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최후의 만찬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선준이 떠나간 지도 이제 석 달, 완연한 봄이 찾아온 저택에는 부드러운 행복이 눅진하게 녹아들었다.
여원이 경험하는 일상은 지난해와는 전혀 달라졌다. 서로의 마음을 온전하게 확인한 후 제헌은 여원을 저택에만 묶어두지 않았다.
예전에 제헌과 함께 방문했던 향수 부티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된 여원은 일주일에 두 번씩 저택을 떠나 서울에서 조향 공부를 했다. 태교를 위해 필라테스도 다녔고, 집에만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는다며 제헌에 이끌려 쇼핑도 하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날이 좋으면 꽃구경도 다녔다.
근심 하나 없이 평화로운 일상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묵직했다. 저택에서 쫓겨난 후 선준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선준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제헌이라면 선준을 따로 추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원에게 전혀 아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여원은 선준이 못내 걱정되었다. 선준이 나쁜 놈인 것은 맞더라도 그가 죽거나 영영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여전히 제헌과 정식으로 가족이 되기에 앞서 선준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기를 기다리고야 있었지만, 실종 신고를 하는 방식으로 선준과 갈라서고 싶지는 않았다.
부우우웅―.
저택에 막 들어서는 순간, 여원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제헌인가 싶어서 액정을 들여다봤는데 뜻밖에도 발신인 불명이었다.
여원은 보통 모르는 번호에서 오는 전화는 잘 받지 않았다. 아마 현재 선준이 행방 불명인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역시 그러했을 것이었다. 초조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잘근 깨물던 여원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원아, 안녕?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선준이었다. 불길한 예감으로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서, 선준이야?”
―응, 나야. 여원이 너 내 목소리 안 까먹었네?
“어, 어어…….”
―그동안 잘 지냈어? 이제 너 배도 제법 불렀겠다.
전혀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선준은 여원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선준이 자신의 임신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아이에 대해 알은체하자 거부감이 울컥 치밀었다. 여원이 서둘러 배를 감싸 안았다.
“사, 살아 있었구나.”
핸드폰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선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멍해진 여원이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읊조렸다.
―에이, 강여원. 너 왜 그래?
“어, 어?”
―꼭 내가 죽기라도 바랐던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여원은 선준이 볼 수 없는데도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정말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선준은 믿어주지 않을 테다. 그리고 이미 사이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마당에, 그동안 선준이 혹시 죽기라도 했을까 걱정했다는 말을 하는 것도 더는 의미가 없었다.
“선준이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여원이 너도 잘 알겠지만 최근에 내가 많이 힘들었잖아? 심적으로.
“어, 어어……. 그랬지.”
―마음 정리하려고 유럽 여행 다녀왔어. 사람이 여행하다 보니까 마음도 비워지고, 시야도 넓어지고 좋더라.
“아, 그랬구나. 음, 그래도…… 목소리 좋아서 다행이다.”
―그래, 너는 내 목소리가 좋아 보여?
짐짓 유쾌하게 내뱉어지는 말에는 날카로운 뼈가 솟아 있었다. 여원이 무슨 말을 하든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선준이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을 지독히 괴롭히기야 했지만, 여원은 지금 상황이 선준에게 못내 미안하기는 했다.
“서, 선준아, 그나저나, 제헌 씨한테는 연락했어?”
―아니, 나 어제저녁에 한국 귀국했어. 그리고 너한테 처음 전화하는 거야.
“아, 그랬구나.”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이 부부로 같이 살던 정이라는 게 있는데, 당연히 너부터 챙겨야지.
“응……. 음, 연락해 줘서 고마워.”
선준은 안부를 묻는 말에 가시를 숨기고는 자신을 쿡쿡 찔러대었다. 여기서 여원이 정색하고 화내면 또 난동을 부릴까 봐 억지웃음을 흘렸다.
―조만간 형이랑 다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어?”
―강여원 너, 이혼 서류에 내 도장 받아야지.
여원은 선준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려고?”
―그럼. 이번에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안 되는 일 억지로 붙잡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더라고.
“아…… 아아.”
―이미 두 사람 애까지 생겼는데 어쩌겠어. 이제 나도 놔주고, 새 출발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응, 그렇지.”
―형이랑 이야기하고 알려줘. 저녁 식사나 할 겸, 내가 저택으로 찾아갈게.
제 할 말을 마친 선준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동안 여원은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옴짝달싹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멍하게 핸드폰만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거, 무슨 함정 같은데. 저택에서 내쫓길 때도 선준이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오히려 한동안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해 오던 차였다. 뒤끝 없는 척 굴지만, 분명히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저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여원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제헌 씨, 오늘…… 선준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현관에 들어선 제헌이 신발도 채 벗어내기 전,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여원이 불쑥 선준 이야기부터 꺼냈다. 여원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하며 제헌의 퇴근도 부쩍 빨라졌다. 제헌은 최대한 여원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음…… 그래서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구나.”
“제헌 씨는 알고 계셨죠? 선준이가 유럽 여행 다녀온 거.”
집 안으로 들어선 제헌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여원을 꼭 안아주었다. 질문에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제헌은 선준의 행방을 사전에 파악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이 밖에도 제헌은 여원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여러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다.
“선준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어요. 그 자리에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겠다고.”
“흠…….”
“일단 알겠다고는 했는데…… 제헌 씨, 솔직히 저는 내키지 않아요.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정말 도장을 순순히 찍어줄지도 모르겠고, 또 굳이 선준이 얼굴 보고 싶지가 않아서요.”
“네, 그렇죠.”
“이제 우리 아기도 있는데, 더 이상 위험한 일이 생기는 건 싫어요.”
제헌의 목에 바짝 매달린 여원이 얕게 칭얼거렸다. 제헌은 잠시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일단 저녁 식사 일정은 잡아봅시다.”
이어진 말에 여원은 솔직히 표정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더는 따질 것도 없이, 싫었다. 제헌도 여원도 이제 선준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이혼 도장을 이유로 굳이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게 느껴졌다.
“선준이 얼굴 다시 보기 꺼려지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헌 씨…….”
“대외적으로도, 나는 이제 여원 씨랑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된 것 숨길 생각 없습니다.”
“하아…….”
“손가락질할 사람들이야 계속해서 있겠지만, 어쨌든 잡음을 최대한 줄이려면 선준이와의 갈등도 제때 봉합해야 하죠.”
그 말은 또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여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원이 가장 신경 쓰이는 것도 결국은 배 속의 아이였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여원이 동생과 결혼한 상태에서 형의 애를 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도덕적인 결함이 아이에게 태생적인 낙인으로 남을까 늘 걱정이 되었다.
“……알았어요.”
그렇지만 적어도 아이의 출생에 묻은 얼룩을 덜어내고, 두 사람의 결합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으려면 제헌의 말처럼 선준의 수긍이 필요했다. 속이야 어쩔지언정, 표면적으로라도 선준이 두 사람을 음해하지 못하게 하려면 결과에 깔끔하게 승복시켜야 했다. 착잡한 기분에 젖어든 여원이 아랫배를 느릿하게 쓰다듬어 내렸다.
“이리 와요, 여원 씨.”
소파에 앉은 제헌이 여원의 등을 푹신하게 끌어안고 제 무릎 위로 올렸다. 얇은 임부복을 끌어 올린 제헌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여원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빠의 손길을 느꼈는지 안에서 아기가 작게 꿈틀거렸다. 놀란 여원이 뒤를 홱 돌아보자, 제헌이 고개를 푹 기울이고는 여원에게 쪽 뽀뽀했다.
“아…… 제헌 씨.”
방금 전까지 날렵하게 좁혀들어 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얼음조각 같았던 남자는 이제 여원의 앞에서 봄바람처럼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얕은 숨을 몰아쉰 여원이 제헌에게 등을 푹 기대자, 맞닿은 몸에서 규칙적인 심장박동이 전해져 왔다.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여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우리 통통이도 이렇게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잖아요?”
“네에…….”
“이제 거의 다 마무리되었으니, 앞으로는 모든 게 괜찮아질 겁니다.”
제헌이 여원의 귓바퀴에 다시 한번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아이가 들어 있는 배를 조심스레 매만져 주었다. 대답 대신 끙, 앓는 듯한 소리를 흘린 여원이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자신도 이게 분명 선준의 계략이고 함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보다 한참은 시야가 넓고 상황을 능숙하게 관장하는 제헌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선준을 불러서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을 보면 제헌이 무언가 염두에 둔 것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제헌 씨, 저는요, 빨리 우리 통통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네, 그 전에 여원 씨와 내가 정식으로 부부가 되어야죠.”
하아, 묽은 한숨을 내뱉었다. 여원은 눈을 내리깔고는, 제헌의 손등이 단단하게 덮고 있는 아랫배에 손을 뻗었다. 여원의 손을 겹쳐 쥔 제헌이 같이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금세 제헌이 온유한 페로몬을 풀어주어, 제헌의 가슴에 등을 완전히 기댄 여원이 쌔근쌔근 호흡했다.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손길과 함께 부모와 아이, 즉 새롭게 태어날 가족이 하나로 이어졌다.
“내가 우리 가족을 지킬 거니까요.”
촘촘한 속눈썹을 파르르 깜빡인 여원이 턱을 주억거렸다.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그럼에도 제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뒤로 돌리고, 이번에는 여원이 먼저 제헌에게 뽀뽀했다. 입술이 열리고, 혀끝이 꼼꼼히 얽혀들면서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 * *
“여어, 강여원!”
구태여 미룰 것도 없다는 제헌의 지적에 다가오는 주말 저녁에 바로 선준과의 식사 약속이 잡혔다. 선준은 시간에 딱 맞춰 저택에 들이닥쳤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얼굴에 여원은 선준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서, 선준아!”
그러니까…… 유럽 여행에 다녀왔다는 선준은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반삭 머리에 태닝으로 피부를 구릿빛으로 그을린 데다, 벌크업도 어느 정도는 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남성성을 과시하는 듯 독한 머스크 향수 냄새가 훅 풍겨들어 여원의 미간이 잔뜩 좁혀들었다. 순간 주변에 다른 냄새 맡는 게 어려울 수준으로 코끝이 얼얼해졌다.
“왜, 그동안 내가 너무 멋있어진 것 같아서 말이 안 나와?
“아, 저기 그게…….”
스타일이 상당히 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기껏 해봐야 애쓴다는 감상일 뿐 빈말로도 멋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혼 서류에 도장을 무사히 받으려면 오늘 저녁 식사를 잘 마무리 지어야 할 텐데. 여원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하자, 제헌이 두 사람 사이를 불쑥 끼어들었다.
“오랜만이다, 선준아.”
“어, 형은…… 음, 여전하네?”
쿨한 척, 악수나 하자며 선준이 제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얕게 헛웃음을 친 제헌이 별 대수냐는 듯 선준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제헌의 얼굴에 선준을 같잖아하는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쯤 되자 여원도 제헌의 어떤 면이 선준의 열등감을 자극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오는 길에 크림파이 사왔어. 여원이 너 예전에 여기 거 맛있다 그러지 않았어?”
“아, 어어…….”
해묵은 감정은 정말로 홀홀 털어버렸다는 듯, 선준이 두 사람이 다니던 대학교 근처 빵집에서 사온 상자를 내밀었다. 실제로 여원이 좋아하는 음식이었지만 선준이 주는 것이라 그렇게 기껍지는 않았다.
“그래, 고맙다.”
여원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선준의 말을 딱 자른 제헌이 크림파이 상자를 대신 받아 들었다. 하긴, 여기가 무슨 할리우드도 아니고 세 사람이 서로에게 유쾌하게 인사할 만한 상황은 결코 아니기는 했다. 냉담하게 굳은 제헌의 얼굴에서는 그가 지금 선준과 안부나 나누고 있을 기분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대표님, 식사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네, 고마워요.”
때마침 다가온 사용인이 세 사람을 다이닝 룸으로 안내했다. 손님이 올 때 개방하는 1층 가장 큰 다이닝 룸 안에는 사용인들이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라고 일컬을 만한 저녁 식사를 성대하게 차려놓았다.
“…….”
“…….”
열 사람이 앉아도 충분할 것처럼 널찍한 식탁에는 음식이 가득 올라와 있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이들은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딱히 유쾌하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말이야, 오랜만에 저택에 와보니까 참…… 그동안 내가 대체 여기서 어떻게 살았나 싶어.”
“…….”
“아니 솔직히,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이 저택이라는 게…… 너무 시대착오적이잖아? 시골 촌구석에 박혀 있어서 오가기도 어렵고, 아무리 보수를 해도 오래된 집이라 낡은 느낌이 확 묻어나고.”
“…….”
“여기 터가 좋아서 우리 집안 사업이 잘됐다, 뭐 그런 것도 이제는 다 미신 같아. 있잖아, 형도 말이야, 이 저택을 제발 좀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어?”
“…….”
“두 사람은 정말, 여기 하나도 안 답답해?”
세 사람 모두 수저와 젓가락을 깨작거리기나 할 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준은 누구도 묻지 않은, 오랜만에 저택을 찾은 감상을 몹시 수다스럽게, 그리고 얕은 모욕을 담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었다. 선준이 채근하듯 제헌에게 말을 걸었지만, 제헌은 피곤한 기색으로 동생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하하…… 그렇구나.”
“…….”
“나도 이곳에만 있으면 아무래도 답답하기는 해, 그래서 요즘에는 종종 밖에 나가는 편이기도 하고.”
여원 역시 선준의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불편했다. 그러나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견디기가 어려워서 제헌 대신 선준의 말을 받아주었다. 여원의 말에 선준이 날카롭게 눈을 치떴다. 그 서슬 퍼런 기운에 흠칫 놀란 여원이 어깨를 떨었다.
“그래, 형이 너를 밖으로 내보내 준단 말야?”
“어? 응…….”
“네가 밖에 나가서, 뭘 하는데?”
“……그냥, 필라테스 같은 것도 하고……. 요즘에는 퍼퓨머리에서 조향 공부도 하고 있어.”
여원은 사실 선준에게 자랑하거나 과시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워낙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물어오기에, 있는 그대로를 대답해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원의 말을 들은 선준은 노골적으로 기분이 잡친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자신을 떠난 여원이 근심 없이 행복해 보이자 속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여원이 너 배도 이제 제법 부른 것 같다.”
선준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여원의 볼록해진 아랫배에 흘긋 시선을 던졌다. 선준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서 배도 거의 나오지 않았고 몸무게 변화도 없다시피 했다. 반면 보동보동하게 볼살이 오르고 피부에 매끈한 윤기가 흐르는 지금은 배 속 아이와 함께 사랑받은 티가 한눈에도 듬뿍 났다.
“아, 으응…….”
“그럼 너, 이제 몇 개월 된 거야?”
“다음 주면 5개월이 된다.”
선준이 배 속 아이에게 자꾸만 관심을 보이자, 제헌이 제 옆에 앉은 여원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내리깐 시선이 선준에게 더는 헛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문 선준이 부들부들 떨고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적대적인 시선을 피해 여원이 슬쩍 고개를 내리깔았다.
“그래. 하선준 너는 복학은 언제 할 계획이고?”
“음……. 난 인생 찾기 좀 더 하려고. 그냥 차라리 아예 유학을 가볼까 해. 거기서 와인 공부 같은 것도 하고.”
“비용적인 면도 생각해 보면, 대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나오는 편이 좋을 텐데.”
“에이, 유산만 상속받고 나면 돈 걱정할 일이 있겠어? 그리고 요즘에는 다들 대학 대학 너무 따지지도 않아. 형이 나이가 들어서 요새 애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나 보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선준이 도발했지만, 제헌은 픽 웃으며 제대로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더욱 악에 받친 선준의 얼굴에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기 싸움을 이어나가는 두 사람 사이에 낀 여원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선준아, 유럽 여행은 어땠어? 나 여행 얘기 좀 해줘.”
“아, 유럽 여행?”
날 선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여원이 일부러 선준이 관심 있어 할 만한 주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함빡 웃어 보인 선준이 입을 큼직하게 벌렸다.
“말도 마, 겁나 좋았지.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젊을 적에 혼자 유럽 배낭여행 가보라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어.”
“아…… 정말?”
“유럽 여행을 딱, 가보면 말야. 지금까지 자기가 살던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내 인생에서 크다고만 생각했던 문제가 사실은 얼마나 별게 아닌지 깨닫게 된다고.”
“그랬구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육체의 고단함에서 느껴지는 경건함이라는 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는, 예술의 덧없음과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지.”
“……음, 그럼 그 산티아고 순례길? 너는 거기가 제일 좋았던 거야?”
선준이 꿈꾸는 듯 몽롱한 눈빛으로 유럽에 다녀온 자랑을 했다.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 없는 여원은 선준의 이야기가 뜬구름처럼만 들려서 제대로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애써 관심을 가지며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여원의 질문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선준이 비실비실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아니지. 너, 이비자 섬이라고 들어봤어?”
“어? 아니…….”
“캬, 나도 말로만 들었는데 거기 클럽이 아주 그냥……. 강여원 너, 유럽에서 내가 오메가들한테 얼마나 인기 많았는지 아냐?”
“아…… 선준이 네가?”
여원은 다시금 선준의 반삭 머리와 구릿빛 피부를 흘긋 건너다보았다. 저런 스타일이 정말 유럽에서는 먹히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제 생각을 들키면 선준이 또다시 발악을 해댈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어, 다들 나보고 아시안 큐트보이라고 하면서 어찌나 격렬하게 들이대던지. 실연의 상처를 씻은 듯이 떨쳐 낼 수 있었다고?”
“…….”
“야, 근데 유럽 애들이 진짜 쩔기는 쩔더라. 그 맛 한번 들이니까…… 한국에 다시 들어오고 싶지가 않던데?”
임신해서 살짝 도톰해진 여원의 가슴 부근을 흘긋 쳐다보던 선준이 입맛을 쩝, 다셨다. 천박한 표현으로 점철된 대화와 끈끈하게 훑어내리는 시선에 여원은 선준이 갈수록 더 불편해졌다. 한동안 보지 않아서 잊어버렸나, 아니면 원래부터 저렇게 저질스럽게 이야기하던 애였나. 배 속의 아기가 듣기라도 할까 괜히 걱정되어, 여원은 아랫배를 연신 쓰다듬었다.
“아 그런데 여긴 뭐 이렇게 덥냐.”
여원의 반응조차 시들해지자, 선준은 걸치고 있던 얇은 카디건을 보란 듯이 벗어 내렸다. 헐렁한 민소매 셔츠를 걸치고 있는 선준의 팔뚝 위쪽에 큼지막한 트라이벌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선준의 체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한 시도였다. 그런 여원의 반응을 오해했는지, 선준이는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준이 너 타투 했어?”
“어어, 이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핫하다는 타투숍에서 직접 받은 거야.”
“근데 너, 이거 평생 안 지워지는 거 아냐? 엄청 커 보이는데…… 할 때 안 아팠어?”
“여원이 너도 참, 그럼, 타투인데 당연히 안 지워지지. 그리고 뭐, 남자라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어.”
“그렇구나.”
“내가, 음……. 실연의 상처가 너무 커서 말이야. 마음 정리도 할 겸, 겸사겸사 받은 거야. 그런데 형, 지금 너무 혐오스럽다는 표정 짓고 있는 거 아냐?”
픽, 제헌의 잇새에서 헛웃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땅찮은 시선이 타투가 흉흉하게 새겨진 선준의 팔뚝을 훑었다.
“우리 형님은 매번 보면, 꼭 속으로만 못마땅해하면 될 걸 그렇∼게 티를 내더라?”
“…….”
“형도 매사에 너무 뻗대지는 마. 내가 이번에 세상 구경 하면서 느낀 건데, 자기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찍혀 나가더라고?”
“그래. 선준이가 이제 다 커서 형한테 인생 조언까지 건네는구나.”
더는 못 봐주겠는지, 제헌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선준을 찍어눌렀다. 위압적인 알파 페로몬이 공기 중에 번지자 식탁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칼만 들고 있지 않았을 뿐, 서로 찔러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였다. 가운데에 애매하게 낀 여원만 난처해서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잠시 자리 비우겠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때마침 진동하기 시작한 핸드폰을 확인한 제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짙게 드리우던 페로몬이 한 풀 걷어지자, 여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도 찰나, 선준이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바짝 몸을 기울여왔다.
“여원아, 나 너 배 만져봐도 돼?”
“어?”
“조카 잘 있는지, 한번 보고 싶어서.”
선준이 퍽 호의적이고 친밀한 태도로 여원에게 물었다. 형형하게 번뜩이는 눈동자에 기묘한 이채가 돌고 있어, 여원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
영 내키지 않는 기분에 대답을 머뭇거렸지만, 여원의 동의를 구하려던 것은 아니었는지 선준이 제헌이 앉아 있던 자리로 넘어왔다. 슬금슬금 몸을 빼려 했지만 선준이 불쑥 배를 향해 손을 뻗은 것이 먼저였다. 아랫배를 더듬더듬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마치 지네가 기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쾌한 감각을 자아냈다.
“우리 조카, 무럭무럭 잘 자랐으면 좋겠네.”
“…….”
“빨리 커야지 우리 집안 재산도 다 물려받지. 저택도, 회사도. 그치?”
“…….”
“아빠 닮아서 우성 알파로 태어나면 삼촌보다 인기도 훨씬 많겠다.”
덕담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 스며든 노골적인 악의가 숨겨지지는 않았다. 여원은 제 배를 쓰다듬는 선준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단호한 얼굴에는 더 이상 선준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또 한 번 여원에게 거부당한 선준의 입매가 음산하게 비틀렸다.
“내가 우리 조카를 봐서라도, 떠나기 전에 강여원 너한테 3층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줄까 해.”
“……3층 서재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이미 물러나기로 한 마당에 모른 척 입 싹 닦을 수도 있지만, 음…… 그래도 우리 부부 사이였는데 정이라는 게 있잖아?”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던 선준은 여원이 더는 저를 무시할 수 없는 단초를 내던졌다. 3층 서재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말에 여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애틋하게 사랑하는 제헌을 믿고 싶었지만, 동시에 3층 서재의 비밀은 여원이 제헌을 완전히 믿을 수 없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형수는…… 참 햇살 같은 여자였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이었지.”
“…….”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형수의 얼굴이 수심에 차 있어서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어. 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형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지.”
“하아…….”
“형수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어. 어느 날 밤, 나는 증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3층 서재에 몰래 숨어들었어.”
“…….”
“그때 나는, 서재 벽면에 뚫어둔 구멍으로 바로 옆 침실에서 형이 형수를 잔인하게 강간하는 장면을 목격했어. 깜짝 놀라 숨소리를 흘려버렸을 때, 형에게 들켜 그 자리에서 딱 죽기 직전만큼 맞았지.”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여원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런 여원의 반응에 선준은 입꼬리를 쓰윽 끌어 올렸다.
“깨어난 나는…… 그 날 밤의 일을 전부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해. 하지만 공포에 가득 질려 있던 형수의 눈망울만은…… 아주 오랫동안 잊히지 않더라고.”
“…….”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는 형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저택을 떠났어. 아마도 더는 형의 폭력성을 견딜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겠지.”
“…….”
“부디 너랑 우리 조카에게는…… 그런 일이 있지 않도록 행운을 빌게.”
소름 끼치는 이야기에 여원은 좀처럼 경악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서재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는 선준의 눈빛은 아련하면서도 동시에 억눌린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진술이 일관적이고 차분해서, 여원을 일부러 괴롭히기 위해 거짓을 꾸며내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아…… 하하…….”
물론 선준에게 유전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 모두를 믿지는 않았다. 선준은 그날의 정황을 왜곡하고, 편집하여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선준이 하는 말 중 일부는 사실일 수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여원은 잔뜩 혼란스러워졌다.
“어, 형! 금방 왔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으로 돌아온 제헌은 자신의 의자를 차지하고 앉은 선준을 못마땅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선준이 입술을 삐죽이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원은 반쯤 넋이 나간 채 제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원래도 불편한 식사 자리였지만, 제헌이 돌아온 후 여원은 극도로 초조해했다. 선준이 했던 흉흉한 말들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서, 제헌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여원이 포크를 쥔 손끝을 덜덜 떨고만 있자, 제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 이걸 깜빡할 뻔했네. 이 샴페인, 프랑스에서 내가 직접 가져온 거야. 프랑스 왕실이 그렇∼게 막장이었다며? 왕이고 왕비고 가릴 것 없이 정부도 많이 두고 말야.”
“…….”
“거기 갔더니 내가 또 우리 형이랑 ……새 형수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더라고?”
여원이 얼어붙어 있는 사이 식사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디저트로 크림파이를 먹을 즈음, 선준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샴페인을 꺼내 두 사람에게 들이밀었다.
“그래서 두 사람 미래 축하하는 의미에서 축하주 사왔어. 저기, 잔 세 개만 좀 가져다주세요.”
선준이 크게 팔을 휘저어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용인이 유리잔 세 개를 가져왔다. 선준은 아주 느릿하게, 신중하게 샴페인을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개의 유리잔에 샴페인이 채워졌다. 여원은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며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혹시 이상한 물질이 들어 있지 않을지 샴페인 향을 맡아보려 했지만, 선준의 향수가 풍기는 머스크 향이 너무 진해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저기, 있잖아, 나는 그냥 건배만 같이 할게.”
“왜?”
“그게…… 나 임신했잖아. 술 마시면 안 돼서.”
“또 왜 그래, 여원아. 설마 내가 배 속에 있는 우리 조카를 죽이기라도 하겠어?”
“……흐, 선준아.”
선준이 저를 독살하려는 것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심은, 설마 조카를 죽이겠냐는 선준의 농담과 함께 훨씬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아니, 정말 그렇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방금 전 여원의 배를 쓰다듬어 내리던 선준의 눈동자는 서슬 퍼런 살기와 복수심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무알코올 샴페인으로 사왔지. 그냥 기분만 내는 거야, 기분만.”
“아니야, 선준아, 나 그냥 안 마실래.”
“야, 지금 내가 배우자도 뺏기고, 저택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판에! 이 정도 성의까지 무시당하면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어?”
제헌과 여원도 다시는 선준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은 실은 선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각자 원하는 것이 있어서였다. 여원과 제헌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받아내야 했고, 선준은 그를 통해 더 늦기 전 자기 몫의 유산을 되찾아야 했다.
“그러지 말고, 다 같이 건배하고 푸는 거야.”
“…….”
그렇지만 여원은 선준이 그 이유로 오늘 저녁 저택까지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할 바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여원을 선준이 계속해서 스멀스멀 구슬렸다.
“제헌 씨…….”
여원은 정말이지 선준이 건넨 술을 마시기가 싫었다. 도와달라는 듯 제헌을 돌아보았지만, 제헌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방금 들었던 서재 이야기까지 겹쳐져, 제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맺어진 두 사람 앞에 항상 아름답고 찬란한 날들만이 펼쳐지기를.”
챙그랑, 선준의 건배사와 함께 끝내 세 개의 잔이 경쾌하게 맞부딪쳤다. 선준이 가장 먼저 아무렇지 않게 샴페인을 꿀꺽꿀꺽 마시고, 빈 잔을 드러내 보였다.
“아…….”
여원은 제가 붙들고 있는 유리잔이 꼭 독이 든 성배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민한 사람이기에, 제헌도 분명 이 위험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위험하지 않은 건가?
“여원아, 안 마셔?”
선준이 의아하다는 듯, 잔을 움켜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원을 돌아보았다. 선준이 제 몫의 샴페인을 말끔하게 마셨다지만, 샴페인 자체가 아니라 잔에 독이 묻어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유리잔은 저택에서 사용인들이 내온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요, 같이 마시죠.”
그때, 여원이 손에 든 잔을 가져간 제헌이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대로 제헌의 목을 타고 액체가 넘어가는 게 보였다.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가? 맥없이 눈만 끔뻑이는 여원에게 제헌이 자신 몫의 샴페인 잔을 대신 내밀어주었다.
“…….”
눈이 마주치자 제헌의 단단한 시선이 여원을 올곧게 향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여원이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선준을 의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헌을 믿어서, 여원은 샴페인을 꿀꺽 크게 한 번 들이켰다.
“으음……?”
톡톡, 기포가 터지는 샴페인이 입 안에 달착지근하게 퍼졌다. 아마 독약이 들어 있거나 했으면 마시는 즉시 알아차렸을 텐데, 다행히 이상한 기미가 전혀 없었다.
역시 내가 지나치게 예민했던 걸까? 하지만 분명 이상했는데. 긴장한 탓인지 목구멍이 말랐다. 여원은 샴페인을 몇 모금 더 들이켰다.
선준은 제헌이 여원과 잔을 바꿔 들었을 때부터 눈에 띄게 당황했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지만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에서 당혹이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여원이 샴페인을 마시는 걸 보고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더니, 제헌 역시도 샴페인을 입가에 가져가자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근황에 관해 말을 이어나가던 선준이 순간 경악했다.
“형……!”
덩달아 어깨를 흠칫 떤 여원이 옆을 돌아보았다.
“제, 제헌 씨!”
제헌의 상반신이 식탁 위로 풀썩, 쓰러져 있었다. 놀란 여원이 제헌에게 다가가 등을 끌어안고 흔들어보았지만, 제헌은 이미 의식을 잃은 후였다. 코끝에서 얕은 숨이 내쉬어지긴 했지만, 그 달싹임은 너무 미약하게만 느껴졌다.
“제헌 씨, 죽으면 안 돼요……!”
패닉에 빠진 여원이 절박하게 소리 질렀지만, 제헌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역시 선준이가 우리 가족을 독살하려고 했던 거야. 샴페인, 역시 아까 그 샴페인에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해. 아까 제헌 씨가 내 걸 대신 마셨잖아.
“어떡해, 분명 샴페인에 문제가……?”
그렇게 확신하며 여원이 식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원의 잔을 대신 가져간 제헌은 처음 한 모금만 마셨을 뿐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선준이 처음에 따른 높이와 비슷하게 샴페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뭐야, 하제헌이 왜 여기서 쓰러져!”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급해진 여원이 내내 허둥거렸지만, 당황한 것은 비단 여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발을 쾅쾅 구르며 길길이 날뛰는 선준 역시 처음부터 제헌을 죽이려던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건가? 선준이 무슨 계략을 꾸몄던 거고,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거지?
“빠, 빨리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하지만 상황을 가늠해 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여원은 다급하게 사용인을 불렀다.
“제헌 씨, 흑, 으윽…… 어떡해…….”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용인들이 바닥에 마른 천을 깔고 제헌의 몸을 길게 눕혔다. 코끝에서 얕은 숨결만 겨우 새어 나올 뿐, 눈을 꾹 내리감고 있는 제헌은 시신처럼 미동 하나 없었다.
“흐어엉.”
그런 제헌을 내려다보던 여원은 왈칵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지금 이 순간 제헌을 지켜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고, 그러니 굳건하고 의연해야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항상 든든하고 매 순간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남자가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여원은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흑, 흐윽, 으엉…… 이대로 죽으시면 안 돼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채 여원이 무릎걸음으로 바닥을 기어갔다. 입술을 작게 달싹이고는 마른 천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제헌의 커다란 손을 붙들어보았다. 미약한 온기를 담은 제헌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지만, 여전히 서러운 마음이 더욱 컸다.
나랑 배 속의 아이랑 다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혼자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울컥거리는 감정이 끊임없이 복받쳐 와 여원은 자꾸만 끕끕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제헌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서, 여원은 온기가 전해지는 제헌의 손을 부여잡고 제 얼굴에 슥슥 문질러보았다.
“하 씨발, 씨발……. 이걸 진짜 어떡하지?”
구급차는 대체 언제 오는 건가 싶어 여원은 발을 동동 굴렀다. 선준은 종종걸음으로 쓰러진 제헌 주변을 돌아다니며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어댔다.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탁 때리기도 했다.
“너는…… 너는 어떻게, 형이 쓰러졌는데 그럴 수가 있어?”
여원은 눈물이 함빡 스며든 눈으로 선준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혼자 수가 틀려서 발을 쿵쿵 구르고 있는 게 저게 진짜 사람 새끼가 맞긴 한 건지.
“하,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진짜 확.”
선준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여원을 홱 돌아보았다. 선준과 눈이 딱 마주치자 여원은 그대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선준의 초점 나간 눈동자가 기이하게 소름 끼쳤다. 스스로의 괴로움에만 매몰되어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 완전히 결여된 자의 눈빛이었다.
“아, 맞다, 강여원!”
무언가 묘수가 떠올랐다는 듯, 선준이 별안간 손뼉을 딱 맞부닥쳤다. 주륵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낸 여원이 어리둥절해했다.
“너, 이혼 서류 가져왔지?”
“갑자기 그게 무슨 얘기야?”
“아니, 늦기 전에 도장 찍어주려고. 오늘 우리 만난 거 그것 때문이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제헌 씨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 씨발, 너는 하제헌이 이대로 곱게 죽을 인간 같아?”
“뭐, 뭐라고?”
“됐고, 어차피 너도 오늘 이후로 내 얼굴 보고 싶지 않을 거 아냐, 빨리 내놔. 지금 당장 도장 찍어줄 테니까!”
선준이 무턱대고 몰아붙이자 여원은 휘말리고 말았다. 식탁 위 갈색 봉투에 담겨 있던 이혼 서류를 엉겁결에 내어주었다. 누가 뺏어 가기라도 할까, 선준은 여원이 건넨 서류를 허겁지겁 잡아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지금 이 순간 선준이 느끼는 당혹이 숨겨지지는 않았다.
“다음, 다음 서류는 어디 있어?”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여전히 제헌 옆에 쭈그려 앉은 여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원의 대답을 기다릴 시간도 없다는 듯, 선준이 펄럭펄럭 종이를 넘겼다. 이혼 서류 뒷장에 있는 것은 각서였다. 합의 이혼을 하는 조건으로 선준이 재산의 반절을 떼어 간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여원아, 후, 내가 지금, 너랑 하, 합의 이혼해 주는 거잖아?”
“어, 어어?”
“네가 나 두고 바람 나서, 네 귀책 때문에 이혼하는 거고……. 형은 어쨌든 죽은 거 아니고, 어떻게든 살아날 거니까…….”
종이를 으깨버릴 기세로 도장을 꽝꽝 찍어댄 선준이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사실상은 여원을 향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처럼 보였다.
“하…… 진짜.”
여원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숨을 푹 내쉰 여원이 선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선준은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미친놈이었는데,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과연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여원 님, 구급차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구급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인을 마친 계약서를 손아귀에 꽉 틀어쥔 선준도 여원을 따라 자리를 박찼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하, 하선준!”
“나 너랑 순탄하게 이혼 잘 해줬으니까, 형 깨어나면 강여원 네가 이야기 좀 잘 해줘!”
당혹감으로 얼굴이 벌게진 선준이 그대로 줄행랑쳤다. 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실제로 더는 선준에게 신경을 쓸 만한 경황이 없기도 했다. 구조대원이 제헌을 구급차에 태우고, 봉긋해진 배를 감싸 쥔 여원도 허겁지겁 뒤따랐다.
* * *
20분여가 지나 구급차는 가장 가까운 권역 응급의료센터에 도착했다. 역시나 선준이 누군가를 독살시키기 위해 저택을 찾은 게 맞았는지, 제헌은 중독된 상태라고 했다. 제헌은 바로 응급 중환자실로 옮겨져 해독 절차를 밟게 되었다.
“제헌 씨, 꼭 다시 깨어나셔야 해요.”
초조한 마음에 꽉 닫힌 병실 문 주변을 종종걸음으로 맴돌았다. 여원은 제헌이 무사히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부푼 배를 연거푸 쓸어내리고, 얕은 한숨을 뭉글뭉글 내뱉었다. 격앙된 감정이 한 꺼풀 가라앉았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격랑처럼 위태롭게 울렁거렸다.
“흑, 하선준 진짜 미친 새끼.”
아까는 제헌이 쓰러진 와중에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상황을 되짚어보니 선준이 그렇게까지 당황한 이유가 명백해졌다. 그러니까, 선준은 제헌이 아닌 자신을 죽이려 했던 거겠지……. 그 사실을 깨닫자, 등줄기에 소름이 쫙 솟아올랐다. 한 끗 차이로 죽음이 스쳐 간 것이다.
“제헌 씨…… 흐으, 어떡해…….”
왠지 제헌은 여원을 독살하려던 선준의 계략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나 대신 위험해지길 선택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 아빠인 제헌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이제 대체 어떡하나 싶었다. 분명히, 우리 가족 평생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그대로 30여 분이 지났을까, 의사가 병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제헌 환자 보호자 되는 분 맞으시죠?”
“네, 맞아요, 맞아요.”
“실례지만 관계가?”
뜨끈뜨끈한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댄 여원이 씩씩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 여원의 얼굴이 너무 앳돼 보여서인지,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했다.
“……배우자예요.”
순간 망설인 여원이 이내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선준과 이혼까지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제헌의 배우자로 지칭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아. 그러시군요.”
“제헌 씨는, 흑…… 제헌 씨는 무사하신 건가요?”
“네, 하제헌 환자 방금 의식 되찾으셨습니다.”
“아 정말요? 너무 다행이에요. 세상에.”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소식에 여원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전신을 저릿하게 타고 흐르는 안도감으로 시야가 순간적으로 노래졌다. 잔뜩 마음을 졸이고 있어서인지, 제헌이 무사하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심장이 바쁘게 콩닥거렸다. 흡, 짧은 숨을 들이켠 여원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현재 몸 상태에 별문제 없으시기는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 밤 정도는 병원에서 지내보는 게 좋겠고요.”
“……네?”
“방금 전에 1인실로 옮겨드렸고, 딱히 이상 없으시면 그대로 내일 아침에 퇴원하시면 됩니다.”
여원이 히끅, 딸꾹질을 안으로 삼켰다. 별다른 이상 없이 건강하다니 너무 다행이고, 다 좋은 일이기는 한데……. 그 말을 전하는 의사의 태도가 이상했다.
“네, 네에…….”
의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제헌의 상태를 읊어냈다. 방금까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촌각을 다퉜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괜찮은 거 맞죠? 혹시 목숨이 위험해지거나…….”
“네, 애초에 섭취한 독극물이 극소량인 데다가, 해독제도 이미 일정량 섭취하고 있어서요.”
히끅, 애써 참고 있던 딸꾹질이 다시 한번 크게 터졌다. 축축하게 젖어든 여원의 눈망울이 커다랗게 뜨였다. 독극물이야 그렇다 치지만…… 해독제라고? 어쨌든 제헌이 깨어났으니 다행이기는 한데, 여원은 여전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그럼 들어가셔서 환자분과 말씀 나누세요.”
“네, 네!”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여원이 의사가 가리킨 병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 1인실 병실 끝머리에 자리한 침대에 누워 있는 제헌이 시야에 희미하게 들어왔다. 그는 환자복을 입고 수액을 맞고 있었다. 제헌이 무사하다는 말을 의사에게 전해 들었는데도, 초췌한 낯빛을 맞닥뜨리자 억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제헌 씨!”
여원이 단박에 침대로 달음박질쳤다. 큰일 날 뻔했던 건 자신이 아니라 제헌이다.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제헌을 위로해 줘야 하는데……. 제헌을 마주하자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또다시 왈칵왈칵 쏟아져 내렸다. 살아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왜 울고 그래요.”
“제, 흑, 제헌 씨 죽는, 흑, 죽, 흐으…….”
“응.”
“죽으시는 줄…… 알았어요.”
내내 사로잡혀 있던 공포를 입 밖으로 내었더니 심장이 더욱 거칠게 울컥거렸다. 다이닝 룸에서 제헌이 쓰러졌던 그 순간부터,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오고, 응급실 밖에서 제헌이 무사히 깨어나기를 기다리기까지 여원은 내내 지끈거리는 긴장으로 조마조마했다. 의사의 말처럼 제헌이 무사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보아도 좀처럼 그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격해진 감정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왜?”
그러자 오히려 제헌이 여원을 다독이며 달래주었다. 아직 수액을 맞고 있어서 거동이 편하지 않았지만, 누워 있는 채로 최대한 여원에게 팔을 길게 뻗어 어깨 부근을 토닥거렸다.
“흐윽, 그래도요.”
언제나와 같은 온도를 품은 제헌의 손이 몸에 닿자 그것만으로도 사무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울음을 삼켜낸 여원이 상반신을 깊숙이 숙여 양손으로 제헌의 뺨을 부여잡았다. 병실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원은 제헌에게 뽀뽀를 쪽쪽 하며 꺼슬꺼슬한 입술을 할짝할짝 핥아냈다. 그대로 여원이 제 품에 순종적으로 착 감겨들자 제헌은 기분이 은근히 좋아진 듯했다.
“우리 애기가 많이 놀랐구나.”
제헌은 여원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여원이 익히 잘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꼭 섹스할 때 여원이 말을 잘 들으면서 제게 안겨들면 지었던 것과 비슷한……. 하지만 다정한 태도와 별개로 제헌이 전하는 말의 내용은 수상했다. 애 아빠가 죽을 뻔했는데 당연히 놀라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제헌 씨……?”
그제야 정신이 제대로 들어서, 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맣게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데루룩 굴렸다. 제헌은 어디를 뜯어봐도 방금 전까지 사경을 헤매거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의사는 제헌이 독을 극소량 먹었다고 했지만,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리는 없을 텐데.
아니,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게 맞나?
“네, 여원 씨.”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헌의 얼굴에는 자신의 가족을 해치려 한 선준에 대한 분노가 엿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꼭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된 것을 기꺼워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설마,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제헌의 계획이었나?
“혹시…… 일부러 이러신 거예요?”
“…….”
여원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짧은 숨을 나지막이 뱉어낸 제헌은 부정하는 대신 여원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하…….”
사실상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나자 여원은 탁 맥이 풀려버렸다. 하긴, 제헌이 처음에 순순히 선준을 저택으로 부를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여원도 충분히 선준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제헌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대체 왜? 여원은 그 이유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선준이가 원래는 저를 죽이려고 했던 게 맞죠?”
꿀꺽, 침을 삼켜낸 여원이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부터 먼저 짚어냈다. 선준이가 저를 죽인다, 고 여원이 말하는 순간 제헌의 눈동자가 살기로 형형해졌다. 하아, 숨을 길게 뱉어낸 제헌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일부러 제헌 씨가 저 대신 위험해지신 거예요?”
“네, 맞습니다.”
“그렇지만……. 선준이가 저를 독살하려는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식사에 초대하지 않으면 됐잖아요. 왜 굳이 이렇게까지…….”
제헌은 여원을 위해 위험을 택했다는 말조차 지극히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대체 왜 제헌이 그런 선택까지 해야 했는지 여원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상속법에 따르면, 유산을 얻기 위해 피상속인이나 다른 상속인을 살해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상속권이 박탈됩니다.”
“아…….”
“그 때문에 선준이도, 애초에 나를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여원 씨를 해치려고 한 거겠죠.”
“그럼, 제헌 씨가 저 대신 위험해진다면…….”
“맞습니다. 선준이가 나를 죽이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해석될 테니, 법적으로 상속권을 뺏기게 되겠죠.”
여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로써 선준은 상속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것이다. 제헌은 큰 그림을 어디까지 그리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제헌 씨가 저한테…… 선준이랑 갈등을 잘 마무리 지어야,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도, 조금이나마 떳떳해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동생이 집안 재산을 노려 형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드러난다면, 선준이는 자연히 지금 움켜쥐고 있는 도덕적 우위도 잃게 되겠죠.”
“아…….”
“그래야 나중에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때, 직면할 비난도 자연스럽게 완화될 것입니다.”
혀끝이 딱딱하게 굳어오는 것만 같았다. 여원은 차라리 화를 내고 싶었는데, 제헌이 하는 이야기가 전부 이해가 가서 더욱 문제였다.
“하아, 제헌 씨…….”
제헌의 행동이 일방적이었을지언정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도 알겠고, 두 사람을 위해서 최선의 결과를 고려한 것도 알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요?”
“이 정도 상황이 아니라면, 선준이가 순순히 이혼에 동의할 리가 없겠죠.”
“아…… 그거야 그렇지만요.”
“선준이에게서 여원 씨를 되찾아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요.”
제헌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실제로도 제헌이 예상한 대로 선준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줄행랑치지 않았던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나 머리로 이해가 간다고 해서 놀란 마음이 쉽게 달래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패턴이 계속 반복된다는 생각에 여원은 좀 지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헌이야 계획을 달성하는 희열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여원은 짧은 순간 지옥과 천당을 오가야 했다. 정수리를 콕콕 찌르는 듯한 탈력감으로 여원이 흐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제헌이 쓰러진 이래 하도 울어대서 이제 더는 쥐어짤 눈물조차 없었다.
“제헌 씨,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뾰족뾰족한 여원의 질문에 제헌이 픽 웃어버렸다. 대체 어디까지 사람 마음을 간파하고, 판을 짜고 있는 건지……. 제헌의 사람을 통제하는 면모는 여원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실제로 피부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제 동기는 파악되었지만, 어떻게 모든 일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언젠가 여원 씨에게 모든 위험은 향에서 출발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죠.”
여원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헌이 일러두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위험과 향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향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불의의 사고를 가장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죠.’
여원이 저택에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호소할 때, 제헌만은 그런 여원을 별나게 여기지 않았다. 선준과는 다르게 제헌과 여원 두 사람은 향을 다루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발달한 감각으로 여원이 향기를 만들어내는 조향에 관심을 가졌다면, 화학 회사에서 일하는 제헌은 각종 독극물을 다루며 위험을 감지해 오고 있었다.
“제헌 씨는…… 냄새로 위험한 독극물을 구별해 냈던 거군요.”
“독극물을 포함해, 화학 물질을 다루는 건 내가 회사에서 늘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이게 대체 가능하기나 한 거예요?”
“나도 사람인지라, 선준이가 유럽 여행에서 어떤 독을 구입했는지 사전에 조사하지 않았다면 바로 알아차리는 게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아…….”
“게다가, 내가 냄새로 독을 구별해 낼 것을 의식했던지 선준이가 일부러 강한 향수를 뿌리고 왔더군요.”
그래서였구나. 여원 역시 선준이 샴페인을 건넬 때 후각을 사용하려 했었지만, 짙은 머스크 향 때문에 샴페인 향을 제대로 맡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계산해서 향수를 뿌렸을 줄은 몰랐다. 낯선 스타일링이나 타투도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향수를 위한 연막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선준이가 크림파이를 꺼낼 때부터, 사전에 알아보았던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는 걸 눈치챘습니다.”
“아……. 독극물이 샴페인이 아니라 크림파이에 들어 있었던 거군요.”
“선준이는 일부러 여원 씨가 좋아하는 크림파이에 독을 타고, 샴페인에 해독제를 넣어두었습니다. 여원 씨가 자기를 의심해서, 제 손으로 건넨 술은 절대 마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죠.”
설명을 듣고 보니 하선준 나름으로는 머리를 굉장히 열심히 굴린 것 같았다. 제헌의 말마따나 그게 너무 어설퍼서 문제였지만. 선준보다 몇 수를 앞서 내다보는 제헌은 이미 선준의 계략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선준이는 진짜…… 답이 없네요.”
게다가 계략의 기저에 깔린 논리마저도 너무나 그를 닮아 있었다. 언제나 누구든 근거 없이 의심부터 하는 것에 익숙한 선준은, 다른 사람 역시도 저를 의심할 것이라 전제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여원이 샴페인을 건네받았을 때, 당연하게 의심했던 건 맞았지만…….
불안한 와중에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한 눈빛으로 저를 응시하는 제헌을 믿었기에 결국 여원은 해독제가 든 샴페인을 들이켰다.
“여원 씨가 무사하니 그걸로 됐습니다.”
제헌은 더 이상 선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가 없는 것 같았다. 여원이야 짧은 연애와 결혼 생활을 합쳐 선준과 1년 남짓 정도의 시간을 보냈지만, 제헌은 평생 선준에게 고통받아 왔을 거라 생각하니 그런 그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 맞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여원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 접힌 서류를 꺼내 보였다. 선준의 도장이 찍힌 이혼 서류를 확인한 제헌은 조금 놀랍다는 듯 눈을 치켜떴지만, 이내 기꺼워했다.
“선준이가 드디어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던가요?”
“네, 제헌 씨가 쓰러져 있었을 때요. 하아, 이제야 왜 그렇게……. 선준이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굴었는지 이해가 가네요.”
“하.”
“제헌 씨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되어, 상속권을 박탈당할까 봐 걱정이 됐었나 봐요.”
잔뜩 기겁한 얼굴로 줄행랑치던 선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여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여원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제헌이 헛웃음 쳤다.
“내 배우자와 아이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아직까지도 자기 몫을 챙길 생각을 하다니 가소롭군요.”
의식을 되찾은 이후 내내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이던 제헌이 선준에 대해 날카로운 적대심을 드러냈다.
이제 선준의 행동을 어린 마음에서 비롯한 말썽이나 치기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복수심에 악이 받친 선준이 여원을 계획적으로 살인하려고 했던 것은 명백하게 범죄의 영역이었다.
“더는 하선준이 지금까지처럼 제멋대로 굴 수는 없을 겁니다.”
눈앞의 이득만 좇는 선준의 탐욕스럽고 근시안적인 행태에 제헌이 몹시 분노했다. 선준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가 여원에게도 전해졌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기는 한데…….”
여원이 여전히 콩닥콩닥 뛰어오르는 심장 부근을 슥, 쓸어내렸다. 상황에 대해 모두 설명을 들었지만, 계속 마음이 술렁거렸다. 여원의 눈에는 제헌 역시 정상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 목숨이 오가는 일까지 제 뜻대로 휘두르며 계획을 실현시킨다는 게…… 솔직히 대단하다기보다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지금 자신이 제헌의 아이를 임신하고 제헌을 사랑하게 된 것도, 전부 제헌이 미리 짜놓은 계략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하아.”
상상 이상으로 지독한 남자와 얽혀들었구나 하는 뒤늦은 자각에, 여원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선준을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여원이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자, 제헌은 그제야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고개를 기울인 제헌이 여원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 했다.
“왜요, 또 걱정되는 것이라도 있어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제헌의 낯빛이 결백해서 여원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이 문제를 다 해결했는데, 여원이 왜 시무룩해하는 건지 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치만, 어떻게…… 어떻게 이 모든 걸…… 저한테는 아무런 말도 안 해주실 수가 있어요?”
처음 몇 번이야 제헌이 모든 걸 예상하고 척척 해결하는 것을 보고 여원도 신기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크게 들지 않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여원은 제헌과 감정적으로 긴밀하게 얽혀든 사이고 이제 곧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앞으로 남은 평생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헌 씨는…… 매번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혼자서만 생각하고 혼자서만 판단하시잖아요.”
물론 여원도 제헌에게 귀여움받고, 그렇게 귀한 아이처럼 사랑받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중요한 결정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아예 배제되는 것이 반복되자 역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하고 욕망하는 대상일 뿐, 제헌이 자신을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느껴졌다니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여원 씨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티가 전혀 안 날 수는 없어서요.”
“…….”
“물론 여원 씨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선준이가 워낙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보니, 사소한 실수로도 판이 깨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화가 난 것처럼 여원이 입술을 꼭 앙다물고 있자, 제헌은 한발 늦게 해명했다. 언제나처럼, 전부 맞는 말이었다. 제헌은 늘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여원 씨가 미리 알았다면 나를 적극 말렸을 거 아닙니까?”
“하아…….”
그 역시 당연한 말이었다. 왜냐면 위험하니까. 아무리 선준을 저택에서 쫓아내는 일이 중요해도, 여원은 그것이 절대 제헌의 목숨을 감수할 만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헌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지만…… 그런데도 오늘따라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수려하고 서늘한, 흰 얼굴이 왜 이렇게 얄미워 보이는 건지. 여전히 여원은 제헌이 원망스러웠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러다 혹시라도 큰일 났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여원 씨.”
“제헌 씨 쓰러지는 순간부터, 저 정말 제정신 아니었단 말이에요.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철렁해서…….”
“…….”
“그래도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인데……. 정말 그러다가, 일이 잘못됐을 수도 있잖아요. 제헌 씨가 그렇게 되면, 저랑 우리 통통이는 어떻게 하라고요.”
여원이 꾹꾹 억눌렀던 서러움을 와르르 토로했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라도 제헌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목놓아 울었던 여원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두덩이가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양 뺨도 찐빵처럼 퉁퉁하게 부풀어 있었다. 놀란 듯,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뻗은 제헌이 여원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걱정 끼쳐서 미안합니다.”
이내 제헌은 와락, 여원을 품에 끌어안고는 등을 나지막이 토닥여주었다. 이런 식으로 굴면 마냥 원망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에, 여원은 코끝을 제헌의 목덜미에 파묻었다.
“그렇지만,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헌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내밀고 있는 여원의 입술을 쪼옵, 빨아당겼다가 놓았다.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 제헌도 자존심이 보통은 아니다. 선준을 제외하면 인생에서 실패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는 스스로의 계획이 100% 성공한다 확신하고 있었다.
“하아, 제헌 씨…….”
그러나 여원은 제헌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세상일에 100%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제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변수를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 얻겠다는 건 결국 허상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통제하셔서, 제가 임신할 것도 미리 알고 계셨나 봐요?”
뾰족하게 눈을 흘긴 여원이 제헌의 허리께를 아프게 꼬집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제헌이 허를 찔린 것처럼 당황했다. 여원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게요. 여원 씨를 사랑하게 된 것만은, 내 계획 밖의 일이었습니다.”
제헌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여원을 말가니 바라보더니, 이내 허탈하다는 듯 픽 웃어버렸다. 사랑 고백도 참 그답게 한다는 생각에, 여원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물론 내가 모든 판단이 완벽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최선의 선택지가 무엇일지, 항상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줘요.”
제헌이 여원을 향해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어 보였다.
“이제는 안 그러겠다고, 저랑 약속해 줘요.”
그러나 평소에 제헌이 조금만 어르고 달래도 몰랑몰랑 풀어지던 여원은 오늘만큼은 여전히 단호한 얼굴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 이제, 정말로 가족이 될 거잖아요.”
“…….”
“그러니까 앞으로는 지금처럼 제헌 씨가 모든 걸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어요.”
“…….”
“물론 제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제헌 씨가 그렇게……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요.”
여원은 또렷하고 오롯한 눈으로 제헌을 쳐다보았다. 매사에 자신 없고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던 여원이었지만 제헌을 만나고부터는 달라졌다. 이제 여원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생겨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를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너무…… 외롭잖아요.”
“…….”
고독한 책임은 오랜 세월 제헌이 견지해 온 삶의 방식이었으니, 하루아침에 저를 위해 바꾸어달라는 게 과한 요구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원은 자신을 믿고 제헌이 마음을 조금 더 열어주길 바랐다. 그로 인해서 자신 역시 제헌을 더 단단히 믿을 수 있도록.
“그래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
“당장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노력할게요.”
사랑하는 모든 연인이 그렇듯이 여원과 제헌은 서로에게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기반으로 서로 차이를 좁혀가리라 약속했다. 그러한 의지 자체가 곧 사랑의 동의어이기도 했다.
“사랑해요, 여원 씨.”
다시금 여원을 푹, 끌어안고 제헌은 여원에게 몸을 가볍게 치대왔다. 그러면서 은근하게 유혹적인 페로몬을 흩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꼭, 너를 사랑해서 한 일이니 이번 한 번만 봐달라고 하는 것처럼.
“……휴우.”
“…….”
마냥 어른스럽고 여유만만한 남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유치한 구석이 있구나 싶어 어이없었고…… 조금쯤은 좋기도 했다. 게다가, 저렇게 근사한 얼굴로 이야기하다니, 여원은 도무지 제헌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저도 제헌 씨, 사랑해요.”
여원이 제헌의 커다란 등을 두 팔로 가득 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듯, 제헌이 여원을 온몸으로 가득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맞닿은 품에서 오롯한 안정감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