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나기
‘여보세요?’
―우리 아들, 엄마야.
‘아…… 엄마.’
―여원아, 정말 고맙다. 사천만 원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그것보다도 더 챙겨주고. 엄마가 가족 생각하는 건 역시 우리 아들뿐이구나 했어.
‘아……. 집으로 연락 갔나 보구나.’
―어어, 덕분에 급한 불은 잘 껐지 뭐니.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여원아, 너희 집안 비서라고 하시는데 어쩜 그렇게 목소리부터 구슬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지. 그런데도 일 처리 하나는 시원시원하고 화통해서, 엄마가 정말 감탄…….
그 주를 넘기지 않고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부담스러울 만큼 감읍하는 태도로 여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제헌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상대를 민망하게 만드는 비굴함을 지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말이 심장에 상처 난 자리를 따끔따끔 스치는 것을 느끼며, 여원은 적당히 대꾸하다 전화를 끊었다.
예전이었다면 그 짤막한 전화 통화에 감정적으로 깊이 매몰되었을 것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여원은 엄마에게 심리적으로 쉽게 휘둘렸다.
너무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간절하게 벗어나고자 했다. 나와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던 가족. 여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가족에게서 얼마간의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제헌이 여원을 제 가족으로 여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여원아, 그때 좀 듣기 싫은 말 했다고 혹시 너 나한테 삐지거나 한 거 아니지?’
‘아? 어……. 전혀 아니야, 그런 거.’
‘야 솔직히, 그런 말 하는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냐?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그런 거야. 알지?’
‘어, 선준아. 나도 네 입장 충분히 이해해.’
‘우리 두 사람 이제 금방 독립할 텐데, 혹시라도 훗날에 발목 잡힐 만한 일은 없어야 하잖아.’
‘…….’
그날 이후 한동안 여원은 그렇게 먹고 싶었던 복숭아를 볼 때마다 피부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 올랐다. 배우자에게 그만큼 상처를 주어놓고도, 선준은 금세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오히려 여원을 구슬리기 위해서인지 이전보다 한층 친근하게 굴기까지 했다.
가족으로 인해 여원이 마음 아파하는 것은 걱정해야 할 일도 아니고, 당연히 쓴소리할 권한이 선준에게 있는 것처럼.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선준의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원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선준이 다정다감하게 말을 붙여올수록 오히려 더한 반발감과 거부감이 일었다.
‘그럼 여원 씨가 내 향수 고르는 걸 도와주겠어요?’
그에 비례하여 제헌의 향수를 직접 골라주게 될 주말은 애타게 기다려졌다. 제헌이 일방적인 도움을 받는 여원을 배려해 구실을 마련해 주었지만, 가끔 제헌이 일부러 제가 외출할 만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 같다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여원은 제헌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최선을 다해 잘 하고 싶었다. 향을 감지하는 감각이 특별히 예민한 만큼, 실제로도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주말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제헌의 페로몬을 물씬 떠올렸다. 꼭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향수를 골라주고 싶었다.
“여원 씨. 준비는 마쳤습니까?”
마침내 선준이 저택을 비운 주말, 제헌이 차분한 태도로 여원의 방문을 두드렸다. 선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정갈한 슈트를 차려입은 제헌은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아, 네!”
실제로는 아니겠지만, 여원은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보는 것이 꼭 처음처럼 느껴졌다. 공들여 세공한 것처럼 수려한 이목구비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여원의 선망 가득한 시선을 의식했는지, 쌍꺼풀 없는 길고 날렵한 눈이 나긋하게 휘어졌다.
* * *
부슬부슬 내리는 소나기 아래로 저택을 에워싼 널따란 정원의 풍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리듬감 있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흙바닥에 고인 웅덩이 위로 잔잔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꼭 선준과 함께 저택을 처음 방문한 그 날처럼, 물기를 적당하게 머금은 공기가 피부에 축축하게 닿아왔다.
뭉글뭉글 내리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원이 어깨를 슬그머니 돌렸다. 짧은 거리였지만, 역시 우산을 챙겨 가는 게 났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돌아선 자리에는 제헌의 단단하고 너른 어깨가 시야를 한가득 가로막고 있었다.
“차 안에 여분의 우산이 있습니다.”
“아, 네…….”
“일단은 나와 같이 걷죠.”
말을 마친 제헌은 단정한 손길로 우산을 넓게 펼쳤다. 한 발짝 앞서 문밖으로 나간 제헌이 왜 어서 오지 않느냐는 듯, 의아하게 여원을 돌아보았다. 여름비에 함초롬하게 젖어든 나뭇잎 그늘로 희고 서늘한 얼굴이 희붐하게 빛났다.
여원은 홀린 듯이 그에게 가까워졌다. 여원을 제 우산 안으로 푹 끌어당긴 제헌이 마른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라며 빗줄기로 자신을 내몰던 언젠가의 선준이 문득 떠올라, 여원은 혀끝이 씁쓸해졌다.
“비가 올 줄 알았으면 우산을 챙겨 왔을 텐데요.”
습윤한 적막이 견디기 어려워 여원은 하나 마나 한 말을 공허하게 되뇌었다. 우아하고 반듯한 손가락이 무심코 닿았다 떨어진 피부 위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엇박자로 앞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어깨가 스치듯이 맞닿았다.
“아…….”
골프용 장우산은 충분히 커다랬지만, 제헌의 어깨가 두드러지게 넓어서인지 둥그런 아치 안의 공간이 좁게만 느껴졌다. 뜨끈뜨끈해진 피부가 그에게 닿는 것이 신경이 쓰여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는 동안 우산 바깥으로 삐져나간 여원의 오른쪽 어깨 끝에 비가 스몄다.
“젖은 몸으로 내 차에도 물을 묻힐 작정입니까?”
혀끝을 짧게 찬 제헌이 다시금 여원을 제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느라 얼결에 제대로 부딪힌 제헌의 상완은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다. 꼬리뼈까지 타고 흐르는 긴장에 여원은 벼락에라도 맞은 듯 척추를 꼿꼿이 세웠다.
“저는…… 제가, 불편하실까 봐…….”
미간만 살짝 좁힐 뿐, 별다른 대답을 내어주지 않는 제헌의 옆모습이 군더더기 없이 정갈했다. 무심하게 딛는 발걸음에 어깨가 툭툭 닿을 때마다, 아랫입술에 뭉근한 열이 올랐다. 느릿하게 흐르는 축축한 공기에 은은한 페로몬이 눅눅하게 퍼졌다.
“어, 제헌 씨…….”
당연히 전용 기사가 대문 앞에서 리무진을 대기시키고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 제헌은 뜻밖에도 차고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뭐 합니까. 안 타고.”
“우리 두 사람만 가는 줄은 몰랐어요.”
“…….”
“기사님께서 운전하는 거 아니세요?”
제헌을 따라 은색 벤츠 앞에 선 여원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맹하게 내뱉어진 질문에 내내 무표정하던 제헌의 얼굴이 미묘하게 금이 갔다.
“평일이 아닌 주말에는 직접 운전하는 편입니다.”
“…….”
“나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제헌은 그대로 여원을 몰아붙이는 대신 퍽 누그러지게 굴었다.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인 여원이 사생활, 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오늘 두 사람의 외출이 그의 사생활의 영역에 속하는구나, 생각했다.
“아…… 그럴 것 같아요. 아무래도…….”
사실은 그렇게까지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면서도. 불쑥 뻗어나간 생각이 스스로도 민망해서 여원은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여원의 귀 끝이 금방이라도 톡 터뜨려질 듯 새빨갰다.
“우물쭈물하면서 낭비할 시간 없습니다.”
“네, 네!”
대형 세단의 오른편으로 이동한 제헌이 우산을 여원 쪽으로 기울여주며 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여원은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무사히 차 안으로 들어갔다. 여원은 담백하고 덤덤한 제헌의 배려를 이따금 황송하게 느꼈다.
“우와…….”
제헌만의 공간인 개인 차량에 올라탄 여원은 차 안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보았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제헌이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밀폐된 공간에 우성 알파 페로몬이 고였다.
제헌의 존재감이 더해진 것만으로 공기의 질감이 까끌까끌해졌다. 여원은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색하리만큼 정면만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정수리에 콕콕 내리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헌 씨 왠지 운전 되게 잘 하실 것 같아요.”
별 시답잖은 소리라는 듯 픽, 제헌이 바람 새듯 웃었다. 시동이 켜지고, 탁한 엔진 배기음 소리가 위잉 울렸다. 여원은 긴장으로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
“…….”
묵직한 세단이 빗물에 살짝 젖어 있는 도로를 씽씽 막힘 없이 가로질렀다. 포장이 불균등한 굽이진 산길에서도 유려한 운전 솜씨 덕분에 승차감이 부드러웠다.
찰박찰박, 솨아아, 물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차창 밖으로 푸릇푸릇한 풍경이 스쳐 갔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는 것들과 함께 내내 답답하게 내리누르던 기분도 가벼워졌다. 숨 막히게 에워싸던 저택에서 유유하게 멀어지는 여원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그런데 저, 엄청 오랜만에 외출하는 거예요.”
여전히 갇힌 공간에 제헌과 단둘이 있는 게 못내 불편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어서인지, 빼곡해진 공기 역시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받아들여졌다. 창밖을 한참 구경하다 배시시 웃는 여원의 얼굴이 보송보송했다.
“요즘에 제가 스트레스를 좀, 받았나 봐요. 그래도 이렇게 나오니까 너무 좋고…….”
“…….”
“그냥,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아요. 결혼한 다음에는, 검사 때가 아니면 제대로 된 외출을 못 했거든요.”
바깥세상을 처음 구경하는 작은 새처럼 여원이 부지런히 재잘거렸다. 산길을 거의 다 내려오자, 쏜살같이 지나치는 창밖으로 키가 아담한 빌딩들이 듬성듬성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법 도회적으로 변한 풍경에 여원의 자그마한 얼굴이 경이로움으로 물들었다.
“스스로 밖에 나갈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제헌은 여원의 들뜬 기색과 대조적으로 무감한 얼굴이었다. 여원의 소극적인 태도를 넌지시 추궁하는 제헌의 까만 눈동자에 날카로운 이채가 돌았다. 여원은 속이 미지근하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버스라고 해봤자, 70분에 한 대씩 오는 거 제헌 씨도 아시잖아요.”
“…….”
“뙤약볕 아래에서 20분을 걸어서 겨우 정류장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버스 배차 시간이 불규칙해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버스를 놓쳤는지, 아닌 건지, 아니면 오기나 하는 건지도 모르겠더라고요.”
“…….”
“집에서 나온 지 세 시간 만에 시내에 간신히 도착했는데……. 주변이 너무 휑하기만 해서, 솔직히 허무하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고생이 많았겠어요. 역시 여원 씨에게 차가 있었다면 좋을 텐데요.”
“아…….”
여전히 핸들을 가벼이 쥔 채로, 운전석의 제헌이 오른편의 여원을 여유롭게 돌아보았다. 집요하면서도 나긋한 시선에 불과 얼마 전의 기억이 지그시 내리눌렸다.
“그래도, 그때 먼저 얘기 꺼내주셔서 감사했어요.”
“흠.”
“선준이도 참……. 차가 생긴다고 제가 저택에서 도망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여원 씨.”
“네?”
“차를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더 좋았을까요?”
“물론이죠.”
여원을 가엾게라도 여기는 듯, 은밀한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온기를 찾기 어려울 만큼 냉정하게만 보이는 알파였다. 그런데도 왠지, 그때 여원이 용기 내 말만 했다면 제헌은 기꺼이 자신의 편에 서주었을 것만 같았다. 기대가 독이 되리란 걸 잘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만 뭉클거렸다.
“저도…… 제가 선준이 눈치를 쓸데없이 많이 본다는 생각을 하기는 해요. 그렇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선준이가 여원 씨에게 함부로 대한 적이 있습니까?”
끼긱, 때마침 신호에 걸린 차량이 갑작스레 멈춰 섰다. 날카롭게 벼려진 질문이 잠시간 평온했던 차 안의 공기를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아, 그게요…….”
기다렸다는 듯, 억울함과 서러움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런데도 섣불리 입술을 뗄 수는 없었다. 제헌 앞에서 보란 듯이 배우자의 흉을 보는 일이 꺼려졌을뿐더러 바로 옆자리의 알파가 서슬 퍼런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형이 화내면 무서워.’
선준이 느끼는 공포가 구체적인 실체와 함께 여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함부로 제헌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아니에요, 그렇다기보다는…….”
“…….”
“제헌 씨도 그러셨잖아요. 제가 필요 이상으로 비굴하게 군다고요. 그건 분명, 제가 고쳐야 하는 부분이에요.”
“음.”
“직접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저를 도와줄 수 없는 거니까요.”
움찔 놀란 여원이 선준의 흠을 애써 수면 아래로 파묻었다. 습관처럼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미심쩍은 얼굴의 제헌은 그를 쉽게 수긍하지는 않는 듯했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선준이 여원에게 마음을 쓰고 진심으로 대했더라면, 애초에 제헌과 여원이 지금 이렇게 나란히 같이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
그러나 선준은 여원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고, 궁지에 몰린 여원은 매달리듯 제헌을 찾아야 했다.
신호가 바뀌고 다시금 차가 출발했지만, 제헌의 그늘진 시선은 여전히 여원을 가두듯이 드리우고 있었다.
“여원 씨는 남자 보는 눈이 없나 보군요.”
무심코 지나치듯 가벼운 말투였다. 여원은 흠칫 옆을 돌아보았다. 제헌은 꼭 선준이 말고 날 골라보지 그랬냐, 여원을 떠보는 것만 같았다. 은근한 기류가 실내에 만연하게 들이찼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요?”
발끈한 여원이 곧바로 맞받아쳤다. 실제로도 제헌은 선준보다 월등히 잘난 남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여원은 제게도 선준을 선택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음을 소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선준이도 나쁜 면만 있는 건 아니에요. 철이 많이 없긴 하지만…… 심성이 영 못되지는 않았으니까요.”
“…….”
“애정과 관심에 많이 굶주려 있어서, 선준이가 외로운 마음을 미성숙하게 표출하는 건 사실이에요.”
“…….”
괜한 오기로 여원이 선준을 옹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허탈해졌다. 한때는 여원도 선준이 적어도 아빠보다는 나은 배우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폭력을 휘두르거나 나쁜 마음 먹고 다른 사람을 해칠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지만 부모님한테 거지 근성이란 말까지 했던 선준인데, 여원이 그를 감싸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었다.
“하…….”
결국은 선준을 방어하는 것은, 여원 스스로가 내린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여원 씨 같은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게 선준이에겐 행운이네요.”
이어진 제헌의 짧은 감상이 여원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인간적인 결점마저 필사적으로 예쁘게 포장해 주려는 배우자이니, 선준으로서는 당연히 놓치고 싶지 않겠지.
“……그렇게 봐주신다니 제가 다 감사하네요.”
제헌이 일깨운 자기객관화에 여원은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씁쓸하게 미소 지은 여원이 창밖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며 상황에서 한 발짝 멀어지려 했다.
“요즘엔 선준이랑 섹스는 안 하나 보죠?”
둔탁한 몽둥이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여원이 옆을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제헌은 여상한 얼굴로 운전대를 반듯하게 잡고 있을 뿐이었다.
악의 없는 모욕에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여원을 경제적으로 부양한다고 해서, 제헌이 무슨 말이든 지껄일 권리가 있는 것 역시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그것에 대해서까지 제가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
“아무리, 우리가…… 가족이라도요.”
여원은 은연중에 제헌이 자신을 헤프게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갓 성인이 된 어린 알파와 섹스하고, 혼전 임신을 해서 저택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성적인 대상으로 비치는 것만 같은.
그러나 이번만큼 노골적인 적은 없었다. 물살처럼 몰려드는 수치심에 여원은 미약하게 들끓어 올랐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여원이 숨을 얕게 씨근거렸다.
“불쾌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하겠습니다.”
“…….”
“어려서부터 도맡아 키워서인지, 선준이 일에 대해서는 과잉보호하게 되네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여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선준과 여원의 부부 생활에 대해서 캐물은 것이, 어떻게 동생에 대한 형의 과잉보호라는 건지……. 오히려 그 정반대로, 조심성 없이 선을 넘는 행동처럼 여겨졌다.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도착을 알리는 제헌의 말에,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졌던 끈이 툭 끊어지는 듯했다. 태연하고 결백한 그의 태도에 여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네, 다행이에요.”
분명히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려던 말이었는데,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픽, 제헌이 웃는 소리에 여원은 당장이라도 화다닥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어졌다.
“잠깐만.”
다급한 기분으로 차 문의 손잡이를 잡아채는데, 알파 페로몬이 예기치 않게 훅 끼쳐 들었다. 어깨와 목덜미에 뻣뻣한 긴장이 퍼졌다. 깜빡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제헌이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네?”
“향수를 고르려면 내 체향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왼팔을 뻗은 제헌이 나란히 앉아 있는 여원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눈높이로 들어 올린 오른쪽 손목에 여원의 얼굴이 파묻혔다.
“아, 흣…….”
훅 끼쳐 드는 체향과 그에 뒤섞인 우성 알파 페로몬에 여원은 금세 해롱해롱해졌다. 멈춰 선 차량 내부에 아슬아슬하게 성적인 기류가 번졌다.
“흐으…….”
오메가를 유혹할 의도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페로몬이었다. 그러나 제헌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우월한 알파인지 여원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제헌 씨, 저 어지러워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여원은 맥없이 휘둘리고 말았다. 제헌 앞에서 여원은 특히 더 연약해졌다. 스스로를 가누기가 버거운 기분에 눈물이 아주 살짝 고여들었다. 단 숨을 겨우 삼켜낸 여원이 힘없이 하느작거렸다.
“저런…… 생각 이상으로 향에 민감하네.”
괜찮은지 살피겠다는 듯, 제헌이 여원의 이마를 짚어왔다. 그러나 우성 알파와의 신체 접촉은 여원을 더욱 몽롱하게 만들었다. 페로몬 필터링을 거의 못 하는 열성 오메가인 여원이 제헌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살 내음, 우성 알파 체향, 은은하게 묻어나는 화학 약품 냄새까지.
수용치 이상의 감각이 쉴 틈 없이 몰아쳤다.
“떼어……주시면 안 돼요?”
이대로라면 금세 그에게 함락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겁에 잔뜩 질린 채, 여원이 제헌에게 호소했다.
“그래요.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흘긋 시선을 던진 제헌이 파들파들 떠는 여원을 놓아주었다. 먹잇감을 앞두고 물러나는 맹수처럼, 미묘한 굶주림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이만 나갈까요?”
짧게 아쉬워하던 제헌은 여원의 눈초리가 경계심으로 가늘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말끔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 * *
기하학적인 형상의 회백색 건물은 강남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데도 자못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향수를 골라달라기에 막연하게 백화점에 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제헌이 여원을 데려온 곳은 국내에 드물게 존재하는 부티크 퍼퓨머리였다.
“같이 들어갈까요?”
“네, 네!”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간에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손끝에 선뜩하게 와닿았다. 향수 부티크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 실험실에 가깝게 보일 만큼, 하얀색 대리석을 중심으로 정돈된 실내는 극도로 절제된 인상을 풍겼다.
“오랜만에 저희 숍을 찾아주셨어요, 하 대표님. 그간 격조하셨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낭랑하게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숍을 찾아온 손님을 반겼다. 또박또박 복도를 걸어 나온 여자는 날카로운 일직선을 그리는 칠흑 같은 단발머리였다. 제헌과는 이미 잘 아는 사이인 듯, 능란한 인사가 매끄럽게 오고 갔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같이 오신 분은…….”
“오늘 내 향수를 골라줄 사람입니다. 여원 씨, 인사드리세요.”
여자는 계절감에 어울리지 않게도 허벅지 중간 정도까지 내려오는 화려한 퍼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여원이라고 합니다.”
“여원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퍼퓨머리 마그니피크의 대표 선아진입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개인 맞춤으로, 희소성 있는 향을 찾고 계신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쪽 살펴보시겠어요? 대표님께 권해드리고 싶은 브랜드들이 제법 있답니다.”
시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조향사의 장인 정신으로 빚어낸 고급 향수들은 각자의 개성과 콘셉트가 명확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여원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보며 곳곳에 놓인 독특한 향수에 감탄을 터뜨렸다.
“마음에 드는 도토리 발견한 다람쥐도 아니고, 참.”
“아, 제헌 씨…….”
“여원 씨,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읽어볼까요.”
“아, 네?”
“궁금하다. 처음 보는 향수들이 많은데, 향도 직접 맡아보고 싶다. 그런데 오늘은 제헌 씨 향수를 골라주러 온 것이니, 내 욕심 채워서는 안 되겠지. 조금만 더 둘러보겠다고 하면, 혹시 싫어할까?”
“……어떻게 아셨어요.”
“모르나 본데, 강여원 씨 생각하는 거 표정에 쉽게 드러나는 타입입니다.”
수려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번졌다. 그렇게 제헌은 여원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듯 굴었다. 그에게 가벼운 희롱처럼 이리저리 건드려지는 것이 여원은 그다지 싫지 않았다.
“편히 살펴보세요. 저녁까지 스케줄은 쭉 비워두었으니까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마음 바뀌기 전에 충분히 즐기세요.”
제헌은 여전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듯한 여원의 얼굴에 흘긋 시선을 던졌다. 배시시 터지려는 웃음을 입술 안으로 말아 삼킨 여원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뒤집힌 와인잔처럼 생긴 특이한 시향지를 들어 올리자 섬세하게 여과된 레몬과 베르가모트 향이 부드럽게 풍겨왔다. 향기 입자와 후각 세포가 긴밀하게 맞물리며 작은 폭죽이 터뜨려졌다.
“아…….”
오감을 섬세하게 일깨우는 향에 여원의 입술이 헤벌어졌다. 나지막한 감탄을 터뜨릴 찰나였다.
“그렇게 신나요?”
어느새 여원의 등 뒤에 바짝 붙은 제헌이 여원의 손에 들린 시향지를 슥 빼앗아갔다. 길쭉한 손가락이 얼굴 가까이 스치자 밀도 있는 페로몬이 훅 퍼졌다.
“아, 제헌 씨…….”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제헌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 심장이 빠듯하게 두근거렸다.
“네, 그…… 아무래도 후각이 사람의 상상력을 가장 자극하는 감각이잖아요.”
“…….”
“저는 향기에 대해서 상상하는 걸 좋아해요. 서로 다른 향을 천천히 들이켜다 보면, 그 안에 숨겨진 내밀한 이야기가 꼭 만져질 것처럼 생생해져서…….”
제헌에게서 관심이 흐트러진 데 대한 질책을 받는 것만 같았다. 온 신경이 다시금 제헌의 작은 몸짓과 행동 하나하나에 쏠려버린 탓에, 여원은 부지런히 입술을 움직이면서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여원 씨가 이렇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네?”
“이렇게 밝은 얼굴로 이야기한 적은 처음이에요.”
“아…….”
마디가 매끈하게 뻗은 우아한 손가락이 나무로 된 향수 진열대 위를 사뿐하게 짚었다. 여원의 코끝에 머물렀던 시향지의 향을 맡아보는 제헌의 눈동자 색이 평소보다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좋아서 한 말입니다. 앞으로도 여원 씨가 자주 이랬으면 하네요.”
항상 서늘하고 냉정하게만 보이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낯설고 몽환적인 공간에 자리해서인지, 오늘 제헌은 평소보다 기분이 한층 좋아 보였다.
“네…….”
시원하게 말려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내 여원은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을 꼭 다물었다. 제헌이 전에 없이 친밀하게 느껴지면서도, 부쩍 가까워진 거리로 인해 미묘한 긴장이 전해졌다.
“저기, 제헌 씨. 오늘 데려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원 씨가 왜 고마워합니까. 내 향수를 사러 온 건데.”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타박에 여원이 바람 새듯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말 역시, 제헌 나름의 농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요.”
구태여 한 번 더 덧붙여본 말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다만 여원을 훑어내리는 그늘진 시선이 보다 집요해졌다.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는 공간에서도 제헌의 존재감이 가장 두드러졌다.
바로 옆에 붙어 선 제헌에게 계속해서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감각이 과밀되었다. 피로해진 후각에 장미 향이 버거우리만큼 몰아쳤다. 다음번 향수를 시향해 보던 여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힘들죠? 잠깐 쉬었다가 다시 볼까요?”
“아…….”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그게 제헌에게는 보였던 모양이다. 머뭇거리고 있는 여원에게서 자연스럽게 시향지를 거두어간 제헌이 신중한 얼굴로 여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원 씨가 향에 민감해서인지, 후각이 피로해지는 속도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른 것 같네요.”
“하 대표님, 안쪽에 저희 접객용 응접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볍게 차 한잔하시겠어요?”
“좋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대표는 유려한 몸짓으로 퍼퓨머리 뒤쪽에 마련된 내실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비밀스럽고 호화스러운 응접실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내부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한 제헌이 대표를 밖으로 물렸다. 빈틈없이 에워싸인 공간에, 잘 알고 있는 제헌과 단둘이 있는 것 역시 다른 의미로 겁이 났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어요.”
“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보기보다는…….”
“여원 씨는 생각 이상으로 연약한 면이 있어서, 오래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
“말 걸지 않을 테니까, 푹 쉬어요.”
푹신한 암체어에 등을 기댄 여원이 눈을 반쯤 내리감고 지나치게 예민해진 감각 세포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연약하게 앞뒤로 나부끼는 조명이 똑딱똑딱 흔들리는 메트로놈의 규칙성을 연상시켰다. 벨벳 커튼의 주름진 굴곡처럼, 만다라를 닮은 문양의 어지러운 곡선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물결 같은 시간이 느릿하게 한곳에 고여들었다.
어느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오랫동안 혼자서만 품어왔던 내밀한 기억이 건드려졌다.
“이제야 좀 얼굴에 생기가 도네.”
“아, 제헌 씨…….”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사소한 변화마저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눈앞의 남자에게만은, 그것을 꺼내 보이고 싶다는 기이한 충동이 들었다.
“제가 어렸을 때, 여섯 살 때였나 일곱 살 때였나, 처음으로 열성 오메가 판정을 받았어요.”
다소 두서없이 내뱉어진 이야기에도, 제헌은 의아해하는 대신 여원에게 귀 기울여주었다. 계속해 보라는 듯 여원을 향한 턱 끝이 가볍게 까닥여졌다.
“열성 오메가를 둬서 어디에 쓰냐고, 엄마한테 많이 혼났어요. 사실 엄마는 베타셔서, 페로몬을 맡을 수가 없었는데…….”
“…….”
“그러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페로몬이 우성만큼 진해질 수 있다고…… 그날부터 매일 저한테 차량용 방향제를 뿌렸어요.”
“…….”
“저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우성 오메가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나쁜 의도였던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헌은 딱히 열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별다른 동요 없이 여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욱 안도가 되었다.
“원래 향에 좀 예민한 편인데, 그때 조악한 장미 향이 너무 오래 기억에 남아서……. 아까처럼, 장미 베이스 향수를 맡으면 아직도 좀 힘들더라고요.”
싸구려 방향제 향과 함께 오랫동안 마음속에 덮어두었던 이야기 역시 조금쯤은 산뜻해졌다.
“그동안 고생이 참 많았겠어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제헌이 담담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눈매가 발갛게 달아오른 여원이 참았던 숨을 겨우 달싹였다. 평생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 가장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것들도 제헌의 앞에서는 완벽하게 무장해제되었다.
“같이 집으로 가면 이제는 괜찮을 겁니다.”
응접실을 나설 때 제헌이 지나가듯 건넨 말에 심장이 아릿해졌다. 언제나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남들에게 얕보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제헌은 처음으로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원을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향수는 보이지 않는 옷이다. 또한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 사이의 숨바꼭질이다.]
섬세하게 세공된 금속 플레이트가 여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앞에 잠시 멈춘 여원이 음각으로 각인된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보았다. 모호하고 몽환적이면서도, 강렬한 설득력을 갖춘 메시지였다.
“이 문구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네. 뭔가 제가, 평소에 향수에 대해서 하던 생각이랑 비슷해서요.”
문구를 보자마자 약속된 것처럼 제헌을 떠올렸었다. 음험한 향기와 매혹적인 향기를 번갈아 풍기며,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제게서 숨바꼭질하는 것만 같은 남자.
“숨기고 싶은 본연의 모습도, 향을 통해서는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니까요.”
“네, 여원 님. 퍼퓨머리의 경영인으로서, 상당히 공감되는 해석입니다.”
“그럼 내 향수를 고를 때도, 여원 씨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담기겠네요.”
“네? 아…… 아무래도 그렇겠죠.”
불쑥, 제헌이 여원에게 가깝게 밀착해 왔다.
“흐읏…….”
한층 짙어진 페로몬이 물씬 밀려들어 왔다.
“나에게 맞는 향을 찾는 일을 항상 어렵게 느꼈습니다.”
“…….”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과 내가 인지하는 모습에는 간극이 있으니까요.”
스스로의 은밀함을 잘 알고 있는 남자. 제헌은 그래서 위험했고, 매력적이었다. 언젠가부터 여원은 그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웠고, 제헌의 페로몬은 주저하지 않고 여원을 푹 적셨다.
“오늘 제가 꼭, 제헌 씨에게 어울리는 향을 찾아드릴게요.”
“그래요. 기대하겠습니다.”
여원이 결연한 얼굴로 각오를 다지자 제헌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달싹였다. 심장이 쿵쿵 온몸을 두들길 기세로 뛰어올랐다.
두 사람의 대화를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대표가 묵직한 우드 케이스에 담겨 있던 향수 여러 개를 꺼내 보였다.
“천천히 살펴보세요.”
여원은 대표가 건네준 다섯 개의 향수를 신중하게 시향했다. 피부에 천천히 스며들었을 때 제헌의 체취와 향이 어떻게 섞여들지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음…….”
마지막 두 개를 남겨두고 고민하던 찰나였다. 문득 여원은 방금 전, 제헌의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불쑥 가까워졌을 때 매혹적으로 넘실거리며 공기를 잠식하던 페로몬을 떠올렸다.
평소의 제헌이라면, 좀 더 위압적이고 무게감 있는 향을 권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순간의 제헌에겐 보다 육감적인 향이 어울렸다.
“이게 가장, 어울릴 것 같아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여원은 이게 가장 맞는 향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바짝 수그렸던 고개를 제헌을 향해 서서히 들어 올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어지는 숨에 미약한 떨림이 묻어났다.
“시향을 하기 전에 궁금한 게 있습니다.”
“…….”
“그래서 여원 씨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헌 씨는……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사람 같아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적막을 가르고 부드럽게 공기를 헤집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나의 모든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보이지는 않잖아요.”
“…….”
“그런데 제헌 씨는, 남들에게 보여주는 면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지극히 적어 보여요.”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조금씩 이지러지는 제헌의 얼굴을 보면서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희열을 느꼈다.
“그거 혹시, 내가 음흉해 보인다는 말인가요? 조금 상처인데요.”
“아니요, 그렇다기보다는…….”
“…….”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 같아요.”
비스듬히 들어 올린 여원의 말간 얼굴은 아득하게 젖어 있었다. 도발을 낚아채는 제헌의 입매가 이제는 제법 노골적으로 비틀렸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썹이 더 해보라는 듯, 여원을 부추겼다.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상상하게 되니까, 호기심이 자극되고, 자꾸만 궁금해져요.”
“…….”
“가끔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일부러 유도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향수를 고르게 된 이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를 빌미 삼아 그동안 제헌에게 느꼈던 두려움과 이끌림을 고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이야기를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적나라한 표현들이었다. 그러나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을 조우하며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내렸다.
“줄래요, 향수?”
여원이 직사각형 모양의 새까만 향수를 제헌에게 건넸다. 두 사람의 손끝이 아주 살짝 맞물렸다. 감각이 한껏 예민해져서인지, 사소한 스침만으로도 짜릿한 감응이 일었다.
“아…….”
제헌은 여원에게 건네받은 향수를 곧바로 손목 위에 뿌렸다. 팔을 적당한 높이로 들어 올리자 남자답게 도드라진 손목뼈와 우아하게 뻗은 손등이 드러났다.
“…….”
“…….”
드레스 셔츠 위로 살짝 드러난 살결에 여원이 고른 향이 유영하듯 흩뿌려졌다. 여원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채로, 눈을 반쯤 내리감고 향을 음미하는 제헌의 반응만을 기다렸다.
“동물 가죽 향인가요?”
“네.”
“거칠고 질깃하네요.”
“네. 처음에는 강한 향이지만, 조금 후에 피부에 달라붙으면…….”
“알아요. 화려하고 관능적인 기운이 퍼지네요.”
실제로 제헌의 몸에 내려앉은 향기는, 생각 이상으로 섹시했다. 여원은 아랫배가 괜히 간질거렸다. 향기가 전이시키는 공감각이 다소 부적절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여원 씨가 생각하는 나는 이런 모습인가 보군요.”
여원의 얼굴은 부드럽게 뒤엉킨 향기에 고조되어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들켜서는 안 될 것들을 제헌에게 고스란히 내어준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알게 되니 좋습니다.”
제헌의 얼굴에 나른한 흡족감이 번졌다. 그는 공기에 흐리게 번진 향을 다시금 빨아들였다.
“제가 고른 향수…… 어떠세요?”
“매일 쓰기에는 향이 다소 강한 편이네요.”
“아, 역시…… 그럴 수도 있겠네요.”
“특별한 날에 사용하겠습니다.”
빼곡해진 긴장으로 입술을 잘근거리던 여원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특별이라는 말에, 잔뜩 부푼 심장이 그대로 팡 터져 버릴 것처럼 강하게 맥동했다.
“고마워요, 여원 씨.”
“아니에요, 좋아해 주시니 정말 기뻐요.”
제헌을 기쁘게 한 것이 몹시 뿌듯했다. 한편으로는, 잘하고 좋아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감각이 여원에게는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다.
향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대표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가까워졌다.
“저희 마그니피크의 특별 제작 향수는, 사실 어떤 인물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착안됩니다.”
“…….”
“이 향수의 경우는 부와 성공, 그리고 위험을 떠올리면서 만들어졌죠. 딱 맞는 주인을 찾아간 것 같습니다.”
“…….”
“연인분이어서인지, 하 대표님께 어울리는 향을 역시 잘 골라주신 것 같아요.”
부드럽게 눈을 휘어 보인 퍼퓨머리의 대표가 건넨 말에, 여원의 얼굴이 당혹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오해였다. 말이 제대로 나오기에 앞서 손사래부터 절레절레 쳤다.
“아, 그런 게 아닌데…….”
“…….”
“그러니까, 그런 사이는 아니어서요. 저는 그냥 제헌 씨…… 가족이에요.”
여원이 서둘러 대표의 오해를 풀었다. 목덜미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반면 제헌은 전혀 당황하거나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자약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어머, 그렇군요. 두 분 계시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제가 실례를 했네요.”
“괜찮습니다.”
간결하게 상황을 갈무리한 제헌이 대표로부터 포장된 향수를 받아 들었다. 여전히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데구루루 굴리는 여원을 퍼퓨머리의 입구를 향해 부드럽게 이끌었다. 짧지 않은 방문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는 동안에도 놀란 심장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 * *
해가 저물고 차창 밖의 풍경이 아롱이는 노을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부티크 안에서의 친밀했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요했다. 에어컨이 세게 틀어진 실내 공기는 선뜩하리만큼 서늘했고, 향기에 뒤섞인 페로몬이 공기의 기류에 따라 불규칙하게 넘실거렸다.
“…….”
“…….”
제헌이 데려가 준 곳은 여원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몽환적인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은은한 향기에 말캉말캉 녹아들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을 잔뜩 해버렸다. 여원은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여원 씨가 임신한 지 얼마나 된 거죠?”
“네?”
“배가 이제 제법 부푼 것 같아서요.”
얕은 숨을 쌔근쌔근 몰아쉬는 여원에게 제헌이 흘긋 눈길을 던졌다. 제헌은 여전히 여원이 고른 향수와 섞여든 매혹적인 페로몬을 은은하게 풍겼다. 제헌의 시선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지나 어느덧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배 주변에 닿았다.
“아, 그…… 14주 정도…… 됐어요.”
움찔 어깨를 떤 여원이 망설이며 대답했다. 제헌과 부티크를 구경하는 동안에는 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선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임신한 배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아…….”
내도록 전신을 부드럽게 휩싸고 들었던 설렘은 사실은 아주 불온한 감정이었다. 제헌은 가족이 된 여원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을 뿐인데도, 여원은 자꾸만 제헌에게 기대고 싶어지고 더욱 의지하고만 싶어졌다. 그를 자각하자, 희미한 죄책감으로 혀끝이 따끔거렸다.
“그런데요, 제헌 씨.”
“네.”
“제헌 씨는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신 건가요?”
무례인 줄 알면서도, 여원은 그동안 내내 미심쩍었던 일을 굳이 꼬집어 물어보았다. 분명히, 뭔가 심각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여원은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거리를 확보할 심리적 방어벽을 찾았다.
“제헌 씨는 회사의 대표이사시기도…… 하잖아요.”
“…….”
“아무래도 후사 문제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으셨을 것 같아서요.”
제헌이 보여주지 않던 면을 파고드는 여원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산발적인 다정함에 맹목적으로 기대기에는, 아직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끌리기 때문에 더더욱, 제헌이 얼마만큼 위험한 사람인지 검증하고 싶었다.
“그게 궁금했어요?”
“네.”
고개를 들어 올린 여원이 또렷하게 그를 쳐다봤다. 집요한 눈빛이 피부에 바짝 밀착해 오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든 일이 원한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
“여원 씨도 원해서 아이를 가진 건 아니었잖아요?”
그러나 여유롭게 웃어 보인 제헌은 대답 대신 여원을 향한 질문을 되돌려줄 뿐이었다. 모호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여원은 그 위험해 보이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게요,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
“…….”
“마음 쓸 것 없습니다.”
저택에 가까워지자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음습한 산길이 매끈한 세단을 빼곡하게 에워쌌다. 어두컴컴해진 하늘 아래로 즐비한 소나무들이 침침한 숲 냄새를 훅 풍겼다. 낮과 밤의 모호한 경계에서 따악 따악 울어 젖히는 매미 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때렸다.
“그런데 여원 씨.”
“네?”
굽이진 길목을 타고 올라 저택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헌이 툭 여원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여원 씨의 부모님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선준이에게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여원은 그 일에 대해서는 선준에게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 말할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제헌이 직접 밝히자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날렵하게 가늘어진 제헌의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은밀한 느낌을 자아냈다.
“어떤 일은 모르는 채로 덮어두고 지나가는 편이 서로에게 좋으니까요.”
잠시 멍해졌던 여원이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제헌과 여원의 사이에 선준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 생겨났다.
비밀스러운 저택에 또 하나의 비밀이 덧대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샤워하기 전 속옷을 벗어 내리자 입구에 닿았던 얇은 면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미끌미끌한 액이 손가락에 끈끈하게 늘어지는 것을 보며 여원은 아연한 기분에 휩싸였다. 오후 내내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진득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단순히 생리적인 반응이라 치부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사실은 여원 역시 오늘 하루 제헌에게 강하게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딱 남편 형에게 발정해 버린 꼴이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일었다. 샤워기를 튼 여원은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몸을 뽀득뽀득 씻어내렸다.
온몸에 흥건하게 묻어 있는 우성 알파 페로몬도, 아랫배를 은근하게 간질이는 스모키한 잔향도, 그리고 선준 몰래 제헌과 단둘이 외출을 했다는 사실까지도.
그 모든 것이 흐르는 물에 흔적 없이 씻겨졌으면 했다. 여린 피부를 바쁘게 쓸어내리는 샤워볼이 평소보다 한층 집착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긴긴 샤워를 끝마친 여원의 얼굴은 새빨갛게 푹 익어 있었고, 희고 부들부들한 살결에서는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진짜 미쳤나 봐.”
선준과는 다르게 언제나 여유롭고, 말끝은 냉정하지만 행동으로는 여원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남자. 그런 제헌을 단순히 선망하고, 감사해하는 것 이상으로 그가 가진 육체적인 매력을 여실히 느꼈다. 아직까지도 저를 뒤흔들던 강렬한 알파 페로몬이 남아 희미하게 진동했다.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결국 제헌과 여원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져서는 안 되는 사이이기에.
* * *
오후에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다가올 태풍의 전조였다. 내내 우중충하던 날씨가 금세 심상치 않게 돌변하기 시작했다. 장대비가 우르르 쏟아지고 폭풍우가 거침없이 몰아치는 불길한 밤이 저택을 두드려왔다.
외출을 다녀온 다음에는 저택이 부쩍 황량하고 고적하게 느껴졌다. 잠깐 닿았다가 이내 멀어져 버린 타인의 온기가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나 오늘 역시 잠자리에 든 여원은 완벽하게 혼자였다. 머릿속의 제헌을 말끔히 지워내야 한다는 생각에, 여원은 침대 위에서 여러 번 몸을 뒤척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끙끙거린 뒤에야 겨우 몽롱한 잠에 빠져들었다.
삐거덕―
나무 바닥이 삑삑 울어대는 소리가 잠든 여원을 깨웠다. 습기를 머금은 목조 건물에서 탁하고 퀴퀴한 냄새가 훅 퍼졌다. 창문을 꼭 닫았는데도, 세차게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천장에 높이 매달린 기다란 조명이 아슬아슬 흔들렸다.
삐거덕― 삐거덕―
음산한 발걸음 소리가 연이어 공기를 예리하게 찢어댔다. 선준이 벌써 온 건가.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도착한다 했는데, 아무래도 태풍 때문에 일정이 취소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굳이 마중까지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급격하게 선뜩해진 공기에 스멀스멀 떨리는 어깨 위로 이불을 바짝 끌어 올렸다. 보송보송한 천 아래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려고 할 때였다.
쿵, 끼기긱―
거친 발길질에 억세게 걷어차인 나무문이 쩌어억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복도에 불도 켜지 않았는지, 어두컴컴한 와중에 문가에 버티고 선 누군가는 컴컴하고 큼직한 덩어리로만 인식되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여원에게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서, 선준아?”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상대를 겨우 불러보았지만, 어두운 그림자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질퍽질퍽한 발소리와 함께 묵직한 인영이 여원에게 가까워졌다.
“내, 내일 오후 되어서야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웬일로 이렇게 빨리…….”
“…….”
“미리 연락이라도 주지. 너는 갑자기 방에 막 들어오고 그러냐.”
여원은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목소리가 덜덜 엉망으로 떨렸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덩치 큰 짐승이 움직이듯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커다란 그림자가 스윽스윽 침대에 가까워졌다.
“힉!”
느닷없이 홱 들이밀어진 얼굴에 여원은 소리를 크게 내지를 뻔했다. 가까이 다가온 선준의 눈에 초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흐, 선준아…….”
무턱대고 침대에 올라탄 선준이 여원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댔다. 후끈한 콧김이 무례하게 닿을 때마다 여린 피부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올랐다. 분명 페로몬도, 향수 냄새도, 모두 조금도 남김없이 씻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너, 이상해.”
“뭐? 그게 무슨…….”
“평소랑 다른 느낌인데. 어떻게 된 거지.”
여전히 눈에 초점이 없는 선준이 음산하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뻣뻣해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여원은 저를 가두듯이 내리누른 선준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댔다.
“선준아, 그런 거 아니야.”
“…….”
“아, 흑……. 나 진짜, 아니야…….”
그대로 선준이 하반신을 바짝 붙여오자, 뜨끈하고 딱딱한 살덩이가 허벅지 위로 슥슥 문질러졌다. 과도하리만치 생생한 촉감에 징그럽다는 생각이 앞섰다. 술에 취한 건가? 딱히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선준이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흥분한 건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선준아, 그러지 말고, 흣,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제헌에게 느꼈던 은밀한 흥분을 선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어떻게든 선준을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여원은 코앞까지 드밀어진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으으…….”
후끈후끈한 살덩이의 온도가 못내 소름 끼쳤다. 선준을 납득시킬 만한 해명을 머릿속에서 쥐어짜 내려던 찰나였다.
“……선준아?”
투둑, 선준이 별안간 갑자기 여원의 몸 위로 쓰러져 내렸다. 순간 얼이 빠진 여원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젖은 빨래처럼 늘어진 몸을 흔들어보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게 대체 뭐지? 선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허탈해진 여원이 선준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이 새어 나오는 것이 선준은 갑자기 잠들어버린 듯했다.
“허…….”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흐물흐물 풀어져 내리고, 헛웃음이 터졌다. 탈력감이 전신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손끝 하나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를 덮치다시피 축 늘어진 선준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좀처럼 맥을 가누지 못하는 선준의 몸은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여원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선준을 가까스로 방에 옮겼다. 신발을 벗겨내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몸을 침대에 내던지듯 뉘었다.
그렇게 대강이나마 선준을 처리하고 났더니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잠이 남김없이 깨어버린 정신은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는 유리처럼 명료했다.
여원은 격자무늬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을 멀거니 내다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을 빼놓고 있다가, 퍼뜩 드는 생각에 나무 바닥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진흙 발자국을 바지런히 걸레질했다.
“하아…….”
그러나 예정에 없던 청소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기분은 막막하기만 했다. 선준이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다.
문득 예전에 저와 제헌의 사이를 의심했던 선준이 떠올랐다. 형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그는 여원과 제헌이 단둘이 외출했던 것을 알게 되면 분명 길길이 날뛸 것이다.
예전에야 전혀 근거 없는 오해를 하는 선준이 대체 왜 이러나, 황당해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제, 짧게나마 제헌을 성적으로 의식한 이상 여원 역시 마냥 떳떳할 수만은 없었다.
선준이 일어나면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여러 가지 시나리오와 대처법을 머릿속에 부지런히 주워섬기는 사이, 잘근잘근 씹어댄 아랫입술이 거의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날이 환하게 밝아질수록, 여원의 속내는 까맣게 타들어갔다.
* * *
“어, 여원이 너 일찍 일어났네?”
테이블에 상반신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여원이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암, 커다랗게 하품하며 선준이 입을 쩍 벌렸다. 잠기운이 듬뿍 묻어 있는 눈을 반쯤 감고는 비척비척 여원에게 걸어왔다.
“서, 선준아. 안녕.”
그 자리에 굳어버린 여원의 어깨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바싹 마르는 입 안을 침으로 축이고, 선준의 기색을 면밀하게 살폈다. 하지만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았던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의 선준은 멀쩡하게만 보였다.
“나도 토스트 하나만.”
“어, 으응.”
여원이 마시고 있던 홍차에 흘긋 시선을 던진 선준이 당연하게 지시했다. 기분 나빠할 새도 없이, 여원은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선준에게 냉큼 가져다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자, 여기.”
“우웅, 고마워.”
“…….”
“…….”
“근데 선준아.”
“어어.”
“너는…… 왜,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고 막 그러냐? 술은 그렇게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던데…… 놀랐잖아.”
우적우적 빵을 씹어먹는 몰골을 흘끔 살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득달같이 달려들지도 모른다. 여원은 선준을 슬쩍 떠봤다.
“응?”
입술 근처에 빵 부스러기를 덕지덕지 묻힌 선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혀 영문을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왔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강여원, 나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맨발이었어.”
“그거야, 내가 신발을 벗겨줬으니까 그렇지. 복도에 진흙 다 묻어 있어서, 아침부터 닦아놨단 말이야.”
“내가 정말 그랬다고?”
혹시 이것도 함정인가 싶어서, 여원은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선준을 훑어내렸다. 그러나 선준은 어젯밤 자신이 여원의 방에 들이닥쳤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전히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끔뻑였다.
“으응…….”
그러나 불안감이 완전히 떨쳐지지는 않았다. 이상했다. 어젯밤 선준의 행동에는 분명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는데.
그렇지만 어제도 곧바로 쓰러졌던 것을 보면, 선준은 당시에도 의식이 완벽히 없어 보였다. 선준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의심이 싹틀 자리를 송두리째 제거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여원이 하하 웃어넘겼다.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고 보니 선준아, 너 여행은 어땠어? 재미있었어?”
“야, 그걸 말이라고. 오후부터 갑자기 태풍 몰아치는데, 계곡물은 제대로 불고 길바닥은 다 질퍽해지고 기분만 존나 잡쳤어. 이 새끼들 별 촌구석 펜션을 골라놔 가지고는.”
“아…… 그랬구나.”
“내가 딱 보기에, 이대로 가면 얼마 안 지나서 갇히겠다 싶은 거야. 차라리 빨리 서울 돌아가자는데, 미친놈들이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어 처먹고. 개빡쳐서 나 혼자서만 밴 불러서 서울에 왔지.”
선준은 기다렸다는 듯 여행에 대한 불만을 툴툴거리며 늘어놓았다. 역시나 선준은 사람들이 모두 저를 위해서만 맞춰주고 대접해 주는 것에 익숙했다.
“선준이 네가 고생 진짜 많았겠다.”
왜 결혼하기 전에는 이걸 몰랐을까 싶다가도, 완연한 어른 남자인 제헌을 만나고 나자 선준의 미성숙함을 두드러지게 느끼게 되었다.
가끔은 월등하게 잘난 형한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자존감이 바닥이 된 선준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애잔함을 쥐어짤 수도 없을 만큼 눈앞의 선준이 못나게만 보였다.
“아무튼, 피곤해서 죽는 줄 알았어. 앞으로는 절대 동기들이랑 여행 안 가야지.”
아냐, 이런 생각 해서는 안 돼.
퍼뜩 정신이 든 여원이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다. 선준은 배 속에 있는 제 아이의 아빠다. 해소되지 않을 불만을 품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너랑 이렇게 오랜만에 아침 먹으니까 뭔가 되게 좋다.”
몽롱한 꿈을 헤집는 것보다, 날 선 현실을 직시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여원은 한동안 소원했던 선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들었다.
“흠……. 맞아, 생각해 보니 진짜 오랜만이긴 하네.”
“결혼하고 나서 우리 둘이서만 있는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것 같아, 그렇지?”
“뭐, 그동안 내가 이래저래 바빴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동안 여원은 저에게 무심해진 선준을 원망하면서도, 멀어져 가고 어색해지는 관계를 회피하기만 했다. 이제는 바꾸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선준아. 나 다음 주에 검사받아야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우리 아기, 초음파로도 보고.”
“아……. 나 병원 싫어하는데.”
“……뭐라고?”
“특히 산부인과는 몰라, 좀 찝찝해. 그리고 어린놈이 왔다고 사람들이 쳐다보고 수군거리고 할 것도 싫단 말이야.”
여원 역시 누가 봐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 오메가치고도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한 탓에, 홀로 병원을 찾을 때마다 사람들의 미심쩍은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때야말로 곁에 아이의 아빠가 없다는 사실이 울컥 서러웠다.
“어차피 너 병원 앞까지 사람들이 다 데려다주는 거 아냐?”
“……그거야 뭐, 그렇지.”
“그럼 그 정도 일은 너 혼자서도 알아서 할 수 있지 않아?”
선준은 병원 얘기가 나올 때부터 죽상을 했다. 그렇게 제가 싫은 건 잘 알면서도, 여원이 힘든 것은 전혀 몰랐다. 아주 기초적인 역지사지조차 하지 못하는 나이 어린 알파. 여원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래. 내가 아주 괜한 소리를 했네.”
“어, 알았으면 됐어.”
해도 해도 너무하네, 진짜. 갑자기 추락한 기분에 싸늘한 대꾸가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선준은 더는 여원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도 없이, 모든 게 처음부터 여원의 잘못이었던 것처럼 대화를 종료시켰다.
“에이, 씨.”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상을 확 구긴 선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털레털레 걸어가 토스트 그릇과 우유 잔을 대충 개수대에 쑤셔 박았다. 너 때문에 기분이 잡쳤다는 듯 여원을 삐죽 흘겨보더니, 시위하듯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하…….”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저런 것도 남편이라고 어제 신발을 벗겨주고 침대에 고이 눕혀줬나 허탈해졌다. 본래 여원은 무언가를 바라며 남들을 위한 일을 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이번만은 명치께가 아프도록 서러워졌다.
“휴…….”
잔뜩 열이 차오른 정수리가 뜨끈했다. 하지만 이대로 부정적인 감정에 잠기면, 손해를 보는 것은 결국 여원 자신이다. 이럴 때일수록 평정을 유지해야만 한다. 큼큼, 작게 목을 가다듬은 여원이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쟤는 애새끼처럼 맨날 뭘 흘리고 다니냐.”
여원의 눈에 의자에 널브러진 선준의 얇은 카디건이 보였다. 아마 선준은 제 옷을 이곳에 놓고 간지도 모를 것이다. 한숨을 푹 내쉬고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옷가지를 들어 올릴 찰나였다.
“이게 뭐지?”
어제 집에 들어올 때부터 선준이 내내 입고 있던 옷이었다. 그러나 옷깃에서 선준 특유의 체향이 아닌 낯선 냄새가 배어났다. 여원의 목덜미에 선뜩한 기운이 스쳤다. 불길한 예감에 여원은 선준의 카디건에 코를 깊숙이 파묻었다.
“아, 이게 대체 무슨…….”
아니나 다를까, 오메가 페로몬이었다. 역하게 치미는 향에 그대로 달려가서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내고 싶어졌다.
아마, 선준이 같이 놀러 간 친구 중에 오메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술자리에서 가깝게 붙어 어울리다 보면, 의도치 않게 페로몬이 묻었을 수도…….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선준의 카디건에 흠씬 배어 있는 페로몬에는 성적인 뉘앙스가 만연했다. 분명 발정한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그것도 우성인.
“세상에…….”
가벼운 여름 카디건을 간신히 들고 여원은 얼이 빠진 채로 더듬더듬 뒷걸음질 쳤다. 주말 동안 선준이 친구들이랑 여행을 다녀온 게, 과연 맞기나 한 걸까?
“아냐, 아닐 거야.”
아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선준에게는 그럴 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을뿐더러…….
‘그럼 언제까지 섹스 못 하는데?’
그러던 중 여원이 임신을 이유로 잠자리를 거부하자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던 언젠가의 선준이 불쑥 떠올랐다. 설마하니, 제 아이를 품은 오메가와 섹스를 할 수 없어지자 다른 오메가를 찾아간 건가.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충격에 여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무 의자를 타고 흘러내리는 선준의 카디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제 방으로 달음박질쳤다.
“헉……. 흐윽…….”
꽉 다물린 나무문에 등을 간신히 기대고 섰다. 눈을 질끈 내리감은 여원이 거칠어진 숨을 연거푸 몰아쉬었다. 불안정하게 들썩이는 가슴팍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위태롭게 출렁이는 마음 역시 절대로 평온해지지 않았다.
아직, 아직 확실하지 않다.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물론 여러모로 미숙한 면이 많은 선준이지만, 설마하니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닐 것이다.
“흑,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쁜 놈이 아니긴, 어디로 뜯어봐도 선준은 지독하게 못돼 처먹은 놈이었다. 그러나 텅 빈 저택 어느 곳에도 여원의 공허한 메아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선준이 최고의 배우자는 물론 아니지만, 최악의 배우자 역시 아니라고 믿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여원은 고되기만 한 결혼 생활을 간신히 버텨왔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에 균열이 한 번 생겨나자 더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의심이 여원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선 지반을 신속하게 갉아먹었다.
‘선준이도 나쁜 면만 있는 건 아니에요. 철이 많이 없긴 하지만…… 심성이 영 못되지는 않았으니까요.’
‘애정과 관심에 많이 굶주려 있어서, 선준이가 외로운 마음을 미성숙하게 표출하는 건 사실이에요.’
이제 와 생각하니 제헌의 앞에서 선준을 포장해 주려 애쓰던 자신이 새삼 기가 막혔다.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사실은 여원이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에 주문처럼 스스로 되뇌었을 뿐.
선준이 쓰레기라는 걸 끝끝내 인정하게 되면, 지금처럼 와르르 무너질 자신을 알았기 때문에.
“흐……. 으으…….”
물론 페로몬만으로 모든 걸 예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과 없이 페로몬을 빨아들이는 열성 오메가인 데다가, 향기에 특히 예민한 여원은 날카로운 직감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른 척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설령 선준이 바람피운 게 맞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건가?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는 듯해, 여원은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답삭 감싸 쥐었다. 제법 묵직해진 부피감을 그대로 꽉 쥐어짜 버리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에 휩싸였다.
선준의 외도가 명백한 사실이라면, 이제야말로 여원은 쉽사리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끝내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는 생각에 빠듯한 절망감이 옥죄어왔다.
* * *
선준에게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어제 여원은 온종일 심한 몸살을 앓았다. 아직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아, 오늘만큼은 병원 문진을 가기가 정말이지 싫었다. 보초라도 서듯이 저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검정 리무진을 단순히 바라만 보아도 목 끝까지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러나 결국 여원은 언제나처럼 아이 아빠 없이 혼자서만 차를 올라타야 했다. 뒷좌석에 앉은 여원이 창밖을 말가니 내다보며 아랫배를 느릿느릿 쓸어내렸다.
처음부터 이 아이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저의 삶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막연하게 상상해 봤다.
병원에서는 배 속의 태아가 이상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했다. 의사가 건넨 거무죽죽한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본 여원은 착잡해졌다. 희끄무레 번지는 작고 희미한 빛이, 저 역시 생명임을 알아달라 여원에게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다.
사실 아이한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던 임신이라지만, 아이 역시 스스로 원해서 생겨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제 자식인데, 가장 힘든 건 저라는 생각에 여원은 아이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도 못했다.
누군가를 탓할 새도 없이, 여원 스스로가 자격 미달인 부모였다. 스치듯이 아이만 아니었더라도, 생각했던 것이 못내 미안해서 마음이 저릿해졌다.
문진하러 다녀온 여원은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저택의 응접실에 홀로 틀어박혔다. 청록색 벽지에 고풍스러운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응접실은 조명이 켜지지 않은 상태로 어두침침했다. 으깨진 유리알 같은 긴장이 고요한 공기를 유유히 타고 흘렀다.
저택에 처음 왔던 언젠가의 기억을 더듬어보며, 여원은 울렁울렁한 아랫배를 살살 쓸어내렸다.
아이만 데리고 이 집에서 도망칠까. 혼자 힘으로도 잘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서울에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푹 터져 나왔다. 여원은 자신이 경험했던 지독한 가난을 곧 태어날 아기에게는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바닥이 가늠되지 않는 깊은 해수면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침잠하는 것만 같았다.
“여원 씨.”
그렇게 눈을 내리감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무뎌진 시간 감각을 가르고 나직한 저음이 부드럽게 새어 들어왔다. 사실, 목소리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특유의 강렬하고 매혹적인 페로몬이었다.
“아…… 제헌 씨?”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제헌의 얼굴이 가득해졌다.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제헌을 향해 여원이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제헌은 항상 여원이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나 줬다. 비참하고 구질구질한 자신과는 다르게, 언제나 매력적이고 자기 확신으로 가득한 근사한 남자.
“오늘 외출했다고 들었습니다.”
“…….”
“병원에는 잘 다녀왔어요?”
그런 제헌이 가장 약해진 순간의 여원을 꼼꼼히 들여다봐 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소에 냉랭하던 제헌의 눈빛이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네……. 잘 다녀왔어요.”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금방이라도 지면 밑으로 푹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흔들흔들 휘청거리는 여원이 제헌을 힘없이 올려다봤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고요?”
“네. 제 아기,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대요.”
“그래요, 아직 임신 초반이니까 특별히 몸조심해야 합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제헌이 여원을 향해 몸을 슬며시 기울이자, 스모키한 가죽 향이 훅 끼쳐 들었다. 피부에 밀착한 향수가 시간이 흐르며 체향과 충분히 섞여들었는지, 처음의 거칠고 질깃한 느낌은 가라앉고 관능적인 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달착지근한 향기를 흠뻑 빨아들이자 여원은 눈물이 핑글 돌았다. 선준은 여원을 단지 집 지키는 사람, 아이를 낳기 위해 존재하는 오메가 정도로만 취급했다. 이 저택에서 제헌만이 유일하게 여원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했다.
“여원 씨.”
“네?”
여원의 입술 새로 물기에 젖어 먹먹해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개를 살그머니 들어 올린 여원의 얼굴이 연약하게만 보였다. 누군가 저를 단단히 붙들어주기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여원 씨가 성인이란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
“잘못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참 이상하죠.”
담담한 어조로 간지러운 이야기를 한 제헌이 여원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별다를 게 없는 말인데도 여원은 그것이 저를 향한 다정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절실하게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맞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헌 씨, 있잖아요.”
“네, 듣고 있어요.”
“요새 선준이, 흐, 선준이가…… 너무 이상해요.”
자신의 이야기에 진중하게 귀 기울여줄 단 한 명의 사람. 선준의 경고나, 본능적인 두려움도 송두리째 잊을 만큼 여원은 절박해졌다. 병원을 다녀온 이후 내도록 울컥거리던 여원의 마음이, 끝내는 주변이 온통 흥건해지도록 넘쳐흐르고 말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겁니까?”
여원의 호소를 가만 곱씹던 제헌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제헌의 먹빛 눈동자에 음험한 이채가 감돌았다.
“그게…….”
곧바로 예리하게 찔러오는 질문에는 막상 대답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냄새만으로 선준의 외도를 단정 짓기는 다소 무리였다. 아무리 페로몬의 작용이 있다지만, 섣불리 이야기를 꺼냈다가 여원만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서, 선준이가…… 가끔씩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입술을 잘근거리던 여원은 반짝 떠오른 생각으로 말을 돌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 아…… 네.”
“언제 있었던 일인데요.”
“어…… 며칠 전에, 선준이가 여행 갔다가 일찍 들어왔던…… 그날 밤이요.”
“여원 씨는 그걸 어떻게 알게 됐고요.”
“앗, 네……. 그, 선준이가 좀, 이상한 상태로 제 방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었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에 그 일을 기억 못 하는 것 같길래…….”
“…….”
“…….”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헌은 그답지 않게도 꽤나 집요하게 여원을 추궁했다.
“저, 저 말씀이세요?”
“…….”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요.”
갑자기 다친 데가 없냐는 질문에 여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헌의 입매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흠…….”
수려한 얼굴에 수심의 그늘이 짧게 드리웠다. 그러나 제헌은 금세 평소처럼 빈틈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언젠가 여원 씨가 저택에서 위험한 냄새가 난다고 했던 적이 있죠.”
“……아, 네.”
제헌이 갑작스레 냄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여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준과는 전혀 동떨어진 주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선준이가 너무 잘해주거든, 경계하세요.”
“…….”
“매사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말입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경고였다. 제헌의 얼굴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한동안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저택 고유의 향기가 공기 중으로 불온하고 위험하게 번져 나갔다.
“네, 조심할게요.”
어깨를 흠칫 떤 여원이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뭐,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지만.
“아…….”
그때, 여원은 배우자가 갑자기 잘해주면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속설을 문득 떠올렸다. 그리고 얼마 전 느닷없이 복숭아를 사 온다고 답지 않게 난리를 피우던 선준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당시에도 여원은 분명 선준의 행동이 별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꼭 무언가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갑작스레 다정한 배우자인 양 친근하게 굴어왔던 게…….
“……아니야, 안 돼.”
즉각적인 공포와 구체적인 의구심이 빈틈없이 밀려들었다. 제멋대로 마구 치달아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혹시 이것 때문에 그랬던 건가. 설마 그때부터 다른 오메가를 만나고 있었던 건가. 나를 감쪽같이 속이려고. 뿔뿔이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맞물리며 하나의 완성된 퍼즐을 이루었다.
“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헌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여원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어떠한 결론을 정해놓고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수집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써보아도, 모든 정황은 단 하나의 가능성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준이, 선준이가…… 다른 오메가를 만나는 것 같아요.”
어쩌면 혼자서만 담아두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엎질러진 물처럼 말을 끝내 꺼내버린 여원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선준이에게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시선이 여원에게 촘촘하게 내려앉았다. 제헌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고 다만 이유에 대해 물었다. 조금의 균열도 없이 매끄러운 그 태도에 여원은 지레 주눅 들었다.
역시 내 말을 의심하는 걸까. 당연히 쉽게 믿어주지는 않겠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 동생이니까.
“제가 임신 초기라서…… 선준이랑 잠자리를, 계속…… 같이 하지 못했거든요.”
“…….”
“그것 때문에, 흐, 선준이가…… 저한테 짜증을 냈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혹시라도 제헌이 저를 믿지 않을까 겁이 난 여원이 가장 내밀한 부부 사정까지 낱낱이 까발렸다. 제헌이 보는 앞에서 속옷 하나 남기지 않고 발가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선준이 카디건에 오메가 냄새가 묻어 있었어요. 우성인 것 같았는데, 그냥 술자리에서 묻어 왔다기에는…….”
“…….”
“너무 적나라한, 흐…… 그런, 냄새여서…….”
코끝이 시큰해지고 목이 얼얼하게 메어왔다. 애써 아니라고 생각하며 묻어두려 했지만, 제헌의 앞에서 직접 이야기하자 선준의 외도가 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랬군요.”
여원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제헌을 올려다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여원의 말을 쉽게 수긍했다.
“제헌 씨도…… 정말, 선준이가 바람을 피웠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타들어가는 초조함으로 여원이 제헌을 보챘다. 한 번 선준을 향한 의심이 부추겨지자,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 주길 바라게 됐다.
“당연하죠. 모든 행동에는 냄새가 묻는 법이니까요.”
덜커덩, 여원은 심장이 발끝까지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제헌의 서늘한 얼굴에 은밀한 기운이 감돌았다.
“…….”
“…….”
그러나 제헌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여원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대신 담담한 얼굴로 여원을 응시하기만 했다. 제헌을 까마득히 올려다보는 여원은 물씬 혼란스러워졌다.
바람을 피우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결혼 생활에서 배우자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이기도 하다.
“아…… 역시 그렇겠죠.”
미적지근한 제헌의 반응에 여원은 묘하게 기가 죽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제헌이 이 같은 부조리에 분노하고 선준을 호되게 나무라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그렇지만 찬찬히 짚어보면 사실 제헌의 반응이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제헌이 아무리 여원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한들, 선준은 제헌의 친동생이고 자신은 그 옆에 달린 거추장스러운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아요.”
“…….”
“말한다고 해서 나아질 상황도 아닌데 말이에요.”
제헌이 대신 해결해 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다. 그럼에도 여원은 내심 제헌이 자신에게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뒤늦게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깨달은 여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모든 게 능수능란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는 우성 알파. 그런 제헌에게 가진 것 없고 어리기만 한 오메가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건 아마도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렇게 여원이 제헌을 향해 품는 기대나, 희미하게나마 관심과 애정을 바라는 마음 역시도…….
“여원 씨도 최근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일 거라 생각됩니다.”
“…….”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짧게 혀끝을 찬 제헌이 암체어에서 몸을 가뿐하게 일으켰다. 커다란 키와 너른 어깨가 여원에게 위압적인 그늘을 드리웠다. 여원이 잔뜩 겁에 질린 채 제헌을 올려다봤다.
“네…….”
여원을 생각하는 척 충고를 건네기에는, 그러는 제헌 본인 역시 충분히 위험한 남자 아닌가. 떨떠름한 대답을 내어놓는 여원의 마음이 삐죽삐죽해졌다.
“정 견디기 어렵거든,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요.”
응접실을 나가기에 앞서, 가까이 다가온 제헌이 길쭉한 손으로 여원의 어깨를 가벼이 토닥거렸다. 얇은 면 티셔츠 아래로 제헌의 손끝이 스치고 지나간 피부가 환부처럼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네, 감사합니다.”
“…….”
“…….”
“그래요.”
도움이라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여원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겠다기보다는 단순히 예의상 하는 인사치레라고 느껴졌다. 두 사람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겠다는 듯, 온건한 낯빛을 한 제헌은 중립적인 태도로 여원을 격려했다.
스스슥, 나선형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가는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공기를 날렵하게 휩싸고 돌았다. 응접실 안에 눅눅하게 고여든 제헌의 페로몬을 짧게 들이켜던 여원은 문득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헌은 정말로 중립적인가?
“아…….”
저택에 사는 두 남자는 하나같이 여원에게 상대방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뻔뻔하게 으름장을 놓거나 부드럽게 어르거나 방식은 달랐지만 본질만은 같았다.
상충하는 진술 사이에서 누구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여원에게는 혼란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 * *
두 사람 중 누가 더 믿을 만한지 따져 보는 게 과연 의미가 있긴 하나. 사실 여원은 가릴 것 없이 둘 다를 조심해야만 했다. 며칠을 끙끙 고민하던 문제였는데도, 결국 여원이 내리게 된 결론은 퍽 직관적이었다.
아무리 혼자서는 선준에게 맞설 자신이 없었다 한들, 여원은 부부의 일을 제헌한테 들고 간 것을 후회했다.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여원 자신이었다. 누구도 그를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 하던가. 그동안 여원은 되도록 저택에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갑갑하고 막막하기만 한 상황이라면, 죽기 살기로라도 부딪쳐 봐야 할 것 같았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아, 여원아.”
“웬일이야? 네가 제시간에 다 오고.”
무슨 변덕인지, 오늘 선준은 드물게 제시간에 귀가했다. 계단에 기대서 팔짱을 낀 여원이 선준을 올려다봤다. 오늘만큼은 선준에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여원아, 왜 그래. 너 오늘 쫌 이상하다.”
“…….”
“무슨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눈썹을 애매하게 늘어뜨린 선준이 여원의 눈치를 살폈다. 여원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냉랭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선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여원에게 딱 붙어오며 퍽 친밀하게 굴었다.
“……아니.”
“에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볼이 이렇게 부었는데.”
급기야 선준이 불퉁해진 볼을 건드리려 하자, 여원이 두툼한 손가락을 탁 쳐내버렸다. 날렵해진 선준의 눈에 일순 노기가 일었다. 그러나 역정을 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 판단했는지, 금세 가라앉혔다.
“강여원, 너 오늘 왜 이렇게 낯서냐?”
“하선준.”
“어, 어?”
“너 요새 누구 만나니?”
직구로 내리꽂힌 질문에 선준이 움찔 떨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선연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
“뭐, 사람들이야 늘 만나지. 교수님이랑 동기들이랑 선배들이랑…… 학교 가면 널린 게 사람인데.”
어깨를 크게 한 번 으쓱해 보인 선준이 비실비실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여원을 향해 눈짓했지만, 여원은 결코 그런 선준과 같이 웃어줄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그 얘기 아닌 거 너도 알잖아.”
“…….”
“여행 다녀온 날, 네 카디건에 오메가 냄새 묻어 있더라.”
“어?”
“……너, 다른 사람이랑 잤니?”
선준에게는 최대한 냉정하게, 감정을 덜어내고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문제의 질문을 꺼내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억울함과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고야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동안 모든 것을 혼자서 꾹꾹 참지는 않았을 텐데.
“야, 너는……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밖에 돌아다니다 다른 사람 냄새 묻은 거겠지.”
해명, 혹은 변명.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는 동안 선준의 오른쪽 입가는 근육에 마비라도 온 것처럼 어색하게 움직거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뻣뻣한 태도를 보며 여원은 선준의 외도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냥 스쳐 간 것만으로 어떻게 그렇게 냄새가 진하게 밸 수가 있어. 넌 내가 바보인 줄 알지?”
“야, 강여원…….”
“너 바람피운 거 맞잖아!”
이미 각오하고 있는데도, 심증이 확신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하강감을 동반했다. 얼굴과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른 여원이 빽, 소리 질렀다. 붉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설핏 고여들었다.
“너 편집증 환자야? 아니 뭐 임신 우울증 그런 건가?”
“뭐?”
“그래서 물증이라도 있어?”
“…….”
“없나 보네. 당연히 없겠지. 근데 뭐 이딴 말도 안 되는 것 가지고 사람을 의심하냐?”
그러나 선준은 끝까지 적반하장이었다. 애초에 바람을 피우지 않은 사람이라면, 놀라거나 억울해하지 물증이라는 단어를 쓸 리가 없을 것이다. 설마하니 선준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라서, 여원은 눈물이 쏙 들어간 채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소설 쓸 시간에 정신과 좀 가봐. 문진 갈 때 종합병원 투어나 한 바퀴 돌고 오면 되겠네.”
이어진 말에는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온몸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고, 얼어붙은 전신에 오싹한 기운이 번졌다. 지금 저게 임산부한테 할 이야기인가?
“이, 이럴 거면, 차라리 이혼해.”
“뭐? 이혼?”
“그래, 우리 이혼해.”
여원도 당장 오늘 이런 말까지 꺼낼 생각은 없었다. 배 속에 아이도 있는 만큼,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원의 이성 역시 휘발되어 버리고 말았다.
“여원아, 왜 갑자기 발작을 하고 그래? 이건 대체 무슨 피해망상이야?”
“…….”
“자기 혼자 멋대로 의심해 놓고 사람 들들 볶아댄 주제에, 어디 네 맘대로 이혼을 하라 마라야.”
당장 이혼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선준은 불성실한 결혼 생활을 했다. 아니, 가끔은 여원에게서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싶어 작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여원이 이혼을 요구하자, 선준은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결혼은 뭐 너 혼자 했어? 난 너랑 이혼해 줄 마음 없어.”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나중에 법정에서 보자.”
“이게 진짜.”
혹시라도 선준이 손을 들어 올릴까 두려워, 여원이 움찔 떨었다. 어릴 적 아빠에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여원의 몸에 본성처럼 배어 있었다. 다행히 선준은 혼자서 어깨를 들썩거리기만 할 뿐이었지만, 폭력에 대한 공포는 여원을 패닉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야. 그럼 배 속에 있는 애는 어쩔 건데?”
“뭐?”
“너 낙태라도 할 거야?”
목이 꽉 틀어막혔다. 사실은 여원 역시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던 선택지였다.
“……그, 그치만.”
“네 성격에 애 절대 못 지울 텐데? 지울 거였으면 나랑 결혼하기 전에 진작 지웠겠지.”
상대에 대한 확신 없이 시작해 어영부영 끌려다니기만 하던 연애였다. 어쩌면 선준은 그런 여원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애는 땅 파서 나온 돈으로 키우려고?”
여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간파한 선준이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여원아, 너 똑똑하잖아. 현실적으로 생각해.”
“…….”
“안 그래도 허덕거리는 너네 가족한테, 갓난쟁이까지 먹여 살려달라 둘러매고 가려고?”
아이에 이어, 가족 얘기까지. 평소에 투박하고 아둔하게만 보이던 선준인데도, 여원의 약점만큼은 동물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망연해진 여원이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아…….”
직면을 위한 노력과 시도는 그렇게 무참하게 와해되었다. 무기력에 젖어든 여원의 눈동자에 빛이 움푹 꺼졌다.
“우리 큰 소리 내지 말고 서로 협조하자, 응?”
“…….”
“조금만 참으면 되잖아. 금방 저택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나 정말 바람피운 거 아니라니까?”
원하는 대로 상황을 휘어잡는 데 성공한 선준이 여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들었다. 홱, 고개를 들어 올린 여원이 선준을 매섭게 쳐냈다.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겨우 이 정도가 지금 선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이라는 생각에 무력감이 왈칵 솟아올랐다.
“워, 워.”
눈을 휘둥그레 뜬 선준이 퍽 놀란 양 굴었다. 항복이라도 하듯 손바닥을 뒤집은 양손을 연극적으로 들어 올렸다.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여원을 남겨둔 채 뒷걸음질 쳤다.
“하…….”
그대로 줄행랑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조금도 속 시원하지 않았다. 무서워하는 척, 선준이 실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 *
비참하고, 비참했다.
선준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여원 역시도 선준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결국 아니었기에.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법적으로 서로를 구속하게 된 이상 배우자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과 신의가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원에게는 그런 말을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여원은 이제야 명료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선준과 결혼한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모멸의 순간이었다. 과거에도 그래 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미래에도 나아질 희망이 전혀 없었다.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막막한 앞날, 어차피 더 나은 선택지가 없겠다는 생각에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결혼을 택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 향방을 다른 사람에게 위탁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보다도 훨씬 나쁜, 가장 최악의 선택지였다.
앞으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불행의 덩어리는 비탈길을 데굴데굴 구르며 눈덩이처럼 몸집을 불렸다. 여원은 자그마한 몸으로 그것을 혼자서 버겁도록 끌어안아야만 했다.
그럴수록 배 속의 아이를 향한 양가감정도 짙어져만 갔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나게 될 아이가 너무 불쌍하면서,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시발점이 되었던 아이를 끝내 원망하게도 됐다. 처음부터 생기지 않았다면, 아니 영영 사라져 버렸으면.
* * *
도무지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를 더듬어 오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향기가 힌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근거도 연관성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강렬하게 각인되는 직감이었다. 두 알파가 자리를 비운 낮의 저택, 여원은 스스로 위험을 찾아들듯이 3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모두 오르자 싸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피부에 바짝 달라붙었다. 목조로 된 골조 위로 고풍스럽고 화려한 치장이 둘린 저택이었지만, 제헌이 거주하는 3층만은 단조로운 분위기로 실내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난간을 짚은 채 여원은 무채색으로 가라앉은 3층의 전경을 한동안 말가니 바라보았다.
지난번 3층에 올라왔을 때보다 제헌의 흔적이 훨씬 더 만져질 듯이 다가왔다. 평소에 사용하기에는 강하다고 말했으면서도, 제헌은 여원이 골라준 향수를 자주 쓰고 있는 듯했다. 나긋하고 육감적인 향이 제헌의 공간에 듬뿍 배어 있었다.
고유하고 개인적인 향기는 그와 연결된 감정과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일으켰다. 가벼이 눈을 내리감자 제헌과 함께 방문했던 향수 부티크가 시야에 한가득 펼쳐지는 듯했다. 선준과 결혼한 이후, 여원이 유일하게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휘발성 짙은 행복은 금세 여원의 손끝에서 달아나 버렸다. 짧고 강렬했지만 결국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기에, 현실로 추락했을 때의 낙폭이 더욱 커다랬다. 순간의 희열에 비례하여 지금의 불행이 더욱 참담해졌다.
고개를 짧게 저은 여원이 원래의 목적대로 복도 끝 서재를 향했다. 저택에 감춰진 비밀에 대한 제헌의 경고는 여원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었다. 본능이 여원을 위험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판단했던 공간인 3층 서재로 이끌어갔다.
엄중하게 닫힌 나무문과 가까워질수록 위험과 폭력을 암시하는 불온한 향기가 짙어졌다. 아니, 예전보다 훨씬 지독해졌다. 악취라고 느껴질 정도로. 저도 모르게 코끝을 틀어막은 여원이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무슨 이런, 지독한 냄새가…….”
후각은 오감 중 다섯 번째로 꼽히는, 가장 마지막의 감각이다. 둘러싼 세계를 인지하는 과정에서도 시각이나 청각, 촉각에 비해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또한 은밀하고 은유적이기 때문에, 오감의 너머에 있는 육감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도 했다.
좋은 향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우리가 현재에 머무르게끔 하며, 미래를 풍요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나쁜 향은 정확히 그 반대의 원리로 작용한다. 모든 악취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3층 서재의 냄새가 짙어진 데도 분명…….
“흐읍.”
불길한 예감에 여원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정체불명의 냄새는 계속해서 진동했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서재의 문고리를 잡아채자,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빠듯하게 치밀어 오르는 토기에 여원이 입을 꽉 틀어막았다.
여원은 3층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야 했다. 오직 그 생각만으로 계단을 향해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울렁거리는 욕지기는 계속해서 심해지기만 했다. 오싹한 공포 때문에,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됐다. 허겁지겁 뛰어가던 여원은 계단에 다다랐을 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쾅―
발밑에 닿은 것은 계단이 아닌 밑이 빠진 허공이었다. 몸이 크게 기우뚱하고, 그대로 균형을 잃은 여원이 푹 고꾸라졌다.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데구루루―
여원은 다급하게 난간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쭉 빠진 손은 난간을 헛돌아서 주르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헉,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들이켰다. 크게 휘청거리던 몸이 그대로 계단 위로 무너져 내렸다.
쿵, 쿵― 쿵.
뾰족뾰족한 계단, 나선형으로 도는 난간에 쇄골이 부딪히고, 골반뼈가 부딪히고, 복사뼈가 부딪혔다. 임신한 이후에도 살이 거의 붙지 않았던 마르고 여린 몸이 계단 위를 퉁퉁 튕겨 내려갔다.
“아, 아흑…….”
속수무책으로 구르던 몸뚱이는 2층 계단 바닥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췄다. 날 선 계단 표면에 거세게 부딪힌 여원의 몸 곳곳에 멍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원은 그곳에서 오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기, 내 아기 어떡해…….”
밑이 훅 빠지면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여원은 욱신거리는 아랫배를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날카로운 송곳에 쑤셔지는 것처럼 배가 쿡쿡 찔리듯이 아팠다. 안 돼…….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겁에 잔뜩 질린 여원이 크게 소리 질렀다. 목이 잔뜩 메어버린 탓에, 갈라진 소리가 쩍쩍 새어 나왔다.
“도와줘…….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나 좀 어떻게, 흑…….”
그러는 와중에도 복부의 통증은 계속해서 심해졌다. 사지에 힘이 쭉 빠지고, 손끝 발끝이 저릿저릿해졌다. 절박하게 소리 지르는 여원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눈물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서 사위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안 돼, 안 되는데…….
“여원 님, 괜찮으세요?”
“흐, 으으……으.”
“세상에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여원 님!”
뒤늦게 달려온 사용인들이 계단 밑바닥에 맥없이 널브러진 여원을 붙들었다. 누군가 응급실에 전화해 구급차를 불렀다. 그러나 괜찮냐고 어깨를 꽉 붙들고 흔들어대는 손길에도, 눈앞의 초점은 서서히 흐려져만 갔다. 의식이 까무룩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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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정글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