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택의 기로.
사람은 언제나 살면서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이걸 잡을까 저걸 잡을까.
더 잘까 일어날까.
뭐 이런 식으로.
지금 나도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분명 지도대로 잘 가고 있었던 거 같은데….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 지도 잘못된 거 아냐? 그래, 지도가 이상한 거 같다. 거대한 고층 빌딩들이 둘러싸인 거리로 들어서면서 내심 맞게 찾아온 거 같아 신이 나 있었다.
여기 이렇게 휴대폰 지도를 보면서 찾고 있는데 길을 잃을 리가 없지. 하지만 1시간 동안 이 주변만 빙빙 도는 게 제 착각은 아닐 거다. 저 간판 아까 본 거 같은데. 역시 아까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야 했던 건가?
은행 찾기가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이 세상에 모든 은행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빨리 은행을 찾아야 하는데…. 심장이 완전 벌렁거려, 빨리 가지 않으면 지금 내 겉옷 왼쪽 가슴 한구석에 넣어 둔 종이를 누가 뺏어 갈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런 기분이라는 거다. 그렇다. 내가 지금 은행을 찾는 이유는… 정말로 당첨됐다!
갑자기 여러 일이 벌어져 시간 감각을 잊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이곳에 온 날이 바로 토요일이었다. 그날 내가 아슬아슬하게 복권을 샀고, 그게 당첨된 거다! 원체 매일 같은 일상이 벌어지는지라 요일을 깜빡 잊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날짜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검색창을 켜 이번 주 1등 번호를 찾았다. 그때 너무 놀라 휴대폰을 바닥에 떨궈 액정이 나가 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계약 기간이 2년이나 남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내심 당첨될 거란 느낌이 왔지만 현실을 마주하니 정말 꿈같았다. 소설 속에 들어오는 것보다 로또 당첨이 더 꿈같았다. 세상이 평범하게 잘 살던 나를 이런 곳으로 던져둔 게 어지간히 미안했던 게 분명해! 그래서 내게 돈을 준 거다! 돈으로 무마하려고!
다시 생각해도 신이 나 돈을 타면 해야지 싶었던 것들을 또다시 하나하나 꼽아가며 길을 찾았다.
일단 침대를 새로 사야지, 그리고 비싼 데서 맛있는 걸 먹는 거야. 제주도로 여행을 갈까? 그렇게 룰루랄라 걷다가 또 길을 잃었다.
“잘못 왔네.”
휴대폰 지도는 이제 이 길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도를 한 번, 길거리를 한 번 쳐다보았으나 아무리 봐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어디 지나가는 사람이 없나?’ 하고 생각했지만 출근 시간이 지난 거리는 무척 한적했다. 사방에 높다란 건물이 숲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회사 단지가 분명했다. 그렇게 또 사람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면 누구라도 나오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며.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팠다. 해가 머리 위에 뜬 걸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된 것 같았다. 슬슬 사람이 보일 때가 된 거 같은데…. 눈을 뜨자마자 가기 위해 밥도 안 먹고 나왔는데 여태 이러고 있다니…. 오늘 내로 은행에 못 가는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때마침 내 시야에 막 건물을 빠져나온 것인지 이 주변에서 가장 큰 건물 앞에 서 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남자가 보였다.
나는 옳다구나 하고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하늘을 보던 남자가 내가 다가가는 걸 눈치챘는지, 시선을 돌려 나를 마주 봐왔다. 그때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저 노란 눈을 어디서 본 거 같다. 저런 샛노란 눈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 분명 봤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저 남자를 나는 오늘 처음 본다. 빛이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듯한 키가, 균형 잡힌 역삼각형 몸을 한 남자는 차주영 못지않았다. 어째 그와 눈을 마주하니 괜히 등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남자가 뭐가 중요한가. 나는 은행이 더 중요했다.
“저기요, 길 좀 물읍시다.”
“아, 생각났다.”
길을 물으려 하니 때마침 남자는 뭔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게 참 사납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도 참 어디서 본 거 같아 묘하기도 해서 그냥 멀뚱히 서 있었다. 아아, 혹시 나를 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얼굴을 찡그린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제가 도를 믿으라고 말을 건 건 아니고요. 여기, 여기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
“…완전 여기랑 반대 방향입니다.”
***
제게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길을 묻는 남자를 보며 박민후는 어이가 없었다. 이 세상 모든 무심함을 한데 모아 만들어진 듯한 남자를 보며, 저 성격에다 길치이기까지 하면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남자가 휴대폰으로 보여 준 목적지인 은행은 이곳에서 몇 블록이나 뒤에 있었다. 그것도 이 남자가 걸어온 쪽으로 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박민후의 대답에 남자는 ‘역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참 영혼 없어 보였다.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그냥 반대로 쭉 가기만 하면 되나요?”
“아니, 무작정 직진만 하지 말고…. 그 전에 제가 말해 주면 알긴 합니까?”
“예? 그럼요.”
그 대답이 참 당당했다. 지금 본인이 길을 잃었다는 자각은 하고 있나 의심이 될 정도였다. 말이나 못 하면…. 어차피 자신이 길을 말해 줘도 못 알아먹을 듯한데. 그래, 오랜만에 착한 일 한다 치자. 박민후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남자는 보아하니 제가 누군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둔한 거야 관심이 없는 거야. 멀뚱히 저와 마주쳐 오는 얼굴을 보니 그냥 둘 다인 것 같았다. 이런 무관심도 참 오랜만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으나 박민후는 자각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쪽으로 네 블록 뒤로 쭉 간 다음, 우측으로 꺾어서 4차선 도로가 나올 때까지 가다 보면 검은색 건물이 나오는데, 그러면 거기서 다시 좌측으로 꺾어 그리고 쭉 직진해. 그럼 바로 보여. 초등학생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바로 보인다고…. 알겠습니까?”
“…….”
이거 듣고 있는 거 맞아? 눈이 풀렸는데? 인상을 쓰며, 그 멍청한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남자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뚱히 남자를 보면서 나는 덤덤하게 깨달았다.
아아, 이놈 어제 그놈이구나. 도망가자.
“…예, 감사합니다.”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모습에 그가 인상을 썼지만 고갯짓으로 대충 인사를 대신하고, 그가 알려 준 대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네 블록 뒤 우회전. 네 블록 뒤 우회전. 네 블록 뒤 우회전….
그래, 저 노란 눈을 내가 어디서 봤나 했다. 왜 갑자기 등이 욱신거리나 했어. 사람 모습이라 눈치채는 게 늦었다. 어쩐지 표정이 이상하더라. 나인 걸 알아본 거겠지? 근데 지가 왜 찡그려? 뭘 잘했다고? 설마 못 알아봤다고 찡그린 건 아니겠지? 그러게 왜 갑자기 두 발로 서서 나타나고 난리야? 지가 무슨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의 정답인가?
저놈 성격상 길을 제대로 알려 줄 놈이 아닌데…. 잘못 알려 준 거 아냐? 잘 가다 우뚝 멈춰 섰다. 그래, 저놈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나도 참 잘못 생각했어. 우측이랬지? 좌측으로 갈 테다. 가다가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어서 이 자리를 뜨자.’, ‘저놈과 엮이면 안 된다.’ 그런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 세상이 아직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이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 그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반드시 사건에 휘말리게 되겠지. 와, 절대 싫어.
가만 생각해 봐라. 주인공에게 길을 물어본 엑스트라? 그 엑스트라가 마침 엄청 운 좋게도 1등 복권 당첨자다. 길을 잃어버린 엑스트라가 우연히 마주친 주인공에게 길을 물으며, 주인공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헤어져서 지금 이렇게 은행에 가고 있다. …아무리 봐도 이거 플래그가 너무 심하지 않아? 이거 너무 뻔하잖아!
아냐, 아냐,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럼 그럼, 주인공도 주인공 나름이지. 내가 잠깐 저놈의 인성을 깜빡했다.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다. 저 개 같은 성격에 근처에 있는 은행에서 사건이 터지든 말든 저놈이 신경이나 쓰겠어? 주인공이 관심도 안 주면 애초에 사건이란 게 일어나지도 않겠지. 그러니 분명 은행은 무사할 거다. 그래야 했다. 나는 가서 무사히 돈만 받아오면 되는 거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은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은행 강도 같은 건 다 옛말이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옛날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시 돈 생각을 하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
“저거, 저거! 길을 알려 줘도 왜 저리로 가는데?!”
멀쩡히 잘 가다가 금세 옆으로 빠지는 남자를 보면서 박민후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 안 듣는 거 같다 했다. 그럴 거면 대체 길은 왜 물어본 거야? 길치는 다 저런 건가?
“아 몰라, 난 제대로 알려 줬다고…!”
박민후는 휙 뒤돌아 걸었다. 그래, 저놈이 가다 길을 잃는 게 자신의 잘못인가. 제대로 알려 줬는데 못 알아 처먹은 저놈 잘못이지. 사람이 오랜만에 착한 일 좀 하려고 굳이 자세히 길을 알려 줬더니 그 결과가 이거야? 아니, 진짜! 관심 끄고, 갈 길 가자. 그렇게 씩씩거리며, 남자와 반대로 걷던 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아오! 이해를 못 하겠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박민후는 인상을 썼다. 그는 이미 남자가 사라지고 없는 거리를 노려보았다. 그냥 무시하려니,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거슬렸다. 그건 눈썹 하나가 눈을 찌르는 정도의 작은 거슬림이었으나, 박민후는 그조차 어째선지 참기 힘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꾸만 그 남자의 세상 무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만사 다 무심하게 보던 그 눈이 자신을 보던 게 떠올랐다. 영혼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높낮이 없는 그 목소리가. 계속 생각나 심히 거슬렸다.
아마 자신이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소한 걸 예민하게 느끼는 거라고, 그런 것일 뿐이라며, 그래 겨우 그런 이유일 뿐이라고 박민후는 생각했다. 그는 어느새 남자가 사라진 길을 뛰듯 걷고 있었다.
이 상황은 이수현이 그렇게 바라지 않은 결과였으나, 어쩌겠는가 선택의 기로에서 박민후가 이 길을 선택해 버린걸. 그로 인해 한번 멈춰 버린 세계의 흐름이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조금씩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수현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난 그저 조용히 돈만 무사히 받고 가고 싶었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 손의 힘 좀 빼 줬으면 좋겠는데…. 숨 막혀. 내 머리에서 그 총도 치웠으면 좋겠다. 아니, 대체 여기서 왜 갑자기 총이 나오는 거야.
언제부터 이 나라가 총기 소지국이 된 건지…. 원작에서 분명 그런 말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초능력이 난무하는 세계다 보니 내가 살던 곳보다는 총기류가 잘 사용되지 않는 편이었다. 잘 사용되지 않는다 뿐이지 여전히 총을 쓰기도 하는데….
문제가 있다면 내가 살던 곳과는 총의 재질과 강도가 다르단 거? 이 세상에선 일반인의 몸도 강철급인데, 몬스터는 어떻겠는가. 평범한 총이 소용이 있을 리가. 이곳에서 그런 건 그냥 비비탄 총 정도의 장난감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총 또한 몬스터에게도 통하도록 좀 더 강하게 발전했는데….
그게 지금 내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바로 이 총이다.
“에휴.”
내가 왜 저놈한테 길을 물어서는…. 이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가. 아니다, 아냐. 재앙이 스스로 걸어왔을 뿐이지. 내가 불러온 게 아니다. 나는 다른 인질들 사이에서 인질인 척 내숭을 떠는 놈을 흘겨보았다. 뻔뻔한 놈. 내가 인질이 된 것도 다 저놈 때문이다.
탕! 탕!
“꺄악!!”
“어, 엄마야!”
“다들 가만히 안 있어? 거기, 뭐해! 빨리 돈 안 담아!?”
당신이나 조용히 해…. 바로 귀 옆에서 소리를 지르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울렸다. 대체 이게 언제 적 레퍼토리람. 정말 대체 왜, 뭐 때문에, 이렇게 발전한 이 시대에…! 이런…. 이젠 만화에서조차 안 쓰는 소재란 말이다. 정말 은행 강도가 왜 나타나냐고!
이 말도 안 되는 일련의 사건이 시작된 건 바로 조금 전이었다.
***
나는 여기저기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겨우겨우 은행에 도착했다. 결론만 따지면 주인공 놈은 맞는 길을 알려 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붙잡고 물어봤는데, 다들 비슷하게 길을 알려 주더라. 그러니 세 명쯤 같은 말을 할 때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뭐 잘못 먹는 거 아냐?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데….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느껴졌으나 일단 은행이 먼저였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자 어째선지 은행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게 이상해,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섰다.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또냐.’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대체 뭐지? 뭔가 불안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문을 등지고 서 있던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슬쩍 내게 말을 걸었다.
“저, 그쪽도 당첨인가요?”
“예?”
“복권이요, 복권. 그쪽도 당첨이죠? 그쵸? 몇 등? 1등? 2등?”
“…1등이요?”
묘하게 말꼬리가 올라갔으나 여자는 그러려니 한 것 같았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내 말 한마디에 가까이 서 있던 몇몇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행 안의 분위기는 정말 이상했다. 다들 서로를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며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 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문 쪽을 힐끔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은연중 직감이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아직 여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한숨을 쉰 여자가 한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번 복권 당첨된 사람이 1, 2등 합해서 84명이래요.”
“…아.”
“이게 뭐야. 뭐 이리 한 번에 몰렸는지…. 저도 1등 당첨됐거든요? 받을 돈이 확 줄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긴 그렇게 많이 당첨됐다면, 원래 금액보다 받는 돈이 줄어들 거다. 진짜 뭐 이리 몰린 거람…. 더는 1등 복권이 1등 복권이 아니게 된 것 같았다.
…그래도 몇억은 받지 않을까? 이번 1등 당첨금이 얼마였지? 온전한 돈을 다 받을 수 없는 게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었다. 그래, 그게 어디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시 은행 문이 열렸다. 그에 당연하다는 듯 은행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막 들어오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나는 아까 들어온 그대로 문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길을 비켜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심정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겠지만 그래도 한 명 더 들어오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돌아보지 말 걸 하고 후회했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었으나 방금 전에 본 남자를 못 알아볼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다. 모자 때문에 그늘진 눈가가 어쩐지 아까보다 더 사나워 보였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나는 내가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얼른 옆으로 물러나 앞을 비켜줬는데 그는 은행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가 은행에 온 목적이 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설마…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해가 안 되는 그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슬쩍 미간을 구겼다. 네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설마 나를 따라왔나? 대체 왜?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그와 본의 아니게 눈싸움을 하자 옆에서 우리를 보던 여자의 얼굴이 요상해졌다. 슬쩍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뒤로 슬금슬금 빠지면서 딴청 부렸다.
“어, 화장실이 어디더라….”
갑자기 화장실을 왜 찾는 거야?
그는 시커먼 모자에 후드 집업까지 뒤집어쓰고, 시커먼 마스크를 쓰고 있어 은행 안에 다른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그를 알아챘으면 소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걸 이 남자도 알기에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온 거겠지. 그래도 자기 얼굴이 유명하다는 자각은 있나 보다.
이 대치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아, 나는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난 너랑 엮이기 싫단 말이다. 은행에 왔으면 볼일 보고 가 버릴 것이지 왜 갑자기 바쁜 사람 붙잡고 눈싸움을 걸고 난리람.
좀 전에 여자가 말을 거는 바람에 번호표 뽑는 것도 깜빡해, 일단 번호표를 뽑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그런 내 태도가 불만이었는지 놈이 내 팔을 휙 잡아당겼다.
나는 그 힘 때문에 종잇장처럼 휘청거렸다. 게다가 그 반동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그와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의 샛노란 눈동자에 거울처럼 내가 비쳤다. 그 안의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가 잡아당긴 팔뚝이 아작 나는 줄 알았다. 분명 거기서 조금만 더 세게 잡았어도 뼈가 부러지든가, 어깨가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놈은 답답한 마스크를 끌어 내리며, 뭐라 입을 열었다.
“이봐….”
그러나 그가 채 한마디 말도 다 꺼내기 전에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탕!
은행 안에 총성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삽시간에 은행 안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모든 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총성과 함께 그들은 갑자기 은행 한복판에 나타났다. 그들은 재빨랐다. 마치 이 모든 과정을 수십, 수백 번은 반복했다는 듯이 물 흐르듯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한 놈은 은행을 중심으로 차단막을 쳐서 외부와 연락을 차단하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놈은 은행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덩굴로 구속했다. 모두 앗 하는 사이에 당한 것이라 어떻게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바닥에 꿇어 앉혀졌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을 남은 세 명이 총을 들고 위협했다. 그렇게 총 다섯 명으로 구성된 무장 강도 집단이 나타났다.
진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다.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그 능력으로 헌터나 할 것이지 왜 이런 곳에서 은행 강도나 하고 있냔 말이다.
모름지기 정의가 있으면 악도 있는 법이라고, 각성은 했으나 헌터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능력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던전에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헌터를 포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반대로 능력은 되지만 간혹 나쁜 쪽으로 빠지는 놈들도 있었다.
이 경우는 후자였다.
나는 내 옆에 나처럼 덩굴에 묶여 바닥에 꿇어 앉혀진 주인공을 곁눈으로 힐끔 쳐다보았다. 그와 너무 딱 붙어 앉아 있었기에 내가 쳐다보는 것을 눈치챈 놈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냐? 하긴 이놈에게 이 일련의 상황은 그저 우스운 재롱 잔치일 뿐일 테니…. 웃기긴 하겠다.
이놈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난 이놈 기분이 그래도 나름 좋은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순순히 잡혀 준 게 아닐까, 그도 아니면 그냥 변덕일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놈이 내게 얼굴을 바싹 붙이고 귓속말을 해대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도와줄까?”
“…예?”
“부탁한다고 해 봐. 그럼 넌 살려 줄게.”
…그냥 구해 준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놈은 아주 선심 쓴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 떨떠름한 반응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그냥 도와주죠?”
“내가 왜?”
“그야….”
‘헌터잖아.’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를 못 알아본 전적이 있기 때문에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것 말고도 이놈이 헌터의 본분을 다하는 놈이 아니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런 나를 보고 놈이 다시금 삐뚜름하게 웃었다.
“뭐야, 날 알긴 아나 봐?”
아차…. 뭐라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강도가 도움을 줬다.
“거기! 뭘 속닥거렸어! 어?!”
씩씩거리며 총을 든 강도가 다가왔다. 우리가 딱 붙어서 소곤거리니 무슨 작당이라도 한 줄 알았나 보다. 괜한 오해를 고쳐 줘야 할까 싶었지만, 놈은 우리 말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총구가 얼굴에 바싹 들이밀어졌는데 옆에 놈은 놔두고 나를 향한 게 참 아이러니했다. 본능적으로 그가 위험하단 걸 느끼기라도 한 걸까.
“말 안 해?!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네놈들 눈엔 이게 장난감으로 보이냐? 어?!”
강도는 정말이지 이상하리만치 흥분해 있었다. 말투도 행동도 거칠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사소한 모든 것에 예민하게 구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때 그들은 충분히 계획했고, 성공할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 이렇게 판을 벌였을 테지만. 그런 와중에도 마음속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나 보다.
그럴 거면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물론 저들의 심정 따위 이해할 마음도 없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 걱정돼서 눈앞이 벌게질 거면 그냥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자면 되는 거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좀 더 착실한 일에 힘을 쓰면, 서로 더 좋을 텐데.
뭐, 그래도 이들은 도망칠 계획도 충분히 세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까 이곳에 처음 그들이 나타났을 때를 생각해 봐라, 그들은 아무 전조도 없이 은행 한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났다. 한마디로 그 인원을 한꺼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각성자가 곁에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 은행 안에 헌터가 있을 걸 대비해서 무효화 능력을 가진 각성자도 데려왔다. 인질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자신의 능력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흘리는 자들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게 여기 일반인인 척 앉아 있는 주인공에게도 통할지는 미지수지만.
내 앞에 다가온 강도의 얼굴은 꽁꽁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 순 없지만,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소리가 무척 거칠고, 그의 말투 또한 성급하기에 강도가 지금 무척 흥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뭐에 쫓기듯 서둘렀다.
나를 한 번 보고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인질들을 보던 강도는 총의 위력을 보여 줄 생각인지, 총을 장전하더니 냅다 벽에 총을 갈겼다.
콰쾅!!
그들이 준비한 총은 몬스터에게도 통하는 특수한 총이었다. 당연하게도 단 한 발이면 벽 한쪽을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총성과 함께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걸 보고 인질들은 숨을 들이켰고, 다른 강도들조차 그 요란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총을 쏜 놈에게 화를 냈다.
“이봐! 뭐 하는 거야!”
“뭐긴 뭐야, 보면 몰라? 본보기다! 이놈들이 수상한 짓거릴 벌이잖아!”
내가 언제, 억울했으나 이번에도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강도가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켰기 때문이다. 강한 힘에 순간 숨통이 막혔다. 그렇게 멱살이 잡힌 채 방금 무너진 벽으로 질질 끌려갔다. 다 부서진 벽에 내 얼굴을 처박듯 들이민 강도는 흥분에 겨워 말했다.
“자! 이거 잘 봐 둬라, 다음엔 네놈 꼴이 저렇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왜 자꾸 나보고 뭐라고 하는 거야…. 저기 있는 주인공한테나 그렇게 말해 달란 말이야. 힘없는 엑스트라 살려. 나는 강도가 어지간하고 날 다시 놔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난 그냥 그 상태로 걸어 다니는 인질이 되어야 했다. 앉아 있고 싶었는데.
“잘 봐! 저걸 보라고! 허튼짓하기만 해 봐! 네놈들 대가리는 이거 한 방이면 풍선처럼 터트릴 수 있단 말씀이야!”
침 튀겨 가며, 다른 인질들에게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남자가 우쭐해하며 그렇게 외쳤다.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었기에 그들이 만약을 대비해 나를 방패막이로 쓸 생각인 건 아닐까 싶었다.
‘모든 헌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힘없는 약자를 최우선 순위로 여겨야 한다.’
이것은 모든 헌터가, 헌터가 된 순간부터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절대적인 사항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힘없는 일반인은 도주하는 범죄자들에게 아주 훌륭한 방패막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헌터들도 다양한 능력이 있다 보니 그렇게 쉽게 범죄자를 놔주진 않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종잇장 몸이 아니라,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능력자의 존재였다.
아무래도 그 능력자는 등급이 높은 듯했으니까. 실질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걸 보여 준 자들은 총 두 명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총을 들고 다녀 각성자인지 비각성자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무효화 능력자를 잡기만 한다면 일이 쉽게 해결될 터지만….
하여간 그로 인해 내가 이 상태로 끌려가면 과연 무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단 이야기다. 인질이 있으니 헌터들이 쉽게 덤비지 못할 테지만,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인질을 무시하고 덤빈다는 상황이 전혀 없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걱정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나는 멀뚱히 은행 안의 풍경을 구경했다.
“현금은 다 챙겼어! 애초에 현금 자체는 별로 없으니까 금방 끝났네.”
“남은 건 이 은행 계좌로 남은 돈을 보내면 끝이지.”
“머리에 바람구멍 나고 싶어? 아니면 불에 구워지고 싶어? 빨리빨리 하란 말이야!!”
“껄껄!! 거봐, 내 말이 맞지? 머저리 놈들 던전 청소 시기만 되면 아주 거기에 목을 매서 이런 사소한 건 신경도 안 쓴다니까?”
“네놈 말이 맞아, 신경을 썼다면 벌써 오고도 남았지!”
“하하하! 거기나 열심히 청소나 하라지!”
바깥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련의 상황이 하나의 촌극 같다고 생각하겠지.
헌터들이 여태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형편 좋은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기론 헌터들이 이 시기만 되면 대부분은 던전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 전국 규모로 던전으로 출장을 가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 평소보다 적은 인원으로 남은 헌터들도 물론 있었다.
단지 만약 그 남은 헌터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혹은 은행 강도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런 이유로 그들이 오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 강도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으니까. 시작하자마자 5분도 안 걸려서 붙잡히고 상황 종료될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그걸 저들이 눈치채지 못한 순간부터 저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고 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직접 은행을 터는 바보가 과연 어디 있을까? 외딴 섬이나 산속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산 게 아니고서야, 요즘 시대의 은행 강도라니! 그런 건 이제 만화에서도 더는 나오지 않을 소재였다. 한마디로 시대에 뒤처진 소재였고, 발전할 대로 발전한 현시대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니 어이가 없어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현금은 훔치고, 전자로 된 돈은 해외 통장으로 부친다고?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였다. 현금? 일련번호가 기록에 남아 있는 이상 사용하는 순간, 추적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해외로 입금한 돈은 어떨까? 출처를 알 수 없는 거액의 돈이 움직이면, 당연하게도 그 나라에서 돈이 들어온 통장을 차단한다. 그 뒤는 간단했다. 돈의 출처가 명확해질 때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이런 걸 두고 바보들의 행진이 따로 없다고 하는 거다.
내가 나름 이 상황을 침착하게 보며, 속으로 참 현실성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갑자기 등장한 은행 강도는 정말 개연성 없고 낡아 빠진 소재가 아닌가. 쓸 내용이 없어도 그렇지 은행 강도가 말이나 되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
박민후는 기척을 죽이며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의 걸음걸이는 그의 외모처럼 단정했다. 뒤에서 그의 올곧은 자세를 차근히 눈에 담았다.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칼이, 규칙적이면서 느긋한 그 걸음걸이가 어쩐지 시선을 끌었다.
어찌 보면 느린 걸음걸이였다. 자신의 평소 걸음보다 두 걸음 정도 느리다고 해야 할까. 그가 걷는 폭이 크지 않아 그런 것도 같았다. 분명 나란히 옆에서 걷다 보면 어느새 뒤처져 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보폭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박민후는 오늘따라 조용한 도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조금 전과 다르게 기분 좋게 느껴졌다. 눈앞에 남자는 그렇게 또 정처 없이 걸었다. 하도 당당하게 걸어가기에 잘 가나 싶다가도, 번번이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꼴이 웃겼다. 그는 가는 길마다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그렇게 물어물어 남자가 목적지인 은행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그 거리를 이렇게까지 빙빙 돌 수 있는 것일까 새삼 남자가 대단했다. 은행 안으로 들어간 남자를 따라 자연스럽게 들어갈까 하다가 우뚝 그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에 홀린 듯 남자를 따라왔지만, 눈앞에서 그가 사라지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선뜻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이 상황은 이상했다. 누군가 강제로 자신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남자를 따라가야 한다고 그렇게 제 등을 떠민 것만 같았다. 그건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사실 박민후에게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박민후는 이런 기분을 열여덟 살 이후부터 몇 번이고 느꼈었다. 이쪽으로 가야 해.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해. 저 사람을 구해야 해. 저걸 잡아야 해. 그런 식으로 그리고 그때마다 박민후는 늘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언제나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보통 두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박민후 자신에게는 이로운 상황으로 연결되었다. 그렇다 ‘자신’에게만. 하나는 이상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는 절망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이상적인 결말만을 선택했다. 그것을 선택할수록 자신은 강해졌고, 세상에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여태껏 자신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내린 선택이 사실은 최선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동료였던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로 인해 강해졌다. 웃기지도 않았다.
‘이건 필요에 의한 희생이었어.’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를 강하게 하기 위해 그들이 희생했다고. 그렇게 홀로 세상에 남았으나, 이 모든 현실이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기에 그는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그게 정말 최선이었나?’
그날 누군가 그렇게 물었던 거 같다. 그에 박민후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외면한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박민후는 몇 번이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 어쩌면 잘못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었겠지만, 박민후는 그 모든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할수록 그는 당연하다는 듯 강해졌으나 그의 주변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를 보는 시선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의 강함은 누군가의 희생을 제물로 삼아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박민후는 어느 순간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뭘 해 봤자 어떤 결과가 나와도 자신은 살아남는다. 그럼 된 거야. 그는 이제 내킬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 또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이었다.
그는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고, 그냥 자신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백날 고민해 봤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은 굴러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어떨 때는 사람을 구했고, 어떨 때는 그로 인해 사람을 죽였다. 그는 여전히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었으나 이제는 예전보다 많은 선택지가 그의 앞에 존재했다. 그는 때때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언젠간 이런 것도 끝이 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버텼다.
그리고 그가 원치 않게 세상을 구한 뒤. 그는 더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한 달이 지나고, 또 반년이 지나고, 다시 1년, 다시 2년.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안심했다. 이제 그 빌어먹을 선택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자유라고. 이미 많은 것이 엉망이 돼 버렸고, 자신은 이제 더는 옛날에 자신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런데 그게 지금 와서 다시 나타났다. 또 뭘 어떻게 하고 싶기에 자신에게 이러는 건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또다시 선택을 강요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언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일까.
박민후는 그것을 알 수 없었으나,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든 게 방금 전 그 남자일 것이라고 박민후는 생각했다.
그가 대체 뭐길래 이러는 걸까.
저 남자는 이 이상한 기분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까?
“…인벤토리.”
박민후가 작게 중얼거리자 허공에 띠롱 하고 그만 볼 수 있는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그는 익숙하게 그곳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꺼냈다. 은행 안에 오늘따라 사람이 꽤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분명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 테니 그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거기에 후드 집업에 달린 모자까지 눌러쓰자 은행 문에 비친 자신의 꼴이 퍽 우습다 생각했다.
박민후는 은행에 들어섰다. 그러자 온 사방에서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렸으나,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시선만이 중요했다. 남자의 연갈색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했다. 살짝 구겨진 미간이 신기했다. 저 얼굴에 다른 표정이 생기기도 하는군. 그건 참 재미난 발견이었다.
그러나 금방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남자가 너무했다. 말 좀 걸려니 금방 이런다. 그에 남자의 팔을 잡아당기자, 그가 크게 휘청거렸다. 별다른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남자의 몸은 무슨 종잇장이라도 되는지 크게 휘청거렸다. 뭐가 이리 약해.
박민후는 코앞에 불쑥 다가온 남자를 보며, 있는 대로 구겨진 그의 얼굴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세상만사 다 무심하게 보던 그 무표정한 얼굴에 금이 간 게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왼쪽 눈썹 위에 점이 있네.
“이봐….”
***
한심한 헌터 놈들. 일을 어떻게 하기에 이런 머저리들이 돌아다니는 거야. 박민후는 짜증이 났다. 그러나 이건 본인이 한 짓을 생각지 못한 처사였다.
그는 성질을 죽이기 위해 생각했다. 이러다간 크게 일을 내겠지 싶었다. 자신의 손을 묶은 덩굴은 살짝만 당겨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허약해 빠졌고, 무효화인지 뭔지 힘을 막는 능력은 사실상 자신 같은 인간에겐 아무 소용없었다. 그저 모기가 내려앉은 듯 가려울 뿐.
다 죽이고 사고라고 뻥을 칠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접었다. 자신이 이런 같잖은 수작질에 순순히 잡혀 준 이유는 그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이 남자 때문이었음을 다시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볼일이 있는데 상황이 그걸 도와주지 않았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뭐하지 않은가. 물론 한바탕 난리를 치면 순식간에 정리될 상황이긴 했으나,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이런 종잇장 같은 남자가 과연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아직 이 남자와 못다 한 이야기가 있는데 실수로라도 죽어 버리면 좀 곤란하지. 그래, 조금만 참아 볼까. 조금만….
때마침 남자가 힐끗 저를 보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딱 붙어 있으니, 그가 조심한다 해도 서로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남자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사방에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두려워 강도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 그런 가운데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훑는 남자. 그 모습이 그날 밤 자신의 발아래에 눌려 피를 흘리던 모습과 겹쳐졌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한 얼굴. 어쩌면 남자는 자신의 목이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와도 저런 얼굴을 하지 않을까? 상상을 해 보니 너무 그럴듯했다. 이런 남자를 내가 어쩌면 좋을까. 겁이라도 집어먹었으면 좀 더 쉬웠을까. 그랬다면 적당히 구슬려서 적당히 영웅 행세를 하면 됐을 텐데.
그러다 문득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도 그에게서 나는 냄새가 미약하기 그지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 감각에도 잡히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맡지도 못할 테지. 바람이라도 불면 허공에 흩어져 사라질 것만큼 미약했다. 신기해 일부러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러자 희미하게 날 듯 말 듯 맡아지는 향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더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건 무슨 냄새지, 섬유 유연제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도와줄까?”
“…예?”
“부탁한다고 해 봐. 그럼 넌 살려 줄게.”
고개를 살짝 돌려 저를 보는 남자를 보며 웃었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건 이 남자뿐이었기에 지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네가 원하면 구해 줄 수 있어. 그러니 부탁해 봐. 다른 놈들을 구해 줄 이유는 없으니까. 너만은 특별히 살려 줄게. 그러나 남자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그냥 도와주죠?”
“내가 왜?”
“그야….”
“뭐야, 날 알긴 아나 봐?”
내가 누군지 모르는 척하더니…. 뭐야. 사실은 아는데 모르는 척한 거였어? 날 알면서도 이렇게 군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남자의 표정은 정말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그가 방금 한 말실수가 아니었다면, 그가 박민후 자신을 알고 있었는지 전혀 모를 뻔했다. 본인도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챘는지 남자가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말을 방해한 건 때마침 이쪽을 보던 강도 놈이었다.
“거기! 뭘 속닥거렸어! 어?!”
시발, 분위기 파악 못 하네.
한껏 흥분한 강도가 남자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 거친 손길에 힘없이 끌려가는 남자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다음은 자신이 저렇게 될지도 모르니 하나같이 몸을 사리며, 자신이 안 당해서 다행이다 안도했다. 그 꼴이 박민후는 같잖았으나 이해 못 하진 않았다.
남자는 강도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이제는 강도의 품에서 목을 졸린 채 머리 옆에 총구까지 들이 밀어졌다. 그 모습은 완벽한 인질의 모습이었으나, 정작 인질인 남자의 표정이 그러질 못했다.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태평했다.
거봐, 내가 말했지. 죽는 순간에도 저런 얼굴일 거라니까?
그의 무심한 얼굴은 이제는 흡사 지루한 걸 보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붙은 총이 사실은 장난감인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태도는 태평했다. 현실은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처지인데도 말이다. 그게 그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저게 어디가 인질의 얼굴이야. 진짜 골 때린다. 저 남자라면, 저대로 그냥 끌려가도, 그러려니 하고 말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저는 저 남자에게 볼일이 있고, 이대로 그가 강도들과 사라지면 곤란해지는 것도 저다. 그러니, 그 꼴을 보며 박민후는 느긋하게 손발을 묶은 덩굴을 찢어 버렸다.
***
이수현은 종이를 찢듯, 덩굴을 찢어 버리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그의 웃음이 더욱더 짙어졌다. 아, 사고 칠 얼굴이었다. 그래, 그 성격에 참 오래도 참았지. 이수현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자는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에 미리부터 성공을 축하하던 강도들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러자 방금까지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했던 은행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쥐 죽은 듯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남자의 존재만으로 자신의 등 뒤에 있던 그들이 당황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눈앞에 상대가 그 ‘박민후’란 걸 모르는 그들이었지만, 강도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허옇게 변했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저 덩굴을 저렇게 간단하게 잡아 뜯을 수 있지? 강철보다 더 단단한 덩굴이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이날을 위해 준비했던가. 능력을 더욱더 능숙하게 쓰기 위해 연습하고,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던전에 숨어들어 몬스터를 사냥하고, 어둠의 루트를 통해 힘을 키웠다. 스킬 등급을 올려 기존의 헌터들과 급이 비슷해질 정도로 꽤 강해졌다고 자부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행동에 나선 것인데, 이게 무슨….
덩굴을 사용하던 각성자는 침음을 흘렸다. 이게 이렇게 힘으로 뜯어 버리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었다! 그것도 이곳에는 자신 말고도 무효화를 사용하는 일행이 있었다. 능력 무효화가 전혀 들지 않는다니…!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손도 못 쓸 테고, 일반인보다 강한 각성자들이어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마치 무슨 종이를 찢듯 가볍게 덩굴을 찢어 버렸다. 자신의 능력은 모르겠으나 무효화는 말 그대로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움직인다? 그들보다 몇 배나 강한…. 그래, S급은 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S급 헌터라고? 말도 안 돼. 이 나라의 S급 헌터 중 저런 외형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인질들은 생각했다, 저 남자가 자신들을 구해 줄 영웅이라고.
강도들은 생각했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지금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각성자의 범죄는 형이 높았다. 특히 헌터들에게는 즉살 처분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까. 눈앞의 저건 자신들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였다.
맞서 싸운다?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런 놈이랑 싸우라고? 신선한 자살 방법이다. 아니, 지금은 앞뒤 볼 거 없이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인질들은 저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자신을 구해 줄 영웅은 대체 누구일까? 강도들이 당황하는 걸 보니 꽤 강한 헌터겠지? 그래,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걸 거야! 다행이다! 역시 헌터야! 우리를 구해 줄 줄 알았어. 우리는 살았어! 누굴까, 강한 헌터겠지? B급? A급? 그 정도 되겠지? 저 덩치면 A급 차주영 헌터일까? 아니면 A급 플로나 헌터? 대체 누구기에 이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있었을까?
긴장이 풀린 인질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모두 해결되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에 그들은 안도했다.
흡사 눈치 싸움을 하듯 강도들은 남자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도망칠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의 계획대로 텔레포트를 써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강도 중 한 명이 서둘러 텔레포트 각성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단체 텔레포트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준비하는 데도 오래 걸릴뿐더러 마나 또한 많이 들기에 강도들은 텔레포트 각성자를 아지트에 두고, 돌아가기 전에 다시 연락을 취해 빠져나가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었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바로 도망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던 거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 걸 그랬다. 애초에 강도질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노력한 게 아쉽긴 했지만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돈이 중요한가!
하지만 그걸 두고 봐줄 박민후였다면 처음부터 그들이 돈을 다 빼돌린 뒤 유유히 도망치도록 그냥 두었을 거다. 박민후는 느긋했다. 이런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짓 한 번이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겠지, 그러나 거슬리는 게 하나.
그들은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인질인 남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질은 일회용 방패막이였고, 생명줄이었다. 여차하면 인질을 이용해서 잠깐의 틈을 구해 더 멀리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헌터와의 접전이었다면 모를까 상대가 박민후일 경우에 그건 정말 별 소용 없는 짓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박민후가 노리는 게 그 인질이라면 더더욱. 그들의 선택은 사실상 최악의 선택이었다. 인질인 남자만 놔뒀어도 그들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다.
그 꼴을 보던 박민후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남자의 목을 붙잡고 있던 강도의 팔뚝이 허공을 날랐다. 순간 상황 파악을 못 하던 강도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팔들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팔이 잘린 강도는 한 박자 늦게 느껴지는 고통에 크게 휘청이며, 바닥을 굴렀다. 그런 강도를 중심으로 은행 바닥에는 점점 피 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내, 내 팔!”
***
“콜록.”
목이 눌리고 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숨이 들이쉬어지니 절로 기침이 나왔다. 그나저나 가만히 있다가 졸지에 다른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기분이란….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 지금 내 몰골은 보기 흉하겠지. 이 차림으로 집에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탑승 거부를 당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걸어가기엔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다. 집에 가는 데 또 얼마나 걸리려나. 저놈은 그 많은 방법 중에 굳이 이런 식으로 행동했어야 했을까. 그보다 왜 날 구했지? 오늘따라 그는 내가 아는 주인공의 성격을 살짝씩 비껴가고 있었다.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닌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좀 전에 그가 자신만은 구해 준다고 하긴 했지만 그 말을 믿진 않았다.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안 그래, 주인공 씨?
나를 보며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남자를 향해 발을 옮겼다. 웃는 그 모습이 참…. 방금 다른 사람의 팔을 자른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허이고, 좋단다. 미친놈. 그가 어떻게 저 거리에서 손짓 한 번에 강도의 팔을 잘라 버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모르는 그의 능력 중 하나겠지. 멀뚱히 그렇게 생각하며 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 때문에 젖어 버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는 게 영 찝찝했다. 씻고 싶어. 찐득하게 눌어붙는 느낌과 온몸에서 나는 쇠 냄새는 내게 익숙한 게 아니었다. 온몸에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다. 핏물이 볼을 파고 흘러내렸다. 내가 그것을 닦기 전에 어느새 내게 다가온 남자가 손을 뻗어 피를 훔쳤다. 뭐 하자는 거야. 내 볼을 감싸듯 대고 있던 남자의 손이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남자의 손을 쳐냈다.
짜악!
…바위를 맨손으로 때리는 느낌이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슬쩍 보니 내 손이 시뻘게져 있었다. 고통 때문인지 손이 후끈했다. 이거야, 원…. 그냥 친 정도로 이렇게 된다는 건가? 몸이 얼마나 단단한 거야. 내가 모르고 세게 치기라도 했으면, 오히려 내 손이 부서졌겠어.
자신의 손이 쳐내진 게 나름 충격이었던 걸까.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입장에선 쥐가 고양이를 문 격일지도 몰랐다. 잠시 멈칫한 그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나와 머리 하나 정도 키 차이가 나서 그가 다가올수록 나는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적정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다. 그를 피해 뒤로 한 발짝 물러설 때였다. 찰박 하고 물을 밟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은행 안은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뒤쪽에서 인간의 몸에서 나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엇인가 뭉개지고, 무언가 찢어지고, 졸지에 떨어지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갔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겁먹은 비명과 고통의 찬 비명이 화음처럼 울려 퍼졌다. 내가 밟은 물은 어느새 내 발아래까지 넓게 퍼져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차근히 모든 상황을 눈에 담았다. 이 아비규환을 만든 눈앞의 남자는 이제 내게 살살 눈웃음까지 치고 있었다. 그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새삼 저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어쩌다 이런 놈이랑 엮이게 된 걸까. 역시 길을 물어본 게 잘못이었어. 휴대폰 지도를 좀 더 믿었어야 했다. 아니면 오늘 하루 집에서 쉬든가 해야 했었다. 복권 당첨이 뭐라고 신이 나 은행에 온 거야. 하지만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이 상황은 분명 그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또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겠지. 그러니 매사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 테다. 내 생각보다 더 또라이구나.
“내가 구해 줬으니까,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뻔뻔하네, 그런 요구를 할 거면 좀 더 잘 구해 줬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