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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향락의 향연 (1)

잠에서 갓 깨어났을 때 여원은 제헌의 탄탄한 가슴팍에 코끝을 파묻은 채였다. 눅진한 페로몬이 유유히 밀려 들어오고, 두꺼운 팔뚝은 여원의 허리께에 단단하게 둘러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여원이 멍한 기분으로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이대로 제헌 씨 침대에서 잤구나. 한발 늦게 찾아온 현실감에 머릿속이 먹먹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지난밤의 적나라하고 낯뜨거운 행위가 눈앞에 스쳐 가 여원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제헌 씨 얼굴을 어떻게 보지. 까마득한 마음에 눈썹이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쉰 여원이 몸을 들썩거리자, 커다란 손바닥이 여원의 등줄기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깼어요?”

끝이 살짝 갈라진 관능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지난밤 여원을 양껏 포식한 제헌의 얼굴에서 나른한 포만감이 묻어났다.

“아…… 제헌 씨.”

“…….”

“회, 회사 안 가세요?”

코끝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제헌의 얼굴이 있었다. 명료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맞닥뜨린 여원이 놀라 흡, 숨을 들이켰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출근부터 물었다.

“자는 사람 혼자 내버려두고 갈 것처럼 내가 무책임하게 보이던가요?”

“그런 게 아니라…….”

웃음기 어린 타박에 열없는 기분이 들었다. 밤새 안겨 있던 제헌의 품 안에서 작게 버둥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화사하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로 제헌의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콧대가 오뚝하게 솟아 날렵한 옆선과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매가 자아내는 서늘하고 우아한 인상에 절로 감탄이 터졌다. 눈앞의 남자와 짐승처럼 질펀하게 얽혀들고, 이제는 그의 침대에서 나른한 아침을 나란히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자, 기다란 속눈썹에 엉겨 붙은 정액이 거치적거렸다.

“으…….”

미간을 찡그린 여원이 자그마한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속눈썹뿐만 아니라, 뺨, 입술, 콧대를 가릴 것 없이 온 얼굴에 끈적한 정액이 말라붙어 있었다.

제헌은 아침에도 꼭 그리스 신화 속 신처럼 비현실적으로 근사한데, 자신은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속상해졌다. 금세 뾰로통해진 여원의 얼굴을 제헌이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너무 창피해요.”

“뭐가.”

“그냥, 제헌 씨한테 이런 모습 보이는 게요.”

픽, 바람 새듯 가벼운 숨을 뱉어낸 제헌이 여원의 턱 끝을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콧대가 미끈하고 오밀조밀한 코, 퉁퉁 부어올라 색이 유달리 짙어진 입술, 얇은 속쌍꺼풀이 섬세한 선을 그려내는 눈매까지, 여원의 얼굴 곳곳에 남은 제 흔적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누가 봐도 내 것 같고 좋은데요.”

만족스러운 감상을 읊조린 제헌이 정말 그렇다는 듯, 여원에게 고개를 기울이더니 쪽 뽀뽀했다. 희끄무레한 얼룩이 묻은 얼굴뿐만 아니라, 여원의 하얗고 곧은 몸에는 밤새 제헌이 남긴 입술 자국과 손자국이 적나라했다. 그것을 확인하듯 여원의 나신을 훑어내린 제헌이 여원을 품에 옭아맸다.

“흐으…….”

보드라운 깃털이 심장을 간질이는 듯한 감각에 여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농염한 정욕이 맹렬하게 들이부어지던 어제와는 다르게, 특유의 체향에 희미하게 섞여든 제헌의 페로몬은 서늘하고 안온했다. 가장 위험한 관계를 맺은 다음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이상했지만, 여원은 제헌의 품을 안전하게 느꼈다.

“아, 제헌 씨?”

포근하게 젖어든 기분이 오래지 않아, 딱딱한 살덩이가 여원의 허벅지에 묵직하게 닿아왔다. 처음 한두 번이 어렵지, 이제는 언제든 사고를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제 너무 많이 해서, 아무래도 지금은 좀 무리일 것 같은데…….

“같이 씻으러 가죠.”

“네, 네!”

정작 아랫도리가 뻣뻣하게 일어선 장본인인 제헌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얼굴로 여원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여원이 두툼한 것이 덜렁거리는 제헌의 하반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엉망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제헌을 쫓아 욕실로 향했다.

“혼자 할 수 있는데…….”

“나도 알아요.”

여원을 제 손으로 직접 꼼꼼히 씻겨 내린 제헌은 샤워가 끝난 다음에도 여원을 놓아주지 않고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냈다. 여원이 말간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제헌은 보송보송해진 여원에게 제 드레스 셔츠 하나를 입혀주었다. 제헌의 장대한 체격에 맞는 셔츠는 여원의 몸에 걸리자 허벅지 절반 정도를 가리는 길이까지 내려왔다.

“이제 진짜 가셔야 하죠.”

깃이 빳빳하게 선 드레스 셔츠, 슬림하게 빠진 슈트 팬츠, 손목에 묵직하게 걸리는 은색 시계까지, 조각처럼 매끈하게 뻗은 몸 위로 하나하나 걸쳐진다. 침대 위에 얌전히 앉은 여원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출근 준비를 하는 제헌을 살폈다. 여전히 나체 위로 제헌의 셔츠 한 장만을 얌전히 걸친 채였다.

“그치, 가야지.”

어느덧 벌써 10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매일 새벽 6시 즈음이면 저택을 나서던 제헌은 일정이 한참은 지체되었을 것이었다. 거친 섹스에 시달린 여원이 힘에 부칠까 봐 늦잠을 자는 것도 내버려두었으니, 제헌이 저를 많이 봐주고 있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부드러운 손길을 받고 나자 막상 제헌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다.

“그런데 발걸음이 안 떨어지네.”

오롯이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순종적인 존재를 제헌이 유유히 내려다봤다. 실제로 그는 기대와 선망이 어린 여원의 눈빛을 제법 기꺼워하고 있었다. 여원은 제헌의 눈에 제가 철없어 보일까 봐 퍼뜩 걱정되었다. 애써 태연한 척, 여원이 미간에 단단히 힘을 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원 씨, 오늘은 뭐 할 생각입니까?”

“네? 아…… 아직 잘 모르겠어요.”

“…….”

“일단 낮잠 조금 잘까 싶기는 한데.”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퍽 다정한 말투로 물어왔지만, 정작 제헌은 무슨 꿍꿍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못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네에…….”

아랫입술을 살짝 핥아낸 여원이 고개를 순순히 끄덕거렸다. 가벼운 손길로 커프스단추를 잠근 제헌이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들어 여원에게 다가왔다. 고개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여원이 바짝 긴장했다.

“아, 흐읏…….”

무언가 했더니, 제헌의 손에 들린 것은 먼젓번에 여원과 함께 구매했던 향수였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여원에게 몸을 깊숙이 숙인 제헌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칙,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여원이 직접 고른 화려하고 관능적인 향이 목덜미 위로 흩뿌려졌다.

“나 올 때까지 이대로 있어요. 속옷도 입지 말고, 바지도 입지 말고.”

“아…….”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리면서, 내 생각만 하고 흥분하는 겁니다.”

제헌은 자신의 향기를 뒤집어쓴 여원을 흡족한 얼굴로 훑어내렸다. 얇게 펄럭거리는 셔츠 아랫단과 엉덩이를 은근하게 어루만지며, 제헌이 귓가에 속삭였다.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습윤하게 파고들자, 귓바퀴의 솜털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잘 할 수 있겠어요?”

말에 담긴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였다. 밀접한 거리에서 바짝 내리꽂히는 서늘한 표정과 짙어진 눈빛이 여원의 목덜미를 죄어왔다. 여원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헌이 가감 없이 드러내는 집요한 소유욕이 여원을 오싹하게 흥분시켰다.

* * *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고 오후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너른 창문을 통과해 새어 들어오는 투명한 빛의 장막이 푹 절인 과육처럼 늘어져 창가에 몸을 기댄 여원에게 드리웠다.

안온하게 흘러가는 오후였지만 여원의 내면에서는 감정의 파도가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심심해진 통키가 발치에서 머리를 동그랗게 치댔지만, 힘없이 등줄기를 쓰다듬기만 했다.

제헌은 저택을 떠난 후였지만, 온몸에 저릿하도록 남아 있는 섹스의 여운은 여원을 온유하게 감싸고 돌았다. 셔츠에서 배어 나온 체향과 희미하게 섞여든 스모키한 향수 향이 피부 위로 은은하게 번졌다.

제헌이 일러두었던 것처럼, 여원은 정말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제헌만을 생각했다. 짙게 침잠한 눈빛, 미지근한 체온, 오만해 보이는 표정, 딱딱한 살갗.

손에 잡히지 않는 상상만으로도 사지가 저릿해졌다. 제헌의 셔츠를 입고 향수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온몸이 그에게 만져지는 것만 같았다.

선준과는 연애도 섹스도 좋아서 했던 적 없고 엉겁결에 휘말려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헌은 여원이 스스로의 의지로 욕망하는 상대였다. 그와 함께 하는 모든 경험에서는 이전과는 격이 전혀 다른 전율이 느껴졌다.

본능이 지배하는 섹스에 탐닉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마음 깊이 편안하기도 했다. 그동안은 이리저리 치이느라 몰랐을 뿐,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이 더욱 자연스럽게도 느껴졌다.

여원은 이제야 제헌에게 발견된 것 같았다. 제헌이 일깨워준 새로운 욕망을 매개로, 이대로 질식 직전까지 감각의 바다에 잠겨들고 싶었다.

* * *

이제 위험이 아닌 향락이 저택을 지배했다. 오래 고삐에 매였던 욕망이 자유롭게 해방되고, 정욕으로 점철된 날들이 이어졌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매 순간이 탐미와 퇴폐로 흠뻑 적셔졌다.

기준선을 넘어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걸 한 번 알게 되니, 그 뒤로는 모든 것이 거침없어졌다.

물론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2주 남짓 후에 선준이 저택으로 돌아오는 것을 제헌과 여원 모두 알고 있었다. 곧 다가올 끝을 알기에 욕망에 더더욱 불이 붙었다.

불문율처럼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선준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얽혀들었다. 섹스할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원하는, 또 누군가에게 원해진다는 것에서 오는 중독적인 희열만이 그 순간의 전부였다.

“흐, 제헌 씨…….”

식탁 위에 여원을 올려놓은 제헌이 노골적인 눈으로 온몸을 훑어내렸다. 제헌에게는 음식과 마찬가지로 여원 역시 남김없이 집어삼켜야 할 대상이었다.

“내가 시킨 건 잘 해왔어요?”

커다란 손으로 여원의 무릎을 거머쥔 제헌이 사타구니 안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검게 내려앉은 제헌의 눈동자에는 열렬한 욕망이 깊숙이 스며 있었다.

“네, 흣, 네에…….”

“보여줘요.”

길쭉한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비틀린 흥미를 머금고 들썩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린 여원은 주춤주춤 바지를 벗어냈다. 제헌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일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특히 부끄러웠다.

“흐읏…….”

기다란 숨을 토해낸 여원이 벌벌 떨면서도 늘씬한 다리를 넓게 벌렸다. 매 순간 제 앞에서 예민하게 수치심을 느끼는 여원을 제헌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아…….”

하얗게 드러난 사타구니가 말끔하게 제모되어 있었다. 원래도 여원의 체모는 연하고 옅었는데, 정리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헌의 권유를 따른 것이었다. 제헌이 손을 뻗어 보송보송해진 둔덕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예쁘게 잘 밀었네.”

오로지 섹스할 때 자극을 더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털이 죄다 밀린 가랑이가 맨들맨들했다. 제헌은 도착적인 요구에도 완벽하게 순종하는 여원이 흡족했다. 노골적으로 훑어내리는 시선에 몸서리쳐졌지만, 여원은 순간의 수치심을 견뎌내면 훨씬 큰 쾌감이 돌아오는 것을 이제 알았다.

“흐, 아…….”

제헌이 말끔해진 사타구니에서부터 팽팽하게 땅겨진 허벅지를 손끝으로 쭉 쓸어올렸다. 무릎뼈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식탁에 골반을 바짝 붙인 채로 여원이 다리를 활짝 벌렸다.

“내 눈 보고 자위해요.”

“네에…….”

훤히 드러난 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제헌이 여원에게 지시했다. 훅, 밀려드는 수치심으로 입술을 잘근 깨문 여원이 손을 살금살금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그러자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제헌의 입매가 비틀렸다. 여원이 어설프게 성기를 잡은 채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하아…….”

팔을 길게 뻗은 제헌이 여원의 손을 겹쳐 쥐었다. 그러곤 그대로 손을 성기에서 떼어내 아래로 향하게 했다. 겹쳐 쥔 두 사람의 손이 여원의 회음부를 지나 엉덩이 사이에 다다랐다.

“나는 여원 씨가 뒤로만 가는 게 보고 싶은데.”

제헌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여원의 손끝이 구멍에 닿아 있는 것을 확인한 제헌이 가볍게 턱짓했다. 그대로 미련 없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식탁 위로 반쯤 나동그라진 여원을 관조했다.

“앗, 으응…….”

어설프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앙다문 주름 근처를 배회했다. 민둥해진 아래를 내보이느라 잔뜩 긴장했는지, 아직은 입구가 충분히 젖어들지도 않았다. 머뭇대면서 입구 주변을 손가락으로 직접 만지는 행위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하아, 응, 흐, 제헌 씨…….”

울상이 된 여원이 제헌을 올려다봤다. 그대로 제헌과 눈이 마주치자, 집요한 눈빛에 짓눌려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부끄러워서 못 견디겠는 마음 한편으로, 제헌의 시선이 다리 사이를 샅샅이 훑어 내리자 기묘한 흥분이 일었다.

“네, 후, 여원 씨.”

거친 숨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리는 고요한 공기를 틈타 눅눅한 열기가 안개처럼 번졌다. 여원은 언제나 냉철한 알파의 눈에 음습한 욕망이 어리는 순간이 못내 좋았다. 저로 인해 그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다는 사실에서 희열을 느꼈다. 몸이 저릿하게 달아오른 여원이, 좀 더 과감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읏, 으읏…… 하앙…….”

손가락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고, 안쪽을 힘주어 만져 보았다. 외부의 침입으로 꽉 조여든 내벽은 아직 뻣뻣하기만 했다. 여린 속살을 꾹꾹 눌러보고,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은 다음 얕게 휘저어보았다. 좁은 틈새로 애액이 질금질금 새어 나오면서, 음란한 향취가 퍼졌다.

“제헌 씨…….”

“네.”

그러나 안을 거침없이 헤집어 내리던 제헌의 손가락과는 다르게, 여원의 것은 짧고 가늘어 원하는 만큼 깊이 자극이 안 됐다. 여원은 이미 제헌이 가져다주는 흥분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떻게 만져 주면 좋은지 너무 잘 아는데, 혼자서는 좀처럼 극점으로 다다르지 못했다. 잔뜩 안달이 나 끙끙거렸다.

“흣, 으으…… 혼자서 잘, 못하겠어요.”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눈매에 눈물이 핑글 고여들었다. 여원은 잔뜩 젖은 눈으로 도와달라는 듯 제헌을 올려다봤다. 스스로를 만지는 여원을 보면서 제헌의 시선이 짙어져 있었다. 이미 손가락 두 개를 물고 있는 구멍에, 제헌이 자신의 중지를 쑥 집어넣었다.

“내가 도와줘야겠네.”

“앗, 으응……. 흐읏…….”

좁은 입구가 빡빡하게 조여들었다.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들이 달그락거리며 얽혀들자 생경한 촉감으로 기분이 야릇해졌다. 제헌의 중지가 말캉한 속살을 주르륵 긁어내렸다. 여원이 만지려 해도 잘 닿지 않았던, 도톰하게 부어오른 예민한 안쪽을 부드럽게 헤집어 내렸다.

얕은 부분에는 여원의 손가락이 있었고, 더 깊은 안쪽은 제헌이 단단히 차지하고 있었다. 끝이 뭉툭한 손가락이 여원의 민감해진 내벽을 마구잡이로 비벼댔다. 주인이 다른 손가락이 안에서 어지러이 얽혀들고, 질척한 내벽은 그 모두를 움찔움찔 조여댔다.

“하, 읏, 아앙…….”

제헌의 중지 끝이 깊숙한 구멍의 안쪽 어딘가를 건드리자, 여원이 다리를 찢어 벌린 채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제헌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이채가 돌았다. 반응이 특별히 격해진 부분을 겨냥해, 제헌이 손가락을 쿡쿡 찌르다 살살 긁어내렸다.

“하, 후으…….”

“아, 하, 흐으으…….”

손목에 힘이 풀리며, 여원의 손가락이 구멍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그러자 제헌이 기다렸다는 듯 검지와 약지도 꾸역꾸역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층 묵직해진 부피감에 속살이 팽팽하게 벌어졌다. 뿌리까지 깊숙이 밀어 넣은 채, 제헌이 손목을 거세게 흔들기 시작했다.

“아, 흑, 제헌 씨…… 잠깐, 아, 으응…… 흐읏…….”

난폭한 자극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흐물흐물해진 속살이 능숙하게 안을 쑤셔대는 손가락을 물고 꼭꼭 조여들었다. 내벽이 제멋대로 수축했다가 다시금 펴지기를 반복하자, 열기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묵직한 손목에서 전해지는 거친 진동과 함께 여원의 아래가 왈칵 젖어들었다.

“흑, 흐아앙.”

제헌이 흥건하게 젖은 손가락을 빼자 벌렁거리는 입구에서 맑은 액이 후두둑 쏟아졌다. 꽤 많은 양의 액을 토해내느라, 구멍이 크게 벌어졌다 다시금 닫히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여원이 자지러졌다. 손가락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여원은 지나친 자극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식탁 아래 바닥이 여원이 흘린 애액으로 미끌미끌하게 젖어들었다.

“시키는 대로 잘 했으니 예뻐해 주겠습니다.”

“네, 흐, 네에…….”

진절머리나는 쾌락의 여진으로 아랫배가 푸르르 떨렸다. 반쯤 넋이 나간 여원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쾌락으로 온몸이 온통 너절해져 버렸는데, 대체 지금 이상으로 뭘 어떻게 더 예뻐하겠다는 건지.

“감사 인사 해야지.”

“흐, 으으으…… 예뻐해 주셔서, 흑, 감사합니다.”

여원이 입술을 달싹거려 가느다래진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여원의 다리 사이에서 흔쾌히 몸을 낮춘 제헌이, 상반신을 숙이더니 젖어든 입구에 입술을 가져갔다. 뒤늦게 상황 파악한 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쯥, 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 주변에 촉촉하게 배어든 애액을 제헌이 빨아 삼켰다. 성기가 아무렇지 않게 쑥쑥 드나들고, 손가락으로 거칠게 쑤셔지던 구멍이었다. 그런데도 제헌이 음부를 직접 빨아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어떻게든 밀어내 보려고 했지만, 단단하고 딱딱한 몸은 좀체 뒤로 밀리지도 않았다.

“핫, 으으응……. 하윽!”

뾰족해진 혀끝이 주름을 핥아 내리더니, 입구를 콕콕 찌르기도 했다. 흥건하게 고인 아래를 쭙쭙 빨아대는 젖은 소리가 노골적으로 번졌다. 도톰하고 까슬까슬한 입술이 움직이자, 예민한 살갗에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여원이 길게 몸서리쳤다.

“아니, 흑, 거기 빠시면, 안…… 흐, 잠깐만요…….”

아래가 샅샅이 빨리는 감각이 생경해 허리가 자꾸만 위로 튕겼다. 뜨끈하고 까슬까슬한 혀가 꾸물거리는 촉감도 적응이 안 되는데, 구멍에 잔뜩 밀착한 입술이 쩝쩝거리는 소리 때문에 더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불그스름해진 눈가를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헌 씨, 아앙, 응, 흐…… 제헌 씨…….”

“하, 후으…….”

“흑, 으응…… 이상해, 안, 흑, 돼…….”

목을 잔뜩 뒤로 젖힌 여원이 가냘프게 제헌의 이름을 불러댔다. 여원이 정말 아파하거나 버거워하는 것 같으면, 흥분한 도중에도 제헌은 그를 기민하게 알아채고 제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쾌감에 못 이겨 흐느낄 때는 절대 봐주지 않고 더욱 집요하게 몰아쳤다.

“하, 흐으…… 앙!”

제멋대로 버둥거리는 다리가 혹시라도 제헌의 몸에 잘못 닿을까 봐, 여원이 넓게 벌려진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어 지탱했다. 매끈한 종아리가 꼿꼿하게 뻗고, 발가락 끝에 꼼질꼼질 힘이 들어갔다. 더운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혓바닥을 애처롭게 내밀고 할딱거리게 됐다.

그러고도 지나친 흥분이 좀처럼 가눠지지를 않아, 여원은 팔을 다리 사이로 내려 제헌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렇게 함부로 만져도 되는 건가 싶어서, 정신이 반쯤 나간 와중에도 불경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

여원의 손가락이 머리를 거머쥐자, 슬쩍 고개 들어 올린 제헌의 눈동자가 못된 장난기로 번뜩였다.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에 비릿한 웃음기가 번지자, 여원은 순간 섹스하면서 이 남자가 못 할 짓은 과연 없겠구나 생각했다.

“앗, 흐! 아아앙!”

바로 그때, 제헌이 앞니로 입구 주변에 옴츠러든 주름을 아프지 않게 살살, 잘근잘근 씹어댔다. 깜짝 놀란 구멍이 순간적으로 벌어질 때, 꼿꼿하게 선 혀끝이 안으로 쑥 밀려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여원이 엉덩이를 꽉 조였다. 빼곡하게 달라붙는 내벽이 어떻게든 안쪽에 침입한 혀끝을 다시 밖으로 밀어내려 들었다.

“흐…… 으, 흐어엉.”

그러나 제헌은 개의치 않고 혀끝을 더욱 안으로 밀어 넣었다. 도돌도돌하게 솟아오른 미뢰가 말캉말캉한 살점에 들러붙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입술을 바짝 붙인 제헌이 구멍을 강하게 흡착하자, 안쪽 살이 제헌의 입 안으로 살짝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제헌의 혀끝이 여원의 구멍을 뭉클뭉클하게 문질렀다가, 콕콕 찔러대기를 반복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교묘한 자극에 끝내 항복한 구멍이 빠끔하게 벌어지자, 제헌은 더욱 집요하게 혀끝을 안으로 쑤셔댔다.

제헌은 식탁에 올려진 여원의 구멍을 거나한 요리처럼 마음껏 맛봤다. 안쪽의 샘에서 줄줄 흐르는 애액은 밖으로 나오는 족족 제헌의 입 안으로 꿀꺽꿀꺽 삼켜졌다. 녹진녹진하게 풀린 속살이 꼿꼿하게 일어선 혀끝에 마구잡이로 휘감겼다.

“흑, 으윽…… 흐으응…….”

“하아…….”

한참 동안 이어진 포식을 끝낸 제헌이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엉망으로 혼탁해진 여원의 시야에 투명한 액으로 번들번들해져 색이 짙어진 제헌의 입술이 들어왔다. 지독하게 외설적이고 낯뜨거운 풍경이었지만, 정작 제헌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흥건하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슥 훑어낼 뿐이었다.

“흐…… 으어엉…….”

진득하게 녹아내린 구멍이 살짝 벌어진 채로 빠끔거렸다. 감당 안 되는 쾌감과 수치심에 여원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뻣뻣하게 일어선 제헌의 성기가 구멍을 단번에 꿰뚫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쑥, 밀려 들어오는 성기에 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는 너무 거대해서 받아들일 때마다 한참은 애를 먹었다. 그러나 손가락과 입술로 집요하게 애무당하며 여원의 몸은 이미 가볍게 절정에 달해 있었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구멍이 기다렸다는 듯 성기를 성큼 집어삼켰다.

“아, 흐으윽…….”

그 속이 완전한 제자리라고 낙인찍듯, 제헌의 성기가 여원의 안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한계까지 다리가 벌어졌다.

온몸에서 송골송골 땀이 솟아오르고, 머리가 웅웅 울렸다. 체온 때문인지 공기 때문인지 후끈하게 열이 오른 그 모든 것이 여원을 괴롭게 하고, 그럼으로써 또다시 흥분시켰다.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하, 여원 씨, 후으…….”

그러나 냉혹한 지배자는 결코 눈물 따위로 멈춰지지 않았다. 오늘 여원을 안달하게 하려고 단단히 작정한 셈인지, 제헌이 허리 힘만으로 성기를 여원의 몸 안 가장 깊은 곳까지 찔러 넣었다. 여원을 얼마나 흥분시킬 수 있는지 실험이라도 하듯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헌은 담금질하듯 꾸준히, 그리고 아주 눅진하게 성기를 박아 넣으며 여원을 집요하게 자극했다. 성기를 빼내고 다시금 안으로 밀어 넣을 때마다 완벽하게 짜인 제헌의 복근이 꿈틀거렸다.

“제헌 씨, 이제, 흣, 그만…… 저 좀…….”

성기가 쑥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빨려 나올 때마다 구멍 근처의 주름이 말려들었다가 이내 팽팽해졌다. 여원은 대놓고 조르지도 못하고 구멍을 움찔거렸다. 절정 직전의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되는 몸 때문에 여원은 그대로 기절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뭐요?”

“흑, 으응…… 흐윽……. 저, 흐, 가고 싶어요.”

목을 길게 젖힌 여원이 숨을 아슬아슬하게 할딱거렸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맨들맨들해진 여원의 성기에 손을 뻗은 제헌이, 예민한 귀두의 표피를 슥슥 문지르더니 곧이어 앞을 막아버렸다. 요도구에 손톱이 파고들자 두려움으로 성기가 빠르게 움찔거렸다.

“아, 으…… 흐으…….”

앞이 틀어막히자, 자극이 뒤로만 집중되었다. 좆을 한가득 문 구멍이 질척해지며 벼락같은 오르가슴이 내리꽂혔다. 절정감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눈을 반쯤 까뒤집었다. 여원이 허리를 크게 튕겼다.

“신음 참지 말고.”

“하, 흐윽, 앙…… 하앙…….”

입꼬리를 흡족하게 끌어 올린 제헌이 여원의 구멍에서 성기를 쑥, 단번에 뽑아냈다. 성기가 빠져나갔는데도 잔여물처럼 감도는 쾌감에 구멍 주변과 허벅지 안쪽이 푸들푸들 떨렸다.

제헌이 두꺼운 성기의 둥그런 끄트머리를 젖은 구멍에 장난치듯 비벼대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원의 발간 몸을 감상했다. 여원이 눈물을 줄줄 흘려대며 입술을 꼭 깨물자, 질퍽해진 구멍 위로 문질거리던 성기를 다시금 콱 쑤셔 박았다.

“하, 여원 씨…… 후, 후으.”

“흑, 응, 으으응…… 앙!”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원은 농염하게 무르익은 페로몬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덕분에 한층 흥분한 제헌의 허릿짓이 거세졌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제헌이 여원의 안에 비대하게 발기한 성기를 전력으로 박아댔다.

“학, 흐읏, 응, 하앙…….”

제헌의 성기에 내벽이 퍽퍽 부딪히는 순간, 여원의 눈앞이 주황으로, 노랑으로, 또 하양으로, 그렇게 쉬지 않고 깜빡거렸다. 애액으로 흠뻑 젖어버린 아래에서는 아주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민망하리만큼 질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쾌감에는 역치라는 것이 없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한계구나 싶을 때마다, 제헌은 그 이상으로 흥분을 끌어 올리며 여원이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을 선사했다.

“하으읏…….”

발딱 일어선 여원의 성기가 만져지지 않은 채로 희멀건 액을 토해냈다. 멀티 오르가슴의 여운으로 사지가 저릿해진 여원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제야 흡족한 듯, 제헌의 정액이 후드득 배 위로 흩뿌려졌다. 동시에, 제헌이 여원의 몸 위로 페로몬을 퍼부어버렸다.

“하, 으으, 흐으…….”

질식할 것만 같은 소유욕과 집착이었다. 여원은 더는 달아나려고 해도, 그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직감했다.

* * *

유유한 강물처럼 흐르는 두 사람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여원은 나날이 꽃피어갔다. 생기가 돌기 시작한 여원의 얼굴에는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나긋한 부드러움이 배어났다. 제헌이 그 어떤 경계심도 없이 품에 착 감겨드는 여원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었다.

“자꾸 쳐다보시니까 부끄러워요.”

최근처럼 마음이 편한 적이 없어서인지, 여원은 실제로 외모에 한창 물이 오르기도 했다. 숱이 많은 밤색 머리칼에는 윤기가 흘렀고 우유색 피부는 티 없이 촉촉하고 매끈매끈했다. 제헌의 시선을 의식하자 살짝 도톰하게 부어오른 볼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저를 향해 오롯이 쏟아지는 애정을 끊임없이 흡수하는 연갈색 눈동자는 총기로 반짝거렸다. 여원의 간지러운 타박에도 제헌은 시선을 돌리기는커녕,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원의 자그마한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여원 씨야말로, 자꾸 이렇게 예뻐져서 어떡하지.”

“하아…….”

“이래서야 집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가 않잖아요.”

이미 충분히 집 밖으로 안 내보내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좀 웃기게 들려 여원이 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헌이 여원의 입가 주변에 부드럽게 팬 볼우물을 톡톡 두드렸다. 나른한 아침 햇살이 서로를 사분사분하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몰캉몰캉 감겨들었다.

“포도 먹여줄까요?”

최근 들어 제헌은 출근하기 전 여원을 제 무릎에 앉히고 아침 식사를 했다. 밥 먹는 시간에 떨어져 있는 것도 아깝다는 제헌의 고집에 못 이겨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제헌의 하반신을 깔고 앉는 것이 못내 어색하고 불편해서, 정말 이래도 되는지.

“저 아기 아니에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알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몇 번 앉아 버릇했더니 여원은 제헌의 품에서 온통 예쁨받는 일이 금세 좋아졌다. 제헌과의 섹스는 여전히 버겁고 힘들어, 가끔은 온몸이 통째로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제헌이 이끄는 대로 순간의 고됨을 버텨내면 단지 쾌락뿐만이 아니라, 오롯한 애정 역시 여원을 찾아왔다.

“오물오물 잘 먹고 예쁘네.”

음식을 잘 먹는다고 칭찬을 받다니. 친부모도 이 정도의 애정 표현을 해준 적이 없었다. 열없는 기분에 여원이 손가락을 들어 볼을 슬쩍 훑어내렸다.

폭력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난 여원은 언제나 잔뜩 주눅이 들어 주변 눈치를 살피는 데 익숙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얻어맞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스스로 의사를 표현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체득한 방어적인 태도가 일상에도 녹아들어, 언젠가 제헌이 지적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하게 됐다.

“제헌 씨도 이거 드세요.”

쭈뼛거리던 여원이 용기를 내어서 포도 껍질을 벗기고, 탱글한 알맹이를 제헌에게 내밀어봤다. 여원이 손을 움직거리는 모양을 빤히 바라보던 제헌이 픽 웃으며 입술로 포도를 받아먹었다.

제헌만은 달랐다. 여원이 무슨 말을 해도 그가 화내거나, 갑작스럽게 태도를 돌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정답을 말하면 기꺼이 칭찬해 주겠지만, 오답을 말한다 해도 비난을 퍼붓지는 않을 것이다.

“맛있네요.”

포도를 우물거리는 제헌의 입꼬리가 그림처럼 근사한 호선을 그렸다. 처음에 여원은 매사에 냉정하고 칼 같아 보이는 제헌이 무섭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제헌의 일관성 있는 엄격함은 언젠가부터 여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을 선사했다. 여원의 삶에서 언제나 결핍되었던, 동시에 가장 필요했던 무언가였다.

“저 이번에는 포도 말고, 무화과 먹을래요.”

저택을 풍성하게 드리운 밀월의 시간 동안 여원은 온실 속에서 자라는 화초처럼 모든 촉각을 그의 태양인 제헌에게 곤두세웠다. 제헌을 향한 욕망을 알게 된 이후로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스스로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 해봐요.”

그리고 제헌은 새싹처럼 움터 오르는 여원의 자아를 퍽 기꺼워했다. 무화과 껍질을 벗겨낸 제헌이 여원의 입 안에 달착지근한 과육을 넣어줬다. 저택의 주인은 숫제 여원을 입 안의 혀처럼 어르고 달래기만 했다.

“네에…….”

자꾸만 제헌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이유는, 사실은 제헌이 태어나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여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원치 않게 조숙해 애늙은이 소리를 자주 들었던 여원이지만, 제헌의 품 안에서는 예쁘고 귀한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존재 자체로서 소중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제헌 씨, 요즘에 저는 꼭,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아요.”

“그래요?”

“네. 예전에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오밀조밀한 입술로 무화과를 받아먹은 여원이 제헌 앞에서 수줍게 이야기했다. 제헌에게 듬뿍 예쁨받자 여원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났다. 성격도 훨씬 밝아지고,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 있는지도 몰랐던 좋은 자질들이 여원의 안에서 발현했다.

“이런 기분이 어떤 기분인데?”

제헌이 애착 어린 시선으로 여원을 촘촘히 내려다봤다. 미처 거기까지는 고민하지 못했다는 듯, 여원이 곰곰 생각에 잠겨들었다.

“제헌 씨랑 있으면, 음…… 행복해요.”

마침내 알맞은 단어를 찾아낸 여원이 제헌을 향해 함빡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행복이라는 건 항상 여원에게 멀게만 느껴지던 단어였다. 그러나 제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차곡차곡 축적되자 그러한 기억이 띠는 색깔이 행복이구나 실감하게 됐다.

“그거 잘됐네요.”

언제나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휘청이던 여원은 제헌의 품 안에서만큼은 오뚝하게 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여원에게 있어 이미 제헌은 삶의 지침이 된 것만 같았다. 제헌의 얼굴에 뚜렷한 충족감이 깃들었다.

“어, 그런데 제헌 씨 이러다 정말 늦겠어요.”

매일같이 밤에 섹스를 해댔으니 여원의 아침잠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를 따라 제헌의 출근 시간 역시 슬금슬금 늦어지고 있었지만…… 벌써 9시 다 되어가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었다. 바쁜 사람 발목 붙들고 싶지는 않아서 여원이 제헌을 재촉했다.

“아휴…….”

그럼에도 제헌이 출근하는 게 싫은 속내를 전부 숨기지는 못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게다가, 일주일 뒤면 선준이 저택에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자 덜컥 불안해졌다.

“왜 한숨을 푹 쉬어요.”

제헌이 여원의 얼굴을 꼼꼼하게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서 애정이 묻어나왔다. 확실히 제헌은 여원을 아껴주고 있었다. 애정을 확인하면서도 희미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황제가 애첩을 귀여워하는 것처럼 제헌에게는 이 순간이 일시적인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아니에요…….”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앞으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헌 앞에서 다른 의사 표현은 곧잘 하면서도, 여원은 차마 그 질문만큼은 꺼낼 수가 없었다. 묻지 못하는 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을 때 무너져 버리고 말 자신을 알아서였다.

불문율이 깨지면 두 사람 사이의 달콤한 균형 역시 흐트러질까 두려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실하게 느끼는 행복이니, 여원은 다만 일주일이라도 더 즐겨보고 싶었다. 그동안만이라도 같이 있어달라는 얘기는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데.”

커다란 눈동자가 망설임으로 일렁거리자, 제헌이 여원의 속내를 금세 꿰뚫어 보았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집요하게 훑어내리는 시선에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몸을 살짝 뒤로 젖힌 여원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냈다.

“베갯머리송사라도 한번 해보지 그래요?”

“제헌 씨…….”

“이 얼굴로 말하면 무얼 부탁하든 당해낼 재간이 없겠는데.”

얕은 농담처럼 내뱉어졌지만, 어서 제 앞에서 이야기를 해보라는 뜻이 전해졌다. 감히 자신이 그런 말을 꺼낼 자격이 있나 싶어서 여원의 마음이 묵직해졌다.

“나도 여원 씨 상대로 욕심 충분히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원 씨는 착하고 예쁘게 다 받아주잖아요?”

“아…….”

“그러니 여원 씨도 원하는 게 있다면 직접 나한테 표현해 봐요.”

제헌의 질문이 어쩐지 시험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원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욕망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일련의 과정은 사람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그로 인해 여원의 안에서 새롭게 생겨난 생명력이 거칠게 맥동했다.

“제헌 씨 회사 안 갔으면 좋겠어요.”

“오늘?”

냅다, 내질러버린 여원이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제헌이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역시 뻔뻔하기는 했다. 금세 시무룩해진 여원이 고개를 숙이려 하자, 제헌의 손이 여원의 턱 끝을 가벼이 들어 올렸다.

“하아…….”

그대로 시선이 같은 높이에서 맞닿자 마음이 찰랑거렸다. 이제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왈칵 서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오늘 말고요. 아니, 오늘도 그렇지만, 그 뒤로도…….”

제헌이 자꾸만 받아주니까 어리광이 느는 건지, 여원은 저도 모르는 사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택에서 혼자 제헌을 기다리는 시간은 나날이 더디게만 흘렀고, 선준이 떠나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쩌지. 오늘은 해외 바이어들을 만나야 해서 회사에 가봐야겠는데.”

“아…….”

“또 얘기해 봐요. 그러면 내가 들어주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여원의 변화는 단순히 저속한 섹스에 익숙해지고, 제헌에게 성적으로 흥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새롭게 태어난 여원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제헌이 가르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출근 안 하시면 좋겠어요.”

“더 해요.”

“저 혼자서만…… 하루 종일 제헌 씨 보고 싶고, 가지고 싶어요.”

두 사람 사이에서 집착과 소유욕은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매 순간 제헌은 여원에게 욕망의 대상이었다. 태어나 처음 탐내고 원하게 된 것을, 여원은 오롯이 저 혼자서만 거머쥐고 싶었다.

“하하.”

그리고 언제나처럼 제헌은 여원이 자신에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퍽 기껍게 여겼다. 자발적으로 저를 원하는 여원을 오래 응시했다. 그동안 거의 자아라는 게 없다시피 했던 여원을 새롭게 창조해 냈다.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보죠.”

“네? 제헌 씨가요?”

“선준이가 돌아오기 전에 여원 씨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네요.”

“진짜 그렇게 하셔도 돼요? 많이 바쁘실 텐데.”

“내가 대표인데 그 정도 일정 조절도 못 할 것 같습니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 비단 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여원의 심장이 빠듯하게 뛰어올랐다. 원하는 것을 직접 표현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경험이 여원에게 섹스처럼 황홀했다.

“그러니까 오늘 여원 씨는 통키랑 집 잘 지키고 있어요.”

부드럽게 타이르며 제헌이 흐트러진 여원의 앞머리를 꼼꼼히 쓸어넘겼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 특별히 애착이 가는, 아름다운 피조물을 지켜보았다. 제헌의 표정이 얕은 수준의 전능감으로 젖어들었다.

“네, 네!”

여원은 벅찬 기분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제헌의 품에서 여원이 새롭게 태어났으니, 제헌이 그런 여원을 이따금 아이처럼 대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감각의 정글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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