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나를. (11/18)

10. 나를.

우리는 좁은 우산 안에 욱여넣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산을 썼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박민후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홀딱 젖어 비 맞은 생쥐 꼴이 돼 버렸다. 늦가을의 비는 너무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리는 추위였다. 덕분에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걸 새삼 느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에 내렸다. 활짝 열린 채로 방치되어 있는 내 집 현관문을 마주하는 건 퍽 당혹스러웠다. 슬쩍 눈을 피하는 박민후를 보다가 현관에 널브러져 있는 운동화가 보였다. 나는 그제야 그가 맨발이란 걸 깨달았다. 내가 집에 없었기 때문에 버선발로 뛰쳐나온 건가? 대체….

“발 괜찮아요?”

“뭐?”

“아, 아뇨. 말이 헛나왔어요.”

“…지금, 내 발을 걱정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슬쩍 시선을 피하자 뭐가 그리 좋은지 박민후가 능글맞게 눈웃음쳤다. 나는 그런 박민후를 현관에 세워 두고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젖은 거지만 박민후는 그냥 옷째로 물에 들어갔다 나온 꼴이었기 때문에 대충이라도 닦고 집에 들어와야 할 것 같았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그의 발아래는 금세 물웅덩이가 새롭게 생겼다. 그 꼴을 보다가 그의 머리에 수건을 덮어 주었다.

“물기는 대충 닦고 들어와요. 아니다, 그냥 거기서 벗고 들어올래요?”

“어? 뭐?”

그 말에 박민후가 퍽 당황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나는 보일러를 켜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게 좋겠지. 이럴 때면 욕실이 작아 욕조가 없는 게 퍽 아쉬웠다. 이런 날엔 따뜻한 물에 푹 담그고 싶어지는데…. 작게 재채기가 나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태 문을 열어 놓은 터라 집 안의 공기는 바깥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추워라. 이러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젖어서 들러붙기 시작한 점퍼의 지퍼를 내리자마자 옷 안에 넣어 놨던 박민후 1호랑 2호가 튕기듯 뛰쳐나와 침대 위에 엎어졌다. 배를 까뒤집고 1호와 2호가 작게 하울링 하며 침대 위를 뒹구는 것을 내버려 두고서 마저 달라붙는 셔츠를 벗기 위해 단추를 풀며, 욕실 쪽으로 향했다. 나머지 놈들은 다 들고 갈 수가 없어 그림자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다행히 말을 들어서 다행이었지…. 보일러를 켜고 다시 돌아왔을 때 박민후는 겨우 겉옷 하나만 벗어 들고 서 있었다.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뭐 해요. 안 벗어요?”

***

“…벗어.”

…거참. 말을 묘하게 한다고 박민후는 생각했다. 그리고 제 머리 위에 얹어진 수건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같이 씻어요. 좀 좁겠지만, 뭐 두 명이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수현이 셔츠를 벗어 던졌다. 철퍽 하고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제 할 말이 끝나자 이수현은 바지 버클을 풀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도 않았다. 박민후가 따라 들어올 것을 대비해 그냥 열어 둔 거였다. 안쪽에서는 마저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그가 수치심이라든가 동성 앞에서도 맨몸을 보일 때에 부끄러움이라든가 하는 그런 걸 좀 느꼈으면 좋겠다고 박민후는 수건에 얼굴을 파묻으며 꿍얼거렸다. 저놈은 수치심 같은 것과 인연이 없는 놈이란 걸 아는데, 알긴 아는데 진짜….

박민후는 미치도록 고민했다. 이 집의 욕실은 작았다. 원룸에 딸린 게 뭐 얼마나 크겠는가. 성인 두 명 들어가면 꽉 차는 그런 크기였다. 박민후는 제 덩치를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수현과 살이 맞닿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수현과 맨몸으로 붙어 있으라고? 저를 죽일 생각인가?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은데? 박민후는 역시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수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박민후가 하도 안 들어오니 그가 나온 것이다.

박민후는 순간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눈을 아래로 내렸다 황급히 위로 올렸다. 제 팔뚝을 덥석 잡는 손에 화들짝 놀랐다. 옷을 사이에 두고 닿은 체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절로 얼굴에 시뻘게졌다. 얼굴만 붉어지면 다행이지, 미치겠네. 하나 저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박민후는 삐걱거리며 못 이기는 척 이수현의 손에 이끌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수현은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서자 손을 놓고 먼저 반투명한 샤워 부스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 상황에선 나가지도 못한다. 결국 머뭇거리다 한숨을 쉬며 박민후는 잘 벗겨지지 않는 옷을 하나둘 벗어 한쪽에 놓인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문득 세면대 거울에 비치는 제 흉터투성이 몸이 자신이 볼 때도 좋게 보이지 않아 조금 멈칫했다. 이수현이 싫어하면 어쩌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관심도 주지 않겠지만….

“얼른 들어와요. 감기 걸려요.”

“…어.”

이따금 이수현은 박민후를 일반인 취급한다. 이 세상에서 박민후를 걱정하는 건 이수현이 유일하겠지. 저는 이런 걸로 감기에 걸리지도 않을 거고, 겨우 맨발로 돌아다녔다고 발이 다치는 일도 없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으면 박민후는 고작 비를 맞은 걸로 감기에 걸릴 것 같았고, 고작 맨발로 걸었다고 발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샤워 부스 안은 예상대로 둘이 서 있기엔 비좁았다. 박민후는 그와 살이 맞닿지 않기 위해 벽에 붙어 섰다. 등에 닿는 벽이 차가웠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과 온도 차 때문에 샤워 부스 안은 뿌연 수증기가 감돌았다. 박민후에게 등을 보이고 선 이수현이 앞에서 꼼지락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 것에 시선이 절로 따라갔다.

“음, 생각보다 더 좁네….”

“그러게 뭐 하러 같이 씻어.”

“그럼 어떡해요. 그런 꼴을 하고 있는데…. 그쪽이 본인 꼴이 어땠는지 모르나 본데….”

이수현이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뜨거운 물줄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박민후는 이수현을 보았다.

“…난 감기 같은 거 안 걸려.”

“…그렇겠죠.”

그 말에 이수현은 새삼 깨달았다. 그는 감기에 걸리지 않겠지. 발도 괜한 걱정일 테다. 괜한 행동을 했다는 뒤늦은 자각이 들었다. 그는 저와 같은 일반인이 아니지 하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좁으니까 나가라고 하기도 조금 뭐 하지 않은가? 그냥 제가 대충 먼저 씻고 나가면 되겠지.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서로의 발을 밟거나 서로의 몸에 닿을 듯한 거리감이었다. 조금 움직이기 불편할 뿐이지 씻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한참 씻다가 생각해 보니 제가 샤워기 물을 다 막고 있는 게 아닌가, 이수현이 벽에 걸어 둔 샤워기를 손에 쥐고 박민후 쪽에 뿌렸다.

갑작스럽게 닿는 물에 그가 조금 움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물이 안 닿으면 말을 하지.”

“네가 빨리 씻고 나가는 게 차라리 나을 거 같으니까 그랬지.”

“그렇긴 해요. 그래도 춥지 않아요? 헌터라고 안 추운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별로… 냉기 저항이 있으니까.”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수현은 무심히 손을 놀려 박민후 몸 여기저기에 물을 뿌렸다.

“눈 감아요.”

“됐어, 너 먼저….”

“얼른.”

하는 수 없이 박민후가 눈을 감자 따뜻한 물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가만히 물줄기를 맞는 모습을 보며 이수현은 어젯밤 제가 씻는데 쪼르르 따라와 난리를 치던 박민후 1, 2, 3, 4, 5… 호가 떠올랐다. 진짜 개도 아니면서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인간 쪽은 그나마 얌전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어제 밥은 먹었어?”

“그럼요.”

“사 먹었지.”

“네.”

“해 먹을 생각은 없는 거야? 재료는 다 사 뒀는데….”

“귀찮아서.”

“귀찮을 것도 많다. 그렇게 귀찮아서야 숨은 어떻게 쉬는 거야?”

“숨 쉬는 것도 때때로 귀찮아요.”

그 말에 박민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여태 물이 얼굴을 때리고 있는데 그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샤워기를 목 아래로 내려 줬다. 그러자 그가 감겨 있던 눈을 느리게 두어 번 깜빡였다.

물기를 머금은 샛노란 눈이 오늘따라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이수현이 그의 눈을 빤히 보는데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접어 웃으며 눈 깜빡할 사이에 이수현의 손에 들린 샤워기를 뺏어 들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그걸 이수현에게로 돌렸다. 막을 새도 없이 뜨거운 물이 얼굴을 때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읍?!”

코로 물이 들어갔는지 코가 찡했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박민후와 다르게 이수현은 이런 식으로 물을 맞으면 숨쉬기가 좀 힘들었다. 숨 쉬는 것도 귀찮다고 했다고 이러는 건가? 그래서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치우려고 했다. 하나 제 손은 허공을 갈랐다. 분명 이쪽에 있었는데? 박민후가 요리조리 손을 피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물소리 사이에 섞여 들려왔기 때문이다. 눈을 감은 상태라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그가 피하기까지 하니 계속 헛손질을 하게 됐다. 차라리 물줄기를 피하자 싶어 움직이다 앞으로 뻗은 손에 무언가 닿아 무심코 움켜쥐었다.

말캉했다.

박민후의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뜨끈한 온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벽이나 팔뚝은 아니었다. 뭐지 싶어 주물러보는데 얼굴을 때리던 물줄기가 순간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타이밍에 맞춰 반대쪽 손을 들고 얼굴에 남은 물기를 쓸어내리며 이수현은 눈을 떴다. 당황한 얼굴로 저를 보는 박민후의 얼굴이 아까보다 가까운 곳에서 보였다.

“…….”

“…….”

…그랬다. 이수현의 손이 잡고 있는 건 박민후의 왼쪽 가슴이었다. 그걸 확인하자 슬그머니 한 움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박민후의 얼굴이 좀 붉은 것도 같았다. 그도 이수현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기에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이 들려왔다.

좀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뭐, 뭘…. 주물럭거리는 거야?!”

“아니….”

“와…. 와, 이수현. 이거 완전 변태 아냐?”

박민후가 등 쪽의 벽에 찰싹 붙어서 한쪽 팔로 제 가슴을 가렸다. 이수현은 그의 그런 반응이 너무 오버스러워서 그가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목까지 완전히 새빨개져서는…. 물기를 머금은 샛노란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꼴을 마주하는 건 퍽 당혹스러워, 이수현은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닫고서 머리를 굴렸다. 일단 제 실수니, 사과를 해야 하나…. 싶다가도 ‘아니 이게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가 제 얼굴에 물을 뿌린 게 문제 아니었나.

“…그쪽이 얼굴에 물을 뿌려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게 장난만 안 쳤어도 내가 거길 왜….”

“야, 그런 거면, 그럼, 그걸 왜 주물러…!”

“제가 언제….”

“완전 떡 주무르듯 주물렀거든?”

가끔 너무 당황하게 되면, 여기서 멈춰야 장난으로 여기고 넘길 수 있는데 괜히 더 오버해서 장난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 지금의 박민후가 딱 거기에 해당했다. 박민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뭐라고 말을 해야 이 분위기를 가볍게 넘길 수 있을지 고민조차 못 했다. 장난치듯 말한 것은 좋았으나 거기서 끝을 내야 했다. 장난식으로 끝내고 그가 욕실을 나가든, 이수현이 나가든,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야 했으나 너무 당황해서 일부러 물고 늘어지고 말았다.

입을 멈춰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더웠다. 온몸의 열이 퍼지는 기분이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또…. 분명 제 얼굴은 목까지 붉어졌겠지.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올라 눈앞이 어질했다. 이 무슨 어린애 같은 반응인가. 이수현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박민후에게는, 너무 그 접촉이 위험했다. 그의 손가락이 제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 세상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런 장난은 왜 쳐서는! 이수현이 없었다면 욕실 벽에 벌써 머리를 박았을 것이다. 욕실 안에 수증기가 가득해서, 그가 아래를 안 봐서 정말 너무 다행이었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벽에 착 달라붙어 저와 거리를 두려는 그를 보자 이수현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언뜻 알 거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그런…. 그렇기에 이수현은 제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박민후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말을 꺼냈다.

“할 말이 없네요.”

그랬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박민후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갑자기 누가 가슴을 움켜쥐면 놀라긴 할 테니까….

“…일단 사고였지만 미안해요.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말에 박민후가 눈에 띄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수현은 그를 내버려 두고 샤워 부스 밖으로 나왔다. 박민후의 시선이 저를 쫓는 것을 알았지만 시답잖은 말싸움이 계속될 바엔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선반에 올려 둔 수건을 꺼내 몸을 닦으며 욕실을 완전히 벗어났다. 등 뒤로 문이 착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수현은 옷장으로 향했다.

욕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이수현이 욕실 앞을 떠난 것을 귀 기울여 듣던 박민후는 그가 완전히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여태 뜨거운 물이 나오던 샤워기를 찬물로 바꿔 틀었다. 그러고는 샤워기를 고정하고 찬물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열을 식힐 필요가 있었다. 그가 생각해도 제 반응이 너무 과했고 웃겼다. 뭐가 그렇게 놀라고 뭐가 그렇게 설레서 겨우 가슴 좀 만졌다고…. 하물며 제가 만진 것도 아니었다! 아니, 왜 그걸 그렇게 떡 주무르듯 주무르는데…!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펄쩍 뛰었다. 이수현의 손이 제 가슴에 닿았을 땐 너무 놀라 숨을 멈췄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살을 세게 움켜쥘 땐 참았던 숨을 들이켰다. 그 손짓이….

짝!!

“…미쳤지.”

있는 힘껏 제 손으로 제 뺨을 내리쳤다. 미쳤지. 미친 거다. 자신이 아무리 이수현을 그렇게 여긴다지만 아니, 겨우 그걸로 이러는 게 말이 돼? 하반신이 뻐근해지는 감각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이걸 여기서 어찌 해결하기엔 밖의 이수현이 너무 신경 쓰였다. 그가 눈치챌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좀 그렇잖은가…. 여기서 그 짓을 하면 이수현보고 변태라고 뭐라 했지만 실상 변태는 자신 아닌가? 게다가 아직도 그가 제 가슴을 움켜잡은 느낌이 너무 생생했다. 박민후는 괴로움에 머릴 쥐어뜯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나 더 찬물 아래 서서 열이 식기를 기다렸다.

***

박민후가 몸이 좋은 것은 알고 있었으나 딱히 관심은 없었기에 이수현이 직접적으로 그의 몸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딱 벌어진 어깨와 반대로 조금 가는 듯한 허리는 이상적인 역삼각형 몸이었다.

박민후는 좀 신경 쓰는 듯했지만 그의 흉터투성이의 몸은 사실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그의 과거를 보았기 때문일까, 그 기억 속에서 보았던 상처가 흉터로 가득 남아 있는 광경은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다 여겼을지도 몰랐다. 사실 몸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에도 희미한 흉터는 꽤 여럿 있었기에 어림짐작이 가능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옅은 흉터였다. 그래도 기억 속에 남은 그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그대로 커다란 흉터로 자리 잡은 것은 아무래도 시선이 갔었다.

그러다 이수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한쪽 손이 잼잼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주먹을 꾹 쥐었다. 손안의 말캉한 감촉이 좀 오래 남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캉… 했지. 이상하게 말캉했다. 가슴 근육이 많으면 부드럽다더니…. 사실이었구나. 가슴이 좀 큰 듯했고…. 아니, 컸지. 그러니 내 손이…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퍼뜩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무척 의아해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그의 말대로 변태가 따로 없었다.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대체. 조금 변명을 하자면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물기를 머금은 샛노란 눈이, 잔뜩 붉어질 대로 붉어져 목까지 발개진 얼굴로 저를 보던 박민후를 한 번 더 떠올렸다가 이수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옷을 챙겨 입었다.

이수현은 침대에 앉아 저를 보는 1호와 2호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보고 박민후가 뭐라 한소리를 할 것 같았지만, 그가 제 식모도 아닌데 제게 밥을 해 줄 이유도 없거니와 그냥 자신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유통 기한이 아슬아슬한 애들이었다. 그래도 신 메뉴라길래 무슨 맛일지 궁금해서 사 왔다.

박민후는 그 뒤로 한참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옷을 가지고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옷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채였다. 인벤토리에서 꺼내 입은 건가? 그냥 나와서 입으면 될 텐데…. 이상하네. 머리에 얹어진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다가오던 그는 이수현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가 성큼 다가와서 식탁을 탁 소리 나게 짚었다.

“굳이 그걸 먹어야겠냐? 내가 해 준다고 했잖아.”

“음, 됐어요.”

이미 반 이상 먹었다. 굳이 다른 걸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게다가.

“그쪽 꼴이 어떤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굉장히 피곤해 보이거든요?”

“…별로 안 피곤해.”

그가 고집스레 그렇게 말하며 눈을 피했다. 집에 오기 전부터 피곤한지 죽상인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아까보단 나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지쳐 보이기도 했고. 이수현은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1호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 드라이어를 찾아 들고 침대로 다가갔다.

“밥은 됐어요. 비를 맞고 왔을 때부터 그쪽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고요. 제가 특별히 오늘은 침대를 양보해 줄 테니까 쉬는 게 어때요? 일단 이리 와요.”

“…왜?”

“머리 말려 주려고요. 젖은 상태로 내 침대에 누울 건 아니죠?”

콘센트를 꽂으며 박민후를 불렀다. 그가 머뭇거리며 제 곁으로 다가오길래 바닥에 앉으라고 턱짓했다. 요즘 따라 그는 참 말을 잘 듣는 개 같았다. 처음에 봤을 땐 안 그랬는데 말이야…. 같이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느슨해졌다. 그게 썩 나쁘지만도 않아 굳이 이런 일을 하는 거지만.

이수현은 얌전히 제 발치 아래 저를 등지고 앉은 박민후를 보며 손에 들린 드라이어를 켰다. 위이잉, 소리를 내며 따뜻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머리를 살살 헤집으며 드라이어를 이용해 그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수현, 오늘따라 낯설다…? 뭐 잘 못 먹었어?”

“아뇨. 식중독 걸릴 만한 건 안 먹었는데.”

“평소랑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갑자기 왜 이래?”

그가 진심으로 이상하다는 듯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그런 박민후의 머리통을 꽉 눌러 잡았다. 자신이 이러는 건 사실 별 이유는 없었다. 한 가지 이유를 꼽자면… 그래.

“박민후 헌터가 없는 동안 영화를 봤는데요.”

“영화? 갑자기 웬 영화?”

“영화에서 그러더라고요. 피곤할 땐 이렇게 해 주면 좋다고…?”

물론 이수현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는 안 갔지만. 그렇다고 했으니까 한번 해 본 거였다. 좀 궁금했으니까 ‘진짜 저러면 기분이 나아지나?’ 하고, 이수현은 제 손가락에 감기는 그의 머리카락이 의외로 부드러워 놀랐다. 좀 더 거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구나.

“영화 하나, 봤다고 이러는 거야…?”

“뭐, 그렇죠. 그래서 어때요. 좀 괜찮나요?”

“…어, 괜찮아.”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 졸음기가 묻어났다. 짧은 머리카락을 말리는 데 오래는 필요 없었으나 그새 박민후는 졸음이 왔나 보다. 이것도 영화랑 비슷했다. 머리를 말려 주면 말리는 대상이 졸음이 와서 꾸벅 졸고 그대로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지더라.

“끝.”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 넘겨주고 드라이어를 껐다. 그러자 박민후가 느릿하게 몸을 틀어 이수현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댔다. 졸음기가 가득 들어찬 샛노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데 머리 한쪽이 이상하게 뻗쳐 있었다. 이수현이 손을 들어 그 부분을 쓸어 넘겨 주었다. 언뜻 쓰다듬는 모양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이상했다. 괜히 손가락이 꿈질거렸다. 가만히 제 손길을 받고 있던 박민후가 조금은 졸음이 가신 눈으로 이수현을 보았다.

이수현은 그가 제게 뭐라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볼 뿐. 그 광경은 참 신기했는데 언제나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건 음…. 이걸 뭐라 하더라. 이럴 때 쓰던 단어가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났다. 박민후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올라와서 자요.”

“…너도 알잖아. 어차피 지금 자도 제대로 못 자는데 굳이 이렇게 일찍 잘 필요는 없어.”

“뭐, 그래도요. 일단 누워 봐요. 어쩌면 오늘은 잠이 잘 올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머리도 말려 줬는데…. 이수현은 내심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 생각하며 침대를 두들겼다. 그가 어기적어기적 침대 위로 올라왔다. 침대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침대는 그가 똑바로 눕자 꽉 차다 못해 넘치는 느낌이었다. 침대 밖으로 그의 발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게 좀 웃겼다. 저번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박민후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 몸을 틀어 벽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안 졸린데.”

“그냥 누워 있다 보면 다시 졸릴지도 모르죠.”

“이수현 집 꼴이 엉망이야.”

“그러네요. 누구누구 씨 때문에 여기까지 물이 고였어요. 이따가 청소를 좀 해야겠네.”

“네가?”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하겠어요?”

“…내가 이 집에 와서 네가 청소를 하는 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베개에 머리를 파묻은 박민후가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리자 이수현은 눈가를 구기며 흘러가듯 대답했다.

“그쪽이 이 집에 있어서 그랬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왜?”

“…왜라고 하면, 딱히 들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래도 말해?”

“뭔데 그래.”

이수현은 딱히 들어서 좋을 게 없을 내용이라고 생각했지만, 박민후는 궁금한지 어서 말해보라며 나를 재촉했다. 그러나 박민후는 이수현의 입에서 나온 말에 바로 듣지 말 걸 하고 곧장 후회하고 말았다.

“그쪽이 이 집을 빨리 나가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무미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차게 들렸다. 박민후를 내려다보는 무심한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흘러가듯 당연한 이야길 하듯 그렇게 이수현은 말을 이었다.

“누군가와 같이 살게 된다는 건 그런 거잖아, 같이 사는 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한 발씩 물러서서 불편을 감수하는 거. 청소를 하는 것도, 밥을 하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그렇죠. 나는 그래. 불편한 상대를 위해 굳이 청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 상대를 위해 밥을 할 이유를 생각하기 싫었고….”

박민후는 누군가 제 심장을 짓뭉개는 기분을 느꼈다. 순식간에 뱃속이 공허해졌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의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할 테지만…. 그런데도 박민후는 괴로움에 이불 속에서 숨을 죽였다. 이수현이 살포시 눈을 내리깔며 말을 골랐다.

“뭐, 그런 거죠. 내가 원해서 시작된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당신의 고집이었고, 강요였고. 난 하는 수 없이 수긍했던 거지. 그러니 내가 그런 식으로 굴면 그쪽이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박민후는 가슴이 너무 아파 심장 부분을 잡아 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 살을 찢어 그 안에 심장을 뜯어내면 이 아픔이 멈추지 않을까 같은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로, 힘주어 주먹 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를 흘렸다. 그의 자가 치유 능력이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를 회복시켰으나 여전히 힘을 주고 있어, 다시 상처가 나고 치료되기를 반복했다. 제 표정이 꼴사납게 구겨진 것이 이수현의 눈동자에 비쳐 보였다.

“…그래서 내가 들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했잖아.”

그런 박민후를 빤히 내려다보던 이수현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하게 떨리는 샛노란 눈이 이수현의 뒤를 쫓았다. 다물린 입이 달싹거렸다. 그럼 지금은? 지금도 그래?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문장이 혀끝에 맴돌았다. 이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박민후는 겁이 났다. 박민후에겐 언제나 불행뿐이었기에 괜한 기대는 저를 좀먹을 뿐이었다. 그러니 상상으로도 그가 긍정적인 대답을 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물론 지금 상황이 처음보다는 나아졌다는 것을 그도 안다. 맨 처음 마주한 이수현은 박민후를 위해 이런 식으로 행동할 인간도 아니었고, 제게 다정하게 굴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 한 말도 고민조차 안 하고 내뱉었겠지. 하지만 그런데도 겁이 났다. 말을 잘못 꺼내면 지금 이 관계는 끝이 날 거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제 감정을 들키는 날엔 이수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곁을 떠날 것 같았다. 그에게 저는 여전히 빨리 떠나보내고 싶은 불청객일 뿐일 테니까.

***

툭, 투둑….

오늘도 빗방울이 베란다 차창을 세게 내려치고 있었다. 여름도 다 가고 가을도 지나 겨울이 훌쩍 다가왔건만 뒤늦은 장마였다. 이따금 휴대폰이 울리면 이제는 익숙한 재난 문자가 와 있었고, TV를 틀면 장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뒤늦은 장마는 전국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호우 주의보가 쏟아지고 물에 잠기고 난리가 났다면 난리였다. 헌터들에게는 말이다. 물론 일반인들도 쉽사리 나가기 힘들 정도로 억센 그런 날씨였기에 자연스럽게 나는 집에서 뒹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을 보내기는 의외로 쉬웠다.

그동안 사는 것에 바빠 해 보지 못한 것 중 영화 보기가 있었다.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그랬고, 나이를 먹어서는 혼자 나와 살려면 돈이 필요했기에 여가 생활을 할 틈이 없었다. 부모에게 손을 벌리기 싫었으니 뭐든 혼자 하려고 했고, 그러니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영화가 산더미였다. 지나가면서 들은 영화 제목들이 가끔 궁금했다. 모처럼이니 이곳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영화가 이 세계에 존재하진 않았다. 비슷한 이름을 달고 비슷한 내용을 연출하는 것은 꽤 있었지만….

그래서 나는 집 안에 틀어박혀 몇 날 며칠을 영화를 보며 보냈다. 세상은 살 만해져서 결제만 하면 바로 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박민후도 내 옆에서 같이 영화를 봤다. 그도 영화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비가 그치면 나중에 그와 영화관에 가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여러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같이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건 박민후는 일상물과 판타지를 좋아했다. 나는 등장인물의 감정이 잘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사랑 영화나 슬픈 영화를 선호했다. 박민후는 참 안 어울린다고 했다. 나도 그에게 똑같이 말해 주었다.

그에게 말한 대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저마다 서로를 조금씩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누구 한 명이 불만을 참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박민후와 오래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의 강요와도 같은 동거 생활에 내가 그를 배려해 줄 이유가 없었고, 그런 내 행동에 그가 참지 못하고 이 집을 나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래야 할까? 그건 조금 고민해 볼 문제였다.

그래서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조금씩 집안일을 같이 했다. 청소하는 것도 그랬고 가끔 밥을 해 먹는 것도 그랬다. 내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박민후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것은 매우 유쾌했기에 조금 재밌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요리도 청소도 할 줄 알았다. 다만 혼자 살 때는 집안일이 너무 귀찮았다. 어차피 나 혼자 있는데 굳이 치우는 것도 귀찮았고, 그 외에도 일단 시간이 없었다. 집에 오면 자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해 먹는 건 뭘 먹던 보통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아 늘 남고 버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 그렇게 인스턴트만 먹게 됐다. 게다가 밖에서 일하면서 요리도 청소도 지겹도록 하는데 굳이 집에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도껏만 해 놓고 살았다.

박민후는 그런 나를 아주 생활력 없는 인간으로 오해한 듯했지만. 굳이 정정해 줄 마음은 없었다. 박민후는 깔끔했고, 그가 만든 요리는 먹을 만했으며 청소하는 걸 싫어하지도 않았고 또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박민후가 옆에 있으니 내 귀차니즘이 승리했다는 말이다.

「…오늘은 나가지 말자. 어쩌면 당분간은 집에만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폭풍우가 온다더라.」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창밖을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퍽 지금의 상황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영화를 보던 시선을 슬쩍 돌려 침대 아래 앉아 있는 박민후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오늘도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깔린 집 안은 이따금 빗소리와 함께 천둥소리가 스며들었고 그 소리와 더불어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는 영화 속에서마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박민후는 조용했다. 영화를 보는 상황이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영화관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영화에 푹 빠져든 것인지 미동도 없이 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흔히 유령이란 건 살아생전 미련이 많이 남아서 죽어도 떠나지 못하는 거라더라. 뭔가 짚이는 거 없어?」

「…음, 글쎄. 있었어도 지금은 너무 늦었지. 날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내가 알던 세상도 이젠 더는 없으니까. 뭔가 바라기엔 너무 늦었지. 기억도 안 나. 나는 꽤 홀가분하게 죽었거든.」

「…그래?」

이번에 고른 영화는 만들어진 지 좀 된 판타지 영화였다. 화면의 색이 바랬고, 조금 빈티지스러운 느낌을 줬다. 박민후가 고른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보니, 볼 게 없어 내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추천을 많이 받은 것을 고른 것이었다.

…그게 퀴어 영화일 줄 몰랐지만.

[…죽는 건 무섭지 않았지. 정말이야. 나는 내가 죽을 거란 걸 알았어. 내겐 정해진 끝이 있었지. 그래서 괜찮았어. 단지….]

헌터로서 생을 마감한 한 남자가 눈을 뜨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눈을 뜬 곳은 폐허 속이었다. 남자가 마지막까지 몬스터와 싸웠던 장소였으나 무언가 이상했다. 부서진 건물과 잔해들을 휘감고 뚫고 자라난 푸른 잎들이 그렇게 이질적일 수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게다가 분명 치명상을 입은 남자의 몸은 너무나 멀쩡했다.

그때 멀리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남자는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저를 보고 있는 또 한 명의 남자와 마주한다. 멋대로 사진을 찍은 남자는 사과를 하며 폐허 속에 서 있던 남자에게 다가와 사진을 건넸다. 그러나 사진은 남자의 손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진 속에도 남자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대략 그런 내용의 영화였다. 유령이 된 남자가 자신이 살던 시간보다 한참이나 더 시간이 흐른 뒤 눈을 떠 성불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남자와 여행을 다니는 그런 내용이었다.

영화 속 세상에는 더는 던전도 각성자도 없었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길을 걸을 때마다 몬스터가 튀어나올까 혹시 하는 위험도 없었고, 헌터들은 역사의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영화 속 인물들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유령을 사랑한 남자는 찍히지도 않을 남자를 피사체로 삼았다. 그들은 평범하게 사랑을 했다. 영화는 조금 우중충했고 애절했고, 서글펐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아주 잘 표현해낸 영화라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를 보며 내가 원래 살던 세상을 떠올렸다.

“박민후 헌터.”

“왜?”

느리게 화면에서 시선을 돌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저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그는 바닥에 앉아 있으니 눈높이가 엇비슷했다. TV 속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그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만약에 말이죠. 아주 만약에. 던전도 없고 몬스터도 없고 각성자도 없는…. 그런 세계가 있다면 어떨 거 같아요?”

“영화처럼?”

“예, 지금 저 영화처럼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마나도 없고?”

“그래요.”

“그거 좋네.”

박민후가 다시 시선을 돌려 TV를 쳐다보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두 사람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니 너무 꿈같은 일이야. 아무래도 이런 세상이니 살아가면서 그런 상상은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걸?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감이 없지. 아무래도 무리니까, 상상을 해도 실감은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왜? 그런 세계가 있으면 좋겠어?”

그가 느슨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나는 반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는 것을 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잔잔한 분위기에 취했다 감히 변명해 보겠다.

“…사실 말이죠. 있어요.”

“뭐?”

내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런 세계 말이에요. 나는 사실 그곳에서 왔어요. 당신이 내게 저주에 걸린 게 아니냐고 전에 물은 적 있죠? 저주가 아니에요. 애당초 내가 살던 곳은 마나가 없는 세계였거든요. 그러니 제가 마나가 없는 건 아주 당연한 거예요. 내가 살던 곳은 마나도 없고, 몬스터도 던전도…. 하물며 각성자도 없는 다소 평화로운 세계였으니까. 아니다, 막 엄청 평화로운 건 아닌데 일단 이곳보다는 평화로워요. 그곳에는 마나도 마석도 없어서 전기를 사용하고…. 또….”

또 뭐가 있더라? 마저 생각하는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민후가 침대 위로 훌쩍 뛰듯이 올라왔다. 침대가 삐걱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그에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나를 팔 안에 가둔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갈 거야?”

그가 다급하게 물어 왔다. 박민후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예?”

“돌아갈 거냐고…!!”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져 있어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조금 얼떨떨했다.

“…내 말을 믿어요? 방금까지 말도 안 된다고 했잖아.”

“어, 믿어. 네가 그런 거로 거짓말할 놈도 아니잖아. 게다가 게이트가 있는 세계야. 던전은 다른 차원이라고도 해. 다른 곳에서 건너온 놈들을 본 적도 있고, 그러니 네가 말한 세계라고 없을 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

***

이수현의 태평한 말투와 행태에 박민후는 애가 탔다.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그렇다는 말은 언제든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제 눈앞에서 그가 사라질 거란 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심장이 심연 밑바닥으로 처박힌 것만 같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해요.”

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상스럽게 말했다. 박민후는 제 얼굴이 어떤지 따윈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가. 그가 말한 세계가 있다면 좋겠지. 분명 좋을 거다. 꿈같은 세상이니까. 하지만 그곳으로 이수현이 돌아가게 된다면 말이 달라졌다.

“가지 마.”

너무했다. 왜 그런 말을 해. 왜 내게 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는 거야? 손에 닿는 침대 시트가 바삭거리며 손안에서 구겨졌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휘감았다. 당장에라도 그가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가지 마, 이수현.”

“…어차피 돌아가는 법도 몰라요. 알게 되더라도 갈 필요성도 못 느끼고….”

이수현은 제 눈앞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박민후의 얼굴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고 그의 눈이 어떤 감정을 품는 것인지 눈앞에서 하나도 빼먹지 않고 새겨 넣듯 그렇게….

그리고 이수현은 눈치채 버렸다.

이수현은 감정이 요동치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계기는 단순했다. 유난히 해가 쨍한 그런 어린 날의 여름이었나. 혼자서 길을 걷다 문득 옆을 돌아보았는데 제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거울이 있었다. 그날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딱 마주쳤는데, 태양 아래서 비치는 제 눈이 평소와 달랐다.

그때 이수현은 눈이란 건 생각보다 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타인의 눈에도 흥미가 갔다. 제 눈이 이러하니 다른 사람은 어떠할까, 그러니 친구를 잡아다 빤히 얼굴을 마주했다. 친구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마치 거울에 비추는 것처럼 보이는 게 너무나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런 눈이 감정을 담으면 어떻게 변하는지 알게 된 순간 이수현은 사람을 볼 때 눈부터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처럼 많은 감정을 품은 눈이 저를 직시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건 그렇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가지 마.”

격한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동자와 거기에 비치는 제 무표정한 얼굴. 저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그 모습이 좋았다. 아마 이건 단순히 눈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기보단… 제 자신의 감정에 둔하니까 제가 모르는 감정을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보고 싶은 데에서 온 행동이었다.

“가면 안 돼.”

이수현이 아는 박민후라는 사람은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가 결여된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수현과는 반대로 무척이나 감정적이었고 때때로 충동적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지금 본인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으로, 또 어떤 목소리로 제게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모르겠지. 모르니까 저렇게 감정이 흘러넘치는 상태로 저를 보고, 자신에게 이리 말하는 거겠지. 이쯤 되면 모르는 게 이상하지. 한번 눈치채 버리니 그동안 그가 제게 보여 준 여러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가득 메우다 흩어졌다. 이수현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지금 박민후한테 뭐라 말 할 수 있을까.

“…안 가요.”

“그럼, 됐어….”

정말 그걸로 된 건가요?

왜 나를 그렇게 봐요?

당신이 지금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숨기고 싶었으면 좀 더 잘 숨겨 볼 것이지. 아무도 모르게, 계속 눈치채지 못하도록 좀 더 꼼꼼히 숨겼어야지. 이렇게 흔들려서 다 티를 내니까, 그만 눈치채 버려서… 그래서. 이수현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고민하게 만들지 말지.

***

그날 후로 박민후와 이수현의 관계에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생겼냐면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수현은 제가 눈치챈 사실을 그에게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그저 평소와 같은 하루가 계속될 뿐이었다. 어차피 그가 먼저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 이상 이 관계에 무언가 변화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민후는 이수현에게 그걸 말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고, 그러니 앞으로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이수현은 문득 그것이 조금 아쉽다고 생각 했다.

***

툭, 투둑….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장마도 끝이 나고 있었다. 이제 장대비는 보슬비가 되어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가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걸까, 환기를 위해 열어 둔 베란다 창문으로 세찬 바람이 들어와 작은 원룸 안을 가득 메웠다. 급속도로 날이 추워져 절로 몸이 떨렸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이불을 좀 더 당겨 바람을 막았다.

어제저녁, 슬슬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자 박민후가 저녁을 먹다 말고 내일 외출할 예정이라고 넌지시 전해 왔다. 그날 이후 박민후는 이따금 내 시선을 피하다가도 내가 안 볼 때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마치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내가 사라질까 조마조마한 것처럼.

그러면서도 박민후는 내가 있던 ‘다른 세계’에 관한 주제는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러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그랬다. 그가 애써 피하는 주제를 다루는 영화는 그가 거부했고, 나도 딱히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암묵적으로 그날 일을 모른 척하기로 한 거다.

“나갈 준비 해야 하는데…. 춥다.”

애벌레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가 어제 외출할 때 다음에는 같이 나가자 했기 때문이다. 나야 오랜만에 외출이니 좋다고 했지, 솔직히 박민후가 이번에도 나를 두고 갈 줄 알았다. 저번에도 두고 갔으니까 이번에도 두고 가겠지.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니 좀 예상외였지만 이내 납득했다. 그는 내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방법 따윈 모르고 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그렇다고 말했을 텐데도 박민후는 도무지 믿지 않는 것 같았다p

이불 따뜻해. 오늘은 다녀와서 전기장판을 꺼내 놔야지. 그리고 이제 정말 일어나야 하는데…. 박민후가 씻고 나오기 전에 준비해야 했는데 그게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가 않았다. 집 안이라 가볍게 입은 옷은 아직 바뀌어 버린 날씨를 적응하지 못해 이불 밖은 너무 추웠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나가기 싫다.

“이수현, 뭐 하고 있어. 안 나갈 거야?”

타이밍 좋게 욕실에서 나온 박민후가 성큼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감은 눈을 뜨지도 않았지만,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시선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내 얼굴에 닿았다 떨어지는 시선에 괜스레 피부가 따끔거렸다.

“…나가요. 나갈 건데…. 너무 추워….”

“참 나.”

그렇게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도 박민후는 성큼 걸어가 나 대신 베란다 창문을 닫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어기적거리며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차가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이제는 미뤄둔 겨울옷을 꺼낼 시기가 됐다. 오늘까지는 얇은 옷으로 참아야 했지만, 그래도 코트를 하나 미리 꺼내 뒀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서둘러 준비를 하고 박민후와 집을 나섰다. 도어락이 채 잠기기도 전에 당연하다는 듯 저를 들어 올리는 손길이 이제는 익숙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상 속에 그의 존재가 익숙해진다는 건 퍽 난처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한 가지 느리게 깨달은 건 내 자세가 전번이랑 달랐다는 거였다.

원래라면 쌀가마니처럼 그의 어깨에 배가 눌리고 있을 텐데, 오늘은 내 엉덩이를 그의 한쪽 팔이 받쳐 들어, 내가 그의 팔 위에 앉아 있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런 자세가 가능한가 싶다가도 이곳이 소설 속이고 그가 일반인이 아니란 사실을 다시 상기하니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하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결과적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한차례 샛노란 눈과 마주쳤지만, 그가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뭐… 배가 안 눌리니 다행인가. 이 자세도 썩 나쁘진 않았다.

그다음은 당연한 수순으로 그의 발치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나는 이번에도 그의 심연을 보게 될까 궁금했지만, 이번에는 보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건물이 있었다. 예전에 박민후와 두 번째로 마주쳤던 곳이었다.

“…여기가 헌터 협회였구나.”

“몰랐어?”

“예, 그냥 다른 건물들처럼 그냥 어디 회사 건물인 줄 알았어요.”

“뭐, 틀린 건 아니지…. 헌터 협회도 일반인이 볼 땐 그냥 회사나 다름없잖아.”

박민후가 나를 내려 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듯 턱짓했다. 건물 내부는 평범한 회사 로비랑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너무나 조용했다는 게 특이할 뿐.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음을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부를 찌르는 시선이 날카로웠고, 어딘지 호기심을 품고 있긴 했지만, 그 시선들 안에 호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민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였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난 위에 올라갔다 와야 하니까, 여기 1층에 카페가 있거든?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요.”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머리 한쪽에선 솔직히 그럴 거면 나를 왜 데리고 왔나 싶었다. 요 며칠 내게서 한시라도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니 이렇게 순순히 나를 두고 간다고? 물론 여기가 헌터 협회니 다른 곳보다 안전은 하겠지만….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냥 평소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할 말도 끝났겠다, 박민후가 나를 두고 금방 갈 줄 알았는데 그는 아직 떠날 생각이 없는지 내 옆에 서서 휴대폰과 엘리베이터 쪽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마치 누굴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뭐지, 누가 오나? 때마침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안쪽에서 두 명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게도 나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한 명은 안경을 쓴 차주영이었고, 다른 한 명은 목소리가 인상적이던 헌터였다. 그는 차주영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박민후 헌터!”

그런 그를 보며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나는 내심 놀랐다. 박민후를 이렇게 호의 가득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을 이곳에 와서 처음 봤으니까. 게다가 그런 친근한 행동에 보인 박민후의 유한 태도도 그랬다. 그렇기에 내심 놀라 버리고 만 거다. 박민후 이 자식…. 내 생각보다 친구가 많잖아? 그때 그 금발 머리 외국인이 친구라고 했을 때도 솔직히 ‘박민후가?’ 하고 안 믿었는데….

“늦었잖아.”

“아,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온 걸 나보고 어쩌라고.”

뒤이어 이쪽으로 다가온 차주영이 박민후한테 살짝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나에게 알은체했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차주영 헌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 뭐, 덕분에요.”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던가? 나를 뭐라 불러야 할지 말을 멈춘 차주영을 보며, 이름도 안 알려 줬다는 걸 깨달았다. 뭐 그때는 굳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생각해 보니 당연했다. 그와 두 번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아마 차주영도 그랬겠지.

“이수현이에요.”

“예, 이수현 씨. 원체 몸이 약하신 분이 이렇게 무탈하신 걸 보니 다행입니다.”

“그때도 말했지만…. 차주영 헌터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진 않아요.”

***

박민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저도 모르는 한쪽 눈썹만 삐딱하게 솟아 버렸다. 차주영이 이수현에게 알은척하는 것이 영 아니꼬워서였다. 게다가 차주영. 저놈은 이수현을 뭐, 얼마나 봤다고 걱정하냔 말이다. 그리고 이수현도 그랬다! 자신한텐 이름도 안 알려 줘 놓고! 그래서 계약서를 보고 그의 이름을 겨우 알아냈는데, 이렇게 순순히 남한테 이름을 말해 주다니! 박민후는 순간 기분이 확 상해 버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며 차주영에게 말을 걸었다.

“입원했다더니 꽤 멀쩡해 보이십니다, 차주영 헌터.”

“별거 아니었습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딱히 그쪽 걱정은 안 했는데.”

“…그러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박민후가 보란 듯이 이수현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걸치자 이수현이 자연스럽게 그 팔을 쳐냈다. 그에 박민후가 기분 상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들의 정면에 서 있던 강유람은 그걸 보고 그만 “풉” 하고 웃어 버렸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너무 웃겼다. 치졸한 질투였으나 박민후 그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안녕하세요! 저는 강유람이라고 해요! 요놈 친구고요. 음, 이수현 씨라고 불러도 되죠? 이수현 씨 이야긴 박민후한테 많이 들었어요!”

“야!”

“안녕하세요, 강유람 헌터.”

내 이야길 했다고? 이수현이 박민후를 돌아보자 박민후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저 이수현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차주영 헌터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음, 예전에 잠깐 도움을 받았었어요. 제가 살던 집에 몬스터가 들어와서 다쳤었거든요.”

그 말에 박민후가 작게 움찔했다. 일반인인 이수현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헌터인 두 사람은 알아차렸다. 차주영과 강유람의 시선이 박민후에게 슬쩍 향했다.

‘말하지 마. 말하면 가만 안 둬.’

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 차주영은 박민후의 눈치를 보다 시선을 피했다. 그 상황을 기민히 살피던 강유람은 이수현이 말한 몬스터가 박민후라는 걸 눈치챘다. 아니, 이 미친놈은 뭔 짓을 저지른 거야. 차주영이 걱정할 정도면 많이 다쳤다는 건데… 허이고.

“강유람, 그만 이야기하고 올라가자.”

“아, 어. 그래…?”

일부러 저러는 게 뻔히 보였지만, 색다른 모습을 보이는 친구를 위해 강유람은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럼 저흰 가 볼게요! 차주영 헌터와 아는 사이시라니 다행이네요! 저희가 위에 다녀올 동안 차주영 헌터가 이수현 씨를 지켜 드릴 거예요. 아주 믿음직한 헌터랍니다! 고지식하고! 꽉 막혔고!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그런 인간이긴 하지만! 안전 하나는 걱정 마시길!”

“…강유람 헌터.”

차주영이 한숨 쉬듯 강유람을 불렀지만, 강유람은 약 올리듯 혀를 내밀고는 먼저 뒤돌아 걸어갔다.

“갔다 올게.”

“갔다 와요.”

“금방 올 테니 부탁하죠. 차주영 헌터.”

“예.”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다 이수현은 불현듯 강유람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아, 강유람. 생각났다. 그는 그 소설의 여주인공이었다.

박민후의 친구이자 든든한 조력자. 박민후의 옛 동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 그러니 사람들은 그가 여주인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 자신도 그랬을 터였고, 물론 제가 봤던 부분까지 두 사람은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가까운 동료보단 친구에 가까웠지.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후반부에 가서 둘이 사귀었을 수도 있다.

뭐, 거기까지 제가 알 길도 없었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다만 박민후와 강유람 사이의 친근함의 근원이 어디서 온 건지 알 것 같았다.

“…가시죠.”

멀뚱히 두 사람의 빈자리를 보던 이수현은 저를 부르는 차주영을 따라 한쪽에 위치한 카페로 향했다. 카페는 심플한 게 매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평범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카페에는 그럭저럭 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회사랑은 다를 테니 그럴 수도 있지. 저를 쳐다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무시한 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차주영은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주문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뭔가 드시겠습니까? 제가 주문하고 오죠.”

“그럼 아포카토 있으면 그걸로, 없으면 그냥 물로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차주영이 카운터로 향하는 걸 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이 좋았다. 통유리 너머로 들어차는 햇볕이 따뜻했고 새파란 하늘도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이수현은 박민후가 일찍 돌아온다면 같이 영화나 보자고 할까 싶었다. 뭐, 그동안 지겹도록 영화를 봤던 터라 그가 싫다고 할 가능성이 컸지만. 이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긴 조금 아쉬웠으니까….

차주영은 생각보다 빠르게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이수현의 앞에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잔을 내려놓고, 차주영 본인 앞엔 유자차를 내려두었다. 이수현은 차주영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아이스크림에 냅다 커피를 들이부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스푼으로 그걸 떠먹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차주영은 그 큰 손으로 작은 머그잔을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실례되는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실례되는 이야기면 굳이 꺼내지 마세요.”

시중에 흔히 파는 아이스크림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아이스크림인지 이름이 궁금하네.

“그럼 궁금증이 드는 걸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실례되는 이야기는 아닌가 보네요? 그래요.”

“…어째서 박민후 헌터와 같이 계시는 겁니까?”

“음, 아슬아슬하게 실례할 뻔했네요. 그쵸?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을 믿으실진 모르겠습니다만. 그날 당신을 해치려 들었던 몬스터가 박민후 헌터인 것은 아십니까?”

“…이렇게 대뜸 말할 줄 몰랐는데.”

이수현은 아이스크림을 떠먹던 손을 멈추고 차주영을 보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저런 샛노란 눈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그럼 어째서…!”

“그럴 일이 있었다니까요.”

차주영은 무심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하는 이수현을 보며 절로 걱정이 들었다. 안 그래도 몸도 약한 사람이 툭하면 사건 사고를 저지르고, 화가 나면 힘 조절을 못 해 건물을 부숴 먹는 박민후같이 안하무인인 자와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가 박민후와 마트에 동행한 사진을 그도 보았다. 처음에 든 생각은 멋모르는 일반인 곁에 서 있는 박민후에게 화가 났다는 거였다.

그는 참 뻔뻔했다. 박민후는 그가 그날 저지른 일을 벌써 까먹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신을 잃은 눈앞의 남자를 짐짝처럼 18층에서 집어 던진 기억이 아직도 이리 생생한데. 억지로 들어 올려 비틀어진 팔과 몸에 틀어 먹힌 돌조각과 그의 등에 커다란 상처를 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박민후 본인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척 이수현의 옆에 있었다.

그러니 걱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차주영은 선한 사람이었다. 정의감도 있었고,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투철했다. 박민후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이미 이 사실을 안다고 말한다. 그것도 무척 덤덤하게 ‘저기 고양이가 지나가네요.’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와 표정으로. 차주영이 기억하는 이수현은 안전 불감증이었다. 위험이 코앞에 닥쳐도 그게 위험한지 모르는 인간 같았다.

아마 이수현의 입장에서는 차주영의 행동이 괜한 참견일지도 몰랐으나, 차주영에게 눈앞에 남자는 그저 보호해야 할 일반인이었다. 맹수의 아가리에 겁도 없이 머리를 집어넣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나 그런데도 정작 박민후의 앞에서는 겁을 집어먹고 당당하게 뭐라 말도 못 하고, 이렇게 뒤에서 이수현과 둘만 있는 상황이 되어서야 이런 말을 하는 본인이 참 치졸했고, 꼴사나웠고, 부끄러웠다. 그러니 차주영은 제 자신이 부끄러워 솥뚜껑만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박민후 헌터는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아마 그럴걸요? 본인은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그가 무섭지 않으십니까.”

“별로요.”

그렇게 말하며 이수현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집에 갈 때 아이스크림 이름 물어봐야지.

***

박민후가 굳이 비가 그치자마자 오늘 헌터 협회로 찾아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피에타 길드 마스터에게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정규 회의가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오늘 그의 목적은 하현에게 있었다. 박민후는 오늘 아침 인벤토리에서 꺼내 제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워 둔 새하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수현에게 줄 반지였다.

반지를 그가 가진 강화석으로 강화도 했고, 거기다가 이 반지는 사용시 공기 중에 존재하는 마나를 끌어다 쓰는 아이템이었으니 이수현도 사용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이었다. 이건 일종의 보험이었다. 박민후가 그의 옆에 있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없어야 했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할 필요성은 있었다. 그러니 힐러의 최상위 스킬을 뜯어내야지. 그 길드 이름으로 된 스킬도 괜찮을 터였다. 순순히 하현이 박민후에게 줄진 모르겠으나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주겠지. 그는 겁쟁이니까.

“커플링?”

“아니야.”

박민후가 연신 반지를 만지작거리자 옆에서 걷던 강유람이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어 왔다. 커플링이냐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박민후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이템인가?”

“어.”

“이수현 씨 주려고?”

“알면서 뭘 물어.”

“혹시나 한 거지. 너 평소에도 장신구 아이템 많이 착용하잖아. 지금도 귀에만 여섯 개면서!”

“이건 그냥, 너무 옛날부터 쓰던 거라 익숙해져서 하고 있는지도 까먹은 거고.”

그렇게 말하며 박민후가 귀를 만지작거렸다. 강유람에게 한 말은 둘러대려고 한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박민후는 솔직히 이것들을 착용하고 있었단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다. 한번 착용하고 나면 이런 장신구 아이템은 웬만해서는 새로 바꿀 때 아니고서야 좀처럼 빼지 않으니까. 무게에도 익숙해져서 있는지도 모르게 되곤 했다. 무심코 귀를 만지다 ‘있네.’ 하고 알게 되던가 방금처럼 남이 말해 줘서 알게 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게다가 이제는 이런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해져서 보조 아이템의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더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됐다. 옛날에야 도움이 됐지, 지금은 박민후에게 그저 액세서리 정도의 가치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다른 헌터들에게 판다고 하면 억만금을 들고서라도 서로 사겠다 난리를 칠 만한 물건이지만 말이다.

막상 또 빼 버리자니 뭔가 허전했기에 그냥 뒀다가 그렇게 또 까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수현은 귀를 안 뚫어서 귀걸이형 아이템은 줄 수가 없겠군.

“이크, 벌써 다들 왔나 보네. 들어가자!”

어느새 도착한 회의실 앞에서 강유람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를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좀 전까지 소란스럽던 회의실 안이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구둣발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회의실 안에는 각 길드의 마스터들과 그들을 보좌하기 위해 자리에 함께한 부길드 마스터들이 모여 있었다. 박민후는 그들에게 대충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강유람은 빠르게 걸어 제 자리인 김세현의 옆으로 가 앉았다. 플로나가 알은척해 왔으나 박민후는 무시하고 제가 늘 앉던 회의실 끄트머리에 가서 앉았다.

“하도 안 오길래 이번에도 불참하는 줄 알았습니다, 박민후 헌터.”

“뭐, 올 일이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짐짓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재버워크의 남태웅이 빈정거렸다. 그에 박민후가 한쪽 턱을 괴고는 나른하게 대답했다. 다만 대화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남태웅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박민후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하현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하현이 흠칫 몸을 떨었다.

“칫, 올 사람도 다 왔겠다 이만 회의를 시작합시다!”

당연하다는 듯 회의 내용에 ‘새’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박민후 자신이 있으니 일부러 그 주제를 피하는 꼴이 역겨웠다. 중요한 내용은 쏙 빼고 진행되는 회의 내용은 부실했고, 이딴 걸로 회의를 하니 그런 게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별 쓸데없는 내용만 계속되는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박민후는 아래층에 있을 이수현을 생각했다.

별일은 없겠지만 그저 차주영과 있는 게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박민후는 차주영과는 첫 만남부터 안 맞았다. 그가 좋은 인간이란 건 알고 있으나 이건 성향의 문제였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반대되는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날의 일을 이수현에게 말해 버릴 수도 있는 남자였다. 그건 좀 곤란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막상 대상이 이수현이 되자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수현의 등에 제 발톱이 파고들었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흐려지기는커녕 더욱더 생생해졌다. 그건 마치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뇌가 몸에게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손쉽게 그의 살을 째고 그 안에 박혀 들었던 발톱을 기억한다. 제 발아래가 피로 물들고, 상상일 뿐인데도 그의 피 냄새가 지금도 코끝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신 없어야 했다. 박민후는 제 손을 물끄러미 보다 꾹 쥐었다. 제 손짓 한 번이면 너무나 손쉽게 사라질 목숨이란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자신은…. 이제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저 잠시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와 같은 건물 안에 있고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저 이수현이 제 앞에 잠시 안 보일 뿐인데, 그저 애가 탔다. 이렇게 숨 쉬듯 당연하게 머릿속이 그의 생각으로 점철되는데 어떻게 이 손으로 이수현을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박민후는 다시 한 번 인정해야 했다.

그건 박민후가 여태껏 만들지 않았던 어떠한 관계의 시작을 의미했다. 박민후는 제가 어떤 놈인지, 제 주변 인간들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소중한 걸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줄곧 하며 살아왔다. 그게 너무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정말 이제 와서…. 다른 놈들이 원하는 그런 약점이 생겨 버린 거다.

이수현.

이수현을 생각하면 심장이 기분 좋게 뛰다가도 그를 잃을까 불안감에 거세게 날뛰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가 걱정된다고 그의 곁을 섣불리 떠날 수도 없었다. 박민후가 떠난다 한들 이미 한번 자신과 엮인 이상 다른 놈들이 이수현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제가 옆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 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헛짓거리하는 놈들을 처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수현과 어디로 훌쩍 떠나도 괜찮을 터였다. 그가 여행 좋아하려나? 보니까 돌아다니는 건 좋아했던 거 같은데. 블랙마켓 때도 그랬고. 좋아하면 좋을 텐데….

어디 한적한 시골 동네도 괜찮고…. 바다도 괜찮겠지.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이수현이라…. 아니, 그놈은 수영은 안 할 거 같은데? 수영하는 모습은 어째 상상이 안 갔지만, 그저 발만 담그고 저를 등지고 서서 물장구치는 모습은 쉽게 상상되었다.

그러다 이수현의 매끈한 등으로 생각이 뻗쳤다. 그리고 그 등에 있던 점들도. 이수현은 점이 많았다. 제가 대충 본 것만 해도 왼쪽 눈썹 위에 하나. 오른쪽 귓가에 하나. 이마와 가르마 사이 쪽에도 하나 있었고…. 목 뒤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에도 척추를 따라 세 개, 날갯죽지에도 한 개가 있었다. 그리고 허벅지에….

“…헌터, 박민후 헌터?”

“…뭡니까?”

“역시 하나도 안 듣고 계셨군요. 회의 끝났습니다.”

“아아, 하도 별 쓸데없는 걸로 회의를 질질 끄니, 잠깐 좀 더 쓸모 있는 생각을 한다는 게 그만…. 미안합니다.”

박민후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니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서 회의실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하현의 발길을 박민후가 붙잡았다.

“이봐요. 하현 헌터.”

“…네, 네?!”

피에타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인 이산과 함께 먼저 문으로 향하던 하현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제자리에 멈추었다. 설마 정말 제게 볼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내가 뭘 했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거참, 뭘 그리 놀랍니까? 한 길드의 마스터라는 인간이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당신은 그럴 만한 존재니까요.”

하현 대신 대답한 건 그 옆에 있던 피에타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인 이산이었다.

“난 그쪽한테 말 건 게 아닌데?”

박민후가 사납게 웃었다. 그 웃음에 회의실 안쪽의 기온이 뚝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들을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은 박민후에게 붙잡힌 피에타 길드의 두 사람만을 남겨 두고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가기 직전 강유람이 박민후에게 앞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하고 그에 박민후는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회의실에는 순식간에 셋만이 남게 되었다. 아직 회의실 문은 열려 있었다. 하현은 땀이 차는 손을 꽉 쥐며 조심스럽게 박민후를 보았다. 하현은 정말이지 그가 무서웠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예, 볼일이 있습니다. 잠시 남아 주시죠. 아, 그 옆의 이산 헌터는 가셔도 좋습니다.”

“마스터를 보좌하는 게 제 일입니다!”

“저는 가셔도 좋다고 했습니다.”

“가세요, 산.”

“…하지만!”

“하, 약속하죠. 안 괴롭힙니다. 잠깐 개인적인 볼일이 있는 것뿐이에요. 하현 헌터가 협조만 잘해 주면 5분이면 끝날 일이라고요.”

박민후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얼른 용건을 끝내고 이수현을 데리러 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머리에 용기만 들어찬 머저리가 갑자기 끼어들어 방해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당신을 뭘 믿고 마스터 혼자만 두고 간단 말입니까!”

“그야, 지금 이산 헌터 목이 잘 붙어 있는 걸 믿어야죠.”

이산은 그 말에 ‘헉’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현은 괜히 애먼 사람 잡기 전에 이산을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정말로 간단한 용건인 것 같았으니까. 억지로 이산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자 그제야 이산은 하는 수 없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하현을 뒤돌아보는 것을 보며 박민후가 혀를 찼다.

“부길드 마스터를 새로 뽑는 게 좋겠습니다. 낄 때 안 낄 때 구분을 못 하는 거 같은데.”

“…아직은 바꿀 예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우리랑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그래도요.”

박민후의 말대로 그들의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이었다. 어리다고 해 봤자 한두 살 차이밖에 더하나? 5년 전 힐러들이 한 번에 많이 죽었기에 피에타 길드의 소속된 이들은 대체로 나이가 어린 편에 속했다. 어린 나이에 부길드 마스터가 돼서 5년 전, 전대 마스터가 행방불명이 되어 죽었다고 발표된 후 그 뒤를 이어 길드 마스터가 된 하현은 박민후보다 겨우 두 살 많을 뿐이었다.

“뭐, 됐어…. 내 용건은 간단합니다.”

박민후가 제 새끼손가락에 껴 있던 반지를 빼 하현에게 건넸다. 하현이 의아해하며 그 반지를 받았다. 순백의 반지는 심플한 디자인에 반지 안쪽에 금색으로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미약하게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이템이군요. 이건 왜?”

“거기에 당신 스킬 좀 담아 줬으면 해서.”

“…저를 높게 봐주신 건 기쁘지만. 굳이 제 스킬일 필요가 있나요? 박민후 헌터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내가 쓸 게 아닙니다.”

“그럼 누가…. 아뇨. 아니에요. 거기까진 제가 알 필요가 없겠죠.”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네.”

“그럼 어떤 스킬을 원하시는 거죠?”

박민후는 반지를 손에 넣은 다음부터 이수현에게 어떤 스킬을 줘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어차피 이 반지는 일회성이었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다시 빈 반지가 되어 버리니…. 공격용은 안 되었고, 방어도 어중간했다. 그렇다면 텔레포트는 어떠한가? 그것도 무리였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을 주어야 할까. 그가 이 반지를 사용하게 된다면 그건 이수현 곁에 그가 없고, 목숨에 위험이 닥쳐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뿐이지.

“[피에타]”

“……!”

하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에타라니…. 사실 그건 단순히 길드 이름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으나 하현에게는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하현이 가진 스킬 중 유일한 SS급 스킬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피에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의미를 지닌 이 스킬은 이름처럼 신에게 자비를 구해 제가 앞으로 살아갈 수명의 반을 바쳐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는 스킬이었다. 즉 여분 목숨이란 소리였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100살이라 할 때 거기에서 50년을 바치고 죽기 전, 그러니까 온몸의 상처가 치유된 상태로 부활한다. 하현은 5년 전, 이 스킬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일평생 두 번은 쓸 수 없는 스킬이었기도 했다.

“그 스킬은… 시전자의 남은 수명을 대신 사용하는 스킬인 건 알고 있나요?”

“압니다. 당장 죽는 것보다 짧게라도 더 사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죠.”

어차피 하현, 자신에게는 더는 사용하지 못하는 스킬이었다. 재사용 쿨타임이 바친 수명만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템 등급이 높다면야 각인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박민후도 그 정도는 알 테고 그러니 제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걸 테다. 어차피 하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하현이 반지에 마나를 흘려 넣자 그에게만 보이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허공에 나타났다. 각인할 스킬을 선택하라는 창과 함께 하현이 가진 스킬 목록이 쫘르륵 나열되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상단에 있는 「피에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현은 눈을 감고 손 안에 든 반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공기 중에 흐르는 마나와 반지를 둘러싼 마나가 작게 요동쳤다. 치지직, 하고 불에 지져지는 소리가 반지에서 들려왔다가 사라졌다. 하현은 눈을 뜨고 반지를 확인했다. 반지 안쪽에 제대로 각인된 것을 확인한 후에 박민후에게 반지를 넘겨주며 말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음?”

반지를 다시 제 새끼손가락에 끼우던 박민후가 고개를 기울였다. 계속해 보라는 듯한 얼굴을 한차례 본 뒤 하현이 마저 말을 이었다.

“이 스킬은 발동 조건이 조금 까다로워요. 대상이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야 합니다. 죽은 뒤에 발동되지 않고요. 한 가지 더 시전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이 스킬은 발동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명심하죠.”

용건도 끝났겠다. 박민후는 감사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회의실 문으로 걸어갔다. 막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고 할 때 박민후는 방금 생각났다는 듯 손잡이를 잡은 채로 멈춰 서서 하현을 돌아보았다.

“아, 깜빡했네.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 줄 거라 믿습니다. 이제 두 번은 못 살아나잖습니까.”

***

박민후가 회의실을 나오자 맞은편 창가에 기대고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강유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이산이 박민후를 지나쳐 회의실 안으로 뛰듯이 들어갔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금방 끝날 일이었거든, 가자.”

“오올, 막 한시라도 안 보이면 미칠 거 같나 봐?”

강유람이 히죽 웃었다. 박민후는 무시하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강유람이 재잘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아까도 회의 내내 딴생각에 빠져 있던데…. 이수현 씨 생각하고 있던 거 아냐?”

“…….”

“와, 진짠가 봐….”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뭐라 대답해도 놀리기만 할 테니 박민후는 계속 무시하려고 했다. 강유람이 훌쩍 옆으로 다가와 그답지 않게 조용히 물었다.

“야, 그렇게 그 사람이 좋냐?”

“…아니 뭐.”

“막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 같고 그래?”

“그냥 보통인데….”

“너 솔직히 말해 봐. 이수현 씨 어때 귀엽다고 생각하지?”

“…어, 좀?”

귀엽냐고? 하는 짓이 귀엽긴 하지….

“와아! 이거 망했네.”

“망해? 뭐가 망해?”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강유람 때문에 박민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금세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온 박민후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물끄러미 바뀌는 숫자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유람은 재밌어 죽겠다는 목소리와 행동으로 계속 이야기할 따름이었다.

“야, 귀엽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길로 끝이야, 끝. 너 이제 이수현 씨? 그 사람? 너의 사랑? 하여튼 절대 못 벗어난다?”

“무슨… 귀여운 게 뭐 대수라고.”

“이것 봐라? 너 귀여운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강유람이 ‘이래서 안 된다니까.’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렇게 외쳤다.

땡!

“귀여움은 세계도 구한다!”

엘리베이터 도착 음과 함께 강유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린가. 귀여움이 세계를 구했으면 나는 귀여움 덩어리로 만들어진 인간이며, 내가 제일 귀여운 생명체가 아닌가. …이 무슨 미친 생각이지? 그딴 미친 생각을 해 버린 박민후는 스스로의 생각에 혐오감이 들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강유람은 그딴 미친 소리가 아니라며 박민후의 등짝을 후려쳤다.

“사실 아무리 이쁘고 멋지고 잘생겨도 말이야, 그게 끝이다? 뭐 눈이 호강하긴 하지. 근데 말이야. 한번 귀엽다고 생각하면 진짜 끝이야. 그 모든 게 다 귀여워 보인다고! 솔직히 귀엽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잖아. 너, 나 귀여워? 이 유람이 귀여워?”

“돌았냐?”

강유람이 제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 꽃받침을 한 채 박민후를 말똥히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박민후가 질색팔색 하며 오만상을 썼다. 소름이 와다다 돋았다. 이 새끼가 갑자기 뭘 잘못 먹고 이리 끔찍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에 강유람도 얼굴을 찌푸렸으나 태도는 당당했다. 왜냐, 자신은 아주 귀엽기 때문이다!

“거봐. 야, 난 내가 귀여워.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날 귀여워하지!”

“개소리하고 있네.”

“그럼 나 이쁘지? 나 정도면 한 미모 하지!”

“뭐…. 그건 인정.”

“거봐 봐. 너도 잘생기고 멋진 편이지. 우리 천하의 박민후, 이 얼굴 어따 써먹나 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강유람이 서슴없이 박민후의 양 볼을 ‘턱’ 하고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이만하면 잘생긴 편이긴 했지! 음, 음! 강유람은 혼자 납득했다. 어이가 없어서 박민후는 그냥 얌전히 있어 줬다가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강유람 손에서 제 얼굴을 빼냈다.

“장난 그만해라?”

“장난 아니다, 뭐! 예쁘다, 잘생겼다, 멋지다 같은 건 그래도 어느 정도 기준이 있잖아. 이 사람은 잘생겼고, 저 사람은 예쁘고…. 근데 자, 저기 보세요. 저기 차주영 헌터 보여?”

강유람이 박민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저 멀리 1층 카페 한쪽에 앉아 있는 차주영을 가리켰다. 그 커다란 덩치 덕분에 이수현이 가려진 건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데.”

“귀엽지?”

“…어디가?”

“봐봐, 저기! 저 큰 덩치가 의자 옆으로 삐져나온 게 너무 귀엽지 않아?”

“네, 취향 참….”

“이것 봐. 넌 차주영 헌터가 안 귀여운데 나는 귀여워. 귀엽다는 건 좀 애매한 거야. 저마다 귀여워하는 포인트가 달라서 때론 서로 이해를 못 하게 되지! 나는 저런 모습조차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인다고. 그럼, 여기서 문제. 지금 차주영 헌터가 하는 행동을 이수현 씨에게 대입해 봐.”

강유람이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붙잡고 중얼거렸다.

“안경이 삐뚤어진 상태인데 그걸 모른다거나. 문자를 보내다 중요한 문자에서 오타를 내 버린다거나 실수하는 거지…. 그러고는 미안하다면서 너한테 잔잔하게 미소 짓는 거야.”

박민후는 내키지 않았지만 약간 혹해 강유람이 말한 대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차주영이라는 인간 때문에 조금 애를 먹긴 했으나…. 젠장, 인정해야 했다. 박민후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젠장 귀여워.”

“거봐!!”

근데 그럴 인간이 아니라고…. 박민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강유람이 말한 대로 제 비루한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가상의 이수현은 현실의 이수현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하나하나가 저를 미치도록 설레게 했고, 귀여워 미쳐 버릴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허상이지, 특히나 마지막 미안하다는 듯 잔잔하게 웃는 미소는 정말이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모습이었다.

왜냐, 현실에서 이수현이 어떻게 웃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강유람은 흥이 올라 귀여움에 대한 연설을 시작했다. 여기가 협회 건물 로비라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점점 더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 같았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를 나오면서부터 소리 차단 스킬을 사용한 강유람 덕분에 주변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뭐가 문젠지 알았냐? 귀여우면 끝이야! 귀여우면 끝이라고! 한번 귀엽기 시작하면 뭘 해도 다 귀여워 보여! 웃어? 와, 씨. 미치도록 귀엽네. 울어? 우는 것 봐! 졸라 귀여워! 화내? 화내는 것도 어쩜 이렇게 귀엽지? 와, 욕해? 욕도 해? 졸라…. 귀엽다. 미친 거 아냐? 무표정? 와…. 무표정이 귀여울 수 있지? 진짜 귀엽다. 와 지구 반 쪼개 버리고 싶어! 어떻게, 와와, 너무 귀여워서 내 손이 주체를 못 한다. 꽉 쥐어서 짜부라트리고 싶어!”

쾅!!

결국 협회 건물 기둥에 기어이 구멍을 내고서야 강유람의 입이 다물렸다. 강유람은 동그랗게 제 주먹 모양으로 구멍이 나고 사방이 갈라지기 시작한 벽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복구 스킬을 사용했다. 이런 일이야 일상다반사니 눈감고도 고칠 수 있었다.

“하여간, 귀여우면 이렇게 된단 말이야. 온갖 게 다 귀여워 걔가 숨만 쉬어도 귀여워 움직여? 움직이는 것도 귀여워. 알아들었어? 넌 끝났어. 크크큭, 박민후 인생 끝났어!! 아이고, 꼬시다!!”

“…걔를 귀엽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런 중증까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애써 외면하지 마라, 받아들여야지~ 그거 얼마 남지 않았다. 그냥 존재만으로 귀여워서 입꼬리를 주체 못 하게 되는 거 아주 순식간이다?”

그 말에 박민후는 결국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제가 살면서 처음 겪어 보니까 강유람이 하는 말이 다 맞는 것도 같고, 이놈이 이 기회에 저를 놀리려고 개구라를 치는 것도 같았다. 그래, 그냥 강유람이 이상한 놈인 게 아닐까? 제 옆에 있는 놈들이 정상인일 리가 없지. 그리고 박민후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했다. 이수현과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이제 한 달이 조금 됐나? 아니 넘었나? 그러니 ‘이게 정상인가?’, ‘다들 그러나?’ 하고, 그런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걔랑 만난 지 이제 겨우 몇 주밖에 안 됐어. 그런데 이러는 게 정상인가…. 원래 다들 그래?”

박민후가 미심쩍다는 듯 물어 오자 강유람은 샐쭉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쳤다. 얘가 평소답지 않게 구네.

“야, 사랑은 원래 그런 거야. 누가 ‘지금부터 이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하고 정해 놓고 사랑을 하겠니? 그냥 ‘엇’ 하는 순간 ‘앗’ 하고 사랑에 빠지는 거지! 사랑에 빠지는 데 시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눈만 맞아도 사랑에 빠지고,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사랑했단 걸 깨닫기도 한다고. 그냥 그런 거야. 네가 그 사람과 겨우 몇 주 만난 거? 일주일 만에 사랑에 빠져? 다 무슨 소용이야. 원래 그런 거야.”

“…….”

다 그런 거라고….

박민후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카페 문을 붙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 옆에 있던 강유람이 말했다.

“어휴, 박민후. 내가 좀 도와준다.”

“뭐?”

“나만 믿어 봐. 요령은 사심 없는 척이야.”

“아니, 뭔 짓을 하려고…. 됐어! 관둬!”

박민후가 괜히 불안해서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는 깔깔 웃으며 박민후 대신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있는 차주영과 이수현에게 뛰듯이 다가갔다. 그 뒤를 박민후가 빠르게 따라갔다. 어디서 난 건지 책을 읽고 있던 이수현의 동그란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볕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서 그런가, 아니면 제 눈이 미친 건가 이수현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저희 왔어요!”

“오셨습니까.”

“왔어요?”

“차주영 헌터, 뭐 마셔요?”

강유람이 앉아 있는 차주영 뒤에 서서 그의 머리 위에 제 머리를 턱 올려놓고 물었다. 그 모습은 꽤 익숙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에 차주영은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강유람 헌터…. 협회 건물 안입니다.”

“아. 네, 네. 알겠다고요. 그놈의 공과 사!”

강유람은 투덜거리다 차주영 옆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박민후도 자연스럽게 이수현의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뭐 하고 있었어?”

“책 보고 있었어요. 차주영 헌터가 심심하면 읽으라고 가져다줬거든요.”

“…‘당신은 안전 불감증입니다’? 뭔 내용이야. 재밌어?”

“뭐 그럭저럭… 시간 때우기죠.”

박민후는 꼭 저 같은 책을 골랐다며 웃었다. 기다리던 사람도 왔겠다 더는 볼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이수현은 보고 있던 책을 ‘탁’ 하고 덮었다. 나중에 나가기 전에 저기 책꽂이에 넣어 두면 되겠지. 그리고 차주영은 도란도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 상념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옆에서 옆구리를 쿡 찔러 오는 강유람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차주영 헌터, 그래서 뭐 마셨냐니까요?”

“유자차 마셨습니다.”

“에이, 카페 와서 유자차가 뭐예요! 이수현 씨는요?”

“아포카토 먹었어요. 괜찮더라고요.”

“아, 여기 아포카토 괜찮죠! 특히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예, 괜찮았어요.”

“나도 뭐라도 주문하고 와야지. 야, 너는? 뭐 먹을 거?”

“아무거나.”

“그럼 물이나 처마셔.”

박민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강유람은 가운뎃손가락을 흔들어 주며 카운터로 향했다. 아무래도 헌터들이 많은 곳이다 보니 카페 또한 마냥 평범하진 않았다. 직원인지 사장인지 하여튼 일반인이 운영하는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주문을 하자마자 음료가 나오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으니까, 그러니 강유람은 가자마자 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왔다. 물론 마실 거 하나만 사가지고 온 게 아니라 케이크며 과자며 트레이 가득 들고 나타났다. 그걸 보고 차주영이 결국 입을 열었다.

“강유람 헌터. 저희는 곧 가야 합니다.”

“괜찮아요! 금방 먹을 거거든요!”

“하지만… 읍!”

“먹어요. 먹어!”

차주영의 입에 마카롱을 억지로 물려 주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차주영이 불만스럽게 그를 보았다가 하는 수없이 착실히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뒤에도 발언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차주영이 입 안에 든 디저트를 다 먹고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강유람이 입에 뭘 자꾸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강유람은 박민후한테는 정말 찬물을 가져다줬고, 이수현의 앞에는 케이크며 마카롱이며 과자를 들이밀었다.

“다들 먹어요! 다 같이 먹자고 잔뜩 샀다고요!”

“야, 아무리 봐도 목적은 차주영 헌터 입 틀어막긴데?”

“아, 들킴? 아니, 글쎄 이 인간이 말이지…!! 아차차, 이건 대외비지 참.”

짜증스레 웃으면서 뭐라 입을 열려던 강유람은 제 팔뚝을 잡아 말을 멈추게 하는 차주영 때문에 제 손으로 입을 ‘턱’ 막아 멈췄다. 박민후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일반인인 이수현이 함께 있었으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뭐, 말해 줘도 상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융통성 없는 남자가 그걸 넘어가 주진 않을 테니 그냥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제게 좀 잘못한 게 많아서 그런 거예요. 이 정도면 귀여운 응징이죠! 안 그래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덕분에 트레이를 가득 채운 디저트들은 모두 차주영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수현은 딱히 단걸 좋아하지 않았고, 박민후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았고,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거절도 못 하고 꾸역꾸역 또 그걸 먹는 차주영이 웃겨 내버려 두었다. 네 사람은 그렇게 강유람의 주도하에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간간이 시간을 확인하던 차주영이 정말 이대로는 늦을 거 같다고 조심스레 강유람에게 말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기에는 조금 아쉬웠던 강유람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사람들의 손을 보고 이거다 싶어 씩 웃었다. 그걸 무심코 발견한 박민후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뭘 하려고 저리 불안하게 웃는 거람. 박민후가 테이블 아래에 놓인 강유람의 발을 제 발로 찼다. 그러나 강유람은 모른 척 이수현에게 말을 걸었다.

“와, 이수현 씨 손이 되게 이쁘시네요?”

“예…?”

“보세요. 저랑 비슷한 거 같은데 느낌 완전 달라.”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네요.”

“그렇다니까요? 어, 저랑 손 크기가 비슷한 거 같아요. 제 손이 보이는 것보다 크거든요!”

강유람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이수현의 손 옆에 제 손을 쓱 가져다 대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의 손은 정말로 엇비슷했다. 물론 이수현이 볼 때는 뭐가 다른지 구별이 안 갔지만. 그런 식으로 갑자기 대화 주제가 손 크기로 바뀌더니, 그가 이수현의 손을 쫙 펴 제 손바닥을 ‘탁’ 대는 게 아닌가? 이수현은 습관적으로 손을 떼려다가 그가 뭘 하려고 이러나 궁금하기도 해 일단 장단 맞춰 주기로 했다.

“별로 크지 않으신 거 같은데요?”

“아니에요! 이게 이수현 씨 손이 생각보다 작은 거 같은데…. 여기 차주영 헌터 손 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옆에 놓인 차주영의 손을 가져다 제 손을 딱 붙였다. 차주영은 화들짝 놀랐다.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구기기도 했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는 건 아마 대 보지 않아도 알았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게 척 봐도 차주영의 손은 강유람의 얼굴만 했으니까.

“음, 손이 차주영 헌터는 좀 넘사벽이라서 그런가…. 이거야, 원. 아빠 손, 아기 손도 아니고 비교가 안 되네. 야, 네 손도 좀 줘 봐!”

그렇게 말하며 강유람이 박민후의 손을 낚아채듯 가지고 가 제 손바닥에 딱 붙였다. 박민후는 아까부터 강유람이 뭘 하는 건지 도통 이해되질 않았다. 갑자기 왜 손 타령이란 말인가? 얼굴을 찡그리며 붙잡힌 손을 보았다. 두 사람은 두께 차이도 있었지만 손가락 길이도 한마디 정도 차이가 났다.

“야,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음, 제 손보다 이수현 씨 손이 살짝 아주 살짝 더 큰 거 같기도 한데…. 박민후랑 제 손가락이 한 마디 정도니까…. 이수현 씨도 박민후랑 한 마디 차이 나지 않을까요? 한번 봐 봐요.”

“예?”

“역시 한 마디 차이 나네요!”

그러면서 신중하게 박민후 손에 제 손을 대 보다가, 다시 이수현 손에 대 보던 강유람은 씩 웃더니 박민후 손바닥에 이수현 손을 ‘착’ 붙여 주고서 비교하는 척했다.

그제야 이게 뭐 하는 수작질인지 눈치챈 박민후가 조금 당황하며 강유람 노려보았다. 어디가 사심 없는 척이냐! 그러나 강유람은 두 사람이 방심하는 사이에 제 손으로 서로 손깍지까지 시켜 버리는 치밀한 행동까지 해 버리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 사람의 시선이 강유람에게 향하던 그때, 강유람은 제가 만들어 낸 작품을 보며 씩 웃고는 뭐가 뭔지 몰라 멀뚱히 앉아 있는 차주영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선 시계도 안 찬 손목을 보면서 말했다.

“이크, 늦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재밌었어요! 나중에 또 봬요! 안녕!”

누가 봐도 다분히 연기하는 톤이었다. 강유람이 차주영을 붙든 채 그대로 카페를 뛰쳐나갔다. 차주영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착실히 인사를 하고 저만치 멀어졌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은 조금 어이가 없어, 깍지 낀 손을 풀 생각도 못 한 채 활짝 열린 카페 문을 볼 뿐이었다.

***

박민후는 속으로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아! 아오! 강유람! 지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튄 거냐고! 솔직한 심정으론 쪼금 고마웠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수작질을 벌여 놓고 가면 저보고 어쩌란 건가! 제가 강유람한테 뭘 잘못했던가? 기억에는 없는데…. 박민후는 이수현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이수현이 풀린 손을 보다 저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으나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미치도록 어색에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아하. 이수현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했다. 박민후랑 마주 잡았던 손을 한번 꾹 쥐어 보고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거참… 할 말 없게 만드네. 저만 그런 게 아닌지 박민후는 제 쪽은 쳐다도 못 보고 있었다. 연신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만 가자.”

“그래요.”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던 그때 이수현의 시야에 뭔가 걸렸다. 박민후의 머리카락에 작은 먼지가 붙어 있었다. 무시할까 했지만,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에 턱 하니 붙어 있는 먼지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비듬이라고 오해받기도 딱 좋았고 말이다. 신경이 쓰여 이수현은 대뜸 박민후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갑자기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이수현의 행동에 박민후가 덜컥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박민후의 다리가 테이블을 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위에 올려져 있던 유리잔이 와르르 엎어졌다. 다행히 내용물은 없었으니 망정이지, 이수현은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려는 걸 붙잡아 다시 똑바로 세워 두고 박민후를 보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시뻘게진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면서 저를 피해 뒤로 물러나는 박민후를 보며 이수현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티가 나는데…. 그동안 어떻게 몰랐지. 절로 한숨이 나올 거 같아 입을 꾹 다물고 한 박자 느리게 말했다.

“잠깐, 가만있어 봐요. 머리에 먼지가 붙어서 근데 잘 안 떼지네….”

한 손으로 하려니 어째 잘 안 떼졌다. 오히려 머리카락 사이로 파묻히는 거 같아 좀 더 잘 보기 위해 이수현은 무의식적으로 점점 몸을 숙였다. 이수현의 말에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그저 눈만 도르륵 굴리던 박민후는 점점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이수현을 보고 순간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또 주체 못 하고 거세게 뛰었다. 그와의 거리가 이제 한 뼘 정도 가까워졌을 때 박민후는 저도 모르게 이수현의 손을 쳐내고 그가 다시 제게 손을 뻗을까 싶어 제 손으로 머리를 개털 털듯 탈탈 털어 버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좀 열이 몰렸다. 이수현이 쳐내진 손을 들고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곧이어 뭐 하는 거냐는 타박에 좀 짜증이 밴 것도 같았다.

“이제 됐지? 먼지 없지?”

“예, 없어요.”

박민후는 떨어져 나가는 손이 내심 아쉽다가도 더 버텼다간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안도했다. 곧이어 그는 후다닥 일어나 먼저 카페를 나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이수현은 그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어 이수현은 책을 책꽂이에 가져다 꼽고 손에 들린 트레이를 정리하고서 느긋하게 카페를 나섰다.

***

카페를 나와 협회 건물을 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박민후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수현에게 손을 뻗을 때까지 말이다. 이수현은 박민후가 저를 잡기 전에 그를 불렀다.

“박민후 헌터.”

“왜?”

“…영화 보러 갈래요?”

“영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박민후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이수현은 아까 그를 기다리면서 휴대폰으로 찾아본 영화를 몇 개 떠올렸다. 다행히 평일 낮은 예매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보니까 재밌어 보이기도 했고 거기다 날도 좋았다.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쉽지 않은가. 이참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예, 그쪽 기다리는 동안 영화 찾아봤거든요. 이제 어디 갈 데도 없잖아요.”

“장마 동안 지겹도록 봤잖아. 영화 보는 거 진짜 좋아하네…?”

“집에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르죠.”

“뭐…. 좋아, 뭐 보고 싶은데?”

“그건 가서 고르죠. 아까 지도 찾아보니까 여기서 얼마 안 걸리는 곳에 영화관이 있었어요.”

“아아, 거기.”

그가 아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가까우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며 그가 허공에 손을 집어넣고는 야구 모자 두 개와 마스크 하나를 꺼냈다. 그중 박민후와 좀 안 어울리는 밝은색의 모자는 이수현의 몫이었다. 주는 대로 모자를 받아들다 문득 저는 마스크 안 주나 싶어 그에게 물었다. 박민후가 모자를 쓰며 피식 웃었다.

“한 명이면 좀 수상해도 감기라도 걸렸나 하겠지만. 두 명 다 그러고 있으면 나 유명인이요, 하는 꼴이니 넌 그냥 모자만 써. 대충 가려질걸.”

일리 있는 말이라 모자를 쓰며 그를 따라 걸었다. 이제 점심시간도 지났는데 여전히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박민후를 놓칠세라 그의 옆에 붙어 걸었다. 영화관은 분명 가까운 거리였지만 가는 길은 조금 꼬여 있어 이수현은 금세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저 혼자였으면 분명 또 길을 잃고 말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영화관이 있는 쇼핑몰이 나왔다. 쇼핑몰은 평일 낮이라도 사람이 어느 정도 많았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매표소가 있는 층에서 내렸다. 영화관은 한적했다. 사람은 한두 명 겨우 보일 정도였다. 사람도 별로 없겠다 이수현은 답답했던 모자를 벗었다. 모자 때문에 눌린 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 넘겼다. 박민후도 조금 답답했는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렸다.

“그래서 뭐 보려고?”

“음, 기다리기도 그러니까 제일 가까운 시간대로 아무거나?”

매표소 앞에서 뭘 보면 좋을까 고민했다. 시간대가 비슷한 게 3개 있었다. 포스터만 보고 고르자니 이것도 재밌을 거 같고 저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박민후는 아무거나 좋으니 빨리 고르라며 옆에서 툴툴거렸지만 이수현이 영화를 고르는 동안 팝콘을 사러 가는 박민후는 조금 신이 난 것 같았다.

박민후는 기분이 좋았다. 마치 데이트 같지 않은가. 그것도 이수현이 먼저 권해 왔다. 그러니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주문 기계 앞에 서서 박민후는 신중히 고민했다. 그러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냥 콜라 두 개 팝콘 하나 세트를 주문했다. 팝콘은 캐러멜 맛이었다. 손님도 별로 없으니 대기 번호는 빠르게 줄었다. 마스크를 다시 쓰고 콜라와 팝콘을 받아 들 때였다.

“민후 씨.”

“…뭐?”

순간 힘 조절을 잘 못 해 콜라가 터질 뻔했다. 솔직히 조금 컵에서 흘러넘쳤다. 익숙한 목소리에 경악하며 박민후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거기엔 당연하다는 듯 이수현이 표를 쥔 채 서 있었다. 그렇다 하면 방금 저를 ‘그렇게’ 부른 게 이수현이라는 소리였다. 박민후는 제가 지금 뭘 들은 건가 귀를 의심했다. 맨날 박민후 헌터, 박민후 헌터, 하며 그것도 아니면 그쪽이나 하여튼 죽어도 꼬박꼬박 그렇게 부르던 인간이 지금 뭐라고? 그냥 박민후도 아니고 민후 씨. 민후 씨이이????

“…미친 건가.”

“뭐래.”

이수현이 제 반응에 어이없다는 듯 팝콘을 들고 먼저 휙 가 버렸다. 박민후는 직원에게 물티슈를 받아 들고 콜라로 적셔진 손을 빠르게 닦은 후에 양손에 콜라를 들고 서둘러 이수현을 뒤쫓아 갔다.

“야, 야, 이수현! 다시 말해 봐!”

“아. 안 할 거예요.”

“아니, 왜?!”

“그쪽 반응이 그따위라.”

“야, 그건 네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럼, 여기서 뭐라고 부르라고? 평소처럼 부르면 그 모자나 그 마스크나 아무 쓸모없는 거 아닌가? 됐어요. 이제 부를 일도 없어.”

아오, 이놈의 주둥이! 맨날 이게 문제야! 가만있으면 이수현이 계속 그리 불러 줬을 텐데…! 박민후는 아쉬움에 이수현의 뒤에서 몸부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현은 표에 적혀 있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박민후는 영화관 안으로 들어온 뒤에 자리에 앉을 때까지 작게 투덜거렸다. 이참에 말도 그냥 확실히 놓고 그렇게 부르라면서. 하지만 이수현은 무시했다. 영화관에 들어올 때부터 사람이 저희 둘뿐이라 이수현은…. 설마 이 영화 망한 영환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표를 고를 때 그래도 군데군데 자리가 차 있었는데 이상하네. 이러면 꼭 영화 시작할 때 사람 들어오더라.

두 사람의 자리는 영화관 한가운데였다. F7, F8. 자리에 앉자마자 관 내에 불이 꺼졌다. 광고는 거의 끝을 향하고 안전 수칙에 대한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옆에서 종알거리는 박민후의 입에 팝콘을 뭉텅이로 넣어 주었다.

“이거 먹고 조용히 해요.”

“응….”

팝콘을 느리게 씹던 박민후는 제 입술에 닿은 이수현의 손 따위를 생각하다 얼굴을 붉혔다. 다행히도 영화관 안이 어두워 그걸 눈치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잠깐 사고가 있었다. 10분 정도 영화를 봤을까 갑자기 영화가 끊기면서 직원이 들어왔다. 영화 필름이 잘못되었다며 사과를 하고는 나간 것이다. 다른 관에서 상영하던 영화와 이 관에서 상영할 영화 내용과 설정이 비슷해 착각했다는 말이었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싶다가도 다시 바뀐 영화 내용 도입부를 보며 ‘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다. 그 뒤에 예상한 대로 영화가 한창 상영 중인데도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찾느라 부스럭거렸다. 저 앞 좌석에서는 휴대폰을 켜는 멍청이도 있었다. 예의 없어. 이수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영화는 생각보다는 재미없었다. 흔한 신파극이었기에 뒤 내용을 유추해 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흔하냐 하면 이수현이 배우의 다음 대사를 머릿속으로 동시에 똑같이 말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잘못 골랐군. 아마 초반에 잘못 상연된 그 영화가 더 재밌었을 게 분명했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조금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수현은 생각했다. 이러다 잘 거 같아.

관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팝콘은 줄곧 이수현이 들고 있었다. 그러니 박민후는 이수현이 끌어안고 있는 팝콘 통에는 손도 못 댔다. 그러나 팝콘은 먹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수현이 영화를 보는 중에도 습관적으로 박민후의 입에 팝콘을 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시선은 스크린을 향한 채 손만 뻗는 것이라 종종 입이 아닌 곳에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처음에만 놀랐지, 후에는 알아서 잘 받아먹었다. 다만 영화 내용에는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 또한 이수현의 자각 없는 행동이었다.

이수현은 원래 친구랑 영화 볼 때면 하던 행동인지라 제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었다. 그냥 원래 하던 행동이 또 무의식적으로 나온 거였고, 이수현이 그 행동을 멈춘 건 팝콘 통이 바닥을 보일 때였다.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남녀 주인공들이 눈물을 뽑고 있었다. 지루하네…. 이 뒤에는 분명 사랑 고백이라도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수현은 잠깐 눈을 감는다는 게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잠깐,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박민후가 옆에서 저를 흔들었을 때는 이미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있었다.

“영화 끝났어.”

“그러네….”

“네가 보자더니 자면 어떡해?”

“하암, 재미가 없었는걸…. 완전히 실패했어요.”

이수현은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일으켰다. 박민후도 그 말에 동감했다. 뭐 솔직히 내용은 귀에 잘 안 들어왔지만, 중간중간 봤을 때 재미는 없었다. 그래서 박민후는 이수현이 자는 걸 구경했다. 턱을 괴고 잠들어서 볼살이 눌려 귀여웠지.

영화는 재미없는 주제에 생각보다 길었다. 이미 밖으로 나왔을 땐 두 시간도 더 지나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져 해가 짧아 밖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좀 더 걸었다. 어차피 걸어서도 집에 갈 수 있었으니 그냥 걷기로 했다. 아까보다 더 거리에는 사람이 북적였다. 두 사람은 길을 걷다 군것질로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도 하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밥은 집에서 먹자고 박민후가 말했기 때문이다.

***

“아, 이수현.”

익숙한 아파트가 눈에 보일 때 박민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왜요?”

“잠깐 손 좀 줘 봐.”

“손은 왜?”

그렇게 묻자 박민후가 왼손을 들어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의 새끼손가락에 새하얀 반지가 있었다. 그 낯익은 모양에 반지를 보자 저번에 블랙마켓에서 구경하던 그 반지가 생각났다. 그가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내 거 사다 겸사겸사 샀어. 이거 갖고 싶었다며.”

“누가 그래요? 그 판매상이?”

“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생긴 게 마음에 들어서 구경 좀 한 거지.”

“줄게. 어차피 나한텐 필요도 없어. 그리고 이건 너도 쓸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스킬도 이미 각인해 놨어. 스킬 이름은 [피에타]야. 아, 따라서 말하진 말고 일회용이니까.”

그의 말에 따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고 다른 질문을 했다.

“무슨 스킬인데요?”

“여벌 목숨? 시전자의 남은 수명의 반을 사용하긴 하지만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났잖아.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죽을 거 같을 때 사용해. 한 번은 널 살려 줄 거야.”

그에게 반지를 받아 들려고 하는데 박민후가 내 왼손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직접 반지를 끼워 주려는 듯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반지를 한 번 보며 중지에 끼웠다. 중간까지 들어가다 더는 안 들어가니 다시 빼고 이번에는 약지로 옮겼다.

“…내가 죽을 위기라는 건 옆에 그렇게 만들 만한 게 있다는 소리일 텐데, 그럼 소용없지 않을까요? 다시 살아나도 다시 죽일 거 같은데?”

“그전에 내가 올 테니까….”

나는 내 손가락에 조심히 반지를 끼워 주는 투박한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보다 높은 체온 때문에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만 이상하게 뜨거워 그 열이 고스란히 자국으로 남을 것 같았다. 나는 박민후가 이럴 때마다 그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하면 안 된다고 이성이 브레이크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괜찮아.”

하지만 그가 그렇게 웃으며 말하니…. 다시금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시선을 내려 그의 손을 쳐다봤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걸까? 말하면 안 되려나? 그럼 이건? 이건 어떻지? 저건? 이건 괜찮지 않을까? 자신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면서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정리되지 못한 질문들이 속 안에서 뒤엉키고 차곡차곡 쌓였다가 와르르 무너지고 또다시 쌓였다 무너지고를 반복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할 문장들이 구성됐다가 부서지고 지워졌다가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박민후 헌터. 나 좋아해요?”

변명을 하자면 무심코 그에게 가장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만 건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 쌓이고 쌓여 갈 곳 잃은 질문이 기어코 내 의지를 배신하고 만 것이다.

그건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계속 외면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가장 내뱉으면 안 되는 말이었고, 동시에 요즘 들어 그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걸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박민후와 나 사이에 무언가가 크게 바뀌어 버릴 걸 은연중에 알았기에 애써 외면했고, 무시했고 그렇게 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턱하고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의 상처투성이인 손을 보던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술을 가르고 나왔다. 박민후가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흔들리는 샛노란 눈이 시야 가득 들어차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자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달았다. 실수했다. 이건 정말 너무 큰 실수였다. 정말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 적어도 이렇게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속으로 삼킨 말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지만 입 밖으로 뱉은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렇다면 이제 받아들여야지. 난 박민후가 여기서 과연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우습게도 말이다. 박민후는 한참을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어.”

그리고 먹먹한 목소리로 그렇게 버겁다는 듯 끊어 말했다.

“좋아해.”

누군가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정말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예상하였고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듣게 되자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속 안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속이 답답한 것도 같았다. ‘어째서’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가 듣고 싶어 했으면서 막상 이렇게 들으니 나는 이 손을 놓고 도망치고 싶었다. 박민후가 여즉 내 손을 잡고 있던 걸 놓고는 그 커다란 손으로 괴롭다는 듯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넌 아니잖아.”

어쩌면 억울해하는 듯하기도 했고, 허탈해하는 거 같기도 한 그런 목소리였다. 나는 거기에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이상하게 그 커다란 손안에 가려진 얼굴이 궁금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내 그런 생각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박민후가 느리게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며 짓씹듯이 제 감정을 토해냈다.

“넌 나 안 좋아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박민후가 웃었다. 그랬다. 그는 웃고 있었다. 눈을 접고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렇지만 그건 언뜻 우는 거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상하지 분명 웃고 있는데 나는 그가 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박민후의 표정이 점차 무너져 내렸다. 더는 웃는 것도 힘들다며 입꼬리가 쳐지고 눈을 꾹 감았다.

“젠장…. 이딴 식으로 말할 거라고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야, 눈치챘으면 좀 더 모른 척해 주지 그랬어. 그냥 모른 척해 줬으면 좋았잖아. 왜….”

그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가.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러게.”

“하하…!”

내 말에 박민후가 어이없어하며 소리 내 웃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런 걸 물었을까. 나조차 이유를 몰랐다.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무의식이 멋대로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린 이 질문의 의도가 뭔지 나도 알고 싶었다.

“이제는 널 좋아하지도 말라고 하게?”

그러니까 박민후가 말한 저런 의도는 아니었을 거다. 아마도.

제가 말하고 제가 상처 입은 것처럼, 그 말과 동시에 기어이 그의 뺨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사정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박민후가 울고 있었다. 박민후가 손으로 거칠게 눈물을 털어냈지만 한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의 손을, 그의 소맷자락을 적셔나갔다.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닦는 걸 포기했다.

“…아, 진짜 꼴사납게.”

그리고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박민후의 모습이었다.

3권에서 이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