구덩이를 구른 뒤인지라 온몸이 찝찝했다. 거기에 비까지 더해지니 정말이지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박민후가 눈을 뜰 때까지 보류해야 했다.

이수현은 그의 얼굴에 묻은 피라도 닦아 주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이미 한참 전에 말라 굳은 피는 닦일 생각을 안 했다. 박민후의 몰골은 여러모로 자신보다 처참했다. 하지만 숨소리만은 평온해 그가 그저 잠이 든 것뿐이라고 안도할 수 있었다.

장시간 똑같은 자세로 있었던 터라 아려 오는 어깨를 조금 움직였다. 그러자 이수현에게 기대어 있던 박민후의 머리통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차,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으며 이수현이 한숨을 쉬었다. 뺨을 간질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겨 주며 이수현이 다시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언제쯤 눈을 뜰까.

“당신은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어릴 적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눈물을 흘리지도 감성에 젖지도 않을 거라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으로만 끝났다. 막상 눈앞에 닥친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수현은 괜찮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이미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됐다.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고, 심장 부근이 뻐근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무어라 말을 뱉고 싶은데도 그러기가 어려웠다. 힘없이 늘어진 박민후를 보자 새삼 자신이 얼마나 이곳에서 무력한지 깨닫는다. 가슴이 아팠다.

다친 박민후를 보자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손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란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꾸만 식은땀이 났다. 등줄기가 오싹해지고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평소의 이수현이었다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타인의 피로 흠뻑 적셔지든 말든, 누가 다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들은 타인이었으니까. 박민후의 말처럼 지금 이 상황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평소처럼 넘겨 버리면 그만일 일이었다.

아, 정말로 그러면 될 텐데, 그러면 머릿속은 차분해지고, 자신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텐데….

이수현은 그 모든 게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이성을 뒤로한 채 감정이 앞서 달려 나간다. 평소라면 할 리 없는 행동을 보인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려고 하는 그 순간이 낯설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눈앞에 이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겪게 된 일이라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한차례 소동이 지나간 후에 이수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무감각했고, 그의 목소리도 높낮이가 없이 평의했다. 그때 들끓던 감정이 빗물에 씻겨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이수현은 잠에서 깼을 때부터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일을 두 번 겪으면 좀 힘들 거 같아. 생각해 봐. 나는 그냥 일반인이잖아. 이런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당신이 이 지경인 와중에 정말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

잠든 박민후가 들을 리도 없는데 이수현은 주저리주저리 그렇게 넋두리하듯 이야기했다.

***

박민후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물론 정확한 시간은 아니었다. 이수현이 자다 깨기를 반복하는 사이, 비가 그쳤고 마지막으로 잠에서 깼을 때 구름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보며 막연히 그 정도 흐른 게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었다.

“윽. 여긴, 어디야…?”

머리가 아픈지 박민후가 한껏 찡그린 얼굴로 머리를 짚으며 그렇게 물었다.

“나도 몰라요.”

이수현이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드디어 자유다. 굳어 버린 몸이 찌뿌둥했다. 감기 기운에 이어 몸살까지 한꺼번에 온 것 같았다. 한숨 쉬듯 내뱉는 숨이 더웠다.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은 기억나?”

“대충은.”

박민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건물 벽에 삐딱하게 기대고 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이수현을 쳐다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이수현의 모습이 떠올라 박민후가 기대를 안고 부드럽게 물었다.

“걱정했어?”

“했어요.”

단박에 나오는 대답에 박민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수현이 그 얼굴을 보며 눈을 흘겼다.

“그 꼴로 그렇게 웃지 마요.”

“내 꼴이 뭐. 아, 피….”

갑작스러운 이수현의 핀잔에 박민후가 머쓱하게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말라붙은 피가 버석거렸다. 거울이 없어서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제대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이수현이 저럴 정도면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게 분명했다.

“쯧, 씻긴 씻어야겠는데. 그나저나 여기가 대체 어디야? 사람 사는 동네 같은데 주변에 인기척이 하나도 없군.”

“어제 대충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이수현이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없다, 정도가 아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부서진 집들과 방치된 채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식물들. 발자국처럼 움푹 파인 자국들과 군데군데 금이 간 길바닥. 깨져 버린 창문들. 미처 닫지 못한 듯 열려 있는 대문과 돌담에 남아 있는 거대한 스크래치 등등.

“확실히…. 일단 이 주변엔 아무도 없어.”

이수현의 말에 주변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박민후도 결국 같은 결론을 내렸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결국 이 골목길에 있는 건 두 사람뿐이란 소리였다. 곳곳에 남아 있는 흔적들이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 벌어졌을 상황을 예상 가게 했다.

박민후가 그렇게 텅 빈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보고 있던 그때, 이수현이 불쑥 박민후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마치 안아 달라는 듯한 그 행동에 박민후가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뭐, 뭐야?”

“뭐긴. 이제 정신도 차렸겠다, 이동할 거 아니에요?”

이수현이 뭘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박민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뒤따라 나왔다.

“…안 써져.”

“예?”

“하아, 능력 안 써진다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박민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 헝클어뜨렸다. 골치 아팠다. 눈을 떴을 때부터 대충 짐작은 갔었다. 기본적으로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과 자신의 상태창이 뜨는 걸 보면, 힘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외에 스킬은 제약이 걸린 듯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박민후가 주로 사용하던 이동 스킬은 지금 쓸 수가 없단 소리였다.

박민후가 주먹을 꾹 쥐었다. 이렇게 돼 버린 이유가 아주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왜 신은 자꾸만 이수현이 [피에타]를 사용하도록 유도했을까? 무슨 목적으로? 신의 계획대로 흘러가려면, 자신이 지금 죽어서는 안 되었기에 도움을 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단순히 그런 이유뿐일까? 박민후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을 오래 봐 오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신이란 놈은 말은 매번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실제로 세계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해진 흐름대로만 흘러간다면 멸망 또한 계산 범위 안에 속했겠지.

세계 평화? 그놈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박민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개소리도 작작 하라지. 그 신이 누누이 말하는 세계를 구한다는 것 또한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했고, 그편이 좀 더 손쉽게 장기말을 구할 수 있었겠지. 그 사이비들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어디 한번 신의 의도를 감히 추측해 보자면, 신은 가지고 있던 힘들 거의 다 소진했다. 5년 전 박민후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에 의도는 박민후 안에 깃든 그와 함께 성장한 ‘힘’이 아닐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세계를 구한 뒤 박민후가 가진 힘을 회수해 갈 거라고. 이 힘이 한때 신을 잡아먹던 괴물이라 했으니, 제아무리 신이라도 함부로 뺏을 수는 없었던 거겠지. 그러니 힘을 회수해 가기 위해 절차를 밟는 중이다. 그렇게 정의하면 대충 말이 되었다.

박민후가 사용하는 힘은 기본적으로 새가 인간들에게 준 힘과는 다른 힘이었다. 한때 신을 잡아먹던 괴물이 넘겨준 힘이다. 기본적인 본질은 비슷하나 서로 상극이었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한쪽에 힘을 때려 넣으면 지금같이 능력에 제한이 걸린다. 아마 그걸 노리고 이수현에게 피에타를 쓰도록 한 것 같았다.

“…나 때문이네요.”

“뭐? 야, 이수현.”

“미안해요. 내가 그쪽 말을 못 믿어서 그래서….”

“니가 왜 사과해? 너 때문 아니야.”

박민후가 이수현의 말을 끊고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박민후는 당황했다. 왜 갑자기 이수현이 사과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 어디에 이수현의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이 있다면 다 빌어먹을 신의 탓이었다. 지금 자신이 능력을 쓸 수 없는 것도 그저 신의 농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신이란 놈도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이런 얄팍한 수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따지면 나 때문이긴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네가 일부러 그랬어? 아니잖아. 그땐 어쩔 수 없었던 거고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리고 이거 봐라?”

이수현을 붙든 손을 놓고서 그들의 뒤편에 있는 대문에 손을 올렸다. 곧이어 철로 된 문이 파열음을 내며 종이 뭉치처럼 와락 구겨졌다. 박민후가 손쉽게 구겨진 문을 뜯어다가 아무렇게나 휙, 바닥에 던져 놓곤 손을 탁탁 털었다.

“만약 괜찮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것도 못 해. 그러니까 내 말은! 괜히 걱정할 거 없다고…. 조금만 기다리면 알아서 해결될 거야. 그, 뭐냐. 나 방금 일어났잖아.”

그렇게 말하며 박민후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수현이 속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가벼운 말씨름을 하기에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지금의 대화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는 게 서로를 위해 편한 일이었다.

“…그쪽이 그렇다니, 그래요.”

이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어젯밤 자신이 갔던 길을 가리켰다.

“저기로 쭉 가다 보면 큰길이 나와요. 사람은 없었지만, 어제는 밤이어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거든. 나가 보면 여기가 어디쯤인지 대충은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일단 갈까요?”

“그 전에 좀 씻고 가자. 찝찝해서 안 되겠어.”

“예?”

이수현이 그를 붙잡기 전에 박민후가 좀 전에 뜯어 버린 문을 밟고 훌쩍 안으로 들어갔다. 이수현은 망가진 대문 앞에 서서 그런 박민후를 따라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는 건 양심이….”

“양심 같은 소리 한다. 너도 대충 눈치챈 거 아냐? 이 동네에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인다는 건 여기가 버려졌다는 뜻이란 걸.”

끼익, 끼익….

“우리보다 먼저 왔다 간 선객이 있었나 본데?”

박민후가 피식 웃으며 손으로 부서진 채 반만 남은 문을 가리켰다. 바람에 덜렁거리는 문이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박민후가 그나마 붙어 있는 문마저 발로 차 부순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그는 전등 스위치부터 찾았다. 해가 떠 있었지만 하늘이 흐렸기에 집 안은 어두웠다. 달칵달칵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집안에 울렸지만, 전기가 나간 건지 고장 난 건지 불은 켜지진 않았다.

“불은… 안 들어오는군. 상태를 보아하니 버려진 지 꽤 지난 거 같은데…. 이수현, 뭐 해. 들어와!”

이수현은 썩 내키진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집 안에 들어서니 박민후는 빠르게 싱크대에서 얼굴이라도 간략하게 씻은 건지 얼굴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집 안 꼴이 엉망이네요.”

집 안 꼴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 물건들이 다 헤집어져 있었고, 창문의 유리란 유리는 다 깨져 있었다. 가구들은 엎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신발 자국이 가득했다.

“이건 몬스터 짓이 아냐. 사람 짓이지. 쯧,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는 게 없군.”

물기를 털어내던 박민후가 혀를 찼다. 거실이며 다른 방도 그렇지만 이미 한차례 뒤지고 난 뒤인 듯한 부엌 꼴도 엉망진창이었다. 부엌이 가장 심했다. 불필요한 식기들은 바닥에 널브러지고 깨져 형체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집 안은 어두웠지만, 밖에서 들어오는 빛 덕분에 움직이는 데 문제 되지 않았다. 바닥을 어지럽게 하는 물건들을 대충 피하면서 이수현은 박민후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박민후가 찬장과 냉장고 등을 열어 보며 말을 이었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만 가져간 건가…. 싹 털렸군. 하여간 재난 상황만 되면 꼭 그런 놈들이 나타난다니까?”

탁, 소리 나게 냉장고를 닫은 박민후가 싱크대에 기대고 섰다.

“대피하란 말은 곧 죽어도 안 듣지. 아주 여기가 지들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빈집을 털거나, 대피 중이던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예전에도 그랬었고… 지금 돌아가는 꼴도 다르진 않겠지. 아, 오지 마. 여기 신발 신어도 위험해.”

다가온 이수현을 박민후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수현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부엌을 벗어났다. 두 사람이 다음으로 뒤진 건 욕실이었다. 엉망인 집구석에서 그나마 욕실만은 멀쩡했다. 하기야 대피 상황에서 뭘 가져갈 게 있겠느냐마는. 솔직히 이런 생필품이야말로 식량 다음으로 대피 시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도망쳐야 했다거나 혹은 이곳을 뒤진 사람이 위생 개념이 없는 아둔한 인간이었다면 손댈 생각도 안 했을 테니, 이런 상태인 거겠지.

“싱크대에서 물이 나왔으니, 여기도 나오긴 할 거 같은데….”

끼익, 먼지가 뿌옇게 쌓여 뻑뻑한 수도꼭지를 돌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나오긴 하는데 따뜻한 물을 바랄 순 없을 거 같아요.”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

“그렇긴 하네요.”

“아니지, 잠깐 기다려 봐.”

박민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욕실을 벗어났다. 이수현은 물을 잠그고 박민후를 따라 거실로 나왔으나 박민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에라도 들어간 걸까 싶어 욕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물었다.

“박민후 헌터, 뭐 해요?”

우웅…!

대답보다 먼저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욕실 맞은편 방에서 박민후가 빠져나오며 사뭇 발랄하게 대답했다.

“보통 보일러는 마나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니까, 회로만 고장 난 게 아니면 작동될 것 같았거든.”

박민후가 다시금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오랫동안 멈췄었기 때문인가 잠시 기다려야 했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씻어.”

“아뇨, 박민후 헌터 먼저 씻어요. 나보단 그쪽이 더 심한 거 알죠?”

이수현은 그렇게 대답하고 욕실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은 이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아팠다. 살짝 열이 오른 것도 같았다. 겉으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몸 상태는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이수현은 짜증을 담아 머리를 쓸어 넘기곤 부엌으로 향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파삭파삭’ 신발 밑창에 유리 조각이 박히고,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분명 약상자 비슷한 걸 얼핏 본 것 같았다. 자세히 본 건 아니니, 감기약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도 가정집이니까 감기약 정도는 있긴 하겠지. 조금 희망을 가졌다. 이수현은 조금 전 박민후가 뒤졌던 곳을 다시 뒤적였다.

작은 서랍들을 열어젖히면서 이미 엉망이 된 물건들을 헤집었다. 그렇게 세 번째 서랍을 뒤질 때였다. 저 끄트머리에 구겨진 약상자가 보였다. 열어 보니 다행히 다 먹고 한 개 남은 약이 들어 있었다. 뭐, 조금 오래된 것 같았지만. 없는 것보단 좋겠지 싶어 이수현은 망설임 없이 약을 까서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마실 물은 딱히 없었으니 수돗물이라도 마셨다.

“후우.”

정신 차려야지. 이수현이 속으로 다짐했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 감기쯤이야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거다. 그러니 괜히 아픈 티를 내서,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

눈을 감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달칵.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던 이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수현.”

“예?”

“큼, 저기…. 입을 옷이 없어.”

문에 찰싹 붙어 상체만 빼꼼 내민 박민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 이수현이 “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짧게 웃었다. 기다리라고 손짓을 하고선 방을 뒤지러 갔다. 엉망인 옷장에는 그래도 옷이 몇 개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입을 만한 게 남아 있네.”

물론 박민후한테는 조금 꽉 끼고 짧을 거 같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마땅한 게 없는걸. 이수현은 박민후가 입을 만한 것을 찾으면서 자신이 갈아입을 옷도 겸사겸사 찾았다. 박민후에게 옷을 전해 주고 잠시 뒤 그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옷이 꽉 꼈다. 그나마 바지는 운동복이어서 괜찮았지만, 발목이 훤히 보였다.

“말끔해졌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신경을 안 쓸 땐 몰랐는데 완전 살 거 같다.”

“먼지에 피 칠갑까지 했으니까 당연하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박민후가 웃었다. 이수현은 그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잘 나왔던 건지 욕실 안은 바깥과 다르게 후끈했다. 들고 있던 옷을 젖지 않도록 멀찍이 치워 두고 원래 입고 있던 옷들을 벗었다.

느긋하게 씻을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몸 상태도 아니어서 이수현은 머리만 감고, 그냥 간단하게 씻기로 했다. 뜨거운 물을 맞으니 머리가 더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실수로 벽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물소리에 묻혀 밖에선 소리가 안 들렸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다. 먼지 냄새가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슬쩍 거울에 이마를 비춰 보니 살짝 빨개졌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지겠지?”

이수현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입 밖으로 내뱉어 봤자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고, 걱정을 바라기엔 지나치게 사소해 ‘겨우 이런 걸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수현은 그저 혼자 삼키고 넘어갈 뿐이었다. 너무 옛날부터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 그렇게 행동하는 게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

두어 번 이마를 문지르고 그다음엔 주섬주섬 옆에 치워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행히 박민후처럼 꽉 끼지 않았다. 수건을 뒤집어쓰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박민후는 엎어져 있던 소파를 똑바로 세워 두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이수현이 나왔음에도 멍하니 휴대폰을 보고 있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려 이쪽을 보았다. 이수현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향한 걸 알았는지 그가 마치 감추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물었다.

“골라 봐.”

“뭘요?”

“너희 집으로 갈래, 아니면 내가 살던 집으로 갈래?”

“뭐…. 이왕이면 내 집이 좋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이수현이 그렇게 말했다.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까치가 자신을 납치하면서 흘러가듯 했던 말이었다.

‘여러 다른 세상에는 ‘서로 닮은 곳’이 다수 존재한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닮은 곳끼리는 곧잘 ‘연결’이 된다고 하죠.’

‘당신도 그런 비슷한 경로로 이 세계에 왔던 게 아닐까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그곳으로 다시 한 번 가 보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이수현은 자신이 이곳에 온 것처럼 박민후도 그렇게 건너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이 망해 가는 세상에서 계속 살게 된다고 해도 하는 수 없었지만,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그냥 흘려 넘기기보단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니.

“…일단 내가 살던 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이수현의 말에 팔걸이에 얹어져 있던 손가락이 까딱까딱 흔들리며 규칙적으로 소파를 툭툭 두드렸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는 듯 말없이 천장을 보던 박민후는 이수현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올 때까지 그렇게 잠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박민후가 다시 입을 연 건 이수현이 막 그 앞에 쓰러져 있는 의자를 하나 일으켜 세우고 앉을 때였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천장을 향한 채로 돌리지 않은 상태였다.

“문자가, 와 있더라고.”

박민후는 이수현이 씻으러 간 사이, 잠시 잊고 있던 휴대폰을 확인해 보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폰은 아니었으니 이수현과 다르게 멀쩡하게 작동됐다. 전원을 켜자마자 알림이 끊임없이 울렸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대외용이 아닌 개인용 전화라 아는 사람이 열 손가락에 꼽힐까 말까 한 그런 휴대폰에 몇십 통의 톡과 문자가 와 있었다.

차주영과 강유람의 톡과 문자가 주를 이뤘다. 박민후는 그걸 보며 뭘 이리 많이 보냈나 어이없이 중얼거렸지만, 그저 지금 상황을 웃어넘기려는 생각일 뿐이었다. 수십 통이 넘는 톡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멈춰 있었다. 대신 그 뒤부턴 문자가 와 있었다. 박민후는 가장 마지막에 온 문자를 확인했다.

휴대폰의 시계는 엉망으로 흘러갔으나 문자에 남은 시간은 제대로 흘러갔다. 그러니 그걸로 박민후는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있었다. 박민후가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3년.”

“…….”

“이곳의 시간은 3년이 흘렀어. 그보다 좀 더 흘렀을지도 모르지만.”

강유람에게서 온 문자들을 떠올렸다. 처음엔 화를 냈고, 후에는 걱정을 했다. 마지막으로 보내온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벌써 3년지났다?시긴참 빠르네 아마이게마지막 문즈가 되지않을가?오늘도 세계는 보시다시피 착실하게망해가는중이얔ㅋㅋㅋ나야 뭔.ㄹㄱ.렇ㄷ.ㅅ이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지만 와전 불쌍하지? 만약 니가 덜아유ㅡ서 이곳 상황을 알게 됐다ㅕㄴ 이문지를 보고있다면 절대 나설 생각하지마. 어디 아무도 모르는곳에가서 꼭꼭 숨어있어!! 마지막 대화가 이런거라 좀 아쉽긴하지민 어쩘 없다고 생각해 참이수혀씨는 무사하니? 너는 정말 괜찮을까? 펀하의 박민후를 걱정하는 게 웃기긴하지만 시국이시국이니까 좀 봐줘라! ㄱ.럼행운을 ㅂㅣㄹㅇ」

엉망진창인 문자가 이걸 보낸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입 안이 썼다. 물론 그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말 그대로 단순히 문자를 더 이상 보낼 수 없게 된 걸지도 모른다. 섣부른 판단을 해선 안 됐다. 하지만 이런 생각 또한 그저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다.

“진짜 잘들 돌아간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박민후가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가 손을 놓으면 늦든 빠르든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다. 박민후라고 그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그게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수현, 일단 너희 집에 간다 치자. 하지만 너희 집이 무사할 거란 장담은 못 해. 서울에 기본적으로 헌터가 밀집되어 있어 타 지역보다는 안전은 하겠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 그건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야. 몬스터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쫓아 움직이는 놈들이라고. 이 동네에 왜 몬스터가 없는 줄 알아? 잡아먹을 게 없으니까, 먹이를 따라간 거지.”

이것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유추해낼 수 있는 사실이었다. 박민후는 이마를 짚던 손을 내리고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르게 했다. 이수현을 마주 보며 말을 꺼내기가 어쩐지 껄끄러워 그의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것이 뻔히 보임에도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이수현은 그저 어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다리를 꼰 채 박민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까? 그곳은 전쟁터야. 게다가 의외로 이런 곳이 허점을 남기기 쉽지. 이미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잖아. 사람도 몬스터도 떠난 자리는 당분간 안전할 거야. 뭐, 먹는 걸 구하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물은 나오잖아? 정 뭐하면 내가 먹을 걸 구해 볼 테니까. 거기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막아 줄 건물도 이렇게 남아 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평소에도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던 이수현의 얼굴이 그의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있는 수건 덕분에 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젖은 머리를 그대로 두고 있어 이수현의 볼을 타고 물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그렇게 물방울의 궤적을 눈으로 좇던 박민후가 수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은 발끝이 서로 맞닿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수건을 붙잡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더 다가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박민후가 수건을 붙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돌아가지 말고 그냥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란 소리야.”

미약한 힘으로 수건의 양 끄트머리가 쭉 잡아당겨지고, 박민후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를 보기 위해 이수현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그의 얼굴이 아까보다는 자세히 보였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어딘지 멍한 얼굴의 이수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어차피 여기나 거기다 별다를 게 없겠죠.”

“…그건 그렇긴 하겠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수현의 머리를 말려주며 박민후가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그 손길을 받으며 잠자코 있던 이수현은 몸이 안 좋았기 때문인 걸까 어쩐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자꾸만 무겁게 감기려 드는 눈을 억지로 뜨며 슬쩍 입을 열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어, 기억해. 그건 갑자기 왜?”

이수현의 말에 박민후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걸 어떻게 잊겠는가. 억지로라도 잊고 싶어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 두었지만, 이수현을 볼 때마다, 혹은 그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언제나 떠올려 버리곤 하던 기억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박민후에겐 그 주제는 다신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지도 못하고 이수현은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박민후 헌터가 그랬잖아요. 게이트는 다른 세계에서 건너오기 위한 용도라고, 그런데 난 게이트 같은 건 넘어온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의문이긴 했어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게이트를 통과했던 걸 수도 있었겠지만, 내 기억으론 난 그냥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드니 이곳이었던 것뿐이었거든요.”

이수현은 이제 거의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리니 눈앞에 박민후가 어떤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이 멈췄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이곳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사람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이 세계엔 ‘이수현’이라는 사람이 이미 있었다는 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상했다. 잔잔한 수면과도 같았다.

“생각하기 귀찮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흘려 넘기긴 했지만. 이따금 드는 의문은 계속 있었어요. 이곳에는 이미 나와 같은 이름, 나이, 성별 하물며 내가 쓰던 것과 같은 통장을 사용하던 내가 아닌 ‘이수현’이 존재했고, 그 사실을 알려 주는 흔적들은 찾아보면 그럭저럭 있었어. 집에서 드는 위화감을 지금까진 그저 무시했지만….”

그랬다. 이수현은 지금까진 생각해 봤자 현 상황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았고, 다시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안 했기에 그저 무시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선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까치의 말이 썩 믿음직하진 않지만, 이수현의 머릿속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가정이 한번 형성되자 그동안 깊이 묻어 둔 의문이 다시금 끄집어내졌다.

“이건 썩 믿음직한 사람이 한 말은 아닌데, 서로 닮은 곳끼리는 곧잘 연결이 된다고 해요.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 평소와 달랐던 건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늘 가던 길에서 오른쪽 길을 선택한 것뿐이었죠. 위에 가정을 조합해서 생각해 보면 나는 아마 그런 식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닐까요?”

그때 머리 위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수현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다급히 이수현의 어깨를 붙잡아 미는 손길에 숙이고 있던 고개가 강제로 젖혀졌다. 올려다본 얼굴이 익숙했다. 박민후가 또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정의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젠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다, 뭐 그런 말이라도 하려고?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라는 거야?! 하긴 너한테는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 나 같은 놈이랑 이런 망해가는 세계에 있는 것보단…!”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가 그만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차라리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몰라.”

어깨를 붙들던 손을 놓고 박민후가 뒤로 주저앉았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수현을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에 저 좋자고 그를 옆에 붙들어 두는 건 어디까지나 박민후, 저 혼자만의 이기심이었다.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그가 굳이 자신의 옆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수현이 좋아서 그가 자신의 곁에 있길 바라며, 매달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박민후 혼자였다.

“허….”

정말이지, 혼자 땅굴을 파는 박민후를 보며 이수현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 거 아냐? 이수현이 박민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방심하던 박민후가 몸을 휘청거리며 딸려 왔다.

“그게 아니라, 나랑 내가 말했던 갈림길에 가 보자는 거야. 내가 이렇게 넘어왔으니까 반대로 박민후 헌터, 그쪽도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잖아?”

훅 잡아당기는 힘에 생각보다 무게가 앞으로 쏠려 생각 이상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러니 이렇게 해요. 일단 그곳에 가 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 다른 변화가 없다면 우리끼리 다른 곳에서 사는 거죠.”

“…그래도 괜찮겠어?”

“나쁠 건 없죠.”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이수현은 풍랑 위의 배처럼 정차 없이 흔들리는 박민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그런 얼굴을 보니 문득 지금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말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자 이수현의 입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그쪽 없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무슨, 생각했는데…?”

코앞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시선에 박민후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떠듬떠듬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쪽하고는 키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어?”

이수현의 말에 박민후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건 박민후로선 정말 상상도 못 해 본 말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 못 한 것처럼 한동안 굳어 있던 박민후가 뒤늦게 내용을 인지하고 눈을 크게 떴다.

곧이어 언제 얼빠진 얼굴을 했냐는 듯 삽시간에 다양하게 바뀌는 표정 변화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목까지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모습이 바보 같고 또 귀여워 이수현이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가, 갑자기 무슨 말을….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왜?”

폭탄같이 떨어진 말에 이어, 박민후는 평소랑 다르게 눈앞에서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이수현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가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들썩이며 웃으니 콧등이 스쳤다. 얼굴이 너무 뜨거웠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현이 박민후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선 뒤로 물러섰다.

“왜겠어, 내가 그쪽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좀 해 봤거든.”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이수현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아마 감기 때문에, 머리에 열이 몰려서, 열에 취했기 때문에, 뭐 그런 이유로 붕 뜬 기분을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맞는 거 같더라고, 내가 그쪽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박민후에게 말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수현이 중얼거렸다. 얼굴이 뜨끈했다. 바람이라도 맞으면서 이 들뜬 기분을 내리누르고 싶었다. 이수현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멍하니 앉아 있던 박민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이수현을 뒤쫓아 갔다.

“이수현! 어딜 가는 거야?!”

“좀 부끄러워서?”

어느새 골목길로 나와서 걷고 있던 이수현이 손등으로 뜨끈해진 볼을 식히며 대답했다. 박민후는 이 상황이 좋으면서도 어째 이상하단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아무래도 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너, 뭐 잘못 먹은 건 아니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뭐 이상한 걸 주워 먹었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아닌데, 애초에 뭐 먹은 게 없는걸요?”

“아니, 그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여전히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박민후가 말끝을 흐렸다.

“음, 그쪽이 사라지고 계속 고민했거든요. 그러다가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간 거예요. 그리고 지금 난 그게 확실한 것 같다고 당신한테 말한 거고….”

박민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다시 들어도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날, 날 정말 좋아한다고?”

“그럼요.”

이수현이 길가의 돌멩이를 툭 발로 차며 대답했다.

“아까 한 말도… 사실이야?”

“그래요.”

그 말에 대뜸 입술부터 들이미는 박민후를 보며 급하게 그의 입을 이수현이 손으로 틀어막았다. 고개를 뒤로 물리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허리를 붙드는 손에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지지는 못했다. 이수현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싶단 건 아니고….”

박민후가 닿기 직전 끼워진 손에 의해 입이 가로막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왜 막냐는 듯이 샐쭉한 눈으로 이수현을 노려보았다.

“…이건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잖아. 고백하자마자 키스는 좀.”

‘그렇지 않나?’ 하고 이수현이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곳도 소설 속이니…. 영화나 소설이나 뭐, 크게 상관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수현이 손을 내렸다.

***

키스라고 하기도 뭐하고 뽀뽀라고 하기도 뭐한…. 그러니까 그건 거의 입술 박치기에 가까웠다. 본 건 많으니 서로 입술이 붙은 이 타이밍에 그의 아랫입술을 물고 입을 벌리기라도 해야 했지만, 서로의 입술이 맞닿은 순간 박민후는 이수현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단 걸 알아 버렸다. 맞닿은 체온인 지나치게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코앞의 단정한 얼굴을 보다 박민후가 입을 벌릴 생각을 접어 두고 고개를 뗐다. 작게 쪽 소리가 났다.

“너 왜 그래?”

“…내가 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어 오는 목소리와 함께 내뱉어진 숨이 뜨거웠다. 그에 박민후가 이수현의 이마를 남은 손으로 턱 짚었다.

“…너 열나, 열 있잖아?”

“음, 괜찮아요.”

이수현이 고개를 흔들어 이마에 붙은 손을 털어냈다. 그에 박민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괜찮긴 뭐가…! 이마가 완전 불덩이잖아!”

“정말 괜찮아요. 봐 봐, 얼굴도 쌩쌩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멀뚱히 박민후를 올려다보는 얼굴은 그의 말처럼 평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아픈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아프단 사실을 몰랐을 때 그렇게 보인다는 소리였지. 아프다는 사실을 안 상태로 보면 또 달랐다. 아파서 희멀건 얼굴에 열이 몰린 덕분에 평소보다 묘하게 생기 넘쳐 보였을 뿐이다. 아픈 걸 숨기려고 일부러 밝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박민후의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넌 왜 아프면 아프다 말을 안 해?”

“…….”

박민후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이수현은 항상 그랬다.

“전에 팔이 부러졌을 때도 그랬지. 그때 말고도 몇 번이고 그랬어. 다른 사람이면 아프다 할 법한 일에 너는 지나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 하물며 지금도 그래! 감기에 걸렸으면, 걸렸다고 그냥 말하면 되잖아!”

“괜찮아요.”

“이수현!”

이수현이 차분히 자신의 허리를 붙든 박민후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다. 박민후를 마주 보는 표정이 평소보다 더 무심했다. 방금까지 사랑 고백을 하고 키스를 하려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 정돈 괜찮아. 어디 터지고 피가 나는 것도 아니고 몸을 못 가눌 정도도 아니잖아. 박민후 헌터도 그렇잖아요. 이게 뭐 대수라고 말해요, 말하길.”

이수현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뭐라고, 겨우 감기인데 그게 뭐 그리 난리 칠 일이라고 이러는 건지 솔직히 박민후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처럼 옆구리가 뜯겨 나가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도 아니고, 하물며 그는 그런 주제에 괜찮다고 말하던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고작 감기 가지고 화를 낸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이수현은 그를 달래듯 제 허리를 붙든 팔을 토닥였다.

“난 멀쩡해요. 그러니까 이것 좀 놔줄래요?”

“그냥 아프면 아프다, 말 좀 해…!”

자신을 다시 붙드는 목소리와 손길에 박민후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밀치며, 이수현이 기어이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멀쩡하다니까…!”

그렇게 소리친 이수현이 제풀에 놀란 듯 표정을 무너뜨렸다. 벌렸던 입을 꾹 다물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목 안이 답답했다. 얼굴에 열이 올라 그렇게 더웠는데 순식간에 등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났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것도 같았다. 몸이 안 좋으니, 별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자신이 한심했다.

“…큰소리 내서 미안해요. 머리 아픈데 그쪽이 자꾸…. 아니, 아뇨. 젠장. 그쪽 탓할 생각이 아녔는데 미안해요. 못 들은 걸로 해 줘요.”

“…….”

박민후가 말없이 이수현을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이수현이 몸의 힘을 풀었다. 생각보다 더 몸이 노곤했다. 정말이지 그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끈거리는 머리가 단어 고르기를 포기한 듯 내뱉어지는 말은 표독스러웠다.

“그래요. 나 아파요. 그런데 그래서 뭐? 아프다고 꼭 다 말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참을 만하니까, 참는 것뿐이에요. 정말 못 참을 정도면 말했을 거고, 이렇게 말하니 이제 속이 시원해?”

이왕이면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었다. 분위기를 좋게 만들진 못할망정 이렇게 화풀이하고 있다니, 이수현은 속으로 낙담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난 네가 아프면 죽을 거 같아.”

“하하, 과장이 심하네요.”

한참 뜸을 들이다 나온 그 말에 이수현이 어이없기도 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다 뱉는 거람, 정말이지…. 등에 감긴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 네가 몰라서 그래. 나한텐 이제 너밖에 없어, 이수현.”

이수현의 머리통에 볼을 기대고 박민후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그게 어떤 의민지 좀 알아주라. 난 겨우 감기라고 해도 네가 아프면 걱정돼. 그냥 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미치도록 신경 쓰인다고, 차라리 그냥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야.”

“…….”

“내가 아프고, 다치는 게 나아. 난 강하고, 몸도 튼튼하고…. 자가 치료도 가능하니까 쉽게 안 죽는다고, 하지만 넌 아니잖아. 넌 너무 잘 다치고 내가 한눈팔면 없어져 버릴 것 같아. 죽어 버릴 것 같다고, 그러면서 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렇게 넘어갈 것 같단 말이야.”

“…그쪽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연약하진 않거든요. 이런 건 정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고.”

이수현이 박민후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두드려 봤자 제 손만 아파 금방 멈췄지만 말이다. 이수현이 한숨을 쉬었다. 감기약을 먹은 게 효과가 도는 건지 갑자기 졸렸다.

“…피곤해요.”

“그래.”

누가 걱정해 주는 걸 바란 적도 없고, 아프다고 어리광부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이수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리광은 겨우 이 정도였다.

“몸도 여기저기 쑤시고.”

“응.”

“머리도 아파요…. 그러니까, 좀 자도 될까요…?”

마지막 말은 거의 웅얼거리듯이 들려왔다. 그런데도 박민후는 똑똑히 들었다.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이수현을 박민후가 조심히 안아 들었다. 일단 왔던 길을 돌아갔다. 소파는 앉기 전에 털어내긴 했지만 좀 지저분해 박민후가 방에서 이불을 꺼내 와 그 위에 깔았다. 그리고 거기에 이수현을 눕혀 놓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다음 날 이수현은 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어제보다는 몸 상태가 좋았다. 머리도 덜 아팠고, 열도 내렸다. 밤 동안 박민후가 어디선가 구해 온 음식으로 가볍게 끼니를 때우고 두 사람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사람이 없는 도로변을 살폈다. 박민후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서울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걸어서 가면 좀 더 걸리겠지만, 만약 차를 타면 서너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일단 걸어갈 수 있는 만큼 걸어가기로 했지만, 다행히도 길가에는 버려진 차들이 아주 많았다. 이수현은 도심을 걸으면서 그나마 멀쩡한 외관을 한 차를 발견하면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그러다 개중에 그나마 멀쩡한 자가용을 발견했다.

달칵.

“아, 열린다.”

잠기지 않은 차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운전석에 열쇠도 꽂혀 있었고, 남아 있는 기름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차창 유리 또한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이수현이 차의 시동을 걸어 보았다. 조금 소리가 크게 나긴 했지만 제대로 시동이 걸렸다. 이 정도면 타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됐다. 우리 이거 타고 가요.”

“…….”

“박민후 헌터?”

“나 운전 못 해.”

“예?”

***

사람들이 사라진 도로 위로 자동차 한 대가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세상은 해가 떠 있는 낮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중충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은 언제든 비를 쏟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고, 열어 둔 창 너머로 바람을 타고 비 냄새가 났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린 채 빠르게 지나치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는 박민후를 슬쩍 곁눈질로 한 번 보고 이수현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면허가 없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그에게 굳이 면허가 필요할까 싶기도 했고, 그럴 정신이 없었기도 했겠지, 싶어 이해는 됐다. 하지만 역시 조금 귀여웠다.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 그가 조수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매고 약간 꽁해 있는 모습이 조금 웃겼고, 그게 귀엽게 보이다니 말 다 했지 싶었다.

톡톡,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핸들을 두드리는데 옆에서 꿍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냥 대놓고 웃지 그래?”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수현의 입가가 짧게 실룩였다. 그걸 놓칠 리 없는 박민후가 삐진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적막 속에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이 유달리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이 사소한 걸 가지고 웃고 있는 이 와중에도 이 세상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냥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심했다. 두 사람이 있던 거리를 벗어날수록 곳곳의 흔적이 보였다. 거리에는 버려지고 망가진 자동차들이 수북했고, 살기 위해 도망친 인간들의 흔적이 가득했다. 하늘을 보면 이따금 검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지나다녔다.

목적지를 향해 갈수록 길가에 몬스터의 시체들이 즐비했다.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차에 달려 있던 내비게이션은 먹통이었기 때문에 이수현은 하는 수 없이 도로에 비치된 교통 안내 표지판을 확인하며 차를 몰았다. 그러면서 창밖을 하염없이 보느라 조용한 박민후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박민후 헌터?”

“왜?”

“뭘 그렇게 봐요?”

“그냥. 그냥…. 허탈해서 그러지.”

박민후는 눈앞에 벌어진 풍경에 눈을 못 떼며 말했다.

“…세상이 멸망할 거란 건 진작 알고 있었어. 그날도 새들이 날 유인하기 위해 일을 벌인 거란 것도 진작 알았지. 이렇게 될 걸 모르진 않았어. 다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박민후가 마른세수를 하며 계속 말을 이으려고 했다.

“후회하나 봐요?”

“조금, 그런 것도 같아.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난 널 구하러 갈 거야.”

이수현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무심한 얼굴이 힐끗 박민후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네가 없는데…. 이런 세상 구해 봤자, 이곳에 네가 없으면 내가 구할 이유가 없잖아.”

박민후는 자신의 뺨에 닿았다 떨어지던 이수현의 손을 다시 붙잡으며 말했다.

“이미 글러 버린 건 아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냥…. 그냥 말이야.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어. 아침에 눈을 뜨면 네가 내 옆에 있는 거야. 너랑 마주 앉아 밥도 먹고, 집에서 한가롭게 TV를 보면서 ‘이거 재밌다.’, ‘저거 웃기다.’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길 하고 싶었어. 그러다 느지막이 집 앞의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하는 거야. 나간 김에 너랑 마트에 장을 보러 가고….”

낮은 목소리가 주저리주저리 기약 없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아, 너만 좋다면 개도 한 마리 키우고 싶어. 나 개 좋아하거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 키울 생각은 못 해 봤지만… 그런 꿈은 꿔도 되잖아. 너랑 의논해서 이름도 붙여 주고 키우고 싶었지. 그렇게 한가롭게 그냥 너랑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어. 남들도 다 하는 그런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어.”

이수현의 손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고, 박민후가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그게 왜 나한테는 이렇게 어려운 걸까.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닌데, 난 그냥 너랑 살고 싶어. 너랑…. 이수현 너랑….”

이수현이 말없이 그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나는 그냥 너랑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이건 박민후가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말, 이제는 이루기 어려운 그런 소원이었다. 박민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수현은 차를 세웠다.

“왜 이렇게 풀이 죽었담.”

그렇게 말하고는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박민후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아 자신에게로 돌리며 이수현이 그렇게 다정하게 웃었다. 박민후는 이 와중에도 그 웃음에 심장이 떨렸다.

“그럼 우리 같이 죽을까요?”

그렇기에 이수현의 입에서 나온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아요.”

이수현은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을 했다는 듯 여상스럽게 이야기했다. 그의 밝은 연갈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수현이 박민후의 눈가의 맺힌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치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 세상의 끝을 함께 봐요. 박민후 헌터.”

박민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지독히도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박민후는 저도 모르게 눈앞의 이수현을 붙들었다. 가만히 박민후를 보던 이수현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줄까요?”

“…갑자기? 생뚱맞네.”

“하하, 그쪽 이야길 들으니까 문득 생각나서요.”

톡톡 손에 잡혀 있는 박민후의 뺨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이수현이 손을 뗐다. 이수현이 다시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으며 말을 골랐다.

“음, 이건 정말 아무한테도 안 해 준 이야긴데요. 이 이야길 듣는 건 박민후 헌터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영광이라고 말해야 하나?”

저 앞에 보이는 교통 표지판을 한 번 보고 길을 확인한 채 이수현이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보통 자기 죽음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일곱 살 때부터라고 해요. 뭐, 예전에 봤던 내용이라 확신하긴 좀 그렇긴 한데….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대화 주제랑 좀 어긋나지 않아?”

순간 길을 잘못 들어 후진하던 이수현이 박민후를 돌아보곤 “그런가?” 하고 웃어넘겼다.

“음, 무슨 말이냐면. 나는 열한 살 때 내가 죽는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뭐, 어린애가 뭘 알겠어요. 죽음 같은 건 간접적으로 접해 봤을 뿐이죠. 하지만 생각하는 건 자유잖아요. 나는 생각했죠. 내가 죽으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죽은 다음에는 사후 세계에 가려나? 저승사자는 정말 있는 걸까. 귀신은 존재하는 걸까. 뭐 그런 거.”

“귀엽네.”

“귀여운가? 뭐, 애였으니까….”

박민후는 어린 이수현을 생각해 보았다. 어째 어릴 때도 지금과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 꼬맹이가 떠올랐다. 그건 꽤 귀엽겠지.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실제로 보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때쯤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은 인생 계획을 세웠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들어가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몇 살 땐 뭘 하고, 몇 살 땐 뭘 하고…. 그리고 정해진 나이가 되면 그전에 죽자고 결심했지. 신기하게도 스물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난 그 계획대로 살았거든.”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더라고, 운이 좋았지.”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 말하는 목소리가 의문을 품고 내뱉어졌다. 이수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남의 삶을 듣고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건 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까? 그렇잖아. 자신이 직접 겪어 보지 못했다고 그 삶이 거짓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생각보다 말도 안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의외로 많고, 그걸 단순히 겪어 보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할 순 있어도 없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돼요. 내 입장에서는 박민후 헌터의 삶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인걸요. 그런데 내가 그쪽의 삶을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한 적이 있나요?”

“…….”

“거봐요.”

그러면서 이수현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린 뒤 살살 내저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나는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죽기로 했어요. 그때쯤이면 할 만큼 했으니까 죽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죽지 못해 산 사람처럼 말하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쪽 말처럼 누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너는 죽지 못해 사는 거 같다고, 맞아요. 태어났으니까 살았을 뿐이야. 스스로 목을 끊는 건 아무래도 아플 테고, 또 무서우니 못 한 거지.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거든…. 아!”

끼이익!

이수현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급정거를 했다. 박민후의 가슴 앞을 손으로 누르며 이수현이 돌아보았다. 박민후의 놀란 얼굴을 한차례 본 뒤 툭툭, 그의 가슴팍을 쳐 주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뭐 그것도 스물여섯 살의 가을에 망했지만. 당신 덕분에 내 계획은 엉망진창이 돼 버렸는데 말이죠. 난 그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왜? 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면 되니까?”

이수현이라면 그렇게 넘어갈 테니까, 박민후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수현이 그 말에 “뭐 그렇기도 한데….” 하며 말을 흐리다가 마저 이어진 말에 박민후는 심장이 아팠다.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너 그거 반칙이야.”

박민후가 손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쪽 말처럼 한 번 하고 나니 두 번째는 쉽더라고요.”

이수현이 핸들에 몸을 기대며 웃었다. 박민후는 정말 저런 모습은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답지 않게 자꾸만 다정히 웃어서 제 심장을 이리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좋긴 좋았지만, 이수현은 알고서 하는 일일까? 아니, 평소의 그라면 자각 없이 하는 행동일 게 분명했다. 또 박민후 저만 이렇게 설레서 주책을 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로는 여기까지밖에 못 가겠는데….”

다른 곳은 다 잘 지나쳐 왔는데 눈앞에 중간이 툭 끊긴 다리를 보니, 차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저 멀리서 거대한 몬스터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을 보니 차를 타고 갈 수 있다 해도 이쯤에서 걸어가야 했겠지만. 그래도 목적지까진 거의 다 왔으니 이수현은 미련 없이 차 문을 열었다.

“내리죠.”

“…그래.”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린 뒤 주변을 훑었다. 아마 이 정도까지, 가까이 왔으니 몬스터들이 하나둘 기회를 엿보고 있을 터였다. 그도 아니면 숨어 있는 사람들이거나. 일단 두 사람은 뻥 뚫린 공간에서 몸을 피하기로 했다.

굳이 이 다리를 무리해서 건너지 않아도 건너편으로 갈 수 있었다. 조금 빙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사방이 뚫린 곳인지라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랐다. 두 사람은 건물 틈 사이에 숨어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 손을 놓았을 줄이야. 생각보다 포기한 곳이 많은걸?”

“대충 3년 흘렀다면서요. 그럼 그럴 수 있죠.”

“뭐, 그렇지. 그래도 주변에 남은 몬스터 시체를 보니, 최근에 죽은 거 같아. 어쩌면 아직 남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조심해야겠는데….”

도로변을 확인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째 분위기가 조금 그랬다. 이수현은 자신이 벽과 박민후 사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허리춤을 붙드는 손길에 이수현이 박민후 팔을 붙잡았다. 틈새로 들어오는 노을빛에 그의 샛노란 눈이 반짝였다.

좀 더 가까워진 얼굴에 이수현이 또 반사적으로 박민후의 입을 틀어막았다.

“또?”

박민후가 황당하다는 듯 입이 막힌 채로 중얼거렸다. 이수현이 슬쩍 눈을 피했다.

“그, 내가 그랬었죠. 그쪽하고는 키스할 수 있겠다고,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다른 사람과 스킨십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뭐 결벽증이 있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고, 그랬다면 아까 그쪽이랑 입술 박치기도 안 했을 거야. 그냥 좀 뭐랄까…. 난처하고 거부감이 든달까?”

그렇게 말하면서 이수현이 슬그머니 박민후의 입을 막은 손을 내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정도가 내 최선이란 소리예요.”

그러고는 박민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박민후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이수현의 손을 보며, 손을 떼어낸 후에 깍지 껴 다시 붙잡았다.

“난 그냥 네가 옆에 있는 거로 족해.”

“뻥치지 말고.”

냅다 주둥이부터 들이민 게 벌써 두 번짼데 어디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냐며 이수현이 박민후의 발을 콱 밟았다.

“…뭐,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떨지 몰라서 나도 장담은 못 하겠는데…. 지금은 그래. 네가 날 좋아한다는데 그거 말고 뭐가 더 필요하겠어. 단지 가끔 이렇게 손을 잡아 주고 이렇게 안아 줘. 그것만이라도 해 줘.”

깍지까지 껴서 빈틈없이 맞물린 손을 박민후가 살살 앞뒤로 흔들었다.

“…날 알던 사람들이 내가 그쪽이랑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많이 놀랄 거예요. 내가 먼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도, 누굴 보며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거든요. 거기다 이렇게 곁에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한 번도 없었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생각 이상으로 엉망진창인 도로를 걷는 것은 의외로 힘들었다. 피해야 할 것도 많았고, 알던 길은 사라져 있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평소라면 익숙했을 거리가 지금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분명 알던 곳이었으나 이수현은 몇 번이고 지나다녔음에도 길을 헷갈렸다. 하는 수 없이 박민후가 대신 길을 찾아 앞서 걸었다.

차는 숨어 있는 몬스터와 사람 할 것 없이 시선을 끌기 때문에 빈 차들을 몇 번이고 발견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야 했다.

사람이 밀집된 곳이다 보니 모퉁이를 돌면 몬스터가 튀어나왔고, 방심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도 했다. 이수현은 그때마다 멀찍이 피해서 박민후가 빠르게 때려잡는 것을 구경했다. 혹은 박민후와 같이 괜히 휘말릴까 싶어, 빙 돌아 도망치기도 했다. 덕분에 예상보다 시간은 더 걸렸다.

벌써 날이 저물어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숨기고 쉬기로 했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박민후가 또 어디선가 구해 온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버려진 집을 찾아 그곳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드디어 저 멀리에 이수현이 살던 아파트가 보였다. 이곳의 길은 의외로 멀쩡했다. 그렇기에 이수현은 자신이 기억하던 장소와 유사한 장소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왜 그래?”

“내가 말했던 곳이 여기예요.”

갑자기 멈춰 선 이수현 때문에 박민후 또한 제자리에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두 갈래 길 초입에 멈춰 서 있었다.

“두 갈래 길이지만 사실 어느 쪽으로 가도 내가 사는 아파트가 나왔거든요. 게다가 어느 쪽으로 가도 도착하는 시간마저 똑같은 곳이라 그래서 난 언제나 왼쪽으로 갔어요.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익숙하니까 늘 가던 길로 간 거였거든요. 그러다 딱 한 번, 오른쪽으로 간 적이 있어.”

이수현이 손을 들어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 길로 가요.”

이수현이 마주 잡은 손을 잡아당기며 오른쪽 골목길로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막 골목길로 들어서기 직전 멈춰 선 박민후 덕분에 제자리에 멈춰야 했다. 박민후가 물었다.

“…만약 네 생각이 틀렸으면 어떡해?”

“그땐, 그냥 이곳에서 그쪽이랑 살면 되죠.”

이수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박민후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만약 너는 건너가도 나는 건너가지 못한다면 어떡해?’

그 물음은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왜냐 그것도 나쁘진 않다고 문득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수현이 가버리면 그가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수현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더는 안 해도 되니까. 그러니까 박민후는 이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준 것만으로 괜찮았다.

그러면 거기까지가 행복한 꿈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다. 이수현이 가 버리고 그 혼자 이곳에 남게 되면 그때부턴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 언제나와 같은 현실을 다시 마주한 것뿐이라 자신을 위로하면 됐다. 오히려 이수현이 없을 때 늘 겪었던 것이니 그쪽이 더 마음 편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민후는 꿈에서 깨기 전, 이렇게 그의 감정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그러니 박민후는 지금 맞잡은 손을 언제든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계속 생각했던 거였다. 박민후가 그에게 늘어놓은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꿈의 일부였다. 소박한 소원이었을 뿐이다. 이루지 못한다 한들 하는 수 없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소원이었다. 그걸 굳이 이수현이 이곳에 남아 이루어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 세상의 끝을 함께 보자고, 만약 건너가지 못하게 되면 박민후 헌터 집에 가요.”

“응, 그러자.”

이수현이 앞서 걸으며 맞잡은 손을 놓칠세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박민후는 그게 기뻤다.

“TV는… 안 나올 테니까 같이 책이라도 읽어요. 책은 찾아보면 많을 테니까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를 거예요. 길은 엉망이겠지만 하루에 한 번은 산책을 하도록 하고, 어차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한곳에 진득하게 있진 못할 테니까 나간 김에 아직 사람들이 털지 않은 마트 같은 걸 찾아볼까요? 그걸로 장보기 하면 될 테고, 또… 맞아, 나 그러고 보니 몬스터 고기도 먹어 보고 싶어요. 그거 맛있을까요?”

“솔직히 맛없지.”

“음, 그럼 그건 패스.”

박민후가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개는… 키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박민후 헌터 소환수로 대체하면 안 될까요? 그 애들도 개는 개잖아요.”

“뭐, 그래…. 그놈들도 개는 개지.”

두 사람은 그 짧은 거리를 걸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수현이 박민후가 바랐던 꿈을 함께하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걸음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세상이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 발, 또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짧은 골목을 벗어난 순간 정적만이 휩싸인 세상에 소음이 들어찼다. 가장 처음 들린 것은 차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다음에는 주택가의 생활 소음, 어디선가 들리는 벨 소리. 새의 날갯짓 소리….

그렇게 이수현은 원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박민후 헌터…?”

다만 이수현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