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가족의 민낯 (14/17)

13. 가족의 민낯

응접실에서 제헌의 옆자리에 앉아 선준을 기다리자니 작년에 저택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선준은 제헌에게 여원의 임신 사실과 결혼 계획을 통보했다. 따지자면 오늘은 그 정반대의 목적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하아…….”

단단히 마음을 다지려고 애썼지만, 아무리 애써도 여원은 결코 제헌만큼 초연할 수가 없었다. 임신 사실에 대한 죄책감과 선준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많이 긴장돼요?”

“……네에.”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심란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손끝을 덜덜 떠는 여원을 흘긋 내려다본 제헌이 여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선준이한테는 뭐라고 하죠? 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야죠.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도 아니고, 에둘러 말해봐야 좋을 것 없습니다.”

“그건 맞지만요.”

“분노이든 비난이든 내가 전부 받아낼 테니, 여원 씨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작게 한숨을 내뱉은 여원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치 않은 환경 속에서 늘 휘청거리던 여원이었지만, 자신을 향하는 흔들림 없는 제헌의 눈동자를 볼 때면 안정감을 느꼈다.

“선준이가……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겠죠?”

“……물질적인 보상이야 충분히 해주겠지만,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아…….”

“그래도 이번 결정이, 선준이의 이해를 구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요.”

“살면서 모든 것을 취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 결국은 선택이 필요합니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게 책임이고요.”

“네에…….”

“다만 그 과정에서 여원 씨가 다치지 않도록 내가 지켜주겠습니다.”

제헌은 여원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오롯이 전해지는 시선이 여원을 안심시켰다. 제헌에게서는 스스로의 선택과 두 사람의 앞날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태로운 격랑의 한복판에서도 여원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네, 고마워요.”

제헌이 심어준 자기 확신이 여원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여전히 많이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제헌과 함께라면 풍파에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사람을 오라 가라…….”

그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선준이 들이닥쳤다. 짜증 나 죽겠다는 듯 오만상을 쓰고 툴툴거리던 선준은 제헌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원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했다.

“뭐야, 강여원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하선준, 건너편으로 앉아라.”

제헌이 대화를 요구한 것만 알았지, 그것이 여원과 관련된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 여원의 등허리 부근을 마지막으로 다독여준 제헌이 여원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뭐야, 두 사람이 대체 왜…….”

선준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상황 파악이 덜 되었는지 패악도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헌은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려 애쓰는 선준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선준이 어영부영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로 서류를 건넸다.

“문서에 사인해.”

“이게 무슨……. 이혼 서류? ……강여원이랑 내 거잖아? 대체 형이 이걸 왜?”

“여원 씨가 임신했다.”

“뭐, 뭐라고?”

제헌의 무미건조한 통보는 선준을 경악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리던 선준은, 나란히 앉아 있는 제헌과 여원을 알아채고는 눈을 날카롭게 홉떴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 올리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씨발. 역시,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두 사람이 작당하고 나를 병신 만들 줄…….”

“자리에 앉아.”

선준이 저열한 욕설을 지껄이자 제헌은 곧바로 위압적인 페로몬을 짙게 풀었다.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알파를 찍어 누르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으로 전해졌다.

“이, 이잇!”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린 선준이 자존심 상해 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힘의 격차를 느끼자 별달리 저항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들릴 듯 말 듯 욕설을 입 안에 집어삼킨 선준이 같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잔뜩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제헌에게 압도당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문서가 하나 더 있어. 원래대로라면 대학교 졸업 이후에 유산 상속이 가능하지만, 내 재량으로 지금 재산의 50%를 떼어 주고 너를 분가시킨다는 내용이다.”

“대체, 이게 무슨…….”

“처음부터 네 몫의 유산을 노리고 여원 씨랑 결혼한 것 알고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이제 잡음 없이 저택에서 나가면 돼.”

원래도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냉랭한 얼굴로 지시하는 제헌은 오늘따라 특히 더 인간미 없어 보였다. 동생을 대하는 형이라기보다는, 협상에 임하는 기업인의 태도에 가까웠다. 협상이라기엔, 조율할 권한이 있는 쪽은 제헌 한 사람뿐이었지만 말이다.

“으아아악!”

이어진 제헌의 말에 선준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시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선준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거머쥐고는 괴성을 질렀다. 그 서슬에 흠칫 놀란 여원이 어깨를 떨자 제헌이 당연하게 여원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열이 오른 선준이 발을 쿵쿵 구르더니, 제풀에 못 이겨 금세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

“부모님도, 형수도, 이제 강여원까지!”

선준은 충혈된 눈을 벌겋게 뜨고는 씨근거렸다. 마구잡이로 감정을 쏟아내다가, 스스로도 그것이 버거운지 숨을 헐떡이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제헌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약이 잔뜩 올라서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마구잡이로 발길질했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것들은 전부 다 형이 차지했잖아! 왜, 대체 왜! 이번에도 이렇게 되는 건데!”

“…….”

“알고 보면 내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인데, 왜 전부 다 형만 좋아하고, 형에게 넘어가서 모든 걸 다 바치는데? 그깟 우성 알파여서?”

결국 선준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배우자의 부정을 알게 된 셈이었다. 선준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여원도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하…….”

그러나 제헌에게 발악하며 잔뜩 발버둥 치는 모습은 단순히 보기 좋지 않은 것을 떠나, 외려 황당하게까지 느껴졌다. 어차피 선준은 처음부터 여원을 이용하려고 결혼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결혼 생활 내내 여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자신의 과거는 모조리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형은…… 처음부터 나보다 가진 게 많았잖아. 근데 왜 내가 원하는 걸 전부 다 빼앗아 가는 건데?”

“…….”

“어떻게 형이 되어서 동생 오메가를 약탈해 가냔 말이야! 이 파렴치한 인간쓰레기야!”

애초에 선준은 여원을 원한 적도 없다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제헌은 선준에게 여원을 도구 삼아 얻으려 했던 재산을 흔쾌히 내어주겠다 제안했다. 그럼에도 선준이 이렇게나 날뛴다는 것은, 결국 갈등의 본질이 여원의 임신이나 선준이 물려받을 유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했다.

“모든 게 다 형 때문이야! 처음부터, 형만 아니었으면…… 형만 없었다면!”

“…….”

“형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이 죄다 망해버렸다고! 이제 어떻게 책임질 건데, 어?”

오랜 세월 축적되었던, 선준의 뿌리 깊은 피해 의식이 격렬하게 폭발했다. 급기야 선준은 제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원 씨를 너에게 뺏어 갔다고?”

“그래! 내가 강여원을 저택에 데려왔잖아. 내 오메가고, 내 것이었단 말야!”

“글쎄, 아닐 텐데. 이 저택에 있는 동안 하선준 네가 단 한 번이라도 여원 씨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대한 적이 있었던가?”

“……이잇!”

“스스로 가장 잘 알겠지. 여원 씨는 처음부터 네 것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

제헌이 냉정하게 본질을 짚어내자 선준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다시금 끄아악 소리를 질렀다. 좀처럼 제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

제헌이 선준에게 현실을 일깨워준 것이 여원은 못내 고마웠다. 그러나 동시에 저 말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을 홀대하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지금처럼 뻔뻔하게 날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 이제 어쩌려고 그래? 그래, 형이 늘 나를 우습고 같잖게 봤던 거 잘 알아. 그런데 동생 배우자를 뺏어 간다니, 이거 완전 콩가루 집안이잖아. 형은 세상 사람들 눈이 무섭지도 않나 봐?

“세상 사람들 눈이 무서운 사람이, 중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민 변호사를 찾아갔나?”

내도록 표정 변화가 없던 제헌이, 그 말을 듣고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되지도 않는 억지를 쓰며 제헌을 협박하려 들던 선준의 얼굴이 금세 퍼렇게 질렸다. 입을 쩍 벌린 그대로 얼어붙어서,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혀, 형이 대체 그걸 어떻게…….”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우습네. 네가 민 변호사와 결탁해서 유산을 탐냈던 걸 알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뭐라고 생각하실까.”

“하, 하지만…… 처음부터 형만 아니었으면…….”

“네가 한 행동만을 두고 판단하면 당장 네 몫의 재산을 몰수해 버려도 시원치 않아. 그래도 도의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제안도 하는 것이니 지금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다.”

더 이상 선준의 이야기는 듣기도 싫다는 듯, 제헌이 다시금 테이블 위에 올라온 두 개의 문서를 가리켰다. 이 정도면 오히려 관대하다고 느껴지는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해!”

하지만 선준은 그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헌이 자신으로 인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더욱 초라함을 느꼈다. 바닥에서 버둥거리던 선준은 악에 받쳐 씩씩거리더니, 급기야는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눈물을 질질 짜내기까지 했다.

“글쎄. 지금 사인하지 않으면 나중엔 더 후회하게 될 텐데.”

“씨, 씨이!”

“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거처 알아보고, 저택에서는 나가도록 하고.”

“으아아악! 형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제는 눈을 반쯤 까뒤집기까지 하는 선준의 발작은 좀처럼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러나 제헌은 동생이 무너져 내리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선준이 정작 이혼 서류에 사인은 하지 않고 패악만 부려대자, 제헌이 놀란 여원을 품 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제헌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아이를 밴 여원뿐이었다.

“여원 씨는 먼저 나가 있으세요.”

“그치만…….”

“이 정도면 우리는 할 만큼은 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지나치게 충격적이고 적나라해, 순간적으로 감정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제헌이 말했다. 여원은 고개를 간신히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내가 이대로 두 사람이 행복하도록 어디 가만 내버려둘까 봐?”

듣기 싫게 갈라지는 선준의 걸걸한 목소리는 응접실 안을 여전히 쩌렁쩌렁 울렸다. 이미 그간 선준의 민낯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도, 이 정도까지 추악해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악의 가득한 협박을 듣자면, 이게 끝이 아닐 것만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헉, 허억…….”

다급하게 복도를 걸어 나오다가, 순간 다리가 풀려 크게 휘청였다. 여원이 복도에 등을 기댔다. 아랫배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여원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제헌의 약속을 믿었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두 사람은 행복해져야만 했다.

* * *

쾅쾅쾅,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전을 따갑게 때렸다.

“강여원, 문 좀 열어봐!”

솔직히 여원은 이대로 선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고 무시로 일관할 수도 있었다. 제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가 곧바로 선준을 제압해 여원의 눈앞에서 제거해 줄 것이었다.

“하…….”

그러나 여원은 선준과 대화하기를 선택했다. 제헌이 자신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해결해 줄 의지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원치 않았던 결혼이라고 해도, 선준은 지난 1년여간 동거해 온 사람이었다. 제헌의 방식과는 별개로, 여원 역시 선준과 끝맺음을 직면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여원아,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

포악하게 문을 두들기던 게 언제였냐는 듯, 막상 방문을 열어주자 선준은 가쁜 숨을 단박에 몰아쉬고는 얼굴을 애처롭게 일그러뜨렸다. 잔뜩 가련한 피해자 시늉을 하며 여원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질금질금 흘러내린 눈물이 선준의 눈두덩이에 허옇게 번져 있었다.

“여원아, 그래도 우리 나름 좋았잖아. 이대로 이혼하는 거, 난 진짜 아닌 것 같아.”

“…….”

“형 아기 가진 거? 내가 용서해 줄게. 이혼만은 절대 아니야. 우리 두 사람 다시 같이 잘살아보자, 응?”

그대로 선준이 소맷부리를 붙잡으려 들자, 여원은 팔을 털어 선준을 밀쳐냈다. 선준이 뒤늦게 저를 구슬리려고 하는 것조차 이제는 솔직히 고까워 보였다. 잘못을 용서해 줄 테니 이혼만은 하지 말자는 말이, 여원이 좋아서가 아니라 제헌에게 패배하고 싶지 않아서 부리는 억지라는 게 뻔히 보여서였다.

“계속 이야기했잖아. 난 네가 싫고, 더는 너랑 결혼 생활 유지할 생각 없어.”

“……여원아,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만 잘…….”

“지금 나온 것도, 이제 정말 마지막이니까 예의를 지키려는 것뿐이지 너 받아줄 생각 있어서가 아니야.”

한 인간의 적나라한 속내가 이렇게까지 까발려지는 것도 실은 굉장히 드문 일이기는 했다. 유산을 물려받는 데, 형에게 반항하는 데 필요했던 도구일 뿐, 처음부터 선준은 여원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다.

“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꼭 형이었어야 해?”

여원이 단호하게 대처하자, 불쌍한 척 빌빌거리던 선준이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다. 눈을 날카롭게 치뜨더니, 기다렸다는 듯 여원에게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정도쯤은 여원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어차피 선준이 너도 나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강여원!”

“처음부터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상대가 하필 네 형이었다는 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하, 하…… 뭐라고?”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변했고, 네가 아무리 억지 부려도 그걸 바꿀 수는 없어.”

여원과 선준 사이에서 이미 관계의 추는 반대 방향으로 넘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여원은 선준 앞에서 주눅 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과도하리만큼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선준은 여원이 더 이상 저에게 휘둘리지 않자 당혹스러워했다.

“하……. 씨발, 너! 그 새끼랑 붙어먹으니까 그렇게 좋았어? 우성 알파 좆 맛은 좀 달랐나 봐?”

“그런 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니까, 그딴 더러운 말 입에 올리지도 마.”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네가 무슨 동정녀 마리아야? 떡도 안 쳤는데 자동으로 막 애가 생겨?”

“됐다, 내가 널 상대로 무슨 말을 해. 잘 알겠으니까, 적당히 하고 이만 꺼져.”

상황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선준은 폭언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여원에게 매달려 붙잡고 싶다가, 잘 구슬려 포섭하고 싶다가, 또 가시 돋친 말로 매도하고 싶다가. 선준은 제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내내 갈팡질팡했다. 그런 상대와 대화를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여원 너 이제 보니…… 꽤나 맹랑하다? 열성 오메가 주제에 세상 무서운 것도 모르고!”

“하…….”

“너 남편 형 꼬셔서 애까지 밴 사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뭐라고 할 것 같아? 막돼먹은 집안에서 커서 뻔뻔한 것도 정도껏 하지, 넌 양심이라는 것도 없나 봐?”

급기야 선준이 양심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자 여원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래,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면 분명 하나같이 자신을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여원도 제헌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가지게 된 순간 죄책감으로 심장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스스로가 내린 선택의 결과였다.

“하선준. 너 기억력 되게 나쁘구나. 미안한데, 먼저 바람피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하선준이 저에게 양심을 들먹거릴 처지는 아니었다. 그의 비난을 듣기가 가소로웠다.

“끄아아아악!”

여원의 말이 어딘가의 열등감을 자극했는지, 선준이 제 분을 못 이기고 주먹으로 벽을 쾅쾅 두들겼다. 놀란 여원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내가, 내가 언제 바람을 피웠는데?”

“정말 기억 안 나? 너 친구들이랑 여행 다녀온다고 해놓고 그날 밤에 다른 오메가 만났잖아. 그것도, 내가 임신해서 너랑 섹스를 못 한다는 이유로.”

“난 그런 적 없어! 그리고 내가 그때 분명히 아니라고 했잖아!”

“넌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옷깃에 발정 난 오메가 페로몬을 그렇게 진하게 묻혀왔는데, 아니라고 하면 아, 내가 오해했구나, 믿으라고?”

여원이 하나하나 근거를 들며 선준에게 맞받아쳤다. 예전에는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는 논리로 선준에게 맞서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기 정당화이자 회피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에, 여원은 절대로 선준에게서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 으으, 진짜로 아니라고…….”

궁지에 몰린 선준은 뜻밖에도 그대로 털썩, 바닥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여원이 본능적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선준은 여원에게 달려드는 대신 얼굴을 푹 감싸고 끄어억, 짐승이 우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선준의 얼굴이 서서히 절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니야, 바람피운 게 아니라…… 그때, 일부러 다른 오메가 페로몬 묻혀온 거란 말야.”

“뭐, 뭐라고?”

“그때부터 네가 형한테 관심 보이고 있었잖아. 너만 한눈팔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안달 난 눈으로 하제헌 쳐다보는 게 분하고 짜증 나서 그랬다고!”

“하…….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른 오메가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나한테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서라도 내 말을 잘 들을 거 아냐!”

여원의 입이 경악으로 쩍 벌어졌다. 배우자의 바람을 의심해서 옷깃에 일부러 오메가 페로몬을 묻히고 왔다는 게…… 사람이 얼마나 속이 꼬였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행동이었다.

“그때부터 둘이 붙어먹었던 거 맞지? 역시 그랬겠지, 그러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된 거겠지.”

허탈한 마음에 여원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푹, 쓸어올렸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과연 제헌과 섹스까지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제헌을 내내 연모해 왔던 마음이 있었다 해도, 실제로 행동까지 옮기게 된 것은 선준이 먼저 배우자로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확고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씨발, 하제헌 개새끼. 그렇다고 진짜 동생 오메가를 따먹냐, 흐어엉!”

악에 받친 선준은 급기야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런 선준이 도무지 감당이 안 돼서, 여원은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건 대체 무슨 유아 퇴행인가 싶었지만, 실제로 지금껏 선준의 모든 행동은 지극히 유아적이기도 했다. 나이만 스무 살이었지, 선준은 어렸을 때의 상처에 갇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성인으로 자라지 못했다.

“매번 형만 잘나고, 다들 나한테는 관심도 없고 형만 좋아해! 왜 나는 형처럼 전부 가질 수가 없는 거야!”

결국 선준은 뿌리 깊은 열등감과 피해 의식으로, 가장 두려워하던 결과를 직접 초래했다.

“이 말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인데, 그때까지 제헌 씨랑은 아무런 일도 없었어.”

“나한테 그딴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냐. 그리고 네가 먼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관계를 맺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어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선준의 행동이 정당화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참작될 수는 없었다. 선준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타인에게 명백한 해악을 끼쳤고, 그것에 대한 피해를 오롯이 받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여원 자신이었다. 따라서 여원은 선준에게 불필요한 연민을 베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인데 무슨 소용이겠어? 결과적으로는 네 의심이 맞았어, 축하해.”

“하…… 흐, 으윽, 우우욱!”

“그리고 아까 물어봤지? 우성 알파랑 하면 좀 다르냐고.”

“씨발, 짜증 나, 개짜증 나아아!”

“어, 그것도 맞아. 나 제헌 씨랑 섹스하는 거 좋아해. 너랑 하면서는 오르가슴 느껴본 적 단 한 번도 없거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단 말야!”

“선준이 너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겠지. 나도 형보다 못난 게 네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니라고! 우으으, 제발 그만해!”

“미안해, 선준아. 근데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제일 중요해.”

“아아악!”

“나랑 결혼한 내내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다만 여원은 언제나 선준이 자신을 모욕해 왔던 방식대로, 선준에게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아킬레스건이 찔려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는 선준을 보면서도, 마냥 통쾌한 승리감이 들지는 않았다.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인간의 밑바닥은 유쾌하다기보다는 씁쓸한 끝 맛을 자아냈다.

“너, 분명 후회할 거야.”

그 자리에 멈춰 선 여원이 가만히 선준을 내려다보자, 한참을 혼자 버둥거리던 선준이 돌연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빛이 맛이 간 채로 선준이 음산하게 읊조렸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선준의 표정에서는 딱히 살기라고도 하기에도 어려운, 형형한 기운이 풍겼다.

“너는 형의 실체를 몰라. 형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인지.”

“……하아.”

“하제헌 지금 되게 세련되고, 젠틀해 보이지? 근데 그거 알아? 어렸을 때, 형이 밤에 잘 때 날 묶어놓고 수틀리면 두들겨 팼어.”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고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선준은 다시금 여원에게 제헌에 대한 불신을 심어 넣기 시작했다. 여원이 저택에 처음 들어온 바로 그 순간부터, 선준은 숨겨진 비밀에 대해 경고해 왔다. 제헌의 잔악한 본성을 여원이 외면하고 있을 뿐이라며 을러댔다.

“그 남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야.”

“하선준.”

“동생인 나한테도 이렇게 냉혹했는데, 너라고 다를 줄 알아? 형수처럼 된 다음에 후회해 봤자 그땐 이미 늦는다고.”

못 들은 척, 여원은 선준에게서 돌아섰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여원은 무사히 선준을 차단할 수 있었다.

“……미친 새끼.”

그러나 선준이 부추긴 두려움마저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선준이 하는 다른 말은 이제 더는 여원을 흔들지 못했지만, 형수에 얽힌 이야기만큼은 여전히 여원의 불안을 자극했다.

“하아…….”

사랑하는 사람이자 아이의 아빠인 제헌을 믿고 싶은 마음과 걸리적거리며 그를 방해하는 마지막 단 하나의 걸림돌이 여원의 안에서 치열하게 충돌했다.

* * *

밤은 침침하게 깊어갔지만 여원은 좀처럼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두툼한 부피감 아래에서 한참 동안 뒤척였다. 버스럭, 이불이 살갗에 쓸리는 소리만 들려도 흠칫 놀라서 몸이 떨렸다. 혹시 문밖에 누가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덜컥 불안해졌다.

오늘 하루에만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기 어려운데 선준까지 여원의 불안을 불쏘시개로 거칠게 들쑤셔서 속이 내내 시끄러웠다. 푹신푹신한 베개를 꼭 끌어안고는, 여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다가는 한숨도 못 자겠어.”

맥없이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베개를 품에 안은 채로 여원이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섰다. 순간 고민으로 턱 끝이 뾰족해졌지만, 역시 저번처럼 혼자서 덩치를 부풀린 불안에 스스로 잡아먹히고 싶지는 않았다.

여원은 위태로운 형상의 나선형 계단을 비틀비틀 타고 올라 3층으로 향했다.

“제헌 씨…….”

침실 앞에 다다른 여원이 밭은 숨을 안으로 삼켜내고 문을 똑똑 두드렸다. ‘여원 씨?’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자, 문을 아주 살짝만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봤다. 쉽사리 잠들 수 없는 밤을 맞이한 것은 제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침대맡, 제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 병이 이미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하아…….”

낮은 조도의 불빛 아래로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서늘한 얼굴이 드러났다. 얕게 일렁이는 새까만 동공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왈칵 조여들었다. 한밤중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여원을 보고도 제헌은 별다른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금세 다시 덤덤한 얼굴을 하고는, 여원을 향해 팔을 넓게 벌렸다.

“이리 와서 내 무릎에 앉아요.”

“네에…….”

입술을 작게 달싹인 여원이 손등을 들어 올려 뜨끈한 눈시울을 꾹꾹 눌러댔다. 지금 이 순간 여원이 제헌을 간절히 원했기에, 다른 말은 불필요했다. 그것만으로도 여원을 들일 이유가 충분해서 제헌은 저를 찾아온 여원을 품에 한가득 안아주었다.

“선준이 때문에 그런 겁니까?”

“…….”

“나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고요?”

“…….”

저보다 한참은 덩치가 큰 제헌에게 여원이 폭 감싸였다. 여원을 무릎 위에 앉힌 제헌이 다정하게 물었다.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묵직해졌다. 새까맣게 타들어간 속을 꺼내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여원은 대답 대신 고개만 맥없이 끄덕거렸다.

“이런, 가엾게도.”

제헌이 여원의 동그란 머리통을 슥, 슥, 쓰다듬어주었다. 얇은 머리칼이 단단한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들고, 여원은 제헌의 품에 얼굴을 푹 기댄 채로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쿵, 쿵, 심장이 나지막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빈틈없이 몸을 맞대고 있는 동안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서로를 하나로 이어주었다.

“내일 사용인 시켜서 여원 씨 짐 이리로 올려보내겠습니다.”

“아, 네…….”

“선준이가 저택에서 나갈 때까지 3층 출입을 금지할 테니, 여원 씨는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도록 해요.”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안도가 되었다.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완고하게 굳은 제헌의 얼굴이 보였다.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턱 끝이 단단한 가슴 근육 위로 가볍게 미끄러졌다. 뭉클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가뜩이나 몸조심이 중요한 시기인데, 선준이랑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차분히 가라앉은 제헌의 새까만 동공은 어릿어릿한 여원의 얼굴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고요히 그를 들여다보며, 여원은 곰곰 생각에 잠겨들었다.

제헌은 자신에게 항상 최선의 것을 주기 위해 고심하는 남자였다. 냉랭한 태도 때문에 쉽게 오해를 살 뿐 직접 하는 행동은 항상 다정했다. 물론 이따금 여원에게 내비치는 욕망이 음험하고 집요해 보일 때야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선준이 말한 것처럼 잔악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있잖아요, 제헌 씨.”

“네.”

잔뜩 긴장한 여원이 제 얼굴 곳곳을 면밀히 들여다보자, 제헌이 너그러운 손길로 여원의 등허리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여원이 어떤 부탁을 하든 들어줄 것처럼 굴었지만, 실제로는 아니라고 생각될 때는 칼같이 잘라내는 남자였다. 먼젓번에, 여원이 선준의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준이는 정말 어렸을 때 형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학대당한 걸까?

저택에 큰불이 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화재의 원인은 무엇일까?

형수라는 사람은 선준과 어떤 사이였을까, 대체 왜 제헌과 이혼하게 된 걸까?

“저, 마음이 너무…… 복잡해요.”

여원을 위해서라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더 좋다는 명목 아래에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 겹겹이 쌓여가고 있었다. 속이 엉망으로 뒤엉키는 기분에 여원이 숨을 얕게 할딱거렸다. 위험의 전조를 풍기는 저택 곳곳에 깊숙이 묻어져 있던 의구심이 스멀스멀 표면을 뚫고 올라왔다.

“……물론 선준이가 싫기는 한데, 그래도 사람이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아서요.”

“…….”

“게다가 너무 심하게 괴로워하니까…… 조금은 안돼 보이기도 하고요.”

선준이 말하는 제헌과 자신이 바라보는 제헌 사이의 간극이 여원을 심란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진 것은 정말 묻고 싶었던 것에서는 한 발짝 정도 비켜 간 질문이었다.

“…….”

가만히 여원에게 귀 기울이던 제헌이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서늘한 표정을 띠었다. 거칠게 내뱉어지는 숨결에서는 얕은 술 냄새가 배어났고, 잘게 일렁이는 동공이 혼탁하게 젖어들었다.

“음, 글쎄요.”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 올리는 제헌이 오늘따라 유난히 소슬해 보였다. 늘 무미건조해 보이던 남자가 드물게 감정을 억누르는 얼굴에서는 어딘가 위태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처음 접하는 제헌의 모습에 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밑바닥이라고 하기엔, 재산도 50%나 떼어 가는데 오히려 저지른 짓에 비해 과분한 결과를 얻는 셈이죠.”

“…….”

“게다가, 선준이는 여원 씨를 애초에 원한 적이 없으니 불쌍히 여길 이유도 없습니다.”

짧은 순간 스쳐 간 동요를 금세 지워낸 제헌은 평소처럼 굳건해졌다. 여원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굳이 내비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친동생인 선준을 딱히 피붙이로도 여기지 않는 듯한 제헌의 사고방식은 역시 보편적이지는 않아서, 여원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니 여원 씨도 쓸데없이 죄책감 느끼지 말아요. 공감도 그럴 가치가 있는 상대에게나 하는 것이니까.”

제헌의 태도는 이성적이다 못해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매사에 냉담한 제헌의 가차 없는 합리성이 나중에 여원 자신에게 칼날로 돌아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끝까지 여원 씨를 놓지 않을 테니 이제 여원 씨는 나만 보면 됩니다.”

대외적으로 제헌은 동생의 배우자를 약탈하는 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제헌은 여원을 가질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그럴게요.”

제헌을 믿고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은 바람이 간절한 만큼, 선준이 심고 간 독약 같은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쩌면 선준은 정확히 이런 반응을 유도하고 여원을 일부러 흔들어댔는지 몰랐다. 그럼에도 사랑과 믿음은 언제나 동의어는 아니었기에, 마음은 수런거렸다.

“오늘은 내 곁에서 자고 가요.”

여원을 제 침대로 데려간 제헌은, 작게 움츠러든 말랑한 몸을 떡 벌어진 어깨 안으로 단단히 옭아맸다. 얇은 파자마 아래로 탄탄한 근육의 감촉과 미지근한 살갗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으응…….”

여원은 자꾸만 제헌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제헌의 단단한 가슴팍에 코끝을 슬쩍슬쩍 문지르고, 묵직한 등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작게 움츠린 몸이 자꾸만 꼼지락꼼지락 들썩이자, 제헌이 코끝이 동그랗게 눌린 여원의 얼굴을 위로 들어 올렸다.

“흐, 제헌 씨…….”

녹녹하게 젖어든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제헌이 여원의 양 볼을 가볍게 쥐었다. 선이 날카로운 얼굴이 성큼 가까워지고, 눅진한 애정이 배어나는 키스가 오롯이 퍼부어졌다.

음, 으응……. 뭉그러지는 소리를 흘리던 와중, 까끌한 혀가 입 안쪽의 연한 점막을 확 쓸어올리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깜빡이던 눈을 동그랗게 뜬 여원이 제헌의 두툼한 목덜미를 매달리듯 껴안았다.

“으, 흣…… 으응…….”

“하아…….”

손끝에서부터 저릿한 흥분이 번져 나가고, 코끝에 싸하게 풍겨 오는 알파의 강렬한 향에 여원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혀를 섞고 입 안을 샅샅이 핥아내고 입술을 빨아도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다.

제헌도 지금 자신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제헌이 짓누르듯 몸을 가두자, 여원은 다리를 넓게 벌려 제헌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응, 흐읏, 제헌 씨…….”

희게 드러난 여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제헌이 꺼슬한 입술을 비비며 체향을 깊이 들이켰다. 이내 커다란 손이 말캉하게 살점이 오른 흰 다리의 선을 따라 더듬어 내리더니, 키스만으로 반쯤 일어선 성기를 소중한 손길로 감쌌다.

“하, 여원 씨…….”

여원의 하반신을 차지한 손이 능숙하게 오르내리자, 가장 예민한 몸의 중심부가 제헌의 살결에 적나라하게 비벼졌다. 이내 꽉 조이듯이 감싸 쥐는 손아귀 힘에 여원의 성기가 금세 딱딱하게 부풀었다. 볼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여원의 온몸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앗, 흐읏, 아으응.”

꼿꼿해진 기둥을 거머쥔 제헌이 적당한 힘을 주어 느릿하게 주무르자, 크기를 완전하게 키운 성기 끝에서 선액이 질끔질끔 솟아올랐다. 입술을 잘근 깨문 여원이 허리를 털컥 들썩였다. 전혀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여원의 안 역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아, 제헌 씨…… 잠깐, 흑…….”

제헌은 성기 밑동을 꽉 조이고, 끄트머리의 벌어진 틈새를 집요하게 자극하며 여원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일부러라도 축축해지기 시작한 구멍 주변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임신 초기에 맺는 관계는 여원의 몸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하, 후으…….”

오늘 제헌은 딱히 제 욕심을 채우려는 것보다, 나른한 성감으로 잔뜩 긴장한 여원의 몸을 부드럽게 풀어주려는 의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몸이 흐물흐물하게 풀리자 바짝 곤두섰던 신경이 한층 누그러졌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쾌감에 복잡하게 출렁이던 생각도 잠시나마 멎었다.

“네, 여원 씨.”

흥분으로 달아오른 페로몬을 흠씬 풍기면서도, 욕정을 억누르는 알파의 얼굴은 낯뜨거우리만치 색정적이었다. 집요하면서도 절제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자면 아랫배가 절로 저릿하게 땅겼다.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리자 성감이 확 자극되었다. 동시에 눈시울이 뜨끈해지며 감정이 울컥거렸다.

“흑…… 흐으, 으, 제헌 씨…….”

“후으…….”

“흣, 제헌 씨이…….”

결국 가장 중요해지는 것은 서로에게 닿아 있는 지금 이 순간, 체온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상대의 존재였다. 제헌의 목에 애처롭게 매달린 여원이 까끌한 입술을 할짝할짝 핥아내자, 제헌은 짧은 숨을 훅 들이켰다. 그러곤 온유한 페로몬을 풀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연분홍색 성기를 집요하게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끊이지 않았다.

“하, 흑, 아아앙…… 흑!”

끝내는 울음에 가까워진 신음을 뱉어낸 여원이 견디지 못하고 제헌의 손 안에서 사정했다. 성기 끝에서 튀어 오른 희멀건 정액이 여원의 하반신과 제헌의 손가락에 난잡하게 섞여들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눈매가 가늘게 좁혀들고,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여원의 눈두덩이를 타고 조로록 흘러내렸다.

“흑, 아응…… 어떡해…….”

제법 여러 번 몸을 섞었는데도. 제헌의 손 안에서 액을 토해내는 순간은 늘 창피하고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여원이 눈을 반쯤 내리뜬 채 밭은 숨을 겨우겨우 내뱉었다. 사정감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기진맥진한 몸을 뒤로 젖히자, 입술 사이로 할딱거리는 혀에 제헌이 다시 한번 깊게 입맞춤했다.

“아…… 우응…….”

아이를 가진 뒤로, 이렇게까지 진한 스킨십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조금의 걱정도 없이 흠뻑 빠져들 수 있는 나른한 쾌감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뒤로 이어질 동작을 기다렸지만, 깔끔하게 뒤로 몸을 뺀 제헌은 흐트러진 여원의 몸을 추슬러줄 뿐이었다. 그러나 알파 페로몬은 코끝이 아릿해질 정도로, 처음 키스할 때보다 훨씬 더 진해져 있었다. 눈을 또렷하게 뜨자 파자마 중심 부근에 불뚝하게 솟아오른 적나라한 기둥 모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

“…….”

제헌이 뜨끈하게 치미는 흥분을 억누르고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섹스의 목적이 교감이라면, 여원은 흐르는 마음이 일방적이지는 않기를 바랐다. 아니, 사실은 꼭 섹스만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제헌에 비하면 자신은 보잘것없어서, 줄 것이라곤 변변찮았지만 그래도 여원은 자꾸만 제헌에게 저를 내어주고 싶어졌다.

“빠, 빨아드릴게요.”

화장실에서 대충 처리를 할 생각이었는지, 제헌은 침대 밖으로 발을 딛고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여원은 제헌의 사타구니에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일부러 그러려는 건 아니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예쁘고 착하기만 해서.”

끓는 듯한 한숨을 몰아쉰 제헌이 침대에 납작 엎드린 여원에게 손을 내렸다. 커다란 눈망울을 순종적으로 깜빡이는 여원의 뺨을 쓸어내렸다. 시선이 한층 짙어지고, 사방을 가득 메우는 페로몬의 밀도가 빼곡해졌다. 흡, 단 숨을 들이켠 여원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불룩하게 부푼 기둥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럴 것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하고 싶어서요.”

“하아…….”

치미는 것을 억누르는지 제헌의 미간이 바짝 좁혀들었다. 제헌은 성기를 훑으려는 여원의 손을 단단히 겹쳐 쥐고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여원도 평소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여전히 하반신 언저리에 손을 뻗은 채로, 정말 안 되냐는 듯 울먹울먹한 눈으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성기가 얇은 파자마를 꿰뚫고 나올 듯 크게 불뚝거렸다.

“그러면, 살짝만 물어보겠어요?”

제헌이 나지막한 한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굴었지만, 꾹 감았다가 뜬 눈은 그늘진 욕정으로 잔뜩 번들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여원 역시 흉곽이 꽉 조여드는 듯해, 달뜬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우응…….”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린 채로, 여원이 손을 뻗어 제헌의 파자마 팬츠를 끌어 내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드로어즈의 밴드 부근을 매만지자, 목덜미를 느슨하게 젖힌 제헌이 끓는 듯한 숨을 몰아쉬었다. 혀를 길게 낸 여원이 그대로 얇은 드로어즈 위, 천과 맞닿아진 제헌의 성기를 할짝할짝 핥았다.

“하아…….”

겨우 골반께만 내려진 파자마 위로 드러난 드로어즈가 여원의 혀로 끈적하게 적셔졌다. 질척한 마찰음과 함께 혀가 닿는 부근마다 드로어즈의 색이 짙어지고, 성기 윤곽이 도드라졌다.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을 하고 여원이 눈을 깜빡이자 제헌의 동공에 날카로운 이채가 돌았다.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더니, 허공을 배회하던 제헌의 손이 여원의 머리채를 단단히 휘어잡았다.

“천천히, 잘, 해봐요.”

“네에…….”

고개를 끄덕인 여원이 축축해진 드로어즈를 마저 벗겨내고, 입술을 동그랗게 벌려 성기를 베어 물었다. 혀끝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오물오물 성기를 빨았다. 자그마한 입이 한눈에도 버거워 보이는 크기의 성기를 열심히 받아내고 점막으로 꼭꼭 조이자, 여원의 머리칼을 쥐어 잡고 있던 제헌의 손아귀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후응, 웅, 우응.”

여원은 자발적으로 제헌을 위로하길 원했지만, 제헌은 여원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지극히 절제했다. 평소랑 다르게 성기를 목구멍 깊은 안까지 푹푹 밀어 넣지도 않고, 허리를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느라 힘이 꽉 들어간 골반 부근이 부르르 떨어댔다.

덕분에 여원은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제헌의 성기를 삼켰다. 척척하게 젖은 선홍색 혀가 귀두 끝 벌어진 틈이나 기둥에 우두둑 돋아난 핏줄을 살금살금 핥아낼 때마다, 제헌은 차오르는 성감으로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하아…….”

제헌은 나른한 얼굴로 여원을 내려다보았다. 임신 사실을 안 뒤로 제헌은 여원을 제 손을 탄 오메가라기보다도, 제 아이의 엄마로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능숙하게 통제하는 남자의 견고한 자제력도 슬슬 한계에 치달아가고 있었다. 정욕으로 비틀리는 제헌의 얼굴을 보자 여원 역시 이유를 모르게 하반신이 뜨거워졌다.

“힘들면 바로 이야기해요.”

“우응, 흐으응…….”

결국, 제헌은 허리를 움직여 척척하게 젖은 여원의 입 안에 제 성기를 직접 박아 넣기 시작했다. 성기가 조금 더 깊이 들어오고, 귀두가 목젖에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마른 숨을 켁켁 뱉어내면서도, 여원은 착실하게 혀를 움직여 제헌의 성기를 살뜰하게 핥았다.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가 입 안에서 살짝 휘어지고, 딱딱한 귀두가 점막을 긁어내리듯이 꾹꾹 자극했다. 이제 입 안에 성감대가 생겨버리기라도 한 건지, 뜨끈한 살덩이가 여린 속살에 문질러지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뜨겁게 열이 올랐다.

“흐, 앗, 우응.”

조금 버겁다 싶을 정도로 성기가 빠듯하게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제헌의 딱딱한 허벅지를 꼭 붙들었을 때, 제헌이 여원의 벌어진 입술에서 성기를 쑥 빼내려 들었다. 사정감이 몰려오는지 제헌의 미간이 바짝 좁혀져 있었다.

“하, 후으…….”

그러나 여원이 입술을 앙다문 채 성기를 빨아당기고 있던 탓에, 성기를 완전히 뽑아냈을 땐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기둥이 쭉, 밀려 나와 허공에 튕기고 끝에서 후드득 쏟아진 정액이 여원의 입술에 튀었다.

“제헌 씨…… 이거, 흐, 오늘따라 되게 끈적거려요.”

아랫입술에 묻어난 정액을 슥 훑어내린 여원이 의아하다는 듯 제헌을 올려다봤다. 제법 오래도록 지속된 펠라티오 때문인지 여원은 반쯤 눈이 풀려 있었다.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것만 같은 순종적인 모습에 방금 사정을 마친 제헌의 성기가 다시금 꼿꼿해졌다. 제헌이 퉁퉁 부어오른 여원의 입술에 묻어난 질퍽대는 액체를 손끝으로 훑어냈다. 그의 눈빛이 소유욕으로 번뜩였다.

“이리 올라와요.”

“아, 으응…… 갑자기…….”

“아기 만져 줄게요.”

침대에 기대앉은 제헌이 여원을 제 하반신 위로 들어 올리고, 제 얼굴을 보게 만들었다. 이제 제 아이를 품고 있다는 생각에 여원이 평소보다 한참은 가냘프고 예뻐 보였다. 아직 판판하기만 한 아랫배를 쓸어내리자,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린 여원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아, 흑…… 흐응…….”

제헌은 제 무릎 위에 여원을 단단히 앉히고 어르듯이 온몸을 매만졌다. 상반신을 바짝 기울여 흰 목덜미, 어깨, 가슴팍을 타고 내려오며 입술을 쪽쪽 찍었다.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는 등허리를 쓰다듬어 내리고, 조금 전 한바탕 액을 쏟아냈던 보드라운 성기를 매만졌다.

“아응, 흑…… 아앙…….”

제헌 위로 축 늘어진 여원이 고양이처럼 가르릉 가르릉, 나른한 신음을 내뱉었다. 또 한 번 성기에 자극이 가해졌지만, 이번에는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래에 왈칵 액이 터지자 심장이 깃털에 간지럽혀지는 것처럼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제헌의 목덜미에 고개를 푹 파묻은 여원이 할딱할딱 젖은 숨을 내뱉었다.

“흣, 제헌 씨, 잠깐만…….”

“쉬, 가만히 있어요.”

제헌이 제 침입을 갈망하는 것처럼 오물거리는 구멍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내렸다. 얕은 자극만으로도 금세 흥건하게 젖어든 아래가 온통 미끌거렸다. 손가락 끝의 지문이 주름을 비비듯이 문지를 때마다 엉덩이 골이 미끄덩하게 적셔졌다.

“흑, 으읏…… 아앙!”

급기야 제헌이 애액이 흥건하게 묻어 있는 손가락을 골에 대고 노골적으로 슥슥 문지르자, 주름이 움찔움찔 떨리더니 구멍이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바짝 맞닿은 아래에서는 제헌의 하반신이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안으로 치받고 싶어 했지만, 족쇄에 매인 듯 그 움직임은 극히 적었다. 통째로 삼켜도 시원치 않겠다는 듯 치열한 시선이 여원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하…… 여원 씨.”

언제나 욕망을 능란하게 개방하던 제헌이 스스로를 절제하는 것이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도무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제헌이 여원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는 다리를 하나로 모아 위로 들어 올렸다. 드러난 구멍에 몸이 움찔 떨리려는 찰나, 제헌의 손가락이 여원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입구 주변에만 겨우 들어온 손가락이 느릿하게 안쪽을 매만졌다. 이미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있던 구멍은 외부의 자극을 반기며 제헌의 손가락에 찰싹 달라붙었다. 푹, 푹, 느린 속도로 안이 쑤셔질 때마다 더 깊은 곳에서 고여든 애액이 찰박찰박 흘러내렸다.

“아, 아응…… 앙!”

철벅, 철벅, 끊이지 않고 손가락이 드나드는 입구에서 민망하리만큼 질퍽거리는 소리가 번졌다. 질척하게 젖어든 내벽이 손가락을 꽉꽉 물어대자 제헌의 턱이 일그러졌다. 제헌의 손가락을 받아내느라 여원의 한데 모인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입에서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신음이 터졌다.

어느새 두 개가 된 손가락이 차지게 감겨드는 안쪽 살을 능수능란하게 유영했다. 농밀하고 관능적인 위로처럼, 아주 깊이는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 부근만 얕게 자극해 대서 여원은 더욱 애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 자제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내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불뚝하게 발기한 제헌의 성기가 허벅지 부근을 쿡쿡 찌르고, 이따금 구멍이 뻐끔하게 열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조금씩 안으로 삼켜졌다. 등골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올랐다. 여전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기에, 제헌은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읊조렸다.

“하…….”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고, 거친 숨을 뱉어낸 제헌이 꽉 다물린 허벅지 사이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슥 밀어 넣었다. 거친 표피가 여린 속살을 쓸어내리는 생경한 기분에 여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대로 골반을 툭, 쳐올리자 제헌의 질긴 다리 근육에 말랑하게 살이 오른 여원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철썩 부딪혔다.

“아, 흑, 으응…… 흐…….”

여원은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하나로 모인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리고 있는 채였다. 자꾸만 흐물흐물해지려는 허벅지에 골반이 퍽, 퍽, 치받아오자 균형을 잡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허벅지 사이를 슥슥 드나드는 성기의 모양이 너무 음란하게 느껴져, 여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을 꾹 내리감았다.

“후…… 여원 씨.”

그럼에도 여전히 제헌의 허릿짓은 거칠거나,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느리고 일정한 속도로 가랑이 안쪽을 쳐올리면서, 제헌은 여원의 아랫배 쪽으로 손을 내렸다. 미지근한 손바닥이 아직은 생명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판판한 배를 거듭 쓸어내렸다. 저를, 그리고 배 속의 아이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온기에 여원이 허리를 얕게 들썩였다.

“아, 흐…… 제헌 씨…….”

눈을 크게 깜빡인 여원이 제헌을 겨우 올려다봤다. 매 순간 냉정하고 무심해 보이는 남자가 드물게 감정을 표출할 때,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희미하게 상처를 내비쳤다. 어쩐지 여원은 그동안 그가 굉장히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를 댈 수는 없었지만, 몸이 닿아 있기 때문이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네, 여기 있어요.”

말로 하는 약속은 명확하고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반면 섹스할 때 달아오르는 체온과 숨결, 흥분한 눈빛, 페로몬 같은 것들은 못내 추상적이었지만 그로써 서로를 간절하게 원하고,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가장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흑, 으읏…… 으으응.”

여원은 지금 이 순간의 제헌을 믿고 싶었다. 선준이 말하는 잔인무도한 남자가 아닌, 눈앞의 그가 지금껏 여원이 알아왔던 진짜 제헌이었다.

“하아…….”

속이 어지럽게 들끓는 듯한 기분에, 다리를 풀어 내린 여원이 그대로 제헌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제헌 역시 그러한 갈망에 부응하듯, 여원의 입술을 미친 듯이 탐하며 거칠게 빨았다. 타액이 얽혀들면서 서로에게 깊숙이 섞여드는 것만 같았다.

“제헌 씨, 흑, 흐으…….”

제헌의 굵직한 손가락이 드나드는 구멍에서는 여전히 흥건한 애액이 철벅철벅 넘쳐 흘렀다. 맞닿은 하반신을 적시고, 침대 시트 위로도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성감에 전신에 소름이 퍼질 때, 여원의 허벅지 안을 오가는 제헌의 성기도 한층 더 뻣뻣해졌다.

“후…… 하으…… 여원 씨, 하.”

제헌이 헉, 하고 더운 숨을 여원의 귓가에 내뱉었다. 사정하기 직전에 제헌은 검붉게 젖어든 성기를 여원의 허벅지에서 쑥 뽑아냈다. 생명이 돋아난 여원의 아랫배 위로 울컥울컥 새하얀 정액이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여원의 시야도 하얗게 점멸했다.

“하으읏…….”

벌어진 구멍은 쉽게 다물리지 않아 움찔거렸다. 오르가슴의 여운이 오래도록 전신을 저릿하게 감돌았다. 한참이 지나 겨우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니, 나른하게 좁혀진 제헌의 미간과 그 아래로 오뚝하게 솟아 있는 콧날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야가 아스라이 밝아지고, 그 아련한 끝에는 여전히 저만을 올곧게 향하는 제헌의 서늘한 얼굴이 있었다.

“……사랑해요.”

머리가 경고하는 것과 마음이 움직이는 건 달랐다. 설령 나중에 그로 인해 상처받게 된다 할지라도, 제헌을 애틋하게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 여원은 그를 믿기를 선택했다. 여원의 고백을 듣는 제헌의 얼굴이 벅찬 감격에 젖어들었다. 너르고 단단한 어깨가 여원을 빈틈없이 품에 푹 끌어안았다.

* * *

이따금 3층에서 저택 아래를 조망하듯 내려다보면, 바짝 약이 오른 채로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선준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준은 절대로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다. 사실상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상황에도 억지를 부리는 걸 보면 선준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제헌의 파멸과 불행이라는 것이 자명했다.

여원을 도구 삼아 처음으로 맛보았던 형에 대한 우월감을 다시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선준의 얼굴에는 해묵은 좌절감과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헌을 두려워하면서도, 형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이혼 서류에 사인하는 것도, 외부에 거처를 알아보는 것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하아…….”

대체 혼자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 제헌이 곁에 있을 때는 안전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처럼 낮의 저택에 혼자 남겨질 때면 여원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냐아! 냐아!

날카로운 고양이 우는 소리에 놀라 달려갔더니, 통키가 몇 시간 전에 먹은 사료를 나뭇등걸로 된 바닥에 온통 게워내고 있었다. 말간 토사물에는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사료 덩어리가 뭉개져 있었다. 최근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지, 통키는 평소에는 잘 먹던 사료도 설사와 구토하기를 반복했다.

“통키야, 아프면 안 돼.”

야옹…….

한숨을 푹 내쉰 여원이 자그마한 털 뭉치 같은 검은 고양이를 조심스레 수습했다. 얼마 전에는 제헌이 보내준 차를 타고 동물 병원에도 다녀왔지만, 수의사도 딱히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단지, 스트레스의 영향일 수 있다고만 했다.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연약한 생명체가 내내 아파하자 여원도 속이 무척 상했다.

“왠지 이 저택이 통키한테 안 좋은 것 같아.”

게다가 선준이 떠나고 한동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던 께름칙한 냄새 역시 최근 들어 다시 차올랐다. 위험의 전조가 될 불길하고 음산한 향은 3층 서재에 가까워질수록 진동했다. 논리적으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도, 여원은 어쩌면 요즈음 심해진 냄새 때문에 통키가 아픈 건 아닐까 생각했다.

냐앙!

“아니야, 괜히 혼자서 없는 일을 만들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기묘한 타이밍에 울음을 내뱉은 통키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헌이 일부러 신경 써서 저를 3층에 머무를 수 있게 해준 것인데, 역시 냄새가 어쩌니 하며 이것저것 따지고 들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여원은 선준이 나가게 되면, 예전처럼 불온한 냄새도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통키한테 다른 사료를 먹여야 할 것 같은데.”

계단 앞까지 다가간 여원이 망설였다. 얼마 전 사용인들이 여원의 짐을 모두 3층으로 옮겨두었지만, 통키 사료 몇 개는 아직 2층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다른 사료를 먹여보면 통키가 소화를 더 잘 시키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빨리 다녀오자.”

정말로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래층을 흘긋 내려다본 여원은 수상한 인영이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하고는 비틀비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힉!”

그러나 여원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새 방 밖으로 나온 선준은 계단 밑에 버티고 섰다.

비뚜름하게 팔짱을 낀 선준이 여원을 감시하듯이 훑어내렸다. 제헌에게 단단히 경고를 들었는지, 여원에게 접근은 하지 못하고 날 선 시선만을 던졌다. 무슨 일이든 막무가내로 굴 것만 같은 선준인데도 제헌의 명령이 일단은 먹혀드는 것을 보면 형이 정말 무섭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미 아래로 내려온 이상 선준을 보고 다시 3층으로 달아나는 것도 좀 웃긴 일이기도 했다. 못 본 척 선준을 지나쳐 빨리 사료만 가져와야겠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여원이 2층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선준은 불퉁한 목소리로 여원의 이름을 불렀다

“야, 강여원.”

“…….”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는 상대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게 가장 좋은 대처법이다. 못 본 척하자. 어차피 쟤는 이제 내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니까. 투명인간 취급해야 해.

그렇게 애써 모른 척 지나치려고 했지만, 여원의 얼굴은 긴장이 역력했다.

“여원아, 왜 사람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그래. 근데 너 오늘따라 되게 피곤해 보인다?”

“…….”

“어제도 밤새 우리 형한테 대줘서 그래? 너 걸으면서 자꾸 비틀거리는 것 같은데 얼마나 해댔으면 골반이 다 벌어지냐?”

“…….”

“근본 없는 집안 출신 애들은 원래 다 그런가 봐? 지조라는 게 없어서, 남편 있는 오메가인데도 자지만 크면 아무한테나 다 벌려주잖아.”

여원이 노골적으로 저를 무시하려는 것을 알아차리자 선준은 더욱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또박또박 복도를 나아가려는 여원에게 기다렸다는 듯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얼굴을 애써 보려 하지 않는데도, 선준이 뿜어내는 악의적인 기운이 형형하게 피부에 닿아오는 것만 같았다.

“하아…….”

찾고 있던 통키 사료를 간신히 들어 올리는데,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 이대로 3층으로 다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내려오지 않으면 돼. 그럼 안전할 것이다.

“이대로 쫓겨나면, 내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줄 알고? 전부 다 터뜨릴 거야. 둘이서 내 뒤통수 치고, 짐승 새끼들처럼 붙어먹은 거.”

“…….”

“하제헌 그 인간이 얼마나 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인데. 소문 퍼지기 시작하면 그때에도 널 품어줄 것 같아?”

“……흐, 으으…….”

제헌이 단단히 일러두었는지, 선준은 지금 이상으로 여원에게 가까이 다가오거나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잰걸음으로 계단을 향해가는 여원을 향해 가시 돋친 말들을 퍼부어댔다. 날것의 악의가 섞여든 말들은 단순히 청각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전해졌다. 코끝에 악취가 풍기고,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이 따끔거리고, 시야가 흐릿해지고, 혀끝에 텁텁한 맛이 번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이야 배 속에 지 새끼가 있으니까 잘해주겠지. 막상 낳고 나면, 알파 애새끼만 뺏어 가고 너 버릴걸? 친동생인 나도 손절 친 거 봐!”

차라리 선준이 헤픈 오메가라는 식으로 자신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헌의 본성이 잔악하기에, 금세 여원을 버리고 말 것이라는 악담에는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울컥거리며 흉곽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계속 듣지 못한 척 일관하려 했지만 어느새 여원의 얼굴에는 열이 뜨끈뜨끈 오르고, 눈물이 핑 고여들었다.

“하, 흐읏…….”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악문 이에는 금세 힘이 풀리고, 자기도 모르게 헐떡이는 숨이 터졌다. 잘못해서 사료를 떨어트리기라도 할까 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선준이 쫓아오지 못하는 걸 알고 있는데도 여원은 반쯤 뛰다시피 다급하게 계단을 타고 올랐다.

“하하, 히히, 히히힉!”

여원이 저로 인해 겁에 질린 걸 알아챘는지 선준이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웃는 듯 호방하게 터지던 웃음소리에 점점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여원의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났다. 최근 선준은 정말로 미친 사람만 같았다.

“내가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아? 어? 나만 빼고 둘이서 잘 먹고 잘살게 행복하게 내버려둘 것 같냐고?”

“…….”

“어림도 없지. 그래, 할 수 있을 때 지금처럼 눈 막고 귀 막고, 행복 회로나 핑핑 돌려보라고!”

쏜살같은 협박이 여원의 등줄기에 무차별적으로 내리꽂혔다. 단순히 실체 없는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선준이 저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여원은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키운 동생이어서인지, 제헌은 선준을 ‘그렇게까지’ 악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명령하면 선준이 군말 없이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원이 아는 선준은 좀 달랐다. 선준은 감정 기복이 심하고,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웠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합리적인 제안을 건네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충분히 물귀신처럼 붙들고 늘어질 수 있었다.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은 결국 그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흐, 으으…… 흐윽…….”

3층에 무사히 올라오자마자, 여원은 그대로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애썼지만, 끝내는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죽 흘러내렸다.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정말 선준이 말한 것처럼 만에 하나라도 제헌이 자신을 버릴까 봐 왈칵 두려워졌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끝까지 여원 씨를 놓지 않을 테니 이제 여원 씨는 나만 보면 됩니다.’

자신을 꼭 끌어안았던 단단한 품, 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를 떠올리며 제헌이 속삭이던 말을 생명줄처럼 붙들어보았다. 하지만 여원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제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이미 충분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데, 선준이 짐승처럼 저를 배신했다는 식으로 자극까지 해대자 정말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심장이 죄 시큰거렸다.

냐아…… 냐앙.

시무룩한 얼굴을 한 통키가 발치에 다가와서, 바닥에 축 늘어진 여원의 손등을 할짝할짝 핥아댔다. 통키를 품에 꼭 끌어안은 여원이 후, 하, 후, 하, 아득한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에는 조금만 끌어안으려고 해도 금세 호다닥 달아나버리던 통키였지만, 오늘만은 여원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품에 얌전히 안겨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니야, 여기서 내가 흔들리면 안 돼.”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굳건하게 버텨야 했다. 뺨에 고여든 눈물을 슥 닦아낸 여원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들고 익숙하게 제헌의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했다. 예전에 여원은 제헌의 얼굴만 봐도 잔뜩 주눅이 들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제헌을 향해 제법 당당하게 요구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네, 여원 씨.

듣기 좋은 중저음이 나지막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제헌은 원래 발음이 정확하고 말투가 딱딱 날카롭게 끊어지는 편이었지만, 여원에게만은 목소리의 결이 어느새 물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제헌 씨, 저 제헌 씨 너무 보고 싶어요.”

분명히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제헌은 통화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도 여원의 전화를 바로 받았다. 밑도 끝도 없이 보고 싶다 응석을 부려도 전혀 싫은 내색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여원이 귀엽다는 듯 희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도 우리 여원이 보고 싶네.

최근 제헌은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제가 여원에게 느끼는 마음을 감미롭게 표현했다. 불안감으로 빡빡하게 조여들었던 심장이 제헌의 말 한마디에 또 사르르 녹아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매 순간 옆에 있어주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네에…….”

선준의 말을 듣고 있으면 불안하다가도, 지금처럼 제헌이 저를 다독여주면 여원은 잠시나마 그를 의심했던 스스로를 탓하게 됐다. 늘 제헌의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고 싶었지만, 제헌은 회사 대표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분에 여원은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

“…….”

―혹시, 선준이가 3층으로 올라온 건 아니죠?

아무런 말 없이도, 단지 여원이 떨떠름하고 조마조마해하는 기색만으로 제헌은 금세 저택에서 께름칙한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역시 감이 뛰어난 남자였다.

“하아…….”

뭉글뭉글한 한숨을 푹 내뱉은 여원이 선준이 제게 퍼부었던 폭언을 되새겨보았다. 너무 저열하고 적나라해서 그를 제헌에게 낱낱이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성희롱적인 모욕이든 본연의 불안에 대한 자극이든, 정교하게 조형된 악담은 그 자체로 여원의 치부가 되어버렸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제헌 씨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

“…….”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네에…….”

―어려운 시기인데 의연하게 잘 버텨줘서 기특하고 고마워요.

핸드폰 너머로 전해지는 다정한 위로를 곱씹으며, 제헌은 보지 못하겠지만 여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헌 씨.”

―네, 여원 씨.

“이따가 오시면 저 꼭, 안아주세요.”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흔쾌한 애정을 마음속에 꼭 눌러 담고 길지 않았던 통화를 끊었다. 그래도 제헌의 목소리를 듣고, 여전히 변함없이 제게 쏟아져 내리는 애정을 확인하자 어지럽게 널뛰던 마음도 어느덧 안정되었다.

침실에 들어간 여원은 옷장에서 제헌의 셔츠를 꺼냈다. 빳빳하게 깃을 세운 흰 셔츠에서는 제헌의 체향과 페로몬이 훅 묻어났다.

“우응…….”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여원이 제헌의 셔츠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제헌의 흔적을 모조리 빨아들이려는 것처럼, 옷깃에 코를 파묻고 킁킁대던 여원은 금세 까무룩 잠이 들었다.

“으음…… 지금 몇 시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사위가 막막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컴컴해진 실내에서 주변을 가늠하기 위해 눈을 끔뻑거렸다. 조명이 꺼진 방 안에서 익숙한 물건들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제헌 씨?”

늦은 밤까지는 아직 아닌 것 같았다. 막연한 기대를 품고 본능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어보았지만, 아직 제헌은 귀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무룩해진 여원이 무릎께에 쓸려 내려가 있던 제헌의 셔츠만 더듬거렸다.

“하아.”

방 안의 공기가 건조해서인지, 잠에서 깨어나자 목구멍이 따끔따끔 타들어갔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여원이 방 밖으로 나섰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릴 때마다 오래된 나뭇등걸과 마찰하는 소리가 삐걱삐걱 번졌다.

부엌에서 텀블러에 물을 가득 채운 여원이 비척비척 복도를 걸어나갔다. 다시금 침실로 돌아가는 길목, 그 바로 옆에 자리한 3층 서재를 지나칠 때였다.

언제나처럼 굳건히 닫혀 있는 문틈으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3층에 여원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찝찝한 마음에 서재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거칠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아직 제헌은 저택에 돌아오지 않아서, 여원은 오롯이 혼자였다. 극심한 공포가 휘몰아쳤다.

“흐, 허억, 흐익!”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나무문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서는 정체불명의 신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3층 서재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던 제헌의 경고가 떠올랐다. 뭐지, 저 안에 괴물이라도 살고 있었던 건가?

“흐읍…….”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숨을 겨우 삼켜냈다. 여원은 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물러서야 한다는 경고가 머릿속에 뎅뎅 울렸다. 하지만 동시에 본능적으로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쨌든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아랫입술을 꽉 깨문 여원이 문고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리고, 아주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바짝 가져다 댔다. 가느다란 틈새로 어떻게든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려던 찰나였다.

“헉, 허억, 형수…….”

헐떡임 사이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수라고? 시커먼 형상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안에 있는 것은 선준임이 분명했다.

“형수, 하아, 허억, 흐, 좋아, 형수…….”

비릿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눈을 거세게 깜빡인 여원은 어둠 사이로 드러나는 광경에 경악했다. 사방이 까맣게 내려앉은 와중에 반쯤 까뒤집힌 눈동자만 희번덕거렸다. 짙은 그림자가 몸통 아래 부근에서 거칠게 들썩거렸다. 선준이 형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위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지나친 충격과 공포로 사고가 온통 마비되었다. 일단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에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긴장으로 땀이 고인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삐거덕, 문고리가 크게 돌아갔다.

“형수, 흐으, 거기 있는 거 형수 맞죠?”

“헉!”

덩달아 서재 문이 활짝 열리면서 검은 인영이 홱 튀어나왔다. 들짐승같이 무거운 것이 쏜살같이 덮쳐 와, 여원은 그대로 나무 바닥에 고꾸라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흘러내렸다.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딱딱한 덩치가 여원을 압살할 기세로 무겁게 짓눌러왔다.

“흑, 흐익! 선준아!”

무거운 물체에 깔린 여원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막연하게 감지해 오던 위험이 현실이 되는 순간 여원은 그대로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신 줄을 꼭 붙들어야만 했다.

“선준아, 잠깐 이것 좀 놔봐!”

대체 언제 3층까지 올라와, 서재에 숨어들어 있었던 거지? 실체가 뚜렷해진 공포를 어떻게든 걷어내려고 했지만, 마른 몸 어느 곳에서 초인적인 힘이 솟아나는 건지 선준은 좀처럼 여원에게서 밀려나지도 않았다.

“힉, 히힉…….”

그러나 선준은 여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이 섞여든 쇳소리만 그르렁 내뱉을 뿐, 대화의 의지라는 게 조금도 없어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는 초점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형수, 사실은 나를 좋아하는데 형 때문에 나에게 오지 못하는 거죠?”

킁킁, 여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선준이 페로몬을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을씨년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들쑤시자 여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올랐다.

“분명히, 나 보고 웃어줬잖아. 형이랑은 다르게, 나한테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줬잖아.”

“선준아, 나 여원이야,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조금만 기다려요, 형수. 내가 형한테서 구해줄게요. 형수, 형수도 내가 좋죠?”

“흑, 허어억!”

어떻게든 선준이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여원이 짓눌리던 팔을 뻗어 선준의 뺨을 때리려 했다. 하지만 선준은 퍼덕거리는 여원을 가뿐하게 제압하고는, 그대로 옭아매듯이 여원의 온몸을 내리눌렀다.

“빨리 대답해!”

스멀스멀 기어오던 손바닥이 여원의 셔츠 단추를 매만졌다. 선준은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입을 헤벌리고 힉힉 웃어대고 있었다. 이대로 강간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반쯤 열린 3층 서재의 문틈에서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찐득찐득하고 스멀스멀하게 넘쳐흐르는 추저분한 냄새가 그대로 여원을 잠식시킬 것처럼 온몸을 뒤덮어왔다.

“윽, 아니야, 아니라고, 저리 꺼져!”

“대답해! 대답하라고!”

여원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선준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팔다리를 휘두르는 몸짓이 거세지자, 그것을 거부의 의사로 받아들인 것인지 흐릿하게 풀린 선준의 동공에 형형한 노기가 돋아났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선준이 양팔을 뻗어 여원의 목을 붙들었다.

“흐, 으아아!”

목을 틀어쥔 채, 덜덜 떨리는 손목에서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이대로 목이 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코앞에 들이밀어진 선준의 얼굴이었다. 분노와 열등감, 좌절로 온통 찌들어 있었다.

컁!

그때, 바닥 위에 어지럽게 얽혀든 두 사람에게 검은 털 뭉치 같은 것이 날래게 달려들었다. 선준의 등 위로 올라탄 통키가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목덜미 뒤쪽을 죽 긁어내렸다.

“에이, 씨발!”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긴 선준이 등에 올라탄 고양이를 쫓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었지만, 여원의 목을 조르려던 선준의 행동을 잠시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헉, 허억…….”

선준의 몸이 잠깐 떨어진 사이 여원이 그동안 참아왔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그때, 바닥에 나동그라진 텀블러가 여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입술을 짓이기듯 깨문 여원이 금속 텀블러를 잡아채, 그대로 선준의 머리를 세차게 가격했다.

“끄어억!”

갑작스러운 타격에 선준이 뒤로 푹 고꾸라졌다. 비틀비틀 기어가다시피 한 여원이 간신히 선준에게서 벗어났다. 단순히 몇 미터의 거리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저릿한 안도감이 퍼졌다.

“하, 하아…….”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데 성공했지만, 완력으로 따지면 여원은 도무지 선준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선준은 정말이지 미친 사람 같아서, 다시금 선준이 제게 달려들면 어떻게 당해내야 할지 눈앞이 까마득했다.

“……어어?”

그렇게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바닥에 엎어진 채인 선준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대로 몇 분이 지났을까, 여전히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선준은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여원의 발치로 다가온 통키가 샛노란 눈을 깜빡거렸다. 혹시 함정인 건가, 불안해하며 여원이 슬금슬금 선준에게 다가갔다. 쿡쿡, 늘어진 몸에 손가락을 찔러보던 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선준은 어느새 고롱고롱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리며 전신에 저릿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좀처럼 지금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아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여원은 허탈한 기분에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냐아!

모두가 맥없이 널브러지고 만 음산하고 적막한 저택에 검은 고양이가 울어 젖히는 소리만 날카롭게 울려 펴졌다.

“흐, 후으…….”

일단 급박한 위기에서 벗어나자 한발 늦게 밀려드는 탈력감으로 팔다리에 힘이 죄 풀어져 내렸다. 꼿꼿하게 세운 꼬리를 붕붕 흔들어대는 통키가 여원의 주변을 맴돌았다. 냐아냐아, 보채는 듯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연이었지만 여원은 좀처럼 정신을 온전히 차릴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밀려들어, 날카로운 직감이 난폭하게 몰아쳤다.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그동안 무심코 묻어두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선준이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던, 폭풍우 치던 밤.

그때에도 선준은 지금처럼 의식이 불투명한 채로 여원을 덮치려 들었고, 다음 날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선준에게 몽유병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다고 넘어갔지만,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어쩌면 저택의 비밀과 얽힌…….

“하선준 미친놈……. 대체 3층 서재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제헌이 출입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던 3층 서재. 지금까지는 안에 숨겨진 것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제헌의 치부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이제야 그 안에서 벌어진 사건은 선준의 소행일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너무너무 무서워…….”

몸을 작게 웅크린 여원이 무릎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 자리에 단단하게 고정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멀게 펼쳐진 시야에는 여전히 볼품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선준의 모습이 보였다. 야옹, 야옹, 통키가 위로하듯 여원 근처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까슬까슬한 혀가 바닥을 힘주어 내리누르는 손가락 사이를 할짝할짝 핥아댔다.

“여원 씨, 이게 대체 무슨…….”

쿵쿵,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급하게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제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여원은 집으로 돌아온 제헌을 보고도 몸을 일으키거나 인사를 하지 못하고,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로 눈꺼풀만 맥없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고롱고롱, 잠들어 있는 선준이 코를 고는 소리가 나지막한 노랫가락처럼 울려 퍼졌다.

“제헌 씨이…….”

제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제헌은 그대로 여원을 푹 끌어안고는 오래도록 억눌린 감정을 토해내듯 벅찬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높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페로몬이 여원을 에워쌌다. 제헌의 목덜미에 코를 푹 파묻은 여원이 규칙적으로 분사되는 페로몬을 들이마시면서 너른 품 안에 차츰차츰 안겨들었다.

“여원 씨, 몸은 괜찮아요?”

“흑, 네에……. 네, 아무 일도, 흑, 없었어요.”

“하…….”

“통키가, 저를 도와줘서……. 흐, 그래서 저는 괜찮은데…….”

가까워진 제헌의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크게 놀란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제헌이 여원의 얼굴과 몸 곳곳을 쓸어내리며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여원의 말에 제헌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 여원이 흘긋, 바닥에 널브러진 선준을 건너다보았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싫어지는 순간은 처음입니다.”

제헌도 여원을 따라 잠들어 있는 선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으드득, 이를 악문 제헌이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여원이 설명하지 않아도 왠지 제헌은 방금 전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꼭, 이전에 이미 비슷한 사건을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오는 길에 내내 연락을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크게 걱정했는데…….”

“…….”

“성인이 된 후로는 선준이 상태가 안정적이어서, 이런 일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전부 내 불찰입니다.”

이윽고 드러난 제헌의 얼굴은 자괴감에 휩싸여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제헌은 제가 지켜야 하는 여원이 잠깐이라도 위험해졌다는 사실에 크게 괴로워했다.

여원은 제헌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선준이 반쯤 미쳐가고 있었는데, 안정적인 상태라는 표현이 못내 이상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역시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야말로 꼭 확인해야 했다. 제헌을 또렷하게 응시하며 여원이 입술을 느릿하게 달싹였다.

“저한테 말씀해 주시기 싫은 것은 이해해요. 그렇지만…… 저도 과거에 이 저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하…….”

“선준이한테 몽유병이 있는 건가요? 3층 서재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거친 숨을 길게 몰아쉰 제헌의 얼굴이 다시금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정체불명의 유전병이 있습니다.”

“……유전병, 이요?”

여원은 언젠가 보았던 유언장 구절을 떠올리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도, 보통은 그런 말까지 유언장에 포함시키지는 않을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저택에 대한 삿된 소문이 돌지 않도록 막으라고 했던 것이…….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증상은 완화되지만, 의학적으로 구체적인 병명을 꼽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아아.”

“잠결에 의식이 없는 채로 이상한 짓을 저지르거나, 피해망상처럼 기억이 훼손되거나 하는 일이 반복되어 집안에서는 일종의 광증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원래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지만, 선준은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유난히 기이한 행동을 저질렀다. 그게 광증으로 인한 발작 때문이었다니……. 혹시 그래서 제헌이 선준이 어렸을 때 밤에 몸을 묶어두었던 것일까.

“저택에 내려오는 저주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대대로 자식 중 하나에게 비슷한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

“윗세대에서는 내 어머니였고, 이번 세대에는…… 선준이었죠.”

다음 말은 입 밖으로 내어지지 않았지만, 여원은 그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선준이 아니었다면, 광증은 제헌에게 발병할 수도 있었다.

“아…… 그래서.”

단순히 책임감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매사에 칼 같은 제헌은 선준을 가뿐하게 제압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묘하게 무르게 굴었다. 그때마다 제헌의 새까만 동공에 스쳐 가던 낯설고도 스산한 빛의 정체는 동생에 대한 부채감이었을까.

“혹시…… 예전에, 저택에서 있었던 큰 화재라는 것 말이에요.”

바싹 마르는 입 안을 간신히 축여낸 여원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타인의 치부를 들쑤시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헌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게 되었다는, 형을 향한 선준의 원망의 시발점이었던 저택의 화재 역시 유전병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선준이에게 광증을 물려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선준이를 더욱 밀어냈습니다. 십대가 된 선준이가 공황 발작으로 시설에 잠시 입원하고 나서는, 자괴감으로 어머니의 증세도 더욱 심해졌고요.”

“……아.”

“발작이 난 상태에서, 어머니가 한밤중에 선준이 방에 불을 질렀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깨어났을 땐 이미 늦어서, 큰 화재로 번진 이후였죠. 화염의 한복판에서 아버지는 스스로를 희생하고 저를 살리기를 택했고요.”

이제야 여원은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사실은 모두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 선준이 부모님은 형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왜 제헌이 형 때문에 부모님이 죽어버렸다는 선준의 가시 돋친 원망을 받아내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동생인 선준에게만은 타고난 성정처럼 냉혹하게 대할 수 없었던 제헌의 속이 그동안 한참은 문드러졌을 게 뻔했다.

“제헌 씨…….”

“괜찮습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제헌은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가 혼자서만 아픔을 억눌러왔던 지난한 세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보다 한참은 크고 단단한 남자가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져 여원이 제헌을 푹 끌어안았다.

“물려받은 저택을 지키면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나가는 것이 남은 평생에 내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

“회사를 수습하기 위해 이른 나이에 정략결혼을 하고, 전처와 함께 선준이를 길렀습니다. 선준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게 마땅히 내 책임이었으니까요.”

“…….”

“나중에 가업 승계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내가 아이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르니, 직계 가족인 선준이가 부디 잘 자라주기를 바랐습니다만.”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제헌이 바닥에 널브러져 드르렁 코를 골아대는 선준을 흘긋 쳐다보았다. 제헌의 성격상 살갑게는 못 굴더라도 그래도 동생을 책임감 있게 보살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어린 나이에 잃고 애정결핍과 피해 의식이 생겨난 선준은 형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서 성격파탄자로 성장해 버렸다.

제헌은 부러 자세한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여원은 제헌이 그가 어떤 마음인지, 어쩐지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선준은 제헌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실패는 아니었을까.

“제헌 씨…….”

새삼 제헌이 저밖에는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매도하던 선준의 비난이 떠올랐다. 그 외침은 얼마나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지. 여원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혼자서만 감당해 왔던 자신의 알파를 응시했다.

“여원 씨에게 처음부터 말해주지 못한 것,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집안의 치부이기에 쉽게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원 씨가 이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여서 더욱 그랬고요.”

제헌은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여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자신과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여원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고, 지독히도 가지고 싶어졌고, 끝내는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선준이 키워왔던 게 망상과 피해 의식이었다면, 운명의 장난처럼 여원을 만난 이후 제헌은 태어나 처음으로 실제로 동생의 것을 탐하게 되었다.

“선준이랑 그 형수라는…… 제헌 씨 전처분이랑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

“…….”

“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원 씨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아…….”

얼굴을 냉랭하게 굳힌 제헌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많은 의문이 풀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찝찝한 것들이 남아 있었고 여원은 그 이상을 알고 싶었다.

“어떤 사실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고통스럽죠. 그것들을 무작정 까발리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 아닐까요?”

“그렇지만, 제헌 씨…….”

제헌의 태도는 바늘로도 찌를 틈 없이 완고해 보이기만 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제헌이 지키는 자존심의 영역이라고도 느껴졌다. 부모님과 저택에 얽혀든 불행한 과거사까지 낱낱이 밝혀냈지만,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여원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 했다. 아무리 여원이 부탁하더라도, 그것까지 들어주지는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알게 되어봤자 서로를 할퀴기만 할 진실이라면, 덮어둔 채로 지나가는 게 낫습니다. 나는 혼자서 감당하는 일에는 충분히 익숙하니까요.”

제헌은 이번에도 여원을 위해 모든 걸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려 했다. 언제나 여원을 통제하고 보호해 왔듯이. 제헌이 드리우는 안온한 테두리는 여원에게 더없는 안정감을 선사했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혼자서 견디는 것이 익숙하다 이야기하는 제헌 역시 마냥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내가 선준이를 모질게 대하지 못해서, 여원 씨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너무나 미안합니다.”

“…….”

“하지만 내 사람을 해치려 드는 이상, 더는 선준이를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 * *

“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서재 바로 앞에 철퍼덕 고꾸라져 있던 선준은 아침에 가까워진 시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퉁퉁 부어버린 눈을 끔뻑거렸다.

“하…….”

역시 지난번처럼,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선준을 바라보자니 여원은 허탈하면서도 씁쓸해졌다. 반면 그 옆에 선 제헌은 서늘한 무표정으로 성성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하선준, 옆에 있는 캐리어 챙겨라.”

“어, 어? 뭐라고?”

밤사이 제헌은 선준의 짐을 전부 꾸려놓았다. 자신의 옆에 있는 큼직한 캐리어를 보고 선준은 당최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장 집에서 나가서 며칠 지내기에는 충분할 거다. 나머지 짐은 갈무리해서, 새 주소를 알려주면 보내주도록 하지.”

“뭐야, 형, 나 진짜 이 집에서 쫓아내는 거야?”

불안해하는 선준이 아이처럼 제헌을 올려다봤다. 지금까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그를 봐주어서인지, 선준은 정말로 제헌이 제게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저택을 나가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평소처럼 대충 뭉개며 위기를 모면하려던 선준이 크게 당황했다.

“싫어,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어딜 가? 형은 어쩌면 그렇게 형밖에 몰라?”

“하…….”

“나도,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지내던 추억이 전부 이 저택에 있단 말야. 형한테만 소중한 공간 아니야, 난 절대 못 나가!”

선준의 입에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제헌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유언장에서 우애 있게 지내라는 말과 함께 재산을 반반으로 나눈 것을 보면, 아버지는 사실은 두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했을 테다. 그 뜻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헌은 지금껏 온갖 만행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보살펴왔지만, 그러한 인내도 이제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지만 이 저택의 주인은 나다.”

선준이 아이를 가진 여원을 위협하기 시작한 이상, 제헌 역시 더는 선준을 향한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졌다.

“3층에 올라오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했었지. 그런데도 너는 보란 듯이 형 말을 어겼어.”

“그치만, 형…….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나도 내가 왜 3층에 있는 건지 모르겠어.”

“하선준 넌 항상 내가 널 성인으로 대해주길 바랐지. 그러면 이유를 막론하고, 이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지?”

“형, 혀엉…….”

“너한테는 결정권이 없어, 내가 말하면 따르는 것 외에는.”

선준이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전까지는 억지를 부리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대면서 패악질을 부렸다면, 정말로 궁지에 몰리자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유약한 모습을 내비쳤다. 그런 동생에게 간밤의 일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제헌이 베푸는 마지막 배려 같았다.

“형…….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그래도, 우리…… 형제잖아. 이렇게 나 쫓아내고, 정말 죽을 때까지 안 보기라도 할 셈이야?”

“하…….”

“집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때까지만이라도 머무르게 해줘. 한겨울에 밖으로 나앉을 수는 없잖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선준이 제헌에게 애원했다. 제헌은 선준을 양육했지만 선준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에 합당하게 자라나지 못했다.

“형 그런 사람 아니잖아. 우리는 가족이잖아.”

이도 저도 안 되자 선준은 인정에 호소했다. 그런 선준을 내려다보는 제헌도 썩 마음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고 해도 용인할 수 있는 행동에는 명확한 한계선이라는 게 있었다.

처음부터 선준이 스스로의 결핍과 모자람을 인정하고 제헌에게 보호를 요청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지 몰랐다. 그러나 형을 향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날뛰던 것으로도 모자라, 재산까지 빼앗으려고 몰래 계략을 꾸미던 선준이었다. 모든 게 다 들통이 난 후에 이제야 가련한 척을 해봐야 그 행동이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집 구할 시간 충분히 줬고, 더 이상은 인내할 수 없다. 호텔에서 생활해라.”

그렇기에 이번에 선준을 잘라내는 제헌은 칼같이 단호했다. 가족으로서 먼저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은 선준인 데다, 제헌이 책임감을 느끼는 가족은 이제 선준이 아닌 여원과 배 속에 있는 자신의 아이였다.

“강여원, 너도 진짜 나 아예 버리는 거야?”

급기야 선준은 얼굴이 희게 질린 채 제헌 옆에 서 있는 여원에게까지 간청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여원을 모욕하거나 비난하지도 못하고, 반쯤 넋이 나가서는 덜덜 떨고 있었다.

여원에게 선준을 동정하거나 이해할 만한 단계는 이미 지나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저택에 얽혀든 불행의 역사와 선준의 병증에 대해 알게 되자 여원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연민이라고 하기에는 덧없는 씁쓸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이었다.

“정말…… 정말 이대로 다 끝이냐고?”

“하아…….”

선준은 얼굴도 번듯하고, 머리도 나쁘지 않고, 학교에서도 적당히 인기 있었다. 연애 시절 선준의 좋은 자질도 많이 봤기에 여원은 더욱 심란했다. 많은 걸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데, 타고난 유전병은 차치하더라도 왜 저렇게 나쁜 선택만을 해서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걸까 싶었다.

“미안해, 선준아.”

그러나 사람을 도우려는 일은 때로는 밑바닥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손을 건네는 사람까지 진창으로 끌어당긴다. 그런 사람을 구하려고 하다가는 자신 역시 잠식될 수 있기에,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이 결국에는 서로를 위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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