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태고지
쑤웅― 스산한 바람 소리가 한 번씩 묵직하게 울릴 때마다 창밖에서는 가련하게 헐벗은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오들오들 떨어댔다.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분홍색 망울이 곳곳에 돋아나 있었지만, 실제로 피어날 것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가장 춥고 고된 겨울날은 지나갔어도 봄이 찾아올 날은 아직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 슬슬 날씨가 풀리는 것 같네.”
겨울에 접어들어 움직임이 부쩍 굼떠진 통키가 여원의 무릎 위에서 까무룩 잠들어 있었다. 창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여원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이따금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줄기를 쓰다듬어 내릴 때였다.
“야, 강여원.”
“…….”
“너 요새 좀 살 만하냐?”
쿵쿵, 퉁명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갑자기 들이닥친 선준이 삐딱한 질문을 던졌다. 까딱 고개를 들어 올린 여원의 얼굴이 새초롬했다. 그러잖아도 심란한 와중에 왜 이 자식까지 와서 시비를 걸어대나 싶었다.
“뭐라는 거야.”
듣는 둥 마는 둥 받아친 여원이 다시금 고개를 창밖으로 팩 돌려버렸다. 통키도 그런 여원을 응원한다는 듯 컁! 컁! 날카롭게 울어 젖혔다.
“에잇, 이 재수 없는 고양이 새끼가 어딜?”
“남의 고양이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마.”
선준이 저택으로 돌아온 지도 이제 3주일이 지났다. 중국에서 들어오자마자 선준은 박살 난 결혼을 접붙이기 위해 불쌍한 척 여원을 회유하려 들었다. 하지만 선준이 대학교에 어떤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는지 알게 된 이상, 여원은 더는 제게 다가오려는 선준을 용인할 수 없었다.
‘나같이 가난한 집 오메가랑 얽히기 싫어서, 일부러 더 조심했다며. 이혼하는 게 차라리 너한테 더 잘된 일 아냐?’
‘너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와서.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전부 다 오해야,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처음 동기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여원은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허를 찔린 듯 크게 당황하는 선준의 반응을 보며 최초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속셈이 드러난 후에도 선준은 여원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에만 짜증스러워했다. 여원이 단호한 태도로 선준을 대하자, 더 이상은 제 뜻을 마구잡이로 밀어붙이기가 글러 먹었다 판단했는지 최근 들어 부쩍 저택 밖으로 나돌아다녔다.
“이야, 이제 그런 말도 막 할 줄 알고, 네가 요새 인생이 정말로 편하긴 편한가 봐?”
“그렇게 보인다니 놀랍네. 네가 나랑 이혼만 해준다면 실제로도 살 만해질 것 같은데 말야.”
“워, 워어―.”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맞받아치자, 선준이 제법 놀랐는지 일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원도 선준과 이혼 생각을 하면 여전히 머리가 아프기는 했다. 그러나 여원은 예전처럼 선준이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인생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확고해지자 선준에 대한 감정은 단절되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한번 흔들어보려는 선준의 빤한 의도가 들여다보이니 그가 원하는 것을 쉽게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선준에게 이런저런 관심을 쏟을 새도 없이 여원에게는 훨씬 중대한 고민거리가 생겨나 있었다.
‘이것만 잘 먹으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죠?’
‘대체로는 그렇습니다. 뭐, 상대 알파가 환자님께 각인을 한 것이 아니라면요.’
‘아…….’
‘오메가와는 정반대로, 알파는 우성일수록 번식이 까다로워지는 건 사실입니다만…… 우성 알파가 자기 짝으로 인지한 오메가에게 각인을 한 상태라면, 사후대처라는 게 의미가 없어지는 수준이죠.’
그날 밤에는 제헌도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알파 특유의 소유욕과 집착으로 가득했던 섹스가 마침내 끝에 다다르자 제헌은 자신이 여원에게 노팅했다는 사실에 아연해했다. 깔끔한 태도로 거친 섹스에 대해 사과하고는, 널브러진 여원의 몸을 수습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후로 제헌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노팅에 대해서도, 혹시 모를 임신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화한 적이 단 한 번 없었다. 내내 초조해하던 여원은 결국 혼자서 사후피임약을 처방받기를 결정했다.
아직 여원은 선준과 법적으로 혼인한 상태인 데다, 제헌과의 미래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제헌이 제 씨를 뿌리고 간, 아직 판판하기만 한 아랫배를 내려다볼 때마다 심란함에 젖어들었다. 그렇지만, 제헌이 자신에게 각인했을 리는 없으니까…….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볼 뿐이었다.
“뭘 또 그렇게 예민하게 굴고 그래, 너 예뻐졌단 얘기야.”
“하…….”
“결혼하고 나서는 매일 죽상이라 보는 사람까지 축축 처지게 하더니, 요새는 얼마나 보기 좋냐, 어?”
“너도 참…… 칭찬이랍시고 사람 기분 이렇게까지 망치는 것도 재능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인데? 할 말 있어서 나한테 온 걸 거 아냐?”
“하. 그래, 우리가 뭐 사사롭게 안부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니기는 해, 그지?”
최근 선준의 신경은 여원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온통 팔려 있었다. 다만 무엇 때문에 밖을 들쑤시고 다니는지는, 선준과 거의 대화하지 않는 여원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역시 단순히 시비를 걸기 위해 눈앞에 얼쩡거리는 것은 아닐 테다.
“본론부터 얘기할게. 너, 오늘 나랑 잠깐 서울 좀 다녀오자.”
“뭐? 내가 너랑 어디를 가는데?”
“가 보면 알 거야.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선준이 당당하게 여원에게 자신과 같이 외출할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제법 비장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여원이 얕게 코웃음 쳤다.
“내가 너랑 서울을 왜 가는데?”
“하하. 여원이 너 좀 귀엽다. 그동안 그렇게 난리 친 거, 밖에 나가고 싶다고 그런 거 아니었어?”
“휴.”
“왜, 막상 나갈 때 되니까 또 내 말에는 싫다고만 하고 싶어?”
평소였다면 씨알도 안 먹힐 제안이었다. 선준이 제대로 짚은 것처럼, 여원은 이제 선준이 바라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든 해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선준의 감시가 느슨해진 것을 틈타, 요새 여원은 제헌에게 부탁해 가끔 밖에 나갈 수도 있었다.
“인상 쓰지 마, 농담이야.”
“하…….”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너 성질 긁으려고 그러는 거 아냐. 일단 도착해 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데. 선준이 제게 숨기는 것의 정체가 궁금했을뿐더러, 최근 들어 여원은 짤막한 밀월 생활이 멎고 급격하게 단조로워진 일상이 심심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언제나 바깥 일로 바빠서 대화할 시간조차 제대로 없는 것은, 선준뿐만 아니라 제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알았어.”
여전히 제헌을 믿고 있었지만, 조금쯤은 방치당한다는 기분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여원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헌에게만 의존하는 대신, 제 나름으로도 정보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 * *
차가 멈춘 곳은 강남 한복판에 있는 고층 건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변호사 사무실 간판이 즐비해 있었고, 실제로 선준과 함께 들어선 실내도 대형 로펌이었다.
선준이 데스크에서 짧게 대화를 나누더니, 직원이 여원과 선준을 복도를 따라 안내했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다다른 가장 구석진 방의 문패에는 ‘법률 고문’이라는 직함이 적혀져 있었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은 채, 여원이 선준을 따라 개인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선준 도련님.”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올라와 있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큼지막한 중역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눈에도 거동이 썩 편해 보이지는 않는데도, 선준을 보고는 어색할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선준은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대며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인사해, 여원아. 이쪽은 우리 가문 전담 변호사야.”
“…….”
“아, 정확히는 ‘구’ 가문 전담 변호사지. 하제헌이 저택과 가업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우리 가문을 위해 누구보다 애써주신 분이야.”
선준은 아주 편안한 공간에 도착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선준이 느닷없이 형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자 여원이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리고 요즘에도 내가 응당 되찾아야 할 것들을 무사히 가져올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계시지.”
“과찬이십니다, 선준 도련님. 돌아가신 선대인께 제가 입은 하염없는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 아드님이신 도련님께 이렇게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 얼마 안 남은 이 늙은이 인생에 다시 없을 보람 아니겠습니까.”
와, 아부 한번 끝장나게 하네.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유려한 강물처럼 멘트가 흘렀다. 늙은 변호사가 잔뜩 굽신거리자 여원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한때 집안을 위해 일했던 사람이라기에 두 사람은 현재에도 상당히 친숙하고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되찾아야 할 것이라니……. 혹시 둘이서 무슨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여원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선준 도련님 배우자 되는 분이시지요?”
“네. 강여원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러잖아도 도련님께 좋은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실물이 훨씬 아리따우시네요.”
“아, 하하.”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아리땁다는 표현이 영 거북스러워 여원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이어 변호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원을 훑어내리자 목덜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선준이 여원에 대해서 좋은 말을 했을 리 없는 데다, 구세대는 열성 오메가에 대한 편견이 더 심한 편인데 가식을 잘도 떨어대는구나 싶었다.
“이봐, 나 안경 좀 갖다 줘.”
“네, 고문님.”
소파에 털썩 몸을 눕힌 노인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비서를 불렀다. 선준 앞에서 과하게 몸을 낮추던 것과 대조적으로, 실제로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는 당연하게 하대하는 데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수더분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여원은 왠지 모르게 음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큼큼, 한동안은 이 방 근처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출입 통제하고.”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잰걸음으로 물러나자 널따란 개인 사무실에는 변호사와 선준, 여원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긴장으로 뾰족뾰족 곤두섰다. 혀끝에 닿는 공기가 텁텁하게 느껴졌다. 여원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물론 여원 씨도 선준 도련님께 대강의 말씀은 전해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대강의 말씀이라니, 여원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무언가 수상쩍은 일에 연루되는 기분에 옆자리에 앉은 선준을 홱 돌아보았지만, 선준은 모른 척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 뻔뻔한 낯짝을 보자 견적이 딱 나와 한숨이 푹 터졌다. 자기가 하기 껄끄러운 일이니 또 어영부영 다른 사람한테 미루려는 심산이었다.
“그래도 서로 간에 오해가 없도록, 명확한 언어로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변호사는 신중한 얼굴로 열쇠를 꽂아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고 낡은 철제 서류 가방을 꺼냈다. 한눈에도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숨겨지지는 않았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자, 둔탁하게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서류 가방의 아가리가 벌어졌다.
“아…….”
안에 담긴 색이 바랜 문서 중앙에는, ‘사본’이라고 붉은 궁서체로 도장이 찍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합법적으로 확보한 사본이 아닐 것만 같다는 짐작이 들었다.
“읽어보시지요.”
“이게 뭐죠?”
“선대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남기신 유언장입니다.”
[유언장]
유언자 하목영은 이 유언서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유언한다.
가. 가족에게 전하는 말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화장을 해달라. 형 제헌은 본인 사후에 저택에 대한 삿된 소문이 돌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동생 선준을 정성껏 보살피며 서로 우애 있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
나. 재산분할에 대하여
1. 장남 하제헌에게는 유언자가 소유하고 있는 저택과 별첨에 상술하는 금융자산 중 총 50%를 상속하게 한다.
2. 차남 하선준에게는 대학교 졸업 이후 금융자산 중 나머지 50%를 상속하게 한다. 그 이전까지는 하제헌이 하선준이 상속할 유산을 전적으로 관리한다.
* 단, 대학교 졸업 이전에 하선준이 아이를 낳아 분가할 경우 앞당겨 유산 상속이 가능하다.
다. 경영권에 대하여
1. 유언자의 사망 시점에 장남 하제헌을 유언자가 경영하는 주식회사 성운케미컬의 임시 후계자로 지정한다. 하제헌은 알파인 직계 후손을 확보하는 시점에 정식 후계자로서 회사를 완전히 상속한다.
* 하제헌이 만 40세까지 정통성 있는 후손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회사는 하선준이 대신 상속한다.
“아이를 낳아 분가하면…… 유산을 상속할 수 있다고.”
유언장의 핵심 내용을 곱씹은 여원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선준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자신을 이용하려던 거였구나.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하자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지고 얼얼하게 울렸다.
그제야 여원은 왜 선준이 콘돔에 구멍까지 뚫어가며 자신을 임신시켰는지 이해가 갔다. 처음부터 아이에게는 관심조차 없었으면서 여원이 유산했을 때 노발대발한 이유 역시도.
그동안 미심쩍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의 완성된 퍼즐로 딱딱 맞물렸다. 그리고 이제 와서 여원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도, 결국에는 제헌에게서 재산을 뜯어내기 위함이겠지.
“하…… 하선준 진짜.”
그런데 얘는 이제 뒤 구린 구석을 숨겨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건가? 말도 안 되게 뻔뻔한 선준의 태도에, 저를 뭐로 보는 건가 싶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걸 대체 저한테 왜? 게다가, 저한테 보여주셔도 되는 문서인 거 맞아요?”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여원이 유언장 사본을 테이블 위로 내던지다시피 했다. 여원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자, 사람 좋은 척 굴던 늙은 변호사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아. 도련님께서 여원 씨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신 게 아니셨나요?”
여원의 포섭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언장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불쾌했는지, 변호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선준을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둘이서 작당하고 있었던 걸까? 그제야 여원은 중국에서 선준이 느닷없이 가족관계증명서와 등본을 떼어 오라고 한 것이, 변호사와 논의하기 위해서였는지 궁금했다.
“어차피 제가 미리 얘기 안 해도…… 얘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잖아요. 잘 협조할 거예요, 그렇지?”
“내가, 너한테 협조를 한다고?”
“헛허허. 그렇지요, 그렇지요. 이 늙은이, 평생을 상부상조를 원칙 삼아 살아왔으니까요.”
“…….”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흘러가야 지당한 법 아니겠습니까?”
늙은 구렁이 같은 변호사는 예민한 기색을 재빨리 지워내고는 금세 유유하게 웃어 보였다. 내내 제헌과 여원의 관계를 추궁하더니, 이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자신을 끌어들이려 하다니. 선준의 지능이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선준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원이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것도 마저 보시고.”
“이건 또 뭐죠?”
“임신이 될 때까지 시험관 아기 시술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에 동의하겠다는 각서입니다. 큼, 이게 정식 계약서까지는 아니니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고요. 상호 간 입장을 명확하게 공유하는 차원이다, 뭐 이 정도로만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여원이 시험관 시술을 통해 선준의 아이를 임신하고, 알파가 태어나면 그와 관련된 친권을 모두 선준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사자인 여원만 빼놓고서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이미 이야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여원은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해졌다.
“하선준, 이게 대체 무슨 얘기야. 내가 왜 시험관 아기를…… 시도한다는 각서에 사인을 해?”
“어차피 너 네 몸에 내 손끝 하나 닿는 거 치 떨리게 싫어하잖아. 그런데 나는 유산을 얻어내려면, 빌어먹을 애새끼가 필요하다고. 이렇게 하면 서로 편하지 않겠어?”
“그래서…… 네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나보고 네 아이를 임신하라는 거야?”
“그렇게 혐오스럽다는 표정 하지 마. 애초에 여원이 네가 칠칠하지 않게 애 유산하지만 않았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이유도 없었어.”
“그걸 내가 왜 해야 하는데? 너도 지금쯤이면 내가 너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너만 좋은 일을 왜 해줘야 하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역시 선준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여원을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선준 단 한 명뿐이었다.
“여원아, 릴랙스, 릴랙스. 진정 좀 해, 나 혼자서만 좋은 일일 리가 없잖아?”
“하…….”
“너 협박하려고 여기 데려온 거 아니야. 우리 지금 협상하는 거야.”
“…….”
“이 각서에 사인하면, 너랑 이혼해 줄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원은 심장이 바닥 끝까지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루빨리 제 삶을 옭아매는 족쇄를 떨쳐 버리기를 간절히 갈망했지만, 선준의 합의 없이는 열성 오메가인 여원은 이혼이 불가능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자유의 잔상에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오싹 돋아올랐다.
“그것뿐이야? 무사히 착상해서, 애까지 낳아주면 보상금을 줄게. 너네 구질구질한 집안에서는 평생을 일해봐야 만져보지도 못할 만큼의 돈을 주겠다고.”
“하…….”
“너는 원하는 대로 이혼도 할 수 있고, 앞으로는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살면 돼. 어때, 이 정도면 제법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
당장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절박하게 이혼을 갈망해 왔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분노가 맥없이 푹 꺼지자, 다리에 힘이 쑥 풀려버리고 말았다. 멍한 얼굴을 한 여원이 다시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요, 여원 씨. 이게 다 사인 하나만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닙니다.”
“하…….”
“선준 도련님이 뒤늦게 저를 찾아오셨을 때,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산 이전에만 알려주셨다면 이 늙은이가 어떻게 한번 힘을 써봤을 터인데.”
“…….”
“그래도 말입니다, 그 여원 씨가 의지만 서류상으로 보여주시면요, 시술을 통해 착상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임신 상태로 갈음해서 유언장 조항을 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유산 상속 절차를 곧바로 밟고, 여원 씨에 대한 보상도 진행할 수 있어지는 거지요.”
“여원아, 진짜 이건 평생 살면서 한 번 올까 말까 한 역전 기회야. 오메가인 게 벼슬은 벼슬이다, 그지?”
선준은 아주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여원을 구슬렸다. 그러나 잔뜩 탐욕스러운 낯을 한 두 사람이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여원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왜 하필 나인데? 어차피 이혼할 거라면, 나 말고 다른 오메가여도 상관없잖아.”
“여원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뭐라고?”
“너같이 사방에 끈 떨어진 오메가 찾는 것도 쉬운 일 아냐. 너 정도로 상황이 열악해야, 나한테 협조를 잘 할 거 아냐?”
“하, 미친 새끼.”
“어쨌든 애새끼가 내 손에 있어야, 앞으로도 나한테 유리하고 말야.”
본격적으로 드러난 선준의 속내는 검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선준은 일관적으로 여원의 아픔을 제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 이득을 보려고만 했다.
‘하제헌이 만 40세까지 정통성 있는 후계자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회사는 하선준이 대신 상속한다.’
그때, 자신과 관련된 내용만 파악하느라 무심코 스쳐 갔던 유언장의 조항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
“하선준 너는 결국 제헌 씨 회사를…… 빼앗으려고 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동안 내가 당했던 수모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야지 수지가 맞지 않겠어?”
“…….”
“어차피 형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도 아니고, 앞으로 몇 년 사이에 어디 가서 알파 애새끼를 하나 구해올 수 있을 리가 전혀 없잖아?”
여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자신에게 모욕적인 제안을 건네는 것으로도 모자라, 선준은 제헌을 무너뜨리려 간교한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나는 형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말 거야. 지금까지는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살았겠지.”
“…….”
“저택도, 회사도 전부 다 내가 차지할 거야. 최후의 승리자는 바로 내가 될 거라고!”
선준은 집안을 완벽하게 파탄 내는 계획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때 이른 승리감에 도취한 선준의 면면을 보자 여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당장이라도 증발해 버리고만 싶었다.
* * *
여원은 도무지 선준이 머무르는 2층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위태롭게 계단을 타고 내려와 복도를 비척비척 걸어 다녔다. 애매하게 1층을 배회하던 끝에 응접실로 들어섰다. 여원은 언젠가 제헌이 앉아 있었던 암체어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부터 선준의 제안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를 받아들이면 선준과 무사히 이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상금으로 경제적 자유도 가질 수 있게 된다. 열성 오메가가 이만큼 순탄하게 이혼할 방법은 없다시피 했다.
여원은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저를 모욕적으로 대하는 선준에게 휘둘려서는 안 됐다. 처음 결혼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교묘하게 틀어쥐고 저를 뒤흔들려는 선준에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선준의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눈앞이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
“아, 어떡해.”
그래도 제헌에게는 하나뿐인 동생이건만, 선준은 형을 무너뜨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렸다. 지금 여원이 다른 누군가를 걱정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제헌은 연약해서 늘 휘청거리는 여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원은 제헌이 걱정되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선준은 다른 오메가를 통해서 계획을 관철하려 들 것이다. 제헌은 선준이 뒤에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
자신이 제헌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저 하나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렇게까지 애틋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헤아리게 될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
시작할 때는 가랑비처럼 스며들었지만, 스스로 깨달았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커진 이후였다. 이런 낭만적인 감정에 젖어들 만한 여유가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닌데도, 마음은 좀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 사랑을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을지, 이 사랑이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되기나 할지를 생각하면 심장 부근이 저릿했다.
똑똑.
그때, 나직한 노크 소리가 스산한 적막을 깨트렸다.
“여원 씨, 그 안에 있어요?”
“네, 네. 여기 있어요.”
당황한 여원이 푹 익어 있는 얼굴을 바쁘게 더듬거렸다. 목이 메어 갈라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둘러 시간을 확인해 보니까 9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선준이 저택에서 어슬렁거리기도 했지만, 제헌 역시 최근에는 이렇게 늦게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얼굴 볼 기회가 자주 없었다.
“왜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어요, 안쓰럽게.”
성큼, 제헌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응접실 안에 걸어 들어왔다. 미처 몸을 완전히 일으키지 못하고 소파에 늘어져 있는 여원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여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제헌 씨…….”
머리칼을 꼼꼼히 쓸어넘기는 제헌의 손길이 포근해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불안하고, 서러웠다. 그러다 가끔은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제헌이 다정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자 여원은 마음이 금세 흐물흐물하게 풀렸다.
“그래요. 나한테 다 얘기해 봐요.”
“아…….”
제헌의 엄지가 통통하게 눌린 여원의 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러나 정작 기회가 주어지자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속이 난폭하게 울렁거렸다.
“…….”
“…….”
제헌을 사랑했지만,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숨 막힐 것처럼 거리를 좁히더니, 단숨에 다시 멀어져 버린 제헌은 언제나 의뭉스럽게만 느껴졌다. 모든 것을 전부 털어놓았을 때, 그가 완전히 자신의 편이 되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
“저 이제 이만 자러 갈까 봐요.”
어깨를 뒤로 바짝 뺀 여원이 흐물흐물해진 몸을 일으켰다. 적대적인 태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원이 무언가를 껄끄러워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로 인해 제헌을 피하려 든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껴졌다. 여원을 슬며시 살펴보던 제헌이 아프지 않게 팔꿈치 아랫부분을 쥐어보았다.
“최근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져서 내가 시간적인 여유가 없네요.”
“…….”
“여원 씨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쓴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담백하게 사과를 내뱉는 제헌의 얼굴이 초췌해서 낯설었다. 선준이 저택에 돌아온 뒤로 제헌은 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게다가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다.
“그래도 나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겠어요?”
뭘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건지. 만에 하나의 확률이라도, 나는 당신의 아이를 배 속에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건지. 여원의 눈에 제헌은 정말로 사랑스러웠고, 다른 누구보다도 제헌을 간절히 믿고 싶었다. 그러나 믿어달라는 말 한마디에 기대기에는 여원이 처한 상황이 지나치게 좋지 않았다.
여원에게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마냥 달콤하지 않았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생겨난 사랑은 사치품에 가까웠다. 뜨겁게 움트고 세차게 맥동하는 감정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자신이 크게 상처받고, 비참하게 나동그라지게 될까 두려워졌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여원이 제헌을 외면하듯이 얼굴을 돌렸다. 나직한 한숨만을 뱉어낼 뿐, 제헌은 여전히 지금 이상으로 여원에게 해줄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순간에마저도 그는 끔찍하게 다정했고, 여원 한 사람만을 향했다.
* * *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별일 없이 지나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게 얽혀들어 있었다. 여기에다 임신까지 더해지면 도무지 감당할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의사가 각인한 상대가 아니면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 여원도 큰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제 안에서 성기가 한계치 이상으로 부풀었을 때, 굶주린 듯 저를 쏘아보던 제헌의 눈동자에는 기묘한 이채가 돌았다. 그 질식할 것 같은 소유욕을 떠올리면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아니야, 괜히 혼자서만 앞서가서 의미 부여하지 말자.”
물론 제헌이 그만큼이나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단정 짓는 것도 자의식 과잉일 테지만……. 그럼에도 역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게 있기에, 불안감이 완전히 떨쳐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미리미리 확인해서 나쁠 일은 없으니까.”
그래서 여원은 제헌에게 노팅당한 이후 매일 아침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했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임신 시 2주째 정도부터는 테스트기에 두 번째 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날 밤의 섹스로부터 딱 2주째 되던 날 확인한 테스트기는 여전히 한 줄이었다. 깊은 안도감이 한차례 크게 휩쓸고 지나가자,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공허감이 심장에 스며들었다.
오늘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지나가야 했다. 여원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척비척 화장실로 향해 습관적으로 찬장 제일 높은 곳에 숨겨두었던 테스트기를 꺼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초조해하면서 매일 아침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상황이 착잡했다.
“음, 왜 이러지.”
처음에는 잠이 덜 깨서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비비적거렸다. 흐릿한 시야가 맑아지도록 눈두덩이에 단단히 힘을 주고 여러 번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세상에, 두 줄이잖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임신 테스트기에는 여전히 두 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경악한 여원의 얼굴이 푸르게 질렸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흉곽을 뚫고 나갈 듯 세차게 쿵쿵거렸다.
아직 판판하기만 한 아랫배를 본능적으로 더듬어보았다. 비대하게 부푼 성기를 받아내느라 뻑뻑하게 내벽이 당겨지던 통각과 질척하고 끈적한 정액이 구멍에서 허벅지 타고 흘러내리는 촉감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명명백백한 결과를 두 눈으로 보았는데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여원은 초조한 낯빛으로 온종일 종종걸음으로 오갔다.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는 서로 다른 테스트기 다섯 개를 시도해 보았다.
“아…… 제발, 제발…….”
그러나 얄궂게도 결과는 모두 똑같았다. 오히려 테스트기의 두 번째 줄은 오전보다 한층 선명해진 것만 같았다.
“임신이라니……. 나 이제 진짜 어떡해.”
당장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자니 눈앞이 아득해져, 여원의 눈썹이 힘없이 아래로 축 처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여원은 원하지 않았던 임신으로 이미 한 번 인생이 피폐해진 경험이 있었다. 동시에, 아이를 잃어버렸던 상실감과 죄책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제헌이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되지 않아 심란했다.
노팅을 한 건 제헌이었지만, 여전히 여원은 제헌의 속을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하아…….”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차라리 이대로 바닥 밑으로 푹 꺼지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도망칠 수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여원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도 없고, 혼자서만 결정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핸드폰을 더듬더듬 거머쥐고, 통화 목록에 떠 있는 제헌의 이름을 보자 한숨이 절로 푹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액정을 꾹 눌렀다.
뚜우우—.
통화 연결음에 귀 기울이며 웅크린 몸을 소파에 푹 기댔다. 항상 제헌의 전화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 여원이 먼저 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혹시 안 받으시면 어떡하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전화했냐고 화를 내시면 어떡하지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호흡을 삼키고 잔뜩 숨죽이자 콩닥콩닥 심장 뛰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네, 하제헌입니다.
제헌은 우아하게 다듬어진 인사와 함께 전화를 받았다. 그 서늘하고 건조한 목소리를 듣자 여원은 마음이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제헌 씨, 저예요. 여원이에요.”
―여원 씨?
결연하게 대처하겠다고 마음을 여러 번 다졌지만, 정작 입을 열자 자신감 없이 흐트러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헌은 조금 놀란 것 같으면서도, 반가운 기색이었다. 여원은 제헌이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액정을 못 보고 전화를 받았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무슨 일로 전화를 걸었어요?
“그게요…….”
여원이 사랑하는 사람이자,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 되는 사람이 짐짓 다정하게 물어왔다. 심장이 죄다 시큰거렸다.
“오늘도 많이 바쁘시죠? 제가, 제헌 씨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요…….”
―네, 듣고 있습니다.
“아, 음…… 그런데, 얼굴 보고요.”
―무척 중요한 얘기인가 봐요?
“네, 맞아요.”
―흠…….
최근 제헌은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그런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원이 야트막한 숨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살펴보는 듯 제헌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일정 조절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너무 늦지 않게 집으로 들어가죠.
“그런데요. 제헌 씨, 그게, 선준이 없는 데에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제헌도 상황이 제법 심각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잠깐의 정적이 생겨났다. 최근 제헌에게 응석이 조금씩 늘어났지만, 여원은 기본적으로 상대방한테 갑작스럽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런 여원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급박한 사안일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면 여원 씨가 이쪽으로 오겠어요?
목을 짧게 가다듬은 제헌이 여원에게 흔쾌히 제안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기색이었다.
“이쪽이요? 제헌 씨 회사요?”
―네. 지금 저택으로 차 보내겠습니다.
“아, 네에…….”
―도착하면 비서가 연락할 거예요.
오후 내내 마음을 졸이던 것에 비해 일은 생각보다 훨씬 순탄하게 흘러갔다. 제헌이 변함없이 보여주는 다정함에, 그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저기, 고마워요.”
―그래요, 오랜만에 둘이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면 되겠네.
“네, 이따 뵐게요!”
씩씩하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은 후에도 쿵쿵 뛰는 심장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아하다가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매번 겁먹어서 쪼그라들었을 뿐, 제헌은 여원이 무언가를 해달라고 표현했을 때 그걸 거절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언제나 여원에게 최선을 주려고 했다.
“아휴…….”
흘긋 아래를 내려다본 여원이 손바닥으로 배를 조심스레 감싸 보았다. 선준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때에는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던 임신이었고, 확신이 없는 상대였다.
물론 이번 역시 계획에 없었던,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임신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제헌이 이 아이를 받아들여 줬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결국에는 자신이 제헌을 사랑해서였다.
마음속에서 제헌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만큼 심장이 시큰거렸다. 애틋하고 특별한 감정으로 저릿해지는 것에 비례해서 묵직한 죄책감으로 욱신거리기도 했다.
“아, 제헌 씨…….”
지금까지 태어나서 누구를 상대로든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심장에 낙인이 찍힌 것처럼 그가 닿은 자리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 사랑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도록 후유증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여원을 태운 차량이 굽이진 산길을 가로질렀다. 여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속속들이 등장하는 도심의 풍경을 맥없이 응시했다. 고요한 차 안에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하게 번지는 것만 같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만남이 두려우면서도 기다려졌다.
20분 남짓이 지나 차량이 익숙한 모양새의 건물 앞에 정차했다. 한적하게 자리한 저택과는 다르게 빈틈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건물 내부를 둘러보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졌다. 여원은 비서를 따라 최상층으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쪽입니다.”
빼곡하게 펼쳐진 복도 끝, 가장 안쪽 코너에 자리한 사무실이 제헌의 공간이었다. 비서가 닫혀 있는 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는 여원만을 남겨둔 채 뒤로 물러났다. 묵직한 긴장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하아…….”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자 제헌의 공간이 널찍하게 펼쳐졌다. 그는 아찔한 고층의 전면 유리를 배경으로 너른 데스크에 느슨하게 앉아 있었다. 서걱서걱, 만년필로 무언가를 메모하던 제헌이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리고,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자신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자 심장이 곧장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아, 제헌 씨, 안녕하세요!”
제헌의 회사를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긴장으로 목구멍이 뻣뻣해져 와 여원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런 와중에도 제헌이 일하는 모습을 보자 철없게도 멋지다는 감상이 들었다. 고개를 짧게 가로저어 생각을 털어낸 여원이 등을 반듯하게 세우고 제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네, 여원 씨. 오는 길에 불편한 건 없었고요?”
“네, 차 보내주신 덕분에 편하게 왔는걸요!”
흐무러진 기분에, 여원은 제헌을 향해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도톰한 아이보리 색 패딩을 입고 데스크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여원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제헌이 눈을 슬며시 접었다.
“일하는 곳에 집안사람 들이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여원 씨는 예외 같네요.”
“아…….”
경색되었던 마음이 말 한마디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제헌의 등 뒤, 탁 트인 창으로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는 햇살이 빛줄기를 와르르 쏟아 내렸다. 예전에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기가 질릴 정도로 날카로운 얼음조각 같은 남자였다. 이제 모서리가 둥그스름하게 녹아내려서, 여전히 차갑지만 만져도 다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쪽으로 앉아요.”
“네, 네에.”
몸을 가볍게 일으킨 제헌은 여원에게 소파 자리를 권유했다. 당연히 제헌이 건너편에 앉겠거니 했지만, 스스럼없이 옆자리를 차지한 그는 자연스레 여원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반쯤 제헌의 품에 안긴 여원이 제헌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영역에 여원을 들이고 나른한 표정을 하는 제헌에게서 특유의 페로몬이 물씬 흘러나왔다.
선준이 저택에 돌아온 이후 이대로 제헌과 멀어지게 될까 봐 내내 초조해했다. 그러나 최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일이 뜸했던 제헌은 정말로 바빴던 모양이었다. 혼자서 키웠던 이런저런 두려움과는 다르게, 정을 떼려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긴장했지?”
그럼에도 여전히, 임신 사실을 알리면 제헌의 반응이 어떨지 두려웠다. 그래도 말해야만 한다. 한숨을 푹 내쉰 여원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미간에 힘을 주어 눈을 똑바로 떴다. 제헌은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여원의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제헌 씨…… 그게 말이에요.”
“네, 듣고 있어요.”
“저…… 임신했어요.”
어렵사리 고백하자, 제헌이 곧바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서늘한 무표정이었지만, 그가 어색하리만치 얼어 있는 게 느껴졌다. 제헌은 지금 당혹스러워하는 걸까? 덩달아 놀라버린 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괜히 임신했다고 얘기했나 봐. 빼곡하게 밀려드는 초조함으로 여원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확인 차 묻는 건데, 나 말고 다른 사람과 관계한 적은 없는 거죠?”
한참의 침묵 끝에 내뱉어진 질문을 듣자, 실낱같은 기대가 우지끈 끊어졌다. 그가 의심스럽다고 느껴질 때도, 여원은 실은 간절하게 제헌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제헌 역시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책임을 외면하는 건가 싶어 눈앞이 아득해졌다.
형이랑 잘못 얽혔다가는 너 역시도 형수처럼 되고 말 거라는, 선준의 조롱 섞인 경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대로 제헌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건가 싶은 두려움으로 손끝이 새하얘졌다.
“제헌 씨…….”
이곳에 오기에 앞서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해 보았지만, 현실은 최악의 시나리오보다도 훨씬 나빴다. 그래도 제헌에게는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고, 또한 기대치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무책임한 발언을 듣자 더욱 배신감이 크게 느껴졌다.
“아니에요. 저 결혼한 뒤로는…… 흐, 선준이랑 한 번도…… 섹스한 적 없는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여원이 제헌에게서 몸을 바짝 뒤로 뺐다. 어차피 어그러진 상황이라면 차분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이 온통 먹먹해서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흐, 으으으…….”
꾹 참으려고 했지만, 서러운 마음에 울음이 왈칵 터져 버렸다.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 여원이 뺨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을 황급히 닦아냈다. 그러자 여원보다 한참은 더 놀란 표정을 한 제헌이 여원을 왈칵 끌어안았다. 하, 제헌은 거칠어진 숨소리를 뱉어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라서 미안합니다. 여원 씨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좀처럼 믿기지가 않아서요.”
“……흐, 으읏…….”
“평생 아버지가 되는 일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상황이지 곰곰 가늠해 보는 동안 히끅, 작은 딸꾹질이 올라왔다.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에는 아직 눈물이 함빡 고여들어 있었다. 눈을 끔뻑일 때마다 물방울이 대롱대롱 맺힌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우성 알파는 확률적으로 수정이 몹시 어렵습니다. 소수 개체를 유지하며 희소성을 보존하려는 본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나는 청소년기에 페로몬 억제 주사까지 필요할 정도로 형질이 지나치게 강했고요.”
오메가와는 반대로, 알파는 우성 형질이 강할수록 번식이 까다로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케이스는 처음 접했다. 제헌은 여원이 만나본 알파 중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인 페로몬의 소유자였고, 특유의 위압감을 지녀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켰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우월한 알파일수록 번식에서는 페널티가 적용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반려라는 확신을 가지고 각인한다면 그 상대에게만은 번식 본능이 발현한다지만, 그건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요.”
“그치만…….”
“내가 누군가를 낭만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건 스스로 가장 잘 알아서, 마음 정리한 지 오래였습니다.”
제헌은 담백한 태도로 자신의 하나뿐인 약점을 이야기했다. 그제야 여원은 이따금 그에게서 느껴졌던 그늘진 초연함의 뿌리를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여원이 전처와 아이를 가지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모든 일이 원한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 했던 대답을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네요.”
제헌은 여원의 뺨을 가벼이 쥐고, 경이롭다는 듯 얼굴 곳곳을 꼼꼼하게 훑어 내렸다. 여원을 보고 성적으로 흥분할 때나, 소유욕으로 옭아맬 때의 집요함과는 확연히 다른 낯선 시선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는 각인 상대를 향한 애정과 보호 본능이 깃들었다.
“그러면 제헌 씨가 저한테 각인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헌의 얼굴은 벅차 보이기도, 한편으로는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여원의 눈에도 제헌이 낭만적인 감정을 품을 수 있는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제헌이 각인할 정도로 자신에게 애착과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다니, 여원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에는 이런 기분이 드는군요.”
“…….”
“여원 씨, 내 아이를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여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제헌의 얼굴은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감격으로 가득했다. 제헌이 다시금 여원을 빈틈없이 꽉 끌어안자, 한층 선명해진 알파 페로몬이 여원을 온유하게 휘감아 내렸다.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는 제헌의 몸에서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는 감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지만 제헌 씨, 히끅, 이번에는 나빴어요.”
빠듯하게 옭아매는 포옹 끝에 밭은 숨을 뱉어냈다. 여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며 제헌을 올려다봤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내내 가슴 졸이고 있었다니. 역시 제헌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원이 새초롬한 얼굴로 제헌의 단단한 가슴팍을 꾹 밀어내었다.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주시고……. 저는 선준이가 저택에 돌아온 뒤로, 제헌 씨가 저한테 거리 두려고 하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
“아직 선준이랑 이혼도 못 했는데, 제헌 씨한테 노팅까지 당해서…… 혹시라도 임신하게 될까 봐 너무 불안해서…… 혼자서 너무 무섭고…….”
말하다 보니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서러움과 불안이 왈칵 밀려들었다. 눅눅한 감정으로 목이 먹먹하게 메어와 여원은 말끝을 흐렸다. 위태롭게 출렁이는 여원의 얼굴이 힘없이 일그러졌다.
“……내가 여원 씨에게 그 정도로 나쁜 놈이었습니까?”
한참 말을 고르다 질문하는 제헌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그동안 여원 씨를 내게로 데려오기 위해서, 최대한 잡음 없이 일을 진행할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아.”
“어쨌든 이혼하려면 선준이의 명시적인 동의가 필요하니까요.”
“…….”
“하루빨리 여원 씨를 찾아와야 한다고 초조해졌던 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여원 씨에게 각인해서였던 모양입니다.”
제헌이 최근 저에게 소홀하다고만 생각해서, 여원은 그가 말한 해결해야 할 일이 자신에 대한 것인 줄은 짐작조차 못 했다. ……그래서 나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한 거였구나.
“그래도 저한테 미리 조금이라도 말해 주셨으면…….”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깔끔하게 해결한 뒤에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원 씨가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제헌 씨…….”
“여원 씨, 나 봐요.”
“……네에.”
“끝까지 책임질 각오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여원 씨에게 손 뻗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헌은 평생을 혼자서만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보호와 통제 사이에서 여원을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두려 했던 그동안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행동은 지극히 그답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너무하다는 생각에, 여원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그런데 제헌 씨!”
일단 놀란 마음이 가라앉고 나자, 여원은 제헌에게 알려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여원에게서 내내 눈을 떼지 못하던 제헌이 얼굴을 바짝 기울여왔다.
“그런데, 선준이가요.”
“내 앞에서 하선준 얘기는 이제 하지 말고요.”
여원이 선준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제헌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원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여원을 제 소유로 두겠다는 제헌의 의지가 한층 확고해졌다. 여원은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선준이가, 지금 제헌 씨를 해치려 하고 있어요. 유언장을 보여주면서 저에게도 시험관으로 아기를 가지라고 하고…….”
“…….”
“예전에 가문 변호사였다고 하는 분이랑 꿍꿍이가 있는데, 아무래도 제헌 씨 재산이랑 회사를 노리려고 하는 것 같아서요.”
숨을 짧게 들이켠 여원이 급박하게 이야기했다. 제헌의 마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더 빨리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그를 온전히 믿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러나 분명 충격적이어야 할 말을 듣고도 제헌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네?”
“그리고 충분히 대처하고 있고요.”
“아…….”
“어차피 유언장에 있는 상속 조항은 성운케미컬에 대한 것이어서요. 원래는 때가 되기 전에 핵심 조직만 다른 회사로 분사시켜서 실질적인 경영권을 장악할 생각이었습니다.”
“…….”
“다만 최근에 선준이가 민 변호사와 접촉하는 것을 알게 되어서 지배 구조를 계획보다 이르게 손봐야 했고요.”
“…….”
“그 변호사는 부모님 사후에 회계사와 결탁해서 집안 재산을 빼돌려온 것이 드러나 해고한 사람인데, 선준이가 그런 선택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제헌은 저를 배신한 동생에 대한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내비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그가 상황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을 줄은 몰라서, 여원은 입이 헤벌어졌다.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건지…….
“그랬던 거군요.”
“네.”
“저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혼자서 제헌 씨가 괜히 걱정되어서…….”
하긴, 여원이 제헌을 사랑하는 마음에 괜한 걱정을 했을 뿐, 가문과 회사를 지키는 일에 평생을 전념해 온 제헌이 선준의 계략에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리는 없었다.
“최근 해결해야 하는 일이 여럿 생겨서, 여원 씨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아, 제헌 씨…….”
“하지만 상황이 한결 명료해졌으니, 이제 더는 거리낄 것 없이 선준이를 쳐내면 됩니다.”
“…….”
“여원 씨도, 배 속 아이도, 앞으로는 내가 단단히 지켜주겠습니다.”
제헌의 판단력은 언제나처럼 정확했다. 선준이 꾸미던 계략까지 드러난 이상 그를 미련 없이 끊어내는 것이 제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라면 응당 가질 법한 불안이나 망설임, 자기 의심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제헌이 여원은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선준이는 제헌 씨 동생인데…….”
“선준이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이제는 여원 씨와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내게는 가장 소중합니다.”
제헌의 태도는 선준을 딱히 피붙이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단호했다.
“여원 씨.”
“네, 제헌 씨.”
“정식으로 내 가족이 되어주겠어요?”
여원의 죄책감을 다독이려는 듯, 손깍지를 끼어온 제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헌과 여원 모두 평생 제대로 된 가족을 가지지 못해, 그들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이기에 말의 무게가 남달랐다. 그는 곧 제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고백이기도 했다.
“네, 좋아요.”
제헌의 손을 맞잡은 채로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가족이 되기를 선택한 두 사람이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너르고 단단한 제헌의 품에 고개를 푹 파묻은 채, 여원은 드디어 마음 놓고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