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호의와 악의
탁월한 채광을 자랑하는 너른 창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번지는 빛의 산란이 유난히 눈부셨다. 꽃이 가냘프게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소복하게 영글어, 저택을 빼곡히 둘러싼 나무들이 진녹색으로 여물어갔다.
그러나 푸릇푸릇한 바깥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생기가 바싹 메마른 실내의 전경은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기, 약간 좀 칙칙해 보이지 않나요?”
“무슨 말씀이실까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는 날이다. 여원은 내심 설레고 있었다. 저택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것은 여원의 책임이 아니었기에, 평소에는 실내 공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까지 자신을 찾아와 준 손님에게는, 저택이 아름답고 화사한 공간처럼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집 말이에요. 아무래도 너무 텅 비어 있는 느낌이라서…….”
“…….”
“정원에 있는 백합이라도 좀 들여오면 어떨까 싶은데요.”
“네, 알겠습니다.”
사용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흐드러진 백합을 한 아름 실내로 들여왔다. 싱그러운 하얀색 백합 잎 표면 곳곳에는 투명한 이슬이 도롱도롱 맺혀 있었다. 크게 호흡한 여원이 자욱한 꽃향기를 안으로 쑥 빨아들였다.
향기에 포박당하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반복해서 눈을 끔뻑이는 동안 몽롱해진 시야에 초점이 느릿하게 맺혔다.
“여원 님. 어머님께서 지금 막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아, 네.”
“경비원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사용인을 향해 여원이 생긋 웃어 보였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지만, 같은 집에서 부대끼며 살 때는 엄마가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 보니 여원도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 저택에서 고립되어 있는 동안 외로웠던 자신을 엄마가 직접 찾아와 준다니 고마웠다.
“세상에, 여원아. 이게 얼마 만이니.”
“어, 엄마 왔어?”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초라해 보이는 헐렁한 꽃무늬 셔츠를 걸친 초로의 여인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싸구려 파마를 한 짧은 머리칼은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버석거렸다. 엄마를 향해 여원이 방긋 웃어 보였다.
“이러다 엄마가 우리 아들 얼굴 까먹겠어. 너도 참, 서울 집에라도 한 번 찾아오지를 않고.”
“……미안, 나도 여러 가지로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서.”
부산스러운 소란을 일으키며 엄마가 여원에게 다가왔다. 한눈에도 값비싸 보이는 여원의 슈트를 보고는 움찔 멈춰 섰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자칫 무례하다 여겨질 정도로, 엄마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원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우리 여원이…… 이제 완전 부잣집 도련님 같네.”
안도인지, 탄식인지, 그것도 아니면 부러움인지. 나직한 읊조림에는 콕 집어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엄마는 여원에게 허물없이 다가오지 못했다.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 일부러 옷을 신경 써서 입은 것을 여원은 뒤늦게 후회했다.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그래.”
“얘는, 엄마가 아들 칭찬 한 번 못 하니?”
“엄마한테 그런 말 듣기 남사스러워. 빨리 앉기나 해.”
“알았어, 알았어.”
선대 가주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저택 내부는 제헌의 취향에 따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쳤다. 배색부터, 배치된 소품까지 모든 요소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억누르듯 극도로 절제된 실내였다. 삶의 찌든 때를 곳곳에 묻힌 엄마가 생활감 없는 공간 한복판에 멀뚱멀뚱 자리를 잡았다.
“너무…… 썰렁하지, 집이. 좀 으스스하고.”
“으응?”
“이 집 사람들 취향이…… 좀 인간미가 없는 것 같아. 이제는 적응할 때가 됐는데도 아무래도 아직 어색하네.”
엄마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저택 내부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그런 엄마의 기색을 초조하게 살피던 여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미래는 여전히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여원은 어딘가 음산한 저택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에 대해 진짜 가족에게 토로하고 싶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한대니. 혹시라도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쩌려고.”
“아, 엄마…….”
“이 정도면 아주 궁궐이다, 궁궐이다. 엄마 같으면 이 집 화장실에 세 들어 살라고 해도 어이구 감사합니다 하겠어.”
그러나 엄마는 이제는 자신과 다른 세계를 살게 된 아들을 득달같이 나무랐다. 혹여나 철없는 불만으로 인해, 아들이 제가 거머쥔 거대한 행운을 놓치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었다.
“참…… 세상일이 모르는 일이다, 그치?”
“어?”
“여원이 네가 이렇게 부잣집에 시집을 갈 줄 누가 알았겠어. 페로몬도 진하지 않은 열성 오메간데.”
“아, 뭐…… 그렇지.”
엄마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못 보는 동안에는 잊고 있었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수선스러운 태도로 여원을 치켜세우자, 여원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엄마가 늘 우리 여원이 좋은 알파 집안에 혼처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도 좀…… 마않이 아리송했거든?”
“아, 엄마…….”
“그런데 여원이 네가 이렇게 우리 집안에 복덩어리가 되어줄 줄이야.”
“그 정도는 아니야, 엄마. 왜 괜히 오버하고 그래.”
“오버는 무슨 오버야, 여원이 너 아니었으면 엄마가 평생에 살면서 이런 으리으리한 저택에 와볼 일이라도 있었겠니?”
형질을 타고난 자들은 더욱 조심하는 페로몬, 열성, 오메가, 알파 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투박하게 주워섬기는 엄마는 아이러니하게도 베타였다.
“엄마는 진짜…….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할 때도 됐잖아.”
마치 로또라도 된 것처럼, 엄마는 베타 일색인 집안에서 태어난 오메가인 여원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여겼다. 세속적 욕망을 숨겨야 한다는 인식도, 의도도 없었다. 그것이 무례와 모욕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별달리 지적할 수조차 없었다.
“왜, 엄마 얘기에 어디 틀린 말 있니?”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했다. 모자를 둘러싼 분위기가 그대로 꽁꽁 얼어붙으려던 찰나, 때마침 사용인이 차를 내왔다. 섬세하게 세공된 값비싼 도자기 잔이 대리석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놓이고, 향긋한 아지랑이를 피워냈다.
“엄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집에는 별일 없고?”
“하이고, 죽지 못해 사는 거야 매일이 똑같지. 다를 게 있겠느냐마는…….”
“하…….”
“너는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그러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동생들은?”
“말도 말어. 혜원이 걔는 무슨 헛바람이 들었는지, 돈 나올 구석이 어딨다고 미술 입시 학원을 보내달라는데. 고 기집애가 지 오빠가 주유소 알바까지 뛰면서 집안 살림에 보태는 건 생각지도 않고.”
여원은 어떻게든 대화의 주제를 돌려보려 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는 못했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 집. 아마 앞으로도 나아질 일이 없을 집.
“그래서 말인데…….”
“어, 듣고 있어.”
“에휴, 아니다, 아니야.”
주절주절 집안 이야기를 풀어놓던 엄마는 중간중간 여원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꺼내려다 망설이기를 반복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여원은 애써 모른 척했다.
“여원아, 근데 이거 뭘 넣었길래 차가 이렇게 맛있다니?”
“괜찮아? 이거 캐모마일 시트러스 차야. 이따 갈 때 챙겨줄게.”
“어, 달착지근하면서도 상큼한 게 맛이 요상하니 좋다, 얘.”
“이거 쿠키랑도 같이 먹어봐.”
엄마는 언제나 여원에게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크게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지다가도, 차가 맛있다는 엄마의 말에는 마음이 흐물흐물 풀어져 내렸다. 여원의 권유에 따라 엄마가 쿠키를 향해 손을 뻗던 때였다.
“엄마, 이거 뭐야.”
“어? 뭐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와중 헐거워진 네크라인 아래로 쇄골과 목덜미에 푸르스름한 멍이 선연하게 드러났다.
“아빠가 또 때렸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요즘 잠잠하더니 아빠는 왜 또 그러는데?”
엄마가 손등으로 멍 자국을 감쌌다. 그럼에도 숨겨지지 않는 폭력의 흔적에 여원은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자라나는 동안 내내 폭군 같았던 아빠였지만 그래도 여원이 성인이 된 뒤로는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여원아, 너도 알다시피 요새 경기가 하도 안 좋으니 아버지 사업이 좀 어려워, 응?”
“…….”
“채권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들 볶아대니, 사람 피가 바짝바짝 마르지 않고 배겨?”
“아…….”
“술에 취해서 실수로 그런 거고, 따지고 보면 사실 몇 번 그런 적도 없어. 느이 아버지도 다 잘 해보려고 하다가 그리된 것인데, 나쁜 마음 먹은 것도 아니고, 응?”
이런 상황에서도 아빠를 감싸려는 엄마를 보자 여원은 마음이 더욱 참담해졌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시큰시큰 열을 뿜어내던 것이, 돌연 피부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나쁜 마음 먹은 게 아니라니, 술 취해서 사람을 때려놓고 그게 대체 무슨 얘기야?”
“여원아…….”
“이제 손버릇 고치겠다고, 술도 그만 마시겠다고 나한테도 아빠가 분명 약속했잖아.”
“아버지도 나름대로 힘들어서 그런 거래도, 응?”
오래도록 지속된 폭력에 무기력하게 길든 엄마는 버릇처럼 학대자를 옹호했다. 아빠의 권위를 부정하는 순간 속절없이 무너져 버릴 스스로를 알기 때문이었다. 여원 안에서는 대상이 모호해진 연민과 원망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래서 말인데, 여원아…….”
“어, 왜.”
“우리 아들이 이번 한 번만, 가족 좀 도와주면 안 될까?”
“그게 무슨 말이야?”
“사천만 원 정도만 여원이 네가 빌려주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어.”
그러나 여원에게는 엄마를 가여워할 시간이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이 달아난 자리에 황당함이 들이닥쳤다.
“엄마……. 나한테 그런 큰돈이 어딨어.”
“그래도 여원이 너는 우리랑은 다르게 이렇게 대궐 같은 집에 살잖니.”
“그치만…….”
“이렇게 부탁한다, 응? 엄마를 봐서라도 어떻게 좀 안 되겠니?”
처음이 어려웠을 뿐, 정작 운을 뗀 엄마는 본격적으로 뻔뻔하게 나왔다. 맡겨놓은 것을 찾듯 당당한 태도로 여원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엄마.”
“에휴.”
“나도 엄마 얘기 들으면 마음 아파. 그치만, 나도 어쩔 수가…….”
“너는 어쩜 애가 그렇게 이기적이니? 우리 가족 떠나서 잘 먹고 잘살면서, 너한테 이 정도 도와주는 건 일도 아니잖아.”
단박에 거절당한 엄마가 여원을 향해 도리어 역정을 냈다. 각박한 사정에 대한 설움 탓인지, 주름진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난에서 겨우 탈출했다고 생각했건만 불행의 그림자는 여원에게 끈덕지게도 들러붙었다.
“진짜 아니야,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여원 역시 배우자인 선준과 그 형인 제헌의 사이에서 삶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게 뻔해서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동시에 저택의 사용인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할지도 마음이 쓰였다.
“엄마, 내가…… 부잣집 알파랑 결혼한 거지, 내가 부자가 된 게 아니잖아.”
“…….”
“혼자서만 잘살겠다고, 도와주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게 아니라…… 원한다고 해서 엄마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정말 아냐.”
머뭇머뭇 꺼낸 목소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여원으로서는 어렵사리 꺼낸 진심이었지만, 엄마는 그를 우회적인 거절로 받아들였다. 울화통을 터뜨리던 엄마는 여원이 입을 꾹 다물자 차마 더 화를 내지도 못하고 금세 맥이 풀렸다.
“그래……. 엄마가 무리한 부탁 해서 미안해.”
결국 엄마가 여원에게 도움을 강요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들에게조차 거부당한 엄마는 수치심을 능숙하게 가리지 못했다. 익숙한 모멸감을 스스로 삼켜낸 엄마가 여원을 향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야……. 못 도와줘서 내가 미안해.”
여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한숨 소리가 뭉글뭉글하게 푹 퍼졌다. 수심이 잔뜩 어린 얼굴이 끙끙 앓는 듯한 소리를 연신 뱉어냈다. 엄마의 말마따나 대궐만 같은 응접실이 한순간에 나락처럼 느껴졌다.
“…….”
“…….”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만 보는 한동안, 하염없이 벌어지는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고였다. 대화의 소재는 허무하리만치 금세 동이 났다. 그 사실이 결국은 엄마가 돈 얘기 하려고 먼 길을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해, 여원은 씁쓸함을 고요히 곱씹었다.
“아, 맞다. 여원아, 너 배 속에 애는 좀 괜찮니?”
저택을 떠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엄마는 이제 조금씩 둥그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여원의 아랫배를 흘끔거렸다. 무척이나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 엄마가 여원에게 호들갑스럽게 말을 붙여왔다.
“엄마…….”
별것 아닌 그 말에 눈시울이 훅 뜨거워졌다. 여원은 그대로 왈칵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사실은, 엄마가 오자마자 이 말부터 물어봐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왜 그래, 아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병원에서 뭐라고 하디?”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여원이 고개를 떨구자, 엄마의 목소리에 배어난 염려가 한층 짙어졌다. 그래서 여원은 더욱 서러워졌다. 계속해서 기대를 배신당하면서도, 엄마에게만은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야, 그런 거. 나 병원도 꾸준히 다니고 있고, 의사 선생님이랑도, 다 좋다고 하셔.”
“너 정말 별일 있는 거 아니지?”
“당연하지. 아이 낳고 하면, 괜찮아질 거야. 전부 다.”
“에이구, 그래. 산모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먹을 거 신경 써서 챙겨 먹고, 응?”
“어, 알았어.”
지금 이 순간 여원을 향한 엄마의 걱정 어린 시선만큼은 진심이었다. 차라리 마음껏 미워하기라도 할 수 있도록, 엄마가 저를 이용만 하려 들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삶의 고단함을 견디느라 나이에 비해서 빠르게 늙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면 여원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음에도 자책감에 휩싸였다.
“엄마는 이만 가볼게, 응?”
“벌써? 나랑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엄마 이따 식당 출근해야지. 엄마가 여기서 밥 먹으면, 우리 집에서 돈은 누가 벌어.”
“그래……. 그치.”
평소에도 그렇게 살갑던 모자는 아니었다. 응접실을 나서기 이전, 망설이던 엄마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여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앙상하기 이를 데 없는 엄마의 팔이 아이를 밴 자식을 푹 끌어안았다. 그 순간 여원은 지독하게 외로워졌다.
“서울에 자주 못 나오겠으면, 전화라도 좀 자주 하고.”
“알았어. 또 연락할게, 엄마.”
“그래, 엄마도 우리 여원이 보러 자주 올게.”
왜소한 몸에서 고스란히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마음이 온통 저릿해졌다. 그렇지만 여원은 당분간 엄마가 자신을 찾는 일은 없으리라 직감했다. 그것은 결국, 여원이 엄마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 * *
며칠이 지나도 목덜미에 선명한 멍을 매단 채로, 여원에게 부스스 웃어 보이던 엄마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당장 어떻게든 사천만 원을 융통한다 해도, 집안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나마 엄마를 도와줄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결국에 이야기를 꺼내볼 만한 대상은 선준이었다. 그러나 여원에게 제헌과 더는 교류하지 말라 엄포를 놓았던 선준은 정작 스스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술에 뻐근하게 취해서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에 기어들어 오는 꼬락서니를 보면 여원은 말문이 꽉 막혔다.
그날 이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집안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은 있을지, 아니면 더욱 나빠졌을지 매 순간 전전긍긍했다. 보이지 않는 시한폭탄을 몸속에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생활하다가도 마음 한편이 계속해서 먹먹해졌다.
삐비빅.
적막한 공기를 찢는 전화벨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원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이 놓인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액정에 뜬 발신인의 이름은 엄마가 아닌 선준이었다.
“어, 여보세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전화를 받았지만 여원의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두근거렸다. 평소에 안 그러던 선준이 느닷없이 전화하는 것 역시, 집안과 관련된 안 좋은 소식 못지않게 여원의 불안을 자극했다.
―여원아, 나 이제 막 집에 들어가려는 길인데. 백화점 지나는데 너 생각나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먹고 싶은 거?”
―응응. 너 이제 슬슬 배도 나오기 시작하던데,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지.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선준의 다감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선준과 평화롭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싶었다. 심지어 문진에서 받아온 초음파 사진도 본체만체하던 선준이 갑작스레 내비치는 관심에 여원은 어리둥절해졌다.
“먹을 거야 뭐, 어차피 거의 다 집에 있잖아. 나중에 다른 분들께 부탁드려도 되고.”
―그래도, 내가 직접 사 오는 건 다르잖아.
슬쩍 시계를 건너다보니 저녁 7시 즈음이었다. 한동안 이렇게 일찍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는데. 무슨 변덕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여원은 선준의 다정한 태도가 달갑다기보다 경계부터 하게 됐다.
“나 그럼 복숭아.”
―하하. 여원이 복숭아 먹고 싶어?
“으응.”
―알았어, 내가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속는 셈 치고 복숭아를 사다 달라 했더니, 선준이 흔쾌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금세 전화가 뚝 끊기자, 여원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봤다.
“여원아!”
요새는 온몸이 나른해서, 조금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졸음이 빠르게 몰려왔다. 여원은 소파에 몸을 느슨하게 기대고 봉긋하게 부풀기 시작한 아랫배를 살금살금 쓸어내렸다.
선준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새 깜빡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들뜬 목소리가 벼락같이 이름을 불러대자 잠에서 깬 여원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선준이구나. 벌써 왔어?”
“어유, 볼 통통하게 부은 것 좀 봐.”
“읏.”
“그럼, 너 주려고 복숭아 사 왔지.”
쭉, 손을 길게 뻗은 선준이 잠기운이 묻어 있는 여원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다른 한쪽 손으로는 복숭아가 담겨 있는 백화점의 쇼핑백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던 여원은, 선준에게 자신을 해칠 의도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배시시 웃었다.
“여원아, 어때. 맛있어?”
매끈매끈한 접시 위에는 하얀 속살을 드러낸 복숭아 조각이 옹기종기 늘어섰다. 너무 말랑하지도, 흐물거리지도 않게 과육이 딱 적당한 정도로 잘 익어 있었다.
“어어. 이거 무슨 복숭아야? 되게 맛있다.”
상큼하고 달큼한 과육의 맛이 입 안에 톡 퍼졌다. 여원은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선준이 사 온 복숭아는 정말로 맛있었다.
“여원아. 오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너한테 많이 신경을 못 써준 것 같아.”
“아……. 선준아.”
“막상 결혼을 하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 집이 답답하기도 하고……. 나도 이래저래 마음에 여유가 없었네.”
“…….”
각자 복숭아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동안 분위기는 나름 화기애애했다. 달크무레한 복숭아 과즙 때문인지, 여원의 마음도 물렁물렁 녹아내렸다. 최근 스트레스가 많아서인지, 싸구려 다정에도 여원은 금세 약해졌다.
“그래도 우리는 부부잖아. 우리가 서로 챙겨야 하는 건데, 그치?”
“아, 응!”
“힘든 일 있으면, 너도 잘 알겠지만 형한테까지 갈 것도 없어. 언제든지 나한테 이야기하고.”
“……고마워, 선준아.”
다른 누구보다도 여원 자신이 선준이 생각을 고쳐먹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여원에게는 지금 이상으로 더 나빠지는 상황을 감당할 만한 여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원아, 나 너 배 만져 봐도 돼?”
복숭아를 다 먹었을 무렵, 선준이 여원의 눈치를 살폈다. 여원의 아랫배를 힐긋거리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선준이 배 속 아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란 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준이 기다렸다는 듯 여원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생각보다 되게 납작하네.”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무척이나 차가워, 얇은 천 위로 닿는데도 선뜩한 기운이 전해졌다. 거미 다리가 더듬어가는 듯한 불유쾌한 촉감이었다.
“아, 으응. 이제 곧 배도 더 나온대.”
아빠인 선준의 손길이 선연한 이물감으로 느껴지는 것이 어색했다. 여원은 거북한 기운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 신기하다.”
고개를 내리깐 선준이 여원의 배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킁킁, 냄새를 맡는 듯 콧김이 피부 위를 살짝살짝 스쳤다.
그래도 애 아빠인데…… 아예 모질게 대하지는 못하겠지. 여원은 분위기가 누그러진 틈을 타 선준의 마음을 파고들고 싶었다.
“저기, 선준아.”
“응?”
나직한 부름에 선준이 아래에서 위를 반짝 올려다봤다. 흡, 짧게 뱉어지는 숨을 겨우 삼켜낸 여원이 머뭇거린 끝에 겨우 입술을 뗐다.
“나……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우리 여원이가,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을까?”
여원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덜덜 떨렸다. 여원을 느긋하게 올려다보며 선준이 비죽 웃었다. 설령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여원은 어떻게든 붙잡아보고 싶었다. 이것저것 따지기에 지금 여원은 지나치게 절박했다.
“우리 집이…… 지금 아버지 사업이 많이 어려운가 봐.”
“…….”
“혹시 선준이 네가 이번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을까? 많이는 아니고.”
“…….”
“그, 사천만 원 정도만…….”
오랫동안 입 안을 메우던 말을 끝내 토해내자 귓불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구체적인 액수를 언급하는 순간에는, 구걸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에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다.
“…….”
“…….”
여원의 배를 느릿느릿하게 쓰다듬던 손길이 뚝 멈췄다. 공기의 흐름이 멎어버린 것처럼 사방이 적막해졌다. 평소보다 한층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하…….”
분위기가 갑자기 심상치 않게 흘렀다. 아랫배 언저리에 얹힌 선준의 손이 갑자기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주춤주춤 물러선 여원이 손등으로 배를 감쌌다.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선준이 입가를 비뚤게 끌어올렸다.
“넌 사천만 원이 우스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았지만, 선준은 그보다 훨씬 강하게 여원을 후려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과 수치로 여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 어? 선준아, 나는 그게 아니라…….”
“아니면 너, 이런 식으로 돈 뜯어내려고 나랑 결혼했냐?”
물론 여원도 사천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저택에 쓰이는 생활비와 하씨 가문이 경영하는 기업에서 오가는 돈의 규모를 감안하면, 그들에게는 객관적으로 큰돈이 아니리라 짐작했었다.
“선준아…… 미안해.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 괜한 말을…….”
“말실수라고? 애초에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면, 그게 실수지. 만약에 지금 내가 호구처럼 그래 알겠다고 했으면, 그때는 실수 아니었을 거잖아.”
“선준아, 그치만…….”
“왜, 내 말이 틀려?”
이대로 쥐구멍에라도 숨고만 싶었다. 불과 10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선준의 앞에서 집안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사천만 원 뭐……. 도와주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 그런데 이번 한 번으로 안 끝날 게 불 보듯이 뻔하잖아.”
“…….”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정이 나아져? 아니겠지. 오히려 내가 돈 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다음번에도 손 벌릴걸?”
“…….”
“어차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데, 상식적으로 이런 부탁은 처음부터 안 하는 게 맞지 않아?”
전부 다, 모조리 맞는 말이었다. 여원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여원은 그 때문에 선준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준아…….”
그렇지만, 선준은 여원의 남편이자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였다. 굉장히 어렵게 꺼낸 이야기였건만, 선준에게는 가족 문제로 힘들어하는 여원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여원이 너도 웬만해선 앞으로 너희 집안 얘기 나한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내가 너랑 결혼한 거지, 너희 집안까지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잖냐.”
“응……. 알았어, 명심할게.”
구질구질한 과거로부터의 단절,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미래에 대한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결혼이었다.
때로는 결혼을 계기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환상마저 이제는 맥없이 흐트러졌다.
“그나저나 며칠 전에 너네 엄마 왔다 갔다더니 결국 돈 때문에 그런 거였냐?”
“…….”
“거지 근성에는 약도 없다더니, 너희 부모님도 진짜 뻔뻔하다. 아니면 무식해서 용감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삶에서 중요한 분기점마다 번번이 여원의 발목을 잡아왔던 가족. 여원 역시 지치다 못해 때로 가족이 진절머리난다고 느꼈다. 그러나 선준이 가족에 대한 여과 없는 비난을 퍼부어대자, 여원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미안해, 선준아……. 내가 잘못했어.”
“…….”
“내가…… 잘못했어.”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그런 가족을 둔 죄인으로서의 사과였다. 선준에게 화를 낸다면, 여원에게도 또 여원만을 바라보는 엄마에게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눈물까지 흘려버리면 너무 비참해질까, 여원은 서러움을 꾹 안으로 삼켰다.
“에휴, 진짜…….”
당혹과 수치심, 억눌려진 분노로 쩔쩔매는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선준은 여원을 제대로 다독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제가 기분이 잡쳤다는 듯, 여원을 내버려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쾅, 선준의 방문이 난폭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
문득 여원은 쟁반 위에 초라하게 널브러진 복숭아 껍질이 저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쓰임을 다해버려 더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대로 혼자서 외롭게 말라 비틀어지고 말.
* * *
그날 새벽에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화는 별일 없이 잘 지내냐는 진부한 인사로 시작했다. 무의미한 안부를 어설프게 주고받았을 뿐이었지만, 목소리에 스며든 희미한 흐느낌에 여원은 엄마가 아빠한테 또 맞았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집안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엄마는 여원에게 또 한 번 돈을 빌려줄 수 있느냐 묻지는 못했다. 여원 역시 엄마가 저에게 전화한 진짜 이유를 차마 묻지 못했다.
방 안에 틀어박힌 여원은 종일 시름시름 앓아야 했다. 가족에 대한 고민도, 선준이 떠안긴 모욕도, 누구에게 털어놓지조차 못한 채 혼자서만 속앓이를 했다.
때마침 입덧마저 심해졌다. 사정 봐주지 않고 가차 없이 솟구치는 토기에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냈다. 한참을 입덧에 시달리고 나면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여원은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혔다.
똑똑.
테이블 위에 축 엎드려 있던 여원이 노크 소리에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 선준이 또 자신을 괴롭히려는 건가 싶어 순간 겁이 났다. 그렇지만, 분명 선준은 얼마 전 외출했을 텐데.
“여원 씨.”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목소리가 여원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만으로 존재감이 선명해졌다. 지금 문밖에 있는 사람은 제헌이었다.
“제헌 씨?”
망설임 없이, 제헌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여원의 방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냉담한 얼굴과 무심한 시선. 제헌이 여원의 몽롱한 시야에 가득해졌다.
“…….”
“…….”
빠르게 정신을 다잡은 여원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순간 꿈인가 싶었지만, 이건 분명히 현실이었다. 또 한 번, 그는 이 저택에서 여원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금 내가 이러는 것이, 여원 씨에게 월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아…….”
“그렇지만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있어야죠.”
덫에 포획된 짐승을 몰이하는 것처럼, 제헌이 여원에게 유유히 거리를 좁혔다. 분명 지금 제헌은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중이었고, 이 저택에서 여원이 기댈 구석이라고는 제헌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원은 안도하기보다도, 이상하리만치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에 여원 씨 어머님이 저택에 다녀간 것 알고 있습니다.”
“…….”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퇴로를 간단히 막은 제헌이 여원을 바짝 쫓아왔다. 직구로 내리꽂히는 질문에 여원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다 알고 떠보는 것 같기도 했고, 정말로 여원의 속사정을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저기 그게…….”
대체 제헌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여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억센 손길에 가장 연약한 약점을 내어주고 있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조금만 힘주어 내리눌러도 그대로 숨구멍이 꽉 틀어막힐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이야기해 보세요.”
제헌은 차갑기만 하던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제 나름으로는 부드럽게 물어왔다. 제헌의 얼굴은 지극히 냉담했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여원이 말하는 모든 걸 다 이해해 줄 것처럼 관대하게도 느껴졌다.
“제헌 씨…….”
마음이 마구잡이로 울렁거렸다. 남편인 선준도 단박에 거절해 버린 마당에, 제헌이 저를 도와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저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고풍스럽지만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저택에서 기댈 곳이라곤 결국 제헌뿐이었다.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 여원이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 끝내 여원은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가 여원 씨를 도와줄 만한 일이 있습니까?”
화려한 문양이 탐미적으로 수놓아진 벽지를 뒤로한 제헌의 얼굴이 유난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제헌의 페로몬이 순간적으로 짙어지자, 여원이 촉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네……. 부탁드려요.”
발갛게 달아오른 여원의 귀 끝에 시선을 흘끔 던진 제헌이 턱 끝을 가벼이 까딱였다. 절박함을 드러내면 유리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여원은 가장 절박한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엄마가, 저택에 다녀가셨을 때, 사천만 원만 빌려줄 수 있냐고 하셨어요.”
“…….”
“사실은 너무 큰돈이고, 제헌 씨가 저를 도와주실 이유가 없다는 걸 저도 너무 잘 알아요.”
“…….”
“아빠 사업이 안 좋아지고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셔서……. 제가, 차마 그걸 못 보겠어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시선이 오래된 목조 바닥의 뻣뻣한 나뭇결을 쓸어내렸다.
“음.”
“죄송해요. 저도 이런 부탁 드려서는 안 된다는 거 너무 잘 아는데…….”
“…….”
“그래도, 생각나는 사람이 제헌 씨밖에 없어서…….”
하나하나 말을 이어나갈 때마다, 흡사 구걸이라도 하는 기분에 더없이 초라해졌다. 흔히들 부자는 돈에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돈에 관대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
“…….”
그러니 제헌 역시 언제든 선준처럼 매몰차게 저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들이닥칠 수치심을 예감하며 여원이 말랑한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비서실에 여원 씨 부모님 연락처를 전달해야겠네요.”
“네? 정말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러라고 나한테 부탁한 거 아니었습니까?”
부탁, 이라는 단어를 도드라지게 발음하는 제헌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치만…… 제헌 씨, 너무 빨리 결정하시기보다는 좀 더 고민을 해보시는 게…….”
“…….”
분명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라 한 적은 있었지만, 여원은 그가 이 정도로 흔쾌하게 제게 손을 건넬 줄은 전혀 몰랐다.
“사천만 원이 큰돈이기는 하지만, 그걸로 저희 집안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 번 도와주게 되면, 앞으로 계속 손을 벌리실 수도 있는 거고…….”
“…….”
“저희 부모님이…… 제헌 씨에게 돈을 언제 갚을 수 있을지도 사실은, 모르는…… 거잖아요.”
제헌의 담백한 태도에 덜컥 불안해진 여원이 선준의 논리를 되풀이했다. 끔찍하게 상처가 되었던 말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선준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다.
“여원 씨는 그 생각을 내가 못 했을 줄 알았나 보죠?”
“……그렇다기보다는.”
“내 선에서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이니까 혼자서 쓸데없는 걱정 할 필요 없습니다.”
“…….”
무엇이 거슬렸는지, 제헌이 미간을 얕게 찌푸렸다. 여원이 멍한 얼굴로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일방적이고 차가운 말투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것은 결국 배려였다.
“네, 안녕하십니까.”
여원의 의견은 묻지 않은 채, 제헌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적으로 오가는 대화에 귀 기울이며, 여원은 주눅 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여원 씨, 비서에게 연락처를 알려주세요.”
흠칫 어깨를 떤 여원이 얼결에 눈앞에 들이밀어진 제헌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묻어나는 금속 플레이트를 쓰다듬으며 여원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제헌은 고요한 시선으로 여원이 직접 행동하기를 거듭 촉구했다.
“네, 안녕하세요. 아, 그럼 저희 어머니 번호를 알려드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네, 편하실 때 아무 때나 연락하시면 됩니다. 번호는 010…….”
전달을 마친 여원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제헌에게 다시 건넸다. 턱 끝을 넌지시 까딱인 제헌이 깔끔하게 통화를 종료하자, 복도가 적막해졌다. 방금 제가 비서에게 한 말을 반복해서 곱씹는 여원의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쾅거렸다.
“잘 했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됩니다.”
길고 서늘한 눈매가 여원을 향해 부드럽게 휘어졌다. 분에 넘치는 격려에 잔뜩 오그라들었던 심장이 펄떡 뛰어올랐다.
“제헌 씨…….”
“비서실에서 여원 씨 부모님과 연락 취할 테니, 여원 씨는 이제 이 일에 신경 끄도록 하세요.”
여원은 일방적인 호의에 익숙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제헌의 도움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어렵기만 했다.
지난 며칠간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던 짐 덩이가 날아가는 감각은 물론 기뻤다. 하지만 스스로의 취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은 부끄러웠다. 자신에게는 어렵기만 했던 일이 제헌에게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간단하고 쉬웠음에 아연하기도 했다.
“제헌 씨……. 정말 감사드립니다.”
“…….”
“이번에 도와주신 것,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제가 앞으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복합하게 얽혀들자, 여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푹 조아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를 도와줄 필요가 없었던 제헌이 제게 크나큰 호의를 베풀었다는 사실이었다.
“강여원 씨.”
그런 여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제헌의 우아한 낯빛이 삽시간에 어그러졌다. 갑작스레 빽빽하게 죄어든 분위기에 여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기왕 받게 될 도움이라면 필요 이상으로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여원 씨도 이제 내 가족 아닙니까.”
제헌이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헌에 의해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불쑥 끌어당겨진 여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족……이니까요.”
여원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멍하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조금씩 뭉클뭉클 녹아내렸다.
“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이미 여원은 제헌의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야 냉담하게만 보이던 제헌이 저에게 베푼 친절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제헌은 가족으로서 마땅히 여원을 보호하려던 거구나. 한 꺼풀의 의심이 거두어지자, 제헌을 향해 뾰족 세우던 경계의 벽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허물어진 자리에 잔뜩 말캉해진 마음이 진탕 녹아들었다.
“혹시, 아까 제 말이 기분 나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는 다만, 제가 제헌 씨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마음을 어떻게 잘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여원은 젖어든 눈으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별다른 알맹이가 없는 말을 어물어물 늘어놓았다. 용건이 끝났다는 이유로 제헌이 저를 두고 금세 훌쩍 떠나버릴 것을 알았다.
“그랬군요.”
“뭐라도 좋으니, 제가 제헌 씨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제헌의 관심을 제게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자그마한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던 여원이 움찔 멈추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방금의 말은 선을 넘은 것 같았다. 이건 대체 무슨 자의식 과잉인지…….
“글쎄. 내게 여원 씨가 필요할 만한 일이 있나.”
그리고 제헌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여원 씨는 상대방이 간절하게 부탁하면 보통 어떤 일이든 들어주나요?’
언젠가 제헌이 건넸던 말이 무의식에서 수면 위로 불쑥 떠올랐다. 말끝에 감도는 미묘한 성적인 뉘앙스를 곱씹던 여원이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왈칵 흘려보냈다. 어쩔 줄을 몰라 허둥지둥하자, 여원을 훑어 내리는 제헌의 시선이 더욱 집요해졌다.
“흠…….”
“…….”
“그래요, 생각해 보니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겠군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제헌의 입꼬리가 슬쩍 달싹였다. 모호하게 흘려진 웃음에 여원의 심장이 마구잡이로 콩닥거렸다.
“그럼 여원 씨가 내 향수 고르는 걸 도와주겠어요?”
“제가, 제가요?”
“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여원 씨가 그 일을 가장 잘 할 것 같네요.”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생각도 죄 잊은 채, 여원은 제헌을 향해 입을 헤벌렸다. 매 순간 은은한 정도로 저택에 배어 있는 야릇한 향기에 더해서,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제헌의 페로몬이 피부 표면에 빈틈없이 밀착해 왔다.
“이번 주말에 선준이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는 걸로 압니다.”
“……네.”
“여원 씨는 일요일에 저랑 같이 외출하죠.”
여원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로소 용건을 마친 제헌이 미련 없이 여원에게서 돌아섰다.
“아…….”
여원은 마치 발끝이 고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서 멀어져 가는 등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느릿한 발걸음이 나뭇등걸과 마찰하는 소음이 잔잔하게 삐걱댔다.
늘 스산했던 저택이었지만, 지금만은 실내의 채도가 한 톤 밝아진 것 같았다. 여원이 홀로 남겨진 자리에는 평소보다 조금쯤은 더 짙어진 제헌의 페로몬이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