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6. 빛나는 상실 (7/17)

6. 빛나는 상실

쿵, 문이 거칠게 밀어젖히는 소리가 평일 오후 병실의 고요를 깨트렸다.

“여원 씨!”

덩그러니 놓인 병실 침대 위에 나동그라져 있던 여원이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헌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제나 말끔하게 정돈되었던 머리칼이 얕게 흐트러진 채였다.

“아…….”

날카로운 뼛조각이 아랫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제헌이 몸을 옹송그린 여원에게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회사에서 일하던 도중 곧장 달려온 것인지, 제헌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슈트 차림이었다.

“…….”

“…….”

여원은 침대맡으로 다가온 제헌을 멍하게 올려다봤다. 버석버석한 입술을 달싹여 보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여원에게서 제헌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순간마저도, 선준은 여원의 곁에 있지 않았다. 여원은 새삼스러운 허탈함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어떻게 된 거예요?”

아직까지도 여원은 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직선적인 제헌의 질문을 받고 나서야 믿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직면하게 됐다.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 ……있었대요.”

간신히 새어 나온 목소리는 송곳으로 쇳덩어리를 긁어내는 것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죽었다, 라는 말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자 목구멍이 홧홧해졌다.

“흐윽…….”

애써 참아왔던 울음이 팡 터뜨려졌다. 여원의 얼굴은 금세 눈물로 흠뻑 젖었다. 제헌의 입매가 이지러졌다. 단정하고 커다란 손이 여원의 뺨을 가벼이 감싸 쥐었다.

“여원 씨.”

훅, 드리워지는 그늘과 함께 제헌 특유의 체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짧게 숨을 들이켠 여원이 울먹울먹한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제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여원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흐, 으…….”

맞닿은 품은 단단했다. 아래가 훅 빠져나간 듯한 지독한 상실감에 괴로워하던 여원을 제헌이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적당한 체온이 닿아오자 위안이 되면서도, 동시에 한층 서러워졌다.

“흑, 제헌 씨, 내 아기…… 아기 어떡해요.”

“…….”

“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흐으, 으…… 아기가…….”

혼자 있을 때는 애써 담담한 척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그러나 제헌이 자신을 위로하자, 방어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 한가득 밀려왔다.

크게 흐느끼느라 여원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이내 여원이 제헌의 가슴팍에 흠뻑 젖어든 얼굴을 푹 파묻었다. 각진 어깨가 움찔, 떨리더니 더욱 강인하게 여원을 끌어안았다.

“여원 씨 잘못 아닙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담백하게 위로했다. 작게 훌쩍인 여원이 제헌의 목덜미에 코끝을 문질렀다.

“흐, 으으…….”

제헌의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규칙적으로 다독였다. 마치, 여원에게 이대로 계속 울어도 된다 말하는 것처럼. 제헌의 슈트 재킷이 눈물에 젖어드는 것을 알면서도, 여원은 제헌의 품에 자꾸만 안겨들었다.

제헌은 여원을 안정시키기 위해 페로몬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아주 귀한 것을 아끼듯이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에 여원의 울음도 조금씩 잦아졌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영영 멈추었으면 했다.

그때였다. 쾅, 또 한 번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여원아, 너 애는!”

선준이 뒤늦게 병실에 들이닥쳤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서 땀을 줄줄 흘렸다. 허둥지둥하던 선준은 제헌의 품에 쏙 안겨 있는 여원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

“…….”

“…….”

제헌은 그런 선준을 지그시 응시했다. 보란 듯이 여원을 감싸 안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헉, 헉, 선준은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선준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여원은 제헌의 품에서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선준은 몸을 단단히 얽고 있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빛이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지금 두 사람, 뭐, 뭐 하고 있는 거야!”

선준은 발을 쿵쿵 크게 구르더니, 빽 소리 질렀다. 잔뜩 약이 오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운 콧김을 씩씩 뿜었다.

“형은 이제 강여원까지 나한테 뺏어갈 셈이야?”

원망과 반발심을 가득 담아, 선준이 제헌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선준이 무언가를 단단히 오해하는 듯해, 여원은 당혹스러워졌다. 그러나 제헌은 전혀 개의치 않고 선준을 서늘하게 내려다봤다.

“둘이 그런 사이일 줄! 나는, 나는 진작부터 알았어. 이렇게 보란 듯이 사람 병신 만들고…….”

“…….”

“지금까지 전부 다, 형이 나에게 뺏어갔잖아. 그걸로는 성에 안 찼어?”

“…….”

“그래도 강여원만은 온전히 내 거였단 말이야!”

선준은 눈을 반쯤 까뒤집고 제헌에게 달려들었다. 격앙된 말들이 내리꽂히자, 그러잖아도 시큰거리던 여원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쿵쿵 뛰어올랐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여원은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머릿속이 텅 비어 먹먹한 와중에도 눈물은 계속해서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하…….”

보다 못한 제헌이 선준에게서 보호하듯 여원을 푹 감싸 안았다. 선준은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여원에게 눈을 부라렸다. 선준을 향한 경멸을 담아, 제헌의 눈매가 날렵하게 좁아졌다.

“너 이리 안 와?”

“아흑…….”

악에 받친 선준이 제헌에게 안긴 여원의 어깨를 홱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배에 통증이 심해졌다. 여전히 눈물을 줄줄 흘리는 채로, 몸을 작게 움츠린 여원이 아랫배를 푹 끌어안았다.

“악!”

그 순간이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선준이 뺨을 거세게 얻어맞았다. 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춤, 물러난 선준이 삽시간에 벌겋게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더듬더듬 움켜쥐었다. 위태롭게 출렁이는 눈동자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여원 씨, 괜찮습니까?”

그런 선준은 본체만체, 제헌은 여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물불 가리지 않던 선준은 뺨 한 대를 얻어맞은 것만으로도 기세가 푹 꺾였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더는 두 사람에게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

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흥건하게 고인 눈물로 시야가 부옜다.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휘몰아치는 일들에 여원이 소스라쳤다.

* * *

여원은 지난 2주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까마득했다. 아이를 잃은 뒤로 몸 아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 자리에 새까만 우물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한번 열린 곳이 제대로 아물지 않아, 벌어진 곳으로 자신의 일부가 줄줄 새어나가고 찐득하게 흘러내렸다.

유산 직후에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탓에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충격에, 머릿속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온통 먹먹했다. 너덜너덜해진 몸을 추스르며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기분이 더 침잠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기운을 내보려고, 여원은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강여원, 너 어디 가?”

여원이 힘없이 복도를 걸어 나오자, 선준이 양팔을 벌린 채 2층 계단 앞을 가로막았다. 언제나처럼 배려 없는 태도였다. 지긋지긋한 무례함에 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3층 안 가니까 미친 짓 말고 신경 꺼!”

형에게 뺨을 얻어맞은 이후 선준은 반쯤 돌아버린 것처럼 굴었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수컷처럼, 저택을 떠나지 않으며 2층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여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너 방금 나한테 소리 질렀냐?”

“왜, 너는 맨날 나한테 버럭거리는데, 나는 그러면 안 돼?”

“하긴, 그러니까 애가 떨어지지.”

“뭐, 뭐라고?”

“말 그대로야. 네가 그렇게 성질 사납게 구니까 아기가 유산된 거 아냐.”

앙심을 품은 선준이 독침 같은 말을 쏟아냈다. 정작 여원이 임신했을 때는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선준은 여원이 유산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다. 계획이 어그러진 사람처럼 씩씩대며 여원을 호되게 탓했다.

“그러는 선준이 너는 잘 한 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 그래?”

“네가 엄마인데 조심했어야지. 너는 어떻게 된 애가 몸 관리 하나 똑바로 못해?”

“그래서, 다 내 잘못이라고?”

“그렇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혼자 있는데 애까지 떨어지고, 네가 하는 게 뭐야?”

심장이 엉망으로 할퀴어진 것처럼, 아이를 잃어버린 상처가 여원에게 선연히 남았다. 몸과 마음 모두가 취약해져 위태로웠다. 그러나 선준은 그런 여원의 상태를 살피거나 여원과 같이 마음 아파하기는커녕, 예전보다 더욱 못되게 굴었다.

그런 선준이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분노할 자격이 있나 싶었다. 지금껏 선준이 단 한 번이라도 아이의 아빠 노릇을 한 적은 있었는지. 이제 여원은 선준이 남편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너 진짜 쓰레기 새끼구나.”

팔짱을 단단히 낀 여원이 선준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서는 선준을 향한 경멸이 숨겨지지 않았다.

“내가 뭘! 내가 언제 틀린 말 했어?”

이 순간에마저도 선준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득바득 화만 냈다. 그런 선준을 마주하자니 과연 이 결혼에 미래가 있나 싶었다. 선준은 처음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고, 앞으로도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여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를 잃은 것은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 더는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이혼해.”

여원이 결연하게 선언했다. 지난번에는 말싸움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지금 이혼을 요구하는 여원의 얼굴은 단호했다. 여원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뭐라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선준아. 나보고 성질 사납고, 혼자서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며. 그런 오메가랑은 이혼하는 게 너한테도 차라리 잘된 일 아냐?”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동안 나랑 사느라 많이 힘들었지. 나 역시 마찬가지야. 이런 걸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렇지?”

“강여원,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그래도 이혼은 아니잖아. 무슨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이혼 이야기가 나오자 선준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여원의 눈치를 살폈다. 결혼 생활에 한 번도 제대로 충실한 적 없으면서 선준이 어떻게든 이혼은 막으려 애쓰는 게 못내 의아했다.

“여원이 네가 유산한 지 얼마 안 돼서 너무 감정적인 것 같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여원아.”

“하…….”

“한 집안에 형제가 둘씩이나 이혼하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어, 응?”

의문은 금세 풀렸다. 그래, 형 때문이겠지. 처음 여원을 집에 데려올 때부터 선준은 제 결혼 생활은 형과는 다를 거라 으스댔다. 그러니 제헌과 똑같이 이혼하는 것만은 극구 막으려 하는 것이다. 그 말까지 듣고 나니 여원은 선준에게 더더욱 정이 떨어졌다.

“만나서 더러웠고,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

강렬한 분노와 배신감은 여원이 똑바로 사리 분별하는 데 도리어 도움이 됐다. 그동안 필요 이상으로 위축되었을 뿐, 생각해 보면 여원이 선준에게 끌려다닐 이유도 없었다.

“여원아, 왜 그래? 너, 애 때문에 그래?”

“하…….”

“애는 또 가지면 되지, 응? 너 아직 많이 힘든가 보다, 헛소릴 다 하고.”

직전까지 여원이 부주의해서 아이가 유산된 거라 난동을 부리던 선준이었다. 그러면서 다시 아이를 가지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올리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원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선준과 사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터였다.

“여원아…….”

선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안절부절못하며 여원에게 손을 뻗었다. 선준의 손등이 제 어깨에 닿기 전, 여원이 거칠게 홱 쳐냈다.

“악, 저리 꺼져!”

“뭐?”

“어딜 감히 나한테 손을 대?”

“야, 강여원!

더 이상은 선준과 조금이라도 닿고 싶지 않았다. 단칼에 여원에게 거부당한 선준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 순간, 환상통처럼 모호한 악취가 여원의 코끝에 훅 퍼졌다.

“어차피 나랑 결혼하는 게 네 인생에는 최선 아니야?”

“뭐라고?”

“나랑 이혼하면 너 이제 누구한테 빌붙으려고? 나 아니었으면, 너 아직도 거지 같은 너네 부모 밑에서 빌빌댔을 거잖아!”

“하선준, 너 말 다 했어?”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여원아. 나 아니었으면 열성 오메가인 네가 어디서 이렇게 호의호식하면서 살겠어?”

선준이 꺼내 보인 저열한 속내에 여원은 소름이 다 끼쳤다. 대체 선준이 무슨 자격으로 여원의 인생에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판단한단 말인가. 그때, 여원에게 선뜩한 직감이 치솟았다.

“하선준…… 너 설마.”

“…….”

“네 말마따나, 거지 같은 집안에 앞으로 인생 나아질 일 없는 열성 오메가라서…… 일부러 나랑 만난 거니?”

“……야.”

“너랑 같이 사는 게 팔자 고칠 애라서, 그래서…… 결혼만 하면 고분고분 말 잘 들을 것 같아서?”

저택 안에서 저만을 바라보며 애를 낳아줄 순종적인 오메가 부인. 결국 선준이 바라던 것은 여원이 아닌, 그 정도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인생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던 여원에게 일부러 접근한 게 아닐까.

“그게, 그러니까…….”

그것만은 부디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거듭되는 추궁에 정곡이 찔린 듯 선준이 움찔거렸다. 선준의 동공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는 여원을 향한 미안함보다는, 숨겨야 할 것을 들켜버린 곤란함이 더욱 짙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붉게 충혈된 여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하, 미친 새끼.”

여원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슥 닦아냈다. 지금 우는 건 선준한테 상처받아서가 아니었다. 선준은 여원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지난 몇 개월간 이렇게까지 치졸한 새끼에게 휘둘려온 자신의 시간과 마음고생이 안타까워서였다.

“더 이상은 네 꼴도 보기 싫어. 그 더러운 손, 나한테 털끝 하나라도 갖다 댈 생각 하지 마.”

선준이 제게 손을 뻗자 징그러운 벌레가 피부 위를 들러붙는 것만 같았다. 끔찍한 기분에 여원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도 난 죽어도 이혼은 못 해!”

여원이 격렬하게 반응하자 선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질 수 없다는 듯, 이내 이를 까드득 악물었다. 선준이 냅다 악을 지르며 여원에게 억지를 썼다.

“흐…….”

역겨워.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지독한 악취가 치밀어오르는 듯해, 여원이 코를 틀어막았다.

저택에 오래도록 고여들었던 향의 궤적이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악취는 좀처럼 떨쳐지지 않은 채 코끝에서 오래도록 진동했다.

꼭 언젠가 3층 서재 앞에서 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온하고 폭력적인 향. 어쩌면 여원의 감각은 구역질 나는 선준의 성품을 가장 본능적인 방식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 * *

“후우…….”

배 속의 아이를 잃고 난 후로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겨버린 것처럼 먹먹하고 공허했다. 그러나 주변을 엉망으로 들쑤셔대는 선준 탓에 여원은 아이를 잃은 슬픔에 온전히 매몰되지도 못했다.

선준이랑 한바탕 대거리를 했지만, 이혼까지 과정이 순탄치는 않을 것 같아 여원은 숨통이 꽉 조였다. 답답함을 떨치기 위해 저택을 빠져나온 여원이 다다른 곳은 너르게 펼쳐진 정원이었다.

소생을 상징하는 선명한 진녹색의 나뭇잎 사이로 눅진눅진한 무더위가 스며들었다. 연연하게 푸르른 녹음의 향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아름드리 등나무가 섬세하게 드리우는 그늘은 빼곡하고 촘촘했다. 선들선들한 바람에 나부끼는 연약한 나뭇가지들이 이따금 섧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이제 여름도 다 저물어가네.”

그러나 생명으로 움트는 화사한 정원과 대조적으로 여원의 마음은 거무죽죽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울리는 여원의 말을 들어주는 이도 누구 하나 없었다. 이마에 흩날리는 앞머리를 손끝으로 털어낸 여원이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다.

“하아…….”

선준이 유산이 전부 여원 탓이라 매도할 때는 맞서서 분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홀로 남아 멍한 얼굴로 텅 비어버린 아랫배를 쓰다듬어 내리다 보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익숙한 자책감이 찾아왔다.

언젠가 아이가 없었다면, 하고 바라서 아이가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끈적끈적한 생각.

“여원 씨, 여기 있었어요?”

그 때, 단단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이마에 살짝 닿았다. 화들짝 놀란 여원이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제헌 씨.”

제헌은 흩날리는 바람에 피부 위에 들러붙은 여원의 머리칼을 가볍게 떼어주었다. 이마에 살짝 스치고 간 나긋한 숨결에 오싹해질 찰나, 제헌이 여원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피부에 솜털이 뾰족 곤두서는 듯한 기분에, 여원이 자세를 정갈하게 가다듬었다.

“너무 답답해서…… 잠깐 밖으로 나왔어요. 요즘 선준이가 계속 집에만 있길래.”

“네.”

“제헌 씨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담백하게 대답한 얼굴은 무뚝뚝했지만, 평소보다 한층 누그러진 시선은 여원의 얼굴과 목덜미 부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열이 오른 눈빛이 닿는 곳마다 예민해진 살갗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

“…….”

별다른 말이 없었음에도, 제헌이 자신을 걱정해서 이곳까지 찾아와 준 것임을 알았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여원을 신경 써주고 걱정하는 사람. 유산 이후 연약해진 마음이 제헌의 관심을 흠뻑 빨아들였다.

“……고마워요.”

바로 옆자리에 앉은 제헌이 지나치리만치 의식되어, 눈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여원이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제헌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

짤막한 인사가 오고 간 뒤로는 두 사람 중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뜨끈뜨끈해진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자, 제헌의 커다란 손이 여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언젠가 저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단단한 감촉이 연상되어, 여원이 몸을 잘게 떨었다.

‘형은 이제 강여원까지 나한테 뺏어갈 셈이야?’

빽, 소리 지르던 선준의 격앙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지만……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제헌의 곁에 있을 때마다 여원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꼈다.

“…….”

그 때 제헌의 반응이 어땠더라. 여원은 부당한 반발을 코앞에서 고스란히 받아내면서도, 웃어넘기며 동생을 가벼이 무시해 버리던 제헌을 떠올렸다. 문득 고개를 돌린 여원이 남자답게 도드라진 제헌의 목울대 부근에 흘긋 시선을 던졌다. 흡사 무슨 죄라도 짓는 듯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이상하죠, 선준이도 참……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고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헌 씨는 선준이 형이잖아요.”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제헌이 있었다. 일렁거리는 페로몬으로 긴장이 팽팽해졌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여원이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 평소에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거의 없는 탓인지, 제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함으로써 여원은 왠지 선을 넘는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제야 제헌은 여원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선준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것이라고, 그렇게 제헌이 적당히 받아쳐 주기를 여원은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제헌의 뜻 모를 시선은 여원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를 느릿느릿 훑어 내릴 뿐이었다. 부정하는 대신, 마치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덮어쓴 가면이 깨어지고 여린 모습이 드러났다. 여원의 얼굴이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혼란에 젖어든 채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흐…….”

때마침 제헌의 페로몬이 색을 달리하자 여원의 입술이 나슨하게 벌어졌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예민한 여원은 제헌의 향기를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핏기가 싹 가셔 있던 창백한 뺨에 금세 발긋한 기운이 돌았다. 괜스레 여원은 꼿꼿하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 끝으로 벤치의 나뭇결을 쓸어내렸다. 습기 어린 기운을 머금고 산들거리는 바람이 길게 뻗은 속눈썹을 얕게 간질거렸다.

“여원 씨.”

“네, 네?”

나직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자 여원이 등을 꼿꼿이 세웠다. 얼핏 냉담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제헌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한층 짙어져 있었다. 기분 탓일까, 제헌을 둘러싼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여원을 향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형 되는 입장으로서도 선준이가 몹시 부끄럽습니다.”

“…….”

“가족으로서 내가 여원 씨에게 힘이 될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부끄러움, 지금껏 제헌이 입에 직접 올린 적 없는 노골적인 단어에 여원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여원 역시 이따금 선준이 창피하다고 느끼고는 했다. 특히 제헌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제헌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제헌과 공감대를 형성해도 되는 걸까? 내내 아슬아슬했던 기분 때문인지, 미약한 죄책감이 심장에 번졌다.

“그런데요.”

“네.”

“제헌 씨랑…… 선준이랑은, 원래부터 사이가 그렇게 안 좋았어요?”

“…….”

“…….”

심장이 빠듯하게 두근거렸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여원은 본능적으로 제헌에게 더는 이끌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수색했다.

“병실에서, 선준이가…… 제헌 씨가 뺏어갔다고 한 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절규라도 하듯 제헌에게 악을 쓰고 소리치다가도, 형에게 뺨 한 대를 얻어맞고는 모든 전의를 상실해 버렸던 선준. 충격을 동반한 그 날의 기억은 착잡한 색으로 여원의 일상에서 톡 돌출해 있었다.

“그게 궁금했나 봅니다.”

“…….”

“그렇지만 내가 여원 씨에게 직접 말하는 게 적절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군요.”

제헌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지만, 이 일에 대해서 함구하고 싶다는 뜻만은 확고하게 전해졌다. 여원의 심장이 한층 빠르게 콩닥거렸다.

매혹적이면서도 비밀이 많은 남자. 음험한 비밀에 둘러싸여 있어서, 더욱 강렬하게 매료시키는 남자.

“숨길 것도 없이, 모든 사실은 저택 안에 남아 있습니다.”

“…….”

“그렇지만, 여원 씨가 호기심 때문에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제헌은 수수께끼 같은 말만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가뿐하게 일어섰다. 흘긋, 여원을 뒤돌아보더니 금세 자박자박 멀어져 갔다. 점점이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내다보던 여원이 숨을 작게 들이켰다.

“흐…….”

낡고 뻣뻣한 나무 벤치에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서인지, 방금 전까지 애처롭고 처연하게만 느껴졌던 정원이 돌연 스산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 *

반쯤 열린 문틈으로 불규칙한 숨소리가 고롱고롱 새어 나왔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지만 선준은 혼곤하게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선준이 잠에서 깰까, 여원은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나무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동그란 발꿈치를 사뿐사뿐 움직였다. 날쌔게 움직이는 자그마한 실루엣이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묵직한 양감의 진녹색 벨벳 커튼이 복도 구석을 두툼하게 휘감았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 정도 개조를 거친 2층이나 3층과는 다르게, 저택의 1층은 오래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손상되지 않은 역사와 훼손되지 않은 기억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아직 밖이 환하게 밝은 대낮인데도 실내는 유달리 어두컴컴했다.

“왜 갑자기 좀 추워진 것 같지.”

어딘가 모르게 오싹한 기분에, 여원은 움츠러든 어깨를 양손으로 푹 끌어안았다. 지난번에 제헌이 직접 안내해 주었던 길을 따라, 여원은 써늘한 기운이 감도는 1층 곳곳을 돌아다녔다. 더듬더듬 벽지에 손을 뻗어 매만지기도 하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악, 깜짝이야!”

무언가가 자기를 쳐다본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여원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등 뒤에 있는 것은 눈동자가 아닌 만다라 문양의 동그란 중심부였다. 다행히 누군가 뒤쫓고 있지는 않았다.

“어휴…….”

놀란 가슴을 간신히 쓸어내렸지만, 심장은 여전히 흉곽을 뚫고 나올 듯이 벌렁거렸다. 그럼에도 저택 곳곳을 뒤지는 것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한번 호기심에 불이 붙자, 숨겨진 무언가를 기어이 캐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어, 여긴 처음 보는 방인데?”

복도 구석 끝, 처음 보는 문이 여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문이라기에는 문고리가 없고, 벽지와 색깔이 똑같아서 그동안은 무심코 지나쳐 왔다. 제헌이 여원에게 직접 보여주지는 않았던 공간이었다.

선뜩하게 퍼지는 예감으로 손끝이 저릿했다. 여원은 틈새로 연한 빛이 새어 나오는 네모난 윤곽을 스르륵 밀어보았다.

“캘룩, 캘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텁텁하고 매캐한 공기에 눈이 따갑고 숨이 막혔다.

여러 번 눈을 깜빡이자, 먼지가 부옇게 일어 잔뜩 흐려진 시야에 오래된 가족사진과 변색된 장난감, 철 지난 학습 도서 따위가 서서히 들어왔다. 시간이 오래 흘러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빛바랜 추억이 한가득 담긴 창고였다.

분명 이곳에 단서가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한참을 뒤적인 끝에 여원은 박스 깊숙한 밑바닥에서 귀퉁이가 뭉그러진 낡은 공책을 발견했다. 처음 몇 장을 넘겨보고는 힉, 숨을 짧게 들이켰다.

손에 들린 것은 선준의 일기장이었다.

공책을 꽉 움켜쥔 여원이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은 떳떳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저택의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고 싶었다.

“헉!”

더듬거리는 손으로 첫 장을 펼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 때문에 엄마아빠가 죽었다]

어린이가 꾹꾹 눌러쓴 삐뚤빼뚤한 글씨. 낡은 종이 위에 도드라진 압력을 쓸어내리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두려움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물론 형이 죽인 건 아니지만

형이 아니었다면 죽을 일도 없었겠지

형만, 형만 아니었더라면…….

형은 꼭 무엇이든 잡아 삼키는 블랙홀 같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제는 부모님까지 나에게서 뺏어가 버렸다.

그래서

나는

형이 너무 밉다]

미간을 찌푸린 여원이 일기의 내용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병실에서 선준이 형이 전부 다 뺏어갔다고 했던 건, 부모님 얘기였던 걸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는 어떤 식으로 제헌과 연관되어 있는 걸까?

‘형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몰라.’

언젠가 선준이 했던 경고를 떠올린 여원은 불안에 휩싸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흉곽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급속도로 부추겨진 의심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아…….”

어쩐지, 선준의 일기장을 읽다 보면 저택의 비밀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읽어도 되는 걸까?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면 끝내는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온한 호기심은 여원의 등 뒤를 빠르게 뒤쫓아왔다.

끝내, 덜덜 떨리는 손은 선준의 일기장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오늘은 형에게 두들겨 맞았다

부모 잃은 자식이라고 흠잡힐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내가 무례하고 버릇없고, 실망스럽다고

나를 창피해하는 형의 시선이 너무 싫다

나는 이제 완전히 혼자다

더 이상 나를 지켜줄 사람이 이 저택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엄마 아빠 얼굴도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형이

무섭다]

흡, 짧은 숨을 삼켜낸 여원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병실에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선준의 뺨을 후려갈겼던 제헌이 떠올랐다. 또한 오만방자하게 굴다가도 제헌이 조금만 언성을 높이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제헌의 눈치를 보던 선준 역시.

비밀에 한 발짝 가까워졌지만, 궁금증은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의혹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선준은 어릴 적 제헌에게 학대당했던 걸까? 매끈하고 우아하게만 보이던 남자에게 내재되었을지 모를 야만적인 폭력성을 떠올리자, 손끝이 저릿했다. 기묘한 흥분과 함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충동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제 여원은 여러 장을 한꺼번에 넘겼다.

[오늘은 형수가 저택에 왔다

형이 고른 사람이라니…… 거기서 거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형수는 나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형과는 다르게

따뜻한

사람

나는 형수가 좋다]

형수.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가 되새겨지자, 여원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툭, 여원의 손에 들려 있던 일기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선준의 형수는……. 무엇 때문에 제헌과 이혼한 거지? 그 사람은 지금 살아 있기는 한 걸까?

“아…….”

몸을 한 번 크게 휘청인 여원이 바닥에 널브러진 일기장을 집어 들려 할 때였다. 하지만 그에 앞서, 다른 손이 먼저 고꾸라진 일기장 위를 덮었다.

빠른 속도로 알파 페로몬과 뒤섞인 몽환적인 향기가 밀폐된 실내 공기를 흐드러지게 채웠다. 손가락이 길고 단단하게 뻗은, 우아한 손은 낯이 익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여원이 위를 올려다봤다.

제헌이었다.

“제, 제헌 씨!”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러버렸다. 칼같이 정돈된 제헌의 이목구비가 평소보다 한층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이래서야 꼭 잘못된 일을 하다가 딱 걸린 사람 같잖아. 여원이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깨물면서 정신을 다잡았다.

“인기척을 못 느껴서…… 후, 놀랐어요. 언제부터 있으셨던 거예요?”

짧은 기침과 함께 목을 가다듬었다. 여원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여원의 눈동자는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여원을 제헌이 흘긋 건너다봤다.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펼쳐져 있던 페이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다시금 스산한 시선이 얼굴과 목덜미 부근을 진득하게 훑어내리자, 여원은 등줄기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 올랐다.

“벌써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습니다.”

깊이 침잠한 눈동자가 여원을 또렷하게 향했다. 원색적인 비난이 섞인 선준의 일기를 읽으면서도 제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여유롭고 어른스럽다고만 여겼지만, 오늘은 그런 그가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

“아, 저기, 그게…….”

비밀을 캐고 다녔다는 걸 들켰으니, 나 역시 위험해지는 걸까? 긴장이 지나쳐, 금방이라도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부…… 부모님이, 제헌 씨 때문에 죽었어요?”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

“…….”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혹감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원이 제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냉담한 시선을 짧게 던질 뿐인 그는 여원의 말실수를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저택에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간신히 저를 구해냈지만, 살아남은 것은 저뿐이었죠.”

“…….”

“당시 선준이는 병원에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잃게 된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입니다.”

살그머니 벌어진 여원의 입술 사이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사람 일은, 한쪽 말만 듣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일기장에서 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지만…….

“아, 역시 그랬던 거군요.”

여원은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맥없이 끄덕거렸다. 제헌이 거짓말을 한다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선준의 일기장을 잠식한 불안과 두려움이 여전히 손끝에 생생했다. 꽉 붙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여원이 젖은 눈으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이제 좀 궁금증이 풀려요?”

선준의 일기장을 가벼이 들어 올린 제헌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완연하게 무르익은 페로몬이 넓게 퍼졌다. 비밀에 둘러싸인 남자는 그를 파헤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아…….”

“…….”

“네, 네…….”

혹시 내가 의심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스스로의 무례를 뒤늦게 자각한 여원은 얼굴이 온통 화끈거렸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여원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제헌은 펼쳐져 있던 일기장을 완전히 덮었다.

“더 이상 아는 것은 여원 씨에게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제헌은 여원을 위한다고만 이야기했다. 매력적인 만큼, 의심스러운. 그러니 여원으로서는 자꾸만 제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칠 수가 없었다.

“하아…….”

제헌이 선준의 일기장을 들고 나가고, 어두운 창고에 다시금 혼자 남겨졌다. 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배치되는 감정들이 어지럽게 충돌하는 와중에도, 이 저택이 이상하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해.

선준과 무사히 이혼하고 난다면, 제헌을…… 마주할 일도 더 이상은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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