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위로의 본질
무거운 눈두덩이를 애써 들어 올려보아도 시야는 여전히 잿빛이었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여원은 얼굴을 매만지는 손가락에 잠에서 반쯤 깨어났다. 뺨을 가볍게 그러쥐는 손길은 서늘하면서도 다정했다.
“으응.”
심연에서 현실로 끌어내는 것처럼, 바닥이 없는 늪에서 뭍으로 건져 올리는 것처럼. 하지만 아직 여원은 수면 위로 올라올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몽롱함에 젖어들고만 싶어서, 고집스럽게 눈을 꼭 내리감았다.
“여원 씨.”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근사한 저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지덕지 묻어 있던 졸음이 단박에 달아나버렸다. 여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무 오래 자서 깨웠어요.”
“아…….”
“더 자려거든 밥 먹고 자요.”
제헌이 또렷한 시선으로 여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아 아침이 밝았는데도 어둑한 방 안에서, 희고 서늘한 제헌의 얼굴만이 빛의 근원처럼 환했다.
부스스 흩어진 머리를 한 여원이 눈을 끔뻑거렸다. 제헌 씨가 대체 여기에 왜……. 얼떨떨한 기분에 뭐라고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러자 침대맡의 통키가 대신 제헌에게 여원을 좀 봐달라는 것처럼 크릉거렸다.
“흐, 읏…….”
제헌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여원의 이마를 짚었다. 이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는 귀밑과 목덜미의 경계에 있는 연한 살갗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차끈한 손길이 닿은 피부에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지만, 정작 여원을 만지는 제헌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어디 아픕니까?”
아, 열을 재보려고 한 거였구나. 여원은 멍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히 잠에서는 깨어났지만, 주변 공기에 스며든 제헌의 페로몬 때문인지 시야가 뿌예지고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것만 같았다. 여원이 저도 모르게 젖은 숨을 길게 뱉어내자, 제헌의 눈매가 좁아졌다.
“요즘 잠을 좀 많이 자는 것 같네.”
“……그러게요, 저도 모르는 사이 피로가 쌓였나 봐요. 원래 이렇게 잠을 오래 자지는 않는데.”
꾸중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제헌이 담담하게 지적하자 여원은 다소 위축되었다. 저보다 한참은 어른 같은 제헌이 풍기는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혼나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원 씨한테 간섭하려는 건 아니고.”
무언가 덧붙이려다 말을 삼킨 제헌은 실제로는 여원에게 개입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요사이 여원은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이상 잠을 잤다.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온종일 침대 위에서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그게요.”
최근 잠에만 빠져드는 것이 사실은 도피성이라는 걸 여원 스스로도 알았다. 시무룩해진 여원이 이래서야 제헌을 볼 낯이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겁먹은 표정입니까.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제헌이 웃음기 섞인 질문을 건네자 여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맥이 탁 풀리자 달콤한 탈력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담백한 걱정이었지만,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어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픈 데는 없다니 다행입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선 제헌은 말과는 다르게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장막처럼 드리우던 제헌의 페로몬이 느릿하게 거두어졌다. 멀어져 가는 제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이유 모를 조바심이 일었다.
“아, 지금 출근하시는 길인 거죠?”
비척비척, 여원도 제헌을 따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톰한 이불이 여원의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덕택에 속이 비치는 얇은 잠옷이 훤히 드러났다.
자그마한 꼭지가 뾰족하게 도드라진 판판한 가슴 부근에 제헌의 시선이 흘긋 닿았다가 떨어졌다. 경황이 없는 여원은 흐트러진 옷가지를 제대로 갈무리하지도 못했다.
“일어난 거 봤으면 됐어요. 안 와도 돼요.”
“그래도요.”
제헌이 여원을 깨우려고 저택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괜한 걱정을 끼쳐서 방까지 발걸음 하게 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기분에 여원 역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
앞서 나가는 제헌을 쫓아 여원이 계단을 쫄랑쫄랑 따라 내려왔다. 제헌의 보폭은 여원보다 한참 컸다. 걸을 때 그리는 선마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끔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슈트 차림으로, 바깥 세계로 나갈 만반의 채비를 마친 채였다.
“안 나와도 된다니까.”
성큼성큼 앞을 나아가던 제헌이 머리는 까치집을 해서는 현관까지 종종걸음으로 쫓아 나온 여원을 보고는 픽 웃어버렸다. 그 웃음에 여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에서 덜 깨서 꾀죄죄한 자신과는 다르게, 완성된 남자인 제헌이 오늘따라 근사해 보였다. 그런 제헌과 같은 공간에서 나란히 호흡하는 것만으로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게 여원이 시선을 내리깔았을 때였다. 구두를 신느라 상반신을 굽힌 제헌의 넥타이 매듭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게 완전하고 완벽했는데, 딱 그곳 하나만이 그답지 않았다.
“……저기.”
여원은 그를 향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여원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목덜미 부근을 배회하자, 제헌이 턱 끝을 슬쩍 들어 올렸다. 의아한 듯 여원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제헌 씨 넥타이 매듭이, 조금 뭉개져 있어서요.”
여원은 거리를 좁혔고, 제헌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손끝이 부드러운 실크에 닿았다. 침을 꿀꺽 삼킨 여원이 넥타이의 매듭을 다듬는 것에 집중했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매혹적인 페로몬과 언젠가 직접 골라주었던 향수의 향이 어지러이 넘실거렸다.
“이제 됐어요.”
입술을 잘근 깨물고 뒤로 홱, 물러난 여원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만연해진 페로몬에 가까이 닿은 것만으로도 피부 위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단지 제헌을 도와주려 했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
손끝에 따끔따끔한 기운이 번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와중에도, 여원은 제헌의 강인한 턱선과 단단하게 뻗은 목덜미 부근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요.”
제헌은 여원의 녹녹한 시선을 조금도 멋쩍은 기색 없이 받아들였다. 압도적인 미남자는 얕게 웃어 보이더니, 언젠가 통키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을 뻗어 보풀처럼 일어난 여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수리를 푹 뒤덮어오는 커다란 손바닥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흐…….”
그러면서도, 손가락 끝의 단단한 촉감은 다른 의미로 오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내리감은 여원은 사심 없는 손길에도 동요하고 말았다. 얕은 자괴감을 느꼈다. 파르르 떨리는 목덜미에 제헌의 시선이 닿을까 조마조마해졌다.
“여원 씨. 그럼 오늘 하루도 잘 보내고.”
“…….”
“이따 저녁에 봅시다.”
현관까지 나온 것이 무색하게도, 잔뜩 긴장해 버린 여원은 잘 다녀오라는 인사조차 제헌에게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통키가 대신 야옹, 앙큼하게 울어대며 제헌을 배웅했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자, 난연히 쏟아지는 빛줄기 사이로 제헌이 거침없이 나아갔다.
“아…….”
제헌이 떠나간 후에도, 여원은 멍해진 기분으로 한참을 현관에 서 있었다. 묵직하고 뜨끈한 덩어리가 목구멍에 느릿느릿 차올랐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방금 제 행동이 과하지 않았나 싶었다.
넥타이 매듭을 만져 주다니, 선준이한테도 안 하던 짓을 하고 정말이지 미쳤다. 쪽팔려…….
“으, 정신 차리자!”
하지만 금세 이런 기분조차 사실은 자의식 과잉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은 여원이 통키를 가슴에 안고는 보송보송한 정수리에 코끝을 푹 파묻었다.
* * *
아침나절부터 침대에서 제헌을 마주했더니, 차마 오늘 하루는 꾸벅꾸벅 졸면서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제헌의 걱정은 여원을 충분히 환기시켰다. 간지러운 긴장감과 함께, 저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으니 자연히 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아가 좀 움직이려고 하니까, 오늘은 우리 통키가 피곤한가 보네.”
느지막이 아침밥을 먹은 여원이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몸을 일으켰다. 계속해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사이 잠에 톡 곯아떨어진 아기 고양이를 내버려둔 채, 홀로 정원을 향했다.
가을이 도래하는 정원에는 나뭇잎이 얼룩처럼 알록달록하게 물들어갔다. 여원은 요염하게 농익은 꽃잎이 풍기는 새큼한 향을 훅 안으로 들이마셨다. 풍경이 여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다채롭게 무르익어가는 식물들과 대조적으로, 메마른 몸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여원은 버석버석 가라앉아 있었다. 까맣고 촘촘한 속눈썹이 바람결에 무심코 흩날릴 때마다, 깊이 침잠한 텅 빈 눈빛이 힘없이 드러났다.
“하아…….”
선준이 떠난 후 여원은 이따금 아득하도록 멍해지고는 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화내고 싸우고 열을 올릴 때는 그렇게라도 정신이 팔려 상실감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러나 분노할 대상이 사라지자 한발 늦게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원래도 유순하고 여린 성격인 탓에, 악바리처럼 달려들었던 것도 사실은 위악에 가까웠다. 방향성을 잃어버린 분노가 녹아내린 자리에는 탈력감만이 남았다. 그동안 나는 이 모든 것을 버텨내느라 지치고 버거웠구나, 그제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왜 하선준이 가고 없어도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것 같지.”
선준이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발버둥 쳤지만, 여원에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인터넷에는 알파의 이혼 거부로 발이 묶인 여원과 비슷한 처지의 오메가들이 모여 인권 운동을 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는 않았다.
‘냐아, 냐아.’
환청처럼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눈을 푹 내리감았다. 최근 여원은 의식적으로라도 통키에게 애정과 관심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저보다 더 가련한 생명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은 삶에 대한 의지를 조금은 불어넣어 주었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통키를 위해서라도, 여원은 지금까지처럼 저의 삶을 휘어잡으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맥없이 휘둘리거나 휘청거려서는 안 됐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다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에휴…….”
축축 늘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밖에 나온 건데, 화사하게 물드는 정원 한복판에서 도리어 초라하고 막막한 기분이 짙어져 버렸다. 깨어 있을 때는 늘 나란히 붙어 있던 통키가 곁에 없어서인 것 같기도 했다.
허벅지 부근을 가볍게 털어낸 여원이 나무 벤치에서 일어섰다.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서, 통키 밥도 챙겨주고 쓰다듬어주고 해야겠다. 그래도 여원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생명을 보살피는 데서 하루의 의미를 찾았다.
“통키야, 형아 왔어!”
그런데 정작 저택에 들어서자, 동그란 쿠션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던 통키가 온데간데없었다.
“어, 이상하다?”
벌써 일어났나? 여원이 주위를 바쁘게 두리번거렸다. 쿠션에 손을 대보자 따끈한 기운과 함께 아기 고양이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훅 퍼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 통키가 어디에 있을까?”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몸을 다시금 일으킨 여원이 2층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양이를 찾았다. 통키가 좋아하는 침대 밑 어두운 곳이나 키 큰 찬장 위를 살폈지만 허사였다. 여원의 방에 있는 벽장까지 열어봤지만, 그곳에도 통키가 없었다. 여원은 슬슬 불안해졌다.
“통키야, 통키야! 어디 있어?”
손끝이 차가워지고, 시야가 어지럽게 출렁거렸다. 통키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원은 공포를 느꼈다. 아직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힘들어하니, 분명히 2층에 있을 텐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자고 있던 애가 꼼짝없이 어디를 가버린 건지. 쿵쿵 뛰어오르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여원이 바쁘게 종종거렸다.
“헉, 통키야!”
그러다가, 여원은 복도 끝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틀 위에 앉은 고양이가 창밖을 향해서 짧은 발을 휘휘 뻗고 있었다. 언제 균형을 잃어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태한 모습이었다. 여원이 창문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아, 세상에…….”
금방이라도 난간에서 밖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통키를 여원이 품에 덥석 끌어안았다.
야옹!
여원은 통키를 간신히 낚아채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창문 밑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단 몇 분이라도 늦었다면, 이대로 통키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시큰한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여원이 가슴께에 안은 통키를 더듬어 내렸다.
“통키야, 이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냐아, 냐옹!
여원은 아직도 얼굴이 희게 질린 채였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런 여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통키는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여원의 품에서 스르륵 내려온 통키가 꼿꼿하게 일어선 꼬리를 흔들며 균형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이렇게 창문을 열어두면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야.”
통키를 되찾고 나서 한차례 크게 놀란 마음이 가라앉자, 뜨끈뜨끈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올라왔다. 여원이 정원에 나갈 때만 해도 굳게 닫혀 있었던 창문은 조금의 안전망도 없이, 보란 듯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 화사한 가을 햇살이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자 여원은 속이 엉망으로 울컥거렸다.
일전에도 통키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뻔한 적이 있었다. 청소할 때도 2층 창문을 꼭 닫아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사용인들은 또 한 번 여원의 말을 흘려들었다. 고양이를 보살피는 것이 여원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누구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
저택의 사용인들은 여원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거리를 두었다. 여원 역시 언젠가부터는 그들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런 식으로라도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려 했다. 여원이 목소리를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통키가 크게 다칠 뻔했을뿐더러, 계속해서 창문을 열어놓는다면 통키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적어도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쿵쿵, 여원은 거친 발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저기요.”
사용인은 1층에서 마른걸레로 도자기를 닦고 있었다. 아무래도 청소를 하던 중 환기를 하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었던 모양이다. 여원이 비장한 얼굴로 사용인에게 말을 걸었다.
“네, 여원 님.”
지극히 냉랭한 낯을 한 사용인이 한발 늦게 여원을 돌아보았다. 존칭을 썼지만 존중하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당장 선준이 여원을 대놓고 무시하는데, 이 집 사용인들이라고 예의를 갖추고 여원을 대할 리가 없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2층 창문 문 열어두신 거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만.”
“……하.”
“혹시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여원의 발치에 있는 통키가 저를 봐달라는 듯 낑낑거렸다. 그러나 그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사용인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통키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자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고양이를 위해 창문을 닫아두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사용인은 여원의 부탁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시당하는 일이 반복되자 말문이 턱 막혔다. 사용인의 태도는 여전히 싸늘하기만 해서, 이 저택에서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고양이가 밖으로 나갈 수도 있으니까, 창문을 닫아달라고요.”
“…….”
“아까도, 제가 조금만 늦게 갔으면 통키가 그대로 떨어질 뻔했단 말이에요!”
첫 마디를 내뱉는 순간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눈에 띄게 흥분한 여원은 저택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사용인을 감정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사용인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원을 아무런 미동 없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2층 창문은 잘 닫아두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인은 감정이 격앙된 여원에게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 싸늘하고 사무적이기만 한 태도에 여원은 자존심이 엉망으로 뭉개지는 듯했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했고, 고양이를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하느냐고, 사용인은 눈빛으로 여원에게 묻고 있었다.
“이거 그냥, 그냥 죄송하다는 말로 되는 거 아니잖아요.”
“…….”
“이대로 잘못돼서, 혹시 다치거나, 통키를 잃어버리기라도, 흐…… 했으면…….”
통키를 잃어버린다, 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크게 사무쳤다. 목덜미를 뒤로 젖힌 여원이 복받치는 울음을 꾹꾹 삼켜내기 위해 애를 썼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용인은 기계적인 사과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제야 여원은 통키가 열린 창문에서 밖으로 떨어질 뻔했던 일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중대하고 심각한 일이어도 사용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제가 평소에 이 저택에서 받는 취급을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제가 처한 상황이 객관적으로 인식되자 여원은 서러우리만큼 허무해졌다.
“하…….”
자존심이 뭉개지다 못해, 이제는 저의 존재 자체가 바닥 밑으로 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원은 말없이 사용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런 여원에게 위로라도 건네듯 통키가 발목에 머리를 문지르자 더더욱 비참한 기분에 휩싸이게 됐다.
* * *
조도가 낮은 등 하나만 켜둔 여원이 2층 소파에 길게 몸을 뉘었다. 착잡한 기분으로 윤기가 흐르는 통키의 새까만 털을 살살 쓸어내렸다. 두어 번 여원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내던 통키는 무언가에 시선이 팔렸는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냥, 냐아앙.
낮잠을 자고 나자 금세 컨디션이 좋아졌는지, 통키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거실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계속 소파에 누워 있기만 하는 여원이 이상하다는 듯,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고개를 빼꼼 돌리고는 샛노란 눈으로 여원을 응시했다.
“하아…….”
통키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울컥 올라온 감정이 차근히 진정되자, 조금 전에 사용인에게 엉망으로 언성을 높였던 일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실제로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여원은 평소 지나치리만큼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통키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자, 오늘만은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사용인을 무작정 몰아붙였다. 지금껏 살면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방식은 무척이나 서툴고 극단적이었다.
사용인의 앞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나서야, 여원은 지금 제가 감정적으로 몹시 위태로운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내내 괜찮은 것 같다가도, 어떤 계기로든 감정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짚더미 위에 선 것처럼 모든 게 아슬아슬했다.
“제헌 씨한테 혼나면 어떡하지.”
사용인에게 못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통키는 실제로 위험에 처했고,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이번 기회에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다만 사실상 더부살이 중인 제헌의 저택에서 잡음을 일으켰다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제헌이 저를 저택에 머무르게 해준 것은 순전한 호의였다. 그래서 여원은 제헌에게 더는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제헌의 손길을 받으며 힘내겠다고 생각한 지 하루 만에, 그에게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릴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여원 씨.”
착잡한 마음에 어두컴컴하게 내려앉는 통창 밖을 멍하니 건너다보고 있을 때였다. 2층에 들어선 제헌이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여원의 이름을 불렀다.
“아, 네!”
써늘하고 매캐한 바깥 공기가 제헌이 입고 있는 슈트 재킷의 옷깃에서 훅 묻어났다. 여원은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던 몸을 꼿꼿하게 일으켰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네, 네…….”
금방이라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여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차라도 가볍게 들어요.”
제헌이 이끄는 대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2층에 오기 전 사용인을 통해 준비해 놓았는지, 고풍스러운 나무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다과와 도자기 찻잔이 놓여 있었다.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여원은 유독 제헌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여원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작게 웅얼거렸다. 혀끝에 따끈하게 닿는 차에서 시원한 민트향이 풍겼다.
껄끄럽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평온한 향을 풍기는 허브티를 마시자 긴장이 한층 완화되었다. 불안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자, 건너편에 앉아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제헌이 의식되었다.
“…….”
“…….”
마음이 얕게 일렁거렸다.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여원이 손끝으로 꾹꾹 눌러보았다. 혼내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겠지. 의연하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전전긍긍한 마음이 들었다. 제헌 씨 화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걸까? 사용인과는 다르게, 제헌은 조금도 받아칠 여지조차 없어 보였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압니다.”
혼날 것을 미리 걱정하는 여원의 얼굴이 침울했다. 그런 여원을 또렷하게 응시하던 제헌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붉게 충혈된 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런 이유 없이, 여원 씨가 그런 행동할 만한 사람 아니잖아요.”
“아…….”
“내 앞에서까지 괜찮은 척할 필요 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어린 시절 부모에게 먼저 들어봤어야 할 말이었다. 그러나 부모에게는커녕, 여원은 살면서 비슷한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었다.
저릿한 감동이 퍼지고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개차반 같은 집, 의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여원을 궁지로 몰아붙였던 남편. 그런 여원을 가족이라고 말하며 보살펴준 사람은 하제헌 단 한 명이었다. 사실은 진짜 가족이 아닌데도, 여원에게는 가장 가족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게, 고양이가……. 창문에서 떨어질 뻔했거든요. 저는…… 너무 놀라서, 잘못 했으면 그대로 통키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
“통키는, 제가 아니면……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도, 저 혼자 너무, 흥분해서…… 죄송해요.”
여원은 제헌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게끔 잘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욕만 앞서는 채로 머릿속은 자꾸만 엉켜들어서 말들은 분절된 형태로 쏟아져 내렸다.
“제헌 씨, 제가, 흐, 제가요…….”
“네, 여원 씨.”
그러나 사실 여원이 제헌에게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통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안 괜찮은 것 같아요.”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연약한 진심을 다른 누군가에게 꺼내 보인 여원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나한테 진작 말을 하지.”
“흑, 으윽…….”
“왜, 나한테 혼날까 봐요?”
제헌의 목소리는 다정하다 못해 유혹적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의 속사정을 모조리 다 털어놓고 싶은 본능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붙잡는 이성이 치열하게 다퉜다. 제헌이라면 전부 다 이해해 줄 것 같다가도, 동시에 그를 상대로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여원 씨.”
턱 끝을 느릿하게 매만진 제헌이 그대로 여원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수려하게 다듬어진 제헌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빛났다.
제헌의 손끝이 아침에 만졌던 여원의 귀밑과 목덜미의 경계 부근을 슥 쓸어내렸다. 그대로 아랫배가 확 달아올랐다. 본능이 이성을 제압하는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아…….”
원래대로라면 내뱉어야 했을 괜찮아요, 라는 말 대신 눈물이 퐁퐁 터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꾹꾹 눌러왔던 울음이 터지자 여원의 희고 자그마한 얼굴이 금세 푹 젖었다.
“그때, 흑…… 제가 피임을 분명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선준이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거기다 아이까지 잃어버리고 나니까, 흑, 너무 힘들어서…….”
“…….”
“그래서 이혼하려고 했는데, 가족들은……. 제가 이혼하면, 돈 때문에…… 안 된다고 하고. 그치만 저는 가진 게 하나도 없는데, 변호사도…… 제가, 열성 오메가라고…….”
혼자서만 끙끙 앓아야 했던, 그래서 안에서 곪다 못해 지독한 악취와 함께 썩어가고 있던 것들을 여원이 와르르 토해냈다.
두서없이 쏟아내는 말들을 제헌이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그러나 제헌의 시선은 여원에게 집요하게 머물렀다. 이내 서늘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래서 여원 씨가 선준이랑 이혼하고 싶었는데 이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이야기네요.”
제헌은 여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 으윽, 네에.”
여원은 양 뺨이 다 젖도록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헌이 알아주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뻐근하도록 벅차올랐다. 물론 지금 저를 부드럽게 달래주는 사람은 선준의 형이었다. 그렇지만…….
“하아.”
제헌이 끓는 듯한 한숨을 뱉어냈다. 자연스럽게 건너편의 여원 옆자리로 이동했다. 여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당연하다는 듯 작고 여린 몸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여원은 그대로 제헌의 품에 안겨들었다. 여원이 훌쩍훌쩍 눈물을 쏟아내는 동안 제헌이 규칙적인 손길로 마른 등허리를 토닥거렸다.
“아, 흐으, 으…….”
이렇게 누군가의 앞에서 마음을 터뜨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녹아버릴 듯이 달콤한 안정감에 그대로 잠겨들고 싶다가도, 심장 부근 어딘가가 뜨끔뜨끔해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품에 안겨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으윽, 흑…… 으…….”
제헌은 꼼꼼한 시선으로 여원을 쓸어내리며, 발갛게 부풀어 오른 눈가를 슥슥 문질러주었다. 당혹스러울 만한 상황에서도 제헌은 평정을 쉽게 잃지 않았다. 여유로운 얼굴에 희미한 포만감이 묻어났다.
“이제 다 울었어요?”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낸 후에야 여원의 들썩임이 잦아들었다. 더 이상은 울려고 해봐야 몸에 남아 있는 눈물이 없을 것 같았다.
“흑, 크응.”
울음을 그친 여원이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제헌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새빨개진 코끝을 훌쩍이는 여원을 보고 제헌이 쿡 웃어버렸다.
“…….”
그렇게 한바탕 울어 젖히고 나자, 창피하고 어색한 한편으로 마음이 후련하기도 했다.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여원의 얼굴이 새초롬했다.
“아, 아…….”
그제야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좀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색이 짙어진 입술이 나슨하게 벌어졌다. 여원이 뒤로 슥 물러났다.
“여원 씨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보호입니다.”
여원이 우는 것을 한참이나 지켜본 제헌이 내린 결론이었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나랑 같이 지내면서,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요.”
“…….”
“왜요, 내가 못 미덥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한참 동안이나 여원을 품에 안고 있던 제헌이 그제야 여원을 얕게 놓아주었다. 제헌을 빤히 올려다보는 여원의 얼굴은 여전히 엉망으로 일렁거렸다.
“그, 저기…… 제가 그분께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이 출근할 거니까요.”
“그렇지만 제헌 씨,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그 사람 해고한 것 아니고, 내가 부리는 사람을 인력 재배치하는 차원입니다.”
“아…….”
“그러니 혼자 앞서갈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여원 씨가 지금 남 걱정할 처지입니까.”
손끝으로 여원의 볼을 가볍게 톡, 건드린 제헌이 상황을 명료하게 마무리했다. 여원이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사용인을 맞닥뜨리는 불편한 상황도 피하고, 혹시나 통키 걱정도 할 필요도 없게끔 하는 방안이었다.
“그런데 제헌 씨…….”
“네, 여원 씨.”
제헌은 언제나 상황에 가장 적절하고, 여원을 위하는 완벽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았다.
“제헌 씨는,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세요?”
단순한 친절과 호의라기에는, 과분한 것을 받고 있었다. 황송할 만큼 좋고, 조금은 들뜬 기분이 들면서도 그에게 되돌려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껏 여원이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
제헌의 오른쪽 눈썹이 미세하게 이지러졌다. 순간 멈칫한 제헌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원의 질문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기색을 했다.
“여원 씨, 아직 유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적 안정이 중요합니다.”
“…….”
“저택에 머무르라고 권유한 것도 나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닐까요.”
그러나 제헌은 여원이 지나치게 감읍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담백한 태도로 자신의 책임을 설명했다.
당연한 것, 상식적인 것. 교과서에는 존재했지만 여원이 실제 삶에서 접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그것을 제게 보여준 사람 앞에서, 여원은 말문이 꽉 막혔다.
“아…….”
감동적이고 기쁜데, 마냥 기뻐해도 될지 조금 헷갈렸다. 그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감정은 설렘이고, 끝내는 상대를 향한 기대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냐앙!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전을 아프게 때릴 정도로 거세게 두근거렸다. 여원이 우는 동안 테이블 밑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얌전히 있던 통키가 슬그머니 기어 나왔다. 꼿꼿한 걸음으로 제헌에게 다가간 통키가 제헌의 발치에 꼬리를 살랑살랑 치댔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노골적인 애교에 제헌의 입가가 희미하게 들썩였다. 서늘한 손이 정수리 부근을 쓰다듬자 통키가 기분 좋다는 듯 가릉가릉 울었다. 제헌의 손이 워낙 커서인지, 그 아래에 감겨든 통키가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 통키요.”
“통키.”
제헌이 발음하는 통키의 이름이 여원의 귀에 낯설게 들렸다. 제헌은 성숙한 어른인 데 반해, 만화 캐릭터와 같은 유치한 이름을 고양이에게 붙인 자신은 지나치게 설익은 것만 같았다.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발음할 때 혀끝에 톡톡 터지는 느낌이 좋아서…….”
턱 끝을 까딱인 제헌이 고양이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선은 여원에게 빈틈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금세 피했겠지만, 여원은 이대로 그냥 좋았다. 살짝 음험하게 그늘진 제헌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는 것이.
“귀엽네. 연약하고.”
고양이를 매만지는 제헌이 툭, 던지는 말이 꼭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들려서 여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우느라 힘 다 뺏겠네. 오늘은 일찍 자고요.”
“네. 그럴게요.”
그대로 제헌이 돌아서자, 적당히 두툼한 근육으로 세밀하게 짜인 널찍한 등이 여원의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여원에게서 돌아서는 제헌의 뒷모습은 평소처럼 무뚝뚝했지만 오늘만큼은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
“제헌 씨, 있잖아요.”
“네.”
용건을 마친 후에는 저를 미련 없이 떠나는 제헌이 여원은 언제나 아쉽고 서운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를 붙잡아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고마워요.”
비굴하게 낮추며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상대로 감히 그런 감정을 품어도 된다면, 지금 제헌에게 드는 것은 차라리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고마움이었다.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제헌에게 전해졌으면 했다. 이 순간의 진심과 미래를 암시하는 미약한 설렘까지도.
“…….”
제헌은 대답 대신 가볍게 웃기만 했다. 바람 새는 듯한 숨소리가 여원의 귓가를 살랑살랑 간질였다.
“이제 진짜 어떡하지.”
제헌이 산뜻하게 떠나간 자리, 공기에 유유하게 배어 있는 페로몬을 여원이 푹 들이켰다. 무의식중에는 이대로 그에게 완전히 잠겨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며칠 전 저택에는 오래간만에 외부인이 다녀갔다. 지난번 제헌과 같이 방문했던 퍼퓨머리의 직원들은 각종 향료와 천연 오일, 스포이트와 시험관 따위를 품에 가득 안고 계단을 올랐다. 불과 몇 시간 만에 3층의 빈방에는 조향실이 탄생했다.
덕분에 최근 여원은 낮 시간 대부분을 3층에서 보냈다. 제헌이 여원을 위해 만들어준 조향실은 작지만 완성된,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세계였다.
새로워진 저택은 여원이 감히 욕심도 내보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헌은 여원이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모두 가져다주었다. 그래서인지, 한정된 공간에서 온종일 지내면서도 갇혀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여원이 원하는 모든 것이 손 닿을 거리에 자리해 있었다. 이렇듯 욕망이 손쉽게 충족되다니. 낯설기만 한 일이었다. 그동안 여원은 엉망으로 불안하거나, 피치 못한 상황에서 남들에게 기대야만 했다.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는 달콤한 의존은 언젠가 제헌이 말한 제대로 된 보호를 닮아 있었다. 향긋하고 온화한 유리 온실 안에서 여원은 언제나 완벽하게 안전했다.
단 하나, 이런 식으로 포근한 안락에 점점 길드는 것이 걱정되는 이유도 물론 있었다. 익숙해진 다음에는 헤어나오지 못할까 봐, 그렇게 영영 이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아니야, 당분간은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할래.”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괜히 뜨끔 찔리는 듯한 기분에 여원은 허공에 대고 변명하듯 되뇌었다.
“나도 그냥…… 가끔은 좀, 편하고 싶어.”
나중에 후회하는 대신, 여원은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오늘은 지난번 퍼퓨머리에서 유심히 눈에 담아두었던 향료들을 실험해 볼 참이었다.
스포이트를 이용해 시험관에 향료를 배합하기를 여러 번, 여원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 향수를 완성했다. 눈을 차분하게 내리깐 여원이 은은한 빛이 감도는 액체를 시향했다.
향기 입자와 후각 세포가 긴밀하게 맞물리며 작은 폭죽이 터뜨려졌다. 레몬과 베르가모트, 재스민, 머스크와 베티버가 뒤섞인 향이 산뜻하게 풍겼다. 화려하게 만개한 감각의 세계를 어서 제헌과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아…….”
오늘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도 제헌은 여원에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는 아무래도 여원을 아직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여원을 너무 잘 알고 있거나.
“요즘 진짜 왜 이러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기는커녕, 결국 조향실에서 보내는 하루는 어떤 식으로든 제헌으로 가득해졌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얼굴과 잔상처럼 젖어든 페로몬이 주변을 푹 감쌌다. 여원은 내내 제헌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어쩌면 최근 제헌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서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가까이 닿아 있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제헌을 향한 감각은 알알이 일깨워졌다. 하나하나 수줍게 피어나고, 금방이라도 터뜨려질 듯 예민하게 곤두섰다.
완성된 향수를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쥔 여원은 금세 나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촘촘한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거리고, 동그란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여원 씨.”
감각이 지나쳐 오히려 몽롱한 기분이 들려던 찰나였다. 불쑥 문을 젖히고 들어오는 인영을 향해 여원이 고개를 깜빡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초점이 맺히고, 수려한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여원의 얼굴이 저절로 밝아졌다.
“아직 3층에 있었네요.”
“제헌 씨! 벌써 오셨어요?”
몸을 반쯤 일으킨 여원이 저도 모르게 크게 반색했다. 저택에 들어온 뒤로 내내 시들어가던 여원에게 제헌의 존재가 다시금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흠.”
대답 대신 눈으로만 웃어 보인 제헌이 여원에게 가까워졌다. 이래서야 꼭 하루 종일 그를 기다리고만 있던 사람 같지 않은가. 여원은 멋쩍어졌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마는.
“아, 흣…….”
그러나 여원이 더는 민망하지 않도록, 제헌은 능숙하게 작은 몸 위로 상반신을 드리워왔다. 부드럽게 퍼지는 페로몬에 여원이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그러곤 제헌에게 고개를 느슨하게 들어 올렸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서늘한 무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제헌 앞에서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요?”
여원을 내려다보는 제헌의 눈매가 은근하게 휘어졌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정원을 지나와서인지, 제헌의 페로몬에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제헌이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본능적인 긴장이 일었다. 그러다가도 저에게만 오롯이 쏟아지는 관심이 다디달아서 경계심이 금세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통키 밥 주고 둘이 같이 놀다가…….”
“…….”
“아, 또, 오늘은 향수를 만들어봤어요.”
향수를 만드는 내내 제헌을 생각했기 때문인지, 괜히 쭈뼛거리게 됐다. 여원이 대답을 마치자 제헌이 꼼지락거리는 손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아한 손가락이 향수를 가볍게 들어서 거두어갔다.
“베르가모트?”
향수를 코 근처로 가져간 제헌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혀들었다. 하지만 향기를 맡는 동안에도, 제헌의 시선만은 여원을 핥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크게 마음고생을 하고 난 여원은 최근 분위기가 부쩍 묘해졌다. 임신해 있는 동안 약간 부풀었던 몸은 유산한 이후로는 잘못 만지면 바삭 부서져 내릴 것처럼 마르고 새하얬다. 얌전히 내리깔린 새까만 속눈썹이 이따금 깜빡거리면 텅 빈 눈빛이 드러났다.
하루 중 그 눈빛에 생기가 도는 순간은 제헌을 마주 대할 때뿐이었다. 제헌을 향해 입꼬리만 슬쩍 끌어 올리며 웃어 보이는 말간 얼굴은 애처로운 한편으로 야릇한 감각이 묻어났다.
“아…….”
“…….”
여원도 지나치리만큼 집요한 제헌의 눈빛을 금세 알아차렸다. 여원이 작게 머뭇거리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제헌은 결코 여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어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밀착해 있는데도, 둘러싼 상황이 부담스럽기보다는 설레고 은근하게 느껴지는 것 역시 신기했다.
“맞아요, 탑 노트는 베르가모트이고……. 아마 제헌 씨도 후각이 예민해서 잘 아시겠지만…… 레몬이랑 재스민, 그리고 머스크도 살짝 섞었거든요.”
“네, 평범한 재료인데 향은 특별하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헌이 턱 끝을 짧게 까딱였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 자신의 말에 이렇게까지 귀 기울여주고, 집중해 준 적이 있었던가?
“요즘 훨씬 보기 좋네요.”
“네?”
제헌이 손가락을 뻗어 여원의 입술 끝을 톡 건드렸다. 그제야 여원은 자신이 제헌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선준과 결혼한 뒤로 사실 웃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제헌 앞에서는 이렇게 웃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에 여원이 조금 놀랐다.
“이제 살만 좀 더 찌면 되겠어요.”
만약 선준이 했다면 질색했을 말들조차도, 제헌의 입에서 나오면 간섭이 아니라 관심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여원의 목덜미 부근을 끈끈하게 타고 흐르는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손을 머뭇머뭇 들어 올린 여원이 도드라진 목선을 감싸듯이 쓸어내렸다.
“처음 왔을 때보다 살이 좀 빠졌죠.”
“아, 사실 몸무게에는 큰 변화가 없긴 하거든요.”
“그래요?”
“네…….”
“분위기가 달라져서 그런가.”
여전히 제헌의 어스름한 시선은 여원의 드러난 살갗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에도 얼핏 다정하게 들리는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게요.”
눈을 슬며시 내리깔았다가 다시금 들어 올렸다. 여원의 심장이 엉망으로 콩닥거렸다. 짧게 숨을 들이켠 여원이 제헌을 향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갑작스레 몰아치는 긴장 탓에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여원 씨.”
“아, 네?”
“이따 가볍게 한잔하겠어요?”
여원이 저택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제헌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여원을 지켜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선을 넘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선준이 저택을 떠난 것을 기점으로 제헌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어? 그…… 술이요?”
“네. 오늘 회사에서 괜찮은 와인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 제헌은 여원에게 다가오는 데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물론 여원은 자신을 향한 제헌의 감정이 기본적으로는 연민과 동정이라고 짐작했다. 아니면 그가 생각 외로 속정이 깊고 다정한 사람이라든가.
“아, 그런데 제가 술을 잘 못 마시는데.”
별것 아닌 말에도 혼자서 붕 들뜨고, 자꾸만 의미 부여를 하게 되는 자신이 사실은 가장 큰 문제였다. 제헌은 죄책감을 동반한 이끌림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였다.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습니다.”
“…….”
“그렇지만, 여원 씨 넓은 저택에 하루 종일 혼자서만 있었잖아요.”
통키를 보며 이런저런 혼잣말을 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제대로 된 대화라고 하기에 어렵다. 제헌이 마련해 준 핑계를 조용히 곱씹어보았다. 여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래 봤자 그냥 술인데,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도 없지 않을까?
“네, 그럼…….”
“…….”
“그럴까요?”
* * *
하루가 고단했는지 동그란 쿠션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통키를 내버려둔 채, 여원은 부엌과 연결된 3층 다이닝 룸에서 제헌을 기다렸다. 공기의 흐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은 창백한 정적이 감돌았다.
“왠지 여기서 좋은 냄새 나는 것 같다.”
의자에 느슨하게 몸을 늘어뜨린 채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기분 탓인 걸까, 선준이 떠난 이후 저택을 감도는 향은 산뜻하고 쾌적하게만 느껴졌다. 저택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이 통째로 도려내진 것처럼, 악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 퍽 이상했다.
“흐음…….”
심지어는 방금 3층 서재를 지나오는 동안에도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전에는 낯선 저택에 들어오면서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던 걸까? 확실히 고양이를 돌보며 여원은 정서적으로 빠르게 안정되고 있었다. 제헌과 같이 있는 동안에는 나쁜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여전히 저택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지만, 음산하고 두렵기만 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여원은 이곳에서 나름의 안락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더 이상 악취가 맡아지지 않는다는 것보다도 훨씬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여원 씨.”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어느새 제헌이 다이닝 룸 안으로 성큼 들어와 있었다.
“아, 제헌 씨!”
부드러운 재질의 홈웨어로 갈아입고 나온 제헌은 비교적 편한 옷차림인데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희미한 웃음기와 함께 여원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평소보다 나른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샤워를 갓 마쳤는지 머리칼 끝이 살짝 젖어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제헌이 식탁에 가까워지자 여원은 짤막한 숨을 흡, 들이켰다. 부드러운 살 내음에 섞인 페로몬이 오늘따라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제헌은 우성 알파 중에서도 유난히 강렬하고 매혹적인 페로몬을 가지고 있다. 여원은 페로몬 필터링을 거의 못 하는 열성 오메가이니 이런 반응은 생리적이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라서…….
“아니에요, 금방 오셨는걸요.”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다잡으면서도, 여원은 금세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제헌에게 들키고 싶지가 않았다. 바쁘게 손부채질을 하던 여원이 손바닥으로 동그란 뺨을 꾹꾹 누르며 얼굴을 감추었다. 그런 여원에게 시선을 흘긋 던지면서도 제헌은 페로몬은 거두어가지는 않았다.
“그게 선물 받으신 와인이에요?”
“네,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입니다.”
매끈한 곡선을 그리는 와인 병이 식탁에 올려졌다. 제헌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금속 오프너를 움직였다.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인 손목이 코르크를 뽑아냈다. 우아한 손등이 와인 병을 들어 올리더니, 곧이어 적갈색 와인이 둥그런 와인잔을 휘감아 내렸다.
와인을 따르느라 아래로 흘러내려 간 소매 위로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평소와 같은 서늘한 무표정을 한 제헌의 입매는 굳게 다물려 있었다. 턱 끝이 살짝 이지러지고, 팽팽하게 당겨진 목선을 타고 목빗근이 도드라졌다.
“와…….”
얕게 들썩이는 탄탄한 가슴팍을 여원은 저도 모르게 흘긋거리고 있었다. 꼭 잘 다듬어진 조각상을 관찰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날카롭던 제헌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렇게 기대가 됩니까?”
제헌이 눈짓으로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 와인을 가리켰다. 당황한 여원이 고개를 잽싸게 끄덕거렸다. 차라리 제헌이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했다. 오랜만에 마시게 된 술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 그에게 눈독을 들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저기, 잘 마시겠습니다.”
“네.”
와인이 찰랑거리는 유리잔이 가볍게 부딪치는 동안에도 이유 모를 망설임이 일었다. 머뭇거리던 여원은, 와인을 삼키는 제헌의 목울대가 살짝 일렁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쌉싸래한 과일 향이 혀끝에서 톡톡 터졌다.
“제헌 씨, 이거 와인, 엄청 맛있어요!”
입 안에 알코올이 뭉글뭉글 퍼져 나가자 빳빳하던 긴장도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처음 마셔보는 와인은 생각 이상으로 맛있었다. 반응을 살피는 듯, 와인잔을 손에 걸친 채 물끄러미 응시하는 제헌에게 여원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잘됐네요.”
그동안은 일방적인 친절과 호의를 간신히 받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관계였다. 첫 만남에서부터 제헌에게 원치 않게 치부를 드러냈던 것과 대조적으로, 여원은 제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술잔을 기울이게 되는 순간에는 조금 달랐다. 제헌의 사적인 시간을 처음으로 엿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여원은 괜히 설레고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빈틈없는 남자가 자신한테 틈을 내어주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려던 말인데,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그대로 제헌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오자, 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얇은 니트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의 윤곽이나 질깃한 근육이 도드라지는 두툼한 허벅지에 자꾸만 시선이 닿았다.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요?”
옅게 웃어 보이는 제헌의 얼굴에서 나른한 기운이 묻어났다. 입안이 바싹 말라와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여원이 제헌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제헌 씨랑 둘이서만 술을…… 먹고 있는 게요.”
단순히 같이 술잔을 기울였을 뿐인데도, 지금만은 제헌의 앞에서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어린애가 아닌 동등한 성인으로 자리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에 취한 여원이 녹진녹진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대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헌의 얼굴 윤곽이 손끝에 만져질 것만 같았다.
“퇴근하고 나면 종종 혼자 와인을 마십니다.”
“…….”
“사람을 만나가며 풀 것까진 아닙니다만, 조금쯤은 느슨해질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한 여원이 삭막한 다이닝 룸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보았다. 휑하고 널찍한 공간이었다. 창문 밖으로 밤이 까맣게 내려앉으면, 황량한 3층 다이닝 룸에서 혼자서 와인을 마셨을 제헌을 떠올려보았다.
“오늘은 여원 씨를 위한다는 핑계로 내 욕심을 채웠습니다.”
제법 심각한 얼굴로 곰곰 생각에 빠진 여원에게 제헌이 반쯤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욕심을 채운다는 말이 왠지 야릇하게 느껴져서, 이미 술에 살짝 취한 여원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런데 제헌 씨.”
“네.”
“회사에서……. 일 많이 힘드시죠?”
여원은 제법 비장하게 꺼낸 말이었지만, 제헌이 표정을 허물어뜨리며 쿡 웃었다. 너무 어린애 같은 말이었나. 제헌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고, 그렇게 제헌을 더 알아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의욕만 앞섰던 모양이다. 금세 시무룩해진 여원의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여원 씨, 나 계속 보고.”
“네에…….”
푹 고개가 꺾이려던 여원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목덜미를 꼿꼿하게 곧추세웠다. 자연스러운 일처럼 손을 뻗어 잔에 고여 있던 와인을 마저 들이켰다. 제헌이 비워진 잔에 새큼한 향을 풍기는 와인을 다시 푹 부어주었다.
“일이 고되지는 않고요.”
“정말요?”
“다만 직원이 수천 명 되는 회사이다 보니, 내 사람들에게 영향이 갈 판단에 대한 책임감은 느낍니다.”
“아…… 그쵸, 제헌 씨는 사장님이시니까.”
“조직의 머리에 있는 사람이 흔들려서는 안 되니까요.”
여원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수천 명이라는 말을 듣자 제헌이 하는 일의 중요도와 무게가 피부에 와닿았다. 새삼스럽지만 제헌이 대단해 보였다. 여원은 자신 한 사람 몫의 인생을 건사하는 것도 버거운데, 제헌은 이미 수천 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집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나도 챙겨주시고…….
“그래도 너무 멋있으세요.”
“하하.”
“저는요, 제헌 씨 진짜 너무 멋있으신 것 같아요…….”
그런 제헌이 너무 좋았다. 볼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라서, 여원은 차끈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처음 마셔보는 술이라 낯설어서인지, 술에 취하는 속도가 조절이 잘 안 되었다. 기분은 적당히 알딸딸했고, 언제부터인가 여원은 제헌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근데요, 제헌 씨는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막…… 힘들 때도, 어디에 얘기할 사람도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런 얘기는 원래 가족들이 잘 들어줘야 하는 건데…….”
제헌이 턱 끝을 작게 까딱였다. 아무리 혼자서도 완전해 보일지라도 사람인 이상 곁에 누군가 있어줘야 할 텐데……. 여원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하하.”
“…….”
“우리 두 사람 다, 가족 복이 없는 편인가 보죠?”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씁쓸한 기운이 숨겨지지는 않았다. 일렁일렁한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깔끔한 윤곽을 그리는 제헌의 얼굴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언제나 결점 없이 근사하게만 보이던 남자가 갑자기 쓸쓸하고 고독하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아닙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데다가, 이혼도 했으니 제헌에게 가족이라고 있는 건 동생인 선준뿐이다. 게다가 선준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자신을 이해해 달라며 패악을 부리기 일쑤였다.
선준이야 생각나는 말을 거름망 없이 죄다 퍼부어대니 차라리 속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매 순간 말을 아끼는 제헌의 속내는, 모르긴 모르지만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제헌 씨는…… 외롭지 않으세요?”
고풍스럽고 화려한 저택의 고아하고 비밀스러운 주인. 모든 걸 다 가지고 있고, 결핍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정작 그런 제헌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
“…….”
고개를 짧게 돌린 제헌은 말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적막과 함께 분위기가 순간 싸늘해졌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여원은 제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하지만 상황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해, 반쯤 풀린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남 걱정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말해 놓고도.”
“…….”
“여원 씨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싫지 않다면 역시 이상한가요.”
잠깐 뜸 들인 끝에 되묻는 제헌의 얼굴이 낯설었다. 매 순간 확신에 차 있고, 망설임 없는 평소의 태도가 아니었다. 제헌은 저에게 드물게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킨 여원을 흥미롭게 내려다봤다.
“모르겠어요.”
“…….”
“근데 저는……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여원은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제헌에게 마음이 차츰 열렸다. 아주 깊숙한 속에서는, 이대로 제헌과 더 친밀해지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내밀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제헌이 꺼리지 않았으면 했다.
“하…….”
샅샅이 저를 훑는 제헌의 시선이 멋쩍어 여원은 고개를 살짝 내리깔았다.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손끝에 따끔한 긴장이 일었다. 자욱한 알파 페로몬이 그런 여원을 길게 드리웠다.
“여원 씨. 하선준이랑은 왜 결혼한 겁니까?”
곧이어 옥죄는 듯한 질문이 들이닥쳤다. 제헌은 여원이 달아날 틈이 없도록 몰아붙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이채가 돌았다.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애가 생겼다고 해서 꼭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요?”
단순히 이유를 묻는다기에는 다소 날 선 말투였다. 여원과 마찬가지로 술기운 때문인지 제헌은 평소보다 감정을 조금씩 더 드러냈다. 꼭 여원이 선준과 결혼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 그러셨잖아요.”
“…….”
“제가,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고요.”
중요한 질문이라서, 제대로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마음과는 다르게 말끝이 자꾸만 흐물흐물 늘어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여원의 얼굴이 엉망으로 흔들거렸다. 제헌은 차분하게 숨죽인 채 여원에게 집중했다.
“그런데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진짜, 결혼하기 전에는 선준이가 이런 애인 줄 몰랐거든요.”
“…….”
“자꾸 막, 저한테…… 울며불며 매달리니까 좀 불쌍하기도 하고…….”
“…….”
“그래도 일단 나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저렇게까지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이 세상에 또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들었고요.”
주섬주섬 말을 이어나가던 여원이 돌연 푸스스 웃어버렸다. 웃긴 이야기가 아닌데 자꾸만 입꼬리가 비뚤게 말려 올라갔다. 그때 자신이 했던 생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되돌아보니, 실은 제가 멍청했던 거죠.”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살아온 탓에, 여원은 스스로 감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저에게 해를 끼칠까 경계심이 많은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제 인생에 가장 악영향을 끼친 선준의 실체는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말은 내 앞에서는 하지 맙시다.”
여원의 자괴감이 짙어지지 않도록 제헌이 단호하게 끊어주었다.
“제헌 씨…….”
딱딱한 어조 안에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겠지. 그럼에도 여원은 자꾸만 제헌에게 끌리게 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희미한 죄책감으로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쓸데없는 감정 이입해서 상대방을 불쌍하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거.”
“…….”
“곤란해서, 못 이길 것 같아서 다른 사람 부탁 들어주는 거. 강여원 씨, 그거 전부 착한 거 아닙니다.”
“…….”
“나쁜 마음으로 여원 씨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빌미 주기 딱 좋은 행동일 뿐이죠.”
여원은 찬물을 철썩 얻어맞은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까지 누구도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를 이렇게까지 가차 없이 도려낸 적 없었다.
“여원 씨는 중심을 스스로에게 두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여원 씨 자신 아닙니까?”
치부를 들켰다는 생각에 움찔하기도 찰나, 금세 울컥한 덩어리가 가슴에 딴딴하게 차올랐다. 간절하게 필요했지만, 그동안은 누구도 여원에게 해주지 않았던 말. 그런 말을 하는 제헌의 태도가 흔들림 없이 단단해서, 여원은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핑글 맺혔다.
“고마워요, 제헌 씨.”
간신히 입술을 열었지만, 벅찬 감동 탓인지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문득 제헌이 참 다정하고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가차 없는 남자의 진심에 여원은 한껏 몽글몽글해졌다.
“앞으로는 저도, 제헌 씨가 말씀해 주신 대로 그렇게만…… 살고 싶어요.”
지금 여원의 마음은 조금의 안전장치도 없이 제헌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여원을 찌르듯이 향하는 제헌의 시선은 여전히 집요했고, 기분 탓인지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공기가 한층 빼곡해진 것 같았다.
“아.”
커다란 손을 불쑥 뻗은 제헌이 여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에 스르륵 감겨들고, 연약한 두피를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눈이 내리감기고, 여원은 몽롱해진 기분으로 제헌의 페로몬을 물씬 들이켰다.
“으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둥그런 신음이 흘렀다. 술기운에 머릿속이 온통 진탕되어서, 판단력이 흐려져 버린 걸까. 그렇지만 여원은 제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이대로 제헌과 같이 있고 싶어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망설이듯 오래 머무른 제헌의 손이 한참이 지나서야 여원에게서 거두어졌다. 여전히 반쯤 눈을 내리감은 채, 여원은 흐릿한 말투로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느라 바쁘게 오물거리는 살짝 젖은 연분홍색 입술에 제헌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으응…….”
제헌의 눈동자는 유난히 새까만 것 같다. 또렷하고, 명징하며,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이는 눈동자가 낮게 침잠했다. 습습하게 젖어든 눈동자가 자신만을 가득히 담고 있는 것이 여원은 못내 좋았다.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여원이 제헌을 마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술기운에 흠뻑 취해서 기분 좋게 달아오른 까닭에, 한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미간을 바짝 좁힌 제헌이 나직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
여원의 입술과 목덜미 부근을 훑어 내리는 시선이 끈끈해졌다. 제헌을 둘러싼 페로몬에 성적인 기운이 훅 묻어났다. 두피가 오싹하게 당겨지는 것 같은 기분에, 여원이 잘근거리던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여원 씨.”
“네, 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으면서도, 여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조금씩 내리깔았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혀를 빼꼼 내어 입술을 바쁘게 핥아냈다. 무섭도록 긴장되었지만, 예전처럼 피하고 달아나고 싶지만은 않았다.
자꾸만 기분이 몰랑거리고, 설레었다. 여전히 아래로 숙인 고개가 온통 화끈거렸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 온도가 올라간 것처럼, 더운 기운이 훅 퍼졌다. 제헌의 눈빛이 닿는 아랫입술이 따끔거렸다.
“나 봐야지.”
또 한 번, 한숨 소리가 나직하게 내리깔렸다. 습한 기운이 사아악 귓가에 퍼지는 듯했다. 얕은 채근에 여원이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렸다.
“흐…….”
상대에게 너무 집중해서인지 눈앞이 살짝 흐려졌다. 대답 대신 고개만 간신히 끄덕거리는데, 우아하고 길쭉한 제헌의 손등이 여원에게 쭉 뻗어왔다. 넓은 어깨가 가파르게 기울어지면서 여원에게 커다란 그늘을 드리웠다.
“힉!”
이러다가는 제헌에게 덮쳐질 것만 같다는 생각에 여원이 작게 소스라쳤다. 그대로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제헌이 와인을 홀짝홀짝 들이켜는 동안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간 카디건을 끌어 올려주었다. 톡톡, 손가락이 어깨를 두드리자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미지근한 체온이 닿아왔다.
“카디건이 아래로 내려갔네.”
카디건을 완전히 끌어 올려준 다음에도 제헌의 손바닥은 여전히 여원의 동그란 어깨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얕게 달싹거리고, 결이 좋은 중저음이 은근하게 공기에 번졌다.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넘실거리는 페로몬이 공기 중에 만연하게 차올랐다.
“흐…….”
짧은 숨을 내뱉은 여원이 충동적으로 제헌에게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서로 닿고, 느릿하게 문질러지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온통 저릿해졌다.
누군가를 정말 원할 때는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처음 느껴보는 농밀한 감정으로 이성이 온통 마비된 것만 같았다. 여원은 제헌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보았다. 서툴고 미숙했지만, 촉촉하게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제헌에게 몸을 바짝 붙인 여원의 수북한 속눈썹이 촘촘하게 내리깔리고, 동그란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여원 씨.”
한동안 입술을 가만히 내어주던 제헌이 여원의 양어깨를 힘주어 붙잡고 딱 떼어냈다. 간결하지만 단호한 동작이 여원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 것만 같았다. 분명 엄격한 얼굴이었지만, 제헌 역시 평소보다 숨이 한참은 거칠어져 있었다.
“하아…….”
어지럽게 얽혀드는 시야에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눈앞이 완전히 밝아졌을 때, 타액으로 흥건하게 적셔져 있는 제헌의 아랫입술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아, 제헌 씨…… 그게 말이에요…….”
그제야 제가 방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났다. 술이 확 깨는 것과 동시에 여원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차라리 이대로 아침이 영영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미쳤어. 진짜 제대로 미쳤어.”
하지만 여원의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도 창문으로는 화사한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기어코 아침이 밝고 말았다면,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중간중간에 기억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어젯밤 꽤나 취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다만 문제의 그 순간만큼은 파편처럼 뾰족하게 도드라져, 너무하리만큼 선명하게 되새겨졌다.
‘아, 제헌 씨…… 그게 말이에요…….’
흐드러진 포도향 사이로 섞이던 갓 샤워를 마친 싱그러운 살 내음과 자극적인 페로몬, 말캉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던 젖은 입술의 촉감, 벅차오르는 감정에 도취된 여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차분한 시선.
‘…….’
‘…….’
크게 나무라기라도 했다면 오히려 더 나았을 것 같았다. 제헌은 그때만큼은 여원이 무슨 짓을 하든 다 받아줄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냉각되며 느꼈던 당혹을 떠올리자 여원은 등골에 소름이 오스스 솟아올랐다.
“으으, 차라리 그냥 와인 처음 마셔본다고 말이라도 할걸.”
그러나 첫 잔 이후로는 전부 자발적으로 마셨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다른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집요하게 내리꽂히는 습윤한 시선에 간지러운 기분이 일 때마다 꼴깍꼴깍 와인을 들이켜던 것이 화근이었다.
차라리, 그 순간 여원이 제헌에게 특별한 존재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한 원망이라면 모를까.
얼굴 보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실수는 술기운에 저질렀지만, 수습은 맨정신에 해야 하니 암담했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도 안 하던 짓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제헌 앞에서 해버렸다니.
“사람이 취해도 곱게 취해야지 진짜.”
말끔한 창문으로 희미하게 반사되는 얼굴은 꼭 어젯밤 제헌의 앞에서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없는 기분에 괜히 술기운을 탓해봤지만, 심장이 크게 철렁거리는 이유는 실은 따로 있었다.
“아휴…….”
차마 방 밖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끙, 작게 앓는 소리를 낸 여원이 다시금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쩐지 머리만 숨기면 그대로 포식자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는 초식동물 같은 모양새였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귓전을 선명하게 때렸다. 술에 취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전혀 맥락 없는 실수는 아니었다. 마음에 없는 행동이라기엔 차라리 용기를 냈던 것에 더욱 가까웠다. 여원은 그것이 가장 당혹스러웠다.
스스로를 옭아매던 억압이 느슨해지자마자, 제헌을 향한 감정이 더 이상은 주체할 수 없어져 왈칵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하고 있었던 거지.”
제헌을 마주할 때면 여원은 늘 이유 모를 고양감에 휩싸였다. 희미하게 들뜨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의식했다. 그를 볼 때마다 느끼던 불편한 긴장감의 원인을 끝내 알아차리고 말았다.
오갈 데 없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이해해 주고, 보호해 주는 근사하고 단단한 사람. 그러나 결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단순한 선망 이상으로, 그 순간 여원은 제헌에게 성적으로 강렬하게 이끌렸다. 그와 입 맞추고 싶었고, 나아가 그에게 안겨들고 싶었다.
이불 위로 눈썹만 겨우 빼꼼 내민 여원이 눈동자를 데루룩 굴렸다. 이미 마음으로는 선준을 배우자 취급하지 않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현시점에서 제헌은 남편의 친형이었다.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고 도와주기까지 한 사람인데, 그런 제헌에게 불온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스러워졌다.
게다가, 분명 제헌은 자신을 전혀 그런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을 텐데…….
‘여원 씨.’
여원이 미지근한 온도의 입술을 스륵 핥아낼 때도, 제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원을 또렷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습한 기운을 머금고 일렁이던 것을 문득 떠올렸다.
아니, 정말 전혀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게 맞기는 한가?
쿵. 쿵.
그 때였다. 계단을 타고 내리는 발소리에 여원이 쫑긋 귀 기울였다. 박자를 맞추듯 여원의 심장 역시 쿵쿵쾅쾅 박동했다. 이대로 오해가 깊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제헌에게 달려가기 위해 단박에 몸을 일으켰다.
“어제, 어제는요.”
여원은 인사도 없이 무턱대고 해명부터 하려 들었다. 말끔하고 무심한 얼굴이 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사실 뛰어올 것까지는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여원의 가슴팍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숙취는 없어요?”
때마침 제헌은 2층 계단을 막 다 내려온 참이었다. 출근길인지, 핏이 칼같이 떨어지는 슈트 위에 얇은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 제헌이 여상하게 물어왔다.
“아…….”
당황한 여원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순간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의심했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어젯밤 닿았던 입술의 감촉은 아직까지도 손끝에 만져질 것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제가, 어제 실수했던 것 같아요.”
“뭐를요?”
심문이라도 당하는 기분에 여원은 묻지도 않은 죄를 고백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꾸만 제헌의 입술에 눈이 갔다. 타액으로 온통 적셔진 입술이 유난히 선정적인 색채를 띠었던 것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 여원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
“…….”
제헌 앞에서 여원은 매번 바짝 긴장한 채로 스스로의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야릇한 감정을 자각한 다음이어서인지, 오늘은 그 정도가 한층 심했다. 제헌과 눈이 마주치고, 페로몬의 그늘에 자리한 것만으로 여원은 얼굴이 온통 화끈거렸다.
“그냥요. 제가, 너무 오랜만에 술을 마셨던 거 있죠.”
“…….”
“혼자서 너무 들뜨는 바람에, 제헌 씨 앞에서 오버한 것 같아서요.”
어제 제가 술에 취한 채 달려들어 뽀뽀했고, 그가 저를 밀어냈다는 말을 죽어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제헌은 여원이 어제의 짧은 입맞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헌의 입가가 얕게 들썩였다.
“제 나이 같아 보이고 좋았습니다.”
뒤이어 날카로운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혀들었다. 나른해진 얼굴에서는 희미한 포만감이 묻어났다. 꼭 격려하고 부추기는 것만 같은 제헌의 태도에 여원은 까마득하게 혼란스러워졌다.
“여원 씨 앞으로 나한테 술을 배워야 하겠어요.”
“네, 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되지.”
유유히 웃어 보이는 얼굴을 맞닥뜨리자 여원은 탁, 맥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지. 하지만 제헌은 생각보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여원은 그가 저를 가지고 노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아, 고맙습니다. 제가요, 앞으로는…….”
“아니에요. 마음 쓸 것 없습니다.”
간결하게 답하고 여원을 지나치던 제헌이 어깨 부근을 툭, 건드렸다. 어깨가 크게 흠칫거렸다. 별것 아닌 손길에도 몸을 파르르 떨게 됐다.
“흐읏…….”
얕은 신음을 흘리려던 여원이 덜컥 놀라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습한 시선이 그런 여원을 골똘히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자극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따 저녁에 봅시다.”
“네, 네…….”
간신히 제헌을 떠나보낸 여원이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어제는 술에 취해서 그런 건가 했는데, 제헌의 페로몬이 결까지 올올이 느껴질 정도로 훅 밀려들었다.
유산 이후 완전히 고장이 났던 페로몬 체계가 뜻밖의 방향으로 회복되는 것인지, 몸이 살짝 달아오르는 감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선명했다.
* * *
창틀에서 새어 들어오는 시린 빛에 눈을 가늘게 떠올렸다.
냐옹, 냐옹.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기에는 기분이 어수선하게 술렁거리기는 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원은 통키의 부드러운 등을 슥슥 쓰다듬었다.
냐아.
여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통키가 기분 좋게 갸릉거렸다. 빗물에 젖어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던 아가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보니 새삼스럽게 덩치가 제법 커진 것 같았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전히 받아내며 하품을 쩍 하는 얼굴은 포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역시 잎사귀를 반 이상 잃어버리고 앙상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 때마다 빈약한 나뭇가지가 애처롭게 후들거렸다.
처음에 저택에 들어왔을 때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릿하게 흘러갔다면, 요즈음 시간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쏜살같았다.
주인을 쏙 빼닮아 묵직하고 위압적이면서도, 우아하고 매혹적인 저택. 제헌은 여원에게 다른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저택에만 머무르라 했다. 그래서 여원은 이곳에서 제헌에 대한 생각만을 했다. 다른 모든 자극이 차단되어서 감각은 오롯이 그에게만 향했다.
그러니 덫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에게 푹 빠져버린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질척한 늪으로 빠져드는 감각은 위험하면서도 달콤했다.
징― 지이이잉―
“힉, 깜짝이야.”
정적을 깨트리는 요란한 진동 소리에 여원이 소스라쳤다. 가족도 친구도 데면데면해져서, 한동안은 울리는 일이 거의 없던 핸드폰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여원이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손을 뻗었다.
[하선준]
제헌에 대한 생각에 먹먹하게 잠겨 있던 여원은 액정에 떠올라 있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움찔 놀랐다. 중국에서 지내고 있는 선준과 이따금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전화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여원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화를 받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별것 아닌 일로도 의심을 부풀리는 선준의 성격을 알기에, 흡, 숨을 들이켜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원아, 나야.
“아, 선준아. 오랜만이다.”
―그러게나 말이야. 어때, 나 없으니까 요새 좀 살 만해?
“…….”
―야, 너는 농담한 것 가지고 그렇게 얼어붙고 그러냐.
“어어, 그렇구나.”
―오랜만에 네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잘 지내고 있지?
중국 생활이 잘 맞는 것인지, 선준의 목소리가 한층 밝았다. 저택에서 여원을 옭아매던 시절보다는, 짧은 연애 기간 여원에게 살갑게 굴었던 선준에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따끔거리는 손끝을 꾹꾹 눌러보았다.
“어, 별다른 일 없이 잘 지내.”
―그래? 목소리는 뭔가 울적해 보이는데?
“아니야, 그런 거……. 그나저나 선준아, 너 중국 생활은 어때?”
―에이. 여기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는데 넌 참 빨리도 물어본다.
“아, 하하…….”
-학교 다니는 게 아니고, 어학원 다니는 거라서 마음은 좀 편하지.
“그렇구나.”
―근데 중국 부자들 클래스 장난 아니더라? 솔직히 나도 어디 가서 빠지는 집안은 아닌데 애들 돈 쓰는 게, 와, 놀랐잖아.
선준은 쾌활한 목소리로 중국에서의 일상을 주절거렸다. 걱정거리 하나 없어 보이는 태도가, 여원이 지금 제헌과 저택에서 미묘하게 얽혀드는 것은 짐작도 하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죄책감으로 심장이 욱신거렸다. 물론, 따지자면 바람을 먼저 피운 것은 선준이기는 했지만…….
―그런데 여원아, 너 지금 집에 있는 것 맞긴 맞지?
“어? 어, 맞는데…… 왜?”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너네 막 동생도 있고, 집도 좁아서 부산스러운 분위기 아니었어?
“아……. 지금 내 방에서 문 닫고 있어서 그래.”
―그렇구나.
선준이 꼭 뭐라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캐물어오자, 여원은 목덜미가 쭈뼛 곤두섰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별일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넘기면 된다. 여원이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요즘 부모님은 잘 지내시고?
“부, 부모님 얘기는 갑자기 왜?”
―왜긴, 너 지금 부모님이랑 같이 사니까 그러지.
“아…….”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꼭 찔리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네가 우리 부모님 싫어하는 줄 알아서.”
―에이, 너 그때 그 일 아직도 마음에 꽁하게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하…….”
단순히 같이 외출하거나, 병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를 의심했던 선준이다. 제헌과 여원이 거의 단둘이서 저택에 지내고 있다는 들켜서는 안 된다.
냐아!
잔뜩 긴장한 여원의 불안감을 함께 느끼는지, 통키가 금속을 긁어내리는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어댔다.
“아, 잠깐만……. 나 엄마가 지금 부르는 것 같아서. 전화 끊을게.”
―야, 강여…….
허둥거리던 여원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통화가 더 길어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면 선준에게 의도치 않게 빌미를 줄 수도 있고, 혹시나 선준이 영상 통화를 요구할지도 몰랐다.
“어휴…….”
전화를 끊은 지 한참이 지나도 놀란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시야가 위태롭게 출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혹시 선준이 자신이 여전히 저택에 머무르고 있고, 제헌에게 미묘한 긴장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만한 방법이 있을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선준을 떠나보내면서 제헌은 저택의 사용인을 한 번 싹 갈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두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설마, CCTV 같은 거라도 설치해 둔 건 아니겠지?”
그렇다 해도 여원이 저택에서 머무르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문제는 아니겠지만……. 격렬하게 뛰어오르는 심장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그보다는 지금 자신이 제헌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젯밤에는 제헌에게 뽀뽀까지 해버렸다.
‘지금 두 사람, 뭐, 뭐 하고 있는 거야!’
원래부터도 선준은 두 사람이 어쩌다 옷깃만 스쳐도 갖은 난리를 피웠다. 그때 여원은 형에 대한 열등감과 피해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선준의 모습이 참 볼썽사납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선준의 의심은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큰일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선준이 온 집안을 뒤집어놓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언젠가는 피할 수 없게 될 순간을 떠올리자 납덩이가 얹힌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여원이 선준과 통화를 마친 직후부터 통키는 유난히 불안해했다.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샛노란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주변을 잔뜩 경계하더니, 급기야는 먹은 것을 온통 게워내기 시작했다.
거친 나뭇결 위에 통키가 토해낸 말간 액을 수습하는 동안 여원도 속이 괜스레 울렁거렸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불안의 색채가 스산해진 저택 안을 일렁일렁 감돌았다.
“통키야, 많이 아파?”
걱정스레 질문해 보았지만, 금세 피곤해진 통키는 쿠션 위에서 쌔근쌔근 잠들어버렸다. 짧은 다리를 꼬물꼬물 움직이는 통키를 내려다보던 여원이 이마에 얕게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 슥 닦아냈다.
이제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제헌을 향한 감정은 몸집을 크게 부풀렸다. 그가 베푸는 달착지근한 다정에 여원은 쉽게 황홀해졌다. 그러나 매력적인 남자라고 해서 그를 마냥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기류를 선준이 알아차리면 뒷감당이 어려워질 게 눈에 훤했다. 평생 이렇게 제헌과 둘이서만 살 것이라면, 여원은 미친 척 눈 딱 감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겨울이 지나면 선준이 다시금 저택으로 돌아올 텐데…….
“하아…….”
그런데도 촉촉하게 문질러지던 입술의 감촉만은 자꾸만 만져질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꺼슬꺼슬하고 차가울 것 같다고 제멋대로 상상했지만, 막상 닿았을 때는 말캉하고 은근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딱 한 번 실수였으니 괜찮다. 어쨌든 제헌 씨도 별일 아니라고 관대하게 넘어가 줬으니까. 지금부터 여원이 조심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다. 선준이 의심한다고 해도 떳떳하게 대처할 수 있다.
부르르르.
또 한 번 요란하게 진동하는 핸드폰 벨 소리에 여원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피부 위로 스몄다.
[제헌 씨]
그러나 이번에 액정에 떠오른 것은 선준이 아닌 제헌의 이름이었다. 오늘 아침 제헌을 배웅할 때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원이 신경 쓰였는지, 제헌은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다.
중심이 단단히 잡힌 중저음의 목소리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은근했다. 그대로 그에게 사로잡히려던 찰나, 여원은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다.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
선준과 통화하는 동안 정신력 소모가 컸는지, 제헌을 기다리는 내내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눅눅하고 묵직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아 내리고, 몸살 기운처럼 열이 미약하게 올랐다. 나른한 기분에 젖어든 여원이 저릿해지려는 사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여원 씨.”
“아…… 제헌 씨.”
그러나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제헌을 보자마자 여원은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피곤함이 살짝 묻어 있는 얼굴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날렵하게 좁혀졌던 눈매는 여원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어졌다.
“같이 저녁 먹자고 해놓고 기다리게 해버렸네.”
“아니에요, 감사해요.”
잠시 넋을 빼고 있던 여원이 제헌에게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쭈뼛거리는 태도와는 다르게 여원의 온 신경은 본능적으로 제헌만을 향했다. 눈을 마주치기가 겁이 나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데, 정수리가 따끔따끔했다. 괜히 다리를 살짝 뒤로 꼬아본 여원이 동그란 발꿈치를 카펫 위로 슥슥 문질렀다.
제헌 앞에서 여원은 자꾸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단둘이서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오늘 처음 먹는 음식이었지만, 맑은 국물을 입에 가져가자 의외로 구미가 당겼다. 선준 때문에 입맛이 확 떨어졌던 것이, 제헌을 앞에 두자 다시금 본능의 영역이 생생하게 일깨워졌다.
“오늘은 별일 없었고요?”
식탁 건너편의 제헌은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은 것처럼 여원을 은근하게 쳐다보았다. 하루의 끝에 일과를 서로에게 나누는 것도 어느덧 두 사람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여원 역시 제헌 앞에서 보드랍게 웃으면서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꼭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뜨끔 놀라 눈을 피해버렸다.
“아, 제가 오늘 이게 첫 끼여서요.”
“식사 거르지 말라고 하니까.”
“죄송해요, 뭔가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여원이 노골적으로 저를 피하자, 제헌이 왼쪽 눈썹을 가볍게 들썩였다.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능숙하게 지워낸 제헌이 여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를 기점으로 여원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아니에요, 딱히 그런 거는…….”
그러나 짧은 고민을 마친 여원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 보였다. 제헌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 같았을뿐더러…… 두 사람만이 있는 장소에서 괜히 선준을 대화 주제로 올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래요, 배고플 텐데 먹어요.”
고개를 크게 끄덕인 여원이 정말로 배가 고팠다는 듯, 밥 먹는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허기가 졌지만, 그것 이상으로 식탁 건너편이 신경 쓰였다.
“하…….”
은색으로 빛나는 칼을 쥔 손등이 스튜에서 갓 건져낸 고깃덩어리를 우아하게 썰어냈다. 얇은 밀가루 옷이 벗겨지자, 살덩이가 안으로 머금고 있던 진한 색의 즙이 새하얀 접시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윽고 제헌은 무감한 얼굴로 뜨끈한 김을 뿜어내는 고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색이 진해진 입술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길쭉하게 뻗은 손등 위로는 핏줄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목뼈는 보기 좋게 불거져 있었다.
아니, 사람이 무슨 밥 먹는 것도 저렇게 야하지.
한 번 그를 성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자, 그동안은 왜 모르고 있었는지 어색할 정도로 제헌의 신체 곳곳이 자극적이었다. 키는 멀대같이 크지만 지나치게 마른 선준과는 다르게, 제헌은 골격이 크고 마른 근육이 조밀하게 붙어 몸이 탄탄했다. 잘 관리된 근육이 그려내는 절도 있는 움직임이 자꾸만 눈길을 끌었다.
“여원 씨.”
불쑥 내뱉어진 이름에 여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남자다운 목울대 부근을 쳐다보고 있는 걸 꼼짝없이 들켜버린 탓에, 허둥거리다 포크에 들고 있던 음식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싱긋 웃어 보인 제헌이 여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흘리고 먹으면 안 되지.”
“아, 흐…….”
길쭉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입술 가장자리를 뭉근하게 스쳤다. 예기치 않은 접촉에 여원의 페로몬이 기다렸다는 듯 왈칵 밖으로 흘러내렸다. 그를 자각한 여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죄송…….”
그냥 모른 척 넘어갈 걸, 죄송하단 말을 괜히 했다는 생각이 한발 늦게 들었다. 무엇을 대상으로 사과를 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한숨을 푹 내쉬는 와중에도, 여원은 제헌의 손길에 제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선준과 사귀는 동안에는 이 정도로 상대에게 성적인 관심을 느낀 적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손을 느릿하게 거두어간 제헌이 작게 들썩이는 여원의 입가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짙은 색 눈동자에 아주 희미하게, 음습한 기운이 스쳤다. 실수로 페로몬을 흘려버린 것은 자신인데도, 제헌에게 성적인 대상으로 비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원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우리, 이제 더는 이러면 안 돼요?
으, 절대 안 된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제헌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는데 혼자서만 제헌을 잔뜩 의식하고 불경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다.
“하아…….”
“…….”
“제가요, 저기…… 저 원래 이렇게 칠칠치 못한 사람이 아닌데.”
급속도로 심란해진 기분에 시무룩해진 여원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서인지, 여원의 설명은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투정처럼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알아요.”
“…….”
“예전처럼 긴장하는 것보다는, 지금이 더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바늘 하나 찌를 틈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남자는 여원에게만은 퍽 다정하게 굴어주었다. 제헌의 입가에 웃음기가 살짝 배어 있는 것을 보며 여원이 작게나마 안도했다. 머릿속으로는 제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잔뜩 의식했다.
“네에…….”
사실은,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 역시 자신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으면 했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중증이야. 애써 억눌러두었던, 제헌을 향한 욕망을 선명하게 자각한 여원이 아연해졌다. 아주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제헌과 가까워지지 않으려 했던 건데…….
“이러다 울음 터뜨려도, 내가 여원 씨 울린 거 아닙니다?”
제헌의 말처럼, 불그스름해진 여원의 눈가는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여원은 뜨끈뜨끈 달아오른 눈두덩을 꾹꾹 눌러보았다. 제헌을 잔뜩 의식해서인지, 아랫배에도 간질간질한 기운이 삭 퍼졌다.
“죄송해요, 괜히 걱정 끼쳐 드린 것 같아서.”
그래도 요새는 제 나이 같아 보인다는 말도 듣고, 제헌 앞에서도 한층 자연스럽게 행동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으응…….”
낙담한 여원이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자그마한 입술이 살그머니 벌어지고, 그 사이로 살짝 젖어 있는 숨이 배어 나왔다. 나직한 한숨을 내뱉은 제헌이 여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파리하게 질려 있던 얼굴에는 발간 혈색이 감돌았고, 움푹 빛이 꺼져 있던 눈동자는 언젠가부터 야릇한 기운을 머금었다. 뽀얗게 살이 오르기 시작한 탱탱한 피부는 윤기가 흐르듯이 매끄러워졌다.
꼭, 알파의 발정을 기다리고 있는 오메가처럼.
“여원 씨?”
“네, 네?”
“직접 만든 향수를 뿌린 건가요?”
맥락 없이 들이닥친 질문에 여원이 흠칫 놀랐다. 날카롭게 찌르는 눈동자는 여전히 습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먹먹해지는 와중에도 여원이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오늘은 선준 때문에 정신이 없어 향수를 뿌리기는커녕 조향실에 들어간 적도 없었다.
“아…… 어제 뿌렸던 향이 남아 있는 모양이에요.”
“…….”
“그거였구나. 맞아요, 그거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역시, 아까 제헌의 손길이 닿았을 때 저도 모르게 흘려버린 페로몬 때문인 것 같았다. 열성 오메가인 여원은 히트 사이클에 가까워져도 페로몬 농도가 진하지 않았지만, 후각이 발달한 제헌은 그를 금세 알아차렸다. 큼큼, 머쓱한 기분에 작게 헛기침을 한 여원이 제헌의 시선을 의식하며 몸가짐을 반듯하게 가다듬었다.
“그래요.”
제헌은 더는 캐묻지 않고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런 제헌이 공기 중에 배어 있는 자신의 페로몬을 맡는 것만 같아 여원의 피부 위로 솜털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성적인 기류가 흘러서는 절대 안 되는 사이인데, 제헌은 태연한 태도로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제헌 씨…….”
간신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연약하게 새어 나왔다. 더는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린 여원이 도움을 갈구하듯 제헌을 올려다봤다. 제헌 앞에서 여원은 자주 절박해지고, 쉽게 간절해졌다.
차라리 더욱 거세게, 거칠게 휘어잡아 주었다면. 제헌이 나쁜 마음을 품고 노골적으로 유혹해 왔다면, 여원은 못 이긴 척 휘둘려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헌은 내내 모호한 태도로 선을 넘을 듯 말 듯 여원을 아슬아슬하게 자극하기만 했다.
저택의 주인은 여원이 거부할 수 없는 관능에 굴복하고, 제 발로 덫에 걸어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원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갈망하기만을 기다렸다.
“아, 흐으…….”
여전히 저에게 집요하게 내리꽂히는 습윤한 시선을 느끼며, 여원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꾹 내리감았다. 내내 나른했던 것이 컨디션이 안 좋기는 했던 모양인지, 온몸에 열이 뜨끈뜨끈하게 올랐다.
“저, 오늘 먼저 일어나 볼게요.”
이대로라면 또 한 번 페로몬이 왈칵 쏟아져 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판단력이 온통 흐릿해져 버린다면……. 지난번보다 더한 일을 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네?”
“몸이…… 갑자기 몸살 기운이 생겨서…….”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 시야가 갑자기 확 어지러워져 여원이 크게 휘청거렸다.
“여원 씨, 괜찮은 거 맞죠?”
단박에 가까워진 제헌이 몸을 지탱하자 여원이 필요 이상으로 크게 소스라쳤다. 흑, 자기도 모르게 더운 숨을 내뱉었다. 제헌은 그런 여원을 유심히 살피더니 꽉 붙들고 있던 팔뚝을 툭 놓아주었다.
“오늘은 혼자 쉬게 둘 걸 그랬네요.”
제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제헌을 경계하는 것을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서늘한 얼굴에서는 흥미와 기대 언저리에 있는 불온한 기운이 묻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쿵거렸다. 도망치듯 달아나는 동안에도 내내 사지가 저릿했다. 목덜미와 쇄골, 아랫배 부근에 따끈하게 오르기 시작한 열감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 *
푹 쉬고 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싶어 일부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뜬 후에도 여원의 몸 상태는 여전했다.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 탓에 전신이 나른하고 흐물흐물하게 풀려 있었다.
“여원 씨, 안에 있어요?”
나직한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여원은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젖은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딴딴하게 뭉친 가슴 부근에서 아릿한 통증이 일고, 텁텁한 숨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들어오시면 안 돼요…….”
얇은 나무문 바로 너머에 제헌이 있었다. 처음으로, 여원은 제헌을 향해 미약하게 반항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지금의 모습을 제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흐…….”
그러나 언제나 여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던 제헌은 이번만큼은 정중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힌 제헌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훅 드리워진 페로몬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오늘따라 특히 버겁게 여원에게 들이닥쳤다.
“여원 씨, 열이 심하잖아요.”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여원을 발견한 제헌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제헌은 당연한 것처럼 여원에게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이마를 뒤덮어오자, 여원이 질겁하며 제헌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열이 오른 이마에 선뜩한 기운이 닿자 눈물이 핑 고였다. 제헌은 가끔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여원을 만졌고,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이 정도 스킨십은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만은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병원에라도 같이 가죠.”
여원을 훑어내리는 시선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 좀처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원은 평소보다 들뜬 제헌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고양감을 느꼈다.
“흑, 으…… 저 진짜 괜찮은데…….”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여원이 얇은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본능적으로 더는 제헌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위험에 사로잡혔다.
“그냥 몸살이라서, 약 먹고 하면 나을 거예요.”
“하…….”
“그러니까, 흣, 으…… 이제, 가 주시면 안 돼요?”
더는 여원에게 강요할 수 없었는지, 제헌은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으로 물러났다. 문 너머로 제헌이 사용인을 불러서 여원을 챙기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조차 점차 희미해지고, 여원은 다시금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