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그럴 수도 있나? (2/18)

1. 그럴 수도 있나?

“이야….”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오늘만 몇 번째 나오는 감탄사인지 모르겠다.

“아까 그 아저씨가 걱정한 집이 내 집이었네. 내 집….”

하도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 같아 한 번만 치고 내렸지만.

이야, 하필 많고 많은 아파트 중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라니….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괴물이 뭘 알고 부쉈겠어? 어쩌다 눈앞에 있으니까 있는 거 부순 거겠지…. 어쩌겠어. 이미 부서진걸. 흑흑, 이 거지 같은 세상에 버려지다니….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을 때부터 설마설마했지만. 역시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라니까. 이거 보험… 되려나.

근데 이거 로또 각인가? 로또 각이지? 살면서 해 보기 어려운 경험이잖아. 이런 생경한 경험을 했으니… 이따가 로또 사러 가야겠다.

“끄악! 이놈의 괴물 자식! 아니 하필 부숴도 여길 부수냐! 아오!!”

“어휴, 이럴 줄 알았어. 다들 보험 회사에 연락부터 해요.”

“그래야겠어…. 어휴. 이걸 다 언제 고쳐.”

“아, 난 보험 안 들었지.”

생각해 보니 난 보험에 대한 건 잘 모른다. 그냥 주변에서 보험, 보험 하니 들어 두면 좋은 거 같다는 정도? 그렇다 보니 집에 보험을 들 생각도 안 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불이 나서 집이 망가지는 걸 생각해 봤지, 설마 괴물이 집을 부숴 먹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아냐, 집주인이 보험을 들어 두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오늘은 일단 찜질방에 가야 하나…? 친구라고 하나 있던 놈이랑은 절연해서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아니, 먼저 집주인이랑 연락을 해 봐야 하나? 집주인 기절하는 거 아니야? 어휴, 다 귀찮네…. 그냥 집이 알아서 고쳐졌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편하고 집주인도 안 울고 얼마나 좋아. 게다가 내 전 재산이 다 저 무너진 건물 안에 있는데….

찾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냥 가서 뒤져볼까? 그래. 일단 잔해를 뒤져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끄러미 무너진 아파트를 쳐다보았다.

…쓰레기장에서 바늘 찾기겠군. 그래도 윗부분만 부서진 거니까…. 중간층까지는 멀쩡하지 않을까. 아, 아닌가? 위험하려나? 그런데 돈 없어서 길거리에 나앉는 거랑 무너진 건물 안에 들어가는 거랑 그게 그거 아닐까. 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부서진 아파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 좀 더 가까이서 봐야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발짝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다들 물러나 주세요! 지금부터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리는 커다란 사자후에 걸음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거의 조건 반사급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 의지가 깃든 행동이라기보단, 목소리를 듣자마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고 하는 게 맞았다. 마치 게임에서 도발 스킬에 당한 몬스터처럼.

그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반드시 돌아봐야 할 것만 같은 강제성이 느껴졌으니까. 와, 목소리 대박. 이 정도는 되어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소리가 난 곳에는 정장을 쫙 빼입은 수십 명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이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 큰 소리로 외친 사람은 아무래도 선두에 서 있는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여자인 것 같았다. 이야, 배 속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였어. 심금을 울리네. 성악 하면 잘 어울리겠다.

“아이고, 드디어 왔구먼!”

“이봐, 헌터 양반! 왜 이리 늦게 오는 거야? 당신네가 늦게 와서 집이 홀딱 무너졌잖아!”

“아저씨도, 참! 저희도 빨리 온 거예요! 아시잖아요?! 요즘 던전 청소 기간이라 일손이 얼마나 부족한데! 뉴스만 봐도 뻔히 알겠구먼!”

“그래도 좀 더 빨리 왔어야지!”

“빨리 왔다니까요? 방금까지 여기서 건물 부수던 몬스터도 잡고, 후다닥 달려온 건데…! 게다가 사상자도 없고! 겨우 건물 몇 개 부서진 것뿐이잖아요!”

건물 몇 개 부서진 게 ‘겨우’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던가.

“저희도 바빠요! 몬스터가 어디 한둘인 줄 아세요? 하긴, 아저씨가 몬스터를 잡아 봤어야 이 일이 힘든 걸 알죠.”

“우리 세금으로 월급 받아먹으면 그 정돈 해야지!”

“아. 예, 예. 됐고, 지금부터 작업해야 하니까 다들 뒤로 빠지세요. 저희 말을 들어주셔야 집에 빨리 들어가실 수 있어요! 밥 먹어야죠! 벌써 저녁인데!”

“차주영 씨! 사람들 좀 뒤로 물려요!”

“알겠습니다.”

여자는 맨 뒤에서 따라오는 덩치가 곰만 한 남자에게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보험 회사 사람들인가? 보험 회사 사람들이라기엔 되게 다들 건강하고 힘세 보이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다들 헬스 다니나 보다. 슬쩍 내 팔다리를 보고 다시 건강미 넘치는 보험 회사 사람들을 봤다.

…톡 치면 톡 부러질 거 같다. 누가? 내가.

“이봐요. 이곳에 서 있으면 다치니, 뒤로 물러나십시오.”

“아… 예?”

언제 온 건지 방금까지 꽤 뒤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곰 같은 남자가 어느새 내 앞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덩치 차이가 이렇게 날 일인가…. 아마 남자 뒤에서 보면 내가 보이지도 않을 거다.

남자의 눈은 좀 신기했다. 그도 그럴 게 쉽사리 볼 수 없는 보라색 눈이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마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상처가 뒤이어 눈에 띄었다. 연한 새 살이 올라와 있는 상처는 남자의 그을린 피부 덕분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든 건 조금 뒤였다.

보라색 눈이라니…. 한국인이 아닌 건가? 혼혈…. 아니, 뭔가 이상하게 낮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니, 정확힌 본 건 아니고….

“이봐요.”

“아, 죄송합니다.”

인상을 쓴 남자의 얼굴은 꽤 사나워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곤 슬쩍 뒷걸음쳤다. 남자는 그런 내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내가 뒤로 물러나는 걸 확인하자 다른 곳으로 가 버렸으니까. 남자가 무서워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괜한 말싸움이 붙을까 싶어 그런 거였지. 분명 저 남자를 나는 난생처음 보는데도 이상하게 어딘가 익숙했다.

내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고개만 연신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사이, 예의 그 보험 회사 사람들은 빠르게 아파트 주민들을 뒤로 물리고, 무너진 건물들을 빙 둘러쌌다. 흡사 강강술래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뭐 하는 거람.

목소리가 큰 여자랑 덩치가 큰 남자만은 그들 뒤로 물러서서 지시를 내렸다. 둥글게 서서 아파트 잔해에 손을 뻗은 보험 회사 사람들이 무어라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건물의 잔해들이 하나둘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그것들은 이내 저마다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영상을 되감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분명 방금까지 무너져 있던 아파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상시의 모습을 하고 우뚝 솟아 있었다.

“허….”

솔직히 도심 속에서 활보하는 괴물을 봤을 때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늘 나의 그럴 수도 있지 마인드에 문제가 생길 거 같다. 이것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이야, 역시 헌터들은 달라? 막 이렇게 부서진 것도 거뜬하게 고치고 말이야!”

“에이, 이 사람아. 그건 아니지. 헌터라고 다 똑같은 줄 알아? 이런 일 하는 헌터들은 다 말단이야 말단!”

“모르는 소리 마세요. 등급 낮은 헌터들 중에도 건물 복구하는 능력을 갖춘 헌터들이 따로 있다고 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이런 역할인 거지, 말단은 아니죠.”

“애초에 능력이 다르잖아요. 뭔 말단 타령이에요. 이 사람들은 이런 복구 능력밖에 없어서 싸움은 못한다고요.”

옆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다 보니, 나는 그제야 아까 그 남자가 왜 낯이 익은지 떠올릴 수 있었다.

남자는 내가 며칠 전에 읽었던 현대 판타지 소설 속 조연과 생김새가 아주 똑 닮아 있었다. 저 여자도 그랬다. 그리고 방금 내가 본 되감기 능력도 그 소설에서 나오는 ‘복구팀’의 능력과 똑같았다. 소설을 읽을 때 ‘역시 이런 능력이 있어야, 초능력을 도시에서 쓰지.’ 하며 봤었는데…. 그런데 그걸 이렇게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자, 자! 수고했어요. 복구팀! 지금 바로 돌아갑니다. 방금 연락이 왔는데 을지로 3가에서 또 건물이 부서졌다네요.”

“예에? 아닌 거긴 뭐 맨날 부서져요!?”

“어떤 헌터가 실수했대요. 힘 조절을 못 했다나….”

“그놈보고 고치라고 해요!”

“이번엔 누구예요?! 또 어느 놈이 힘을 못 숨겨서 건물을 부숴 먹어?!”

“대체 누구예요, 그놈!”

“그…. 박민후 헌텁니다.”

“…….”

한참 짜증을 부리던 사람들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입을 ‘헙’ 다물었다.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고, 할 말을 잃은 듯 삽시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하하하, 저희의 본분이 뭐죠? 복구! 복구입니다! 젠장!”

“난 건물 복구할 때 살아 있음을 느껴요! 흐으흑…!”

“울지 말고 다들 갑시다, 가요!”

일부러 밝게 목소리를 내는 일행을 보던 여자는 그 반응들에 멋쩍게 웃으며 제 일행을 토닥였다.

“…유람 씨가 얘기 좀 해 줘요! 기물 파손 그만하라고!”

“저도 노력은 하고 있어요! 노력은! 그렇지만! 안 되는걸!”

“좀 더 노력해요! 할 수 있다, 강유람!”

“유람 씨… 우리가 놈이라고 한 거 비밀로 해 주기예요. 전 아직 더 살고 싶어요.”

어째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던 사람들은 이러다 늦게 왔다면서 한 소리 또 듣겠다며 허둥지둥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숨 쉬며 보던 여자가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치며 그들을 구경하던 주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해도 지는데 다들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그리고 여러분, 재난 문자가 오면 제발 무시하지 마세요!”

보험…. 아니, 복구팀은 그렇게 처음 이곳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아파트 주민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마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바글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반대로 꺼져 있던 불들이 하나둘 켜지는 걸 나는 멀뚱히 서서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나 혼자 남았을 때, 그제야 내 시선은 아직까지 불이 켜지지 않은 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내 집이었다.

방금 벌어진 상황으로 보아 저곳이 정말로 내 집이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에 들어와 버린 것 같다. 조금 전 떠난 사람들은 내가 살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하물며 괴물도 그랬다.

소설 속에 들어왔는데 내 집이 과연 제대로 존재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저 집은 겉모습만 같을 뿐이지 더 이상 내 집이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경찰서에 가도 신원 불명으로 붙잡히는 거 아냐? 지금으로선 무엇 하나 명확한 게 없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걸까? 오늘 내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 게 뭐가 있을까?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평소처럼 아침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그래, 두 갈래 길에서 나는 늘 왼쪽으로 갔었다. 다만 오늘은 단순한 변덕으로 오른쪽을 택했었다.

겨우 그것뿐이었는데.

“…이번엔 진짜 로또 당첨될 수 있을 거 같아.”

어디 이런 경험이 쉬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진짜 느낌이 왔다. 그렇게 나는 룰루랄라 몸을 돌려 편의점으로 향했다.

***

딸랑.

“안녕히 계세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신난 마음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손에 들린 복권을 소중히 왼쪽 가슴께의 주머니에 넣고, 가슴께를 도닥였다. 음, 좋아.

“1등…. 느낌 왔어. 이건 반드시 1등이야.”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1등 당첨되면 뭐부터 할지 하나둘 꼽으며,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아주 가벼웠다. 이곳이 정말 소설 속이라면,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길에 나앉을 수도 있겠지만…. 왼쪽 가슴께에 있는 종이 한 장이 날 진정시켰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이미 벌어진 거 어쩌겠어. 그럴 수도 있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삑삑삑삑.

삐로리, 철컹!

“…열리네.”

손에 익은 비밀번호를 누르며 내심 안 열리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찬 기운이 나를 반겼다. 더듬더듬 벽을 짚어 전원을 켜자 환해진 집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집이었다. 아침에 벗어 둔 옷가지와 어질러져 있는 방 모양새가 퍽 익숙했다. 나는 바닥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발로 쓱쓱 밀며, 들고 있던 가방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소설 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내 집이 버젓이 있으니 새삼 사실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 정말 말도 안 되지. 솔직히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그냥 제가 아까 본 사람들은 그저 소설 속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이고, 그냥 갑자기 괴물이나 초능력자가 나타났다는 게 더 말이 될 거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길 가다 소설 속에 들어오겠어. 그저 오른쪽 왼쪽 어느 쪽으로 갈까 하다 평소와 다른 길을 선택한 것뿐인데….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잠금을 풀고 바로 인터넷에 들어가 헌터에 대한 것을 찾아보았다. 여기가 정말 소설 속이라면 헌터라고 검색창에 쳤을 때 뭔가 특이한 게 나올 거라 생각했다. 관련 뉴스나 블로그나…. 뭐라도 나오겠지.

나는 여러 가지를 검색해 보았다. 아주 간단한 것부터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것까지. 한 시간 정도 그렇게 뒤졌을까? 손에 들린 휴대폰이 따끈한 핫팩으로 변했을 때 나는 찾는 걸 멈추고 한 뉴스 기사를 멍하니 쳐다봤다. 방금 새로 올라온 따끈한 뉴스 속보였다.

「불광천 밑바닥에서 F등급 던전 브레이크 발생!

오늘 오후 5시경, 불광천 밑바닥에 생긴 F등급 던전 ‘루펄의 숲’이 결국 폭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알다시피 던전 등급에 따라 우선 처리 순서가 달라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낮은 등급의 던전은 최하위로 밀리기 일쑤인데 그 과정에서 위치를 찾기 어려운 곳 같은 경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설처럼 이따금 잊히기도 한다. 또 너무 간단하여 나중에 클리어해도 되겠지 하는 안일한 태도 때문에 오늘 같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편 때아닌 몬스터의 출몰에 이번 일의 책임을 맡은 길드와 협회는 시민들의 불만의 목소리를 피하긴 어려울 듯싶다. 이에 따라 일반인들은 헌터 협회에 피해 보상을 요구할 예정….」

결론만 따지자면 여기는 소설 속이 맞았다.

“새삼 신기해.”

분명 그렇게까지 기억에 남는 소설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읽다가 도저히 읽을 시간이 나지 않아 중간쯤밖에 못 본 소설이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그 소설의 제목도 기억 못 할뿐더러, 주인공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 이곳이 어떤 소설이냐 하면, 글쎄. 그저 흔하디흔한 헌터와 던전, 그리고 몬스터가 나오는 소설이었지.

내가 그나마 뚜렷하게 기억하는 소설 속 내용은 이랬다.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던전’과 ‘몬스터’로 인해 세상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만화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이 되자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패닉에 빠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쳤고, 그중 소수는 세상을 비관하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고, 몬스터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그런 와중에 우습게도 사람들은 자신을 구해 줄 영웅을 기다렸다. 왜 이런 상황이 생기면 누군가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은연중에 바라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목숨 바쳐 지켜 주는 걸 상상하며 자신을 구해 줄 영웅을 기다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이 기다리는 영웅은 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남을 위해 당당하게 괴물과 맞설 수 있겠는가? 그것도 제 목숨을 바쳐서.

세상은 그렇게 빠르게 무너져 갔다. 지능이 있는 몬스터들은 아마 아주 쉽게 이 세상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손짓 한 번이면 인간은 너무나 쉽게 죽어 버렸고, 저희의 얼굴만 봐도 겁에 질려 도망치는 인간들을 보는 건 퍽 우스웠다. 그래서 그들은 방심했다.

살고자 하는 인간은 의외로 끈질겼다.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난다고, 살고 싶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었다. 영웅을 기다리며 구원을 기다리기엔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 못했다. 무너진 잔해들을 보며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고 일어섰다. 그 순간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그렇게 사람들은 움직였다.

그들이 처음부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부류의 인간은 제일 처음 죽기 딱 좋았다. 생각이 없으니까. 적과 자신의 차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괜한 오기를 부리고,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일 거라는 착각을 하며, 자만하다 한순간에 훅 가 버렸다. 초반에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죽어 나갔다. 용기는 만용이었고, 누군갈 믿는 것은 사치였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도망치고, 숨고, 피하고, 기회를 엿보고, 생각을 정리하고, 머리를 쓰고,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딱히 그들은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게 아니었다. 그들 중 싸움을 해 본 사람보다 안 해 본 사람이 더 많았다.

그래도 살기 위해 싸웠다. 죽자 살자 싸웠다. 일방적인 싸움이었으나 그들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했다. 그렇게 싸움을 시작한 이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람들이 기다리던 영웅이 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게 아니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을 뿐. 누군가를 지키고, 구하는 것도 자기가 안전하고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가 살 거라는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쉽사리 남을 위해 나설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인간은 바보였다.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영웅이 되고 싶은 바보.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찬양할지도 몰랐으나 제 목숨을 버리고 남을 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구할 거면 동시에 살아야지. 나도 살고 너도 살고 그럴 수 있어야지.

그러니 오로지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살고 싶어서, 누군가 죽든 말든 자기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주변 사람을 미끼로 썼다. 그 틈을 노려 괴물을 공격하고, 또 기회를 보면 도망쳤다. 그 뒤에는 당연하게도 그런 행동들의 반복이었다. 또다시 옆에 있는 사람을 미끼로 쓰고, 도망치고 그렇게 승리를 거머쥐며 지독하게 살아남았다. 정말로 지독하게 말이다. 지옥 속에서 피어난 자그마한 희망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영웅이 된 거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차차 늘어 갔다. 괴물은 느리게, 또 천천히 쓰러져 갔다. 그것들이 죽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건 그저 그 순간 자신이 괴물을 이겼다는 단순한 고양감에 취했던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싸울 이유가 생겼다.

이러면 더 강해질 거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더 강해져야 했다. 그럼 살아남겠지.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살아남겠지.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을 거다. 그러면….

그런 인간들이 불쌍하기라도 했을까, 아니면 여태까지 구경만 한 게 지루했던 것일까. 도움을 주고 싶어진 건지,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들에게 손을 뻗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온 세상을 뒤덮은 순간, 사람들의 눈앞에 반투명한 안내 창이 나타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자들에게 저마다 힘이 내려졌다. 누군가는 뭐든지 파괴했고, 누군가는 불을 만들어냈으며, 누군가는 산 자를 치료했고, 누군가는 사물의 시간을 되돌렸다.

힘을 받은 그들은 스스로를 ‘사냥꾼’이라 칭했다.

평범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힘.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었다. 순식간의 전세는 역전되었다. 상식을 뛰어넘은 힘을 발휘하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괴물들을 물리치고, 빼앗긴 터전을 되찾았다. 세상에 잠깐의 평화가 왔을 때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힘을 모았다. 이제 그들은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지켜 줄 정도로 강해졌다.

그 순간 사람들이 맨 처음 원했던 그런 영웅이 된 것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세상은 다시 발전해 나갔다. 저마다 비슷한 힘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체계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누구는 괴물을 정리했고, 누구는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또 누구는 부서진 건물을 복구했다.

모든 게 원상 복구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굉장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죽은 사람이나 동식물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진 상황에서 그들은 노력했다. 괴물을 죽였을 때 나온 부속물을 연구하고 던전에서 자라는 식물과 동물들 중 사람이 별문제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속속들이 발견되면서 점차 세상은 과거의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아 갔다.

그렇게 세상은 고비를 넘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에 와서는 전 세계 공용어라면서 ‘사냥꾼’은 ‘헌터’로, ‘괴물’은 ‘몬스터’로 통일되었다. 던전을 꾸준히 관리하여 주기마다 발생하는 던전 브레이크를 막고, 몬스터에게서 채취한 마석을 새로운 자원으로 썼다. 그렇게 세상은 빠르게 발전했다.

훗날 ‘최악의 날’이라 불리게 되는, 몬스터가 처음으로 나타난 날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과거의 일은 이제 역사 교과서 한편에서나 언급될 정도로 세상은 평화에 물들었다. 몇 세대를 거쳐 이제 세상은 던전과 몬스터, 헌터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제 헌터들은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란 직업보단 국민의 세금을 받는 나라의 공무원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능력을 각성한 헌터들이 아니어도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간의 육체는 강해졌다.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마나’ 때문이라는 학계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식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날 정도의 육체가 이제는 평범한 것이었으니 말 다 했다. 인간은 쉽사리 죽지 않게 되었다. 진화라면 나름 진화였다.

목숨을 걸어야 각성하던 옛날과 다르게 능력을 갖추는 계기는 이제는 사람마다 달라졌고, 능력도 더욱 다양해졌다. 그 덕분에 나라에서는 능력에 순위를 매겨 관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힘이라는 것이 운용 방법에 따라 위력이 다르고, 힘을 숨기는 이들도 있어, 순위니 관리니 하는 것은 거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이지만.

이곳은 그런 세계관을 가진 세상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과거 설정이 참 지독했기에 그것만 좀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다. 이 소설의 이름조차 기억 안 난다면 말 다 한 거지. 단지 작가가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는 성악설주의자였고, 그 덕분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성격 파탄자였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성격 나쁜 주인공이 인기가 많다나…. 뭐, 만날 일이야 없겠지만.

“한창 싸우는 옛날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지금 시대는 내가 살던 곳이랑 별로 차이 안 나는 시대니까…. 적응하기 어렵지도 않고.”

의미 없이 검색창이 띄워져 있는 화면을 아래로 내려 새로 고침 했다.

“가끔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거 빼면 나쁘지 않아. 몬스터가 나와도 뭐 헌터들이 알아서 하겠지….”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퍼어억!!!

“악!”

갑작스러운 진동에 그만 손이 미끄러져 얼굴에 정통으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말도 못 하게 아프다. 이게 휴대폰이야, 벽돌이야. 얼굴을 문지르며 대체 뭐가 온 건가 싶어 휴대폰을 확인하자 재난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앞부분만 읽고 가볍게 넘겼다.

“진짜 드럽게 아프네….”

휴대폰을 머리맡에 던져두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따라 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쓸데없이 피곤했다. 나는 옷을 훌렁훌렁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옷가지들이 하나둘 길을 만들었다. 내일도 아침부터 아르바이트를 가야 했기에 더 늦기 전에 자야 했다. 뜨끈한 물을 맞으니 저절로 몸이 노곤해졌다. 습관처럼 눈을 감고 느릿느릿 잠에 취한 상태로 몸을 씻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내 알바 자리가 이 세계에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집이 있으니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없으면…. 어쩌지, 내일이 월급날이었는데. 꾸벅 졸면서 머리를 욕실 벽에 박았다.

와장창!!

그 순간 욕실 밖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떠졌다. 바로 옆에서 일어난 것처럼 가까운 데서 난 소리였다. 잠시간 숨을 죽이고 욕실 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문이 벌컥 열린다거나 다른 소음이 들려오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조용했다. 나는 느릿하게 샤워기를 잠그고, 벽에 걸려있던 수건을 챙겨 들었다. 대충 몸을 닦으면서 문밖으로 향했다.

나는 그날 재난 문자를 제대로 좀 봐둘 걸 하고 후회했다. 물론 문자가 온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재난 문자를 제대로 확인할 리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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