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려워.
그날은 오랜만에 친구 녀석이 밥을 사 준다고 해서 얼마 없는 쉬는 날을 사용했던 날이었다.
시끌시끌한 고깃집에서 나는 제 맞은편에 앉아 연신 술을 퍼마시는 제 하나뿐인 친구를 보며 불판 위에 늘어놓은 고기를 집어 먹고 있었다. 잘 익었네.
‘야. 이수현.’
‘왜.’
어느새 소주 한 병을 혼자 다 해치운 친구 놈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고기를 몇 점 먹다 말고 친구가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할 말이 있는 듯 저를 보며 입을 달싹이다가, 술을 물처럼 마시더니 이제야 말할 생각이 들었나 보다.
‘나… 널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어.’
‘…….’
고기를 집던 젓가락이 우뚝 멈췄다. 불판 위에 고기를 보던 시선을 들어 벌겋게 취한 얼굴의 친구를 쳐다보았다. 친구 놈은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지…. 물론 처음에는 친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널 더는 친구로는 못 보겠더라. 나도, 나도 웬만해서는 참아 보려고 했거든? 근데 그게 잘 안 돼…. 진짜. 내가 술 취해서 하는 농담 아니고…. 너도 알잖아. 나 술 한 잔만 마셔도 벌게지는 거. 소주 한 병이 주량도 아니고. 나 안 취했어. 아, 이렇게 말하니까 취한 거 같은데 진짜 안 취했어. 그냥…. 술 좀 먹으면 용기가 날까 해서 왜 그런 거 있잖아.’
나는 드디어구나 싶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너 좋아해. 친구나 막 그런 의미가 아니고 연애하고 싶은 마음으로 좋아해.’
나는 옆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 평소와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태도에 애가 탄 건 친구였는지 그가 무어라 다시 말을 꺼내려는 찰나 내가 컵을 탁자에 소리 없이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알아.’
‘…뭐?’
‘안다고.’
그 말에 친구 놈이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알고 있었다. 친구가 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아무리 내가 감정에 둔해도 그 정도 곁에 있었으면 눈치를 안 챌 수가 있어야지. 솔직히 그가 품은 감정을 눈치챈 지는 꽤 되었다. 철판의 고기가 까맣게 타 버리는 것에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런데 난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 네가 날 더는 친구로 못 보겠다면….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네.’
‘…….’
‘잘 들어가.’
‘…그랬지. 넌 이런 놈이었지. 알고 있었다고….’
후드득 눈물을 떨구는 친구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현아.’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내가 특별한 적이 없었어?’
나는 고민하듯 뜸을 들이다 한숨처럼 말했다.
‘…나는 너한테 고마운 게 많아. 그러니까 너랑 친구도 됐고, 여태 이렇게 만나고 연락도 하면서 지낸 거야. 그런데…. 그렇다고 널 특별하게 생각한 건 아니야. 우리는 딱 여기까지가 좋았어. 이 정도 관계까지, 친구인 상태가 서로에게 좋았을 거야. 그 이상은 아니었지.’
그렇게 울고 있는 친구를 그 자리에 두고 나는 고깃집을 나왔다. 계산은 원래 친구 놈이 고기를 사 준다고 했던 거니 그냥 나왔다. 내가 계산을 하는 것도 친구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았으니까.
‘하아….’
괜히 한숨만 나왔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무리겠지. 내 성격을 잘 아는 놈이니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그도 내가 받아 줄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을 거다. 그저 참고 참고 참다 둑이 터지듯 말해 버린 거겠지. 그런 놈이었으니까. 나는 휴대폰을 켜고 연락처 중 친구의 이름을 찾아 지웠다.
그렇게 나는 밤거리를 걸었다. 집에 가려면 택시를 타든 마을버스를 타든 해야 했지만 그냥 걸었다.
언제나 나는 사람들이 왜 잘 유지되던 관계를 스스로 깨 버리는 말을 해 버리는 걸까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난 너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왜 너는 나를 그렇게 봤나. 나는 너를 친구라 여겼다. 그런데 너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에게 배신감을 줬다. 너는 그 말을 하면 안 됐어. 그 말을 한 순간부터 우리는 그냥 친구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는 걸 너도 알았을 거야. 너는 이 관계의 끝을 고한 거라고.
흔히들 고백하고 거절한 후 ‘그럼 다시 친구로 돌아가자.’라고 말하지만 그게 가능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걸 아무리 나라고 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끝난 관계도 몇 번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었다. 노력해도 예전처럼 될 수 없겠지. 나는 그런 노력조차 안 할 인간이었고, 너도 그렇겠지. 그러니 네 선택은 너무 섣불렀고 무모했다. 나를 잘 아는 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나에게 배신감을 줬다는 걸 너는 알까? 나는 네 선택을 원망했고, 너는 거절한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네가 한 말을 후회하겠지.
내가 너를 아는 만큼 너도 나를 알았다. 그런 세월이었다. 나의 유년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인연을 무 자르듯 잘라 버리는 건 아무리 나라도 조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밤바람을 맞으며 무작정 걸었다.
그래도 나는 다음 날엔 언제나처럼 행동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문장을 중얼거리면서.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기 싫은 공허가 들어차는 건 기분 나쁘고 몇 번을 겪어도 낯설었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 괜찮아지겠지.
‘그럴 수도 있지.’
***
박민후는 그날 그렇게 가 버린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앞에서 도망치듯 떠난 박민후를 붙잡지도 못한 채 그가 사라진 거리를 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멀뚱히 침대에 드러누워 보지도 않을 TV를 틀어 놓고 하루를 기다렸다. 박민후는 밤 12시가 넘어 날짜가 바뀐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박민후는 없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밥을 먹고 씻고 책을 보다가 어쩐지 조금 허전해 TV를 켜 놓고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잤다. 아침이 되어 그가 왔을까 했지만, 박민후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을 기다렸고, 그렇게 사흘을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때. 평소처럼 밥을 먹다 말고 문득 정말 아주 문득 여전히 나 혼자 있는 작은 원룸이 평소보다 커 보인다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그는 더는 이 집에 오지 않겠구나.
방금까지 잘만 먹고 있던 밥이 맛이 없어졌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억지로 숟가락을 들어도 어째 더는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겠지.
‘박민후 헌터. 나 좋아해요?’
맞아.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지. 대체 왜 그런 말을 해 버린 걸까. 계속 참았어야지. 그가 나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눈치채지 말았어야 했어. 그냥 계속 모른 척했어야 했는데….
달그락.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치웠다. 설거지를 해야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그릇과 식기를 싱크대에 처박아 두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천의 촉감은 조금 서늘했고,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음은 오늘따라 크게 들렸다. 밥을 먹고 바로 자면 위가 아픈데 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이수현은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상황을 한 발짝 물러서서 볼 때면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라면 안 그럴 텐데.’
‘나라면 거기서 그러지 않았을 거야.’
‘나라면 이렇게 했을 거야.’
‘나라면….’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 건 제삼자의 시선으로 한발 멀리 떨어져 상황을 마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랬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다. 수십 번 수천 번을 시뮬레이션을 해도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는 경우는 정말 어쩌다 한 번이었고, 그건 저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이렇게 해야지.’ 하고 아무리 대비해도 막상 현실에 부딪치며 생각이 멈춰 버린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어?’ 하는 사이에 끝이나 ‘아’ 하며 후회한다.
나처럼 태평한 인간도 이렇게 후회를 하고 있지 않나. 나는 계속 후회했다.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아 버린 자신에게 후회했고, 그의 감정을 눈치챈 것에 후회했다. 결국 도망치는 박민후를 잡지 못한 것도 후회했다. 나답지 않게도 이상하게 하나둘 갈수록 후회만 늘었다.
나는 후회했다. 그리고 후회하며 과거에 얽매여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과거의 내가 봤다면 놀라서 비웃을 정도로 저답지 않은 행동의 연속이었다. 뭐가 후회는 잠깐인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양 그날의 기억은 바래지 않고 자꾸만 생생해졌다. 놀라 크게 떠진 눈이, 내가 좋아하는 샛노란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를 보며 무어라 입을 열려고 노력하는 그의 얼굴이. 저에게 고백하던 목소리가. 그 모든 게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쪽에서 아른거렸다.
내 입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 버릴 줄이야. 박민후와의 관계를 끊어 버릴 말을 내 입으로 했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건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어. 그가 그 말을 내게 꺼내려고 했으면 진작 했겠지. 그도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걸 텐데. 물론 처음엔 그가 불편했다. 불편하고 싫었고 귀찮았고 하루라도 빨리 곁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도 그런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한참 뒤에 나왔다.
“아니. 아니었어.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하며 나는 엎어진 몸을 뒤집었다. 침대 위에 멍하니 드러누워 베란다 창밖 너머로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집 안에서 자꾸만 위화감을 느꼈다. 그저 원래대로 돌아간 것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멋대로 내 세계에 파고들어 자리를 튼 그가 또다시 제멋대로 나가 버린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유만으로 이렇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그날 이후로 자꾸만 속이 답답했다. 무언가 꽉 틀어막힌 것도 같았고, 메스꺼워 토할 거 같기도 했다. 눈가가 뻑뻑했다가 몸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아니, 반대로 몸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아니, 모르겠다. 다 모르겠어.
이 참기 힘든 공허함이 저의 숨통을 조여 왔다.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다. 예전에도 몇 번이고 겪어 봤던…. 늘 옆에 있던 것이 사라진 뒤에 남은 허전함과 후회. 하지만 괜찮아질 게 분명했다. 그때도 그러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게 분명했다. 괜찮을 거야. 이런 기분은 잊어버리면 된다. 한숨 자고 나면 잊을 수 있을 거야. 눈을 감았다. 그걸로 모자라 손을 들어 팔목으로 눈을 가렸다.
‘어, 좋아해.’
눈을 가리던 손을 치우고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 젠장. 욕이 나올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환영처럼 그가 보였다. 귀를 틀어막으면 환청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짜증 나는 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박민후의 목소리가 어째 자꾸만 생생해졌기 때문이다. 여러 번 반복된 기억은 조금씩 잊히거나 내가 만들어낸 기억으로 덧칠되기 마련인데…. 어째서.
“…날 왜 좋아해.”
이 의문은 그의 감정을 처음 눈치챘을 때부터 계속해 오던 거였다.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날 좋아한다고? 왜? 대체 왜? 이런 내가 어디가 좋다고? 스스로가 볼 때도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어딘가 좀 이상한 놈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러니 나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질 않았다.
내가 자기애가 부족하다든가 자존감이 낮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자기애도 있고 자존감도 뭐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저 나를 좋아하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연애 대상은 아니지 않나? 친구도 아슬아슬했다. 그냥 오다가다 아는 사이 정도가 그나마 괜찮았지. 이런 무심한 성격에 표정도 없고 툭하면 영혼도 없다는 말을 듣는 내가 어디가 좋다고.
‘내가 왜 좋아?’
그런 질문을 하면 여러 대답을 듣게 된다.
‘그냥 좋아.’
‘너라서 좋아.’
‘네가 가끔 보이는 다정함이 좋아.’
‘나는 네가 특별한데 나도 네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등등. 그리고 거기에 대고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안.’
정말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통상적인 거절의 대답을 위해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랬어야 했다. 박민후가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아니, 정말 그랬을까? 난 그때 거절의 말을 내뱉을 생각조차 안 했었다. 그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베개를 껴안고 거기에 턱을 올리고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고 대처했는지 차근히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도 답이 나오지 않자 나는 베개를 던져두고 노트북을 들고 식탁으로 가 앉았다. 이번에는 지금 상황과 유사한, 그런 종류의 영화를 닥치는 대로 찾아보았다. 소설을 보았고 만화를 보았다. 드라마도 보았다.
타닥, 타닥.
조용한 원룸 속에서 타자치는 소리만 이따금 들리고, 마우스 휠을 내리는 소리와 배우들의 목소리, 노랫소리 같은 것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지금 내겐 아무도 없으니까, 이 세계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박민후, 단 한 명뿐이었다. 며칠 전에 만난 차주영과 강유람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걸 물어볼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혼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흘러가는 영화를 눈에 담으며 박민후가 내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참지 못해 흘러넘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그의 눈을 생각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와 무너지는 표정 나를 붙잡는 손의 온도 따위를 생각했다. 그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의 행동을 사랑에 빠진 등장인물들에게 투영해 보았다.
그래, 그는 날 사랑하는 거야. 그건 믿어 의심치 않을 확실한 사실이지. 그럼 나는?
그렇게 차근히 생각을 정리해 보자 내가 생각보다 더 박민후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나의 오랜 친구도 하물며 가족들도 저와 몇 년이란 세월을 함께 보내고 나서야 그나마 곁에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런데 박민후는?
그와 내가 만난 지 며칠이나 됐지? 한 달은 되었나? 그런데 그를 신경 쓴다고? 그걸 깨닫자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거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건 정말 새로운 기분이었다. 더 이상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로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그런 상황을 내가 겪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쩌면 내가… 박민후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지도 몰라. 나는 그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확신은 없었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지금 이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정의하니 이게 맞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럼 한 가지 더 해 보자. 누구였더라? 나와 말을 주고받던 같은 시간대 알바생 중 하나였던가? 하여튼 누군가 그랬다. 저 사람이 정말 좋은지 안 좋은지 이게 연애 감정인지 친구를 대하는 감정인지 만약 헷갈린다면 그 사람과 내가 키스하는 상상이라도 해 보라고, 키스할 수 있으면 연애하고 싶은 거고 상상이 안 된다면 그냥 친구 하고 싶은 거라고 했었지.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 비웃었던 것도 같고 이해 안 된다고 말했던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수긍했다. 나는 친구와 키스할 마음도 그런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자꾸만 친구와 그를 비교하게 되는 게 영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 상황과 가장 비슷할 만한 대상이 그 애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박민후와 제가 키스를 할 수 있을까?
처음 타인과의 접촉이 뚜렷하게 싫다고 느낀 건 처음으로 연애를 하던 때였다. 조금 안일한 생각에 연애를 시작했던 것도 같았다. 고백은 상대가 먼저 했고 나는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조금 궁금해졌었다. 대체 그놈의 사랑이 뭔지. 뭔데 온 세상이 매일같이 사랑을 이야기하는지,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라서 ‘그럼 연애를 해 보면 뭔가 달라질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때 상대가 말했다.
‘사귀다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
그런가? 그때는 아직 어렸으니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쪽으론 더 잘 알 테니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애는 애정이 따라 줘야 한다. 관계의 성립이고 당연히 혼자서 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당연하게 내게 사랑을 바랐고 신체 접촉을 원했다. 손을 잡는 것은 내가 먼저 금방 놓기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괜찮았다. 몇 번 반복하니 오래 잡고 있을 수도 있었다. 포옹을 하는 건 몸이 움찔거리고 당장에 밀치고 싶은 거부감이 들었으나 부끄러워 그러냐는 애인의 말에 그런 건가 싶었다. 물론 아니었지만. 그리고 입을 맞췄을 땐 확실히 거부감이 들었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여태까지 참았던 게 단순히 부끄러워서, 낯간지러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냥 거부감이 들었다. 그건 생리적인 거부감 같은 거였다. 성별과는 하등 관계없었다. 그냥 누군가와 제가 접촉한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그렇다면 애정도 없는 연애에 스킨십도 못 하는데 그만 헤어져야 하는 게 마땅했으나 그렇다고 바로 헤어졌던 건 아니었다. 그런 스킨십만 없다면 그럭저럭 잘 지냈으니까. 내 이런 상태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상대는 이상한 얼굴을 했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자신은 참을 수 있다고,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먼저 지친 건 상대방이었다. 그는 연인이라면, 애인이라면 당연히 스킨십을 해야 한다는 그런 욕구를 포기하지 못했다. 손도 잡고 싶고 껴안고 싶고 입술을 문대고 더한 것도 하고 싶다고 했다. 난처했다. 이런 것에 거부감이 든다 말했을 때 괜찮다고 말한 것은 본인이면서 그는 나를 매도했다. 그럼 헤어져야지. 내게는 간단한 문제였지만 상대방에게는 아니었다.
그때 상대는 나를 사랑한다기보다는 그저 우월감에 젖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감정이 둔하고 잘 모르는 인간에게, 스스로 직접 감정을 알려 주면서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그런 우월감을 맛보고 싶었던 게 아녔을까. 그도 그럴 게. 그와 함께 걷다 보면 사람들의 놀람과 수군거림을 듣게 되니까.
‘와, 어떻게 이수현 같은 애가 연애를 하지?’
‘네가 너무 좋아서 이수현도 변했나 봐.’
그들은 이 모든 게 너의 공인 것처럼 나를 보며 놀라워했고 너를 보면 추켜세웠다. 나는 이상한 놈이었고 너는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만든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게 참 이상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흘려 넘기길 몇 번 너는 점점 도를 넘어섰고 결국 나는 헤어지자고 했다.
내가 그와 헤어질 때 뭐라 했더라. 너는 드라마를 너무 본 거 같다고 했던가? 너는 나를 바꿀 수 있다 착각이라도 한 것 같다고 말했던가. 네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지. 그때 네가 뭐라고 했더라. 자긴 좋은 의도로 그랬다고 그랬지. 그래, 좋은 의도.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나는 너 같은 애를 알아. 좋은 의도로 그랬다면서 네가 한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네 행동에 피해를 보고 상처받은 사람은 생각도 못 하고 ‘난 좋은 의도로 그랬어.’, ‘난 널 위해 그런 거야.’ 하며 오히려 자기가 피해자인 척 굴어. 그게 얼마나 자기만족을 위한 행동인지도 눈치 못 채고 말이야.
네가 한 행동이 정말 자기만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날 위한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나? 나를 가르쳤다. 나를 바꿨다 하는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정말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웃었던 것도 같고….
“…쓸데없는 생각까지 해 버렸네.”
비슷한 상황을 떠올려 보기 위해 머리를 정리하니 별게 다 기억났다. 다시 박민후와의 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 글쎄…. 어떨까? 제 코앞까지 들이밀어지는 샛노란 눈을 떠올리며, 서로의 코끝이 스치고 서로의 숨결이 마주 닿는 거리에서 조금 거칠어 보이는 그의 입술을 제 입술에 문댄다 해도 나는 괜찮다고 넘어갈 것도 같았다.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상상하기 어렵지도 않았고 별다른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성욕이나 그런 욕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와 입을 문대고 손을 잡고 서로 끌어안고 그런 걸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은 들었으나 할 수 있는 거지 그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한때는 이런 내가 이상한가 싶기도 했지만,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 살다 보면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직접 만나지 못해도 다양한 방법으로 접하고 듣고 본다. 그렇게 다양한 성별, 다양한 성격,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또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으니 이 또한 이상한 게 아니었고, 틀린 것도 아니었으며, 잘못된 것도 아닌, 그냥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걸.
…하여튼 이 생각이 맞았다면 저는 박민후를 좋아하는 게 맞았다. 열렬한 사랑까진 아니었지만, 연애를 하고 싶은 정도의 호감은 맞았다.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박민후처럼 감정을 주체 못 해 흘러넘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모든 게 낯설고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한 번도 누군가가 제 삶에 특별하다 여겨 본 적이 없건만…. 그는 특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밝아 보이거나, 하늘을 붕 뜨는 기분이라더니 막상 겪어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심장 언저리가 조금 욱신거리고 기분이 술렁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박민후가 보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박민후를 보고 싶다고 인정하자 그럼 이게 좋아한다는 거겠지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이제 이 집에 박민후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직접 찾으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럽게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의 전화번호조차 몰랐다. 아, 그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나마 그의 거처를 알 만한 곳이라곤 헌터 협회뿐인가? 운이 좋다면 차주영이나 강유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 일단 헌터 협회로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밖에 나가면 바로 택시를 잡아타야지.
“…….”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열린 틈으로 세찬 겨울바람이 다가와 얼굴을 때렸다. 그 찬바람을 맞자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자 다시금 든 의문에 그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정말 이런 어중간한 감정으로 박민후를 붙잡아도 되는 걸까?
다시 의문이 솟구쳤다. 모르겠다.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처음부터 서로가 좋아서 연애를 했을까? 그런 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허구의 이야기가 아닐까? 사람 마음이 어떻게 다 똑같겠어. 누구는 아직 여기까진데 누구는 저만치 달려가 버릴 수도 있었다. 사랑의 경도도, 계기도 다 다르지 않던가. 지금 제가 그랬고 박민후가 그렇지 않은가.
현실과 허구는 다른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책과 영화로 사랑을 배웠다지만 모든 게 사실이 아닌 것쯤은 알았고, 모든 게 거짓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그러니 더 혼란스럽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해야 정답이라고 말한다. 내가 보아온 사랑은 통틀어 ‘모순덩어리’였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아주 틀리지도 아주 맞지도 않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모두 처음에는 나처럼 굴지도 몰랐다. 그저 작은 계기로 관계의 시작을 고하고, 그러다 점점 상대가 좋아져서 나중에는 같은 감정으로 서로가 서로의 옆에 서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내게 박민후는 그 정도 노력을 해 보도록 만드는 인간이었다. 그럼 된 거지.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따갑게 뺨을 때리며 얼굴을 붉게 만들었지만 지금 추위 따윈 신경 쓰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