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놈은.
“으음.”
내 집은 작은 욕실이 딸린 원룸이다. 한쪽 벽면에 베란다가 있는…. 그런 구조인데.
“시원하게 뻥 뚫렸네….”
원하지 않았던 증축이다. 집터가 안 좋은 걸까? 어떻게 하루에 두 번이나 집이 부서지는 거지? 창문이 부서지면서 그 여파로 전등도 망가졌는지 환했던 집 안은 캄캄했다. 부서진 벽에서 들어오는 달빛과 주변 건물의 불빛 덕분에 그나마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달빛에 의지해서 나는 방 안을 한번 훑어보았다. 원래도 엉망이던 집 안 꼴이 더욱 엉망이 되었으나, 뭐 그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대체 뭐 때문에, 뭔 이유로 남의 집 벽 한 면을 부숴 먹은 건지다.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초능력 같은 힘을 쓰는 헌터들과 괴물이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집이 부서진다? 첫 번째 이유는 헌터요, 두 번째 이유도 헌터다. 헌터랑 몬스터가 파괴한 건물들은 복구 헌터들에게 웬만해서는 수리를 부탁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분명 헌터는 영웅이 아니라 악당 취급을 받았을 거다.
손에 들린 수건을 허리에 감았다. 옷을 입고 싶긴 한데…. 창가에 가깝게 뒀던 옷장도 그리 무사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옷장 문 쪽이 아래로 향한 채 엎어지는 바람에 옷을 꺼낼 수가 없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과 벽을 구성했던 시멘트 조각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뿌려진 온갖 먼지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바닥에 벗어 둔 옷이라도 털어서 다시 입어야 할 거 같네…. 어두워서 이게 그거 같고, 저게 그거 같았다. 바닥의 옷들을 뒤적이는데 침대가 있는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 들어왔나 보다.
그보다 일단 내 팬티가 어디 있지…. 여기 어디 벗어 둔 거 같은데…. 아니면 바지라도. 위아래가 휑한 데다가 밖에서 찬바람도 계속 들어오니, 방금까지 따끈했던 몸이 빠르게 식어 버렸다. 절로 몸이 으슬으슬 떨려 빨리 뭐라도 입고 싶었다. 이제 늦가을의 밤바람은 너무 찼다. 방 안 가득 있던 먼지 때문에 코도 가렵고.
“에츄!”
솔직히 뭔 일이 터지고, 사고가 나도 일단 알몸은 아니지…. 이대로 누구랑 마주치면 그것도 참 꼴불견 아닐까. 드디어 반바지인지 팬티인지, 어쨌든 하의에 입는 옷을 찾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상의라도 거꾸로 입을 생각이었다. 그것도 꼴은 웃기겠지만, 알몸보단 낫지. 대충 바지를 껴입어 보니 아마 촉감상 잠옷 대용으로 입던 반바지인 듯싶다. 허리를 가리던 수건은 어깨에 걸쳤다. 자, 이제 침대에 뭐가 있나 볼까? 역시 오늘은 찜질방에 가야 하나 봐.
“…뭐야, 아무것도 없네.”
침대 위는 조금 어지럽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깨끗했다. 위치상 창가와 떨어져 있어서 별로 피해를 안 입은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이불만 털면 잘 수 있겠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불을 털면서 침대 헤드 쪽에 던져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112를 찍었다.
미친 거 아냐? 침대 밑에 뭔가 있다.
번호를 찍으며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멀어졌다. 저게 몬스터라면 이 근처에 헌터가 있을 테다. 헌터 협회 전화번호를 내가 알 리 없으니 112에 신고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이곳을 나가야 했다. 신호음이 가려는 순간 침대 아래 웅크리고 있던 것이 휙 하고 튀어나와 나를 짓눌렀다.
쿵!
“……!”
너무 놀라면 아무 소리도 못 뱉는다는데 딱 그 꼴이었다. 등을 내리찍은 것은 거대한 짐승의 앞발이었다. 이렇게 큰 게 침대 아래 있을 수 있는 건가. 내 침대 아래가 무슨 4차원 주머니라도 되나…!
“크르릉.”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솜털이 쭈뼛 섰다. 등을 내리찍고 있던 놈의 발톱이 무척 날카로워 이놈이 의도한 것은 아닐 테지만, 놈의 발톱이 여지없이 내 등살을 파고들었다.
아프다. 그런데도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입을 열면 저 괴물의 아가리가 내 목을 노릴 거란 걸. 고통을 참는 건 익숙해서 이 정도는 아직 참을 수 있었다.
놀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설상가상으로 바닥에 눌린 가슴 쪽도 아팠다. 벽돌 조각인지 유리 조각인지 하여튼 뭔가가 내 가슴과 배를 찌르고 있었다.
슬쩍 눈을 굴리니 손에서 놓친 휴대폰이 보였다. 다행히 신호가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받지 않는다. 신호가 간다는 건 112가 있다는 뜻인데…. 이곳에 경찰도 다름없는 건가. 아니면 이곳엔 112가 없거나, 다른 역할을 하는 곳인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받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괴물이 내 목덜미에 코를 들이밀며 킁킁거렸다. 고개를 숙인 덕분에 놈의 체중이 더욱더 내게 실렸다. 압사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눈을 굴려 놈을 훔쳐봤다.
집 안이 어둡고 괴물 자체도 시커메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놈은 늑대와 닮은 것 같았다. 놈은 어둠에 녹아내린 듯 온통 검은색이었는데, 와중에 눈만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샛노란 눈이었다.
앞뒤로 눌리니 고통이 가중돼서 몸에 힘도 안 들어갔다. 바닥은 차갑고 가슴과 배를 찌르는 것들이 피부에 박힌 것 같고, 등을 내리누른 앞발 때문에 점점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괴물은 그저 가만히 날 구경했다. 그 모습이 내 눈엔 마치 배부른 사자가, 그냥 장난으로 먹이를 잡고, 구경하고 있는 모습으로만 보였다.
미친놈. 이럴 거면 그냥 빨리 죽이라고 하고 싶었다. 내가 처음부터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로 다치진 않았겠지. 이곳의 사람들은 일반인조차 피부가 강철 같아서 유리에 베일 일도, 이런 짐승의 발톱이 등에 박힐 일도 없을 테니까. 힘들게 숨을 쉬는데 드디어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리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위험한 상황이라면 소리를 내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위험한 상황에서 소리를 내면 그게 더 위험한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그게 바로 위험한 거라고, 헛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쳐다보다 힐끗 놈에게 눈을 돌렸다. 놈은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는 듯. 그 눈빛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것도 같았고, 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같았다. 그에 나는 체념해서 그냥 한숨만 한 번 쉬었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곧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는지 전화를 끊었다. 항의할 테다. 그때 놈이 픽 웃었다. 나는 늑대한테도 웃는 얼굴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날 비웃는 건지, 아니면 전화를 받은 상대방을 비웃는 건지 모르겠지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점점 숨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눈이 파르르 떨렸다. 놈의 얼굴에 핀 웃음은 금방 가셨다.
휴대폰에는 흥미를 잃은 듯 놈은 다시 한 번 내 얼굴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부러 앞발에 더 힘을 준 것 같았다. 내 반응을 확인하려고, 정말 성격 나빴다. 다시 묵직한 감각에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한층 더 숨쉬기가 힘들어 헛숨을 들이쉬는데 놈이 눈을 마주쳐와 어쩔 수 없이 놈을 쳐다보았다.
놈이 내 눈을 핥았다.
“윽.”
기분 나빠! 물컹한 혀가 내 눈알을 훑고 갔다. 절로 욕이 나올 것 같았다. 그 행동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를 맛보듯 핥는 것만 같아서 더 기분이 나빠졌다.
하필 눈을 뜨고 있을 때 눈알을 핥아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대체 이놈이 나랑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날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 건지…. 가지고 놀려는 거 같기도 한데, 흐릿한 눈을 애써 뜨기도 귀찮아져 그냥 눈을 감았다.
아, 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다. 피곤해. 지쳤어.
이제 등이 아픈지 가슴이 아픈지도 모르겠고, 숨은 안 쉬어져서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 있기도 싫었다. 그냥 그렇게 다 놓고 정신을 잃으려고 할 즈음, 귀 바로 옆에서 낮게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한 차례 더 들리더니 곧이어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완전 물몸이네.”
젠장…. 나 이 짐승 새끼가 누군지 알 거 같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난 잠들었다. 기절이 아니라 잠든 거다.
***
‘그것’은 자신의 발아래서 어느새 태평하게 잠이 든 남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설마 싶었다. 그러다 규칙적이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그것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아무리 요즘 세상 사람들이 평화에 찌들어 안전 불감증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하지 않나? 김이 팍 새 버렸다. 이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아까까지 들끓던 짜증이 팍 식어 버렸다. 오죽 어이가 없었으면, 자신이 그리 좋아하던 괴롭힘도 할 맛이 안 났다. 이 남자는 이상했다. 처음 홀딱 벗고 나왔을 때부터 그랬다. 엉망이 되어 버린 집 안을 보면서도 그의 태도는 느긋하다 못해 태평했다.
그건 괴물이 본인의 등을 내리찍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비슷했다. 처음엔 놀란 듯싶다가도 이내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이젠 아예 근심 걱정 없는 얼굴로 잠들었다. 아주 입맛도 다시면서 푹 잠에 빠졌다. 차라리 기절한 거면 이해를 할 텐데 그게 아니라 잠들었다니, 이놈도 어지간히 제정신은 아닌 거 같다.
슬쩍 그의 등에서 발을 치웠다. 아까 처음 남자를 내리찍었을 때 자신은 별로 힘을 주지 않았다. 단순히 겁을 줄 요량으로 했던 행동이었다. 그저 남자가 도망치거나, 외부와 연락을 할 걸 차단할 생각으로 행동을 저지했을 뿐이었다. 물론 좀 귀찮게 굴었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겠지만…. 그러니 원래라면 이런 상처가 날 리가 없다는 말이다. 단순히 예를 들자면 ‘이봐.’ 하고 어깨를 살짝 쳤더니 어깨가 쑥 빠진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완전 물몸이다.
느릿하게 남자의 등에 난 상처를 혀로 훑었다. 한 번 핥고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피가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살을 파고드는 감각과 익숙한 혈향이 느껴졌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이 남자에게서는 ‘최악의 날’ 이후로 세상의 근본이 된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
이 세상에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제2의 혈액.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몸에 피와 같이 흐르던 마나는 일반인들이 각성자가 아니면서도, 튼튼한 이유기도 했다. 마나가 없는 인간이라니. 그것의 감각은 인간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났기에 이를 착각할 리도 없었다. 그에 잠깐 흥미가 생겼지만 그뿐이었다. 그것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자각이 들어서였다.
“박민후 헌터, 찾았습니다. 네, 여기 위치는….”
“…더럽게 빨리 왔네.”
그렇게 말하는 그것은 어느새 사람의 모습을 하고, 두 발로 우뚝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샛노란 눈만이 형형하게 번쩍였다.
그것은 자신을 ‘박민후 헌터’라고 부른 남자를 향해 사납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짐승과도 같아. 차주영은 짐승이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것인지, 사람이 짐승의 탈을 뒤집어쓴 것인지 순간 헷갈릴 지경이었다.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차주영은 얼굴을 굳혔다. 눈앞에 이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존재였다. 그는 너무 사나웠으며,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마치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다른 사람과 근본부터가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그는 너무나 인간다운 존재였다.
박민후.
이 세상에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갓 태어난 갓난쟁이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세간에 영웅 중에 ‘영웅’이라 알려져 있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정점에 선 자였다. 그는 너무나 강했다. 정말이지, 누가 그를 감히 상대할 수 있을까. 그는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그는 모든 이들의 우상이며, 모두가 그를 동경했고, 또 두려워했다.
헌터들 사이에서 그는 다른 의미로 ‘영웅’이었다. 타인을 지키는 영웅이 아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웅이 된 초대 헌터들처럼.
그는 그런 ‘영웅’으로서 더 유명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아군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에게 아군이란 필요에 의한 장기말이었으며, 몬스터를 유인할 미끼였고, 자신의 발판일 뿐이었다. 헌터들 사이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을 꼽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런데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는 건 그가 너무 강해서였다.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을까. 그는 왜 저렇게 강해졌으며, 왜 저렇게 성격이 더러운가. 그 이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가 고등학생 시절 최연소 S급 헌터로 각성하고, 이름을 떨쳤을 때 그의 과거를 캐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그 누구도 그가 각성하기 전 어디서 무얼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느 것 하나 알아내지 못했다.
박민후는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뚝’ 하고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거대한 재앙과도 같았다. 그의 적의가 사람이 아닌 몬스터에게 향했다는 게 그나마 이 세상에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존재였으나, 어찌어찌 이 세상은 그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괴물, 아니. 박민후가 한발 물러서 줬기에 가능한 처사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목줄이 생각만큼 짧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 긴 목줄 옆에는 ‘위험’이라 써진 팻말을 세워 두며, 대충 눈 가리고 아웅 할 뿐. 그렇기에 그는 번번이 목줄이 채워진 채 뛰쳐나갔다. 자유 시간이란 이름하에.
“이게 누구야. 차주영 헌터, 오랜만입니다?”
느릿하게 남자가 움직였다. 차주영을 쳐다보는 얼굴에는 지루함이 가득했다.
-차주영 헌터, 조심하세요.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치고요!
“그, 일반인으로 보이는 부상자가 한 명 있어서 물러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예?! 심각한가요? 부상자가 맞아요? 이미 죽은 건 아니고요?
“아뇨, 아직 살아 있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긴 하지만 숨소리가 일정한 걸 보면 그리 크게 다친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만약을 위해 힐러를 더 지원할게요. 곧 다른 헌터들이 도착할 거예요. 차주영 헌터는 일반인의 안전을 먼저 확보하세요. 박민후 헌터는 그다음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샛노란 눈이 번뜩였다.
“그래, 얘기는 끝났습니까?”
“예, 오랜만입니다. 박민후 헌터,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입니다.”
“난 아직 돌아가기 싫습니다.”
“하아…. 이제 당신은 어린애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른이야말로 노는 게 제일 좋을 나이죠, 그것도 모릅니까?”
이 일련의 말다툼이 박민후는 따분했다.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돌아갈 시간이라면서 사람을 찾느냔 말이다. 목줄을 끊고 도망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그들이 들을 리도 없으니 얼굴만 구길 뿐이었다. 자유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게 괜한 기분 탓은 아닐 거다. 이 세상은 점점 자신을 옭아매기 위해 혈안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귀찮은 일에 엮였는데 발아래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는 남자를 보니 괜히 짜증이 났다. 괜히 툭 발로 건드렸다. 몸이 크게 들썩였으나 그뿐, 잠든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느릿하게 남자의 한쪽 팔을 잡고, 잡아 올렸다. 남자의 뼈마디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당신네들은 일반인의 안전이 최우선이지요?”
“박민후 헌터, 그건 헌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을 건들지 마십시오. 일반인입니다. 당신이 멋대로 굴어도 될 존재가 아닙니다.”
“정말 재미없네, 그거 압니까? 차주영 헌터는 너무 꽉 막혔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박민후 헌터, 그 사람을 내려놓으십시오. 일반인입니다.”
“내가 이 남자를 죽여도… 그쪽이 뭘 할 수 있는데? 같이 죽는 거?”
“…내려놓으십시오.”
“고지식하긴.”
그렇게 말하며 박민후는 이름 모를 남자를 부서진 벽 너머로 집어 던졌다. 당연히 차주영이 그를 잡을 거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그걸 차주영 또한 모르지 않았다. 아까 그가 인이어로 나눈 대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박민후는 귀가 좋았고, 그러니 아무리 소곤거려도 그에 귀에는 들렸을 테지.
박민후의 생각대로 차주영은 베란다 밖으로 떨어지는 남자를 향에 몸을 날렸다. 남자의 집은 18층에 있었고, 아무리 요즘 사람들이 튼튼하다지만 저 남자는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웬만한 헌터라도 이 정도 높이에서 무방비하게 떨어지면 크게 다치고도 남았다. 차주영은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붙잡고 지면에 내려섰다. 품속의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깨지 않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그냥 잠이 든 것처럼 보였으나 가만히 남자를 훑던 차주영의 표정이 점점 험해졌다.
박민후는 그런 남자를 보며 참 어지간하다며 혀를 찼다. 차주영은 박민후가 무슨 짓을 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거라고 생각한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긴, 그럴 만했다. 지금 보니 등뿐만 아니라 가슴과 배 쪽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다. 일반인의 몸에 유리 파편들이 박혀 있는 모습은 꽤 심각해 보였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그 꼴을 힐끗 쳐다본 뒤 박민후는 차주영이 자신을 쓰레기 보듯 쳐다보든 말든 그림자 속으로 유유히 숨어들어 모습을 감췄다.
“하아… 박민후 헌터가 그림자로 도주했습니다.”
-끄으응…!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수색해야겠네요. 하여튼 우리 박민후 헌터는 야근의 요정이라니까요.
“…일단 힐러만이라도 불러 주십시오. 일반인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합니다.”
-예, 안 그래도 이산 헌터가 그 금방에 도착했다네요. 1, 2분 안으로 도착할 겁니다.
“예.”
***
짹짹.
지저귀는 새소리와 눈을 찌르는 햇빛 때문에 슬쩍 눈이 떠졌다. 오랜만에 푹 잔 듯, 몸이 상쾌했다.
…처음 보는 천장이다.
슬쩍 눈만 굴려 주변을 훑으니 새하얀 병실이었다. 그제야 병원 특유에 소독약 냄새 같은 게 옅게 맡아졌다. 그러다 잠들기 직전에 일이 생각나, 몸을 살폈다. 잠옷 바지만 겨우 입고 있던 헐벗은 상태가 아니라 TV에서 보던 환자복이 입혀져 있었다.
그렇다고 어디 아프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몸을 더듬어 봤지만 말끔한 맨살의 촉감만이 느껴질 뿐. 상처 같은 건 없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싶을 정도로 내 몸은 아주 멀쩡했다. 오히려 기분까지 상쾌했다.
그러나 그놈이 내 등에 발톱을 박아 넣는 감각이 지금도 생생했기에 어쩌면 후에 환상통처럼 떠오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건 늑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놈은….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주인공과 엮이면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으니까. 그놈은 성격이 나빴다. 정말로, 어젯밤 내가 겪은 것은 정말 새 발의 피다. 그는 세상에 몇 없는 S급이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아마 그보다 높은 등급일 것이 분명한 남자.
아주 개 같은 놈이 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거다.
쭉 기지개를 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누가 있었던 흔적이 남은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뿐이었고, 이 병실은 1인실이었다.
와, 1인실 처음 써 봐.
“몸도 멀쩡한데 집에 가도 되나….”
휴대폰도 없는 것 같아 심심했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보다가 또 꾸벅 졸았다. 옅게 잠이 들었을 때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거기엔 곰 같은 남자가 있었다. 어제 봤던 남자였다. 그때도 크다 싶었는데 누워서 보니 더 큰 것 같다. 그는 들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깨셨습니까?”
남자, 그러니까 차주영이었던가. 그의 물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잠을 쫓았다. 차주영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의자 작지 않아?
“어디 이상이 있거나 하진 않습니까? 일단 힐러가 치료를 했습니다만…. 그…. 피해자분의 몸이 굉장히 약한 상태여서 일단 입원 조치를 취했습니다.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예, 그렇습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돌았다. 몸이 약하다니….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지만, 이 세계에서 나는 갓난아기보다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입원도 해 본 거겠지.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럼 이제 집에 가도 되나요?”
“예? 아, 퇴원하실 겁니까? 더 입원하셔야 하는 게 아닌지….”
“괜찮아요. 원래 이런 몸이라서.”
“아,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세상 연약한 걸 보는 표정인지.
“돌아가는 길은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소지품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오신 거라, 혼자 돌아가시는 데 문제가 있을 겁니다.”
“그렇네요, 부탁 좀 할게요. 아, 참. 제 집이….”
“걱정 마십시오, 부서진 집은 좀 전에 수리가 끝난 것을 막 확인하고 온 참입니다. 이건 댁에서 가져온 옷입니다. 멋대로 집 안을 뒤져 죄송합니다. 그래도 돌아갈 때 입으실 옷이 없어서…. 그리고 수리비, 병원비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그거 다행이네요.”
차주영에게서 옷을 건네받자마자 환자복 단추를 풀었다. 아르바이트에 대한 생각이 번쩍 났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그 가게가 있다면 돈 걱정이 좀 줄어들지만 없다면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돈이 없다, 돈이 없어. 얼른 집에 가서 나의 1등 복권을 품에 넣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차주영은 내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자 고개를 숙였다. 아마 눈앞에서 누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는 게 좀 그랬나 보다.
“그….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저희 헌터 측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사고입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됐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살다 보면 몬스터한테 덮쳐지는 경우가 어디 저한테만 있겠어요.”
그치, 어디 나뿐이겠어. 그럼 그럼.
그렇게 말했더니 차주영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심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정말 이곳이 소설 속인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 풍경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으니까. 매일 아침 보던 풍경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서도, 이런 판타지 소설이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게 어디 나뿐이겠는가. 물론 자세히 찾아보면 다른 곳이나 새로운 곳이 나오겠지만…. 지금 겉으로 볼 땐 그렇다는 거다.
아쉬운 기분이 들어 ‘쿵’ 차창에 머리를 박았다. 흠칫 놀라 백미러로 이쪽을 보는 차주영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아까부터 저 남자는 내가 잘못 쥐면 어디 다칠까 어디 터질까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의 눈에 나는 어디 막 태어난 작은 병아리쯤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내 몸이 이곳에서 어린애보다 약하다지만, 그건 경도의 문제지…. 난 체력도 멀쩡하고, 겉으로 봤을 때 그냥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신체 건강한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저렇게 안절부절못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쪽이 운전만 잘하면 내가 여기서 다칠 일이 없을 텐데. 그냥 앞이나 잘 봤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평화로운 도심을 보고 있자니 어제 봤던 괴물은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나는 점점 지금이 소설 속의 어느 쯤인지 알 수 없었다. 이 평화로움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있는 폭풍전야인가 그도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찾아온 평화인가.
그나마 정확히 하나 확실한 건 내 생각보다 많은 것이 지나갔다는 것 정도다. 어젯밤 내가 기억하던 몇 가지의 굵직한 사건들을 찾아보면서, 그 모든 사건이 이미 지나간 후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대체 언제인 걸까. 보통 소설에서의 1년은 매우 긴 편이었다. 그러다가도 몇 년은 엄청 짧게 진행되기도 한다. 단지 1년 동안 수십 가지의 대형 사고들이 벌어지고, 주인공은 그걸 헤쳐 나가는 게 많을 뿐. 그런 흐름이라면 모든 것이 끝난 뒤일 수도 있었다.
내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그 소설은 이미 완결이 난 소설이었지만, 내가 읽은 건 준비된 이야기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은 내 생각대로 이미 정해진 이야기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닐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미 진작 지나 버렸다면?
이야기가 끝난 뒤 남은 사람들은 과연 무얼 할까?
책은 끝났으나 이곳은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그 뒤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지금 이리 고민해 봤자. 모르는 건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는 거였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제대로 찾아봐야 했다.
하나 다행인 건 내가 아는 것들이 그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잔재라는 것으로, 내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것 정도다.
나는 이야기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배경으로 사용되는 엑스트라 1로 살고 싶었다. 주인공이든, 단역이든, 조연이든, 이름이 거론되는 인간들과 엮여서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모름지기 주인공의 친구나 조연의 친구야말로 사건·사고의 피해자가 되기 가장 쉬운 법이지 않은가? 그들과 엮이면 이름이 없는 엑스트라여도 삶이 험난해지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사건은 주인공을 위해 흘러간다. 그건 세계의 흐름이 준비한 것이니, 그 흐름에 낀 불쌍한 엑스트라는 어쩔 수 없이 주인공들을 위해 험난한 생활 속에 던져져야 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걸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게 누군지 아나? 길 가던 엑스트라다. 주인공은 꼭 한발 늦게 등장해서 사건의 휘말린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을 구하지. 사실 따지면 엑스트라가 젤 위험했다. 주인공들은 능력이라도 있지. 엑스트라는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 대부분이다.
끔찍해! 나는 그냥 복권 1등 당첨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시민 역을 하고 싶단 말이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뇨. 그냥 좀 멀미가 나네요.”
차주영을 보았다. 그리고 어제 만난 놈을 생각했다. 어쩌면 어젯밤을 기점으로 나는 이미 망해 버린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흐름에 몸을 던진 것일까? 지금부터 잘하면 되지 않을까? 나는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싶단 말이다. 한동안 집구석에서 나가지 않으면 괜찮을까? 아니…. 그러다간 사건에 휘말려 죽는 게 아니라 뉴스 1면에 ‘OO 아파트에서 20대 남성이 아사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하고 뉴스에 실리게 되겠지. 그러니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게 좋을 거다. 그냥 늘 하던 대로 아르바이트도 하고, 집에 갈 때면 의미 있게 천 원 써서 복권도 사고, 매일 토요일 밤 8시를 기다리는 거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럼 중간은 가겠지.
나는 진심으로 이곳이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세계이기를 바랐다.
“다 왔습니다.”
“뭐야, 꽤 가까운 곳이었네요. 이럴 거면 그냥 걸어와도 괜찮았을 뻔했어요.”
“아뇨, 걸어오기엔 거리가 애매합니다. 게다가…. 몸도 약하시고.”
“…….”
오랜만에 할 말을 잃었다. 그에게 몸의 경도와 체력은 다른 부분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어차피 말해 봤자 소용없겠지.
“제가 그쪽이 걱정하는 것만큼 그렇게 약하진 않아요. 괜한 걱정이에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말을 말자. 차주영을 무시한 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니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사전에 달리기는 없다. 닫히든 말든 느릿하게 걸어가는데, 어째선지 안에 탄 사람이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쓸데없는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차주영은 내 바로 뒤에서 따라 걷고 있었다. 안 바쁜가. 그는 꽤 바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뭘요, 몇 층 가세요?”
“18층이요.”
“어머, 같은 층이네! 이거 어쩌면 이웃일지도 모르겠어요. 음? 이상하다. 그런데 내가 이 아파트 오래 살았는데 어째 한 번도 못 본 거 같지?”
“뭐….”
“같은 층이니 총각도 알겠네! 어젯밤에 우리 층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거! 글쎄…! 1808호였나? 1809호였나?”
“1808호요.”
“맞아! 거기 몬스터가 들어와서 집이 완전 개판이 됐다지 뭐야? 어쩜 좋아. 내가 다 안타까워서, 원…. 요즘 왜 이리 몬스터들이 집을 부수고 다니는 줄 몰라. 헌터들이 일을 안 하나….”
난 힐끗 차주영의 눈치를 봤다. 그 헌터가 여기 있습니다. 아주머니. 이 남자는 꽤 유명할 텐데 아주머니는 눈치를 못 채신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이러는 걸까. 후자면 정말 대단하다 싶고, 헌터가 그 정도밖에 안 되나 싶기도 했다. 전자이길 바란다.
“우리 집도 그렇게 되면 어쩌지 너무 걱정돼서 밤잠을 설쳤다니까? 그 집 사는 사람 누군진 몰라도 참 안됐어…. 낮에도 집이 한번 무너졌는데, 밤에 또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람.”
“그거 제 집입니다.”
“아…. 그, 내 입이 주책이었네. 미안, 미안해요.”
“아닙니다.”
시끄럽게 떠들던 아주머니는 금세 조용해졌다,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아주머니는 아니었나 보다. 엘리베이터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점점 안색이 나빠지는 아주머니를 한 번 보고, 그냥 숫자판이나 보면서 멍청히 있었다. 조용하니 좋네.
띵.
아주머니는 문이 열리자마자 내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허둥지둥 내리셨다. 빠르게 멀어지는 아주머니를 뒤로한 채 차주영도 나도 별말 없이 내 집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고요한 복도를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발소리가 참 어떤 식물 캐릭터를 생각나게 하는 거 같단 실없는 생각을 했다.
“이제 그만 가시죠? 제가 집에 무사히 도착한 것도 보셨고. 여기서 더 어물쩍거리면 정말 헌터는 일도 안 하고, 시간 때운다는 인상이 남을 거 같네요.”
“들어가시는 것까지만 보고 가겠습니다.”
“진짜 고지식하네. 그런 말 많이 듣죠?”
“…….”
차주영은 내 눈을 슬쩍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걸 흘기곤 도어락을 열어 번호를 찍었다. 드디어 집이다. 나는 신나서 문을 열었다가 다시 문을 닫았다.
“……?”
“…….”
차주영이 이상하게 쳐다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순간 내 집이 아닌 줄 알았다. 이사를 오기 직전에 봤던 집 모양이 이랬을까.
“왜 그러십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 반응이 이상해 보였는지 차주영이 내 뒤에서 내 집 안을 여기저기 확인했으나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냥 신기해서요. 깨끗해졌네요. 엄청!”
그렇다! 엄청 깨끗해졌다! 내가 집을 순간 착각한 건가 싶을 정도로! 뭐지? 원래 이런 청소 서비스도 해 주는 건가?
“아, 몬스터가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원상 복구 시키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몬스터가 꽤 어질렀더군요. 복구팀이 혀를 내둘렀습니다. 벽은 빠르게 복구가 되었는데 방은 복구가 더뎌져서 고생을 좀 했다더군요.”
“…그, 렇군요.”
그거 몬스터가 한 거 아닙니다. 제가 했습니다.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 나는 원래 정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뭐 삶이 바쁘기도 했고, 그 나중에 치우려고 했는데….
원래부터 내 집 꼴은 무척 엉망이었다. 그놈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놈은 그냥 거기에 손만 얹었을 뿐이다. 절연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이렇게 생긴 거랑 따로 노냐.’였다. 평소 단정하단 말을 많이 듣고, 그렇게 생겼단 말을 많이 듣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내 입으로 그런 말 한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 그런 사람들 모두 내 사물함이나 내 가방 안을 보면, 언제나 기함을 하곤 했다.
어떻게 이렇게 지저분할 수 있냐고.
난 억울했다. 내가 볼 땐 그렇게 지저분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것저것 버리지 않은 게 모여서 그래 보일 뿐, 여기저기에 내 물건들이 널려 있을 뿐이지. 더럽진 않았다! 내가 찾기 쉽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억울해!
과거 일을 생각하자 저절로 뚱한 표정이 됐다, 물론 금세 원래의 무표정으로 되돌아왔기에 차주영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남이 뭐라든 내 알 바냐. 이번 건 좀 부끄러웠지만. 나는 진정하며 내 뒤에 여태 서 있는 차주영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별문제 없어요. 이제 진짜 그만 가세요.”
“예, 그럼 모쪼록 몸조심하십시오. 또 어제와 같은 문제가 생겼을 시에는 이쪽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헌터들이 달려올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차주영은 명함을 내밀었다. 헌터 협회라고 적혀 있는 심플한 명함이었다. 나는 명함에 적힌 번호를 확인했다. 역시 112는 아니었구나. 차주영은 정말 이제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뒤돌아 나갔다.
***
청소의 힘인가 싶을 정도로 이 집이 참 낯설었다. 내 물건들은 각자 원래 자기 자리는 여기였다는 듯 정리되어 있었다. 한창 집을 구경하다 식탁에 놓여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디… 연락 하나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슬슬 불안했다.
알바 처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얼마간 가더니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익숙한 사장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하고 나는 내가 일하던 가게의 이름을 말하며, 그곳이 맞냐고 물어보았다. 상대방은 전화를 잘못 거신 거 같다며 전화를 끊었다.
난 한동안 멍하니 꺼진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꽤 오래 일했던 가게는 이곳에 없나 보다. 다른 곳에도 전화를 해 봤다. 결과는 똑같았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내 월급…!”
오늘이 월급 받는 날이었는데! 한 달 일한 게 이렇게 날아가다니…. 내 월급. 내 돈.
마른세수하며 잠시간 멍청하게 앉아서 휴대폰을 노려봤다.
“후…. 뭐 이제 어쩌겠어. 이미 끝난 일인데.”
그래. 소설 속에 들어왔는데 월급이 어디 있겠어. 휴대폰과 같이 식탁 위에 고이 놓여 있는 복권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이제 너밖에 없다.
***
전망이 좋은 이곳은 바로, 헌터 협회 건물 가장 최상층에 위치한 한 회의실이다. 던전에서 채취한 강화석으로 만든 강화 유리로 사방이 둘러싸인 회의실은 도시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특정 능력의 정점에 섰다고 알려진 고위 헌터, 즉, 각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분기마다 모여 회의를 열곤 하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 한가운데 묶여 졸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박민후 헌터!”
결국 한 중년의 헌터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를 참지 못한 그가 책상을 짚자, 그 간단한 행위만으로 테이블은 그 수명을 다해 버렸다.
어찌어찌 토요일 밤 도망친 박민후를 월요일 아침에서야 겨우 붙잡는 데 성공한 이들은 아침이 돼서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 상관에게 일을 보고하고, 그 상관들은 푹 쉬시다가 부하들의 연락에 이렇게 부랴부랴 아침부터 모이게 되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나 잡아 봐라.’를 하던 박민후가 조는 건 어쩌면 아주 당연한 거였다. 죄인에게나 쓸 법한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사슬과 능력을 억제시키는 밧줄 같은 걸로 온몸이 꽁꽁 묶인 남자는 반쯤 졸며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일정하게 까딱였다. 회의 내용은 안중에도 없단 소리다.
“대체 언제까지 그럴 겁니까! 예?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협조를 하겠다. 스스로 약조해 놓고서, 이렇게 틈만 나면 나 몰라라 해도 되는 건가요?”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잘 아시잖아요. 당신의 힘이면 일이 빨리 끝날 텐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말은 잘하네.”
“뭐라고요?”
박민후가 쩌억, 하고 하품을 했다. 그는 그냥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다.
“당신네도 헌터면 스스로 해결할 생각을 좀 해 보시죠, 나한테만 매달리기 쪽팔리지도 않습니까? 나이는 허투루 드셨나.”
“박민후 헌터!”
“대체 뭐가 불만입니까? 세상은 당신 덕분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예전만큼 큰 위협도 더는 없지요.”
“당신이 그렇게 날을 세울 일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렇게 간간이 저희와 같이 던전을 청소하거나, 이렇게 회의만 꾸준히 참여해 달라는 게 안 될 부탁입니까?”
“그리고 밖을 나돌아다니지도 말고?”
“……!”
촤르륵, 툭, 툭.
어느새 그를 묶어 둔 사슬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쿵, 그것들이 하나둘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광경에 그를 제외한 헌터들이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저런 거로 그를 묶어 둘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그래도 그가 순순히 묶여 왔으니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여느 때처럼 얌전히 있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박민후는 슬슬 짜증이 났다. 언제까지 이렇게 봐줘야 할까. 이들은 점점 주제를 모르고 기어올랐다. 이 모든 게 그저 그에게는 단순한 유희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은 알아야 했다.
“본인들 입으로 말했네. 그래, 나는 할 만큼 했어. 그렇지?”
가끔 박민후는 자기가 이런 처지가 되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살아남았나 하고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이러려고 힘을 갈구했나. 열여덟 살. 그날의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가 자신의 영웅이 되었을 때. 만약 그때 이렇게 될 거란 걸 알았다면 나는 뭔가 다른 선택을 했을까? 누군가에게 신이 준 힘은 축복이었을 테지만 자신에게 그것은, 축복은 아니었다. 그 힘은 어느새 그를 괴물로 만들었으니까.
“이 세계를 말아먹을 재앙을 막아 준 게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군.”
한 자세로 가만히 있었더니 근육이 뭉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건 분명 착각이었으나, 착각이 아니길 바라며 일부러 간단하게 몸을 푸는 시늉을 했다.
그의 어투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듯 이어졌다. 그가 말을 할수록 회의실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기 있는 모두가 덤빈다 한들 그를 이길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그걸 그들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나 방도가 없었다.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나도 알아, 5년이면 강산이 변할 시기긴 하지…. 그래서 이렇게 태도가 변했나?”
박민후는 특유의 사나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평소에도 잘 웃는 편이었으나 짜증이 나면 그 웃음이 마치 짐승의 것처럼 보였다. 두려움이란 것이 그들을 좀 먹어 갔다.
박민후의 발아래에서부터 잉크가 번지듯 퍼져 나온 검은 그림자는 어느새 그들을 옭아매고, 회의실을 집어삼켰다. 그제야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저마다 얼굴이 사색이 된 꼴이 웃겨, 배를 잡고 웃는 그의 모습은 어느새 짐승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주둥이에서 사나운 이빨이 번뜩였고, 사람 같지 않은 그 샛노란 눈이 형형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은 늑대를 닮았으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어둠과도 같았다. 언뜻 보면 형상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 어둠 그 자체 말이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해졌을까? 내가 스스로 목줄을 걸었다고 해서, 그 줄을 당신네가 쥐고 있다 착각이라도 하는 건가?”
사방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 노기는 없었으나 그들은 회의실 온도가 한층 내려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몸이 떨려 왔다. 입김이 나오는 것이 착각인지, 이 추위가 착각인지, 무엇이 현실인지 좀처럼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 추위에 누군가의 이가 ‘딱딱’ 부닥치는 소리가, 모두가 숨을 집어삼켜 조용한 공간에 울렸다.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존댓말을 써 줄 때 ‘예.’ 하고 들어 처먹으란 말이야.”
이빨을 숨긴 짐승이 느긋하게 몸을 움직였다.
“당신네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조차 나에게 떠넘기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어디까지 가나 하고 두고 본 거라고 생각은 못 하나 보지?”
느릿느릿 거대한 덩치가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식은땀이 절로 났다. 무서웠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눈물이 터진 헌터도 있었다.
“이곳에 헌터가 나뿐인가? 나만 헌터인가?”
“그, 그거야 당신이 나서면 더 빨리 정리가 되니까…!”
“그럼 당신은 이 세상에 없어도 되겠군.”
“……!”
입을 잘못 놀린 헌터는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박민후라면 저를 단숨에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두려워 저를 도와줄 이가 하나 없다는 것도 잘 알았기에 지목당한 헌터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안 그래? 내가 나서면 빠르겠지. 솔직히 당신네가 없어도 내가 다 할 수도 있어. 그럼 당신네는 이제 필요 없겠네! 그렇지 않나?”
그들의 눈앞에 선 그것은 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정체불명의 괴물이었다. 그것은 공포였고, 그 공포는 미지의 것에 악의를 품었다. 악의는 또다시 혐오의 감정을 품게 했다. 그 모습을 그 감정을 찬찬히 지켜보던 박민후는 그저 웃었다. 우습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새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난 이제 좀 쉬고 싶어. 여태 열심히 했잖아.”
그 목소리는 퍽 여려, 그가 아직 스물 중반 어린 나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아니면, 내가 목줄을 끊어 버려야 속이 시원한 건가? 응? 우리 제발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합시다, 여러분.”
박민후는 퍽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웃음조차 무서워했다. 그 꼴을 보다, 그는 아무 미련 없이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떠난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제가 나가자마자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는 그저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후회한다.
그는 후회한다.
그는 계속 후회했다.
과거 자신의 선택은 잘못되었다고.
“이딴 세상 구하는 게 아니었어.”
박민후는 세상을 구한 뒤 언제나 그것을 후회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죽기 싫어 살아남았으나, 그저 자기 자신을 구했을 뿐인데도 세상은. 박민후를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영웅.
나는 영웅인가.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건만. 다른 이들은 무얼 보고 자신을 영웅이라 하는가.
그렇게 저를 영웅으로 만든 세계는 어느새 저를 괴물로 만들었다. 그의 강함은 그들에겐 두려움이었기에, 그들은 박민후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괴물은 스스로 제 목에 목줄을 채웠다.
자신은 인간이다. 그래야만 했다.
괴물이 스스로 목줄을 찼을 때, 그의 행동은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샀다. 세상은 그에게 ‘어째서 자신의 목에 스스로 목줄을 채웠나.’ 하는 의문을 품었고, 겁도 없는 자가 그것을 본인에게 물었다. 그에 그는 별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자신을 괴물이라 하기에 자신도 인간임을 깨달으라고 목줄을 찼다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괴물이기에 스스로 목줄을 채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모순적이었으나 그가 그렇다 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렇게 목줄은 채웠으나, 그 목줄 끝을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만은 그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 목줄을 손에 쥐는 이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고, 박민후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밖에 나오니 쓸데없이 날이 화창했다. 자신의 기분도 모르고,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박민후는 자신이 등진 헌터 협회 건물 안이 아비규환이 되든 말든 이대로 어디로든 가 버리고 싶었다. 지금 기분이 바닥 끝까지 처박혀, 힘 조절을 못 할 거 같아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굳이 내가 참아야 하나 싶었다. 그냥 다 부수고 다닐까 잠깐 생각하는데 시야 끝에 뭔가 잡혔다.
단정한 생김새가 이상하게 시선을 끌었다. 그 남자는 휴대폰을 보며, 길을 찾는 것인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만난 지 그리 오래된 거 같지 않은데. 언제였지? 가만히 서서 기억을 더듬는데,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춘 남자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가 어찌나 당당하던지. 뭐 하자는 걸까 싶었다. 자신을 보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저에게 호감이 있다고 해도 멀리서 물끄러미 볼 뿐이지, 이렇게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놈은 뭔데 이리 당당하게 다가오는 건지. 멀뚱히 서서 그가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그래, 이 무심한 얼굴을 분명 어디서인가 봤다. 남자는 자신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야 입을 열었다. 영혼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저기요, 길 좀 물읍시다.”
“아, 생각났다.”
엊그제 그 물몸?
박민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