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밤에 우는 새. (7/18)

6. 밤에 우는 새.

계약서를 작성한 뒤 우리는 마트에 갔다. 사실 코앞에 있는 마트 정도는 혼자 가도 되지 않나 싶었는데 박민후는 그래도 쫄래쫄래 따라왔다. 속으로 뭘 살까 하나하나 정리를 하며 장바구니를 들려 하니, 박민후가 어디서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 뭐 얼마나 산다고 카트를 끌고 오냐고 하자 박민후는 제가 먹을 것도 사야 하고, 지내려면 필요한 생필품도 사야 한다면서 투덜거렸다. 카트를 밀며 먼저 가 버리는 박민후를 보곤 한숨을 쉬며 따라갔다.

“그쪽이 계산할 거죠?”

“그래그래.”

건성건성 대답하는 박민후는 가는 길마다 하나둘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시리얼에서부터 과자, 빵, 음료, 술, 고기에 아이스크림, 그리고 냉동식품. 내가 고르기도 전에 카트는 벌써 수북해졌다. 일주일은 넘게 먹을 수 있겠다. 그보다 간식류가 많지 않아? 아무리 봐도 생각 없이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를 멈춰 세워야 했다. 그가 미는 카트를 살짝 잡아 멈출 생각이었는데 멈추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진열장에서 눈을 떼고 “뭔데?” 하고 물어 왔다.

“우리 집 냉장고 작아요.”

“…냉장고 살까?”

“아뇨.”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는데? 새로 사면 좋긴 하겠지만 새 냉장고가 들어올 공간은 없었다.

“며칠 먹을 것만 사요. 이거랑 이거, 꼭 먹어야 해요?”

“음, 아니. 그냥 먹어 보고 싶어서 담았는데.”

“그럼 빼고, 도로 가져다 놔요. 이것도…. 음 이거랑 이건?”

그의 품에 하나둘 당장 필요 없는 것들을 물어보며 들려 주었다.

“이걸 제자리에 가져다 두라고?”

불만으로 찡그려진 얼굴을 보며 얼른 돌려놓으라고 재촉했다. 그래도 그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자 계약서 제1 조항을 읊어 줬다.

“싫으면 나가시든가?”

“아, 알았다고!”

짜증을 내며 뒤돌아 갈 거라 생각했던 박민후는 혀를 차며, 바닥에 발을 한 번 굴렀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의 발치에 있던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요동치더니 ‘퐁퐁’ 그와 참 안 어울리게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작고 귀여운 검은 개들이 나타났다.

작은 놈들은 어디서 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내가 기억하는 건 저것보다 수십 배는 덩치가 커다랬고, 개보단 늑대 같았지만. 어쩌면 저것들은 개가 아니라 늑대일지도 모른다. 뭐 늑대도 갯과이니….

소환된 개들은 박민후에게 몸을 치대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바닥에 드러눕기도 하고 내게 들러붙기도 하고 아주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것들이 총총거리며 돌아다니는 꼴은 사뭇 귀여웠기에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박민후는 휘파람을 불어 그것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휘파람 소리에 개들이 일제히 귀를 새우고 박민후를 쳐다보았다. 그는 손에 들린 음식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개들에 명령했다.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놔.”

바닥에 닿기 전에 개들이 서둘러 그것들을 입에 한두 개씩 물고,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개들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작게 소란이 일었다. 평화로운 마트에 때아닌 개떼의 등장으로 한순간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어떤 헌터가 능력을 썼다고 수군거리고, 개중에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오기 전 박민후에게 후드랑 야구 모자를 씌우고 나왔지만, 그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이 몇 있는지 간간이 ‘박민후다.’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정작 소란의 당사자는 뭘 잘했다고 ‘됐지.’ 하며, 씩 웃고 있었다.

“…진짜 쓸데없는 데 능력을 쓰네요.”

“네가 가져다 두라며?”

“그쪽 다리는 장식이에요?”

“능력 있는데 뭐 하러 내가 직접 가냐?”

“나랑 다니고 싶으면 되도록 능력 쓰지 마요.”

“왜?”

“귀찮아지니까.”

진짜 귀찮아. 저마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저희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다가올까 기회를 엿보는 멍청이들도 몇 있는 게 문제였다. 시선이 모이면 사건이 생기기 쉽다.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이제 인터넷 배송만 시켜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카트를 밀었다. 어서 살 거 사고 가야겠다. 어째 점점 더 사람이 몰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벌써 이 마트에 박민후가 나타났단 소문이라도 퍼진 게 아닐까 싶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가자 어느새 옆에 온 박민후가 자연스럽게 대신 카트를 밀기에 그에게 카트를 맡기고 나는 살 걸 골라 왔다.

문득 제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작은 힘에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까의 작은 개들이 명령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개들은 또 박민후에게 엉겨 붙고 그의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하고 저들끼리 우당탕거리며 몸싸움도 했다. 그리고 그중 유일하게 한 마리만 자신의 바짓단을 물어 당기고 있었다. 으르렁 작은 몸에서 울리는 귀여운 울음소리에 이걸 어쩌나 싶었다. 그 꼴을 보고 나머지 개들에 둘러싸인 박민후가 웃기다며 웃었다. 내가 볼 땐 그쪽이 더 웃겼다.

“아야, 물지 마, 이놈들아! 야, 걔가 네가 마음에 드나 본데?”

“이거 지능이 있어요?”

“있지, 그러니 아까처럼 심부름도 시키는 거 아니겠어? 아, 물지 말라니까?!”

“하긴 그렇겠네요.”

“안 되겠다. 일 끝났으면 다들 돌아가!”

그 소리에 개들은 아쉬운 듯 낑낑거리다 다시 그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단 한 마리만 빼고.

“잠깐, 이건 왜 그쪽 그림자가 아니라 내 그림자로 들어가죠?”

“뭐 어때, 그거 꽤 쓸모 있다? 일단 내 그림자로 만든 소환수라서 어느 정도 공격력은 있거든, 생긴 건 새끼지만.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어쩌다 나 없이 혼자 다닐 때 무슨 일 생기면 걔가 도움이 될 거야.”

“그런 말 하지 마요. 그쪽이 말하면 현실이 될 거 같다고요.”

“계약서 제3 조항 ‘을은 갑의 집에 사는 동안에는 갑의 안전을 최우선 순위로 여겨야 한다.’ 이거 네가 적어 놨잖아. 그냥 보험이라 생각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러면 꼭 뭐가 터지던데…. 그래, 보험이라 생각하자. 가지고 있어도 나쁘진 않겠지, 좀 찜찜하지만.

계산대에서는 들어오기 전 박민후가 말한 대로 그가 계산을 했다. 박민후가 블랙 카드를 내밀어 나도 놀랐고, 직원도 놀랐다. 거의 3분의 2는 박민후의 먹거리인 봉투는 당연하게 내가 들 생각이 없었다. 가득 들어찬 봉투를 챙겨 박민후에게 넘겼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걸 들었고, “인벤토리.” 하고 그가 아주 작게 읊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봉투들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내 감상은 딱 하나였다.

“…헌터들은 편하겠어요.”

“편하긴 해. 굳이 들고 다닐 필요도 없고, 부피가 큰 것도 넣을 수 있거든.”

“이사할 때 편하겠다.”

“아니, 왜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 못 해? 좀 다른 것도 많잖아.”

앞서 걷자 박민후의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옆으로 따라왔다.

“가치관의 차이겠죠.”

그다운 말에 실실 웃던 박민후는 슬쩍 이수현에게 어깨동무를 하려다 손이 어깨에 닿기도 전, 아주 자연스럽게 제 손을 치우고 앞서 걸어가는 이수현 때문에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박민후는 멍하니 갈 곳 잃은 손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괜히 멋쩍어져 그대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참, 나….”

***

어두운 새벽 넓은 홀에 모여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허공에 떠 있는 영상을 보며 저마다 의문을 품었다. 오늘 낮 인터넷에 올라온 한 헌터의 목격담이었다.

그곳에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쪽은 얼굴을 모자로 가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옆에 있는 남자는 알아보기 쉬웠다. 조금 확대해서 그 남자의 얼굴을 차근히 뜯어보며, 홀 안에 사람들은 저마다 소곤거렸다.

“흠,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그 박민후가 관심을 보이다니 세상에나.”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 저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죠. 그는 아주 변덕스러우니 잠깐의 여흥일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계획에 이 일반인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요.”

“그럴 리가요. 박민후잖아요.”

“아무래도 저 일반인을 조사해 봐야겠어요.”

“자, 자. 이 이야긴 조금 뒤에 마저 하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가 모인 건 다른 이유 때문이잖아요?”

저마다 새의 가면을 쓰고, 거기에 새하얀 로브를 입어 정체를 감춘 자들이 까치 가면을 쓴 자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으로 이 자리에서 가장 발언권이 있는 자가 누구인지 명확했다. 까치 가면을 쓴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노이즈 낀 목소리가 홀 안을 잠식해 갔다.

“좋아요. 계획대로 물건은 잘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아주 순조롭습니다.”

“저희에겐 5년 전의 경험도 있고, ‘그들’이 남기고 간 잔해들도 있습니다.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오래 걸렸지요. 기대해도 좋습니다. 곧 테스트를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래도 여전히 걱정입니다. 일이 잘못되면 어쩌죠?”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될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 많은 사람이 죽긴 하겠죠. 그렇지만 이건 필요한 희생입니다.”

다른 이들에 걱정에 까치 가면은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설령 계획에 문제가 생겨도 괜찮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저희에겐 ‘박민후’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지요. 설령 초반에 일이 어그러진다 해도 계획대로 그가 다시 한 번 이 세계를 구하면 됩니다. 그는 절대로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영웅’이잖아요?”

까치 가면이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 그 말에 다른 새들도 히죽 웃었다.

“영웅의 유래가 뭔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자기들끼리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이 버틴 이기적인 인간들을 칭하는 말이지요. 우리의 목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그런 이기적인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우리 계획대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특히 박민후같이 오만하고, 독선적인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은 더 그렇지요. 우리는 그의 그런 성미를 이용하면 되는 거예요.”

이질적인 목소리 속엔 희미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새들은 그 말에 긍정하며 까치 가면의 말에 더욱 공감했다.

“또 한 번 세상이 멸망하려 할 때, 그는 좋든 싫든 자신이 살기 위해서 세상을 구할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계획이 실패할 걱정은 없습니다. 5년 전 우리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겨우 이런 힘을 포기 못 해 그토록 바라 왔던 평화를 저버리고, 잘못된 선택을 했어요. 이 자리에 각성자가 있는 것을 압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각성자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날 결정을 반대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까치 가면은 감정에 북받쳐 테이블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우리는 해낼 겁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는 거예요. 더 나아가 완벽한 평화를 위해 우리는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는 거야.

이것은 잘못을 바로잡는 일.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그렇게 말하며 까치 가면이 인자하게 웃었다.

***

이수현과 박민후는 장을 보고 돌아와서 가볍게 방금 사 온 것들로 끼니를 때우면서 간단하게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면서 박민후의 나이가 스물여섯이란 걸 알았다. 자신의 나이도 묻기에 이수현은 동갑이라 말해 주었다. 그러자 박민후는 이수현보고 존대하지 말고 편하게 말하라고 했으나 그는 단박에 거절했다. 이수현은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겐 아무리 동갑이어도 반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때에 따라 존대가 편한 상대도 있는 법이다.

이수현에게 박민후가 그랬다. 그는 전혀 편한 인간도 아니었고, 친해지고 싶은 존재도 아니었다. 딱 이 정도 거리감이 좋았다. 물론 그 대답에 박민후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지 얼굴을 구겼지만, 이수현이 알 바 아니었다.

어제오늘 어기적거리는 박민후를 보며 이수현은 지나가는 투로 그에게 안 바쁘냐 물었더니 “당분간 휴가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휴가라…. 그 말을 듣고 제발 박민후가 필요한 던전이라도 터져서 그가 자신의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민후와의 동거 생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이수현은 늦은 아침마다 실수인 척 그를 밟아 깨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를 밟을 때마다 따끈한 시멘트를 밟는 기분이었기에 솔직히 미안하지도 않았다. 당장 블랙마켓에 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이수현은 한동안 집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다.

먹을 건 박민후 돈으로 잔뜩 사 뒀으니 걱정 없었고, 바빠서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들도 많았다. 그렇게 누워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가끔 인터넷을 하거나 하면서 느긋한 생활을 보내는데 박민후는 그런 생활이 썩 적응이 안 되는지 동거 3일째 되는 날 TV를 샀다.

새벽 댓바람부터 배송 온 벽걸이 TV를 보고 이수현은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다시 잠들었고, 정오가 돼서야 다시 눈을 떴다. 그랬더니 TV는 벽 한쪽에 설치까지 되어 있었다. 이수현은 어이가 없었으나, 곧 박민후와 함께 데운 냉동 볶음밥을 같이 먹으면서 TV를 봤다. 이왕 산 거 써야지 어쩌겠는가? TV는 죄가 없다. 그 뒤로는 같이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일주일이 지났다.

쾅!

“안 질려?”

“안 질리는데요.”

박민후가 식탁에 숟가락을 집어 던지며 짜증을 부렸다. 그 반동으로 식탁이 크게 흔들렸고 그의 밥그릇이 엎어졌다. 지금 보니 숟가락이 부딪친 자리에는 둥근 홈까지 생겼다. 어휴. 밥상 앞에서 뭐 하는 짓인지…. 동거 일주일째. 박민후가 드디어 냉동식품에 질렸다.

“난 질렸어!”

“그럼 다른 거 먹어요. 오늘은 닭가슴살 볶음밥 어때요?”

“시발, 그거 3일 전에 먹었잖아!!”

“3일 전에 먹은 건 야채볶음밥이에요.”

“너 무슨 볶음밥 못 처먹고 뒤진 귀신이라도 들렸어? 어?! 아니면 볶음밥에 무슨 한이라도 맺혔어? 어떻게 일주일 동안 삼시 세끼 다 볶음밥만 처먹어?!”

그 꼴을 보고 이수현이 숟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같이 먹자 그랬나. 자기가 따라 먹고서 어디서 성을 내?”

“다 들려!!!”

이수현과의 동거 생활은 처음에만 괜찮았다. 그래 처음에만. 문제의 시작은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어지르는 걸 정말 잘했다. 그렇다고 그걸 치우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입은 옷을 허물 벗듯 바닥에 두는 건 당연했고, 자고 일어난 그대로의 상태로 그대로 유지되는 엉망인 침대 또한 당연했다.

책을 본답시고 책장에서 잔뜩 꺼내둔 책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안 치우냐 물으면 좀 있다 치울 거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치우긴 개뿔! 다음 날 일어나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화딱지가 나지만 박민후답지 않게 참고, 대신 치워 주길 몇 번. ‘그래, 다 나를 위해서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다.’ 하고 자기 최면을 걸며 청소를 했다.

치워도 원상 복구 된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 정돈 참을 수 있었다. 이수현이 아침마다 절 밟고 갈 때는 어디서 병아리가 지나가나 했다.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다 읽을 때까지 움직이질 않아서 일주일간 밖에도 안 나갔지만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 이건 아니었다!

그렇다. 박민후는 이제 더는 볶음밥이 먹고 싶지 않았다. 볶음밥에 ‘볶’ 자도 보기 싫었다! 이게 하루 이틀이면 몰라, 무슨 일주일 동안 삼시 세끼가 다 볶음밥이야. 양심은 있는지 그래도 하루에 같은 맛은 먹지 않았지만 그래도 볶음밥인 건 똑같았다. 이제 박민후의 입은 볶음밥이 들어오는 것도 거부했다. 그가 일주일간 본 이수현은 볶음밥에 미친놈이었다.

그래, 하루 이틀은 볶음밥을 많이 좋아하나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어째 계속 먹는데 줄지 않고 냉동고 가득 들어 있는 냉동 볶음밥을 봤을 때도 ‘왜 그대로지?’ 하고 말았었다. 하지만 일주일째 이수현이 특유의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볶음밥 봉지를 찢고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볶음밥을 제 앞에 놔줄 때 결국 못 참고 수저를 집어 던졌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먹기 싫으면 나가라는 거야?!

박민후가 짜증스럽게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 냉동식품도 종류가 많잖아. 다른 것도 많은데 왜 이것만 먹는 거야? 언제까지 이것만 먹게?!”

“다 먹을 때까지요.”

“오, 신이여….”

“그게 신까지 찾을 일인가?”

박민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볶음밥을 먹는 이수현을 질린 얼굴로 쳐다봤다. 저게 저렇게 좋을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볶음밥이 그렇게 좋냐?”

“음,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뭐야, 좋아서 먹는 거 아니었어?”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음, 먹기 편해서요. 설거짓거리도 별로 안 나오고 들어간 것도 이것저것 있으니까. 그래서 먹는 것뿐이에요.”

“겨우 그런 이유로?”

“겨우라뇨. 밥 한번 차려 먹기가 얼마나 귀찮은데, 그에 비해 이건 전자레인지만 돌리면 되니까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만 사용하면 되잖아요.”

박민후는 이해가 안 갔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미친놈처럼 볶음밥만 처먹었다고? 볶음밥에 미쳐서 그랬다고 하는 게 더 이해됐다.

“내가 볼 땐 넌 그냥 볶음밥에 미친놈 같아.”

“그 정돈 아닌데…. 그냥 잘 안 질릴 뿐이에요. 저 최대 한 달간 비빔밥만 먹은 적도 있어요. 그다음엔 질려서 짜장면만 한 달 먹었지만….”

“미친놈.”

그거나 저거 나잖아!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어느새 이수현은 밥을 싹싹 긁어 먹고 빈 그릇을 보였다. 박민후는 제 몫의 볶음밥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꼴 보기 싫었다. 마음 같아선 냉동고에 있는 것들도 다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이수현은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고 바로 설거지를 하러 싱크대로 향했다. 그래도 그는 설거지 하나는 먹자마자 했다. 그릇이라곤 하나뿐이기에 설거지는 금방 끝났다. 손에 물기를 닦던 이수현은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누워서 TV를 보는 박민후를 불렀다.

“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뭔데?”

“블랙마켓이라고 알죠? 거기 어디 있는지 알아요?”

“…거긴 왜?”

박민후의 눈썹이 움찔하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의 표정은 마치 그런 곳에 네가 갈 일이 뭐가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반인이 블랙마켓을 아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곳에 가는 일은 더 드물었다. 그곳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면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이수현은 박민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 보려고요.”

“그러니까, 네가 왜 거기에 가냐고. 거기가 어딘진 알고 간다는 거야?”

“알아요, 아니까 간다는 거예요. 전부터 가 보고 싶었거든요. 슬슬 집에만 있기 따분하고 그쪽도 그렇지 않나요?”

“…하긴 일반인들은 잘 못 가는 곳이지. 궁금할 수도 있겠네. 내가 같이 가면 안전은 걱정 없고. 근데 거기서 뭘 사도 네가 쓰진 못할 텐데?”

“뭘 살려고 가는 건 아니고, 말했잖아요. 구경하러 가는 거라고…. 근데 내가 거기서 뭘 사도 못 쓴다고요?”

“어, 못 써.”

“일반인은 못 쓰는구나…. 그럼 헌터만 쓸 수 있는 거예요? 아, 그래서 일반인들이 그곳을 잘 모르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고. 너만 못 쓴다고.”

“그게 무슨…. 왜 나만 못 쓴다는 거예요?”

“왜긴 왜야.”

박민후는 오히려 이수현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살짝 쓰며 마저 말했다.

“너 마나가 없잖아.”

“…예?”

“반응이 왜 그래? 몰랐어?”

“…아뇨.”

몰랐다. 마나가 없다니. 아니 없는 게 당연한가? 애초에 이수현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니 오히려 있는 게 이상했다. 없는 게 당연하지. 이수현은 놀람을 가라앉히고 나자 작게 의문이 들었다. 그걸 박민후가 어떻게 아냐는 거였다. 박민후쯤 되면 그런 것도 쉽게 알 수 있는 건가?

“근데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그거야….”

“뭐야. 왜 바로 대답을 못 해?”

박민후는 당황스러웠다. 정말 오랜만에 당황스러웠다. 사실 경로를 말해 주기가 뭐 했기 때문이었다. 그야 내가 네 등짝에서 흐르는 피를 핥아먹고 알았다고 말하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은가. 이수현은 그때 그게 저인 줄도 모르는데 섣부르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같이 사는 입장이다 보니 그날 일은 이수현이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 내가 좀 마나에 민감해서 그래…! 나 정도 되면 척 보면 척하고 안다고.”

“뭔가 수상한데….”

“아, 됐고. 그래서 블랙마켓 가자고?”

“말 돌리는 거 같은데…. 됐어요. 생각해 보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거 같으니까 넘어가 줄게요.”

***

박민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집 앞에 있는 지하철역이었다. 카드를 찍고 지하철 역사 내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저 남자가 대중교통이라니…. 그보다 교통 카드가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그는 나보다 두 배는 빨리 걷는 편이었기에 박민후와 함께 지하철까지 오면서 나는 그를 두 번 정도 놓쳤었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그를 놓치기 십상이었다. 그때마다 박민후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거나 되돌아와 같이 걸었다. 지금도 잠깐 카드를 찍는 사이 훌쩍 멀어져 계단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에게 다가갔다.

“지하철 타고 가는 건가요?”

“아니, 마켓 입구가 지하철 내부에 있거든. 마침 이 지하철 안에도 하나 있어서 그리로 들어갈 거야.”

“원래 그런 건 좀 사람 없는데 숨겨져 있지 않나? 그런데 지하철이라니….”

내가 기억하던 거랑은 좀 달랐다. 원작에서 박민후가 처음 블랙마켓에 들어갔을 때 사용한 입구는 사람의 발길이 뜸한 으슥한 골목에 있었다.

“뭐, 옛날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거든. 찾아보면 마켓 입구는 여기저기에 꽤 있어.”

그간 그와 지내면서 새롭게 안 게 있는데 그건 그가 의외로 말이 많다는 거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걸음을 옮기느라 어느새 박민후가 제 보폭에 걸음을 맞추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의외로 이런 곳에도 있나 싶은 곳에 특히 많아. 이렇게 지하철 안쪽이나, 혹은 대형 백화점 지하 주차장이라거나 하는 곳에 말이지.”

마침 열차가 도착했는지 그들의 옆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환승하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과 열차를 타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음 속으로 그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가 흩어졌다.

“그냥 음지의 것들이 눈속임하기 쉽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숨어든 거야. 그래서 가끔 일반인들이 실수로 섞여들긴 하는데…. 그것까진 네가 알 거 없고. 입구 중에 제일 유명한 걸 꼽자면 신도림 환승역이지. 거기는 누가 사라져도 정말 구별이 안 가거든.”

한차례 사람이 빠진 역사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 그저 그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탁….

“여기네.”

그가 멈춘 곳은 환승 구역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평범한 벽이었다. 박민후가 벽 한쪽을 손으로 짚자, 마치 그곳에 처음부터 벽이 없었던 것처럼 그의 손이 벽을 통과했다. 이런 신기한 광경을 볼 때마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왔음을 상기하게 된다.

“이리 와.”

멀뚱히 그의 손을 보고 있는데 박민후가 나를 불렀다. 저기가 문이라니, 번개 상처를 가진 마법사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 다가가자 박민후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를 밀어내려는데, 그럴수록 박민후는 나를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아파! 내적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품에 빈틈없이 몸이 꽉 맞물리고, 내 등허리를 무식하게 누르는 손 때문에 뼈마디가 아렸다.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반항은 빠르게 포기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몸에 힘을 빼고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사실 그가 힘만 주지 않았어도 퍽 편한 자세였다고 생각했다.

“…뭐 하자는 거예요?”

“가만있어 봐.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귓가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갑자기 무언가 몸을 뒤덮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아래까지 천천히 몸을 훑어 내려갔다. 그 기분 나쁜 감각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바로 옆에서 귀찮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귀찮네. 진짜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머저리 같은 저주를 받은 거야?”

“저주요?”

“그래, 마나 없는 거 저주잖아. 아니야?”

“…….”

“뭔 짓을 했는진 모르겠는데 되도록 빨리 푸는 게 좋을 거야.”

자신의 상태를 그는 저주라고 생각하는 건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 못 하는 걸 보면 이게 평범하지 않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알려져서 좋아질 게 없을 것 같았다. 누가 물어보면 저주에 걸린 척해야겠다.

한차례 기분 나쁜 감각이 지나가자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진짜 뭘 한 거야. 분명 박민후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갑자기 나를 껴안을 이유가 없지. 무거운 팔을 들어 그의 등을 툭툭 치자, 언제 저를 껴안고 있었냐는 듯 빠르게 몸을 떼어냈다.

“됐다. 들어가자.”

“…설명 좀 해 주죠?”

“일단 들어가. 이거 오래 못 버텨.”

하는 수 없이 저를 벽으로 잡아끄는 박민후를 따라 벽을 통과했다. 벽을 통과하는 그 순간 무거웠던 몸이 다시 확 가벼워졌다. 손을 들어 보며, 잘 움직이나 확인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터널 안에 있었다. 어쩌면 동굴일지도 몰랐다. 눈앞에 보이는 건 사람이 한두 명 지나다닐 수 있을 법한 크기의 터널이었다. 벽에는 빛을 밝히는 돌이 박혀 있었는데, 아마 헌터들이 던전에서 사용한다던 야광석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사물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저처럼 한차례 주변을 둘러본 박민후가 허공에서 검은 천 같은 것을 꺼내더니 내게 던졌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자 그 또한 허공에서 내게 준 것과 비슷한 천을 하나 더 꺼내더니 어깨에 둘렀다. 이제 보니 그냥 천이 아니라 게임에서나 볼 법한 로브였다. 박민후가 입으라고 턱짓을 하기에 저도 따라 입었다. 그는 어느새 로브의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완벽히 가려졌다. 로브에 의해 그의 얼굴 중 입만 겨우 보였고, 그 외에는 음영이 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 로브 자체에 인식 방해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모자 써.”

폭이 넓은 모자까지 눌러쓰니 그제야 만족한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앞서 걸어가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런 인위적인 워프 게이트는 들어가는 대상이 어느 정도 마나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그런데 넌 마나랄 게 없잖아. 보통은 신체에 자연스럽게 마나가 깃들어 있으니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데…. 그래서 그런 귀찮은 방법을 쓴 거야.”

박민후는 내가 잘 따라오나 한 번 확인하곤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내 마나를 일시적으로 너한테 뒤집어씌웠어. 뭐 타인의 마나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어서 네가 기분 나쁜 건 이해하겠는데, 이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거든. 걱정 마. 내 마나는 여기 들어온 순간 다 흩어졌으니까.”

마나가 전부인 세상에서 마나가 없다는 건 여러 불필요한 상황에 엮인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간단한 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도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정말 한숨만 나왔다. 무엇보다 그 방법이란 게 별로였다.

“그런데 그게 꼭 껴안을 필요까지 있나? 박민후 헌터 정도 되면….”

“접촉면이 넓어야 더 빨리 되니까. 그리고 이름 부르지 마. 이름 까발리고 다닐 거면 뭐 하러 얼굴을 가렸냐?”

“그럼 뭐라 부르라고.”

“내 이름만 아니면 돼. 블랙마켓은 서로가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알아서는 안 되는 곳이니까.”

개새끼라고 불러 주지.

얼마나 걸었을까, 터널 끝이 가까워졌는지 빛과 함께 소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우리는 거대한 공터를 마주했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세계였다. 이 정도 규모가 땅 아래 있을 거라고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언뜻 보면 야시장 같기도 했고, 또 언뜻 보면 판타지 소설 속에서 볼 법한 지하 도시 같기도 했다. 전등 대신 야광석이 어둠을 밝히고 있어 조금 어두웠지만 그게 또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의외로 규모가 컸고, 사람도 많았다. 저희처럼 얼굴을 가린 수많은 사람들이 저 아래에서 지나다니고 있었다.

“놀랐어?”

“예, 재밌네요. 이런 곳이 서울 지하 아래 있다니….”

“누가 만들었는진 아무도 몰라. 그저 어느 순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 구경하고 싶다며, 여기서 보는 걸로 끝낼 건 아니지?”

“내려가죠. 뭐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재밌는 게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박민후는 내가 여기서 뭘 사도 쓰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하나쯤은 내가 쓸 만한 것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마나를 담아 두는 아이템이라든가…. 그런 게 있으면 박민후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

그 시각, 헌터 협회 건물 가장 최상층에 위치한 한 회의실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원래라면 한참 전에 끝났어야 했다. 오늘 회의 내용은 그동안 청소한 던전들의 향후 뒤처리와 혹 평소와 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진 않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여태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재버워크 길드’가 막판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던전 청소 기간 동안 재버워크는 정해진 구역 외에도 다른 던전들을 몇몇 청소했다. 평소의 할당량을 초과해 일을 했기에 그에 따른 보상을 더 받아야겠다는 이야기였고, 그것에 반대하는 ‘레라인 길드’로 인해 이야기가 결론지어지지 못한 채 결국 회의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던전 청소를 시작하기 전 한국의 대표 길드인 재버워크, 레라인, 미스토어, 피에타. 이 네 길드가 청소 기간 동안 나오는 부산물과 마석 등을 공평히 나눠 갖기로 사전에 약조하였다. 그렇기에 레라인은 재버워크 측이 약조를 어긴다며 반대하고 있는 거였다.

이 모든 게 박민후 한 사람이 빠지자 생긴 문제였다. 원래라면 박민후 혼자 청소해야 했던 던전들을 다른 길드들이 나눠 맡았고, 그 과정에서 주인을 잃은 보상을 그들이 탐하기 시작했다. 레라인은 똑같이 일했으니 공평하게 나눠 갖자고 하였으나, 재버워크는 우리 측에 손해가 크다며 레라인 측의 말을 거부했다.

미스토어와 피에타 길드는 복구와 힐러의 집단이라 발언권이 약했다. 결국 그들은 이 상황에서 침묵을 택했다. 사실 피에타는 억지로나마 저 싸움에 끼어들 수는 있었다. 발언권이 약하다고는 해도 힐러의 역할은 던전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고, 피에타의 길드 마스터는 힐러들의 대표였으니까.

다만 피에타 길드의 길드 마스터 하현은 이 자리에 없는 호랑이가 무서워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괜히 남의 것에 손을 대 제 몸에 불똥이 튈 바에는 관여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호랑이가 자리를 비우면 여우가 주인 행세를 한다더니 박민후가 없는 회의장이 딱 그 꼴이었기에 미스토어의 부길드 마스터로서 회의에 참가한 차주영은 이 쓸모없는 회의가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또 한 명의 부길드 마스터 강유람에게 대신 와 달라고 해야 했다. 뒤늦은 후회를 하며 차주영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일이 안 풀릴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한창 말싸움을 하던 레라인 측의 부길드 마스터에게 외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실례하겠습니다. 예, 플로나입니다. 말씀하세요. 예, 예….”

전화를 받던 그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에 화려한 백금발을 쓸어 넘겼다. 맑은 하늘을 닮은 푸른 눈이 통화가 길어질수록 점점 찌푸려졌다. 각 길드와 그 산하의 속한 길드, 그리고 협회에 헌터들은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 외부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거나, 그에 준하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좌중은 싸우던 입을 다물고 레라인 측 부길드 마스터 플로나 메스윈에게 시선을 모았다. 짧은 통화 끝에 플로나는 다소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새’를 발견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회의실 안은 크게 술렁거렸다.

‘새.’

그건 단순히 조류를 상징하는 말이 아니었다. 플로나가 언급한 새는 ‘밤에 우는 새’였다. 그 불길한 명칭과 반대로 새들은 새하얀 로브를 입고 새의 가면을 쓰며, 자신들을 ‘선지자’라 자칭했다.

그들의 사상은 불온했다.

새의 목적은 단 하나. 세상을 5년 전과 같은 상황으로 만드는 것. 지금의 평화를 거짓된 평화라 칭하며,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이념하에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려는 자. 다시 한 번 세상이 멸망할 때 신이 나타나 세상을 구하고, 이번에야말로 자신들을 던전도 몬스터도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세상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믿는 자들. 그래, 한마디로 사이비들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처음 마주했을 때 ‘까치’가 한 말이 있었다.

‘이건 신의 뜻입니다.’

그 말을 들었던 헌터들은 훗날 그들이 정말 사이비 같았다 회상했다.

그들의 대표, 일명 ‘까치’라 불리는 자의 정체를 특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직 그의 정체를 특정 지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까치의 뒤를 캐면서, 그가 빛 속성을 가진 자라는 것과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신의 축복을 받은 ‘각성자’라는 사실로 어쩌면 정말 그런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만이 돌 뿐이었다.

한차례의 침묵 후 입을 연 것은 재버워크의 길드 마스터 남태웅이었다. 지금 던전 부산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발견 장소는?”

“일단 여의도 인근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비밀리에 뒤를 밟았습니다만…. 신도림역에서 놓쳤다는군요.”

“신도림이면 그럴 만하지.”

“한동안 조용하기에 혹 자멸했나 했더니 아직 살아 있었군.”

“그들의 사상은 아주 위험해요. 지금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그때 여태 입을 닫고 상황을 관망하던 미스토어의 길드 마스터 김세현이 입을 열었다.

“이제 새들에 대해 박민후 헌터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그에게 새들을 비밀로 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남태웅이 불같이 화를 냈다. 또다시 그의 손에 의해 회의실 테이블이 두 동강 났지만, 김세현의 손짓 한 번에 원상 복구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생각해 보게, 미스토어! 박민후 헌터는 우리를 원망하고 있어. 이 세계의 평화를 바라지 않는 작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새들에 대해 알려 줬다가 그가 새들에게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땐 어떻게 할 겁니까? 괴물이 미쳐 날뛰는 꼴이 보고 싶은 겁니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어 봤자 변하는 건 없어요, 재버워크.”

“…미안하지만 나도 재버워크 말에 동의해요. 이 안건은 최대한 그의 귀에 늦게 들어가야 합니다.”

하현은 그렇게 말하며 떨리는 양손을 꼭 붙들었다. 새들에 대해 박민후가 알면 분명 저희에게도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현의 직감은 살아오면서 그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 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상황을 정리하던 레라인의 길드 마스터 유진이 입을 열었다.

“플로나, 새를 신도림역에서 놓쳤다고?”

“네, 신도림 역사 안에서 놓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들이 블랙마켓으로 향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스터.”

“다들 그만 싸우세요. 일단 지금은 새를 잡는 게 먼저겠죠. 저희가 발견한 것도 있고 레라인은 플로나가 현장에 나갈 겁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 명 더 인원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저희가 돕죠. 미스토어는 차주영 헌터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죠?”

“예, 마스터.”

차주영은 마스터의 부름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데 맞은편에 서 있던 플로나가 그를 보며 윙크를 날렸다. 젠장. 역시 오늘은 운이 나쁠 게 틀림없었다.

***

한편 이러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박민후는 지금 꽤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랬다, 박민후는 당황스러웠다. 이수현의 몸에 밴 어떠한 행동 때문이었다. 언뜻 보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깨닫고 나니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블랙마켓의 거리는 좁고 사람도 많았다. 이 거리를 걷는 사람은 별별 놈들이 다 있고, 개중에는 이따금 바닥에 침을 뱉거나 껌을 뱉어 놓는 놈들도 존재했다. 바닥을 보면서 걷는 사람은 좀처럼 없으니 그걸 모르고 밟고 지나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기에 박민후는 이수현이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피해 가고 있다는 걸 한참 뒤에 눈치챘다.

길을 걸으며 이수현은 이따금 박민후의 팔을 잡아당겨 진로를 변경했고, 이따금 자신과 자리를 바꾸어 밖에서 걸었다. 그 모든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박민후는 그저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에 보인 거다.

그가 저를 자연스럽게 잡아당겨 가던 길을 바꾸고 나면, 원래 제가 가던 길에 누가 침을 뱉어 두었다거나, 껌이 붙어 있는 게. 그대로 갔다면 모르고 밟았을 터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진열대에 부딪칠 뻔한 걸 자연스럽게 저를 살짝 잡아당겨 피하게 한다든가. 앞에 오는 사람과 부딪칠 거 같으면 그가 또 자연스럽게 제 몸을 옆으로 밀어 부딪치는 걸 피하게 했다.

어디로 보나 저를 위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박민후는 솔직히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낯간지러웠다. 그래, 낯간지러웠다. 누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자가 다름 아닌 이수현이었기에 그래서 더 그랬다.

생각해 봐라. 저 세상 무심한 얼굴로, 물론 지금은 그 얼굴도 안 보이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안 당황스럽겠는가. 그제야 어제오늘 이따금 그와 걸을 때 뜻 모를 행동을 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더는 낯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이수현에게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침 밟으면 기분 더럽잖아요. 보이니까 피하는 것뿐이에요.”

“부딪치면 기분 나쁘니까.”

“왜 말 안 했냐고요? 말하는 것보다 내가 움직이는 게 빨라요. 말하면 늦고 그걸 또 설명하기도 귀찮잖아. 그나저나 여기 정말 바닥이 더럽네.”

그렇기에 박민후는 생소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 겪어 봤을지도 모를 기분이었다. 그게 뭔지 명확히 몰랐으나 그저 가슴께가 가려워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긁었다. 물론 은연중에 그런 행동으로 사라질 가려움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박민후는 그 뒤에도 몇 번이고 가슴께를 긁었다. 이 이유 모를 가려움이 빨리 사라지길 바라면서.

***

이수현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있었다. 길을 걸을 때 바닥과 주변을 살피고, 주변 소음에 귀 기울이는 그런 습관 말이다. 언제부터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다. 어렴풋이 어릴 적 난 사고가 원인이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러나 기억이 없어도 두려움은 각인된다고, 본능이 그때와 같은 상황을 피하고자 습관처럼 남아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옛일이다.

이건 이제 그저 몸에 밴 습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길을 걸을 때 수시로 주변을 살피고, 지나가는 사람을 피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하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듣고는 필요한 것을 기억해 두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는 유용한 것도 있고, 재밌는 것도 있다.

밖에 비가 온다더라, 앞에 사고가 났다더라, 버스가 늦게 온다더라, 저기 디저트가 맛있다더라. 그와 같은 이야기는 꽤 유용했다. 그렇기에 지하철을 나서기 전 역 안에서 우산을 사고, 사고가 난 길을 피하거나 알려 주고, 버스가 늦게 온다고 언급해 주고, 여기 디저트가 맛있다며 같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수현은 자신에겐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 같이 걷는 사람을 설레게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럴 의도도 아니었고 겨우 그런 거 가지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블랙마켓에 온 건 잘한 일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바닥이 좀 지저분하다는 게 좀 그랬지만. 이런 건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늘 있는 일이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수상한 모양새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그랬거니와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 구경도 흥미로웠다. 돗자리나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파는 물건들은 신기했다. 게임 속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무기들과 액세서리들이 실물로 있었으니까. 보석처럼 색색으로 반짝이는 마석들도 신기했다. 그 외에도 간간이 스킬 북이 보였고, 그래도 가장 많은 건 역시 몬스터의 부산물이었다. 거대한 뿔을 구경하는데 알고 보니 발톱이었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정말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박민후는 좋은 가이드였다. 그에게 물어보면 대체로 이게 뭔지 어디에 쓰는 건지 바로바로 알려 주었다. 당연했다. 그에게 분석 스킬이 있었으니까. 그걸 알고 물어본 것이었다. 보통은 분석 스킬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그렇다 보니 번거롭긴 하지만 아이템의 성능을 확인하려면 일일이 감정사에게 맡겨야 한다. 그 때문에 블랙마켓에선 사기가 판을 쳤다. 그런 면에서 박민후가 옆에 있으면 사기당할 일은 없었다.

“흠.”

손안의 새하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새하얀 반지 안쪽에는 금으로 각인이 되어 있었다. 그 심플한 모양새가 퍽 마음에 들었다. 좀 작아 네 번째 손가락쯤에 딱 맞을 것 같았다. 무슨 반진지 박민후한테 물어볼까? 고민하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판매상이 말을 걸었다.

“그게 마음에 드나?”

“그냥… 다른 놈들이랑 다른 게 평범하게 생겨서요. 무슨 반지죠?”

“보는 바와 같이 그저 평범한 반지지.”

“아이템이 아닌가 봐요?”

“지금은 평범한 반지란 뜻이야. 아무 능력도 없는 빈 통이란 뜻이지.”

“빈 통이라, 무언갈 담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렇지. 딱 한 가지 스킬을 담을 수 있다네.”

“어떤 스킬이든지?”

“그렇고말고, 단 딱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지.”

딱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소모용 아이템이란 뜻이었다. 저 말이 사실이면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으면 될 거 같으니까.

“사용 방법은요?”

“뭐야, 일반인이었나?”

“글쎄요.”

판매상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지. 사용법은 간단해. 각인된 스킬명을 말하면 된다네.”

“입으로요?”

“입으로.”

“…그건 좀.”

입으로 스킬명 외치는 거 안 부끄러운가? 하라고 해도 못 할 거 같은데. 하지만 판매상이 말하는 걸 보면 따로 마나가 필요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살 거야 말 거야?”

“좀 있다가 다시 올게요.”

“예끼! 그럼 그렇지. 때 탄다, 요놈아! 이리 내놔!”

판매상이 투덜거리며 반지를 낚아채 갔다. 조금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나쁘진 않은데…. 스킬명만 안 외치면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 아니, 그냥 장신구로 써도 좋을 거 같기도 한데…. 슬쩍 옆을 보니 박민후도 무언갈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말도 없이 조용하길래 뭘 하나 했더니…. 뭘 보는 걸까 싶어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손에 들린 낡은 책을 들여다보았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책인 걸 보아 스킬 북임이 분명했다.

스킬 북은 이 세계의 언어로 적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헌터들은 그게 다른 차원의 언어라고 설명했고, 그렇다 보니 그런 걸 읽을 수 있는 건 각성자들뿐이었다. 아니, 사실 각성자들도 그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건 그 책의 제목인 스킬의 이름과 등급 정도다. 내용을 읽는 건 다른 문제라고 했다. ‘해석’이라는 스킬을 보유한 자만이 온전히 책을 이해할 수 있다나? 원작에서 그런 언급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각성자들은 어떻게 이해도 못 하는 책을 읽나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각성자가 스킬을 습득하는 과정은 ‘책을 펼친다.’ 이거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스킬 북을 열었을 때 그들에게 안내창이 하나 뜬다.

[읽는다] [습득한다]

해석 스킬이 없다면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안 되기에 반강제로 [습득한다]를 누른다고 한다.

대체 무슨 스킬이기에 박민후가 이리 고민하는 걸까…? 이런 노점상 같은 곳에서 그의 흥미를 끄는 스킬이 있을 수가 있나? 내가 알기로 박민후는 좋게 말하면 올라운더였고, 나쁘게 말하면 잡캐였다. 한마디로 웬만한 기능은 다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새삼 그가 무슨 스킬을 보며 이리 고민하나 호기심이 들었으나, 곧 내가 쓸 것도 아니고 관여할 일도 아니었기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다른 걸 구경하러 가야겠다 싶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무슨 스킬을 보고 있는지 몰랐다.

***

<고블린도 할 수 있는 A급 요리!>

등급: A(일반)

분류: 요리

요리를 못하는 당신도 할 수 있다! A급 요리!

시전자가 고블린보다 못한 손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뛰어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단 스킬 숙련도와 스킬 레벨에 따라 완성품에 품질이 달라진다.

박민후가 보고 있던 것은 <고블린도 할 수 있는 A급 요리!>라는 요리 스킬 북이었다. 이걸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유는 역시 두 번 다시 볶음밥이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오늘도 그의 집으로 돌아가면 눈앞에 볶음밥이 차려지겠지…. 로브의 가려진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생각한 것만으로도 물렸기 때문이다. 일단 집에 가자마자 냉동고를 불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물론 이수현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일주일에 한 번으로 하자고 협상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이수현은 볶음밥에 미친놈이었기에 볶음밥에서 벗어나려면 협상 말고도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사실 외식을 한다든가, 배달 음식을 시킨다거나 하는 선택지가 있었으나 박민후는 제 주제를 잘 파악했다.

박민후가 생각 없이 밖에 나돌아 다니는 건 이수현에게나 박민후에게나 썩 좋지 못한 상황으로 연결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배달하면 자신이 지금 사는 집이 알려질 것이고, 외식을 하면 그게 또 문제가 됐다. 저 혼자라면 상관이 없었다. 그런 건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수현은 달랐다. 그는 일반인이었고, 몸도 약해 빠졌다. 박민후 본인은 적도 많았고, 사람들이 관심도 많았다. 그러니 이수현이 원해서 밖에 나가는 게 아닌 이상 함부로 움직여서 좋을 게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직접 요리를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버린 거다.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면 그 빌어먹을 볶음밥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천하의 박민후가 만들어 준다는데 다른 말을 하진 않겠지!

하나 문제가 있다면 박민후는 생존을 위해 먹을 수 있는 것밖에 못 한다는 거였고(맛없음), 그런 요리를 저 남자가 먹을 리 없다는 거였다. 이수현은 볶음밥만 처먹는 주제에 입은 또 까다로웠다. 이수현은 볶음밥에도 까다로웠다. 볶음밥이라고 다 같은 볶음밥이 아니란 말이다. 브랜드에 따라 똑같은 새우 볶음밥이어도 맛이 다르단다. 게다가 ‘얘는 좀 기름 맛이 많이 나네요.’, ‘이건 새우가 아무 맛도 안 나네요.’ 하면서 그렇게 걸러진 볶음밥은 더는 식탁에 오르지 못했다. 참고로 박민후 입엔 그게 그거였다. 무슨 차이인지 구별도 안 갔다.

그렇다 보니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 ‘음, 괜찮네.’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이 요리 스킬 북이었다. 스킬명은 좀 믿음이안 가긴 한데 일단 등급은 A등급이었다. 고블린도 할 수 있다는데 이 박민후가 못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결정을 내린 박민후는 매대에 기대 하품을 하는 판매상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이거 얼마지?”

“으응? 어디 보자. 요리 스킬이구먼! 요리 스킬이 구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겠지?”

“됐고, 가격이나 불러.”

“껄껄! 좋네, 좋아. 아까 있던 놈이랑은 딴판이구먼! 현금이랑 마석. 둘 중 뭐로 할 거지?”

“귀찮으니 마석으로 하지.”

“시원시원하구먼. 참 아까 같이 온 놈과 일행인가?”

“…그건 왜 묻지?”

“그자가 유심히 보던 물건이 있어서 말이지.”

판매상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아까 이수현이 살까 말까 고민하던 반지를 박민후에게 건넸다. 박민후는 반지를 한차례 돌려보다 감정 스킬을 사용했다.

<텅 빈 반지>

등급: ?

분류: 장신구

심플한 매력이 돋보이는 특별한 반지이다. 단 한 가지의 스킬을 반지에 담을 수 있다. 담긴 스킬은 반지 안쪽에 각인되며, 각인된 스킬은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고 사용 후 반지에서 사라진다.

“어때, 돈도 많아 보이는데 대신 사 주는 게?”

“스킬을 사용하면 반지는 사라지나?”

“그렇지는 않네. 다만 여러 번 사용하게 되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겠지.”

“뭐, 나쁘지 않네. 이것도 가져가지.”

“통 큰 친구야! 그래그래 내가 가격을 깎아 주지. 흠 좋아. 상급 마석 하나, 거기에 하급 세 개만 주게.”

“됐어. 최상급으로 하나. 거슬러 줄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더 통 큰 친구였구먼.”

박민후는 그 자리에서 스킬 북을 습득했다. 느긋하게 해독할 시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반지는 스킬을 각인하고 난 다음 나중에 줘야겠다. 이수현에게 줄 만한 스킬이라고는 보호나 방어 계열 정도인데.

박민후가 가진 방어 계열 고위 스킬은 타인에게 줄 수 없는 고유 스킬이라 각인도 안 될뿐더러, 그렇다고 가진 것 중에 각인되는 스킬은 레벨도 등급도 낮았다. 그런 걸 주기는 뭐 했다. 차라리 귀찮더라도 피에타의 길드 마스터에게 부탁하는 편이 더 나았다.

반지를 인벤토리에 넣어 놓고, 어느새 멋대로 사라진 이수현을 찾으러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퍼억!

이수현이 사라지자마자 이렇게 누구랑 부딪칠 줄은 몰랐다. 어이없네, 진짜. 그의 말대로였다. 어깨 빵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데 한몫한다. 부딪친 어깨를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탁탁 털어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가 와서 쳐 놓고 친 놈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장신의 남자는 부딪친 충격으로 로브가 벗겨져 그 화려한 백금발이 드러났고, 덤으로 얼굴을 가리던 가면도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물론 넘어진 순간 서둘러 로브를 다시 눌러쓰고 가면을 고쳐 썼지만,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박민후는 눈앞에 있는 놈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놈이었다. 그렇기에 박민후는 허둥지둥 사과의 말을 내뱉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억, 미안합…. 헉?!”

“네놈이 왜 여기 있어.”

플로나 메스윈은 멱살이 잡힌 순간 습관적으로 눈앞에 남자에게 분석 스킬을 사용했다. 깨져서 보이지 않는 익숙한 정보창을 보며 좆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사라졌네.”

나는 손안에서 짤그락거리는 작은 주머니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건 바로 조금 전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흘리고 간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인파에 휩쓸리다 보니 실수로 흘린 거라 생각한다.

주인을 못 봤으면 무시했겠지만, 눈앞에서 떨어진 걸 보고도 못 본 척하기에는 영 신경이 쓰였다. 중요한 걸지도 모르니 전해 줘야지 싶기도 하고 바로 앞에 있으니 금방 전해 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앞서서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하지만 내 발이 느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곳에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결국 눈앞에서 주머니의 주인을 놓치고 말았다.

목소리를 높여 불러 보아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쫓기듯 가 버렸는데…. 아무리 봐도 영 수상쩍었다. 설마 이거 훔친 건 아니겠지? 그렇게 한번 생각하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도로 그 자리에 가져다 두어야 할까? 금방 돌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들고 온 것이었는데 영 실수한 게 아닌가 싶다.

왔던 길을 돌아가자니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고…. 이럴 때 박민후라도 있었으면 쉬웠을 텐데. 박민후는 또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주머니를 손에 든 채 다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블랙마켓을 구경하기 전, 박민후와 한 가지 약조한 것이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길을 잃어버리거나 서로 떨어지는 상황이 오면, 그 길로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으로 가라고. 이 지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니 아무리 이수현이라도 찾기 쉬울 거라고 했다.

그 말대로였다. 사람과 건물들 사이로 삐죽 솟아 있는 거대한 시계탑은 한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쭉쭉 가다 보면 시계탑 앞에 도착하겠지. 저 시계는 이곳의 유일한 시계였다. 정각이 되면 종소리가 시간만큼 울리고, 사람들의 약속 장소로도 사용되는 곳이라고 했다.

박민후와 결국 떨어졌고, 저는 여기에 온 적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돈도 박민후한테 있으니…. 이대로 시계탑으로 가는 게 정답인 것 같았다.

왼손에 들린 주머니가 영 찜찜했지만. 주머니 속 내용물을 확인해 볼까 하다가 말았다. 사실은 못 봤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평범한 주머니인 줄 알았더니 이것도 아이템이었나 보다. 꽉 다물려서는 잡아당겨도 풀어질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도 경찰서가 있다면 좋을 텐데. 아니면 분실물 센터라든가…. 하기야 그런 게 존재할 리 없나. 가는 길에 물건을 흘린 사람을 만나면 더 좋겠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왼손에서 짤그락짤그락 소리를 내는 주머니가 영 불길하기 짝이 없어, 실수인 척 주머니를 바닥에 떨구고 그냥 걸었다.

하지만 그 뒤 곧바로 주머니를 주워 든 사람 덕분에 다시 내 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쓸데없이 친절하기는…. 내 것도 아닌데. 내가 흘린 걸 봤다고 하니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고…. 한숨을 쉬며 다시 주머니를 챙겼다.

아까보다 중앙 시계탑이 가깝게 보이는 걸 보면 거의 근처까지 온 것 같았다.

시계탑이 있는 곳은 거대한 광장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분수대가 하나 있었는데 분수대 안에는 머리가 없는 낡은 조각상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분수대는 낡았고, 그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어쩌면 동전일지도 몰랐고, 아이템일지도 몰랐다. 분수대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도, 잠시 쉬어 가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분수대에 무언갈 집어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아, 그건가 분수대에 동전을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나 뭐라나. 이것도 그런 유의 분수인 걸까? 손에 들린 주머니를 한 번 분수대를 한 번 보았다. 결정은 빨랐다. 잘됐네. 여기에 올려두면 누군가 가져가거나, 아니면 누가 소원 빌기 용으로 쓴 건가 하고 넘어가겠지.

툭, 분수대 가장자리에 주머니를 내려놓았을 때였다. 제 몸 위로 그림자가 진 것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

“자, 잠깐잠깐!!”

“시끄럽다.”

플로나 메스윈, 그가 누구던가.

전 세계 내로라하는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권에서 노는 헌터 중 한 사람이며, 어떠한 이유로 원래 국적을 버리고 한국으로 이민을 온 그는 젊은 나이에 레라인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 자리를 차지한 남자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구불거리는 화려한 백금발과 시원시원한 푸른 눈은 마치 천사와도 같아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일반인이 뽑은 이달의 헌터 1위! 사귀고 싶은 남자 1위! 등을 차지하던 플로나 메스윈은 현재 꼴사납게 멱살이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 작은 소란은 블랙마켓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덩치 큰 놈과 덩치 큰 놈이 아웅다웅하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하는 입장인 플로나로선 그저 눈물만 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소란으로 다 잡은 새를 또다시 놓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냔 말이다. 마스터에게 혼나는 건 당연했고, 언제나 저희 레라인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멍청한 재버위크가 비웃을 꼴이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하지만 새의 존재를 박민후에게 섣불리 말할 수도 없는 처지인 플로나는 그저 박민후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었다. 물론 택도 없는 짓이었다. 잡힌 옷을 벗고 도망치면 모르겠으나 그러지도 못했다.

뭉쳐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하는 박민후는 제 손에 잡힌 남자가 난리를 치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차이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잔뜩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된 플로나는 빠르게 방음 마법을 박민후와 저에게 씌우고 소리를 힘껏 질러댔다.

“박민후! 아. 좀 멈춰 봐, 이 개자식아!”

“이름 부르지 마라. 아가리 찢기기 싫으면. 아니면 더 개같이 굴어 줄까?”

“놓으라니까!? 내 발로 간다고!!!”

“뭘 귀찮게 네 발로 가냐, 내가 손수 배달해 주잖아. 편하고 얼마나 좋냐?”

“안 좋아!”

그들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투덕거려도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은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뭐, 소매치기나 사기꾼이 운 나쁘게 현장에서 붙잡힌 거겠지. 이곳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다 망했다. 다 망했어!

귀여운 테디 베어와 함께 임무에 온 것까진 좋았다. 플로나 정도 되는 자가 어째서 이런 사람 찾는 임무에 차출되었냐 하면, 첫째 ‘새’가 도망친 곳이 하필이면 사람 많고 탈도 많은 블랙마켓인 게 이유요, 둘째 플로나가 세계에 몇 없는 ‘분석 스킬’ 소유자라는 게 이유였다.

블랙마켓은 쓸데없이 드넓었고, 인간도 개미만큼 많아서 하는 수 없이 테디와 나눠서 찾아보던 중이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수백 명을 관찰했을까? 겨우겨우 개중에 딱 한 명 부하들에게 보고받은 능력과 일치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발견했다. 새의 상징인 새하얀 로브 대신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시커먼 새 가면을 쓴 자. 새의 다른 동료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발견한 게 한 명뿐이니 저놈만이라도 꼭 잡아야 했다.

그렇기에 발견 즉시 곧바로 멀리 떨어져 상황을 보고 있던 테디에게 연락을 취했다. 인이어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가 참 귀여웠지. 새가 저희를 발견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새가 무슨 목적으로 블랙마켓에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상상도 못 할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게 분명했다. 이곳은 음지였다. 바깥세상과는 차단되어 있고, 쓸데없이 사람이 많았다.

물론 플로나 자신은 그런 인명 피해 따위 신경도 안 쓰지만, 저의 테디 베어는 너무나 정의로운 영웅이라…. 굳이 사서 고생을 하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뭔가 벌어진다면 제아무리 플로나라도 막을 수 없단 뜻이었다. 그는 반드시 사건에 끼어들겠지. 귀여운 테디, 조금만 이기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물론 그 고지식함이 그의 매력이지만.

속전속결. 플로나는 새가 눈치채기 전에 새가 향하는 목적지를 예상해, 양쪽에서 새를 몰아 사냥을 하자는 단순하지만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다. 인파에 숨어들어 조심스럽게 정해진 위치로 향하던 중이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계획대로 일이 잘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하필이면 가는 길목에 박민후가 떡하니 있을 게 뭐란 말인가. 불쌍한 플로나~!

다 깨져서 보이지 않는 상태창은 절대 흔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저같이 등급이 높은 자가 분석 스킬을 사용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랬다. 이런 상태창을 가진 자는 플로나가 알기론 이 세계에서 박민후, 한 사람뿐이었다. 제가 분석할 수 없는, 인간의 기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 그렇기에 플로나는 다 깨진 상태창을 보자마자 이 임무가 실패로 돌아갈 거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대체 왜 그가 여기 있냔 말이다. 박민후가 블랙마켓에 올 일이 대체 뭐가 있지? 여기에 그가 탐낼 만한 게 있기라도 한가? 부와 명예를 다 가진 그에게 필요한 게 있던가? 혹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라도 숨겨져 있는 건가? 아니면 설마…. 박민후가 새에 대해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플로나의 머리가 최악의 과정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박민후의 의해 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을 피해 좁다란 골목을 지나, 인적이 드문 길목까지 간 박민후는 주변을 한차례 훑더니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높은 곳에 갈 생각이었다. 이수현이 저와의 약속을 지켜 시계탑으로 향했다면 높은 곳에서 찾는 게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벽과 벽을 발로 차며 건물 옥상에 올라선 박민후는 한 손에 들려 있던 플로나를 집어 던졌다. 꼴에 헌터라고 공중에서 멋지게 한 바퀴 돌아 바닥에 착지한 플로나는 꼴사납게 엎어지는 꼴은 면했다. 겨우 두 발로 땅에선 플로나는 박민후 덕분에 엉망으로 해져 버린 로브를 탈탈 털며 입을 삐죽였다. 부디 귀여운 테디 베어가 제가 없어도 혼자서 일을 잘 해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워, 워. 우리 말로 하자. 그 주먹 내려놔. 응?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원래 말보다 주먹이 빠른 법이지.”

로브 속에서 박민후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자기애가 충만한 플로나는 저 흉포한 손이 자신의 얼굴을 때릴 걸 대비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난 그 말 싫더라. 교양 없잖아.”

“네가 지금 교양 따질 입장인가? 그 꼴로 교양 운운하는 거 존나 웃기지 않냐, 바른대로 불기나 해, 메로나 자식아. 네가 여길 왜 왔어? 내 뒤라도 쫓아온 거냐?”

“난, 내 테디 베어랑 임무 수행 중이었다고! 누굴 네 스토커로 알아?!”

“테디 베어? 아, 차주영 헌터 말하는 건가? 그자도 같이 온 거야?”

“그래, 우리 테디랑 데이트 중이었어! 난 억울해!!”

데이트라니…. 차주영 헌터가 듣고 어이가 없어서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지겠다.

“억울하긴. 네놈이 전적이 있으니까 그런 의심이 드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무슨 5년도 더 된 이야길 다시 꺼내? 그때도 뭐, 내가 널 좋아해서 따라다녔나. 다 마스터가 시켜서 그런 거지.”

“그 잘난 마스터가 또 내 뒤를 쫓으라고 했을지 내가 어떻게 아냐? 게다가 무슨 임무길래 우리 귀하신 마법사님께서 이 더러운 땅굴까지 오신 건지 나는 참 궁금하다? 어디 들어나 보자.”

아무렇지 않게 플로나와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박민후는 이수현의 기척을 쫓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 속에 제 그림자를 넣어 놨으니 사실 찾는 건 간단했다. 다행히도 약속대로 행동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안심이고…. 문제는 이놈이었다. 일부러 시계탑이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 귀찮은 놈에게 이수현의 존재를 들키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어랑 아아무 관계도 없어! 그냥 테러범 잡으러 온 거니까. 신경 끄고 네 갈 길이나 가! 그리고 나도 참 궁금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천하의 박민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뭘 살 게 있다고 오셨나?”

“그건 네가 알 거 없지.”

그렇게 말하면서 박민후는 시계탑을 쳐다보았다. 저 아래 이수현이 있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저 제멋대로인 남자가 또 어디로 가 버리기 전에 제 옆에 데려와야 하는데 말이지. 정말, 이 상황에 만난 게 플로나라니. 차라리 차주영이었다면 더 편했을까? 아니지, 그놈은 그놈대로 고지식해서 그대로 제 윗선에 보고할 놈이었다.

“그럼 나도 알 거 없다야!”

“아니지, 나는 그래도 되지만 너는 아니지. 너는 바른대로 불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웃는 박민후의 모습에 플로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박민후가 지금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짜증이 날수록 웃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기에 플로나는 괜히 화내는 척 목소리를 높였다. 적당히 깔짝대다가 도망칠 심산이었다.

“너 때문에 놓치면 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여기까지 끌고 어…!?”

쿠구구궁!!!!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세상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놀라고 당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플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저를 쳐다보는 박민후를 쳐다보았다. 이거 어째 느낌이 싸했다. 그는 서둘러 차주영에게 연락을 취했다.

“테디?”

-치지직….

“주영아?”

그러나 인이어에서는 치지직 하는 전파 소리만이 들릴 뿐, 차주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플로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박민후의 시선을 피했다. 차주영과 연락이 끊겼다. 아, 이 새대가리들이 결국 일을 치고 말았구나!

거세게 흔들리던 땅은 언제 흔들렸냐는 듯, 곧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 지진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헌터 혹은 각성자들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판단은 빨랐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땅속이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진이 계속 발생한다면? 그대로 매몰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판단을 내린 사람들은 빠르게 대피하기 시작했다. 장사치들은 서둘러 물건을 정리하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블랙마켓의 입구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아수라장이 된 블랙마켓의 거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박민후였다.

“이 지진. 네가 찾는 놈의 소행인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으음, 글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하!”

박민후는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수현의 기척을 찾았으나 어째선지 그는 아직도 시계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안 도망치고 저기서 뭘 하는 거야? 가뜩이나 종잇장 같은 게…! 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플로나가 문제였다. 이놈을 빨리 치워 버려야 하는데. 이수현은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메로나, 차주영 헌터랑 연락은?”

“음, 안 되네. 죽었나…?”

“그럼 시체 치우러…”

꺼지라고 막, 말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불길한 사이렌 소리가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소리였다. 재난 문자가 도착하면 이래 그랬듯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였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던 사람들은 굳이 휴대폰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이변의 시작이었다.

대기를 뒤흔드는 불길한 기운이 시계탑 광장 한가운데에서부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명 같은 듣기 싫은 소리가 공기를 뚫고 세상에 울려 퍼지고, 곧이어 시계탑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보나 저리로 보나.

던전 게이트의 출현이었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숨을 집어삼켰다. 이 자리에 나타난 게이트가 너무나 불길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생한 게이트는 뭔가 이상했다. 저렇게 피 묻은 것처럼 검붉은 게이트를 플로나는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붉은색 게이트는 흔했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즈음이면 게이트는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색도 색이지만 전해져 오는 기운이 불길하기 짝이 없어, 절로 피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던 플로나는 제 목을 향해 다가오는 손을 한 박자 늦게 눈치챘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박민후에게 목이 붙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옥상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커억!”

플로나의 목을 부러뜨릴 생각으로 땅에 처박던 박민후가 소리쳤다.

“테러가 던전 게이트를 말하는 거였어?”

플로나를 내려다보는 박민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플로나 메스윈. 지금 사태를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하나 그 말과는 다르게 박민후의 시선은 더 이상 플로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게이트를 향해 있었다. 박민후는 더 이상 플로나와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로브의 가려진 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게이트가 나타나자마자 이수현의 기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박민후는 저 게이트를 알고 있었다.

열여덟 살 가을, 그를 집어삼켰던 그 게이트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게이트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맞춰 박민후의 그림자가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플로나는 똑똑히 보았다. 박민후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타르 같기도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그의 몸에서 툭툭 떨어져 내렸고, 그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그에게서부터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비명 같기도 했다.

도망가야 한다고 본능이 소리쳤다. 식은땀으로 인해 등 뒤가 축축했다. 바닥을 짚은 손이 덜덜 떨렸다. 압도적인 공포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평소와 무언가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따금 그는 짜증 나거나 화가 날 때면 이렇게 짐승의 모습을 하긴 했었다. 때때로 그건 장난이기도 했고, 도주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본 어떤 모습도 이렇게 징그럽지는 않았다. 이렇게 두려움에 몸이 묶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지금의 박민후의 상태는 확실히 이상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어느 순간 그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그의 그림자가 기어코 박민후 본인을 집어삼켰다. 박민후를 집어삼킨 그림자는 점점 덩치를 불려 나가더니 순식간에 집채만 한 짐승의 형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의 내면에 숨어 있던 괴물이 기어이 고개를 비집고 세상에 나오려 하고 있었다.

……!!!

짐승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흉흉한 울음소리였으나, 옆에서 듣던 플로나는 그것이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소리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 박민후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박민후가 옥상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 충격으로 가뜩이나 아슬아슬했던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플로나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말이다. 뒤에서 짧게 플로나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박민후의 신경은 온통 시계탑 앞에 나타난 핏빛 게이트에 꽂혀 있었다.

그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그가 지나친 곳의 존재했던 모든 발광석들이 일제히 터져나가 그의 뒤를 어둠으로 잠식했다. 그것은 흡사 어둠을 몰고 나타난 괴물과도 같았다. 사납게 울부짖으며 순식간에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한 마리의 괴물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저 괴물을 안다.

그렇기에 두렵고 또 경이로웠다.

***

“쿨럭, 어우…. 아파라.”

무너진 잔해 속에서 플로나는 피를 흘리며 늘어져 있었다. 아오, 망할 박민후.

“[라이트]”

어둠에 물든 주변을 밝히며, 플로나는 몸을 일으켰다. 제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박민후의 괴력을 감당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부러진 팔을 붙들고서 다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때마침 박민후가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핏빛으로 빛나던 던전 게이트가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치 불길했던 기운 또한 함께 사라졌다. 마치 다른 게이트로 바뀐 것처럼….

“역시 새들은 5년 전처럼 인위적으로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려고 한 건가….”

가만히 게이트를 살피던 플로나는 결단을 내렸다.

미안합니다, 마스터.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제 목숨이 더 소중한 거 아니겠어요? 참고로 전 마스터의 결정을 반대하던 인간이랍니다. 박민후도 알 건 알아야죠. 플로나는 씩 웃고는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어디, 테디가 살아 있나 확인해 보러 가 볼까나. [텔레포트]”

2권에서 이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