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향기의 주인 (17/17)

외전. 향기의 주인

결코 첫인상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강여원……이라고 합니다.”

스무 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결혼 계획을 통보한 선준이 데려온 오메가는 한눈에도 어리고 여렸다.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서는, 스치듯 지나가는 시선 한 점에도 목덜미를 파르르 떨었다. 애처롭게 흔들리는 동공을 어디에 둘 줄을 모르더니, 짧은 통성명을 마치자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마주 보려 애썼다.

“저희가…… 그, 피임을 철저히 하기는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임신을 하게 된 것이어서요.”

“네.”

“그래도 역시…… 아이를 낳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혼전 임신이라니, 제헌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차피 남 일이기야 했지만, 죄스럽게 고개를 푹 숙이는 몰골을 보자니 혀끝을 차게 됐다. 인생을 저런 식으로 사는 부류는 딱 질색이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무책임하거나 아니면 멍청하거나, 혹은 둘 다.

“그보다는, 형이 나한테 유산을 먼저 물려주고, 우리를 독립시켜 줘도 되는 거고…….”

전처가 저택을 떠난 이후 특히, 선준은 제헌에게 깊은 앙심을 품고 반항의 수위를 나날이 높여갔다. 그러나 몇 년만 기다리면 자연히 제 몫이 될 유산인데도, 상속 시점을 앞당기겠다고 오메가를 임신시켜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자라면서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적 없던 동생이 어떻게 제법 반반한 오메가를 꼬여냈는지 의문이었다. 속이 빤한 선준의 계획에 휘말려든 여원 역시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난 형이랑은 다르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어. 그러니 이 사람이랑 결혼해서 평생 행복하게 살 거야.”

“…….”

“솔직히, 형도 사랑에 대해서 아는 거 별로 없잖아? 그런 형이 내 일에 왈가왈부하는 거 난 좀 아닌 것 같아.”

선준이 굴절된 열등감을 고스란히 투사하자 제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동생이고, 어쨌든 사회인이 될 때까지 선준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으로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작자였다. 게다가 선준이 데려온 오메가는 집안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임신을 계획한 것도 아닌 데다 딱히 선준을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졸업 전까지는 내 집으로 들어와서 살도록 하세요.”

선준이 광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하나 제헌은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이미 애가 생겨버린 데다, 본인도 임신 중절 생각이 없다고 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오메가의 처지는 딱했지만, 그렇다 해서 저택의 치부를 외부인에게 쉬이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선준이 낳은 자식이 아버지보다 근소하게라도 낫다면, 기업을 위해서는 그게 더 좋은 일이기도 했다.

“…….”

동생의 때 이른 결혼 소식에 조금쯤이나마 심란함이 생겨났다. 그날 밤, 저택의 꼭대기 층에서 홀로 술을 마시던 제헌은 까마득한 어둠으로 가라앉은 창밖을 길게 내다보았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바깥의 황량함을 안줏거리 삼아 와인잔을 느릿하게 기울였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자, 커다랗고 순한 눈동자가 문득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저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던.

얼굴이 눈에 띄게 예쁘기야 했다. 하나 예쁜 오메가가 세상에 한둘 있는 것도 아닌데 여원은 의아하리만치 뇌리에 오래 남았다. 경계심으로 외피를 꽁꽁 두르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온화하고 순순한 성격인 것이 티가 났다. 그러면서도 웃을 때 묘하게 그늘져 있는 듯한 느낌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하아…….”

누군가를 눈빛으로 기억하는 것은 제헌에게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제헌은 평소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갈구하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넌덜머리 났다.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나 당신이랑 지내면서 감정적으로 대단한 것 기대한 적 전혀 없어.’

‘…….’

‘그래도 이건 아니야. 처음부터 사랑 없는 결혼이었다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랑 남은 평생을 살다가는 내가 온통 피폐해질 것 같아.’

물질적인 요구든 부부간의 신의이든, 제헌은 결혼 생활에 깔끔하게 책임을 다했다. 그런데도 왜 자신이 처음부터 줄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힌 것을 요구하는 걸까. 제멋대로 애정을 기대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상처받고, 그러다가 자신을 원망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지루하도록 익숙했고, 딱 그만큼 피곤했다.

이런 게 세간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면, 제헌은 그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타고나기를 낭만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바로 그 이유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니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었다. 아쉬움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다. 그러나 딱히 그런 자신을 바꾸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제헌에게는 키워내야 하는 회사가 있었고, 저택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연연해 봐야 결국은 시간 낭비였다.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이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자신의 삶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었다. 여원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퇴근을 마치고 적막한 저택으로 돌아와, 나선형 계단을 오를 때면 이따금 히끅히끅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결혼 이후 선준은 눈에 띄게 집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여원은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

가끔씩 마주칠 때면 여원은 아슬아슬한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처연한 기운이 어슴푸레 젖어든 눈동자가 자꾸만 눈길을 잡아끌어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결혼하고 나면 선준도 책임감이란 걸 배우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배후에 목적이 있었더라도, 여원은 제 아이를 임신한 오메가였으니까. 그러나 선준은 대체 어디서부터가 글러 먹은 것인지, 정작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식사는 배 속의 아이가 아니라, 여원 씨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

“스스로를 챙기지 않으면, 이곳에는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마음이 쓰여서라기보다는 잡음이 일어나지를 않기를 바라서였다. 의도치 않았던 임신으로 결혼한 것은 한심했지만, 그렇다 해도 여원이 처한 상황은 부당했다.

여원이 지나치게 궁지에 몰린다면 이 결혼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저택을 둘러싼 추문도 들불처럼 번져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도움을 건넸을 뿐이다.

“원래는 선준이랑 섹…… 그러니까, 관계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

기댈 곳 하나도 없이 위태로운 순진한 오메가. 여원은 자신을 선망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해서,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꼬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원은 제헌을 볼 때마다 예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우고, 수동적으로 굴면서도 묘하게 기대하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성적으로 의식하기까지 하다니 처음에는 우습다고 생각했다.

“여원 씨는 상대방이 간절하게 부탁하면 어떤 일이든 들어주나요?”

무신경하게 내뱉어진 질문에 여원이 힉, 단 숨을 들이켰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자그마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자 제헌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시선을 잡아끄는 가벼운 흥미, 그 이상은 절대 아니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여원에게 손을 뻗기 시작한 것 자체가 실은 관심의 발로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제헌은 여원을 본격적으로 관찰했다. 집이 가난하고, 열성 오메가이기는 했지만 여원은 얼굴이 매우 봐줄 만했고, 성격도 모난 데 없이 유순했다. 세상 다 산 것처럼 초연함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배시시 웃을 때면 말간 얼굴이 딱 제 나이처럼 보였다. 알파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싶다고 눈독 들일 법한데, 대체 왜 함량 미달인 선준에게 발목 잡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나날이 커져만 갔다.

“아니다, 그러지 말고 여원아. 네가 직접 말해봐.”

“어, 어?”

“너 정말 차가 필요해?”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거봐, 얘가 괜찮다잖아. 형은 바쁘다는 사람이 참 오지랖도 넓다, 넓어.”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선준은 제헌을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짧게 지나가는 대화만으로도 제헌은 여원이 선준에게 속아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원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뻔뻔하거나 막돼먹은 사람은 아니었다. 여원은 자존감이 낮은 데다, 쓸데없이 착하고 마음이 여려서 선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이용하는 선준이나, 이용당하는 여원이나, 어느 쪽이든 답 없어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제헌이 평소에 딱 질색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우유부단하고, 자기 생각 없고, 남들한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그게 착한 거라고 생각하는 부류.

그런데도 왜 자꾸만 손 내밀고 싶어지고, 그 내민 손으로 건드리고 싶어지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여원은 자신이 붙들어주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벼랑 끝에서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여원은 눈매가 발갛게 젖어든 채로 페로몬을 폴폴 흘렸다. 선준에게 휘둘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는 못마땅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정작 여원이 자신에게 매달리자 묘하게 구미가 당겼다.

“기왕 받게 될 도움이라면 필요 이상으로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원은 간절했지만, 제헌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제헌은 어렵지 않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불안정하게 떨리는 축축한 눈동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비굴하게 굴지 말라고 타이르면서도, 내심 여원이 제 앞에서 절박한 얼굴을 하길 기대했다.

“여원 씨도 이제 내 가족 아닙니까.”

“…….”

“…….”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족이라는 말 한마디에 여원은 함빡 감동에 젖어들었다. 궁지에 몰려 있어서인지, 조금만 잘해줘도 뭉클뭉클 녹아내리는 게 정말이지 쉬웠다. 이래서야 선준이 아니라 누굴 상대로든 이용당할 만큼 극도로 취약해 보였다.

애정을 갈구하는 듯한 시선, 자신에게 기대하는 듯한 눈빛에는 신물이 났다. 그런데 여원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다른 감상을 자아냈다.

낯선 감각을 자각한 제헌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흥미롭고 여린 생명체. 그런 여원이 맹목적인 선망을 담은 눈동자로 저를 간곡히 올려다봤다.

본래 제헌은 선망과 존경, 경외 어린 시선에도 제법 익숙했다. 그러니 신경을 묘하게 까끌거리는 지금의 감각은, 솔직해지건대 성적인 맥락이었다. 여원의 시선을 받아내며 제헌은 옅은 수준의 전능감에 휩싸였다. 여원은 확실히 가학적인 지배욕을 자극하는 유형이었다.

섹스할 때 얼마나 순종적일까. 시키는 것은 하나도 거절하지 못하고 다 받아주며 가쁜 숨을 터뜨릴 여원을 떠올리자 아랫도리가 금방이라도 뻐근해질 것만 같았다.

“뭐라도 좋으니, 제가 제헌 씨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

제헌이 얕게 코웃음 쳤다. 이래서야 뭐, 부탁하면 뭐든 들어주는 수준이 아니라 벌려달라고 하면 박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할 것만 같다. 사람 무서운 걸 모르고 순진해 빠진 얼굴로 이렇게 아무 말이나 하나.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입 안이 헐 지경으로 자신의 성기를 빨아보라고 지시하면 여원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했다.

“글쎄. 내게 여원 씨가 필요할 만한 일이 있나.”

여원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는 제헌의 얼굴이 나른하게 젖어들었다. 떠보듯이 슬쩍 내던진 질문에 여원은 달뜬 페로몬을 왈칵 흘렸다. 모든 신경을 제헌에게 예민하게 곤두세운 채로, 말끝 하나 시선 하나에 파르르 떨고, 좋아하는 티를 좀처럼 숨기지 못한다. 이제는 자각하지 못한 채로 섹스어필까지 한다.

“흐, 으으…….”

까마득하게 어린애가 자꾸 눈앞에서 움찔거리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래가 확 꼴렸다. 말갛고 하얀 오메가가 자꾸만 자극해 오던 것은 깊은 곳에 도사린 가학심과 지배욕이었다.

휘청거리는 여원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고 더욱 뒤흔들어서, 자신만을 바라보고 의존하게끔 하고 싶었다. 딱히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향수를 고르려면 내 체향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평소라면 철저히 무관심하게 대했을 텐데도, ‘어른스러운 도움’, 내지는 ‘보다 못해서’라는 핑계로 여원에게 접근했다. 긴장을 팽팽하게 당기고 살짝살짝 선을 넘으면서 그에 따라오는 여원의 반응을 살폈다. 여원이 흐트러지고, 이내 저를 갈구하듯이 올려다보면 비틀린 충족감을 느꼈다.

“아, 흣…….”

“…….”

“제헌 씨, 저 어지러워요. 떼어…… 주시면 안 돼요?”

열성 오메가인 여원은 페로몬 필터링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제헌은 우성 알파 중에서도 형질이 특출나게 강했다. 딱히 작정하고 페로몬을 흘리는 게 아니어도, 희미하게 잠식되는 것만으로 여원은 금세 몽롱해졌다.

발갛게 달아올라서 할딱이는 얼굴은 음습한 상상을 자극했다. 이대로 발가벗은 몸 위에 페로몬 샤워를 시키면 어떻게 될까. 좁은 구멍에 손가락 여러 개를 비집어 넣고 애액을 줄줄 흘릴 때까지 흔들어대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선준 대신 제헌 자신이 여원을 저택에 가두고, 제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린 다음 버거워서 켁켁거릴 때까지 성기를 빨게 하고 싶었다.

“저런…… 생각 이상으로 향에 민감하네.”

여원을 관능으로 복종시키는 것을 집요하게 상상하면서도, 제헌은 딱히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쨌든 제헌은 여원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중이었다. 여원도 팍팍한 저택 생활에 제헌 하나만을 보면서 버티고 있지 않은가. 여태껏 선을 넘은 행동을 한 적도 없고, 실행으로 옮길 생각도 없으니 터부시되는 판타지는 오히려 감각적이고 산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헌에게 여원은 딱히 진지하게 생각할 것까지 없이 흥미로운, 그러나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 유희거리였다. 딱 취향에 알맞게 예쁜 데다가, 손끝만 튕겨도 파르르 떨어대며 반응하니 보고만 있어도 즐거웠다. 다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집요하게 눈길이 가서, 선준보다 늦게 여원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날이 갈수록 조금씩 더, 아쉽기는 했다.

“여원 씨!”

여원이 빛이 움푹 꺼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았을 때, 제헌이 견고하게 지켜오던 오만은 단숨에 와르르 붕괴해 버렸다. 아이를 잃게 된 여원은 그동안 머금고 있던 수줍은 생기를 송두리째 빼앗겨, 공기가 죄 빠져나간 풍선인형처럼 볼품없이 나풀거렸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주변에 모든 색채가 없는 무미건조한 풍경에서 여원만이 선명한 색깔로 도드라졌다. 정말로 극단까지 몰려버린 여린 생명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아파하자, 제헌의 심장도 낯설고도 묵직한 통증으로 저릿해졌다.

“흑, 제헌 씨, 내 아기…… 아기 어떡해요…….”

“…….”

“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흐으, 으…… 아기가…….”

제헌의 품에서 스르르 무너져 내린 여원이 히끅히끅 울어댔다. 정수리가 뾰족한 송곳으로 찔리는 것처럼 날카로운 화가 치밀었다. 이건 절대로 여원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이를 가진 오메가를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은 선준의 패악질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여원이 눈물을 흘려내며 자신을 탓하고 있으니 분노가 더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에서 야릇한 매혹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망가지기 직전에 다다른 여원을 마주하자 필요 이상으로 언짢고 불쾌해졌다.

“여원 씨 잘못 아닙니다.”

그제야 제헌은 여원을 볼 때마다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불만족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여원이 선준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원이 자신의 것이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둘이 그런 사이일 줄! 나는, 나는 진작부터 알았어. 이렇게 보란 듯이 사람 병신 만들고…….”

“…….”

“지금까지 전부 다, 형이 나에게 뺏어 갔잖아. 그걸로는 성에 안 찼어?”

병실에 들이닥친 선준은 제헌의 품에 안긴 여원을 보고 길길이 날뛰어댔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배우자 앞에서 고함을 질러대다니, 저 자식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놀란 여원이 무어라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주룩주룩 흘려대는 것을 보며, 제헌은 자신의 실패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선준아…….”

지금껏 선준의 오만불손한 행동을 참아왔던 것은 제헌이 선준보다 강자이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선준은 자신의 책임과 보호 아래에 있어서, 지긋지긋한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행동들도 묵과해 왔다. 그러나 어느새 선준은 결핍을 핑계로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괴물로 자라나 있었다.

“악!”

그러한 인내심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제헌이 두툼한 손바닥으로 선준의 뺨을 후려갈겼다. 자신 혼자만 참아서 되는 일이라면 숙명이겠거니 받아들이겠지만, 더는 아니었다.

“여원 씨, 괜찮습니까?”

여원을 볼 때면 종종 망가뜨려서라도 가두고 싶은 얕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정작 망가지기 직전의 모습을 보자 자신이 원하는 건 파괴가 아닌 구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한번 씨앗을 틔운 소유욕은 빠른 속도로 만개했다. 위태위태하게 등을 떠미는 것도, 혹은 자신의 품 안에 끼고 예뻐하는 것도, 여원에 대한 일이라면 모두 선준이 아닌 제헌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다.

이제 제헌의 목표는 선준에게서 여원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욕망을 자각한 이후로는 더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여원을 해치지는 않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도 충족하는 방식으로 판을 짜기 시작했다. 선준을 중국으로 떠나보내고, 여원을 외부 자극으로부터 차단한 후에 다정한 외피를 덮어쓰고 살살 건드리며 유혹했다.

부도덕한 행동을 한다는 죄책감이나 고민은 크지 않았다. 여원은 평생을 감정적인 동요 없이 살아온 자신을 강렬하게 매료시킨 최초의 존재였다. 여원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때, 흑…… 제가 피임을 분명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선준이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거기다 아이까지 잃어버리고 나니까, 흑, 너무 힘들어서…….”

“…….”

“그래서 이혼하려고 했는데, 가족들은……. 제가 이혼하면, 돈 때문에…… 안 된다고 하고……. 그치만 저는 가진 게 하나도 없는데, 변호사도…… 제가, 열성 오메가라고…….”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은 가뿐했다. 애초에 선준이 여원을 정말로 사랑하고 아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테니 모든 건 사실 선준이 자초한 거라고 봐야 했다. 게다가 마찬가지로 함량 미달인 여원의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자신만을 바라보며 저택에서 머무르는 게 여원에게도 더 나았다. 여원을 위해서도 이게 최선이었다.

“여원 씨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보호입니다.”

제헌은 여원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외부의 거친 풍파를 차단하고, 무균실 같은 저택 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여원을 기르고 싶었다. 면밀하게 들여다보며 매일같이 가꾸고 예뻐해 주고, 그로써 여원이 자신을 태양처럼 여기며 저만을 향해 웃기를 바랐다.

“제헌 씨는,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세요?”

“저택에 머무르라고 권유한 것도 나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닐까요.”

이 정도까지 짙고 어두운 욕망을 여원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전부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두 여원을 위한 일이었다. 어차피 새장 안에서 예쁘게 키우면 여원도 행복할 테니까.

힘의 격차로 따지면 애초에 상대가 되지를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제헌은 여원을 완벽하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다만 제헌은 음험한 속내를 능숙하게 숨길 만큼은 상식을 갖추고 있는 알파였다. 강압적인 섹스라는 질 떨어지는 방법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여원은 이미 충분히 제헌에게 끌렸다.

여원을 더욱 촘촘하게 옭아매고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여원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렇기에 강압적으로 휘어잡아 단번에 손아귀에 움켜쥐는 대신, 제헌은 여원이 좋아할 만한 말과 행동을 차츰차츰 이어나갔다.

“제헌 씨, 있잖아요.”

“네.”

“고마워요.”

저택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여원은 기다렸다는 듯 제헌에게 푹 빠져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내도록 성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얽혀드는 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소요되었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여원이 자신을 선망하듯이 바라보고, 성적으로 의식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여원은 속은 숨기지도 못하면서 의외로 도덕성이 높은 편이었다. 당장에라도 자고 싶어 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정작 확 당기지는 못했다.

“너무 멋있으세요.”

“하하.”

“저는요, 제헌 씨 진짜 너무 멋있으신 것 같아요.”

물론 그래서 더 귀엽고 꼴리기도 했지만, 제헌의 인내심도 슬슬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적당한 핑계를 들어 일부러 술도 먹여보았다. 여원은 경계의 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배시시 웃었다. 그때, 제헌은 여원이 제 앞에서 휘청거릴 때 느꼈던 비틀린 충족감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희열을 느꼈다.

“고마워요, 제헌 씨.”

“…….”

“앞으로는 저도, 제헌 씨가 말씀해 주신 대로 그렇게만…… 살고 싶어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검은 속내는 짐작도 못 하고 여원은 제헌이 좋은 사람이라 철석같이 믿으면서 그의 말만을 따르겠다고 했다. 보송보송하고 연약한 존재가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기만 의존하고, 모든 판단이나 행동에 자신을 지침으로 삼았다. 본래 일방적인 함락보다는 자발적인 복종이 훨씬 달콤한 법이었고, 그게 진정한 의미의 정복이기도 했다.

쪽.

여원은 촘촘하게 내리깔린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열이 오른 동그란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어서, 자그마한 얼굴 전체가 흐드러지게 여물어가는 복숭아 과육 같았다. 그런 여원이 제게 쪽, 소리 나게 입 맞추더니, 찰싹 달라붙어 와서는 입술을 살짝살짝 핥아댔다. 발정 난 고양이 같기도 하고, 마냥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 같기도 했다.

“하, 여원 씨…….”

히트 사이클이 다가오는지, 달착지근한 페로몬을 폴폴 흘려대며 입술을 빨아대는 여원을 밀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기에 인내는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여전히 결정적인 불씨를 댕기는 사람은 제헌이 아닌 여원이어야 했다. 여원이 자신에게 유혹당하거나, 휘둘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제헌을 선택했다고 느끼게끔 해야만 더욱 오랫동안 여원을 가지고 한층 집요하게 여원을 맛볼 수 있었다.

“제헌, 흑, 제헌 씨…….”

“여원 씨.”

인내의 열매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달콤했다. 열성이어서 은은하면서도 왜인지 농밀하게 느껴지던 페로몬이 완전히 무르익어서 공기 중에 만연하게 퍼져 있었다. 눈매가 불그죽죽하게 젖은 여원은 들썩이는 아랫도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엉망으로 헐떡거렸다. 지금 당장 자신을 게걸스럽게 탐해달라는 듯, 새뽀얀 몸뚱이 전체가 농염하게 물들어 있었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제헌에게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연약한 목소리에는 하닥하닥한 숨소리가 새어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온 지배욕이 완벽하게 충족되자 아랫도리가 단박에 뻣뻣해졌다.

“지금 이러는 거, 하…… 여원 씨 잘못 아닙니다. 히트 사이클 때문이니까.”

“…….”

“여원 씨를 도와주는 거잖아요, 그렇죠?”

페로몬에 푹 절여져, 아래에서 애액을 질질 흘려대면서도 여원은 이따금 흐느끼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헌과 얽혀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아주 살짝 초조해진 제헌이 알파 페로몬을 확 풀며 노골적인 욕망을 개방했다. 여원의 풀린 동공이 아슬아슬하게 깜빡거렸다.

“그럼 옷 전부 다 벗고 이리로 기어와요.”

한번 여원을 자신의 손아귀에 단단히 거머쥔 이후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여원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도덕의식이나 죄책감이라는 것도 가속이 붙기 시작한 욕망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쾌감에 푹 절여져서는, 여원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면 달콤한 정복욕이 사지에 저릿하게 번졌다. 욕망의 나락으로 여원을 몰아넣는 일이 제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짜릿한 희열이었다.

“왜요. 내가 여원 씨 나쁜 짓 시키는 것 같습니까?”

“흐윽……. 아니, 아니요.”

예상했던 것처럼, 여원이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헌은 여원을 상대로 위험한 욕정을 마음껏 풀 수 있었다. 연약하고 여린 존재한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제 욕심을 채웠다. 지금껏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비열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진심으로 소유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게 되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음험한 지배욕이 그 끝을 모르고 발산했다.

“나 올 때까지 이대로 있으세요. 속옷도 입지 말고, 바지도 입지 말고.”

“아…….”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리면서, 내 생각만 하고 흥분하는 겁니다.”

“제헌 씨…….”

“잘 할 수 있겠어요?”

제 소유의 저택에 여원을 가두다시피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취향대로 길들였다. 가끔은 백치처럼 느껴질 정도로 여원은 성적인 면으로는 백지 같은 구석이 있었다. 지금껏 선준과 섹스하면서는 오르가슴이란 걸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여원에게 쾌락을 가르치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법을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음탕하게 개발되는 여원을 보며 제헌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졌다.

“제헌 씨, 요즘에 저는 꼭,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아요.”

“그래요?”

“네. 예전에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품에 온전히 안긴 여원이 사랑에 푹 빠진 눈으로 저를 올려다볼 때는, 지금껏 그 누구를 상대로도 느껴본 적 없는 완벽한 전능감이 들었다. 단순히 성적인 쾌락이나 흥분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결코 드러낸 적 없었던 모습을 자신에게만은 활짝 열어주는 여원은 꼭 하나의 피조물 같았다. 여원이라는 백지 위에 그려진 모든 흔적은 자신의 그림이었고, 그는 정점에 오른 제헌의 통제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제헌 씨 회사 안 갔으면 좋겠어요.”

“오늘?”

“매일매일, 출근 안 하시면 좋겠어요…….”

“더 해봐요.”

“저 혼자서만…… 하루 종일 제헌 씨 보고 싶고, 가지고 싶어요.”

자신을 향한 존경과 복종을 아낌없이 바치는 여원의 의존적인 기질이 제헌에게 황홀하리만큼 달콤했다. 하나둘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서서히 익숙해지더니, 끝내는 자신을 향한 앙큼한 소유욕까지 표출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사실상 자아가 없다시피 하던 여원에게 욕망을 불어넣은 것이 제헌이기에, 지금의 여원을 제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여원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고, 단 하나뿐인 주인 같았다.

그러니 소유욕도, 욕망도, 집착도, 그리고 끝내는 애착까지도, 자연히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원은 제헌에게서 오롯하게 쏟아지는 애정으로 새롭게 피어났다. 그런 여원을 덩굴처럼 칭칭 옭아매고 있는 동안 제헌의 감정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순종적이고 맹목적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러한 기대를 배반하기보다 충족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도 여원을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졌다.

“제헌 씨…….”

“네, 여원 씨.”

“선준이가 돌아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선준의 귀국일이 슬슬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제헌은 자신이 여원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아가 확고한 제헌이지만 동생의 배우자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받게 될 사회적 지탄에 대한 부담은 있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기보다는, 제헌은 판세에서 자신이 불리해지는 것이 싫었다.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 여원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선준이 앙심을 품고 추문을 떠벌리고 다니는 일은 반드시 없어야 했다. 필요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여원은 선준이 돌아올 때가 되자 부쩍 불안해했다.

“많은 걸 말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는 걸 이해해 줘요.”

“…….”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여원 씨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여전히 제헌은 여원에게는 굳이 흉하고 나쁜 것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따위 것들은 제헌 자신이 모조리 통제하고 쳐낼 테니, 여원은 지금까지처럼 예쁘기만 한 모습으로 자신의 품 안에서 안락을 즐기면 됐다.

“제헌 씨, 너무, 흐으, 으, 좋아요…….”

“하아…….”

“흑…… 좋아해요.”

언제나처럼 여원은 제헌의 말을 잘 들었고, 예쁘게 쾌락을 느꼈다. 섹스 도중 흥을 돋우기 위한 말이 아니라 정말로, 여원은 자신의 좆을 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최근에는 들기 시작했다. 좁고 습하고 축축한 구멍이 쫀득하게 성기에 달라붙으면서 오물오물 물어댈 때의 쾌감은 그 어느 순간에도 비할 수가 없었다.

치미는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숨을 달싹달싹 내뱉고, 가장 잘 느끼는 곳에 닿으려 애쓰며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어대는 것 역시 퍽 기특했다.

“그치만, 그치만 통키가 보고 있잖아요.”

여원은 평생 이렇게, 자신의 인정과 사랑에만 매달리며 자신을 기쁘게 하는 방법만을 고민하며 살게 됐다. 응당 그래야 할 여원이 통키가 보고 있다는 이유로 저에게서 허겁지겁 도망치려는 것에 일순 선명한 불쾌감이 일었다.

통키는 핑계일 뿐이지, 여원이 금방이라도 들이닥칠지 모르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원은 일단 유혹에 못 이겨, 욕망에 못 이겨 제헌과의 섹스를 저질러버렸다. 그러나 곧 선준이 돌아온다고 생각하자 앞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덜컥 겁이 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나한테서 도망이라도 갑니까?”

“학, 흐윽, 으응…….”

마침내 여원을 빈틈없이 옭아매기까지 외부 요소를 정확하게 통제하고 느릿하게 흐르는 여원의 변화를 인내해 왔다. 보다 완벽한 소유를 위해 혹시나 두 사람 앞날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쳐내고 있는데, 여원이 바르작거리기 시작했다. 착하고 여려서 금방 꼬여낼 수 있었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심약했다. 제헌과의 관계가 부담스럽다며 달아나 버릴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나는 여원 씨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데.”

그러나 여원이 저에게서 도망친다니, 제헌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껏 공들여 지금의 여원을 만들어두었는데, 놓아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기 취향인 사람이었다. 여원이 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얄팍한 상상만으로도, 이성을 잃고 흥분해 버린 제헌이 여원에게 노팅했다.

여기까지는 모두 제헌의 의도대로였다. 자잘한 부침 정도야 있겠지만 큰 그림에서는 제헌의 계획을 이탈하는 요소가 없었다.

여원과 선준이 공식적으로 이혼하기 위해서는 선준의 동의가 필요했다. 선준이 말이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몰아붙여야 했다. 그래서 선준이 저택에서 쫓겨난 변호사에게 연락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긴장했지?”

여원을 포기하고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차근차근 선준의 숨통을 조여나갈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여원과 둘이서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여원은 예쁘고 착하긴 하지만 확실히 손이 많이 가는 편이었다. 애정을 주는 만큼 예쁘게 피어나고 착실하게 순종하는 것은 좋았지만, 원하는 만큼의 관심을 못 받자 금세 시들어갔다.

“저…… 임신했어요.”

변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통제하지 않았던, 따라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 제헌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

“…….”

원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제헌은 지배자로서 성공적으로 군림하기 위해 가망이 없는 일은 빠르게 단념하고, 가능성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기대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확인 차 묻는 건데, 나 말고 다른 사람과 관계한 적은 없는 거죠?”

“제헌 씨…….”

“…….”

“아니에요, 저 결혼한 뒤로는…… 흐, 선준이랑 한 번도…… 섹스한 적 없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했을 때 혹시 모를 변수까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자 너무나 서럽다는 듯 펑펑 우는 여원을 보고 제헌이 오히려 더욱 크게 당황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여원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게 맞았다.

“내가 누군가를 낭만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건 스스로 가장 잘 알아서, 마음 정리한 지 오래였습니다.”

“…….”

“그런데, 아니었네요.”

제헌에게는 노팅 자체도 흔히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여원이 임신까지 했다니, 처음 접할 때는 얼떨떨했지만 차근히 생각해 보자 납득이 되기도 했다. 그 순간 자신이 여원을 상대로 느꼈던 소유욕과 집착은 실로 선명했다.

그게 사랑이라니, 저라는 인간은 역시 어쩔 수 없구나 싶다가도 어쨌든 누군가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강렬한 감정을 느껴본 건 여원이 처음인 게 맞아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아이를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계획 밖의 일이었기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도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그를 가능하게 해준 여원이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헌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중심이 될 것이 분명한 여원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여원부터가 너무 아기 같기만 한데, 그런 여원이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다니, 묵직하고 빠듯한 충족감이 들었다.

“부디 정식으로 내 가족이 되어주겠어요?”

인생에 더없이 낭만적인 프러포즈를 하는 중에도, 제헌의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전체적인 그림을 따져 보고 있었다.

마음이 유난히 여린 여원은 죄악감이나 수치심 같은 불필요한 감정에 특히 취약했다. 이렇게 자기 곁에 얌전히 있다가도, 금세 또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껴 달아나버릴까 언제나 걱정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 때문에라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테니, 그 역시 무척이나 흡족했다. 선준에게서 여원을 뺏어올 때도 명분이 한층 확고해졌다. 일이 이미 벌어진 이상 이제는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정리하면 상황이 훨씬 깔끔하게 해결될 것 같았다.

“네, 좋아요…….”

오해가 풀린 여원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여원 앞에서는 최대한 다정하고 정제된 모습만 보여줬는데, 여원은 내내 혹시나 자신에게 버려질까 불안하고 초조했던 모양이었다.

유리하게 판을 짤 수 있다는 흡족함보다도, 여원이 저를 향해 보드랍게 웃어준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 더욱 컸다. 그때 제헌은 자신은 지금껏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왔구나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원에게 이렇게나 빠져버렸다는 것이 조금쯤은 허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일 수도 있었던 변수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존심 상한다기보다도 오히려 한층 기꺼웠다.

사랑이라는 건, 보다 본질적으로 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제헌은 여원을 만나고 나서야 그러한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는 여원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제헌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계승되어 내려오는 불행의 역사처럼, 저택에서는 엇비슷한 상황이 반복해서 발생했다. 애초에 원한 적도 없었던 여원을 형한테 빼앗겼다는 사실에 광증이 도진 선준이 여원을 위협했다.

“당장 집에서 나가서 며칠 지내기에는 충분할 거다. 나머지 짐은 갈무리해서, 새 주소를 알려주면 보내주도록 하지.”

“싫어,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어딜 가? 형은 어쩌면 그렇게 형밖에 몰라?”

“하…….”

“나도,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지내던 추억이 전부 이 저택에 있단 말야. 형한테만 소중한 공간 아니야, 난 절대 못 나가!”

“그래, 그렇지만 이 저택의 주인은 나다.”

전처를 대상으로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제헌의 우선순위는 확고하게 저택을 지키는 것이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선준을 쫓아달란 말에도, 전처의 안전보다는 그로 인해 저택과 가문이 입을 손익을 머릿속으로 따졌다. 그러나 여원이 위험해지자 고민의 여지 없이 선준을 단칼에 쫓아내게 됐다.

“이미 집 구할 시간 충분히 줬고. 더 이상은 인내할 수 없다. 호텔에서 생활해라.”

선준을 단박에 끊어내고 나서야, 원래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선준을 인간적으로는 경멸하더라도, 일단 제헌에게는 가족에 대한 책임이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여원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다음부터는 삶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망설임 없이 썰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는 여원은 제헌에게 욕망의 대상만으로 머무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것을 한참을 뛰어넘는, 풍성하고 입체적인 감정을 나날이 새롭게 이끌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헌은 그 사람을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을 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제헌은 여원 앞에서 언제나 우아하고 다정한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겠지만 속으로는 얼마든지 저열해질 수도 있었고 음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언젠가 여원이 자신과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 속삭이던, 그런 순간이 더욱 많아졌으면 했다. 자신의 품 안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여원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어졌다.

처음에 내민 제안을 순순히 수락했으면 좋을 텐데, 탐욕적이고 근시안적인 선준은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헌은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삶에서 선준을 완벽하게 떼어내기 위해서 마지막 도박을 치밀하게 설계했다. 자신이 위험해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면 꺼리지 않았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뿐더러, 여원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해 낼 수 있었다.

“제헌 씨……?”

“네, 여원 씨.”

“혹시…… 일부러 이러신 거예요?”

그러한 계획에 대해서 굳이 여원에게 밝히지는 않았다. 첫째로는 여원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아서였고, 둘째로는 여원이 미리 알고 있다면 일을 진행하는 데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혹시라도 큰일 났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여원 씨.”

“제헌 씨 쓰러지는 순간부터, 저 정말 제정신 아니었단 말이에요.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철렁해서…….”

“…….”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아프지는 않을지, 힘들지는 않을지, 자기 일처럼 종종거리며 걱정한다. 생각해 보면 여원은 늘, 이런 식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같잖다고 느꼈다. 여원에게 감정이 생겨난 다음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러다가 큰일 나셨을 수도 있잖아요. 제헌 씨가 그렇게 되면, 저랑 우리 통통이는 어떻게 하라고요…….”

제헌은 현실 파악을 가장 우선시하는 편이라, 무슨 상황에서든 값싼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매사에 본인만의 계획이 있고, 그를 실행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물론 제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제헌 씨가 그렇게……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요.”

“…….”

“그러면 너무…… 외롭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애타게 걱정하며 온전하게 헤아리는 여원에게 마음이 동했다. 지금까지 제헌에게 가족이란 의무나 책임감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자신에게 깊은 감정적 애착을 느끼는 여원이 두 사람이 가족으로서 만들어나갈 미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신선한 기쁨을 느꼈다.

저를 향해 바지런하게 달싹이는 그 마음이 세상 무엇보다 예뻐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여원이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원에게 마음이 움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해요, 여원 씨.”

이제는 제헌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원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단편적인 집착이나 소유욕, 독점욕으로 설명될 수는 없음을.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스스로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더 이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랑이었다.

여리고 온순하며, 또한 포용력이 있는 여원은 자신과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확신했던 제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역시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이제 우리, 저택을 허물었으면 해요.”

“…….”

“더 이상 제헌 씨에게 이 저택은 어울리지 않아요.”

세심하고 다정해서, 여원은 다른 사람의 욕구나 결핍도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를 해결해 주겠다며 작은 손을 움직이며 잔뜩 애를 썼다. 제헌이 더 이상 저택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것도 여원이었다. 그동안은 제헌의 정체성이었던 저택이었지만, 이제는 제헌이 제헌답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요, 앞으로 우리 가족이 살 집은 같이 찾아볼까요?”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다면 자신의 판단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 가소로워했겠지만, 여원의 부탁이기 때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택을 부수어 내릴 수 있었다. 제헌은 여원을 위해서라면 흔쾌히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이라도 맞춰줄 수 있었다. 물론 여원이 그러한 상황을 못 견뎌 할 사람이지만.

쿵, 쿵, 쿠웅―.

마침내 저택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제헌은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맞이했다.

모든 일이 통제하에 돌아간다는 데서 희열을 느끼며 살아오던 제헌이었다. 그러나 여원을 만나고 사랑하면서, 지금껏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그를 통해 삶을 둘러싼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게 된 것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혼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풍성한 미래로 향하는 문을 저에게 열어준 여원의 존재가 한층 소중해졌다.

여원이 없을 때도 제헌은 삶에서 딱히 불만족이나 결핍을 크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인간인지라 이따금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 실체는 고립이 아닌 고독이었기에 기꺼이 즐길 수 있었다. 그 상태가 편안하고 익숙했으며, 따라서 홀로 충분하다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여원은 원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알려주고, 채워주었다. 여원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대해서 깊숙하게 알게 되었으며, 결합을 통해 온전해질 수 있음을 실감했다. 지금 제헌의 인생은 이전까지보다 한층 풍요롭고 충만했으며, 변화한 삶의 중심축에 있는 것은 단연코 여원이었다.

“제헌 씨, 오셨어요?”

저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다정한 의지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여원이 사랑스러웠다. 여원은 흑백영화처럼 단조롭게 흘러가던 제헌의 삶에 다채로운 색채를 부여하는 특별한 존재였다. 충족 또는 불만족으로만 구별되던 무채색의 세계에 새롭게 덧입혀진 선명한 색의 이름은 행복이었다.

감각의 정글 3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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