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꼬이고 꼬인다. (6/18)

5. 꼬이고 꼬인다.

그가 이동하는 찰나 동안 나는 또다시 그의 심연을 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집채만 한 검은 짐승이 몸을 웅크린 채 존재했다. 희미한 기억 속에 손을 들어 그 짐승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던 것도 같다. 그에 느리게 열리는 그 샛노란 눈이 나는 썩 맘에 들었었다.

결론만 말하면 나는 결국 그날 떡볶이를 먹지 못했다. 내가 박민후에게 둘러업힌 채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쯤 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다행히도 그가 아파트 문으로 들어왔기에 집이 부서지는 상황은 면했다. 그의 어깨에서 내려와 허우적거리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세 번 실패했나? 너무 졸려서 눈이 제대로 떠지질 않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를 침대에 던져 놓은 박민후가 한숨을 쉰 것도 같았지만 몰려오는 수마를 버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졸린지 모르겠다. 배가 고팠지만 지금은 식욕보단 잠이 먼저였다. 나는 그렇게 잠들었다.

***

어두운 방 안에서 박민후는 잠이 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정신을 못 차리던 그를 하는 수 없이 대신 집어 던지듯 침대에 눕혀주었다. 침대에 눕기 무섭게 남자는 거의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

“하여간…. 약해 빠져서.”

이 남자가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평소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 헝클어져 반듯한 이마가 훤히 보였다. 겉모습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을 텐데….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팔을 슬쩍 잡았다. 살이 없어 굵은 뼈가 잡히는 팔은 어째 ‘톡’ 치면 ‘툭’ 하고 부러질 것만 같았다. 겉모습으로는 쉽사리 눈치채기 어렵지만 이렇게 만지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몸의 경도가 한없이 약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해.’

자신이 살짝만 힘을 주어도 손안의 팔은 바스러지겠지. 아무리 일반인이라도 이렇게 약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자의 몸은 약해 빠졌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이 남자가 마나에 의해 보호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그 때문에 이렇게 죽은 듯이 잠든 걸 테고.

박민후가 사용하는 ‘그림자 이동’ 스킬은 간단한 원리만 설명하자면, 시전자의 마나와 공기 중에 흐르는 마나를 사용해서 그림자 안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었다. 자신과 붙어 있었으니 이 남자에게도 같이 능력이 써진 걸 테지만…. 기본적인 마나조차 몸에 없는 남자에게 그 과정은 육체적으로 굉장한 피로감을 주었겠지.

이 세상에 공기와 같이 존재하는 마나는 사람의 몸을 보호하고, 능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보호에서 배제된 존재가 어떤 식으로 부담을 지게 될지, 알 수 없으나 다음 날 일어나면 이 남자는 근육통에 시달릴지도 몰랐다. 물론 거기까지는 그가 알 바 아니지만.

굵은 뼈대가 느껴지는 팔을 주물럭거렸다. 자신이 살짝 만진 것만으로 금세 빨개지는 게 참 신기했다. 이빨로 물면 바로 상처가 나려나…. 문득 남자의 등짝에 발톱이 파고들었던 감각을 기억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알맞지 않은 몸이었다. 어린아이보다 약하디약한 몸으로 여태 잘도 돌아다녔다 싶었다.

‘마나는 신의 축복이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최악의 날’에 세상을 밝은 빛으로 물들인 신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내린 축복 중의 하나라고 말이다. 불가사의한 힘들은 모두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를 벗어난 모든 것을 ‘신이 그랬다.’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 속에서 사람들은 신이란 존재를 믿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각성자들은 신에게 직접 축복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신이 선택한 자들’ 어느 순간부터 인식된 이 생각은 후대에도 전해져 이제는 아주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져 왔다.

그렇기에 박민후는 제일 처음 이 남자에게서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을 때 그가 신에게 버림받은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었다. 그도 아니면 그에 준하는 저주를 받았거나. 몸에 마나가 없다니…. 헌터였다면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의 큰일이었다.

던전을 돌던 중에 저주를 받아서 마나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이따금 잊을 만하면 나타났었다. 마나 회복을 봉인하는 저주라거나 마나를 강제로 0으로 만드는 저주 같은 게 있었는데 대개는 던전에서 발견한 신전에서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 신이 노해 벌을 내렸을 때 그런 저주를 받았었다.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긴 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러나 박민후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처음부터 마나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주라면 좋든 싫든 알려졌을 텐데 일반인이라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저주를 받은 거지? 보통이라면 무서워서라도 집에 틀어박히거나 협회에 도움을 청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남자의 성격이 그 모양이니 저주라고 해도 신경을 안 쓰고 나돌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쪽이 더 말이 됐고 이해가 갔다.

뭐 이거에 관해서는 차차 물어보도록 할까. 어느새 자신의 손 모양대로 벌겋게 손자국이 난 팔을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옆에 있으려면 힘 조절을 좀 해야겠네.

“……?”

박민후는 방금 자신이 한 생각에 제풀에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한 생각에 박민후는 소름이 돋았다. 힘 조절을 하겠다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이? 이 박민후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잠을 안 자서 맛이 갔군.”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잠을 며칠째 안 자서 그런 걸 테다. 그래서 그런 걸 거야.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지. 남을 위한다는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제였더라 될 대로 되라고 모든 걸 포기했을 때였나, 아니면 그 전이었나.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조심하자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이제 와서, 정말 이제 와서….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잠든 얼굴이 참 부러웠다.

“팔자 좋네.”

남자의 고운 이마를 툭 쳤다. 아팠는지 찡그리는 걸 보고 피식 웃었다. 좋겠다. 그런 마인드로 살 수 있어서.

열여덟 살,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 악몽을 꾸지 않는 밤이 없었다. 한때 잠드는 게 무서웠던 시절이 있었다. 잠이 들면 언제나 눈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기를 몇 번, 일부러 잠을 참고 또 참아서 죽은 듯이 잠들기를 몇 번. 어느 순간 짧은 수면조차 제대로 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다 박민후는 침대 아래에 앉아 등을 기댔다. 어두운 적막 속에서 이따금 등 뒤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걸 가만 듣고 있자니 졸음이 왔다. 문제라면 이 작은 원룸에는 침대 말고는 딱히 잠을 청할 곳이 없었다는 거였다. 소파도 없었고, 침대에서 같이 자기에는 싱글 베드에는 자리가 없었다. 물론 같이 잘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침대 아래에 드러눕기로 했다. 낯선 천장을 쳐다보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눈을 감았다.

조금은 잘 수 있겠지.

***

스르륵 감겨 있던 눈이 떠졌다. 멍한 정신 속에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7시’ 시간을 보아하니 또 알림이 울리기도 전에 깼나 보다.

일어나기 싫었으나 일어나야 했다. 베개에 얼굴을 박고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일단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세수하고, 씻고, 밥을 먹고…. 아, 먹을 게 없던가. 편의점에 가야겠다. 그리고, 그리고… 겨우겨우 팔로 몸을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으나, 곧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다시 털썩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뭐야.”

온몸이 쑤셨다. 어제 내가 자다가 어디 구르기라도 한 건가? 이상할 정도로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이상하다? 무리한 기억은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기적거리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세수라도 하면 정신이 좀 들겠지. 그런데 그 순간 바닥에 있던 뭔가를 밟고 앞으로 엎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원래부터 쑤시던 몸에 가해지는 큰 충격은 말도 못 하게 아팠다. 절로 앓는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잠이 확 깼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 하고 눈을 깜빡였다. 뭐야, 뭘 밟은 거지? 내가 깔아뭉갠 게 뭔지 알 수 없어서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넘어진 충격으로 인해 골이 울렸다. 눈에 초점이 잘 안 맞아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흐릿한 시야에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초점이 안 맞는 눈으로 잠시 그걸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그 검은 게 사람이란 걸 겨우 인식했다. 아니 이놈이 왜 여기 있어?

“하암, 발밑 좀 보고 다녀. 갑자기 왜 자는 사람을 밟아?”

막 잠에서 깬 건지 누워 있던 박민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그의 몸에 걸쳐져 있던 내 다리를 그가 보길래 얼른 발을 치웠다. 감히 제 몸에 발을 올렸다고 발이라도 부러뜨리는 거 아냐? 내가 아침부터 이놈 얼굴을 봐야 한다니…. 방금 부딪힌 머리가 아파 인상을 쓴 건지 그도 아님 골치가 아파 인상이 써지는 건지 구분되지 않았으나 절로 인상이 써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누가 바닥에 누워 있으랬나.”

자다 일어나 잠겨 있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누가 바닥에 있을 거라고 내가 생각이라도 했겠냐고, 본인이 멋대로 드러누워 있어서 밟힌 주제에 웃기고 있어?

“집이 더럽게 작아서 내가 잘 곳이 없으니까 그런 거잖아!”

“내가 언제 우리 집에서 자라고 했나, 좁으면 그 넓은 집으로 가면 될 것이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순간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절로 곡소리가 나올 뻔했으나 이를 악물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걸 입 밖으로 내고 싶진 않았다.

갑작스럽게 생긴 근육통 때문에 온몸이 아픈데 바닥에 들이박았더니 이젠 머리도 아팠다. 지금 보니 팔목에도 웬 멍이 시퍼렇게 들었고, 넘어진 다리도 그랬다. 아, 얼굴에도 멍이 든 거 아냐? 아직도 욱신거리는데…. 지금은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멍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집에 파스가 있던가? 뻐근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본인 집으로 안 가고, 그쪽 집에 가서 잠이나 자요. 넓고 좋던데!”

“어제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냐? 확실해질 때까지. 네 옆에서 지켜볼 거라고 했잖아!”

“그게 우리 집에서 자는 거랑 뭔 상관인데요? 그 잘나신 이상한 느낌이 우리 집에서 자야 한다고 하기라도 했나 봐요?”

“야, 내가 장난하는 거 같아?”

자다 깨서 당한 봉변도 짜증 나고, 온몸이 아픈 것도 신경질 나는데, 눈앞의 주인공 놈이 자꾸 화를 돋우니 점점 좋은 말이 안 나왔다. 원래부터 아침에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터라 잠시간 혼자 기분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정말 오랜만에 짜증이 났다. 자기가 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죽이기밖에 더 해?

“저도 묻죠. 제가 장난하는 거 같아요?”

“어, 존나 장난치는 거 같아. 그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 존나 짜증 나! 내가 한 말이 진짜 개소리 같은 건 나도 아는데, 나한텐 중요하다고 했잖아, 내가 본 네 성격상 내가 네 옆에 어슬렁거리든 말든 아무래도 좋을 것처럼 굴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왜 그래?”

잘 아네. 그쪽이 이 세계 주인공만 아니면 신경도 안 썼어. 어슬렁거리든 말든 지나가다 차에 치이든 괴물한테 잡아먹히든 신경도 안 썼다고.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그쪽이랑 엮이기 싫어서 그런다고 생각은 안 하나 봐요? 이봐요, 박민후 헌터. 당신이랑 엮여서 좋아질 게 뭐가 있겠어요. 좋은 머리 뒀다 뭐 해요? 난 평범하디평범한 일반인. 당신은 적도 많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헌터. 딱 봐도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나?”

딱 봐도 시궁창이잖아.

“내가 왜 손해 볼 짓을 자처해서 하겠어요.”

“…일리 있네. 시발.”

자기도 인정은 하는지 박민후가 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심 이대로 집에나 가 버리길 바라는데 오히려 그는 내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허?

“아, 몰라. 피해 생기면 피해 보상 청구하든가!”

“거긴 왜 올라가요.”

“더 잘 거야! 잘 자는데 네가 깨웠잖아!”

착실하게 이불까지 덮고 저를 등지고 드러누운 박민후를 보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 예. 처주무세요.”

별 미친놈을 다 봤네. 청구하라면 못 할 줄 알고. 나는 그에게 청구할 정신적 피해 보상과 육체적 피해 보상을 계산하며 씻으러 들어갔다. 내가 씻고 다시 나왔을 때 그는 진짜로 잠들어 있었다. 누구보고 팔자 좋다는 거야.

은행에 가기 위해 나오자마자 나는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처음부터 택시를 타고 가면 될 일이었다. 어제 지도를 찾아봤을 때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라 걸어가면 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택시를 탔으면 그런 일도 안 생겼을 텐데. 은행까지 가는 기본요금이 아깝다고 또 걸어가기엔 어제의 일이 반복될 것만 같았다.

어제 갔던 은행으로 가려는 택시 기사에게 다른 은행으로 가 달라고 했다. 잠시간 의아해하던 택시 기사는 마침 뭔가 떠올랐는지 알았다며 차를 몰았다. 어제 벌어진 사건이 이미 여기저기 알려졌는지, 기사 아저씨가 주절주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헌터들이 인질들을 풀어 주고 제압된… 아무리 봐도 사실 그대로 알릴 순 없으니 순화된 거 같다. 하여튼 그렇게 범인들을 체포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사건을 해결한 헌터의 이름이 박민후라며 택시 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박민후에 대한 찬양을 하기 시작했다.

박민후를 잘 모르는 대부분에 일반인들에게 그는 그저 용감한 ‘영웅’에 지나지 않았다. 동경의 대상이며 우상이었다. 이건 박민후의 이미지를 위해 헌터 협회와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마케팅한 결과였다.

그는 좋은 헌터였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라면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어제의 사건을 해결한 박민후의 이미지가 더 좋아지는 거겠지. 뉴스나 기사들이 내용을 순화한 것도 한몫할 테고. 물론 그때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이 후에 인터넷에 경험담을 올릴 수도 있고, 주변에 말을 퍼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로 쉽게 무너질 명성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세계를 구한 영웅이지 않은가. 뭐, 대부분의 높은 등급의 헌터들이 성질이 더럽기도 하고, 또라이도 많아서 그냥저냥 넘어가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면전에서 박민후를 찬양하는 걸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기분이 묘했다. 아마 지금도 내 침대에서 자고 있을 안하무인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모습이 떠올랐다.

뭐, 때로는 모르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해 주지 않자 머쓱해진 모양인지 택시 기사는 슬쩍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택시는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심은 오늘도 여전히 평화로웠다. 평화롭네. 몬스터라느니 각성자라느니 그런 게 없는 원래 내가 살던 세상 같았다.

가까운 거리인지라 은행에는 금방 도착했다. 돈만 잘 받고 카페를 가든가 해야겠어. 어제부터 먹은 게 없다 보니 위가 아팠다. 은행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박민후를 피해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게 실수였다. 불행히도 아직 은행은 영업 시간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아침을 먼저 해결하러 가기로 했다. 큰길에 있는 은행이다 보니 주변에 카페는 많았다. 은행 맞은편에 있는 카페가 마침 불이 켜져 있어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딸랑.

막 영업 준비가 끝난 카페는 적막했다. 카운터로 다가가 간단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베이글을 하나를 주문하고서 나는 카페 안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요즘엔 패드가 더 좋다던데…. 이참에 바꿀까 싶기도 했다. 전원이 켜지길 기다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 이곳에서 대충 시간을 보내고 나가면 되겠지.

타닥타닥.

타자 치는 소리가 고요한 매장 안을 울렸다. 이참에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알아볼 것도 있었다. 박민후 말대로라면 이곳은 이미 완결이 난 세상이었다. 그거 하난 다행인데. 완결이 났다면 왜 아직도 각성자나 던전이 존재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이런 현대 판타지 소설들은 완결 후에는 반드시 던전이 사라지면서 힘도 같이 사라지지 않던가? 그런데 이곳은 각성자도 던전도 버젓이 존재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그리고 내가 볼 때 그 평화에는 어딘지 이질감이 있었다.

좋든 싫든 박민후와 엮이게 된 이상 정보가 필요했다. 모두가 아는 일을 나 혼자만 모른다면, 그건 여러모로 불편했고, 또 의심을 사기 쉬웠으니까.

나는 정말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처음 소설 속에 들어왔을 때는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살아가는 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제부로 그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다는 아니더라도 후반부의 이야기를 조금은 알아 둬야 했다. 몰랐기에 일이 이렇게 꼬였지 않은가. 정말 최악이다. 무지는 죄라더니….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터라 박민후의 얼굴도 못 알아봤고, 이 세계가 이미 구해진 뒤라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꼬였다. 만나기조차 싫은 사람과 제대로 엮여 버린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나는 빠르게 포기했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였다.

일단은 박민후와 관련된 사건과 그 외에 일반인에게도 알려진 일들을 알아야 했다. 많이는 필요 없었다. 어느 정도. 그래, 일반인도 아는 정도가 딱 좋았다. 박민후 몰래 알아봐야 해서 이렇게 노트북까지 챙겨 나온 거다. 원래라면 집에서 마음 편하게 했을 테지만…. 집에 있는 불청객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앞날이 캄캄했다. 평화로운 일상이 자신을 버리고 저 멀리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이건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인공은 왜 쓸데없이 엑스트라에게 관심을 가질까? 빌어먹을 세계의 흐름은 나를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써먹을 생각이 아닌 건가? 그런 생각이 마구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마침 울린 진동 벨을 쥐고 카운터에서 주문한 것들을 받아 왔다.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잘 구워진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듬뿍 발랐다. 베이글을 입에 물고 인터넷 창을 켰다. 박민후만 아니었다면 이 고생을 할 일도 없을 텐데…! 부디 그가 내가 집에 갈 즈음엔 알아서 사라졌기를 바랄 뿐이다.

머리로는 그를 욕하며, 손가락으로는 세계 종말에 관한 기사를 찾아봤다. 아무래도 세계가 끝날 뻔한 일인지라 그에 관련된 기사는 찾기 쉬웠다. 그중에 몇 개를 찾아 읽어 봤다.

「세계를 구한 영웅, 그의 이름은 ‘박민후’」

내용은 쓸데없이 길었고, 박민후의 활약과 그에 대해 찬양하는 글이 절반 이상이었다. 그걸 일일이 읽기에는 머리가 아파 대충 훑어 넘겼다. 저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나고 난 뒤의 결과만이 중요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노트북 화면을 보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새 식어 버린 베이글을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요점만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세상은 다시 한 번 지옥으로 변했다. ‘제2의 최악의 날’이 도래한 것이다. 제일 처음엔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

한 번에 수백 개가 넘는 던전이 터지자 그야말로 세상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사람들은 여태까지 쭉 이어져 온 평화로운 일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처가 늦었고, 전 세계에 계속해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막을 헌터들은 한없이 부족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버릴 곳은 버리고 지킬 곳은 지키면서 싸웠다. 그럼에도 끝도 없이 밀려 나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세상은 점차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뒤에는 그들이 알던 몬스터들보다 한 단계 더 위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괴물들이 출현했고, 그런 그들을 지휘하는 정체불명의 것들이 나타났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었다. 이계의 존재쯤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그에 맞서 많은 헌터가 죽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세상은 왜 이렇게 됐는지 이유도 모른 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박민후가 나섰다. 그의 등장은 정말 한 편의 소설 같았고, 한 편의 신화 같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이 세계의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맞는 말이지. 그의 힘은 그 시절에 이미 인간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그의 압도적인 힘도 힘이었지만, 먹구름 속에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새하얀 빛이 그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본 순간. 사람들은 그가 신이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 준 ‘신의 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이 부분을 보고 실소했다. 그렇게 그는 정체불명의 것들을 차례차례 물리치고, 어느 순간 세상을 구했다. 정말 소설다운 결말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그때 하늘에서 신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세상의 던전과 몬스터를 없애 주겠다고, 그 말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말 끝이구나. 모든 게 끝이 났구나! 세상은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구나! 그러나 신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신 각성자들의 힘도 사라질 것이며, 그들이 여태 연구하고 발전시킨 마나와 마석, 몬스터의 부산물 등, 그 모든 게 사라질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갈등했다. 이미 인류는 그것들의 편함을 맛본 뒤였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그 모든 걸 가져가면, 아무것도 없는 저희는 이 죽어 가는 땅에 맨몸으로 남아야 했다. 그건 그냥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제 한숨 돌리자 인간은 탐욕스러워졌다. 힘이 필요했고, 물자가 필요했다. 이미 모든 게 각성자, 몬스터의 부산물, 마석, 마나로 굴러가는 세상이었다. 그 모든 게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신에게 부탁했다. 애원했다. 저희는 던전이 필요하다고, 저희를 버리지 말라고, 준 것을 빼앗지 말라고. 바보 같은 선택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선택했다.

그 결과가 이 거짓된 평화였다.

“완전 미친놈들 아냐?”

그래도 그렇지. 던전을 그대로 둬? 자신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런 세상에 오게 됐다니 정말 한숨만 나왔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걸 쓴 작가가 성악설 지지자일 때부터 이미 알아봤어. 이게 바로 욕망에 찌든 인간의 결말이다. 그래 거짓된 평화도 평화지, 암. 고개를 끄덕이다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넘어 있었다. 시간도 됐겠다, 은행에 가야겠다. 남은 커피를 손에 들고 뒷정리를 한 후에 카페를 나섰다.

문득 ‘박민후도 그걸 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다 사라졌다.

***

박민후는 정말로 오랜만에 악몽이 아닌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저와 다른 한 사람이 존재했는데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고운 손만이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제게 다가오는 손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그것을 집어삼키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참았다, 아니, 참아야 했다. 참지 않으면 저 손이 제게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자신의 노력을 알아준 것인지 체온이 낮은 손이 자신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게 간지러워 코를 찡긋거리자 손이 물러났다. 그게 참 아쉽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주둥이를 들이밀자 손이 다시 한 번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손이 그의 눈 주변을 매만졌다. 부드럽게 한 번 쓰다듬더니 건반을 치듯 톡톡 치고 멀어졌다. 멀어지는 손길이 다시 아쉬워 그 손가락을 향해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코앞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한 번만 더….

징징.

오랜만에 푹 잠들었던 박민후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진동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무시하면 멈추겠지 하고 다시 눈을 감았으나 진동은 끊기질 않았다. 그게 짜증 나 하는 수 없이 인상을 쓰며 전화를 받았다. 누구에게 온 건지 발신자 확인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몇 없기에 박민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왜는 왜야, 지금 대체 어디야?!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큰 목소리 덕에 박민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집?”

-이봐요, 박민후 씨? 내가 지금 너희 집이거든요? 집에 있긴 개뿔이! 집 안 꼴은 또 왜 이래?

“아, 마침 잘됐네. 그거 좀 치워 주라.”

-내가 왜?!

“네가 복구팀이니까? 주어진 업무에 힘내 주십시오, 강유람 헌터.”

-난 몬스터가 파괴한 것만 고치거든요~? 이건 네가 직접 해, 돈도 많은 놈이!

“아, 진짜. 너 목청 너무 크다고 매번 말하지 않았냐? 소리 좀 줄여. 골 울려…. 그리고 따지면 나도 괴물이니까 몬스터로 분류되지 않나?”

-…장난해?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랬지!!

박민후는 강유람의 말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의외로 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박고 조금 더 미적거리고 싶었으나,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잠기운은 이미 오래전에 날아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느리게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뻗친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조용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집에 없나?

귀에서 멀찍이 떨어뜨린 휴대폰에서는 강유람이 여전히 열을 내고 있었다. 그걸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는 박민후를 좋아하는 몇 안 되는 헌터 중 한 사람이며, 또한 박민후와 서로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때, 두 사람은 어쩌면 연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단지 세계를 구한 직후부터 박민후는 강유람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건 강유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마주치고 엮인 것이 마치 누군가의 소행이었던 것처럼.

그때서야 박민후는 그러한 감정 또한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얼마나 허탈하고 개 같았는지 모른다. 그 뒤 두 사람은 그저 서로 투덕거리는 친구 사이로 자리 잡았다. 물론 선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아무리 강유람이 그와 친근하다 해도 강유람 또한 박민후의 선 밖에 존재였다.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네가 사고치고 또 사라지니까 전화했지. 헌터 협회에서 그 난리를 친 것도 모자라서 은행까지 뒤집어 놓고!

“말은 바로 해야지. 협회는 그놈들이 먼저 개소리해서 그런 거고, 은행 건은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강도 잡았으면 됐지.”

-강도들이 감방에 갇히기도 전에 병원에서 살아나올 수 있을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그리고 어제 데리고 간 일반인은 또 누구야? 누누이 말했잖아, 일반인은 건들지 말라니까?!

“안 건드렸어…. 그냥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 볼일이 있어서 같이 간 거고.”

-정말이지? 또 어디다 묻어 놓고 모른 척하는 거 아냐?

“아니거든?”

-그럼 됐어. 그래서 너 진짜 어디야?

“친구 집.”

-너 친구 없잖아.

“얘가 뼈 때리네.”

박민후가 너무하다는 듯 목소리를 애처롭게 만들었으나 강유람은 코웃음 쳤다.

-바른대로 불어. 또 이상한 사고 치지 말고.

“이번엔 결백해, 그냥 어디 와 있어. 자세히 알 거 없고, 쓸데없이 찾지도 마. 그리고 던전 청소는 이제 나 없어도 상관없잖아.”

-…그렇긴 해. 나도 그렇다고 말했는데 윗선에서 하도 지랄 지랄 해서 이러는 거지…. 후.

“자기들이 그딴 결정만 안 했어도 이 고생도 안 했을 텐데 안 그러냐?”

-거기에 할 말이 없다. 나도 그딴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진짜 싫은데 이해는 가거든. 너도 그렇잖아.

“…그래, 이해는 가. 누가 이해 안 된다 그랬어? 그냥 내가 기절한 사이에 그런 식으로 결정된 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거지.”

-…….

정말이지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세계를 구한 뒤 신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자신은 한 달가량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한참 만에 눈을 떴을 때 창밖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어느 정도 원상 복구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아, 모든 게 끝났구나 하고 안심했었다. 눈앞에 상태창이 다시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뭔가 잘못되었다 생각했을 때는 이미 한참은 늦은 뒤였다. 때마침 제가 입원한 병실에 찾아온 강유람을 붙잡고 절규하듯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그에 강유람은 울면서 사죄했다. 강유람은 자신이 기절한 동안 벌어진 일들을 차근차근 말해 주었다. 그걸 듣는 내내 손이 벌벌 떨렸다. 헛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멍청한 인간들의 선택을 알고 나자 얼마나 허탈하던지.

“강유람,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어? 아, 응. 미안.

“됐어.”

-내가 윗놈들한테 너랑 연락 안 된다고 대충 둘러댈게. 뭐, 안 믿을 거 같긴 한데 자기들도 양심 있으면 넘어가겠지. 이참에 오랜만에 휴가라고 생각하고 쉬다가 와.

“그래, 끊는다.”

오랜만에 이상할 정도로 잠이 잘 왔다. 남자에게 더 잘 거라고 한 말은 사실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정말 이렇게 잠들 줄 몰랐다. 게다가 악몽도 꾸지 않고 오히려 좋은 꿈을 꾼 것 같았으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냥 어렴풋이 나쁘지 않았다는 기분만 떠올랐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잘 자고 일어났더니, 괜히 옛일이나 떠올라 기분만 잡쳤다. 머리를 헤집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인 없는 집을 멋대로 돌아다닌다는 데에서 오는 머쓱함 같은 건 박민후에게 없었다.

제집처럼 돌아다니며 작은 원룸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처음 왔을 때는 돼지우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질러져 있었는데 오늘은 참 깔끔해 돌아다니기 편했다. 그의 집은 생활감이 넘쳐났다. 바닥에 벗어 던져 둔 제 옷이 보였다. 빌려 입어 놓고 이렇게 패대기쳐 놓기냐 싶어 어이가 없었다. 그 외에도 남자가 입었던 옷가지가 바닥에 하나둘 떨어져 있었다.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그 흔적들을 하나둘 주워 가며, 도착한 곳은 욕실이었다. 참, 씻긴 해야겠지. 주운 옷을 대충 빨래 바구니 같은 것에 던져 놓고, 제가 입고 있던 옷도 벗어서 같이 던져 놓았다.

그러다 바로 옆면에 붙어 있는 세면대 거울로 슬쩍 눈이 같다. 참으로 오랜만에 거울을 본 것 같았다. 거울에 비친 몸에는 흉측한 흉터가 가득했다. 이제는 몸에 흉터가 생기지 않기에 지금 있는 흉터들은 모두 과거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새삼 참 흉한 몰골이라고 생각했다. 제 꼴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거울 속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남자는 한없이 피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제 꼴이 우스워 입가에 절로 비웃음이 맺혔다.

역시 자신은 그때 그냥 죽었어야 했다. 주제도 모르고 삶을 갈망했기에 이런 꼴이 되어 버린 거다.

샤워를 하고 맨몸으로 나왔다. 남자는 아직 오지 않았나 보다. 지금이 몇 시지? 해를 보면 12시는 넘은 것도 같은데…. 그의 옷장에서 멋대로 옷을 꺼내 입었다. 키나 덩치 차이가 좀 있다 보니 바지는 짧았고 윗옷은 다른 옷 중에 그나마 큰 듯한 티셔츠를 찾아 입었으나 좀 꼈다. 그러고 나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밥이라도 먹자 싶어 냉장고를 멋대로 열어 보았으나 있는 게 없었다.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았기에 물이나 대충 한 잔 마시고 또다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번호도 모르니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모르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겨우 하루 만난 사이 아닌가. 그의 직업은 뭔지, 나이는 몇인지, 이름은 뭔지 그런 사소한 걸 물어볼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남자가 오면 이름은 알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다 두어 개 골라 가져왔다. 침대맡에 기대어 앉아 하나를 펼쳤다. 딱히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박민후는 남자의 집에 넘쳐나는 생활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이 느긋함이 마음에 들었다. 베란다 너머로 넘어오는 햇빛이 좋았다.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린 적도 있었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박민후는 지금 상황이 참 낯설었다.

***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은행을 나왔다. 슬쩍 휴대폰 화면에 찍힌 액수를 다시 보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당분간 일 안 해도 되겠다! 1등이 아무래도 여러 명이다 보니 쪼개고 쪼개 겨우 내 시중에 들어온 건 17억. 그렇지만 이게 어디인가. 내 평생 이만큼의 돈이 통장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주인공이 곁에 없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이다. 봐라,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는걸! 어제의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무색하게 오늘은 이리도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역시 박민후는 가까이하면 안 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 솔직히 이미 반쯤 포기했다. 연약한 엑스트라가 뭘 하겠는가. 이야기를 바꾸는 건 주인공들이나 가능했다.

돈도 생겼겠다, 당장은 급한 알바도 이곳에는 없고, 그럼 당분간은 이 백수 생활을 열심히 보낼 생각이었다.

그래,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지. 한 번도 가 본 적 없으니 국내든 해외든 어디든 좋았다. 돈이 없을 때야 당장 일자리가 급했지만 당분간 일은 느긋하게 구하면서 여기저기 궁금했던 곳에 가 볼 생각이다. 역시 간단하게 국내 여행이라도 갈까? 제주도를 갈까, 고등학교 때 이후 가 본 적이 없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아니면 서울을 구경해도 좋겠다. 서울에 살지만 제대로 서울을 둘러본 적은 없으니까.

누군가에겐 일상이어도 내게는 여행이 될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과 같으면서도 조금씩 달랐으니까. 다시 한 번 그걸 상기하자 익숙한 도심이 더 다르게 보였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구경할 곳을 찾는다면 무척 많을 것 같다.

각성자들의 역사를 기린 박물관이라거나, 몬스터에 대한 박물관이라거나 헌터들의 무기 판매소나 아이템 판매소 같은 것들. 그런 건 충분히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현대 판타지 소설을 볼 때마다 나도 한 번쯤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 있었다. 주인공들이 새로운 힘을 얻거나, 몰래 아이템을 구할 때 자주 이용하는 곳.

일명 ‘블랙마켓’,

뭐, ‘어둠의 루트’라든가 ‘뒷골목’이라거나 ‘암시장’이라거나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곳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던전에서 구한 다양한 물건들을 팔기도 하고, 또 경매도 하는 곳이었다. 가끔 시중에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나, 혹은 협회에 검증되지 않은 물건들,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판매된다. 의외로 현직 헌터들도 그곳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다들 알면서도 쉬쉬하는 곳이라고 했었다. 협회도 도를 넘지만 않으면 눈감아 주다 보니 점차 몸집을 불려 그 시장 자체가 규모가 무척 크다고 했었지.

요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이 말이다. 물론 위험도 하겠지만…. 살짝만 구경하고 오면 괜찮지 않을까? 그 전에 일단 입구부터 찾아야 하는데…. 한 곳 알고 있기는 했다. 원작에서 초반부에 박민후가 그곳을 통해 간 적이 있으니까. 단지 문제는 지금도 그 입구가 멀쩡히 있냐 하는 건데…. 없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제일 쉬운 방법은 현직 헌터한테 슬쩍 물어보는 건데…. 차주영한테 물어볼까? 아냐, 그 사람은 너무 고지식해서 블랙마켓은 가 본 적도 없을 거야. 그럼 집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놈팡이한테 물어봐야 하나? 그러긴 싫은데. 인터넷에 친다고 나오진 않을 거 같고…. 모로 가도 결론은 박민후구나.

“싫어라….”

***

삑삑삑삑.

삐로리, 철컹!

“어디 갔다 와?”

“아.”

박민후는 이수현이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순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을 던지듯 내려놓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꼴이 퍽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와도 같았지만 그걸 박민후도 이제 막 문을 연 이수현도 알 리 없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수현은 그에 손잡이를 잡은 채 멈칫했다. 당연히 현관 앞에 서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어느새 맞지도 않는 제 옷을 꺼내 입고, 방금까지 바닥에서 뒹굴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 뻗친 머리라거나 옷의 주름 등을 보며, 여기가 그의 집이었나 싶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현관까지 나와 있는 박민후를 보고 의아했다.

그의 성격을 알다 보니 ‘굳이 여기까지 나와 있을 필요가 있나?’ 하고 이수현은 그런 당연한 의문이 들었으나 곧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가볍게 넘겼다. 한차례 생각을 정리한 그다음에야 여태 붙들고 있던 문을 닫고, 신발을 벗으며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있었네요.”

“왜,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어?”

“네.”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좀 해 봐라.”

기분 상했다는 듯한 박민후의 트집에 살짝 고민해 본다는 듯 살짝 뜸을 들이던 이수현은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그건 아니라며 그를 지나치면서 흘러가듯 말했다.

“음, 빈말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여전히 그 특유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는 영혼이 1%도 없었다. 박민후는 이 남자가 멍청하거나, 겁대가리를 상실했거나, 아니면 오늘 죽어도 상관없거나, 시한부라 인생 막 나가는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민후의 개 같은 성격은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했기에 그를 이리 대하는 인간은 몇명의 친우들뿐이었다. 아니면 미디어에서 보여 주는 그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한 일반인들이나. 그의 친우들은 그래도 헌터기라도 했지, 이놈은 헌터도 아닌 게 이리 겁을 상실한 말을 툭툭 하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그래서 박민후는 나름 진지하게 물었다.

“너 혹시 시한부라거나 막 내일 죽는다거나 그래?”

“뭔 개소리야.”

“…그래, 아니구나. 그냥 겁대가리가 사라진 거였네.”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을 힐끗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 박민후는 납득했다.

세상에 나 같은 또라이도 있는데 이런 또라이도 있는 거겠지.

“그래서 어디 갔다 왔냐?”

“은행이요. 누구누구 씨 때문에 어제는 볼일을 못 봐서.”

“내가 뭘? 이건 구해 줘도 난리야!”

“제가 뭘요? 난 박민후 헌터 때문이라고 안 했는데, 뭐 찔리셨나 봐?”

말을 참 뭐같이 하네! 사실 찔리긴 했다. 아무래도 그가 살아온 환경이 그렇다 보니 지레 찔려 이번에도 또 제 탓을 하나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정말 그를 탓한 게 아니었다. 하긴 가만 상황을 생각해 보면 박민후 탓이 아니었다. 정말 그가 지레 찔려 투덜거린 것뿐이었으나, 그래도 저리 말하는 남자가 참 얄미웠다. 그에 앞서 걸어가는 말끔한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저걸 확 때릴 수도 없고…!

저 남자가 보통 사람의 반만이라도 건강했으면 그냥 장난치듯 머리통을 한 대 쳤을 거다. 타박상 정도로 끝날 테니까! 자신의 인벤토리에 안 쓰는 포션이 한가득하니 그걸 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제가 잘못 치면 그냥 죽는 인간이었다. 그런 놈을 어떻게 함부로 치겠는가! 결국 박민후는 그저 입술만 삐죽일 뿐 주먹 쥔 손은 들지도 못했다.

박민후 자신이 평소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상기했다면 이 상황은 참 놀라운 광경이었으나 이 또한 박민후는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는 짧은 복도를 가로질러 가면서 가방을 바닥에 툭 놓고, 겉옷을 바닥에 툭 떨구고, 그렇게 또 허물 벗듯 옷을 하나둘 땅에 떨어뜨리며 옷장으로 다가갔다. 아침에 본 것과 똑같은 모양새가 또 만들어졌다. 인제 보니 저것도 버릇인가 보다. 생긴 건 참 안 그렇게 생겼는데….

“허물 벗어? 뭐 이렇게 벗어 놔?”

한숨을 쉬며 그의 옷가지들을 주워 들었다. 박민후 또한 생긴 거랑 다르게 깔끔한 걸 좋아했다. 그의 집을 생각해 봐라. 있을 것만 딱 있고, 어질러진 것도 없이 깨끗했다. 남자의 옷을 주워 들고 조금 묵직한 듯한 가방은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갈아입을 옷을 꺼내 든 남자는 그런 박민후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둬요. 나중에 치울 거예요.”

“언제?”

“그쪽 가면…?”

“영원히 안 치우겠단 소리로 들리는데.”

그 말에 남자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가 풀어졌다.

“내 집에서 영원히 살 거라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영원히는 아니고 당분간?”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생각을 해 봐, 곁에 있어야 상황 변화를 알기 쉽잖아. 네가 밖에 나올 때마다 따라다니는 것보단 같이 사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

“같이 살아도 내가 나갈 때 따라올 거잖아요?”

“그렇지?”

“그럼 내 집에서까지 피곤하게 같이 살 이유가 없는데.”

“아, 피해 보상금 준다니까? 나 돈 많아. 별로 쓸데가 없어서 모아만 뒀거든. 같이 살면… 이 집, 월세냐?”

“네.”

“대신 내 줄게. 아니면 좀 더 큰 데로 이사해도 되고, 아니면 네가 우리 집으로 와도 되고?”

“그쪽 집은 좀…. 있는 게 없어서.”

“카드 줄 테니까 네가 사서 꾸며.”

“그런 귀찮은 짓은 한 번이면 족해서.”

“아오, 그럼 역시 그냥 여기서 같이 살면 되겠네!!”

“흠, 월세를 대신 내 준다니…. 그것참, 나쁘진 않네요.”

남자가 잠깐 고민하듯 볼을 긁적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던 남자는 제 손에 들린 옷가지들을 뺏어 들고 느긋하게 욕실로 향했다. 잠깐의 물소리가 들린 후에 그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간단하게 씻고 나온 건지 앞머리에 물기가 있었다.

“일단 계약서를 좀 쓸까요.”

“계약서? 뭔 이상한 걸 쓰려고?”

식탁에 올려 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켜던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별건 아니고…. 이 좁은 집에서 서로 불편함 없이 지내려면 필요한 것들이요. 앞에 앉아 봐요.”

식탁 한쪽 의자를 꺼내 앉으며 남자가 앞에 앉기를 권했다. 손은 빠르게 타자를 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말 계약서 내용을 적고 있나 보다. 미심쩍어하며 그의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았다. 계약서라…. 헌터 생활을 하면서, 그간 별별 이상한 계약서를 접했던 박민후는 남자가 계약서란 이야기를 꺼낸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시선을 들었다. 노트북의 화면을 제 쪽으로 돌려놓고, 일어나 프린트를 연결했다. 그러고는 어디 읽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기에 어디 읽어나 보자 싶어 화면을 들여다봤다. 내용은 짧았다.

“이걸 지킬 수 있으면 같이 살죠.”

「동거 계약서

이수현 (이하 “갑”)과 박민후 (이하 “을”) 계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을은 갑의 집에서 사는 동안 갑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싫으면 지금 당장 나가면 된다.

2. 을은 월마다 집세를 대신 내 주어야 한다.

싫으면 지금 당장 나가면 된다.

3. 을은 갑의 집에 사는 동안에는 갑의 안전을 최우선 순위로 여겨야 한다.

갑이 다칠 경우 그에 대한 치료비와 더불어 갑이 청구하는 피해 보상금을 꼭 주어야 한다.

싫으면 지금 당장 나가면 된다.

4. 갑은 침대, 을은 바닥에서 자야 한다. 웬만한 건 각자 알아서 한다. (청소, 밥 등)

싫으면 지금 당장 나가면 된다.

5. 을과 갑은 서로에 관해서 깊게 파고들지 말아야 한다.

싫으면 지금 당장 나가면 된다.

6. 을은 자신의 착각이 증명되면 이 집을 나가야 하며, 한 달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달 월세는 내야 한다.

싫으면 지금 당장 나가면 된다.

갑 이수현(서명)

을 박민후(서명) 」

“음, 계약서 내용이 참….”

이게 참 뭐라 말로 설명하기 애매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1번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거 말고야 뭐 괜찮겠지. 그보다 이름이 이수현이군. 이수현, 이수현. 박민후는 몇 번 그 이름을 입 안에서 되새김질했다. 솔직히 계약 내용보다 남자의 이름이 더 머리에 박혔다. 게다가 사실 이런 일반 종이 쪼가리의 계약서는 아무런 효력도 없었다. 그러니 박민후는 애들이나 하는 소꿉놀이에 맞춰 주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그렇게 해.”

“뭐 고치거나 추가하고 싶은 건?”

“없어, 없어. 대충해. 네 말대로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좋아요, 그럼 사인해요.”

어느새 프린트까지 해 온 계약서를 남자가 척하고 그의 앞에 내려 두었다. 손수 펜도 집어 주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 박민후는 나름 기분이 좋았다. 그가 저를 싫어하는 티를 내기에 혹시나 하였는데 돈으로 해결이 되다니. 돈 좋아하나 보네.

그렇게 기분 좋게 사인하고, 남자에게 펜과 계약서를 돌려주자 남자도 마찬가지로 사인을 했다. 그리고 그걸 벽에 걸려 있던 메모판에 딱 꽂아 두었다. 뒤돌아선 남자가 손을 내밀기에 그 손을 덥석 잡고 씩 웃었다. 그러자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저는 또 잘 부탁한다고 흔드는 거라 생각해서 같이 흔들었다. 이수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손잡으라고 준 거 아니고요, 월세 달라고 준 겁니다. 손 좀 놓죠?”

그에 박민후는 얼굴을 확 구겼다. 그럼 그렇지! 이수현의 손을 확 팽개치듯 놔 버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계좌 불러.”

“예, OO 은행 XXX-….”

그런 박민후의 기분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수현은 묵묵히 계좌 번호를 불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이 남자랑 엮이게 될 거라면 그냥 그러려니 이 흐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말 싫지만 이미 엮여 버리지 않았나? 그와 같이 산다 해서 여기서 뭐 얼마나 더 꼬이겠어? 게다가 오래 살 것도 없었다. 한 달도 안 돼서 이 집에서 나가겠지. 같이 살다 보면 금방 그가 느낀 게 단순한 착각이란 걸 깨달을 거다. 분명 그렇게 될 거다.

자신은 엑스트라, 박민후는 주인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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