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돌파구
여원은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앞으로 제가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살 생각을 하면 눈앞이 까마득했다. 감옥 같기만 한 저택에 꼼짝없이 갇히기에는 여원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복학하면, 다들 아닌 척하면서도 나를 손가락질하겠지? 이혼한 오메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을 알기에, 여원은 학교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렇지만 두려움을 이유로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었다. 여원에게는 원래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선준과 갈라설 결심을 굳힌 여원은 본격적으로 이혼할 채비를 했다.
―여보세요, 여원이니?
“어, 엄마.”
일단은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지 않아, 전화를 받은 엄마의 목소리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밝았다.
―우리 아들, 요새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 응, 그냥 그렇지 뭐.”
―어린것이 안쓰러워서 어쩐다니…….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여원이 네가 마음 다잡고 몸 잘 추슬러야 해, 알지?
“으응…….”
―애야 뭐, 나중에 다시 들어설 수도 있는 거니까.
엄마가 정감 어린 말투로 안부를 물어오자, 그러지 않아도 무거웠던 마음이 물에 젖은 솜처럼 먹먹해졌다.
“엄마, 나 이혼하려고 해.”
선준의 앞에서는 흔들림 하나 없이 쉬웠던 말인데, 엄마에게 하려니 이렇게 자신이 없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숨처럼 앓는 듯이 새어 나온 목소리 끝이 모호하게 뭉뚱그려졌다.
―…….
따끔따끔한 정적이 흘렀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도, 여원은 괜히 고개를 푹 숙이게 되었다.
―너, 너 방금 뭐라고 했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귀청이 떨어질 것처럼 소리를 빽 질러댔다. 경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떤 여원이 꽉 부여잡은 핸드폰을 귓가에서 멀리 떼어냈다.
―아이고, 세상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엄마…….”
―너 설마 애 떨어져서 그 집에서 쫓겨나는 거니? 그러게 몸 관리를 잘 좀 하지 그랬어, 칠칠하지 못하게.
“아니, 엄마. 이혼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혼하려는 거야.”
거센 반응을 예상이야 했지만, 엄마가 다짜고짜 여원의 탓부터 하기 시작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원은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오해를 정정했지만, 엄마는 득달같이 여원을 몰아붙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니? 네가 이혼을 왜 해?
“엄마, 나 이 집에서, 행복하지 않아.”
―뭐……?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이번 일 있고 더 확실하게 느꼈어. 이 사람이랑 평생 사는 거, 난 절대 못 해. 그러니까 차라리 더 늦기 전에…….”
―아니 얘, 여원아!
“……어.”
―너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혼이란 말을 어쩜 그렇게 쉽게 하니, 응?
두서없이, 폭력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말들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엄마 생각에는 이혼은 역시 아닌 것 같아. 이혼 경력 있는 열성 오메가가 대체 어디서 제대로 된 혼처를 다시 구하겠니. 네가 아직 세상 무서운 걸 몰라서 그런다. 이혼하면 대체 뭘 먹고 살려고…….
“하, 엄마 진짜.”
인상을 찌푸린 여원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왜 선준과 이혼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묻지도 않으면서, 다짜고짜 뜯어말리기부터 하는 엄마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을 싸는 것도 아니고. 네가 이혼하면 우리 가족은 어떡하라고?”
“왜 그래, 엄마. 내가 이혼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러다가, 사실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뜩하게 스며드는 예감에 여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
예상치 못한 침묵이 이어졌다. 길어질수록, 경직된 고요는 불안감을 더했다. 하, 밭은 숨을 내뱉은 여원이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그게 여원아, 너희 아주버님…… 대표님이 사정 봐주셔서, 매달 아버지 빚 이자 보내주고 계시거든.
뒤통수가 크게 후려쳐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호한 배신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여원아, 우리 집 사정 알잖아. 그 돈 아니면 우리 다 길바닥 나앉게 생겼어.
“하, 엄마, 엄마는 대체 왜 그걸 덥석 받고…….”
―엄마도 많이 힘들어서 그랬지, 응? 그러니까, 여원이 네가 엄마를 봐서라도…….
“엄마는…… 그것 때문에, 나보고 하선준이랑 같이 살라는 얘기야?”
―그렇다기보다는…… 여원아, 너무 너 하나만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응? 결혼이라는 게 당장 때려치워야겠다 싶다가도, 살다 보면 다 정이 붙는 거더라고.
“…….”
―엄마가 이번 한 번만 이렇게 부탁할게, 응?
여원을 붙들고 통사정을 하는 목소리는 애처로웠지만, ‘이번 한 번만’이라는 엄마의 말은 기만처럼 느껴졌다. 대체 여기에서 이기적인 사람은 누구인지. 살다 보면 정이 붙는 거라면, 여원 역시 엄마와 같은 삶을 살라는 말인지.
“엄마…….”
하지만 숨통을 옥죄듯이 여원을 몰아붙이는 엄마 역시도 불행한 결혼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울컥거리는 울화통이 목구멍을 타고 넘쳐 흐를 것만 같은데도, 차마 그녀를 완전히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일단 끊어.”
―그래, 여원아. 이혼은 안 하는 거 맞…….
안절부절못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도 않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하지만 목 끝이 얼얼하리만치 틀어막힌 답답함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때 한 번 주고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다달이 돈을 부쳐 주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그대로 발이 묶여버린 것만 같았다.
‘비서실에서 여원 씨 부모님과 연락 취할 테니, 여원 씨는 이제 이 일에 신경 끄도록 하세요.’
앞으로는 가족 일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거라던 제헌의 말이 문득 스쳐 갔다. 여원이 걱정할 만한 거리를 제거한 거고, 실제로 제헌에게는 그게 큰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도 섣불리 믿을 수 없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제헌이 베풀어준 호의와 도움이 결국 족쇄로 돌아왔다.
* * *
국비지원 아카데미, 미용 자격증 따위를 컴퓨터로 검색하던 여원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엄마가 극구 반대하는 탓에 골치가 아팠지만, 선준과 이혼해야 한다는 결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엄마 말마따나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으니, 미리 대책을 세워둬야 했다.
아무래도 집안 사정상 당장 복학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여원 씨, 여기 있었어요?”
“어, 제헌 씨!”
방 안에 들어선 제헌을 알아챈 여원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저는, 여기에 오실 줄 모르고…….”
때마침 여원에게 가까워진 제헌이 모니터 화면을 주욱 훑어내렸다. 집요하게 들러붙는 시선을 알아챈 여원이 여러 개 띄워진 인터넷 창을 다급하게 종료시켰다.
“음…….”
하지만 한발 늦어버린 탓에, 제헌은 검색창을 이미 보아버린 이후였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구질구질한 고민을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 무슨 마음으로 여원이 이런 것들을 찾아보고 있는지, 제헌은 훤히 들여다보고도 남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말끔해진 모니터를 확인하고 쭈뼛 뒤를 돌아보자 제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
“…….”
다행히도 제헌은 여원에게 왜 이런 걸 찾아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묻지는 않았다. 다만 진득하게 가라앉은 시선만이 여원의 얼굴을 훑어 내리듯이 머무를 뿐이었다.
“여원 씨.”
“…….”
“나한테 할 말이 있습니까?”
숨이 꽉,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 늪에 잠긴 것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 그런 여원의 속을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아, 그게요…….”
흐트러짐 없이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는 표정에서는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어려웠다. 여원은 일부러라도 먼젓번 제헌의 도움이 저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음을 되새겼다.
그리고 더 이상은 여원이 알아서는 안 된다며, 선준의 일기장을 거두어갔을 때의 섬뜩한 기분 역시……. 여전히, 제헌에게는 미심쩍은 구석이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
“…….”
그런데도 완벽히 고립된 여원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결국 제헌밖에는 없었다.
“네.”
“…….”
“제헌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요새는 계속 이혼 절차와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갈지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무료 상담을 제공하는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직접 찾아가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다녀올 곳이 있어서 그런데, 서울에 가는 차를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
먼젓번에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선준이 훼방을 놓지 않았던가. 이혼 준비를 하기 위해 변호사를 만난다는 이유로 기사를 부를 수는 없었다. 지난번 경험에서 배웠듯, 저택 사용인들 역시 결국에는 선준의 편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선준이가 모르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
“…….”
말하면서도 무리한 요청이라는 건 알았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지만, 어쨌든 제헌과 선준은 피가 섞인 형제였고 이혼을 생각하는 여원은 가족의 외부인이었다. 저택의 가주로서 제헌은 하씨 가문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요.”
그러나 잔뜩 긴장해 눈치를 살피던 것이 무색하게도, 뜻밖에도 제헌은 흔쾌히 그를 받아들였다. 여원이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날짜는 언제가 좋겠습니까?”
제헌이 빙긋 웃어 보이자, 여원은 그대로 그에게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은 기분에 혼미해졌다. 제헌의 얼굴을 오롯이 담아내는 여원의 눈동자가 일렁일렁 흔들렸다.
“아…….”
페로몬이 물씬 밀려왔다. 여원에게 상반신을 느슨하게 드리운 제헌이 컴퓨터 마우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여원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가벼운 격려를 마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뒤로 쑥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하, 탄식 같은 숨을 내뱉은 여원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무척 고마우면서도 그에 비례하여 마음이 무거워졌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자꾸만 제헌에게 의지하고 의존하게 되는 스스로를 알아서였다.
* * *
환절기에 접어든 날씨가 최근 부쩍 써늘해졌다. 얇은 재킷을 걸친 여원은 몸을 작게 웅크리고 저택 앞에서 제헌이 보낸 차를 기다렸다. 몰래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라도 선준이 뒤쫓아 나올까 봐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원 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제헌 대표님 수행비서 유현석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리무진에 기사를 붙여줄 줄 알았는데, 제헌이 자신의 수행 비서를 직접 보내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비서가 타고 온 차는 여원의 눈에도 낯이 익었다. 예전에 제헌과 외출했을 때 같이 탔었던 은회색 벤츠였다.
“아…….”
비서가 운전하는 동안, 여원은 뒷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제헌의 차에는 특유의 페로몬과 여원이 직접 골라줬던 향수 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정작 제헌을 직접 마주 보고 있을 때는 늘 바짝 긴장하게 되는데, 익숙한 향기는 어딘지 모르게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푹신한 좌석에 푹 가라앉은 여원은 눈을 감고 향기에 물씬 잠겼다. 곁에 제헌이 있지 않은데도, 계속해서 제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빠져나왔을 때, 여원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각 잡힌 비서의 시선을 의식한 여원이 흐트러진 몸가짐을 단정히 가다듬었다. 잠깐 사이에 몸에 묻은 옅은 페로몬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팔다리를 작게 휘젓고는 핸드폰으로 주소를 확인했다.
그래도 역시 이혼 상담을 받으러 밖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욱하게 드리우는 먹구름 사이로 빛줄기를 발견한 것처럼 희망찬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맞긴 한가.”
무료 법률 상담이다 보니,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무실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열악한 실내 환경과 어딘가 퀴퀴한 분위기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손님이 오랫동안 없는지 반쯤 졸고 있던 변호사가 여원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몸을 곧추세웠다.
“그런데 외람되지만 이혼은 굳이 왜 하시려는 거예요?”
게다가, 한참 동안 이어진 여원의 설명을 듣고 변호사가 내뱉은 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네, 뭐라고요?”
“잘 이해가 안 가서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결혼하시고,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죠? 아…… 여원 씨 삶이 훨씬 더 나아지신 것 같아서요.”
스스로를 열성 오메가라고 밝힌 여원이 알파인 선준과의 결혼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이야기를 건성건성 듣던 변호사였다. 그런 그가 함부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결론지었다는 사실에, 여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죄송한데, 그건 변호사님께서 판단하실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제 일이고, 이미 단단히 결심한 부분이기도 해서요. 상담 계속 진행해 주시겠어요?”
“아, 예……. 뭐 그러시다면야.”
“……하아.”
“큼큼, 그런데 현실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혼 과정이 쉽지는 않겠다, 뭐 그렇게 보인다 이겁니다. 아무리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열성 오메가에 대한 법적 처우가 좋지는 않기 때문에 법리적으로도 좀 불리한 구석이 있으시고요.”
“…….”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정 내에서 학대나 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까? 알파 쪽에서 이혼을 안 해주겠다고 버틴다면, 소송이 지지부진 끌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나이가 오십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 변호사는 탁한 냄새가 풍기는 전통차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이따금씩 코를 훌쩍거렸다. 딱히 돈이 안 될 만한 건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시종일관 무성의한 태도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렇지만 그쪽에 귀책 사유가 있잖아요. 바람을 피웠다고 이야기했고…….”
“고것도 보면 애매한 구석이 있어서요. 판사나 변호사 중에서 베타도 있는 만큼, 명확한 물증 없이 페로몬이 묻어 있었다, 정도로는 설득력이 있기가 영 난해합니다.”
“하…….”
“게다가 상대가 재벌 가문이고, 이혼을 거부하고 있다면 분명 소송에서도 노련한 변호사를 고용할 텐데요. 그러면 수년간 소송이 이어질 수도 있는데, 비용을 부담할 만한 여건은 되시겠어요?”
하지만 변호사의 불성실한 태도와는 별개로, 그의 논리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었다. 소송 비용, 까지 얘기가 나오자 잠시나마 들떠 올랐던 여원의 심장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결국에는 또 돈인가 싶었다.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는 거죠?”
그나마 돌파구라고 생각했던 길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걸 깨닫자 한순간에 막막해졌다. 절망적이었다.
“쩝. 뭐,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상대 배우자 귀책 사유에 대한 실질적 물증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아…….”
“지금도 남편분이 바람피우고 있다고 보시는 거죠? 흥신소 필요하면 소개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제가 연락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여원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이혼하려고 결심하기까지도 쉽지 않았지만, 과정 역시 절대로 녹록지는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 버티려 했던 얼굴이 빠른 속도로 일그러졌다.
“잘 이해했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요.”
“…….”
“그럼 이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잠시나마 희망을 품었던 만큼,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은 탈력감이 오늘따라 유난히 심했다. 마른빨래처럼 축 늘어져 버린 여원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벌써 가시려고요? 차 한잔 들지를 않고…….”
처음에는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귀찮은 티를 내다가도,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자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싸구려 연민은 오히려 여원을 더욱 비참하게만 할 뿐이었다.
“하아…….”
변호사 사무실이 위치한 낡은 콘크리트 건물에서 터덜터덜 빠져나왔다. 그렇지만 도무지 지금 이대로는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저기…… 죄송한데, 저희 한 20분 정도만 있다가 출발해도 될까요?”
“예, 알겠습니다.”
좁고 너저분한 골목에서도, 제헌 소유의 벤츠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근사하게 번쩍번쩍 빛났다.
“차라리 비라도 확 내리든가…….”
맥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우중충하게 덧칠된 먹구름이 한가득했다. 쨍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비를 뿌리지도 않는 애매모호한 날씨가 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원의 신세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만 없으면 저택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선준이라는 독초를 인생에서 잘라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쉬운 선택과 안일한 마음으로 이어진 길 끝에는 뒤늦은 후회만이 남았다.
짧게나마 기대를 해서인지, 냉혹한 현실을 체감하게 되자 더 암울한 기분이었다. 자기 연민 해봤자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여원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제 신세가 퍽 처량하게 느껴졌다.
벽면이 누더기처럼 마모된 골목길을 추적추적 걸어나갔다. 또 꼼짝없이 저택에 갇히게 된다고 생각하자 한 발짝 한 발짝 떼어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미야오.
희미하게 들린 울음소리에 여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심코 그냥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골목길 끝머리에 아기 고양이가 작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세상에…….”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고양이는 얼마 전까지 내린 비에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앙상하게 마른 몸이 초췌한 데다 듬성듬성 솟아난 새까만 털도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솟아 있었다. 야옹― 인기척을 알아챈 고양이가 앓는 듯이 작게 끓는 소리를 냈다.
“왜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어.”
야옹, 끼야옹.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는지, 가까이서 보자 고양이의 몸이 엉망으로 덜덜 떨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미 고양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엄마는 어디 있어? 혹시 너도 버려진 거야?”
고양이를 들어 올린 여원이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고양이가 여원의 가슴팍에 머리통을 미약한 힘으로 문질러댔다. 눈곱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꺼풀 사이로 끔뻑 드러나는 눈동자가 너무 슬퍼 보였다.
“이러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코끝에서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숨이 너무나 얕았다. 그대로 어린 짐승을 놓아주기 위해 어깨를 잘게 들썩이자,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다시금 힘없는 머리통을 여원의 가슴팍에 문질러왔다.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다시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방금 전 눈을 마주친 이후로 아기 고양이가 계속해서 마음에 밟혔다.
“이런…… 큰일이네.”
혼자의 힘으로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
여원 역시 지금 제 몸 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데려간다면 분명히 선준이 한 소리를 하겠지, 싶으면서도 마음이 쓰여서 도무지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고양이를 소중하게 안아 든 채로, 여원은 골목길 초입에 주차된 차량을 향해 터덜터덜 되돌아갔다.
“볼일은 잘 해결했어요?”
변호사 사무실이 자리한 허름한 저층 건물 앞에 제헌이 길쭉하게 서 있었다. 야옹! 고양이가 앙칼지게 우는 소리에 흠칫 놀란 여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제헌 씨!”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런데…….”
제헌의 시선이 여원의 품 안에서 낑낑 앓고 있는 고양이에 닿았다. 흠칫 어깨를 떤 여원이 까만 솜뭉치 같은 것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게…….”
어쨌든 아직까지는 저택의 안사람 비슷한 위치라지만, 여원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실질적으로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고양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오겠다고 빨리 얘기해야 하는데도,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키우고 싶어요?”
그런 여원의 속내를 알아차린 것처럼, 제헌이 담담하게 물어왔다.
“네, 네!”
여원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유산한 이후로 내내 가라앉아 버석버석했던 여원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생기로 넘쳐흘렀다. 제헌의 얼굴에서도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래요.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
“늦겠습니다. 빨리 차에 타고요.”
저택의 주인인 제헌이 고양이를 데려가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내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마음이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하다가, 이제야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잔뜩 감격에 차 제헌을 올려다보았다. 여원의 뺨에 발긋한 색이 덧입혀졌다.
“금방 있으면 집에 도착할 거야.”
하나로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서 따끈따끈한 체온과 부슬부슬한 털, 얕게 뛰어오르는 심장박동이 온전하게 전해졌다. 여원은 차에 올라탄 지 얼마 안 되어 잠에 톡 곯아떨어진 고양이의 등줄기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앞 좌석에서는 제헌이 매끈하게 핸들을 움직여 차를 운전했다. 제헌이 흔쾌히 고양이를 키우게 해준 것이 여원은 못내 고마웠다. 그 때문인지, 자꾸만 심장이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다시 한번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굽이지고 침침하기만 했다. 그러나 제헌이 곁에 있어주어서일까, 새로운 생명을 심장 가까이에 품은 여원은 희망에 대해서 다시금 떠올려보게 되었다.
* * *
“하암.”
잠에서 갓 깨어난 여원이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눈두덩이를 슥슥 비벼냈다. 맑아진 시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보송보송하고 새까만 털 뭉치였다.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왔는지, 이불 위에 우아한 자태로 선 고양이가 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야옹!
저를 빤히 쳐다보는 샛노란 눈동자를 맞닥뜨리자 웃음이 절로 비죽 새어 나왔다. 살금살금 침대를 기어 다니는 고양이의 몸짓에 혼이 쏙 빠졌다. 여원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깜빡 잠이 들 때도 늘 바로 곁에서 고양이가 살랑거리는 까닭에, 요새 여원은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고양이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어깨가 작게 떨리자, 침대 시트도 덩달아 얕게 출렁거렸다. 그러자 등을 꼿꼿이 세운 고양이가 금세 경계심 가득한 낯을 했다. 스르륵, 민첩한 몸짓으로 침대 위를 미끄러지듯 누볐다.
“통키야∼”
여원이 팔을 뻗으려 했지만, 주인인 여원을 닮아 조심성 많은 성격의 고양이는 이미 침대 아래로 날래게 내려가버린 이후였다. 여원이 달아나려는 고양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냐아.
단박에 여원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낑낑대는 소리를 냈다. 유연하고 나긋한 몸이 가슴팍 위에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처음 만났을 때 꾀죄죄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지난 며칠간 여원의 보살핌을 받은 고양이의 새까만 털에는 매끄러운 윤기가 흘렀다.
“우리 통키 언제부터 이렇게 예뻤어?”
내 고양이이지만, 어쩜 이렇게 잘생겼지? 고양이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여원이 말랑말랑한 핑크 코에 제 콧등을 슥슥 문질렀다. 상실감으로 텅 비어 있던 마음속 우물에도 따스한 온기가 찰랑찰랑 차올랐다.
결국 누군가를 잃은 자리는 누군가를 들임으로써 채워질 수 있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보살피고 사랑하는 동안, 아이를 잃고 메말랐던 여원의 마음속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통키야, 오늘 하루도 우리 둘이 같이 행복하게 보내자, 되뇐 여원이 품 안에 쏙 안겨든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다짐과 함께 문밖을 나서던 찰나였다.
“아, 깜짝이야!”
심장이 크게 철렁했다. 바로 방문 앞에 선준이 형형한 눈빛을 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
“하선준, 놀랐잖아.”
최근 들어 여원을 향한 선준의 감시는 더욱 삼엄해졌다. 여원이 이혼을 알아보고 다니는 것을 동물적으로 알아차렸는지, 선준은 부쩍 예민하게 굴었다. 여원이 저택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여원의 행동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강여원! 너는 어떻게 된 게 애가…….”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악을 부릴 태세를 만만히 갖춘 선준이 고양이를 품에 안은 여원에게 오만상을 썼다. 더 이상 선준에게 굴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여원 역시 강하게 맞받아치려던 때였다.
컁, 캬앙!
여원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고양이가 선준을 향해 하악, 하악, 새된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평소에는 세상 순둥이가 따로 없는데도, 고양이는 선준만 보면 이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댔다.
“아, 이 고양이 새끼는 왜 나만 보면 지랄이야.”
“하선준!”
“어쭈, 이게 얻다 대고 눈을 부라려? 재수 없게시리.”
“야, 너는 쪼끄만 아기한테 왜 화풀이야?”
주먹을 꽉 움켜쥔 선준은 금방이라도 고양이를 쥐어박을 기세였다. 여원이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고 여린 동물에게 으름장을 놓는 모습이 너무나 못나 보였다. 선준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인 여원이 고양이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푹 숙였다.
“아기? 별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네. 이건 무슨 신종 정신병이야.”
“너 입조심 안 해?”
“그러니까 왜 내 허락도 안 맡고 이딴 걸 집에 데려오는데? 난 고양이 존나 싫단 말야!”
악에 받친 선준은 급기야 그대로 고양이를 발로 걷어차려 했다. 기겁한 여원이 등으로 고양이를 감쌌다. 끼잉 울음을 흘린 고양이가 여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너 혹시라도 통키한테 못된 짓 할 생각 하지 마.”
고양이를 소중히 끌어안은 채, 고개를 홱 돌린 여원이 선준에게 경고했다. 그런 여원의 반응에 선준은 오히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너 그렇게 물고 빨고 하는 고양이한테 쏟는 애정을 남편인 나한테 딱 절반이라도 쏟아봐.”
“누가 남편이래? 난 너 내 남편으로 생각 안 해. 이혼하자고 벌써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이게 진짜!”
“말 나온 김에 잘됐네, 우리 빨리 이혼하자. 나도 이 집에서 나가고, 꼴도 보기 싫다는 고양이도 한꺼번에 치우면 서로 좋은 거 아냐?”
선준이 눈을 반쯤 까뒤집고 달려들었지만, 여원은 더 이상 그런 선준의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이러다 이혼당한다 해도 아쉬울 게 전혀 없었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반면 선준은 변화한 여원의 태도를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고양이 새끼, 당장 밖에다 내다 버릴 거야!”
“너 우리 통키 당장 이리 안 줘?”
선준은 잔뜩 약이 올라 여원에게서 고양이를 빼앗아갔다. 어찌나 손길이 우악스러웠던지, 여원이 차마 막아낼 틈새도 없었다. 거친 손길에 덩달아 바닥에 나동그라진 여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악!”
고양이를 되찾기 위해, 팔을 길게 뻗은 여원이 바동거리던 때였다. 선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고양이가 선준의 얼굴을 냅다 할퀴어버렸다.
“아…….”
선준의 이마에 배어난 핏물을 보고는 여원도 순간 흠칫했다. 아직 아기 고양이인데도, 안으로 감추고 있던 손톱이 꽤나 날카로운 듯했다.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나 망설였지만, 어쨌든 먼저 고양이를 괴롭히던 것은 선준이라서 조금쯤은 통쾌하기도 했다.
“두 사람 지금 무슨 일입니까.”
선준과 여원이 서로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참이 지나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길쭉한 실루엣을 알아차린 여원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제헌이 직접 2층으로 발걸음 했다.
“아, 제헌 씨, 그게…….”
제헌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최근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워대는 여원과 선준이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미야오.
제헌이 두 사람에게 서서히 가까워지자, 고양이가 폴짝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스르륵 제헌에게 다가간 고양이가 매끈한 슈트에 감싸인 종아리에 대고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샛노란 눈동자에 날카로운 이채가 돌았다.
“으이씨!”
보란 듯이 이마를 움켜쥔 선준이 아파 죽겠다며 엄살을 부렸다. 여원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선준을 뾰족 흘겨보았다. 제헌이 보는 앞에서 선준과 다투는 것이 퍽 민망했지만, 그럼에도 선준을 향한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형, 저 고양이가 내 이마를 할퀴었다니까? 사람 공격하는 짐승 새끼인데, 이렇게 집에다 둘 거야?”
“제헌 씨, 아니에요! 하선준이 먼저 통키 괴롭혔어요! 통키 원래 순해서 진짜 안 저런단 말이에요.”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선준이 제헌에게 일러바쳤다. 고양이를 지켜야 하는 여원도 이대로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다가 금세 제헌의 앞에서 떼쟁이처럼 굴었다는 생각에, 퍼뜩 눈치를 살폈다.
“하…….”
두 사람 모두 악악거리며 달려들자, 제헌의 미간에 팬 주름이 짙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헌은 여원과 선준을 노골적으로 나무라지는 않았다. 냉각된 시선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여원에게 잠시 머물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선준에게로 향했다.
“여원 씨, 고양이 데리고 잠깐 정원에 나가 있을래요?”
여전히 발치에서 살랑살랑 애교 부리는 고양이를 흘긋 내려다본 제헌이 여원에게 부드럽게 권유했다. 동생과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네에.”
고개를 맥없이 끄덕거린 여원이 고양이를 푹 끌어안았다. 여전히 눈을 사납게 홉뜨고 있는 선준을 애써 못 본 척, 두 알파만 남겨둔 채 저택 밖으로 나섰다.
“통키야, 아까 많이 놀랐지?”
정원 한복판에 자리한 벤치에 앉은 여원이 무릎 위의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무성한 잎사귀가 길게 드리우는 그늘이 안락하고 선선한지, 금세 기분이 좋아진 고양이가 골골골 노래를 불렀다. 여원은 포만감으로 눈매가 가늘어진 고양이의 촉촉한 코끝을 톡톡 건드려보았다.
냐아.
이렇게 순하고 다정하기만 한데. 통키가 선준의 얼굴을 할퀴었을 때는 꽤나 놀랐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내 휘청이던 자신이 겨우 정을 붙인 고양이에게 소름 끼치고 재수 없다며 쏘아붙이다니. 선준을 향한 반발감이 앞섰다.
“우리 통키랑 형아랑 이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고양이의 정수리 부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원은 절대 이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통키에게 좋은 삶을 주기 위해서라도, 선준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마침내 저택을 떠나게 되는 날에는, 한 점의 아쉬움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정말 그럴까? 위태롭게 부유하던 생각은, 어느덧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었던 제헌에게 다다라 있었다.
이혼하면 그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사는 동안 다시 만날 수나 있을까?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나부끼는 나뭇잎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차피 제헌과는 선준 때문에 엮이게 된 사이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전혀 아니었다. 그런 제헌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스스로가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느긋하게 골골거리던 고양이는 어느새 여원의 무릎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작고 몽글몽글한 털 뭉치 같은 것을 품에 꼭 끌어안은 여원이 비척비척 저택으로 돌아갔다.
“어?”
막상 들어선 저택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제헌과 선준은 잔뜩 경직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생을 훈육하는 제헌에게서 위압적인 기운이 풍겼다. 여원마저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아, 여원 씨. 때마침 잘 왔습니다.”
“네, 네에.”
“하선준, 여원 씨한테는 네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게 좋겠지.”
뻣뻣하게 굳어 있던 선준이 여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선준의 얼굴은 불만투성이인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나로 딱 정의 내릴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선준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번 2학기에는…… 잠깐 외국에 다녀올까 해.”
“어? 뭐라고?”
깜짝 놀라 반문했다. 유산 이후로는 여원이 잠깐이라도 제 눈에 띄지 않으면 난리법석을 피우던 선준이었다. 게다가 제헌과의 사이도 의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외국에 가겠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 말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우리 둘 다 너무 흥분한 상태인 건 맞는 것 같아.”
“…….”
“잔뜩 화난 채로 자기 말만 하니까 너무 말도 안 통하고.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고.”
“…….”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머리를 식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요. 선준이가 떠나 있는 동안에는, 여원 씨는 친정에 가 있으면 되겠고요.”
선준이 아마도 제헌에게 설득당했을 논리를 되뇌고, 제헌이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이해가 갔다. 하긴 요즘에는 감정이 상한 채로 서로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면서도, 여원과 선준을 둘러싼 상황에는 실질적인 진전이 하나도 없었다. 지지부진하게 반복되는 감정싸움이 못 견디게 싫은 것은 비단 여원 한 사람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 다, 지금 이대로는 아닌 것 같아.”
“…….”
“어쨌든 여원이 너도, 나랑 이대로 갈라서는 걸 진심으로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형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펄펄 날뛰던 선준도 조금은 차분해져 있었다.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이 진정 바라는 바를 슬그머니 내뱉은 선준이 여원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그러니 한동안 서로 머리 좀 식히면서 객관적으로 상황 보자. 어려운 상황일수록,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중요하니까.”
어깨에 힘을 단단히 준 채로, 선준이 여원을 또렷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선준은 위기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후퇴를 결정했다 믿고 싶은 듯했지만, 여원의 눈에는 스스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치달아가는 상황을 단순히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원 씨,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감정에 휩싸인 채로 결정해서는 안 되죠.”
“…….”
“일단 지금은 여원 씨가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는 것이 최우선이라 봅니다.”
이제는 제헌도 여원이 선준과 이혼하고 싶어 하는 것을 뻔히 알았다. 저택의 주인이자 가주로서 마냥 여원의 편에 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선준과 싸우느라 저택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 역시 집주인인 제헌에게 실례이기도 했다.
“네, 감사합니다.”
별거라는 게, 결국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보류였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여원은 꼴도 보기 싫은 선준에게서 잠시나마 떨어질 수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확 트이는 듯해,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그래요. 두 사람도 피곤할 텐데, 쉬어요.”
한차례 소동 끝에 두 사람 다 조용해지고, 유리알처럼 위태로운 평온이 찾아왔다. 그제야 제헌은 기꺼운 얼굴을 했다. 선준과 여원을 자기의 통제하에 놓은 저택의 주인이 고고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자리를 떴다.
* * *
선준의 유학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처음에 얘기를 꺼낼 때부터 제헌이 염두에 둔 바가 있었는지, 선준은 중국의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평소에는 제헌에게 사사건건 반항하던 선준이지만 이번 일에는 별다른 마찰 없이 형의 판단을 따랐다.
감정적으로 격양된 상태였던 여원 역시 유학 준비로 분주한 선준과 자연스럽게 멀어지자 한층 차분해졌다. 여원은 선준으로 인해 분노하고, 짜증 내고, 흐트러지는 것 모두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이미 선준은 여원의 인생에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와 떨어지게 되는 앞으로의 6개월 동안, 여원은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며 제 살길을 미리 찾아둘 생각이었다.
깃털 장난감으로 통키와 놀아주던 여원은 똑똑,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낮 시간이라서 제헌은 회사에 있을 텐데, 여원이 의아해했다.
“여원아.”
쭈뼛거리며 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뜻밖에도 선준이었다. 야단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잔뜩 주눅이 든 그가 조심스럽게 여원을 불렀다. 이어 주춤주춤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나 내일 중국 출국해.”
“어, 그래.”
여원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남 일이니까. 그러자 쭈뼛거리던 선준이 못내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여원이 네가…… 내 말 듣고 싶지 않은 거 알아.”
“…….”
“그래도, 이번에 중국 가는 거, 나는 너랑 잘 살아보려고 하는 거야.”
선준은 기세가 한층 수그러져 있었다. 대체 제헌이 어떻게 구슬렸기에 선준의 태도가 돌변했나, 순전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여원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동안 전적이 있는데, 선준을 상대로는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됐다.
“지금처럼 얼굴만 보면 서로 싸우기만 해서는 우리한테 미래가 없잖아.”
“…….”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 마음 잘 정리하고, 그다음에 차분히 다시 잘 이야기해 보자.”
여원이 못 들은 척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선준은 시간이 지나면 여원의 화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반성하는 척한다 해도 그동안 선준이 여원에게 떠안긴 모멸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잘못했어, 여원아. 그동안 결혼하고 너 많이 힘들게 했던 것 같아서…… 나도 반성하고 있어.”
“…….”
“그렇지만, 너 좋아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야. 그것까지 의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한숨을 폭 내쉰 여원이 마지못해 선준을 마주 보았다.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선준이 갸륵한 낯빛으로 구질구질한 사과를 늘어놓았다. 저럴 거면 처음부터 그러지나 말지, 하는 생각에 씁쓸해질 뿐이었다.
“많이 성숙해져서 올게. 너도 잘 있고, 그동안 네 생각이 변하기를…… 바랄게.”
“…….”
“너도…… 집에서 잘 지내다 오고.”
이제 와서 진심을 이야기한다 한들 선준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저질러버린 이후였다. 또한, 그런 행동을 했다면 감히 진심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되었다.
“응, 알았어.”
여기서 어설프게 선준의 마음을 받아주었다가, 또 한 번 그의 감정 기복에 휘말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여원이 딱 잘라내듯 선준에게 대답했다.
“…….”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선준이 패배자처럼 돌아섰다. 스스로도 무슨 짓을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뒷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 * *
선준이 중국으로 떠난 다음 날, 커다란 캐리어를 펼친 여원은 단출한 짐을 꾸렸다. 정작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가져갈 것들이 별로 없었다. 이곳에서 여원이 입고 먹고 사용하며 누리던 것들은, 사실은 이 저택에 속한 것이지 정말로 여원의 소유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냐옹!
반드시 빠트려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통키 하나 정도일까. 살랑살랑 다가오는 고양이를 여원이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나 여원이 살던 반지하 다세대주택은 환경이 무척이나 열악해, 부모님과 동생들끼리 지내기도 퍽퍽하기 그지없었다.
그곳에서 자기 공간이 중요한 고양이를 기를 수나 있을까? 부모님이 고양이를 보자마자 당장 쫓아낸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휴…….”
현실은 언제나 여원에게 상상 이상으로 냉혹했다. 혼자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저의 보살핌으로 살아가는 어린 생명체도 책임져야 했다. 보란 듯이 잘살아 보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다가도 한숨이 불쑥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원 씨.”
그 때, 반쯤 열려 있는 문 틈새로 길쭉한 실루엣이 드리웠다. 여원은 흐트러진 자세를 올곧게 바로잡았다. 적어도 제헌 앞에서는 세속적인 삶의 걱정에 찌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표정을 가다듬은 여원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 제헌 씨. 안녕하세요.”
여원은 제헌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동안 선준과 싸우느라고 못 볼 꼴을 보인 것이 내심 신경이 쓰였던 탓이었다. 사실은 선준과 이혼하게 된다면, 굳이 제헌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집으로 가져갈 짐?”
“아, 네. 맞아요.”
“생각보다 짐이 많지는 않네요.”
“그러게요, 저도 좀 놀랐어요. 아무래도 꼭 필요한 것들 위주로 추리다 보니까.”
머쓱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여원을 향해 제헌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제헌에게 꼬리를 우아하게 흔들며 다가간 고양이가 몸을 치댔다. 저택의 사용인을 포함해 여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고양이였지만, 제헌에게만은 잘 보이고 싶어 했다.
“아…….”
의외로 제헌 역시 그런 고양이가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린 제헌이 고양이의 머리통을 매만져 주었다. 윤기가 흐르는 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우아한 손가락을 여원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 여원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제헌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심장이 펄떡 뛰어올랐다.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여원은 제헌의 시선을 피해 바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착하다.”
고양이를 어루만지는 제헌의 목소리가 나직했다. 가릉가릉, 고양이도 기분 좋다는 듯 나른하게 울었다. 제헌과 나란히 있는 지금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게 느껴졌다.
숨도 못 쉴 것처럼 저를 옥죄어오던 저택이었지만, 선준이 사라지자 그것만으로도 한결 살 것 같았다.
물론, 저택을 떠나 친정으로 돌아가 봐야 답이 없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떠나게 되는 순간에마저 저를 꼼꼼하게 살피는 제헌을 마주하자, 이제 한동안은 그를 볼 일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눅눅해졌다.
“여원 씨, 부모님에게는 이번 일에 대해 말씀은 드렸고요?”
그런 여원을 그대로 꿰뚫어 보듯, 제헌이 적확한 질문을 건넸다.
“아, 그게…… 그러니까.”
“…….”
“아직 말씀은 못 드렸어요. 이제부터…… 어, 잘 이야기해 봐야죠.”
치부가 들추어진 여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내 엄마에게 사정을 알려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혼 얘기만 살짝 흘려도 노발대발하던 엄마인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가기 싫어요?”
“그치만, 제가 싫건 말건 일단은 가야 하는 상황이고.”
“난 상황 말고 지금 여원 씨 생각이 궁금한 건데요.”
“……가기 싫어요. 여기 있고 싶어요.”
의도치 않게 불쑥 내뱉어진 생생한 진심에 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 밖으로 내어진 다음에야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여원의 눈동자를 제헌이 빤히 응시했다.
“여원 씨는 안 가도 됩니다.”
마침내 입을 뗀 제헌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흡족해 보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여원이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 커다란 눈이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원한다면 저택에 머물러도 된다고요.”
제헌이 태연하게 턱 끝을 까닥였다. 저택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알파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될 것도, 심지어는 여원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예측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물론 선택은 여원 씨 몫입니다.”
“…….”
“고양이도 있으니, 부모님과 지내는 게 불편할 테니까요.”
“아, 네.”
빠듯하게 밀려드는 고민에 여원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물론 저택에서의 삶이 숨 막히게 버거웠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저택 자체가 끔찍하다기보다는, 그 안에 여원을 가두기 위해 빈틈없이 옭아매던 선준이 못 견디게 싫었다. 선준은 저택을 떠났다. 그러니 저택에서의 삶도 이제부터는 달라지지 않을까?
“…….”
“…….”
물론 어떤 방향으로 달라질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제헌의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혼은 절대 안 된다, 저를 들들 볶아대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를 꼼짝없이 목도해야 할 게 뻔했다. 부모님은, 돈을 이유로 여원의 이혼을 돕기는커녕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막을 사람들이었다.
“여원 씨가 밖에 못 나가도록 감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득한 고민에 빠진 여원에게 제헌이 반쯤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선준의 허물을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것 같으면서도, 여원이 걱정하는 바를 아주 기민하게 포착하고 달래주었다.
그래도 제헌은, 선준과는 다르게 자신이 원할 때마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어때요, 한동안 나랑 같이 지내겠어요?”
사실은 여원이 내내 기다려오던 말이기도 했다. 아랫입술을 살짝 축인 여원이 고개를 느슨하게 들어 올려 제헌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맞물리자 심장이 엉망으로 두근거렸다.
부적절하게도 여원은 설레하고 있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분명 허락된 것 이상으로 그와 가까워질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치밀었다.
“…….”
“…….”
그럼에도 여원을 향해 눈매를 나긋하게 휘어 보이는 얼굴은 은밀하고도 유혹적이었다. 어느 것 하나 강요한 적 없었지만 여원은 언제나 그를 홀린 듯이 따르게 됐다.
“네, 좋아요.”
그래서 여원은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손끝이 저릿해지는 기분에 질끈 눈을 내리감자, 제헌이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모호하게 번지는 듯도 했다.
그렇게 여원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거대한 저택의 주인과 사실상 단둘이서 지내게 되었다. 혹독하게 무더웠던 여름이 막을 내리고, 부쩍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풍요로운 가을이 여물어가는 동안 비밀스러운 저택을 둘러싼 녹녹한 공기도 빠른 속도로 그 색을 달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