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날개 달린 것들은 반드시 추락한다.
지독했던 장마는 진작 멈추었지만, 요즘 들어 하늘은 이상하게 흐릿했다. 먹구름을 닮은 회색빛 구름이 햇빛조차 틀어막아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음울한 분위기가 도심을 휘감자 사람들은 혹시 이러다 또 갑자기 비가 올까 싶어 우산을 챙겨 들고 다녔다. 일기 예보는 번번이 빗나갔다. 하지만 일기 예보가 틀리는 것쯤이야 언제나 있던 일이니, 사람들은 거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다 무너져 내린 성당이 하나 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지 오래된 게 분명한 이 구조물은 한때나마 이곳이 성당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들이 군데군데 존재했다. 물론 다 망가지고 부서져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부서지고 녹슬어 성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빈틈 사이사이로 녹색 식물들이 뿌리를 뻗고 싹을 틔웠다. 건물을 집어삼키듯 휘감은 식물들은 이곳이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려졌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젠장…!”
기다란 로브 자락이 그가 걸을 때마다 땅바닥을 쓸며 작은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바람이 불면 풀잎들이 스산하게 노래했다. 입을 제외한 그 윗부분을 모두 가리고 있는 검은 까치 가면을 쓴 자가 심란하다는 듯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이고 있었다.
분명 완벽한 계획일 터였다. 그만큼 준비도 철저히 했고 여러 차례 실험도 했다. 블랙마켓에서 벌인 일도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우연찮게 박민후가 있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어느 정도 허용 범위였다. 게다가 결론만 말하자면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게이트 발생 탐지기를 속이면서 강제로 던전 게이트를 개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5년 전 겪었던 ‘대격변’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면 자신의 계획은 생각처럼 잘되지 않고 있었다. 이게 다 박민후 그 괴물 때문이었다!
“괴물 자식…!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
여태 쉬쉬하던 4대 길드와 협회 놈들이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솔직히 저희도 협회가 언제까지고 박민후에게 지금 이 상황을 비밀로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니 그 뒤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들이 뭐라 말해 봤자 그 괴물 자식이 제대로 듣기나 하겠는가 싶었고, 뻔히 알면서도 무시로 방관하다가 제가 필요할 때가 돼서야 나타나 뒷수습을 할 거라 생각했다. 5년 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박민후는 저의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나 버리고 말았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을 것처럼 굴어 저희가 그럼 그렇지 하고 안심했더니 얼마 전에 갑자기 나타나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아아, 곤란해. 곤란하다고!”
물어뜯은 손톱이 피를 흘리든 말든 까치 가면을 뒤집어쓴 자는 짜증스레 눈앞에 벽돌 조각을 발로 차 부쉈다.
일이 꼬였어, 그는 아직 나서면 안 됐다. 아직 너무 빠르다고…! 원래 영웅이란 자고로 다른 이들이 손쓰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 딱 나타나 사건을 해결해야지, 사건이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나타나 초를 치면 어쩌잔 건가!
아아, 우리의 위대한 계획을, 원대한 꿈을 이런 식으로 망칠 순 없었다. 그는 세상이 붕괴할 때 나타나야 했다. 그거야말로 영웅의 재림에 딱 어울리는 연출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가 아직 이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됐다. 아직 동시다발적으로 던전 게이트를 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고 강제로 브레이크를 터트리는데도 재료가 모자랐다. 이제 시작인데. 5년을 기다렸는데…!
푸드덕!
그때 하늘에서 새하얀 새가 날아와 다 무너진 조각상 위에 내려앉았다. 날갯짓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 까치 가면을 쓴 자가 단번에 화색을 띤 채 새를 향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신이시여!”
자그마한 새를 보며 신이라 외치다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퍽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으나 새하얀 새를 신이라 부르자 그것이 맞는다는 듯 눈부신 빛이 새로부터 흘러나왔다. 때마침 먹구름 사이를 가르고 지상으로 내리쬐는 햇빛은 그런 새를 더욱 신성하게 만들었다. 새의 작은 부리가 열리자 이 세상의 모든 자애로움을 품은 듯한 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리 자주 나를 찾아오지 말라 그리 말했거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저희만으로는 해결할 방도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까치 가면을 쓴 자가 한탄한 듯 외쳤다. 무릎걸음으로 새의 바로 아래까지 기어와 손을 모으며 빌었다.
“아아, 이제 저희는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신이시여, 부디 지혜를 빌려 주소서!”
새의 모습을 한 신은 그 광경이 퍽 우습다고 여겼으나, 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이 우스운 연극에 기꺼이 동참해 줄 마음이 있었기에 짐짓 모른 척 입을 열었다.
[…그의 곁에는 이 세계의 섭리가 멋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이방인’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이, 이방인이라 하시면…? 혹시….”
신이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박민후가 어느 날 갑자기 옆에 데리고 다니던 그 일반인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일반인일 텐데…? 만약에 상황에 써먹을 수 있을까 싶어 그 남자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마친 뒤였다.
이름 ‘이수현’, 나이 ‘26세’, 피붙이도 따로 없는 고아로 하루하루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다 약 한 달 전쯤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는 것이 전부인 정말이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어찌 언급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아, 너희가 그토록 원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지.]
“……!”
이방인의 도움은 포기할까 싶었지만… 하는 수 없지.
[그 이방인을 내게 데려오면 너희의 계획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단다.]
그 말을 끝으로 새는 날갯짓을 하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을 구경하며 신은 저희의 무자비한 영웅을 떠올렸다.
그거 아니?
이 세계에 영웅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 영웅을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필요악이 될 수 있단다.
***
“아악!!”
“한 마리 확보.”
고통의 찬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한때는 사람이었을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곳곳에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혼자 고고히 서 있는 박민후에게 한 차례 시선을 주던 김세현은 고개를 돌려 주변 헌터들에게 명령했다.
“남은 수는 몇이지?”
“지금 발견된 ‘새’는 이걸로 끝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은 협회로 연행하세요.”
“예!”
저벅, 저벅.
“박민후 헌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소리로 이미 김세현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았지만, 박민후는 다른 곳을 보며 짐짓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어이 말을 거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김세현을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기분만 나빠졌다.
“생각을 바꾸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당신네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어쨌거나 저희에겐 이득인 상황이니 감사할 따름이죠.”
“…….”
“가시죠.”
박민후는 주먹을 꾹 쥐고 김세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들은 제가 변덕으로 이리 나타나 새를 잡고 있다고 여기는 듯싶었지만, 새의 잔당을 잡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이수현이었다.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아직 이곳은 멸망해선 안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야 멸망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을 테지. 물론 이런 사실을 말해 줄 마음은 없었다. 입이 가벼운 플로나가 뭐라 말을 흘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일을 언제까지고 질질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는 시간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으니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제가 잠시 이수현의 곁을 벗어난 지금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이수현…. 버릇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
박민후는 제 마음을 자각하고 나서 나름 여러 상황을 생각해 보았었다. 제가 만약 이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하게 된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지, 또 어떤 식으로 말을 할지. 그리고 제가 이수현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을 때 그의 반응 같은 거 말이다.
당연히 제일 처음 생각한 건 거절하는 이수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맨살을 찢는 아픔과는 궤를 달리하는 아픔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가장 그럴듯한 무시하는 이수현을 상상했다. 좀 슬프고 씁쓸하긴 하지만 그게 제일 무난했다. 솔직히 박민후는 이수현이 알게 된다면 그냥 무시해 줬으면 했다. 그러면 그래도 조금은 더 그의 곁에 있어도 괜찮았을 테니까. 차례차례 생각했다. 그가 경멸한다는 상상은 어째 잘되질 않았지만….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생각한 게 그가 저를 받아 준다는 상황이었다. 이건 정말 제 희망사항에도 없는 선택지였다. 그가 받아 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그 외에도 미안해한다 등 여러 상황을 염두해 다양하게 생각해 보았었지만.
단연코 이수현이 제게 대놓고 물어보는 상황만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그런 일이 절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박민후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우습게도 본인은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박민후는 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은 줄어들긴커녕 풍선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그나마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이쯤에서 눈치챈 거였지. 만약 그들의 곁에 제삼자가 존재했다면 이수현은 이보다 빠르게 눈치챘을 것이다.
“…박민후 헌터. 나 좋아해요?”
그러니 박민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그것도 이수현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된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덜컥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절로 몸이 굳어 버렸고, 제 감정을 들켰다는 사실에 그 자리에서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 때문에 이러다 제 손안에 잡혀 있는 이수현의 손에 무심코 힘을 줘 버릴까 봐 이를 악물었다.
세상이 빙글 도는 거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식은땀이 찼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니 박민후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대답을… 해야 했다. 뭐라도 말해야 했는데.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변명을 해야 할까? 아니라고 잡아떼야 하나 못 들은 척해야 하는 걸까? 박민후는 당장 이 손을 놓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아주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속으로 그를 원망했다.
이수현, 우리 오늘 되게 좋았잖아.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같이 카페도 가고 모른 척 손도 잡아 보고 네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 뻔도 했다. 그리고 같이 영화도 보고 팝콘도 나눠 먹었지. 나는 정말 좋았어.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기분이었거든. 내가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 모든 게 이렇게… 이렇게 이런 마지막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어? 난 그것도 모르고 주책맞게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고 기뻐서…. 장기가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떨려서 속이 메스꺼웠다.
그런데 문득 이게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너에게 이 마음을 고백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이 뒤를 짐작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박민후는 대답하고 싶었다.
“…어.”
아, 좀 더. 좀 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좋아해.”
그게 안 되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 본 것도 처음이라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너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지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그런데 넌 아니잖아.”
차마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지만 박민후는 제 말을 듣고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조금 궁금해서 결국 가린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넌 나 안 좋아하잖아.”
…그러면 그렇지. 제 고백에 이수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저를 직시하자 박민후는 제가 실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슨 기대라도 한 걸까. 이럴 걸 이미 짐작했으면서 혹시나 하고 조금 기대라도 했나 보다. 이수현은 평소랑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웃어야지. 웃어야 하는데…. 표정이 점차 무너져 내렸다. 더는 웃는 것도 힘들어 억지로 잡아 올린 입꼬리가 축 처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꾹 감았다.
“젠장… 이딴 식으로 말할 거라고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야, 눈치챘으면 좀 더 모른 척해 주지 그랬어. 그냥 모른 척해 줬으면 좋았잖아. 왜….”
박민후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맞겠지. 굳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가 뭔지 짐작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하루 이틀 사이에 내 감정을 알아챈 게 아닐 거야. 그렇다면 이 감정을 접으라고…. 더 이상 좋아하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어서 말을 꺼낸 걸까?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러게.”
“하하…!”
하지만 이수현의 대답은 겨우 ‘그러게.’였다. 그러게. 그러게. 그러게. ‘그러게’란 단어가 이리 비참했나. 박민후가 어이없어 소리 내 웃었다. 웃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눈가가 움찔거렸다. 아, 결국 내 입으로 내가 생각한 걸 내뱉게 되는군.
“이제는 널 좋아하지도 말라고 하게?”
후두둑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은 이미 제 의지를 벗어났다. 정말이지 비참했고 쪽팔리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이까짓 게 뭐라고. 겨우 제 감정 하나 거절당하는 게 뭐가 그리 무섭고 슬퍼 이리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이 모든 게 그저 우스웠다. 천하의 박민후가 이수현이라는 사람 한 명에게 좌지우지된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농담하지 말라는 대꾸가 돌아올까. 꿈이라도 꾸냐는 타박이 들어올까. 박민후 본인도 때때로 이런 제가 낯설고 우습고 어색하니 말 다 했지.
“…아, 진짜 꼴사납게.”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누군가 수도꼭지를 망가트린 것처럼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다. 이제 그의 소매는 눈물 자국을 넘어 누가 물이라도 엎은 것 같았다. 축축한 천이 피부에 달라붙는 게 기분 나빴다. 소매로 비빈 눈가는 조금 붉었다. 아, 자꾸만 눈물이 차올라 흐릿해지는 시야로 이수현의 얼굴이 뭉개져 보였다.
그는 뭐라 입을 열려고 했으나, 박민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고백을 했지만, 아직 이수현의 대답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뒤에 말해 주라. 좀 더 내가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을 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이수현이 제게 할 말이라면 아주 뻔했으니까.
그러니 뒷걸음질 쳤다. 제가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얌전히 이수현이 저를 거절하는 말을 꺼내는 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했나? 싫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런 주제에. 제 발로 그의 곁을 도망쳐 놓고서 결국 박민후는 이수현의 곁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매일같이 그가 잠들 때까지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 앉아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밤이 되고 12시가 지나 날짜가 바뀌고도 또 한참을 기다린 뒤, 늦은 새벽녘에 기척을 숨기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이수현이 자는 모습을 한차례 보다가 나왔다. 술렁거리는 가슴은 알기 싫은 이유로 아려 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흐르면서 박민후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박민후가 없어도 이수현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늦은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책을 보기도 하고 또 영화를 보다가 또 밥을 먹고 때때로 외출도 했다. 저와 둘이 가던 마트에 이제는 혼자 가고 필요한 걸 사서 집에 돌아온다. 그는 저녁을 먹고 조금 놀다가 잠이 든다. 매일 같은 일상 속에 제가 빠졌지만, 그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수현은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그에 곁에 박민후가 없다고 해서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
그게 박민후를 괴롭게 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동안 그런 버릇이 들어 버렸다. 그는 제가 없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제가 없는 편이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 사실에 박민후의 표정이 울 듯 일그러졌으나 겨우 그뿐이었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여기 이렇게 멍청하게 앉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입술을 짓씹는 것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네가 곁에 없어 하루하루가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평범하게 숨을 쉬는데 때때로 숨이 멎는 기분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결국 박민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 이수현이 제게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꺼낸 뒤로 언제든 그가 제가 모르는 어딘가로 훌쩍 사라져 버릴까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며 곁을 지키고 있었던 거였지만…. 이제는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오히려 다시 돌아가는 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여태 제 욕심에 이곳에 그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 제가 할 일이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이러고 있어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잠깐은 괜찮겠지. 금방 해결하고 다시 돌아오면 괜찮겠지. 문제가 생기면 제 소환수가 알려 줄 터였고, 이수현이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려면 헛짓거리 하는 놈들을 서둘러 해결해야 했다.
김세현에게 아무것도 안 할 거라 그리 말했건만… 하는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안 들었으나 새보다는 협회 쪽이 그나마 나았으므로,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수현을 한차례 응시하던 박민후는 그곳을 벗어났다.
“…금방 올게.”
그렇게 현재 박민후는 4대 길드와 그 아래 소속된 산하 길드, 그리고 협회와 함께 새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새들의 수는 생각 이상으로 많았고 그들은 생각보다 더 미쳐 있었다. 그들은 헌터들에게 붙잡힐 뻔하자 제 생명을 제물로 바쳐 던전을 강제로 열었고, 그도 아니면 이미 열린 던전으로 들어가 브레이크를 터트렸다. 그 모습에 헌터들은 혀를 내둘렀다.
“던전 게이트를 강제로 여는데 제 목숨을 제물로 삼다니…. 정말이지 미친 게 분명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걸까요? 원래 목적이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거라면서요. 그러면 뭐 해 죽으면 끝인데.”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느니 헛소리를 하더니만…. 이건 좀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강제로 열린 게이트를 청소하던 현장에 투입된 헌터들이 소란을 떨었다. 그리고 상황을 보러 온 레라인 길드 마스터 유진이 입을 열었다. 제 부하들의 의문은 지금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던 의문이었다.
“일단 그들의 목적은 이른바 ‘평화로운 세계’가 맞을 겁니다. 5년 전 벌어진 대격변을 재현하고 그걸 박민후 헌터가 해결하면 신께서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를 우리에게 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거죠.”
“마스터, 그런 허울 좋은 이야기가 말이나 돼요?”
“말도 안 됐죠. 우리는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더한 욕심은 피를 부를 뿐이에요.”
거기에 대답한 건 어느새 다가온 김세현이었다. 그의 뒤를 느긋하게 박민후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헌터들이 박민후의 존재에 몸을 떨며 긴장했다.
“오셨군요. 미스토어, 박민후 헌터.”
“이쪽은 끝이 났나요?”
“예, 아직 던전이 남았습니다만, 이번에 나타난 놈들은 대부분 잡아들였죠.”
“다행이군요. 그럼 지금 던전은….”
“일단 평소처럼 조를 나눠 레라인과 재버워크 그리고 피에타가 팀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한 군데 등급이 S급인 곳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 박민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박민후는 절로 얼굴을 찡그렸다. 도와준다 하니 아주 제대로 부려 먹을 생각인가 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혼자서 세계 곳곳에 흩어진 새들을 쫓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쩔 수 없이 이 정도 같잖음은 참아 줘야 했다.
“내가 가죠. 거치적거리니까 다 나오라고 해.”
***
유진에게 던전 좌표를 건네받은 박민후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그림자를 몇 번 건너뛰어 박민후가 도착한 곳은 광화문이었다.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던 헌터들이 광화문 한복판에 나타난 거대한 게이트를 보며 침음했다. S급 게이트는 그 기세부터가 남달랐다. 게다가 자연적으로 열린 것이 아니다 보니 어딘가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하급 헌터들은 오스스 몸에 소름이 돋고 자꾸만 몸이 굳어지는 상황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게 터지기라도 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사태가 벌어질 터였다. 기자들이 셔터를 누르는 소리와 구경꾼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소리로 거리는 소란스러웠다.
그때 어둠 속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분명 거리는 소란스러웠다. 그러니 그런 조그마한 발소리 따윈 들릴 리도 없을 텐데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발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을 가르고 박민후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 박민후다!”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사람들은 발소리의 주인공이 그 ‘박민후’란 사실을 깨닫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에 기이한 열기. 그래, 기이한 열기가 감돌았다. 열기에 휩쓸린 사람들은 이상한 용기가 샘솟았다. 그들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너 나 할 것 없이 박민후에게 다가왔다. 그를 한 번이라도 더 찍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휴대폰을 들이밀었고, 시끄럽게 말을 걸었다.
“박민후 헌터! 여기 좀 봐 주세요!”
“이번 던전 공략은 역시 박민후 헌터 혼자 하시는 겁니까?!”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불온분자들의 테러라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어째서 좀 더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나요?!”
“언제나 당신에게만 뒤처리를 맡기는 4대 길드가 아니꼽지는 않으십니까?!”
“이번 사태의 원흉이 당신이란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에 질타를 피할 순 없을 겁니다!”
“박민후 헌터에게 이 정도의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 아닌가요?!”
“업무 태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박민후 헌터!”
“박민후 헌터!”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목소리들이 한데 뒤섞이자, 그건 더 이상 말이 아니라 귀를 아프게 하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박민후는 개미 떼처럼 몰려든 인간들이 자신을 향해 뭐라 내뱉는지 뭉개지고 뒤섞인 소리 때문에 이젠 구별도 되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 시끄러웠다. 남들보다 한층 예민한 감각들 덕분에 머리가 아파, 그의 얼굴이 짜증 난다는 듯이 구겨졌다. 귓가에 날파리가 날아 앉은 것만 같았다.
“시끄러워.”
그러니 박민후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대중을 향해 짓씹듯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싸늘한 한마디에 일순 세상이 고요해진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별거 아닌 말 한마디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저기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크게 잇따라 들려왔다. 방금까지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던 게 거짓말인 양,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찬물을 뿌린 것처럼 단숨에 가열된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박민후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그런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은 겁을 집어먹었다.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쓸려 불나방처럼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그에게 다가섰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거기.”
“예, 예?!”
박민후가 멀찍이서 이쪽을 방관하고 있던 협회의 헌터를 불렀다. 제가 불린 줄도 모르던 헌터가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박민후가 혀를 찼다.
“뭘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습니까. 관리 안 합니까? 일 안 해? 이런 일 하루 이틀 해? 정신을 어디 던져 놨으면 저놈들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오는데 막을 생각도 안 하고 멍이나 때려!”
“아니, 그게…. 박민후 헌터, 말을 조심하시는 게….”
그렇게 말하면서 협회의 헌터가 눈을 굴려 주변의 포진해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박민후는 그 태도가 더 짜증이 났다.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박민후가 짜증을 담아 쏘아붙였다. 최대한 차분히 말을 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게 며칠째인지도 가물가물했다. 이수현의 곁을 벗어나니 한동안 잠잠했던 불면증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도졌고, 덕분에 피곤은 쌓여만 갔다. 거기에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이 잠을 못 자 한층 날이 서던 중, 이렇게 쓸데없는 상황 속에 있자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짜증이 나는데 남을 위해 좋게 말해 줄 마음은 먼지만큼도 없었다. 박민후가 미간을 누르던 손을 내리면서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떴다. 드러난 그의 눈이 짐승의 것처럼 번뜩였다. 그 시선이 그를 구경하는 구경꾼들에게로 향했다.
“하, 시발. 구경났어? 언제부터 게이트 앞이 이런 관광 명소가 된 건지 모르겠네….”
평소 언론에서 박민후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다 보니, 이따금 이런 일이 생겼다. 관계자들도 아닌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그렇게까지 성격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닐까?’ 하며 은연중에 ‘이 정도 괜찮겠지.’ 하고 선을 넘어 버리기도 했다. 뭐, 그 결과는 참담했지만.
이곳의 수많은 사람은 저마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저희는 그의 팬이었고, 또 기자였고, 일반인이었으니 박민후 같은 헌터가, 위대한 영웅이 우리가 조금 뭐라 한다고 성질을 부리진 않겠지. 게다가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더 조심하겠지, 그런 아둔한 생각으로 움직였다. 다른 헌터였다면 틀린 생각도 아니었지만 상대는 박민후였다. 여론이 어떻든 말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꺼져!”
박민후가 사납게 일갈했다. 구겨진 얼굴을 풀지 않은 채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게이트 앞에 모여 있던 헌터들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박민후의 눈치를 봤다.
“설명해.”
“예, 예! 그러니까 이번 던전은 <잠에서 깨어난 어둠의 주민>이라는 던전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닌지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놈입니다. 그래서 던전 이름 앞에 ‘잠에서 깨어난’이 붙은 거 같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던전 공략을 하는 게 좋겠지만 아무래도 S급 던전인지라, 그게 좀 저희끼리는 무리랄까…. 등급 제한이 걸리기도 해서 말입니다. 아! 던전 자체는 일반적인 던전입니다! 평범한 축에 속하는 던전이라 박민후 헌터께서도 별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오는 애들은 곤충형 몬스터라네요. 그나저나 박민후 헌터께서 빠르게 와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진짜 저 불길한 게 터지면 이 광화문 일대가 쑥대밭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빠르게 쏟아지는 설명을 듣던 박민후는 삐딱하게 선 상태로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터트리지?”
“…예?”
“차라리 터트리라고.”
“그게 무슨…!! 그런 짓을 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러십니까! 여기엔 일반인도 많다고요!”
“저게 터질 때까지 남은 시간이라고 해 봐야 끽해야 앞으로 한두 시간? 그 정도만 있으면 저거 그냥 터질 텐데.”
박민후가 무심히 그들의 뒤편에 있는 게이트를 가리켰다. 고작 한두 시간 후면 터질 게이트를 굳이 들어가서 처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저 이 앞에서 나오는 놈들을 때려잡으면 그만인 것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박민후 혼자만의 생각인 듯싶다.
“차라리 터트리는 편이 효율적이야. 던전 안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되지?”
“그! 그, 그러니까…”
하급 헌터는 무언가 반론을 꺼내고 싶었으나 뒤이어 따라온 박민후의 물음에 허둥거리며 손안의 태블릿을 뒤적였다. 하급 헌터는 당황했던지라 손이 자꾸만 엇나가고 분명 글을 읽고 있는데도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가만히 그 꼴을 보다가 저러다 날 새지 싶어 박민후가 하급 헌터의 손에서 태블릿을 뺏어 들었다.
“이곳의 두 시간이 저곳의 30분인가….”
“박민후 헌터!”
“뭐.”
이번에는 다른 헌터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박민후를 불렀다. 박민후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휙휙 손가락이 화면을 내렸다 올렸다 하며 자료를 확인했다.
“S급 던전을 그냥 두자니요! 저게 D급 이하였다면 물론 저희도 그런 식의 방법을 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건 S급이잖습니까! 괴물들 중에서도 가장 머리 꼭대기에 있는 놈들이라고요! 만약 한 마리라도 놓쳤다간…!”
“그래서? 그것 말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나? 응?”
박민후가 언뜻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띠고 물었다. 그 모습에 살짝 안심한 헌터들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저희는…. 박민후 헌터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들어서….”
“아하.”
“당연히 박민후 헌터가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인력을 분산해 이곳에 하급 헌터들밖엔 남지 않았습니다!”
“근데 이거 어떡하지? 난 해 주기 싫은데. 왜냐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쏙 들어가게 행동하는 네놈들이 너무 좆같아서.”
박민후는 여전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지만, 그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처리할 생각을 했어야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아시잖습니까! 저희는 모두 하급 헌터라서 상급 던전에는 등급 제한 때문에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조금 있으면 브레이크가 터질 텐데! 저희가 그걸 어떻게 막습니까!”
“헌터가 여기 있는 놈들이 다는 아닐 거 아냐. 아까 남아 있던 놈들로도 충분히 시도는 해 볼 수 있었겠지. 그런데 시도는 해 봤나? 아니지? 너희들 중에 등급 높은 놈들이 아예 없진 않았을 거야. S급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최소 등급은 B급이다. 이곳에 B급이 아무도 없나? 아닐 텐데.”
박민후가 그렇게 말하며 눈앞에 이들을 비웃었다.
“널리고 널리게 B급이지. 그래, 나도 알아. S급 던전, 평범한 B급만으론 힘들지. 근데 말이야, 언제부터 S급 던전을 공략하는 헌터가 반드시 S급 헌터여야 한다는 법이 정해졌지? 니들 머리에 든 건 우동 사리야? S급은 흔하지 않지만, 그 아랫것들은 흔하잖아. 솔직히 널리고 널렸어. S급이 없으면, 거기에 준하는 A급도 많다. 하물며, 수도 S급보다 많다. 파티를 꾸려서 들어가진 못할망정 지금 뭐라 개소리를 하는 거야?”
박민후의 비난에 헌터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S급 던전 같은 경우에는 보통 S급 다음으로 가장 강한 A급 헌터가 파티장을 맡아 입장이 가능한 헌터를 수십 명 선발한 뒤, 통솔해 공략을 진행하곤 했었다. 물론 그것도 거의 5년 전의 일이었지. 요즘에는 그럴 일이 많이 줄어든 추세였다. 공략할 던전이 균등해지고 높은 등급의 던전 출몰이 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전에는 박민후가 말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공략을 했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놈들 말이 아주 좆같다는 걸 좀 알겠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 뒈졌을 리도 없고 귀찮다 뭐다 하고 발이나 빼고 있었던 거겠지.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 끌다 이렇게 터질 때가 돼서야 이 난리를 치는 게 참 웃기지 않나? 응? 그렇지 않냐고.”
던전 게이트가 열리는 수가 5년 전 그날을 기점으로 현저히 줄어들고, 그중에서 S급은 오늘에 와선 보기 드문 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모든 게 끝나고 찾아온 평화에 찌들어 살던 헌터들 또한 안전 불감증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고비를 넘긴 인간들은 나태해졌다. 그야 그들이 사는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해결해 줄 절대적인 아군이 있었다. ‘영웅이 존재하는데 굳이 우리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그런 식으로 잔머리만 굴리지 말고 뭐라도 좀 해! 제발, 부탁인데. 그렇게 나만 믿고 이러다 내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아주 세상이 뒤집히겠어?”
“그런 일이 생길 리 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합니다…!”
“박민후 헌터가 없는 세계라뇨! 그런 말도 안 되는!”
박민후가 짜증스럽게 내뱉는 말에 그 옆에 있던 헌터들이 소리쳤다. 그들이 뱉은 말에는 강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5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모든 인간이 박민후를 신앙처럼 믿었다. 그들에게 박민후는 더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고,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무언가에 가까웠다.
몇은 그를 두고 괴물이라 칭하고, 몇은 그를 보며 신에 버금간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가 사라지는 미래 같은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박민후를 쓰러뜨리는 자가 존재나 할까. 신이 와도 그것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희의 미래도 안전하겠지. 지금 같은 상황도 그가 있으니 모두 해결될 터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며 안심한다. 박민후의 적의가 그들을 향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믿음이었다.
“…뭐, 나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박민후는 그런 그들을 보며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결국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들이 저를 어찌 여기는지 너무 뻔했기에 그가 아무리 뭐라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관계의 단절은 상대와의 대화를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곳에 머물러서 저 멍청한 놈들을 상대하기도 진이 빠지고,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던 참이니 마침 잘됐다 싶기도 했다. 박민후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누군가 알아서 받겠지.
“그럼, 내가 다시 나왔을 때 아까 같은 상황은 없길 바랍니다.”
“예!!”
그 말을 끝으로 박민후는 게이트 안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집어넣었다.
***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수백, 어쩌면 수천일지도 모를 눈들이 일제히 박민후를 직시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박민후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동굴 벽에 박혀있는 발광석의 빛을 피해 어둠 속에 숨어 저를 지켜보는 몬스터의 수는 가히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적의를 가득 담은 붉은 눈들이 입구 앞에 서 있는 박민후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저리들. 뭐가 단순 던전이야, ‘몬스터 웨이브’잖아.”
기가 찼다. 정말이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박민후가 헛웃음을 지으며 입고 있던 점퍼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점퍼 주변으로 모래 먼지가 일었다. 준비 운동을 하듯 목을 좌우로 꺾으며 소매를 걷어붙인 박민후가 안전지대 밖에서 이제나저제나 그를 공격하기 위해 눈치를 보는 몬스터를 보며 사납게 웃었다.
“뭐, 좋다 이거야. 빨리빨리 끝내자고.”
가벼운 걸음으로 박민후가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꼴에 S급이라고 몬스터들은 박민후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겁도 없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곤충형 몬스터는 특유의 다닥다닥 달린 다리들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사방에서 박민후를 포위했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닌지라 박민후가 인상을 찡그렸다.
몬스터 웨이브는 끝도 없이 몰아치는 거센 파도와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안 보이고,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는 몬스터들의 파도는 헌터들이 가장 싫어하는 던전의 종류기도 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던전인 이상 끝은 존재했다. 다만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가 다른 던전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헌터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체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다. 그러니 오래 끌수록 버티기가 어려웠다.
몬스터 웨이브를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경우는 건물이나 엄폐물이 존재할 때였다. 하지만 이곳은 거대한 공터였다. 던전은 마치 펜타곤 모양의 거대한 링을 연상케 하는 구조였다. 가장 까다로운 유형 중 하나로, 보통 실패가 당연시되는 유형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몸을 숨길 곳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몬스터 웨이브 던전은 보통 시간제한이 걸려 있는 타임 어택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모든 몬스터를 잡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 동안 살아만 있으면 누구나 클리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정해진 조건에 관해서는 직접 찾아 나서야 했지만. 보통 던전 내부에 그려진 문양이라든지, 자잘한 사물의 움직임. 혹은 몬스터의 종류나 행동 패턴이 힌트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 그걸 알아내서 참고하면 된다지만….
“…그런 건 귀찮지. 그냥 다 잡을 수 있는데, 굳이 시간 끌 필욘 없잖아.”
게다가 어차피 주어진 시간도 별로 없었다. 박민후가 한쪽 발을 살짝 들어 올린 뒤 강하게 제 그림자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그의 발아래서 웅크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마치 가지를 뻗듯 빠르게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지면이 점차 어둠에 물들고, 그걸로도 모자라 그림자가 벽을 타고 올라가 던전 벽 곳곳에 박혀있던 발광석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파삭, 파삭. 팍!
어둠을 밝히던 발광석들이 그림자에 닿자마자 일제히 터져 나갔다. 마치 전등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빛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어둠 속에서 몬스터들의 붉은 눈만이 번뜩였다. 이곳의 있는 모든 존재가 암흑 속성을 띠고 있기에 이까짓 어둠쯤이야 박민후에게도 몬스터에게도 별다른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같은 속성끼리의 싸움은 으레 그러하듯, 좀 더 급이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내리찍는 싸움이었다.
찰박.
키익?
상황 파악이 더딘 곤충형 몬스터가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몬스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덟 개의 눈으로 제 발아래를 보니 거기에는 검은 늪이 있었다. 던전 바닥을 가득 메운 검디검은 그림자가 진짜 늪인 것처럼 출렁거렸다. ‘찰박’ 하고 다시 한 번 액체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망자들의 비명 같기도 했고, 공기 중에 울려 퍼지는 진동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런 기이한 소리가 박민후의 발아래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 위에 발을 올리고 있던 몬스터들이 한발 늦게 위험을 느끼고 몸을 물리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나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이미 포진해 있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온몸으로 발버둥 칠수록 그림자는 더욱 빠르게 몬스터들의 몸을 잠식해 나갔다. 순식간의 그들의 다리부터 옭아맨 그림자가 질척하게 온몸에 들러붙었다. 아니, 사실은 발아래가 꺼진 것처럼 그들의 몸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거였다.
마치 그 아래에서 누군가 발목을 붙잡아 끌어 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무저갱으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같은 속성이어도 급이 달랐다. 발악하는 몬스터들을 보던 박민후의 손에서 검붉은 불꽃이 작게 피어올랐다.
화륵.
박민후가 가볍게 손을 털자, 자그마한 불씨가 그의 손에서 떨어져 그림자에 옮겨붙었다. 그 순간 불씨가 그림자를 타고 빠르게 번져 나갔다. 휘발유 위에 떨어진 성냥개비가 거대한 화마로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제 덩치를 키웠다.
그 검붉은 불꽃은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 하는 몬스터들을 집어삼키고 천장을 향해 높이 타올랐다. 불꽃이 몬스터의 겉껍질을 녹이고 살을 익히자, 독을 품은 매캐한 연기와 지독한 탄내가 훅 풍겨 왔다. 곤충형 몬스터의 혈액 속에 흐르는 독이 공기 중에 퍼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독을 머금은 연기마저 그 거대한 화마에 집어삼켜졌다.
불에 닿은 연기는 초록 빛깔로 번쩍이더니, 폭발했다. 연속적으로 터져 나가는 폭발이 화마와 뒤엉켜 땅에 눌어붙은 몬스터들을 태우고 터트려 나갔다.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센 폭음에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박민후는 시선을 돌려 간발의 차로 그림자와 폭발을 피해 허공으로 도망친 날개 달린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손이 갈고리처럼 몬스터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이봐, 피하면 안 되지. 잡으러 가기 귀찮잖아!”
목덜미를 움켜쥔 손이 강철의 버금가는 껍질을 꿰뚫었다. 파열음과 함께 겉껍질이 부서져 내리고 속 안에 숨겨진, 겉보다는 약한 표피를 찢어발겼다. 버둥거리던 몬스터가 목이 잘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과 몸통이 분리되어 땅으로 낙하했다. 아래쪽의 폭발은 멈추었지만, 아직도 불꽃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박민후가 떨어져 내리는 몬스터의 몸을 발판 삼아 다시 허공으로 뛰어오른 뒤 다음 타겟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겁에 질린 몬스터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박민후의 사정거리 내였다. 어느새 뒤를 잡은 박민후가 양 날개를 부여잡고 딱딱한 등껍질을 내리찍듯 발로 찼다. 그 충격으로 그의 손에 붙들린 피막으로 구성된 날개가 순식간에 등에서 뽑혀 나갔다. 날개를 잃어버린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키에에엑!!!!
열 개가 넘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괴로움에 온몸을 바르작거리던 몬스터의 모습이 꼴사나웠다. 몬스터와 같이 추락하던 박민후가 인벤토리에서 재빨리 와이어를 꺼냈다. 그를 피해 높이 날아오른 몬스터의 앞발에 와이어를 던져 휘감고, 그 상태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몬스터의 배를 발로 차며, 박민후가 높이 뛰어올랐다. 얼마나 높이 치솟았는지 순식간에 던전의 천장이 가까워졌다. 천장과 한 뼘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박민후가 허공에서 몸을 돌렸다. 그의 신발 밑창이 단단한 천장을 짚었다.
박민후의 샛노란 눈이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천장을 가볍게 박찬 뒤 그대로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낙하하던 박민후가 손에 들린 와이어를 이용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몬스터의 몸에 와이어를 휘감았다.
카가가강!!
몬스터보다 아래로 떨어진 박민후의 몸 때문에 쇠로 만들어진 와이어가 몬스터의 겉껍질을 긁으며 마찰음을 냈다. 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박민후는 몬스터를 휘감는 반동을 이용해 공중에서 궤도를 바꿔 다른 몬스터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다시 한 번 와이어가 넓게 풀어지며 몬스터를 감쌌다. 던전 벽을 발판 삼아 박민후가 더 높이 뛰어오르며, 같은 행동을 두세 번 반복했다. 어느새 와이어가 거미줄처럼 허공의 수놓아져 허공에 날아다니던 몬스터들을 꽁꽁 묶었다.
키익!?
와이어의 양 끄트머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걷어붙인 팔뚝에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박민후가 어금니를 악물고 그 상태로 와이어를 엎어치기 하듯 앞으로 휘둘렀다. 한 대 뭉쳐져 있던 몬스터들이 굉음을 내며 바닥에 처박혔고, 그 뒤를 이어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킨 박민후가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다음 그대로 아래를 향해 도끼처럼 내리찍었다.
콰과강!!!
던전 바닥 일대가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흙먼지가 비상하고 돌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 아래로 내리찍힌 몬스터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지거나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단단한 와이어가 끊어져 허공에 나풀거렸다. 박민후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다시금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직시했다. 그의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갔다.
“다음.”
캬악!!
다리에 다시금 힘을 주자 바닥이 움푹 파였다. 그와 동시에 박민후가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징그러운 수십 개의 눈을 번뜩이는 몬스터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그 몸을 밟고 뛰어올랐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단검을 든 손이 허공을 가르자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 검격에 박민후를 향해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썰려 나갔다. 독을 품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다시 바쁘게 몸을 움직이던 박민후는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싶었다. 이수현을 만난 뒤로는 휴가라는 이름하에 그저 그의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했었다. 칼이라고는 부엌의 식칼을 잡은 것이 다였고, 이렇게 몸을 움직인 것도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던 그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귀에 익은 기이한 울음소리가 어느새 동굴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박민후의 손에 죽어 나가는 몬스터의 비명보다 그림자가 우는 소리가 더욱 커, 기어코 몬스터의 비명마저 집어삼켰다. 박민후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명과도 같은 소리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의 발아래 넓게 깔린 어둠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박민후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역시 그때 느꼈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 이수현을 찾으러 비를 맞고 뛰어다니던 그날부터 그 생각은 조금 더 강해졌다. 아니, 그 전부터였을지도 몰랐다.
또다시 심연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박민후가 잠시 멈칫한 사이 그의 배후에서 낫처럼 휘어진 날카로운 앞다리가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박민후가 서둘러 단검을 휘둘렀다.
캉!!
팔이 저릿해지는 무게에 박민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단검의 날이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한두 번 쓰면 끝나겠다며 눈앞에 몬스터를 발로 차 멀리 날려 버리고는 박민후가 혀를 찼다. 여전히 귓가를 괴롭히는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아팠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눈의 초점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게 되면 그 힘에 집어삼켜지지 않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내면과 싸워야 했다.
박민후는 힘을 얻은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심연을 거부해 왔다. 심연의 목소리는 달콤한 속삭임과도 같았다. 이곳에 몸을 던지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고, 너는 편안해질 거라 말한다. 이곳은 너만을 위한 요람이며, 나의 목소린 너를 위로하는 자장가라고 귓가에 속살거린다.
헛수작이 분명했다. 그저 언제든 제 몸을 집어삼키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았다. 박민후가 힘을 키우고 성장해 나가면서, 그 힘도 그와 같이 성장해 나갔다. 어느 순간 그것이 제게 의지를 표현해냈을 때 그건 어디까지나 의지를 표현하는 거였지, 아직 이렇다 할 행동은 없었다. 그러니 저항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안심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잊을 정도로 한동안 잠잠했다. 모든 것이 끝이 난 이후에는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 감감무소식이었다. 하지만 기회를 엿보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는 듯이 심연은 박민후가 힘들어하는 그 순간을 노리고 다시금 머리를 치켜들었다.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제 슬슬 포기하는 게 어떠냐고 더 강한 사념을 전달했다.
이리 오라고, 어서 오라고 박민후가 몸을 움직일수록 힘을 끌어다 쓸수록. 자꾸만, 자꾸만 박민후가 그간 억눌러둔 무언가가 튀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자신은 아직 인간이었고, 인간일 테니까. 그러니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계속 그래야 했다. 자신이 왜 스스로 목줄을 찼고, 자신이 왜 짜증을 내면서도 인간들 무리에 섞여 있는가를 매일같이 상기해야 했다.
키악!!
“…징글징글하네!”
연이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도륙 내며 박민후가 짜증을 냈다. 생각을 돌려야 했다. 그래. 이수현을 생각하자. 제가 보고 싶어 하는 그를 생각하자. 그가 있을 그의 보금자리를 떠올리며, 이수현이 보내고 있을 평화로운 일상을 생각하자. 그럼 괜찮아질 것 같았다.
박민후는 끊임없이 이수현을 떠올렸다.
몬스터의 머리를 가르고, 수십 개의 다리를 절단하며, 그가 휘두르는 힘을 못 이겨 기어이 부러진 단검을 몬스터의 눈에 쑤셔 박으며, 망설이지 않고 비어 있는 손을 뻗었다. 몬스터의 겉껍질 사이사이에 미세하게 숨겨진 틈새에 냉큼 손을 쑤셔 넣고 힘을 주어 뜯어 버리는 와중에도 온통 머릿속에는 이수현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기계처럼 몸을 움직이며 오직 그만을 생각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나. 또 그 거지 같은 볶음밥만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또 영화를 보고 있으려나. 내가 너와 또 영화를 보는 날이 올까? 네 대답을 듣기 무서워 도망쳤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도망만 칠 생각은 없었다. 새를 전부 잡아 꺾은 후 네게 가야지.
그 뒤에 제대로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서 좀 더 제대로 고백해야지, 그때 그 고백은 좀 우스웠잖아. 좀 바보 같았고, 한심했지. 그러니 다시 한 번 고백하고 나면 그땐 괜찮아질 거다.
그때는 담담하게 이수현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이번엔 울지 않겠지. 하지만, 구질구질하겠지만. 너와 친구라도 하자고 하면 이수현은 어떻게 행동할까? 네 곁에 있게만 허락해 달라고 빌면, 못 이기는 척 자신의 말을 들어줄까?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곁에 있게 해 달라고 네게 빌고 싶었다.
***
쿠쿵!
흙먼지가 나풀거렸다. 열 개가 훌쩍 넘는 번뜩이던 붉은 눈이 까무룩 감기고, 온몸을 바르작거리던 집채만 한 몬스터의 몸이 기어코 뒤로 넘어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쥐 죽은 듯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하아.”
후각을 마비시킬 것만 같은 피비린내 속에서 박민후가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긴 뒤 찾아온 적막 속에서 ‘뚝뚝’ 박민후의 손을 타고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지천에 깔린 피 냄새가 고약했다.
눈을 감고 그 고요를 만끽하던 박민후의 귓가의 날벌레들이 웅웅거리는 듯한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의 발아래에서부터 뻗어 나가 던전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던 그림자가 한 차례 크게 꿀렁거리더니 순식간에 그곳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크게 부푼 그림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시 줄어들더니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와 평범한 그림자인 척 박민후의 발아래에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산처럼 쌓여 있던 몬스터의 시체들이 자취를 감췄다.
박민후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드러난 그의 눈은 어딘지 초점이 나가 있었다. 느리게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후에야 박민후는 ‘평소의 박민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쯤엔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박민후의 눈이 평소와 다름없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 순간 세상이 ‘파삭’ 소리를 내며 깨어져 나갔다.
***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큰길로 나갔다. 겨우 며칠밖에 바깥에 나오지 않았을 뿐인데 내가 알던 날씨보다 더욱 추웠다. 목도리를 챙기는 거였는데, 하긴 그럴 정신이 없었다. 장갑도 양말도 무엇 하나 챙기지 못했다. 헝클어진 머리며 대충 걸친 코트며, 그 안에 안 어울리는 면 티를 입은 모습이 다른 사람이 볼 때 퍽 우스꽝스러울지도 몰랐다.
“후우….”
숨을 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허공에 퍼졌다. 정말이지 하루 사이에 기온 차가 너무 심하게 변한 것 같았다. 추워. 양말을 신지 않은 발이 시렸고, 목도리를 두르지 못한 목이 추워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코트 깃을 여미며 손을 주머니에 넣고 신발 안쪽에서 발가락을 연신 움찔거렸다.
택시 잡기가 이리 힘들었던가. 몇 번이고 내 앞을 쌩하니 지나가는 차들이 야속했다. 택시가 보이면 주머니에서 꺼내기 싫은 손을 억지로 꺼내 흔들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이럴 때만 꼭 반대편에는 빈 택시들이 많이 지나가는 거 같아, 길을 건너 반대편에서 잡을까 고민을 했다. 코끝이 시렸다. 이러다 감기에 걸리는 거 아닐까? 목감기만은 제발 참아 줬으면 했지만, 목도리도 두르지 않은 상태로 쇄골까지 들어차는 찬바람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끼익!
겨우겨우 택시를 잡았다. 제 앞에 멈춰 선 택시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택시를 기다리던 그사이를 못 참고 몸이 얼어붙었는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짜증스레 손잡이를 당겼다.
“헌터 협회로 가 주세요.”
택시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면서 목적지를 말했다. 차 안은 바깥의 공기와 다르게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 놔 오히려 더웠다. 훅하고 열기가 몸에 들러붙어 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이 볼만 불그스름해져 웃겼다. 덕분에 얼굴만 더워져 손으로 대충 볼을 문지르고 ‘툭’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어둑했다. 도시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든 것만 같았다. 우중충한 도심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아, 비 맞기 싫은데.
박민후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 같다고?
나는 빙 돌려 말하는 재주가 없었기에 직설적으로 묻는 수밖에 없어 골치가 아팠다. 다짜고짜 그러면 박민후 성격에 믿지 않을 거 같고, 또 저번처럼 도망칠지도 몰랐다.
게다가 박민후는 뭐랄까, 나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봐라, 조금이라도 기대했다면 그렇게 휙 하니 나를 내버려 두고 도망가지도 않았겠지. 만에 하나라도 내가 저를 좋아할 거라는 그런 생각을 애초에 못 해 본 것처럼 보였다.
‘넌 나 안 좋아하잖아.’
…그러니 머뭇거리는 내게 그렇게 확답을 했겠지. 여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그런데도 너는 날 좋아했다.
그간 박민후가 내게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그건 너무나 명확했다. 정말이지 내 어디가 그리 좋다고, 이상한 놈. 사실 나는 그에게 약간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박민후’라는 인간을 먼저 접한 건 그가 주인공인 소설이었으니까. 소설 속에서 묘사된 박민후에 대한 것이 기억으로 남아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몰랐다.
눈앞에 있는 박민후를 보며 ‘박민후라면 이럴 거야.’ 하고 ‘이런 건 그답지 않아.’ 하며 멋대로 재단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박민후는 소설 속에서 묘사되던 것처럼 성격 파탄자 같지는 않았다. 뭐, 성격이야 나쁘긴 했지만. 그래도 의외로 정중했고, 감정을 모른다고 서술했던 것치고는 나보다 더 감정에 충실했으며, 무뚝뚝하기보단 말도 많았다. 게다가 주방에 서 있던 그를 봤을 때는 정말이지 놀랐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은연중 박민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착각이었고, 난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 나아가 어쩌면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 모든 게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박민후는 내게 더 이상 활자 속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사람이었으니까. 아니면, 그렇네. 내가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그 뒷부분에서 박민후의 성격이 조금 유순하게 변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만이 명확했다.
“이거 참, 차가 좀 막히는데…. 그냥 여기서 내리지 그래요?”
상념을 깨부순 건 혀를 차는 택시 기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기대고 있던 몸을 바르게 피고 앉으며 물었다.
“…다 왔나요?”
“예, 요 앞이야. 저기 보이죠? 검은 빌딩.”
“아, 예. 보여요. 그러면 여기서 내릴게요.”
“그럽시다. 저 앞까지 가느라 헛돈 나가면 그렇잖어?”
헌터 협회 바로 앞에서 내렸으면 좋았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이상하게 차가 막혔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은 더 남은 것 같은데 이상하다며 혀 차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윽고 클랙슨이 우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툭툭 핸들을 두들기는 택시 기사를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협회 건물은 차 안에서도 바로 보였다.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으니 여기서 내려서 가는데 어떠한 지장도 없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카드로 결제를 끝마치고 택시에서 내렸다.
탁! 소리 나게 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협회에 가서 일단 박민후가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어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걸 나에게 쉽게 알려 주려나 모르겠다. 차라리 안면이 있는 차주영이나 강유람을 만난다면 일이 쉬워질 것 같았지만, 그들이 협회에 상주하는 것도 아닐 테니 운이 따라 줘야 했다. 둘 다 협회보단 소속 길드 건물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 차라리 협회가 아니라 두 사람이 소속된 길드 쪽으로 가는 게 더 좋았을 거 같은데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왜, 그런 게 있지 않은가. ‘헌터 협회’라고 명시하니 왠지 헌터들은 모두 여기서 관리할 거 같고, 소재지도 파악하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게….
“이수현 씨?”
그때였다. 막 협회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내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내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
쾅!
“윽!”
벽으로 밀쳐진 충격으로 골이 울렸다. 시야가 점멸하듯 깜빡였다. 억센 손아귀에 억지로 틀어진 어깨에서 우두둑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나는 비명이 나올 것만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입 안의 살을 깨물었는지 피 맛이 살짝 났다. 볼에 닿는 벽이 지나치게 차가워 몸에 소름이 돋았다.
“쉿.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행동과 다르게 나긋하기 짝이 없었다. 협회 건물로 향하던 도중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었다. 다짜고짜 내게 웃으며 다가온 남자는 덥석 내 손을 붙잡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몸을 물리려는 찰나 순식간에 세상이 빙글 돌더니 시야가 뒤바뀌었고, 그리고 현재 어딘지도 모를 골목길에서 이렇게 벽에 짓뭉개지는 중이었다.
나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붙잡힌 팔을 힘껏 움직였지만, 역시나 꿈쩍도 안 했다. 짜증 나. 아마 등 뒤에 있는 괴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세게 잡고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피식거리며 웃지 않았겠지. 그저 살짝 붙잡아 행동을 저지할 생각이었겠지만, 이곳 사람들보다는 연약한 내 몸뚱이는 힘 하나 없는 일반인이 각성자의 손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어깨가 빠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고, 어쩌면 금이 갔을지도 몰랐다.
이 무슨 개 같은 경우인지.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이 절로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나 한숨도 편하게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아주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야 이미 몇 차례고,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내게 벌어질 거라 짐작할 만한 징조가 있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았던 건 순전히 박민후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겪게 된 것도 박민후 덕분이었다. 그러니 절로 구겨지는 얼굴을 막을 수 없었다.
남자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 무뢰한이 나를 해치려고 했다면 1초로 충분했다. 그러니 이 행동은 나를 해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럼 뭘까, 설마하니 금품 갈취가 목적인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굳이 나를 제압할 필요도 없었다. 하니 단순히 납치가 목적인가?
“가만히만 있으면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 발버둥 칠 생각은 버리세요.”
맞나 보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이 무뢰한에게 죽을 걱정은 없으니 한결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이 상황이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았다. 이럴 때면 힘 하나 없다는 게 어찌나 불편한지. 내가 살던 곳에서는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키가 엄청나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평균 이상은 되었고, 시급이 높아 힘쓰는 일을 많이 해 힘도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종이 쪼가리처럼 휙휙 붙잡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닐 일이 없었단 말이다.
“그나저나 정말 연약한 몸이네요. 다른 일반인들과 비교도 안 되게, 이게 바로 진짜 ‘평범’하다는 건가…?”
남자가 감탄하듯 중얼거리는 말이 이상했다. 진짜 평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남자의 손에 등 뒤로 팔이 붙잡혀 옴짝달싹 못 하던 나는 남자가 한눈을 판 사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윽?!”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빠르게 튀어 오르더니 내 뒤에 있던 남자를 덮쳤다. 사나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텅 빈 골목에 울려 퍼졌다. 진돗개보다 조금 큰가 싶은 크기의 검은 짐승이 사나운 이빨을 번뜩이며 제 발아래에 깔린 남자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놀랐다.
새끼 모습이 아닌데…?
“젠장, 거기 숨어 있을 줄은…!!”
남자가 저를 씹어 삼키려 드는 소환수의 이빨을 한쪽 팔로 막으며 황급히 발을 들어 올렸다. 검은 짐승의 배를 차고서 그 틈에 훌쩍 거리를 벌렸다. 물어뜯긴 왼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붉은 길을 만들었다. 그것을 한차례 보던 남자가 뭐라 중얼거리자 밝은 빛무리가 생기더니 다친 팔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남자가 회복된 팔을 확인하듯 그 자리에 서서 팔을 움직였다. 시선은 이곳을 향한 채였다.
으르륵!
박민후가 남겨 두고 간 소환수가 내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어째 영 기분 나쁜 미소였다.
“…박민후가 당신을 많이 생각하긴 하나 봐요? 자신의 일부까지 내어주다니, 솔직히 놀랐어요.”
나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머리가 긴지 꽁지머리를 한 남자는 저보다 어려 보였다. 이제 막 스무 살은 되었을까. 하는 짓거리가 어리진 않은 것 같았지만. 외관상으론 그러했다. 남자가 쓰고 있던 굵은 뿔테 안경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검은 머리가 뿌리부터 천천히 색이 빠지더니 백색으로 변했다. 남자가 눈을 감았다. 뜨자 눈꺼풀 사이로 숲을 닮은 녹음이 드러났다. 안경을 접어 허공에 집어넣던 남자가 다시금 밉살스럽게 웃었다.
내 앞을 지키고 선 박민후 1호인지 2호인지가 더욱 크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면 조금 위기감을 느꼈다. 언제든 다시 뛰쳐나가려고 몸을 낮추고 경계를 하는 검은 짐승이 이를 드러내는 이 와중에도 남자가 재밌다는 듯이 웃어 젖혔다.
“박민후는… 암흑 속성이었죠. 이런, 안타깝게도 저는 빛 속성이랍니다!”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스피드였기에 남자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캉캉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 같은 것이 나기도 했다. 여러 차례 불꽃이 튀더니 이윽고 깨갱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검은 무언가가 허공에서 추락했다.
“제가 직접 데리러 왔으니까, 이 정돈 누워서 떡 먹기죠. 다른 사람에게 일을 부탁했으면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갈 뻔했어요.”
당연하게도 그건 박민후의 소환수였다. 시멘트 바닥에 처박힌 소환수가 이윽고 검은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이게 정말인가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눈으로 따라잡지도 못할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인간이나 소환수의 싸움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불시에 불똥이 몇 번 튀기고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빠르게 끝난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뭐 보이는 게 있어야지…. 뭔 일이 벌어졌나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끝나 버리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뭐, 그래도 나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냈다. 다시 말해 도망치는 건 포기했다는 소리였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어디로 도망을 치겠는가. 만약 도망친다 해도 10초도 안 돼서 도로 붙잡힐 게 뻔했다. 그러니 움직이지 않는 왼팔은 두고 다치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우리, 말로 할까요.”
그러자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되게 순순히 붙잡히네요. 뭘까, 뭐 다른 숨겨 둔 게 있으신 걸까?”
“아뇨, 없는데요. 방금 그게 다예요.”
내가 움푹 팬 바닥을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뭐, 순순히 같이 가 준다면 저야 좋죠. 되도록 상처 없이 데려가고 싶었거든요.”
“어깨가 맛이 간 거 같지만요.”
“하하, 미안해요. 그건 제가 지금 치료해 드리죠.”
남자가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금 정리하며, 내게 다가왔다. 내 코앞에 멈춰 선 남자가 허공에 손을 집어넣고 ‘새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며 이렇게 말했다.
“참, 저는 편하게 ‘까치’라 부르시면 돼요.”
새….
저 가면을 본 순간 어딘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새 가면을 마주한 것은 블랙마켓 때 한 번, 지금이 두 번째였다. 그때 그놈과 지금 이 남자. 바보가 아닌 이상 서로 관련이 있다고 밖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새라, 새 가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알고 있는 그 ‘새’와 연관이 있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도 불쑥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을 까치라 소개한 남자가 다시금 내 다친 팔을 붙들었다.
까치가 다시금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그 손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형성되더니 그것이 붙들린 팔 주변에 휘감겼다. 그러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박민후가 전에 내게 사용했던 스킬과 같았으나, 확실히 정반대의 빛 속성을 가진 자가 사용하니 같은 스킬임에도 시각적으로도 촉감으로도 느껴지는 게 달라 마치 전혀 다른 스킬 같았다.
“이제 가실까요? 당신을 기다리는 분이 계신답니다.”
***
까치는 이수현을 데리고 몇 번을 나눠 장소를 이동했다. 까치는 자신이 사용한 것이 텔레포트의 일종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스킬이 자신의 주력 스킬은 아닌지라 등급이 낮아 목적지까지 가는데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쓸데없이 친절하기도 하지. 그에 이수현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까치가 가자는 대로 갈 뿐이었다.
이수현은 솔직히 말해 이 와중에도 까치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치기는 싫으니 순순히 가 줄 뿐이었다. 이수현은 자신이 싫다고 반항하고 도망친다고 해도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일이라 도망칠 의욕도 나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쪽으로 생각이 뻗어 나갔다. 박민후가 남겨 두고 간 소환수는 아까 그 애 한 마리뿐이었는지, 그림자를 몇 번이고 노크해도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가 저를 데리러 올까?
이수현은 내심 궁금했다. 제게 있던 소환수가 역소환되었으니 그 사실을 박민후가 모르진 않겠지. 그렇다면 저를 구하러 올까. 왔으면 하는 마음과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했다. 그가 와도, 혹은 오지 않아도 어쨌든 상황은 그리 좋게 흘러가진 않겠지. 이수현은 생각했다. 자신은 아마 인질이나 협상 도구쯤이지 않을까.
“이리로, 발밑을 조심하시길.”
까치를 따라 도착한 곳은 다 무너진 성당이었다. 까치의 충고대로 무너진 잔해들과 무성하게 자란 풀들 때문에 자칫하면 넘어질 것처럼 발아래가 어지러웠다. 까치는 이수현이 넘어질까 싶은지 그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이수현은 그 손을 썩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 따위가 이곳에서 중요한 건 아니었다. 덥석 잡아당기는 힘은 자비가 없었다. 팔이 얼얼했다. 맞닿은 온기가 소름 끼쳤다.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마치 벌레가 몸을 기어오르는 듯한 그런 기분 나쁜 감각 말이다.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이수현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아, 구역질 나.
안으로 조금 더 들어서자 그곳에는 낯익은 조각상이 있었다. 블랙마켓 분수대에 설치되어 있던 목 없는 조각상, 그리고 거기서 발생한 던전에서 보았던 조각상. 사실 그때까지는 긴가민가했었다. 블랙마켓에 있던 건 목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조각상까지 보자 이수현은 확신했다. 그 세 개가 다 같은 조각상이라는 것을. 똑같은 걸 다 다른 곳에서 세 번째 보았다면 그걸 더는 우연이라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아름답지요. 한때 이 땅에 있었던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조각상이라 하더군요.”
“…그런가요.”
이수현이 그 말에 심드렁하게 말하든 말든 까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귀한 것을 만지듯 그렇게 낡은 조각상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원래라면 이곳에서 만날 예정이었지만, 일이 좀 틀어져서 말이죠.”
까치가 검은 마석을 꺼내 들고 그것을 발치에 떨어뜨렸다. 다른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수현은 까치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까치가 제 팔뚝을 길게 그었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피가 주르륵 쏟아지며 바닥과 검은 마석을 핏물로 적셔 나갔다.
“박민후가 당신을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이런, 자신감이 부족하네요. 내가 장담하죠. 그는 당신을 데리러 올 거랍니다.”
곧이어 대기가 진동했다. 사방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눈앞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탁한 빛을 내는 던전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까치는 제 팔뚝을 치료하면서 이수현을 돌아보았다.
“그의 소환수를 내 눈으로 볼 때까지 나조차 확신하지 못했죠. 설마! 그 박민후가? 말도 안 됐죠. 상상이 가나요? 여태 무엇 하나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던 천하의 박민후가, 그 미친 괴물 자식이 스스로 제 약점을 만들다니요.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남자가 이수현의 뒤로 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앞으로 밀었다. 이수현은 하는 수없이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마 좀 전에 눈치챘겠죠. 소환수가 역소환된 그 순간, 당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걸 말이에요. 그의 소환수는 그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그의 그림자가 박민후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으니까요.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일부를 당신에게 똑 떼서 맡겨 둔 거나 마찬가지죠.”
게이트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수현은 티 나게 한숨을 쉬었다. 까치가 멈추지 않고 이수현을 일렁거리는 공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수현이 던전에 가는 건 이번이 두 번 째지만 매번 자신의 의지로 간 적이 없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시야가 어지럽게 뒤바뀌더니 멀리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이고 멀어지는 바람 사이로 까치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걱정 말아요. 당신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답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해 당신을 데리고 갈 즈음이면 아마 다 끝나 있을 거예요. 이건 그저 준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왜 이런 일을 하죠?”
“왜?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네요.”
이수현이 슬쩍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인 것은 풀이 무성한 도심이었다.
“나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나와 일을 도모하는 모두가 그렇죠. 지금의 평화는 그저 현실을 외면한 거짓된 평화에 지나지 않아요. 진정한 평화란 이런 게 아니에요. 몬스터도 던전도 없고, 각성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요. 당신이 살던 곳처럼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뒤에 남겨진 세상은 이렇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때 사람이 존재했을 게 분명한 흔적들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다만 인간이 사라진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바로 동식물이었다. 까치의 마지막 말에 이수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가려지지 않은 그의 입만이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이요?”
“네! 우리가 바라던 세계가 실존한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죠. 하지만 신께서 거짓을 말할 리 없지 않습니까. 아아, 꿈같군요.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희망이 보였어요.”
그 말에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 이수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여전히 그의 뒤에서 걷던 까치는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안심했죠. 머지않아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거예요! 그러기 위한 준비 과정이죠.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요. 우리가 죽어도 후대는 살아남을 테니까요.”
“이상하네요. 보통은 그런 세계가 보고 싶어서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나요.”
“물론 보고야 싶죠. 볼 수 있다면요. 하지만 원하는 걸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죠. 영광적인 희생이에요. 더욱 나은 미래를 위한 죽음이죠! 저 또한 그걸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목숨을 바칠 거예요.”
이수현의 머릿속에 ‘미친놈’이라는 세 글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정말이지 미친 소리였다. 더 어울려 줄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이수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미친놈의 말에는 답해 주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고요한 도시에 인간은 없었으나 이곳저곳 풀잎이 무성했고, 동물의 울음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기도 하고 혹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이곳은 예전에 이수현이 들어갔던 그 던전과 닮아 있었다. 멸망의 징조라고 말하던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와 비슷했다.
바스락. 바스락.
풀잎이 발에 짓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거대한 빌딩을 지나자 그곳에는 낡은 성당이 존재했다. 던전 바깥에 지어진 것과 아주 유사한 모양새였다. 성당 입구의 잔해를 치우던 까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혹시 그거 아시나요? 여러 다른 세상에는 ‘서로 닮은 곳’이 다수 존재한답니다. 이 성당 또한 그렇지요. 이 성당의 구조와 구조물은 바깥의 성당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닮은 곳끼리는 곧잘 ‘연결’이 된다고 하죠. 던전의 흐름 때문에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 당신도 그런 비슷한 경로로 이 세계에 왔던 게 아닐까요?”
“…….”
“뭐, 그냥 해 본 소리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까치가 짧게 웃고는 이수현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수현은 그 뒷모습을 보며 막연히 생각했다. 서로 비슷한 곳이라….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으로 가던 길에 갑자기 이곳에 오게 되었다. 까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 하면 그가 자신의 집으로 가기 위해 걸었던 길목이 서로 비슷했기에 세계가 연결이 되어,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말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그곳을 다시 찾아가면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자, 나의 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까치의 말에 이수현은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의문을 멈추었다. 앞을 보자 그곳에는 부서진 오르간과 그리고 제단 같은 것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이제 네 번째로 보는 조각상이었다. 낡은 성당의 천장은 대부분이 부서져 있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조각상을 중심으로 태양빛이 쏟아지는 모습이 이수현의 눈으로 볼 때도 무척 신비로운 연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상의 머리 위쪽에 낯익은 ‘새’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이수현이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새를 향해 한 발 더 내디뎠다. 제게 다가오는 이수현을 보며 새의 부리가 벌어졌다.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자애를 담은 듯한 나긋한 목소리가 이수현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오랜만이구나.]
“그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나요.”
이수현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박민후가 이상을 감지한 것은 몇 번째인지 모를 던전을 처리하던 때였다. 분명 이수현의 그림자에 넣어 두었던 그의 소환수가 역소환되어 제게 돌아왔을 때 박민후는 사람들이 흔히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고 표현하던 게 어떤 의미였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 뒤 어떻게 던전을 클리어하고 밖으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필름이 끊긴 것처럼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는 것밖에는. 세상이 암전되고 다시 빛이 들어왔을 때 쇠사슬이 그의 몸 여기저기를 옭아매고 있었다.
“…민…!!”
“그만…!!”
세상이 소란스러웠다. 갑자기 들이켠 숨 때문에 그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박민후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이 끊겼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분명 마지막에 던전에서 몬스터를…. 내가 언제 밖으로 나왔지? 여기가 어디야. 눈동자만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수십 명의 헌터들이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박민후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양손 모두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드문드문 피가 말라 굳어진 손이 뻑뻑하게 당겼다. 자꾸만 핏방울이 손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의 피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대치 상황이었지?
모든 소리가 뭉그러져 들려왔다.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장이, 말이, 언어가 되지 못해 부서지고 뭉개졌다. 분명 듣고 있으나 이해하지 못했다. 박민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숨을 천천히 들이켜고 내쉬었다. 점점 사방에서 소리치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가시면 안 됩니다, 박민후 헌터!!”
“그만두십시오!!”
가지 말라고? 어디를? 아, 이수현. 이수현, 맞아 난 그한테 가고 있었어.
“놔!”
차르륵.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박민후가 거칠게 내뱉었다. 어쩐지 목이 쉰 것처럼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여태 제 팔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이 거슬렸다. 헌터들에게 붙잡힌 팔을 거칠게 털어내자 쇠사슬과 함께 묵직한 무게감이 훅 딸려왔다.
“아악!”
“악!”
힘을 못 이긴 헌터들 몇이 땅을 나뒹굴었다. 원래부터 박민후를 묶어 두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동안 그렇게 사용했던 사슬들이 하나둘 끊어졌다. 여전히 남아있는 쇠사슬이 그의 행동을 저지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할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놓으라고!!”
팽, 소리를 내며 사슬들이 다시 한 번 당겨졌다.
“진정하세요! 당신을 유인하기 위한 수작이라고요!”
“저기는 던전의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릅니다. 당신이 한 번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즈음이면, 이곳의 시간은 1년 이상이 흐를 거예요!!”
미스토어의 마스터 김세현이 거칠게 날뛰는 박민후를 설득하려고 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박민후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았다. 유진이 서둘러 자신의 길드원들에게 실드 스킬을 쓰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유진이 다중 실드를 펼치자마자 일이 터졌다.
“상관없어!!”
마나를 담은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박민후를 묶어 둔 쇠사슬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박민후의 그림자가 사납게 일렁거렸다. 기이한 울음소리가 망령의 목소리처럼 뒤따라 울려 퍼졌다. 거센 흙먼지로 인해 사람들의 시야가 가로막혔다. 유진이 아슬아슬하게 펼친 반투명한 실드에 부서진 쇠사슬의 잔해들이 틀어박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가 펼친 실드 외에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가기도 했다. 사방에서 파열음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내 앞을 막지 마. 한 번 더 붙잡으면 다 죽이고 갈 거다. 내가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야.”
“박민후 헌터!!”
박민후는 남은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 일갈했다. 박민후의 뒤에서 비명처럼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앞의 열려 있는 게이트를 향해 뛰어들었다.
***
쿠구구궁!!!
땅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우거진 수풀이 흔들거리고 낡은 건물들이 와르르 무너져 뿌연 흙먼지가 휘날렸다. 그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거리면 단체로 날아올랐다.
“생각보다 더 빨리 왔네요.”
까치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까치의 말대로 그들이 이 던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제 막 새와 조우했는데 바로 뒤에 박민후로 추정되는 침입자가 나타났다. 이수현도 속으로 감탄했다. 진짜 빨리 왔네. 그게 그냥 했던 말이 아니구나. 그나저나 어떻게 저를 찾은 걸까. 이수현의 시선이 그림자로 향했다. 분명 역소환됐다 그러지 않았나…?
[이거야, 원. 이방인과 뭔 대화도 못 해 보고 끝나겠구나. 조금 더 시간을 끌거라.]
“예, 편히 대화 나누시죠.”
곧장 성당을 벗어날 것처럼 대답한 까치는 몸을 돌려 멀뚱히 서 있는 이수현을 불렀다.
“이수현 씨.”
“예?”
“그것 좀 빌려주시겠어요?”
까치가 성큼 이수현에게 다가왔다. 뭘? 이수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그러자 바로 앞까지 다가와 턱하니 손을 내밀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손에 끼고 있는 거 말이에요.”
“손? 아.”
이수현은 까치의 말을 듣고 제 손가락에 껴 있는 새하얀 반지를 보았다. 있는 줄도 몰랐다. 존재감이 흐릿했달까, 끼고 있는 느낌도 안 났기에 이수현은 곧잘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분명 세수할 때나 이따금 보긴 했지만….
주기 싫은데.
“아, 오해하지 마세요. 박민후를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거지, 내가 그딴 기분 나쁜 마나가 느껴지는 아이템이 정말 갖고 싶어서 이러는 거 같아요?”
“…….”
대답 없이 까치를 보자 그가 이수현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그 힘의 차이 때문에 이수현의 몸이 강제로 끌려왔다. 바로 코앞에서 까치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을 담은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다.
“예의상 물어보는 것뿐이지 당신이 거절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길 바라요. 나는 얼마든지 당신을 ‘치료’할 수 있거든요. 보시다시피 신의 은총을 받는 힐러라.”
“…정말이지. 당신네들 진짜 짜증 나네요.”
“저도 그렇답니다.”
억세게 쥔 손목이 아팠다. 이수현의 왼손에 끼어 있던 반지를 강제로 빼 가며 까치가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털었다. 이수현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붙잡힌 팔목이 아려 다른 손으로 감쌌다. 슬쩍 보니 잡힌 손 모양대로 금세 시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했다.
까치가 그대로 뒤돌아 성당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이수현의 곁으로 새가 포르르 날아왔다. 이수현은 그런 새를 보며 이참에 궁금했던 거나 물어보자 싶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 있었죠. 그 게이트는 ‘세계의 중심이 될 법한 자’를 집어삼킨다고요. 그때 그 게이트가 삼킨 건 저였어요.”
[호오, 타당한 의심이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
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이수현은 그때 새의 말을 듣고 그렇다면 저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곳에 제일 먼저 들어간 건 다름 아닌 이수현 자신이었으니까. 이것은 타당한 의심이었고,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새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나 너는 아니란다. 이방인은 이 세계와 궤를 달리하는 존재. 세상의 흐름 또한 너를 어찌하지 못하는데 그런 네가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겠니. 너는 그냥 우연히 삼켜졌을 뿐이란다. 네가 우연히 이 세계로 넘어왔듯이 그때도 우연히 삼켜졌을 뿐이지. 거기다 내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그저 그렇게 메말라 죽었을 한낱 먼지 같은 존재다.]
“하지만 좀 말이 안 돼요. 게이트는 열렸잖아요? 멸망의 징조라면서….”
[그 아이가 있잖니.]
“아.”
[이미 버젓이 영웅이 존재하는데, 한 명이 더 필요치는 않단다. 그래서 말했잖니. 그 아이는 다시 불행해질 거라고.]
하긴, 이수현이라고 제 생각이 맞을 거라고 확신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런 게 아닐까 하고 한번 해 본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나름 괜찮은 추론이라 생각했지만 신은 비아냥거렸다. 새가 다음으로 내뱉은 말은 어쩐지 화를 품은 듯도 했다.
[네가 영웅이라도 될 성싶으냐?]
“그럴 리가.”
[주제를 알거라.]
“잘 알고 있죠.”
이수현은 건성으로 새의 말을 흘려 넘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이리 서서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상대와 대화를 해야 하나 짜증이 났으나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로 아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것 말고도 영웅이 탄생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있지. 그 게이트는 8년 전 이미 수명을 다했단다. 원래라면 두 번 다시 열릴 리 없는 곳이었지. 너도 보아서 알 것이야.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끽해야 자라나는 풀잎이 다지. 그것도 얼마 안 가 시들어 사라질 테지만.]
말 많은 새에게 손목도 다리도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이수현은 비교적 멀쩡한 축에 속하는 널따란 성당 의자에 앉았다.
[박민후가 이미 모든 것을 끝낸 뒤였기 때문에 그곳에는 다음 영웅을 위해 준비된 것이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힘을 키워 줄 몬스터도 없었고, 힘의 원천이 될 보상 또한 남아있지 않은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한 세계였다. 언제든지 사라질 날을 기다리고 있는 멸망한 세계였지.]
널따란 의자는 오래되어 썩어 문드러진 부분도 있었고, 또 무척 지저분한 데다 풀이며 꽃 같은 것이 자라 있었지만 계속 서 있기도 싫었다.
“…그냥 생각해 본 거예요. 그쪽 말대로라면 그럴듯한 이야기였잖아요.”
[뭐, 그렇지. 만약 이 세계에 영웅이 부재했다면 그다음 영웅이 되는 건 어쩌면 이방인인 너였을지도 모른단다.]
어차피 깨끗한 몰골은 까치를 만났을 때 포기했다.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고 앉자, 새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수현은 그것을 힐끗 보며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모순덩어리네요. 이방인이기에 안 된다고 하더니, 이제는 ‘될 수도 있었다.’라.”
[그야 모든 건 흐름이 정하기 때문이란다. 지금 상황은 불가능하지만, 네가 만약 조건에 맞아떨어졌다면 세상의 흐름이 너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자꾸만 시야에 밟히는 조각상이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잠깐…. 저거 표정이 좀 움직이지 않았나? 이수현이 슬쩍 눈가를 좁혔다. 하지만 금세 옆에서 깃털을 정리하는 시늉을 하며, 한숨을 쉬는 새에게 시선이 옮겨 갔다.
[비교 대상이 필요할 테니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해 볼까? 다른 세계에서는 퍽 자주 있는 일이란다.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이 그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아주 흔한 것이지. 다만 이 세계는 거기서 제외되어 있단다. 왜냐, 이미 ‘박민후’라는 영웅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거기다 멸망할 뻔한 세상도 벌써 구한 뒤다. 이런 세계에 굳이 새로 영웅이 필요할까? 이 의문의 답은 간단하지.]
“필요 없겠네요.”
[그렇지.]
이수현은 문득 제가 지금 절 납치한 놈과 이렇게 ‘사이좋게 이야기나 나눌 때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야, 뭐 무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 ‘이렇게 태평해도 되는 걸까?’ 하고 묻는다면 바로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자각은 그나마 있었기에 조금 미묘한 기분이었다.
아마 지금 자신은 소설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악역에게 납치당해 주인공이 구해 주길 기다려야 하는 히로인쯤이겠지. 여태까지는 그저 지나가는 엑스트라, 혹은 좋게 말해도 주연의 친구 정도였겠지만. 박민후가 이수현을 ‘좋아한다.’ 고백한 순간, 그리고 이수현이 박민후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이 세계에서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였던 그의 역할이 뒤바뀐 걸지도 몰랐다.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영웅은 사라져야 한단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혹은 존재했으나 힘을 계승하듯이 다음 영웅에게 넘겨줘야 했지, 원래라면 5년 전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그 아이가 다시 불행해질 일도 더는 없었겠지.]
“5년 전에요?”
이수현이 미묘한 기분을 느끼거나 말거나 새는 연신 그 작은 부리를 벌리며 재잘거렸다.
[그래, 원래라면 5년 전 그때 그렇게 모든 게 끝났어야 했다. 이 내가 힘도, 던전도 그 모든 걸 수거할 예정이었지. 그렇게 다음 세계로 건너가 다음 영웅을 기다릴 예정이었다. 그러니 나는 남겨진 인류에게 몇 번이고 해 왔던 질문을 했고, 이번에도 당연히 정해진 대답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지.]
멀리서 계속 들려오던 폭음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박민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수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뭐, 그의 평범한 시력으로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폭음이 멈추자 이곳은 무척 조용했다.
이따금 바람이 부는 소리와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는 풀잎의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그 때문인지 새의 목소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거 아니? 이 세계의 인간들은 무척 이기적이었단다. 참으로 이기적이었지.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너무 빠르게 우리가 힘을 주었기 때문일까?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인간들은 변해 버린 모든 것에 익숙해졌단다. 익숙해진 나머지 나태해졌지. 그들이 미리 준비만 잘했더라면 던전과 각성자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이수현은 슬슬 이 상황이 지루해졌다. 그가 먼저 물어보았지만, 솔직히 엄청나게 궁금했다거나 관심 가는 주제도 아니었을뿐더러, 이수현 본인에게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러니 길고 긴 남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흘릴 정도로 금방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끝이 왔을 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단다. 아니었어. 어느 누구도, 하물며 신조차 닥쳐올 미래를 알지 못한다지만. 예상하고 대비할 순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었고, 신탁으로 몇 번이고 언급도 했었단다. 그런데도 무시한 건 인간들이었지.]
그렇게 대충 흘려듣던 이수현은 문득 새가 하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굳이 들어줄 필요 없는 거 아닌가?
“그럼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원하는 대로 했으면 됐잖아요. 신이라면서 굳이 물어볼 필요도, 원치 않는 대답을 곧이곧대로 따라줄 필요는 없지 않나?”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새가 조그마한 눈으로 이수현을 흘겨보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 결국 이도 저도 못 한 채 나는 이곳에 얽매여 있단다. 흘러가야 하건만 그러지 못한 채 고여서 천천히 썩어 가고 있었지.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세상은 끝을 보았다. 정해진 일은 모두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그대로 고여 썩어 없어져야 했다. 다만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 이 세상은 다시 흘러가고 있지.]
새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유연하게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며 새가 말했다. 여전히 목소리 하나는 참 다정했다. 이수현은 멍하니 새하얀 새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나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생각했단다. 그렇게 생각을 더듬어 가던 중 한 가지 결론이 나왔지. 아마 흐름은 그때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그러니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한 것이 아닐까. 내가 여태 남아 있던 것 또한 그런 연유였던 것은 아닐까.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한 또 한 번의 기회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수현은 솔직히 말하자면 새의 말을 중간부터 거의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거기다 대체 왜 이런 이야길 자신에게 하는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새는 저번부터 이수현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그것도 길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바로 과거의 결과를 다시 번복하는 거란다.]
이수현의 지금 심정을 표현하자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가 딱 맞았다.
[저 앞에서 그 아이와 싸우는 이들은 과거를 번복하려는 무리란다. 그들의 행동은 우연하게도 이미 지나간 세계의 흐름과 퍽 닮아 있었단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눈여겨보았지. 그때는 아직 흐름이 멈춰 있었기에, ‘헛짓거리를 하는구나. 거짓된 평화라도 즐기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됐을 것을.’ 딱 정도의 감상이 다였단다.]
샛노란 금색 눈이 고요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네가 이 세계에 나타났다. 영원히 멈춰 있을 거라 생각했던 흐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지. 그래서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단다. 일부러 그들에게 접근했지, 그들의 대표가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힐러들의 옛 우두머리였으니까. 일은 아주 쉬웠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신이 되어 주었지.]
까치가 다친 팔을 금방 치료하는 걸 봤고, 또 본인 입으로 힐러라 말하니. 당연히 힐러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뭐, 그렇다고 이수현이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긴 아니었다.
[영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악역’ 또한 필수 불가결했다. 그래야 세상이 정해진 흐름의 따라 멸망을 향해 갈 수 있었으니까.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다음번 ‘악역’은 우리의 ‘영웅’이 되었을 게 분명했단다.]
“예?”
하지만 갑자기 나온 박민후의 이야기에 이수현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되물었다. 박민후가 악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새는 이수현의 그런 반응을 살피며, 다소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사실 박민후의 존재 자체는 지금에 와선 무척이나 아슬아슬하단다. 우리가 괜히 멸망을 막아낸 후 힘을 회수해 가는 것이 아니야.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힘이다. 한순간 허점을 보이면 바로 본인을 집어삼킬 그런 힘이지. 그것은 재앙의 싹이기도 하다. 그런 게 계속 세상에 존재한다면 다음 재앙이 바로 그가 되는 것이 당연한 섭리지.]
박민후가 악역이 된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영웅은 고독하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세상을 구해 주어도 범인의 이해를 뛰어넘은 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수현이 볼 때 그는 악역도 잘 어울렸다. 생각해 봐라. 박민후는 딱 봐도 영웅보단 악당이 잘 어울렸다. 솔직히 박민후 정도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주변에서 이딴 식으로 구는데 아직도 영웅 노릇을 하는 게 더 신기한 일이 아닌가?
[같은 인간의 머리 꼭대기에 홀로 서 있는 영웅은 모든 것을 잃음과 동시에 잃어버린 것 외의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지. 인간들은 그런 영웅을 동경한다. 경외하기도 하고, 질투에 눈이 멀기도 하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본능적으로 혐오하지,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그렇다면 그의 미래는 너무 뻔한 것이 아닌가? 그가 의지를 잃는 순간, 그를 옹호할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그에게 무기를 겨누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란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박민후는 역시 의외로 착했다. 뭐가 성격파탄자란 말인가. 주변 놈들부터가 먼저 파탄 나기 직전인 놈들뿐이 아닌가?
새가 구구절절 이야기해도 이수현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새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수현은 지금 상황 자체가 어이없었다. 자신이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가. 처음은 그가 궁금한 걸 묻긴 했지만 중간부턴 이수현이 듣고자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수현은 그저 박민후가 보고 싶어 그를 찾아 나섰을 뿐이었다. 그에게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 위해 나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던 길 잘 가고 있던 자신을, 까치라고 소개한 놈이 납치하지를 않나. 제 물건을 멋대로 뺏어 가질 않나. 어째 모든 일의 원흉 같은 신이란 놈은 갑자기 넋두리하듯 자신에게 뭔가 중요한 듯한 이야기를 해대질 않나. 그래서 저보고 뭐 어쩌라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냔 말이다.
[…이거야 원, 재미없구나.]
그때 말을 멈춘 새가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다시 포르르 날아가 조각상 위에 내려앉았다.
[무슨 반응이라도 해 보거라, 이런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들진 않느냐? 그가 불쌍하진 않느냐? 내가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느냔 말이다.]
“그닥…. 그나저나 저번부터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네요.”
[그렇지. 지금에 와서는 너밖에 할 수 없고, 내가 부탁할 건 지금 너에겐 아주 간단한 거란다.]
이수현이 기어코 얼굴을 구겼다. 참으로 못마땅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 알았어요. 딱히 뭘 부탁할 건지 진짜 먼지만큼도 궁금하진 않지만, 안 들어주면 계속 이럴 거 같으니 들어나 보죠.”
[…정말 불경하구나. 뭐, 좋다. 정말로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이야기란다. 내가 네게 부탁할 건 박민후가 다시 한 번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하는 거란다. 네겐 정말 어렵지 않지?]
“제가 싫다고 한다면요?”
[그저 이 세상이 좀 더 빠르게 멸망할 뿐.]
“그….”
콰과광!!!!
“…거참 안됐네요.”라고 채 말을 끝맺기도 전, 무언가가 그의 뒤쪽에서 빠르게 날아와 성당 벽에 틀어박혔다. 덕분에 그 여파로 일어난 모래 먼지가 가만히 앉아 있던 이수현에게 쏟아졌다. 자잘한 벽돌 조각이 피부를 때리는 건 덤이었다.
이수현이 반사적으로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마치 안개처럼 낀 모래 먼지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였다.
“콜록, 이거….”
모래 먼지 때문에 목이 메어 이수현은 연신 잔기침을 하면서 휘휘 손부채질을 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이수현을 불렀다.
“이수현! 어디 있어!?”
***
퍽!
“커헉!”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새의 형상을 한 가면이 우그러지고 그대로 ‘새’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뒤이어 박민후가 다른 방향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다른 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뒤, 오른쪽 다리를 지지대 삼아 그 상태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긴 다리가 정확히 새의 관자놀이를 향했다. ‘파각!’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발에 차인 새가 저 멀리 날아가 건물 벽에 틀어박혔다.
건물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 한가롭게 쉬고 있던 새들이 그 소리와 충격에 놀라 우르르 날아올랐다. 날갯짓 소리가 시끄러웠다. 건물 하단이 부서지자 지지대를 잃은 건물이 균형을 잃고 폭삭 무너져 내렸다. 모래폭풍이 불었다.
“…….”
박민후는 모래폭풍을 뚫고 또다시 달려드는 새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그는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새들을 보면서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고,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저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죽이기 위해서만 움직였다.
뒤에서 다가오는 새의 머리통을 붙잡은 채 그 상태로 땅을 박차 뛰어올라 몸을 물구나무서듯 거꾸로 섰다. 손에 잡힌 머리통을 가볍게 비틀어 목을 꺾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날붙이를 유연하게 피했다. 박민후가 손을 놓자 손아래에 새가 끈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졌다. 꺾인 무릎이 바닥에 닫기도 전에 박민후가 새의 시체를 밟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무방비하게 붕 뜬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긴 다리를 높게 치켜들었다. 그의 발등이 마치 도끼날이라도 된 것처럼 그 상태로 땅 위에 서 있는 새를 향해 강하게 내리찍었다.
콰과쾅!!!
또다시 거대한 모래폭풍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땅의 지반이 뒤틀리고 곧이어 쩌적쩌적 소리를 내며 땅에 연속적으로 금이 갔다. 그의 발아래 미처 피하지 못한 새들이 뭉개지고, 피했다 한들 연이어 뒤흔들리는 땅 때문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이 정도 했으면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설 만도 하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들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이라도 된 것처럼 계속해서 박민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 막아!!”
“크윽, 괴물…!”
새들도 알고 있었다. 이건 무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발버둥일 뿐이라는 걸.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진심으로 박민후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박민후의 발을 붙잡아두기 위한 단순한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았다. 허무한 죽음이었고 무의미했다.
“…….”
그 모습을 보며 평소의 박민후라면 신선한 자살 방법이라며 비웃었겠지만, 지금 그는 날벌레 같은 그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그의 발아래서 그림자가 하늘을 향해 치솟더니 채찍처럼 가늘어졌고, 이윽고 박민후 주변을 감싸듯 휘둘러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채찍이라 비유했지만 그것은 날카롭게 날을 세운 검과도 같아 그것에 닿은 모든 것이 차례차례 썰려 나갔다.
“아아악!!”
“헉, 허억!”
“…조금만 더! 헉, 조금만 더 버텨!”
사방에 피가 튀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버려진 도심 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누군가의 팔이었던 것이 바닥을 나뒹굴고 누군가의 다리가, 누군가의 목이, 몸통이 허공에 붕 떠올라 이윽고 추락했다. 근처에 건물들이 충격을 못 이기고 연이어 무너져 내렸다.
자욱하게 시야를 가리는 모래폭풍 속에서 박민후의 목을 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쇄도했다. 박민후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자그마한 고갯짓만으로도 그런 공격쯤은 아주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자 새들은 당연히 그가 피할 줄 알았다는 듯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광범위 스킬을 준비 중이었는지 수십, 수천 개의 날붙이들이 번쩍이더니 비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디버프를 인챈트한 검이었고, 창이었으며 때로는 화살이었다.
박민후라고 그 모든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가 진심으로 피하고자 마음먹으면 못 피할 것도 없었지만. 박민후가 멈추지 않으니, ‘서걱’ 하고 그의 머리카락 끝이 잘렸다. 그의 뺨을 날붙이가 할퀴며 붉은 선을 만들고, 칼날에 닿은 그의 옷자락이 찢어졌다. 하나둘 가느다란 생채기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그런데도 박민후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서 치유될 상처들뿐이었다. 치명상이 될 법한 공격은 피하거나 쳐냈고 그 외에 스치는 자잘한 공격은 그대로 맞으면서 박민후는 새들을 잡아 나갔다.
“끝이 없군.”
던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박민후가 입을 열었다. 정말 새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마치 몬스터 웨이브처럼, 죽이고 죽여도 다시 몰아쳤다. 그때와 다른 점은 이곳에는 엄폐물이 너무 많다는 것 정도일까. 텅 빈 도심 곳곳에 숨어 이제나저제나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가 아니니, 그들은 전술을 짜고, 자신들이 가진 무기와 스킬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렇게 번번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들은 박민후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다리를 붙잡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끌 뿐이었다. 때로는 갑작스러운 소동에 이곳의 살던 짐승들이 놀라 뒤섞여 날뛰기도 했다. 박민후는 자신이 잡는 것이 저기 뛰어다니는 날짐승과 다를 바 없다 생각했다.
무슨 목적으로 이리 목숨을 내놓는단 말인가. 세뇌라도 걸린 것이 아닐까 타당한 의심이 들었다. 하기야 새들의 행동은 언제나 비이상적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던전도 각성자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라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어째서 이리 쉽게 목숨을 버리지? 만약 정말 그런 세계가 펼쳐진다 한들 막상 그것을 원한 본인들이 다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저 개죽음일 뿐이지 않나. 박민후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저들도 자신들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지금 이 현상은 명백히 이상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이상했다. 다만 그들의 ‘머리’가 저들의 뇌를 뒤집어 놔 저 좋을 대로 세뇌를 했다면 사실 이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 저와 무슨 상관인가.
자신의 앞을 막는다면 그저 처리할 뿐이었다. 힘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편을 차지했기에 최대한 힘을 쓰지 않고 몸만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스멀스멀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그림자가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던 그림자를 보며. 박민후가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림자가 쩍 굳더니 장검의 형상을 띄었다.
지금도 전지가 나간 전등처럼 눈앞이 깜빡거렸다. 그가 눈을 감았다 뜰 때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시시각각 변해 있었다.
박민후가 오른손으로 땅을 짚으며, 그 상태로 몸을 움직여 덤벼드는 새들을 돌려 찼다.
찢어발기고, 짓밟고, 뭉개며 피 보라 속을 걷는 박민후는 이곳이 바다 위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이수현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박민후는 풍랑 위에 배처럼 정차 없이 흔들거렸다. 그때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새의 수는 확연하게 줄어들어 이제 살아 있는 것보다 죽어 있는 것이 더 많았다. 박민후가 새의 목을 가르고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와 동시에 박민후의 앞쪽에 있던 빌딩 위에 한 명의 인영이 내려섰다.
“…폼 잡냐고.”
박민후가 이상한 걸 봤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딱 봐도 연출한 거 같은 모양새가 꼴같잖아 웃음도 안 나왔다. 뒤이어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박민후, 날 잊진 않았겠지.”
“네가 누군데.”
거참, 내뱉는 말조차 어디 삼류 악역 같은 대사를 치다니 기가 찼다. 저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는 거였지 목소리의 당사자를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기억할 가치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놈일 테니 박민후가 신경 쓸 만한 놈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니었는지 박민후의 말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물론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비틀린 입매라거나 격양된 목소리 톤 때문에 상대방의 심기가 심히 불편하단 것은 알 것 같았다.
“날, 날 잊었다고…?”
“내가, 너 같은 걸 하나하나 기억해야 하나?”
남자를 향해 무심히 내뱉던 박민후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려다가 문득 피 묻은 손이 시야에 들어와 “쯧.” 하고 혀를 찼다.
“난 피에타 길드의 전대 마스터다! 이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아. 뭐야, 뒈진 거 아니었어?”
그 말을 들으니 언뜻 생각나긴 했다. 분명 그가 알기로는 피에타의 전 길드 마스터는 죽었다. 그러니 하현이 뒤를 이어 마스터 노릇을 하는 것이었고. 적어도 박민후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관심 없는 이야기였던지라 보고받을 때도 ‘그래?’ 하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다.
“네 덕분에 아직 살아 있지…. 어차피 내 이름조차 기억 못 할 테니 편의상 까치라고 다시 소개할까?”
까치가 헛웃음을 지으며 삐딱하게 서서 박민후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박민후가 피식 웃었다. 한순간 박민후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박민후는 까치 바로 뒤에 서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시답잖은 일이나 벌일 거면 차라리 그때 죽지 그랬어.”
박민후의 손이 빠르게 까치의 목으로 향했다. 까치가 그것을 뒤늦게 깨닫고 빠르게 몸을 옆으로 피했다. 박민후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까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며 상처를 남겼다. 까치가 피가 주룩 흐르는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더욱 거리를 벌렸다.
“이 괴물 자식이!”
“아, 그래. 괴물 자식. 괴물 자식이라. 이건 아직 기억난다.”
박민후가 다시금 빠르게 까치에게 따라붙었다. 어느덧 상처를 빠르게 치료한 까치의 손에는 새하얀 창이 들려 있었다. 박민후가 까치를 향해 발을 들어 올렸다. 그의 발이 유려하게 허공을 가르며 강하게 까치의 허리를 내려찍으려고 했다.
쾅!
“참 이상도 하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당신은 날 사람으로 안 본단 말이야…?”
“당연한 걸 묻는군!”
박민후의 발차기를 까치가 창으로 막아섰다. 상반된 속성 탓에 맞닿은 곳에서부터 파직파직 서로 다른 색의 전류가 튀었다. 강한 힘에 일순 창을 손에서 놓아 버릴 뻔한 까치가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손이 저릿했다. 까치가 팔 근육에 힘을 주어 그 상태로 창을 휘둘렀다. 박민후가 창 끝에 달린 칼날을 피해 몸을 훌쩍 물렸다.
“이해를 뛰어넘은 강함은 존재의 본질을 바꾸게 되지. 박민후 바로 너처럼!”
“그게 뭐?”
“나라고 너를 처음부터 괴물로 본 건 아니었다. 남들과 다르단 느낌은 받았지만 분명 처음부턴 아니었다고! 내가 처음 기억하는 ‘박민후’는 막 세상에 나타난 갓 S급이 된 어린아이였지. 피 묻은 교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날이 아직도 생생해. 그 시절의 너는 세상 물정 모르고 독기만 가득 찬…. 아직은 별 볼 일 없던 S급. 겨우 그뿐이었다!”
쾅!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부딪쳤다. ‘쾅쾅’ 연이어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건물들이 또다시 하나둘 충격을 못 이기고 폭삭 내려앉았다. 까치는 분명 박민후보다는 약했지만 속성 때문인지 박민후의 스킬을 어느 정도 막아내거나 흘려보내면서 버틸 수 있었다. 아무리 힐러라지만 그는 ‘전투 힐러’였던지라 싸움엔 일가견이 있었고 신에게 받은 SS급 무기 또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큭, 그렇지만 너는 누구보다 빠르게, 순식간에 제 힘을 불려 나갔다. 그게 무척이나 탐욕스러워 보였다는 것을 알고나 있나? 이러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질 정도로,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그 순간 나는 깨달았지.”
하지만 그것도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았다. 까치는 제 손에 들린 무기에 미세한 균열이 차츰 커지는 것을 발견했다.
“넌 우리와 궤를 달리하는 이해를 뛰어넘은 괴물이란 걸!! 그렇기에 나는 그 순간 ‘박민후’라는 존재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그저 괴물이다. 힘이란 게 그렇지. 본인이 그걸 제어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아군이며, 무기가 되겠지만.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순간 그건 그저 고삐 풀린 망아지일 뿐이지. 안 그런가, 박민후?”
까치가 비웃었다. 지금 그의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기이하게 울고 있는 그림자를 한차례 짓밟으며 박민후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어쩌라고!”
박민후의 그림자가 가지를 뻗듯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까치를 향해 쇄도했다. 까치의 온몸을 찢어발길 것처럼 뻗어 나가던 가지들이 까치가 손을 들어 올리자 우뚝 멈춰 섰다. 박민후의 표정에 일순 금이 갔다.
“너…!”
까치가 들어 올린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새하얀 반지를 보자 박민후의 눈이 뒤집혔다. 멈췄던 그림자들이 다시금 움직였다. 콱콱 시멘트 바닥에 틀어박히는 그림자를 피해 까치가 도망쳤다.
“그걸 왜 네놈이 갖고 있어!!”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약 올리듯 돌아온 대답은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이수현에게 주고 온 반지가 왜 저놈 손에 있는 거지? 설마 그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박민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여기서 저놈과 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슨 이유인지 새들은 자꾸만 시간을 끌려고 들었다. 이미 충분히 지체됐다.
감정이 격해지자 또다시 시야가 흐려졌다. 박민후한테는 그저 눈을 잠시간 감았다 다시 뜨는 그런 사소한 행동이었으나, 그 잠깐 사이 그의 그림자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러니 그의 기억은 자꾸만 서로 다른 필름을 이어 붙인 것처럼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아, 저놈을 잡아 죽여야지.’ 하고 생각하던 찰나. 다시 눈을 뜨니 까치는 제게 목이 붙들려 있었다.
“크읏!”
어디로 팔아먹었는지, 까치의 다리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절단된 다리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지독한 피 냄새는 이제는 익숙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목을 붙잡고 있는 박민후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까치가 연신 헛손질했다. 그런 발악을 지켜보며 이대로 목을 ‘똑’ 하고 부러뜨리는 게 좋겠지 싶었다. 박민후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다시금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새하얀 반지를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쉽게 죽이면 재미없지.
“…이건 네놈한테 준 게 아니야.”
박민후가 싸늘하게 읊으며 까치의 손가락을 잡아 뜯었었다. 까치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으나, 박민후는 반지의 묻은 피를 닦아내는 것에 열중했다. 그의 발이 바닥을 기는 까치의 등을 짓이기며 강하게 내리눌렀다. 갈비뼈들이 발아래서 부러지고 뭉개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까치가 피를 토하며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이윽고 박민후가 신발 밑창에 묻은 피를 쓱쓱 까치의 옷에 닦으며 그대로 까치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저만치 날아가 건물 벽을 몇 개나 부수고 날아가 바닥을 구르는 까치를 박민후는 몇 번이고 발로 찼다. 목적지는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두 개의 인기척이었다. 하나는 너무 미약했고, 하나는 또 너무 강했기에 저곳이 틀림없었다.
거대한 성당이 눈앞에 보일 때쯤 까치를 마지막으로 발로 차 성당 벽에 처박은 박민후가 서둘러 모래 먼지가 뿌옇게 낀 내부로 들어섰다.
“이수현! 어딨어!?”
“박민후 헌터?”
모래 먼지 사이로 무심하기만 한 평소와 다르게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의 이수현이 보였다. 박민후는 그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이수현에게 달려가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
아. 익숙한 체취가, 익숙한 체온이 자신의 품 안에 있었다. 박민후는 그 사실을 깨닫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박민후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정말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좀 더 빨리 오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든 그 끝이 긍정적이지 못했다.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잠시 늦으면 박민후의 삶에서 모든 게 사라졌으니까. 그의 동료들은 언제나 박민후가 도착했을 땐 이미 죽어 버린 뒤였고, 그것도 아니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수현이라고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도 없었다. 점점 부정적인 생각들이 뭉게구름처럼 불어났다. 혹여 그가 다쳤을까 심장이 아려 왔고, 혹여 자신이 너무 늦었을까 겁에 질렸다. 한마디로 거의 패닉 직전이었다.
그에게 그렇게 큰소리 땅땅 쳐 놓고. 만약, 정말 아주 만약에 이수현이 이미 죽어 버린 뒤에야 도착할까 봐. 자신이 그를 찾았을 때 목도한 게 살아 있는 이수현이 아니라 이미 죽어 버린 그일까 봐. 그런 생각이 박민후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었다.
그를 품에 끌어안고 있는 이 와중에도 박민후는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이수현과 있을 때면 늘 설렘으로 거세게 뛰던 심장이, 그것과는 다른 감정으로 거세게 뛰었다. 이러다 식도를 타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부러 더 강하게 이수현을 부서지라 끌어안았다.
어쩐지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자신처럼 널뛰는 것만 같았으나, 착각일 게 분명했기에 박민후는 제 심장 박동 소리를 착각한 거라며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그의 어깨와 머리 부근에 얼굴을 비비며 박민후는 이수현이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한껏 새겨 넣었다.
“…숨 막혀요.”
“응, 미안.”
박민후는 입으로는 착실하게 미안하다면서도 전혀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더 강하게 끌어당길 뿐이었다. 짜부라지는 듯한 느낌이라 이수현은 조금 숨이 막혔으나, 사실 숨이 막혀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기에 그냥 얌전히 있어 주었다. 그 큰 덩치로 이러는 게 나름 귀엽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갈 곳 잃은 손을 주춤거리며 그를 따라 하듯 어색하게 들어 올렸다.
고민을 한 번 하고서, 그의 등 뒤로 팔을 뻗었다. 박민후가 그런 것처럼 그의 등을 살짝 끌어안았다. 단단한 그의 등이 옷자락 너머로 느껴졌다. 서로 맞닿은 가슴에서부터 시작되는 두 개의 심장 박동이 엇비슷했다. 이수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슬쩍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 속에 이렇게 자신이 먼저 남을 마주 안아 본 적이 어릴 때 빼고는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는 게 문뜩 생각났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지금 자신의 행동이 참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푸드득!
천천히 모래 먼지가 아래로 꺼지고, 그렇게 잠시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을까. 조용한 적막을 가르고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박민후가 떨어지기 싫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바로 그들의 머리 위에서 유유히 날고 있는 새하얀 새를 보며 욕지기가 치밀었다. 박민후의 샛노란 눈이 저와 닮은 금안을 노려보았다.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박민후가 빠득 이를 갈았다. 날 선 목소리가 새를 향해 내뱉어졌다. 하지만 새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따름이었다. 이수현은 새도 어깨를 으쓱일 수 있구나 하고 그의 품에서 그런 태평한 생각을 했다.
박민후는 새의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가 다시금 무어라 말을 토해내려는데 새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자애로움이 깃든 목소리가 서글프게 속삭였다.
[다 너를 위한 거였단다.]
한껏 서글픈 목소리가 다정을 가장한 채 그렇게 속삭였다. 만약 저 말을 듣는 대상이 박민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 가증스러운 목소리를 의심 한번 못 해 본 채 곧이곧대로 믿어 버렸을 게 틀림없었다.
“나를 위한 거라고?”
박민후는 이미 저 목소리에 이골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과거 저 입 발린 말에 번번이 속아 넘어간 나날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니 이제 와 저런 말을 듣고 또 속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이지 기가 찼다. 나를 위한 거라고? 어디서 그런 뻔뻔한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지껄이냔 말이다.
“드디어 그 머릿속이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거야? 내가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 같아? 개소리하지 마! 나를 위하긴…. 내가 아니라 다 ‘너’를 위한 거겠지!”
[…이상하구나,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일까? 너도 잘 알잖니, 지금 네 몸이 몹시 불안정하다는 걸. 난 그저 그런 너를 생각해서 벌인 일이었단다.]
박민후가 이를 악물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남의 일에 뭐가 그리 관심이 많은지, 그들이 박민후 본인도 아니면서 언제나 멋대로 이런다. 박민후가 이수현을 힐끗 보다가 그를 붙잡은 손을 풀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수현이 멀뚱히 그런 그를 쳐다보자 박민후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
[정말로 네가 스스로 할 수 있을까?]
그 목소리가 비웃음 같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인가. 새가 심드렁하게 마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지 않니. 세상을 한 번 더 구하면 그만인 것을. 그러기 위한 악역도 이렇게 준비되어 있고, 그러기 위한 힘을 가진 영웅도 여기 존재한다. 영웅의 고난을 위한 ‘대상’도 이렇게 있지.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고, 흐름에 따라 수긍하면 그만이다, 대체 뭐가 문제지?]
“뭐가 문제냐고?”
박민후는 그렇게 되물으며 말을 골랐다. 그러게, 뭐가 문제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문제인 거 같다가도 새의 말처럼 그 모든 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습관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던 박민후는 손에 잡히는 차가운 반지를 저도 모르게 손안에서 굴렸다.
[그래, 나는 모르겠구나. 내 말대로 한다면, 너는 이제 더는 불행해질 일도 없을 것이고 ‘너’라는 존재를 집어삼킬 힘 또한 내가 수거해 갈 것이야. 그와 더불어 이 세상을 파괴하는 던전 또한 함께 사라지고, 각성자의 힘 또한 당연한 수순으로 사라진단다. 그러면 넌, 너를 멋대로 휘두르던 강제성의 제약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자, 여기 어디에 네가 마다할 이유가 있지?]
새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을 재촉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저도 모르겠다는 듯이 허망하게 내뱉어진 말이 언뜻 체념을 담은 거 같다고 옆에서 듣던 이수현은 생각했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샛노란 눈이 이수현을 향했다.
박민후가 잠시 동안 말없이 이수현을 응시하다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박민후의 손에는 새하얀 반지가 들려 있었다. 아까 까치가 그에게서 뺏어 간 그 반지였다. 막연히 ‘그가 다시 뺏어 왔구나.’ 싶어 이수현은 반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박민후는 반지를 주다 말고 눈앞에 내밀어진 그 손을 덥썩 붙잡더니 만지작거렸다. 그에 이수현이 작게 움찔거렸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저 조금 전에 까치가 붙든 손목이 아파서 그랬다. 정말로.
“그냥, 계속 네놈 말 듣는 게 이제는 좆같아져서 더는 못 들어주겠다, 뭐 대충 그런 건가 보다 해.”
“참 나, 그게 뭐예요.”
이수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박민후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굳은살은 있었지만, 자신의 손보다 부드러운 서늘한 손이 기분 좋았다. 박민후가 눈을 내리깔고 이수현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이미 제 감정을 다 말한 뒤였다. 주저할 마음은 없었다. 그가 싫어한다면 하는 수 없었지만. 입을 맞춘 상태로 눈만 굴려 이수현을 보았다. 이수현이 뚱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로 봐? 귀엽게.
[아주 꼴값을 떠는구나.]
그 모습에 새가 혀를 찼다. 분위기 깨는 그 언행에 박민후가 와락 미간을 찡그렸다. 다시 이수현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싫어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손바닥에 다시 한 번 입술을 도장 찍듯 문대던 박민후는 그거론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이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 이수현이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을 곁눈질로 보며 하는 수 없이 손을 놓아주었다.
이건 안 되나 보다. 아쉬움에 박민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때 퍼렇게 손바닥 모양으로 멍든 이수현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박민후가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붙들며 물었다.
“이건 뭐야.”
“별거 아니에요.”
이수현은 내색하기 싫어 입을 꾹 다물었으나, 박민후의 눈이 푸르게 물든 손목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박민후가 혀를 차며 조심스레 멍든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심한 건 아닌지 확인했다. 그 간지러운 행동에 이수현이 손가락을 움찔거리다 그만 주먹을 꾹 쥐고 말았다. 이거야 원, 손목에서부터 시작되는 낯간지러움에 이수현이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그쪽은 정말 괜찮아요?”
“응, 괜찮아.”
[안 괜찮다.]
“아, 진짜 자꾸 분위기 깨네!”
이수현의 물음에 가벼이 대답하자마자 새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민후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신의 말대로 행동하고 싶은 마음은 더는 없었다. 그런 고집스러운 박민후의 태도에 새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게 정녕 네 선택인가?]
“그렇다니까!”
박민후는 계속해서 도돌이표 찍는 대화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 선택을 넌 반드시 후회할 거란다.]
고심이 대답을 고르던 새가 한숨처럼 말했다.
“얘가 그러더라. 원래 사람은 후회할 일만 한다고, 그러니까 상관없어.”
“…….”
뒤따라 들려오는 단호한 말에 이수현이 박민후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게 괜히 찔려 박민후가 양팔을 버둥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렇다고 내가 후회할 거란 소린 아니고….”
“내가 뭐라 했나?”
그 모습을 보며 이수현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한 가지 궁금한 건 있었다.
“그런데요. 저 새가 그러는데 이 세상 멸망한대요. 그것도 괜찮아?”
“그건…. 그러니까.”
“참고로 나는 상관없어요.”
궁금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수현은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거기에 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의 평소 ‘죽으면 죽는 거지.’ 하는 마인드가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도 아니니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게다가 이수현이 볼 때 이 세계는 솔직히 망해도 어쩔 수 없는 곳이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든 걸 박민후라는 사람 한 명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세상을 한 번 구했으니, 당연하다는 듯 계속해서 그의 도움을 바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를 자신들과 동일선상으로 보진 않았다. 그를 괴물이라 부르고 인간이 아니라 말하며, 그저 필요에 의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게 아닐까. 이수현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물며 신이라고 하는 놈도 그랬다. 그러니 망한다면 그건 다 자업자득이 아닌가.
“박민후 헌터, 당신 의견이 중요한 거예요.”
“난….”
이 세계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박민후도 알았다.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구한다 한들 같은 일은 분명 또 벌어질 게 분명했고, 그건 박민후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당연하다는 듯, 정해진 수순처럼 일어나는 일이겠지.
세상은 오직 그에게만 모든 것을 짊어지게 했다. 모든 일의 끝을 선택하는 건 반드시 그여야만 한다는 듯이 굴었고, 그로 인해 벌어질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도 언제나 박민후 혼자여야만 했다. 박민후는 알프하의 둥지에서 김세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이 번번이 내뱉던 말도 떠올랐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으나….
그 누구보다 눈앞에 이수현의 말이 가장 강하게 남았다. 박민후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달싹였다.
“하기 싫어.”
“그럼, 하지 마요.”
박민후는 제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대답하는 이수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박민후가 멍청하게 반문했다.
“…내가 그래도 될까?”
“그러면 안 될 이유도 없죠. 이미 당신은 할 만큼 했잖아. 한 번 해 줬으면 됐지 두 번이나 똑같은 일을 하라고? 나라면 안 해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상스러웠다. 박민후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도 이수현의 저런 모습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이수현은 여전히 무심했고, 무감각한 얼굴과 목소리가…. 지금은 그게, 그저 그뿐인 게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래서 박민후는 그냥 웃었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수현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로해 주는 상냥한 말을 내뱉어 주는 그런 류의 인간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수현이 내뱉는 말조차 남을 위로하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런 그의 무심함이 박민후 같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었다. 아마 이수현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역시 좋아해.”
“예?”
그러니 툭 하고 뱉어진 말이 예전처럼 놀랍진 않았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로 뱉는 말은 의외로 쉬웠고, 여전히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분위기도 환경도 달랐지만…. 박민후는 눈앞의 이수현을 보자 이 말을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왕 거절당할 거라면 몇 번이고, 원하는 만큼 말한 뒤에 시원하게 차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지금 그런 말을 할 타이밍이었던가요…?”
“그러게.”
박민후의 말에 이수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시선을 피한 채 한숨을 쉬기도 했다. 박민후는 그걸 보며 그냥 슬쩍 웃었다. 언젠가 그가 내뱉었던 ‘그러게.’란 단어를 자신이 이렇게 내뱉을 줄은 몰랐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담은 ‘그러게.’라는 단어가 웃겼다.
“…엄청 별거 아닌 듯이 말하네.”
이수현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박민후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그가 조금 신기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이수현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무엇이 그리 달라 보이는지 확실하게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하여간 그랬다.
“두 번째라 그런가, 생각보다 쉽더라.”
“그런가요.”
박민후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반지를 내밀었다. 어쩐지 이수현이 뚱한 얼굴로 주저하다 반지를 집어 들었다. 반지에 피 얼룩이 살짝 묻어 있었다. 덕분에 이수현의 손에도 피가 살짝 묻었다. 이거 아까 그 까치란 사람의 핀가? 싶어 이수현은 핏자국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걸 보며 박민후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내가 준 반지도 뺏기고, 거기다 이런 곳엔 왜 또 와 있는 거야? 걱정했잖아.”
“아…. 그게 말이죠.”
정말로 걱정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이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달싹거렸다. 그를 보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입 안에 맴돌다 사라졌다. 자신도 박민후처럼 툭 하고 내뱉고 싶었다.
왜 이럴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보자마자 툭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방금 박민후도 되게 쉽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안부 인사를 하듯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왜 자신은 그게 안 될까. 생각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입 때문에 이수현은 고민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왔어요.’
이 말을 내뱉기가 이렇게 어려웠나. 긴장으로 땀이 차는 손바닥 안에서 반지를 느리게 굴리다가 고개를 들고 박민후를 보았다. 그의 샛노란 눈이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어, 바로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입 안이 말랐다. 생경한 기분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이렇게 긴장한 적이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옛날에나 느껴 봤는데. 괜히 심장이 쿵, 쿵.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었다.
이수현은 그의 눈을 좋아했다. 빛에 따라 밝게 반짝이는 그의 샛노란 눈을 좋아했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박민후의 그 눈이 좋았다. 이수현은 지금 말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지금 말해야 할 거 같다고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이수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목이 잠겨 내뱉는 목소리가 한없이 작은 것만 같았다.
“…사실은 말이죠. 그게, 박민후 헌터. 제가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
[쯧,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신을 보고 있던 박민후의 눈이 일순 미세하게 다른 곳으로 향하는 순간.
콰과광!!!!
거대한 굉음과 함께 다시 한 번 모래 먼지가 나부꼈다. 충격으로 지반이 흔들렸다. 이수현이 손안에서 굴리고 있던 반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손에서 벗어난 반지는 지면에서 몇 번 튕기더니 이윽고 데구루루 굴러 저만치 굴러갔다.
“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