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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폐막식 (16/17)

15. 폐막식

냐아!

통키가 보채듯이 울어대는 소리에 멍하게 있던 여원이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혓바늘이 까슬까슬하게 돋아난 혀끝이 손가락을 축축하게 적시는 촉감이 선명했다. 그 감각을 시작으로. 저릿하게 마비되어 있던 정신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여원이 저를 둘러싼 주변을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세월의 흔적인 듯 군데군데 얼룩진 천장. 바람이 스산하게 불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창문 소리. 혀끝에 텁텁하게 와 닿는 눅눅한 먼지 입자의 맛.

그렇게 하나하나 일깨워지는 감각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여전히 저택을 불온하게 흐르는 향기였다. 저택에 처음 발을 들이던 바로 그 순간부터, 여원을 음산하게 위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정하게 경고하는 것 같기도 했던 특유의 향기.

여원에게 저택은 모순적인 감각이 어지러이 뒤섞인 정글이었다. 명징하게 도사린 위험이면서도 이끌릴 수밖에 없는 관능이었고,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희열임과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자괴감의 근원이었다. 죽음에 가까워지도록 여원을 위협하던 선준은 말끔하게 사라졌지만, 저택 자체가 자아내는 긴장감만은 여전했다.

오늘 아침, 무사히 퇴원한 제헌은 출근하는 대신 여원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외부 연락을 완벽하게 차단한 두 사람은 세상에 온전히 둘만이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루를 보냈다. 계획했던 일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건 사건의 파급과 충격이 강렬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외부로부터 고립되는 시간이 얼마간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면함으로써 매듭지어야만 하는 일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대표님, 선준 도련님은 오늘 아침에 살인 미수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현재 사건 경위를 조사받고 있습니다.”

제헌을 찾아온 비서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선준의 소식을 알렸다. 못내 씁쓸해진 여원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가, 슬쩍 옆자리의 제헌을 돌아보았다.

“네.”

눈빛이 잘게 흔들리는 여원과는 다르게 제헌은 표정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예전에는 매사에 태연한 제헌의 태도를 보고, 살면서 어려운 일이 없어서 완고할 수 있는 것이라 짐작했다. 이제는 정반대로, 너무나 커다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무던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선준이가 독살을 시도해서 내가 상해를 입은 건, 증빙될 수 있도록 진료 기록 준비해 주세요.”

이제 더는 유산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끝내 미수로 돌아가긴 했지만, 선준은 타인을 해치려는 살의를 품은 범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원도 그 사실이 심란한데, 어릴 적부터 선준을 양육해 온 제헌이 느끼는 착잡함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합의 관련해서는 어떻게 진행하시겠습니까?”

“합의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제헌은 더 이상 여원을 해치려 한 선준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모든 일에 있어 우선순위는 여원과 배 속 아이였다.

“……그리고 의사 소견서 제출할 수 있도록, 선준이가 십대 때 다니던 정신과에 연락 넣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딱 그 정도가 제헌이 선준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보살핌이었다. 불행한 성장 환경과 유전병에서 출발한 열등감과 피해 의식까지. 선준은 악행을 저지르는 매 순간 쫓기듯이 불안해했다.

인간은 때로 악해서가 아니라 나약해서 나쁜 선택을 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모두가 선준과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선준에게 있어 순간의 선택이 축적된 결과는 벼랑 끝까지 몰린 타락이었다. 이제는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였다.

“이제 나는 선준이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제헌은 과거에 대한 단절을 선언했다. 제헌이 결코 쉬운 마음으로 선준과의 절연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여원도 잘 알았다. 저를 살려내기 위해 희생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제헌은 평생 저택을 지키고 동생을 책임져 왔다. 하나 남은 가족인 동생에게 온전히 모질 수 없었던 건 결국 우유부단함 때문이 아닌, 고통스러운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니 여원 씨도 더는 마음 쓰는 일 없었으면 해요.”

결국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이란 없기에, 결정의 순간은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러나 선준이 다른 사람을 낭떠러지로 끌어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선택을 했다면, 제헌은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일생 지켜오던 가치를 포기했다.

“네, 고마워요.”

그로써 고풍스럽고 위압적인 저택은 이제 외부의 침범 없이 온전히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저택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여전히 여원의 마음 한구석에는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이제 여원은 제헌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도 감수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그가 끝내 밝히고 싶지 않아 했던 사연이라면, 헤집는 대신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요, 제헌 씨.”

그럼에도 여원은 이대로 모른 듯이 지나갈 수는 없었다. 제헌을 적당한 정도로만 사랑했다면, 아마도 모른 척 눈을 감고 안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헌을 아주 깊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여원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두 사람의 관계를 좌초시킬 암초는 미리 제거하고 싶었다.

“네, 여원 씨.”

“저, 3층 서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요.”

부드러운 눈으로 여원을 바라보던 제헌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선준이 떠나간 지금에도, 여전히 3층 서재가 그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게 느껴졌다.

여원이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제헌은 3층 서재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여원이 겪을 위험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지만, 제헌이 결코 들추고 싶지 않았던 아픔 때문이기도 했다.

“선준이가 무슨 말을 했나 보군요.”

“맞아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했죠.”

“하아…….”

“물론 그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헌 씨를 사랑하고, 그래서…… 제헌 씨를 믿으니까요.”

여원은 제헌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제헌의 속내에 대해서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여원이 아는 것처럼 무뚝뚝하지만 다정하거나, 아니면 선준이 말하는 것처럼 번지르르하지만 잔혹하거나,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언젠가 제헌 씨가 저에게, 어떤 사실은 덮어둔 채로 지나가는 것이 좋다고 하셨죠.”

“여원 씨.”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아무리 고통스러운 진실이라도, 있는 그대로를 직접 보고 싶어요.”

“…….”

“……그래야만, 고통이 나눠질 수 있는 거잖아요.”

여원은 제헌의 치부를 파고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를 의심하기 때문에 속속들이 파헤쳐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헌을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그의 전부를 끌어안고 싶을 뿐이었다.

“제헌 씨의 눈에는 제가 마냥 어리고, 약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제헌 씨가 저를 사랑해 주셔서, 이렇게 단단하게 만들어주셨잖아요.”

“…….”

“그러니까 이제 혼자서만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

“저에게도 나눠 주세요. 제헌 씨만 저를 지키는 게 아니라, 저도 제헌 씨를 지켜드리고 싶어요.”

여원은 오랜 세월 고독하게 책임을 버텨온 그를 더 이상 외롭게 두고만 싶지 않았다. 이제 여원은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의 제헌을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난 순간, 금기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다.

“알겠어요.”

“…….”

“여원 씨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킬게요.”

제헌을 올려다보는 여원의 눈동자는 오롯한 애정과 믿음을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헌 역시도 진실을 밝히는 일이 서로를 할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게로 내밀어진 손을 꽉 붙잡은 제헌이 여원을 3층 서재로 데려갔다.

끼기긱.

엄숙한 얼굴을 한 제헌이 서재 문을 열어젖혔다. 언제나 굳건하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고여들었던 악취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아…… 이게 무슨…….”

쿰쿰하게 펼쳐지는 어둠 틈새로 여원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이윽고 불이 밝혀지자, 결이 거친 나무 바닥 군데군데에 빛바랜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막연하게 느끼던 위험이 실체로 드러나는 순간, 그날 밤 진실이 여원에게 성큼 다가왔다.

“선준이가 흘린 피입니다. 내 손으로 저지른 일이죠.”

“아…….”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음산하면서도 차분하게 눅눅한 공기를 갈랐다. 끝끝내 제헌이 서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유를, 여원은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준이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때렸습니다.”

제헌은 보살피고 책임져야 하는 동생에게 처참하게 폭력을 휘둘렀던 과거를 고백했다. 냉철하고 이지적인 남자가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고 잔악한 본성을 드러냈던 순간이 이곳에 박제되어 있었다.

“전처와는 정략결혼 한 사이였지만, 내 성격상 동생을 살갑게 대하지 못해서 선준이만은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그게 내 실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준이는 십대 후반에 알파로 발현하고 나서, 전처에게 성적인 관심을 보이며 집착하기 시작했죠.”

“아…….”

여원이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새로 온 형수는 형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웃어주었다는 어린 선준의 일기장이 문득 떠올랐다. 끝내는 괴물이 되어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다만 저에게 오롯이 쏟아지는 애정과 관심이 필요했으리라. 고마움과 호감으로 출발해서 형수를 따르다가, 끝내 점점 집착하게 되었을 선준이 충분히 상상되었다.

“광증이 도질 때면, 선준이가 3층 서재에 몰래 숨어들어 와 벽에 뚫린 구멍으로 침실을 관음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

“그 사실을 알게 된 전처가 선준이를 저택에서 내보내 달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죠.”

“…….”

“선준이는 당시에 미성년자였고, 유전병까지 있기 때문에…… 결국은 가족인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헌은 언젠가 스스로를 낭만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었다. 정략결혼이라지만 어쨌든 부인이었고, 살다 보면 정이라는 게 들기도 한다. 그러나 부인이 선준을 끔찍해하며 위험을 호소하는 순간에도, 제헌에는 집안의 치부가 들춰지지 않도록 동생을 책임지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그 일 이후로 전처의 태도가 싸늘해지자, 기댈 곳을 잃어버린 선준이는 정서적으로 더욱 불안해졌고요.”

“아…….”

“광증 발작이 점차 심해지더니, 급기야 내가 저택을 비운 밤에는 3층 서재에서 숨어들어 있다가 전처를 강간하려 했습니다.”

광증이 도졌을 때 스스로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던 선준은, 영문을 모르기에 더욱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햇살처럼 드리우던 애정을 빼앗기고, 다시금 혼자가 되자 형을 원망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다. 분명히 형의 소행으로 형수가 불행해졌다 생각하며, 피해 의식과 과대망상을 부풀려왔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나 역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선준이를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

“다행히 직전에 발견해 전처가 다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혼을 요구해 왔을 때 붙잡을 수는 없었죠.”

“……그러면, 저 피가…….”

“아무리 청소를 해도, 선준이가 그날 밤 흘린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더군요.”

제헌은 스산한 얼굴로 여전히 서재에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핏자국을 내다보았다. 서재에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내내 악취를 풍겼다는 것 역시, 대를 타고 내려온다는 정체불명의 유전병에 더해져 저택 자체를 불길하고 음산하게 보이게끔 했다.

“선준이는…… 그날 있었던 일을, 모르는 거죠?”

여원이 짐작했던 대로, 아예 밑바닥에서부터 통째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광증에서 깨어난 선준은 자신이 알고 있는 파편적인 사실을 뒤섞어 재편집하고, 왜곡된 기억을 만들어냈다.

“네.”

“…….”

“누구에게든 이야기해 본 적 없는 이야기입니다.”

선준에게 광증 상태로 저지른 일을 낱낱이 알려주지 않은 것은 제헌 나름의 배려였다. 고통스러운 진실로부터 상대를 지켜주는 것이 그에게는 보호의 방식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저택의 불행과 광증으로 인해 얼룩진 가족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제헌 씨…….”

하지만 정확히 그 때문에,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로 사람들이 저를 떠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선준은 더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외로워하고, 그다음에는 습관처럼 형을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피해 의식을 재료 삼아 망상을 부풀리는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 혼자서만 느끼는 것 같은, 서재에서 진동하는 악취를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

“그 냄새가 꼭 나에게 그날 밤의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우리의 과거는 기억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에, 그날 밤의 일은 선준이 아닌 제헌에게 트라우마였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과 3층 서재에서 내도록 진동하는 악취처럼. 부채의식으로 출발한 책임감에서 끝내는 저릿한 죄책감에 이르기까지, 제헌의 현재는 그날 밤의 고통스러운 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여원 씨를 추악한 진실로부터 보호해 주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리는 제헌의 얼굴이 아스라했다. 습기를 머금고 새까맣게 내려앉은 동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여원이 돌아설까, 조금쯤은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헌 씨…….”

분명 진실은 여원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묵직하고 고통스러웠다. 소스라치듯 놀라게 될 수밖에 없었고, 쉬이 감당해 내기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제는 선준이 내내 경고해 오던 제헌에게 내재된 폭력성에 어느 정도 실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나라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여원에게 좀처럼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제헌의 목소리가 얕게 떨렸다. 어쩌면 모르고 지나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진실은 언젠가 제헌이 경고했던 대로 고통스러웠다.

“하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여원은 제헌이 무서운 마음보다도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커다랬다. 추악한 진실을 혼자서만 간직해 오는 동안, 제헌의 속이 얼마나 곪아갔을까 걱정되었다. 결국에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해요.”

한 걸음, 두 걸음, 서재를 가로질러 제헌에게 다가간 여원이 양팔을 한껏 벌려 커다란 몸을 끌어안았다. 여원은 차츰차츰 제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었다. 긴긴 세월 혼자서 버텨왔을 책임감과 고독의 무게, 벗어나기 어려웠던 죄책감까지, 어렴풋이나마.

“사랑해요, 제헌 씨…….”

그렇게 제헌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부는 드러내지 않고는 치유할 수 없다. 제헌은 완벽해 보이는 표면 아래로 깊숙이 매몰되어, 곪아가는 상처를 홀로 간직하고 살아왔다.

“앞으로는 저에게 얘기해 주세요.”

“……하.”

“제헌 씨가 외롭지 않도록, 제가 평생 곁에서 지켜드릴게요.”

그렇기에 제헌에게 있어 과거와의 단절이란 단순히 여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여원에게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라고 조언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제헌 역시도 책임감과 부채의식에 짓눌려 스스로를 온전하게 돌볼 겨를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여원을 만난 이후로 제헌은 인생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고, 그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 *

오후에는 여우비가 내려서 유리창에 투명한 빗방울이 몽글몽글 번져 있었다. 창밖으로 촉촉하게 가라앉은 소담한 바깥 풍경을 말가니 내다보던 여원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목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약속 시각까지는 5분 남아 있었지만, 초조한 마음에 얼마 전부터 자꾸만 시간을 확인해 보게 됐다.

“하아…….”

여러 번 심사숙고하고, 결연하게 결심을 굳힌 뒤에 이 자리에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도록 잘근잘근 깨물어댄 입술에는 아릿한 통감이 번졌고, 손톱 주변을 자꾸만 뜯어대서 거스러미가 슬슬 찢어졌다.

짤랑, 하는 종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창백하고 도회적인 도심 호텔의 카페와는 대조적으로 산란하고 수선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여자가 실내에 들어섰다. 낯설어하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은 여원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엄마!”

“어머, 여원아.”

“잘 찾아왔네? 이쪽으로 앉아.”

“그래, 얘 그런데, 여기는 무슨 찻집이 이렇게 멋있다니?”

그녀는 여원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에서 별로 변한 게 없는 모습이었다. 끄트머리가 보풀보풀하게 일어선 파마머리에, 화려한 문양이 어지러이 새겨진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에휴, 사는 게 매일 그저 그렇지. 별거 있다니?”

나이에 비해 빨리 늙어버린 엄마의 얼굴에서는 세월의 흔적과 고단함이 묻어나지만, 그래도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밝아 보였다. 요즘에는 아빠가 좀 잠잠한가 보다 싶다가도, 그 이유가 제헌이 다달이 부쳐 주는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묵직해졌다.

“여원이 너는 얼굴이 너무 좋아졌다.”

“아…… 그래?”

“그럼, 저번에 봤을 때는 애가 매가리 하나도 없더니, 요즘 남편이 잘해주니? 볼살도 좀 오른 것 같네.”

제헌이 자신의 집안을 원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여원은 엄마를 대하는 일이 내내 불편했다. 그동안은 연락을 거의 하지 않은 탓에, 엄마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여원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엄마…… 나 오늘은,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

때맞지 않게 천진해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니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마음 졸이게 됐다. 더 이상 엄마의 허락이나 인정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여전히 긴장되었다.

“아니, 무슨 이야기길래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대?”

하지만 여원은 직면을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 어렵고 꺼려지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나 이혼하게 됐어.”

“뭐, 뭐?”

벼락처럼 내리꽂힌 선언에 엄마의 눈이 단박에 휘둥그레졌다. 정작 그 말을 꺼낸 여원은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엄마는 생각조차 못 했던 소식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니, 여원아. 그때…… 그래, 이혼 얘기 했던 거 엄마도 기억은 하는데……. 그 뒤로는 잘 지내는 것 같더니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얘기야?”

“…….”

“합치고 찢어지고 하는 게 부침개 뒤집기처럼 할 일이니. 그러지 말고 다시 잘 생각해 봐, 여원아. 엄마 보기에 네 깜냥으로는 그만한 애 다시 만나기 어려워.”

“엄마…… 그러니까, 이미 이혼은 했어. 법원에 서류 제출도 끝났고.”

엄마의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둥지둥 여원의 마음을 돌리려는 말을 늘어놓았다. 한숨을 푹 내쉰 여원이 제 뜻을 다시금 명확히 밝혔다. 헛숨을 들이켠 엄마가 허탈한 얼굴로 여원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나…… 아니, 어떻게 이렇게 큰일을 엄마한테 말 한마디 안 하고 할 수가 있어?”

뜻밖의 소식이 놀랍고, 여원이 걱정스러운 한편으로 엄마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다. 그녀의 처지로서는 당장 제헌이 보내주는 돈이 끊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원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일이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엄마한테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아니…… 아이고, 여원아. 너 앞으로 남은 인생을 대체 어떻게 살려고 그런 일을 했어. 응? 이렇게 될 거였으면, 처음부터 결혼을 신중하게 생각했어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옳다구나 결혼하라고 등을 떠밀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니 혀끝이 씁쓸함으로 딱딱해졌다. 어릴 적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여원을 부잣집에 결혼시키는 것을 마지막 하나 남은 인생 역전 기회로 생각해 오던 엄마였다.

“엄마는 이제 네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더니…… 아니, 그래도 일단 결혼했으면 꾹 참고 버텨야지. 이혼한 오메가가 사회에서 어떤 취급 받는지 뻔히 알면서 너는, 응?”

“…….”

“나와서 산다고 인생이 그냥,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릴 것 같아? 세상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데. 얘는 어렸을 때부터 보면, 참 얌전한 것 같다가도 이상한 데서 한 번씩 이런 짓을 하더라.”

잔뜩 조마조마해하다가 끝내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낸 엄마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부잣집에 결혼시킨 아들이 저처럼 그저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 통탄하기만 해 보였다. 여원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도 맞았지만, 좀처럼 출구가 없어 보이는 불행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여원이 자신과 같은 운명을 답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역시 그녀에게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해.”

이어진 소식은 더더욱이나 예상 밖이었는지, 엄마의 얼굴이 당황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슨 상황인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엄마가 여원의 아랫배에 시선을 던졌다. 여원의 아랫배는 육안상으로 어느 정도 봉긋하게 부풀어 있었다.

“여원아…… 너 설마, 임신한 거니, 지금?”

“응, 맞아.”

“아니 세상에…… 결혼하겠다는, 그 사람 애야?”

“어.”

“……그 사람이 누군데?”

“제헌 씨. 선준이 형.”

선준과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제헌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기가 더욱 어려웠다.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크게 실망하고, 내가 너를 이렇게 키웠냐며 득달같이 야단쳐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더라도 어차피 그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원을 직접 기른 엄마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에는 마음이 묵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하니, 참…… 이게 내 배에서 나온 새끼가 맞나 싶기도 하고.”

“…….”

“아니, 얘가 세상 무서운 걸 모르고…… 사람들이 알면 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어, 응?”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엄마가, 여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양 호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원은 주눅 들거나 기죽지는 않았다. 엄마가 당황하고 실망할 거라는 건 이 자리에 나오기 전부터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헌과 함께하기로 한 선택을 철회할 수는 없었다.

“하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는 맥없이 얼굴 감싸 쥐었다가 여원의 배를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기를 반복했다. 마음 같아서야 내가 너를 이렇게 키웠냐, 너는 정신이 있는 애냐 없는 애냐, 로 시작하는 드잡이질을 한참은 늘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놀라게 한 건 미안해.”

소식을 전하는 여원이 전에 없이 차분하고 단단한 태도였다. 부모 자식 사이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원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논의하고, 고민을 토로하며 마음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통보가 목적이라는 것을. 엄마가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할지라도, 여원의 결정을 바꾸거나 혹은 감정적으로 흔들면서 영향을 줄 수도 없었다.

“나도 잘 알아. 사람들이 알면, 손가락질할 만한 일이라는 거.”

“얘는, 안다는 애가 겁도 없이 이런 짓을…….”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었어. 아이가 먼저 생기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하아…….”

“엄마, 그래도 이번에는 나 아이 잘 낳고, 예쁘게 키우고 싶어.”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랑 앞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어.”

엄마의 얼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일그러졌다. 일방적인 소식을 전하는 여원을 득달같이 야단치기에도, 호들갑스럽게 걱정하기에도 적절치 않았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었음에도 오히려 한층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제야 이미 너무 멀어져 버린 거리를 체감하게 되었다.

“그래…… 엄마가 뭐라고 한들, 이제 네가 엄마 말을 듣기나 하겠니.”

“…….”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어쩌겠어. 보니까 배도 제법 불렀는데, 애를 떼라고 할 수도 없고.”

“…….”

“아이고……. 됐고, 두 번 이혼하는 일만 없도록 해. 너는 열성 오메가라서, 이제 한 번 더 이혼하면 인생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거야.”

고개를 모로 돌린 엄마의 입꼬리가 불안정하게 씰룩거렸다. 여원에게 이런저런 타박을 늘어놓았지만, 그 내용을 곰곰 따져 보면 이제 더는 여원을 휘두르려 하지는 않았다. 어딘가 헛헛해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응시하던 여원이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이건 또 웬 거니?”

불쑥, 테이블 앞에 내밀어진 하얀색 종이봉투를 본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에 든 내용물이 제법 묵직해 보였다.

“많이는 안 되고, 300만 원이야. 그치만 내가 번 돈이야.”

“……여원이 네가 무슨 수로?”

“제헌 씨 소개로, 요즘에 향수 부티크에서 조향 공부하고 있어. 내가 만든 향수를 거기 대표님이 마음에 들어 하셔서, 정식으로 제품 발매하실 계획이래. 그 향기를 사가시면서 주신 돈이야.”

“…….”

“내가 처음 내 능력으로 모은 목돈이어서…… 엄마 주고 싶었어.”

여원은 엄마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대로 내리깔았다.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동안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어서 내내 무기력했다. 그러나 제헌의 도움을 받아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터널에 빛이 새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결국 엄마였다.

“……엄마를 다 생각해 주고 고맙다, 얘.”

응당 기뻐해야 할 순간이었지만, 여원이 건넨 돈 봉투를 받는 엄마는 얼떨떨해하고 한편으로는 떨떠름해하는 기색이었다. 아마도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 제헌 씨가 우리 집에 매달 돈 보내는 일, 앞으로는 없을 거야.”

“…….”

“나 혼자서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내 능력으로 번 것도 아닌데, 계속 엄마한테 그 돈을 보내게 되면 내가 제헌 씨 앞에서 떳떳할 수가 없어.”

“……하아.”

“엄마,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그래서 나는, 그러고 싶지가 않아.”

“얘, 여원아.”

“나, 아기 낳고 나면 학교도 복학할 거고, 앞으로 내 능력도 기를 거야. 그동안 엄마한테 보낸 돈도, 내가 앞으로 무슨 수를 써서든 제헌 씨한테 갚을 테니까…….”

얼얼하게 북받쳐서 목이 메는 듯한 기분에 여원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목을 살짝 뒤로 젖히자,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눈매에 눈물이 희미하게 맺혔다. 밭은 숨을 들이마신 여원이 다시금 고개를 똑바로 가누었다.

“……이미 엄마 거니까, 어떻게 쓰든 엄마 자유지만…… 그래도, 혹시 이혼할 때 변호사 비용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썼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엄마를 도와줄 수는 없었다. 그게 과연 엄마를 위한 일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여원은 그녀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마침내 행복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어.”

“…….”

“우리 아들이 번 돈이니까, 엄마도 꼭 잘 쓸게.”

한동안 말이 없던 엄마는 여원이 건넨 돈 봉투를 핸드백에 밀어 넣었다.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린 엄마가 여원을 향해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평소의 우악스럽고 속물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아주 드물게 기억하는 찌들고 닳아지지 않은 미소였다.

“아유, 벌써 시간이 몇 시야. 엄마 이제 가봐야겠다.”

한동안 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는 갑작스레 시간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진짜로?”

“어어, 이따 일 나가야 하니까 이제 일어나야지.”

핸드백을 들어 올린 엄마가 어수선한 몸짓으로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정돈했다. 그러는 내내 입가가 불안정하게 씰룩거렸다. 그 순간 여원은 앞으로 엄마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집안에서 오랜 기간 함께해 온 식구였지만 이제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여원아, 너 그 사람이랑 결혼식은 했니? ……엄마 부를 거지?”

그대로 돌아서려던 엄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여원에게 질문했다. 여원이 느슨하게 벌어지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식은 아마 생략할 것 같아. 결혼한 사실을 숨길 건 아니지만, 딱히 널리 알릴 만한 일도 아니기도 해서.”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살아, 앞으로는 엄마 속 썩이지 말고.”

말을 끝내고도 엄마는 한동안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얼마간 망설이더니, 한 발짝 여원에게 가까이 다가와 양팔을 크게 벌렸다. 고개를 푹 숙인 여원이 엄마를 포옹했다.

“…….”

“…….”

질척질척한 이야기들은 오가지 않았지만, 심장 부근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진부하다 싶을 마음들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행복했으면 좋겠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런 바람들.

“여원아…….”

“응, 엄마.”

“엄마가 여원이 사랑하는 거 알지?”

먹먹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엄마의 눈시울이 촉촉해져 있었다. 걸걸하고 그악스러운 태도도 사실은 처절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나름의 생존방식이었다. 만들어진 외피가 벗겨진 자리로,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 드물게 끄집어내졌다.

“……나도 사랑해, 엄마.”

빈말로도 좋은 부모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불행한 결혼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여원을 내내 정서적으로 학대해 온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원은 그녀를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응시하게 되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없었음에도 마음으로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이제 갈게?”

일상과 유리된 고결한 찰나는 오래 지속하지 않았다. 포옹에서 여원을 딱 잘라 떼어낸 엄마가 부러 경쾌하게 이야기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여원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엄마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응 엄마. 택시 타고 가지, 내가 택시비 줄게.”

“아냐, 괜찮아. 지하철로 가는 게 더 편해.”

“그래도…….”

“얘는 참, 금방 간대도?”

여원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인 엄마가 터덜터덜, 불규칙한 발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여원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엄마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

누군가의 눈에는 초라하고 궁색해 보일지언정, 삶을 결코 놓지 않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 역시도 묻어났다. 익숙한 뒷모습이 점점이 줄어들더니, 끝내는 완전히 시야를 벗어났다. 여원은 한참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면, 끝이 그렇게 나쁘다고만 생각되지는 않았다.

“제헌 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제헌이 차 안에서 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헌의 이름을 부르는 여원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제헌은 다만 여원을 안아주었다.

“고생 많았어요.”

“하아…….”

“그리고 잘했어요.”

토닥토닥, 커다란 손이 안정적으로 여원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제헌이 선사하는 애정의 테두리 안에서 여원은 더없는 안온함을 느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굳건한 신뢰로 이어진 사이였다.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덕분은 무슨. 여원 씨가 스스로 한 일인데.”

제헌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벼이 저어냈지만, 여원에게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아니에요, 정말로요.”

여원에게 과거와의 단절이란 과거를 유기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지금의 여원을 구성하는 일부였기에, 송두리째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적당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

절단의 순간은 마냥 순탄할 수만은 없고, 따끔하도록 쓰라렸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로서 바로 서야만 했다.

제헌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충분히 사랑받아보고, 돌아갈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또한 제헌 역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과거를 단절해 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자신의 방식대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결연한 의지를 품는다 해도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 역시 그다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결국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억지스러운 고집 없이도 스며들듯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 * *

무척이나 화사하고 쾌청한 날이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을 에워싸는 정원에는 싱그러운 초록이 탁 트여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상큼한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이르게 피어난 장미가 수줍게 봉오리를 벌렸다.

후드득 쏟아질 것처럼 만개할 계절이 문턱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느새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초여름이었다.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 정도로, 고풍스러운 저택은 여전히 웅장한 위엄으로 넘쳐흘렀다. 언제나처럼 내부에 들어서는 대신, 여원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현관 즈음에서 제헌이 여원을 돌아보았다.

“제헌 씨.”

사박사박하게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여원은 본연의 빛을 완전히 되찾고 찬란하게 반짝였다. 이제 여원은 제헌에게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과감한 요구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제헌의 앞에서 불안함 한 점 없이 떳떳했다. 제헌이 자신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여원 씨.”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이야기해요.”

“이제 우리, 저택을 허물었으면 해요.”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저택의 주인이, 자신의 전부처럼 여겨오던 공간을 무너뜨리라는 말에 눈썹을 가볍게 치켜떴다.

여원의 부탁은 단순히 억지를 쓰거나 고집을 부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혹은 한때 선준한테 감금되다시피 해서 지냈던 날들 때문에, 저택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더 이상 제헌 씨에게 이 저택은 어울리지 않아요.”

저택은 외부인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원만을 배제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기 확신이 넘치고 자아가 강해 보이던 제헌이지만, 그 역시 결국 저택에 깃든 비밀과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내려본 적 없었다. 저택의 주인인 제헌 역시도 저택에 의해 삶 전체를 억압당했다.

“저택의 저주는 이 대에서 끝내야 해요.”

“…….”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는 더 밝고 행복한 곳에서 자랐으면 좋겠어요.”

제헌과 여원은 스스로 선택한 가족을 만들어나가기를 약속했다. 이제 새롭게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지막 남은 굴레인 저택을 끊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앞으로 다가올 두 사람의 미래에는 더 이상 그늘이 없어야 하기에, 지금의 선택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하하.”

여원의 제안을 곱씹던 제헌이 웃음을 흘렸다. 한때는 지켜야 할 전부라고 생각했던 저택이었지만, 그를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제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저택이 허물어진다 한들 제헌의 정체성이 훼손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여원 씨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처음에 저택에 들어왔을 때는 사소한 의사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여원은 제헌과의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충분히 단단해진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요, 앞으로 우리 가족이 살 집은 같이 찾아볼까요?”

이 정도로 파격적인 요구를 할 만큼 여원이 자신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제헌을 퍽 기쁘게 했다. 여원에게 일어난 변화는 경이로움마저 선사했다. 여원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제헌 역시 의식하지 못한 사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새로 이사하는 집에는 빛이 잘 들었으면 좋겠어요.”

현관에 서 있던 제헌은 음울한 저택에 들어서는 대신, 여원을 따라 함초롬하게 반짝이는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손을 단단히 맞잡은 두 사람의 사이로 햇살이 녹아드는 자리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 * *

쿵, 쿠웅.

굴착기가 지면에 부딪히며 묵직한 소음을 자아냈다. 부연 흙먼지가 일어나면서 시야가 매캐해졌다. 워낙 거대한 저택이라서 철거를 위해 동원되는 인력만 해도 상당했다.

“이 저택이 얼마나 오래된 겁니까? 한 70년 정도?”

“네, 그 정도 됐을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저택에 집착적으로 매달려왔다. 이곳을 지키는 일이 곧 나의 삶에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행으로 얼룩진 면면을 들여다보면 회의감에 휩싸이게도 됐다. 그럼에도 결코 혼자서는 무너뜨리기를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게요, 건축학적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건물인데 무너뜨리기를 선택하셨네요.”

“하하.”

저택은 빼곡하게 솟아난 산등성이에서도 빼어나게 돋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며칠에 걸쳐 숭숭 뚫린 구멍에 폭약을 두르고 있는 취약하고 앙상한 모습이었다.

거처를 옮긴 지는 이미 오래였고, 새로운 집에서 여원은 배 속의 아이와 함께 행복해했다. 태어나서부터 평생을 자라온 곳이라 떠나는 일이 못내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한번 저택을 벗어나자 적응은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오늘 역시 굳이 이 자리에 올 필요까지는 없었겠지만, 저택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직접 목도하고 싶었다. 이게 가끔 여원이 말하던 이상한 고집인 걸까.

“그럼 이제 허물겠습니다.”

“네, 진행해 주시죠.”

굉음과 함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고, 웅대한 저택이 단박에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한 시대의 종막이었으며, 파멸과 동시에 찾아온 새로운 시작이었다. 분진으로 와해되는 저택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순간에는 뜻밖에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가지고, 한때는 나의 전부라고 생각해 왔던 것을 무너뜨리는 것까지, 전부 여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일들이었다. 의무로 점철되었던 과거를 허물어뜨리고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제헌 씨, 오셨어요?”

새롭게 이사한 집에는 언젠가 여원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빛이 유난히 환하게 들었다. 반쯤 열린 문 틈새로 아이를 가진 여원이 말갛게 웃어 보이자 심장에 빠듯한 충족감이 차올랐다.

저택을 부유하던 나의 향은 이제 한 사람에게 정착했다. 인생에 단 한 명뿐일 연인에게 완벽하게 속박됨으로써 오랜 기간 갈망해 오던 자유를 비로소 온전한 형태로 손에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감각의 정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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